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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반성문이라니.

현실 세계에서도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것을. 빙의하면서까지….

천하의 바르간이 되었다고 해도 이건 피해 갈 수 없었다.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를 비교하니,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괜히 제가 나선 것 때문에 이렇게나 험한 대우를…."

울기 직전인, 아니 사실상 울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울상인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걸었다.

지금 나와 그녀는 반성문을 모두 제출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이 여리다 못해 물러 터진 녀석이 자꾸 귀찮게 군다.

"내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즐기지 않음을 알 텐데 계속 시끄럽게 우는구나."

반성문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눈시울을 붉히던 그녀는 구슬구슬 방울진 눈물을 떨구며 반성문을 작성했다.

하도 산만하게 하기에 그만 울도록 명령까지 했는데 보다시피 이렇다. …그나마 뭐라 해서 이 정도인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도련님의 명성에 먹칠했다는 걸 상기할 때마다 자꾸… 폐가 되지 않으려 했는데…."

하아⎯.

이 답답한 것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까짓 지적 좀 당하고 반성문 좀 쓴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성장 좀 했다 싶으면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좀 강해졌다 싶으면 바로 쓰러지니 애도 아니고 손이 과하게 간다. 이런 걸 히로인이랍시고 감싸고 있어야 하다니.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알리시아의 이마에 기습적으로 딱밤을 때렸다. 상당히 강하게 쳤다.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아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새빨개진 이마에 관심을 전혀 두지 않은 채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아픈 연기는 이제 접기로 한 것이냐?"

"...."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한다. 가끔은 채찍이 아니라 당근도 줘야 할 필요가 있다.

"잘했다. 이것아."

"...."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알리시아는 자신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혹은 반대의 의미로 이해했거나.

곤란하군.

이 정도까지 당근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네 행동을 칭찬한 것이다. 알리시아."

그녀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이 눈만 보더라도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니터처럼 드러난다.

"그렇게 이상하다는 듯 볼 것 없다. 네가 들은 것 그대로다."

알리시아를 칭찬했으면 칭찬했지 욕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욕하고 싶은 건 이런 무른 모습이지.

"너는 네 본분을 다했을 뿐이다. 학생이라는 신분에 현혹될 법도 했거늘,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은 것을 어찌 나무라겠느냐."

리암이 나를 위협할 소지가 있는 마나를 끌어오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 알리시아가.

여리고, 배려하기를 즐기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히로인이.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악역, 바르간을 위해서.

"그럼 내가 뭣 하러 거짓을 뱉겠느냐."

그때의 알리시아는 지금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득 살기를 쏟아 냈다. 남을 위협했다. 그것은….

"정확히 내가 바라던 그림이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거라."

"…!"

알리시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숨이 가빠지고 한가득 감정의 결정체가 모여드는 것이 보인다.

'설마 여기서 머무르게 하는 불상사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을 말끔히 지워 주듯, 알리시아는 고이 담긴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그녀가 눈에 잔뜩 힘을 주자 눈썹에 각이 선다. 입은 우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상태다. 눈물을 참아 내는 얼굴인가.

"거기서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떨군다면 오늘 훈련의 양을 배로 늘릴 것이다."

"끝까지 버티겠습니다…!"

더욱 필사적이게 된 알리시아.

그렇게 한 차례의 파도를 견뎌 낸 그녀는 겨우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는지 조금이나마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이제야 좀 갈 길을 마저 갈 수 있을 것 같다.

"진정됐으면 가도록 하자. 오늘 저녁에는 환영회가 있다고 했으니 그 시간 동안에는 단련을 못 하지 않느냐."

"환영회…! 맞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어서 가서 마법을 연습해야만 합니다!"

환영회라는 말을 듣고 안색이 확 트인 알리시아,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한 사고를 가진 것 같다.

"오늘이야말로 도련님께서 알려 주시는 비기(祕器)를 터득하겠습니다."

"과장이 심한 녀석이구나."

우리가 기숙사로 향하는 길은 다소 소란스러웠다.

25화

에밀리보다 먼저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리암은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오늘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다. 마음이 심란해진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강의실에서 확인한 바르간의 스테이터스.'

봤을 때 너무 놀라 정확한 수치까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높은 숫자들이 나열돼 있었다는 것과, 남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점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다.

리암은 작은 손거울을 바라보며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독특한 소리를 내며, 컴퓨터의 창이 뜨듯 투명한 사각형의 무언가가 시야의 한쪽에 나타난다.

미리 띄워 놓은 채 끄지 않은 에밀리의 스테이터스와 함께 보인다.

⎯ 띠링!

본인의 스테이터스를 열람합니다.

리암 (Lv.32)

힘 : 4.4/10 ⦁ 체력 : 4.4/10

마력 : 3.2/9 ⦁ 정신력 : 3.9/9

방어력 : 4/10 ⦁ 민첩 : 4.6/10

에밀리

힘 : 3.5/10 ⦁ 체력 : 3.9/10

마력 : 2.9/10 ⦁ 정신력 : 2.9/10

방어력 : 3.3/10 ⦁ 민첩 : 4.3/11

왼쪽에 있는 숫자가 현 능력치. 오른편의 수가 한계치다. 설명서 같은 게 있지는 않으나 레벨 업을 통해서 올라가는 것은 현 능력치뿐이었다.

일전에 만났던 파울라가 자신을 보고 잠재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 까닭은 아마 남들에게는 없는 이 레벨 업 시스템의 탓일 것이다.

만약 그녀가 말하는 잠재력이 한계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훤히 보였을 것이니까.

에밀리와 비교해도 한계치가 부족하다. 이것은 리암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신체의 한계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일반적이지 않아."

바르간의 스테이터스는 괴이했다.

현 능력치와 한계치가 어마어마했다. 확인한 신입생들이 현 능력치가 보통 3점대 중후반이라는 점과, 대부분의 이들의 한계치가 최대 10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는 비이상적이다.

한계치는 어디까지나 최대치일 뿐이니, 그가 한계치까지 성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었던 항목은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

독보적으로 돋보였던 건 정신력.

정신력은 마나 총량을 의미하는데 바르간에게 적혀 있던 문자는 이랬다. 나머지는 잘 기억 안 나도 이건 잊을 수 없다. 어쩌면 나머지를 정확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게 이 탓일 수도 있다.

정신력 : ? / ?

물음표라니. 현 능력치와 한계치가 모두 물음표라니. 확인이 불가하다는 뜻일까.

자신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표본이 적었기 때문일까. 소설의 내용이 조금 더 전개되면 비슷한 케이스들을 발견하곤 이해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불확실하다.

앞으로의 어떻게 전개가 될지 모르겠다.

바르간을 만나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비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오죽 답답하면 오늘 그와 직접 대면해 이야기하려고 했을까.

"결국은 실패했지… 근데 알리시아는 또 어떻게 된 건데."

아직 알리시아와 면식도 제대로 없었는데 바르간에게 저항하고자 마나를 모으니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원래 알고 있던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행위였다. 그 선하던 인물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나오다니. 그리고 왜 검을 쓰는 거지.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고.

"모르겠다. 모르겠어."

리암은 의자에 완전히 기대며 천장을 바라봤다.

아카데미아의 물건이라 그런지 의자에 달린 쿠션이 푹신하고, 천장의 실내장식이 고급지다.

"흐음…."

뭔가.

갑자기 바보가 된 기분이다.

샤락⎯.

생각이 멈추자, 커튼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머리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고급진 드레스를 차려입었다.

그러나, 환한 옷과는 달리 안색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알리시아와 다툼이 생겨 버린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다.

"내키지 않으면 방으로 돌아갈래?"

리암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그러자 에밀리는 고개를 저으며 리암과 몸을 가까이했다.

"으응. 모처럼의 환영회인데 빠지면 안 되지."

"하지만…."

"어서 가자."

에밀리가 먼저 리암의 손을 잡고 끌었다. 그녀의 감정을 느낀 리암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

잠시 정지되어 있던 사고가 이어진다.

혼란으로 가득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면 손에 닿는 일부터 해결하는 게 맞지 않을까.

괜찮다.

괜찮아.

다시 냉정함을 되찾고 하나씩 맞춰 가자.

이 비틀어져 가는 이야기의 원인이 어떠하든 변하지 않는 게 있으니까.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너무나도 압도적인 악역이자 사건의 원흉으로 추정되는 인물.

완벽에 가까운 천재로 불리는 그.

소설에서도 그가 벌였던 최후의 발악에서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만큼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강력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완벽에 가깝다는 말은, 완벽하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그 강렬했던 악역 바르간은 결국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두렵지 않다.

이제부터 보여 주면 된다.

모든 것을 원상태로 되돌리자.

할 수 있다.

왜냐.

"…리암?"

리암은 에밀리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준다. 그것은 침울한 그녀에게 힘을 건네기 위한 제스처이자.

'바르간, 나는 너의 약점을 알고 있다.'

반격을 위한 다짐이었다.

***

"화려한 옷들, 수많은 음식, 값비싼 장신구들과, 음악이라니…! 도련님, 설마 저는 이미 죽어 천국에 온 것입니까?"

"알리시아, 하나부터 셋까지 천천히 세 보아라."

알리시아는 주변에 물음표를 가득 채우면서도 순순히 말을 따랐다.

"하나."

"호들갑 좀 떨지 말거라. 네가 있던 저택에서도 이미 충분히 봐 왔던 것들이 아니냐."

"두, 둘."

"세상에 천국과 지옥은 없다만, 설령 있다고 한들 천국에 갈 것을 확정시해서 말하는구나. 어처구니도 없지."

"…죄송합니다."

"뭐 하나, 어서 셋을 말하지 않고."

알리시아의 들떴던 목소리가 꺾이며 자신감이 없어 보이게 되었다. 나의 시선을 피하며 남은 숫자를 부른다.

"셋…."

"체통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 명성에 먹칠할까 두려워하는 것을 연기한 주제에 이런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다니. 대체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도련님, 아무래도 저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끝내 이루지 못한 마법을 연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미리 말하는데.

알리시아가 이곳에 오기 전에 당당하게, 반드시 비기를 터득하겠다니 뭐니 말해 놓고는 결국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고 성내는 것이 아니다.

그녀 정도의 천재성이라도 어려운 일이었으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 당연한 거지.

…음. 그런데 하지도 못할 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밀어서 남을 기대하게 하는 건 잘못된 거 아닌가? 헛된 희망으로 기다리는 사람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아, 다시 말하지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단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의문이 생겼을 뿐.

"그럼 도련님, 내일 아침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이 녀석이라면 정말로 돌아가서 마법을 연습할 거란 말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비꼬는 걸로 받아들였을 텐데 얘는 도저히 그게 안 되네.

"…됐다. 그냥 있거라. 인생에서 한 번 있을 환영식까지 참가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못되지는 않았다."

"도련님은 못되지 않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으냐."

알리시아랑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가끔 기가 빨릴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 순간. 의도는 알겠는데 알아서 더 힘들다.

새 옷보다는 헌 옷이 놀기 편한 원리인가.

"아무튼, 지금 이곳에서는 마음껏 놀도록 해라.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몇 없는 진귀한 경험이니 즐기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쯤은 알아서 하거라. 저기에 있는 남자 무리와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도 되고, 아니면 너와 비슷한 처지의 동성 친구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친구… 말입니까?"

말하고 보니까 생각난 건데, 원작에선 알리시아와 에밀리가 연적이기도 했지만 둘도 없는 절친 사이였다. 지금은… 뭐, 어쩌다 보니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같은 조원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방법이다."

세레나는 참여하지 않았고, 핀은 추천하지 않으니. 결국에는 네가 신경 쓰고 있다면 에밀리에게 말을 걸어 보는 안을 등 떠민 것이지만.

"에밀리 씨가 과연 저를 받아들여 줄지 모르겠습니다."

어쩐 일로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알리시아가 살짝 슬픈 눈을 뜨며 말했다.

"분명, 저를 싫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에밀리의 소중한 존재를 위협했으니까. 순간적인 충격이 그녀에겐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그 말씀은…."

달가운 사실은 아니나, 사람은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행위에는 감정이 함께한다.

특히 에밀리 같은 경우는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는 일이 빈번한 인물이다. 아마도 그때 알리시아를 당장에라도 해칠 것처럼 노려봤던 이유는 순간적으로 감정이 터져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시간도 좀 지났고, 리암에게서 화해하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을 테니 심리적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리라 짐작된다.

"나는 네가 누구와 친하게 지내든 지내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의 앞날에 방해될 것 같으면 당장에라도 잘라 내겠지만, 그 정도는 감히 그림자도 내밀지 못하니까."

"...."

알리시아가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본다. 이젠 이런 시선에도 익숙해졌다.

물론 익숙해졌다고 해서 맞대응을 해 주지는 않지만.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거라."

잠시 정지해 있던 알리시아가 얼떨결에 고개를 떨구듯 작게 까닥인다. 그러곤 흐트러져 있던 초점이 응축된다.

어떤 선택이든지 하나의 길을 고른 것으로 보인다.

"도련님, 감사합니다."

그녀가 말을 잇는다.

평온한 얼굴로. 은은하게 핀 꽃처럼.

"저는 항상 중요한 순간에 도련님에게 기대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각!

알리시아가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건 없었다. 총총걸음으로 기분 좋게 튀긴다.

"역시 도련님은 못되지 않으십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알리시아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치고는 드물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쯧쯧, 혼자서 끙끙대더니.

결국엔 저렇게 신나서 갈 것이었으면서.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군. 애들은 질색인데 말이지."

나는 주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잔에 담긴 붉은 빛깔의 포도주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꽤 괜찮은 품질의 포도주 같다. 향기가 예사롭지가 않다. 약간 독특하기도 하고. 귀한 것들은 많이 접해 봤지만 이건 또 어떤 맛이 날까.

그렇게 잔에 입을 대려던 찰나. 모처럼 생긴 나의 여유를 방해하는 이가 생겼다.

"흐음. 쟤가 걔구나?"

조그마한 체구에 생기 있게 빛나는 머리칼.

어울리지 않게 고혹적인 눈매와 살짝 앳된 톤.

"별일이군. 네가 나를 다 만나러 오다니."

"연기하지 마 슈겐하르츠.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잖아. 오기 싫은 걸 억지로 참고 또 참아서 온 거야."

"그거 영광이군."

트로아 제국의 명문가인 슈겐하르츠의 자손 앞에 서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팔짱을 낀 채 거만함을 보이는 여자.

그녀의 새초롬한 목소리가 귓구멍에 화살처럼 꽂혀 들어온다.

"정말… 내가 왜 너 같은 거랑 엮여 가지고."

"꼭 그렇게 말을 해야만 하나. 다름 아닌 우리 사이에 말이다."

트로아 제국에서 슈겐하르츠 다음으로 명성 높은 가문.

포트레트 본가의 차녀.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그녀는 바르간과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이자.

"그런 말 좀 하지 마. 소름이 돋으려고 하니까."

"계속해서 섭섭한 말을 뱉는군. 그런 발언을 이어 가도 괜찮은 거냐. 가문 사람들이 들으면 슬퍼할 것이다. 약혼녀."

약혼을 한 사이다.

26화

"정말 죄송했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알리시아가 고개를 완전히 굽힌다.

주변에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당황하던 리암은 급하게 그녀의 행동을 만류했다.

"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일단 고개 드세요!"

"하지만…."

"이러실수록 제가 오히려 죄송해서 그래요."

알리시아는 부족하다는 기색을 내비쳤으나 리암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부담스러워했다.

그의 제지에 알리시아는 다시 허리를 폈다. 시선은 그를 직접 보지 않고 살짝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전에 보여 줬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리암은 어쩐지 약간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제가 억지로 일을 진행하려다 생긴 불상사였어요. 알리시아 씨가 이렇게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목에 검을 들이미는 폭력을 행했어요. 이건… 간단히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아뇨, 다친 것도 아니고 위협에서 그쳤잖아요. 그리고 알리시아 씨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네…?"

자신감 없이 바닥만을 내려보던 알리시아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며 아리송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리암은 겨우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슈겐하르츠에서 일하게 되셨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싫든 좋든 그 가문의 사람을 보호해야 했겠죠."

"아… 네…."

"제가 너무 성급하게 그를 대했으니 바르간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불쾌할 만했다고 생각해요. 서로 일면식을 나눈 적도 없는 사이였으니까요."

"...."

"알리시아 씨?"

어째서인지 알리시아의 기분이 살짝 상한 것으로 여긴 리암은 그녀를 불렀다.

알리시아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바로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지만, 순간적으로 보인 얼굴은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리암의 사고가 길어지는 것을 막듯 사과를 이어 나간다.

"에밀리 씨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제 행동으로 분명 상처를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알리시아는 리암과 거리를 벌리며 멋쩍어하고 있던 에밀리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애처로운 눈빛이 이어지자 에밀리도 더 이상 모른 척하기는 힘들었다.

"아, 진짜 부끄럽게. 저도 괜찮아요. 그야 물론… 리암을 해하려 한 건 화가 났지만, 저도 욕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알리시아 씨를 위협했으니까요."

"에밀리 씨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대한 것에 대해선 입이 열 개라도…."

"아, 아아! 이제 끝! 우리 그냥 없던 일로 해요. 같은 조라 앞으로 얼굴도 자주 마주칠 텐데 그때마다 어색한 건 질색이에요."

알리시아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을 두 손으로 막는 에밀리. 다소 붉어진 얼굴로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다.

알리시아가 말을 이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밀리는 그녀의 입에서 손을 떼 원위치로 돌리다 멈췄다.

그대로 내미는 한 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이걸로 다 잊자. 나도 미안했어. 그리고…."

그녀는 쑥스러워했다.

"그… 뭐야, 그, 그거. 이런 상황에서 좀 웃기긴 한데. 크흠! 왜 그거 있잖아 그거…."

알리시아는 멍하니 그녀가 내민 손을 바라봤다. 처음 놓이는 상황에 어찌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 그거… 그게 뭘까요."

"…아 진짜 쪽팔리게."

에밀리가 알리시아의 손을 덥석 잡는다. 고개는 옆으로 돌린 채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다.

"이제 무슨 뜻인 줄 알겠지…?"

"아아…!"

알리시아는 에밀리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했다.

토끼같이 놀란 눈을 하고는 에밀리의 손을 맞잡고 흔든다.

알리시아의 순진무구한 반응에 에밀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우리 서로 반말하자. 나이도 같은데."

"반말이요? 반말… 그렇죠, 반말을 써야 하겠죠…?"

"존댓말이 편하면 써도 되고. 그냥 편하게 불러."

"…으음."

알리시아는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곤 말했다.

"…반말을 써 본 적이 없어서. 노력은 해 보겠지만, 우선은 존댓말을 쓸게요."

"전에도 말했지만… 정말 여러 가지로 대단하네…."

에밀리가 알리시아의 놀라운 성격에 혀를 내두르고 있자 파티장의 공간에 변화가 생겼다.

"어?"

주변의 조명이 어두워진다.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한 곳을 향해 모여들며 기대감이 깃든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딱 보니까. 그거네. 시간도 마침 된 거 같고."

알리시아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자 에밀리가 대답했다.

"그거요?"

"응. 무도회 말이야. 이번 개막은 입학 성적 1위부터 10위까지가 짝을 지어서 춘다고 했으니까 그 바르간… 님? 아무튼, 그 사람도 있을 텐데 몰랐어?"

"네, 저는 들은 바가 전혀…."

1층 중앙 스테이지에 조명이 쏠린다. 원형의 발판을 중심으로 신입생들이 무리 지어 서 있다.

"우리 위치가 좋았네. 마침 무대가 잘 보이는 2층에 있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리암."

알리시아는 발을 내디디며 모든 인파가 주목하고 있는 무대를 가까이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하는 열 명의 주인공들.

남자 다섯. 여자 다섯.

정확히 성비도 같아 짝이 없는 인원이 없었다.

무대에서 바르간과 그의 짝이 함께 인사를 한다.

관객들은 약혼자끼리 짝을 이루었다며 더욱 열기를 올린다.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로 만든 것 같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미남미녀. 두 사람을 엮는 약혼이라는 관계.

바르간이 입학식에서 했던 발언도 까먹을 정도로. 고고한 두 사람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풍기고 있었다.

"저 사람은 저기에 있어도 눈에 띄네. 아, 나쁜 의미는 아니었어. 오해하지 말아 줘."

에밀리의 해명하는 듯한 말이 알리시아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알리시아의 시선은 오로지 바르간을 향하고 있었다. 완전히 박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무거운 소리를 내는 현악기가 무도회의 시작을 알렸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던 회장이 감탄사로 뒤덮인다.

"오, 오오!"

"다들 기품 있는데?"

주인공들이 무대를 종횡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것처럼 자유롭게.

한 번의 스텝이 밟힐 때마다 움직임이 크다. 옆 사람과 부딪힐 듯 부딪히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

남성은 파트너를 리드하고, 여성은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도 화사함을 자랑한다.

곳곳에서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처럼. 화려하다.

바르간과 그의 파트너는 특히 호흡이 잘 맞았다.

강압적이고 제멋대로가 아니다.

확고하지만 부드럽게. 상대가 헤매지 않으면서도 불쾌하지 않게 움직인다.

신장 차이가 꽤 났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 본 사람처럼 둘은 서로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닮았다.

고혹적인 눈매. 자신감 있는 분위기.

그러다가 종종 서로 귓속말을 나누기도 한다. 시끄러운 회장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

바르간은 살짝 미소 짓는다.

평소에 남을 비웃기 위해 지을 때와는 또 다른 웃음이다.

"...."

무대가 끝날 때까지. 알리시아는 가슴 한구석에서 왠지 모를 저릿함이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

"정신 차려라, 알리시아."

"앗!"

청명한 소리가 울린다.

오늘도 알리시아의 이마에 붉은 점이 생겼다.

지금의 상황을 처음 목격한 에밀리는 놀라 알리시아를 감싸 안았다. 나를 노려보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며 나무란다.

나는 어이가 없어 답했다.

"내가 내 시종에게 벌을 주는 것이 뭐가 잘못이란 말이냐. 그리 아프지도 않으니 괜히 시비 걸지 말거라."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소리 못 들었어? 난 무슨 두개골 부서진 줄 알았어!"

"호들갑스럽군."

"이…!"

에밀리는 더욱 발끈하여 대항하려다 알리시아가 막자 기세를 죽였다.

그나저나, 저 녀석 어제부터 알리시아한테 말 놓더니 오늘은 나한테도 그런다. 어차피 겪을 일이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만 한낱 평민한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잠시 딴생각에 잠겨 도련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했습니다."

"그건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알리시아."

"…맞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두 번 말하는 건 싫어하는데.

가장 중요한 녀석이 놓쳤으니 다시 말해 줘야 한다. 대체 이 중요한 순간에 뭔 딴생각을 한 건지 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해 줄 테니 잘 듣거라."

나를 보고 있는 조원들에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지금부터 말할 것을 위한 필요 인원이다.

"나는 '연구회'를 만들 것이다. 당연히 너희는 전부 들어와야 하고."

"연구회라고 하시면…."

아카데미아의 동아리라고 보면 된다.

다만, 현실 세계의 동아리보다 더욱 체계적이며 전문적이라는 게 차이점이지만.

"연구회의 주제는 '개인 역량 발전'이다. 쉽게 말해, 너희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라는 뜻이지."

"아까도 말했지만, 왜 우리가 강제로 그 연구회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핀과 함께 가장 조에 도움이 안 되는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망발을 뱉는 것이냐."

"그, 그건…!"

에밀리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일으킨 몸을 다시 가라앉힌다.

그래도 기본적인 개념은 탑재되어 있는 것이라 다행이다.

알리시아는 손을 들며 발언권의 기회를 잡으려 든다.

최근 그녀가 아카데미아의 수업을 받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관습이다.

"말하거라."

"도련님께서는 학생회에 들어가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입학 성적 1위부터 5위까지는 학생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아…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벌레 씹은 표정을 하자, 알리시아가 사과로 말의 마무리를 지었다.

학생회에서 제안은 왔지.

하지만.

"그런 백해무익한 곳은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그 집단의 현 우두머리가 '그 녀석'인 상황에서는 더욱이.

지금은 조원들의 수준을 머리채 잡고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이며, 훗날에 완성될 그림의 밑 작업이기도 하니 이렇게 나가는 것이 맞다.

"저는 좋습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할 지경입니다!! 바르간 님께서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으엑, 얘 또 이러네. 어? 세레나, 너도 설마 들어갈 거야?"

"...."

핀의 과한 반응에 에밀리는 기겁했고, 조용히 있기만 하는 세레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세레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만을 작게 끄덕였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은 바르간 님의 발목을 잡는 처참한 실력이지만 기필코 언젠가는!"

"핀, 네 열의는 알았으니 그만 다물거라."

토이렌 트로아 핀.

귀족이긴 하지만 변변치 않아 별다른 지원을 못 받은 녀석. 열정만은 항상 최대치로 차 있는데 별다른 성과는 없는 슬픈 조연이다.

핀은 원작에서도 바르간과 같은 조였는데 이번에는 순위에 다소 변동이 생겼음에도 또다시 같은 조가 되었다.

게다가, 놀랍게도.

원작과 동일하게 입학 성적 꼴찌.

이것은 녀석에게 있어 처음으로 받은 성적이었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그가 꼴찌로 입학한 것이 두 번째였다.

그럼 이렇게 지지부진하다가 마지막에 재능을 개화해서 빛을 보느냐고?

아니. 전혀.

쏟아붓는 노력은 막대하지만, 전혀 보답받지 못한다. 재능이 정말 지독할 정도로 없는 놈이다.

"연구회… 그래 좋다 이거야. 수석님께서 직접 우리를 위해 애써 주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에밀리가 말을 잇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 주겠지만, 의문점을 지울 수 없다는 듯.

"뭣 때문에 이러는 거야? 단순히 앞으로 함께할 조원들의 수준을 올리기 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주제도 모르는 것이 말은 더럽게도 많구나.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란 판국에."

"…주제도 몰라서 미안하지만. 일단 질문에 답변을 주면 안 될까? 응?"

여전히 싸가지가 없는 녀석이지만.

그래 좋다. 말해 주마.

"이걸 안 하면 너랑 핀은 1년 뒤에 죽는다."

27화

지금으로부터 1년 후.

용사들의 주적, 알티프(Artife)가 아카데미아를 급습한다.

아카데미아에 전례 없는 비극이 도래한 것이다.

알리시아가 말하던 붉은 괴물들.

그들은 부르는 정식 명칭인 알티프. 그들의 세력은 전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며, 지금도 실시간으로 수를 불려 나가고 있다.

아카데미아를 덮치는 붉은 파도에 2학년이 된 주인공 일행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단단하게 아카데미아를 보호하고 있던 방어 체계는 파괴되고, 수많은 학생이 학살된다. 특히 그 시기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절반 정도가 사망한다.

2학년들도 상당수가 죽음에 이른다. 1학년들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었으나 결코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망한 대부분의 이들은 기존에 뒤떨어졌던 이들.

에밀리와 핀도 그 무리에 속해 있다.

히로인이었던 에밀리는 죽는 장면이 정확히 묘사되어 있었으며, 단순 조연에 불과했던 핀은 나중에 죽었다고만 명시되었다.

평소 에밀리라는 캐릭터를 보고 의아했을 수 있다.

그녀는 주인공인 리암을 연모하지만 알리시아처럼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며, 성격이 완만한 것 또한 아니다.

그런 그녀가 히로인이라니. 어떤 이가 좋아하겠는가. 누가 좋은 시선으로 보겠는가.

그래서인 것일까.

그녀는 죽는다.

정확히 말해, 죽어서야 도움이 된다.

그녀의 죽음에 리암은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분노에 포효하며 각성한다.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고, 안일했던 지난 시간을 반성한다.

그녀는 주인공의 성장을 도와주는 발돋움 판이었다.

참혹한 전개지.

리암의 각성과 아카데미아의 비극은 이야기의 분위기가 매우 전환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렇게 깨달았다.

내가 빙의한 이 소설의 배경을 결코 밝지 않다. 주연이라고 해서 반드시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조연은 말하면 입만 아프다.

예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무리하지 않는다.

무리란 목표치에 비해서 과하게 임하는 것.

나는 평소 수면 시간을 2시간으로 잡았다.

틈만 나면 마력을 다스리며 자신을 함양하는 데 집중한다.

밑 작업을 하며 시기를 기다린다.

부족하면 부족했지 절대 과하지 않다.

내가 마주해야 할 앞으로의 전개란 그런 것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넘긴 에밀리는 아마도 1년 후에…."

죽으려나.

하긴, 그것도 괜찮기는 하지. 그렇게라도 도움이 된다면야.

핀 녀석은 잔뜩 긴장한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는데, 과연 어떨지.

"음?"

필수 교양 수업을 듣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자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여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찡그린 표정을 바로 하며 나를 무시하려 든다.

이거 또 섭섭하게 하시네.

"어차피 같은 수업인데 함께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주위의 시선도 있으니 말이다."

"...."

"환영회 무대에서는 둘도 없는 호흡을 보이지 않았느냐. 나는 그때 네가 나에게 온전히 마음을 연 것으로 보았다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약혼녀인 그녀가 당돌하게 대응한다.

단어 하나하나에 가시가 돋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한 거였잖아. 가문만 아니었다면 내가 너를 찾아갔을 일도 없었을 거고, 억지로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출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런 것치고는 꽤 괜찮은 표정이었는데 말이지."

"그만큼 처세술이 늘었다는 소리겠지."

에리카는 팔짱을 끼며 싱겁게 답했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바르간의 기억이 나에게 남아 있어 그녀가 과거에 어땠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다르긴 하다. 그녀는 발전하고 있다.

"키는 그대로인 것 같지만."

"시끄러워 슈겐하르츠."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 쌍의 원앙새처럼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트로아 제국의 유명 인물인 나와 그녀이다. 우리가 약혼했다는 사실은 어딜 가더라도 귀족들이 있는 곳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너도 그래서 완벽히는 뿌리치지 못하는 거고.

"…이렇게 된 게 누구 탓인데 천연덕스럽게."

에리카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강의실로 들어섰고, 에리카는 내키지 않아 했으나 결국엔 뒤를 따랐다.

***

수업이 시작되고 벌컥 문이 열리며 당당하게 들어온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번 1학년 마법 술식 심화 이론 1을 맡게 된 파울라라고 해요~!"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또 묘하네.

저택에서 보였던 텐션 그대로 교수직을 하는 건가. 역시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다.

아무래도 별문제 없이 복직 과정을 마친 모양이다. 다소라면 문제가 생겼어도 좋았을 텐데.

"어머머, 반가운 얼굴도 보이네요!"

파울라가 나를 향해서 손을 흔든다. 애써 대꾸해 줄 필요는 없다.

그녀는 이어서 내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을 주시하더니 뭔가를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현재 나와 에리카는 다소 거리를 벌려 앉기는 했으나, 누가 봐도 지인끼리 붙어 앉아 있다는 모습을 연출했다.

파울라도 나와 에리카의 관계쯤은 알고 있으니 대충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을 것이다.

"입학 성적 최상위 부부도 같이 들어 줘서 기뻐요. 미남미녀가 붙어 있으니 그림이 되네요. 호호호."

이해하긴 개뿔이.

저년이 또 지랄이다.

"...."

에리카의 눈썹이 작게 진동했다.

이목이 상당히 쏠려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상당히 불쾌하신 모양.

"어쩜 금슬도 좋아서 착 달라붙어 있네요. 부러워라."

정도가 지나치군.

나는 파울라의 눈을 직시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뭐라도 한소리 하려던 순간, 나보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에리카였다.

손을 들어서 발언권을 얻은 게 아니라. 바로 꽂는다.

"학생을 동물원의 동물 취급하는 건 그만두시죠, 파울라 교수님."

살짝 앳되나 지독하게 권위적인 말투.

"저희는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이지 놀림거리가 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에리카는 감정을 죽인 눈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기분이 다소 나빠지는 것은 괜찮다는 건가.

파울라와 처음 보는 사이이며, 교수와 학생의 차이가 있음에도 말이다.

상대가 누구라도 물러서는 일 없이, 품격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것만 같다.

그래, 얘는 이런 캐릭터였지.

"아, 미안해요 에리카 양.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는 학생을 만나 반가워서 그만.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파울라는 그녀의 냉대에 쉽게 꼬리를 내렸다. 에리카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발언이 남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인지해서일 터이다.

"저도 교수님에게 버릇없게 행동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언뜻 보면 에리카도 파울라에게 고개를 숙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해석해 보면 전혀 다르다.

사과드리겠다는 것은 의미가 텅 비었고, 무게가 치우쳐져 있는 문장은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이다.

결국 그녀는 파울라에게 경고를 날린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딴 말을 뱉지 말라고.

학생이 교수한테 말이지.

"크흠, 크흠. 그, 그럼.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해 볼까요?"

파울라가 분위기를 전환할 겸 수업을 진행하려 든다.

그러게, 알리시아도 아니건만 왜 건드려서는.

옆을 바라보자 에리카의 긴 속눈썹이 팔락거리며 눈동자는 필기와 칠판을 반복해서 움직인다.

에리카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파울라의 수업에 집중했다.

할 말은 할 말이고, 수업은 수업.

챙길 건 제대로 챙겨야 한다는 여자다.

"…불쾌하니까 눈 돌려, 슈겐하르츠."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말했다. 악혼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과연 바르간의 약혼녀이자 악역영애.

싸가지도 보통 싸가지가 아니다.

***

무사히 수업이 끝나고.

아니지, 무사히는 아니려나. 시작부터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에리카는 한시라도 빨리 나한테서 떨어지고 싶었는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면 괜히 더 말 걸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인데 일부러 저러는 것일까.

"그냥 가는 것이냐?"

내 말에 그녀가 이상한 것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도 멈춰 서긴 했다.

"할 말도 있는데 점심이라도 같이 먹는 게 어떠냐."

"…?"

에리카가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의 귀를 매만진다. 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처럼.

그러곤 묻는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너의 그런 반응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 장담하지.

"약혼자와 식사를 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농담이라면 거기까지 해. 유쾌하지 않아."

"농이라니.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진지하게 대답하자.

이상함을 느낀 에리카가 돌린 고개를 바로 한다.

시선을 주고받는다.

에리카가 표정을 바꿨다. 그녀의 눈이 커진다.

"슈겐하르츠… 드디어 네가 약에도 손을 댔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에리카가 질색과 혐오를 드러내며 나를 바라본다.

저 표정은… 집에서 바X벌레가 나왔을 때 사람이 짓는 표정인데. 무례해도 정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멋대로 생각해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함께할 테냐?"

그녀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절대 싫지. 그걸 말이라고 해?"

"아쉽게 됐군. 그럼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하지."

거절을 당했으니 깔끔하게 물러나자.

한 번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대략… 열 번은 신청해야 하지 않을까.

"잠깐. 슈겐하르츠."

내가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에리카가 잡아 세웠다.

당혹감과 경계심이 짙은 얼굴이다.

"가문의 일로 할 말이 있는 거야? 심각한 사항인 건가?"

"가문의 일?"

"그게 아니고서야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건가…. 하긴, 그렇겠군."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 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이지."

"가문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일 때문이라고…?"

"그래, 그러니 다음 이 수업이 있는 날의 점심은 시간을 비워 둬라."

"뭣… 아, 그래. 이제 알겠다. 곧 있을 클래스전 때문에 그러는 거구나. 나와의 대화에서 반에 대한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서."

'우승은 우리 4반이 할 거야. 절대 네가 있는 반에 넘어가게는 두지 않아.' 그녀는 사족을 덧붙였다.

클래스전이 중요한 에피소드이긴 하지. 그런데 지금 상황과는 그다지.

"어렵게도 생각하는구나."

"그야, 네가 이렇게 나오니까…!"

"그냥 너랑 밥 한 번 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원한다면 시간과 장소를 네가 정해도 된다."

"…!"

에리카는 더욱 눈을 키웠다. 황당무계해도 이 정도로 터무니없을 수는 없다는 듯이.

그러나 들리는 대답은.

"그래도 싫어."

28화

"반드시 우리 반이 우승해야 한다. 알겠나."

루이사의 강한 의지가 강의실에 있는 모두에게 전해졌다.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한 달이 조금 남지 않은 클래스전(戰)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카데미아는 학년마다 다섯 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 입학한 1학년도 마찬가지로 1반부터 5반까지. 인원수는 소설 설정의 탓인지 1학년만 정확히 스물다섯 명씩이다.

"안전이 제일. 다른 반에서는 이딴 개소리를 지껄일지 몰라도 우리 1반은 다르다."

지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몸보다 우승에 집중해라. 그렇게 말하던 루이사는 돌연 혀를 차며 바닥을 울렸다.

마력이 담긴 발길질에 공간이 진동한다.

"특히, 3반은 아주 개작살을 내 버려라. 3반 연놈에게 깨지는 녀석은 내가 머리통을 깨트려 버릴 테니 알아 두고."

3반이면 파울라가 담당 교수로 있는 반이다. 그녀가 저렇게 화를 내고 있는 이유를 굳이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술 마시다가 내기한 것이다.

보나 마나 파울라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장난을 치다 판을 키운 것이 틀림없다.

"당연히 우승하는 반에 떨어지는 점수, 카티아가 20으로 가장 높다. 개인 성과에 따라 추가적으로 카티아가 지급되겠지만 어디까지나 부가적이다. 물론, 너희들이 신경 쓰는 게 카티아만은 아닌 것도 안다. 그러나, 괜히 눈에 띄겠다고 무대포로 나서다가 뒈져서 피해 주는 꼴이 되면 각오해라."

루이사의 눈초리가 매섭다. 모두를 협박하고 있다.

멋대로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탈락하게 된다면, 머리통까지는 아니더라도 갈비뼈 하나 정도는 정말로 부서질지 모른다.

현재 내가 보유하고 있는 카티아가 20. 입학 성적이 가장 우수했기에 현 상황에서는 1학년 중에 나보다 높은 카티아를 보유한 이는 없지만, 이번 에피소드로 인해 충분히 뒤집힐 수 있는 점수.

"규칙은 당일에 공지된다. 마음 같아선 지금 확 공개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도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른다. 썩을."

그녀는 혀를 찼고. 학생들 속에 있는 나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감이 온다.

"슈겐하르츠. 네놈이 수석이니까 책임지고 반을 이끌어라. 전략과 전술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충하는 연놈들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도록. 기강을 바로잡아 줄 테니."

기강을 바로잡아 준다는 말에 몸을 흠칫 떠는 학생들이 있다.

학기 극초반이건만 벌써 그녀에게 따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고심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질이 온다고 급하게 움직이면 물고기가 도망치는 법이다.

"그 말은 즉, 이번 클래스전에 대한 통솔권을 저에게 넘기신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습니까?"

"교수는 클래스전에 참가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다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너도 참 어지간한 녀석이구나."

"직접 듣는 것과 아니한 것은 천지 차이이기에."

나는 가볍게 샌 웃음을 뱉었다.

루이사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더니. 곧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래, 너에게 이번 클래스전에 대한 통솔권을 넘기마. 네가 이번 리더다."

리더. 좋은 단어다.

내가 이렇게까지 확답을 바란 데는 다 까닭이 있다.

"알겠습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해 보도록 하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겼다.

***

"그래서. 왜 네 녀석이 여기 있는 거지."

연구회의 자격을 얻고 제공받은 작은 방. 이 좁디좁은 공간에 내가 초대하지 않은 손님 하나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내가 연구회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리암도 같이 넣어 줘. 클래스전이 코앞이니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해져야 좋은 거 아니겠어?"

"네년에게 묻지 않았다."

"아오, 하여간. 저걸 그냥…!"

리암의 소꿉친구면 소꿉친구이지 보호자는 아니지 않나. 저 녀석이 말 못 하는 벙어리도 아니고.

"괜찮아 에밀리. 내가 말할게."

"짧게 하도록."

나는 뒤로 몸을 기댔다. 푹신한 쿠션이 달린 의자가 몸을 지탱한다.

"나도 에밀리와 함께 연구회에 들어가겠어. 이 연구회의 주제가 개인 역량 발전이라 했잖아, 그럼 나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

"싫다. 꺼져라."

짧게 하라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말이 많은지.

"이 연구회의 설립 의의에 따르면 거부할 이유는 없을 텐데? 그게 아니면 개인 역량 발전이라는 주제는 껍데기일 뿐이고 사실은 음모를 숨기고 있는 건가?"

중간에 자신의 말이 끊겼음에도 기분 나쁘다는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말을 잇는 녀석.

껍데기는 연구회의 주제가 아니라 네가 애써 둘러대고 있는 이유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참.

"네놈은 거짓말쟁이로구나."

"뭐?"

"네가 말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핑계일 뿐. 실제로는 나를 감시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그건 오해야."

"오해라… 과연 그럴까."

나는 에밀리를 흘깃 바라봤다.

시선이 닿자 그녀는 살짝 놀란 눈치로 시선을 회피했다.

"네놈의 소꿉친구는 내 예언 비슷한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딴 불길한 소리는 하지도 말라며 일침을 날렸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에밀리는 연구회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뒤집혔다.

무언가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랬던 과거는 잊어버린 것처럼, 이렇게 염치없이 너까지 끌고 와서는 입회를 신청하고 있지. 마치 누군가 개입한 것처럼 어색하게. 그럼, 누가 그녀에게 입김을 불어 넣은 것일까."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일까? 아니, 그럴 리가. 한천한 재능을 가진 여자 하나 들어오게 만들겠다고 내가 그 정도로 할 위인은 아니지."

이번엔 알리시아를 가리킨다.

"그럼, 알리시아일까? 아니. 아니지.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다. 에밀리와는 어제 수업이 끝나고 접촉한 적이 없어. 핀과 세레나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면 결국 남은 인물은."

손가락 끝이 리암에게 정지한다.

"너다."

그의 입가에 살짝 주름이 생겼다.

당연하게도 들켜서 놀란 반응이 아니라, 찝찝한 사실을 공론화시킨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리암이 알고 있는 전개와 내가 알고 있는 전개는 다르지만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히 있다.

1년 후에 있을 아카데미아의 비극. 이와 같이 이야기의 커다란 줄기는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안 그래도 나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려고 애쓰는 녀석이, 에밀리를 통해 내가 말한 찝찝한 예언을 들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에밀리의 죽음에 대한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을 터.

그러나, 아카데미아에 비극이 도래하는 것은 그도 아는 사실.

"어지간히도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구나."

리암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녀석에게 있어 내가 수상한 빙의자라는 덜미를 잡은 셈이니 좋다고 달려들겠지.

"…그래, 인정할게."

리암은 말한다.

"사실. 너의 행보를 지켜보기 위해 연구회에 들어가려는 거야."

"나의 행보를?"

"너는 입학식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제멋대로인 녀석이야. 네가 이후에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 감시하고 사전에 방지하려는 거지."

"너에게 어떤 이득이 있기에 그렇게 움직이는 건지 이해되질 않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네 녀석 따위가 막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구나."

"글쎄.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 말은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인데.

"허세하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이 공간에는 우리의 대화에 주목하는 캐릭터가 많다. 그는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바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머리가 완전히 빈 녀석으로 봤는데 생각만큼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너의 입회를 허가할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바르간…."

"하지만 문득 궁금하긴 하군."

나는 리암에게서 시선을 돌려 알리시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대화의 불씨가 자신에게로 옮겨지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황해한다.

"네 녀석과 내 시종인 알리시아. 현 상태에서 둘이 붙게 된다면."

나는 제안한다.

알리시아와 등급전을 해서 승리하게 된다면.

"누가 이기게 될까."

입회를 허가하겠다.

***

등급전은 아카데미아의 체제로, 학생들이 목매는 카티아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이다.

한 달에 한 번.

상대와의 아카데미아 순위 격차 20 이하.

최대 베팅 10카티아.

해당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학생들은 상호 동의하에 등급전을 치를 수 있다. 이는 아카데미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전투로 등급전을 위한 공간도 따로 갖춰져 있다.

"떨리느냐."

"아, 도련님."

가벼운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알리시아가 경기장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약이 걸려 있지 않은 경기장을 바로 빌릴 수 있었다.

연습용 검을 등에 메고 있는 알리시아는 다소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다.

"카티아가 걸린 첫 승부이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는 정신을 바짝 차릴 테니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승리하면 지금 네가 보유하고 있는 카티아의 배가 될 것이다."

나는 수석으로 입학했기에 초기 지급되는 카티아가 20이지만.

입학시험을 통과해도 10위 안에 들지 못한 이들은 모두 10카티아를 받는다.

알리시아와 리암이 보유하고 있는 카티아도 동일하게 10. 이번 배팅으로 걸린 10카티아.

이번 승부에서 진다는 것은 현재 소지하고 있는 카티아가 모두 소멸된다는 소리다.

"혹여나. 리암이 받을 피해가 걱정되어 대충 한다는 등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거라."

알리시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서 나온 우려였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도련님이 실망하시는 일이 없도록 최선의 결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이것은 필요한 승부이다.

현재의 리암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성능은 이 세상 수준이 아니다.

원작 기준. 성장 속도로만 본다면 미친 천재 알리시아의 재능에 필적하거나 살짝 상회하는 정도이니까.

즉, 이번 승부는 첫 단추.

만약 리암이 승리하게 된다면 억지로 기연을 연결시키지 않는 이상 알리시아의 성장 속도로 리암을 추월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리암 하나를 제압하는 데 알리시아 외의 추가 인력이 필요해지게 된다. 이는 상대 체스 말 하나를 상대하는 데 두 개의 말을 써야 한다는 것.

실로 비효율적이며, 수가 제한되는 길.

이번 단추를 잘 끼워야 이후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짠 대로 잘 따라와 줬으니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유일하게 염려되는 게 알리시아의 천성적인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는 그녀가 확답을 주었으니 믿는… 아니,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저어… 도련님?"

"왜 그러느냐.

"방금 그런 대답을 해 놓고선 이런 질문을 드려 송구스럽습니다만. 아무리 연습용 검이라곤 해도 날붙이인데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아카데미아의 의료진과 베테랑 심판이 대기 중이니 괜찮다. 큰 충격이 예상될 경우 심판이 미리 준비한 마법을 발동시켜 공격을 무효화하고 전투를 중지시킬 것이다."

"아, 그런 것이군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하더니 바로 이런 모습이라. 너무 일찍 그녀와 리암을 상대하게 한 것일까.

그런 약간의 후회의 감정이 피어나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를 마친 알리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어쩐지 그늘이 져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괴물 잡듯이 해도 되겠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에리카에게 점심을 함께 먹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의 심정이 이러한 것이었을까.

『17시 30분. A-23 경기장. 1학년 알리시아. 1학년 리암. 의 등급전이 곧 시작됩니다. 선수들은 경기장 안으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놀란 눈을 한 채 그녀를 부르려고 하자. 기계적인 목소리가 귀를 강타한다.

알리시아는 앞으로 나아가며 살짝 고개를 돌렸고. 환한 미소를 보였다.

"도련님,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과소평가했던 모양이다.

29화

경기장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몸을 숨길 만한 커다란 차폐물도, 꺼슬꺼슬한 작은 모래알들도 없다.

그 공간에 있는 것이라곤 세 명의 인물.

리암, 알리시아.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심판이 전부.

"...."

그녀뿐이다.

아무런 주변의 간섭 없이. 리암의 시야에 오로지 알리시아만이 들어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별들로 수놓은 듯 반짝이는 머리카락. 눈처럼 하얀 피부가 생기 있다.

초식동물의 눈은 그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검에 대립되어 이질적이다.

"정말 이래야 하나요. 알리시아 씨? 저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이번처럼 날붙이를 들고 있든 그렇지 않든. 리암은 알리시아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싸울 이유가 없다.

연구회에 들어가 바르간을 감시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큰 스토리의 줄기로 봤을 때.

그녀는 자신이 읽은 소설의 히로인이지 악당이 아니었다. 본래였으면 그녀는 주인공인 왕자와 우연한 계기로 만남을 이어 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구속되어 본래 진행됐어야 할 운명을 거스르고 있다. 한 악역에 의해서 놀아나는 채로.

"어떠한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바르간에게 저당잡혀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저런 자에게…. 저는, 그런 당신을 구하고 싶습니다."

"...."

"한마디. 단 한마디로 됩니다. 도와달라고 말해 주세요. 그에게 걸린 구속을 풀고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 말해 주세요."

"사람으로요…?"

"네, 사람으로요. 당신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권한이 있고 그래야 마땅한 일이니까요!"

입을 꾹 닫고 말을 듣고 있던 알리시아가 반응을 보이자 리암은 감정을 이끌어 내며 그녀를 설득하는 데 몰입했다.

지금의 그녀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이 쇠사슬을 푸는 데 그녀의 힘만으로 역부족이라면 자신이. 더욱 나아가 아카데미아의 힘을 빌리면 될 것이다.

아카데미아의 규칙에 따르면, 아카데미아의 재학생은 본래 시종을 데리고 있을 수 없다. 가문의 종사자를 데려와서도 안 되고, 신분이 낮은 재학생을 시종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이는 내부에 들어오는 외부인을 최소화하여 안전을 지키고, 계급 간의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상황은 옳지 않아요."

왕족이나 황족에게도 적용되는 이 규칙을, 바르간은 기존에 일하던 종사자가 입학했을 뿐이라는 명목으로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

알리시아는 아카데미아에 입학하기 전부터 바르간의 시종이었기에. 외부인도 아니고 재학생이 시종으로 된 경우도 아니다.

따라서 그가 알리시아를 시종으로 두고 있는 것이 얼떨결에 용인되고 있다.

아카데미아에서도 시종이 입학하게 된 경우는 처음인지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배움의 기회도 적고, 하루하루 일하기에도 벅찬 그들이 꾸준히 준비해 온 엘리트들을 능가해 입학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신분을 원래대로 돌릴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어요. 알리시아 씨가 도와달라는 한마디의 말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정말 그 한마디의 말이면 된다.

그 하나의 사실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테니까.

아카데미아가 중요시하는 자유와 평등을 들먹이며, 재학생인 그녀가 부당하게 잡혀 있고 시종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만 밝혀 준다면.

어떻게든 부딪힐 명목이 생긴다.

아카데미아의 권위자는 물론이고 학생들에게까지 그녀의 처한 상황을 설파해서 세력을 형성하고 힘을 기를 수 있다.

"알리시아 씨,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도와달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설령 지금이 힘들다면 이후라도 좋아요. 저는 당신을 기다리며…!"

"리암 씨."

알리시아가 리암을 부른다.

평소와 같지만, 평소와 다른 말투로.

"리암 씨에게 저는 '사람'이 아니었군요?"

"네?"

알리시아의 입에서 빠져나온 문장은 리암이 기대하는 것과 완전히 결이 달랐다.

이런 냉기도, 분노도.

리암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에 제가 사과할 때 절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셨죠? '슈겐하르츠에서 일하게 되셨다면서요.'라고요."

"네, 그…랬죠. 근데 지금 그게 왜…."

"이상하지 않나요. 일하게 되셨다니. 제가 슈겐하르츠가에 들어온 건 6개월도 더 된 일이에요. 길지는 않지만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죠. 그런데 리암 씨는 마치. 제가 슈겐하르츠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혹은, '일하기 전의 저를 아는 것'처럼 말했어요. 분명 처음 만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

"하지만 그건 단순히 단어의 선택을 실수한 것일 수 있으니 괜찮아요. 제가 따질 부분이 아니기도 하고요."

다소 놀란 눈을 한 리암에게 알리시아는 친절하지만 어딘가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리암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아까는 제가 다소 공격적으로 말했지만, 리암 씨가 어떤 의도로 저에게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을 했는지 알아요. 어째서인지 저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마음도 전해지고요."

알리시아는 리암과의 대화 동안 유지하고 있던 자세를 바꿨다. 한쪽 발을 뒤로 밀며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린다.

그녀가 봤을 때에도, 리암은 굉장히 '선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낯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나설 수 있는 인물.

"정말 감사해요. 사람의 호의를 받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알아차리는 게 쉽진 않지만. 리암 씨의 따뜻한 마음은 잘 전달됐어요."

'그런데요.'

그녀는 새롭게 운을 뗐다.

"리암 씨는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요…?"

"네,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아니, 말이 잘못됐네요. 저한테는 과분한 정도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매일 밤 침대에 누울 때는. 지금이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도하면서 잠들어요."

"그건…."

"바르간 도련님이 오해받기 쉬운 분인 건 잘 알아요. 슬픈 일이게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모든 걸 알았다고 판단하죠."

"...."

"도련님과 리암 씨가 왜 서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네요."

리암이 그것을 물으려고 하자.

조금씩 움직임을 다잡던 알리시아가 온전한 자세를 잡았고, 동시에.

"...!!"

"리암 씨가 패배했다는 사실이요."

⎯콰지지지지직!

돌풍과 함께 달려든 알리시아가 순식간에 리암에게 접근하더니, 칼끝을 그의 목에 집어넣으려 한다.

마력을 가득 머금은 알리시아의 오러와, 미리 준비된 두꺼운 마법 장벽이 강하게 반응한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 이어졌다. 다소 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암은 알리시아의 검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리려 하지만.

삐이이익⎯⎯⎯!

마법 장벽이 발동된 순간부터. 승부는 끝이 난 것이었다.

경적 같은 고음과 이어지는 기계음이 다시 한번 그 현실을 자각시켜 준다.

『17시 40분. A-23 경기장. 승자, 알리시아. 승자, 알리시아.』

***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하마터면 귀족의 품위를 잃어버린 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제력이 뛰어난 나였으니 망정이지 다른 놈이었으면 감정에 잡아먹힌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조금 전의 전투는.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꼴불견이었다. 일말의 도움도 안 되는 녀석 같으니라고!"

모처럼 자리를 잡아, 알리시아와 승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건만 실컷 수다만 떠들다가 방심해서 당했다.

참으로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녀석답다면 녀석다운 한심하고 경멸심이 이는 승부였다. 아, 생각하니까 또 화가 치밀어 오르네.

이래서야 리암과 알리시아의 현 상태를 비교하는 것을 글러 먹게 되었다.

아니지. 이미 확인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한 건가. 실력이 어쨌든 저런 상태면 절대로 알리시아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리암이 정신을 차리고 활약하길 기도하자. 신은 믿지 않지만.

'뭐, 그래도. 얻은 것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리시아가 리암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리암이 상상이상으로 버러지 같은 모습을 보였듯, 그 버러지에 대한 알리시아의 감정도 생각보다 더 부정적이었다.

⎯괴물 잡듯이 해도 되겠네.

등급전에 들어가기 전, 알리시아가 했던 말이 아직까지 귓가에 맴돈다.

그녀의 감정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긍정적인 요소이며 계획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도련님!"

교복으로 갈아입은 알리시아가 멀리서 나를 부르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러고서는 자신이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속도를 줄이며 허리를 꼿꼿이 편다.

저 정도면 상당히 신난 것 같다.

"도련님. 저, 첫 등급전에서 승리했습니다. 카티아도 10이나 더 늘어, 20카티아가 되었습니다! 전부 도련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신 덕분입니다!"

…정정한다.

상당히 '많이' 신난 것 같다.

만약 그녀가 다렉 연합국이나 마족이라 꼬리가 있었다면 빠르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래, 잘했구나. 승부가 어처구니없이 끝나기는 했다만. 틈을 노리고 무자비하게 들어간 것은 아주 보기 좋았다. 훌륭할 정도로 치사하게 잘 성장하고 있구나. 알리시아."

"감사합니다! 아… 예? 도련님? 칭찬으로 하신 말씀이신 겁니까 아니면…."

"칭찬이다."

드디어 이 거친 세상의 풍파를 견딜 수 있는 초석이 준비되었는데 마땅히 칭찬함이 옳다.

그녀의 유약하고 착해 빠진 본성도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

"이번 승부의 결과로, 에밀리 씨는 연구회에 들어오고 리암 씨는 들어오지 못하게 되겠군요."

"그런 조건이었으니 말이다."

에밀리의 사항을 추가해서 말이지.

리암이 승리할 경우, 리암은 연구회에 들어올 권한을 얻게 되고 에밀리는 연구회의 모든 활동을 '자의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알리시아가 승리할 경우, 리암은 연구회에 들어오지 못하며 에밀리는 연구회의 모든 활동을 연구회장의 '통제하에' 참여해야 한다.

쉽게 말해, 귀찮은 리암 녀석은 시야에서 제외하고. 말 더럽게 안 들을 에밀리는 부르고 싶을 때 불러서 강제로 활동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예정된 죽음에 의해 도움이 되겠지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원작에선 밑밥만 뿌려지고 회수되지 않았던,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을지 모르는 또 하나의 가치.

예정된 미래대로 죽는 것보단, 확인하고 보다 나은 이후를 생각한다는 방안이 더 매력적이다.

"자, 그럼 등급전도 끝났겠다. 저기서 하찮은 리암을 위로하고 있는 에밀리를 끌고 돌아가자꾸나. 연구회실에서 세레나와 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아, 으으. 본격적으로 연구회 활동을 시작할 생각을 하니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신나서 뛰어다니면 이마가 붉어진 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앗… 유념하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는 알리시아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연구회의 이름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떤 명칭의 연구회입니까?"

나는 똘망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답한다.

"학생회다."

"아… 주제 넘는 참견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아카데미아는 '학생회'라는 단체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럼 적당히 앞에다 신(新)을 붙이면 되겠구나."

다소 극단적일지라도, 우선은 그것이면 된다.

최우선 목적은 화제성을 얻는 것이니까.

학생회는 이를 위한 최적의 간판이다.

30화

"신(新)학생회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중년의 남자가 탁상을 치며 거칠게 일어섰다.

학생회라는 단체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새로운 학생회라는 이름의 연구회가 설립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대체 루이사 교수는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그런 불순한 집단을 허가하다니. 게다가 그 신학생회니 뭐니 하는 곳의 연구회장은 입학식의 문제아가 아닙니까! 당연히 막았어야지요!"

고함을 질러 대며 루이사에게 손가락질하는 중년의 남자.

주변에서 그를 진정시키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이사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운을 뗐다.

"…연구회의 작명은 학생들의 권리입니다. 창설 허가에 대한 권한이 교수에게 있다지만, 사실상 해당 연구회의 목적이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어처구니없는! 그럼, 신학생회를 자칭하는 반동 세력의 존재가 옳다는 이야기인 겁니까?!"

루이사는 자신의 말이 중간에 끊긴 것이 상당히 불쾌했다. 때와 장소가 이런 곳이니 최대한 노력하나 미간이 다소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름이 그런 것이지. 그들의 주장하는 신학생회의 의의는 개인 역량 발전입니다. 주기적으로 해당 진척 상황에 대한 보고와 검사를 받는 것을 약속했으니 설립 목적에 의거한 실적을 보인다면 뭐라⎯."

"그런 사항쯤은 대충 적어서 내면 그만 아닙니까! 그들이 비밀리에 정식 학생회를 붕괴시키기 위한 암약이라도 버리면 어쩔 셈이지요?! 그땐, 루이사 교수. 당신이 책임을 물 것입니까?!"

"만약 암암리에 활동하려 한다면, 그건 다른 연구회들도 해당되는 사항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말 그런 뜻을 품고 있다면 눈에 띄는 이름을 썼을 거라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루이사 교수는 입학식의 그 사건을 잊어버린 겁니까?! 그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나도 그의 저택에 있을 땐 그 성격 때문에 개고생을 했으니까."

루이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파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자신의 오랜 친구의 살기 어린 눈빛을 감지한 파울라는 질린 얼굴색을 띠게 됐다.

"아, 아니 내 말은…! 그렇지만 머리가 비상한 학생이라 대놓고 속을 드러내는 짓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 말이었어! 루이사 이만 진정해!"

"넌 이따 보자."

파울라가 울상을 지으며 그녀에게 달라붙는 와중 중년의 남성은 다시 역정을 냈다.

루이사의 체온이 점점 높아져 끓는점에 다다르기 시작한다.

"아무튼, 저는 절대로 그 불한당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총장님. 해당 연구회를 와해시키는 것이 아카데미아를 위한 길로⎯."

"아, 또 빡치게 하네."

갑자기 들린 그녀의 음성에, 중년의 남성이 '뭐 이런 미친 게 다 있지'라는 눈으로 루이사를 바라봤고.

"루, 루이사 교수. 지금 뭐라고 한 겁니까?!"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넘기며 참아 왔던 화를 풀기 시작했다.

"제가 하는 말마다 중간에 끊으면서 그쪽 말만 밀어붙이고 있는데 기분이 안 나쁘겠습니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부끄럽지 않아요?"

"루이사 교수! 지금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제발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중년 교수의 말은 루이사의 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루이사가 마치 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살벌하게 노려본다.

"당신이 맡은 학생회에 피해가 갈까 봐 궁상떨고 있는 게 참기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내 반 학생을 욕하면서까지 지껄이고 있는데 담당 교수가 가만히 있는 건 퍽이나 말이 되나 보죠⎯⎯?!"

지이이잉⎯⎯!!

루이사의 분노와 함께 마나가 터져 나왔다. 저항성이 낮은 이들은 몸을 옥죄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힘이다.

짙은 농도의 푸른 불꽃을 형상화한 마나가 루이사의 몸에 타오른다.

"야, 야야! 진정해! 이러다가 너도 나처럼 근신 처리 받는다!"

후우, 후우!

파울라가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며 불꽃을 꺼트리려 했으나 루이사의 마나는 그런 것으론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마나로 루이사의 마나를 끄려던 순간.

"교수님들의 뜻은 알았으니.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죠."

목소리가 들렸다.

겉으로 듣기엔 힘없는 노인의 소리였으나, 그의 음성은 본질부터 달랐다.

파울라 그녀가 앞으로 100년은 더 마법에 매진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할 정도의 깊이와 폭.

그녀의 스승이기도 한 아카데미아 총장의 언어는 지긋하고 세월이 가득한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가 그에게 집중한다.

자리에 일어서 열을 내고 있던 두 사람도 얌전한 애완동물이 된 것처럼 꼬리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총장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선한 노인의 웃음을 보이며, 주름진 입을 열었다.

"이 노인이 봤을 때, 이번 일은 교수들이 개입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하얗고 긴 수염을 쓸어내렸다.

느긋하고 인자한 말투였으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위엄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학생회장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신학생회 연구회장과 깊은 인연이 있기도 하니.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군요."

총장은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던 학생회장에게 판단을 맡겼다.

총장이 이런 말을 꺼냈다는 건. 그의 결정을 적극 지지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엔 모두의 이목이 학생회장에게로 향한다. 그의 한 마디로 이번 사항이 향후가 결정될 것이다.

"저는…."

검은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매가 강제로 누군가를 형상화하는 그.

슈겐하르츠 본가의 장남.

슈겐하르츠 트로아 라인카르벤은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

"네가 나를 만나러 오다니.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뜨겠구나."

"나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니까… 근데 원래 해는 동쪽에서 뜨잖아?"

"올 줄 알고 있었다."

바르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연구실 내로 들였다. 에리카는 바르간의 리드를 거부하듯 가만히 서 있는다.

"…네가 무슨 수로."

"학생회장이 보낸 것이겠지.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 예상 가능하다."

"쯧.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자신의 행동이 미리 읽혔다는 것이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차는 에리카.

바르간은 살짝 놀리는 어투로 에리카에게 제안한다.

"그 녀석의 개가 되는 것보다는 내가 있는 이 연구회에 들어오는 게 낫지 않겠느냐?"

"둘 다 끔찍하지만. 네가 있는 연구회에 들어갈 바에는 학생회에 남아 있겠어."

"약혼녀가 첫째의 명령을 따르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만… 어쩔 수 없군."

어깨를 으쓱하는 바르간을 뒤로하고 에리카는 자신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실로 들어섰다.

가지고 온 리스트를 팔락이며 연구실 내부를 둘러본다.

"연구회명은 신학생회… 다시 봐도 제정신이 아니야. 이런 명칭이 통과하다니…. 멤버는 총 5명. 응? 셋은 어디 가고 둘만 있는 거지?"

"따로 할 게 있어서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땅을 구르면서 흙투성이가 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이곳에 보이는 인물은 에리카를 포함해서 셋뿐. 나머지 멤버들은 바르간이 내준 다른 일을 하는 모양이다.

대답을 들은 에리카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한 발자국 다가섰다.

"흐응. 나머지 회원들은 다른 곳에 방치한 뒤 너는 여시종과 단둘이서 이곳에 있었다는 말이지? 네가 왜 어울리지도 않게 이런 연구회를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

안 그래도 조그마한 에리카가, 큰 체구의 바르간에게 다가서니까 더 작게 느껴진다. 사나운 눈매와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분명 겉모습으론 쉽게 무시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질투할 것 없다. 알리시아와는 네가 상상하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니까."

"질투라니, 실없는 소리. 그리고 남녀 사이에 그건 또 모르는 법이지."

바르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는 에리카. 그녀는 서 있는 바르간을 지나쳤다.

이어서 연구실을 살피며 물품을 확인한다.

이곳저곳을 제법 면밀히 살피는데 아무래도 뭐라도 반드시 걸리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렇게 둘러봐도 네가 기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 하던 거나 마저 해. 저 시종이랑 공부를 하든, 마력을 단련하든, 성행위를 하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니까."

"⎯예에?!"

마법 서적을 읽는 척하며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얀 머리의 여인이 깜빡이 없이 들어온 에리카의 독설에 당황하여 소리를 냈다.

그러곤 곧바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책을 읽는 척을 지속하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녀의 귀는 새빨개졌고 눈은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바빴다.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바르간은 의자에 몸을 기댄다. 그러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하는데 시선은 제대로 에리카를 향하고 있다.

"아 그렇지. 에리카. 갑자기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다음 주 일정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

"일정? 무슨…."

"다음 주 수요일 점심 약속 말이다. 아무래도 그 시간은 내가 좀 바쁠 것 같구나. 어차피 너와 수요일 오전에 같은 수업이니 그때 다른 시간을 알려 주도록 하지."

"...."

에리카는 저번 두 번의 제안처럼 칼같이 거절하는 게 아니라 살짝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잡히지도 않은 약속을 미루는 게 무슨 경우냐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녀와 바르간의 시선이 오랫동안 마주한다. 에리카는 곧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한 여성에게로 눈을 향했다.

"...."

다시 눈을 돌린 그녀는 '내키지는 않지만'이라는 말로 물꼬를 틀었다.

그녀가 꺼낸 말은 예상외였다.

"…고민해 볼게."

***

연구실에 에리카가 방문한 지 3일 후.

땅거미가 진 지도 오래된 늦은 밤.

아카데미아 재학생 리스트를 보고 있던 나는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이 시각이면 깨어 있는 사람도 드물진대 어느 몰상식한 것이 방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수련을 중단한 나는 감각을 원상태로 되돌리며 밖에 있는 인물의 마나를 파악했다.

이건….

얘가 지금 여길 왜 온 거지?

나는 방문을 열었고 복도에 있는 사람을 눈으로 확인했다.

익숙한 모습의 그녀는 잠옷 차림을 한 채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바르간 도련님…."

"...."

생기 있게 반짝이는 하얀 머리칼을 가진 그녀가,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방문이 닫히고 한 공간에 그녀와 함께하게 된다.

그녀의 가는 숨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내 심장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듯 내 몸에 붙인 얼굴을 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적막을 깬 것은 나였다.

그녀가 서글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한다.

31화

"도련님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녀가 말한다.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꼭 쥔 채.

눈동자가 흔들리며 곧이라도 눈물을 쏟아 버릴 듯 찰랑거린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이런 제 감정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더는 억누를 수 없습니다."

⎯도련님이 에리카 아가씨와 함께 춤을 추던 그날. 제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도련님이 아가씨에게 보인 웃음은.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용기를 내 보고자 합니다.

"도련님. 부디 저를 받아들여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그녀가 발끝을 들었다.

그녀의 오밀조밀한 눈, 코, 입. 모든 것이 더욱 가까워져 간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서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두 손은 나를 당긴다.

나는 그렇게 가까워진 그녀의 뽀얀 살갗에.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꺄아아아아악!"

그녀의 가냘픈 비명이 날카롭게 찢어진다.

고통이 상당한 모양인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마에 마력으로 냉기를 불어 넣었다.

"너무해, 너무해요. 도련님! 저는 도련님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에서."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도 알리시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냐. 나이아스."

"역시 들켰지? 아이. 분위기 좋게 다 잡아 놓고서는! 아, 근데 너무 아파! 진짜 미친 거 같아. 손가락에 철이라도 심은 거야?"

나는 눈앞의 여성을, 아니 알리시아를 빙자한 정령을 내려다봤다.

나이아스는 샐쭉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여자아이를 이토록 험하게 대하면 벌을 받을 거야! 알리시아는 지금까지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았나 몰라."

"웃기는군. 정령에게는 성별이라는 게 없지 않느냐. 그리고 평소 알리시아에게 한 것보다 강하게 했다."

"그런 거지? 어쩐지. 이걸 그렇게 맨날 맞으면서는 못 살지. 아, 진짜. 후유증 미쳤네. 도련님, 나 멍든 거 아닌지 좀 봐 줘."

뭐, 가끔은 이 정도로 치기도 하지만.

알리시아의 모습으로 다가와 이마를 보이는 나이아스.

분명 같은 외관일 터인데 성격이 다르다는 것으로 완전히 상이하게 느껴진다.

저 이마에다 한 방 더 꽂아 줄까 하다가.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녀석에게 물었다.

"왜 이런 같잖은 짓을 한 거냐. 오늘은 보고를 받는 날도 아니거늘."

"아 그거? 엣헴. 그건 말이지. 아, 알았어. 까불지 않고 바로 말할 테니까 그 손가락 망치 좀 저리 치워 줘. 도련님아!"

까불거리기에 다시 매운맛을 보여 주려 했더니 아쉽게 됐다.

"내 힘의 절반이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지! 보다시피 이젠 더 완벽하게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게 가능해졌어!"

"그건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본심은 뭐지?"

"알리시아로 변신해서 도련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려고… 아, 아니야! 아니야! 아아아악⎯⎯!!"

이게 나이아스만의 화법이다. 녀석의 행동에는 다른 숨겨져 있는 뜻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처음 나와 계약할 때 걸어 둔 제약으로. 나에겐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하지만. 이렇게 콕 짚어서 말하면 피할 수 없다.

"내 이마 터지겠어!"

정령위(位) 공작의 위엄은 다 어디 가고 이런 모습일까.

루비드 마을에서 알리시아에게 하사했던 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정령 나이아스. 검 자체는 리암이 원작에서 사용하여 익숙하나 정령 나이아스는 소설에서 언급만 됐을 뿐 등장한 적이 없다. 그야, 리암이 발견할 적에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이젠 그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여간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모처럼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로 변신했는데 좀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덧나나."

"알리시아로 잘도 긴장하겠구나."

"하긴 그건 또 그러네.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쭉 지낼 거야. 이 외관이 마음에 들었거든. 거울 볼 때마다 기분 째진다니까?"

"...."

아무튼, 그래서.

"보고해라. 이왕 온 거 지난 3일 동안의 보고는 지금 끝내겠다."

"그래 좋아. 으음… 별다른 일은 없었어. 다만, 집착이 어후… 장난이 아니더라. 자기 수업 시간이 아니면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딴 주관적인 생각 말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행동을 말해라."

"아, 다 준비해 놨지. 나도 학습하는 정령이라고."

나이아스는 마나로 만들어진 양피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한 인물이 있었던 장소나, 했던 행위가 시간별로 적혀 있었다.

빠르게 한 번 훑어봤지만, 미리 말했던 대로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역시 생각대로다. 미리 정해진 시간표 그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나이아스는 '그치? 그대로지? 근데 소름 돋는다니까.'라며 웃었다.

나이아스는 내 방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력의 흐름이 좋은 곳을 찾았는지 몸을 공중에 띄운 채 특정 구역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도련님 생각한 것과는 달리 되게 섬세하네. 배려심이 깊다고 해야 하나. 약혼녀 몰래 이렇게까지 하다니 대단해."

"뒷문장만 들으면 내가 그녀를 스토킹하라고 명령한 것 같구나."

"하하핫, 결국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허공에서 웃고 있던 나이아스의 목에 검은 목줄 같은 문신이 생기더니, 곧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문신에 의해 실체화를 풀지 못한 나이아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떨어진 부위를 문지르고 있다.

"너와 내가 계약을 했다는 것을 가끔 잊는 모양이구나. 나이아스."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나도 말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있는 거잖아!"

"자유롭게 말해도 좋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언제든지."

지금의 나이아스는 내 사역마가 된 상태다.

사역마와 인간이 맺는 계약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것과는 달라서 강제성이 더욱 강하다. 내가 사역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아 그래그래. 있잖아, 도련님아. 나 할 말이 있어."

잠시 잠겼던 생각을 마친 나이아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곤 빙그레 웃어 보인다. 방금과 같이 웃고 있어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입가에 걸린 미소엔 작게나마 적의가 담겨 있다.

"그놈. 「여신교」더라?"

말을 잇는다.

"그 녀석이 자신에게 걸고 있던 거. 마법이 아니었어. 여신교에서 내린 '축복'이지. 하긴, 마법이었으면 도련님이 나한테 부탁할 일도 없었겠지."

나이아스가 엄지를 세워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인상을 구기며 고민하는 척을 한다.

한쪽 눈은 게슴츠레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 도련님은 녀석이 에리카라는 인간에게 붙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처럼 눈이 좋아서 여신의 축복이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오호, 확실히 그 눈의 성능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축복과 마법도 구분하고."

여신교(女神敎).

붉은 괴물들, 알티프(Artife)의 종교.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을 습격하는 이유도 오락이나 번식을 위한 것도 있지만, 종교의 계명을 따른다는 목적이 가장 크다.

즉 여신교란, 알티프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자, 그들의 정신인 것이다.

'뭐, 여신교의 신자가 괴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괴물의 종교이긴 하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신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신자들이 비밀리에 퍼져 있으며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라 하면 대표적으로, 1년 후에 있을 아카데미아의 비극이 있다. 내부에 잠복해 있는 여신교의 세력이 급습하기 좋은 적절한 시기와 방어 체계를 무력화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외의 만행들도 대단하지만 우선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그들을 짧게 설명하자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절대악.

공교롭게도 내가 이 세계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는 멸절시켜야 하는 적이다.

이번에 에리카 주위를 얼쩡거리는 목표물도 그 종교의 신자로, 인간이지만 여신의 추종자인 녀석 중 하나로 여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

축복은 알티프 이외의 종족이 여신교를 택했을 때 하사받는 권능.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달리 발현되는 이 매력적인 힘을 얻기 위해 괴물 쪽에 붙는 녀석들도 다수 있는 상황이다.

"놈들이 이곳저곳에 있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걸 발견하는 건 별개의 일이지. 그게 힘드니까 골머리를 썩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나이아스는, 그렇게 꽁꽁 숨어 있는 여신교의 신자를 어떻게 별다른 증거도 없이 꼬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다.

내 주변 인물들은 궁금증도 참 많다.

모든 걸 말해 줄 수 없는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보이진 않아도 알 수 있다. 내 가설이 맞았다면 녀석이 그렇게 움직일 시기일 테니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평화를 흉내 내는 때란 말이다. 게다가 네가 말했듯, 내가 그 녀석을 볼 수 있었다면 너를 활용하지도 않겠지."

"으으으음. …뭐 됐어! 도련님이 특이하다는 거야 처음 본 날부터 알았으니까. 또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여간 비밀이 많은 인간이란 말이야."

나이아스가 활발한 남자아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다.

심심할 틈은 없어서 좋다는 말도 이어 붙인다.

"인간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참 인간은 어렵게 사는 거 같아. 그 리암이라는 수컷이랑, 에리카라는 암컷이랑 도련님을 감시하려 했잖아? 근데 또 도련님은 그 녀석을 감시하고. 왜들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그냥 무력으로 제압해 버리면 될 텐데."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될 일이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나이아스는 또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지, 바닥에 가부좌하고 앉은 자세가 기울어진다.

이 녀석에게 뭔가를 제대로 말해 준 적은 없으니 부족한 머리로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머리 아프니까 생각하는 건 그만둘래. 어차피 도련님의 예상보다 결과가 빨리 나오게 된다며? 난 그 순간을 즐기면 되지!"

나이아스의 말대로다.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원만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남은 건 해당 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얼마 남지 않았다.

녀석은 반드시 미끼를 문다.

그리고 그때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낚아챈다.

***

"알겠어…. 오늘 저녁 말이지."

"그래, 저녁에 보자꾸나."

슈겐하르츠 녀석.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포트레트가의 차녀.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는 최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주마다 한 번씩. 식사 약속을 제안한 지 3주째 되는 날. 저번에 말했던 대로 슈겐하르츠는 이번 세 번째 점심 약속을 저녁으로 미뤘다.

'예전보다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슈겐하르츠와 자신은 사이가 좋지 않다. 약혼자라는 건 서로에게 족쇄일 뿐이다. 이렇게 된 것도 다 그 녀석 탓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했고 밀어냈기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며. 지금의 관계가 된 것이다.

자신이 그를 싫어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슈겐하르츠도 자신을 싫어해서 서로 엮이고 싶지 않을 텐데.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이런 연기를 시키며 엮이려 드는 거지?'

오랜만에 그 녀석을 만나 춤을 춰야 했던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부터 녀석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슈겐하르츠가 걸었던 불쾌한 귓속말.

⎯에리카. 큰 소리 내지 말고 들어라.

나는 앞으로 너에게 대략 열 번 정도, 그 이하일 수도 있지. 동일한 시간, 동일한 내용의 제안을 할 것이다. 네가 질색할 만한 것으로 말이다.

너는 그 제안을 솔직하게 거절하면 된다. 어차피 네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확실히 해야 하기에 말한다.

내 제안을 계속 거절해라. 그러나, 내가 갑자기 처음 제안과 다른 안을 내민다면.

'받는 척'을 해라.

받는 척. 어째서?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가?

왜 그래야 하는지 도저히 감도 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아무런 까닭 없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그리고 무도회장과 연구실에서 마주한 그 눈빛.

마치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는 그 가증스러운 눈동자.

거짓임을 알지만, 그때의 슈겐하르츠의 눈은.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예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짜증 나."

슈겐하르츠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질색이다. 녀석과는 엮이고 싶지 않으며 될 수 있으면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

하나, 그와 자신이 약혼 관계인 것은 현실이었고. 자신이 할 일이 어렵지 않다. 불이익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득이지.

마지막에 슈겐하르츠는 이 안을 따라 준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10카티아(Cattia)를 준다고도 했다.

수석인 녀석이 현재 가지고 있을 카티아는 20. 제안으로 건 10카티아면 한 달에 줄 수 있는 카티아의 최대치. 녀석이 가지고 있는 절반의 지분을 건넬 셈이다.

정식으로 건넬 수 있는 수단은 없으니 등급전을 통해서 줄 것이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녀석이 자신의 전적에 일부러 패배를 남긴다? 믿기 힘든 일이다. 계약을 한 것도 아니니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

하지만.

악덕한 놈이라도 치졸한 놈은 아니다.

10카티아라.

클래스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반에 무시할 수치는 아닌데.

이걸 별것도 아닌 일의 입막음과 약간의 거짓으로 지불한다니.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자신이 할 일은 단순하다.

단순히 저녁 약속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만 하고 가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일.

이것도 그의 이득과 연관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만약 당하는 꼴이 된다면 앞으로 그의 앞에선 어떠한 대항도 의미가 없는 행위이겠지.

"에리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아, 밴틀로. 아니야. 별일 없었어."

복도를 걷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선한 인상의 남자. 자신의 몇 없는 친구, 밴틀로. 그가 듣던 수업도 같은 시간이니 끝나고 온 것 같다.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지금의 인상이 사나워 보이긴 한 모양이다.

"걱정되네…. 에리카, 몸 상태가 안 좋은 거면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어때?"

"괜찮아. 고작 이 정도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힘들면 말해. 내가 업어서라도 데려다줄게."

"너 이따가 전공 오후 수업 있잖아."

"수업 시간은 곤란하지만 그 전이라면…."

"말만이라도 충분해."

아무리 슈겐하르츠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되도록 숨기고 있다.

그는 우리 사이를 알고 있으니 더욱, 그런 눈에 띄는 행위를 할 리 없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겉치레. 그런데, 이런 따뜻한 겉치레 한마디가 왜 이렇게 와닿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든지 말해 줘. 오랜 친구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참 고마운 친구다.

누구와는 다르게 자신의 모난 성격을 받아 주니까. 바르간과 사이가 좋지 않아진 뒤로 만난 꽤 오랜 친구이지만 지금까지 그와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는 뭘 하든 항상 자신에게 맞춰 줬다.

그런 밴틀로가 하는 말이다. 뭐가 됐든 선한 의도로 말하는데 너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땐 민폐 좀 끼치도록 할게."

....

문뜩 웃고 있는 밴틀로와 과거의 그 녀석이 겹쳐 보인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녀석이 갑자기 돌변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돌변조차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속이 깊었더라면.

지금의 이런 관계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파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었을까.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정신 차리자.

그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아 통증을 호소하는데, 뭐? 녀석이 달라져?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

녀석은 달라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던 것이다.

에리카는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냉소로 씹어 넘겼다.

에리카의 심장에는 바르간이 박아 놓은 과거의 칼날이 아직까지도 그 예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3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