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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결판

"검?"

하룬이 비웃는다.

"기마전을 하는데 검을 꺼내? 좀 찌그러지긴 했지만, 네 창 쓸 만해 보였는데 왜?"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나는 허벅지로 말의 배를 힘껏 조이고 반로아를 겨누었다.

하룬은 빙글빙글 웃었다.

"에이.... 매정하네. 그래. 끝내자. 슬슬 한계지?"

하룬, 저놈이 짜증 나는 건

저렇게 말하면서도 먼저 나서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 그랬듯이,

이번에도 친위대원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다 죽고 이제 겨우 2명 살아남았는데....

쩌억-!

불쌍한 친위대원 머리 하나 날리고.

콰득!

두 번째 머리는 쪼개고.

검을 미처 회수하기 전에 드러나는 짧은 허점의 사이,

오싹.

솜털이 곤두섰다.

다그닥-

귓가로 길게 늘어지는 말발굽 소리.

잔뜩 곤두선 솜털을 헤집는 싸늘한 바람.

오러가 태워 버린 공기에선 탄내가 났다.

하룬의 검 끝에서 피어난, 환한 금빛의 오러 블레이드가 눈앞으로 확대되었다.

계속 느끼는 건데,

이거... 터무니없이 빠르다!

타악!

나는 지체 없이 뒤로 물러섰다.

내 의도를 눈치챈 말이 한 걸음 물러설 때,

나는 아예 말 등을 박차고 몸을 뒤로 던졌다.

"허...?"

설마 내가 말을 버릴 줄은 몰랐나 보다. 하룬의 입술 사이로 맥없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보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집중되어 있던 하룬의 오러 블레이드가 본래 예정했던 타격점을 지나면서 흐릿하게 흔들리는 것을.

하룬의 장기는 기마 돌격 끝에 모든 힘을 모아 타격점에서 정확하게 터뜨리는 것.

그걸 정면으로 막아 내느라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덕분에 정확한 타이밍과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가장 힘이 집중되는 순간을 피하고....'

그다음엔 아래에서 위로, 오러 블레이드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결을 따라,

벤다!

쩌어어어엉!

탄내가 코를 찌른다.

폭발하듯 사방으로 부서져 나가는 나와 하룬의 오러.

다만,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엔 나의 검푸른색 조각보다는 하룬의 금빛 오러 쪽이 훨씬 많이 깨어져 흩날렸다.

"무슨...!"

균형을 잃으며 허점을 드러내는 하룬.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달려들어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거리가 다소 멀다.

대신,

서걱-

오러 슈팅을 쏘아 말 머리를 베었다.

쿠- 궁!

여태 하룬의 무시무시한 돌진을 지탱했던 그의 애마가, 끈이 풀린 꼭두각시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말을 박차고 뛰었던 나는 땅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너...! 나의 엘딘을...!"

낙마하는 와중에도 재빨리 균형을 잡아 착지한 하룬이 거친 살기를 뿜어냈다.

뭐, 왜.

아까는 지 애인 죽었다는 소리에도 빙글빙글 대던 놈이.

말 이름이 엘딘이었어?

뭐 어쩌라고.

"그 표정.... 그래. 다리 다 잘라 놓고, 그다음에 한번 얘기해 보자."

왜? 내 표정이 어땠길래.

스르릉-

화가 잔뜩 났는지,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하룬.

여전히 경쾌했다.

소름이 쫙 끼치는 속도 하며. 폭발 순간을 기다리며 무시무시하게 집중되는 오러 하며.

하지만 이미 분석은 끝났다.

쩌어엉!

같은 흐름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찌르기가 아닌 베기였으므로, 뒤가 아닌 앞으로 뛰어들었다는 것.

집중된 오러가 폭발적인 위력을 만들어 내기 전에 한발 앞서서 결을 쪼갰다.

"큭!"

하룬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렇게나 많은 오러를 집중시켰는데, 그게 강제로 깨어졌으니 반발력이 엄청날 수밖에.

아마 지금쯤 그의 몸속에서는 폭풍해일이 몰아치고 있을 것이다.

우우웅-!

하지만, 검을 쥔 하룬의 손에는 되레 힘이 들어갔다.

그의 또 다른 특기는 쉼 없이 쏟아붓는 연격.

박살 났던 오러가 잠시의 틈도 없이 다시 검신을 타고 솟구쳤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몇 번을 해도 소용없어."

"하! 고집이 없으면 기병대장이 아니거든!"

쩡! 쩌저정! 쩌엉!

코끝을 스치는 탄내. 눈앞에 반짝이는 오러의 파편. 어금니를 꽉 문 하룬. 그의 이 사이로 스쳐 나오는 날카로운 숨.

하룬은 필사적으로 나를 몰아쳤지만,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이미 그의 무예를 철저히 분석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반로아가 들려 있었다.

고대의 검기는 사용하는 검의 수준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반로아는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보검이었다.

되레 그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아직까지도 하룬의 검이 두 동강 나지 않고 버텨 내고 있다는 게.

무려 반로아의 검기로, 약점만을 노려 계속 깨뜨리고 있는데... 이걸 버텨?

대체 오러 양이 얼마나 많은 거야?

쩡! 카각!

물론 하룬이 마냥 무사한 건 아니었다.

"쿨럭! 쿨럭!"

무리하게 오러를 쏟아부은 탓에, 그는 피를 한 움큼씩 뱉어 냈다.

뜨거운 공기. 매캐한 탄내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인다.

허나 여전히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는 옅은 금빛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뿜었다.

"더 하게?"

내 질문에 하룬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멈춘 기병은... 죽은 기병밖에 없거든...!"

고기 방패로 사용하던 친위대도 모두 잃고, 기동력을 확보해 주던 애마까지도 잃고 이제야 순수하게 일대일로 나를 마주 본 하룬.

그는 뺀질뺀질하던 처음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구우우웅-!

그야말로 모든 걸 불태울 기세로 정직하게 나를 향해 맞부딪혀 왔다.

기세가 꺾이긴커녕, 되레 오러 블레이드를 더 환하게 밝히며 달려들었다.

휘오오오오-!

오러 블레이드의 난폭한 힘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미처 도망치는 게 늦었던 궁기병 몇몇이 그 폭풍에 휘말려 말과 함께 쿵! 쿵!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내 몸에서도 여기저기 피가 튀었다.

"으랴! 이럇!"

의미불명의 기합을 지르며 달려드는 하룬.

그의 스텝은 단순했다.

그저 나를 향해 달려들 뿐이다.

한 발 물러나면 다시 이 보 전진.

두 발 밀려나면 다시 삼 보 돌진.

'미친 건가...?'

승리를 확신했던 내 등으로도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룬은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의심 따위는 없었다.

내가 아무리 막아 내도, 자기가 딱 한 번만 뚫어 내면 된다는 것처럼.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칼날을 뿌렸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는... 폭풍의 연격.

그러던 순간,

쩌어어엉-!

"구웨에에엑...."

유독 잘 들어간 일격이었다.

부서진 오러가 눈송이처럼 하늘에서 떨어질 정도였으니까.

하룬은 피를 쏟았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피를 줄줄 흘렸다.

그 와중에도 검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하룬은 철철 피를 흘리면서도 웃었다.

"질풍은... 멈추지 않아...."

그가 비틀어 쥔 검에서 다시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올랐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이 싸움을 끝낸 건 우리 두 사람의 검이 아니었다.

"주군!"

웬 전사 하나가 말을 몰아 싸움에 끼어들었다.

눈에 익다.

카슈시에 최후통첩을 전하러 왔던 바로 그 최상급 익스퍼트.

피르제라고 했나?

돌연 끼어든 그녀가 하룬의 옷깃을 낚아채 제 말 등에 얹고 도주했다.

"...."

하룬이 발버둥 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시체처럼 말 등에 축 늘어져 있을 뿐.

그제야 알았다.

'저거... 진작에 기절해 있었구나.'

어쨌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는 말 하나를 잡아타고 있는 힘껏 외쳤다.

"하룬이 도주한다! 전부 추격해! 잡아!"

그게 결정타였다.

이미 곳곳에서 적장을 쓰러뜨린 상태.

거기에 총사령관인 하룬의 패주.

그것은 가득 차서 찰랑거리던 잔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이나 다름없었다.

"져... 졌다고?"

"저기 봐! 궁기병대 다 도망가잖아!"

"젠장.... 걍 튀어!"

지휘관을 잃고도 끈질기게 버티던 하룬군의 진형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심지어 중간 지휘관들끼리는 엇박자가 발생했다.

"하룬 님을 지켜!"

"아니, 뭔 소리야! 지금 빠지면 다 죽어!"

"아니, 하룬 님 목숨이 위험하잖아!"

"개소리 말고 대형 유지해!"

"이미 텄어. 퇴각해!"

하룬을 지켜야 하나, 일단 대형을 유지하며 싸워야 하나, 아니면 도주해야 하나....

원래라면 그 결정을 내려 줘야 하는 익스퍼트 최상급의 무장들이 다 죽거나 묶여 있는 지금, 혼란은 사그라들긴커녕 점점 커지기만 했다.

결국 땅을 도배하는 건, 갈팡질팡하다 죽는 아일룬의 전사들뿐.

나는 목이 터지라 외쳤다.

"진격! 계속 진격한다! 마지막 하나까지 놓치지 마라!"

* * *

처음엔 얼떨떨했을 것이다.

"이겼어...?"

"우리가 이긴 거 맞지?"

"5왕(王)의 군대가 도망을...?"

지금 저 앞에 도망치고 있는 저 전사들이 노르베르쥬에서 가장 강하다는 그 아일룬의 강병들이 맞나...? 근데 왜 도망치지?

그다음에 올라오는 것은 전율이었을 것이다.

"이제 보니... X밥 아냐?"

"씨이파 이제 좀 싸워 보려고 하니까 토껴?!"

"크으으-! 5왕(王). 별거 없음."

"이겼어.... 300달론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폭발하는 건, 가장 원초적인 환희!

"으아아아아아!!!!"

"이겼다아아아!"

"300달론! 300달론!!!"

"땄다! 땄어!"

"내가 뭐라 그랬어! 딴다 그랬잖아!!! 이긴댔잖아!!! 으아아아!!"

출렁출렁!

군대가 파도친다.

치열한 전투로 다 소진한 줄 알았던 힘이 대체 어디서 이리 샘솟는 것인지.

"다 잡아 죽여!"

"끝까지 추격해!"

패주하는 하룬의 군대를 추격하는 그들은 무거운 갑옷을 들썩거리며 뛸 만큼 활력이 넘쳤다.

그렇게 신나게 적병을 잡고 추살하고 생포하다가, 진격하고 또 진격하다가, 서서히 열기가 식고 잊고 있던 피로가 스멀스멀 다시 올라올 때쯤.

그들은 보았다.

가장 앞에서 자신들을 이끌고 있는 한 남자의 등을.

검푸른 오러가 넘실대는, 그의 뒤로 무수한 시체가 길을 이루었다.

엘리트 전사든, 익스퍼트든, 그를 막아서려 했던 모든 이들은 그저 길에 깔리는 새로운 재료가 될 뿐.

란센의 전사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 코앞만 보고 싸우느라 전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전사들이,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이 상황이 되었는가?

어째서 갑자기 적들이 내빼기 시작했는가?

누구 덕택에, 생명을 판돈으로 내걸었던 이 도박에서 이길 수 있었나?

"그러니까... 란센 백작님이 하룬을... 이긴겨?"

"아까 못 들었어? 겁나 크게 외치던데."

"아니.... 듣긴 들었는데... 정신이 없었지. 눈앞에 창칼이 왔다 갔다 하는데."

"와.... 센 줄은 알았는데 하룬을 이겨 버리네."

"내가 봤어. 완전 초주검이 되어서 말 등에 실려 가던데?"

"설마...."

"설마고 자시고. 내 눈엔 초주검이 아니라 그냥 주검 같던데?"

"일대일도 아니었잖아?"

"아까 못 봤어? 백작님이 혼자 궁기병대 썰어 버리던 거?"

"새로운 5왕인가...?"

당장 눈앞에 죽일 만한 적도 없고,

팔다리도 무거워진 김에,

움직임은 서서히 느려지고, 대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까와는 다르게 더 큰 현실을 깨달으며 천천히 일어나는 소름. 가슴 깊이 울리는 통감.

"우리 이거...."

"이거 어쩌면...."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으로는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 인생 대박 난 거 아니냐?'

아니,

우리 사령관이 5왕(王) 중 하나를 찢더라니까?

그걸 직접 봤다니까?

근데 겨우 27살인데....

무엇보다, 돈도 엄청 잘 준다니까?

근데! 내가 지금 그 밑에 있다니까? 월급에 성과급도 말도 안 되게 빵빵하고...!

'이건 미쳤어!!'

무법자라 불리는 로버랜드 전사들의 가슴에,

뜨거운 충정이라는 것이, 그 불씨를 지폈다!

#50화 전쟁, 그 후.

"저기다!"

"다 잡아 죽여!"

패잔병이 되자 그 유명하던 아일룬의 강군도 어쩔 수 없었다.

"하, 항복!"

"사, 살려 주세요."

여기저기 조무래기들처럼 도망 다니다가 잡히는 순간 허겁지겁 무기와 갑옷을 던지고 항복했다.

진군.

또 진군.

우리는 끝없이 진군했다.

추적하고 추살하며 하룬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틈을 주지 않았다.

칼세릭은 나를 졸졸 따라오며 싱글벙글 웃었다.

"대장님. 이건 2배가 아니라 3배, 아니 4배로 불려 주신 거 같은데요? 설마 진짜 하룬을 이겨 먹을 줄이야."

칼세릭은 온몸으로 즐거움을 표했다.

표정뿐만 아니라 손짓, 말 허리를 조이는 허벅지의 힘에서부터, 즐거움이 뚝뚝 묻어났다.

"왜? 형제들이 뭐라 해?"

이번 전투엔 칼세릭 형제단도 전원 참가했다.

변경 토벌 직후 합류한 그들은 훈련 시간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나의 전술 전략을 흡수해 제 역할을 다 해 주었다.

덕택에 우리는 부족했던 익스퍼트 전력을 메울 수 있었지만,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번 전쟁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큰돈을 벌려고 몸을 의탁했더니 갑자기 5왕과 전쟁을 벌이라고? 얼마나 황당했겠나. 칼세릭의 강력한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끝내 떨치지 못한 불안이 남아 있었겠지.

그래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승리를 안겨 줄 수 있어서.

"다들 칼세릭에게 고맙다 그러지?"

결과적으로 보면, 칼세릭 형제단은 완벽한 시기에 합류한 셈이었다.

5왕과의 첫 전투를 함께한 전사들. 개국공신이었다. 내가 약속한 보상도 빵빵하게 받을 테고.

칼세릭이 유독 기분 좋은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불안해하던 형제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증명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거라고.

하지만 호탕하게 웃어 보인 칼세릭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으하하하! 그것도 그런데, 그보단... 아무도 안 죽어서 좋습니다!"

칼세릭은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팔다리가 날아간 놈들이 있긴 한데, 은퇴하고 쿠샨시에 정착해서 살겠답니다. 꿈에 그리던 은퇴 아닙니까! 포상금도 많을 테니 노났죠 아주. 크하하!"

뭐야.

이겨서 좋다. 앞으로 얼마나 승승장구할지 기대가 된다. 이게 아니었다.

'안 죽었다.' 그리고 '정착해서 산다.' 이 두 가지에 방점이 찍히는 칼세릭의 말. 이득도 이득이지만 자기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삶의 태도.

그게 내게 묘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주군으로서. 또 도시의 지배자로서.

그건 희미하지만, 감격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나는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대대손손, 내 도시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해. 그럴 만하게 다스릴 테니까."

"으하하하! 백작님만 믿습니다!"

싱글벙글 웃어 보인 칼세릭은, "그럼 저도 잔당 소탕하러 가겠습니다! 이럇!"하고 내 곁을 떠나갔다.

칼세릭뿐만이 아니었다. 적으면 10명씩 많으면 100명씩 갈라져서 사방으로 흩어진 하룬의 패잔병들을 쫓았다.

지독한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강하게 몰아치면 몰아칠수록 하룬을 상대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패잔병을 추격하다가 밤이 오면 휴식을 취했고,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다시 추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키날로까지 진군했다.

"키날로다! 키날로까지 왔어!"

"어라? 기병대야!"

"저기에 하룬도 있는 거 아냐?"

"지금 저것들 그냥 내빼는 거지?!"

저 멀리 보이는 키날로의 성벽.

그리고 우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뒷문을 열고 빠져나가는 기병대.

아마 틀림없이 저 안에 하룬이 있을 것 같았다. 성에서 농성해 봐야 나를 막을 자신이 없으니 도망치는 거겠지.

'잡지는 못하겠네.'

하룬의 보병들은 족족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지만, 아일룬 백마의 속력까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나 혼자 달린다면 혹시 몰라도....

'그래 봐야 하룬하고 지휘관들은 먼저 도망치겠지'

그저 병사들에게 분풀이하는 것밖에는 안 됐다.

지휘관급이 탄 아일룬 백마는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명마. 그것들은 너무 빨랐으니까.

해서, 나는 공연히 힘을 빼기보다는 눈앞의 실리를 챙기기로 했다.

키날로.

끼이이익!

그저 다가갔을 뿐인데, 키날로의 성문이 저절로 열렸다.

원래 있던 방어 병력은 대개가 도망을 쳤고, 남은 이들은 아예 성문을 열어 목숨을 구걸했다.

"화, 환영합니다. 백작님!"

창칼은커녕 갑옷조차 내려놓고 뛰어나와 허리를 숙이는 병사들.

그리고 그 뒤에서 고개를 숙이는 키날로의 지배 계층, 마법사들.

쿠샨. 카슈. 키날로.

이 세 도시가 모두 나의 수중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한 가지....

하룬을 놓쳤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거 살 수나 있으려나?'

그렇게 불안하진 않았다.

아마 죽을 테니까.

그만큼 하룬이 마지막에 쏟아 낸 피는 엄청났다. 아마 내장이 다 조각조각 났겠지.

엘릭서가 없다면 그는 죽는다.

거의 확실하게.

* * *

쿠샨시.

전사들은 하룬과 란센 중 누가 이길까를 두고 내기판을 벌였다.

그중 '원샷'이라는 이름의 전사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인생은 한 방이라고 굳게 믿었다. 걸어오는 내기를 피하는 법이 없고, 누가 좋은 돈벌이가 있다고 말하면 전 재산이라도 꼴아 박았다.

이 야수 같고 짐승 같은 그의 별명은, 멈출 줄 모르고 달리는 그의 기세를 고스란히 담은 것이었다.

블랙 카우(Black Cow)!

야생의 들소와도 같은 사내.

다만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아마 그가 익스퍼트 전사가 되지 못했다면 파산을 했어도 10번은 했을 거라는 게 주변의 평가였다.

오늘도 그의 친구인 척을 하며 항상 돈을 빨아먹는 텐글이라는 놈이 원샷을 비웃었다.

"야. 란센이 이기겠냐? 하여튼 이놈은 한탕만 노려서는.... 니가 그러니까 아직도 장가를 못 가는 거야."

"닥쳐. 기회는 온다."

"이번엔 얼마 걸었냐?"

"400달론!"

"미친...! 전 재산을 다 걸었다고?"

"가즈아!"

말이 안 통하는 고집불통.

"지금 배당률이 1대 9이야! 너 미쳤어? 란센이 질 확률이 90퍼센트라고!"

"텐글, 넌 바보냐?"

"뭐?"

"그 말은 따면 열 배란 소리잖아? 진정한 전사들은 다 란센에게 걸었다!"

"아니 뭔...."

"가즈아!"

"미친.... 그렇게 꿍쳐 놨으면 내가 말한 투자에나 좀 넣지...."

이 와중에도 돈을 더 빨아내지 못한 게 아쉬운 텐글.

그리고 마침내,

쿠샨시에 전령이 도착했다.

승전보를 들고.

"으아아아아아아!"

그날, 쿠샨시에는 검은 들소 같은 남자의 감격이 울려 퍼졌다.

인생 처음으로.

꿈에 바라마지 않던 한탕을 성공시킨 남자.

"4,000달론이다!! 은퇴다!!"

원샷은 책상을 박차고 올라가 펄펄 뛰었다.

"란센! 란센!"

"그는 신이야!!"

그와 같은 편에 걸었던 전사들은 전부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테이블 위로 올라서서 어깨를 부딪치는 전사들.

누구는 껴안고 누구는 팔꿈치로 밀어내고, 그러다 얼굴을 맞거나 정강이를 차이기도 했지만....

고통?

그딴 건 느껴지지 않는다.

"으아아아아!"

순수한 환희만이 흘러넘칠 뿐이었다.

* * *

승전보가 도착하기 직전,

나이트 벌슨과 란센의 동생들은 한자리에 모여 전장의 소식을 기다렸다.

"씨.... 왜 소식이 안 오냐고...! 아오...!"

데이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자리를 뱅글뱅글 돌았다.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붉은 머리칼이 다 산발이었다.

벌슨은 그런 데이지를 타일렀다.

"허우적거리면 더 깊이 빠지는 거야. 물속에 있을 땐, 가만히. 힘을 빼야 한다."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

하지만 벌슨의 묵직한 명언에도 데이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아저씨! 그거 도움 하나도 안 돼!"

하지만 벌슨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후방에 남아 있다고 한들, 우리 역시 란센의 휘하다. 무소의 뿔처럼. 엎드린 호랑이처럼 고요해야...."

"아! 몰라 몰라! 어차피 우린 뿔도 없고 호랑이도 아니라서 뒤에 남겨진 거잖아!"

"어...."

벌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가로 습기가 부풀어 오른다.

오러 코어가 깨지고 무력을 상실한 벌슨에게, '자신이 약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자각은 크나큰 상처로 남은 것이었다.

하지만 벌슨은 얼른 표정을 감추었다.

자신의 이런 고통을 아이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보호자의 도리도 아니었고, 신하의 도리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견딜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아저씨.... 차라리 우리가 척후를 보내면 어때?"

데이지는 데이지대로 정신이 없었다.

전장에 나간 오빠와 언니들이 걱정되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벌슨의 손을 꼭 붙잡고 글썽대는 데이지.

그런 데이지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착잡한 벌슨.

그 사이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전령의 우렁찬 외침이 파고들었다.

"승리! 승리! 이겼습니다! 대승입니다!"

데이지와 벌슨의 눈이 동시에 전령을 향했다.

"승리? 그럼...!"

"백작님께서 모두 무사하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우앗...!"

데이지가 펄쩍 뛰며 기쁨을 쏟아 내려던 찰나,

"우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통곡이 먼저 방을 휩쓸었다.

벌슨이었다.

"끄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

그는 바닥에 엎드려서 울부짖었다.

너무 기뻐서.

너무 다행이어서.

이긴 것보다 란센 저하가, 도련님 아가씨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너무 안심이 되어서.

데이지가 그런 벌슨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뭐.... 무소의 뿔 어쩌구 하더니.... 사실 아저씨가 젤 벌벌 떨고 있었던 거 아냐...?"

그러자 벌슨은 울음이 섞여 엉망이 된 호흡으로 끅끅대며 답했다.

"호랑이가... 흐끅! 포효한다고 해서, 끄윽! 그걸 우는 거라고 할 수는...! 끅!"

"...그거 맞아? 호랑이?"

"끄어으어어어어!"

대답 대신 돌아오는 엄청난 통곡.

원래는 데이지도 실컷 울 예정이었으나... 바로 앞에서 저런 엄청난 것을 봐 버리니,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어휴.... 아저씨 나 좀 봐."

데이지는 그저,

몸을 굽혀,

포효하는 호랑이를 토닥토닥 안아 주기로 했다.

* * *

풍랑의 구릉지에서 란센이 하룬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로버랜드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일룬의 그 강병들이 대패했다고?"

모두가 그 소식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어진 소식에는 더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룬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란센이 그렇게까지 강해?"

백번 양보해서 전투의 승패는 전술과 전략의 영역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란센의 무력이 하룬을 압도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였다.

거기에 하룬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니....

"여기서 하룬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뜬소문일 거야. 란센이 아무리 강해도 이제 27살인데...."

"그래. 그 나이에 그랜드마스터급이라고? 말도 안 되잖아?"

"하지만 정말 하룬이 죽었다면... 노르베르쥬엔 피바람이 몰아치겠네."

"노르베르쥬뿐이야? 후계자도 없는 하룬이 이 상황에서 죽으면... 해상왕 자파르가 가만히 있겠어?"

"하긴. 아무리 란센이 강하다고 해도 아직 세력이 부족하니...."

"진짜 피바람이 부는 거지."

모두가 하룬의 안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수많은 전령과 첩보원들이 하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하지만 하룬의 궁전에선 그 어떤 정보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도시 일루나엘.

하룬의 궁전.

간신히 도주에 성공한 하룬은 침소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오지 못했다.

"윽... 으윽...."

그는 여전히 몸을 회복하지 못했으니까.

사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탈태를 한 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터였다.

그만큼 끔찍한 내상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끄윽.... 브리... 브리다! 어딨어! 브리다!! 끄윽...."

기절한 채로 끙끙 앓던 하룬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의 연인, 브리다를 찾아 댔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도 못 하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그저 브리다의 포근한 손길이 그리울 뿐이었다.

"어떡해...."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시녀 하나가 물수건을 들고 다가가 하룬의 땀을 닦아 주었다.

"치워!"

하룬은 그런 시녀의 손길 뿌리쳤다.

"너 말고! 브리다!!! 브리다 어딨느냐!!"

아픈 손목을 문지르던 시녀는 주저하다가 겨우 입을 뗐다.

"그게... 브리다 님은... 이제... 안 계십니다."

"뭐? 그게 무슨.... 아.... 아아...."

하룬은 그제야 깨달았다.

브리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 사실이 이렇게 가슴에 사무칠 줄은.

브리다가 없다고?

내 머리칼을 쓸어 주던 그 손길을, 그 따스한 사랑을 다시는 느낄 수 없다고?

"나가! 당장 나가!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 시녀들을 내쫓은 하룬은 가슴을 움켜쥐고 꺽꺽거렸다.

가슴 한 켠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아무리 움켜쥐고 흔들어도 도무지 나아지질 않았다.

"...아아, ...아아아...."

뒤늦게 너무나 아픈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룬은 절망했다.

왜 몰랐을까. 가장 옆에 있던 가장 따스한 존재를. 가장 위로가 되는 존재를.

혼미한 고통 속에서 차디찬 한과 후회만 가슴에 서렸다.

"멍청한....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뭘 하겠다고...."

끅, 끄윽... 하는 신음과 울음만이 하룬의 궁전을 차갑게 식혔다.

#51화 사신

우리가 키날로시에 입성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양옆으로 쭈욱 도열한 마법사들이었다.

"키, 키날로시는 란센 백작님을 환영합니다!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도시의 모든 마법사가 나온 것 같았다.

머리가 하얗고 화려한 로브를 입은 원로 마법사뿐 아니라 제 팔보다도 긴 로브를 입은 10세 초반의 어린 마법사들까지도.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저는 키날로시의 마법사 대표 테베크라고 합니다. 안내와 인수인계를 맡았습니다."

테베크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다.

한껏 저자세로 나오는 그들을 보며, 나는 느끼는 점이 많았다.

'하룬이 진짜 쥐잡듯이 잡았나 보네.'

키날로는 마법사들의 도시. 이곳 마법사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드높은지는 동화책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들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를 영접한다?

모르긴 몰라도 하룬에게 크게 당하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거기다가 상황 판단도 빠르고.'

키날로의 마법사들이 저 테베크라는 마법사를 중심으로 뭉쳐 있다는 게 퍽 인상적이었다.

누가 뭐래도 키날로의 지배계층은 마법사. 만약 그들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면 내 입장에서는 일이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 소환해서 심문하듯 정보를 캐내 가며 통치의 기반을 다져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테베크를 중심으로 조직이 뭉쳐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키날로의 지배층이었던 마법사 단체가 고스란히 내 하부 조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우리 측과 키날로의 마법사들. 양측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우리의 행정자원 소모를 크게 줄이고 키날로의 마법사들은 최소한의 입지를 지키고.

눈에 빤히 보이는 처세이긴 했지만, 나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마법사들답게 똑똑하네.

"그래. 테베크. 반갑다. 안내해라."

그러니 내 한 마디가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테베크는 말없이 제안을 건넸고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셈이니까.

활짝 얼굴이 밝아진 테베크가 마법사들을 이끌고 행렬의 선두에 섰다.

"키날로의 진정한 지배자, 란센 백작님의 행차다! 모두 영접하라!"

그의 호령에 따라 거리에 나와 있던 키날로의 시민들이 일제히 환호를 내질렀다.

"만세! 만세! 만세!"

갑작스러운 개선 행렬.

우리는 좌우로 도열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키날로의 영주성으로 행진했다.

사방에서 우렁차게 외치는 만세 소리.

하지만 정작 신민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딱딱한 긴장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다들 고생이네.'

모두 입으로는 찬미의 말을 뱉고 손으로는 꽃잎을 뿌렸지만, 사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건 시민들이 속삭이는 말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또 새로운 정복자라니...."

"특별 세금을 또 걷나?"

"부역 징발도 하겠지...."

"일단 오늘 개선 연회한다고 하니까, 다들 저녁 시간 비워 두라고. 가서 음식이라도 날라야지."

"미쳐 버리겠다 진짜...."

그들은 내가 못 듣는 줄 알고 속삭였지만, 소드마스터의 귀에는 훤하게 들렸다.

내 입 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껄끄러워졌다.

'정복이라....'

나는 정복자가 맞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큰 정복자가 되어야 했다.

세아가 만든 삼전계(三戰計)를 성공시키려면, 최소 10개 이상의 도시를 추가로 정복해야 할 테니까.

키날로의 정복은 그 시작을 알리는 초석으로서, 아주 의미가 크고 기쁜 성과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풍경까지 좋아할 수는 없었다.

거리엔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겁먹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다 집 안에 가두고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일단 소중한 것들은 숨긴 것이겠지.

난 이런 게 싫었다.

동생들과 신하들에게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이기자. 다시는 꼴 보기 싫은 거, 참지 않아도 되게.'

내가 꼴 보기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어른들은 겁에 질리고 아이들은 방에 갇혀 있는 풍경.

숨죽인 침묵.

따라서 무거워지는 가슴.

그렇게 하염없이 답답해지고 있을 때,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눈에 반짝반짝 들어오는 녀석들이 있었다.

'애들이 있기는 있구나?'

갇혀 있던 꼬마들이 밖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대로 옆의 2층 집, 3층 집에서 창문이 열리고 꼬마들이 기웃기웃 고개를 내밀었다.

갸웃거리는 작은 머리들.

꼬마들을 보니 이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키날로라는 도시를 만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웃으시는데?"

"생각보다 인상이 좋으셔."

"좀... 잘생긴 거 같지 않아요?"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하지만 이젠 그 목소리들이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곳에도 아이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

삐걱.

이 자리에 그 누구도 듣지 못했을 소리였다.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온 작은 삐걱임 하나.

그게 내 귓가에 탁 달라붙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주시했다.

"아...!"

꼬마애 하나가 테라스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를 구경하기 위해 너무 몸을 밖으로 내밀었던 모양.

타악-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나는 몸을 던졌다.

건물 외벽을 박차고 그대로 몸을 날려 꼬마 아이가 떨어지기 전에 받아 냈다.

"으아...! 아?"

내 품에 사뿐히 안긴 아이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내 얼굴을 말똥말똥 올려다보았다.

이제 5살이나 되었을까? 세온이보다 어려 보이는 녀석이었다.

"살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맑은 두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꼬마.

"델피나!"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은 기절할 듯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내 곁으로 달려온 여인은 아이를 감히 받아 가지도 못하고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델피나라 불린 아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 높은 사람? 그치만 마법사님으론 안 보이는데...."

5살 정도밖에 안 된 꼬마의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란 마법사를 의미하는 거였나 보다.

"나 높은 사람 맞아."

장난삼아 그렇게 말해 주자 아이는 눈을 빛냈다.

"진짜요? 그럼 아카데미도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아카데미?"

"네! 저는 마법사가 되고 싶거든요! 제국엔 아카데미가 있대요. 동화책에서 봤어요! 누구든 마법사가 될 수 있대요."

꽤나 당돌한 녀석이었다.

녀석의 엄마는 아주 사색이 되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나는 웃었다.

이 꼬맹이가 나랑 생각이 제법 잘 맞았기에.

"알겠다."

그리 대답해 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인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할 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삼전계도 좋고 제국에 복수도 좋지만, 일단은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것. 그렇게 다스리는 것.

그걸 바란다.

그리고 그래야, 진정으로 강력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민들과 눈을 마주치며 약속했다.

"다들 두려운 거 안다. 하지만 지켜봐라. 이 도시는 달라질 거다. 특별 세금도, 부역도 없다. 개선 행사도 우리끼리 조촐히 치를 테니 너희는 푹 쉬면 된다. 고생 많았다."

그제서야,

술렁거리는 시민들의 눈에 희미한 기대감이 반짝거렸다.

"이번엔... 좀 다른 거 같은데?"

누군가 중얼거린 그 한마디가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 * *

개선 연회는 며칠에 걸쳐 이어졌다.

시민들에게 공언한 대로 세금을 걷거나 부역을 동원하는 일은 없었다.

정당하게 금화를 뿌려 인력을 동원하고 먹고 마실 것을 마련했다.

점령지 내의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개선 연회도 한 번에 치르지 않고 부대별로 돌아가며 치렀다.

덕분에 개선 연회는 1주일 넘게 이어졌다.

나는 떠들썩한 연회장을 빠져나와 영주성 꼭대기에 있는 작은 로비로 숨어들었다.

여기는 나랑 몇몇 동생들이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나는 거기 앉아서 지난 전투를 되새기며 멍을 때렸고 세아는 항상 서류에 코를 박고 있었다.

"오빠."

"응?"

"연회장 좀 가 봐. 카트리나 언니가 찾던데."

세아는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아까 얼굴은 비췄어."

"얼굴만 비추면 어떡해? 전사들에게 술도 한 잔씩 돌리고, 핵심 인물들과 회포도 풀고. 그게 다 정치다?"

"난 정치가 안 맞나 봐."

탁.

세아가 서류를 내려놓더니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그게 힘들면 어떡해? 진짜 정치는 이제 시작인데."

"진짜 정치?"

"응. 이제 눈치만 보던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다 사신을 보낼 거라고."

"아.... 말만 들어도 피곤하네."

"피곤해도 어쩔 수 없어. 혈안이 되어서 정보를 캐고 다닐 거란 말이야. 오빠가 정말 하룬보다 강한지. 얼마나 압도적으로 이겼는지. 하룬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 어디 줄을 댈지 머리 엄청 굴리겠지."

"잘 아네."

잘 안다. 그래서 더 피곤했다. 지금은 그런 잡스러운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지금 내 머릿속은 하룬과의 전투를 되새기는 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세아에게 말했다.

"지침을 정하자.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기로."

"아무것도?"

"응. 병사들 입에서 퍼지는 소문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말고 침중한 분위기를 유지하자고."

"오빠 설마...."

"우리가 대승을 했는지 어떤지 아예 파악할 수 없게. 그래. 아예 나는 얼굴도 안 비치는 게 낫겠다."

"얼굴을 안 비추겠다고?"

"응. 그래서 내가 부상당했다고 생각해 주면 더 좋지. 아주 헷갈리게 하자고. 노르베르쥬의 영주들이 상황 파악 못 하게."

"좋아. 노르베르쥬 영주들을 헷갈리게 한다. 그럼 우리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좋아. 근데...."

세아가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지금 그거 일 안 하겠다는 선언 아니야?"

하여튼 눈치는 빠르다니까.

"세아야."

나는 생글거리며 세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세아.

나는 얼른 오러를 불어넣은 손으로 세아의 작은 어깨를 잡았다.

"어이쿠. 어깨 뭉친 것 좀 봐. 너 쉬긴 쉬는 거야?"

"난 괜찮아.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 안 괜찮은데? 어깨가 딱딱해!"

난 오러가 깃든 손으로 세아의 딱딱한 어깨를 열심히 풀어 주었다.

"윽! 잠깐. 오빠. 으음...."

저항을 하던 세아. 하지만 내 손끝에 뭉친 근육이 한 올 한 올 풀릴 때마다 녀석의 저항은 점점 작아졌다.

"안 돼.... 안 되는데.... 으음. 음.... 내가 이런다고.... 코오...."

피곤이 많이 쌓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어깨를 시원하게 풀어 주자 세아는 스르르 책상에 엎어져서 잠이 들었다.

나는 씩 웃으며 한 켠에 가져다 둔 야전 침대에 세아를 눕혔다.

잠이 든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미안.... 앞으로도 좀 부탁한다."

이 정도 말했으면 세아는 알아들었을 거다.

내가 사신을 맞이하는 업무를 자기한테 떠넘겼다는 사실을.

염치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 낭비라서.'

난 지금, 승냥이 같은 다른 도시의 사신들이나 맞이하며 보낼 시간이 없었다. 정말로.

* * *

그렇게 영영 사신을 맞이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고 예상은 언제나 크게 빗나가는 법.

키날로를 함락하고 4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4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엄청나게 큰 변화가 있었다.

모두 세아 덕분이었다.

카슈와 키날로의 통치를 확고히 하고, 병력을 보충하고, 노르베르쥬의 다른 영주들이 보낸 사신들을 영접하고....

세아가 내가 해야 할 이 모든 일을 맡아 준 덕분에, 나는 속 편하게 하룬과 싸우며 얻은 깨달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사신들도 다 물러가고 급한 일도 얼추 처리가 된 상태였기에 내가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슬슬 운명의 책이나 한번 사용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롭던 때였다. 바로 그런 시점에 아무 예고도 없이 사신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지막 사신이.

"누구냐!"

"거기 멈추...! 끄으윽...."

"으으...."

오랜만에 알현실에 나와 각종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돌연 바깥에 큰 소란이 일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싹-

살갗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터무니없는 오러가 문밖에서 꿈틀거렸다.

저벅- 저벅.

정적 속에서 들려오는 거침없는 발소리.

그리고,

끼이익! 쿵!

홀로 알현실의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

소매가 넓은 펑퍼짐한 옷에, 잿빛 머리칼, 그리고 잿빛 눈동자.

그가 알현실 중앙까지 함부로 걸어오는 동안, 그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익스퍼트 상급은 물론, 최상급인 리베라나 카트리나조차도.

그나마 칼자루에 바들거리는 손을 올렸다는 것 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

저벅.

남자는 마침내 알현실 중앙까지 와서는 나를 향해 손을 대충 흔들어 인사했다.

"반갑다.... 나는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보낸 카인 마누스다."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성의가 없었다.

걸음걸이도, 인사도,

나른한 목소리까지도.

그저 모든 게, 귀찮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댄 이름을 생각하면 그런 태도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카인 마누스.

반로아 왕국을 멸망시킨 갈로틴 제국의 황실 친위 대장.

제국 황제, 로크슈탈렌 갈로틴의 가장 곁에 서는 황제의 검.

그러니까, 우리의 원수였고.

그랜드마스터로 알려진 인물이었으니까.

#52화 꿈

카인 마누스가 찾아오기 3주 전.

나는 세아에게 뒷일을 맡기고 '슬쩍' 빠져나왔다.

아니, '홀린 듯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겠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이 꽉 차 있었다.

'환골탈태.'

사실 하룬과의 전투는 내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우물 밖 세상을 잠깐 바라본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현대의 오러 검술만 사용하는 하룬이 그렇게까지 강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그간 내가 오러 검술의 가능성을 너무 등한시했던 거야.'

고대 검술이 주는 짜릿함에 취해, 더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놓치고 있었다.

'...설령 그랜드마스터라도 이젠 내 상대가 아닐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그랜드마스터도 아닌 하룬에게...

까딱하면 질 뻔했다.

그만큼 하룬의 무위는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검 자루에 올린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한시라도 빨리,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쌤!"

그렇게 한참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꼬마 녀석 하나가 흙장난을 하다가 나를 불러세웠다.

"어? 세온이?"

6살. 세온이.

우리 패밀리의 막둥이.

녀석이 손을 탈탈 털며 날 올려다봤다.

"쌤! 근데 꿈이 뭐야?"

"응?"

"꿈이 뭐야?"

중의적인 질문이었다.

이것은 내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인가, 아니면 꿈이란 단어의 의미를 묻는 것인가....

"아니, 데이지 누나랑 세클란 형아랑 놀아 달라고 했는데, 데이지 누나가 자기들은 꿈을 쫓는다? 그래서 바쁘대. 근데 꿈이 뭐야?"

"아.... 꿈은 말야."

문득 말문이 막혔다.

꿈...?

이게 의외로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구나.

"음.... 그러니까. 내가 간절히 하고 싶은 거. 되고 싶은 거. 그런 게 꿈이거든? 일단?"

"아! 알겠다! 오늘 저녁에 돼지 통 뱃살 먹고 싶다! 이런 거?"

"아? 음...."

그거보단 큰 건데....

그래.

"세온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뭘 하고 싶은 거라거나."

"나? 움.... 엄마. 엄마 만나고 싶어!"

...

하....

너네 어머니는 이미....

하....

나는 치미는 울컥거림을 집어삼키고 세온이를 안아 들었다.

"세온아."

"응?"

"저녁. 돼지 통 뱃살 먹고 싶어?"

"응!"

"알았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려 주었다.

신경이 쓰이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내 할 일을 해야 한다.

세온이는 세온이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 식구들의 관계라는 게 그랬다.

결국엔 각자가 자기 몫을 알아서 감당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견뎌 냈다.

세온이와는 일단 작별하고 나는 연무장으로 계속 나아갔다.

연무장 앞.

영주성의 시녀가 보이길래 불렀다.

"저기."

"히익! 네! 네! 시장님!"

시장?

키날로시에서는 이런 직함을 쓰나 보다. 우리는 다 백작님으로 통일이었는데.

여튼.

"가서 주방장한테 오늘 저녁, 돼지 통 뱃살로 해 달라고 전해 줘."

"네, 넷! 알겠습니다!"

시녀는 과도하게 긴장해선 총총걸음으로 멀어졌다.

내가 뭘 했다고 저러나... 싶기도 하다가, 잠깐 사이에 2번이나 정복을 당한 도시니까 뭐. 그런 납득이 밀려왔다.

'시간 지나면 나아지겠지. 수련이나 하자.'

돼지 통 뱃살도 해결했으니, 나는 발걸음을 서둘러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연무장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붉은 머리의 데이지와 푸른 머리의 세클란이 땀방울을 흩뿌리며 맹렬한 대련을 벌이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데이지가 쉴 새 없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

"정말! 이게! 말이 되냐고!"

세클란은 데이지의 공격을 잘 받아넘기면서도 계속 흥분한 데이지를 타일렀다.

"알잖아. 우릴 걱정 하셔서! 그런 거지."

챙! 카앙!

둘 사이로 쉴 새 없이 불똥이 터진다.

한껏 달아오른 체취와 쇠 냄새 흙냄새가 뒤섞여 연무장다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걱정?! 하! 그러니까! 내가! 약해서 빼고 간 거잖아!"

"솔직히... 우리가! 약하기는...! 하잖아?"

"그게 젤 빡쳐!!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니까! 다들 내 말은 안 듣고!"

카아아앙.

들어 보니 알겠다.

데이지가 가진 불만이 뭔지.

'저거 전쟁에 지 안 데려갔다고 삐졌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쟁에서 제일 많이 죽는 게 '젊은' 하급 익스퍼트니까.

강하긴 하지만 무르익지 않은.

그래서 경험 많은 엘리트 전사에게도 죽어 버리는.

물론 그런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게 전술의 묘미였지만, 그래도 데이지랑 세클란은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데이지의 불만 따위 깔끔히 무시하기로 했다.

'수련이나 하자.'

연무장은 넓으니, 다른 쪽으로 멀찍이 떨어져서 자세를 잡았다.

곧장 상념에 빠져들었다.

'벌슨 아저씨가 그랬지. 탈태를 이루는 조건은 충만한 오러와 완벽한 오러 제어력이라고.'

비록 소드마스터는 아니었지만,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벌슨은 그 누구보다도 오러 이론에 정통한 전문가였다.

그에게 배운 내용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오러.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전신에 잘 묶어 두다 보면, 어느 순간 오러가 신체 자체의 그릇을 넓히기 시작한다.

그것이 환골탈태.

'오러 제어력은 걱정 안 해. 문제는 오러의 절대량.'

지금 내 오러량은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평균에도 꽤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오러가 깨진 채로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

이제부터 성실하게 오러 심법을 수련한다면 빨라야 5년 뒤에나 환골탈태에 도전할 수 있으려나?

반로아 왕실의 비전, '철혼(鐵魂)'이라는 최상급의 오러심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근데 그걸 줄일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우우웅-

내 손에서 반로아가 울었다.

오러를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 끝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투명한 아지랑이에는 분명, 미약하나마 오러가 포함되어 있다.

'검기는 마나를 끌어들이고 심지어 오러를 빚어낸다.'

직접 보고 겪고 행해 보았다.

마나는 결국 순수한 의지에 이끌린다.

그리고 검령이 토해 내는 검기야말로 '벤다'는 단 한 가지에 충실한 가장 순수한 의지다.

검기가 일면 대기 중의 마나가 이끌려와서 압축되고, 결국 실체적인 힘을 지닌 오러가 된다.

물론 하찮은 수준의 오러였다.

어디까지나 검기 자체의 절삭력이 우선이고, 생겨난 오러는 그저 그것을 보조하는 역할을 할 뿐.

하지만 나는 그걸,

지금 좀 다르게 써 볼 생각이었다.

발상은 단순했다.

검이 만들어 내는 오러를 내가 흡수할 수 있다면?

환골탈태에 이르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어찌 보면, 검이 연공을 대신 해 주는 거잖아?'

다만 문제로는 검기가 빚어내는 오러가 내가 가진 철혼(鐵魂)의 오러와 명백히 다르다는 점에 있었다.

일단,

투명했다.

검기가 빚어내는 오러는 색이 없었다.

원시 오러라고 해야 되나?

철혼(鐵魂)이 빚어내는 검푸른색의 오러나, 하룬이 뽑아내던 탈색된 듯한 금빛의 오러와 비교하면, 나약하고 몰개성했다.

'그대로 흡수하면 철혼(鐵魂)의 오러랑 박치기해서 깨져 나가겠지.'

하지만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지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건 낮고 강직한 목소리.

'스승... 님이 그랬지.'

라이테나 셀시우스 대공.

나를 검탁의 경지로 이끌어 주었던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검탁이란, 검이 네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 이미 반로아는 나의 일부다.

내 마음을 읽고 내 자신보다 더 나다운 결정을 내린다.

[뭘 시켜서가 아니라, 검이 너의 일부가 되었기에 움직이는 것뿐이다.]

이미 반로아는 내 심장이나 위장처럼, 나의 일부로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

그렇기에,

[검탁이라는 경지로 따로 분류되고는 있지만 결국 '검아일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

어떤 면에선, 나는 이미 '검아일체'의 경지에 발을 디딘 셈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검과 내가 진정으로 하나라면... 반로아가 철혼(鐵魂)을 연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믿는다.

사실 확실한 건 하나도 없지만.

믿기로 했다.

검과 내가 진정으로 하나일 수 있음을.

우웅- 우우웅-

떨리며 뻗어 내는 손을 따라 허공을 긋는 반로아의 검기.

때로는 내 손이 앞서고, 또 때로는 반로아가 앞선다.

보면,

옳다. 내가 가려 했던 길에 반로아가 있다.

검이 스스로 움직인 것인가.

아니면 내가 검을 이끈 것인가.

애초에 그런 구분에 의미가 있는가.

훙- 후웅-

쉼 없이 휘두른다. 아니 춤을 춘다. 반로아와 함께.

점점 지워지는 주위 풍경 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비쳤다가 사라진다.

"...뭐야. 저 아저씨 언제 왔어?"

"넌 오빠랬다가 아저씨랬다가.... 뭐냐 대체?"

"내 맘이거든?"

데이지와 세클란이 나를 알아차리고 근처를 서성이다 사라졌다.

"아니....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누나 그냥 가자."

"가긴 어딜 가."

"으윽!"

카트리나와 바렌도 날 바라보다가 주변에 자리 잡고 수련을 시작했고.

"어? 리베라 님도 나오셨네요?"

"...저 혼자 놀고 있으면 나중에 더 많이 맞을 거 같아서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남죠. 아마 여기서 빠지면 란센 형의 특훈을 받게 될걸요?"

"...두렵군요."

"...두려워요."

리베라와 잘츠란도 지나가고.

룩크랜서, 캐치, 세아, 미카, 제페토... 다들 와서 나를 들여다보다가 한쪽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계속 춤을 췄다.

주변 소리조차 점점 멀어져 갔다.

"...언제까지 하는 거야?"

"...설마 형이 수련 끝낼 때까지 우리도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지?"

"벌써 이틀째인데.... 오바야."

"세아 부럽다. 걘 행정 처리한다고 빠지잖아."

점점 멀어진다.

나와 반로아만 남아서 춤을 췄다.

"오빠, 아직도 하는 중?"

"카트리나 누나는 저러다가 쓰러지겠는데...."

"아니, 저 언니는 왜 이런 것까지 승부욕을 부려?"

"...어?!"

"왜."

"지금... 저기...!"

"어...?"

"오러가??"

"저게 뭐야!?"

동생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멀어진다.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남는 건...

나도 아니고,

반로아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춤'뿐이구나.

* * *

어느 순간, 연무장에 모여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란센을 향했다.

우우웅-!

웅-!

반로아는 마치 청동종처럼 웅장하게 울었고, 그 울림을 따라, 검푸른 오러가 숨을 쉬었다.

소드마스터의 검에 오러가 맺히는 게 뭐가 신기할까?

하지만 그 오러가 저렇게 거대하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

반로아를 따라 계속 꿈틀대며 움직이는 오러.

때로는 뭉쳐져서 고래와 같았고, 때로는 흩어져서 폭풍과 같았다.

소낙비 같고, 동방인들이 믿는 길쭉한 용과 같고, 깊은 호수 같은,

오러.

그것이 란센과 반로아를 오가며 끝없이 부풀었다.

"뭐야.... 저거. 무서워...."

마지막까지도 홀로 수련에 매진하던 카트리나도 결국엔 란센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무섭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은 '전율'이었다.

알아볼 수 있었다.

거대한 오러가 지금 끝도 없이 란센의 몸속으로 빨려드는 중이라는 것을.

몇 달.

어쩌면 몇 년은 연공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오러를 단숨에 삼켜 버리고 있는 란센.

그러고도 그 몸이 뻥! 하고 터져버리지 않는, 경악스러운 오러 제어력.

그걸 넋을 놓고 지켜보던 카트리나는, 어느 순간 이를 아득! 물었다.

"보고만 있을 거야?!"

카트리나는 등을 돌렸다.

칼자루를 더욱 굳게 틀어쥐었다.

"저거! 란센 오빠가 우리한테 가르쳐 준 검술이잖아! 그거 응용한 거잖아!"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카트리나에게 모였다.

"우리도 할 수 있어!"

부웅!

검을 휘두르는 카트리나.

단 한 가지를 생각했다.

'검의 목소리를 듣는다.(독검讀劍) 그 이후는... 검의 목소리를 점점 더 키우고, 마침내 검의 기운을 몸속으로 받아들인다(체검體劍)!'

란센이 알려 준 대로.

그녀의 검에 맺힌 오렌지빛 소드 오러 위로도 희미한 검기가 일렁거렸다.

소드마스터 바르칸과의 싸움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 준 고대의 검기.

그녀는 이제 그다음 단계를 바라보려 했다.

* * *

모두가 카트리나를 따라 다시 수련을 재개할 때도, 데이지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그건 그녀의 동갑내기 친구인 세클란도 마찬가지였다.

"...."

"...."

178cm의 세클란.

167cm의 데이지.

둘이 나란히 서서 란센을 바라본다.

"예쁘다.... 우리 오빠...."

중얼거리는 데이지. 그녀의 시선이 꽂혀 있는 곳은 저 거대한 오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란센의 춤.

검과 사람이 하나가 된,

검무(劍舞).

그녀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과 반려가 된 듯.

함께 춤을 추는.

문득 데이지는 자신의 검을 내려보았다.

"...나는 내 검을 저렇게 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매번 자기를 무시하고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던 언니 오빠들처럼. 나도 내 검을 그렇게 제멋대로 휘둘렀던 건 아닐까.

데이지는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소중하게.

란센이 강조했던 대로 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러자, 옆에 있던 세클란도 거울처럼 같이 몸을 움직였다.

그는 데이지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이... 날 부르는 것 같아.'

웅-

우웅-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작은 진동이 검 자루를 타고 전해진다.

그게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도 할 수 있어.'

'좀 더 욕심내도 돼.'

그는 반로아의 혈통이 아닌, 쿠샨시에서 굴러다니던 평범한 고아.

형, 누나들과 가족처럼 지내지만 어쩔 수 없이 눈치 보고, 조금은 비켜서 있던 아이.

꾸욱!

칼자루를 쥐는 세클란의 손에는 이전에는 없던 의지가 불끈!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6살.

세온.

그 아이의 눈에 비친 연무장은 알록달록 빛이 났다.

란센이 뿜어낸 거대한 검푸른 오러를 배경으로, 각각 자신의 색깔을 피워 내는 형, 누나들의 오러....

"하아...."

세온은 처음 느껴 보는 벅차오름에 한숨을 내쉬었다.

"예쁘다...."

그런 종류의 기억이 있다.

단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억.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렇게 세온이의 가슴에 새겨졌다.

돼지 통 뱃살은 생각도 나지도 않는,

그런 완벽한 순간이었다.

#53화 그랜드마스터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검과 나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고,

세상에 오로지 우리의 춤만이 남았을 때, 마침내 시작되었다.

우우우웅-!

반로아가 스스로 철혼(鐵魂)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이 오러 심법을 운용한다!

웅! 우웅!

반로아의 은백색 검신을 따라 철혼의 검푸른 오러가 줄줄 흘러내렸다.

'엄청나게 빨라.'

어째서일까?

반로아가 빚어내는 철혼의 오러는 터무니없이 막대했다.

1시간을 연공해야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오러가 1분이 되기 전에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본능처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순수한 의지.'

인간의 의지는 순수하지 않다.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화나고. 온갖 의지와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인간.

반면에 검의 의지는 순수하기 그지없다.

검령은 그저 '벤다'는 하나의 의지만을 품을 뿐이니까.

'마나는 의지에 이끌리며, 의지로 빚어져 오러가 된다.'

오러 연공에 빠지지 않는 기초 이론.

어떤 마음 상태로, 어떤 의지를 품어야 하는가, 모든 연공서의 서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의지를 지닌 검이, 나와 동화되어 오러 연공을 함께하면... 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그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마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오러.

몇 달의 시간을 압축하는 며칠.

1주일....

2주일....

시간을 잊었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고, 피로도 몰랐다.

계속 계속 검을 휘두르며 오러를 정제했고, 정제한 오러를 삼켰다.

화르륵!

어느 순간, 내 몸이 검푸른 오러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향초가 된 것처럼,

온 사방에 오러의 향을 퍼뜨렸다.

살과 피와 신경이 재와 연기로 흩어지고, 그 자리에 오러를 듬뿍 머금은 새로운 세포가 자라났다.

뼈와 살이 바뀌는 변화. 아니 진화.

환골탈태!

앞으로 5년은 걸릴 거라 예상했던 경지를 단 2주일 만에 앞당겨 성취했다.

"후우우...."

긴 숨과 함께 눈을 뜨는 순간, 몰아지경 속에서 붙들고 있던 감각이 흩어졌다. 잠시 도달했던 최상급의 경지. 하지만, 아직 온전히 내 것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쉽진 않았다. 머지않아 닿게 될 거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모든 게 끝난 뒤,

올려다본 밤하늘엔 부서진 달과 반짝이는 별이 가득했다.

"달은... 황량하구나...."

시야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이야.

달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은회색 표면에 얼핏얼핏 보이는...

저것은 산, 저것은 계곡인가?

달이 그 자체로 또 다른 세상이었다는 걸,

나는 두 눈으로 확인했다.

스치는 바람조차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황홀한 세상.

나는 그렇게,

벗어났다.

* * *

황제가 보낸 전령, 카인 마누스와 마주한 건 환골탈태를 마치고 다시 나흘이 지난 뒤였다.

이 시기에 찾아온 황제의 전령이라....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나는 여유롭게 그를 맞이했다.

"그래. 고명하신 그랜드마스터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지?"

잿빛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느릿느릿.

호통을 치고 싶을 만큼 그는 느리게 움직였지만, 감히 나서는 자는 없었다.

여전히 그의 기세가 알현실 전체를 짓눌렀으므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

카인 마누스는 아주 귀찮아하며 품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품에서 나올 만한 크기가 아닌 걸로 보아 아공간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나 보다.

저벅. 저벅.

그는 상자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듯 천천히.

"큭! 거기 멈춰...!"

"멈추...시오!"

스르릉-!

카트리나가 검을 뽑아 들었고, 리베라는 언제 꺼냈는지 활시위를 당겼다.

허나,

저벅. 저벅.

카인 마누스는 그저 걸었다.

둘은 제자리에 굳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재밌는 장난을 치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미적거리는 사내.

하지만 정작 그의 오러는 며칠을 굶은 야수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 흉포함 앞에,

검까지 뽑아 든 카트리나는 하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었고, 활시위까지 당긴 리베라는 끝내 활을 겨누지 못했다.

그렇게 모두를 짓누른 채로 천천히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카인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 봐...."

"흠."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5kg 정도 되려나.

어떤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지 상자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이 상감되어 있었고, 그 주위로 마나의 흐름이 기묘하게 왜곡되었다.

기꺼이 상자를 열었다.

훅-

끼쳐 오는 비릿한 악취.

두쿵! 두쿵!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무거운 박동.

"...심장?"

그것은 거대한 마수의 심장이었다. 검었고, 사이사이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기만해도 혐오스럽고 꺼림칙했다.

뭔가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카인 마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된 '굉고(訇鼓)'의 심장...이야."

굉고(訇鼓)?

"멀리서 으스러뜨리는 큰 북소리. 그거?"

"어."

그게 진짜 있는 괴물이었어?

전설인 줄 알았다.

누구는 5미터라고 하고 누구는 20미터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이. 매일마다 땅을 쿵쿵 두드린다고.

그 거대한 북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는 이는, 평생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는 북소리가 그 희생자의 귀에만 점점 크게 들리다가, 나중에는 몸을 떨리게 하고, 끝내는 그 몸을 터져 죽게 한다는 저주받은 북소리.

그 괴물을 굉고(訇鼓)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괴물의,

여전히 뛰는 심장을,

내게 선물로 보냈다?

약은커녕 독으로 쓰기에도 부적절한 이런 물건을?

대체 무슨 생각이지?

스윽.

카인 마누스의 잿빛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건 관찰하는 눈이었다.

아니, 시험하는 눈이었다.

이 선물을 받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나 낱낱이 기억해 두려는 눈빛이었다.

진짜 뭘까?

이러는 이유가.

그냥 악취미일까? 나를 놀리려고?

아니다. 어쩌면 시험일지도 모른다.

정체불명의 불쾌한 선물을 보냈을 때 내 반응이 어떤지를 보고, 날 가늠하기 위해서.

그래. 그런 거라면 지금 날 저렇게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카인의 시선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지만,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카인이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나는 마음을 정했다.

"황제께서 귀한 선물을 보내셨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정말 즐겁다는 듯이.

혼신의 연기를 펼쳐, 그리 웃었다.

"세아. 이건 카슈시(市)에 있는 예배당에 봉안한다."

그 말은,

세아를 굳게 믿고 한 말이었다.

정체불명의 '마수 심장'.

거기에 '예배당'.

이 두 단어라면, 세아가 분명 나의 의도를 이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예. 백작님."

공식 석상이기에 세아는 나를 백작이라 불렀다.

"테베크. 귀한 물건이니 고스란히."

세아가 마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키날로의 마법사 대표. 하룬의 침공 이후 남겨진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난 이.

"예에 아가씨."

테베크는 구부러진 등을 짚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카인의 앞에 서자 두려운지 흠칫 몸을 떨었지만, 꿋꿋하게 나무 상자를 건네받고 주문을 외워 한 번 더 봉했다.

그 과정을 확인한 세아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예배당에 봉안하고 오겠습니다."

나와 세아의 눈이 마주쳤다.

'역시 통할 줄 알았다니까.'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는 같은 단어가 떠올라 있을 것이다.

'사교도.'

번개처럼 스치고 간 가설이었다.

저런 흉측한 심장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을까?

놀랍게도 있다.

나는 저렇게 '기분 나쁜 것'을 이미 본 적이 있었으니까.

'크시아스 백작.'

저런 끔찍한 것들로 의식을 거행하는 놈들.

그 의식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자들.

그리고 흡혈귀가 주는 그 기괴한 불쾌함, 5만년 전 과거에서 보았던 그 촉수 늑대 괴물의 노린내와도 비슷한 역겨움.

그 모든 게 저 거대한 심장과 닮아 있었다.

'저건 사교(邪敎)와 관련된 물건이야.'

아마도,

사교도에게 있어선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겠지.

근거는 부족하지만 예리한 직감이 확신으로 이어졌다.

황제는 사교도다.

'어쩐지 정복전쟁에 미쳐 있더라니...'

정복하고. 정복지의 양민들을 학살하고.

그게 다 사교 의식을 위한 일이었다 생각하면 많은 의문이 해소되었다.

그 가설을 통해 생각하면, 이 선물의 의미는 하나였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보고, 같은 사교도인지 아닌지 판단하겠다는 것.

그래서 난 선택했다.

사교도로 위장하기로.

다행히 눈치 빠른 세아 덕택에 이 위장은 제법 그럴 듯하게 이루어졌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어쩌면 이건 사교에 대한 정보를 얻고 더 나아가 제국과 황제의 약점을 찾아낼 수도 있는 길이었으니까.

"흐음...."

상자를 들고 멀어지는 세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인 마누스가 묘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 보았다.

"폐하께서. 답례품을 가져오라셨어...."

답례....

굉고(訇鼓)의 심장을 내밀고 내 반응을 살핀 것이 첫 번째 시험이라면 이건 두 번째 시험이었다.

그러니까 답례품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이거지?

좋아.

보여 주마.

첫 번째 시험으로 같은 편이라 어필을 했으니까.

이젠 내 성질대로 해도 되는 거 아냐?

"그래. 이런 귀한 물건을 받았으면 그에 걸맞은 답례를 해야지."

말을 끌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이건 어떨까? 한 세력의 수장을 대하면서 반말이나 찍찍 뱉는 건방진 사신에게 돌려줄 답례로 적당할 거 같은데."

약속도 잡지 않고 경비 병력을 제압하며 침입한 죄.

감히 내 앞에서 오러를 휘둘러 내 신하들을 압박한 죄.

명분이라면 차고 넘쳤다.

나는 옆에 세워 둔 반로아를 뽑아 휘둘렀다.

카인의 목을 정확하게 노렸다.

카아아앙!

"하아...."

언제 검을 꺼냈을까?

가뿐하게 내 검을 받아 낸 카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할 거냐는 듯, 몹시 귀찮아하며 내 검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오러 없이도 이걸 막아?'

조금 놀랐다.

물론 나 역시 오러를 쓰진 않았다.

하지만 반로아는 고대인들도 인정한 절세의 보검.

그런데도 카인의 검은 반로아를 받아 내고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과연 그랜드마스터가 쓸 법한 대단한 명검.

군침이 싹 돌았다.

그 명검을...

내가 반 토막 낸다면 어떨까?

카인은 분명 내 살기를 느꼈을 거다.

숨기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그저 귀찮음이 역력할 뿐이었다.

내가 하룬마저 베었다는 걸 알 텐데도, 그는 나를 전혀 적수로 여기지 않았다.

카인은 검을 천천히 까딱거리며 말했다.

"뭐... 들어와. 5합을 견디면 통과한 걸로 칠게."

"그래?"

통과.

난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이참에 확인을 해 볼 작정이었다.

인간을 벗어난 초인. 최강이라 불리는 그랜드마스터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낱낱이 까발려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구우우웅-!

검푸른 오러가 장대하게 피어오르며 알현실을 떨쳐 울렸다.

사방을 할퀴는 날카로운 폭풍에 신하들은 분분히 몸을 피했다.

난 오러 블레이드와 고대의 검기를 섞어 있는 힘껏 내려쳤다.

카인은 단순하게 대응했다. 그저 내 검을 향해 마주 검을 뻗는 방식으로.

그의 검에 맺힌 건 처음에는 평범한 오러 블레이드처럼 보였다.

허나 검과 검이 맞닿는 순간이 오자,

후우우웅-!

내 오러는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태풍을 만난 횃불처럼.

카인의 검로를 따라 모든 마나와 오러가 저절로 길을 비켜섰다.

그 뻥뚫린 길 사이로, 연녹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칼날이 짓쳐들어왔다.

'이게... 소울 블레이드!'

말로만 듣던 소울 블레이드를 마침내 내 눈으로 목도했다.

그랜드마스터의 전유물인 소울 블레이드. 그 앞에서 나의 오러 블레이드는 흔들리며 흩어지려 했다.

그것을 겨우 붙잡아 놓는 건, 검신을 타고 아른거리는 고대의 검기!

차라아아앙-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기묘한 공명음이 터져 나갔다.

막대한 힘이 검과 검 사이, 아니 오러와 오러 사이를 메아리쳤다.

일렁거리나 깨어지지 않는 나의 오러 블레이드.

한없이 단단하나 가늘게 진동하는 카인의 소울 블레이드.

두 개의 힘이 한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 이마를 부딪혔다.

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그의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묻어났다.

"...뭐야? 고작 오러 블레이드로 소울 블레이드를 어떻게 막았지?"

조금 달아오른 목소리.

나는 대답 대신 관찰을 했다.

'그래, 이거구나. 소울 블레이드.'

강했다.

확실히.

주변의 오러를 다 왜곡시키고 흩어 버리니, 그랜드마스터 이하에게는 극상성의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검기가 아니었다면, 나 역시 당해 내지 못했겠지.

하지만,

'설마 이게 다는 아니지?'

위명도 쟁쟁한 그랜드마스터.

전 세계를 다 꼽아도 10명을 넘지 않는다는 그랜드마스터.

두근.

그 솜씨가 너무 궁금해서 심장이 뛰었다.

#54화 답례

카인의 눈동자는 아주 약간의 열기를 머금었으나, 여전히 전체적으로는 미지근했다.

세상 모든 게 시시하고 지루하다는 듯한 그 눈을 보다 보면 상당히 기분이 더러워졌다.

"조금... 번거롭네."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카인의 목소리.

하지만 펼쳐지기 시작한 그의 검술은 결코 심심한 것이 아니었다.

캉!

현란했다.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오러가 저렇게 자유자재일 수가 있어...?'

길어졌다가, 두꺼워졌다.

휘어졌다가,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연격 하나하나가 전부 어려운 난제.

'재밌어.'

그래서 내 심장은 오히려 두근거렸다.

지금 내 목표는 하나였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분석하는 것.

짧은 시간에 수많은 정보가 쌓였다.

우선 첫째,

소울 블레이드는 주변의 마나와 오러를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

때문에 보통의 오러는 소울 블레이드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내 검기와 오러 블레이드로 버티는 게 가능했다.

둘째,

소울 블레이드는 사라지지 않는다.

카가가강!

밀려오는 소울 블레이드를 반로아로 밀어내도,

가까스로 피해 내도,

심지어 길게 늘어진 소울 블레이드의 허점을 노려 깨뜨렸을 때도,

소울 블레이드는 사라지지 않았다.

검에서 흘러나온 연둣빛 뱀들이 내 주위를 둥둥 떠다니며 내 움직임을 점점 제약했다.

'소울 블레이드는 전술적 이점이 엄청나구나.'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것을 넘어, 그 궤적이 허공에 남아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검탁의 경지로 견뎌 낼 수 있었다.

여기선 이렇게.

저기선 이런 길도 있지 않을까?

지금! 위험해!

난 쉼 없이 검과 대화를 나누며 활로를 열었다.

그게 의외로,

즐거웠다.

어려운 문제들이 있고,

그걸 바로바로 풀어내는 내가 있다.

온몸이, 머릿속 하나하나까지 다 깨어나는 이 기분.

내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나?

한계의 너머에서 맛보는 열광!

이걸로 끝이 아니지?

그랜드마스터잖아.

더 있지?

번지는 웃음.

카인 마누스의 잿빛 눈동자가 그런 내 입가를 천천히 훑었다.

썩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쩌어어엉!

내가 카인 마누스의 검을 또 한 차례 쳐낸 직후,

그가 중얼거렸다.

"...간다."

그의 건조한 동공 속에 살기가 스쳤다.

진짜 큰 게 온다.

우르릉-!

천둥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

연둣빛 파도가 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눈앞으로 밀려오는 카인의 검 외에도, 방금 전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둥실둥실 떠 있던 소울 블레이드들도 일제히 움직여 나를 겨냥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검격은 이 통한의 일격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던 것!

대기가 타오르는 냄새로 코가 맵다.

온 솜털이 곤두선다.

후욱!

난 숨을 크게 뱉으며 오러 코어를 있는 힘껏 쥐어짜 냈다.

돌진기 [템페스트(tempest)]

콰아앙!

세상이 코앞으로 압축되었다.

후폭풍을 일으키며 나는 되려 연둣빛 오러 블레이드가 쏟아지는 정면으로 질주했다.

'벤다.'

하체에서부터 밀어 올린 오러가 코어를 자극한다.

코어를 채우고 있던 오러의 3분의 1 가까이가 울컥 쏟아져 나온다.

그건 곧 가슴을 지나 팔을 넘어 검에 닿는다.

이때 핵심은,

내내 오러를 차갑게 응축시켰다가 검끝에서 단번에 끓여 기화시키는 것.

반로아 왕실 검법, 필살검.

[엑시큐셔너(executioner)]

쩌어어어엉!

오러가 폭발을 일으키며 막대한 힘을 쏟아 냈다. 검푸른 오러가 연둣빛 오러 폭풍의 한 귀퉁이를 베어 냈다.

커튼이 갈라지듯,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생(生)의 틈바구니를 향해, 나는 힘껏 몸을 들이밀었다.

우르르르-

등 뒤로 천둥소리가 사그라든다.

카인 마누스의 좌측으로 비껴 나온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곳에,

카인 마누스의 선명한 '표정'이 돋아나 있었다.

"...피해?"

거슬림. 분노. 짜증. 불쾌.

그저 귀찮음 하나만을 품고 있던 얼굴에 새겨진 노골적인 감정들.

어때?

이제 좀 재미있지?

나도 재미있다.

정확히 5합째였다.

견디면 통과한 걸로 치겠다고 말했던 그 5합째에 놈은 작정하고 승부를 걸었다.

그러니까 난,

통과를 한 거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여전히 목이 말라.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쯧."

그는 짜증스럽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검을 휘둘러 왔다.

번쩍! 중간 과정이 보이지 않았다.

돌연 연둣빛 소울 블레이드가 눈앞에서 타올랐다.

초신속의 일격!

쩌어어어엉!

'와, 나 이거 어떻게 막았지?'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의 빠르기였다.

우웅 우웅-

반로아도 떨고, 나도 떨었다.

'이렇게까지 빠르다고?'

이런 건 처음 봤다. 아니, 사실 보지도 못했다. 그저 직감을 따라 막아 냈을 뿐.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쿠우우웅!

이번엔 느릿하게 수직 베기가 떨어졌다. 대신 태산처럼 무거웠다.

"욱...!"

받아 내는 순간, 토악질이 울컥 치밀었다. 수직 베기에 실린 그 압도적인 무게가 내 근육 한 올 한 올을 움켜쥔다.

카인의 눈동자는 여전했다.

무심함과 지루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 속은 짜증과 분노로 타올랐다.

'막아? 감히?'

그런 말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는 착각이 일 때쯤,

제3격이 떨어졌다.

쐐애애애-

이번에는 귀가 먼저 위험을 눈치챘다.

아주 높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질 때 들릴 법한... 귀청을 찢는 소음과 함께, 카인의 검로가 불가능한 경로로 휘어져 나를 노렸다.

카아아앙!

오싹!

그 검을 쳐내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미숙했으면... 나 방금 죽었다.'

이 공격을 막은 건, 순전히 내가 '벗어난' 소드마스터였기 때문이었다.

환골탈태를 겪으며 초월적으로 예리해진 감각, 집중력, 반응속도... 거기에 검탁과 내가 쌓아 올린 전투 경험까지, 이 모든 게 합쳐지고 나서야 겨우 막을 수 있는 일격이 아니었을까?

카인은 내가 방금 일격을 막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한층 더 우중충하게 가라앉았다.

돌연, 오싹했다.

'또 있어?'

양파처럼 까도 까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

하늘 끝까지 닿아 있던 내 자신감에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균열이 생겼다.

쩌정! 쩡! 카아앙! 키라아아앙!

빨랐다가, 무거웠다가, 강맹했다가, 휘어졌다가, 헛치고 다른 곳을 노린다든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검이 카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연신 뒤로 물러나며, 그것을 피하고 막았다.

오감에 직감에 요행까지 더해 버티는 총동원의 시간.

'또? 아직도? 더 있어?'

그런데,

막았다.

막아졌다.

피해지기도 했다.

점점 더 익숙해졌다.

내 자신에게.

내 한계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먼 곳에 있었다.

'환골탈태와 고대 검술의 시너지 덕분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체에, 검의 날카로운 기운과 본성이 깃든다는 것.

그 상상초월의 시너지 효과가 지금 날 버티게 했다.

반로아와 나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놀라며 카인의 검을 맞상대했다.

10합.

15합.

그리고 마침내, 30합이 되던 순간.

"지겨워...."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카인이 아래에서 위로, 사선의 경로로 검을 그었다.

콰아아앙!

내가 사용했던 [엑시큐셔너(executioner)]처럼 일순간에 폭발하는 맹폭한 오러.

쩌어어엉-!

"큽...!"

막아 내는 순간, 가슴이 진탕되고 입 속에서 쇳내가 풍겼다.

기세에 떠밀린 반로아가 위로 튕겨졌다.

그랜드마스터쯤 되면, 이런 필살검을 준비 과정도 없이 바로 뽑아낼 수 있는 거냐?

하지만 그조차도 진짜가 아니었다.

나를 노리는 진짜 송곳니는 위에서 덮쳐 왔다.

꽈릉!

벼락 소리와 함께 정수리를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연둣빛 오러.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검은 아래에서 위로 그어졌는데, 왜 오러는 머리 위에서 떨어져?

마법사야?

이미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격을 막느라 여력을 다 쓴 상태였기에...

난 이걸 막을 수 없었다.

"끝이다."

카인의 입꼬리에 만족스런 미소가 설핏 드리우던 그 순간,

내가 택한 것은 나의 검, 반로아를 믿는 것이었다.

우우우우웅!

반로아가 울었다.

순간 타오르듯 커지는 검기.

사방에서 몰려든 마나가 반로아를 타고 흐르며 오러로 변환되고, 우산처럼 내 머리 위를 감쌌다.

쩌어어어엉!

반로아가 빚어낸 투명한 오러와 벼락처럼 내리꽂힌 연둣빛 오러가 머리 위에서 충돌하며 장대한 오로라를 만들어 냈다.

반로아가 만들어 낸 건, 검푸른 오러는 아니었다. 나를 환골탈태로 이끌어 주었던 그 깨달음을 나는 수습하지 못했으니까.

검아일체. 무아지경에 빠져서 잠깐 맛보았던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는, 깨어남과 동시에 꿈처럼 흩어져 버렸다.

나는 여전히 고대 기준, 익스퍼트 상급이었다.

그래도 희미한 깨달음은 남았다.

검이 스스로 철혼(鐵魂)의 검푸른 오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할지라도, 검기 고유의 투명한 오러 정도는 엄청나게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그게 날 살렸다.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 연둣빛의 오로라.

그리고 이제 내 차례가 왔다.

방금의 일격이 비장의 한 수였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멍하니 선 카인.

"뭔...?"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코어의 오러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진탕된 가슴에 오러의 흐름이 원할하지 않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순수한 고대 검기만을 드리운 반로아가 쭉 뻗은 카인의 손목을 노렸다.

스아악!

허공을 베었다.

어느새 훌쩍 물러선 카인.

그의 두 눈에 들끓는 살기.

"너...."

그의 입술을 비집고 스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처음의 지루하고 귀찮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러웠다.

'다 봤다.'

가슴이 뜨거울 만큼.

흔히 사람들이 소드마스터는 한 지방의 지배자가 될 만한 무력이고, 그랜드마스터는 능히 일국을 이룰 수 있는 무력이라 하던데....

그 본질을 오늘 내 눈으로 낱낱이 확인했다.

'상상 이상으로 강했어.'

원래는 카인의 검을 부러뜨려 줄 생각이었지만 거기까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내 오러는 벌써 간당간당한데, 카인은 여전히 쌩쌩해 보였다.

이 이상 싸우면 내가 손해.

괜히 내 밑천만 드러내는 꼴이 될 터였다.

"죽인다...!"

카인은 잔뜩 화가 난 눈치였다.

가만히 두면 다시 달려들 기세.

"이거 받아."

그래서 나는 얼른 손에 쥔 천 조각을 그에게 던졌다.

검을 부러뜨려 주지는 못했지만, 대신 내가 얻어 낸 것.

"...이건?"

뭔지 모르겠어?

말없이 소매를 가리켜 주었다.

카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소매가 한 마디쯤 잘려 있었으니까.

마지막 순간, 놈의 손목을 노렸던 일격으로 잘라 낸 소매였다.

이게 나의 답례였다.

"예의를 모르는 사신에게 주는 답례로는 꽤 적절하지? 그랜드마스터의 잘린 소맷자락. 꽤나 귀한 거잖아? 그게 내 답례품이니 황제한테 잘 전해 드리도록."

뿌득.

어디서 어금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카인은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가타부타 대답도 없이 자신의 잘려 나간 소맷자락을 꼭 쥐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래. 참아야지. 날 죽이고 싶겠지만, 그게 불가능하잖아? 설령 네가 나보다 조금 더 강하다고 해도 그 차이가 아주 크진 않고, 이곳엔 내 부하들이 득실거리니까.

나는 분노를 활활 태우며 떠나는 카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이고 죽겠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찮아?"

"주군! 괜찮으십니까?"

허겁지겁 달려오는 카트리나와 리베라.

나는 손을 흔들어 그들을 말렸다.

지금은 생각할 게 좀 많았다.

'그랜드마스터도 괴물이네.'

한때는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가 검령과 소통하는 경지가 아닌가 하고.

전혀 아니었다.

오늘 보니까, 현대의 그랜드마스터는 검령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오러를 극한으로 다루는 존재일 뿐이었다.

오러를 극한으로 다루다 보니, 온갖 마법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인. 그게 그랜드마스터의 정체.

'그래. 뭔지는 알겠단 말이지...?'

소드마스터가 제 몸에 마나를 극한까지 다루어 낸다면, 그랜드마스터는 몸 내부뿐만 아니라 몸 외부의 마나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뤘다.

그 부분은 확실히 알았다.

다만 문제는,

'근데, 어떻게 해야 그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거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머리 아프네.'

어떻게 수련해야 저 경지에 닿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머리칼을 헤집었다.

고민을 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당장은 정보부터가 너무 적었으니까.

'이럴 땐,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제국이 내게 관심을 갖고 있고, 제국의 그랜드마스터가 저렇게까지 강하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한시라도 더 빨리 강해지는 것.

'운명의 책. 당장 쓰자.'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

* * *

로크슈탈렌 갈로틴.

글로리 랜드의 3분의 1을 지배하고 다른 3분의 1을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나머지 3분의 1을 눈치보게 하는, 대제국 갈로틴의 황제.

그는 지금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인. 카인아. 너 뭐라고 했지? '제가 거기 갈 필요는....'이라고 했던가? 근데 필요가 아니라 '피로' 아니야? 얼마나 피로하면 소맷자락이 잘려서 돌아와?"

그건, 농담이라면 발화자의 수준을 의심케 할 만한 참혹한 발언이었다.

황제의 앞에 부복한 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웃어?"

"죄, 죄송합니다."

카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란센의 앞에서 보여 주었던 오만함도 귀찮음도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두려움을 대변했다.

- 그랜드마스터는 황제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

이게 세간 퍼져 있는 속설이었으나, 지금 황실에서 벌어지는 풍경은 그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그래도 재밌긴 하다. 그렇지? 언제 네가 옷을 다 베여 보겠어? 목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서늘하게 빛나는 로크슈탈렌의 눈.

자줏빛 눈동자는 내가 당장이라도 그 목을 쳐 주랴? 하고 묻는 것만 같았다.

카인은 몸을 떨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죽음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황제였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머리를 땅에 박아 사죄를 하려던 찰나,

"안 웃어?"

황제의 음성이 들려왔다.

카인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하... 하하...."

로크슈탈렌은 그제야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카인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대신 보고서를 팔락였다.

거기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란센은 심장의 용도를 정확히 아는 게 분명했다.

당황은커녕 도리어 기뻐했고, '마법'으로 잘 봉인하여 '예배당'에 봉안했으니까.

'이만하면 일단, 검증은 된 거지.'

로크슈탈렌은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것'의 맥은 이어졌구나. 들카슈 다음은 크시아스. 그리고 이제 란센인가."

그러자 등 뒤에 시립해 있던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고했다.

"하지만 폐하. 란센 그자는 반로아의 잔당으로...."

"알아. 하지만 '그것'에 홀렸잖아? 그런 자에겐 국가도, 사랑도, 가족도 의미가 없지. 우리 '아버지'가 몸소 증명해 보였잖아?"

로크슈탈렌이 아버지를 입에 담자 대전에 있던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직 등 뒤에 시립해 있던 남자만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란센에게는 어떤 지원을...."

"지원? 왜? 작정하고 죽여야지."

"네? 하지만 그것을 따르는 자라면 우리와...."

로크슈탈렌이 손을 휘저어 남자의 말을 끊었다.

"크시아스나 들카슈 같은 장기 말이면 모르겠는데...."

그의 손에서 카인이 가져온 소맷자락이 팔랑- 떨어졌다.

"답례로 이런 걸 보냈잖아? 그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지. '그것'을 따른다고 설쳐 대려면, 혼돈을 잡아먹어야지, 지가 잡아먹히면 안 되잖아?"

황제의 옥좌 앞.

넓은 테이블에는 노르베르쥬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쿠샨시(市)나 카슈시(市)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닌, 사람이 살 수 없는, 잿빛 땅만이 표시되어 있는 그런 지도가.

"더 성대하게 준비해 보자고. 어쩌면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우리 신입을 위해."

황제의 두 눈동자는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렸다.

#55화 로레인 연구소

"왔어?"

영주성 밖으로 나서자 세아가 나를 반겼다.

이미 말과 짐, 호위 부대까지, 모든 여행 채비를 다 마친 상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안 거야? 내가 바로 카슈시(市)로 갈 거."

세아가 남색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당분간 시간 여유 있음. 황제가 그랜드마스터까지 보내 압박. 더 강해져야 함. 당연히 운명의 책을 사용하러 카슈시로 가겠지. 이유가 더 필요해?"

날 아주 훤히 꿰고 있구나.

누구 동생이길래 이렇게 똑똑한지.

세아의 머리칼을 헝클어 주었다. 바둥거려 피하는 세아.

"그... 저... 시장님! 저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여행 가방을 등에 짊어진 마법사, 테베크가 보였다.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두 눈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반짝거렸다.

세아가 속삭이듯 설명해 주었다.

"굉고(訇鼓)의 심장. 그걸 연구해 보고 싶대. 오빠한테 직접 물어보라 그랬어."

"그럼 연구하면 되지, 왜?"

세아가 턱으로 짐마차를 가리켰다.

"근데 그 심장은 여기 말고 쿠샨시 예배당에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혹시 모르잖아? 사교의 예배당에 있으면 뭔가 반응이 있을지도. 그건 또 하나의 단서가 되겠지."

음.

맞는 말이네.

사교.

이제 그것은 우리의 운명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당장 운명의 책 자체가 사교와 관련이 있는 데다가... 우리의 원수인 황제 로크슈탈렌도 사교도인 게 거의 확실했으니까.

그러니 굉고의 심장은 카슈에 두는 게 맞다.

테베크는 아예 카슈시로 따라와 굉고의 심장을 연구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안 돼."

미안하지만 단칼에 거절이다.

일단 심장을 들고 예배당에 가 볼 생각인데, 거기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면... 좀 골치 아팠다.

아직까지 시간 여행은 나와 동생들, 그리고 벌슨 아저씨만 아는 비밀.

리베라나 칼세릭에겐, 딱히 숨기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말해 주지도 않은 정도였다.

그런데 마법사인 테베크를 데려갔다간 자칫 시간 여행의 비밀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었다.

"앗, 아.... 녭 녭 알겠습니다...."

테베크는 크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하룬을 패퇴시킨 나를 굉장히 두려워했다.

지금도 쩔쩔매며 혹시 기분이 상한 건 아닐지 내 눈치를 살폈다.

저만큼이나 날 두려워하면서도, 연구 때문에 청을 올렸던 거였나.

'열정적이네.'

꽤 마음에 들었다.

저 나이에도 순수한 열정을 품고 있는 것도. 또 그 열정을 금방 숨길 수 있는 처세술도.

나 역시 크시아스 밑에서 저 비슷한 삶을 살아 봐서 그런가? 괜히 호감이었다.

"세아."

"응."

"마법사 테베크 앞으로 할당된 연구비 있어?"

"응. 책정하려고."

"그거 50% 인상해."

"알았어."

화아악!

빛이 뿜어지는 것 같다.

억지로 웃고 있던 테베크의 얼굴에서 돌연 진짜 행복이 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넙죽넙죽 허리를 숙이는 할아버지가 부담스러워서 적당히 어깨를 일으켜 주었다.

"세아를 잘 보좌해. 여기 토박이니까 큰 도움이 될 거야. 할 수 있지?"

"녭! 물론입죠! 녭!"

그의 어깨를 꽉 한 번 잡아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테베크의 존경이 물씬 느껴졌다.

그렇지.

자고로 좋은 보스란,

등 뒤에는 큰 칼을 세워 두고, 눈앞에서는 금화를 쏟아 주는 사람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