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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요.]

이엘리야는 생각했다.

이 인간은 미쳤다고.

용감하고 무모한 정도를 넘어 뇌의 어느 한쪽이 고장 나 버린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제2관문 핵심 요약 일람: 서우진>

■흑감람 경구 투여.

■흑광견(黑狂犬) 32개체 사살.

■싸이클롭스 1개체 사살.

- [타격: 1,492회]

- [피격 1회]

- [회피: 295회]

- [최종 처치 요인: 과다출혈]

- [전투 시간: 4시간 22분 58초]

■소장(small intestine) 파열, 내부출혈, 탈진 등 종합 신체 결손 발생

■후원 총액 620Coin

■관심 성좌(★) 101/101 만석(滿席).

[이게 진짜 말이나 되는 일인가요....]

서우진에게 붙은 제2관문의 요약 일람은 이엘리야로 하여금 기함을 토하게 했다.

아니,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외적인 표현이 그 정도라 그렇지 내적으로 느낀 놀람의 정도는 그보다 더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약 일람에 새겨진 하나하나의 항목들이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층계초월자가 그중 하나만 달성했다고 해도 놀랄 만한 일인데, 하물며 그 모든 게 한 사람이 이룩한 일이라니.

이엘리야가 가진 상식과 지식의 선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전에도 이만한 성과를 이룩한 층계초월자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고.

[....]

물론 요약 일람에 같이 적혀 있듯이, 그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룩한 일들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우진은 피투성이의 상태로 관문의 경계에 넘어왔으니까.

심지어.

이번에는 정말 우진의 피가 섞여 있다는 점에서 제1관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급한 몸 상태였고.

[1성 회복 마법이 적용 중입니다.]

[자연회복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물론 이엘리야도 그 상태를 방치하진 않았다.

올라온 우진의 몸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10Coin을 때려 부어 1성급 힐링 마법이 내장된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전송, 발동했으니까.

본래라면 절차적으로 우진의 의사 확인이 필요했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한지라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는 해야 마음 놓고 회복을 기다릴 수 있었으니까.

[대체....]

다시 한번 요약 일람을 확인한 이엘리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고작해야 제2관문을 통과하는 층계초월자가 보일 수 있는 퍼포먼스가 아니었다.

관문지대를 모두 통과하고 정식으로 용사 후보생이 된 자라 하더라도, 혼자 수행하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업적들.

아니, 솔직히 이 정도라면 1성 훈장을 받고 현재 활동 중인 브론즈급 용사들이라도 모두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의뢰로 같은 업적을 요구한다면 대부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결과.

[....]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우진이 모든 성좌에게 마킹(Marking)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성좌의 '마킹'이라는 것은 언뜻 듣기에 '즐겨찾기'처럼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상 그렇게 가벼운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영향력만을 생각한다면, 관문지대의 모든 요소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기막힌 후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코인이나 특성은 관문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그 의미가 많이 훼손된다.

물론 관문지대에서 얻은 코인과 후원이 나간다고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위차원계에는 코인과 특성을 가진 용사들이 넘쳐 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희소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

성좌들이 기를 쓰고 관문지대에 참관해서 전속계약을 맺으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아무리 많이 돈을 쓰더라도, 상위차원계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는 용사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니까.

하지만 '마킹(Marking)'의 경우에는 달랐다.

관문지대에 참관하지 못한 여타 성좌들이 '신규 용사 후보생'의 퍼텐셜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

때문에 성좌가 남긴 '마킹'은 용사로서 활동하는 동안 꼬리표처럼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다.

하물며, 교단의 교칙에 따라, 한 성좌가 표할 수 있는 마킹(Marking)의 수에도 제한이 있었으니.

그 마킹이 가지는 가치는 가히 '전속계약'에 준한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용사 후보생이 받는 의뢰 비용의 책정이 상당 부분 '마킹 수'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아직 깨어나시려면 시간이 있는 것 같으니까.]

잠시 우진의 상태를 살피며 중얼거린 이엘리야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파앗-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몸이 마법진을 벗어나며 관문의 경계에서 실행되던 형상구현 마법이 취소된 것.

"총괄 주임사제님이 출타 중이시니까...."

탁탁탁탁-!

"수석 사제실… 수석 사제실...."

자신의 사제실을 벗어나 뛰는 것이나 다름없는 걸음으로 하얀 복도를 내걷는 이엘리야.

그리고 도착한 복도 끝의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후우...."

똑똑-

가쁜 숨을 정돈하며 수수한 장식의 문 위로 노크를 했다.

이내 너머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

- 누구죠?

"이번 관문지대에 수행사제로 발탁된 남부 수도원 출신 이엘리야 폰 데이나 머큘루르트라고 합니다."

잠시 이어진 정적.

- 들어오십시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엘리야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구레나룻부터 이어 내려온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

수석사제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머큘루르트, 무슨 용건이죠?"

날카롭지 않지만, 미묘하게 내려앉은 목소리.

"분명 지금은 안내 시간일 텐데. 안내가 벌써 끝난 건가요?"

뒤이어진 은근한 지적에 방금 이엘리야는 방금 자신이 밉보였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아무런 기별도 없이 수석사제실에 들이닥친 것도, 정해진 시간에 직무 장소를 벗어났다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짓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수석사제의 태도에도 이엘리야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다름이 아니라. 특이사항 발생으로 요청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요청이요?"

그러니까.

"제가 담당을 맡은 층계초월자 서우진이 올 마킹(All Marking) 특수 요건을 충족해 <선택받은 자> 특성 발행을 요청드리러 왔습니다."

무려 지난 100년간 한 번도 발행된 적 없는 '교단 특성'의 발행을 요청한다는 말을.

16화

EP4. 마지막 관문 (1)

"…머큘루르트 수행사제님."

"네. 수석사제님."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교단 특성.

'선택받은 자'의 발행을 요청한다는 이엘리야의 난데없는 요구에 수석사제의 얼굴이 눈에 띠게 구겨졌다.

물론 이엘리야가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소수이기는 하나 교단에 '선택받은 자'라는 특성을 직접 발행하는 제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었고, 현재 활동하는 용사들 중, 그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자가 있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 교단 특성이 발행된 게 무려 100년 전이라는 게 문제였다.

100년 전 발생한 어느 사건을 트리거로 교단 내부에서는 '교단 발행 특성' 자체에 대한 위험성을 제고하게 되었고.

그렇게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서 사실상 폐지가 된 것이 바로 <교단 특성: 선택받은 자>였다.

심지어 그 사건이 워낙 충격적인 터라, 교단에서는 특성을 발행했던 과거를 치부로 여기며 함구령을 내리고 기록조차 쉬쉬할 정도였으니.

일반적인 사제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하물며 이엘리야는 이제 막 초임수행사제로 발탁된 병아리 중의 병아리.

수석사제의 입장에서는 얼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엘리야가 교단 특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알고 있다면 그 엄중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요구하는 그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수석사제의 복잡한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걸까.

이엘리야는 그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수석사제의 얼굴을 직시하며 자신의 의견을 견지했다.

"물론 수석사제님이 걱정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렇게 요청을 드릴 만큼 현재 제가 관할하고 있는 층계초월자의 자질이 남다른...."

"머큘루르트."

다시 한번 그녀의 성을 부르는 수석사제.

이번에는 그녀의 뒤에 붙어 있던 직책이 빠져 있었다.

목소리는 더 낮게 깔렸고.

뒤이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굳은 얼굴색으로 그가 읊조렸다.

상사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엘리야는 순간 흠칫-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는 법.

교단 본부 차원에서 요청을 기각당하더라도, 요청까지는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그녀였다.

"적어도 요청까지는...."

하지만.

뒤적뒤적-

부욱-

돌연 서랍에서 흙색 종이 한 장을 꺼내든 수석사제가 그것을 찢고 마법진이 그려지자, 그녀의 목소리가 기능을 잃어버렸다.

'이건...?'

사일런스(Sillence).

대충 느껴지는 감을 보아하면 <마법: 사일런스>의 최저 수준인 무성급(☆)의 마력을 담은 것 같았다.

1성급도 아니고 이 정도 메모라이즈 마법을 역산-해제할 수 있는 디스펠 능력은 가지고 있는 이엘리야였지만, 그녀는 굳이 디스펠을 실행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이엘리야의 입을 정말로 강제로 막으려 했다기보다는, 수석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닥치고 있으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과 같은 처사였으니까.

실제로 수석사제의 목소리는 더욱더 낮아져있었다.

"서우진. 하위차원계 한국 출신. 남성. 28세. 제1관문 오크 193마리 사살"

"...."

"제2관문 흑광견 32개체 사살. 싸이클롭스 사살. 관문 조기종결 유발. 그리고...."

"...."

"올 마킹(All Marking) 조건 달성."

드륵-

수석사제가 우진의 전적을 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큘루르트도 알고 있겠지만 주임사제님이 출타하시는 동안은 제가 총괄 모니터링을 맡습니다. 당신이 관할하는 그 잘난 층계초월자의 요약 일람도 이미 읽었고요."

"...."

"물론 대단합니다. 전에 없던 일이고, 절대적인 데이터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아마 사상 최고 수준이겠죠. 모든 특이사항에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지만 싸이클롭스를 죽인다는 건 저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범주라 급하게 제2관문 자체를 조기종결 시키기도 했으니까요."

"...."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는 수석사제실의 탁자 뒤에 놓여 있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물론 정리하는 동안에도 입은 쉬지 않았고.

"항마전에서 교단 본부가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히 큽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요."

"...."

"상위차원계에 존재하는 모든 성단과 성좌가 주목하는 곳이 바로 교단 본부입니다. 본부의 뉘앙스가 교단연합군의 뜻이 되고, 교단 본부에서 취하는 스탠스가 전쟁의 양상을 유지하고 뒤틀죠."

"...."

"때문에 교단은 어떤 선택을 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한번 내린 선택을 뒤집을 때는 더더욱."

정리를 끝마친 수석사제는 천천히 이엘리야에게 다가오며 검지를 펴보였다.

"그러니 그 '서우진'이라는 층계초월자에게 예외적으로 특성 발행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실력 외에도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엘리야의 뒤쪽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재 교단연합군이 애를 먹고 있는 마왕군의 책사(策士)."

"...!"

"그처럼 변절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입증해야겠죠… 알겠습니까?"

* * *

"...."

번뜩 뜨여지는 눈과 함께, 새하얀 관문의 경계 배경이 들어왔다.

동시에 주마등(走馬燈)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는 몇 개의 장면.

『온몸의 인대를 끊기고 무릎을 꿇은 채 늘어진 싸이클롭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나.』

『자박하게 고인 피웅덩이.』

『찢어발겨진 흑광견.』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일어나 봐요… 서우진 씨.... 이, 이게....』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며 더듬더듬 힐링 능력을 써보려는 김시아까지.

아무래도 무의식의 내가 어떻게든 싸이클롭스를 잡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꼼지락 꼼지락-

'…괜찮네.'

몸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은 것을 보면 김시아든 이엘리야든 내 몸의 후처리를 어느 정도 해준 듯했고.

'근데… 왜 반응이 없지.'

문득 느껴지는 어색한 고요함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이엘리야를 찾자.

오른쪽 머리맡에서 쪼그려 앉아 있는 이엘리야의 형상이 눈에 잡혔다.

"어… 안녕?"

[아...!]

"나 일어났는데...."

[내 정신 좀 봐… 그러니까… 다행이에요. 고생하셨어요.]

"...."

긁적긁적-

제1관문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왜 그리 무리했냐고 화를 내든가.

어떻게 싸이클롭스를 잡았냐고 경악을 하든가.

둘 중 하나는 했어야 하는데, 이건 뭔가 반응이 애매했다.

다른 데에 정신을 팔고 있는 느낌이랄까.

혹시나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내 사지(四肢)를 훑어 보았는데, 딱히 잘렸다거나 잘못된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요약 일람.

+

<제2관문 핵심 요약 일람: 서우진>

■흑감람 경구 투여.

■흑광견(黑狂犬) 32개체 사살.

■싸이클롭스 1개체 사살.

- [타격: 1,492회]

- [피격 1회]

- [회피: 295회]

- [최종 처치 요인: 과다출혈]

- [전투 시간: 4시간 22분 58초]

■소장(small intestine) 파열, 내부출혈, 탈진 등 종합 신체 결손 발생

■후원 총액 620Coin

■관심 성좌(★) 101/101 만석(滿席).

+

요약 일람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내가 노린 부분은 실패 없이 모두 성공한 완벽한 성적표.

'여기도 문제는 없는데....'

녀석에게 뭔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내가 일어난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쪼그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까.

어딘가 다른 데에 신경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내게 반응을 한 것이고.

도대체 뭐가 녀석을 그렇게 만들었을 까 생각을 해보는데, 문득 녀석이 눈을 내려깐 채로 입을 열었다.

[용사님.]

"어? 어 왜."

[용사님은 최고예요.]

"...?"

느닷없는 칭찬.

그것도 전혀 기쁘지 않은 목소리로 칭찬을 하니 당황스러웠다.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말 그대로예요. 용사님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용사님은 모르실 거예요.]

"...."

[아마, 역대에 층계초월자들을 모두 모아 놔도 손에 꼽을 만큼… 엄청난 일이에요. 싸이클롭스를 사냥하고… 또 모든 성좌로부터 마킹을 받았다는 것은.]

여전히 침울함이 섞인 얼굴.

나는 그 즈음에 짐작할 수 있었다.

녀석이 왜 저렇게 토라져 있는지, 그리고… 누구한테 토라져 있는 건지를 말이다.

[수석사제 개X끼....]

뒤이어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녀석의 솔직한 중얼거림에, 나 역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식-

[그거 좀 요청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지만 사제인가. 나도 이제 사제서품 받았는데.]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설마 내가 기절한 사이에 알아서 '교단 특성 발행'을 요청하러 갔을 줄이야.

[Bucket List#4]

『교단 특성. '선택받은 자' 획득.』

'…이런 거 보면 내가 전생에도 수행사제 하나는 잘 만났다니까.'

3번째 버킷리스트 '모든 성좌로부터 관심받기'는 본질적으로 이 4번 '선택받은 자 특성 획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100년 전쯤 교단이 '교단 특성 발행 제도'를 중단하며, 발행 대상 조건에 '올 마킹(All Marking)'이라는 사실상 달성 불가능한 조항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적어 둔 버킷리스트.

물론 그게, 그걸 달성한 사람에게 주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사실상 폐지'를 위해 끼워 넣은 조항인지라 달성한다고 해서 '선택받은 자' 특성이 발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조건 자체는 만족했어도 관문지대를 관리하기 위해 편성된 관리사제단 선에서 본부로의 요청 자체를 묵살했을 것이다.

'신뢰도'니 '엄중함'이니 그럴듯한 말들을 들먹이며 말이다.

원래 사람이라는 게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손해보다는, 어떤 행위를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손해에 더 민감한 법이었으니까.

…애초에 교단만치 거대한 집단에서 돌발 변수를 반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제3관문까지 끝내고서 직접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그냥… 용사님을 위해서 제가 뭔가 준비해 둘 수 있다 생각했는데, 시도도 못 해 보고 포기해야 돼서 좀 속상해서 그래요.]

녀석이 고백 아닌 고백으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선택받은 자'라는 단어만 안 나왔지,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훤히 알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아직도 침울함이 사라지지 않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름을 불렀다.

[…머큘루르트예요.]

"혹시 그 말 알아? 하위차원계에서 유행하는 말인데."

[…무슨 말이요?]

"'될놈될 안될안'이라고...."

녀석의 고개가 모로 기운다.

모른다는 의미다.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더 풀어서 의미를 설명해 줬다.

"될 놈은 어떻게든 되고, 안 될 놈은 어떻게든 안 된다는 말이지."

[…의미 자체는 이해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은 왜....]

"나는 어느 쪽일까?"

문득 던진 질문에 이엘리야가 피식-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정해 놓고 묻는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야 될 놈이시겠죠....]

"땡."

[...?]

"정답은 '돼야 하는 놈'이야."

녀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때아닌 선문답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이게 정답이었다.

될 놈의 운명인지 안 될 놈의 운명인지는 이 2회차의 끝자락에 가서야 알 수 있을 테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나는 돼야 하는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어, 내 멋대로 죽을 수조차 없는.

내 멋대로 실패할 수조차 없는.

"…그니까 될 거야. 그게 뭐든. 내 버킷리스트에 있다면."

…그래야만 하는.

17화

EP4. 마지막 관문 (2)

['관문지대: 제3관문'에 입성하셨습니다.]

['제3관문'에 부여된 시련을 확인합니다.]

+

[시련: 수성전(守城戰).]

■개요: 고대부터 상위차원계에는 굉장히 많은 마물 종족이 존재해 왔지만, 원주민들에게는 그들이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물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같은 마물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고대에 마왕이 등장하여 '마왕연합군'이 형성된 뒤에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반목하지 않습니다. 끝없이 세를 불리고 상위차원계 원주민들의 목을 조이며, 최후의 보루인 중앙대륙 '에덴'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끝없이 밀려드는 마왕군을 막아 내고, 성전을 수호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수호십자성전을 24시간 동안 수호.

■난이도: D

■제한시간: 24시간.

■보상: '???'

+

관문의 경계를 떠나 도착한 마지막 관문의 집행지.

그곳은 넓은 광야 한가운데 존재하는 외딴 성의 성벽 위였다.

'....'

수호성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백색으로 이루어진 내성과, 연회색 외성벽으로 이루어진 외딴 성.

그 바깥의 황야.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할, 수많은 마왕군의 무리.

…이곳이 관문지대의 마지막을 장식할 전장(戰場)이었다.

- …여기가.

- 야-호!

- 여기선 또 얼마나 굴러야 되는 거야.

이 공간에 떨어진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띄운 안내문에도 나와 있듯, 이곳의 퀘스트는 1, 2관문과 다르게 모두가 같이 해결해야 하는 일종의 공동 퀘스트.

131기 딱지를 달고 관문지대에 올라온 층계초월자 전원이 이 외성벽 위로 소환되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성벽 위에 쭉 늘어선 모습은 꽤나 봐줄 만한 장관(壯觀)이었다.

'…200명이라. 생각보다 많지만 어떻게 부족하진 않겠네.'

대충 가늠해 본 숫자는 그 정도였다.

뒤이어-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과감한 결단력을 치하합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이 선사한 드문 볼거리에 감사를 표합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을 향했던 일말의 의심을 사과합니다.]

[성좌, '신단수의 후계자'가 당신을 보며 이유 모를 뿌듯함을 느낍니다.]

.

.

.

밀린 감상평을 쏟아 내는 성좌들의 문장까지 떠오르고.

제3관문을 시작하기 위한 얼추의 요식은 끝난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왕군이 성을 향해 진격해 옵니다.]

[남은 시간 00:29:38]

회귀 전의 나는 이때 주어진 시간에 아마 칼을 갈았던 것 같다.

성벽 너머에서 몰려오고 있을 마물 무리를 대비하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다.

'…가장 큰 적이 내부에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지.'

결국 성벽 밖의 마물과 우리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도 못하고 제3관문은 끝이 났으니까.

"큼, 흠."

아직 싱숭생숭한 사람들을 보며 목을 한 차례 가다듬은 나는, 이엘리야를 통해 미리 구매해 둔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꺼내 찢었다.

부욱-

동시에 떠오르는 문장과 마법진.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사용합니다.]

[내장 마법: 메가폰(Megaphone)]

[아아-마이크테스트. 들리시나요?]

- ...!!

가볍게 소리를 내자, 바로 반응이 왔다.

'E급 마법진치고는 성능이 괜찮네… 그린 지 얼마 안 된 건가.'

갑작스런 큰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준 사람들.

그런 그들을 향해, 나는 간단히 두 가지 정도의 사항을 말해 주었다.

[잠시 내성에서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내가 이 확성 마법을 사용한 용건이었다.

일단 본격적으로 마물들이 몰려들기 전에 미리 처리해 둘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번은 모여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참고로 하나 말씀드리자면… 제2관문에서 싸이클롭스를 잡은 사람이 접니다. 괜히 까불다가 뒤지기 싫으면 다 모이세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을 수 있을 만한 협박조의 조언이었다.

근데 이제....

씨익-

[…라고 할 뻔.]

조크를 담은.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듣도 보도 못 한 문장 배열에 입을 벌립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이게 칼로 배때기 찔러 놓고 죽을 줄 몰랐다고 사과하는 것과 무에 다르냐고 묻습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탁월한 하이개그에 감탄합니다.]

* * *

내성 안으로 사람들을 모으려는 나의 의도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 다섯만 모여도 반드시 쓰레기가 있다는 말도 있는데, 설마 200명 중에 반골(反骨) 기질 하나가 없을까.

조크에 담긴 내 진심을 읽은 몇몇 정도가 외성벽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뭐, 그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모든 사람을 모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마 이 중에 있겠지.'

성스러운 듯 아닌 듯.

어딘가 애매한 시골 성당 느낌의 대충 만든 내성 원목 인테리어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한층 가중시켰다.

- …저 사람 나도 본 것 같긴 해. 싸이클롭스는 아니지만 오크 잡는 거 봤어.

- 래피드 알비노 오크....

- 아 X발, 이런 거 딱 질색인데. 용건 있으면 빨리 말이나 할 것이지.

-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여기서 목숨 걸고 이러고 있냐고.

- 어쩌자....

.

.

.

터벅터벅-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쫓으며, 어서 입을 열어 보라는 듯 다그쳤지만 나는 일부러 더 느긋하게 움직였다.

천천히 무리를 돌아 내성의 정문으로 향한 나는.

끼익-

천천히 문을 닫았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당신의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그리고 다시 내성의 강단 위로 올라가, 챙겨 온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익-

후우.

"안녕하세요.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내가 입을 열자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다.

빛이라고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뿐이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기에는 충분한 밝기였다.

한차례 그들을 훑고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간단히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제2관문에서 싸이클롭스를 직접 사냥한 사람입니다. 몇몇 분은 아시겠지만 아마 제1관문에서 오크를 가장 많이 잡은 사람도 저고요."

언뜻 듣기에는 자랑에 가까운 말들.

아니, 실제로 그건 들으라고 하는 자랑이었다.

"그래서 제가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코인이 제일 많을 겁니다. 가장 강하기도 하고요. 여러모로 여러분들보다는 제가 전투의 조건이 용이...."

특정 반응을 듣기 위한 자랑.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기다리던 반응이 나왔다.

-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자랑하려고 우리를 부른 건가?

무리 사이에서 문득 튀어나온 고까운 반응.

그게 정확히 내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나는 그 반응이 튀어나오자마자, 미리 챙겨 두었던 자루 하나를 그들 앞에 꺼내 보였다.

텅-

그리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어떤 분은 제가 자랑을 하기 위해 이렇게 사람을 모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 ....

"여러분들도 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1, 2관문과 다르게 제3관문은 모두가 함께 수행하는 공동 관문입니다. 제아무리 잘나 봤자 전체가 다 잘하지 않으면 통과하기 어려운 관문이죠. 그래서 제가 가진 코인으로 여러분들이 사용하실 수 있는 포션 비슷한 것을 사 왔습니다."

와르르-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합리적이지 않은 코인 소비에 미간을 찌푸립니다.]

말과 함께 자루의 줄을 풀자, 강단 위로 5cm가량의 길쭉한 플라스크가 쏟아져 나왔다.

이엘리야를 통해 미리 관문의 경계에서 사 둔 'E급 성수(聖水)'.

마왕연합군의 도핑제가 '흑감람'이라면.

교단연합군의 도핑제는 바로 이 성수(聖水)였다.

그 자체로 마기(魔氣) 정화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액체.

사실 이 성수가 관문지대에서 크게 효과적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E급 성수는 사실 3Coin 정도로 살 수 있는 흔한 물건이었고, 마물에게도 미미한 효과가 있긴 했지만, 그 본질은 악마종(惡魔種)을 상대하는 데에 있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나은 정도였다.

그러니 성수를 이렇게 무더기로 구매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아레스의 평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성좌들은 아직까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건 성 밖에서 몰려오는 마물을 잡는 데 쓰려고 산 게 아니었으니까.

성수의 정체를 알아본 누군가가 외쳤다.

- 저거… 성수 아니야? 우리 수행사제한테 설명 들었던 것 같은데.

- 맞네!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느새 웅성거릴 정도로 커졌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에 대한 의심이 충분히 사그라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괜찮은 분위기가 만들어진 뒤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여러분들을 도울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은 거고요. 하지만 저에게 적대감을 가지는 사람들까지 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수도 넘쳐 나는 상황이 아니고요."

- 옳소!

"해서, 제 말을 듣고 모여 주신 여러분들에게만 성수를 나눠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몇 개의 성수 플라스크를 주워 자루에 담으며, 말했다.

"자, 줄 서세요. 한 명이 두 번 마시면 안 되니까."

* * *

내가 서 있던 강단을 기준으로 일렬로 선 사람들은 한 명씩 성수를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전히 잦아들지 않은 의심 때문에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일단 한 명이 마시고 시스템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자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식음 행렬이 이어졌다.

"다음이요."

"다음."

"네, 다음이요."

"쭉 들이켜세요."

"괜찮아요."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수를 마시고, 끝까지 성수를 마시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 8명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왜 무료로 제공하는 성수를 마시지 않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그들은 답했다.

"우리가 당신의 뭘 믿고 그 알지도 못하는 액체를 마셔야 합니까?"

"흐음… 앞에 분들이 이미 시스템창을 통해 증명해 줬을 텐데요."

"애초에 이 관문지대라는 곳에 끌려온 것부터가 완전히 납득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 시스템이라는 것에도 당신이 조작질을 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타당한 주장이었다.

"흐음~."

전생에 나였어도 아마 마시지 않았을 것 같았고.

그래서.

방긋-

"오케이 합격."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미 성수를 마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터벅- 터벅-

- 뭐… 뭐예요. 왜 갑자기....

- ...?

- 왜. 우린 다 마셨잖아.

갑작스럽게 굳은 표정.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내가 가는 방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황을 불러 일으켰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그러니까.

"음...?"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시아'의 앞에.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콰-앙!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당신의 돌발 행동에 두 눈을 부릅뜹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예상치 못한 반전에 입을 벌립니다.]

[성좌, '신단수의 후계자'가 이유 모를 실망감을 느낍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망나니 같은 행동에 이유를 묻습니다.]

갑작스런 전개를 이해 못 한 성좌들의 질문들이 빗발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더욱 바닥으로 짓눌렀다.

그러자.

"커헉-!"

기침과 함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성수'.

그와 함께 풍겨 오는 익숙한 쓴 내에 나는 확신했다.

"…아가리에서 마귀 탄내가 진동을 해요."

그녀가 더 이상 '김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몽마 아주머니."

여기 있는 이 존재가, '김시아'의 탈을 쓴 간악한 몽마(夢魔)라는 것을.

18화

EP4. 마지막 관문 (3)

몽마(夢魔).

사람의 꿈에 나타나 정기를 빼앗고 홀린다 전해지는 최하급 악마종.

성별이나 가진 능력, 혈통에 따라 자기들끼리는 인큐버스(Incubus), 서큐버스(Succubus), 나이트 메어(Nightmare) 등 가지각색으로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전장에서 우리가 가장 흔하게 부르는 명칭은 몽마(夢魔)였다.

굳이 성별을 구분해야 할 때는 거기에 암컷, 수컷이 붙는 정도.

뭐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몽마(夢魔)는 전생에도 131기의 관문지대에 나타났었다.

그 때문에 당시에도 131기 용사 후보생들은 꽤나 유명한 편이었다.

이 몽마가 131기 관문지대에 숨어들며 발생한 일련의 사건으로 131기수 출신 생존자가 대폭 줄어들게 되었으니까.

용사끼리의 회담에서도 스스로가 131기임을 밝혔을 때에는 '오, 진짜?'라는 반응이 돌아올 정도였다.

'전생과 달라졌네. 설마… 김시아를 숙주로 삼았을 줄이야.'

몽마(夢魔)가 관문지대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오랜 항마전에서 교단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법을 찾던 마왕군의 책사는, 차원균열이 일어날 때마다 저급한 마물들이 하위차원계로 강제 전이되는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본래라면 하나의 개체가 거시차원적 현상에 개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묘수(妙手)를 떠올린 마왕군의 책사는 모종의 방법으로 몽마 하나를 하위차원계에 내려보내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위차원계에 내려간 몽마(夢魔)는 사람의 몸에 기생해서 다시 관문지대로 올라오게 되는데.

그 몽마를 통해 관문지대를 유지하는 교단의 마법장치를 무너트려, 차원 간에 거대한 싱크홀(Sinkhole)을 만드는 것이 바로 마왕군의 궁극적인 계략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교단의 발 빠른 대처에, 관문지대가 차원 싱크홀로 변하는 대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 131기 층계초월자들이 대다수 휘말리며 생존률이 10% 이하로 떨어지게 된 것.

그게 회귀 전에 일어났던 '131기 몽마 칩입 사건'의 전말이었다.

- 몽마?

- 몽마가 뭐야. 아니 저 양반 미친 거 아니야? 멀쩡해 보이는데....

- 아니… 왜 멀쩡한 인간을....

- 하여간! 내가 말했잖아 저 새끼 저거 분명 뭔가 꿍꿍이가....

내 갑작스런 행동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졌지만, 굳이 그런 데에 신경을 두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유를 둘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았다.

아무리 최하급이고, 인간의 몸에 기생을 하며 살아가는 저급한 종이라 하더라도.

몽마(夢魔)는 엄연히 악마의 피가 흐르는 악마종(惡魔種).

그만한 마물을 눈앞에 두고 방심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때였다.

[아....]

김시아의 목을 타고 튀어나온 낮은 탄성이 장내를 얼려 버렸다.

싸아-

단순한 탄성일 뿐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 소란스러웠던 장내 모든 사람이 아가리를 틀어막아 버리고, 시야를 흐렸으니까.

심지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던 나조차, 일순간 정신이 흐트러질 뻔했다.

아마 미리 체내의 마나를 순환시키고 있지 않았다면, 저기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저들과 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X같네요… 진짜.]

이어 튀어나오는 고혹적인 목소리.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쌍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듣는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흔들어 놓는 목소리였다.

[주의! <특성: 악마의 속삭임(★)>의 영향을 받습니다.]

[주의! 강대한 마기(魔氣)에 정신이 흐트러집니다.]

까득-

일부러 입술을 씹어 정신을 붙잡자,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한 김시아의 눈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 뭐예요?]

"…뭐가."

[안 그래도 이상한 게 굴러 들어왔다 싶어 미리 눈도장까지 찍어 놨는데… 그 역겨운 십자의 개들도 아니고 한낱 하층민 나부랭이한테 걸릴 줄은 진짜 몰랐는데.]

"…내가 눈치가 좀 빨라서."

[하.]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김시아… 아니 암컷 몽마(夢魔)라고 이야기하는 편이 맞았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김시아의 인격체가 잠식당해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지랄하지 말고 말해요 빨리. 지금 그게 궁금해서 당신 살려 놓고 있는 거니까.]

"...."

[내 흥미가 사라지면 당신은 뒈지는 거예요. 설마 지금 이 머리채 붙잡고 있다고 당신이 나를 제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

[그럼 막 가소로워서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요?]

머리를 붙잡힌 채 씨익- 하고 입가를 끌어올리는 김시아의 모습은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해 보였다.

팜 파탈(Femme fatale).

'파멸적인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다수의 성좌가 교단의 철저하지 못한 방비에 실망감을 표합니다.]

[다수의 성좌가 현재의 상황에 의구심을 갖습니다.]

확실히 녀석의 말처럼, 지금 내가 김시아의 몸을 구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몽마를 잡아 두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몽마는 숙주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쉽게 말하자면 본체가 없는 마물이었으니까.

'숙주를 제압하는 것'과 '몽마를 제압하는 것'.

둘 간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었다.

"…그래?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센 것 같은데."

짐짓 모른 체를 하며 그리 뇌까리자 조소 섞인 답변이 돌아온다.

[그야 이기시겠죠. 이 형편없는 몸뚱어리는. 근데....]

"...."

[그래서요? 설마 이 여자가 죽는다고 저도 죽는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악마종은 특별하다.

마왕연합군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마물 종족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뽑을 수 있을 정도로, 가장 특별한 종족이었다.

그 이유는 굉장히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마왕(魔王)과 같은 혈통.'

이 한 문장으로 모든 게 설명이 가능했다.

물론 방계 혈족 끝자락에 존재하는 최하급 악마종이었지만 몽마(夢魔) 역시 엄연한 악마종.

싸이클롭스처럼 피 많이 흘리고 목 자른다고 쉬이 죽일 수 있는 종족이 아니었다.

악마종으로서 몽마의 까다로움은 바로 그 존재 자체의 모호함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니까.

[몽마(夢魔)라는 말은 어디서 주워듣고 왔는지 모르겠는데… 공부를 좀 더 하고 오셔야겠네요. 당신처럼 어쭙잖은 지식으로 까불면 병신 되기 십상이에요.]

"…안 죽으려나?"

[하. 기가 차네요 정말. 하여간 인간은 정말 멍청하고 병신 같은 종족이라니까. 그럼 죽겠어요? 죽을 리가 없잖아요. 이-.]

"...."

[등신 같은 새끼야.]

달가운 멸시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온다.

[주의! <특성: 악마의 속삭임(★)>의 영향을 받습니다.]

[주의! 강대한 마력에 정신이 흐트러집니다.]

순간 강화된 마력.

김시아의 머리채를 잡은 오른손에서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다.

스르륵-

[정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죽여 봐요.]

그대로 몸을 돌린 몽마(夢魔)가 그대로 몸을 돌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를 펴들어 스스로의 가슴께 정중앙을 쿡- 쿡- 찌르며 나를 도발했다.

씨익-

[여기. 찔러 봐요, 서우진 씨.]

마치 김시아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를 흉내 내며.

"...."

그 말을 끝으로, 사위가 적막해졌다.

내성에 있던 모든 이는 몽마에 홀린 채 넋이 빠진 지 오래였고.

몽마와 나.

둘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몇 초를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적막의 끝에서.

[그럼 그렇죠. 인간 따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

"그러지."

나는 녀석의 요구에 대답을 해주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강대한 정신력이 마기(魔氣)에 저항합니다.]

[<특성: 악마의 속삭임(★)>이 무력화됩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찌푸려지는 녀석의 미간.

[…뭐라고요?]

"죽여준다고."

씨익-

나 역시 녀석이 지었던 것과 똑같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치잉-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검을 꺼내들자, 몽마가 다급히 나를 설득했다.

[아까 못 들었어요? 내가 분명 이런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고-.]

물론.

푸욱-

그걸 다 들어주지는 않았다.

"커헉-!"

날카로운 헌팅 대거의 칼날이 김시아의 가슴께를 파고들고, 입에서는 기침과 함께 피가 튀어나왔다.

보라색으로 물든 김시아의 눈이 다시 옅은 갈색빛으로 돌아오고, 적막만이 흘렀던 주변에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 뭐, 뭐, 뭐야 방금....

- 야 저기!!!

- 미친....

- 꺄아악!

아마 나를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을 사람들과.

"쿨럭...."

입에서 피를 쏟아 내며, 아련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김시아.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는 것처럼, 세상이 다시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내 세상은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또렷했던 감각이 아득해지고, 피를 잔뜩 흘린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몸.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몽마의 목소리.

[…놀랐어요. 확실히.]

'....'

[설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찌를 줄이야. 등신 같은 새끼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그래 봐야 하층민 나부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

[…혹시 주변에 성수(聖水)를 먹여 놓은 것도 계획이었나요? 이 정도 정보라면 성좌든 교단이든 어디서 개입을 한 것 같은데… 당신 진짜 뭐예요?]

'....'

[아, 아니다. 됐어요. 그냥 이제 내가 알아보면 되니까.]

흐릿했던 시야에 거뭇한 점들이 올라오더니, 이내 까맣게 멀어 버린다.

[주의! <스킬: 나이트 메어(★)>의 피격조건을 만족하셨습니다.]

[몽마(夢魔)가 꾸민 영원한 악몽에 빠져듭니다.]

.

.

.

[…어디 한번 이번에도 버텨 봐요.]

19화

EP4. 마지막 관문 (4)

짙은 보랏빛 세상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로, 관능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몽마의 모습이 보였다.

"환영해요. 내 세상에 온 걸."

남의 꿈속에 들어와 놓고 태연자약하게 자기 세상이라 씨불이는 꼬라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실제로 몽마가 꾸민 악몽(惡夢) 속에서는 몽마가 원하는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세상'이라는 표현이 그리 틀리지 않았다.

"…내 꿈인데?"

"후훗- 주제도 모르고 깝치는 꼴은 밖에서나 안에서나 똑같네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녀석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도… 인정할게요. 하층민치고는 꽤 인상적이었어요. 오히려 저 멍청한 십자의 개들보다 나은 구석이 있네요 당신은."

녀석의 중얼거림과 함께 돌연, 발아래서 식물의 뿌리 비슷한 촉수 돌기가 올라와 내 몸을 옭아맸다.

"설마, 그 여자의 몸에 바로 칼을 꽂아 넣을 줄이야. 교단 놈들이었으면 아마, 지네끼리 회의라도 거친 후에야 '불가피한 사유....'어쩌고 하면서 찌르는 시늉만 했을 텐데 말이죠."

"칭찬인가?"

으쓱-

"듣고 싶은 대로 들으세요. 개새끼보다 낫다는 말이니까…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생각하기 나름이죠."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지자, 몽마의 외관이 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내릴 수 있는 평은 '이엘리야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어깨 위로 떨어지는 은색 단발.

검은 박쥐 날개.

보랏빛 눈.

'보온'이라는 의복의 본래 기능을 잃어버린 듯한 검은색 천쪼가리까지.

그야말로 '몽마'라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외관이었다.

"어머, 시선이 불순한 것 같은데요?"

"...."

"걱정은 마세요. 별로 실망 안 했으니까."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녀석이 더더욱 다가왔다.

"당신이 좀 별나다 해봤자 인간이죠…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

"식욕, 수면욕, 성욕. 뭐 이런 덧없는 일순간의 기쁨에 환장하는 게 인간이잖아요?"

어깨를 으쓱인 녀석이 내 코앞에 섰다.

꽈악-

어느새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온 보라색 촉수는 내 온몸을 엮고 양팔까지 묶어 버렸다.

자연스럽게 횡으로 뻗어진 양팔은, 나를 십자가에 달린 희생양처럼 허공에 걸어 놓았다.

힘으로 팔을 한번 당겨 보았지만, 역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내가 몽마(夢魔)라고."

사락-

"여기서는 뭐든지 내 마음대로예요. 시간도, 장소도, 고통도, 쾌락도… 결국 당신의 마음까지도."

마지막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온 녀석은, 오른손으로 슬며시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콰악-

내 머리를 쥐어 뒤로 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때요.]

[지금 꾸고 싶은 꿈 있어요-?]

숨결과 함께 귓가를 타고 들어오는 그 노골적인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을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꺼… 아...."

"…뭐라고요?"

그러니까.

"꺼지라고 X년아. 역겨우니까."

…라고.

* * *

"무, 무슨...."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의 몽마(夢魔)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낱 하층민 나부랭이'가 몽마의 악몽 속에서 멋대로 저항하는 것은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이번에는 분명 확실하게 넋을 빼 놓았는데...."

"아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가 좀 다르다고… 그런가 보지."

스윽-

자연스럽게 촉수의 구속을 벗어난 나는 묶여 있던 팔을 풀며 어깨를 돌렸다.

"...."

몽마(夢魔)가 가진 스킬과 특성은 개체에 따라 그 능력과 개수가 달랐지만.

모든 몽마가 공통적으로 가진 스킬과 특성이 하나씩 있었다.

<특성: 악마의 속삭임(★)>과 <스킬: 나이트 메어(★)>.

<특성:악마의 속삭임>은 쉽게 말해,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현혹 기능을 목소리에 탑재하게 하는 특성.

그리고 <스킬: 나이트 메어>는 인간의 심상 세계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악몽(惡夢)을 구현하는 스킬이었다.

"나는 그 태도가 끔찍하게 싫어."

"...."

"인간을 죄다 장난감 취급하는 네 녀석들의 그 역겨운 우월주의가."

따악-

촉수 돌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손가락을 튕기자, 그 흉물스런 촉수가 이번에는 몽마의 발목 아래서 돋아났다.

"마, 말도-."

발목을 타고 몸을 얽어매는 촉수 돌기를 보며, 이번에는 거의 기겁을 하는 몽마(夢魔).

아마 수많은 인간의 심상세계를 넘나들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자신이 꾸며 놓은 악몽(惡夢) 속에서 역으로 당하는 것은.

"다, 당신 대체...."

"몽마가 인간의 꿈속에서 제멋대로 악몽(惡夢)을 펼칠 수 있는 건, 기본적으로 그 인간이 그 짓을 허락하기 때문이지… 네 녀석의 그 요망한 혀놀림에 현혹돼서."

"...."

"근데 난 아니거든."

몽마가 사람들의 꿈속을 넘나드는 메커니즘은 굉장히 간단했다.

<스킬: 나이트메어>를 통해 대상의 심상세계 속에 악몽(惡夢)을 꾸미고, 몽마가 멋대로 주무르는 악몽 속에서 대상의 정신이 무너지면 그 붕괴된 빈자리를 차지하여 숙주로 삼는 것이 대략적인 몽마의 생존 원리.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심상세계에 침투한 몽마에게 악몽을 꾸밀 권한을 넘겨주는 것은 대상자 본인이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유외강(內柔外剛)한 동물인지라, 밖에서는 <특성: 악마의 속삭임>에 어떻게든 버티더라도 일단 몽마가 심상세계로 직접 들어오게 되면 훨씬 나약해지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꽈아악-

"으흣...."

"미안하지만 내가 평범이랑은 한참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오히려, 아직 신체가 여물지 않아 제대로 된 마력 저항이 갖춰지지 않은 심상세계 밖에서라면 모를까.

회귀 전부터 쌓아 온 경험치가 온전히 녹아 있는 이 안에서는 절대 녀석의 목소리에 홀릴 정도로 나약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항마전의 전장에서 이곳을 다녀간 몽마만 해도 수백 마리였다.

그 경험치가 오롯이 존재하는 이 안에서는 내가 절대로 녀석에게 질 수 없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매여 버린 몽마가, 문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설마… 일부러 나이트메어의 발동 조건을...."

피식-

내가 녀석의 스킬에 '당해 준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히려 이쪽이 홈그라운드라서 말이야."

<스킬: 나이트 메어>는 교단의 등급산정 방식으로 1성급에 해당하는 스킬이었는데, 사실 인간 한정으로 그 능력을 본다면 일반적인 1성급을 훨씬 상회하는 잠재능력을 갖춘 스킬이었다.

그럼에도 1성급으로 산정되는 이유는 그 발동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었는데.

그 발동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었다.

하나는, '기존 숙주와의 직접 접촉'이고.

둘은, '신규 숙주의 동의'였다.

"주변에 성수를 먹여 놓은 건, 네가 다른 숙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

"네 어쭙잖은 목소리에 당해 주는 척을 한 건, 내 몸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거였지."

그리고 나는 김시아의 심상세계에 숨어들었던 몽마에게, 내가 바로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숙주라고 '올가미'를 놓은 것이었고.

"어떻게 몽마에 대해 이렇게까지 알 수 있죠? 아니, 그걸 떠나서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녀석의 표정이 점점 짙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인상적인 표정 변화를 감상하며, 나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어차피 여기가 네 마지막이 될 테니까… 재미있는 걸 하나 보여 주지."

따악-

그와 함께, 보랏빛 세계 위로 백색의 네모난 영화 스크린이 나타난다.

『…후후. 결국 실패해 버렸네요.』

그 위로 펼쳐지는 장면에 몽마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게 물든다.

『뭐, 그래도 상관없어요. 십자의 개들한테 들켰다는 게 자존심이 좀 상하긴 하지만.』

"...."

『자라나는 개새끼들을 좀 찢어 놓은 것은 그분께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유는 간단했다.

화면 안에서 그리 뇌까리는 것은 여기, 내 눈앞에 묶여 있는 몽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멀쩡한 이 녀석과는 다르게, 화면 속 몽마는 양 날개를 찢기고 다리를 잘린 채 교단의 십자가에 내걸려 있었으니까.

"이건...."

"내 기억."

"...."

"뭐, 굳이 따지자면 '과거의 미래'에 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지."

과거의 미래.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말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알아들었다는 듯 몽마의 입이 벌어진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나지막한 탄성.

아-

무력감.

억울함.

절망.

아마, 줄곧 몽마가 남들의 심상세계에서 보아 왔을 넋 빠진 얼굴이 그대로 몽마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것을 보아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식-

"고통스럽나보네."

솔직히 즐거웠다.

뭐랄까.

몽마들이 남들의 머릿속을 휘저으며 느끼는 희열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달까.

물론 누군가는 타자(他者)의 고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나를 보며 '네가 몽마와 다를 게 뭐냐.'며 소름 돋아 할 수도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저건, 죽어 마땅한 마물이었으니까.

스윽-

나는 오른손을 들어, 넋을 놓은 녀석의 목을 감싸 쥐었다.

"잘 부탁해."

커헉-

그리고, 막힌 숨을 터트리는 몽마를 보며 나지막이 뇌까렸다.

씨익-

"이게 시작이니까."

20화

EP4. 마지막 관문 (5)

금색과 백색으로 치장된 호화로운 접객실.

관문지대를 관할하는 사제단의 소성당(Chaple)에서 두 명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의 조합은 꽤나 특이했다.

노소(老小).

한쪽은 머리와 수염이 희게 새어 있는 노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10살 남짓이 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나이와 의복의 품이 퍽 어울리는 노인과 다르게 금발 소년의 옷은 마치 아빠 구두를 따라 신은 꼬맹이처럼 품이 맞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는 범주 내였다.

흔치는 않아도, 그게 아예 불가능한 조합은 아니었으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버튼 경께서 직접 방문해 주셨는데 제대로 환대식도 해드리지 못하고...."

"…환대식이라뇨. 같은 교단의 형제끼리 당치도 않습니다. 저도 본부에서 하달된 명에 따라 이동한 것뿐이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차라도 준비해 두는 것이었는데 말이죠."

"…중앙의 홍차 정도면 훌륭하죠. 원래 제가 가장 즐겨 마시는 차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장 아이러니한 점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건 바로, 노인이 소년에게 깍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가는 대화 속에서는 '버튼 경'이라 불린 금발 소년이 갑(甲), 노인이 을(乙)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갑을관계가 녹아 있었다.

딸그락-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천천히 홍차가 담긴 잔을 내려놓은 소년은 노인을 향해 본론을 꺼내 놓았다.

"본래라면 저도 주임사제님과 조금 더 담소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바로 사건 조사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소년의 말에, 주임사제가 흰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러시겠지요… 아무래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버튼 경."

"…수호십자의 이름 앞에 최선을 하겠습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발이 닿지 않는 의자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온 소년은 주임사제의 안내에 따라 접객실을 나섰다.

벌컥-

그리고 흘러내려 땅에 끌리는 사제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다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자리를 이동하며, 주임사제는 자연스레 사건의 개괄을 설명해 주었다.

"이미 서면으로 읽어 보셨겠지만, 이동에 텀이 나니 이후의 상황을 포함해서 대략적인 상황을 다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131기 관문지대를 진행하던 도중 이상 인물을 한 명 발견했습니다. 이름은 '서우진'이라고, 제1관문의 통과 과정부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행 결과를 보인 층계초월자죠."

금발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

"본래라면 관문지대의 진행 이외에 개별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사제단의 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버튼 경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 최근 마왕군 책사의 장난질이 기승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교단 본부에 미리 언질을 해두었습니다. 기우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버튼 경께서 한번 직접 보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잘하셨습니다."

"…문제는 그사이에 또 한 번 일이 터졌다는 겁니다."

"...."

"제3관문에서.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난 거죠."

금발 소년이 주임사제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살인미수라...."

"그리고 역시 제 예상대로 이 건에도 그 서우진이라는 자가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

"게다가 전후 사정과 성좌들의 증언을 파악해 보면 이 건에는 간악한 몽마(夢魔)의 개입이 확인...."

턱-

그때였다.

돌연 금발 소년의 발걸음이 멈추고 오른손이 들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까지만 듣죠, 주임사제님. 어차피 저도 사건 일지가 있으니 나머지는 직접 조사 과정에서 진상을 밝혀 보겠습니다."

투박한 원목 문이 달려 있는 복도의 끄트머리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끼익-

주임사제가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문 너머로 나선형 지하 돌계단이 드러났다.

"…부디 사건의 진상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래에 내려가시면 저희 십자군 병사 하나가 보초를 서고 있습니다. 혹여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그 이에게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주임사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금발 소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호십자의 성은(聖恩)이 항상 함께하시길...."

"수호십자의 성은(聖恩)이 항상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역시 마주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린 금발 소년.

그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서우진…이라...."

버릇처럼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 금발 소년의 정체는 예상외로 놀라운 것이었다.

수호십자교단의 하이프리스트(High Friest).

이단심문관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

겉보기에는 영락없이 10살짜리 귀족 자제 같이 생겼지만, 그는 실제로 항마전의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자라 온 교단의 고위 사제였다.

사정이 있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진 전투능력과 경험치만큼은 하이프리스트 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게다가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 자체가 교단 내에 몇 없었고, 오히려 주교품을 받은 사제들보다도 전쟁의 일선에서 활동하는 십자군들에게는 더 칭송을 받는 직책이었으니.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은 절대 외관만으로 무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항마!"

"수고하십니다. 저 문 좀 열어 주시죠."

"예, 알겠습니다."

철컥- 끼익!

병사가 문을 열자, 루이스는 계단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올라가서 잠시 쉬고 오시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예? 하지만 버튼 경. 저는 이곳의 보초를...."

툭-

당황스레 대답하는 병사의 허리춤에서 가볍게 열쇠를 빼앗은 루이스는 조금 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직무상 대외비가 필요하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루이스의 꾸지람 아닌 꾸지람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병사.

그가 완전히 지하포로실을 벗어난 것을 확인한 루이스는 철제문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철컥-

포로실 안에는 한 명의 남성이 양손이 수갑에 묶인 채 앞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

고개를 푹 숙인 채 미동도 없는 짙은 흑발, 하얀 피부의 그 동양인 사내를 보며 루이스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눈 뜨세요, 서우진 씨."

"...."

"알고 있습니다. 당신 깨어 있는 거."

그리고 그 목소리에, 우진의 오른쪽 눈이 슬며시 뜨여진다.

동시에, 찰랑- 하는 수갑 소리와 함께 들리는 우진의 고개와 오른쪽 손바닥.

"오랜만."

"…초면입니다."

"그거 서운한 말인데."

'오랜만'이라는 우진의 말을 장난으로 여긴 루이스는, 덧붙인 말을 무시하고 짤막하게 자기소개를 남겼다.

"…본 사제는 수호십자교단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봉사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용건을 꺼내려 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서우진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하지만, 우진은 그의 말을 고이 들어주지 않았다.

시치미를 떼며 여유를 부리는 그 얼굴을 보며 이유 모를 분노가 차오른 루이스였지만, 루이스는 옅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에 침착하게 말을 덧붙였다.

"…모르면 제가 설명을 드리죠."

"...."

"당신은 이번 '관문지대 몽마 개입 건'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다른 층계초월자들의 증언으로 이미 몽마의 관문지대 개입 자체는 확인이 된 상태고… 정황상 몽마의 최종 숙주로 추정되는 인물이 바로 당신이죠."

"...."

"그렇기에 '이단심문관'인 제가 파견되어 이곳에 와 있는 거고요."

우진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이자, 루이스는 옅은 한숨과 함께 설명을 보강했다.

"아무래도 아직도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와닿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만."

"...."

"하위차원계의 상식으로는 아군 병사를 양성하는 훈련소에 적국의 병사가 신분을 위조하여 숨어든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적국 수장의 직속부대 출신이요."

"...."

"당신이 그 가장 유력한 후보고요."

우진의 어깨가 한 번 으쓱한다.

"논산에 간첩이라...."

"...."

"…그거 참 스펙터클한 일이기는 하네."

거기까지 이야기한 루이스는 곧바로 품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서면으로 정리된 사건 일지의 개요만을 따서 또다시 정리해 놓은 그의 개인 수첩이었다.

"제1관문, 제2관문에서 보인 예외적인 수준의 실력. 제3관문에서 있었던 갑작스러운 살인미수 건. 그리고 타자의 증언을 통해 입증된 '몽마 전이' 특유의 징후인 홍채 색 변화까지."

"...."

"당신이 몽마의 최종숙주라 생각되는 정황증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간단히 우진의 이력을 정리한 루이스는 우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제가 당신을 '몽마 숙주'로 낙인찍고 사형을 구형하더라도 이견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요."

"...."

"단지, '사형'이라는 중차대한 형의 집행을 위해서는 교단의 절차적인 입증 과정이 필수적이기에 심문의 과정을 거칠 뿐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루이스의 말을 들은 우진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자, 꼬맹아."

빠직-

순간 자기도 모르게 이마 위로 옅은 사거리 표시가 돋아난 루이스였지만, 그는 이번에도 역시 후우- 하는 심호흡과 함께 참아 내며 우진에게 물었다.

"…뭐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주어와 목적어를 정확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루이스의, 루이스다운 되물음에 피식- 하고 웃음을 지어 보인 우진이, 그의 요청대로 주어와 목적어를 붙여 되물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몽마의 숙주라고 생각하냐고."

"…말씀드렸지만 현재까지의 여러 정황을 보았을 때, 교단 본부에서 추정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바로 서우진 씨 당신...."

도리도리-

루이스의 상투적인 대답에, 우진이 그의 말을 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아니 그러니까 교단의 의견 말고."

"...."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

"...."

"네 생각에도 지금 내가 몽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냐고."

그리고 우진의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은.

무려 '침묵'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

"...."

피식-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인 우진이 양손을 흔들어 수갑 소리를 내며 말했다.

찰랑-

"그럼 나 이것부터 좀 풀어 주라. 손목 아파."

21화

EP4. 마지막 관문 (6)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스며든 몽마를 색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몽마가 작정하고 숙주 안에 자신의 몸을 숨기는 이상, 외관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아예 의미가 없었고.

몽마의 전이가 일어난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면, 딱히 마나 패턴이나 흔적이 남지도 않았으니까.

때문에 교단 내에서도 '몽마'가 개입하여 발생한 일에는 난관을 겪기 마련이었다.

아니, 몽마(夢魔)뿐 아니라 악마종 자체가 모두 특유의 까다로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마종이 연루된 일이라면 대부분 평범한 인간의 사고과정으로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해서, 교단에서는 대악마종(惡魔種) 전문 인력 집단을 두어 왔다.

그것이 바로 악마종을 판별하는 '이단심문관'과 그 휘하의 악마종 퇴치 전문 집단 '엑소시스트'.

오직 악마종에 대응하는 스페셜리스트라 할 수 있는 그들만이 몽마와 관련된 건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그게.

이단심문관,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이 이 자리에 온 이유였다.

"그럼 나 이것부터 좀 풀어 주라. 손목 아파."

"...."

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을 하는 녀석의 눈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녀석은 이미 마음속으로 판단을 내렸다고.

'역시.'

녀석은 대륙 각지를 돌면서 악마종만 조지고 다니길 백 년이 넘은 베테랑이었다.

루이스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눈깔 돌아가는 것만 봐도 이게 몽마에 넋을 놓은 놈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머저리 같은 관문사제단의 눈에는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남아 있는 몇 개의 흔적을 따져보면, 내가 몽마의 손아귀 아래 조종당하는 숙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을 터.

가끔 이상한 데서 헛다리를 짚긴 해도, 저 악마종 탐지의 스페셜리스트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탁-

침묵을 지키던 루이스가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열쇠를 꺼내어 내 손목에 묶인 수갑을 풀어 주었다.

철컥-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몽마의 숙주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그저 면담의 과정에서 수월한 대화를 위해...."

피식-

"내숭은."

툭 뱉은 말에 루이스의 이마에 있던 사거리 표시가 조금 더 짙어진 것 같았지만, 녀석은 이번에도 역시 참아 내었다.

대신 수첩을 내려다보며 나에게 요구했다.

"제가 먼저 서우진 씨의 요구를 들어드렸으니… 몇 가지 질문에 협조를 좀 해주시죠."

"오케이."

미리 질문들을 적어 왔는지 녀석은 곧바로 입을 열어 물었다.

"첫째로. 귀하는 층계초월자 '김시아'를 칼로 찌른 혐의가 있습니다. 이렇다 할 동기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말이죠."

"그렇지."

"…이유가 뭡니까?"

눈빛을 보아하니 어차피 다 알고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상흔 보면 대충 답 나오잖아."

나도 대충 알아듣게 말했다.

역시 그렇게 말하자 지가 알아서 해석을 해주었다.

"…기존 몽마의 숙주가 층계초월자 김시아고, 귀하가 몽마를 그녀의 몸에서 빼내기 위해서 고안한 방법이라는 의미가 맞습니까?"

"그렇지."

"…당신이 찌른 칼날이 심장 2mm 앞에서 멈춘 것이 그 증거고요."

"응."

"…주변 사람들에게 미리 성수를 섭취하도록 시킨 것은 그 몽마가 다른 몸으로 이동해서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겠죠."

"…그치."

사실 또 다른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몽마가 다른 데 기어 들어가면 더 귀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이 분위기에서 굳이 반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여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녀석의 '넘겨짚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서우진 씨는 제3관문에 들어가기 이전부터 몽마가 김시아에게 숨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게 되는 거군요. 미리 성수를 준비해 갔으니까."

"...."

"제2관문에서부터였나요?"

"어… 그러니까."

"…아니죠. 사실 제2관문에서 눈치챘다기에는 서우진 씨의 행동이 너무 과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미 관문지대에 들어오기 이전, 하위차원계에서부터 층계초월자 김시아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고 사료되는데… 맞습니까?"

"...."

사실 내 생각에는 제1관문에서가 아닐까 싶었다.

몽마의 입에서 분명 '안 그래도 이상한 게 굴러 들어왔다 싶어 미리 눈도장까지 찍어 놨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전생에는 다른 이를 숙주로 삼아 관문지대에 들어왔었으니까.

대충 제1관문에서 나와 헤어진 시점에 '몽마(夢魔)'가 김시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는 설명이 제일 맞아떨어졌다.

…문제는 회귀를 알리지 않는 이상 '전생'을 들먹이며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그냥.

"어...."

그렇다고 했다.

"그렇지 뭐… 원래 좀 이상하더라고 아래서부터."

"예를 들면요?"

"음… 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막 머리에 꽃꽂이 하고, 모르는 사람한테 말 걸고 했었을걸? 막 미친년처럼...?"

"역시…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단서가 이렇게 맞춰지는군요. 방법은 모르겠지만 몽마가 관문지대로 들어온 것에 대한 설명도 맞아떨어지고."

자신의 추측이 모두 맞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이스.

"...."

녀석의 수첩에 김시아에 대한 신상 명세가 왜곡되어 적힐 것을 생각하니, 왜인지 그녀에게 미안함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회귀자라 다 알고 있었다.'라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녀석이 떠들어 댄 그 설명이 제일 그럴듯한 모양새였다.

그때였다.

"두 번째 질문을 하겠습니다."

루이스의 얼굴색이 진지하게 변하며, 나에게 눈을 맞춰 왔다.

"사실 여기까지는 저도 어느 정도 짐작했던 부분입니다. 악마종에 특히 예민한 이들은 존재하고, 제 생각에는 서우진 씨도 그쪽 부류에 포함되는 것 같으니까요."

"...."

"하지만 이 이후가 제 머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 때문에 교단 본부에서도 당신을 몽마의 최종 숙주라 파악하고 있는 거고요."

앞쪽이 서론이고, 이쪽이 본론이라는 느낌이었다.

한층 내려앉은 분위기.

이어 튀어나온 녀석의 질문은.

"지금 몽마는 어디 있습니까."

핵심을 짚고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신이 몽마의 간악한 술수 아래 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악마종의 냄새를 맡는 재능은 상위차원계에서도 아주 귀한 능력이니까요."

"...."

"하지만, 이 부분이 설명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최종 숙주라는 판단하에 이단심문 과정을 거칠 수밖에요."

"...."

"그리고 이단심문 과정은… 그리 자비롭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권고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붙임말.

그 기조에 그대로 맞추어, 나 역시 오묘한 답변을 해주었다.

"글쎄-."

"...?"

"몽마니까 아무래도 지옥에 있지 않을까. 천국에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잠시 이어진 정적.

루이스의 미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찌푸려졌다.

"그 말은...."

그대로 두면 어차피 되물을 것 같아 나는 설명을 조금 더 붙여 주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몽마의 최종 숙주가 맞아."

"...!"

"몽마가 김시아에서 내게로 옮겨 오고 내 심상계까지 들어오긴 했으니까. 근데-."

낯빛을 바꾸다 못한 루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쓱-

"거기서 처리하니까 그 뒤로는 딱히 영향이 느껴지진 않던데."

"…불가능한 일입니다."

"뭐… 못 믿어 준다면 나야 어쩔 수 없지만."

곧바로 믿지 못하는 녀석의 태도는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심상계에 진입한 몽마에 대항하고 제거하는 것은 녀석 휘하에 있는 엑소시스트 단원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인 이들만이 가능한 일.

이제 막 제3관문을 통과한 일개 애송이가 거론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한 루이스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방금 그 말,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응."

"…조금 더 생각을 하고 대답하시죠. 만일 일말의 거짓말이라도 섞여 있다면 곧바로 몽마의 최종 숙주로 교단에 기소될 겁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어서 한 대답이야."

"...."

내 즉답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

루이스는 사제복을 헤치고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단심문. 집행하겠습니다."

씨익-.

기다렸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케이.'

교단의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오직 루이스에게만 부여된 고유특성 <고유특성: 천칭의 이단심문관>.

그 이름에 걸맞게 십자가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내 눈앞에 금빛의 저울을 형성했다.

"이단심문은 본래 유력한 범죄 용의자의 형을 확정할 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극히 드물게 반대의 경우로 사용하기도 하죠."

"...."

"이 천칭(天秤)은 당신의 속에 있는 마성(魔性)을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신의 속내가 얼마만큼 악한 것을 좋아하는지를 측정하는 역할을 하죠."

"대단하네."

"…보통 인간은 2할에서 3할 정도의 마성(魔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이스가 천천히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교단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들은 보통 1할 이하의 마성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

"몽마에게 현혹당한 이는 설사 사제라 하더라도 7할 이상의 마성을 보입니다."

이내 내 눈앞에 당도한 녀석.

"선악(善惡)에 대한 호오(好惡)를 숫자로 측정을 한다라… 그거 되게 사이비(似而非) 같은데."

"…확실히 한 개인의 선악성을 판단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

"이 천칭은 악(惡)에 대한 증오심, 선(善)의 맹신도, 무의식의 표상, 기억, 경험 등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 산출되는 데이터니 믿으셔도 됩니다."

"…맞으니까 닥치고 따르라는 거구만."

"…닥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깐깐하게 구는 녀석을 향해 미소를 지어 주며 나는 양손을 들어 보였다.

"오케이."

"...."

내 승낙에 녀석은 곧바로 그 십자가를 내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띠링-

[<고유특성: 천칭의 이단심판관>의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정신분석을 집행합니다.]

유체이탈을 경험하는 듯한 붕- 뜨는 기분과 함께, 눈앞의 천칭이 더욱 또렷해졌다.

[사상, 기억, 경험, 정서, 자아, 행동, 충동을 종합하여 사고 종합 정신계를 분석합니다.]

어느 초월적인 존재가 내 머리를 까뒤집어 보는 듯한 기괴한 기분도 잠시.

문장이 떠오르며 양쪽 저울을 위아래로 요동치던 천칭이 잠잠해졌다.

[…분석 완료.]

그리고 떠오르는 놀라운 메시지.

[마성(魔性) 측정 결과 …1.38%]

"...!"

촤락-

나와 똑같은 문장을 본 듯한 루이스가,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놓쳤다.

씨익-

나는 여유롭게 그 목걸이를 받아 들며 다시 녀석의 목에 걸어 주었다.

"어이쿠."

"말도 안 돼...."

"귀한 것 같은데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쓰나."

녀석은 사진이라도 찍어 두고 싶은 보기 드문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 수치는...."

루이스의 천칭을 통해 산출되는 마성 수치란 쉽게 말해, 마왕군의 아이덴티티(Identity)라 할 수 있는 '악함'의 표상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측정한 수치.

원죄(Original Sin)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말의 악함을 속내에 가지고 태어나기 마련이다.

해서 실수도 하고, 당위적으로 마땅한 일에 고민을 하기도 하는 법.

녀석의 말처럼 일반적인 인간의 속내는 착해 봐야 마성 수치 2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사제 서품을 받은 이들 중 준수한 이들이 마성 수치 10%이하.

그리고 그 대단하다는 교단 고위 사제들이 간신히 5% 이하를 기록할까 말까 한 게 현실이었다.

심지어 주교품을 받은 이들 중에도 3% 이하의 마성 수치를 기록하는 이는 없다시피 했으니 1.38%라는 수치가 얼마나 낮은 것인지는 알 만한 일이었다.

"...."

녀석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주교 서품의 성사 과정에서 의례적으로 마성 수치를 측정하는 단계가 있기에 수 번을 직접 보아 왔을 테니까.

이만큼 마성 수치가 낮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을.

…뭐, 물론 성녀(聖女)같이 마성 수치가 아예 1% 이하로 떨어지는 인간도 있기야 했지만… 그쪽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어때. 석방?"

"...."

내 물음에도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녀석을 위해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임 프리?"

"아...."

그러자 녀석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트리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절차적인 번거로움이 남아 있긴 하지만."

"...."

"이 정도 마성 수치라면 확실히 심상계에서 몽마를 스스로 제거했다는 설명이 성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이스.

나는 녀석의 자그만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턱턱-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너무 충격받진 마. 아직 어려서 그래."

"…본 사제는 올해로 백일흔아홉 살입니다만...."

"말꼬리 잡지 말고,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 이 꼬맹아."

"…사소하지 않은 것 같아서 되물은 겁니다."

"뭐 어쨌든."

오랜만에 하는 짧은 투닥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얼른 가서 그 절차적인 번거로움 좀 해결해 줘. 배고프다."

"...."

그제야 몸을 돌려 철문을 연 녀석은, 괜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교단을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건의 엄중함으로 인해 구금 및 심문의 조사 과정이 필수적으로 진행되어야 했음에 너른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여간 꽉 막혀서… 알겠으니까 얼른 가라고."

"…교단 본부를 통해 관문사제단에 공문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반나절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제가 직접 요청을 해서 가능한 빠르게 소명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멈칫-

"아 그리고...."

"...?"

그대로 문을 나서려던 녀석이 잠시 몸을 멈춘다.

"정식으로 용사 후보로 임명된 이후에, 서우진 씨와 따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든가."

"그럼...."

내 끄덕임을 정말 마지막으로 녀석은 철문을 나섰다.

끼익- 철컥.

그리고 나는 녀석이 이 포로실의 철문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야-

"푸하...."

편히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들키는 줄 알았네...."

22화

EP5. 동행 (1)

루이스 녀석의 말대로 반나절 정도를 기다리자 포로실의 철문이 열렸다.

동시에 시야 위로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

"요, 용사님!"

"…어."

이엘리야였다.

녀석은 자기 몸보다 더 큰 수건을 질질 끌고 와서 다급하게 내 몸을 덮었다.

나름대로 걱정을 했는지 녀석의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이게… 제가 분명 그럴 리가 없다고 이야기하긴 했는데… 변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했어요. 제가...."

"...."

사실 모든 것이 내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녀석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항마전이 진행 중이다 보니, 다른 것은 몰라도 악마종에 관련된 일은 군법상 엄히 처리하는 교단이었으니까.

내가 몽마의 권속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든 입증되지 않는 이상.

최소 구마감옥 '다키스트 던젼(Darkest Dungeon)'에는 구금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몽마를 처단한다는 명목하에 사형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이엘리야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댓 번 정도 죽지 않았을까.

원체 쓸데없는 걸로 자기 탓이 많은 녀석이었으니, 아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도 수많은 자책을 하지 않았을까 싶긴 했다.

그때였다.

꾸르락-

며칠간 묶여 있으며 허기진 배가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것도 좀 일반적이지 않은 소리로.

그 소리를 들은 이엘리야는 돌연 얼굴을 찌푸리며 내 배에 귀를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이 소리는 설마...."

"...."

"고문을 당하신 거예요?"

…루이스 녀석이 다녀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를 넘겨짚기 시작했다.

"아니… 고문은 안 당했...."

"…들어 보기는 했어요. 입에 쉴 새 없이 물을 집어넣는 물고문 과정에서 복부팽만과 함께 장기 손상으로 인한 내상이 있을 수 있다고."

"아니...."

"…이단심문관님도 너무 하시지. 아무리 그래도 이제 갓 올라온 용사 후보에게 고문을 하다니...."

"...."

사제를 안 했으면 어디 음모론 동아리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떠들어 대지 않았을까 싶은 넘겨짚기 스킬.

녀석의 그 상상력을 듣다 못한 나는, 한숨과 함께 호들갑을 떨어 대던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고문 부분은 정식으로 항의할게요. 그래도 듣자 하니 무죄 입증이...."

"하… 슈렐리아."

"네, 네?"

갑작스런 부름에 녀석이 멈칫했고.

"적당히 해."

"...."

"나 고문도 안 당했고, 몸도 멀쩡하니까."

부산을 떨어 대던 녀석의 입은 그제야 잘못을 알았는지 멈추었다.

그리고 내 복부를 내려다보며 하얀 장갑을 낀 양손으로 더듬더듬 짚는 시늉을 했다.

"그럼 방금 그 소리는...."

"…배고파서 난 소리라고."

"...."

잠시 정적이 이어지고.

소심하게 돌아오는 뒤늦은 딴지.

"…제 이름은 슈렐리아가 아니라 이엘리야인데요."

피식-

그 녀석다운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직접 나누는 익숙한 만담과.

오랜만의 녀석의 얼굴과.

반가움 때문인 것 같았다.

"내가 여기 갇힌 지 얼마나 지났지?"

"어… 수훈식이 그제였으니까… 딱 4일째일 거예요."

"…나가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자. 배고파."

"삼겹살이요?"

"응. 바싹 구운 삼겹살에 흰쌀밥으로다가."

…오랜만이었다.

* * *

화륵-

붉고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칠흑같이 검게 물든 무쇠 위로, 강렬한 열기가 올라온다.

하지만 아직이다.

완벽한 때는 오지 않았다.

"…이제 올릴게요 용사님?"

"안 돼."

"왜요."

"보면 몰라? 아직이잖아."

"…대체 뭐가 아직인 건데요."

불판 올리고 불 켰으면 고기 올려야지....

하고 칭얼거리는 이엘리야의 중얼거림이 귓바퀴를 타고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쇠 위를 주시했다.

녀석은 아무래도, 고기를 어떻게 굽든 맛은 거기서 거기라는 입장인 것 같았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소리였다.

"삼겹살처럼 지방질이 많은 고기는 살코기를 얼마나 적절한 식감으로 구워 내는지가 조리의 핵심이야. 센 불에 빠르게 구워야 단백질이 수축하면서 발생하는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고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마이야르 반응을 최대로 이끌어 낼 수 있지."

"아니...."

"특히, 무쇠 팬의 경우에는 열 보존율이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충분한 열을 머금기 위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더더욱 주의해야 하지."

"…대체 왜 그렇게 요리에 진심인 건데요."

곧이어, 달궈진 무쇠 팬 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지금이었다.

미리 잘라 둔 꼬투리 비계를 집게로 집어 빠르게 기름 코팅을 한다.

치익-

고온의 열기에 지방질이 녹아 나오며 만들어 내는 황홀한 소음.

그 입맛을 돋우는 빗소리가 채 끊어지기 전에, 나는 고기를 올렸다.

그러자 기름을 코팅하며 들려왔던 작은 빗소리가 소나기가 되어 방안을 채웠다.

치익- 치이이익-

"…이거지. 이게 마이야르지."

씨익-

그 만족스런 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이야르고 나발이고. 고기 하나 구워 먹는 데 뭐 그리 요란이에요. 그냥 먹으면 되는 거지."

"내가 요리에 좀 진심인 편이라."

"…그래요. 뭐 요리에 진심인 것까진 알겠는데."

그쯤에 오자, 이엘리야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눈으로 한숨을 쉬며 물었다.

"…대체 왜 다른 용사 후보생분 방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거예요?"

"...."

"그것도, 임시로 배정받은 대기실도 아니라 병실에서 말이에요."

그렇다.

이엘리야와 내가 무쇠 팬을 가져다 놓고 고기를 굽는 이 장소는, 내가 만든 흉부의 열상으로 입원해 있는 김시아의 병실이었다.

이엘리야의 말에 김시아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저는 괜찮아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시아 양."

"아니에요 아니에요! 여러모로 서우진 씨에게는 빚진 것도 있고. 또… 저도 마침 배가 고픈 참이라."

관문지대의 대미라고 할 수 있는 '131기 용사 후보 임명식'은 이미 이틀 전에 끝나 버렸다.

임명식을 마친 용사 후보들은 각자 레어(Lair)를 배정받아 떠났고, 이미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관문사제단의 채플에 남아 있는 사람은, 김시아 정도가 다였다.

…대충 그런 명분이었다.

똑같이 몽마의 건에 연루된 터라 용사 후보 임명식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깍두기끼리 밥이나 먹으면 좋을 것 같다는.

칼을 찔러 넣은 사람인데 그래도 도의적으로도 찾아와야 한다는 그럴듯한 설명.

"상처는 괜찮아요?"

"아, 네. 덕분에요."

"…그 말은 좀 묘하게 들리네요."

가볍게 뱉은 장난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뇨아뇨. 정말로요! 제 수행사제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몽마의 숙주가 된 용사 후보생이 멀쩡하게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되는 일이라고...."

"운이 좋았죠."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고개를 꾸벅이는 김시아에게 어깨를 으쓱여 주자.

이번에는 그녀가 질문을 던져 왔다.

"그… 일은 잘 해결되신 건가요?"

"…아. 네 뭐. 포로실에 갇혀 있느라 제대로 못 먹고, 못 자고 했는데 그것 말고는 별일 없었어요."

"다행이네요.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몽마의 출현을 확인한 '관문사제단'의 개입으로 <제3관문: 수성전>은 강제 종료되었다.

<제2관문: 싸이클롭스의 포도농장> 역시 내가 사이클롭스를 잡아 버리는 탓에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마 이번 131기는 역대에 가장 정신없는 관문지대로 회자되지 않을까 싶었다.

뭐 그렇다고 죄책감이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뒤처리를 해야 하는 관문사제단 입장에서야 꽤나 골이 아프겠지만 계획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루트였으니까.

꿀꺽-

"다 됐다."

"…오."

이엘리야의 노골적인 침 삼킴이 공들인 삼겹살 구이의 완성을 알렸다.

동시에, 이엘리야와 김시아의 시선이 동시에 불판 위로 향한다.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접시 위로 조심스레 옮겨 담으며 나는 이엘리야의 이름을 불렀다.

"자, 모차르트."

꿀꺽-

"…네! 뭘 준비할까요 용사님?"

"너는 이제 수석사제실로 가."

"…네?"

녀석의 미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찌푸려진다.

"선택받은 자 특성 발행 좀 다시 요청하고 와. 저번에 그 수석사제한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번에 이미 기각당했잖아요. 아니 그보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일단 가 봐. 이번에는 아마 다른 반응일 테니까."

뭔가 불만이라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녀석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20분만 있다 갈게요."

"지금."

"…그럼 10분만."

"안 돼."

"…한 입만."

"그러다 특성 발행 안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곧이어 억울하다는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오른다.

"아니 그게 왜 제 탓이에요!"

"지금 가면 되는데 늑장 부리다 안 되면 네 탓이지."

"아니...."

김시아에게 맞장구까지 요구하면 이리저리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보려는 녀석이었지만, 나는 녀석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며 고기를 담았다.

- 용사님, 사제라는 작자들 특성이 쫌생이 기질이 있어서 시간 좀 지났다고 마음이 바뀌는....

- 어차피 안 될 거라니까요? 수석사제 그 인간이 얼마나....

- 딱 한 입만 먹고 갈게요. 한 입....

그리고 한 마디를 얹어 주었다.

"…특성을 이렇게 놓치네… 서럽다 서러워."

"...."

"저번에는 말 안 해도 먼저 해주더니, 지금은 수행사제 명찰 달아 놓고 코앞에 있는 사제실 좀 들러 달라는 부탁도 무시당하...."

듣다 못한 이엘리야가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익- 가요 가! 간다고요!!!"

생긋-

"조심히 다녀와."

그리고는 벌컥하고 병실문을 열어젖히며 나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다시는 뭐 먼저 하나 봐라!"

"...."

"시키는 거만 할 거야 무조건!"

쾅-!

감정을 가득 담아 문을 닫은 녀석은 쿵쿵- 소리를 내며 복도에서 멀어졌다.

"...."

"...."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와."

나는 녀석을 불렀다.

갈색빛이 감돌던 김시아의 눈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나를 바라본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헛웃음.

"하."

"...."

"…연기 잘하시네요?"

"…그건 내가 할 말 같은데."

그랬다.

루이스 녀석 앞에서는 태연하게 '몽마를 처리했다.'고 지껄여 놓았지만.

…나는 몽마를 죽이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 해도 되요? 그 잘나신 성좌들이 보면 참 아니꼬워 할 것 같은데."

"뭐, 관문지대도 나왔고 훈장 달기 전까지 그 관음용 위성마법은 활성화되지 않으니까. 상관없지."

"...."

"…좋겠네요. 아는 거 많아서."

으쓱-

그렇게 김시아의 몸을 잠식한 몽마를 향해 내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한 말은… 생각은 좀 해 봤나?"

"...."

그러자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녀석의 시선이, 문득 아래를 향한다.

그러니까.

삼겹살 접시를 들고 있는 내 왼손으로.

그리고 생뚱맞은 제안을 던진다.

"그거."

"...?"

"먹으면서 얘기해요… 맛있어 보이는데."

그리고 녀석의 제안에 대한 내 대답은.

"…악마랑은 겸상 안 하는데."

23화

EP5. 동행 (2)

냠냠-

오물오물-

"...."

내가 만든 요리를 악마가 맛있게 먹고 있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했는데.

솔직히 별생각 안 들었다.

악마라고 해봐야 심상에 있을 몽마고, 외양이 평범한 인간 여성이라 그런지.

저 속에 들어 있는 게 간악한 몽마라는 생각을 하면 확실히 증오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긴 했지만, 특유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앉은 자리에서 고기 한 접시를 다 비운 몽마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안 먹어요? 이거 진짜 맛있는데."

"…말했잖아, 악마랑은 겸상 안 한다고."

"…뭐, 그래요. 서럽네요."

"다 처먹었으면 본론이나 말해."

그리 단도리를 놓자, 그제야 몽마는 입을 열어 본론을 꺼내었다.

"…당신이 한 제안이 그거였죠. 당신에게 협조하면… 살려 주겠다고."

"그랬지."

녀석의 말대로였다.

『커헉… 흐읍… 허억… 헉....』

『어때, 역시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지?』

『허억… 흑… 허억...』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 협박을 하나 하고 싶은데.』

『허억… 헉...?』

『너 '착한 편' 할 생각은 없냐? 그러니까 뭐… 대충 회개(悔改)한다는 느낌으로.』

몽마의 숨통이 끊기기 직전 목을 놓아준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녀석에게 특별한 제안을 건넸다.

나를 돕는다면, 살려 주겠다고.

본래의 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회귀를 통해 악마종의 간악함을 바닥까지 경험한 내 사전에, '용서'나 '자비'같은 단어는 없었으니까.

차라리 두 번 죽이면 죽였지.

뒤통수칠 거 뻔히 알면서 녀석을 풀어 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가 녀석을 살려 준 이유는.

그 간악한 악마의 핏줄이 내 계획을 이루는 데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

.

.

『나는 네가 필요하거든.』

『....』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가진 '악마의 특이점'이.』

마물 중에서도 '악마'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마왕의 혈통인 악마종은 여타 다른 마물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교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시스템 데이터'에 기록되지 않고, 교란을 일으킬 수 있는 악마종의 까다로운 특성.

'악마의 특이점(Demon singularity)'이었다.

소위 말하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이 '악마의 특이점'은.

원하는 때에 '위성마법'을 포함한 교단의 '시스템 데이터'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고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씹어 먹을 악마의 핏줄을 기용하려는 이유였다.

성좌들로 하여금 용사들을 항시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위성마법'의 존재는 내가 회귀 전의 정보를 마음껏 이용하는 데 제약을 주었고.

나는 때에 따라 성좌들의 눈을 벗어나 회귀 전의 정보를 기용해야만 했으니까.

몽마가 하급 악마종이긴 했지만, 그래도 특성의 효능 자체는 의심할 필요 없었다.

…고작해야 하급 악마종인 몽마 따위가, 교단의 홈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관문지대 안에서 그렇게 마음껏 돌아다닌 것이 그 능력의 방증이었으니까.

물론, 이미 몇 사람을 집어삼켰을 악마를 이용한다는 게 찝찝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감정에 휘둘릴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나도 이 세계의 결말이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 회귀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면, 이딴 메스꺼운 짓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악마종을 끼고 다니라고? 그게 말이야 지금?』

『탐탁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꼭 해야 합니다. 당신의 회귀가 알려지는 일은 가능한 뒤로 미뤄야 하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서우진 씨.』

돌아온 것은 나뿐이지만, 내 회귀가 정말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된 회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었지.

'…하여간. 괜히 한다 했어. 이 빌어먹을 회귀'

짧은 회상을 깨고, 몽마가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제가 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어이없는 질문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피식-

"아니."

"...."

"…그래서 말했잖아. 이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라고."

"...."

"네가 거절하는 순간 죽일 거야. 내가 필요한 건 네가 아니라 '악마의 특이점'이니까."

내 단호한 대답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던 녀석은 이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

"마경(魔境)에서 눈뜨고 여기에 오기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일들만 해도 양 손가락이 다 부족하죠."

"...."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십자의 개들 본원 한가운데서 당신한테 들켜 버렸으니까. 이 끈질긴 생의 운도 여기서 다 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목적지까지 한참을 돌아갈 것 같은 녀석의 늘임새에, 나는 다시 한번 말을 끊었다.

그리고 녀석은 그제야 진짜 본론을 꺼내 놓았다.

"생각을 좀 해 봤는데."

"...."

"…나는 아직 더 살고 싶은 것 같아요. 못 해 본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별거 없는 핑계에 이어지는 나지막한 고백은 꽤나 진솔해 보였다.

"…살려 주세요."

"...."

"착한 편… 해 볼 테니까."

오묘한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악마가 '착해져 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꼴은.

본래라면 그 가증스러움에 더더욱 역겨움이 느껴져야 할 테지만, 왜인지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더더욱 기분이 찜찜했다.

그 일련의 감정을 뒤로한 채, 나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뭐부터 해야 하나요?"

그렇게 나름의 협상을 마친 몽마가 휴지로 입가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첫 번째 미션을 주었다.

"이거."

그러니까.

"네가 다 처먹었으니까. 구워 놔."

"아니...."

조금은 소소한.

"불판이랑 접시 설거지도 미리 해놓고."

"...."

* * *

벅벅-

"…설거지라니. 인간들은 왜 이런 비효율적인 행위를 하는 거죠?"

수세미를 부비는 몽마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나에게 물었다.

"비효율적이라니. 설거지만큼 효율적인 일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냥 깨버리고 다시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착해지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야."

"…그렇긴 하네요. 벌써부터 이렇게 기분이 X같은 거 보니까."

다시 정적이 흐른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생각해 보니까… 앞으로도 계속 야, 너로 부를 순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당신 꼴리는 대로 부르세요. 어차피 회귀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일개 하급 몽마에게 이름 같은 거 없는 거."

"흠."

"저번에는 잘 불렀잖아요. 몽마 아주머니라든가, X년아… 같은."

"...."

녀석의 말처럼 마물의 세계에서 한 개체가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워낙 같은 종족 내에서는 외양의 차이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고, '네임드(Named)'라며 이름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지위를 동반한다는 문화가 대부분의 마물 종족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든가, 종족 내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나 업적을 가졌다든가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체가 이름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건 마왕의 혈통인 악마종(惡魔種)에게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었다.

몽마(夢魔)라는 종족을 이끄는 종족의 수장이나, 그 휘하에 작위를 받은 몇몇 네임드(Named) 정도를 제외한다면 이름을 가지고 있는 몽마는 흔치 않았다.

심지어 이 녀석은 간신히 달고 있는 흑익(黑翼) 날개 한 쌍조차 제대로 여물지 않은 어린 몽마.

확실히 녀석이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었다.

"이름이라...."

적당한 이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문득 창밖 정원에 피어난 장미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피식-

'…괜찮네.'

드르륵-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록시."

멈칫-

설거지를 하던 몽마의 손이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묻는다.

"…록시요?"

나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내어 옅은 마력을 흘려보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록시 하트(Loxy Heart)."

마력을 흘려보낸 장미가 보랏빛으로 물들고, 녀석의 얼굴 역시 오묘하게 물들었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마물에게 이름이 생긴다는 것은, 쉽게 말해 무림에서 무력을 인정받으며 생기는 별호(別號)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마왕이 준 것도 아니고 인간이 지어 준 이름인지라 감개가 무량한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을 받은 녀석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록시…라고요?"

"그래."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붙인 '록시 하트'라는 이름이, 녀석에게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

당연히 곧이곧대로 말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마침 눈에 들어온 장미가.

결사대의 일원이었던 어느 머저리의 최후를 기억하기 썩 괜찮았기 때문에 지어 붙인 이름이었으니까.

'....'

몽마의 저주에 걸려, 사지를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린 채, 신을 부르짖으며 고개를 꺾은 녀석의 최후를 기억하기에.

『우리를 시험에… 쿨럭- 들게 하지 마옵시고.』

결사대원으로서, 누구보다 악마종의 교활함을 잘 알면서도.

끝내 악마의 손에 놀아난 그 머저리 같은 놈의 최후를 기억하기에.

『다만....』

악마라는 족속들의 본질을 잊지 않기에.

『악에서… 악에서 구하소서.』

…녀석의 심장에 남았던 서큐버스 퀸 '릴리스'의 보라색 장미 인장을 기억하기에.

'록시 하트'라는 이름이 썩 괜찮아 보였기 때문에 지어 붙인 이름이었다.

…그게 맞았다.

김시아를 포함해 이미 저 악마에게 삼켜져 신체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적어도 나는 저 녀석이 '악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긋-

"록시 하트...."

"...."

"좋네요."

…내가 붙인 그 이름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 건지.

스스로의 이름을 뇌까린 몽마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툭-

나는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든 장미를 빈 화병에 꽂아 넣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얼른 설거지나 해. 이제 좀 있으면 이엘리야도 올 거니까."

"그럴게요."

"...."

다시 뒤로 돌아 수세미를 부비는 록시 녀석을 보며, 나는 품에 있던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부터 몇 장을 넘겨 표기했다.

[Bucket List#5]

『몽마… 포섭하기.』…○

24화

EP5. 동행 (3)

"이미 요청을 넣었습니다."

"…네?"

우진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듣고 씩씩거리며 수석사제실을 찾은 이엘리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뢰니 마왕군의 책사니.

이유란 이유는 다 가져다 대면서 우진의 '선택받은 자' 특성 발행 요청을 거절한 수석사제가, 이미 본부에 '특성 발행'을 요청했다는 말을 뱉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요청을 이미 넣으셨다고요?"

다시 한번 되묻자, 메모라이즈 페이퍼를 그리고 있던 수석사제의 붓이 멈춘다.

"…나는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머큘루르트."

"...."

자신이 거절했던 것을 기억이나 하는 건지, 태연자약하게 그런 말을 뱉는 상관의 아가리를 한 대 후려갈겨 주고 싶은 이엘리야였지만.

그녀는 간신히 충동을 참아 내며 침착하게 물었다.

"…이렇게 간단히 해주실 거면서 이전에는 거절했던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수석사제님."

그래도 이번에는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수석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큼… 거시적인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버튼 경께서 다녀가고 나서요."

"...."

"아직 본부로부터의 공문이 오지 않아 따로 이야기는 안 했지만… 심문 과정에서 버튼 경께서 천칭을 꺼내드셨습니다."

"...!"

"즉, 서우진 씨가 수감된 포로실에서 본격적인 이단심문 과정이 진행된 것이죠."

수석사제의 말에 이엘리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대단하다는 루이스 버튼의 천칭은 새로운 주교가 발탁되는 때 정도가 아니라면 곧잘 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주교 서임식이 아니라면, 이미 악마종으로 기소되어 재판이 끝난 사형수의 사형판결을 확정 지을 때나 꺼내는 것이 루이스의 천칭이었다.

그만큼 절대적인 잣대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러니 이엘리야의 입장에서는 혹시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우진의 재판 결과가 좋지 않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갈 수밖에.

…하지만 곧 이어진 수석사제의 말에, 이엘리야는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천칭이 서우진 씨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

"…버튼 경께서 말하기로 그의 마성 수치가 10% 수준 이하라고 하더군요. 머큘루르트도 알겠지만 그건 악마종이 속내에 들어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치고요."

"아...."

안도가 담긴 옅은 한숨.

"…사실 요청 자체는 저희 관문사제단에서 한 게 아니라, 버튼 경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서우진 씨의 공증인을 자처하면서요."

"...."

"그러니 특성 발행 자체는 아마 긍정적으로 검토될 것 같습니다. 워낙 예외적인 사항이라 쉬이 장담은 할 수 없지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단심문관의 공증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애초에 교단에 가지는 이단심문관의 입김 자체가 가볍지가 않은 데다가.

그 '천칭의 이단심문관' 루이스 버튼이 직접 선인(善人)으로 공증한 이는, 그가 이단심문관으로 재직한 백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손에 꼽는다는 사실도 무게를 더해 주었다.

어째서 루이스 버튼이 그렇게까지 우진을 옹호하는지, 이엘리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진에 대한 일 처리가 긍정적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일단 가 봐, 이번에는 아마 다른 반응일 테니까.』

정말로 우진이 했던 말대로 말이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이 인간은.'

우진의 그 말도 안 되는 능숙함과 지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엘리야였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층계초월자 수준에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임명식이 이미 끝난 마당이라 또다시 임명식을 할 수는 없지만… 본부로부터의 공문이 도착하는 대로 사과의 의미를 담아 버튼 경께서 직접 수훈을 해주시기로 했으니...."

"...."

"일단은 돌아가서 대기하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반드시 그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이엘리야는 수석사제실을 나섰다.

* * *

교단 본부로부터의 소명 공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록시가 구운 고기를 먹고, 배정받은 대기실로 돌아가 등 뜨시게 누워 있다 보니 이엘리야를 통해 귀빈실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는 길을 나섰다.

어차피 그건 기다리던 '수훈식'일 게 뻔했으니까.

길다란 복도를 지나 귀빈실의 문을 열자.

벌컥-

"오셨군요, 서우진 씨."

"어."

"…이쪽으로 앉으시죠."

도착한 귀빈실에는 루이스와 김시아의 몸을 빌린 록시가 마주 앉아 있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이번에 난리를 일으킨 몽마라는 것을 알기는 하는지.

루이스 녀석은 내 반말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록시의 옆에 앉을 것을 유도했다.

털썩-

내가 자리에 앉자, 록시가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장난을 걸어왔다.

"…어머. 화제의 주인공 서우진 씨 등장하셨네요."

"...."

"안 그래도, 서우진 씨 욕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관문지대를 미리 한 번 해 본 수준 아니냐고요. 후훗."

스윽-

고개를 돌려 루이스를 바라보자.

녀석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변을 던져 왔다.

"…욕 안 했습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네."

생긋-

나와 루이스를 번갈아 보며 웃음을 지은 록시는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엑스트라는 이쯤 해서 퇴장해 볼게요. 두 분은 두 분이 하실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담당 수행사제분을 통해 레어(Lair)의 좌표가 발급될 겁니다. 좀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김시아 용사 후보님에게 수호십자의 성은이 함께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후훗. 그래요. 아마 별 소용은 없겠지만...."

"...."

"그럼 이만!"

탁-

그렇게 귀빈실의 문이 닫히고.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훈장은?"

"…맥락을 좀 갖추시죠, 서우진 씨."

"알 만한 사람끼리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빨리빨리 끝내자고. 어차피 나머지 구색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니까."

"…제 생각에 당신은 알 만한 사람에 속하면 안 되는 거 같습니다만."

"또, 또 별것도 아닌 걸로 말꼬리 잡지 말고."

"역시 별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이스는, 우측 아래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나무 상자를 주섬주섬 꺼내었다.

턱-

"빨리."

"…알아서 할 테니 재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루이스는 나무 상자의 봉인을 천천히 뜯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 수훈식은 며칠 전 있었던 131기 용사 후보 임명식을 약식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본래라면 관문사제단을 총괄하는 주임사제가 직접 훈장을 달아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만...."

"...."

"교단의 실책으로 고를 겪은 감사와 양해를 구하는 차원에서, 직분상 상급자인 제가 훈장을 달도록 하겠습니다."

"생색내지 말고 빨리 열기나 해."

빠직-

다시 한번 재촉하는 내 말에 루이스의 이마 위로 힘줄이 돋아났다.

녀석은 코로 한숨을 한 번 내쉬며 상자를 열었다.

끼익-

"...."

나무 상자 안에는 밋밋한 진회색 훈장이 들어 있었다.

방을 나선 김시아가 달고 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모양새의 자그마한 훈장.

"오."

훈장을 보고 나지막한 탄성을 뱉자, 루이스가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 훈장은 '무성(無星) 훈장'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교단의 정식 용사는 아니지만, 관문지대를 통과하여 교단의 용사 후보생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훈장이죠."

스윽-

"훈장의 역할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위성마법, 스타링크(Starlink)의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위성마법(危星魔法).

언뜻 듣기에는 어려운 말 같지만, 이게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용사와 성좌 간의 신뢰 유지를 위해 용사의 의뢰 수행 과정이 언제나 해당 지역을 관할하는 성좌의 인지 범위 안에 있도록 교단에서 구축한 시스템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실시간 스트리밍 같은 개념이었다.

이 위성마법을 통해.

의뢰를 맞긴 성좌는 용사가 자신의 의뢰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의뢰 수행 과정에서 해당 용사의 퍼포먼스를 보고 향후 전속계약이나, 지정의뢰(appointment request)에 참고를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포로실에 갇혀 가며 몽마를 포섭한 것도 결국은 이 귀찮은 관음용 시스템에 수작질을 하기 위함이었고.

"…때문에 정식으로 용사 후보로 훈장을 등록하며 채널이 개설되면 서우진 씨 역시 방문한 지역을 관할하는 성좌의 인지 범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이 훈장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읏-차.

그렇게 위성마법에 대한 설명을 마친 루이스 녀석이 돌연 훈장을 집어들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하던 말을 이었다.

"…라고 김시아 씨께는 설명을 드렸지만, 사실 이 훈장은 그녀가 가져간 것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래. 내 눈에도 그래 보이네."

녀석의 말처럼, 내 훈장은 그녀가 달고 있던 훈장과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테두리.

밋밋한 그녀의 훈장 테두리와 달리 내 훈장의 테두리는 광택이 나는 보라색 장식으로 감싸져 있다는 부분이 달랐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오래전 이야기라 서우진 씨는 잘 모르시겠지만, 100여 년 전까지 관문지대를 수석으로 통과한 용사 후보생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교단의 직할 특성을 발행했었습니다."

"...."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발행이 중지되어 사실상 폐기된 제도지만… 이번 131차 관문지대에서 서우진 씨가 보인 이례적인 성적과 여타 다른 사항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교단 본부에서 특별히 허가를 받아 발행되었죠."

선택받은 자.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교단의 특성이 발행되었다는 것이었다.

씨익-

"…달아 드릴 테니. 능력은 직접 확인하시죠."

[새로운 특성 권한이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목록에 새로운 특성이 추가됩니다.]

[특성, '선택받은 자'가 적용됩니다.]

25화

EP5. 동행 (4)

[새로운 특성 권한 감지되었습니다.]

[특성 목록에 새로운 특성이 추가됩니다.]

[특성, '선택받은 자'가 적용됩니다.]

루이스가 훈장을 달아 주자, 시스템창의 요란한 알림 소리와 함께 문장들이 무더기로 떠올랐다.

+

<특성 목록>

■선택받은 자(★☆☆)

[선택받은 자는 교단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3급 권한을 얻습니다. 시야 안의 대상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정보의 중요도에 따라 제한이 있습니다.]

■학살자(★☆☆)

[학살자는 연속으로 개체를 처치할 때마다, 학살 중첩이 쌓입니다. 최대 5번까지 중첩되며 중첩당 공격속도가 10% 증가합니다.]

+

"...."

선택받은 자.

관문지대를 통과한 용사 후보생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에게만 선사되는 이 특성은, 교단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얻게 된다.

물론 혹자가 보기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접근을 할 수 있다는 게, <특성: 학살자>처럼 읽는 순간 와닿는 능력도 아니었고 까놓고 말해 전투력을 올려 주는 특성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교단이 오랜 기간 항마전을 이어 오며 축적한 기록들은 절대 얕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교단이 수백 년이 넘도록 항마전을 이어오며 가장 중요시 생각한 것이 바로 '정보'였으니까.

수많은 해를 거쳐 쌓인 교단의 데이터베이스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것'조차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정보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담고 있었다.

그 기록의 편린이나마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특성: 선택받은 자>.

내가 굳이 버킷리스트에까지 특성을 적어 놓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 능력을 확인하고자 루이스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확인."

"…잠깐만요 서우진 씨."

띠링-!

[<인물: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대상 선정 완료]

[확인 가능 기록 검색… 완료]

[4,431개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련 키워드를 지정하십시오.]

"지금 뭐 하-."

"키워드 입력. 비밀."

[키워드: #비밀]

[키워드에 해당하는 기록 중 열람 가능한 정보를 랜덤으로 선택합니다.]

[#1341. 루이스 버튼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와 관련된 기록.]

"호오...."

떠오른 문장에 감탄을 뱉자, 루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짧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잡아챘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장 그만두세요… 그러라고 제공된 교단 특성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다고 그만둘 내가 아니었지만.

"[#1341]. 정보 열람."

"당신 진짜...!"

루이스의 잔뜩 붉어진 얼굴을 배경으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

[#1341]

-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마력특성과 관련이 있음.

- 그는 자신의 의지로 모습을 변형시키고 있으며 원하는 때에 해제가 가능함.

- 그가 모습을 변형시킴으로써 얻는 가장 큰 가치는 [냉정함].

<※추가정보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추가 권한이 필요합니다.>

+

"오."

씨익-

"원래는 그렇게 잘 참는 성격이 아닌가 보네?"

"...!"

정보를 토대로 한마디를 읊조려 주자 안 그래도 붉던 루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까득-

"…제가 아무래도 마성 수치 체크를 잘못한 것 같군요."

이까지 갈며 부들거리는 녀석에게 나는 양쪽 손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나는 그냥. 직접 확인해 보라길래."

"그냥 넘어가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당장 교단에 부적격 심판을 요청하겠습니다."

"허허."

내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내쉰 녀석의 한숨과 함께.

"…일어나시죠."

"...."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 * *

"100년이 더 된 일이지만… 본래 관문지대를 통과한 용사 후보 중 수석에게는 선택받은 자 특성과 함께 한 가지 특권이 더 주어졌습니다."

"...."

"바로 '아티팩트'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본래라면 정식으로 1성 용사 서품을 받을 때에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선택받은 자에게는 특별히 일찍 이 공간이 개방됩니다."

[<마법진: 텔레포트>가 활성화됩니다.]

[이용 권한을 확인합니다… 이단심문관(준주교품) '레오나르도 루이스 버튼']

[좌표… 확인 완료]

화악-

루이스가 말한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Sevens Door>라고 칭하는 교단의 보물고였다.

항마전을 이어 오며 수많은 시간 동안, 상위차원계 각지의 유니크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천혜의 보고.

신화 속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적인 무기나, 전설의 영약 같은 것들이 말 그대로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상위차원계 최고의 보물 창고였다.

터벅- 터벅-

루이스를 따라 도착한 '세븐스 도어'는 역시나 교단의 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새하얀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대한 벽면에 총 7개로 이루어진 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문의 치장은 각자 다 달랐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그 색에 있었다.

각 용사의 등급에 부여되는 색과 같이 좌측 끝부터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다이아… 그리고 그 뒤에 백색과 흑색 문으로 구분되는 7개의 거대한 문들.

"용사 등급과 마찬가지로 아티팩트에도 등급이 존재하는데, 그 수준은 용사 등급과 동일한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예를 들어, 서우진 씨께서 의뢰 공적치를 충분히 채우셔서 1성 용사로 서품을 받으시는 데 성공하신다면 그때도 이쪽 1성 아티팩트가 보관된 창고에 들어올 기회가 생기는 것이죠… 예외적으로, 항마전에서 혁혁한 공으로 칠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이 끼어 있다면 더 높은 등급의 창고가 열릴 수도 있겠지만."

…익숙하다고까지 이야기하기는 뭐했지만, 그래도 와 본 적이 있는 공간이었다.

전생에는 멋모르고 들어와서 매번 꽝을 뽑아가기는 했지만, 이곳에 얼마나 좋은 아티팩트들이 보관되어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7개의 문을 쭉 훑어본 나는, 짐짓 모른 체를 하며 우측 끝에 있는 흑색문과 백색문을 가리켰다.

"…아까 아티팩트 등급에는 5성까지가 다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문은 7개인데? 이 보물고 이름도 세븐스 도어라며. 뭔가 안 맞는데?"

고민을 했는지, 잠시 멈칫한 루이스가 대답했다.

"…저곳은 아티팩트가 아니라 '신기(神器)'와 '마기(魔器)'를 모아 놓은 곳입니다. 아티팩트의 등급으로 산정할 수 없는 등급 산정 불가에 해당하는 물건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호오...."

"…괜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노파심에 말하는 게 아니라, 아마 지금 수준으로는 들어가자마자 마기와 신기에 짓눌려 말 그대로 온몸이 으스러질 겁니다… 어차피 열고 싶다고 열리지도 않겠지만."

피식-

"너는 무슨 내가 애도 아니고."

"…갓 올라온 용사 후보 수준이라면 제 눈에는 충분히 애로 보입니다."

으쓱-

"그러니까…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녀석의 말을 흉내 내며 받아쳐 주자.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몸을 돌린 녀석은 곧바로 1성 아티팩트가 보인 황동색의 문 앞으로 다가가 손을 대었다.

그러자.

끼익- 소리와 함께 개방된 문.

문이 열리며 안쪽으로 기다란 복도가 나타났다.

"…들어가기나 하시죠."

* * *

보물고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실제 문 안으로 드러난 모습은 창고보다 '박물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새하얗고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의 좌측과 우측에 일정한 간격으로 물건이 하나씩 놓여 있는 모양새.

"흠… 뭘 가져가야 잘 가져갔다고 소문이 나려나."

"…세븐스 도어의 출입과 출납 기록은 기밀 취급을 하기 때문에 서우진 씨가 어떤 물건을 선택하셔도 소문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째릿-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이 융통성 없는 자식아. 조크 몰라 조크?"

"본 사제는 말의 무게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꺼져. 너랑 안 놀아."

사실.

이곳에서 뭘 고를지 생각해 온 물건들이 있기는 했다.

1성급 아티팩트로 등급이 측정되었지만 사용자나 사용 방법에 따라 그 이상에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들.

예를 들면, 무기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 고유무기로 전환되며 1.5배의 성능을 발휘하는 <이름 없는 닌자의 단도>나.

일회용이지만 산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검격을 날릴 수 있는 <파산검(破山劍)> 같은 무기들.

애초부터 선택받은 자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 세븐스 도어에서 가져갈 물건 하나 생각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하지만 내가 고심 끝에 떠올린 몇 가지 무기들이 과연 베스트냐.

그건 아니었다.

회귀를 해서 대충 이맘때쯤 남아 있는 쓸 만한 아티팩트 몇 개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나도 정확하게 이 시점에 어떤 아티팩트들이 이곳에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

<아티팩트: 무기>

■이름: [파산검(破山劍)]

■등급: ★☆☆☆☆

■설명: [검에 담긴 마나를 이용해, 1회에 한해 산을 가르는 검격을 펼칠 수 있습니다.(단, 검격을 펼치고 나면 이 무기는 파기됩니다.]

■특수능력: [파산검격]

+

"...."

"파산검이라. 괜찮은 물건입니다. 범용성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여벌의 목숨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물건이죠."

그래서일까.

미리 생각해 뒀던 아티팩트들을 보더라도 그닥 감흥이 오거나 손이 뻗어지지 않았다.

뭔가 살짝 아쉬운 느낌이랄까.

몇 번 눈길을 준 아티팩트들을 지나치자, 루이스가 경고를 남겼다.

"…본래 사제가 용사의 아티팩트 선택에 개입할 수는 없는 법이지만… 서우진 씨에게 주어진 '브론즈 도어'의 출입 권한은 1시간입니다. 유념하십시오."

"…알아 나도."

"보아하니 눈썰미는 있으신 것 같은데… 너무 과한 욕심은 때로 화를 부르는 법입니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이미 좋은 아티팩트들을 많이 지나쳤습니다."

"...."

뚜벅- 뚜벅-

녀석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계속해서 복도를 내걸었다.

<크고 거대한 방망이>, <늙은 마법사의 돋보기>, <아름다운 민낯 가면> 등.

이미 그 효능을 잘 알고 있는 많은 아티팩트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내가 그 아티팩트들을 지나친 이유는 생각보다 그리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잠깐 쓸 소모품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1성급치고 성능이 확실하다 치더라도, 회귀 후 행보를 장기적으로 보면 그중 뭘 선택하든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루이스 녀석의 말대로 이건 욕심이었다.

고작해야 브론즈 도어에 들어와 있으면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근거 없는 욕심.

"어."

"…왜 그러십니까?"

멈칫-

…하지만 때로는.

그런 욕심이 생각보다 큰 행운을 가져올 때도 있는 법이었다.

"이건...."

26화

EP5. 동행 (5)

"…정말 그걸로 하시는 겁니까?"

"응."

"...."

똥 마려운 강아지 표정과 비슷한 얼굴을 한 루이스가 나에게 물었다.

…세 번째 질문이었다.

이번에도 싱글벙글 웃으며 같은 대답을 해주자, 루이스가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내뱉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본래 사제가 용사의 아티팩트 선택 권한에 참견하는 건 금지된 일입니다. 하지만 딱 한마디만 말씀드리자면...."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 녀석의 말을 잘라 버렸다.

"참견하지 마 그러면."

"...."

"가만있어."

하아-

답답함에 한숨을 내쉰 루이스가 물었다.

"…혹시 왜 그 물건을 선택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보면 몰라?"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이쁘잖아."

"...."

"그리고… 느낌이 좋거든. 뭔가 나랑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랬다.

내가 선택한 아티팩트는 암적색 빛깔의 십자 귀걸이.

무기도, 방어구도 아닌 무려 '장신구'였다.

+

<아티팩트: 장신구>

■이름: [레드 크로스 링]

■등급: ★☆☆☆☆

■설명: [미확인 아티팩트.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수능력: [-]

+

"마지막으로 하는 참견입니다만… 아무런 효능도 알 수 없는 미확인 아티팩트를 선택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이지. 혹시 알아? 내가 이 아티팩트의 효능을 밝혀낼 수 있을지."

"그건 단순히 들고 다닌다고 효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아티팩트가 아닙니다. 이제는 아예 존재 의미 자체가 사라진-."

순간 답답함에 참지 못하고 쏘아붙인 루이스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호오."

그리고 한 번 심호흡을 하며 나에게 말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주시죠. 실언이었습니다."

피식-

"생각해 보고."

"…퇴장하겠습니다."

뚜벅뚜벅-

걸어온 복도를 따라 다시 되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와 달리 적막했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한 이유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실언(失言)을 후회하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녀석은 문에 거의 다 도달할 때까지,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발걸음만을 계속했다.

그때, 문득.

지하 포로실에서 나가며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식으로 용사 후보로 임명된 이후에, 서우진 씨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브론즈 도어를 코앞에 두고, 몸을 돌린 녀석이 운을 띄웠다.

"나가기 전에, 서우진 씨에게 하고 싶은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녀석은 이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

.

.

"혹시 용사가 아니라… 제가 이끄는 '엑소시스트'에서 활동할 생각은 없습니까?"

* * *

수훈식을 마친 용사 후보생이 선택할 수 있는 다음 행보는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었다.

하나는 전속계약을 맺은 성좌의 고유성역으로 향해 이런저런 수련을 하며 상위차원계에 대한 추가 적응 기간을 갖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첫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대충 9 대 1정도의 비율로.

전속계약을 맺은 이들 대부분은 속한 성좌의 성역으로 향한다고 봐야 하고, 전속계약을 맺지 않은 이들이나 혹은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만이 바로 첫 의뢰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스 녀석이 내게 제안한 것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지 않는 제3의 제안이었다.

"엑소시스트는 평범한 용사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도맡아 합니다. 교단연합 내부에 침입한 '악마종'을 색출(索出)하는 교단의 전문 인력으로 주로 음지에서 활동을 하게 되죠."

"...."

"…예를 들면, 이번에 서우진 씨께서 경험하신 '관문지대 몽마 개입 건'이 비슷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엑소시스트(Exocist).

이단심문관을 우두머리로 하며, 악마종이 개입된 사건을 해결하는 교단의 전문 해결사 집단.

"…촉박하지만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엑소시스트는 업무 특성상 원칙적으로 용사활동에서는 배제되어야 하니까요."

"엑소시스트라...."

"서우진 씨께서 제안을 승낙을 하시면, 교단의 모든 데이터에서 서우진 씨의 이름이 곧장 말소될 겁니다… 물론 완전 말소가 아니라, 1급 기밀에 붙여진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웬만한 성좌조차도 굳이 찾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엄금한 기밀에 붙여지고 새로운 신분으로 활동을 하게 되겠죠."

…사실 고민해 본 적이 있는 루트였다.

교단연합군이 항마전에서 승리하는 데에 가장 애를 먹이는 것이 바로 악마종이었으니까.

관문지대에서 루이스의 눈에 들어, 엑소시스트로 스카우트되고.

회귀하며 가져온 정보를 이용해, 미리 악마종들을 처리하는 것.

충분히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어쩌면 교단연합군이 항마전에서 승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가장 무난하고 리스크가 적은 루트였다.

하지만.

"기각."

"...."

…그렇기에 선택할 수 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무난한 루트'가 아니었으니까.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나에게는 결과가 중요했다.

과정이 무난하다든지, 위험하다든지는 결국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끝난 것이나 다름없던 상위차원계에 주어진 유일한 기회가 바로 내 '회귀(回歸)'였고.

여기서 실패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해야만 하는 일'과 '교단연합군의 승리'는 엄연히 다른 영역에 존재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은 오직 내 수첩에 적힌 버킷리스트의 목록들뿐.

그 목록에는 '교단연합군의 승리'도, 녀석의 엑소시스트에 들어가는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엑소시스트에 들어오라는 루이스 녀석의 부탁은 거절할 수밖에.

"이쪽도 나름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서."

"…그렇습니까."

단호한 거절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 뒤통수에 다른 제안을 던졌다.

"…대신."

"...?"

"나중에 한 번 도와주라."

"…도와 달라니 그게...."

"나중에 언젠가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한 번 도와 달라고. 그럼 그때는 나도 생각해 볼게. 엑소시스트에 들어가는 거."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던 녀석이 대답한다.

"…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 * *

관문지대는 신규로 올라오게 되는 층계초월자들이 상위차원계에 적응하는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교단에서 조성한 공간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종의 '튜토리얼 지대'.

그런 만큼, 본격적으로 상위차원계에 올라왔을 때 용사가 겪게 되는 구조는 관문지대에서 겪었던 것과 생각보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 일례가 바로 '레어(Lair)'였다.

레어(Lair)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드래곤 레어'와 거의 동일한 역할을 하는 용사 고유의 공간으로 관문지대를 통과한 용사 후보라면 누구나 배정받는 곳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관문지대의 '관문의 경계'와 같은 공간이었다.

다만, 오롯이 용사를 위해 마련된 공간인 만큼, 레어에는 몇 가지 특수한 규칙이 더 적용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두 가지가 바로 '출입 방법'과 '출입 권한'이었다.

레어의 출입은 오직 각 성당에 설치되어 있는 교단의 특수한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서만 가능했는데, 각 용사에게 부여된 레어의 좌표는 오직 용사와 수행사제만이 알고 있었다.

물론, 만약의 상황을 위해 교단의 시스템 데이터에 그 좌표가 기록이 되어 있기는 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만 확인할 수 있도록 암호화가 되어 있어, 설사 교단의 최상위 직책인 '주교'라 하더라도 용사의 레어에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성좌와 용사를 연결하는 위성마법 '스타링크(Starlink)'조차 이 공간만큼은 개입할 수 없었으니.

'레어'는 말 그대로 용사 '고유'의 공간이 맞았다.

…세븐스 도어의 탐방을 마치고, 처음으로 배정받은 레어에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엘리야가 욕지거리와 함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용사님 미쳤어요?"

"어… 그, 일단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제 생각엔 미친 게 분명해요."

"...."

"…그렇지 않고서야 그 수많은 아티팩트를 놓고, 이 듣도 보도 못한 개뼈다귀 같은 귀걸이를 주워 올 리가 없어요."

"…허허. 주워 오다니."

조금 심하다 싶게 바가지를 긁어 대긴 했지만.

사실 당장 할 말은 없었다.

확실히 그 많은 아티팩트 중에 굳이 고집을 부려 미확인 아티팩트를 가져온 것은, 이엘리야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물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이걸 고른 것은 아니다만.

[<아티팩트: 레드 크로스 링>의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대상 선정 완료]

[주의! 열람 가능한 정보가 없습니다.]

당장 '선택받은 자'의 특성을 활용해도 나오지 않는 정보를 알고 고른 거라 씨불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지금 당장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 아니 도대체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개떡 같은 아티팩트를 골라 온 거예요!

- 남들은 평생 가도 한 번 쥐어 볼까 말까 한 보물들을 놓고 귀걸이? 귀이걸이이?

- 듣고는 있는 거냐요?!

그렇게 그냥 냅두면 하루 온종일 쏟아 낼 것 같은 이엘리야의 말을 끊고자, 나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 폰 케이스."

"…'폰 데이나'예요. 그리고 누가 사람을 미들네임으로 불러요!"

"일단 진정해.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하아-

"그러니까…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짊어져야 하는 일이라 이러는 거죠."

"뭐 어쨌든. 이건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니까 넘어가고."

"…퍽이나요."

"의뢰… 쪽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

죽은 동태 눈깔로 한숨을 내쉬던 이엘리야의 눈이 '의뢰'라는 단어에 빛을 되찾았다.

"의뢰. 의뢰. 의뢰 중요하죠."

"...."

그리고는 손가락을 익숙하게 튕기며 시스템을 활성화시켰다.

따악-

그러자.

[수행사제, 이엘리야 님의 시스템 화면을 공유합니다.]

+

[의뢰 목록]

- [마교 잔당 소탕]

- [오크 토벌전 참전]

- [북부 세계수의 파편 수집]

- [미개척지 탐험]

- [무림 남부 수성전 참전]

- [마녀 사냥]

.

.

.

+

간단하게 정리된 의뢰 목록이 눈앞에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졌던 관문지대의 시련과 다르게, 상위차원계 용사 후보부터는 의뢰의 선택권이 존재해요."

"...."

"사실상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마물 토벌전' 같은 높은 난이도의 의뢰부터, 각 성좌의 성역에서 이루어지는 '소일거리' 같은 의뢰들까지. 용사님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와 위험성과 보상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되죠. 예를 들면...."

의뢰와 관련된 이런저런 설명들을 늘어놓는 이엘리야였지만, 녀석의 설명은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기도 했고, 귀걸이를 발견한 시점부터 이미 내 정신은 다른 데에 팔려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초반부에는 너무 어렵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수준의 적당한 난이도의 사냥 임무 정도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여기 있다."

"...?"

"이걸로 하자. 이엘리야."

+

[QUEST: 열차 수호]

수행 난이도: ☆☆☆☆☆

의뢰주: <수호십자교단>

의뢰 내용: 무림(武林)의 동서부를 횡단하는 수호열차에 탑승해 운송물자를 수호하십시오.

의뢰 보수: 수호주화 100coin

+

의뢰를 가리키는 내 손가락에 이엘리야는 아무래도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다른 의뢰가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왜?"

"명확히 설명드리긴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의뢰 보수가 적기도 하고… 교단 의뢰인 데다가...."

머뭇거리던 녀석이 털어놓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수 수석의 첫 의뢰로는 좀 급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요… 오히려 이건 관문지대에서 용사님이 겪으신 것보다도 허드렛일에 해당하는 의뢰라서...."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의뢰지에 적혀 있는 내용만 본다면 이건 특별한 게 없는 의뢰였고.

녀석의 말처럼 실제로 허드렛일 중에도 허드렛일에 해당하는 의뢰였으니까.

하지만.

씨익-

"…이걸로 하자."

원래도 이 의뢰를 수행할 계획이긴 했지만, 세븐스 도어에서 적십자 귀걸이를 찾는 순간부터는 '무조건' 이것으로 결정이었다.

'…오랜만에 보겠네.'

[Bucket List#6]

『파티원모집-J. J』

'제리.'

27화

EP6. 파트너 (1)

J. J.

제리 주니어(Jerry Junior).

녀석과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꽤나 애매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제리.」

「…왜 부르나.」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

「너랑 나는 무슨 관계냐?」

썸 타는 이성 관계에서나 뱉을 법한 드문 질문을 던지자, 곧이어 녀석이 다리를 꼰 채 눈썹산을 매만진다.

생각에 잠길 때 녀석이 주로 보이곤 하는 버릇 같은 행동.

문득 떠오른 단어를 뱉자.

「친구?」

녀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한다.

「…그건 아닌 것 같군. 나는 친구가 없다.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고.」

「하긴 뭐. 나도 어디 좋은 데 갔다고 너한테 줄 기념품을 챙겨 본 적은 없었으니까.」

「....」

「그렇다고 적은 아니잖아.」

이번에는 녀석이 단어를 꺼냈다.

「상호 보완적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한 간헐적 협업 관계.」

…단어가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린 내가 힐난한다.

「등신아. 그건 나도 알고. 그걸 뭐라고 부르냐고 물어본 거잖아.」

녀석의 멸시 어린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조크다.」

「....」

「…수준 높은 하이개그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일부러 과장까지 해줬는데… 역시 네놈은 항상 기대 이하로군.」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지. 이 방구석 히키코모리 새끼야.」

「…혐오 발언은 자제하도록 해라. 종족 특성으로 인한 필연적 생활 양식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시 오른쪽 눈썹산을 매만지던 녀석이 하나의 단어를 꺼내었다.

「…파트너.」

이번에는 정말 단어였다.

「그 정도로 하지.」

그것도 꽤나 괜찮은.

* * *

+

[QUEST: 열차 수호]

수행 난이도: ☆☆☆☆☆

의뢰주: <수호십자교단>

의뢰 내용: 무림(武林)의 동서부를 횡단하는 수호열차에 탑승해 운송물자를 수호하십시오.

의뢰 보수: 수호주화 100coin

+

이엘리야는 탐탁지 않은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결국 의뢰, '열차 수호'를 선택했다.

의뢰의 승낙 의사를 표하는 순간, 의뢰를 수행하기 위한 시작 지점.

제국, <무림(武林)>의 동부에 위치한 교단의 채플 좌표가 발급되었고, 나는 레어에 마련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곧바로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잠깐을 걸어 수호열차의 역으로 들어서자, 늘어선 기차 칸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오르고 있었다.

"...."

…이엘리야에게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내가 이 의뢰를 선택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걸 또 타게 될 줄이야.'

전생 이 시점에 내가 '첫 의뢰'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기수의 수석으로 '선택받은 자'라는 이례적인 특성 발행까지 이루어내며 뭇 성좌들의 주목을 받는 신인 용사 후보지만.

그때.

가까스로 목숨만을 부지해서 관문지대를 통과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첫 의뢰는 이런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지직- 직-

[아. 아. 들리세요? 용사님?]

"어. 잘 들려."

[텔레포트는… 이상 없이 잘 작동되었나요?]

훈장의 또 다른 기능.

레어에 있을 수행사제, 이엘리야와의 통신 기능이었다.

"…방금 도착해서 지금 타려고."

…수행사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편적으로는 용사가 어디에 있든 따라다니며 보필하는 쪽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수행사제 없이 혼자 활동하는 용사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었다.

수행사제의 역할 자체는 필수적이었지만, 준비만 어느 정도 해 둔다면 그 역할이 꼭 용사의 우편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성향에 따라 혼자서 활동하는 것을 즐기는 용사들도 적잖게 있었다.

통신 기능은 그런 맥락에서 마련된 기능이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도움을 바로 받기는 어렵지만 지식이나 정보의 측면에서 대응이 좀 더 용이해지는 구도로 수행사제의 역할이 정해지는 것.

[첫 의뢰 정도는 제가 동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사실 '열차 수호' 정도의 의뢰라면 용사님 말처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긴 하네요.]

"…난 이게 더 좋은데. 너도 이쪽이 더 잘 맞지 않아?"

[음… 그러니까 저도 육체적인 쪽보다는 머리를 쓰는 데 특화되어 있기는 한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앞으로도 웬만하면 이렇게 하자."

[…봐서요. 혹시 나중에 토벌전 같은 의뢰에 참여하게 되면 그때는 저도 용사님 옆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시고. 뭐 미리 말할 거 있어? 열차에 올라서는 좀 잘 생각인데."

[음. 잠시만요.]

잠시 우당탕- 하는 소음이 들려오고, 뭔가를 미리 정리해 둔 듯 이엘리야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사님이 타실 수호열차 'Bb-6641'은 중앙대륙 동부에 위치한 제국, '무림(武林)'을 가로지르는 횡단 열차예요. 무림제국 자체가 중앙 성역을 제외한다면 교단연합군 내부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고, 한 지역을 통째로 횡단하는 열차도 잘 없기 때문에 연합 내에서도 가장 긴 선로를 지나는 수호열차 중 하나죠.]

"...."

[…일단 최종 도착지는 '산동'으로 무림의 동부 끝자락에 붙어 있는 반도 형태의 지역이에요… 한 세기쯤 전까지 '마교(魔敎)'라는 이름의 독특한 무림 내부 집단이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죠.]

"마교라."

익숙한 단어의 등장이었다.

"그건 좀 흥미가 돋는 단어인데."

[…기대하시는 게 어떤 느낌이신지는 알겠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대단한 건 없어요. 원체 크지 않은 집단이어서, 100년 전 무림의 통합 과정에서 완전히 해산되었고, 지금은 무림 항마전선 끝자락에 걸쳐져 있는 별 볼 일 없는 위수 지역에 불과해요.]

피식

"별 볼 일 없는 변두리라… 그래?"

[왜요?]

"…아니, 뭐 내가 생각한 느낌이랑 절묘하게 틀리면서도 맞아서. 웃겨 가지고."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관련해서 몇 마디 말씀을 더 드리자면, '산동반도'는 공식적으로 무림의 관할 지역이지만 무림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앙관부와 4파1방으로 이루어진 무림맹에서 사실상 손을 뗀 지역이에요.]

"...."

[…물론 그래도 항마전선에 속한 만큼 군의 눈치를 보기에 완전한 '무법지대'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직접 관리가 소홀한 만큼 무림제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일들은 대부분 이곳을 거쳐 간다고 보아야 하죠.]

"예를 들면?"

[뭐 예를 들면… 노예를 거래하는 암시장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뭔가 하기 싫은 말을 하는 듯, 불편한 뉘앙스로 대답한 이엘리야가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데 노예제도는 교단에서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행위예요. 다만 교단의 중앙권력이 연합 소속 집단의 자치권한을 과도하게 침범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는 거죠.]

…녀석이 굳이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상위차원계는 넓고, 다양한 존재가 살아가며, 또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으니까.

오랜 기간 동안 뿌리 깊게 박혀 있던 문화가 단번에 사라지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법.

아무리 시민 의식이 성장하고 교단을 중심으로 한 일반 관념이 자리를 잡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에는 관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금지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암암리에 남아 있는 악습 중 하나가 바로 '노예제도'였다.

수인족을 중심으로 갖가지 아인종을 거래하는 노예 암시장도 그 연장선상이었고.

물론 개선의 여지가 있기는 했다.

인간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의 수인족과 같은 취급을 받던 엘프족 같은 경우에는 교단연합에 참여하며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자신의 종족을 노예제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했으니까.

…갖가지로 분열되어 제대로 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수인족이 노예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직까지 지난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딱히, 용사님께서 걱정할 만한 부분은 없으실 거예요.]

"...."

[교단의 훈장은 꽤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준무법지대라 불리는 산동반도라도, 교단연합군의 영토 내에서 시정잡배들이 용사 후보를 건드릴 수는 없을 거예요.]

그때, 타이밍 좋게 탑승을 재촉하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하오니 탑승하실 승객분들은....

[아. 이제 타셔야겠네요.]

"어, 아무래도. 일단 통신 기능은 꺼놓을게. 졸려."

[…무슨 일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저는 이쪽에서 추가로 알아 두셔야 할 부분들 정리하고 있을게요.]

"오케이."

이엘리야에게 인사를 고하며 통신 기능을 종료하자.

띠링!

[의뢰, '열차 수호'에 착수합니다.]

[위성마법, 스타링크(Starlink)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용사 후보, '서우진'의 이름이 스타링크 시스템에 링크됩니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기다렸던 링크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장합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

훈장 위로 기하학적인 마법진이 그려지며 의뢰의 착수를 알리는 시스템의 문장이 떠올랐다.

본래대로라면 내가 밟고 있는 관할지의 성좌들만이 스타링크 시스템에 참여하는 것이 맞았지만.

토벌전이나, 국경의 전투, 그리고 이런 교단 의뢰에는 예외적으로 모든 성좌가 참여할 수 있었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이 선택한 의뢰에 의문을 표합니다.]

입장한 성좌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당신의 선택에 의문을 가집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예상외의 순한 맛에 입맛을 다십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의뢰 선택에 실망을 표하는 모습.

[몇몇 성좌가 당신의 채널에서 이탈합니다.]

심지어 몇 성좌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기도 했다.

아직 의뢰가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엘리야의 말처럼 이건 '급'이 떨어지는 의뢰였으니까.

항마전의 핵심 요소에 끼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도 극히 낮으며.

긴장감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굳이 볼 필요 없을 것 같은 진부한 의뢰.

이엘리야가 걱정하던 것도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관문지대에부터 이어진 관심으로 내 몸값을 밀어 올리던 성좌들의 관심이 식는 것.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성좌들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관심만 생긴다면 어차피 돌아올 이들이었으니까.

[성좌, '하얀 눈의 청룡'이 당신의 선택에 실망하며 채널을 떠납니다.]

[성좌, '거꾸로 꽂은'....]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성좌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용사와 용사 후보를 위해 마련된 열차의 맨 앞 칸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머."

"...."

"귀걸이가 잘 어울리시네요… 주인님?"

"…좀 더 평범한 호칭으로 부르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렇게 이상한가요? 귀걸이의 주인님이라는 의미였는데...."

"...."

나와 같이 의뢰를 수행할 김시아(ver. 록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 * *

수호열차의 주 승객은 상위차원계의 교단연합에 속한 중산층 이상의 주민들이다.

물론 수호열차가 만들어진 취지 자체가 항마전을 오가는 교단의 용사들을 위한 것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용사의 사용 지분은 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부분의 용사들이 한번 전속계약을 통해 어느 지역에 정착하게 되면, 굳이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닐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고.

혹시 이동할 일이 생기더라도 정식 용사 서품을 받을 때쯤 되면 개인 이동 수단이 이미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수호열차가 수행하는 주 기능은, 중산층 주민들의 이동 수단으로서의 기능과. 전쟁물자 보급을 위한 운송 수단으로서의 기능 정도였다.

때문에.

텅-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이 없네요. 원래 이런가요?"

"몰라 나도. 물어보지 마."

"…뭐, 그래도 이편이 나을 것 같긴 하네요. 시끄러운 것보다는."

우리가 들어선 칸의 고객은 록시와 나뿐이었다.

- 열차가 출발합니다. 열차가 출발합니다. 객실 내부의 승객분들께서는....

객실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을 알리는 열차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위잉-

곧이어 창밖으로 짙게 깔린 어둠이 스쳐 지나가고, 은근한 부유감과 함께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과 함께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 록시.

녀석의 얼굴에는 왜인지 기분 좋은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흐응~♬

"…뭐가 그렇게 신났어?"

"처음이라서요. 기차 여행."

"...."

"그것도 당신 같은 사람과 함께하는 야반도주라니.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두 사람 사이의 알 수 없는 기류를 읽습니다.]

[성좌, '개머리 심판자'가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습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주는 맞는 표현이 아닌 것 같은데."

으쓱-

"그렇다고 야반의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낭만 없게."

"…시끄럽고. 시간 됐으니까 할 일이나 해."

녀석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여진다.

"…벌써요? 이제 출발했는데."

"질질 끌어서 뭐 해. 시간 없어."

"아니...."

뭔가 반박을 해 보려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쉰 녀석은 이내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맞춰 왔다.

그리고.

스윽-

왼손을 슬며시 내뻗어 뒷목에 걸쳤다.

[성좌, '올림포스의 망나니'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두 눈을 끔뻑입니다.]

[성좌, '누구보다 인간 같은 불멸자'가 자신의 직감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하며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성좌, '신단수의 후계자'가 그보다는 상견례가 먼저라며, 진도의 순서를 지적합니다.]

천천히 내 목을 당기며 점점 가까워지는 녀석의 얼굴.

"...."

그렇게 둘 사이의 대화가 멎고.

열차 칸이 고요해졌다.

짓쳐 들던 성좌들의 메시지가 사라지고.

덜컹거리며 선로 틈새를 넘는 기차 소리만이 들려올 즈음.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성좌들의 시선에 안 들키게 잘하라고 시킨 건 당신 아니었어요?"

"그건 맞는데. 그… 장르가 맘에 안 들어서 그렇지."

으쓱-

"제가 해 본 건 멜로가 전부라서요."

"...."

이내 다시 몸을 물린 녀석의 오른손에는, 내 무성훈장이 쥐여져 있었다.

지직- 지지직-

무성훈장 위로 그려진 기하학적 마법진에는 전에 없던 보라색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주의!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위성마법, 스타링크(Starlink)가 일시적으로 비활성화되었습니다.]

악마의 특이점.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키는 악마종 특유의 마나가 훈장에 새겨진 위성마법에 흘러 들어간 것.

내가 미리 록시에게 시켜 둔 일이었다.

이 열차 안에서 성좌들의 눈을 피해 마쳐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길게는 안 돼요. 티가 나기도 하고… 제가 계속해서 손을 댈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대충 얼마나 되는데?"

"음… 한. 20분 정도?"

씨익-

"충분해. 그 정도면."

답변을 들은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볼일 보러."

뚜벅- 뚜벅-

물어오는 록시에게 대충 둘러대고, 있던 칸을 벗어난 나는.

용사 후보를 위해 마련된 맨 앞 칸을 벗어나 용사가 아닌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뒤 칸으로 향했다.

…그쪽이 정말로 내가 볼일이 있는 쪽이었으니까.

드르륵-

칸막이를 열고 객실 내부를 확인했다.

- ....

- 뭘 저렇게 훑어봐...?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뚜벅뚜벅-

다시 한 칸을 지나 그 뒤 칸으로.

드르륵-

이번에도 역시 내가 찾는 이는 없었다.

또 다시 한 칸을 지나 뒤 칸으로.

드르륵-

이번 객실은 텅 비어 있었다.

"...."

…객실 반대쪽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한 남자.

그러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오랜만이네."

친구도, 동료도 아닌.

"…파트너."

…어느 익숙한 얼굴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28화

EP6. 파트너 (2)

길쭉한 팔다리에 걸친 블랙 슈트와 블랙 타이.

은은한 기풍이 흐르도록 깔끔하게 넘긴 머리.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눈 밑에 깊게 깔린 다크서클.

그리고 특유의 무표정한 포커페이스까지.

객실 끝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흑백의 남성은 의심할 여지 없는 J. J였다.

"오랜만이네… 파트너."

"...."

뚜벅뚜벅-

손을 들어 인사를 던진 뒤, 천천히 걸어가 녀석의 비어 있는 녀석의 자리 앞에 마주앉았다.

녀석은 내 인사에 그 어떠한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

"...."

그렇게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녀석은 다리를 꼰 채로 오른쪽 눈썹산을 매만지는 특유의 버릇을 보이며 말했다.

"…누구지? 이 칸의 모든 좌석은 내가 대절했다만."

"서우진. 28세. 이번에 131기로 올라온 용사 후보지."

녀석의 물음에 나는 훈장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그렇군."

"그렇지."

여전히 얼굴 표정에도 목소리에도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녀석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알아본 게 분명했다.

이 보라색 테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

"...."

다시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그리 어색하고 불편하지는 않았다.

전생에도 녀석과의 대화는 항상 반쯤 정적으로 채워져 있었으니까.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쳐 말을 뱉는 녀석 특유의 대화 템포는 나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정적 끝에 뱉은 말.

이번에는 오디오가 겹친다.

"제안하고 싶은 게 있...."

"용사 후보가 굳이 무림 동부로 가는 이유가...."

녀석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네가 먼저 말해."

"…그러지."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무림 동부는 갓 올라온 용사 후보가 가기에 그리 적합한 지역이 아니다. 특히 산동은 변경 중에서도 변경이지. 마왕군과 국경을 맞댄 전장도 아니고, 딱히 이름난 성좌의 고유지역도 없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

"…반응을 보아하니 동부에 볼일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닌 것 같고… 혹시 열차 수호 의뢰를 맡은 건가?"

"오. 바로 아네."

"…굳이 그런 의뢰를 수행하지 않아도 부르는 곳은 많았을 텐데."

역시.

J. J 녀석은 이 보라색 테가 기수 수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녀석은 보라색 테 훈장을 발급받은 마지막 용사를 직접 본 적이 있을 테니까.

그 테가 가진 의미를 알 수밖에.

나는 짐짓 모른 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네 말대로야… 열차 수호 의뢰는 그냥 구색 맞추기용이고."

"...."

"사실 당장은 너를 만나러 온 게 더 크지… 제리 주니어."

은근슬쩍 녀석의 이름을 거론하자.

다시 한번 정적이 이어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황한 표정을 내비칠 법도 했지만, 녀석은 여전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뀐 것이라고는.

스윽-

다시 오른손 중지로 눈썹을 매만지고 있다는 것 정도.

생각을 마친 녀석이 물었다.

"…나는 내 이름을 소개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랬나?"

"…사람을 잘못 보고 말을 건 줄 알았다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군."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녀석 고유의 영역을 깨뜨리고, 뒤흔들어 내 템포를 가져와야 했다.

으쓱-

"너 찾아온 거 맞아."

"...."

"무림제국 서부의 경제특구 향락도시 '사천(四川)'에 신흥 카지노 타워를 가진 주인이자."

"...."

"사천(四川)의 마피아 서열 3위를 달성한 J. J 패밀리의 얼굴 없는 보스(Boss)."

"…살수인가? 생각보다 조사를 많이 해 왔-."

한 템포를 끊고.

"제리 'D' 주니어."

멈칫-

"…방금 뭐라고 했지?"

동요 어린 되물음에 쐐기를 박듯 대답한다.

"아."

"...."

"제리. 드라큘라. 주니어"

씨익-

"…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

* * *

제리. 드라큘라. 주니어.

자신을 가리키며 읊조리는 그 세 음절을 듣자마자, 팽팽하게 돌아가던 그의 머리는 망치를 맞은 듯 멎어 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왜지?'

'왜 그 단어가 이 젖비린내 나는 풋내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거지?'

'어떻게?'

'131기가 마무리된 게 언제지?'

'애초에 처음부터 이상했나?'

누구도 답해 주지 않는 물음만을 허공에 던져 댈 뿐.

평소 육하원칙에 따라 상황을 분석하는 그 특유의 버릇 같은 사고방식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씨익-

'서우진'이라는 의문의 용사 후보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아.'

제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느새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말려 버렸다.'

단 몇 분.

아니, 실질적으로 나눈 대화만 세어 본다면 채 1분도 되지 않을 짧은 사이에 수십 년간 엄격히 지켜오던 스스로의 템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간만에 느끼는 당혹스러움 아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할 수 없는 그 오묘한 인물에게 하릴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정도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미리 손을 써 둬서 그 관음증 걸린 성좌 양반들이 보고 있지도 않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직 나뿐이니까."

"…정확히 네가 알고 있다는 그 부분이 문제인 것 같은데."

으쓱-

"문제는 문제를 삼아야 문제가 되는 법이지."

"…그 성이 가진 의미는 아나?"

"물론이지."

확인차 던진 제리의 물음에 우진이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드라큘라(Dracula) 백작."

"...."

"한때 마왕군 진영에서 백작의 지위를 누렸던 뱀파이어 일족의 수장이자, 수인족의 배반자. 네가 그 드라큘라 가문의 직계 후손이라는 의미지."

"...."

물 흐르듯 나오는 우진의 대답에, 제리가 허탈하게 덧붙였다.

"…막 올라온 용사 후보치고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렇긴 한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 없는 거."

"...."

"대충 그렇게 생각해."

제리, 그러니까 '제리 드라큘라 주니어'는 현재 자신의 성을 숨겨 가며 J. J라는 신분으로 교단연합군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드라큘라'라는 성이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내 비밀은 사라진 것 같다만."

"아니지."

피식-

"...."

"사라진 게 아니라 둘만의 비밀이 된 거지."

* * *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쯤 전.

'뱀파이어 일족'의 구심점이 되었던 '드라큘라 백작'이 죽으며, 마왕연합군 내에서 뱀파이어 일족의 입지는 점점 애매해졌다.

본래 교단연합군의 소속이었다는 온당하지 못한 출신 성분과 지도자의 부재(不在)라는 치명적인 리스크.

드라큘라 백작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회복되지 못할 처연한 입지 아래.

결국 뱀파이어 일족은 떠밀리듯 항마전의 최전방에 서게 되었다.

어느 전쟁이든 그렇지만.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는 곳은 전쟁의 선봉이기 마련.

몇 번의 반복되는 최전방 참전에 종족괴멸 수준의 피해를 입은 뱀파이어 일족은, 결국 그들을 증오하며 대륙을 헤집는 뱀파이어 헌터들의 손아귀에 일족의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러니.

멸족된 일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리 드라큘라의 입장에서는 마왕군에 몸을 기대기도, 그렇다고 배반하고 온 교단연합군에 이제 와서 손을 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신분을 세탁하여 일반 사람들 사이에 숨어 살아가는 것.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제리 드라큘라 주니어의 신분이.

무림(武林)제국 서부의 향락도시 사천(四川)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카지노 카르텔.

'J. J 패밀리'의 얼굴 없는 보스 'J. J'라는 신분이었다.

"...."

완벽히 수세에 몰린 제리는 우진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돈인가?"

이제 어떻게 알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정보를 들킨 이상 어차피 이제 와서 그 방법을 알아낸다고 손을 쓸 수 있는 방도는 없었으니까.

그저 제리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원하는 조건을 맞추어 주며 시간을 끌고.

…좀, 아니 많이 아깝기는 했지만 이제껏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신분을 세탁할 기회를 노리는 것.

그게 이 궁지(窮地)를 빠져나갈 수 있는 제리의 유일한 수였다.

"파트너."

"...?"

하지만.

"상호 보완적 비즈니스 모델을 바탕으로 한 간헐적 협업 관계…라고 하던데."

정작 돌아온 우진의 답변에 제리는 이번에도 역시 사고를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조크인가?"

"그래 보여?"

"…만의 하나이지만, 내가 네 하이개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으쓱-

"미안하지만 아닌 것 같은데."

"...."

"아쉽게도 농담 따먹기나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는 제안이다."

…제리의 입장에서 그런 우진의 제안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제리가 우진에게 약점을 잡힌 상황이었으니까.

그것도,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만큼 강력한 약점을.

"…파트너라니."

이미 옛 저녁에 사멸된 것으로 알려진지라 선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남은 뱀파이어의 생존이.

그것도 그 백작 드라큘라의 직계 후손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교단에 보고된다면, 제리의 머릿속에 떠오른 결말은 대충 두 가지쯤이었다.

사형.

구마 감옥에 투옥.

아니… 차라리 그편이면 다행이었다.

그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아마도 뱀파이어 헌터들의 끔찍한 손아귀에 천천히 찢어 발겨져 죽어 가는 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 정도로 강력하게 목덜미를 쥐고 있으면서도 굳이 '파트너'라는 수평적 관계를 요구하는 우진의 꿍꿍이속이 제리의 입장에서 이해가 갈 리가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같은 목적을 가진 '파트너'야. 내가 하려는 일이 좀 위험한 짓이라, 언제든 상황 바뀌면 뒤통수칠 수 있는 부하나 친구는 같이 못 하거든."

"…위험한 일이라면 나도 역시 사양이다만."

씨익-

"일단 들어나 보지?"

"...."

"아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일 텐데."

우진의 제안에 제리가 되뇌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

"...."

"…그렇군."

제리가 반쯤 승낙하는 투로 읊조리자.

우진이 오른쪽 귀걸이를 매만지며 흘리듯 말했다.

"흑마법."

"...!"

"정확히는… 너네 드라큘라 가문의 전통 혈귀술을 되살리는 것. 그게 내 제안이야."

고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며 정적이 흐르고.

우진이 팔뚝을 덮은 셔츠를 걷어 올리며 읊조렸다.

"…대충 알아들었으면 일단 여기 좀 물어 봐."

"...."

"안 아프게."

제리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수십 년 만의 두 번째였다.

29화

EP6. 파트너 (3)

상위차원계의 마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백마법과 흑마법.

언뜻 들으면 무언가 명료한 기준을 가지고 선악을 따져 나눈 것처럼 보이지만, 마법이라는 게 결국 마나의 특정한 활용 방식이라는 점에서 두 마법은 그리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이 두 가지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교단의 데이터 베이스'에 정립이 된 마법이냐, 아니냐에 있었다.

백마법과 같은 경우에는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단의 데이터베이스 아래 전통 있게 정립된 교단의 마법.

그리고 흑마법은 소수 종족의 혈계를 따라 전수되거나, 암암리에 전승되어 교단의 데이터에 기록이 남지 않은 독특한 마나 활용 기술을 의미했다.

흑마법을 흑마법(Black Magic)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대부분의 마법이 시간의 흐름 속에 소실되었거나 사장되었기 때문인데.

그건 변변찮은 기록이나 기억으로 전수되는 흑마법의 특성상, 오랜 기간 이어진 항마전에서 대가 끊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제리 녀석이 속한 뱀파이어 일족 역시 대를 이어 종족 고유의 흑마법을 전수해 오던 집단이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분명 경고 했다. 나는 이 흑마법을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다고. 애초에 내가 돈을 긁어모아 흑마법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것도 일족의 보전을 위해-."

"그쯤하고 처물기나 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

"하여간 누가 쥐 수인 아니랄까 봐… 겁은 오질라게 많아요."

"…박쥐와 쥐는 엄연히 다르다."

"닥쳐. 한 번만 더 떠들면 파트너고 나발이고 그냥 던전에 처넣어 버릴 거야."

"...."

팔뚝을 물으라는 말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제리는 한 번 일갈을 한 후에야 마지못해 내 팔뚝을 받쳐 들었다.

물론 녀석이 꺼려 하는 이유 자체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마력술식을 갖추지 못한 채 운용되는 반쪽짜리 흑마법은, 시행자인 녀석의 마력회로를 뒤틀어 극심한 고통을 주었을 테니까.

아마 이 시점에는 연습한답시고 몇 명을 물어 보는 과정에서 아마 몇 주씩을 앓아누웠을 것이다.

…깊은 다크서클에, 반응을 보아하니 비교적 최근에도 한 번 앓아누운 모양이고.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이제 시간도 얼마 없는데.'

마지못해 팔뚝을 입에 가져다 댄 녀석은 입안에 감춰 두었던 송곳니를 내 오른쪽 전완근에 꽂아 넣었다.

푸욱-

이내 핏줄을 타고 녹아드는 뱀파이어 일족 특유의 차가운 마력.

그와 함께 시스템창의 다급한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알 수 없는 마력이 체내를 잠식합니다.]

[주의! 기록되지 않은 마력이 마력회로에 개입합니다.]

[주의! 마력회로가 외부의 영향으로 구조를 변경합니다.]

[주의...!]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다급한 문장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볼까."

이 차가운 마력도, 시스템창의 경고문도.

그리고 지금부터 행할 흑마법도.

…모두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