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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같은 시각, 아카데미아 내부에 위치한 연무장.

다양한 형태의 허수아비와 인공 구조물이 배치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늦은 밤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단련에 매진하고 있는 소수의 학생들이 있다.

"하하하! 좋구나, 좋아! 지치지 않고 임하는 단련이야말로 강함의 원천! 아주 훌륭한 끈기다 벨!"

"아, 아파요! 진짜 이러다 멍들어요! 멍든다니까요! 그리고 목소리 좀 제발 줄이세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예요!"

3반의 학생인 레온과 벨도 그중 일부였는데, 벨은 레온의 솥뚜껑 같은 손에 몰매를 당하고 있었다.

레온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웃어 대기 바쁘다.

피로에 지친 벨의 눈매에서 글썽글썽 눈물이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불쌍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는 이런 늦은 시간까지 몸을 혹사하고 싶지 않은데, 왜 매번 저를 방에서 끄집어내서는 강제로 훈련을 시키시는 건데요! 제발 저 좀 방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벨은 진정성을 가득 담아 오열하듯 말했다.

하지만, 이는 레온에게 닿지 못한다.

"벨! 네 진심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네가 쑥스러워하기 때문이지! 그 쑥스러움조차 단련으로 극복해 보자꾸나!"

"아, 진짜…! 누가 이 사람 좀 말려 줘!"

"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어 대던 레온은 시야 한편에 보이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최근 연무장에 가장 일찍 도착해 가장 늦게 나가는 인물이었다.

?탁!

그는 조금의 휴식도 없이 검을 움직인다.

기계가 된 것처럼 오러를 두른 검으로 허수아비를 노린다.

?탁!

"흠…."

레온은 그 남자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훈련에 미쳐 사는 레온이었지만, 그는 정도가 지나치다. 몸을 혹사시키며 치유 마법으로 그 명맥을 이어 나가려 든다.

?탁!

지나치게 약해서 꺼질 듯한 오러의 빛이 허수아비와 부딪힌다.

벨은 레온이 다른 대상에 관심을 돌렸다는 걸 알아차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고개를 따른다.

허수아비와 씨름을 하고 있는 인물은 1반의 학생인 토이렌 트로아 핀이다.

"음!"

레온은 고민을 마쳤다.

"…이번엔 또 뭐 하시려고요?"

클래스전을 통해서 레온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벨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레온은 호방하게 대답한다.

"벨! 합동 훈련이다."

"아, 진짜 고막 터질 거 같네. …네? 잠시만요. 갑자기 합동 훈련이라뇨 그게 무슨…."

"너와 자웅을 겨룰 상대를 찾았다!"

레온은 성큼성큼 핀을 향해 걸어간다.

뭔가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을 감지한 벨은 그를 막으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정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아무리 잡고 막아도 돌진하겠지.

"하아… 제발 좀 자게 내버려 둬 주세요."

벨은 탄식의 한숨을 뱉으면서도 레온의 뒤를 따른다.

68화

구슬 탑 쌓기 단련과 연구회 활동을 이어 가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여드레가 흘렀다.

과제 시즌이 종료되고 기말고사까지는 다소 기간이 남아, 재학생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기간이다.

이때의 학생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용사에 뜻이 없는 벌레들은 더욱 무의미한 시간을 낭비하는 데 몰입하고, 조금이라도 개념이 있는 놈들은 자기 발전이나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분야를 접한다.

그렇게 서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와중, 과제 결과 발표는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온다.

"알리시아, 성적 잘 나왔어?"

"감사하게도 좋게 평가해 주셨어요."

불쑥 다가온 에밀리. 성적이 꽤 괜찮았는지 기분이 자못 좋아 보인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성적표를 보여 줬다. 7과목 모두 만점. 평균치로 환산되어 지급되는 카티아는 최고치인 10이라고 적혀 있다.

에밀리는 혀를 내둘렀지만, 알리시아라면 마땅히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

세레나는 성적표를 보이는 것으로 언어로서의 기능을 대신했다. 그녀는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최고점이었다.

"오… 오. 다들 높구나…?"

에밀리는 약간 움츠러든 기세로 은근슬쩍 핀을 바라본다. 핀이라면 왠지 자신과 비슷한 성적을 받았으리라 본 모양이다.

그러나, 핀은 그녀의 예상을 가볍게 깨부쉈다.

"뭐, 뭐야… 핀…! 너만은… 너만은 믿었는데!"

"어? 나 A+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대부분이 A에서 B+이잖아! 8카티아나 받게 되잖아…!"

"그럼 내가 몇 점을 받았어야 만족하는 거야…."

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고, 그녀의 물음을 그대로 되돌려 준다.

같은 조원들의 점수를 알게 된 에밀리는 자기 성적을 밝히는 데 저항감이 있었지만, 모두의 성적을 물어본 당사자였기에 성적을 보였다.

한 과목에서 A를 받았으며 나머지는 전부 B+이다.

지급되는 카티아는 7.

나름 평균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순전한 개인 실력이 아니라,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과제니까 그녀나 핀의 성적이 높게 나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너는?"

에밀리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물었다.

당연히 답이 예상되지만, 최근에 유물로 제약이 걸려 있으니 어쩌면… 하는 눈으로 보고 있다.

하.

헛웃음이 나온다.

"항상 어중간한 것들이 가장 요란스럽게 행동하는 법이지."

"…나는 내 성적이 꽤 잘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내 성적은 당연히 모두 A+로 최고점이었고 받는 카티아 역시 최대치였다.

원래는 남들에게 밝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너무 당연한 거니까. 자랑할 거리조차 되지 못하니까.

뭐, 어찌 되었건 이것으로 내 보유 카티아는 이제 70이 되었다. 여전한 학년 1위.

6월은 등급전이 허락되지 않으니.

1학기에서 카티아를 받을 수 있는 수단은 5월의 등급전과 기말고사만을 남겨 두고 있다. 갑자기 미끄러지지 않는 이상은 약간의 변동만을 겪은 채 1위가 유지될 예정이다.

카티아의 점수도 점수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내가 노리는 건 점수 자체가 아니다.

학년 1위로 1학년을 마쳐야지 나중에 보상받을 수 있다.

오직 아카데미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아주 가치 높은 물건으로 내가 만들고자 하는 '무기'를 만들 재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절대 놓칠 수 없다.

…다만, 내 실력이 아카데미아에 정평이 나 있다 보니, 비슷한 등수라고 해도 등급전을 치르는 게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긴 하다.

서로의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결투이기에 한쪽에서 거절의 의사를 보이면 통과되지 않는데, 굳이 어려운 상대와 싸우려는 별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없다 싶으면 가문을 이용하거나 서로 이득을 볼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일이 필요하다.

돈이라면 충분히 있으니까. 정 안되면 다른 수단을 찾으면 되고.

"그럼, 바르간 님.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핀은 고개를 숙이더니 곧 급한 사람처럼, 거의 뛰다시피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최근에는 아예 거기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

에밀리는 핀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그는 이미 떠나고 없지만, 그녀는 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 핀 진짜 열심히 훈련하더라. 수업 시간과 눈 떠 있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을 검을 휘두르는 데 쓰는 거 같던데."

에밀리도 몇 차례 연무장에서 훈련한 적이 있어서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핀은 조금의 낭비도 없이 모든 시간을 검에 쏟아붓고 있다.

"최근 '가지' 멤버들이랑 레온 일행이랑 함께 연무장에서 단련하잖아. 훈련 강도가 어마어마하던데 몸이 버틸지 참…."

"걱정되는 것이냐."

"그야 걱정되지. 딱 봐도 무리하고 있는 게 너무 잘 보이는데."

에밀리는 핀의 몸이 망가져 버릴 것을 염려하고 있다.

살인적인 일정.

마력이 있고, 용사가 되기 위해 단련된 신체를 일반인의 관점으로 보면 안 되긴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핀의 몸은 확실히 부담을 쌓아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한들, 녀석의 수련 강도를 덜 순 없다."

"알아… 핀도 원해서 하는 거니까."

원작에서의 핀은 지금과 성격이 다르지 않다.

알리시아 같은 트라우마가 있어 성장을 방해받았던 것도 아니고, 에밀리처럼 특이 분야로 발전할 가능성의 아주 작은 실마리조차 있지 않았다.

항상 밝은 면모를 남들에게 보이며 뒤에서는 꾸준히 노력해 온 그.

남들이 한 걸음 걸을 때, 다섯 걸음씩 발을 뻗으며 따라붙으려 했던 남자.

그럼에도 끝까지 따라잡지 못하고, 조금의 희망도 보지 못한 채 주검이 되어 버린 핀.

나는 '무리한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핀에게는 필요한 단어이다. 그에게 있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자, 최후의 수단.

자신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욱 온 힘을 쏟는 것이고.

"나도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겠지…."

에밀리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여리게 진동하는 눈동자로 핀이 나간 문을 바라보는 그녀. 나는 감상에 젖은 듯이 분위기를 잡은 에밀리와 조원들에게 말했다.

"핀도 핀이지만, 더 중요한 사항이 있다."

가만히 서 있던 알리시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린다.

"알리시아, 당분간 너와 세레나를 중심으로 아르볼 프루탈의 활동을 이어 나가라. 해야 할 과업과 스케줄은 다 짜 두었으니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공표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한데… 다른 바쁜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있지. 아주 바쁜 일이.

헤일리온의 유물을 착용한 지 10일째. 남은 유효기간은 20일.

한 달, 정확히 표현해 30일 동안 지속되는 이 유물의 남은 기간 동안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 20일 동안 폐관 수련에 들어갈 것이다."

"아 폐관 수련을… 예? 도련님…?!"

그리 놀랄 것 없는데. 폐관 수련이라고 해도 기숙사에 박혀서 약 3주간의 수행을 하는 거뿐이니까.

"그, 그럼 수업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짼다."

"아…."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이해시키려 들며 당황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는 알리시아.

하지만 나라고 아무런 대책 없이 말한 게 아니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반항기의 청소년도 아니고, 계획과 목적이 존재한다.

"남은 날짜를 계산해 봤을 때 내일부터 3주간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성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수업 진도 따위는 안중에 들 필요도 없는 자잘한 것이니."

"잠깐, 잠깐! 그럼 목대의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가지랑 줄기야 그렇다 쳐도 목대는 우리가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

에밀리도 제법 연구회 회원으로서의 반듯한 마음가짐이 생긴 듯하다. 처음에는 튈 마음으로 가득하더니, 이젠 이렇게 달라졌다.

…여전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긴 하지만.

"그들은 네가 고려할 범위가 아니다. 간단한 지시만 내려 두면 어련히 활동할 텐데 무엇을 걱정하는 거냐."

엘리트 그룹이 괜히 엘리트 그룹이 아니다.

본 활동에서도 그들에게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술식이나 기술을 갈고닦고 연구하는 쪽이라 내가 필수 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파 사항이 있다."

"뭔데 또?"

이것도 꽤 중요한 사항이지.

아르볼 프루탈의 모두가 해당하는 일이니.

"다음 달 첫째 날, 승급식을 열겠다."

그러니까, 6월 1일.

아르볼 프루탈의 멤버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확인하여, 그 수준이 해당 그룹을 넘어선다고 판단되는 인물을 승급시켜 소속을 바꾼다.

"또한 승급에 성공한 이들에게는 10골드를 수여할 터이니 일러두도록."

"돈도 주는 거야?! 일이 좀 커지는 거 같은데."

사람 본성이라는 게 누군가의 위에 있고 그걸 상징화하여 증명받게 된다면 만족감과 우월감을 얻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콧대 높은 고위 귀족들이나, 이들 위에 서 보고자 하는 평민들은 달려들 터이다.

그럼에도 상금을 거는 건 보조적인 원동력을 올리기 위함이다. 돈이 목적이라 달려드는 이도 있을 터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물질적으로 무언가가 떨어져야 보다 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의 미래에 투자하는 거다.

당연, 나는 내가 얻은 인재들을 쉽게 놓아줄 생각도 없고 말이다.

"잘 알아들었나?"

"도련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르볼 프루탈의 시동은 이제 막 걸리기 시작했다.

***

"…해서, 당분간 목대의 활동은 적어 둔 사항대로 활동하면 됩니다. 또한 목대는 이번 첫 번째 승급식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아 두십시오."

목대 인원들만 불러 따로 마련한 자리.

3주간 바르간이 수련에 몰입하느라 연구회에 모습을 비치지 못할 거라고 알리자, 각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네, 그럼 3주가 지나고 각자 발전된 기량을 보일 수 있겠네요."

밴틀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다시 만나는 때가 기대된다는 말을 남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네가 없으면 연구회 활동이 심심할 거 아니야, 바르야!"

알렉세리아는 되지도 않는 앙탈이 섞인 목소리로 불만을 표한다.

저 '바르'라는 건 설마 나를 말하는 건가. 이걸 진짜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일이 모두 끝나게 되면 파울라와 같이 땅에 묻어야 하나.

바르간은 그녀의 비음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알겠다. 연구회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끔 눈여겨보도록 하지."

브락키움은 선배답게 점잖은 면모를 보이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는 알리시아 일행과 함께 바르간의 빈자리를 메꿔 주는 역할이다.

"...."

유일하게 조용한 이는 프란체스카였다.

'곤란하게 됐다….'

겉으로는 조금의 티도 나지 않지만, 그녀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바르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접근한 연구회.

그를 살피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연구회를 나올 생각이었는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연구회에 들어가고 나서 1달이 지나지 않으면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탈퇴하는 게 가능하다.

연구회의 멤버들의 원성을 사는 일이나 그녀는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타인의 평가보다는 그녀가 하려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물론, 1달이 지나고 나서도 본인의 의지만으로 탈퇴할 수 없는 건 아니나, 다소 과정이 복잡해지고 시간이 걸린다.

특히, 이번같이 처음 들어갈 때부터 장기로 활동하겠다는 계약을 맺은 경우는 더욱.

게다가, 그가 종적을 감추게 되면 그만큼 그녀가 하려는 일의 진척이 늦어지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서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다.

'차라리 지금 나가는 게 현명할까. 하지만… 그가 보여 준 능력을 이대로 놓치기에는….'

온갖 천재들인 모이는 아카데미아에서, 교수를 포함하고도 저주와 사역마 분야에서 바르간 정도의 재능을 가진 인물은 없다. 정확하게 그녀가 필요한 마법의 분야임으로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프란체스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3주가 지나면 다시 연구회로 돌아오는 건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

"이것 봐!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서운해하잖아. 그냥 폐관 수련 같은 건 안 하면 안 돼?"

알렉세리아로 인해 다시금 시끄러워진다. 그 소란 속에서 프란체스카는 생각한다.

어차피 그가 없었다면 혼자서 진행했을 연구다. 우선 지금까지 해 왔듯 이어 가도록 하자.

마음을 침착하게 다잡은 그녀.

하지만, 책상 아래에 놓여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무언가에 쫓기듯 톡톡톡? 두드리며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69화

20일간의 짧은 폐관 수련이 시작되었다.

담당 교수인 루이사에게도 미리 통보해 두었으니 방해꾼이 찾아올 염려도 없다.

아카데미아에서 이렇듯 독방에서 단련을 이어 가느라 수업을 듣지 않는 케이스도 있었는데, 나처럼 통보하고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아카데미아의 규정을 지나치게 넘지 않으면 눈감아 주는 그녀였기에, 이번 나의 결정은 제지당하지 않았다.

다만,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관계자를 통해서 상태를 확인받으라고 했는데, 이는 협의를 통해 알리시아로 대체했다.

폐관 수련 동안은 알리시아의 검사도 진행하지 않고, 외부와의 접촉을 대부분 차단한다.

하루에 한 번, 알리시아가 식사를 들고 오며 나의 상태를 살피는 게 전부다. 알리시아가 들어오더라도 말을 걸지 않도록 언질을 줘 두었으니 살며시 놓고 가는 게 전부.

당분간은 누군가와 대화하며 낭비할 필요도 없다.

그야말로 수련하기에 최적의 환경.

앞으로 많지 않은 소중한 시간이다.

"그럼… 다시 구슬 탑을 만들어야겠군."

마나 총량을 늘리는 단련은 여러 선택지가 있으나, 구슬 탑이 현 상태에서 마나 총량을 가장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이었기에 다시 마나를 모으고, 구체로 형태화하며 크기를 줄인다.

최근 달성한 수준은 지름 1m의 마나를 5cm로 줄여 7층까지 쌓는 게 가능했으니 우선 층을 더 높여야 한다.

최소한 10층은 되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효율적이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더욱 특별한 방법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

앞을 바라본다.

내 눈앞에 바르간을 빼다 박은 듯한 어린 남자아이가 하나 있다.

그건 10세의 바르간.

정확히 말해, 바르간이 10살의 나이에 가지고 있던 마력이다.

헤일리온의 과제를 받기 전, 당시 가지고 있던 마나를 모두 담아내도록 만든 분신. 그게 이 리틀 바르간이다.

바르간의 사역마 중 오로지 마나를 저장하기 위한, 마나 공급용 사역마.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 투명한 이 아이는 계약자밖에 인지하지 못한다. 가끔 정령이나 특이 개체는 인식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론 그렇다.

원작에서는 안 그래도 마나가 많은 바르간이 이 사역마를 통해 추가 공급을 받으니 방대한 술식의 활용이 더욱 용이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아이를 마나 공급용 배터리가 아니라, 단련의 진척을 비교하며, 치열하게 경쟁할 상대로 정했다.

다른 사역마처럼 상호작용이 원활하지도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공급해 준 마나만을 저장하는 아이이지만, 그런 만큼 '마나'와 관련된 면에서는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지이잉?.

10세의 바르간의 손에 푸른빛이 모이며 세기를 더한다. 농도가 높아지면서 마력 입자 간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구체는 금방 작은 구슬이 되어 손에서 잡혔다.

이 사역마, '공급이'를 통해서 다른 마법을 발현시키는 건 불가능하지만, 순수한 마나를 다루게 할 순 있다.

지금 공급이가 활성화하고 있는 마나는 10세의 바르간의 경지.

최대치는 2주 전의 내 마력이며 그 세기의 조절이 가능하다. 게다가 공급이는 유물로 봉인되어 있지 않은 상황.

즉, 힘이 제한된 나는 지금까지 바르간이 성장해 온 마나의 기록을 상대하며 단련할 수 있다.

만드는 탑의 높이나 구슬의 지름으로 발전을 확인을 할 수 있으나, 더욱더 직관적이며 효과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없으니 더 좋구나."

10세의 바르간이 묵묵히 마력탑을 쌓아 가기 시작하자 나도 행동으로 옮겼다. 공급이는 마나 이외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숙식이 필요 없어 이보다 나은 경쟁 상대가 없다.

'이 불쾌한 감각도 익숙해졌군.'

마력을 제한하는 유물에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유쾌하지 않은 감각과 제한에도 자연스럽게 구슬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다.

당연히, 더욱 높은 완성도를 인지하고 경험해 봤기에 만족스럽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경지를 알기에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된다.

게임으로 따지면, 아무것도 없던 현실에서 경험치 바와 레벨이 보이는 느낌. 성취감을 받아들인다.

또다시 구슬을 만든다.

그리고 쌓아 올린다.

마력 회로가 달궈지며 체력과 정신력이 닳아 갈수록 성취는 높아져 간다.

20일이다.

고작 20일.

현실적으로 계산했을 때, 단련이 끝났을 때 나를 상대하고 있을 공급이의 나이는 대략 13.

유물로 제한하는 마력이 워낙 커, 사실은 13살의 바르간과 제대로 비교하지 못하고 그 전에 끝날 확률도 낮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비관적인 말이 아니라 긍정적인 뜻이다.

어린 시절 바르간의 3년. 남은 20일 안에 이 시간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마나에만 관련된 성취라고 해도 기적과 같은 일.

그러기에 하루도, 1시간도, 1분조차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서할 수 없다.

잠을 잔다는 건 사치다.

모든 시간을 투자하자.

....

그렇게

차곡차곡.

공든 탑이 쌓여 간다.

***

멀어져 있는 정신의 저편에서 어떤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계속 선명해지며 결국에는 다른 여인을 깨운다.

"알리시아… 알리시아!"

"…네, 네?!"

화들짝 놀라 눈을 깜빡이는 알리시아. 그녀를 깨운 건 동료인 에밀리였다. 알리시아의 눈앞에서 손 흔들기를 반복하던 에밀리는 그녀가 대답하자 동작을 멈췄다.

"이제야 겨우 대답했네. 되게 오랫동안 멍 때리고 있었던 거 알아?"

"아… 제가 그랬나요?"

"응응,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장난 아니었어. 맞지 에밀리?"

둘의 대화에 프리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여우 귀가 쫑긋거리며 반응한다.

에밀리는 그녀의 말을 긍정하며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걱정하는 사람의 눈이다.

"괜찮아? 상태가 안 좋으면 오늘은 들어가서 쉬는 게 낫지 않겠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에밀리 씨. 하지만 괜찮아요.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잠깐 식곤증이 왔나 봐요."

알리시아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자신을 걱정하는 에밀리의 염려를 덜어주려 했다.

그런 알리시아를 보던 프리다는 턱 끝을 잡고 잠시 생각했다. 성실하고 착실한 알리시아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다가 정신을 놓았다. 사유가 있을 터. 지금 이곳에서 달라진 게 뭐가 있지?

?바르간 님의 부재.

'아하. 그렇구나.'

프리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왜, 왜 그러세요. 프리다 씨?"

"아니야, 아무것도. 아직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라서, 강력한 경쟁자인 알리시아의 등을 밀어주는 일은 할 수 없지."

바르간 님의 여자가 되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이득이지만, 세 번째 여자보다는 두 번째가, 두 번째 여자보다는 본처가 나은 것도 사실.

프리다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기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차례의 대화가 끝나 갈 무렵 연구실의 문이 열린다.

"아, 에리카 님."

알리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고.

'와… 얘가 여기서 들어오네.'

프리다는 속으로 감탄했다.

학생회의 불시점검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학생회의 사람이 찾아와 활동을 지켜보거나 보고서를 살핀다.

오늘 아르볼 프루탈의 담당은 에리카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확인한 에리카는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는다.

"슈겐하르츠는?"

"도련님께서는 오늘부터 20일간 폐관 수련에 들어가셔서 당분간 밖으로 나오지 않으실 예정이에요. …못 들으신 건가요?"

"폐관 수련?"

알리시아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에리카는 폐관 수련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다.

잠시 고개를 돌려 얼굴의 근육을 가볍게 푼 프리다는 세상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네요. 약혼녀이신 에리카 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니. 저희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거든요."

에리카의 날카로운 눈이 프리다와 마주한다.

"…너, 이름은?"

분명히 똘망진 눈으로 악의가 없다는 걸 보이는 프리다였지만, 디피엘리아나 알리시아와는 다르다. 에리카는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저는 프리다라고 해요. 바르간 님의 연구회인 아르볼 프루탈 간부 중 한 명이죠."

"아, 그래…? 네가 프리다였구나."

프리다의 이름을 들은 에리카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진다. 클래스전에서 디피엘리아의 반을 배반하고 바르간에게 붙었던 그녀.

에리카의 입장에서 프리다는, 클래스전이 패배로 나아가는 데 일조하고 디피엘리아와의 사이를 서먹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클래스전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따로 프리다의 정체를 물색하지는 않았지만, 워낙 소문이 활발하게 돌아다니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당분간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다.

에리카를 마주하다, 휙?하고 고개를 돌린 프리다는 두 손으로 찻잔을 잡으며 차를 마셨다. 복슬복슬한 꼬리가 살짝 살랑인다.

"...."

에리카는 평소보다 거칠게 아르볼 프루탈의 보고서를 집어 들더니 적당히 거리가 벌어진 자리에 앉았다.

한편, 저번에 데인 경험이 있는 에밀리는 큰 소음이 나지 않을 정도로, 주섬주섬 교과서를 가방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은 망설임 없이 이어진다.

"이, 이제야 생각났는데. 리암과 약속이 있었다는 걸 깜박했지 뭐야? 하, 하하. 나… 먼저 좀 갈게?"

에밀리는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려 들었고.

"그러셨군요? 늦진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밀리 씨."

"으, 응… 내일 보자 알리시아."

순진한 알리시아의 반응은 그녀가 자연스럽게 갈 수 있도록 졸지에 돕는 꼴이 되었다. 에밀리는 모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에밀리의 빈자리를 채우듯,

한동안의 정적 속에서 세 사람은 모두 각자의 일에 몰두했다. 서로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니 침묵이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첫 마디가 오가기 시작한 건 1시간 정도가 지나서였다. 아르볼 프루탈의 모든 기록을 살핀 에리카가 알리시아의 발전 속도를 보고 다시금 신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슈겐하르츠가 데려왔다고 했지?"

교과서를 정독하던 알리시아가 토끼 같은 눈으로 에리카를 보게 됐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에리카는 설명을 덧붙인다.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너를 슈겐하르츠가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끌고 온 거라며."

"그렇게 험하게 하시진… 으음. 시골에 있던 저를 데리고 오신 건 맞아요."

"처음부터 너의 재능을 알고 데려온 거야? 아니면, 거기까지는 모르나?"

"아, 그게…."

에리카는 그녀의 표정에서 다소 꺼려진다는 기색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슈겐하르츠의 전속 시종이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조심스러울 만하다.

"말하기 그러면 안 해도 돼."

확고한 목적과 이득 없이 그녀를 곤란한 입장으로 몰아넣는 건 맞지 않는다. 정말 알고 싶다면 나중에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아뇨, 꺼려지는 게 아니라 저도 잘 몰라서 말씀드릴 수 없어서 곤란했던 거예요. 바르간 도련님께서 어떻게 저를 알고 직접 행차하셨는지는 들은 바가 없거든요."

"그래?"

"네… 하지만 제가 겪었던 일들이라면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고, 특히나 에리카 님이라면 알려 드려도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 자신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에리카는 가만히 알리시아의 이어지는 말을 듣기로 했다.

알리시아는 간단하게 자신이 아카데미아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돌연 찾아와 그녀를 사들이고, 마차에서 자신도 모르던 재능이 있음을 이야기해 주었으며, 여러 훈련을 통해 이곳에 올 수 있었다고.

프리다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유심히 그녀의 대화를 엿들었고, 에리카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생각이 많아지는지 눈매를 좁혔다.

"흐음…."

이 정도의 재능을 가진 천재다. 마법이나 무술에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른 사람이나 교회의 사람이라면, 그녀를 살피는 것으로 재능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점은, 알리시아가 별도로 교회를 다닌 게 아니었고, 용사 비슷한 어떤 사람과도 접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정보가 소리 소문도 없이 멀리 떨어져 있던 바르간의 귀에만 들어가는 게 가능한 일일까.

에리카가 고민에 잠겨 있자 알리시아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예전에 한 번 여쭈어본 적이 있어요. 저도 에리카 님과 똑같이 궁금증을 품었었고 도련님께 양해를 구해서라도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그랬더니?"

"다 아는 방법이 있다고만 이야기하시고 자세한 과정은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슈겐하르츠는 그 과정을 숨기고 있는 건가?

작은 의심의 꽃봉오리가 올라온다.

"그냥 예뻐서 그런 거 아니야?"

불현듯 프리다가 입을 열었다. 보고 있던 서적을 접고서는 알리시아를 발끝부터 훑으면서 올라오더니 마지막에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마을에 소문이 나지 않았던 게 이상한 일이지. 분명 들러붙는 남자들도 엄청 많았을 거고. 옆 마을, 옆옆 마을 너머까지 퍼져 나갔을 거라고 봐. 알리시아의 재능이 공표화되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이쪽이 현실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프리다는 에리카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렇지 않나요?"

"...."

여전히 어딘가 불쾌함이 감도는 눈이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도 나름의 타당성은 갖춘 듯이 보였다. 에리카가 생각하지 못한 방면의 사고이다.

"그, 그런…! 아니에요! 저는 그냥 흔한?."

"?그만둬 알리시아. 그 이상 말하면 기만이니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런 외모를 가지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범죄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수준이야 넌."

거친 할렘가에서 남들을 피하고 속이며 살아온 그녀였기에, 외모가 반반한 이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프리다는 실제로 그런 종류의 위기 상황을 여러 차례 맞이한 적이 있었고, 강인한 정신력과 생존력으로 무장한 채 극복해 왔다.

"바르간 님은 여자보다는 수련이나 권력에 관심이 있는 걸로 보이지만 그래도 남자잖아요. 예쁜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바르간 님의 외모, 권력, 재산, 능력이라면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인에 대한 소문을 종합해서 방 안을 가득 채워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참고로, 자신이라면 그랬을 거라는 언급도 함께.

"꽤 맹랑한 애구나 너."

"아! 불쾌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요."

프리다는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숙인다. 입으로는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눈꼬리와 함께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게 만들어 죄를 지은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하."

에리카는 짧게 헛웃음을 뱉었고. 탁? 하고 보고서를 덮었다.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알리시아, 이야기해 줘서 고마웠어."

"아, 아아… 아니요. 별말씀을요."

알리시아도 둘의 알 수 없는 신경전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굳은 몸동작으로 그녀가 건네는 보고서를 받았다.

보고서를 건넨 에리카는 몸을 돌리면서 프리다를 흘기는 눈으로 봤고, 프리다는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드르륵?.

에리카의 모습이 사라지고 알리시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프, 프리다 씨! 대체 왜 그러셨던 거예요!"

"그냥 뭐… 첩도 되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질투 같은 거지. 그보다, 나 막상 별말은 안 했어. 거짓말도 하지 않았고."

"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의 분위기라는 게…!"

알리시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던 프리다는 그만 풉? 웃어 보였다.

"알리시아. 난 네가 참 좋아."

대화의 맥락과 맞지 않게, 프리다는 알리시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외모, 성격, 말투 모든 게 이상적이고 완벽하다고 말이다.

"어느 정도로 좋아하냐면, 남한테 조언을 해 주지 않는 내가 너에게만은 특별히 해 주고 싶을 정도로."

툭툭. 가볍게 알리시아의 어깨를 건든다.

그녀의 장난기와 진중함이 섞인 목소리가 울린다.

"너무 숨기지 마."

"예…?"

"그러다 정말로 놓친다."

프리다 또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구실을 나갔다.

알리시아는 혼자서 넓은 연구실의 정적을 가만히 듣게 되었다.

"...."

프리다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천천히 곱씹는다.

70화

구슬탑 훈련에서 최초의 지름과 압축시킨 지름의 차이가 작을수록 난이도가 높다. 압축시킨 구슬의 밀도가 낮으면 안정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폐관 수련 첫날.

10세의 바르간은 구슬의 최초 지름을 1m, 압축시킨 지름이 5cm. 탑의 층수를 10층까지 세울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물로 줄어든 나의 마나 출력과 정밀도보다도 뛰어났다.

그와 내가 만드는 최초의 지름과 압축시킨 지름이 동일하나, 나는 7층까지만 가능한 상황.

녀석은 매번 나보다도 빠르게 작업을 완료했으며 그 완성도가 더욱 뛰어났다.

그렇다고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조금의 흐트러짐이라도 생기거나 집중도를 떨어뜨리게 된다면 쌓아 가던 탑은 무너지고 구슬의 원형은 유지되지 못한다.

"...."

지금만 해도 그렇다.

10세의 바르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공급이는 10층짜리 구슬 탑을 세우고 난 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에 어떠한 감정은 들어 있지 않았으나 썩 유쾌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렇게 8층에 도전하던 내 탑이 무너지게 된다.

"다시."

허탈해 있을 시간도 아깝다.

내 명령이 떨어지자 공급이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력을 구슬을 전부 입안에 털어 넣었다. 공급이의 마력은 모두 내가 부여한 것. 마력을 소모하게 되면 그 힘이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순수한 마력으로 만든 구슬은 대부분이 본래 공급이의 몸 안으로 돌아가 에너지를 발생하는 근원이 된다.

그런 녀석에게 내가 만든 탑마저 건네주었다.

녀석은 아무런 말 없이 받아 들고는 이 역시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아무리 수준이 높다고 해도 마력 구슬을 생성할 때 발생할 손실을 메꿔 주기 위해서다.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력은 더욱 떨어져 가나 공급이는 아무런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단련을 이어 갔고.

역시 공급이는 나보다 먼저 안정적인 탑을 완성했다.

***

폐관 수련 3일 차.

아직도 내 눈앞에서는 다른 녀석들이 아닌, 10세의 바르간이 탑을 쌓고 있다. 공급이는 지치지 않고 탑을 쌓아 나간다. 아니, 지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체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알리시아가 하루에 한 번 내 상태를 확인할 겸, 식사를 가져오지만 지금까지 하루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먹으면서 쌓아 올릴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최소한 10세의 바르간을 뛰어넘기 전까지는 식음을 전폐하고 전념할 생각이다.

또다시 공급이의 탑이 10층에 이르렀다.

나는 현재 8층을 다 쌓고 9층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

3일간 조금의 휴식도 없이 몰입한 결과가 구슬 탑 층 하나를 더 올리는 정도라… 새삼스레 재능이 얼마나 값지고 찬란한 것인지를 체감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범재 정도의 수준이니까.

1차적인 달성 조건은 초기 지름 1m, 압축 지름 5cm짜리 10층.

10층이다.

10층은 이 녀석보다 완벽하게 되어야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더 작은 최초의 지름으로 도전할 수 있다.

자신과의 대결이건만 묘하게 긴장감과 투쟁심이 발동한다. 동시에 웃음이 그 흐름을 타고 새어 나왔다. 눈앞에 목표물이 바로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기뻐하기에 마땅한 일인가.

성과를 바로바로 알 수 있다는 건 수련을 떠나서 하나의 작은 행복이었다.

지이잉?.

마력 회로에서 마나를 더욱 끄집어 올리며 몰아붙인다. 옆에서는 10세의 바르간의 무감정한 눈이 향하고 있다.

분명 아무런 사고도, 상념도 담기지 않는 시선이건만 은근히 신경 쓰이며 속이 끓는다.

천재를 상대하는 범재란 애달플지언정 멈춰 설 틈이 없다.

…그래, 인정하겠다. 이 유치하며 부글거리는 감정은 경쟁심이다. 내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저 녀석을 넘고 말겠다.

***

폐관 수련 7일 차.

드디어 오랜만에 음식을 입에 댈 수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빵이나 고기가 아니라 물을 허겁지겁 들이켜기 시작했다.

귀족의 품위를 잠시 잊고 그 생명수가 목을 적시는 쾌감을 만끽했다. 살면서 이것보다 맛있는 물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맛이 뛰어났다.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며 마나의 정제만으로 버텨 왔으니 갈증과 공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것도 슬슬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회복된 기운으로 체내의 마력을 재정립하자 다시금 여유가 생겼다.

폐관 수련을 마치기 전까지는 예정대로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사실, 물 정도는 단련 도중에 마셔도 괜찮았겠지만 이를 하지 않은 까닭은 나를 더욱 고취하기 위한 다짐 같은 거였다.

일상적인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달성 조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정도도 하지 못했으면서 다른 일을 하려는 나 자신을 탓하며 방지하기 위한 방책.

빙의가 되기 전에도 종종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언가에 몰입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이 훨씬 낫지.

꿈틀꿈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10세의 바르간의 형태가 헝클어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완성된 공급이는 11세의 바르간의 모습을 보였다. 팔다리는 그사이에 부쩍 길어졌으며 놀랍게도 이 어린 나이에 턱선과 같은 몸의 선이 날렵하게 살아 있었다. 어린 녀석이 제법이다.

"바로 시작한다."

식사를 채 2분이 되지 않게 급하게 마치고 다시 훈련을 이어 나간다. 이미 최초의 지름 1m, 압축 지름 5cm로 10층까지는 완벽히 숙달되었다.

이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

나는 최초의 지름을 1m가 아닌, 75cm로 잡아 이를 5cm로 압축시켰다.

압축된 크기가 같은데 최초의 부피가 작아지면, 완성된 마력 구슬의 밀도가 떨어져 형태를 유지하는 게 더 어렵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11세의 바르간은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공장에서 뽑아내듯 아무렇지 않게 구슬을 만들어 댄다. 금세 10층을 세워 내보이는 녀석.

이내 최초의 지름을 50cm로 하여 압축시킨 뒤 탑을 쌓기 시작한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냐."

의지랄 것도 없겠지만, 나는 확실히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꼈고, 만들고 있던 마력 구슬을 부숴 버렸다.

1m에서 50cm. 갑자기 두 배가 된 난도.

그러나, 과거의 바르간이 했던 일이다.

아무리 제한이 있다고 한들 지금의 나라고 못 할쏘냐.

나는 직경 50cm짜리 마력구를 압축하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어린애 같은 걸 알면서도 천진난만하기에 더욱더 효과적이었다.

***

폐관 수련 13일 차.

11세의 바르간, 이 녀석은 미쳤다.

고작 10세에서 11살. 1년이 더 흐른 것에 지나지 않는데 발전한 정도가 지나치다.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알리시아 정도는 아니나 바로 그 아래 등급 정도는 된다.

나를 끌어올려 주던 경쟁심이라는 녀석도 불타올라 재가 되고 있는지 이젠 패배감이라는 치욕스러운 감정마저 그 공간을 채우려 한다.

녀석의 최초 지름 50cm, 압축 지름 5cm의 탑은 10층.

반면 나는 아직 8층.

"쯧."

못마땅함에 혀를 찼다.

솔직히 지름 50cm로 갑자기 줄어든 것만으로도 제어하기가 난해했다. 11세의 바르간을 처음 상대할 때는 8층은커녕 3층도 간신히 세울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희망은 보였다.'

11세의 바르간. 이 녀석은 확실히 호적수였다.

13세까지의 바르간은 성실하게 단련을 이어 갈 때이니 그 성취가 1년 만에 급등한다고 하여도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이 정도로 따라온 게 신기한 일이지.

그러나, 8층을 쌓는 데 성공한 순간.

나는 비로소 감을 잡았다.

아무리 난도가 높은 작업이라고 해도 아무런 방해 없이 온종일 같은 일만 하다 보면 요령이라는 게 붙고, 그 궤를 꿰뚫을 방도가 보이게 된다.

출력이나 총량은 현저하게 떨어질지 몰라도, 세밀함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본래 천재들은 알지 못하는, 무심코 지나가 깨닫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디딘 것으로도 모자라 날아가고 있다.

"후우…."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지나칠 정도로 과열된 마나 회로를 냉각시키고, 머리를 총명하게 하도록 활기를 불어넣었다.

감을 잡았을 때 치고 나아가야 한다.

이제 새로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정확한 증거 따위는 없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희망이 몸을 움직인다.

***

그렇게 폐관 수련 20일 차. 마지막 날.

알리시아는 오랜만의 검사를 받기 위해 바르간의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곧, 바르간의 폐관 수련이 종료된다. 그 사실이 알리시아를 들뜨게 했다.

문 앞에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문고리를 잡아서 돌렸다. 노크는 하지 않는다. 그가 제지한 행동 중 하나이다.

문에서 나는 소음이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매우 조심스레 연다. 방 안은 최근에 항상 그랬듯 어둠으로 가득하….

"어?"

뜻밖의 모습에 알리시아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다. 방 안의 불이 켜져 있어 밝다. 주변도 모두 정리되어 있어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해 보인다.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주인이 앉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으로 향한다. 가까워질 때마다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알리시아의 몸에 울린다.

그리고.

"왔느냐, 알리시아."

정갈하고 반듯한 자세 속에서도 그가 뿜어내는 고유의 삐딱함이 서로 어울린다. 그 남자는 마침 자신에게 걸어 두었던 유물을 푸는 중이었다.

그의 손목에 팔찌가 독특한 소리를 내며 술식을 발동한다. 해제의 마법이었다. 이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고.

즈으응?!

잠금이 해제된다.

"…!!"

댐에 가득 차 있던 방대한 양의 물이 댐의 붕괴로 한꺼번에 뚫고 밀어 들어오는 감각. 갑작스러운 마나 출력의 재확립과 확장으로 인한 마나의 진동, 이에 따라 일어난 풍압.

바르간의 방 안 모든 물건이 그 충격을 받아 넘어지거나 흔들렸고, 책상에 쌓여 있던 양피지는 비둘기 무리처럼 방 안을 채우며 날아다닌다.

알리시아의 새하얀 머리칼도 바람의 영향을 받아 흩날렸다. 그녀는 푸른 눈으로 달라진 바르간의 형상을 눈에 담는다.

외관의 변화는 없다. 그는 항상 보이던 그 모습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내부의 변화가 겉으로 표출되어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바르간의 마력의 농도와 출력, 마나 총량은 급격하게 성장해 있었다.

마치, 처음 바르간이 사제급 알티프를 몰살하는 광경을 눈에 담았을 때. 인외의 존재를 목도하고 경외감에 소름이 돋았던 그때의 느낌.

알리시아는 그날과 같은 감정을 다시 한번 맛보게 되었다.

"오호… 나쁘지 않군."

바르간은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마력을 집중시켰다가 흩어 보였다.

빠르게 자기 몸의 변화를 살피며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았는지, 얼마 정도 성장했는지 등을 확인한다.

그러다가 보았다.

그 기쁨에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환호한다.

"그래, 그곳이었구나. 그곳이었어…!"

"도련님…?"

바르간의 눈에는 앞에 있는 알리시아나 주변의 사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외부가 아닌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모든 수맥이 만나 커질 대로 커진 드넓은 강.

바르간은 그 위에 서 있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세상에 빛을 하사하는 강렬한 태양의 빛과 이를 받아 반짝이는 강물의 표면. 시야를 멀리해 그 끝을 따라가려 드니 보였다.

드디어 보였다.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바다와 강의 경계.

강 너머로 이어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광대한 세상.

그 초입의 단계가 부쩍 가까워져 있음을 안다.

저 넓디넓은 세계는 분명.

「초월(超越)의 계위」

마나 총량을 초월의 경지까지 올릴 수 있다. 이제 이건 예상이 아니라, 확정이다. 이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달성하게 된다!

원작의 바르간이 끝내 달성하지 못한 마나의 경지.

아직 저주나 사역마 분야에서는 그의 전성기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마나만큼은 크게 앞질렀다.

마나 총량이 초월에 접어들게 되면 다른 분야를 끌어올리는 건 훨씬 수월해지게 될 터.

또한, 고유술식에 들어갈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아니… 아니다. 계획을 변경해야 한다. 초월을 눈앞에 두게 된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마나 총량만큼은 반드시 초월의 계위로 올리고 고유술식을 연구하는 게 이득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 보여도 결국에는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사실 고유술식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저주 마법이 해득(解得)에 올랐을 때부터 가능했다.

다만, 일정 이상의 마나 총량을 더욱 확대한 상태에서 들어가야 수월하고 효과적인 성과를 낼 수 있어 미뤄 두었던 것인데, 그 기간이 조금 더 길어지게 되었다.

아쉽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보다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 걸 아는데 무시하고 진행하는 덜떨어진 인간이 아니니까.

와인은 오래 숙성시킬수록 그 맛이 뛰어나다.

그가 만들어 낼 고유술식도 그렇다.

바르간의 입가에 길게 미소가 지어졌다.

뚜렷한 목적지의 발현과 가랑비처럼 몸을 적시는 전능감이 일었다.

다른 마법이라면 몰라도 마나가 초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 한 사람, 아카데미아의 총장 이외에는 없다.

지금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다가 된다면 얼마만큼이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

보고 싶다.

경험하고 싶다.

탐구하고 싶다.

기존 바르간에 숨어 있던 마법사에 대한 연구심, 그리고 본래의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이 맞물려 거대한 시너지를 발휘한다.

아직 발을 디디지 못한 경지에 대한 갈망에 목이 마르다!

"도련님."

청아한 목소리.

그 여린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알리시아는 일말의 더러움도 묻지 않은 깨끗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바르간을 치하하는 듯했다.

"정말로…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

바르간은 생각한다.

고생… 고생이라.

내가 고생을?

다시 말하면 무리를 했다는 건가. 내가?

웃기지도 않는군.

무리가 아니라 본래 정해 놓은 철저한 계획의 절차를 밟은 것에 불과하거늘. 이를 고생이라고 칭하다니.

…하나.

지금 그녀를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금은 솔직하게 달성의 성취감을 음미하도록 하자.

"…그래. 고맙구나."

정제된 감정을 담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바르간의 책상에는 단 한 개의 10층 구슬 탑이 세워져 있다. 구슬의 지름은 5cm. 이는 압축을 가하지 않은 순수한 마나였다.

동시에 이를 무뚝뚝하게 지켜보고 있던 14세의 바르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다.

71화

폐관 수련의 효과는 대단했다.

디피엘리아가 속한 5반의 마법사 가르샴. 그녀는 입학 당시 6위라는 높은 성적을 이루어 낸 원소 계열 특화 마법사이다.

정의심과 정이 많은 가르샴은 반의 지도자 격인 디피엘리아를 꽤 아끼어, 클래스전에서 무참히 꺾여 농락당한 디피엘리아의 모습을 언급하자 발끈하며 등급전을 받아들였다.

결과는 확연했다.

그녀와 똑같은 마법, 똑같은 원소로 대응하여 오로지 출력과 성능만으로 가볍게 쓰러트렸다. 사역마나 저주 마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내가 발전한 걸 눈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준비한 자리이니 정확히 그녀가 사용한 원소만 꺼낸 것이다.

귓등에서 분홍 꽃이 자라나는 가르샴은 다렉 연합국의 아인 중에서도 물과 흙의 원소에 대한 강한 적합성을 보인다.

해당 원소 마법은 그녀의 자존심이기도 했는데 내가 동일한 마법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니 얼이 나가 버렸다.

그녀의 10카티아는 얼과 함께 받아 갔다.

이제 80카티아. 1학기 기말고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카티아를 획득했다.

?또각또각.

"당연히 아르볼 프루탈의 모든 멤버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겠지? 그렇지 않다면 벌을 줄 것이다."

"인원들의 출석 확인을 했습니다. 도련님께서 연구회에 들어가시면 곧바로 승급식이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끝마쳐 두었습니다."

"그래야지."

현재 나와 알리시아는 복도를 걸으며 대련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예정했던 대로 승급식을 진행한다.

연구회에 들어오고 나서 그들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모두의 앞에서 선보이며, 다음 그룹으로 올라갈지 유지될지가 결정된다.

"알리시아, 너는 간부이긴 하나 마찬가지로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번 승급식에서는 하지 않겠지만, 다음번부터는 발전이 미진할 경우 그룹에서 강등시킬 것이다."

"예, 유의하겠습니다."

사람의 발전을 돕는 건 보상만이 아니다. 채찍도 필요하다. 다른 이들보다 유독 뒤떨어지는 발전을 보이면 가차 없이 강등시킨다. 기존 멤버인 뿌리라 하여도 이는 해당하는 사항이다.

나를 위해 싸워 줄 인재들을 키우는 연구회이지,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한 유치원이 아니니까. 이는 철저하게 진행한다.

그렇게 대련장의 앞에 도착하고.

동작의 끊김이 없이 커다란 문을 연다.

"자, 승급식을 시작하겠다."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거든, 제대로 본인의 능력을 끌어내라.

나는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

넓디넓은 대련장의 밖에서.

두 사람이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군요."

"네… 보고서는 착실히 내고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연구회이니 아카데미아의 정식 기관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총장님, 염려 차원에서 말씀드리지만 아르볼 프루탈은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회장이 입학식 날 보인 무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정신 이상자로 분명 이후에 아카데미아에 치명적인… 크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호호호, 페르기오 교수님은 학생회를 정말 아끼시는군요."

페르기오는 본인이 맡은 학생회를 다른 그 어떤 연구회보다 우선시하는 교수로, 아르볼 프루탈이 '신학생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할 때 강하게 비난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생회의 명성을 이용해서 아르볼 프루탈의 인지도를 확보한 바르간이 마음에 들 턱이 없었다.

"승급식이라고 했죠.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건가요. 페르기오 교수님."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페르기오는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펼쳤다. 바르간이 올린 승급식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어디 보자… 아르볼 프루탈에서 신입을 대거 받았을 때, 1차 심사에서 그들에 대한 입학 성적에 대한 정보, 2차 심사에서 면접을 통해 확인한 능력을 대략적인 등급으로 환산해서 기록해 두었다고 합니다."

"호오… 등급제로군요."

"연구회원들에 대한 성장을 주마다 적어 두어 이미 대략적인 수준은 파악하고 있는데, 이번 승급식에서는 기록에서는 확인하지 못한 또 다른 가능성을 점검하고 모든 회원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려는 명목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상태를 비교하여 등급을 재정립하는 자리…라고 적혀 있군요."

"참 성실한 학생입니다. 자기 할 일로 바쁠 텐데 말이죠."

페르기오는 입맛을 다셨다. 본인이 말했지만, 지적할 부분이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자 재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학생회장과 닮게 생긴 그는, 학생회장과는 다르게 기본적인 예의가 없었다.

아,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밖에 널린 빨래를 바라보듯 페르기오를 흘겨봤고 다시 승급식을 진행했다.

저런 점. 저런 점이 열받게 하는 녀석이다!

슈겐하르츠이면 전부인 줄 아는 놈. 용사에게 있어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거늘!

"...."

페르기오가 이를 갈고 있을 때, 총장은 천천히 연구회의 모두를 살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상상해 본다.

열정, 긴장감, 각오….

모두 젊고 생기가 있다.

여름에 자라나는 풀잎들처럼 반짝거리며 힘이 넘친다. 미래를 이끌어 나갈 아이들이다. 어여쁘고 어여뻐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주고 싶은 소중한 존재들.

"호호호…."

하지만, 이는 곧 씁쓸한 뒷맛을 가져왔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아이들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나아가기 바쁠 젊은 인생들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곳에 와서….

'우리 세대에서 끝을 내지 못했다는 게. 미안할 따름이구나.'

이제는 늙어 버린 그 목에서 미래를 나아갈 이들에 대해 죄스러움을 머금었다. 총기를 잃은 눈은 창에 비친 자신을 살핀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자글거리는 손. 생의 윤기를 잃어 푸석거려 보이는 백발의 머리칼.

총장은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었다.

앞으로 그들이 겪을 고난과 역경, 슬픔과 절망을 알기에. 이를 대물림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 세대의 무력함을 느끼기에.

반짝이는 푸른 잎들을 바라보는 총장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페르기오 교수님."

"예."

"더 늦기 전에 차기 총장을 선출하도록 하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장님이 이렇게 멀쩡히 계시는데 차기 총장이라뇨?!"

총장은 푸석한 백발의 머리를 저었다. 그는 예전부터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민다.

"이 늙은이가 언제까지 버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총장님…!"

"모든 건 순환입니다."

이 몸이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난다.

마법사 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인 총장은 미래를 위해 이만 그 권좌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페르기오는 깊은 눈을 하더니, 견고한 제 뜻을 전했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호호호… 너무 늦지만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총장은 그를 뒤로하고 얇은 다리를 끌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르기오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젊을 적 보았던 총장의 믿음직스러운 등은 굽어 버렸다. 모두를 지탱하던 두 다리가 이젠 지팡이 없으면 걷기 불편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페르기오도 그가 늙어 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총장직에서 물러나 마법사계에서 떠날 것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과거의 정념에 얽매여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아직은… 아직은 괜찮을 터이다.

그렇게 스스로와 타협하며.

조용히 총장의 뒤를 따랐다.

***

승급식을 진행하기 위해 프란체스카의 힘을 빌렸다.

그녀는 죽어 버린 해골의 활동을 재개시키며, 그 살점 없는 것이 살아생전 이루었던 성취를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다.

복원할 수 있는 경지는 프란체스카의 능력 내에서다.

따라서, 전생에 길바닥에 널려 있는 수준의 힘을 가졌다면 거의 모든 힘을 회복할 수 있으며, 프란체스카의 수준을 넘어서는 힘을 지녔었다면 그 일부분밖에 사용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그녀의 해골 병사들은 결국 무생물. 게다가 그녀가 붓는 마나의 양에 따라 강함을 조절할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마나를 제공해 주고 세밀한 작업을 도울 수 있다. 대련 상대로 사용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물건이지 않은가.

프란체스카는 자기 병사들이 실험대에 오른 것 같아 마땅치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다. 좋은 재료가 있다면 올바르게 써야지.

내가 그녀의 술식을 공유하여 새롭게 조합할 때마다 주의 깊게 보고 있다. 나만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 게 아니라, 그녀도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에밀리인가."

세레나의 차례가 마치자 교대되듯 에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레나는 아르볼 프루탈 멤버 평균 발전 정도보다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활에 오러를 두르는 시간도 상당히 단축되었고, 그 농도 또한 높아졌다.

특히나 활이 날아가는 속도와 힘도 크게 향상되어 전보다 멀리 있는 적을 정확하게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약점을 인지하고 극복하려 한 증거이다.

예전부터 세레나를 고평가하는 이유가 이래서이다. 조용한데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 성실하여 정해 놓은 성취를 달성한다. 역시 그녀는 쓸 만하다.

"아, 이렇게 보이려니 좀 부끄럽네."

에밀리가 같잖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세레나나 그전에 했던 인원들은 뭐가 되는 건가.

"잡설은 하지 않아도 되니 바로 시작해라."

"나도 뱉고 나서 아차 했는데 역시 바로 짚는구나…."

"벌써 15초가 경과했다."

한 사람에게 정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 안에 자신이 발전한 모습을 모두 보여야 한다.

에밀리는 다급하게 단검을 꺼내고 오러를 담았다.

예전 같았으면 '시작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시간이 흘러간 거야!'라고 대꾸했을 그녀이지만, 사족을 달지 않고 빠르게 전투 모드로 전환한다.

흩어져 있던 기운이 모이며 단단해진다. 그녀의 눈동자 또한 한층 진지하며 또렷하다. 마치 적을 썰어 버리는 알리시아를 형상화하듯이.

?철컥.

에밀리가 상대할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 병사가 한 걸음 옮겼다.

그 백골은 저편에 사라진 기억을 되새기며 달그락거리는 손가락으로 장검을 움켜쥐었다. 푹 파여 있는 눈두덩이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마주한다.

프란체스카의 술식을 공유한 나는 백골의 세부 사항을 조절하며 데이터로 남아 있는 입학 시즌 에밀리의 기록을 집어넣었다.

해골 병사는 더는 전생에 따르지 않는다. 새롭게 형성된 그의 전투 방식은 에밀리를 위협할 것이다.

이렇게.

투홧??!

에밀리와 서로 간을 보던 해골 병사는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상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장검을 세워 그녀를 노린다.

에밀리는 거기서 눈을 떼지 않는다.

칼날이 쇄도한다.

확장된 감각으로 칼의 방향을 읽어 낸 에밀리.

피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검은 병사의 검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힘을 판단하며 계산한다.

에밀리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다. 아직도 형편없지만, 더욱 뒤떨어졌던 석 달 전의 모습. 잘 보면 자세도 엉성하고, 빈틈투성이다.

이런 허접한 검술로 핀보다 조금 앞선다고 으스댔다니. 리암에게 추월당했다고 슬퍼했다니. 핀의 노력에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리암의 재능에 그림자도 내밀지 못하면서.

반성해야 한다.

변화해야 한다.

혼자 멈춰 있을 순 없다.

카앙??!!

에밀리는 내세우던 검을 살짝 비틀어 다가오는 상대의 날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

매끈하게 잘린 검은 그녀가 들고 있는 단검의 길이 정도가 되었고, 날아간 도신은 바닥에 처박혔다.

본래였다면 하지 못했을 행위.

그러나, 약 석 달이라는 기간 동안 에밀리는 바뀌었다.

오러도, 의지도, 동작도, 시야도.

한 단계 나아가 새로운 자아를 형성했다.

진지하게 기운을 뿜어 대던 에밀리의 눈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곤 자신이 한 행동을 되살피며 믿기 힘들다는 듯 입을 벌린다.

심사위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나를 바라본다. 여전히 뻐끔거리며.

"나, 나나… 생각보다 많이 강해진 거 아니야?!"

괄목할 만한 성취에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에밀리는 소리만 지르지 않았을 뿐이지 속으로 환호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기뻐하는 그녀를 위해 말한다.

"다음."

특정한 대답을 원하는 그녀의 모습을 비웃음으로 흘렸다. 에밀리의 차례가 끝났으니 다음 사람을 확인해야 한다.

"야, 야…! 그래도 여기에서는 칭찬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칭찬을 받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장을 인정한다든가, 그동안의 노력에 수고했다든가… 연구회장으로서 면모를 보여 줘야지!"

"적당히 성장했고, 적당히 쓸 만해졌다. 이제 만족하느냐."

"...."

갑자기 피가 쏠린 에밀리는 어지러운지 머리를 짚더니, 곧 별다른 반항 없이 발을 옮겼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너지.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더 정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게.'라는 말과 함께.

말투에서는 힘이 빠졌지만, 나아가는 걸음걸이는 그렇지 않았다.

종이를 넘긴다.

다음 멤버의 정보를 살핀다.

아, 이제야 나왔군.

사실 가장 궁금한 건 이 녀석의 성장이다.

"보이도록 해라, 핀."

나와 함께 헤일리온의 단련을 받았던 입학 성적 꼴찌의 범재, 토이렌 트로아 핀이 모습을 드러냈다.

72화

결론부터 말해서, 핀은 성장했다.

입학 성적 당시 핀의 수준인 해골 병사를 가볍게 제압하고, 그동안 보여 주지 못했던 수준의 안정된 오러를 검에 두르는 게 가능했다.

에밀리와 같이 그를 꾸준히 지켜본 이들은 놀란 눈을 뜨며 칭찬 일색이었다. 고생했다. 성과가 있구나. 대단하다. 주변의 소란은 그에 대한 호평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핀은 자신의 차례가 끝나고 나서도 조금의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분하다는 듯, 창피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지켜봤다. 지금의 상태에 대해 녀석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계속 끌고 갈 만한지 아니면, 폐기해야 하는지.

"죄송합니다. 바르간 님."

성장? 그야 했다. 입학 성적의 모습이 아무리 처참했더라도 불과 3개월 전의 상태. 승기를 가볍게 잡기란 쉽지 않다.

노력? 그야 했겠지. 소설에서도 명시되었고 그가 가지의 멤버들, 레온 일행과 함께 단련한다는 걸 익히 들었다.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만 모였으니 게을리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핀은 나와 같이 헤일리온의 유물을 받았고. 그동안 다른 누구보다도 빠르게 성장할 환경을 얻었다.

나만 하더라도, 무려 마나 분야에서 초월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 마나 총량은 현재 소설 속 인간 중에서도 두 손 안에 들 정도로 방대하다 자부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빙의 특전과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얼추 비슷한 느낌은 내야 했다.

"실망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

핀이 기량을 보일 때마다.

동작을 이으며 검을 내찌를 때마다.

짙은 실망감이 올라왔으며 겉으로 티가 났다.

그도, 나도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저도 제가 한심스럽습니다. 무려 1품 유물을 가지고도 이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한 자신이, 바르간 님의 기대를 매번 저버리는 제가 너무 싫고 신물이 납니다."

핀은 바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며 자신을 다잡으려 애쓴다. 이를 꽉 아물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다.

그는 수치스러웠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보다 발악하겠습니다."

하나, 포기하지 않는다. 줄곧 떨리는 눈동자에 신념을 가득 담는다. 그리고 선언한다.

"그 결과를 1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나와 약속한 자신의 가치를.

기필코 보이고 마리라 장담한다.

"…그래."

그의 의지를 재확인한 나는 대답했다. 어쩌면 조금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핀은 모르고 있겠지만, '2학기 기말고사'는 1대1 토너먼트 식이다.

초반부터 강한 상대를 만날지도 모르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뛰어난 인재를 만나게 되겠지. 지금 아르볼 프루탈의 멤버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사람들이 주목할 것이다.

수많은 관중을 둔 그 무대에서 모든 기량을 뽐내어 강자들을 쓰러트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말한 셈이다.

헤일리온의 유물을 착용한 건이 있어 약간의 기대감을 걸었던 건 사실이나, 애초에 핀은 덤 같은 거다.

추가로 딸려 오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

핀의 마음이 꺾이지 않았다면, 버리지 않아도 된다. 기간도 길지 않으니.

그는 제한을 2학기 기말고사로 정했다. 내가 최초에 상정하고 있던 시간과도 엇비슷하니 기다리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다음 멤버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살피며 말을 던졌다.

"기대하고 있으마."

핀은 다시금 의지를 다잡으며 멀어진다.

***

승급식이 끝났다.

대부분 이들의 실력을 재확인했다. 상정한 대로의 발전 정도다. 조금 아쉬운 점은 마찬가지로 '상정한' 대로라는 점이다.

하기야, 알리시아 같은 경우가 워낙 특이하니까 재능에 대해 인지하고 있더라도 매번 새롭게 놀라움을 주었던 것이지, 일반적인 수재 수준이면 이 정도가 옳긴 하다.

그나마 이들 중 한 학생이 눈에 들어왔는데, 에밀리가 책임자로 있는 가지의 남학생이다. 소설에서는 단 한 차례의 묘사나 언급이 없었는데 꽤 괜찮은 성장세를 보인다.

트로아 제국의 평민 출신으로 무척 전투적이고 강함에 대한 갈망이 상당하다. 이번에 유일하게 승급한 인원이기도 했다.

아까 살펴보니 핀을 일방적으로 괄시하는 듯 보이던데. 이 녀석은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될까.

뭐, 그거야 나중의 일이니 미뤄 두고 우선.

"용무가 뭐지?"

복잡하던 연구실의 풍경이 사라지고 남은, 텅 빈 연구실에서 나와 프란체스카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와는 길고도 깊게 할 이야기가 있다.

"선배와 후배의 원활한 교류를 위한 자리…라고 해도 믿지 않으실 듯하군요."

프란체스카의 눈이 좁혀진다. 내 접근은 예상치 못했는지 황금의 눈이 내 반응을 살핀다.

나도 그녀의 행동을 분석했다. 디피엘리아 때와는 다르게 긴장하는 기색은 비치지 않는다.

"다른 할 말이 없다면 돌아가고 싶은데."

"바쁜 일이 있으신가 보죠?"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조금의 흔들림도, 어색함도 없다.

"2학년이니까. 공부할 것도 많고."

"그렇군요…."

하나, 그렇기에 더욱 티가 난다.

나는 길게 끌지 않고, 창처럼 날카롭게 변모한 말을 집어 던졌다. 성격이 급한 프란체스카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고대 드래곤의 뼈」의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멈칫.

잠시였지만, 그녀의 동작에 군더더기가 발생했다. 몸을 돌려 무감정한 얼굴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프란체스카.

"그게 무슨 말이지?"

"시치미를 뗀다라. 제법 자연스러우시군요. 프란체스카 선배님."

적어도 삼류는 아니고, 이류 배우 정도는 되어 보이십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요.

"…영문 모를 소리를 이어 갈 거라면 더 들을 가치도 없겠네. 난 지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말은 넓은 연구실에 낮게 퍼져 나가 전체를 울렸다. 그녀가 마땅한 반응의 처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새,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저라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

프란체스카는 한동안 내 눈을 직시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이 짧은 사이에 그녀의 눈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의구심에서 경계로. 단계가 올라갔다.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제 저주 마법도 결국에 흑마법의 하위 분야니까요. 2학년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흑마법사인 프란체스카 선배에 대해 약간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아는 것도 결코 특이할 게 아니죠."

"…누구한테 들었지?"

누구한테….

글쎄. 누구한테 들었다고 생각하느냐 프란체스카.

"글쎄요. 당신이 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운 '조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뭐가 되었든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안건은 아닙니다."

"...."

프란체스카의 눈동자가 침전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빛을 발하던 눈동자는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듯 탁한 기운을 보인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선의로 돕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눈치채고 계시겠지만, 저는 무상으로 남을 도울 만큼의 얼간이는 아니라서 말이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존경하옵는 선배님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배가 서로의 이득을 위해 거래를 제안하는 바입니다. 못 미더우시다면 상반 간의 저주의 계약을 맺어도 좋습니다."

프란체스카의 성격이면 높은 확률로 계약의 저주를 서로에게 건다. 그리고 그래야 나에게 있어도 보험을 들고 가는 셈이니 필요하다.

필요하기에 살짝 언급만 할 뿐 강요하지는 않는다. 마치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오히려 그쪽이 편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럼 상대는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 가 봐."

이를 물고자 할 터이니.

"네, 좋습니다. 제가 생각한 거래의 안을 보이도록 하죠.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프란체스카는 1학기가 끝나기 전에 나와 관련된 일을 해결하려고 들었을 터이다.

그러나, 내가 갑자기 폐관 수련을 하게 되어 일정에 차질이 생겼고 다소 불안한 마음이 있었겠지.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 이렇게 덥석 무는 걸 보면,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

사령술사 프란체스카야.

"저와 함께하신다면 아카데미아에 모셔져 있는 고대 드래곤의 뼈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어리석은 주인공과 달리, 너를 막지 않을 것이다. 2학기에 벌어질 축제 에피소드를 너만의 무대로 만들어 주마.

그리고, 한바탕의 축제가 끝나 어둠이 슬그머니 찾아올 적에는.

나를 위한 거름이 되어라.

***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

사방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이 시커먼 연기를 타고 올라오느라 정신없다.

사람들을 보호하던 마을 경비대는 모두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으며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부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빠른 현상.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살려 주십시오…!! 부디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저만이라도… 저만이라도!"

중년의 남자가 머리를 땅에다 강하게 박으며 목숨을 구걸한다.

눈과 코, 입에서는 그 남자의 간절함을 대변하는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자갈이 박힌 이마에서는 주르륵 피가 흘렀다.

"여, 여신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위그드라실 같은 나무쪼가리가 아닌, 오직 여신님만을… 유일신이신 여신님만을 위해 기도하며 살겠습니다??!!"

나무 상자에 걸쳐 앉은 어떤 존재를 향해. 남자는 연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고백한다.

매일 아침 가족과 함께 위그드라실에 대한 기도를 올렸던 그는, 명확한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 문지방을 넘듯 가볍게 신념을 바꾸게 되었다.

주변에선 그의 열두 살 아들과 열 살 딸, 그의 아내가 주검이 되어 있다. 그들 역시 잔뜩 부패하여 기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존함을 알려 주십시오…! 당신의 산하에서 평생을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어, 어떻게 보면… 어떻게 보면… 다 여신님께서 이끌어 주신 운명…."

말을 이어 가던 남자의 시야에 다시금 그의 가족이었던 구성원들이 비춰졌고, 목이 메여 제대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부디… 부디... 자비를 베?."

자자작.

남성의 머리부터 시작된 부식의 진행은 빨랐고. 순식간에 전신을 감싸 생명을 앗아 갔다.

『퉤, 맛없어. 얘도 쓰레기 같은 맛이네.』

그 남성의 시체 위에 침을 뱉는다.

나무 상자에 앉은 그 존재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두 팔을 뒤로 상자를 짚어 하늘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다닌다.

집이 타오르는 매연 탓에 검은 연기가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다.

『맨날 맛없는 녀석들만 걸리고…. 운도 더럽게 없지.』

그 존재는 열셋쯤 되는 남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세로로 찢긴 동공과 풍기는 불길한 기운은 도무지 인간으로 볼 수 없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남자아이는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그러곤 상자에서 뛰어내려 부식된 남자의 머리를 깨트린다.

『아… 15년 전에 먹었던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는데… 지금쯤이면 더 농익어서 맛이 풍부해졌겠지? 빨리 먹고 싶다.』

남자아이는 쾌감에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되새기는 것만으로 충격적인 감각이었다. 그 절대적인 수준의 미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텐데!

『더는 못 기다려. 15년이나 숙성시켰으면 충분하잖아. 너무 오래 둬서 썩으면 안 되니까!』

특정 대상을 그리워하며, 남자아이는 가볍게 걸어갔다. 그가 걷는 그 어디에도 멀쩡한 사람이나 건물이 없었다. 모두 부패하고 붕괴해 있다.

[크륵.]

붉은 몸의 사제급 알티프 한 마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태가 조금 독특하여 말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위에 타곤 알티프를 몰았다. 그러자, 주인이 이동하려는 걸 알아차린 모든 사제급이 모여 그의 뒤를 따른다.

멀리서 보면 핏빛 강물이 마을을 쓸어버린 듯하다.

그 거대한 군세는 일개 마을에는 모두 담을 수 없었다.

남자아이는 입맛을 다신다. 빨리 먹고 싶다. 그 건강하고 팔팔한, 다신 없을 지고의 별미를!

『아, 아아…! 빨리 보고 싶다. 어서 나머지 부위도 맛보고 싶어! 헤일리온?!』

황홀한 표정을 짓는 남자아이.

여신교의 제2 위험군, 열다섯의 대주교 중 하나.

「아미」.

알티프의 대군세를 이끄는 그는 차례로 다음 마을, 또 그다음 마을로 이동과 함께 멸망을 이끌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시체 썩는 냄새와 파리가 들끓었다.

73화

광활한 영토와 무한한 영광으로 빛나는 트로아 제국.

그 찬란한 제국의 수도, 브루템베르크.

정식으로 확인된 인구수만 28만이 넘는 대도시 브루템베르크에는 세계 곳곳에서 물건을 들이는 상인의 무리와, 위그드라실교에서 파견된 성직자들, 던전을 탐험하면서 마물을 잡아들이는 헌터들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터전을 잡아 항상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선 헌터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거리가 있었는데 그들의 일터이자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길드에 방문하기 위함이다.

해당 거리에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정상급 길드들이 본부를 두고 있었는데, 최근 이곳을 뜨겁게 달구는 헌터 길드가 하나 있다.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해 가며 초신성 같은 인재들을 방방곡곡에서 발굴해 오는 길드.

이 새롭게 떠오르는 길드의 장을 맡은 바르간의 충신, 브람은 현재 자신의 맡은 업무를 잠시 중단시키고 바르간과 수정구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의 주인인 바르간이 아카데미아에 재학해 있는 상황이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정구에서 약간의 잡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다면, 그 던전의 2할은 사망했다는 것이로구나. 가엾지만 어쩔 수 없군.

"제 능력이 부족하여 발생한 일입니다."

?아니다. 브람. 너는 충분히 네 일을 문제 없이 수행해 주고 있다. 통솔에 따르지 않는 마물이 발생하는 건 당연지사. 오히려 손실이 고작 2할이라 치하받아야 마땅한 일이니.

브람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바르간에 대한 자신의 충의를 드러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주인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이제 제법 명성이 올라, 슈겐하르츠의 지원이 필요 없게 되었구나. 실무도, 칼로스가 우리를 배반한다는 우책을 벌일 위인이 아니니 이 또한 걱정 없고.

바르간은 길드를 창설해 아카데미아 이외에 숨겨져 있는 인재들을 포섭하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칼로스는 가장 먼저 영입한 인재로, 손익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돈이 되는 것을 파악하는 안목이 뛰어난 길드의 실무 담당이다.

바르간이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겼을 때, 그의 길드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해당 생태계의 정상에 우뚝 설 것이 틀림없었다.

이는 명백히 소설의 내용을 전부 암기하고 활용하는 바르간의 두뇌의 덕도 있었으나, 온갖 무기를 제 손처럼 다루며 남들을 이끌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브람의 도움이 컸다.

?이번 결과로 얻은 유물 중에서 1품에 속하는 창이 하나 있었지. 그건 네가 사용토록 해라.

수정구에 비치는 바르간의 영상이 웃는다.

?그건 손을 잘 타야 하는 물건이니 네가 제격이다.

브람은 알리시아처럼 당황하거나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낮추며 감사를 표할 뿐이다.

"주인께서 하사하여 주신 유물. 일신(一身)의 사지와 같이 여기겠습니다."

브람은 바르간이 유일하게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언제나 바르간에게 깍듯하며 한마디의 말도 흘려듣지 않는다.

?네 무력의 발전은… 아니,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무례한 일이군. 이 정도면 확인할 건 모두 끝난 듯하구나.

지극히 귀족적이고 갑질하기를 즐기는 바르간이 무례하다는 단어까지 보였다. 그는 통신을 종료하려는 기색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주인."

바르간과의 통신이 끝난 이후에도 브람은 한동안 꿇은 무릎을 펴지 않으며 있다가, 느지막이 몸을 일으켰다.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리며 한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 바르간 님과 통신하고 있었구나."

"무슨 일이지."

브람의 고즈넉한 눈동자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그는 길드의 장인 브람의 뒤에 바르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방금 바르간이 돈의 흐름을 볼 줄 안다고 언급한 인재이기도 했다.

칼로스는 버릇처럼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번 원정으로 인해 브루템베르크 내뿐만이 아니라 근방의 위성도시들에서도 우리 길드의 위상이 한층 올랐어. 지금처럼 물이 들어왔을 때 노를 저을 수 있는 안이 생겨서 말해 주려고 왔지."

"내가 나서야 하는 일이군."

"여럿이서 몰려가는 것보단 한 사람, 그것도 우두머리로 알려진 인물이 정의를 내세우고 나선다면 보다 뛰어난 선전 효과가 발생할 테니까."

브람은 근처에 있는 검을 들려다 말았다.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1품 유물을 사용해 볼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칼로스는 설명을 덧붙인다.

"최근 새롭게 창설된 헌터 길드에 대한 건인데, 알고 보니까 길드는 이름뿐이고 밀거래를 하는 곳이더라고. 마약, 사람, 마물 등 품목도 다양했고. 위치는 이곳이야."

지도를 건네받은 브람은 잠시 훑어보더니 위치 파악을 끝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갔다 오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도시를 지키는 방위대는 아니었으나, 이따금 사회를 좀먹는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을 자진해서 해결하기도 했다.

"길드의 이미지는 중요하니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잔인하게 죽이거나 하면 안 된다?"

"알고 있다."

브람은 오러를 끌어올리며 가볍게 몸을 달군다.

오랜 세월 단련된 그의 단단한 다리가 문밖으로 향했다.

최근 브람이 세간에서 불리는 이름은 '브루템베르크의 무신(武神)'. 그는 거의 모든 무기를 극도로 단련한 무인이었다.

***

브람과의 통신을 종료한 후, 나는 개인적인 단련을 2시간 동안 이어 간 뒤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이미 날이 바뀐 밖은 어두컴컴했으며 달은 구름에 가려져 끄트머리만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갈 길을 나아가자 익숙한 붉은 머리가 목소리를 키우며 성을 내는 게 보였다.

이 늦은 밤에 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나 보고 있자니 주변에 늑대의 모습을 한 남자와 말다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변에 리암과 그의 조원들이 함께 있다.

"아… 이 짐승 냄새 나는 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털을 다 뽑아 버릴 수도 없고."

"리암, 네 소꿉친구라는 이 계집 좀 패도 되지? 실수로 확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장면이다.

에밀리와 싸우고 있는 저 늑대인간은 루카이엘이라는 놈인데, 원작에서는 바르간의 조원이었으며 에밀리와 자주 마찰이 있었다. 가끔은 리암과도 대립 관계를 형성했었지.

이번에는 리암과 같은 조가 되어 문제없이 지내나 했더니… 에밀리와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단순히 조 때문이 아니라 본래의 성격 차가 큰 원인인 듯싶다.

"그, 그만해… 싸우지 마…."

"비켜, 니켈라. 오늘 저년의 붉은 머리칼을 전부 뽑아 버릴 테니까."

옆에서는 후드로 머리를 가리고 있는 여학생이 벌벌 떨며 말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는 기존의 전개와 동일하게 리암과 같은 조가 된 '니켈라'이다.

그녀가 루카이엘에 의해서 밀쳐지자 주변의 두 여성과 리암이 추가로 나섰지만, 내 눈에 그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정령술사 니켈라.

알리시아, 에밀리, 프란체스카에 이은 리암의 마지막 히로인이다. …하여간 여자도 더럽게 많이 꼬이는 놈 같으니라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이와는 대비되게, 보기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여인이라 리암을 돕는 것도 그렇고, 마음을 전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종종 얼굴을 보였다.

이런 특성 탓에 에밀리가 연애 관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경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알리시아는 뭐… 분명 주인공의 도움이 많이 되는 강력한 아군이었으나, 타이틀만 메인 히로인이다 뿐이지 그런 방면에서는 다른 여인들에게 묻히기 십상이었으니….

"둘 다 진정하고…! 에밀리, 잠깐 나랑 저리로 가서 대화 좀 할까? 우리 요즘 둘이서 대화 나눈 지도 오래됐잖아."

리암의 필사적인 중재하에 둘의 분쟁은 잦아들었다. 화를 식힌 에밀리는 뚱한 눈으로 니켈라를 지나치고는 리암을 바라본다.

"…됐어. 아직 오늘 치 훈련 다 못 했어."

오, 이건 놀라운 발언이다.

리암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단장할 에밀리가 단둘이서 대화할 기회를 마다하다니.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핀의 입김이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가지'의 책임자로서의 압박감 때문일까. 최근 에밀리의 훈련 강도나 양이 부쩍 늘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리암.

내가 확인한 장면은 여기까지였다.

어딘가에 숨어서 훔쳐보던 게 아니라, 지나가는 도중에 잠시 본 게 전부였기에 정보가 제한적이다.

제법 흥미롭기는 했으나, 나에게 이득 될 게 없기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최근 리암 녀석이 불현듯 다가와 했던 제안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금세 잊혀졌다. 녀석은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대로 걸음을 재촉하여 아카데미아의 한구석에 위치한 고분을 찾아간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어두워지며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고분. 거대한 크기의 흙무더기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철문이 달려 있었다. 이 문을 통해 고분의 안으로 들어가는 게 가능하다.

끼이익?.

원래라면 닫혀 있어야 할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황금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단번에 보였다.

"빨리 왔네."

"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말이죠."

나를 마주하는 어딘가 서늘한 눈빛의 주인은 프란체스카.

2학기 축제에서 벌어질 난동의 주범인 사령술사였다.

***

"푸하??! 이거지, 이게 삶의 맛이지!"

같은 시각.

아카데미아에 위치한 아카데미아 관계자 전용 주점.

파울라와 루이사는 한편에 자리 잡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들의 테이블은 세 주먹은 들어갈 커다란 유리잔들만이 가득했고, 다른 요리 따위는 없었다. 안주라고는 가게 주인이 우려 차원에서 건넨 약간의 견과류가 전부였다.

꿀떡거리며 커다란 잔에 담긴 맥주를 목 뒤로 넘긴 파울라는 기세 좋게 테이블 위에 잔을 때리듯 올렸다. 그러고는 기분 좋은 표정을 한 입을 쓱 닦는다.

"진짜 술 없으면 이 세상 어떻게 사나 몰라. 젊었을 때는 술 같은 건 냄새만 맡아도 질색이었는데. 인생 참 어떻게 될지 몰라."

은근히 반응을 바라는 파울라의 말투.

루이사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한다.

"지랄. 1학년 때 내 방에서 술 퍼마시다가 골병 나서 수업 못 들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음? 내가 그랬나?"

"그랬어, 이년아."

"아, 맞아 맞아. 이제야 생각나네…! 호호호, 내 정신 좀 봐. 젊을 때가 아니라 어릴 때였나 봐. 아… 아닌가? 아니면 말고!"

적당히 취기가 오른 파울라는 평소보다 텐션이 높았다. 루이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혼자 꿀꺽거리며 술을 넘긴다.

"아, 왜 혼자 마시고 그래. 같이 마시자고 같이!"

그렇게 둘은 한참을 웃고 떠들며 음주를 즐겼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잠깐 찾아온 정적에서, 살짝 풀린 눈으로 맥주잔을 바라보던 파울라가 주제를 던진다.

"…이번 기말고사는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가면 좋겠는데."

그건 넋두리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녀가 술김에 뱉은 말에 루이사의 눈에 담고 있는 현실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이를 털어 내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신다.

"크으?"

여전히 맛있지만, 기분 탓인지 술이 조금 써진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이야… 나는 이런 위험한 기말고사 제도가 이해되지 않아."

"알아. 넌 항상 폐지하자는 쪽이었으니까."

"참… 그놈의 전통이 뭔지. 애들 목숨보다 중요한 건가. 다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냥 확 깽판 치면서 폐지 주장해 볼까?"

"아서라, 그러다 또 근신 당한다. 이번에 또 근신 당하고 돌아오면 절대 단순 감봉으로는 안 끝나."

현실적인 대답에 파울라는 '큭… 그건 맞는데.'라며 약간의 여지만을 남겨 둔 채, 자기주장을 접었다. 설령 그렇게 나선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었기에.

파울라가 긴 한숨을 쉬었고, 루이사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하는 바를 꺼낸다.

"애들이지. 아직 어려서 보호받아야 하는 꼬맹이들."

파울라가 술잔을 들고 있는 사이, 루이사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어떡하겠냐. 어리다곤 해도 용사 지망생들인데."

일정 보호를 하며 성장을 돕는 게 교수인 그들의 임무였지만, 품에 안고 있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용사가 되지 못한다.

달궈진 철을 만져서야 비로소 뜨거움을 알 듯, 상처받을지언정 그 아픔으로 하여금 더욱 나아갈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픔을 참지 못하고 떨어지는 이들도 있었으나, 별수 없다. 이 정도의 충격에 떨어질 잎이었으면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잎인 것이다.

"크으…."

루이사는 잔에 남긴 모든 술을 털어 넣었고. 때마침 파울라의 술도 동이 났다. 파울라가 말한다.

"여기요?! 맥주 둘 추가요!"

두 교수는 술과 함께 쓰린 현실을 목 뒤로 넘겼다.

74화

『얼마 후 있을, 1학기 기말고사에 관해 설명하겠다.』

클래스전을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루이사는 강의실에 커다란 영상을 띄워 두곤 그녀의 카리스마 아래 모두를 집중시켰다.

그녀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쩌렁쩌렁 울린다.

『너희도 예상했다시피, 이번 1학기 기말고사 또한 과거와 마찬가지로 '둥지'의 핵을 파괴하는 거다.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실습 시험이지.』

알리시아가 아카데미아에 들어와 처음으로 알티프와 조우하고 비명을 질렀던 그 자리. 그녀의 명성에 진득한 진흙을 덕지덕지 바른 사건.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실습용 알티프 둥지의 '핵' 제거.

이곳은 본래 실제로 알티프 주교급의 둥지였으나, 주인을 제거하고 둥지를 파괴하지 않은 채 용사들의 육성을 위한 배움의 장으로 활용한 경우다.

매년 새롭게 들어오는 예비 용사들은 1학기 기말고사로 이 시험을 통해 알티프라는 존재가 어떤 녀석들인지, 본인들의 적이 누구인지, 둥지란 무엇인지 등을 직접 체험하면서 깨닫게 된다.

『둥지에는 각종 함정이나 사제급 알티프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벽이나 천장도 일반적이지 않고 생물의 장기처럼 생겨선 침입자를 공격하지. 이를 전부 뚫고 준비해 둔 모의 '제단'에 있는 핵을 파괴하면 된다.』

본래 존재하던 제단의 방은 환혹 계열 마법을 걸어 입구를 보이지 않게 하고, 내부에 관계자들을 배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혹시라도 학생들이 잘못 들어와 실제 핵을 파괴할 경우와 다른 주교급 알티프가 둥지를 차지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주교 이상급이 지금까지 남의 둥지를 점령하는 경우는 단 한 차례도 발견되지 않았다. 괴물 새끼들 주제에 어지간히도 자의식이 강해 남의 둥지는 들어가는 것조차 꺼린다는 보고도 수두룩하지.』

특히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개체가 지은 둥지라면 더더욱. 그렇게 말하던 루이사는 공중에 띄워 둔 영상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영상에는 1학년의 모든 학생이 조에 따라 나누어져 있었으며, 시험의 출발 순서가 적혀 있다.

『이번 시험은 팀전이다. 좋든 싫든 한 학기 동안 함께한 조원들과 함께 이 시험을 격파해라. 이번에는 클래스전처럼 개인 점수는 주어지지 않는다.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의 균형을 맞춰서 움직여라. 이 말이다.』

공중에 떠 있는 영상만이 빛을 발하는 강의실에서.

리암의 눈은 바르간과 알리시아를 담고 있었다.

'이번 시험. 알리시아의 트라우마가 모두의 앞에서 공개되어 수모를 당하는 전개다.'

그가 알고 있는 줄거리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알리시아는 온갖 욕을 다 먹게 되고, 큰 상처를 받는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는 그녀였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갔을 게 틀림없다.

알리시아 그녀도 어린 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힘들진대, 안 그래도 마음 여린 그녀가 이로 인해 남들에게 험담까지 듣게 되는 걸 괜찮다고 웃어넘기는 게 가능할까.

'…그리고 한 명 더.'

얼마 전부터 리암이 가까이 지내는 같은 조의 여학생.

정령술사 니켈라.

그녀는 이번 시험에서 크게 다치어 알티프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얻게 되고, 아카데미아에서 자퇴를 신청하는 조연 캐릭터이다.

하지만, 조연이라고 해서 결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성격이 모났다거나 하지 않다. 수줍게 남을 배려하고 정이 많은 착한 아이였다.

그녀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교우 관계를 이어 가고 있는 리암에게 있어, 그대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이번 시험으로 알리시아와 니켈라가 상처입을 것을 생각하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됐다.

따라서, 최근 바르간에게 다시 한번 접근해 이번 일에 대해 스리슬쩍 언급했다.

바르간은 빨리 대화를 끝내 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1학기 기말고사 이야기가 나오자 다소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리암은 조금의 희망을 품은 채 말했다.

니켈라는 자신이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알리시아는 바르간의 통제하에 있기에 그의 허락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알리시아가 이번 시험을 치르지 않게 도와줘.

리암은 솔직한 자신의 진심을 꺼냈다.

알리시아는 트라우마가 깊이 박혀 있는 상태. 이 감정의 골이 메워진 이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

아무리 악역이고 막나가는 바르간이라고 해도 자신과 같은 빙의자라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알리시아를 이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을 터이다.

시종이긴 하나, 슈겐하르츠의 소속이 된 그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직속 상사라고 할 수 있는 바르간이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녀가 무너지는 걸 그냥 둘 리 없다.

하지만.

?이익이 없다.

바르간은 가볍게 이를 거절했다.

자신에게는 조금의 이익이 떨어지기는커녕, 손해밖에 없는 일을 어째서 해야 하냐고 되물었다.

리암은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이를 설명했다. 바르간이 빙의자임을 밝히고 싶지 않아 둘러서 말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단에 맞춰 준다는 생각으로 말했다.

?알리시아는 알티프에 대한 극심한 공포증이 있는 상태야.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해 줄 수 없지만… 절대 나쁜 의도를 아니라는 걸 알아줘. 이건 그녀를 위해서이지만 너를 위해서이기도 해. 슈겐하르츠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없잖아…?

설득력은 없었지만 거짓은 일절 담지 않았다. 에밀리의 말대로 사람을 잘 간파하고 분석할 줄 아는 그라면 분명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이 말을 듣고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던 바르간의 모습이. 우자(愚者)를 비웃던 그의 어조가.

?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구나.

"...."

리암은 바르간과 알리시아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 물렁물렁한 눈을 굳세게 만들고 영상에 적힌 빽빽이 적힌 글자로 돌려, 자신의 조를 찾는다.

????

출발 순서

<첫 번째. 1반 3조>

리암

해리아나

루카이엘

라반 카롤 오필리아

니켈라

<두 번째. 1반 2조>

하이오드 트로아 펠릭스

....

????

운이 좋다.

모든 반 중 우선으로 시험을 치르게 된 1반의 리암. 심지어 그 안에서 무작위로 선출된 조의 순서에서도 가장 빨리 출발하게 되었다.

리암이 이를 보고 다행이라 여기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알리시아가 속한 1조는 1반의 후미에서 출발. 알리시아가 알티프와 조우하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다. '제단'이 있는 곳과 그 최단 코스를 알고 있으니 가능하다.

리암은 작전을 변경했다.

바르간은 그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저번에 보인 반응으로 짐작건대, 알리시아를 그대로 밀어 넣을 심산으로 추측됐다.

까닭 따윈 모른다. 그의 사고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해 있지 않다. 해서, 리암은 다른 방안을 도출해 냈다.

너무나 극단적이고 최악인 방법일지 모른다.

온갖 욕을 먹을 것이고, 손가락질받을 터이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알리시아와 니켈라가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그는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생각한다.

바르간… 네가 끝까지 알리시아를 둥지에 밀어 넣을 생각이라면 난….

그 둥지를 붕괴시켜, 그녀들이 슬퍼할 일 자체를 뿌리 뽑아 버리겠어.

리암은 아카데미아에서 준비한 모의 제단이 아닌, 둥지의 실제 핵이 있는 실제 '제단'으로 가리라 다짐한다. 우연과 실수를 가장해 둥지를 부수어 시험 자체를 끝낼 심산이었다.

본인이 욕을 먹을지언정, 타인이 고통받는 걸 모른 척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리암이었다.

***

"오랜만이네! 도련님아!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나이아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움직임을 정지시키기 위한 행위였다.

"다가오지 말고 거기 가만히 서 있어라 나이아스. 생선 비린내가 나니까."

"거짓말?! 거짓말이지…?! 킁킁. 생선은 무슨… 아무 냄새도… 아! 맞아. 정령이 냄새날 리 없잖아! 나를 속였구나. 하여간 짓궂다니까."

놀란 눈으로 황급히 자신의 체취를 맡던 나이아스는 어린아이와 같이 헤실헤실 웃으며 또다시 안기려 든다.

내 눈치를 살피던 알리시아가 의중을 파악하곤, 그것의 뒤에서 양팔을 잡은 채 들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린 모습을 한 나이아스가 나무의 포도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나이아스가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하지만, 알리시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리시아. 왜 나와 도련님의 애정 행위를 막는 거야. 질투하는 거야?"

"지, 질투라니요…! 그게 아니라, 도련님께서 귀찮아하시는 기색을 비치셨기에 사전에 방지한 거예요."

"치. 재미없어. 알리시아는 생각보다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구나? 나는 성별도 없는데."

"...."

물을 머금은 미역처럼 축 늘어져 입만 대쭉 나온 나이아스.

내 기숙사의 방에는 현재 나와 알리시아, 그리고 어린 척하는 늙은 정령 한 마리가 함께 있었다.

항상 하던 알리시아의 검사 겸 오늘은 나이아스를 데려오라 일러두었다.

"헛소리는 그쯤하고. 나이아스, 현재 네 힘의 회복은 어느 정도 되었지?"

"음… 도련님이 좋아하는 수치로 말하자면… 대략 6할 정도?"

"최근 회복 속도가 더디구나. 이유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너무 오랜 세월 힘을 빨려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분명 초반에는 빨랐는데 말이야, 갈수록 힘이 덜 모인다고 할까. 이미 충분히 젖은 천에다 물을 붓는다고 다 스며드는 게 아니잖아."

"즉, 네가 취할 수 있는 힘의 최대치가 줄어들었다는 말이냐. 그건 큰일이군… 파기해야 하나."

"아마도 그런… 엑?! 잠깐만, 파기라니! 도련님아, 그건 진짜 안 돼! 나중에 후회한다? 나, 이대로 영영 강해질 수 없는 게 아니야. 최소한 기존에 이루었던 정도는 금방 다시 강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제발 버리지 마!' 하며 울부짖는 나이아스. 더는 혼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외친다.

저렇게 앵앵거리는 놈이 과거 정령위 공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정령이라는 게 다 저런 식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파기한다는 말은 버리는 게 아니라 부숴 버린다는 의미이다. 네가 깃들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수면 정령계로 돌아갈 것이 아니냐."

"정령계는 재미없는 애들밖에 없단 말이야. 조금 유쾌하다 싶으면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애들이 태반이라 대화가 안 된다고. 그게 버리는 거지 뭐야!"

시끄럽게 울어 대는 나이아스를 보자 다시는 이런 대화로 주제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한 번도 끔찍한데 이런 소음을 두 번이나 들을 순 없다.

가볍게 턱짓하자 알리시아는 나이아스의 입을 막았다. 필터링이 하나 생기자 그나마 좀 낫다.

그나저나… 그런가.

나이아스는 아직 6할 정도의 전력밖에 내지 못하는가.

참고하여 판을 짜야겠다.

"나이아스."

"으읍?"

알리시아에게 입을 봉인당한 나이아스가 울음을 멈추곤 대답한다. 그 잠금이 해제된다.

"당분간 알리시아가 아니라 내 쪽에 있어야겠다."

"아, 진짜로? 아싸! 또 재밌는 거 보겠네! 근데 갑자기 왜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있다."

손가락을 튀겨 소환진을 형성했다. 그 안에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정화될 정도로 깨끗한 하얀 손수건이 튀어나와 공중에서 넘실거린다.

순백의 색이 매력적인 사역마 '하얀이'다.

"갑자기 그 사역마는 왜… 서, 설마…."

나이아스가 어색하게 웃는다. 양옆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냥 알리시아의 곁에 얌전히 있겠다고 말한다.

아쉽지만 그럴 수 없다.

『나이아스, 검으로 돌아가라.』

"시, 싫어…! 영체는 싫어…!!"

계약의 힘에 의해 실체를 잃은 나이아스는 알리시아가 들고 있는 푸른 검으로 돌아갔다.

나이아스가 현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회복하는 방법은 검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 이대로 두면 곧 일정 시간을 지나곤 나올 것이 분명하기에 하얀이를 불렀다.

하얀이는 내 의사를 이해하곤 몸집을 불려 알리시아가 들고 있는 유물, 나이아스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이 나비가 내려앉듯 기품 있다.

?꿀꺽.

유물의 등급이 높아서인지 나이아스를 삼킨 하얀이에게 독특한 소리가 났다.

본래라면 저런 잡음도 없이 조용히 사물을 고유의 공간에 보관하는 하얀이었지만, 1품 유물이자, 정령이 깃들어 있는 나이아스는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은 까닭이었다.

나이아스의 모습은 사라지고, 하얀이는 다시 너울거리며 하늘을 날아왔다. 그러고는 종이를 접듯 새끼 새 모양으로 변하여 내 어깨에 앉는다.

"알리시아."

"예, 도련님."

"어쩌면 곧 네가 나이아스를 남들 앞에서 잡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씀은…."

"2할 정도. 현재 파악 가능한 정보로는 2할 정도의 확률로 나이아스를 잡아야 할 것이야."

알리시아는 그윽한 눈으로 가만히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열어 물었다.

"기말고사에서는 아카데미아에서 제공하는 연습용 무기밖에 사용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말이겠지."

아직 아무것도 확정을 지을 수 없다.

괜한 기우일 수 있다.

하나, 어떤 상황이 들이닥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철저한 준비를 마쳐야 한다.

설령 그 위험이 이번 기말고사의 체계를 파괴할지라도, 몇 명의 생명을 앗아 갈지라도 견고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

창밖을 내다봤다.

바람이 거세다.

겨울바람은 떠난 지 오래건만 성난 바람이 창을 마구잡이로 두드린다. 창문은 그들의 침입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온몸으로 받아 낸다.

덜컹덜컹.

밤바람은 창을 넘어가지 못한다.

얇은 경첩만이 들썩일 뿐이다.

75화

콰각??!

레온의 주먹에 둘린 두꺼운 오러가 핀의 복부를 감싸고 있는 얇은 오러의 막을 그대로 뚫곤 복부를 강타했다.

커헉! 핀은 위액을 뱉어 버렸다. 동공은 확대되고 온몸의 힘이 빠진다.

그럴수록 탈출해 버릴 것 같은 정신을 더욱 꽉 잡는다. 이번에야말로 강력한 유효타를…!

핀은 순간적으로 목검을 잡는 방법을 내리찍는 형태로 바꾸었고 그대로 레온의 팔목을 노린다.

그러나.

퍼억?!

레온의 돌려차기로 안면을 강타당했고 핀은 연무장의 벽에 부딪혀서야 간신히 공중에서 떨어졌다.

딸꾹질하듯 올라온 숨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적에는 단련을 위한 결투가 아닌, 생사결을 치르고 있는 듯하다.

"오, 또 일어나는구나. 대단하다. 핀!"

문제는 그 목숨을 건 승부는 핀 혼자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허벅지, 다리, 팔, 얼굴… 핀의 몸은 멍이나 상처로 얼룩져 있다.

부족한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는데 바쁜 몸뚱이는 더는 움직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심금을 울리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핀은 강제로라도 몸을 일으켜 레온의 단련을 이어 갔다.

레온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곧바로 돌진해 가차 없는 주먹을 복부에 꽂았다.

핀은 흔들리는 눈동자를 치켜세우며 이를 읽어 보려 했지만 역부족.

극도의 경도와 강도를 자랑하는 레온의 오러가 다시금 핀의 몸에 지독한 통증을 안겨 준다.

"우읍…!"

주먹을 날린 레온이 몇 걸음 뒤로 빠지며 핀의 상태를 살피자, 핀은 자기 입을 가리며 무언가를 급하게 막으려 했고 실패했다.

핀의 입에서 피와 함께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가 누적되자 그의 위가 내부에 있는 모든 걸 방출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레온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고, 주변에서 본인들의 결투를 지켜보던 가지의 멤버 중 아무나 한 명을 짚어 불렀다.

핀의 뒤처리를 부탁한다며 사실상의 종료를 알렸다.

"살살 좀 하지 그래요. 그가 심각할 정도로 무리 중인 건 아시잖아요. 이대로 계속 훈련을 이어 가면 죽을 수도 있어요."

가지의 멤버와 함께 핀의 뒤처리를 도와주는 벨.

그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자진하여 핀이 쏟아 낸 토사물을 걸레로 닦고는 핀을 부축해 일어나도록 도왔다.

그 말을 들은 레온은 가만히 핀을 바라보았다. 위풍당당하게 두 손을 허리춤에 댄 채 핀의 대답을 기다린다.

핀의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에서 여리지만 굳은 의지가 새어 나온다.

"잠시만요… 전…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억지 좀 그만 부려! 네 몸 상태가 어떤 줄 알고서 하는 말이야?"

몇 주 전부터 핀과 함께 훈련해 온 벨은, 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넣는지 지켜봤다.

핀은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아무리 용사가 되기 위해 단련된 몸이라고 해도 생명체에겐 한계라는 게 있다.

핀은 매일같이 그 선을 넘으며, 단련을 가장한 고문을 자기 자신에게 주고 있다.

심신의 평화와 안정, 이를 위한 계획이 가장 우선인 벨에게 있어 핀의 행동거지는 이해하기 힘든 범주였다.

"이미 짧은 시간 동안 충분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잖아. 대체 얼마나 더 욕심을 내려는 거야?"

헤일리온이라는 위대한 용사가 준 유물을 통해 핀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전에는 벨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고작 3주간의 기간이 지나고 대등한 대결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

벨은 스스로의 무력에 대해 자신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아카데미아에서 평균 정도를 간신히 맴도는 수준이었으나 핀의 입학 성적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의 발전이었다.

"아직… 아직… 멀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이 정도로는… 될 수 없습니다."

핀의 귀에 벨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바로 앞에 서 있는 레온, 그 이상을 바라보며 주변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핀의 목울대에서 지독한 간절함을 머금은 문장이 나온다.

그의 눈은 시력을 잃은 사람처럼 보일지언정 초점은 또렷하게 목표를 직시했다.

"저는… 인류를 수호하는 용사가 되고 싶습니다."

레온은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방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한지 연무장에서 단련하던 모든 사람의 주목을 단번에 받을 수 있었다.

항상 큰 목청을 울리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그 세기가 더욱 대단했다.

"핀! 너는 반드시 강한 용사가 될 거다. 이 내가 장담하지!"

쿵?. 레온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쳐 보였다. 오러를 두르지도, 마나를 담지도 않은 평범한 주먹이 대기를 진동시킨다.

오셀 반테올로 레온.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핀의 성취를 확언한다.

"너라면 교회에 들어가서도 용사랭킹 10위 안에 안착할 수 있다!"

호언장담하는 레온.

그 이름과 숫자가 짓누르는 거대한 질량과 무게를 알기에 옆에서 바라보던 벨은 눈을 끔뻑거렸다.

솔직히 말해, 핀은 이대로 꾸역꾸역 강해져야만 간신히 용사가 될까 말까 한 수준이다.

그런 그를 보고 용사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간다고 말한다고?

오랜 시간 동안, 헤일리온을 제외하면 천재라고 불렸던 신인 중 아무도 그 자리에 이름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힘을 주고 싶어도 너무 허황한 미래를 심어 주는 건 아닌가.

지나치게 현실성 없는 목표는 오히려 역효과….

아.

아니다.

저 확고한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레온은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맞아. 레온이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지.

"바르간도 너를 믿고 있기에 헤일리온 님의 멘티로 너를 뽑은 게 아니더냐! 하하하?!!"

그는 진심으로.

끈질긴 노력은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다시 한번…. 대련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몇 번이라도 상관없다. 밤을 새워 불태워 보자."

하하….

아마 진짜로 잠도 안 자고 대련을 이어 가겠지.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벨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벨! 너도 들어와라!"

"예?! 저, 저도요? 아… 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죠."

연무장의 불은 깊은 밤이 찾아와도 꺼지지 않는다.

***

최근, 알리시아의 검사와 내 훈련을 마치면 매일같이 고대 드래곤의 뼈가 안비되어 있는 고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프란체스카와 고대 드래곤에 관한 술식을 연구하며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원작을 기반으로 한 이유가 있다.

사령술사 프란체스카.

본래의 줄거리에서 고대 드래곤을 어중간하게 부활시켜 이를 복종하게 하지 못하고, 되레 본인의 해골 군세마저 빼앗긴 그녀.

주인공인 리암과 그 일행의 힘으로 이들을 무력화시키려 하지만, 끝도 없는 드래곤의 마력에 병사들은 잠들지 않고 사람들을 공격한다.

축제는 유일하게 용사와 관련 없는 외부인들도 참여하는 자리.

대부분의 교수와 재학생 들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신이 없고, 그마저도 3학년과 4학년의 부재로 수가 부족한 상황.

리암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최초 시전자인 프란체스카밖에는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간신히 그녀를 찾아내 특기인 설득을 시도했으며 기가 막히게도 이게 먹힌다.

결국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아내곤 해결해서 상황 종료.

역시 사람을 구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라 그런지, 이런 소란 끝에 사망자는 0명. 정말 잘되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린 게 아닌가?는 얼어 죽을.

이후 리암의 히로인 무리에 들어간 프란체스카는 2년 뒤에 자살한다. 에밀리 이후 두 번째 공식적인 히로인의 죽음이었다.

우리의 주인공님께서는 여기서 정신을 놓게 되고. 그때면 한창 알티프의 습격이 빈번한 시기라 그럴 틈도 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리암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지능과 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내가 대신 나서야지. 어떡하겠는가. 그녀는 그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죽어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인재인데.

아, 당연한 말이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나에게 이득이 가장 많이 되는 형태로 만들어 간다. 그러지 못할 것이었으면 손을 대지 않았겠지.

"이 술식에서는 사역술에 사용되는 3차 마력식을 적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마나를 공급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확실히… 맞는 말인 거 같네. 직접 계산해 보면… 맞아. 그편이 기존 마나의 흐름을 1.19배 정도 향상할 수 있어."

계획을 위해.

그녀를 도와 유대감이라 불릴 만한 걸 갖춘 관계를 형성하고, 2학기의 축제 에피소드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기 위해 도우려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도 이 술식 연구가 내 저주나 사역마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프란체스카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서도 사령술과 마법 술식 체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상당하여 나도 배움이 있어 쌍방향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아, 그러면 여기에 다차 함수 시간 변환을 이용해서 시간 복잡도를 가질 수 있게 변환할 수 있어."

"그렇다면, 출력 또한 1.19배 상승합니다. 놀랍군요."

그렇게 한동안 술식에 대한 토론을 이어 나가다 3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한두 시간만 더 지나면 어둠을 몰아낼 아침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과열된 머리를 식히고 있던 프란체스카는 아직 찬 새벽의 공기를 두 입술 사이로 비집어 넣더니 길게 내뿜었다.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관심이 없는 듯한 무심한 눈.

사령술 관련 연구를 할 때를 제외하면 그녀의 눈에서 이지적인 빛이 발하는 경우가 없다.

그런 그녀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거지."

같은 연구회라고 해도, 생판 남이 불현듯 자신을 돕겠다고 말하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구를 도와주고 있다.

게다가, 고대 드래곤의 뼈를 연구하여 부활시키려 한다는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경위도 수상한 상황.

그녀가 가지고 있는 건 마땅한 의구심이자 의심이었다.

"처음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라고. 그래도 믿지 못하시는 듯하여 이렇게 서로에게 저주까지 걸었는데도 부족하신 건가요. 첨언하자면, 더는 발을 물려 양보해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

새벽에 보는 그녀의 눈은 죽어 있는 듯했다. 주변의 여린 빛을 담으려 하면 그 망막에서 튕겨 나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관은 없지만."

그녀의 입에서 맥이 없는 말이 빠져나왔다.

해골을 다루는 프란체스카의 입술에는 죽은 자의 원념처럼 차가운 기운이 묻혀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진척도 많이 되었고, 오늘 1학년은 기말고사를 치르러 이동해야 하잖아."

"그럼, 그러도록 하죠."

여름방학 중에는 프란체스카를 도와줄 수 없으니 지금까지 했듯 혼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어중간하게 할지언정 그녀는 혼자서 고대 드래곤의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게 가능했다.

2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약간의 여유가 있으니 그때 다시 협력해도 늦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씩 날이 밝아질 기미가 보인다.

하늘에 널려 있는 거대한 구름의 색이 변화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

기말고사가 치러질 장소는 비공정을 타고 하루를 날아가야 하는 거리.

모든 아카데미아의 인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크기의 비공정.

일반적으로 운행되는 모델과는 달리 이렇듯 한 학년 이상의 수가 단체로 이동될 때만 이용되는 대형이다.

이제부터 저 거대한 놈을 타고 하루 동안 하늘을 떠다닐 예정이다.

"핀 님 괜찮으신가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아 괜찮아. 그냥 훈련하다가 조금 다친 것뿐이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알리시아."

"하지만…. 조금이 아닌데요…."

"그러니까. 이래서야 내일 기말고사 할 때 방해되는 거 아닌가."

콕콕. 프리다가 핀의 멍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그때마다 핀은 오금이 저리는 표정을 지었지만, 최대한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연기를 이어 갔다.

입으로는 '괜찮긴 한데 그만 만지면 안 될까?'라고 다소의 감정이 담긴 말을 뱉었다.

"그리고 너는 같은 조도, 같은 반도 아니잖아.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나 반에서 어울리지 못하잖아.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어."

"그런 것치고는 되게 당당한데…."

"내가 반 애들을 따돌리는 거니까. 그리고 여기엔 바르간 님이랑 알리시아도 있고."

프리다는 알리시아를 껴안으며 얼굴을 비볐다. 그 모습이 마음을 튼 사람에게 몸을 문대는 동물을 보는 듯하다. 주황빛 귀와 꼬리까지 있으니 더욱 그렇다.

"아, 물론 에밀리랑 세레나도."

"됐네. 이 사람아."

에밀리는 뒤늦게 자신들을 챙기는 프리다의 말을 튕겨 냈다. 단순히 삐진 까닭은 아니었고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제 슬슬 출발할 것 같은데?"

그녀의 말이 씨가 된 건지, 마도구에 의해 증폭된 음성이 귀에 꽂혔다. 장난기 가득하고 익숙한 파울라의 목소리다.

?아아, 말씀드립니다! 지금부터 본 비공정은 목적지인 기말 시험장으로 이동을 위한 이륙을 할 예정이오니. 안내에 따라서 아… 됐다. 안내는 무슨 안내. 빨랑빨랑 타도록 하세요! 곧 출발합니다.

76화

땅거미가 내려앉은 방.

비공정의 수많은 방 중 하나.

홀로 외로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리암은 특수한 창을 띄운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창에는 조건 달성으로 인해 「특수 스킬」이 개방되어 있다고 적혀 있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 화면을 담는다.

동시에 과거의 일이 멋대로 회상된다.

지독하리만큼 슬프고 괴롭지만, 따뜻했던 기억을.

비공정에서도 갖추어질 건 다 있어 훈련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루 동안 스킬의 성장에 집중했던 리암은 조원들과 약속했던 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조원 중 한 명인 정령술사 니켈라가 배정받은 방이었다.

"존나 늦게 왔네. 빨리 좀 처 오지."

"루카이엘! 그런 못된 말은 쓰지 말라니까!"

문을 열자마자 성대하게(?) 리암을 맞이하는 남자와 이를 혼내는 여자. 여자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이어 간다.

"리암, 이젠 익숙하겠지만 용서해 줘요. 루카이엘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말한 건 아니에요. 아직 사람 사귀는 데 익숙하지 못해서…."

"해리아나. 너는 가끔 내 부모 행세를 하려고 하더라. 어릴 때부터 그랬지. 그거 나쁜 버릇이야. 알아?"

"루카이엘… 다행히 자각은 하고 있었구나."

"야."

둘 다 아인종이 가득한 다렉 연합국 소속으로 루카이엘이라 불린 남학생은 얼마 전 에밀리와 말다툼을 한 인물로, 늑대의 꼬리와 귀, 날카로운 어금니와 손톱을 가졌다.

그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여학생은 해리아나. 귓등에 별을 형상화하는 노란 꽃이 피어 있다.

두 사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소꿉친구이다.

항상 남에게 험한 말을 뱉어 버리는 루카이엘의 중재자 역으로 해리아나가 나서곤 했다.

"리암도 왔는데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거야. 우리가 지금 잡담이나 하자고 모인 게 아니잖아."

상황을 매끄럽게 진행하는 여인은 라반 카롤 오필리아였다. 트로아 제국과 오셀 왕국보다 멀리 떨어진 라반 왕국이라는 지역에서 왔다.

알리시아를 모욕하고 치른 등급전에서 패배해 아카데미아를 떠나갔던 티그레스도 이 왕국 소속의 귀족이었다.

모두를 집중시킨 오필리아는 리암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화두를 던진다.

"내일 치를 기말고사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응 맞아. 그 전에 니켈라. 방을 빌려줘서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아, 아니야… 이 정도는… 나도 리암의 조원인걸. 가끔은 도움이 되고 싶어."

방의 주인인 정령술사 니켈라는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만을 바라본 채로 수줍게 말했다.

아마 리암이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얼굴을 숨기며 피하려 들 게 틀림없었다.

"니켈라는 항상 도움이 되는데?"

"고, 고마워… 그건 좀 기쁘네."

작게 미소 짓는 니켈라를 뒤로하고 리암은 본제로 들어가려 했다.

전에 따로 리암이 마련한 자리에서 니켈라는 자기가 아무리 겁이 많아도 알티프와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테니 함께 기말고사를 치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녀가 울상으로 부탁하듯이 말하자 리암은 거절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조장일 뿐이지 별다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조원들이 한쪽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만 있게 도와주는 역할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빠져 줬으면 했지만,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을 포함한 다른 조원들이 지켜 주면 된다.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괜찮을 터이다.

바르간도 원작의 스토리를 제 입맛대로 바꾸고 있다. 지금까지는 후폭풍이 두려워 크게 역사를 바꾸지 않았으나, 이제부터는 조금 대담하게 가려고 한다.

원작의 메인 여주인공 알리시아. 그녀가 더는 상처받지 않게 하도록.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예비 용사들을 위해서.

"나는 내일 있을 시험에서 둥지를 무너뜨릴 생각이야."

리암은 모두에게 밝혔고.

"이 새끼가 제대로 미쳤네. 요즘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니 그런 괴상한 생각을 하고 다니던 거야?"

"루카이엘 예쁜 말을 좀…! 그런데 리암… 둥지를 무너뜨리다니… 모의 제단이 아니라 실제 제단에 있는 핵을 부수겠다는 말인가요?"

루카이엘은 분노와 헛웃음, 해리아나는 우려를 드러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오필리아는 침착하게 리암의 말이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루카이엘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성을 냈으나 해리아나의 제지로 우선 들어 보기만 하겠다고 의견을 바꿨다.

리암은 짧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말한다.

"알티프를 상대하는 건 아직 우리에게 일러."

알리시아에 대한 건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을 설득하는 데 적절하게 작용하지 못하니까.

리암은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밝혔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원작에서 니켈라는 공포심을 못 이겨 아카데미아를 자퇴하고,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외상을 입는다. 그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흉터가 남는 예도 있었다.

아카데미아가 용사를 육성하기 위한 기관임은 확실하나, 때에 맞는 고난이라는 게 있다. 리암이 원작을 읽으면서 유독 이 시험만큼은 그 시기가 옳지 않게 빠르다고 느꼈다.

아직 제대로 날개도 펴지 못한 새들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는 꼴. 이 에피소드는 옳지 못하다. 좀 더 늦춰지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제거되는 편이 낫다.

…리암은 인지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그는 바르간이 급진적으로 전개를 비트는 걸 목격했고 이 영향을 받고 있었다.

평소라면 기존의 안전한 선로를 밟았을 그이지만, 지금은 더욱 진취적으로 나아간다.

리암의 주장을 듣던 루카이엘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인상을 구겼다.

"야, 귀 파고 똑바로 들어. 이 기말고사는 우리가 있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이야. 나야 전통 따위 그다지 중요시하진 않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다 겪어 온 길이라고."

루카이엘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협하듯 내비쳐졌다. 그는 리암을 뚫어질 것처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우리만 겁쟁이처럼 쏙 빠져서 벌벌 떨고 있으란 말이냐?"

"…그럼, 여기서 추가로 근거를 덧붙일게."

리암은 품에서 돌돌 말려 있던 종이를 꺼내 보였다. 매듭을 풀자 꽤 커다란 면적에 빼곡히 글자가 적혀 있다.

그중 한 부분을 가리킨다.

"이건 작년 실습에서 발생했던 사상자들이야. 다행히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없었지만, 중상을 입은 학생들이 열둘이나 발생했지. 이 중 셋은 용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떠나갔어."

작년의 기록을 살핀 리암은 점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자신의 근거를 뒷받침했다. 개중에는 수십의 사상자와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해도 있었다.

"이 정보는 모두 아카데미아의 도서관에서 기록되어 있는 기록을 그대로 필사한 거야. 도서관에 보관된 책들은 모두 여러 차례의 검증을 거친 서적들이라는 건 알고 있지?"

또한 아카데미아는 모든 기록을 그대로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나, 그래도 결국은 누군가의 필기에 불과하다.

어쩌면 적혀 있는 수치들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가다듬은 언어일 수 있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자 루카이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잠깐, 뭐야. 이러면 또 이상해지는데. 이렇게 확실한 증거와 주장을 갖추고 있었으면 진즉에 위쪽에 말해 버렸으면 됐잖아. 굳이 네가 나서서 둥지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더라도 완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거 아니야?"

리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번에 움직이는데 내세울 '실수와 오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악책이다.

"매년, 이 둥지의 실습을 다른 시험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안건이 올라오고 과반수를 가뿐히 넘는 사람들이 반대를 던지고 있어. 살펴보면 벌써 15년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악순환이지."

이는 루카이엘이 꺼냈던 주장과 비슷하다.

아카데미아가 다른 국가나 집단과 비교하면 월등히 현대의 사상과 비슷한 단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다른 세계였으며, 집단에 담긴 물은 고이기 마련이다.

전통과 예를 중요시하는 교수들이나 관계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며 일어서기에 해당 안은 항상 통과하지 못하고 부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안을 상부에 올리고 마찬가지로 부결된 채, 둥지를 파괴한다? 이는 명명백백하게 의도성을 가진 계획적인 행위라 밝히는 셈이다.

"그래서 극단적이지만 실수와 오해를 가장해서 둥지를 파괴할 생각이야."

이는 알리시아를 위해서이기도 하며, 동시에 미래의 세대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본래는 알리시아와 니켈라를 보호하려 준비한 자료들이나, 조사하면 할수록 시험 자체에 대한 불신과 폐지에 대한 신념이 깊어졌다.

루카이엘은 짓고 있던 인상을 풀곤 짐승의 감각을 확장한 채 리암의 눈을 직시했다.

"진심이다 이거지?"

"진심이야. 욕을 먹을 각오도 되어 있어."

리암은 시험이 시작되고 나서 갈림길에서 자신만 빠져나와 실제 제단으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조원들에게 이걸 밝히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피해가 갈 것이라는 점에 대한 양해와 사과, 시험 도중 갑자기 사라질 자신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할 2차적인 손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쯧. 혼자 멋진 척하기는."

의자에 거칠게 앉은 루카이엘은 다리를 꼰 채 떨었다. 더는 반박하지 않겠다는 그만의 견해 표명이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제단의 위치도 발견하기 어려울 텐데…."

"그에 대한 대책도 준비해 뒀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희는 그냥 모른 척만 해 줘. …부탁할게."

해리아나의 우려 섞인 물음에 리암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설을 통해 실제 제단의 위치는 알고 있다.

혹시 몰라서 그림으로 그리며 되짚어 보기까지 했으니 내부가 바뀌지 않는 이상 찾아갈 수 있다.

리암은 누군가 자신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음을 느끼곤 이를 바라봤다. 수줍음이 많은 니켈라였다.

"나는 리암 도울래…."

그녀는 직접적으로 리암의 행동을 도울 요량이었다.

모른 척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행동하여 핵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려 든다.

"안 돼, 니켈라. 이건 내 억지일 뿐이야. 같은 조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비난을 들을지 모르는데 그 이상으로 피해를 줄 순 없어."

니켈라는 더욱더 강하게 소매를 잡아당겼다.

항상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그녀가 리암과 제대로 마주했다.

"나, 리암을 돕고 싶어."

"...."

니켈라는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었던 완고한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큰 결심의 증거라는 사실이 전해진다.

"니켈라…."

"나도 도울게. 평소에 네가 조장으로 힘들었던 걸 아는데, 귀족으로서 이마저도 모른 척할 순 없지."

오필리아 또한 리암을 가세하겠다고 선언하자 해리아나가 그 뒤를 따른다.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리암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쯧. 다들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는 거 아니야? 저딴 계획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루카이엘의 말이 맞아. 다들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 내 독단 행동이면 족한데 모두가 이 일에 연관되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여전히 반대야. 그리고 해리아나도 그 계획에는 참가하지 않을 거야."

"루카이엘…! 난 리암을 도울 거라니까?"

"안 돼. 아무리 리암의 주장이 옳아 보인다고 해도, 우리가 그 정도의 위험부담을 지닐 필요는 없어."

루카이엘은 탁상 아래에 숨겨져 있는 해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내색하지 않으려 했던 면모를 루카이엘이 그대로 끄집어낸다.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누굴 돕겠다는 거야."

"그래도…."

"리암.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하자."

루카이엘의 늑대의 눈이 리암을 향한다. 그 짐승의 눈은 한층 진지해져 있다.

"우린 조원이고, 네가 바라는 건 우리가 입을 닫고 있는 거야. 맞지?"

"맞아."

"그럼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충분한 거잖아."

"응. 말했지만, 그 이상 너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리암의 입으로부터 다시금 확인을 받은 루카이엘은 잡고 있는 손을 당기며 해리아나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고, 그녀는 착잡한 얼굴이 되었다. 해리아나는 망설이고 있다.

그런 그녀의 남은 손을 잡으며 니켈라가 작게 웃어 보였다. 해리아나를 긍정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리암은 나랑 오필리아가 지킬게."

"...."

"해리아나랑 루카이엘은 다른 방법으로 리암을 도와줘."

남들에게 리암의 계획을 알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그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니켈라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해리아나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뱉어 냈고. 니켈라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곤 잠시 시간이 지나, 모두의 선택이 확고해졌을 때. 모두가 리암을 바라봤다.

리암은 그들 한 명 한 명을 두 눈에 새겼다. 그들에게 더 이상 뭐라고 한들 흔들리지 않을, 확고함이 자리 잡고 있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모두가 리암을 위했다.

"다들…."

고작 3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알고 지낸 짧은 인연이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 리암에게 있어 깊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마워."

리암은 그들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했다.

....

?달달달달.

홀로 방에 있으려니 비공정의 미세한 진동이 리암의 귀에 들렸다.

잠깐의 푸근하고 따뜻함을 가장한 기억.

이는 변모하여 리암의 목을 노린다.

그 몽실몽실한 솜사탕 같은 달콤한 순간은 사나운 단두대가 되어 리암의 목을 내리치려 한다.

쿵쿵. 심장이 아프다.

그 심장을 움켜쥐려 하니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손가락으로 인해 잡을 수 없었다.

"루카이엘… 해리아나… 오필리아…."

리암의 갈라진 목에서 샌 소리와 함께 그들의 이름이 한 명씩 나온다.

감당할 수 없는 죄스러움에, 극도의 절망감에 그 이름을 감히 입에 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겠지만. 억지로 내보였다.

"니켈라…."

마른 목과는 대비되게 리암의 눈에서는 생기 없는 눈물 한줄기가 흘렀다. 눈물에 비치는 건 반투명한 창에 특수 스킬이 개방되었다는 표시뿐이었다.

리암의 숨이 턱하고 막히며 괴로워진다. 심장은 급하게 요동치고 혈액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회전한다.

…다시.

다시 하고 싶다.

다시 그때의 선택을 돌려 그딴 어리석은 사고를 한 과거의 자신을 흠씬 두들겨 패서 죽여 버리고 싶다.

소설이잖아. 이 세계는 창작물이잖아.

페이지를 뒤로 돌릴 순 없는 거야?

그런 스킬은 없는 거야?

정말… 되돌릴 방법은 없는 거야…?

?와장창!

리암이 있는 곳은 난리였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아카데미아로 복귀하는 비공정의 병실. 그가 쓸어 버려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의료 도구.

붕대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는 피눈물을 흘린다. 며칠 전, 그날의 모든 선택과 시간을 후회하며 목 놓아 운다.

"미안해… 미안해…!"

어둠이 내려앉은 병실.

넓은 창밖에서 들어온 빛이 리암의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림자는 한낮의 햇빛을 받을 적보다도 더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끄아아아아…!! 아아아????!"

도돌이표 없는 통곡이 그림자와 함께 춤춘다.

?모든 사건은 1학기 기말고사에서 발생했다.

77화

바글바글한 1학년들.

현재, 교수들을 제외한 몇몇 관계자들과 모든 1학년은 둥지의 입구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다.

처음으로 목격한 둥지를 보고 흥미를 감추지 못하는 이들은 직접 내벽을 만져 보거나 눌러 본다.

생물의 장기와 비슷한 촉감인 그것은 누른 그대로 푹 들어가곤 금세 푸딩처럼 튕겨 나온다.

그 모습이 우습다며 깔깔거리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심도 있는 탐구를 하는 이들도 있고, 앞으로 알티프와 조우하리라는 사실에 굳어 있는 학생들도 있다.

동굴처럼 생긴 둥지의 초입은 다중으로 마법적 장치가 되어 있어 침입자를 공격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벽에서 촉수를 꺼내서 쏘기는커녕, 약간의 꿈틀거림조차 어렵다.

이 둥지의 주인이 제3 위험군, 주교급이었으며 현재 주인이 없는 상태였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하얀 머리칼의 여인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굳세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평온이었다.

"꽤 침착하구나."

알리시아가 알티프에 품고 있는 감정은 극도로 험하다고 봐도 된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 간 존재가 그들이었기에, 비록 사육되는 알티프라 해도 긴장하거나 분노의 편린을 보일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의 반응이다.

"둥지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다스리기 힘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들어오고 나니 차분해졌습니다."

"뭐, 좋다. 어지러운 감정에 이끌려 실수를 범하는 것보다야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게 당연히 나으니."

알리시아는 고개를 돌리어 나를 올려다봤다. 호수와 같은 새파란 눈동자다.

"여쭙겠습니다만, 저번에 말씀하신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은 여전히 2할의 확률로 도래할 것으로 보십니까?"

"확률로는 그러하다. 하지만… 녀석들이 움직인다 한들,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어떻다고 짚어 줄 순 없구나."

그녀는 질문에 응해 주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덧붙인다.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되어도, 저는 도련님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멀리서 별도로 활동하고 있는 브람을 떠올릴 정도로 충직한 자세.

실로 믿음직스러운 발언과 태도라고 볼 수 있으나, 사실 이번의 주인공은 알리시아가 아니며 그녀가 이렇게까지 굳게 다짐을 보일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둥지의 출입을 허용하겠습니다. 미리 공지한 순대로, 차례가 다가올 조는 미리 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둥지의 물컹거리는 벽에 설치된 스피커와 같은 마도구에서 음성이 실려 나왔다.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첫 번째 조, 1반 3조. '리암, 해리아나, 루카이엘, 라반 카롤 오필리아, 니켈라.'는 지금 바로 출발 선상에 서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첫 번째….

한편에서 리암과 그 일행이 움직이는 장면이 포착된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응원하거나 흥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런 와중, 조장인 리암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제법 강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시선과 교차는 오래 지속되지 않고 금방 끝이 났다.

"흠…."

짧은 순간 전해졌던 리암의 정신 상태와 감정을 녀석의 행동반경에 대입하여 고려한다.

상정한 우려의 상황이 발생할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몇 배는 더 높지만…. 어쩌면.

리암의 첫 번째 각성이 2학년 초반에 있을 아카데미아의 비극이 아니라, 이번일 수도 있겠다?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

[케에에에엑????!]

둥지에 가득한 알티프의 끔찍한 비명,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지는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리암 일행은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다.

"오필리아! 1시 방향, 100m 알티프 1체!"

쉐악??!!

공기를 꿰뚫는 오필리아의 활. 근육을 접어 뛰어서 날아들려 하는 사제급 1체의 다리를 정확히 노렸다. 녀석은 다리를 잃어 바닥에 쓰러진다.

"루카이엘! 3시 방향 1체. 해리아나는 6시의 2체에 원소 마법을 날려 줘!"

"명령하지 않아도 할 거였어!"

"네, 알겠어요!"

리암의 지시에, 늑대인간 루카이엘은 오러를 두른 맹수의 손톱으로 두꺼운 알티프의 가죽을 그대로 뚫어 버렸다.

해리아나는 공중에 번개를 얇은 지팡이처럼 형상화하더니 그대로 날려 그들의 까맣게 태워 버린다.

그러나, 한 녀석에 가해진 힘이 약했는지 다시금 돌진하는 알티프 1체.

해리아나는 다급히 마나를 모으며 마법을 사용하려 들지만, 돌연 내벽에서 튀어나온 날카로운 촉수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해리아나??!"

루카이엘의 외침.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달려드는 알티프. 그렇게 해리아나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갈 때쯤.

쿵?!

니켈라가 소환한 바람의 정령이 알티프와 부딪쳐 행동을 저지했고. 그사이의 틈을 놓치지 않는 리암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괴물의 목을 벤다.

파지직.

리암이 검의 지나간 자리에는 허전한 목과 그을림, 약간의 전류만이 남았다. 뒤늦게 붉은 피가 터져 나온다.

이로써 이번 전투도 끝이 났다.

리암은 그 피의 분출을 피하며 모두를 살폈다.

황급히 해리아나에게 달려들어 상태를 확인하는 루카이엘. 놀라기는 했어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자기는 괜찮다며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이를 걱정스러워하는 루카이엘 또한 멀쩡했다.

오필리아는 조금 지쳐 보이기는 했으나, 아직은 전투를 이어 나가는 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동굴 형태의 구조에서는 활을 사용하는 그녀가 활약하기에 불편함이 많아, 다른데 마나가 많이 소모되었다.

"리암… 피."

"아."

니켈라는 손수건을 꺼내 리암의 얼굴에 묻은 알티프의 피를 닦아 주었다.

되도록 피한다고 해도 전투 중에 피가 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곧 다시 더러워질 테지만, 니켈라의 성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다 됐다…."

피를 닦아 낸 니켈라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더니 곧 자기가 한 행동을 떠올렸고, 머리를 감싸고 있는 후드를 잡고 내려 표정을 숨겼다.

그 모습이 마치 껍데기로 들어간 소라게를 보는 듯했다.

"리암, 슬슬 네가 말한 구역에 다 온 거 아니야?"

해리아나와 함께 다가온 루카이엘이 물었다. 전투를 끝낸 그의 손톱은 도로 짧아져 있다.

리암은 원작의 정보를 통해 직접 작성한 꾸깃꾸깃한 지도를 꺼내 보였고 주변을 둘러보며 비교한다.

현재까지 확인한 구역 대부분이 지도와 일치했다.

제법 상세히 적혀 있던 소설의 묘사라고 해도 전부가 적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라, 비어 있는 구간이 있었고 이를 허수라 생각해 제외하면 전부 같았다.

지도를 보던 리암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거의 다 왔어. 곧 여섯 번째 갈림길이 나올 거야."

리암은 상황을 정리했다.

내부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들을 방해하는 함정이 많았다.

벽에서 촉수가 튀어나오는 건 기본이고, 벽 자체가 그대로 이들을 가격하는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발을 디디고 있는 바닥이 솟아올라 천장과 부딪히는 일도 있었다.

함정만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사제급 알티프와 협공을 시도하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잠깐 쉬고 갈까?"

"뭔 개소리야. 급한 거 아니었어?"

"각 조의 출발 간격이 길어서. 아직은 괜찮아."

알리시아 일행이 출발하기까지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아카데미아 측에서도 선발대가 쓰러트린 알티프의 사체나 보급을 이루어야 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리암은 물통을 꺼내 루카이엘에게 던졌다. 그는 별말 없이 공중에서 이를 받아 내곤 옆에 있던 해리아나에게 건넨다.

벌써 이들 일행은 세 차례나 알티프와의 전투를 벌였다. 조금은 쉬어야 이후의 진행이 완만할 터이다.

조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잠깐의 휴식에 들어간다.

리암은 적당량의 물로 입을 충분히 적신 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소량의 물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러는 사이 다시 생각은 깊어져 간다.

본래의 시험대로라면 여섯 번째 갈림길이란 시험에 없었다. 일직선으로 들어가는 코스이지 다른 통로는 없다.

…정확히 말해, 인식되지 않는다.

다중 마법 술식이 발동하는 비밀의 통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찾아낼 수 없다.

그 끝에 실제 제단이 위치하는 방이 있었기에 시험을 치르던 학생들이 헷갈려서, 혹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 둔 장치다.

그러나, 리암 일행이 노리는 건 시험의 통과가 아니라 붕괴.

리암은 여섯 번째 갈림길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위치, 걸린 마법의 종류까지 알고 있다.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다 한들 파훼법을 알고 있는 이상 문제는 없다.

지금까지는 순조롭다.

운 좋게 바람의 흐름이 따라 주는 날에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만 다시 가 보자."

리암이 뱉은 한마디의 말에 모두가 분주히 움직인다.

설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들과 함께라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솟아 올라온다.

이들은 처음부터 소꿉친구였던 에밀리 같은 경우를 제외하곤, 빙의된 리암이 처음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친우이자 동료인 이들과 함께 둥지의 더욱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

***

둥지 밖에 마련되어 있는 교수들과 관계자들의 집합소.

아쉽게도 현재 마법과 기술력으로는 초입을 제외한 둥지 내부의 직접적인 통신이 불가한지라, 클래스전과 같이 모든 학생을 살필 수 없다.

시험장으로 개조를 거쳤다고 해도, 마력의 흐름이 비정상적인 둥지의 내부에서는 사역마의 힘으로도 마법으로도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둥지 안에 배치된 관계자들의 사역마의 직접적인 이동을 통해 외부에 있는 집합소에 소식을 전하는 식이다.

"이상하군."

"갑자기 왜? 배라도 아파? 화장실이라면 비공정 안에…아야야!"

루이사는 파울라의 입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볼을 잡은 손가락과 맞닿은 부위가 지문처럼 붉어진다. 쭉 늘어나는 파울라의 입

"으함… 그함, 그만! …아이! 아파 이년아!"

루이사의 꼬집기에서 벗어난 파울라는 눈물을 글썽거렸고, 쓰라린 볼을 감싼 손을 떼지 못했다.

그런 파울라의 반응을 무시하며 루이사는 자기 턱을 매만졌다. 다른 한 손으로는 작성된 정기 기록표를 보고 있다.

"뭐야, 왜 그러는데? 왜 혼자 심각해지는 거야."

"실제 제단을 지키고 있는 인원들로부터 오늘치 보고에 누락이 있어. 6시간 주기로 올리게 되어 있으니까…. 2분 전에는 왔어야 하는데."

"2분 가지고 너무 깐깐하게 구는 거 아니야? 그거 뭣 좀 하다가 늦을 수도 있지."

"매일같이 교대로 이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이야. 앞선 기록을 봐도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사역마가 도착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2분이 넘게 연락이 안 되는 상황…."

"음… 아… 그러게? 듣고 보니 좀 이상한 거 같기도 하네. 마치?"

"?문제가 발생한 것처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루이사와 파울라의 대화에 난입한 남자. 그는 2반의 담당 교수인 루센이었다.

며칠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사람처럼 항시 퀭한 눈과 짙은 눈그늘을 지닌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을 이어 갔다.

"본래 제단 담당인 관측자들의 사역마에게는 시간이 새겨져 있어, 특이 사항이 없을 때는 자동으로 미리 지정해 둔 보고를 올리는 구조이지요. 그런데도 오지 않았다는 건… 갑작스러운 변화가 발생했거나, 혹은…."

루센의 퀭한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사역마의 주인이 사망했거나."

"에, 에이… 그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방심했다고 해도 제3 위험군에게 당할 사람들도 아니고…. 그렇지 루이사?"

"...."

루이사의 표정이 변화한다.

뾰족하게 찢어져 사나운 눈매에 음각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유 모를 소름이 돋는 그 순간.

『와, 먹이가 한가득 있어.』

사람의 언어를 흉내 내는 이질적인 목소리.

루이사의 동공이 확대되며 급히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린다. 순식간에 전투준비를 마친 그녀?.

?콰가가가가가가가각!

"루이사????!!"

갑자기 돌격해서는 그대로 루이사를 들이받은 채 날아가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파울라는 지팡이를 들고는 마법을 시전한다. 루셀과 주변에 있던 교수 두 명도 황급히 각자의 무기를 들어 적을 겨냥한다.

방금 루이사와 함께 날아간 개체를 포함하면 파악된 적은 다섯.

『저 녀석은 성격이 너무 급해서 탈이라니까. 제일 강해 보이는 놈을 가져간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내버려 둬. 한두 번이야?』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들은 생명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변질되어 있다.

그중 가운데 서 있는, 영화 속에서 영국 신사가 쓸 법한 높은 탑햇을 쓰고 있는 어떤 이가 말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카데미아의 교수 여러분. 저희는 이번에 여신교에서 당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된 신자들입니다.』

그는 사람의 예의를 갖추었다.

모자를 들쳐 보인 이마에는 또 하나의 눈이 있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이 또한 여신님의 뜻. 당신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여신교의 번영을 위해.』

남자의 형태를 한 그의 눈은 초승달 모양이다.

『그 더러운 피를 제단에 바쳐 주시지요.』

7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