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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80화 소왕야 주사윤

나는 기둥 뒤로 이동해 슬며시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폈다.

군복을 입은 이도 보이고 도포나 비단옷을 입은 자도 보인다.

그리고 무리의 중심에 낯익은 얼굴이 누군가를 보좌하고 있었다.

'현명이노인가?'

그때였다.

"소왕야를 뵈옵니다."

외할아버지 화진옥 대장군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왕야!

그렇다면 저자가 연왕 주윤문의 아들 주사윤인가?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화진옥 대장군. 말년에 고생이 많소. 그래, 몸은 좀 어떠시오?"

"늙은이가 병이 있어 그동안 소왕야를 영접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병마를 훌훌 털고 일어났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외할아버지는 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를 상대했다.

"하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중요한 건 대장군의 건강이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제는 쉬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주사윤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높아져 있었다.

"소왕야의 조언이 고맙지만 전 이 땅에 뼈를 묻기로 작정한 몸입니다. 선대 폐하는 물론 병상에 누워 계신 현 황제 폐하께서도 제게 명하신 바죠."

"하하하. 네, 네. 그렇지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대답에 소왕야 주사윤이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그리고 부채를 손에 쥔 남자를 한 번 힐끗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북부대장군가 화진옥 대장군을 뵈옵니다."

"뉘...신지?"

"연왕부 군사(軍師) 손혁재입니다."

자신을 연왕부의 군사라 소개한 손혁재가 다시 말한다.

"제가 대장군을 위해 시조를 한 수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고명하신 손 군사께서 이 늙은이를 위해 준비했다는데 안 들어 볼 수 없겠군요."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그가 낭랑한 음성으로 시조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읊었다는 하여가다.

"연왕부의 위력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있습니다. 만약 화 대장군께서 지금까지 대립을 잊고 시운에 순종할 수 있다면 북부대장군가의 영화는 앞으로도 천년만년 이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시거늘!"

"맞습니다. 대장군의 말씀이 맞아요. 황제 폐하께선 아직 살아 계시죠. 의식도 없이 벌써 십수 년을 산송장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입니다. 천하에 산재하는 영약이란 영약을 구해 왔지만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신의의 말이 있었습니다. 화 대장군! 자고로 시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 했어요. 보세요. 영왕, 부왕, 진왕께서도 우리와 손을 잡았습니다. 좀 더 확실하게 말씀드릴까요? 네. 그렇습니다. 연왕께 진충(盡忠)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늦기 전에 연왕 전하의 손을 잡으시죠."

외조부는 주위를 한 번 살피더니 소왕야 주사윤과 그 무리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노구를 위해 시 한 수 들었으니 보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화진옥 대장군은 신념이 느껴지는 단호한 음성으로 정몽주의 단심가를 읊었다.

이거 표절 아냐? 그게 아니면 하여가와 단심가가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던가?

"나는 힘없는 노구에 불과하지만 무엇이 대의고 무엇이 순리인지를 알고 있소이다. 연왕 전하께서 중원의 적법한 후계자가 아님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천하가 알고 있는데 시세가 어렵다 하여 사내대장부가 어찌 굴복할 수 있겠소?"

"대장군!"

소왕야 주사윤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치세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 했소. 대장군, 마지막 기회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은 물론 북부대장군가 역시 피로 물들 것이오."

"흥! 화씨 일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그러자 현명이노가 살기가 느껴지는 음성을 마치 혼잣말하듯 툭 하고 내뱉었다.

"큭큭큭. 죽고 싶어 환장한 늙은이가 있군."

현노의 망발에 북부대장군가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눈빛 하나 깜짝하지 않고 외쳤다.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재일봉의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외할아버지의 대답에 손혁재 군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화 대장군께서는 오직 저무는 태양만 바라보시겠다는 거군요. 그것참 아쉽습니다."

그가 소왕야 주사윤을 힐끗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혁재 군사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품에서 교지를 꺼내 읽었다.

"북부대장군가의 화진옥 대장군은 연왕의 교지를 받으라. 화씨 일가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증언이 있는바, 남경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재빨리 주변을 포위했다.

"이 무슨 짓들이냐?"

이곳은 북부대장군가의 심처지만 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지가 있으니 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외할아버지가 교지를 받지 않으면 역모로 엮겠다는 생각이 눈에 빤히 보였다.

스르릉!

이때 화경찬 장군이 보검을 빼어 들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이것은 현 황제 페하께서 하사하신 상방보검이다."

뒤를 이어 화진옥 대장군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것은 선대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황보패다."

"헉!"

"그, 그것은 상황보패?"

웅성웅성!!

상방보검에 이어 상황보패까지 출현하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상황보패의 권위를 빌려 말하겠소. 북부대장군가를 모함한 자를 이곳으로 데려오시오. 누군가의 고변이나 정황 증거가 아닌 확실한 증좌가 없다면 북부대장군가를 모함한 이들의 목을 상방보검으로 단칼에 베어 버리겠소."

"...!!"

상황이 반전되었다.

확실한 증좌가 어디에 있겠나?

거짓 증거를 만들고 사람들을 협박해 고변시켜 엮으려고 한 것이 분명할진대 말이다. 암튼 상황이 180도 역전되었다.

"이... 이...게...."

소왕야 주사윤이 분노에 찬 얼굴로 현명이노를 쳐다봤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는 눈빛이다.

이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뚱뚱한 노인, 명노와 눈이 마주쳤다.

"사형! 저기 무당파 놈이다."

흥분한 명노가 다짜고짜 몸을 날려 일장을 날렸다.

모지리가 분명하지만 나로 인해 일이 엎어졌다는 것을 안 것이라.

-펑!

미리 대비하고 있던 바, 나 역시 진기를 끌어 올려 그와 일장을 교환했다.

명노가 재차 출수하려 하자 현노가 만류했다.

"사제, 참아."

"이익! 사형, 저놈이 우리 일을 망쳤다. 모두 저놈 때문이다."

"그래, 사제. 사제 말이 맞아. 그런데 잠시만 참아."

"사형, 내 말이 맞는데 왜 참아야 해?"

현노가 명노를 만류한 까닭은 이 일의 주재자라 할 수 있는 주사윤이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그 위명이 자자한 무당파의 검제시군요. 그런데 강호의 인물께서 어찌하여 관부 일에 나선 겁니까? 강호의 소문에 의하면 무당은 공명정대한 문파라 들었는데 소문과 사뭇 다른 것 같군요."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잘못 들으신 것 같군요. 전 위험에 빠진 이를 외면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즉 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이죠."

"도리요? 하하하! 말씀을 참 재밌게 하네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방금 관부라 하셨는데 대체 누가 관부 사람입니까? 설마 현명이노를 칭하신 겁니까? 하긴 소왕야 옆에 있는 것을 보니 제 생각이 맞는 것 같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전대의 마두를 관인으로 쓰는 곳이 있다니 대체 그곳이 어딥니까? 아! 연왕부에서 오셨으니 그 관부가 연왕부가 맞습니까?"

"...!!"

단도직입적으로 비꼬자 소왕야 주사윤이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왜 그렇게 보시죠? 지금 나랑 눈싸움하자는 겁니까?"

"풉!"

"크...흑!"

내가 천연덕스럽게 반문하자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연타 성공이다.

!!

순간 주사윤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로 변했고 그의 수하들이 난리를 쳤다.

"저, 저런!"

"그 입 닥치지 못할까!"

"허튼소리!"

호통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한 가운데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소왕야 주사윤이 차갑게 말했다.

"현명이노가 과거 무림에서 활동한 것이 사실이나 이미 오래전 연왕부에 투신해 관부의 사람이 되었소. 일의 선후가 어찌 됐건, 누가 누구를 오해했건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건 무림과 관부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이고 북부대장군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검제께서 그것을 어겼다는 것이오."

"그래서요?"

"무당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오. 감히 무당 따위가 100만 대군을 감당할 수 있겠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었으나 그저 가볍게 넘기기엔 그의 위치가 무거웠다.

"내가 만약 관계가 있다면?"

"뭣이?"

순간 주사윤이 깜짝 놀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무당의 검제와 북부대장군가가 무슨 연관점이 있다는 것인가?

순간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의 의문을 풀어 줄 겸 낭랑한 목청으로 말했다.

"소손이 외조부께 인사드립니다."

"...?"

"...?!"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무당에서 기억을 잃고 십수 년을 살았습니다. 얼마 전에야 기억을 찾았고요."

"서, 설마...."

외조부의 표정에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렸다.

"주선우 황자님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뒤늦게 경악이 번지기 시작했다.

"주선우 황자?"

"저, 저분이 누이의 아들이라고?"

"무당의 검제가 내 조카였다니!"

나는 좌중에 모인 이들을 향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당에서 기억을 잃고 십수 년을 살았습니다. 얼마 전 원시천존의 도움으로 기억을 찾았고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설명하기 쉽지 않아 얼마 전에야 기억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참고로 나는 주선우가 해야 할 도리가 있다면 할 생각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도리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본질이 무림의 주선우가 아닌 지구의 최선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 머지않은 미래, 나는 무림에서 지구로 완벽하게 귀환하게 될 것이다.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 그 이후 어떻게 상황이 변할지 알 수 없었지만 지구가 아닌 무림에서 얽히고설킨 특별한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신, 북부대장군 화진옥,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외할아버지는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비록 존친(尊親)이지만 나는 황제의 아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외삼촌과 이모들 역시 나를 향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지금은 무당의 도인일 뿐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나는 서둘러 그들을 일으켜 세운 후, 연왕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모두들 아연실색한 모습이다.

특히 소왕야 주사윤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다시 한번 상황이 재밌게 변하기 시작했다.

제81화

81화 다시 만난 한남동 용병대

"살...아 계셨소?"

"원시천존께서 굽어살펴 주신 덕이죠."

주사윤의 질문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눈빛으로는 놈을 한없이 비웃어 주며 말이다.

"검제께서는 조금 전의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으시오?"

이때 손혁재 군사가 끼어들었다.

'흐음!'

역시 군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질문 하나로 내 말의 진위를 확증하는 동시에 내 위치를 황실의 인물이 아닌 무당의 검제로 확언했다.

나는 좌중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답했다.

그리고 저들이 원하는 것처럼 내가 가진 현재의 위치를 확실하게 주지시켜 주었다.

"무당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소. 하지만 내가 주선우였음을 부정하면 천륜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겠소?"

"그 말씀은??"

"예부터 강호의 은원은 칼로 해결하는 법. 어떻게 생각하시오? 원한다면 해결을 봐야 하지 않겠소?"

주사윤의 눈에 문득 이채가 서렸다.

아마도 좋은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

비무로 인해 나를 죽인다면 최고의 결과가 분명하니 말이다.

"소왕야, 검제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대로 물러간다면 연왕부가 강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자명하니, 강호의 법칙대로 해결을 봐야 하지 않겠소?"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저들의 모습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자리부터 옮길까요?"

"그러시죠."

연왕부에서는 예상한 대로 현명이노가 나왔다.

"놈! 뼈까지 씹어 먹어 주겠다."

"넌 나쁜 녀석이다. 사형과 날 힘들게 했다. 가만두지 않겠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그대들은 말이 참~ 많아. 닥치고 덤벼. 선공은 양보할게."

마치 고수가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말투로 도발하자 현노의 얼굴에 노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모지리 명노는 참지 못하고 공격을 날렸다.

"죽어라!"

이미 손속을 나눠 봤기에 애초부터 탐색전 같은 것 없이 저마다 강기를 뽑아냈다.

연무장 한쪽 벽이 거의 동시에 터져 나갔다.

콰지직!

"맙소사. 시작부터 검강(劍剛)이라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현명이노가 진기를 한층 더 끌어 올리며 강기를 마구 발산했다.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고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끊는다. 태극검 흡(吸), 탄(彈), 절(絶)."

푸른빛으로 이글거리던 무극 대검이 폭음을 일으키며 저들의 강기를 쳐 냈다.

-콰콰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드러난 모습.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서 있는 나와 반대로 현명이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하다.

정갈하던 의복이 어느새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당당했던 눈빛 또한 당황한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와 같은 반응은 비무를 관전하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헉!"

"마, 말도 안 돼."

특히 소왕야 주사윤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화경에 오른 검제라지만 현명이노 역시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나 눈에 보일 정도의 차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 사형. 뭔가 이상하다. 며칠 전과 위력이 달라졌다."

모지리 명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충분히 상대하리라 먹었던 기대가 여지없이 빗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현노가 모를 리 없다.

"놈... 실력을 숨긴 것이냐?"

현노의 매서운 눈초리가 내 몸을 샅샅이 훑었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

200이란 숫자는 무려 40레벨이 상승한 것과 같다.

대등했던 상대가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변해 버렸으니 저들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혼란과 경악 그 자체였을 것이다.

각설하고 내 입장에선 상황이 꽤나 재밌게 흘러가고 있었다.

현명이노의 공격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척이나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현현신공 심연의 바다."

"명명신공 깊은 곳의 어둠."

조심스럽게 거리를 좁히던 현명이노가 공격을 감행한다.

각기 다른 광채를 날리며 순식간에 36방위를 점해 찔러 들어왔다.

콰콰콰콰콰콰콰!!

기세 좋게 내뻗어진 강기 세례.

하지만 애석하게도 거기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순간 이동 스킬에 의해 허공만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이, 이형환위?"

드래곤 스승님 덕에 닳고 닳은 싸움꾼인 된 내가, 그것도 레벨이 40이나 상승한 내가 빈틈을 놓칠 리 만무하다.

"태극검 통강(通剛), 꿰뚫는 강기!"

뒤이어 현명이노의 병장기에서 막대한 내력을 쏟아 만들어 낸 강기가 터져 나왔지만 전과 다른 위력에 우수수 하며 모조리 조각나 버렸다.

현명이노 중 명노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조각난 병기가 몸속에 파고드는 통증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퉤!"

현노 역시 치밀어 오르는 울혈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뱉어 냈는데 처음 기세와는 달리 현노의 목소리에서는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너 이... 자식. 죽여 버릴 테다."

"사, 사형. 어떻게 하지? 놈은 강하다. 놈이 무섭다."

명노가 본심을 내비쳤다.

모지리지만 내가 자신들보다 뛰어난 강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퍼퍼퍼퍽!

입을 딱 벌린 채 고통으로 몸을 파르르 떠는 현명이노.

하지만 내 공격은 상대가 저항을 하건 말건 그것과 상관없이 계속되었다.

"으아악!"

"악!"

난 닥치는 대로 현명이노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태극검이고 태극권이고 따지지 않았다. 그저 오른손과 왼손이 원하는 곳으로 빈틈이 보이면 일단 박아 넣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사시나무 떨듯 몸을 뒤흔드는 현명이노.

현명이노는 살기 위해선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현문정종의 진기가 그들의 내부를 헤집었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왔는데....

두 사람은 상대를 잘못 판단한 죄로 이토록 허무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서걱!

명노는 심장이 관통당해 쓰러져 버렸다.

가슴에 생긴 지름 10cm의 커다란 구멍이 그의 비참한 최후를 가늠케 했다.

빠각!

현노의 최후 역시 명노에 비해 비참하면 비참했지 부족하지 않았다.

태극권의 강기에 천령(天靈)혈, 즉 정수리를 가격당해 뇌가 터져 버린 것이다.

권강의 거대한 위력에 눈알이 터지며 코와 귀 그리고 입에서 뇌수가 섞인 피가 흘러나왔다.

쿵. 쿠웅!

현명이노는 단말마의 비명도 없이 차디찬 대지에 몸을 뉘었다.

-[띠링, 레벨이 상승합니다.]

-[띠링, 레벨이 상승합니다.]

-[띠링, 현명이노를 격살했습니다. 명성이 +3,000 상승합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시스템의 청아한 음성.

나는 오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어 좌중을 살펴보았다.

"...."

"...."

"...."

아무 말 없이 숨을 죽인 채 꼬리를 내린 사람들.

현명이노의 비참한 최후로 인해 그야말로 전의(戰意)를 상실한 모습이다.

일부는 겁에 질린 듯 시선을 회피한 채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병X.'

소왕야 주사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겁에 질린 듯 어깨를 움츠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 * *

클럽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대개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곳을 떠올리기 쉽다.

허나 사실 클럽의 탄생은 특수한 목적이나 친목 도모를 위한 사교에 그 목적이 있다. 참고로 1904년 고종 황제가 내국인과 외국인의 문화 교류 촉진을 위해 만든 사교 클럽인 서울 클럽이 여전히 운용되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도시.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발을 멈춘다.

그리고 문득 약속 장소인 한남 클럽 입구 앞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불현듯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힘들었던 날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오래전 일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을 보라.

예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바뀌었다.

이때 상념을 깨우는 음성이 들려왔다.

"청운!"

그 바람에 언뜻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네. 조안."

어느새 유정욱, 소은정, 김현태 역시 내게 다가왔다.

"너, 맞지?"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지는 소은정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내 입술만 바라보고 있는 4쌍의 눈동자.

"꽤 궁금한 표정들이네."

모두들 이미 확신하고 있는 눈빛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은 것 같았다.

"그래. 나 맞아."

내가 마치 별것 아니란 듯 망설임 없이 밝히자 오히려 놀란 표정이다.

특히 현태는 입을 떡 하고 벌렸는데 그 모습이 우스웠다.

"현태야, 그러다 파리 들어가겠다."

"하하하, 상관없어. 파리든 모기든 들어오라고 해."

현태는 친구의 농담에도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음을 지었다.

"와! 대박! 역시 맞구나."

"근데 왜 하필 미국이야?"

"그러게. 한국에서 받을 수 있었잖아?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마스크는 왜 했어?"

한남동 용병대는 마치 이 시간만 기다렸다는 듯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잠깐만! 너희들 여기 서서 물어볼 거야?"

"어? 어! 미안."

그제야 유정욱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대답했다.

"흐흐흐! 우리가 실수했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목도 좀 축이고."

"그래."

나는 친구들을 따라 클럽 내부로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 속에, 그렇다고 어둡다는 건 아니다. 중앙에는 적당한 크기의 무대가 있고 여자 가수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귀에 착 달라붙는 것이 꽤 실력 있는 가수인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오픈된 공간이라는 점이다.

애길 들어 보니 미팅 룸이 있다고 했는데 어디까지나 담소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자그만 공간이라 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김 실장, 세팅해 놨지?"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김 실장이라는 사람과 대화라는 폼이, 소은정이 한남 클럽의 대표인 것 같았다.

'흠! 강남이라 땅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역시 부자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김 실장의 안내로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사실 난 이쪽 방면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고 할 수 있지만 이곳이 일반적인 클럽과 다르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인테리어만 봐도 그렇다.

클럽 내부는 편안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클래식하게 꾸며졌다.

한쪽 벽면을 완전히 차지한 장식장엔 최고급 양주와 와인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보기만 해도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은정아, 여기 대표가 너야?"

"응."

"와~ 대단하네."

"뭐가 대단해? 대단한 건 너지. 사실 따지고 보면 난 대단할 게 없거든. 그저 운이 좋아 금수저로 태어났다고나 할까?"

"아이고 소은정이 대단할 게 없다니, 게이츠 형님이 울고 가겠다. 물론 초반에 아버지 덕을 봤지만 클럽을 만든 지 2년 만에 여기 건물 전체를 사 버렸잖아. 은정이 너, 사업 수단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

유정욱이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남 클럽은 가입비 1억에 가입 이후 기존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달 50만 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또한 돈만 있다고 가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존 회원 2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가입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상류층 인맥 형성과 정보 교류 때문이라고 한다.

"은정아, 좋은 정보 있으면 나도 투자 좀 하게 알려 주라."

"세상에 좋은 정보가 어디 있니? 그냥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파는 거지."

"크크크, 네 말이 맞네. 뉴스 보고 샀더니 맨날 손해만 봤어."

"크크크! 난 주식 안 해. 머리 아파."

"그래. 펀드 매니저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자! 자! 일단 우리 한남동 용병대 대장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한잔하자. 어서 잔부터 채워."

"오케이~."

"좋아."

분위기 메이커 소은정이 선창했다.

"한남동 용병대의 우정과 성공 그리고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첫 잔을 시작으로 우리는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사 귀환도 귀환이지만 친구들의 관심은 S등급에 관련된 것이 주를 이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제 썰 좀 풀어 봐."

"그래. 그래.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돌아오자마자 미국으로 간 거야?"

"아니, 그보다...."

나는 쏟아지는 질문 세례 속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제외하고 나름 성실히 답해 줬다. 황기택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알 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정체를 감췄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친구들은 더 이상 그것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제82화

82화 뭐가 이렇게 앵앵거려?

간만의 여유를 즐기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비울 때였다.

바텐더 쪽에 있던 김 실장이 다급한 모양새로 들어오더니 소은정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작은 소리였지만 가까이에 있었기에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마침 반대편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뒤의 말은 자세히 듣지를 못했는데 소은정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뭔가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순간 몇몇 사내가 테이블에 조용히 다가왔다.

"여기들 있었네?"

테이블에 난입한 자들은 모두 세 놈이었는데 그중에 한 놈이 허락도 없이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일순간에 냉각시켜 버렸다.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 그리고 이쪽은... 못 보던 얼굴이네."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방성욱, 이게 무슨 짓이야?"

"김현태, 넌 빠져. 난 지금 소은정에게 용건이 있거든."

"무슨 일인데?"

의외로 차분한 소은정의 목소리다.

"역시 사채놀이 하던 집안이라 그런지 눈 한 번 깜빡이지도 않네. 강심장이야, 강심장. 큭큭큭!"

이 한마디의 말에 실려 있는 어투만으로 예의는 물론 4가지마저 없어 보였다.

"사채꾼과 서자들의 조합이라 멋지군. 조안. 넌 왜 얘들이랑 어울리는 거야? 격에 맞게 놀지 그래."

"성욱아, 시비 걸지 말고 가라."

소은정이 여전히 차분함을 잃지 않고 말을 받았다.

"시비? 무슨 시비? 그나마 나나 되니까 너희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는 거야."

"뭐 인마!"

김현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는 불청객의 몰상식한 행태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안, 저 사람 누구야?"

"방성욱."

"방성욱?"

"우리 초등학교 동창. 한성일보 막내야."

한성일보면 대한민국 3대 언론사 중 하나로 종합 편성 TV와 신문사를 소유한 언론 재벌이다.

"얼마 전에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고."

"왜?"

"클럽 내부에서 약을 했거든."

이런 미친놈 같으니.

저런 놈이라면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당연했다.

"더러운 돈에 더러운 피라."

"조합이 죽이네. 큭큭!"

"끼리끼리 논다고 하더니, 과연 틀린 게 없어."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갔다.

한눈에 봐도 악역 1, 악역 2라고 얼굴에 적혀 있는 녀석들이 방성욱의 편을 들며 대화에 참여한 것이다.

"진필식, 박종남. 그 입 닥쳐라."

"아이고 무서워.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쳐 봐. 쳐 봐."

"오늘 깽값 좀 버나요. 헤헤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저 두 사람 역시 동창인 것 같은데....

입이 참 더럽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뭔가 사달이 일어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성욱아. 필식이, 종남이도 오랜만이다."

"어."

"그래. 오랜만이다, 조안."

분위기는 여전히 험악했지만 조안을 바라보는 눈빛이 사뭇 달랐다.

"그만하면 안 될까?"

"뭘?"

"보시다시피 친구가 있어서."

"흐응? 그래서?"

"내 친구가 불편한 것 같아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가 줬으면 좋겠어."

"...."

조안의 말에 방성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안, 네 부탁이면 들어주는 게 맞겠지. 좋아. 그럼 내 부탁도 하나 들어줘."

"뭔데?"

"한남 클럽 회원권. 은정이에게 말해서 나랑 필식이, 종남이 회원 자격 원상 복귀시켜 줘. 그럼 조용히 물러날게."

방성욱의 제안에 조안이 소은정을 바라보자 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럼 나도 못 가겠는데."

다음 순간 방성욱이 내 옆자리에 '홱' 하고 앉았다.

그러더니 곧장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빨더니,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후우~ 이봐요, 형씨. 내가 있어서 불편해요?"

!!

방성욱의 행동에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이 일순 크게 당황했다.

"지, 지금 뭐 하는...."

"저 새끼가...."

"헉!"

"미쳤어."

방성욱은 친구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아니,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듯 비릿한 미소를 얼굴 전체에 떠올렸다.

호사다마라고 하더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처맞기 싫으면 불편해도 그냥 참는.... 억!"

퍽!

방성욱은 테이블 두 개를 박살 내며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뭐가 이렇게 앵앵거려? 은정아, 클럽에 파리가 있나 봐."

한남동 용병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런 미친 새끼!"

"감히 우릴 건드려?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필식과 종남이라 그랬나?

난 저 두 사람을 가리키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은정아, 여기 두 마리가 더 있네."

손바닥을 이용해 필식의 목덜미를 가볍게 탁~

발가락을 이용해 다리를 높이 차올렸다가 종남의 등판 한가운데를 팍~

콰당!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녀석이 테이블에 코를 박아 버렸다.

탁자 위에 있던 술병이며 안주들이 쏟아지며 난장판이 되었지만 대신 코끝을 한 번 찡그리며 애써 미안함을 표했다.

그때 가장 먼저 날아가 버린 방성욱이 정신을 차렸는지 내 앞으로 달려와 독기에 찬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단도를 꺼내 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개새끼, 죽어...."

말을 하던 방성욱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어느 순간 단도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

녀석의 단검은 내 손에 잡혀 있었다.

그것도 맨손으로 말이다.

녀석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돌덩이에 박힌 토르의 망치처럼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게 도대체?"

놀란 표정과 함께 녀석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내, 내가 누군지...."

진부한 레퍼토리.

들을 이유가 없고 들어 줄 이유도 없다.

난 녀석이 말을 끝맺기 전에 왼손을 들어 먹을 잡았다.

"컥, 커억!"

힘을 정확하게 분배한 덕에 목뼈가 부러지지 않았지만 잡히는 순간 턱 하고 숨이 막혔을 것이다. 마치 거대한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조여 오는 느낌일 것이다.

"그만둬."

"당장 멈추지 못해!"

필식과 종남이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분노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양손에 맺힌 불덩이와 잔뜩 독이 오른 검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내 손에 잡혀 있는 녀석을 포함해 이놈들 또한 각성자, 그것도 수준급 헌터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날 만났다는 게 운이 없었다.

"그 손 놓으라니까, 새꺄!"

종남의 입에서 쌍말이 튀어나오며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 난 제운종을 펼쳤다.

녀석의 몸을 따라 어느 순간 바람처럼 부드럽게 회전하면서 녀석의 뒤를 선점한다.

동시에 오른손이 짧은 궤적을 그리며 녀석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날아가자 뼈마디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누, 누구...십니까?"

갑자기 웬 존댓말?

예상치 못한 실력에 당황한 걸까 아니면 친구가 맥없이 무너진 게 그만큼 충격이었나?

난 한결 조심스러워진 필식을 향해 한 번 웃어 주고는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주, 죽어라!"

그러자 필식이 불덩이를 날렸다.

내 손에 잡혀 있는 방성욱의 생사를 도외시하고 말이다.

'저런 것도 친구라고!'

친구가 잡혀 있는데 불덩이를 던진다. 그것도 두 개나.

최소한의 어떤 대책이라도 세운 후에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놈들은 X나게 맞아도 쌌다.

-펑, 펑!

"하, 하하, 하하...하...."

필식은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 덕에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호신강기에 무력화된 줄도 모르고 말이다.

휘익!

은은한 조명 아래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잔영(殘影)의 궤적을 그린다.

"으악!"

순간 극통(極痛)을 호소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필식의 몸이 날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내 손에 잡혀 있는 방성욱뿐이다.

"야, 자냐?"

"...."

마치 의식을 잃은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기감을 펼치자 놈의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면 속으려 해도 속을 수가 없다.

순간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우우웅!

난 기절한 척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기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은 마치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벌벌 떨더니 얼마 못 가 똥오줌을 싸지르고 말았다.

"어?"

"이, 이게 무슨 냄새지?"

"어머?"

"으악! 엄마야."

그 냄새가 어찌나 고약했는지 클럽 내부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어서 향수 가지고 와."

"여기도 뿌려."

난 이 정도면 충분한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해 손을 풀었다.

"...."

"...."

"...!"

"...."

고개를 돌리니 유정국, 조안, 김현태, 소은정이 동그랗게 변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벤트로 인해 S급 헌터의 강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한 것 같았다.

"청운이 호(號)라고?"

"응."

난 한남동 용병대에게 내 본명을 말해 줬다.

무엇보다 내 이름에 대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금수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정을 나눌 만한 가치가 있었다.

"내 이름은 최선우야."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대화를 통해 나 역시 친구들의 신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먼저 유정욱은 대한민국 10대 재벌에 속한 지엘 그룹 3세다. 하지만 서자라는 신분으로 어렸을 땐 방황을 좀 했다고 한다. 광전사 김현태 역시 유정욱과 마찬가지로 서자로 30대 그룹에 속한 SG 그룹 3세였고 말이다.

한남 클럽을 소유하고 있는 소은정은 보유하고 있는 현금만 따지면 대한민국에서 수위 안에 든다는 명동 사채왕의 딸이다.

한바탕의 활극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정치인?'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조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법과 정치를 주업으로 삼은 집안으로 군수, 법관, 장관, 국회의원 등을 배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

"응."

현직 대통령의 외손녀라는 말에 나 역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우야,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들어줄 수 있을까?"

"뭔데?"

"사실 너에 대해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았어.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잖아. 그래서 말인데 미국 가기 전에 시간이 되면 널 초대해도 될까?"

"청와대에?"

"응."

"물론 되지. 그렇지 않아도 한번 만나 뵈려고 했었어."

난 조안에게 한국에 오기 전, 주미 한국 대사관 유정해 대사와 만난 일을 얘기해 줬다.

"그랬구나. 그럼 내가 조만간 연락해도 될까?"

"그럼 나도 공식적인 만남보단 비공식적인 만남이 편할 것 같아."

"오케이. 그럼 접수. 내가 할아버지랑 얘기해서 날 잡을게."

"나도 오케이, 접수!"

참고로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방성욱과 그를 추종하는 똘마니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못된 녀석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악인은 아니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거든."

"유학을 가더니 거기서 친구를 잘못 사귄 거야. 아까 봤지? 필식이랑 종남이. 암튼 사정을 봐줘서 고마워. 성욱이가 이번 기회에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똥오줌을 지렸는데 못 차리면 그야말로 구제 불능이겠지."

"옛날처럼 다 같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래도 어렸을 땐 꽤 친했잖아."

"그건 그래."

우리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잔을 나눈 후,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제83화

83화 참교육

이른 아침,

오늘의 목적지는 서울 강서구 마곡에 위치한 킬리만자로 사모 펀드다.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탄탄한 외관부터 마음에 든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출발하면서 문자를 보낸 덕에 차강민 변호사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 변호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덕분에 아주 바쁘게 지냈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팍팍 밀어주신 덕에 아주 즐겁게 일했습니다. 대표님은 잘 지내셨는지요?"

"네. 저도 나름 바쁘게 지냈네요."

"한국엔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이 사흘째네요."

"사흘이면 시차 적응이...."

"뭐 거의 적응했습니다. 하하하."

"그러시군요. 그럼 사무실로 올라가실까요?"

"그러죠."

잠시 후,

차강민 변호사가 10장 내외로 잘 정리된 서류를 꺼냈다.

"여기, 대화 그룹 관련 자료입니다."

서류에는 대화 그룹과 관련된 각종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룹의 총매출과 영업이익을 시작으로 각각 흑자, 적자 계열사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길드에 대해서도 말이다.

"대화 그룹 지분 관계는 파악했습니까?"

"일단 해외 자본이 지주 회사 지분의 20%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황금산 회장 일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모두 합해 25%고 국민연금이 10%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계열사 간에 지분율이 복잡하게 엮여 있지만 그것 역시 어느 정도 윤곽을 보이고 있으니 이달 안으로 완벽히 파악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해외 자본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제가 해결할 테니 일단 대화 그룹 계열사 쪽에 신경을 써 주세요. 조사가 끝나는 즉시 은밀하게 매입을 시작하는 겁니다."

현재 대화 그룹의 주가 총액은 20조 원 규모다.

게이트가 등장하기 전과 비교해 약 세 배 정도 성장했다.

이처럼 게이트 시대에 적응한 기업들은 전과 비교해 그룹의 규모가 커졌는데 대표적인 예로 성삼 전자를 들 수 있다. 시가총액 300조 회사가 현재 1,500조를 넘었으니 말이다.

"대표님. 펀드 운용 자금은 어느 은행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망에 오른 은행들이 몇 개 있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펀드가 규모가 있는 만큼 일단 분산해서 예치할 생각인데, 왜요, 혹시 추천할 만한 곳이 있습니까?"

"딱히 그런 곳은 없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알아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대표님."

"참! NDA(Non-Disclosure Agreement : 기밀 유지 협약서)는 어떻게 됐나요? 직원들 전부 작성했나요?"

"네. 모두 작성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단 굵직한 일들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수고는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업무입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직원들과 상견례도 할 겸 회식이나 한번 하시죠. 어떻습니까?"

"소고기입니까?"

"물론이죠. 소고기는 사랑이니까요."

"그럼 오늘 소고기 양과 격하게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하하하! 당연하죠. 아주 열렬하게 사랑하십시오."

명색이 대표지만 그동안 미국에 있느라 직원들의 얼굴도 보지 못했기에 겸사겸사 회식을 잡았다.

"사장님, 여기 고기 좀 주세요."

"네~ 어떤 놈으로 드릴까요?"

"판마다 투 플러스로 쫙 깔아 주세요."

회사 근처에 위치한 정육 식당을 통째로 빌린 덕에 사장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 변호사님, 그동안 준비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자! 제 잔부터 한 잔 받으시죠."

"감사합니다, 대표님."

나는 좌중을 향해 말했다.

"고기는 마음껏, 대신 술은 원하는 분들에 한해서 원하는 만큼만 먹는 겁니다. 다들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대표님."

"잘 먹겠습니다, 대표님."

우리는 각자의 잔에 술을 채웠다.

몇몇 직원은 취향에 따라 음료수나 물을 채웠고.

나는 후창이 적힌 종이를 펼쳤다.

"그럼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나는 잔을 들어 크게 선창했다.

"응답하라."

"보너스~."

직원들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며 다 함께 외쳤다.

"우리는."

"하나~."

"끌어 주고."

"밀어주고~."

"스트레스."

"날려 버려~."

"오늘은."

"대표가 쏜다. 와아아~~~."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즐거운 술자리와 함께 직원들의 사적인 대화가 이어졌는데, 내 귓가를 자극하는 내용이 있었다.

"부장님, 이거 보셨어요?"

"그게 뭔데?"

"어제 낮에 올라온 영상인데요. 완전 대박이에요. 어제 XX 클럽에서...."

한남 클럽 내부에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중에 누군가 영상을 찍은 모양이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 영상을 확인했다.

-[XX 클럽 사건]

-[영상 속 남자의 정체는?]

-[재벌 3세 XXX]

-[한성일보]

-[한X 클X 사건 Full version 영상]

-[똥 테러 영상]

다행히 화면에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초상권 문제도 문제지만 재벌과 헌터가 연관되어 있으니 알아서 몸을 사린 것이 분명했다.

"우와! 대박이다."

"차장님, 이 정도면 엄청난 실력자 아니에요?"

"당연하지. 못해도 A급은 될 것 같네."

"A급이요?"

"응."

"이야. 대단하다. 아주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사람들은 영상을 보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나 역시 이 우연한 한바탕의 활극 덕분에 내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하게 변하였는지 3자의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전 이만 들어갈 테니 편하게들 마셔요. 여기, 2차 회식비입니다."

"우와아~~."

"감사합니다, 대표님."

한눈에 보기에도 두툼한 봉투를 꺼내자 직원들의 눈이 반달곰처럼 변했다.

좋은 상사라면 요렇게 1차에서 사라져 주는 것이 매너였다.

난 두둑한 금일봉을 건네며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이봐, 거기."

"...?"

주차장 앞,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이거, 너 맞지?"

남자가 들이민 것은 오늘 하루 장안의 화제가 된 한남 클럽의 영상이다.

그런데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아하니 원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좋은 말로 할 때 같이 가자."

"멀면 곤란한데?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내가 좀 피곤하거든."

"...뭐?"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손짓하자 헌터로 추정되는 다수의 사람들이 전후좌우에서 나타나 포위했다.

"우린 메이지 길드에서 왔다. 난 메이지 길드 넘버 3 바람의 검심 진형오고 말이야. 너도 헌터라면 바람의 검심이란 이름은 들어 봤겠지?"

솔직히 메이지 길드는 들어 봤지만 바람의 검심이란 이름은 처음이다.

"한성일보가 메이지 길드와 관련이 있었나?"

한성일보라는 단어가 나오자 녀석이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넌 건드려선 안 될 분을 건드렸어."

"그래서?"

"후후후! 선택지를 줄게. 난 관대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1번 지금 즉시 나와 함께 간다. 2번 여기서 뒈지게 맞고 개처럼 질질 끌려간다. 골라봐."

"음... 3번은 없어?"

친구에게 말하듯 편안하게 반문하자 녀석의 미간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이 새끼가 미쳤나. 마! 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뭐?"

"됐고! 난 3번 선택할래."

"3번은 없다니까! 아니, 그래, 그래. 좋아. 일단 들어나 보자. 3번이 뭔데?"

"3번! 형이 피곤해. 근데 오랜만에 한우를 먹어서 기분이 좋아. 그러니까 기회를 줄게. 그냥 가. 안 가면 니들 피똥 싼다."

"하, 하하... 하하하하. 이거 완전히 미친놈이었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얼굴을 심하게 구긴 진형오가 어떤 예고도 없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다.

호신강기에 그대로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

"실드? 너 마법사였나?"

"아닌데."

"그럼 스킬인가 보군. 예상외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실드 따위 내가 깨뜨려 주마. 바람의 검심!"

녀석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기 무섭게 바람이 일어났다.

-꽝!!

그러나 이번에도 호신강기에 막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 버렸다.

"어?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바보야. 내가 실드 아니라고 했잖아. 이건 호신강기라고."

"이 자식이 지금 무슨 헛소리야!"

진형오는 검을 들고 재차 공격을 펼쳤다.

깡!

한데 진형오의 검이 팔의 피부와 부딪쳤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검날이 피부를 파고들지 못하고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호, 호신강기?"

나는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왜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을까?"

메이지 길드원의 수는 30명.

고작 일류와 이류가 어지럽게 섞인 무리다.

난 한 마리 야수가 되어 놈들에게 뛰어들었다.

무슨 바람인지 원초적 격투, 무식한 전투, 호쾌한 박투를 즐기고 싶었다.

"마, 말도 안 돼. 대체 뭐 하는 놈인데 칼이 박히지가 않는 거지?"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부르짖은 그의 고함은 전투 소리에 묻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움직임에 깃든 파괴적인 힘.

엉성하게 보이는데도 막상 상대하려 하면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양손이 휘적거리며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막상 정신을 차려 보면 쓰러져 있다.

진형오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실력으로 날 상대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호신강기는 초절정 고수, 즉 트리플 A급 헌터가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절예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킬 형태로 얻은 기술이 아니라면 말이다.

"거기까지."

"...!"

진형오는 등 뒤에서 들려온 내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두 손을 올리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녀석은 처음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내 기세에 눌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누, 누구...신가요?"

"풋! 갑자기 웬 존댓말?"

"그게...요. 그러니까...요."

"됐고! 아직도 내가 널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

"아, 아닙니다. 그냥 가시면 됩니다."

양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고성을 질렀다.

"정말? 그냥 가도 돼?"

"네. 그럼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에이~ 그럼 또 찾아올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냥 가? 안 그래?"

"그, 그거는 그러니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적당한 대답을 찾는 소리가 눈에 선하다.

"됐고! 가자."

"네?"

"가자고."

"어, 어디를...요?"

"방성욱이 있는 곳."

"...!!"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고 주위가 어둠에 휩싸였다.

경기도 김포에 위치한 인적이 뜸한 창고였고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진형오의 수혈을 짚어 잠이 들게 만들었다.

"형오야, 좀 자라. 몇 시간 후면 깰 거다."

처음에 봤을 땐 몰랐었다.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생각이 났다.

서로가 서로를 기억할 만큼 접점이 있지 않았지만, 녀석은 분명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운이 좋았다, 넌."

난 깊은 잠에 빠진 진형오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녀석을 통해 듣고 싶은 정보를 다 들었다.

자고로 친구를 잘 사귀라 했는데!!

방성욱의 문제는 그의 옆에서 거머리처럼 빌붙어 기생하고 있는 필식과 종남이다.

술과 여자 그리고 마약.

방탕한 생활을 비롯해 이번 납치 모의 역시 두 녀석의 꼬드김이었다.

'저번엔 좀 약했나?'

미안하지만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사양하겠다.

어중간한 교육은 이렇게 헛된 복수심을 키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는 고개를 들 수 없도록 영혼에 각인될 수 있을 정도로 공포를 심어 줘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난 차에서 내려 유유히 창고로 들어갔다.

제84화

84화 누가 너의 친구인가?

드르르륵!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홍콩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럼통이 있고 불을 쬐며 몰려 있다.

'찾았다.'

드럼통 바로 옆 의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는 3인방이 보였다.

방성욱과 그의 친구 필식과 종남이다.

세 사람 모두 포션을 사용해 치료를 받았는지 전치 20주 이상의 부상이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보였다.

그때 나를 향한 놈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야?"

"왜 너 혼자 와? 다른 사람은?"

병신 같은 놈들이 나를 동료인 줄 안다.

나는 태연한 척 마치 산보하듯 놈들을 향해 걸어갔다.

"저, 저 새끼는?!!"

놈들이 날 알아본 모양이다.

"놈이다."

"저 새끼야. 저 새끼 잡아 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놈들이 몰려온다.

나 역시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진기를 끌어 올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콰앙!

먼저 주먹이 날아가기 시작했고 다수의 인영이 거꾸러지는 장관을 연출해 냈다.

"태극권 흡(吸), 부드러운 바람은 회오리가 되어."

"어, 어어?!!"

"뭐야? 내 몸이 끌려가고 있어!!"

단언컨대 놈들은 오늘 죽음의 사신을 영접할 것이다.

"태극권 탄(彈), 하나의 탄환처럼 날아가."

-퍼퍼퍽.

"태극권 파(破), 내 앞을 가로막은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태극권의 강렬한 권격이 연달아 펼쳐졌다.

놈들이 반격할 시간도 도망칠 여유도 없이, 마치 수수깡 쓰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커억."

"크아악!"

"악!"

이것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었다.

인간이 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 죽이듯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놈들 중 태반이 쓰러졌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불구하고 반격을 가한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후방에 있던 3인방이다.

"순간 이동!"

"배때기를 쑤셔 주마. 구룡검세!!"

"기가 트레이닝!"

-우루루광!

-서걱서걱!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됐다. 성공했어. 하하...하?!!"

"...어?"

"...!!"

방성욱은 항거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동시에 필식과 종남 역시 날 무슨 괴물처럼 쳐다봤다.

자신들의 공격에 적중되었으면 피격 즉시 살과 뼈가 썰리고 장기가 타 버려야 정상인데 그 흔한 생채기도 없이 태연하게 미소까지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방성욱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녀석의 생존 본능이 도망치라고 시켰음이라.

완벽한 소모전의 양상에서 팽팽하게 진행되던 전투가 갑자기 무너질 때가 있다.

장판교의 장비가 그랬고 상산의 조자룡이 그러했다.

항거할 수 없는 힘에 동요해 아군의 사기가 일시에 무너지는 것이다.

방성욱, 필식, 종남이 서로 약속한 듯 일시에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놈들을 가만히 도망치게 내버려 둘 리 없다.

난 아공간에서 무극 대검을 꺼내 들고 천지 사방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슈슈슈슈슈슈슛!!

무극 대검에서 발생한 다량의 검기가 파죽지세로 날아가 놈들을 덮쳤다.

살이 터지고 피부를 가른다.

종남은 운이 없었는지 팔목까지 잘려 나갔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보기에도 아찔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으악!"

처음 당해 보는 고통에는 면역이 없다.

"악!!"

근육이 잘리고 뼈가 뒤틀리는 고통은 절정에 이른 고수라도 견딜 수 없었다.

방성욱을 비롯해 종남과 필식의 다리 밑으로 피가 섞인 소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뚜두뚝! 뚝!

광대뼈가 내려앉고 코가 뭉개지고 두개골이 빠개지듯 압축되며 수축과 팽창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제, 제발... 목숨만."

"끄아...악. 살...려... 살려 줘."

"제...발 우리가... 악! 잘...못했어. 아악!"

이제야 상황 판단이 되는지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말이 짧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살...려... 주...세요."

순간 존댓말로 바뀌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어중간하지 않게 확실히 교육을 시켜 줘야겠다.

분근착골이 진행되는 가운데 무형의 기운을 이용해 녀석들의 심령을 압박했다.

세 놈 모두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게지더니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인다.

나는 죽음이라는 마지노선에 이르면 그제야 숨통을 슬며시 열어 줬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이제는 비명조차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그저 온몸을 비틀며 꿈틀거릴 뿐이다.

사실 한남동 용병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당장 목을 따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말이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못된 녀석이야. 하지만 악인은 아니야. 삐뚤어진 심성이 문제지. 원래는 착한 애였어.

악인은 아니라는 안타까운 말 한마디가 녀석을 살렸다.

"좋아. 살려 주지."

이 정도면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분근착골(分筋錯骨)을 멈추자 녀석들의 눈빛에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이 피어났다.

"근데 셋 다 살려 줄 순 없어. 내가 병신도 아니고 말이야. 내 목숨을 노렸는데 적어도 한 놈은 본보기로 보내 줘야지. 안 그래?"

"...."

"...."

"...."

어느 누구도 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심기를 건드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민주주의 하면 뭐가 떠올라? 모르겠어? 다수결이잖아. 들어 봐. 방법은 간단해. 내가 셋을 세면 너희들은 누굴 죽일지 한 명을 선택하는 거야. 간단하지?"

녀석들의 얼굴에 낭패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본인이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자! 시작한다. 하나, 둘, 셋!"

!!

결과가 나왔다.

난 피식 웃었다. 어쩜 이렇게 내가 예상한 것이 100% 맞았을까!

"필식아, 종남아. 니들이 어떻게...."

필식과 종남의 손가락은 정확히 방성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가지 의외인 것은 방성욱의 선택이다.

녀석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킨 것일까?

어쨌든 저 모습을 보니 원래부터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야."

"...네."

"쟤들이 네 친구 맞아?"

"...."

"솔직히 말해 봐. 너 친구 없지?"

"친...구...라면 많...이 있...습니...다."

"큭! 널 호구로 보는 친구들?"

"...!!"

난 종남과 필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니들은 왜 쟤를 찍었냐?"

"...."

"...."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래. 왜 대답하기 싫어?"

내가 '씩' 하고 미소를 짓자 두 녀석이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쟤는 그냥 말만 친구지 진짜 친구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 새끼, 그냥 돈 많은 쓰레기예요."

필식과 종남은 방성욱에 대해 자질구레한 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방성욱이 얼마나 개차반이며 쓰레기고 사람들을 어떻게 무시했는지 듣기 민망할 정도로 마음껏 풀어놨다.

"어,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툭, 툭!

수혈을 누르자 거짓말처럼 잠이 들어 쓰러졌다.

난 필식과 종남을 쓱 훑어본 다음 방성욱에게 말했다.

"쟤들이 니 친구냐? 저게 친구야? 널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만 친구라면 적어도 함께 울어 주고 손은 잡아 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녀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고 방성욱은 한동안 말문이 막힌 모습을 보였다.

"정욱이, 현태, 은정이 그리고 조안이 그러더라. 너 어렸을 땐 안 그랬다고. 삐뚤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악인은 아니라고 말이야. 그 말이 널 살린 줄 알아."

"...."

난 출구를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 속에서 한 남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김포에 위치한 창고로 몇 대의 차량이 도착했다.

"헉! 이, 이게 대체?"

이중성 부장이 창고에 들어갔을 때 창고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방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고 그중에는 죽은 시체가 즐비했기 때문이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

"이봐! 도련님을 본가로 모셔. 부상자는 서울 양지 병원으로 옮기고."

"넵, 부장님."

부랴부랴 사태를 정리한 이중성 부장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전 걸려 온 도련님의 전화를 떠올렸다.

-저 좀 데리러 와 주실 수 있으세요?

"...!!"

평소와 다른 말투였다.

존댓말은 물론이고 그렇게 풀이 죽은 목소리는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어디...십니까?"

-김...포 공장...이요.

"다치셨습니까?"

-...네.

"지금 즉시 가겠습니다."

이중성 부장은 직원들을 호출했다.

* * *

"악! 성욱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새벽녘에 울려 퍼진 여인의 고성에 성북동이 뒤집어졌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이 엉망진창이 돼서 돌아온 것이다.

이중성 부장의 보고에 따르면 김포 창고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성욱아, 누가 그런 거냐?"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던 방정남 회장의 묵직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왜 말을 못 해? 혹시 말할 수 없는 일이냐?"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아버지."

"허어!"

방성욱의 평소 모습을 잘 알고 있던 방정남 회장은 아들의 침묵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 박미경 여사가 나섰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러니! 그리고 만약 잘못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이건 아니지. 누가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 이 부장님."

"네, 사모님."

"부장님은 알고 있죠? 말해 보세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그게...."

이중성 부장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방정남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한 게 있으면 말해 보게."

방정남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중성 부장은 한남 클럽 영상을 시작으로 창고에서 있었던 일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런! 개XX를 봤나. 당장 영상부터 내리라고 해."

"네. 이미 조치했습니다. 확인하는 즉시 바로바로 내리고 있습니다."

"이 부장님, 애들 풀어서 당장 저 새끼 잡아 와요."

"죄송합니다만 아직 저자에 대해서 정보가 없습니다."

"뭐라고요?"

"도련님께서 말씀이 없으셔서 말입니다."

이 부장의 대답에 박미경 여사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성욱아, 엄마에게 말해 보렴. 대체 누가 이런 거니?"

"...."

박미경 여사는 예상한 행동 패턴을 보였는데 의외인 것은 방정남 회장의 태도였다. 그는 아까부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얼마 전 한남 클럽에서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아들.

아들의 성격이라면 영상 속 남자를 수배해 찾아냈을 것이다.

'김포로 데리고 갔겠지.'

그런데 메이지 길드 소속 헌터 수십 명을 박살 냈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사실이라면 영상 속 남자는 굉장한 실력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최상급 헌터일지 모른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문득 만사불여튼튼이란 글귀가 떠올랐다.

이것은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마다 그를 살린 명언이었다.

방정남 회장이 조용히 수화기를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수석님."

-방 회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제85화

85화 인과응보

평생 힘을 갖고 산 강한 자는 힘을 존중할 줄 모르지.

약한 사람만이 힘의 가치를 아네. -아브라함 어스킨

* * *

천마산으로 향하는 길.

친구란 무엇일까.

울음을 터트린 방성욱으로 인해 마음이 심란했다.

안선환.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미쳐 버렸을까?

비밀 가옥에 들어가자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 모습을 확인한 선환의 눈이 급격히 커진다.

눈동자 속에 언뜻 비치는 노란 광망,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사라지고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잘 있었어?"

"...으... 으...."

"아차! 말을 못하지? 미안."

녀석의 혓바닥을 뿌리까지 뽑아 버렸다는 걸 깜빡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지만 이미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마당이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웃으며 죽일 수 있다.

저 녀석을 봐라.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신음을 내뱉으면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초라하다 못해 비참할 정도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모두 자업자득인 것을.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친구를 배신했고 친구의 가족을 위험에 빠뜨렸으며 살해 행위에 가담했다.

그 결과 성공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과실을 얻었지만 불행히도 오래가지 못했다.

"뭐야, 지금 후회하고 있는 거야?"

"으... 으으...."

날 바라보고 있는 선환의 눈가에 무언가 회한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너도 알잖아."

"으... 으."

선환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 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온몸이 뒤틀려 버린 탓에 삐뚤삐뚤하게 적힌 글자가 땅바닥에 적혀 있었다.

선우야. 미안하다.

내가 죽일 놈이야.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옛 정을 봐서라도 내가 지은 죄는 부디 나 혼자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줘.

우리 가족은....

....

....

....

...대여 금고 비밀번호 A***678***.

이게 내가 알고 있는 것 전부야.

정말 미안했다.

나는 심유한 눈빛으로 옛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게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녀석의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나 역시 모종의 감정에 젖어 들고 말았다. 일종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랄까!

이게 다 빌어먹을 방성욱 때문이다.

하지만 용서해 주기엔 그의 죄가 너무 컸다.

"그래. 선환아. 이쯤 하면 됐겠지. 네 말대로 한때나마 우리가 친구였으니 약속하마. 가족은 건드리지 않아."

"...."

처음이었다.

녀석이 비밀 가옥에 잡혀 온 후, 내게 미소를 보인 것은.

나는 무극 대검을 빼어 들었고 녀석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음 순간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일자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고통 없이 한순간에 보내 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Fly me to the moon(날 달로 데려다줘요).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별들 사이에서 놀게 해 줘요).

Let me see what spring is like(그 봄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해 줘요).

On Jupiter and Mars(목성과 화성에서의 봄 말이에요).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

사연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조안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즉 대통령과의 비공식적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 사람을 대동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래, 괜찮아.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다음 날 정오.

청와대에 도착하자 간단한 몸수색을 받고 무슨 비서라는 사람이 안내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고급스러운 회의실에 선객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최선우 씨. 전 유현상입니다. 비서실을 맡고 있죠. 이쪽은 현진건 민정수석입니다."

"반갑습니다. 민정수석 현진건입니다."

대통령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이다.

그들은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최선우입니다."

"자네가 그 친구인가? 생각보다 어린 것 같은데? 암튼 난 이지철 실장이네. 보시다시피 경호실을 담당하고 있지."

"이지철 실장님! 대통령님께서 초대하신 분입니다. 더욱이 초면인데 예의를 갖추시죠."

"에이, 조카뻘 나인데 뭘 그러십니까? 안 그래요, 최선우 씨?"

문제는 삐딱한 표정의 경호실장이다.

대통령의 경호를 책임지는 위치인 만큼 느껴지는 기세가 제법 대단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미국의 맥더프 대통령도 공적인 자리라면 내게 존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동하다니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걸까?

이때 내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했다.

"선우야."

난 그녀에게 눈인사를 보내는 동시에 대통령께 허리를 숙였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자 사적으로 친구의 외할아버지인 만큼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최선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조명환입니다. 우리 손녀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조안 친구입니다."

"허허, 아닙니다. 전 이렇게 말하는 게 편합니다."

"아니... 그래도...."

"재계에서는 돈이 곧 서열입니다. 돈이 많으면 나이와 상관없이 대우를 받죠. 군대는 어떻습니까? 직급이 곧 서열이지 않습니까.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바로 헌터의 시대입니다. 선우 군의 위치는 미국 대통령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는 제가 단지 손녀의 친구라는 이유로 편하게 대할 순 없습니다. 훗날 제가 공직에서 물러나면 그땐 모르겠네요. 허허허."

"휴우,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아직 식사 전이죠?"

"네."

"그럼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조안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문제는 경호실을 맡은 이지철 실장이다.

가끔씩 틱틱거리며 내 신경을 조금씩 긁어 댔는데 그 이유가 내 실력을 확인하지 못해 그렇다는 걸 눈치챘다.

"이지철 실장님."

"네. 최선우 씨."

"제 실력이 궁금하신가요?"

대놓고 묻자 순간 이지철 실장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그럼요."

"듣자 하니 최선우 씨가 미국에 등장한 S급 헌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이지철 실장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최선우,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시절 각성. 서울 국립 헌터 학교 입학. 헌터 학교 재학 중에 잠시 두각을 나타냈으나 하위권 성적으로 졸업. 그 후 F급 헌터로 활동하다 실종되었음. 몇 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미국에 등장한 S급 헌터 청운이라고 함. 이 같은 사실이 진실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

조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조안, 나는 네가 저 녀석의 거짓말에 속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거야. 어쩌면 정체를 숨긴 빌런(Villain)일 수도 있고 말이야! 이봐, 최선우 군. 내 말이 틀렸나?"

"실장님! 그만하세요. 제가 부탁해서 초대한 거예요."

"...."

후우~

뭐 이해는 간다.

고작 F급 헌터였던 20대 청년이 실종된 지 몇 년 만에 S급 헌터가 되어 나타났다니 어느 누구라도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쉽게 믿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대해 놓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는 거다.

"이 실장,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자 조명환 대통령이 나섰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을 보아하니 그 역시 당황한 눈빛이 역력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만약 이지철 실장이 조명환 대통령과 사전에 모의했다면 꽤 실망했을 것 같았다.

"대통령님, 전 어디까지나 대통령님의 안위와 안전을 위해...."

툭!

더 이상 불필요한 의심은 사양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통짜 식탁 위로 보란 듯이 헌터증을 던졌다.

"보세요."

"네?"

"확인하시라고요."

"...!!"

"...!!"

다음 순간 난 이지철 실장을 향해,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게 기운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왜 저번에 한번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겐 저마다의 기도와 기세가 있는데 거기에 잘못 휘말리면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간다고 말이다.

-우우우웅!

마스터의 기운이 한 자루의 서늘한 비수가 되어 날아가자 그래도 경호실장이라고 얼추 대응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말이다!

"윽!"

그럼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나는 기운을 조절해 가며 단계별로 증가시켰다.

일류에서 절정 그리고 초절정에 이르자 이지철 실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동시에 팔과 목, 얼굴에 이르기까지 심줄이란 심줄은 죄다 튀어나오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올랐다.

"으...윽... 으으윽...."

여기서 한 스푼 쯤 진기를 더한다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해 펑 하고 터질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절정과 초절정 사이 그 어디쯤이겠군.

하긴 대통령을 지근에서 경호하는 책임자라면 저 정도 실력은 돼야겠지.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한 교육이 됐겠다 싶어 기운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뒤끝 작렬이라 하겠지만 내 맘이다.

"좀 더 확실하게 확인시켜 드리죠."

난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결어 간략하게 이 상황에 대해 말했다.

내 친구가 조명환 대통령의 손녀다.

초대를 받고 청와대에 왔다.

그런데 이지철 경호실장이 날 거짓말쟁이 취급을 한다.

내가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쁘다.

다짜고짜 이지철 실장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이지철 실장입니까?

"네. 누, 누구...십니까?"

-나, 주한 미국 앤더슨 대사요.

"애, 앤더슨 대사님."

-야, 이... 개XX야. &*&&#$&&**@@**!!

앤더슨 대사의 욕설 섞인 고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을 보아하니 속이 다 시원하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이지철 실장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전화기를 대통령께 넘겼다.

"저... 대통령님, 앤더슨 대사님이 바꿔 달라고 하십니다."

"이리 주세요. 조명환입니다, 앤더슨 대사님."

-존경하는 대통령님, 마스터 청운은 한국인이지만 동시에 미국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실수를....

"네... 네.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친구의 할아버지를 떠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과하는 모습이 썩 유쾌하지 않다.

난 조명환 대통령에게 양해의 눈빛을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앤더슨 대사님, 접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이번 주 안에 급한 볼일이 끝날 것 같습니다. 그때 미국으로 돌아가야죠. 미국에서 할 일도 있고요. 네, 좋지요. 가기 전에 한번 봐요."

"...."

"...."

"...."

"...."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지철 실장이 내게 용서를 구했다.

살려 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이며 말이다.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은 모습에 나도 남자답게 말했다.

"실장님의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하하하!"

이때 조명환 대통령이 말했다.

"유 실장, 현 수석."

"네, 대통령님."

"이 실장과 함께 나가 있게. 마스터 청운과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이야."

"...!"

세 사람은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제86화

86화 늙은 생강이 맵다

방정남 회장의 성북동 자택.

어디선가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때아닌 고성이 집 안 전체를 깨웠다.

짝!

"멍청한 놈. 내가 누차 말했잖아. 사람을 제대로 보라고 말이야. 공부 따윈 못해도 돼. 좋은 대학 나오면 뭐 하려고? 네가 검사를 할 거야? 아니면 의사를 할 거야? 걔들은 돈만 주면 다 쓸 수 있어. 우리는 고용하는 사람이지, 고용당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데 넌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왜 네가 나선 거야?"

"여보. 우리 성욱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요? 다친 게 안 보여요?"

"당신은 가만히 있어!"

"...!"

박미경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누굴 건드렸다고 저 양반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건가?

이미 남편 몰래 본가의 도움을 받아 알아본 박미경 여사다.

정황으로 보면 상급 헌터와 시비가 붙은 게 확실한데 막말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의 성삼 그룹이나 대통령의 자식을 건드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100번 양보해서 그들과 시비가 붙었다 해도 결과를 보면 내 새끼가 처맞고 온 것이다.

"여보, 대체 그놈이 누군데 그래요? 그냥 사과만 받을 생각이었다고 하잖아요."

"그럼 직접 만나면 되지, 왜 창고로 불러?"

"아니... 그건 사람들 눈도 있고...."

"당신! 그 입 다물지 못해? 가만히 좀 있으라고!"

"...!!"

방정남 회장의 시선이 방성욱에게 향했다.

"말해 봐. 왜 나선 거야? 네가 뭔데? 너 따위가 뭔데?"

"여보! 당신 대체 왜 그래요? 성욱이 얼굴 안 보여요? 우리 애가 맞았다고요. 성욱이가 피해자예요."

짜악!

"악! 여... 여...보."

"그 입 다물라 했지! 왜 자꾸 끼어들어? 당신이 자꾸 이러니까 애가 저 모양이잖아."

"왜 때려요! 내가 뭘 어쨌다고요!"

박미경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울부짖자 방정남 회장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외쳤다.

"S급 헌터!"

"네?"

"성욱일 저렇게 만든 자가 S급 헌터라고!"

폭탄과 같은 발언에 박미경 여사는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성욱이가 그럼 정주휘 헌터라도 건드렸다는 말이에요?"

"마스터 청운."

"마...스터 청운?"

"그래. 당신도 뉴스에서 봤잖아. 얼마 전 미국에 새롭게 등장한 한국인 마스터."

방정남의 말에 박미경 여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주 일가답게 그녀 역시 S급 헌터가 가지고 있는 위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정남 회장이 다시 한번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현 수석이 내게 거짓말이라도 했을까? 그자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 가족은 물론 회사 전체가 날아갈 수 있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뭘 어떻게 해? 석고대죄를 해서라도 용서를 구해야지."

한 가지 다행이라면 S급 헌터를 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구 비서."

"네, 회장님."

"빠른 시일 내로 지엘, SG 그리고 명동과 약속 좀 잡아 주게."

"유 회장님, 김 회장님 그리고 소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회장님."

현 수석이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한남 클럽 영상을 비롯해 돌아가는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방정남 회장은 마스터 청운이 유정욱, 김현태, 소은정, 조안과 친분이 있다고 확신했다. 늙은 생강이 맵다는 말처럼 그는 이와 같은 사실에 주목했다.

* * *

이와 같은 시각,

청와대에서 나와 경복궁을 지나고 있을 무렵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최선우 대표님 번호가 맞나요?

"네. 제가 최선우입니다만 어디십니까?"

-네! 저는 미래 은행 발산동 지점장 강태길입니다. 차강민 변호사의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차 변호사라,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네. 다름이 아니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킬리만자로 사모 펀드의 운용 자금의 일부를 미래 은행 발산동 지점에 예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때나 좋으니 시간이 되실 때, 저희 지점에 한번 방문해 주십사 해서 이렇게 연락을 드렸습니다.

"차강민 변호사와 무슨 관계인가요?"

-네.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음! 사실 미래 은행이라면 강남이나 여의도 쪽에 계좌를 개설하려고 했었습니다."

-아! ...네에... 그러셨군요.

순간 분위기가 차악 하며 가라앉는 느낌이다.

"하지만 차 변호사님 친구분이면 한번 방문해 봐야겠네요. 지금 어떠세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네. 넉넉히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것 같은데.... 아차차!"

순간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착각했다.

은행은 당연히 영업을 하지 않는다.

-가능합니다.

"네?"

-대표님께서 오신다고 하시면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시간 후쯤 뵙죠."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럼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일요일에 은행을 오픈하겠다니 어쩌면 이것이 자본주의 세상을 움직이는 돈의 위력일 것이다.

그로부터 1시간 후,

나는 미래 은행 발산동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 날씨 한번 좋네."

굳게 닫혀 있는 은행 앞에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서성이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혹시 최선우 대표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전 미래 은행 발산동 지점 정운찬 대리입니다."

"그러시군요.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합니다. 휴일인데 쉬지도 못하고."

"아닙니다. 고객님이 언제나 최우선이죠. 이쪽으로 가시죠. 지점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럽시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강태길 지점장이 내게 필요한 각종 서류를 완벽하게 구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준비성이 뛰어나시네요."

이 정도 준비성이라면 차 변호사를 봐서라도 일부 자금을 예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내일 이 금액을 발산동 지점에 예치하도록 하죠."

"가, 감사합니다, 대표님."

메모지에 1조를 적어 내밀자 지점장이 크게 놀라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번 거래로 인해 실적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생겼으니 솟아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참고로 1차 자금은 미래 은행 발산동 지점이지만 앞으로 투입될 2차, 3차, 4차 금액은 민국 은행, 최고 은행, 하니 은행에 분산해서 넣을 계획이다.

이는 곧 대화 그룹의 자금줄을 막아 버릴 카드가 될 것이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근처에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도 제가 약속 장소까지 모시고 싶습니다."

"아니에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휴일인데 지점장님도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표님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네."

마침 길가에 서 있는 택시가 눈에 보였다.

나는 재빨리 택시에 탑승해 목적지를 밝혔다.

"한남동 오거리요."

목적지를 밝히자 택시가 순식간에 달려 나간다.

내가 향한 곳은 미국 정부에서 제공한 집으로 미 정부 소속 고위 관료가 살던 집이라 했는데 몇 달 전 임기가 끝나 비어 있다고 했다.

"멋...지군."

입구부터 대리석으로 포장된 것이 마치 별천지에 온 느낌이다.

하긴 이 동네 집값이 평균 70~80억이라고 하니 이 정도 인테리어가 당연할 것이다. 듣기로 이곳엔 원래 4년제 종합대학이 있었는데 2000년쯤 서울 외곽으로 학교 전체가 이전하게 되면서 고급 주택 단지가 들어섰다고 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집 보러 왔습니다."

계약서를 보여 주자 관리인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106동에 들어오신 분이군요."

관리인은 내가 원한다면 단지 내부를 직접 설명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했다.

대신 간략하게 그려진 브로슈어(Brochure)를 받았다.

"이쪽이 주차장인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거주할 곳이라 찬찬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그 순간 거친 황소가 선명하게 박힌 고급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어라, 그런데 저 여인은 레드핑크의 은수가 아닌가!

복장을 보아하니 운동을 다녀온 것 같은데 전에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겁나 예쁘다. 더욱이 화장도 안 한 얼굴인 것 같은데 저런 미모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머! 당신은?"

그녀 역시 날 알아봤는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

난 일부러 그녀를 모른 척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 기억 안 나요? 얼마 전에 뉴욕에서 봤잖아요."

"아!"

난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내 마카롱 뺏어 먹은 여자!"

"앜!"

미치겠다.

귀여워서. 하하하.

"그런 기억은 빨리 삭제해 주세요."

"그건 뭐, 하는 거 봐서."

지금도 봐라.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는데, 심쿵할 정도로 충격을 준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혹시 이사 와요?"

손에 들린 브로슈어를 봤는지 이사를 오냐고 묻는다.

"응."

"언제요?"

"오늘."

"몇 동이에요?"

"106동."

"어라! 내가 105동인데 바로 옆으로 오셨네요."

"그러네."

"근데요. 왜 자꾸 반말하세요?"

단답형의 짧은 대답에 이어 계속된 반말에 또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내가 오빠니까."

"오...빠요?"

"왜 기억 안 나? 마카롱...."

"앜!"

대경실색한 그녀가 양손을 활짝 펴며 내 입을 막았다.

"그 기억은 이제 그만 잊어 달라고요."

아이고! 저 얼굴 좀 봐라.

왜 이렇게 놀리는 게 재밌지?

여담이지만 화내는 표정도 엄청 예뻤다.

"하하하. 알았어, 그렇게 원한다면 잊어 줄게."

그녀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반말이 불편하면 너도 말 놔. 대신 야자는 하지 말고. 오케이?"

"음. 오케이."

"그래."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안면이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안면일 뿐이다.

즉 우리는 아직까지 깊이가 있거나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막말로....

-어디서 비린내 나지 않아?

-비린내요?

-오! 이런! 여기 인어공주가 있었네.

-(철썩!)

이런 식의 썩은 멘트를 건네는 건 안 하느니 못했다.

어차피 이웃이 된 이상 부딪치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으니 오늘은 시크하게 돌아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봐."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심히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가 날 붙잡았다.

"오빠, 잠깐만."

고개를 돌리니 뭔가 심통이 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왜?"

"불공평한 것 같아서."

"뭐가?"

"오빠는 내 이름이 뭔지 내 직업이 뭔지 다 알고 있잖아. 그런데 난 오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그래서?"

"이보세요. 우리 이제부터 이웃사촌이거든요. 말도 놨고요."

난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주시하다가 마침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은수의 얼굴에 이채가 떠오르기 무섭게 반문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앜!"

큭큭큭! 또 방방 뛴다.

개꿀맛! 아무래도 이거 중독될 것 같다.

"그러니까 나도 좀 알면 안 되냐고!"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답했다.

"안 될 건 없지. 우선 내 이름은 최선우. 좀 전에 밝혔듯이 106동으로 이사 왔어. 그리고 직업은 설명하기가 좀 복잡한데 일단 뭐 조그만 사모 펀드 하나 운용하고 있어. 전에 얘기했었지? 내 여동생이 네 팬이라고."

은근슬쩍 여동생 핑계를 대며 그린 라이트를 던져 보았다.

"이웃사촌에 말도 놨는데, 여동생 소개도 시켜 줄 겸, 겸사겸사 조만간 집들이라도 한번 해야겠네."

집들이란 말이 나오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린 것 같다.

"집들이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어라!

내가 착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진도를 빨리 나갔나?

일단 한 걸음 후퇴하기로.

"그래? 알았어. 그럼 집들이는 없는 걸로...."

"내일."

"엉?"

"오늘 오후엔 음악 방송이 있고 저녁엔 예능 녹화가 있어서 안 돼. 그러니까 내일 저녁이 좋을 것 같아."

"어? 어. 그, 그래."

"그럼 내일 봐. 오! 빠!"

순간 은수와 눈이 딱 하고 마주쳤는데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을 뒤로하고 105동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그린 라이트 맞지?!

제87화

87화 클럽에서 생긴 일

[본격적으로 게이트 시대가 찾아왔다.

이제는 인간과 게이트가 공존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J.K 드와이트

* * *

한남동 집을 살펴본 후,

호텔로 돌아왔더니 침실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시차 적응 문제로 고생하던 여동생님께서 마침내 일어나신 모양이다.

"이제 일어났냐?"

"오빠야?"

"그래, 이 똥강아지야."

"뭐래, 아까 일어났거든!"

하늘 같은 오라비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손을 들어 보인다.

"이봐요, 사랑하는 동생님아! 거짓말을 하려면 눈곱부터 좀 떼고 말씀하시죠."

"...붸!"

할 말이 없었는지 혓바닥을 쭉 내밀며 나가라 손짓한다.

지금 중요한 통화를 하고 있다고 눈치를 주면서 말이다.

"눼. 눼. 눼. 알겠습니다. 오빠님은 이만 물러납죠."

얼마나 중요한 통화길래? 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진기를 청각에 집중시켰다.

-야! 이 썩을 X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낯익은 목소리.

저 목소리는 여동생의 절친 4인방 중에 하나인 영미다.

"야~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썩을 X이 뭐냐."

-이런 미친X. 넌 아주 #%#%&*%%....

영미는 무려 두 달 만에 연락이 된 여동생에게 찰진 욕설을 날렸고 정확히 2분 24초가 지난 후에야 서로를 향한 욕설이 멈춰졌다.

하아, 훗날 쟤들을 누가 데리고 갈지, 심히 안타까웠다.

-그래서 학교는 아예 때려치운 거야?

"아니야.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대체 뭔 일인데 OT, MT까지 다 댕겨오고 잠수를 타냐? 빨리 말 안 해? 너 혹시....

"혹시 뭐?"

-너 임신했니?

"에이, 미친X아."

-어머! 그건 아닌가 보네. 미안. 아임 쏘 쏘리 벗 아이 러뷰~~. 그니까 어서 말해 보셔.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말이야.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됐어."

-유학?

"응. 가족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게 됐거든."

-이민! 미국으로?

"응."

-헐~~~

혜진과 영미는 그렇게 장장 2시간을 통화했다.

"영미야, 자세한 건 이따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 그게 좋겠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현정이, 지연이, 승희도 부를게. 오케이?

"오케이."

통화를 마친 여동생이 잽싸게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염병! 장장 2시간을 통화해 놓고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니!

이건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일까?

위대한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죽기 직전까지 하나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What women want(여자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동생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난 단순한 게 좋다.

왜 [Simple is the best]란 말도 있지 않은가.

한남동에서 나오며 인테리어 전문가를 찾았다. 뭔가를 자르고 붙이고 못을 치는 것이 아닌 그저 집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에 어울리게 꾸미는 동시에 신박한 정리를 해 달라고 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때문인지 업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액의 수고비를 얘기하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하듯 외쳤다.

참고로 아직 여동생은 한남동 집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내일 저녁 레드핑크 은수도 소개해 줄 겸 서프라이즈(Surprise)를 해 줄 생각이었다.

* * *

한영미는 접시 한가득 음식을 담아 오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혜진아, 여기 진짜 좋다. 음식도 엄청 맛있고."

"그치? 완전 맛있지?"

"영미야, 너 다이어트한다고 하지 않았어?"

"히히히~ 걱정하지 마. 맛있게 먹으면 살 안 쪄."

"...."

혜진이 친구들과 만난 곳은 맛집으로 소문난 유명 레스토랑이다.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쉽게 올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두 달 만에 연락이 온 혜진을 용서하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야! 그래도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호호호, 알았어."

어느 정도 배가 차자 혜진을 향한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유학은 어디로 간 거야? 학교는 정했어?"

"집은? 미국 어디서 살아?"

"일단 집은 뉴욕에 있어."

"뉴욕? 와! 거기 땅값 장난 아니지 않아?"

"그것까진 잘 몰라. 오빠가 샀거든."

"오~ 선우 오빠 대박!"

혜진의 얘기에 영미, 유정, 윤정, 진선이 호들갑을 떨었다.

"학교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아이비리그에 합격했는데 현재 부모님이랑 상의 중이야. 갑작스럽게 이민을 간 거라 여기 학교도 정리를 못 했고 너희들과 인사도 못 했잖아."

"헤헤헤. 그건 그래. 암튼 아이비리그라니 정말 좋겠다, 혜진아."

"그래. 완전 축하해. 대박이야."

"아잉, 부럽당."

혜진은 친구들의 진심 어린 축하에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어 영미가 건배를 제안한다.

"얘들아, 우리 혜진이를 위해 다 같이 건배할까?"

"그래."

"좋지~."

"다 같이 위하여~."

"위하여!!"

혜진은 4명의 친구들과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근처에 위치한 클럽으로 향했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딱 한 잔 더 하자는 영미의 강압적인 제안 때문이다.

"저기 아가씨, 같이 놀래요?"

"아니요."

"5명 오셨죠. 우리도 딱 5명인데~."

"관심 없어요."

친구들과 간단하게 한잔 마시려고 왔는데 뭔 놈의 부킹이 이렇게 들어오는지....

클럽에 입장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벌써 7번째 부킹이다.

이와 같은 순간,

간만에 친구들과 JJ마호니를 찾은 김성철의 눈에 혜진과 그녀의 일행이 들어왔다.

"야! 저기 쟤네 어떠냐?"

"누구?"

"저기, 오른쪽 테이블에 앉은 애들."

"오! 최상급 하나에 중급 둘, 근데 폭탄이 하나 있네. 큭! 어딜 가나 폭탄이 하나씩 있다니까. 암튼 연식을 보아하니 회사원은 아닌 것 같고 대학생인 것 같은데, 어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어?"

"없지. 더욱이 최상급까지 있는데 흐흐흐!"

"좋아. 그럼 내가 간다."

소문난 바람둥이 김성철이 움직였다.

"자리가 없어서 그러는데 합석 좀 해도 되겠습니까?"

"자리가 없다니 안타깝지만 다른 자리 알아보시죠."

혜진의 차가운 말투에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웃으며 정중히 대꾸했다.

"그래도 사람이 말하는데 거절할 때 하시더라도 얼굴은 보고 말씀해 주시죠."

성철의 매너를 논하는 말에 혜진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응?"

남자는 샴페인의 황제라 불리는 돔 X리뇽을 양손에 각기 한 병씩 들고 있다.

더욱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웃는 낯이다.

"좀 전엔 제가 실수했네요."

얼굴을 대면한 덕인가?

혜진은 전처럼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근데 이 자리는 친구들끼리 오붓하게 온 거라서요. 죄송하지만 다른 자리를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흠! 너무 매몰차시군요."

"죄송해요."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딱 10분만 합석해요.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어서 그래요. 10분만 앉아 있다가 자리가 나면 그때 일어날게요. 약속해요."

후우!

혹시나 했는데 역시다.

자신이 정중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계속해서 합석을 시도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했다.

"알겠어요. 그럼 여기 앉으세요."

혜진이 백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김성철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더니 친구들을 불렀다.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이고, 실례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김성철과 그의 친구들이 자리에 착석하자 혜진이 말했다.

"얘들아, 가자. 다들 일어서."

"어, 어어?!!"

성철이 당황하는 순간 혜진과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자리가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냥 여기 쓰시라고요."

성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혜진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하긴, 보면 몰라? 같이 놀자는 거지."

"이 손 놓으시죠."

"싫은데?"

그는 100만 원짜리 수표 수십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순간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이게 무슨 뜻이죠?"

"용돈이야. 오늘 나랑 같이 놀면 이거 다 줄게."

"헐!"

성철의 행동에 결국 혜진의 뚜껑이 열려 버렸다.

"이 미친X아. 이 손 안 놔? 이거 성추행이야."

"그래요. 그 손 놔요."

"어서 놓지 못해요? 그거 성추행이에요."

성철의 지론에 따르면 이 정도쯤이면 십중팔구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성추행 운운하며 대들고 있다.

"성추행? 이 미친X들이 지금 뭐라는 거야?"

화가 난 성철이 가면을 깨뜨렸다.

그는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으르렁거렸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매너가 사라지고 대신 놈의 시커먼 본성이 자리한 것이다.

"영미야! 경찰에 신고해."

"알았어."

"윤정아, 넌 카메라로 찍어."

"어? 어. 그래."

성추행, 경찰, 카메라.

이와 같은 말에 성철과 친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뭐야! 이년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전화 안 내려? 이 개XX 년이."

순간 육두문자가 난무하며 테이블이 난장판이 됐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뒈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핸드폰 내놔."

"네가 누군데? 그러는 넌 내가 누군지 알아?"

혜진은 남자의 포악함에 겁이 났지만 다행히도 주변엔 사람이 많았다.

오히려 기세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크게 외쳤다.

"어디 돈 많은 집 자식 같은데, 너네 부모님이 너 이러고 다니는 건 아시니? 꼴에 아들이라고 너 낳고 미역국 드신 네 어머니가 불쌍하다."

혜진의 말에 성철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다.

"하...아! 얘들아. 오늘 나, 갯값 문다. 말리지 마라. 퉤!"

김성철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동시에 싸다구를 날렸다.

* * *

-[강남 경찰서]

강남 경찰서 박준혁 형사과장이 난감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서장과 중년 여성을 쳐다보았다.

"김성철 군은 아주 훌륭한 청년입니다. 그럴 일을 할 리가 없지. 안 그런가, 박 과장?"

"서장님, 목격자가 있습니다. 여학생이 폭행당했고요."

"허허허, 박 과장. 왜 그래? 조서에도 따귀 한 대라고 적혀 있던데 말이야."

"그것도 폭력입니다, 서장님."

"엄밀히 말해 쌍방 폭행이지. 여자 쪽에서도 밀치고 했더구만. 쌍방 과실로 하자고."

경찰서장은 어떻게든 이번 사건을 축소하여 무마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서장님, 그건 아니죠."

이때 소파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의 뾰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박 과장님이라고 했나요?"

"네. 박준혁 경감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 중에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있네요."

"잘못이요?"

"그래요. 일을 처리하려면 선후 관계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선후 관계요?"

"그래요. 이 사건은 우리 착하디착하고 순진한 아들이 그야말로 꽃뱀에게 당한 겁니다. 그리고 폭행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들 말로는 그년이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지 뺨을 스스로 치면서 자해를 했다고 하던데요? 설마 우리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녀는 거짓말에 강한 악센트를 주었다.

"서장님."

"네, 사모님."

"서장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바깥양반이 나랏일로 바쁩니다. 이런 작은 일에 신경을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선거가 코앞인데 구설수에 오르는 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럼요, 사모님. 알죠.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잔뜩 긴장한 채 중년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장님도 은퇴하기 전에 여의도로 나오셔야죠. 호호호."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원님께서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라도 달려가야죠."

강남 경찰서장 이혁재는 중년 여성 앞에서 아주 쩔쩔매고 있었다.

은퇴를 앞둔 그에게 국회의원은 평생의 꿈이자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준혁 과장은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곤혹스러웠다.

성인 남자 5명과 여자 5명이 서울 시내 유명 클럽에서 시비가 붙었고 상황 증거나 목격자의 진술을 보면 여자 측이 피해를 입은 것이 확실한데 경찰서장은 쌍방 과실로 무마하려 하고 국회의원 사모님이라는 저 여자는 한술 더 떠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그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제88화

88화 전화 한 통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은수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준비한 마카롱을 즐기고 있었다.

"음~ 이 커피 향이 좋은데?"

"그거 한 잔에 10만 원짜리 커피야."

"한 잔에 10만 원?"

"응. 루왁이거든."

아! 이게 그 루왁 커피구나.

은수가 집들이 선물이라고 가지고 온 커피가 바로 고양이 똥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루왁 커피였다.

"근데 오빠 여동생은 언제 와?"

"그러게. 올 때가 됐는데."

친구들과 헤어지기 아쉽다고 대신 늦어도 10시까지 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오빠, 설마 나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여동생을 창조한 건 아니지?"

"아니거든요."

난 핸드폰으로 전송된 문자를 보여 줬다.

-[오후 5시 : 오빠. 친구들이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 오후 6시까진 갈 거야.]

-[저녁 7시 : 오빠. 얘들이 계속 아쉽다고....]

-[저녁 8시 : 사랑하는 오라버니. 죄송합니다. 10시까지 들어가겠습니다. ㅠㅠ]

시간이 늦었지만 여동생을 보고 가겠다는 말에 TV를 켰다.

밥도 먹었고 차도 마셨다. 이쯤에서 분위기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혹시 영화 좋아해?"

"완전."

"어떤 영화 좋아해?"

"공포 영화 빼고 다 좋아. 오빠는?"

"나랑 비슷하네. 그럼 로맨틱 코미디는 어때?"

"완전 좋아하지. 뭐 있는데?"

@"줄리아 로버츠랑 휴 그랜트가 나온 옛날 영환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수가 정답을 말했다.

"설마 노팅힐?"

"알아?"

꽤 옛날 영환데, 그녀의 입에서 제목이 나올 줄 몰랐다.

"알지. 나 이 영화 완전 좋아해."

"그럼 같이 볼래?"

"좋지~."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가 영화의 홍보를 위해 영국을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들른 작은 책방에서 남자 주인공인 책방 사장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동화 같은 러브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

"...."

오해로 인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윌리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계적 스타와 평범한 자신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체념한다. 그런데 그때 안나 스코트가 서점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Don't forget. I'm...."

"...also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

우린 동시에 영화 속 안나 스코트의 명대사를 읊었다.

-[난 그저 사랑해 달라며 한 남자 앞에 서 있는 여자일 뿐이에요.]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서로를 향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이거 맞지?

지금이 바로 그럴 타이밍이지?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가고 있을 때, 그녀의 입에서 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 기다리다 늙어 죽겠네."

그러더니 곧장 손을 뻗어 내 상체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어머나! 나 지금 키스당하는 거니?

쪼오옥~

캬하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누가 먼저 하면 어때!

과학적으로 보면 키스란 남녀 간의 침을 교환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참 이상하다.

왜 이렇게 달콤한 걸까?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 가운데 산통을 깨는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앜!!

* * *

"그래서 혜진인 무사한 겁니까?"

-그게... 말입니다.

"허!"

차강민 변호사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여동생이 지금 경찰서에 있는데 그 이유가 X같아서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

일단 전화부터 한 통 걸고!

"Hello. Code Number 3227***."

차 변호사에게 전화가 오기 정확히 10분 전,

강남 경찰서 박준혁 과장이 최혜진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합의하시죠."

"합의 못 해요. 형사님은 아시잖아요?"

"...."

혜진의 반문에 박준혁 과장이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저도 알아요. 미안하지만 그래서 합의하라는 거예요."

"왜요? 제가 맞았잖아요. 제가 피해자라고요."

"나도 알아요. 근데 세상이 그렇지 않아요. 합의 안 하면 아가씨가 구속될 거예요."

"헐!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경우죠? 형사 아저씨, 아저씨가 제 사정을 봐주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대체 왜 이런 거죠? 저 양아치 새끼가 대통령 아들이라도 돼요?"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엔 또 모르죠."

"네?"

박준혁 과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자식 아버지가 야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4선 의원이에요. 어머니는 언론 재벌이고요. 조동일보라고 들어 봤죠? 게다가 이미 손을 썼는지 아가씨 친구들을 제외하면 목격자가 없어요. 저 자식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아가씨들이 꽃뱀이고 상황이 불리해지자 스스로 자해했다고 말을 맞췄고요."

"...!!"

"그래도 정치인 집안이라 구설수에 오르기 싫다고 이렇게 합의하자는 거예요."

혜진은 억울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나다니 말이다.

"정말 미안해요. 근데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 더러워서 피하죠."

"...."

혜진은 정말 황당했다.

그리고 화가 났다. 상대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넘어가 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죄송한데요. 전화 한 통만 할 수 있을까요?"

"전화요?"

"네."

"...네. 그러세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오빠가 말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오빠에게 전화하라고 말이다. 만약 오빠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땐 차강민 변호사라는 분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다.

"저... 차강민 변호사님이시죠?"

왠지 오빠에게 전화를 한다면 정말 큰 사달이 날 것 같아 차선책을 택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40분 후,

고급 세단 한 대가 강남 경찰서에 도착했다.

"충성!"

푸른색의 외교관용 번호판을 확인한 경찰관이 거수경례를 한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외국인 남녀 한 쌍이 차에서 내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 대사관에서 오셨다고요?"

"네."

금발의 미녀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저는 대사관 소속 글로리아 참사관입니다. 이분은 제임스 공사님이시고요. 앤더슨 대사님이 현재 중요한 업무 수행 중이라 대사님을 대신해 공사님과 제가 왔습니다. 최혜진 양을 뵐 수 있을까요?"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 글로리아 참사님이랑 제임스 공사님이라고요?"

"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찰관은 빠른 속도로 자판기를 두들기더니 곧 최혜진에 대해 알아냈다.

"지금 형사과 유치장에 있네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형사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굉음이라고 할 만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강남 경찰서에 밀려 들어왔다.

주한 미군 소속 마크가 선명하게 박힌 특수 차량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면 모릅니까, 우린 주한 미군 사령부에서 왔습니다."

"네?"

주한 미군 사령부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군인들이 쏜살같이 하차했다.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당당하고 절도 있는 발걸음이 마치 오랜 훈련을 받은 특수 요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들 중 유독 눈길이 가는 사내가 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평복 차림의 남자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도록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지휘관으로 보이는 미군에게 경어까지 듣고 있었다.

"마스터, 들어가시죠."

"아니요. 사령관님. 전 이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냥 조용히 지켜보고 싶어서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난 사령관에게 양해를 구한 후, 미군들 사이에 자리한 채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최혜진 양은 지금 어디 있죠?"

"책임자를 불러 주십시오."

"당신들은 미국 시민을 정당한 이유 없이 구속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한 미국 대사관 소속 고위 외교관에 이어 주한 미군의 등장이다.

담당 형사는 본능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서장실에 연락을 취했다.

-뭐 이번엔 주한 미군 사령부라고?

"책임자를 찾는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빨리 내려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혁재 서장은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저도 잘...."

-아, 아니야. 아무튼 알겠네. 바로 내려가지.

외교관에 이어 주한 미군까지 출동했다는 말에 이혁재 서장은 불안한 마음을 느끼며 서장실을 빠져나갔다.

-[강남 경찰서 형사과]

"네? 미국 시민권자요?"

"그렇습니다. 최혜진 양은 우리 미합중국 시민입니다. 고로 본 사건은 지금부터 저희가 인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이번 일에 관련된 김성철 씨는 지금 이 시간부로 저희가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이혁재 서장을 따라 뒤늦게 형사과로 내려온 김금옥 여사가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죠? 미국 시민이면 한국에서 죄를 저질러도 되는 건가요?"

"누구신가요?"

"나, 이런 사람이에요."

김금옥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글로리아 참사관에게 내밀었다.

-[조동일보 사외이사 김금옥]

"조동일보라면 김명국 회장님과는...."

"네. 제 아버지가 김명국 회장님이세요. 남편은 야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4선의 김원영 의원님이고요."

"아, 그러시군요."

그녀는 금발의 여인이 자신의 신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표정을 보이자 내심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상관치 않았다.

그래 봤자 최혜진이란 년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이 사건의 본질은 저년이 선량한 제 아들을 폭행했다는 겁니다. 우리 아들이 피해자라고요."

그러나 상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데요. 미국 시민이, 그것도 연약한 여성이 피의자라는 것은 그쪽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뭐라고요? 보아하니 일개 직원 같은데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그걸 판단하는 거죠?"

"아! 아직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일개 직원은 아니고요. 미 대사관 소속 글로리아 참사관이라고 합니다."

"차, 참사관?"

저 여자가 참사관이라고?

김금옥 여사가 당황하는 사이 한 무리의 군인들이 형사과에 들이닥쳤다.

"모두, 동작 그만!"

"뭐, 뭐야?"

사령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간을 점했다.

-웅성웅성!

"조 형사, 저 사람들 누구야?"

이때 사령관을 알아본 대사관 직원이 앞으로 나왔다.

"패튼 장군님."

"제임스 공사, 자넨가?"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글로리아 참사관도 있었군. 내가 한발 늦은 모야이네."

"아닙니다, 사령관님."

강남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다.

특수부대를 이끌고 온 자가 주한 미군 사령관 존 와이어트 패튼, 4성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패튼 사령관을 알아본 서장이 인사를 건넸다.

"사, 사령관님. 인사드립니다. 전 강남 경찰서를 책임지고 있는 이혁재 서장입니다."

"...."

패튼 사령관은 서장의 인사를 가볍게 씹으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김성철 씨, 당신을 미합중국 시민에 대한 폭행 및 살인미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이는 한미 협정에 의거한 정당한 조치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그가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저 자식을 당장 끌고 가.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네!"

"알겠습니다."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패튼 사령관의 말에 이혁재 서장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X 됐다.'

제89화

89화 대체 누굴 건드린 거야(1)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짐작도 못 하겠다.

어머니가 왔다.

자신이 잘못했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곧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경찰서에서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미국 대사관 사람들이 등장했다.

저년이 미국 시민이었다니 젠장 똥을 밟았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당황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돈 좀 쥐여 주고 적당히 합의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이 점점 더 요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 떼의 미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주한 미군 사령관이라는 대머리 양키가 자신을 쏘아보더니 기차 화통 소리를 내며 외쳤다.

"김성철 씨, 당신을 미합중국 시민에 대한 폭행 및 살인미수 혐의로 긴급체포합니다. 이는 한미 협정에 의거한 정당한 조치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살인미수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당장 끌고 가.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난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저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엄, 엄마!"

"아들, 성철아!"

"엄마, 나 좀 살려 줘. 악!"

뒤늦게 엄마를 불렀지만 이번만큼은 엄마도 어쩌지 못했다.

그들의 손길은 사정이 없었다.

김금옥 여사는 서둘러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야. 지금 큰일 났어."

-무슨 일인데?

"우리 성철이가 미군에게 끌려갔어. 그것도 개처럼 질질!!"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성철이가 왜?

"나도 몰라! 여기 대사관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 안 통해.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거기 어디야?

"강남 경찰서."

-알았어. 일단 진정부터 하고 끊어 봐. 내가 당장 알아볼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강남 경찰서 형사과에 들어오던 한성일보의 기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어? 저 남자 많이 본 얼굴인데?"

뒤이어 주한 미군 사령관의 얼굴이 보이고 대사관 소속의 고위 외교관마저 모습을 보이자 그는 본능적으로 특종을 떠올렸다.

한편 와이프의 연락을 받은 4선 의원 김원영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

그가 누군가?

야당 원내대표를 역임한 정치 거물이 아닌가!

차기는 몰라도 차차기라면 유력 대선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거물 정치인인데 그의 아들이 미군에 의해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그것도 강남 경찰서에서 말이다.

"이것들이 감히 내 아들을 끌고 가?"

비명에 가까운 고성을 지르던 와이프의 음성이 귀에 선했다.

"이 서장, 날세."

그는 노회한 정치인답게 강남 경찰서장에게 연락을 취하는 동시에 주한 미국 대사관에 선을 넣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일이 쉽게 해결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