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2

10화.

-케겍. 켁

괴물이 많았다.

체이서의 신체 능력은 전투다운 전투를 하기에 부족하다.

창을 들면 딱 고블린과 전투할 수준의 초보 병사도 기본 훈련은 마쳤다.

체이서는 훈련조차 받지 않은 신병이었다.

싸울만한 무기도 없고, 있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전투하지 않고 잠입하는 게 좋았다.

-크켁 케윽.

그러나 체이서의 몸놀림으로 완벽한 은신은 불가능했고, 결국 들켰다.

-크웨에엑!

그러나 생각만큼 위험하진 않았다.

달려드는 도플갱어가 스스로 느려진다.

그리고 끝끝내 체이서를 잡지 못했다.

하필 체이서로 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한 개체의 변신은 그 개체를 본 모든 도플갱어들의 변신을 야기했고.

-크웨엑!

이상한 소음을 내며 돌아다니는 저 못난 도플갱어들의 모습이 전부 체이서와 똑같아졌다.

-ㅋㅋㅋ 되게 멍청해 보인다.

-전투는 안 되겠지···?

-전투력도 카피하니까 아마 약자전이 되겠지만···. 그래서 더 처절할 듯.

-절대 금지. 패배보단 쫄보가 낫다. 난 지면 안 봄.

-지면 못 봐···. 죽을 거 아냐.

물론, 멍청해 보인다는 건 시청자들의 느낌일 뿐. 체이서에겐 상당히 섬뜩한 광경이었다.

주변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배회하고 있는 광경이 '멍청해 보인다.'는 이유로 우스울 리가 없었다.

도리어 어딜 가도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붉은 지대에 소름이 끼치면 끼쳤지.

가끔은 자신의 시야가 고장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자신이 저기 있는데 이쪽에서 보고 있는 기분?

그래도 그 근방은 그나마 나았다.

적어도 미궁의 핵은 배경으로만 있었으니까.

가까이 가지만 않으면 그냥 개별적인 물건일 뿐이었던 「미궁의 핵」들이, 미궁 깊숙이 들어가자 더는 선반에 놓여 있지 않았다.

미궁과 한 몸이 되어버린 창고처럼, 괴물들이 「미궁의 핵」을 장비한 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핏빛 슬라임 내부엔 온갖 보석이나 장식 등이 둥실거리며 떠다녔고, 도플갱어들은 체이서의 몸으로 저주 섞인 장신구나 장비를 당당하게도 장착하고 다녔다.

온몸에서 저주가 풀풀 풍긴다.

-움직이는 저주네.

-생각보다 번거롭네 저기.

하지만 워낙 거대한 공간인 데다 선반이 깔려 숨을 곳이 많았고, 도플갱어는 하필 체이서로 변신한 탓에 체이서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이 세상의 전사나 사냥꾼들은 감지력이 대단해서 인기척이나 적의를 느낀다고 했다.

그런 걸출한 인물로 변한 도플갱어는 능력을 어느 정도 베껴와 상당한 감지 능력을 보였을 테지만, 체이서로 변한 도플갱어는 딱 농부 수준의 감지력을 지녔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체이서가 지닌 강력한 영혼이 없기에 감지력이 체이서보다 더 낮았다.

결국 자신이 부족함을 확인 시켜주는 일이었기에, 기뻐하기만은 애매한 행운(?)이었다.

"생각보다 미궁이 더 크네요. 이러다 다음 구역까지 넘어갈 것 같은데···."

느려터진 전진. 그러나 조급함 없이 미궁 깊숙이 들어가는 데 성공한 체이서는, 좁은 복도를 지나 새로운 공동을 발견했다.

그래, 알파벳을 매긴다면 E구역이어야 하는 곳.

그곳은 A부터 D까지의 구역 중에 제일 넓고 거대했다.

족히 두 배는 더 큰 듯한 그 구역에는 그간 늘어나기만 하던 괴물들이 전혀 없었다.

뒤를 돌아 살펴보니, 강력하게 뿜어 나오는 저주에 영향을 받아 이쪽으론 다가오지 못하는 듯 보였다.

저주 방호 아티팩트를 차고 왔다면 지금부터 촉박한 제한 시간이 주어졌겠지.

그러나 체이서는 느긋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E구역의 구조는 다른 구역과 비슷했다.

가지런히 놓인 5층 선반들과 벽에 빼곡히 붙은 수납 공간.

그러나 E구역 중앙엔 여태껏 본 적 없던 검은 제단이 있었다.

핏줄 같은 붉은 물길이 제단으로 수렴해 거미줄처럼 뒤덮여 검붉은 기운을 피워 올리고 있다.

그런 불길한 제단 위에 둥실 떠 올라 천천히 회전하고 있는 물건은 누가 봐도 「미궁의 핵」이었다.

체이서가 그 물건에 시선을 주자, 눈동자가 어둑한 호박빛으로 빛나며 해석을 시작했다.

「호펜의 양피지」---------------------

외계인을 고문해 기술을 얻어낸다는 소문이 돌았던 호펜 가문. 그 비밀은 언어 천재였던 호펜가(家)의 막내아들에게 있었다.

그는 던전에서 발견되었다는 이 양피지를 경매장에서 구매한 뒤, 한 줄 한 줄 해석할 때마다 천금이 될 발명품에 대한 정보를 주입 받았다고 한다.

그는 양피지를 탐내는 첫째 형에게 죽었고, 그 이후, 양피지의 문자가 바뀌며 아무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바이러스로 인해 해독할 수 없음.

!해독하려면 입금하세요.

[email protected]

#qodzm _____-____-__

천금을 주고 고용한 언어학자도 읽어내지 못하게 된 양피지는, 호펜가의 서재에 버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궁을 형성하였다.

일정 반경의 모든 문자가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변질했다. 그곳에 들어선 자들은 소통할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짐승처럼 행동했으며 스스로 빠져나오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 세계의 해결사들은 끝내 알아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노출된 자의 뇌에 의문의 암호를 덧씌운다. 영구적인 언어 장애가 발생한다.

!저주에 당하면 개나 고양이 정도의 1차 의식만이 기능한다.

‗‗‗‗‗‗‗‗‗‗‗‗‗‗‗‗‗‗‗‗‗‗‗‗‗‗‗‗‗

렌즈가 알려주는 정보를 간추리자면 이랬다.

체이서에겐 영향 없음.

-일종의 랜섬웨어같은 저주네.

-인간의 뇌조차도 기록물로 취급해 암호를 걸어 버리는 건가?

체이서는 양피지에 관심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문의 구조물을 발견했다.

자연스러워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창고에 있기엔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저건 뭘까요?"

「호펜의 양피지」를 향하는 길이라도 되는 듯 한 쌍으로 세워진 돌기둥들이었다.

11자 형태의 기둥은 일정 거리를 두고 솟아 있었다.

그게 총 세 쌍.

총 세 개의 관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굳이 그곳을 통과할 필요가 없다면···.

체이서는 호펜의 양피지를 향해 다가가려다가 이내 가로막혔다.

투명한 결계가 자리해, 일정 반경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막혀 있었다.

결국, 돌기둥들 사이로 지나쳐야 했다.

"좋아. 갑니다."

체이서가 첫 번째 돌기둥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체이서의 몸이 들어서자마자 돌기둥에 새겨진 세모문양에 붉은빛이 밝혀져 일렁인다.

-콰아아앙

제단 주변에 흐르던 붉은 액체가 일제히 비산했다.

세차게 튀긴 붉은 액체가 공중에서 뭉쳐지더니, 폭탄 터지는 소리를 내며 체이서에게 날아든다.

그 형태는 단검.

순간 몸을 날려 피했지만, 체이서의 어깨에서 붉게 핏물이 배어났다.

자칫하면 팔이 날아갈 위기였다.

어깨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오지만, 아직 상처를 확인할 때가 아니였다.

꿋꿋이 앞을 보면서 새로운 공격이 날아들지 않는지 파악했다.

잠깐의 정적.

움직이지 않으면 더 공격하지 않는다.

체이서는 그 정보를 기억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듯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료한 정신은, 지금 후퇴해선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괜히 다치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무의미한 행위로 넘기지 않기 위해서, 체이서는 한 발자국 더 전진했다.

붉은 구역에 새겨진 적색 물길에서 꾸역꾸역 액체가 흘러나온다.

온갖 물건으로 빚어진 무기는 검, 화살, 도끼, 창.

온갖 무기가 더욱 크고 위협적인 형태로 변이한 채 체이서를 겨누었다.

여기까지다.

체이서가 발을 슬쩍 내미는 순간.

-콰아아앙

다시 굉음이 들리며 무기가 쏘아져 체이서가 있던 자리를 거세게 갈랐다.

그 숫자가 양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해결 불가능이 상쾌하게도 와닿았다.

체이서는 그저 땅에 드러누운 채로 웃었다.

치솟는 아드레날린과 이 답도 없는 상황에 대한 허탈함 때문이었다.

난이도를 매기자면 악몽. 체이서의 퀘스트 창에 해결 불가능이란 도장이 쾅 하고 눌러 찍히는 순간이었다.

-ㅋㅋㅋ 진짜 죽을 뻔했네.

-발 대자마자 드러눕지 않았으면 방금 가루됐어.

-저길 어떻게 지나가냐?

체이서의 볼에서 핏방울 하나가 땅으로 떨어져 바닥의 붉은 선으로 흘러내렸다.

몸이 조금만 옆으로 틀어졌다면 아마 머리에 구멍이 뚫렸겠지.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제 정면으로만 오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릴 수도 있다는 거였다.

제단과 땅에서 끊임없이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맥혈을 찌른 듯 세차게 솟아오르는 붉은 액체는 계속해서 더 많은 무기를 만들어냈고, 전면을 가득 채운 뒤로도 계속해서 숫자를 불려 나갔다.

그렇게 위로, 더 위로 쌓여가던 무기들은 이제 체이서를 완전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게 내려꽂히면 체이서가 피할 방법이 없다.

눕던 구르던 고슴도치 엔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체이서는 이내 뒤로 움직여 보았다.

-꿈틀.

무기는 가만히 떠있었다.

뒤로 가는 것엔 반응하지 않는다.

체이서는 거기까지 확인하곤, 전생의 포복 훈련을 떠올리며 조금씩 조금씩 물러났다.

그가 전진한 거리는 돌기둥에서 네 발자국.

그마저도 회피하느라 뛰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만큼의 전진이었기에, 빠져나오는 것도 금방이었다.

돌기둥에서 빠져나온 체이서가 몸을 일으켰다.

제단 방향을 돌아보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제단 반대편의 허공까지 빼곡하게 채우는 붉은 물결.

그게 전부 무기였다.

1mm라도 더 전진했다면, 체이서를 겨누고 있는 저 무수한 무기가 체이서를 부숴 핏덩이로 만들었을 터였다.

그럼 바닥에 덜린 붉은 액체와 뒤섞여 미궁과 한 몸이 되었겠지.

체이서가 두 발짝 옆으로 움직이자, 무기도 방향을 틀어 체이서를 향했다.

-목표물 설정 완료.

-록온. 언제든지 격추할 수 있습니다!

-ㅋㅋㅋ 대체 누구 편이야 너희들.

-아 당연히 미궁 편 아니냐고 ㅎㅎ

-죽으면 편이고 뭐고 의미가 없다.

-후퇴! 후퇴하라!

체이서는 가슴팍을 더듬었다.

「귀환 주문서」를 만지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붉은 무기들에게서 멀어진 체이서는, 다시 복도를 지나 도플갱어가 있는 곳 근처까지 돌아갔다.

"음?"

체이서는 온갖 저주 아이템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는 도플갱어를 보다가, 턱을 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테블릿을 꺼내 들었다.

해결할 수 있다!

체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미궁의 핵이 가진 문제점 중 하나.

'단단함.'

그것은 부숴야 할 물건에 붙은 특성이기에 단점이지, 방어구로서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체이서는 수집해놓은 자료를 정신없이 넘겼다.

이거다!

「포피파의 전신갑옷」-------------------

포피파 파피포파.

!갑옷을 보는 자에게 언어적인 문제가 생겨 외계어를 말하게 된다.

!편안한 마음에 어떤 경우에도 갑옷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

‗‗‗‗‗‗‗‗‗‗‗‗‗‗‗‗‗‗‗‗‗‗‗‗‗‗‗‗‗

테블릿에 정리된 문구답게 다소 짧았다.

심지어 위에 적힌 글씨와 아래 적힌 글씨가 다른 필체였다.

아무래도 처음 기입하던 자는 이미 저주에 당한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저주가 어떻든 체이서에겐 상관없었다.

전신 갑옷이 생전 주인의 무기술로 미쳐 날뛰는 것만 아니라면, 저주야 무엇이 있든 체이서에겐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2층에 있네."

체이서가 물건이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붉은 구역에서 빠져나갔다.

오늘은 일단 복귀. 내일 갑옷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체이서가 숙소로 돌아오자,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틀에 느긋하게 앉아 꼬리를 탁탁거리던 고양이는 체이서가 들어오자 우아하게 바닥으로 내려서며 인간으로 변화했다.

마리나는 체이서의 어깨와 볼의 상처와 온몸에 새겨진 멍을 보며 안쓰럽다는 듯 걱정의 말을 건넸다.

"역시 어려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전이 있었습니다."

***

다음 날. 체이서가 상층으로 진입했다.

C구역과 D구역의 사이에 상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곳을 처음으로 오르는 그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뚜벅 -뚜벅

원형 계단을 울리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려 퍼진다.

체이서가 오르는 계단 벽에는 인물화가 그려진 액자들이 드문드문 걸려있었다.

한때 유행했던 움직이는 그림들이 「미궁의 핵」이 되었다는 듯하다.

11화. 좋은 갑옷을 챙겨 입었다.

11화.

저 그림들에 깃든 저주는 '막대한 공포'로, 보는 것만으로 작용하는 강한 저주긴 하지만 일단은 심장마비 또는 도주를 유발하는 그나마 약한 녀석들이라고 한다.

체이서가 그림 속의 미인과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피눈물을 흘린다.

끔찍한 안구 테러과 더불어 새카만 저주를 발산하는 것이, 왜 2층으로 가는 계단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을 지나치지 못할 자는 애초에 2층으로 가면 안 된다.

2층에 있는 물건의 경우, 외부로 반출되면 어마어마한 재해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 걸린 액자는 위험한 물건을 노리는 침입자를 가로막는 역할도 할 것이다.

본래 이곳으로 들어서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터였다.

체이서가 아니었다면.

-위이잉

2층에 들어선 체이서가 쭉 뻗은 복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어둑한 호텔 복도 같은 풍경.

넓은 1층과는 달리, 수많은 방이 있었다.

바머의 일람에 적힌 설명대로다. 강력한 저주를 지닌 물건들이어서, 더 안전하게 격리하기 위해서라고 했지.

복도를 걸어 수많은 문을 지나쳤다.

그리고 「포피파의 전신 갑옷」이 있다는 방문 앞에 섰다.

[2층 009호실]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히도 잠겨있지 않았다.

-끼익

오래된 문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려왔다.

어둑했던 방. 인기척을 감지한 발광석이 자동으로 가동한다.

은은한 빛이 들어오고, 환풍기가 돌아가는 듯한 윙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감이 사라지니 오히려 분위기가 나아졌다.

무언갈 보관하러 온 자를 위하는, 창고 제작자의 선의가 느껴진다.

체이서가 방으로 들어서자, 갑옷 걸이에 한 세트로 걸린 전신 갑옷이 보였다.

매끈한 외형에 미래적으로 보이는 멋들어진 장식. 그 갑옷은 언뜻 보아선 그저 명품으로 보였다.

실제로 포피파 따위의 엉망인 이름은 아니었다.

체이서의 눈에 해석된 해당 물건은, 특별한 방식으로 마법을 담은 전신 갑옷이었다.

「데그랑드 풀 플레이트」----------------

던전에서 발견된 이 아이템은, 던전 헌터의 장비로 쓰이다 경매로 팔린 뒤, 왕국 대도서관의 장식으로 비치되어 있었다.

도서관에 방화 사건이 일어나며 수많은 영혼을 먹고 미궁화했다.

!기록물 암호화의 저주.

!장비 해제 불가.

!내장 마법 고장 현황.

-자동 비행.

-마공학 핵융합 광선.

-트렌드 사교댄스 10선.

‗‗‗‗‗‗‗‗‗‗‗‗‗‗‗‗‗‗‗‗‗‗‗‗‗‗‗‗‗

-그렇군. 이거 같은 곳에서 왔다.

-양피지랑 같은 세상에서 왔다는 거야?

-맞아.

-그쪽 물건이 이 세상이랑 안 맞네. 에너지 수집 효율이 워낙에 높다 보니까 영 에너지도 쉽게 빨아들여서 미궁의 핵이 되나 봐.

-저주 발현도 특징적이군. 기록물을 건들면서 생물체의 뇌까지 건드려버리네.

-확실히 이 세상보다 한 차원 높은 기술이 담겨서 보물이긴 한데, 앞으로 저쪽에서 넘어온 물건을 보게 되면 조심해야겠다 체이서.

여느 때처럼 질문하지도 않은 고급 정보를 마구잡이로 교육해주는 시청자들.

체이서는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살피곤 다시 갑옷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데그랑드 풀 플레이트」---------------

세계 최고 명장의 손에 제작되어 자유 영지의 영주 데그랑드에게 바쳐진 풀 플레이트는 그의 위엄과 강력함을 담았다.

만 이천 오백 가지의 마법이 담겨있었지만, 차원 이동 간 소실되어 현재는 삼십 가지만 남았다.

데그랑드는 멋쟁이로 유명했는데, 중년의 나이에도 사교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고 한다.

‗‗‗‗‗‗‗‗‗‗‗‗‗‗‗‗‗‗‗‗‗‗‗‗‗‗‗‗‗

이 세상으로 넘어오기 전엔 그저 훌륭한 장비였을 뿐이었는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다.

거기까지 읽은 체이서는 저주에 관한 내용만 태블릿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내용을 잘 기록해두고는, 전신 갑옷을 걸쳐 입었다.

그의 신체에 딱 맞게 크기가 줄어들며, 편안한 착용감이 느껴졌다.

몸이 유달리 가벼운 게, 근력 보조와 체력 증가, 자세 보조 효과도 느껴졌다.

본래 체이서의 신체 능력이라면 전신 갑옷을 입고 편하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었을 터였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흔히들 생각하는 편견보다는 가볍다 하나, 그래도 30kg이 넘는다.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한참 익숙해져야 했을 거다.

이건 마법 물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탈착도 시도해봤다.

갑옷이 스스로 커지면서 몸이 움직이기 편하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갑옷 뒤를 열어 뒷걸음질로 벗을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다.

-장비 해제 불가라며?

-벗을 수 없도록 유혹하나 본데?

확실히. 그저 가두는 것보단 정신을 침식해 스스로 벗지 않게 만드는 게 더 강력한 저주긴 하다.

그런 저주를 품고 있지만, 본래 기능 자체는 잘 돌아가는 듯싶었다.

그렇다는 것은, 체이서에겐 그저 상당한 성능의 방어구란 뜻이지.

좋아. 가자.

체이서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복도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무언가가 체이서의 바로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체이서가 걷자, 그 방향대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따라왔다.

머리 위에 있는 무언가는, 분명히 체이서를 인식하고 있었다.

-3층에 가는 건 좀 고민해봐야겠다 체이서.

···어차피 나중 일이지.

체이서가 D구역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평소처럼 숨어들기 위해 상체를 숙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젠 숨을 필요가 없지 않나?

수준급의 검사가 체이서와 싸우게 된다면, 체이서의 투구 틈으로 칼을 쑤셔 넣어 초살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에겐 체이서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 그저 살아있는 훈련용 나무 인형이나 다를 바 없다.

능력 있는 마법사라면 더 쉽다. 체이서를 띄우고 납치하고 굽고 튀기다가 감금하는 등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격투가나 모험가들도 내부를 부수는 발경이나 적당한 중독 아이템과 함정을 써서 가볍게 눕힐 수 있겠지.

필요한 건 하나. 체이서를 제압할 잠깐 사이 저주를 버텨줄 고급 아티팩트였다.

체이서는 이렇듯 약하다.

안타깝게도, 템빨로는 좁힐 수 없는 실력의 간극이 또렷하게 존재했다.

그러나 그건 전투에 진심이라서 수십 년간 무언갈 죽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숙련하는 인간이란 존재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고.

물리력만 믿고 덤비는 저 멍청한 몬스터들은 이제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척

체이서는 도플갱어 앞에 당당히 섰다.

달려드는 도플갱어.

아니, 체이서들.

진짜 체이서는 전신 갑옷에 가려져 있고, 도플갱어들은 체이서로 변한 채 머리를 내놓고 있다 보니, 어딘가에서 강력한 기사가 나타나 분신술을 쓰는 체이서를 작살내는 듯 보였다.

···이상한 광경이란 뜻이다.

-쾅!

근력 보정을 받은 강철 주먹이 체이서 하나의 머리를 터뜨렸다.

도플갱어 특유의 검은 피가 터지고, 또 다른 체이서가 달려들었다가 사바톤에 차여 벽에 처박힌다.

-호우!

-갑자기 먼치킨이야!

-ㅋㅋㅋㅋ 100대 1 돌았냐고!

그 소리를 듣고 몰려드는 도플갱어들이 호러 영화 속 좀비 군단처럼 체이서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저만치 멀리서 달려드는 도플갱어들은 갑옷까지 따라서 형태를 뒤바꾼다.

물론 형태만을 따랐을 뿐이지, 본래부터 전설적인 아이템이었던데다 미궁의 핵이 되면서 더욱 견고해진 「데그랑드 전신갑옷」에는 댈 것이 아니었다.

이 물건은 2층에 봉인되어 있던 물건이었다.

강력한 저주에 비례해 단단해진다는 스펜서의 말에 따르면.

-쾅!

요 근처에 있는 미궁의 핵보다도 단단하단 뜻이었다.

하물며 피륙을 가진 몬스터 따위야.

가볍게 박살낼 수 있는 게 당연했다.

-퍼어억!

연신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철 조각이 비산했다.

높게 뛰어올라 체이서의 코앞까지 달려든 도플갱어.

체이서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가 거칠게 고개를 뒤흔들며 고함을···

-포피파아아아!

주먹을 꼬나쥐던 체이서가 멈칫했다.

"···?"

-누가 해석좀.

-캬아아- 라는 뜻.

-쟤들 갑옷 복사하면서 저주에 당해버린 듯.ㅋ

-와 도플갱어의 뇌도 랜섬웨어에 당해버린 거냐고.

문제는, 적들이 체이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포피 -쾅!

"···!"

체이서는 자신의 얼굴을 한 도플갱어의 입에서 나오는 외계어를 견디지 못했다.

절로 손이 말리며 주먹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꾸욱 쥐어진다.

그렇게 빨라진 학살.

수십 명의 체이서를 부수고 도달한 돌기둥의 앞에서, 체이서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좋아요. 충분히 시험해봤다고 생각합니다."

-아, 시험 삼아 그렇게 날뛰셨다?

-ㅋㅋㅋ 피나 좀 닦고 말해.

-잔인성 +150%

-아 ㅋㅋㅋ 다른 건 다 참아도 오글거리는 건 못 참는다고.

거칠었던 전투였지만 몸에도 갑옷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

오히려 체력이 넘친다.

이런 물건을 지금껏 썩혀왔다는 게 아쉬울 정도.

하지만 앞으로 받아낼 위협적인 무기들엔 또 어떨지 몰랐다.

체이서는 심호흡을 한 뒤, 믿음직스러운 전신 갑옷을 입은 채 돌기둥 사이로 전진했다.

-콰아아앙!

-캉!

전과 같이 폭음과 함께 붉은 날붙이 하나가 갑옷에 날아든 뒤 튕겨 나갔다.

-카카캉

한 발자국 전진할 때마다 늘어나는 붉은 무기들.

그리고 세 발자국을 걸었을 때, 다시 E구역을 가득 채울 정도로 수를 불린 무기가 체이서를 노렸다.

-저벅.

-후우우웅

격추된 비행기가 조각나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날붙이가 동시에 공기를 격하면서 내는 파공음 이후엔, 공동을 뒤흔드는 굉음이 뒤따랐다.

-콰과과과광!

절대 가볍지 않은 충격량. 부딪힐 때마다 체이서의 몸이 들썩거렸지만, 그의 발자국은 멈추지 않았다.

-콰과과곽 –카캉 -캉

굉음을 뿌리며 쏟아지는 무기를 몸으로 받아내며, 도검의 폭우 속을 외로이 거니는 한 명의 기사.

그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갑옷 내부엔 별다른 고통이 없었다.

「포피파의 전신갑옷」은 모든 데미지를 받아 흘렸고, 착용자에게는 관성으로 인한 떠밀리는 듯한 느낌만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붉은 액체로 만들어진 무기 따위에 부서지거나 부식되거나 구겨지지 않는다.

악착같이 날아드는 무기들은 갑옷에 부딪힐 때마다 박살이 나서 힘을 잃고 떨어졌다.

체이서는 붉은 파편을 흩뿌리며 차근차근 미궁의 핵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탱커야!

-사실상 무적이라고! ㅋㅋㅋ

-세계관에 버그가 있어요!

체이서가 성공적으로 두 번째 돌기둥 앞에 도달했다.

그 사이로 발을 디디는 순간.

-후우웅

첫 번째 돌기둥의 붉은 빛이 꺼졌다.

시끄럽던 충돌음이 사라졌다.

잠깐의 적막.

-쏴아아

피의 비가 내렸다.

하늘에 만들어졌던 무기가, 첫 번째 시련이 끝남과 동시에 도로 액체화되며 떨어지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었던 핏빛 무기는 액화에도 시간이 걸려, 공중에 머문 채 아주 천천히, 천천히 방울져 저주를 내렸다.

-차박

체이서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추적추적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서 창고 내부의 또 다른 세상. 붉은 지옥을 걷는다.

목적지는 이제 멀지 않다. 검고 붉은 아우라를 풍겨 올리는 양피지가 가까웠다.

그렇게 체이서의 발자국이 일정 선 너머에 찍히자, 두 번째 돌기둥에 그려진 원 문양에서 초록빛이 발광했다.

-우우웅

구동음과 함께 피어오른 녹색 안개는, 이미 돌기둥을 지나쳐 중간쯤 온 체이서의 갑옷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도망을 용납지 않는다는 악의가 느껴졌다.

몸에 스며들 때는 위협적으로 보였던 녹색 안개. 그러나 정작 긴장했던 체이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머리가 살짝 띵하다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체이서가 자신의 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한 녹색 연무를 바라보았다.

호박색 렌즈가 현상을 해석해서 정보를 띄워주었다.

「정신 파괴의 저주」

-더 볼 것도 없네. 안 통해.

-왜 체이서가 강해 보이지?

-그러게···.

정신 장애도 아니다. 정신 파괴.

창고에 널린 위험한 저주들보다 한 단계 우월한 강력한 저주가, 체이서의 정신을 지키는 가호에 무력해졌다.

체이서는 초록색 안개를 휘감은 채 걸음을 옮겼다.

금세 다음 돌기둥에 도달한 그가 지체하지 않고 발을 디뎠다.

두 번째 돌기둥의 초록빛이 꺼지며, 체이서의 갑옷을 둘러싼 초록 안개가 흩어진다.

대신 세 번째 돌기둥에 새겨진 마름모에서 검은빛이 발해졌다.

이번엔 어떤 공격이 올까.

체이서가 즉시 대응하기 위해 정면을 바라보았다.

12화. 미궁의 핵이 끈질기다.

12화.

-카가가각 –기기기긱

움찔.

체이서의 눈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긁히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귀에 들리는 게 아닌듯한 아스라한 소리는 불편하게 들리긴 했다.

그러나 거슬릴 뿐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두 번째 공격의 띵한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몰랐으나, 채널을 보고서 이해할 수 있었다.

-오. 체이서 강해 보여.

-어떻게 된 게 1절에 너덜너덜해지고 작전상 후퇴하더니 2절부터 무적이냐고 ㅋㅋ

-지금 자신이 「영혼 파괴의 저주」에 공격 당하고 있단 걸 모르니까 저렇게 멍하니 있는 거겠지?

「영혼 파괴의 저주」

그 중 「거인 악령의 손아귀」.

체이서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크고 기괴한 악령의 손아귀가 체이서의 영혼 바깥을 거침없이 긁어 대고 있었다.

미지의 공격이 아닌, 본인에게 무의미한 공격임을 알게 된 체이서가 마침내 양피지 앞에 섰다.

핏빛 비가 추적추적 내려 투구 앞으로 흘러내렸으나, 시야를 가리는 정도로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체이서가 앞으로도 이 갑옷을 애용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기긱

그의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저주에 당한 건가? 체이서의 긴박한 의심이 무색하게도, 외부에서 보는 그의 갑옷은 그저 묘하게 멋들어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번쩍거리는 미궁의 핵을 뒤로 한 채 앞 짐을 지고 고개를 숙인 모습.

-쏴아아아

잠깐의 정적 후.

갑옷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미궁의 핵 앞에서 정교한 춤을 추는 기사.

그 몸은 빙글빙글 돌면서 경쾌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초록빛 안개를 휘감고, 붉은 무기를 다시 띄워 올렸다.

완벽한 역주행이었다.

-캉! 카각 캉! 카가각!

그러나 스텝을 밟는 발은 한쪽으로만 향하진 않았다.

앞으로 뒤로 경쾌하게 움직이며 리듬감을 싣는 기사에게, 다시금 붉은 무기가 쏘아졌다.

경쾌한 몸놀림은 날아드는 붉은 무기마저 악기처럼 사용하는 듯, 지나쳐 가는 무기를 재기 넘치게 두드리며 리듬을 싣기도 했다.

체이서가 넓은 대지 위를 제 무대인 양 누볐다.

-이왜진?

-갑자기 음악영화?

춤은 점점 더 격해졌다.

심지어 날아드는 붉은 무기를 이리저리 디디며 공중을 거닐기도 했다.

그 모습은 어제 그토록 위태로웠던 모습과 대비되어, 멋있기는 했지만 어처구니없었다.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디디는 듯 자연스러운 스텝. 오르락내리락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E구역을 접수하는 체이서.

물론 감상은 썩 좋지 않았다.

-얼씨구?

-여기 방장 누구임? 왜 갑자기 춤추는 거임? 나만 이해 안 됨?

-모르면 음악 틀고 봐라.

-틀었는데도 모르겠음.

-삐빅. 정상입니다.

-이분이 춤에 좀 진심이셔서···.

-그러다 진짠 줄 알겠다.

-감독님. 영상미가 너무 강합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집요할 정도로 길었던 댄스 타임이 지나가자, 언제 다시 되돌아왔는지 「호펜의 양피지」 앞이었다.

양팔을 사선으로 펼친 채 다리를 꼬고 서 있는 화려한 자세로, 마무리까지 확실했다.

체이서는 신체의 통제권을 되찾은 뒤 힘이 쭉 빠진 듯 비틀거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며 이마를 탁 짚었다.

애용은 무슨···!

-ㅋㅋㅋ 갑옷에 내장된 마법이 고장 났다더니. 갑자기 저러는 건가?

-저건 저주도 아니고, 그냥 혼자 오작동하는 거니까 어떻게 막을 수도 없네?

-춤 이름이 뭐임? 괜찮은데?

-트렌드 사교댄스 10선.

-ㅋㅋ 이름이 무슨 길보드 차트 같네.

-심지어 춤 10개 다 춘 거임.

-그래서 두 시간 ㄷㄷ....

-이래야지! 장점만 가득한 물건이 체이서 앞에 딱 놓인다고? 그게 더 이상하다!

-어휴 삐딱해.

체이서는 채널을 보지 않았다. 봐봐야 놀림거리밖에 안 될 게 뻔하니 자신의 목표물. 「호펜의 양피지」에 집중했다.

그가 미궁의 핵에 손을 대자, 파직 대며 튕겨냈다.

"칫, 결계인가."

고민하던 그는 문득 생각해냈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

첫날 체이서의 이마를 찔러왔으며 마녀가 탐냈던 열쇠.

그거면 될 것 같다.

-뭐야 또 되돌아가?

-내일 하지?

-이미 일과 시간 한참 지난 거 알지?

체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진 않다.

체이서가 세차게 달렸다.

전차처럼 괴물들을 튕겨내며 도착한 입구 근처에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열쇠를 챙겼다.

-까아앙!

이전처럼 체이서의 머리를 찔러온 열쇠는, 도리어 저가 더 큰 타격을 입고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후론 그가 쥐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쿵쿵쿵

체이서가 다시 달렸다.

이젠 돌기둥 사이를 걷는 것도 익숙해져서, 그냥 달려서 지나쳤다.

「호펜의 양피지」 앞에서 헐떡거리던 체이서가 열쇠를 꾹 쥐고 다가섰다.

검은 기운이 위협적으로 일렁이지만 괜찮다.

카득거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체이서가 열쇠를 꺼내 들이댔다.

자존심 강한 두 아이템의 대결이 벌어졌다.

-파지지직

「호펜의 양피지」가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보다 강력한 물건은 맞다.

그러나 「호펜의 양피지」는 결계가 주능력이 아니었다. 그건 미궁화가 진행되며 생겨난 부속물에 불과했다.

반면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는 결계를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주된 능력이었다.

그러한 상성상의 문제로, 마침내 시원한 소리가 미궁 내에 울려 퍼졌다.

-찰칵!

복잡한 마나 패턴이 복잡한 결계 패턴에 스며들어 강제로 열어젖히는 소리는, 자물쇠를 여는 소리와 비슷한 효과음을 냈다.

파직거리는 둥근 막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불길한 일렁임은 계속되었다.

체이서는 양피지에 손을 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잡았다 요놈.

-ㅋㅋㅋ 아 끝인가? 좀 아쉽네.

-하나도 안 아쉬워···.

그가 양피지를 집어 드는 순간, 주변에 박동하던 붉은 액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것같이 맥동하던 미궁.

불그스름했던 창고 전체가 무기질적인 회백색으로 변하며 기이한 분위기가 사그라든다.

-궁

그리고, 미궁이 마지막 발버둥을 시작했다.

-구구구궁!

넓은 공간이 뒤흔들린다.

체이서를 괴롭혔던 돌기둥이 무너진다.

그리고 E구역의 선반에 있던 「미궁의 핵」들이, 진동으로 인해 바닥으로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체이서가 비틀거리며 제단을 붙잡는 사이, 호펜의 양피지가 팔락거리며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리고 검붉은 빛기둥을 뿜어냈다.

-콰아아아아

아니, 기둥이 아니었다.

어지러이 적힌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세차게 흘러나오는 광경이 기둥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문자가 겹쳐 문장이 되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미궁의 핵」들에 닿았다.

그리고, 오작동을 일으켰다.

-피이잉

바람 소리와.

-피해!

급박하게 올라가는 채팅창.

-콰아앙!

체이서의 몸이 거센 충격에 날아올랐다.

순간 달려든 「미궁의 핵」의 충돌로 인해, 체이서의 몸이 창고 벽에 틀어박혔다.

하나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주변에 널려있던 물건들. 미궁의 핵이 둥실거리며 제 몸을 띄우고 있었다.

그가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무수히 많은 「미궁의 핵」이 체이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콰광 콰앙!

연달아 쏟아지는 운석과 같은 박력.

천장에서 쩌저적하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먼지가 쏟아졌다.

그렇게 단단하던 창고벽도, 수많은 「미궁의 핵」이 한 점으로 내리쳐지는 것에는 유의미한 타격을 받는 듯 보였다.

-위이잉 -위이이잉

순간, 2층에서 들었던, 환풍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체이서의 갑옷과 닿은 창고벽. 심각한 데미지를 받은 부분 위로 정교한 마법진이 짜이기 시작했다.

수복 마법과 방어 마법.

창고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해 경보를 울리며 내장된 마법을 가동한 상황.

이는 바머의 일지에도 적혀있지 않던,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체이서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에선 미궁의 핵이 날아들고, 뒤에선 더없이 견고한 방어 마법이 버티고 있다.

그 사이에서 다져지는 상황을 버텨주는 갑옷은, 분명 기대보다 활약해주고 있다.

문제점은, 미궁의 핵은 핏빛 무기처럼 단숨에 부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소 두세 차례는 재차 부딪쳐도 거뜬했고, 그에 따라 공격이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호펜의 양피지」는 재차 자신의 저주를 발했다.

자신을, 미궁을 해결하려는 자.

해결사를 죽인다.

침입자를 죽인다.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권능을 꺼내 들었다.

양피지에 적힌 문자가 푸른 빛을 낸다.

스스로 해독한 문자는 허공에 나아가 다른 글귀로 적혔다.

암호로 가려진 겉모습을 벗고, 정보로서의 자신을 오롯이 되찾은 문장은 [마법 물품의 무조건적 강화]였다.

이 시대엔 신력과 다름없는 이적을 담은 그 정보는, 체이서를 조준하고 있는 미궁의 핵에 깃들었다.

-파앗

흔치 않은 아이템 강화 이펙트.

연신 빛이 번쩍이며 안 그래도 위협적이었던 「미궁의 핵」들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렇게 강화된 물건들은, 체이서의 몸을 부술 기세로 그가 박혀 있는 벽에 쏘아졌다.

-콰과광!

체이서도 서서히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갑옷이 흘려내지 못한 충격이 그의 몸에 닿아 멍을 새긴다.

갑옷 역시 「미궁의 핵」끼리 부딪치는 상황에 무적과도 같았던 내구가 조금씩 줄어드는 듯 보였다.

다이아몬드로 다이아몬드를 깎아내듯, 미궁의 핵이 미궁의 핵을 깎아내고 있다.

다만 지금 버텨낼 수 있는 건, 체이서가 입은 갑옷이 더 강력한 저주를 지닌 「미궁의 핵」이기 때문이다.

붉은 지대 근처의 미궁의 핵보다, 상층에 격리되어 있던 「데그랑드 전신 갑옷」이 한 차원 더 견고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대로 있다간 갑옷보다 자신이 먼저 부서진다.

체이서는 생각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아."

체이서는 갑옷에 탈착 명령을 내렸다.

그 의념을 받아들인 갑옷은, 체이서가 갑옷을 벗을 수 있도록 크기를 키워주었다.

물론 이 난장판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는 바보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전신 갑옷 속에서 팔이 자유로워진 체이서가 군복 품속을 더듬었다.

「귀환 주문서」.

그 귀한 물건이 고스란히 체이서의 품에 있었다.

호펜의 양피지에 깃든 사념이 얼마나 영리한지는 모르겠으나, 갑옷 속에서 사라진 그의 미약한 기세까지 알아챌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호펜의 양피지」는 물건이다.

사념이 담겨서 얼마간 지능을 가졌다 해도 고작해야 영리한 알고리즘 수준.

'목표가 파괴되었습니다. 공격을 중지합니다.' 정도는 가능해도.

'갑옷 내부에 적이 없습니다. 공격을 중지합니다.' 따위의 고차원적인 행동 패턴을 보일 리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이 사라져도 저 미궁의 핵은 이 갑옷이 부서질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을 낭비하고 낭비하다가 모두 사용하게 되면, 저 발악도 끝나겠지.

그러니까.

체이서는 귀환 주문서를 찢었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기이잉 철컥.

현 주인의 의념을 받아들인 듯, 갑옷이 모든 기능을 정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 「마공학 핵융합 광선」을 가동했다.

체이서의 흉갑 앞에 둥근 에너지 구가 생겨난다. 그 구는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지만.

-파콰아아-!

고장으로 인한 오작동으로 발사되지 못했다.

대신 돌개 바람처럼 흩어져 일대에 진득한 에너지 과포화 지대를 형성했다.

이는 체이서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저 이세계의 결전 무기가 과부하 되어 생긴 죽음의 지대는 미궁의 핵에도 충분한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그곳에 노출된 호펜의 양피지가 자신이 머금고 있던 영력과 마력을 줄기차게 내뿜으며 미궁의 핵을 강화해 날려 대는 것은, 이젠 공격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거였다.

두 물건은 체이서의 바람처럼 서로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체이서가 미궁. 아니 난장판을 눈에 담았다.

그는 사실 지금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저 현상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이 펼친 장막 밖에서 체이서의 시야에 가까워져 오는 미궁의 핵은 기괴하게 생긴 가면이다.

가면 뒤에서 저주의 물건들이 연신 빛을 번쩍이며 강화음을 내고, 날아들 준비를 하고 있다.

-구구궁

호펜의 양피지가 발하는 마력에 따라 창고가 흔들린다.

그로 인해, E구역의 드넓은 벽에 빼곡히 위치한 선반에서 무수한 미궁의 핵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 마계 심처와 같았던 광경이 확 일그러지고, 체이서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어둠과 정적.

그가 다시 눈을 뜨자, 앞에 보이는 것은 고풍스러운 창고 문이었다.

갑작스레 음소거된 듯 조용한 공간.

체이서가 잠깐 비틀거리더니 곧게 섰다.

첫 귀환 마법은 살짝 어지러웠지만, 상당히 신비한 경험이었다.

체이서가 제 몸을 살폈다.

그의 몸은 온통 상처와 멍투성이였고, 밀려오는 탈력감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창고를 나서는 그의 입가엔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내일 확인해보죠."

그는 오늘의 위기도 가볍게 이겨냈다.

***

"···이리 와보시겠어요?"

마리나는 너덜거리는 체이서를 보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붉은 포션을 꺼냈다.

근무시간 내내 붉은 액체로 샤워하다 온 체이서가 눈앞에서 찰랑이는 빨간 포션에 흠칫했으나, 이내 감사를 표하며 다가갔다.

13화. 마녀의 의뢰를 해결했다.

13화.

체이서의 등에 뿌려진 포션은 순식간에 흡수되어 온몸의 멍과 상처를 제거했고, 남은 절반은 그의 입에 들어가 회복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했다.

"익숙해 보이네요?"

마리나는 포션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순식간에 회복되는 몸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 체이서를 보며 신기하게 생각했다.

제작 기술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연금술 분야는 발전이 느리기로 유명하다.

붉은 포션과 푸른 포션의 제작법과 재료는 수백 년간 변하지 않았고, 가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아 상당한 고가였다.

쓰이는 재료가 값비싸며, 그걸 제조할 수 있는 마녀 또는 연금술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션 종류보단 간이 주문서 쪽이 더 발달했다.

발전된 마공학 기술로 힐링 마법을 쪼개 담은 주문서는 출혈을 멈추는 등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좋았다.

물론 그것마저도 싸지는 않았지만.

기사 정도나 되어야만 예비로 한두 병을 가지고 다니고, 웬만한 상처에는 쓸 생각을 하지 않는 포션을 이렇듯 여유 있게 사용하는 체이서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알기로 저 젊은 청년은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부대로 온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이서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빨간색 포션은 체력을 올려준다.

그건 진리 아니던가.

"하루 미뤄졌는데, 내일은 정말 끝날 겁니다."

마리나는 걱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저렇게 말하곤 오늘 더 크게 다쳐왔다.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이 의뢰 하나에 걸린 게 워낙 많았다.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말릴 수도 없다.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그녀는, 그저 이 일이 잘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

다음날. 체이서가 미궁 내부로 향했다.

붉은 구역이 사라져서 그런지 붉은 슬라임이 없어졌고, 도플갱어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학살하긴 했지만 상당히 남아있던 괴물들은 없고, 그들이 몸에 품거나 걸치고 다니던 「미궁의 핵」만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언제 다 치우냐 저거···.

-ㅋㅋㅋ 일해라 체이서.

-두근두근. 결과가 어떻게 나왔으려나?

그리고, 체이서가 미궁의 심부였던 곳. E구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선 아직도 소음이 일고 있었다.

다만, 어제처럼 어지러울 정도의 굉음은 아니었다.

-쿵··· 쿵···

「그록스의 대검」

커다랗고 투박해 보이는 대검 하나가, 이제 완전히 찌그러진 갑옷에 반복해서 내리쳐지고 있었다.

그 주변.

-장관이네.

고위 마법이나 검술, 가호를 지닌 해결사들이 부수지 못했던 골칫거리들.

수많은 「미궁의 핵」이 힘을 잃은 채 산산조각이 나, 갑옷이 틀어박혔던 자리 밑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박살 난 드래곤의 레어를 보는 느낌인데?

-저게 미궁의 핵만 아니었어도, 엄청난 가치의 보물이 잔해가 되어 산처럼 쌓인 건 맞지.

-저거 부술 때마다 보상해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맞아. 스펜서가 미궁의 핵 치울 때마다 대가 준다고 했었음.

-이 집 서비스 잘하네.

-ㅋㅋㅋ 걍 이제 인정해야 함. 체이서는 유능하다.

-인정.

마침내 대검이 갑옷을 뚫었다.

그리고 쑥 빠져나오며, 빛을 잃은 데그랑드 풀 플레이트를 잔해의 산 위로 떨구었다.

-절그럭

고맙다. 이렇게까지 오래 버텨줄 줄은 몰랐는데.

저 갑옷이 부서졌지만 괜찮다.

바머의 일람에 따르면, 3층에는 더 좋은 전신 갑옷이 있다고 하니까.

-갈 순 있고?

그래, 무언가가 3층에서 움직이고 있었지.

하지만 쓸만한 갑옷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방법은 찾으면 다 나오니까.

체이서는 그렇게 갑옷을 잃은 아쉬움을 달랬다.

"정말 괜찮아요. 또 억지로 춤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요."

결코 여우와 신포도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아깝지 않다.

체이서가 애써 갑옷에서 눈을 돌렸다.

-아, 그 녀석. 좋은 녀석이었지.

-충성스럽고 말이야.

-X

-눈에서 땀이...

-듬직하기도 했지.

체이서는 꽤 놀란 상태였다.

저렇게 많은 미궁의 핵을 버텨내는 것도 모자라 도리어 부술 줄이야.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층이 다른 물건은 확실히 더 단단한 게 맞는 듯했다.

현실적으로도 굳기 1도 차이로 상당한 격차가 나고, 그 격차는 뒤죽박죽이다.

모스 8도와 9도의 차이는 2배이나, 모스 9도와 10도 차이는 4배.

창고 한 층 차이는 과연 몇 배나 더 단단할까?

현대의 광물학자가 와서 측정해보지 않는 한은 영영 모를 일이지만 이번 일로 예측해볼 수는 있다.

최소 수백 배는 강할 것이다.

체이서는 이 세상의 물리학 법칙은 잘 몰랐으나, 자기보다 더 단단한 것에 반복적으로 내리쳐지는 물건은 반드시 박살 난다는 상식은 안다.

아무리 단단한 물건이라도 일정 이상의 견고함과 무게를 지닌 물체로 오래 내리친다면 결국엔 부서진다는 것도 알고.

그러나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다.

저 독한 양피지는 밤새 저 깨지지 않는 갑옷에 수많은 미궁의 핵을 미친 듯이 처박아댄 것이다.

부서지면 다른 미궁의 핵을, 또 부서지면 다른 미궁의 핵을 보내어 끝끝내 갑옷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체이서는 깊게 한숨 쉬었다.

미궁의 핵이 대규모로 죽어 만들어진 이 언덕과 그 위에 힘없이 앉아 최후를 맞이한 데그랑드 전신갑옷의 모습은, 홀로 수 백의 적을 학살하고 죽은 영웅의 기백과 아름다운 희생정신, 주인에 대한 사랑 등이 느껴져 안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냥 아깝다고 말해 체이서.

-그래, 체이서. 그냥 인정해.

미궁의 핵으로 미궁의 핵을 부순다는 것. 강력한 미궁의 핵을 부술 한 가지 방법을 찾은 셈이지만, 사실 해결사들이 이런 생각을 안 했을 리가 없겠지.

다만 장비할 만한 「미궁의 핵」은 장비할 수 없는 「미궁의 핵」보다 단단하지 못했을 거고, 그렇기에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비할 수 있는 체이서는 정작 근력이 달려서 의미가 없다.

저주가 강하면 장비하기가 힘들고, 장비가 가능한 미궁의 핵은 다른 미궁의 핵보다 덜 견고하다.

결국 미궁의 핵을 무기로 미궁의 핵을 부수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이런 상황은 굉장히 예외적이다.

저런 강력한 미궁의 핵끼리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사례로 기록해둘 만한 가치가 있지.

체이서가 태블릿에 이번 일에 대해 적어 넣었다.

그리고「호펜의 양피지」에 다가갔다.

-우웅

체이서를 발견한 「호펜의 양피지」가 희미하게 박동했다.

갑옷을 부쉈던 대검이, 양피지를 호위하듯 공중에서 움직여 체이서를 겨누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호펜의 양피지는 이미 힘을 다했다.

지옥에서 돌아온 듯 이글거리던 아우라가 없어서 알아보기 쉬웠다.

양피지를 지키는 대검 역시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투박한 몸에 거미줄 같은 실 선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저 공중에 띄워져 있는 것만으로도 머지않아 부서질 듯한 「그록스의 대검」은, 집요한 「호펜의 양피지」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여 재차 쏘아졌고.

-콰아아앙!

체이서의 한참 앞에서 추락했다.

바닥에 틀어박힌 검 앞에 체이서가 섰다.

손잡이를 잡자, 검날부터 크로스 가드까지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손잡이만 남은 검을 잡아 잔해 위에 던져 올린 체이서가 기분 좋게 말했다.

"하나 추가."

그가 「호펜의 양피지」에 다가갔다.

불길한 빛이 깜빡였다.

어제 보였던 방대한 힘이 이젠 다한 듯 체이서의 손에 가볍게 틀어 잡혔다.

그러나 미궁이 사라지고 미궁화하며 생겨났던 막대한 힘이 사라졌다고 미궁의 핵에 내재된 저주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체이서가 양피지를 쥐자 「호펜의 양피지」가 당연하단 듯 저주를 심었다.

그러나 정신을 침범하는 암호화의 저주는 체이서에게 아무런 효과를 줄 수 없었다.

의뢰가 끝난 것이다.

"끝났다."

-와아!

-진짜 끈질기고 독하긴 하네.

-만만하고 쉬운 것보단 재밌지 않아?

-어려운 일을 쉽게 해결하는 게 재밌지. ㅎㅎ

그는 양피지를 품 안에 잘 챙기곤 주변 정경을 찍어 태블릿에 담았다.

시청자들이 장관이라고 했던 미궁의 잔해가 태블릿에 고스란히 담겼다.

체이서가 창고 밖으로 나왔다.

대낮의 햇빛에 눈이 부셨다.

유달리 이른 퇴근. 그러나 체이서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체이서가 숙소로 돌아가자 마리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더군다나 체이서는 전날 포션으로 치료한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어제 체이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늘 끝난다고 했지.

그러한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체이서가 양피지를 꺼내며 당부했다.

"잘 처리해주세요."

"와아 성공하셨군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근데 괜찮으세요? 그걸 맨손으로 집고도···."

그러나 환호의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양피지를 쥔 체이서의 맨손에 경악했기 때문이다.

어디 물건에 담아올 줄 알았지, 저렇게 대놓고 만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꽤 거창한 장갑을 사용했다.

반짝거리는 빛을 내는 데다 손등 부분엔 홍옥까지 붙은, 누가 봐도 보물 같은 장갑.

「무의미한 손길」-----------------------

요정 여왕이 사랑하는 자의 날개로 손수 만든 장갑.

이 장갑에 닿는 것은 일시적으로 의미를 잃는다.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

일단 엄청난 보물인 건 맞는 듯하다.

그 장갑이 끼워진 마리나의 가느다란 손이, 양피지가 쥐어진 체이서의 손을 가리켰다.

"지금 계속 공격하고 있는데요?"

"네? 얌전한데···."

오히려 열쇠가 계속 날뛰지 얘는 저주가 통하지 않을 때부터 조용했다.

갑옷을 벗고 나니 거짓말처럼 도로 건방져진 열쇠는, 다시 창고 입구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영혼을 파고들려고 악착같이 긁어대고 있네요. 하여튼 고마워요."

그녀는 더 보고 있기 괴로웠는지 얼른 체이서의 손에서 「호펜의 양피지」를 꺼내 갔다.

"확실히 없애주시는 거 맞죠?"

"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고위 연금술의 제물로 쓸 거라서요. 이 물건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예요."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이서가 문을 보았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니, 이미 고양이가 창틀을 넘어가고 있다.

-먀오.

꼬리가 손을 흔들듯 흔들렸다. 다음에 보자는 거겠지.

그렇게 그녀가 사라졌다.

"네 나갑니다! 아, 가비 상병님."

"어. 역시 복귀해 있네? 별일 없지?"

"그럼요."

가비 상병은 체이서의 몸을 슬쩍 살피더니, 건강한 걸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스펜서 담당관이 종종 살피라고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신병들이 병사 숙소로 들어올 거야."

"아 그렇군요."

"그래. 아직 훈련 기간이 좀 남긴 했는데, 나머진 전부 정훈과 이론 교육이거든. 아마 내일은 같은 방을 쓸 녀석들이 올 거니까 알아 두라고."

"네. 감사합니다."

그는 대충 손을 휘적이더니 나갔다.

아무래도 일찍 퇴근한 것에 걱정되어 확인하러 온 것 같다. 숙소에 관한 이야기는 온 김에 전했을 테고.

신병에게 저런 걸 일일이 설명하러 찾아오는 상병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여튼 친절해.

체이서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마음이 탁 풀리며 잠이 쏟아졌다.

***

"그래. 보고해보게."

스펜서는 이번 보고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상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대하는 게 이상했다.

-놀라 자빠지겠네.

-기대된다. 대체 어떤 반응이려나.

체이서가 차분히 지금까지 일주일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렇게 현재 바머의 일지에 적힌 내용의 이 정도 분량을 태블릿에 옮겨 두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작성하겠습니다."

체이서가 태블릿에 담긴 정보를 보고했을 때, 스펜서는 짧게 치하했다.

"잘했군."

이 짧은 기간 홀로 정리했다기엔 대단한 양이었다.

체이서의 보고가 이어졌다. 마녀의 영내 침입에 대해 말할 때, 스펜서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녀가 불법으로 영내 침입을 했다는 건 알지."

그는 가호 「내려다보는 눈」으로 인해, 그녀가 몰래 창고로 들어갈 때도 알고 있었다.

마녀는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존재다.

더군다나 목표가 미궁의 핵인 듯하여 뭘 하려 하는지 두고 보던 참이었다.

같잖은 짓을 시도하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처리한 뒤 모든 증거를 지우려 했겠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문제가 아니라 손님이었다.

체이서에게 접근할 땐 조치할까 싶었으나, 어찌 된 것이 하루 만에 의뢰자와 의뢰인 관계가 되어버렸지.

"자네의 의뢰자란 것도 알고. 「호펜의 양피지」를 제거해줄 고마운 사람이란 것도 아네. 그러니 다음으로 넘어가지."

스펜서에게 그녀의 불법 침입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중요할 뿐이었다.

문제가 안 일어났고 안 일으켰으며 앞으로도 안 일으킬 거면 됐다.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창고 내 미궁이 해결되었고, 「붉은 구역」의 핵이던 「호펜의 양피지」를 마녀에게 양도하였습니다."

"···."

"그리고 「미궁의 핵」 984개가 해결됐습니다. 거기에 아직은 마녀가 가지고 있는 「호펜의 양피지」를 더하면 985개입니다."

스펜서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니까, 창고에 있던 미궁을 자네 혼자서 해결했단 말인가?"

체이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최선을 다한 만큼,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선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말할 수 있다.

그게 비록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는 것이더라도.

체이서는 자료 화면으로 태블릿에 담긴 창고 내부 사진을 화면에 띄워 보여주었다.

스펜서가 바로 말했다.

"전송해주게."

스펜서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고대 최신 기록장치」에 전송된 자료를 열었다.

14화. 마녀의 보상을 받았다.

14화.

스펜서가 연 사진 속.

이리저리 구겨지고 심장 부위에 거친 검상이 보이는 전신 갑옷이 보인다.

그 갑옷은 온갖 마법 물품들. 그가 증오하는 「미궁의 핵」들이 처참히 부서져 쌓인 산 가장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듯한 자세.

박살 나서도 묘한 멋이 있었다.

비장미라고나 할까.

물론, 체이서가 멋지게 자세를 만져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사진 하나를 찍을 때도 최선을 다했다.

-거짓말. ㅎ

-미련이 절절 흘러넘치더만.

스펜서는 창고 내부에 쌓여 있는 「미궁의 핵」이었던 것들.

그 잔해의 산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체이서의 미련이 만든 그 사진은 대부호의 예술 감각을 자극한 듯했다.

"놀랍군."

스펜서가 그 사진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햇빛도 비추어 보고, 사선으로도 보고, 멀찌감치 놓고도 본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로 사각형을 만들어 그 안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곤 체이서에게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했다.

"내 기분이 어떤 줄 아나?"

이때, 가비 상병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내 전 재산을 주고 싶을 정도라네."

삐끗했다.

그러나 그는 프로페셔널한 상병.

기어코 흘리지 않은 찻잔 두 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곤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업무가 과중하더니, 드디어 스펜서 담당관님께서 미치셨나?'

다만 조금 불경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조금 진정된 건지, 스펜서 담당관이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홀로 미궁을 들어가서 해결하는 건, A급 이상의 해결사나 가능한 줄 알았건만···."

아주 특별한 상황이긴 했다.

보통 미궁엔 저렇게 다양한 능력을 지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오직 적밖에 없는 고독한 공간이다.

환경 전체가 침입자를 죽이려 들며, 그곳엔 무엇이든 막아줄 강력한 갑옷도, 결계를 뚫어줄 만능열쇠도 없다.

오직 자신의 장비와 능력으로 뚫어내야 하는 현세에 내린 혼돈.

체이서 역시 그런 곳에 홀로 들어간다면 저주에 당하진 않겠지만 이렇듯 해결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도리어 각종 물리력에 다져져 죽겠지.

그러나 해결은 해결.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그마치 30명의 해결사가 들어가서 못해낸 일을 저 신병이 혼자서 해냈다는 거다.

그렇다면.

"상을 내려야겠군. 그래. 자격이 있어. 받을 자격이···."

스펜서는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는 듯, 보고 시간을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기대해도 좋네."

체이서가 담당관실에서 나왔다.

-그래도 좀 실망스러운데?

-겨우 저 정도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

시각적인 반응이 부족하여 보이자 기대가 어긋났는지 불만스러워하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체이서에게는 힘든, 아니 누가 오더라도 힘든 일을 이렇게나 잘 해냈는데 고작 저 정도 반응이라니.

그러나 체이서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굳게 믿었다.

저택을 제공한다고 말할 때 느꼈던 스펜서의 어마어마한 배포를.

최선을 다해 일하면 담당관 역시 최선을 다해 퍼줄 것이다.

***

체이서의 숙소에 편지가 도착했다.

톳테마을 4번 길 23번지.

<마리나의 마법 찻집>

톳테마을은 수도 외성 인근에 조성된 마을로, 나름 번화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중규모 마을이다.

마녀는 그곳에 자신의 작업실 겸 찻집을 차렸다는 듯했다.

편지에는 이곳에서 약 제조를 마무리한 뒤 떠날 거라고 했다.

「별 무리」의 제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데다, 백색 숲이 멀어서 가는 와중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확실히 「호펜의 양피지」를 지닌 상태로 이리저리 움직여 다니는 건 위험할 것 같다.

-마녀가 정착한다고?

-흐음···. 좋은데? 마법에 전문가. 더군다나 호의를 가진 사람은 인맥으로 충분하지. 주변에 있어서 나쁠 게 없어.

체이서가 편지에 적힌 주소대로 찾아갔다.

그녀의 사업장은 톳테마을의 한 상업 건물 1층에 입주해 있었다.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반짝거리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간판에는 마녀 모자를 쓴 고양이가 찻잔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빙긋 웃는 얼굴 그림이 붙어있었다.

그 아래엔 '마리나의 마법 찻집'이 화려한 필기체로 적혀있다.

움직이는 그림은 창고 2층 계단에서 본 적 있었지.

그림 속의 찻잔이 빙글빙글 돌았다.

-에옹

소리도 났다.

···완성도가 쓸데없이 높아.

마법 잡화점 겸 찻집이 잘 어우러진 완벽한 실내는, 외부에서 언뜻 보더라도 당장이라도 개업해도 될 정도였다.

역시 마녀. 빠르고 수완이 좋다.

마법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준비할 수가 없었겠지?

건물을 구경하며 신기해하던 체이서가 내부로 들어갔다.

-딸랑

"아직 개업하지 않았답니다~ 모레 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던 마리나는 체이서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리고 주기로 한 대가를 즉시 준비했다.

건물 지하에 갖춰진 마리나의 작업실.

체이서를 이곳까지 찾아오게 만든 이유는, 바로 보상을 줄 아공간 주머니의 제작에 특별함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자, 여기에 핏방울을 떨어뜨려 주세요."

보글보글 끓는 항아리 안엔 회색 액체가 있다.

"신기하죠? 고급 연금술에서 자주 보이는 '혼돈상'이랍니다."

-저게 나오면 품질이 무작위지. 실력이 그리 대단친 않나 보군.

-우리랑 비교하면 안 되지 ㅋㅋㅋ 그래도 혼돈상을 띄워서 랜덤이라도 내는 게 어디야. 운만 좋으면 최상급도 만든다는 거잖아.

-그러네. 중급 이상 품질을 죽을 때까지 못 뽑아내는 연금술사도 널렸으니까.

-그렇지. 저 시대상으론 굉장히 유능한 편이라고 본다.

체이서가 '혼돈상' 위로 핏방울을 떨구었다.

마리나는 바쁘게 이런저런 재료를 투하하고 이리저리 섞었다.

젓는 방향 하나까지 신경 써야 했다. 온도 조절. 마력량 조절. 재료 투입 순서 등.

하는 일이 많고 복잡했으나,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대가의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그렇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체이서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하는 건 귀속 작업이에요.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대신, 추가로 혼돈상이 생기거든요. 가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물건이 나온답니다."

랜덤에 랜덤을 더한다.

운만 좋으면 굉장한 물건이 나오지만, 반대로 쓰레기같은 물건이 나올 수도 있겠지.

갑자기 전생에서 가챠를 하던 당시의 안 좋은 기억이···.

-퍼엉

귀여운 소리와 함께, 연금술이 끝났다.

"성공이에요!"

그녀의 바람대로, 상당한 물건이 나왔다.

「체이서의 아공간 주머니」---------------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의 공간이 뚝 떼어져 주머니가 되었다.

영혼과 연결되어 심상을 파악해 주인이 생각하는 가장 편의적인 휴대용 보관소로 기능한다.

용량: 30x6칸.

무게제한 : ∞

‗‗‗‗‗‗‗‗‗‗‗‗‗‗‗‗‗‗‗‗‗‗‗‗‗‗‗‗‗

액체는 저절로 형태를 갖추더니 손바닥보다 더 큰 사각 가방 형태가 되었다.

주머니라고 하기엔 크고 묘하게 현대적인 것이 핸드백처럼 보이기도 했다.

"디자인이 참 예쁘네요. 피의 주인이 지닌 심상을 반영했을 테니, 체이서님의 감각인가요?"

마리나가 따끈한 신상을 항아리 속에서 꺼내 들었다.

체이서가 가까이 다가가자 가방이 형태를 잃고 흐릿해진다.

흐릿해진 가방이 백광이 되어 반짝이더니, 체이서의 머리로 빨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마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형태가 없이 부여되는 귀속 아이템은 잃어버릴 일도 없고 부서질 염려도 없어서 상당히 좋았다.

사실상 내구력이 무한이라는 뜻이 되고, 손이 남아 사용하기 편리하기도 하다.

신비한 효과가 사그라든 후, 마리나가 활짝 웃으며 축하했다.

"정말 축하해요! 이런 좋은 물건은 정말 간만이네요."

체이서는 제 눈앞에 떠오른 180개의 반투명한 네모 칸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눈앞에 뜬 아공간 주머니는, 게임 속에서 흔히 보던 인벤토리의 형태 그대로였다.

체이서가 가장 편리하게 생각하는 휴대용 보관소란 곧 게임 속의 인벤토리였기 때문이다.

체이서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 물건은 그의 업무는 물론이고 일상에서도 엄청난 편리함을 줄 것이었다.

그녀는 흐뭇하게 웃더니 가게를 나서는 체이서에게 말했다.

"언제든 놀러 오세요."

***

체이서가 부대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신병들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방에 배정된 신병은, 놀랍게도 식당에서 시비를 걸었던 그 트리오였다.

빵을 만드는 브레드.

투시하는 더글래스.

물 위를 걷는다는 워터맨.

그들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다가 체이서가 들어오자 순간 입을 다물었다.

"···."

체이서는 으쓱하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그의 자리를 빼거나 물건을 멋대로 흩트려놓는 등의 짓궂은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우유」-----------------------------

신선한 우유.

‗‗‗‗‗‗‗‗‗‗‗‗‗‗‗‗‗‗‗‗‗‗‗‗‗‗‗‗‗

의심스러움에 체이서의 눈동자가 해석한 물건은 그저 신선한 우유였다.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진 우유 옆엔 따끈한 빵도 있었다.

「브레드의 빵」-----------------------

제빵의 신의 가호를 받은 자가 가져온 빵.

제빵의 신이 총애하는 아홉 제자가 만드는 빵은 특정 장소에 보관되다 신의 가호를 받은 자에게 제공된다.

이 가호는 제빵사의 자질이 좋은 인재가 이 맛을 보고 발전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브레드가 소환함.

‗‗‗‗‗‗‗‗‗‗‗‗‗‗‗‗‗‗‗‗‗‗‗‗‗‗‗‗‗

이렇게 선물이 올려져 있었다.

물론 렌즈가 없었다면 의심스러워서 찜찜했겠지만, 일단 장난쳐놓진 않은 것 같다.

으음. 미궁 물품이 아닌 일반 물품을 해석해도 이렇게 쓸만한 정보를 주는구나.

새삼 렌즈의 효용성에 감탄하면서 체이서가 두 음식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세 사람이 움찔했다.

"잘 먹을게."

"그, 그래!"

브레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로 대답했다.

혈색 좋은 토실한 볼이 밀려 올라가며 미소를 지었다.

옆의 둘도 표정이 좋아지는 게 은근 긴장했던 것 같았다.

"저번엔 미안했다. 우리가 너무했지?"

체이서가 고개를 저었다.

"훈련하는 데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이해해."

뻔했다.

저들의 능력은 전투에 관련되지 않았다.

근데 미궁은 공격적이므로, 특무부대의 신병 훈련엔 전투 훈련이 많았다.

저런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면 어디에서도 인정받거나 특별한 취급을 받았을 테지만, 여기 와서부터는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했을 거다.

훈련을 따라가기 벅찬 데다 재능에도 회의감이 느껴지고, 경쟁과 비교에 지친 상태였을 대다수의 신병들.

창고나 정리하고 있는, 특별취급 받는 사람을 보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이상했다.

그리고, 체이서는 곧 나갈 거다.

스펜서가 주기로 한 저택을 받으면 숙소에서 나가서 살 생각이었다.

출퇴근할 수 있다는데 굳이 부대 막사에서 여럿이 지낼 필요가 없다.

그러니 누가 룸메이트로 오든 전혀 상관없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훈련지나 훈련소 식당에서 먹던 신병들이 돌아왔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평소엔 휑하던 식당이 평소보다 훨씬 붐볐다.

일병은 이 식당에서 먹지만 시간이 달랐고, 상병 이상부턴 다른 식당에서 먹는다고 했다.

전세 낸듯한 식사 시간은 이제 없는 건가.

체이서가 소소한 아쉬움을 느끼며 밥을 받아 앉는데, 그를 따라온 브레드 일행이 앞자리와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그때 주변에서 체이서를 주제로 말하는 듯한 대화가 들려왔다.

"저기 체이서다. 저번에 싸웠던 놈들이랑 같이 있네?"

"야 근데 건드려도 될까? 쟤 그 창고에서 일한다며."

"맞아. 최근 신설된 팀 30명 중 세 명만 살아나온 미궁이 거기에 있다더라고."

"미궁 척후라고 들었어. 매일 둘러보고 담당관님께 보고한다고···."

"야 그걸 믿냐? 미궁은 창고 한참 안쪽에 있고, 슬슬 피해 다니기나 하겠지.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위험한 미궁을 신병에게 맡겼다고?"

"만에 하나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 쳐도, 그래봤자 천민이잖아?"

"그치. 지금이야 무슨 이유인지 혜택 받지만 그래봤자 백날 천날 병사로 보내겠지?"

체이서는 갸웃했다.

저렇게 다 들리게 뒷담화를 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었다.

워터맨이 말했다.

"···쟤네는 귀족들이야."

"귀족도 병사로 오나?"

"훈련은 병사부터 받아. 그리고 빠르게 진급한다고 들었어."

"그렇군."

군대. 누군가는 그저 끌려온 곳이지만, 누군가에겐 작위를 얻기 위한 고속 루트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런 특혜를 받을 녀석들이 저렇게 뭉쳐 다니며 나쁜 짓을 도맡아 한다는 거네.

체이서는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듯한 녀석이 체이서와 눈을 마주쳤다.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시선을 돌리고 옆 사람을 팔꿈치로 찔러 무슨 말을 했다.

"저기 귀족파의 우두머리는 도미닉. 풀바인 후작가 막내라고 하더라고."

브레드가 가리키는 걸 보자, 방금 씩 웃은 녀석이 도미닉이었다.

"저 녀석들 악질이야. 훈련 간에 사고가 터지거나 포기하고 나간 신병이 꽤 되는데, 그 뒤에 쟤들이 늘 있었거든. 보통 눈에 띄거나 잘하는 애들이 당했어."

시시덕거리면서 한 명 잡고 괴롭히는 것을 즐긴다는 소문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서 무마됐거든."

"교관들도 뭔갈 아는 것 같긴 한데, 그러려니 하고 있어. 훈련장에서 일어나는 사고 정도로 다치거나 포기할 정도면, 애초에 해결사가 될 수 없다는 눈치야."

"인력이 부족하다지 않았나?"

"부족한 게 짐덩이보단 낫다더라고···."

그들이 시무룩해졌다.

체이서는 얼른 그들을 달랬다.

"너흰 분명히 유능한 해결사가 될 거야."

"말만이라도 고맙다."

그들의 말은 꽤 도움이 되었다.

훈련을 받지 않아 동기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브레드 일행의 생생한 이야기는 사회적 경험치가 되어주었으니까.

체이서는 금방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체이서가 식당을 나가려는데, 앞을 가로막는 자가 있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뒤에서 더글라스의 말이 들려온다.

브레드 트리오는 오늘 체이서가 시비 걸릴 것을 얼추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붙어 있었군.

마음은 고맙지만, 사건 예방엔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체이서는 앞을 가로막은 병사를 난감하게 바라봤다.

언제 앞질러 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귀족 일행 중의 한 사람이다.

도미닉이 옆구리를 찔렀던 남자.

체이서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거한이었다.

거한은 상당히 강할 게 분명했다.

대머리였기 때문이다.

15화. 저택을 받았다.

15화.

체이서가 귀족들이 앉아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우두머리격인 도미닉이 보였다.

도미닉은 여전히 삐딱하게 웃으면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주 재밌어서 죽으려고 하는군.

"어딜 보는 거냐 하층민."

순간, 제대로 된 시비가 들어왔다.

대머리 거한은 브레드 트리오와는 다른, 진짜배기 양아치였다.

거한이 입을 열었다.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스펜서 가문의 관심을 받았지? 역겨운 패배자의 냄새가 날 화나게 하는군."

체이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거한이 먼저 말을 뱉었다.

"주둥아리 닥쳐! 넌 말할 자격도 없어! 이 식당을 함께 쓰는 것도 모자라 이 몸 앞에서 입을 열게 둘 것 같아? 그건 귀족에 대한 모독이다 이 머저리야."

그는 입을 열려는 체이서의 말을 매번 끊어내곤 집요하게도 욕설을 퍼부었다.

현대에서 보던 '말이 곧 랩'이라던 형님들 같았다.

"어···."

"그러니 조용히 들어 농부 새끼야."

끊임없는 디스가 틈도 주지 않고 쏟아져 내려와 체이서를 벙찌게 했다.

"너 같은 그지 새끼가 패배자가 될 때, 네가 그저 그런 병사로 빌빌대고 있을 때, 나는 저 위에 대령까지 달 테고, 네 위에서 내려다 볼 거다. 30대 초반에 별이 된 발터 공작님처럼 될 거라고."

결국 체이서가 대답할 기회를 얻었을 때는, 얼빠진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게 누군데?"

이미 앞의 내용에 반박하기엔 너무도 많은 문장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ㅋㅋㅋㅋ 기껏 대답하는 게 질문이냐고.

-체이서 딱봐도 말싸움 못할듯.

-그럼 싸움으로 가자!

-아오 체이서한테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게.

-한주먹? 저 떡대를? 체이서가 지지 않냐?

-그런가?

-아니지. 맵이 중요하잖아.

-ㅋㅋㅋ 아 창고 맵?

-고럼. 맵은 웨어하우스지.

체이서가 채팅을 보고 피식 웃었다. 현대에서 했던 게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웃어?"

"아 미안. 그래서 발터 공작님이 누구신데?"

체이서는 저 콧대 높아 보이는 귀족 녀석이 그토록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했으나, 상대는 자신이 존경하는 분을 모욕했다고 느끼는 듯 얼굴이 시뻘게졌다.

"너 이 새끼. 한 번 죽어봐야겠다."

-저걸로 그냥 흥분해버린다고?

-뭐야 이러면 체이서가 이긴 거 아냐?

상대방이 상체를 내밀며 접근해왔다.

체이서는 반사적으로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귀환 주문서가 손에 잡혔다.

눈앞의 병사에게 맞느니 주문서 한 장을 쓰겠다는 통 큰 판단이었다.

어차피 다 쓰면 다시 받으면 되니까.

-드르륵

그 순간 식당 문이 열렸다.

공교롭게도 가비 상병이 들어왔다.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방문이다.

가비 상병이 상황을 보더니 얼굴을 굳히며 체이서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체이서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일이 커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수십 가지 일을 잘 해내도, 이런 잡스럽고 귀찮은 일 하나에 평가가 크게 떨어지는 법이었다.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담당관님께서 부르신다. 저택이라고 말하면 이해할 거라고 하시던데?"

체이서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 집 마련의 꿈이 가까워진다.

"드디어!"

"미궁을 해결한 해결사님이신데. 당연하지 않겠어?"

가비 상병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그냥 걱정되는 신병이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체이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인재였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식당 밖으로 향했다.

거한도 상병을 건들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뒷걸음질 친 채로 가만히 있었고.

그러나 그들의 대화로 인한 파장은 작지 않았다.

-두둥.

그런 소리가 식당에 울려 퍼진 듯했다.

"해결사?"

"쟤가 미궁을 해결했다고?"

"저택은 또 무슨 소리지?"

신병들이 웅성거리는 식당 속에서 도미닉은 이제 미소짓지 않았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체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저렇게 무대응으로 끝내는 건가?

어떤 녀석인지 확인하려는데 도통 화를 내지 않으니 도리어 답답했다.

개싸움이든 제대로 된 전투든 실전에서 가호를 쓰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데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참을성이냐. 미궁을 해결했다는 헛소리는 또 뭐고.

저 녀석 대체 군 생활을 어떻게 하는 거지?

도미닉의 생각이야 어찌 됐든, 체이서는 정신없는 욕설 따위는 이미 잊어버렸다는 듯 가비 상병과 친근하게 대화하며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바로 이사할 거야?"

"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하하, 출퇴근하다 보면 후회할걸?"

도미닉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마음을 굳혔다.

본인이 나서기로.

이유?

그거야.

저 녀석이 거슬리니까.

***

담당관실에는 스펜서가 없었다.

대신 그가 부른 스펜서 가(家)의 사용인이 와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체이서님. 저는 제라딘 님의 명령으로 금일 저택 계약과 안내를 맡을 요하임 스펜서입니다."

스펜서 가(家)의 사용인이라는 요하임 스펜서는 정중해도 너무 정중했다.

아직도 현대 한국의 유교 사상에 영향을 받는 선비의 후손 체이서는 얼른 말했다.

"스펜서란 성이면 귀족 아니신가요? 말씀 낮추시죠."

"체이서님이야말로 말씀 낮추시지요."

성이 없는 자에게 말을 낮추라 하는 성이 있는 자.

분명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스펜서 가의 가신인 요하임에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역시 능력만으로 귀족의 성을 받은 사람이었고, 본래는 그저 평민이었다.

작위는 없으므로 어디 가서 귀족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펜서 가 내에서의 직위와 성만으로도 여느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했다.

그는 상대의 핏줄과 현재 위치는 전혀 관심 없었다.

오로지 능력.

능력주의가 뼛속 깊이 각인된 요하임에게, 체이서는 머지않아 귀족이 될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셋째 도련님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면서 확인한 체이서의 저력은 솔직히 믿기 힘들 정도였다.

아직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 저 신병이 미궁을 해결했다는 정보는 가문의 정보 담당자들이 애매한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이게 가능해?

어떻게 한 거지?

대륙 곳곳에서 모인 천재들에게 이런 물음표를 찍게 만드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날아오를 일만 남은 잠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하임은 금일 수행도 일절 결점 없이 해낼 생각이었다.

그가 체이서를 안내해 대기 중이던 마차에 태웠다.

-오 ㅋㅋ 저게 마차야?

-쓸데없이 고퀄이라 멋있어.

윤기 흐르는 말에 장착된 장비에 마력의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황금색의 스펜서 가(家) 인장이 새겨진 마차는 말을 뒤에서 밀어주고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 내부와 외부의 크기가 달랐다.

공간확장 마법.

그 고급 마법을 마차 따위에 사용한 것이다.

"···."

체이서가 포근한 의자에 앉자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딱 백색 소음으로 느껴질 정도.

오히려 적막하지 않아 좋은···.

-금일 바하무트 소식입니다. 제도의 3황자님이 또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들어왔는데요, 서둘러 들어오길 바란다는 황비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라디오 소리다.

-네에 방황이 오래가네요. 부디 황자님이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셨으면 좋겠습니다. 황실의 이름에 먹칠은 적당히 하고 말이죠.

부드럽고 듣기 좋은 억양으로 장난스레 말한 진행자가 선곡까지 해주었다.

-노래 듣고 오시죠. 골드듀란이 부릅니다. 고귀함의 무게.

고루한 제목에 비해, 음악은 나름 신선했다.

리듬감 있는 박자.

그래, 말싸움하던 덩치 신병이 떠오르는 플로우는 체이서의 고개와 어깨가 절로 들썩이게 했다.

그 뒤로 깔리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어우러지며, 웅장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곡이 되었다.

현대로 따지면 재즈 오케스트라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세계가 다른 만큼 묘한 특색이 있어, 해외로 온 듯한 이국적인 기분이 들었다.

과연 황도. 라디오도 존재하나.

그가 살던 곳엔 전파가 닿지 않고 수신기도 없어서 라디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니, 전파가 맞나?

-찾아봄. 음파를 마력 파동으로 변형하여 쏘니까 전파라곤 하기 힘들다고 한다.

-TMI 아웃.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

-마녀한테 갈 때 한 번도 못 들었나?

-ㅇㅇ 라디오는 처음임.

-애초에 수도 안쪽으로 들어온 게 처음이다.

음악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았지만, 마을 축제에서 듣던 뚱땅거리는 북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트렌디함이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혹시 최신 유행곡입니까?"

"아, 아닙니다. 이 채널은 조금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듣는 채널이라서요. 방송하시는 분도 막내 황녀님이십니다."

음성방송을 듣더니 신문물이라도 본 듯 놀라워하는 체이서의 모습은, 요하임으로 하여금 흐뭇한 웃음을 짓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순박한 시골 청년이로군.

"···막내 황녀님이 라디오를?"

"허허 최신 유행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관련해서 이해를 도울 전문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체이서는 황녀님이 선곡한 음악을 들으며 수도에 진입했다.

대로에 따라 보이는 매장과 상업 건물들이 깔끔하게도 세워져 있었다.

확실한 도시계획에 따라 세워진 듯, 지저분한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거리.

황도 입구에서 황궁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도로는 그렇듯 무결점했다.

그러나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자 슬슬 현실적인 광경이 비쳤다.

얼기설기 달라붙은 다세대 주택과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목적이 너무나도 단순하게 드러나는, 크지만 좁아터진 건물들.

그리고 적잖이 떨어져 있는 쓰레기들과 돌아다니는 들고양이들도 보였다.

그 주변에 놓인 화단과 가로수들도 나름의 도시계획에 포함된 듯 성의가 보이긴 하였으나, 방금처럼 위압적일 정도의 깨끗하고 웅장한 느낌은 없었다.

그저 사람 사는 동네.

도리어 적잖이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체이서는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조금 전은 뭐라고 할까.

한 사람의 취향에 맞추어 최대 효율로 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지.

도무지 수십만이 사는 대도시같은 자유분방함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이런 외곽 쪽에 위치한 고즈넉한 저택.

참 좋지.

체이서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거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차창 밖으로 골목을 뛰어다니는 꼬마 아이들이 보이고, 코트를 입은 신사들과 양산을 쓴 부인들, 자전거를 타는 청년들이 보인다.

좋은 동네로 보였다. 평생 살아도 좋을 그림 같은 집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차가 멈추지 않는다.

고지대로 올라가는 듯 기울기와 감속이 느껴졌다.

-다그닥 다그닥

이윽고, 인적이 드물어졌다.

촘촘했던 집들은 이제 없다. 그리고 왠지 벽이 드높은 저택들이 띄엄띄엄 있다.

아, 드라마에서 봤다. 평창동이던가 한남동이던가?

···꼭 그런 분위기다.

하지만 더 올라간다.

마차는 다시 경로를 틀어 가로수만 가지런히 세워진 정비된 도로로 접어들었다.

여기부터는 사유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으로 진입한 마차는 또 몇 분을 더 가서야 커다란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구구궁

위엄어린 소리와 함께 대문이 개방되었다.

"혹시, 저 스펜서 가(家)에 방문하는 겁니까?"

체이서는 슬슬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요하임은 질문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체이서님의 저택으로 가는 중입니다."

커다란 철제 대문이 완전히 열렸다.

건강해 보이는 잔디가 빼곡한 초록 언덕 사이에, 좁지 않은 새하얀 길이 놓여 있다.

어떻게 깐 건지 매끄럽고 티 한 점 없는 길이다.

마차 바퀴가 그곳을 부드럽게 굴렀다.

체이서가 마차의 창밖을 확인했다.

초록 언덕 위에는 큐브 형태로 조각된 나무와 색색의 화초가 보였다.

지저귀는 푸른 새들과 팔랑거리는 노란 나비가 그 위에서 노닌다.

조금 더 지나치자 온갖 소동물이 조각된 석제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대에서 무지개를 만들며 뿌려지는 맑은 물은 좁게 파둔 바닥의 물길을 따라 공원을 넓게 휘돌았고, 이내 저택을 가로지르는 맑은 강으로 흘러내려 갔다.

맑은 강 좌우로는 고급 석재가 쌓아져 수심이 높아지더라도 넘칠 일이 없게 정비되어 있었다.

"강이 아주 맑지 않습니까? 수도 뒷산인 밧트 산에서 내려오는 강줄기를 이용했습니다. 요즘 추세인 강 조망권을 위해 그냥 강을 들여오셨지요. 저택에서 보시면 강과 공원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강을 건널 때 불편함이 없도록 아주 넓고 아름다운 다리까지 건설되어 있었다.

체이서가 차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요하임이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만족하시는군.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집이다.

요하임은 마부에게 속도를 줄이도록 했다.

체이서가 저택 앞에 조성된 공원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분수대 주변에 깔린 석재 테이블과 그 위를 가리는 고급스러운 차양.

다수의 귀족 영애가 티타임을 즐기는 모습이 선하게 눈에 그려질 법한 휴양 시설을 지나쳐.

풍광과 어우러지는 푸른 탑. 전망대가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

"저 위로 올라가시면 수도인 '무트'시와 '바하'강. 그리고 외곽 도시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주 체계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언제 보아도 감동적인 풍경으로 다가오지요."

무트시와 바하 강이 합쳐져 바하무트.

그곳을 확대해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집에 있다.

보안 지역인지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문구가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체이서는 잠깐 고민했다.

나는 저기서 말하는 관계자인가 관계자가 아닌가.

나는 과연 저길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집주인이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 집안에 있다?

-ㅋㅋ루삥뽕

-아 집주인이 평민따리 신병일 줄 몰랐다고요.

-당연히 들어가도 되지 뭘 그런 걱정을 해 ㅋㅋㅋ

마차는 이윽고 멀리서부터 시선을 끌던 거대한 다리에 오른다.

-다그닥 다그닥

강줄기를 건너자 드디어 집이 보였다.

본관 건물은 30층에 높이 200미터라고 하더니, 하늘을 향해 웅장하게 솟아있다.

그 뒤의 푸른 언덕. 그리고 새파란 하늘.

과연 그림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체이서는 이런 그림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워어-"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고, 체이서와 요하임이 마차에서 내렸다.

체이서가 망연하게 자신이 받을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16화. 백지 수표를 받았다.

16화.

체이서는 까마득한 고층 빌딩을 올려다 보았다.

커다란 백색 건물이 하늘로 높이 솟아있다.

매끈한 정육면체 여섯 개로 탑을 쌓았는데, 그 사이 사이가 살짝 띄워져 있는 형태의 건축물이다.

저 위로 어떻게 올라 다니라는 거지?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고, 그냥 층에 비해 높아 보이는 이유인가 싶었다.

하지만 구조물 틈에서 마력 반응이 읽히자, 체이서의 황금빛 렌즈가 즉시 정보를 띄워 올렸다.

「최상급 마력 포집기」‗‗‗‗‗‗‗‗‗‗‗

본 건물의 에너지 효율은 130%로, 자연상의 마나를 수집해 에너지로 사용한다.

!마나세를 내지 않는다.

‗‗‗‗‗‗‗‗‗‗‗‗‗‗‗‗‗‗‗‗‗‗‗‗‗‗‗‗‗

현대의 태양광 설비와 비슷한 시설인 듯하다.

체이서가 저택을 보았다.

견고함, 청결 유지, 부식 방지, 충격 감지, 벌레 퇴치, 주인 인식, 온도 조절 등의 수도 없는 마법들에 대한 정보가 띄워지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게 불편하여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보이는 정보.

상급 해석 능력이 정보를 수렴해 새로 꺼낸 결과물이다.

「체이서의 대저택」‗‗‗‗‗‗‗‗‗‗‗‗‗‗

대부호가 실거주를 위해 만든 대저택이다.

550종의 생활, 안전, 편의 마법과 마탑 수석 교수 놀란의 공간 마법이 새겨져 있다.

밧트 산에서도 유독 마나가 풍부한 땅에 지어져 마력 수집 효율이 높아 영구적으로 기능한다.

총 일곱 개의 정육면체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무단 침입시 23가지 방법으로 사망할 수 있음.

!현재 주인 : 체이서.

‗‗‗‗‗‗‗‗‗‗‗‗‗‗‗‗‗‗‗‗‗‗‗‗‗‗‗‗‗

이 건물은 그냥 건물 자체로 아티팩트다.

더는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은 그림 같은 집을 원했지 마법 같은 집을 원한 게 아니다.

"과합니다."

이건 저택이라기엔 너무 컸다.

그리고 쓸데없이 멀다.

장원이라고 해야 할 이런 곳에서 살 자산도 없었다.

비록 최신(?)식 마공학 설비 덕분에 관리비가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들어와 살게 되는 순간 아름답던 화단과 잡초 하나 없던 푸른 잔디밭이 금세 지저분해질 것이다.

"이번에 또 무언가 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요하임은 물론 겸양으로 보았다.

겸양하는 자에겐 칭찬을.

"저택은 본래 창고를 관리하는 대가라고 들었습니다. 그 일을 아주 잘 해내고 계신다고도 들었지요."

"네. 그렇기는 합니다."

그 부분은 더없이 당당할 수 있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거기에 더해, 수많은 미궁의 핵을 부수셨고, 창고 내의 미궁까지 해결하셨습니다."

그렇게 체이서의 업적을 나열한 뒤,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그 대가로 제라딘 도련님께선 보상으로 드릴 저택을 몇 단계 올려주셨습니다. 가지신 저택 중 여덟 번째였던 저택이···."

스펜서가 총 열 두 채의 호화 저택을 갖고 있고, 본래는 여덟 번째 가치의 저택을 줄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세 번째로 바뀌었지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더하여 제라딘 스펜서가 지닌 저택 중 세 번째로 비싼 집으로 격상하여 제공하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요하임이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러니 손해 보는 거래라고 안 할 수가 있나요. 허허."

요하임의 말에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펜서 담당관은 얼빠진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한 체이서는 저택의 위엄 넘치는 모습을 둘러보았다.

산지를 포함하여 최소 오만 평이 넘어간다는 이 대지는 엄연히 제국 수도 '바하 시'에 편입된 곳이다.

더군다나 본관 저택 최상층에서도 수도가 내려다 보인다고 했다.

이런 집이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건설 허가에도 정부와 수많은 논의가 오갔을 테고, 여기까지 길을 트는 것과 자재를 나르는 것과 마법사를 초빙하는 등 어마어마한 재화가 들어갔을 터였다.

체이서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전 재산을 줄 만큼 기쁘다는 스펜서의 말이 그냥 칭찬을 위한 헛소리가 아니었던 듯싶었다.

"저는 아무래도 출퇴근을 해야 해서요. 이런 집은 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러자 요하임이 정중하게 입구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1층으로 들어가자, 넓은 차고가 보였다.

"지금 타고 온 마차와 마부는 저택에 포함된 재산으로 함께 제공될 것입니다."

요하임이 넓은 승강기에 올랐다. 체이서가 따라 오르자, 30층을 누른다.

승강기가 고속으로 올라간다.

큐브 사이에 빈 공간이 존재함에도, 전혀 막히는 부분 없이 최상층인 30층에 도달했다.

-띵!

승강기 문이 열리고, 요하임이 다시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저택의 30층은 무트 시내의 사유지와 공간 마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로와 인접해 있는 공원으로, 출퇴근이 용이하지요."

요하임이 복도 끝에 덩그러니 놓인 문에 도착했다.

체이서에게 열기를 권한다.

"체이서님만 열 수 있는 문입니다. 일종의 신식 비밀 통로라고 할까요."

체이서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길게 뻗은 복도가 보였다.

체이서가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30층 창문이 보였고, 당연하지만 밖은 200m 상공. 하늘이다.

그러나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길다란 복도가 대지를 향해 뻗어있다.

이게 가능해?

요하임이 그곳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쳐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조경수 몇 그루와 깔끔하게 정비된 정원. 판판한 하얀 석재 위주의 인테리어는 대저택과 비슷하나, 전체적으로 크기가 간소해졌다.

체이서가 뒤를 돌자 5층 짜리 정육면체가 평범한 건물인 양 위장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지.

5층 짜리 건물도 평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체이서는 벌써부터 자신의 가치 감각에 혼란이 오는 것을 느꼈다.

"마부에게 일러두시면 알아서 오가며 준비할 것입니다. 이동으로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여기도 혹시 제 저택에 포함인가요?"

"물론입니다. 저기 네모난 건물이 보이시지 않습니까? 저 건물이 일곱 개가 모여 체이서님의 저택입니다."

체이서가 해석한 저택의 정보에 큐브 구조물이 일곱 개라고 나온 이유가 있었다.

하나로도 훌륭한 건물일 5층 짜리 정육면체 구조물이 세로로 6개가 쌓아져 30층의 드높은 본관 건물이 된다.

나머지 하나는 여기에 있고, 그 명칭은 별관이었다.

"이렇듯 본관 30층 복도 끝에 달린 문을 열면, 수도 입구와는 5분 거리인 별관이 나옵니다. 교통 편의성도 주요한 부동산 요건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고려하셨지요."

"···그렇군요."

하나의 건물이지만 두 장소에 있다는 것.

"이러한 편의와 자연스러움. 공간 마법의 부작용인 어지럼증을 줄이기 위하여, 공간 마법의 대가인 마탑의 수석 교수 놀란님을 초빙해서 지어졌습니다."

체이서는 마지막으로 걸리는 것을 언급했다.

"유지비가···."

"아마 나중에 제라딘 도련님이 언질하실 테지만, 보상이 저택으로 끝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 저택을 받지 않으시면 문제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요하임이 대상인의 가문 소속원으로서 대답했다.

"그분께서 준비하고 있는 보상이 그만큼 귀하기 때문이지요. 훗날 그분께서 드린 보상을 부디, 이 저택을 유지하기 위한 돈과 재물로 교환하시길 바랍니다."

결국 체이서는 이 저택을 받고 말았다.

그리고 요하임의 말은 그리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

다음날.

담당관실로 호출한 스펜서가 체이서에게 세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스펜서 가의 백지 요청서」‗‗‗‗‗‗‗‗

제국 제일의 부자 가문. 스펜서 가의 인장이 찍힌 요청서이다.

복사 방지, 위조 방지, 변형과 도난 방지 등의 갖가지 마법이 깃들어 있다.

주인만이 무언가를 적을 수 있다.

!현재 주인 : 체이서

‗‗‗‗‗‗‗‗‗‗‗‗‗‗‗‗‗‗‗‗‗‗‗‗‗‗‗‗‗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적어서 가문으로 보내게. 돈이 필요하면 돈을, 물건이 필요하면 물건을, 뭐든 적어서 보내면 답을 줄 걸세."

요하임이 말한 저택을 꾸릴 금액은, 이 종이만 있다면 충분하다.

"돈을 요구하면 임원 퇴직금 정도의 현금을 즉시 제공할 걸세."

저 스펜서 가(家)의 임원 퇴직금이 얼만 지는 모르나, 여하튼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게 얼마나 보물이냐는 것이었다.

"으음, 보통은 우리 가문에서 대단히 활약한 자들에게 보상으로 주는데, 하고 싶은 걸 적으면 가문이 나서서 그걸 이뤄주는 걸세."

스펜서는 여상하게 말했다.

"보통 그걸 받은 자들은 자신만의 신 사업을 시작할 때 쓰지. 그 요청서를 소지한 인재를 믿고 어떻게든 사업체를 꾸려주거든. 물론 사업을 유지하는 건 자기 능력껏 해야 하지만, 그거야 모든 상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업이지."

돈 뿐만 아니라 소원을 적어내도 들어주는 백지 수표 세 장.

"저택도 단계를 높였는데 만족했나? 요하임이 말하기론 잘 확인했다고 들었네. 괜찮은 저택이니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사할 일은 없을 거야. 평생 쓰게."

스펜서는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건 그냥 말치레 같잖나. 그래서 '필요한 걸 이루어줄 증서'를 내가 줄 수 있는 만큼 제공하는 걸세. 실물이 있으니까 좀 낫지 않은가?"

거기까지 말한 스펜서는 일하던 서류와 만년필을 집어 들더니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창고는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가보게."

체이서는 그렇게 세 장의 백지 수표를 들고 담당관실에서 나왔다.

상상하지도 못한 포상이었다.

아무리 미궁의 핵의 잔해를 산처럼 쌓았다지만···.

그때 인벤토리에서 알람이 울렸다.

창을 띄워 태블릿을 꺼내자, 저택 안내 중에 친구 추가한 요하임의 메세지가 와있었다.

그 역시 스펜서가의 가신으로서 「고대 최신 기록 장치」의 사용자였다.

-체이서님. 그 증서는 구 '사막의 길잡이'들에게 8년차 생존과 무역 성공의 증표로 주어지던 이래, 스펜서 가(家)에서도 최고 수준의 포상으로서, 걸맞은 자에게 사장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사업 기획서이자 사장 허가증'입니다.

-그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시면, 안 그래도 체이서님을 주시하는 스펜서 가의 어르신들께 노여움을 살 수 있으니, 잠자코 현금과 교환하신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체이서는 요하임의 구구절절한 말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에서 본의 아니게 협박의 기운을 느껴버린 자들이 있었으니.

-사업하면 500포인트.

-ㅋㅋㅋ 사업 세 개 차려서 재벌 가즈아!

-재벌이 말이 되냐? 그런 의미에서 대부호 어떰?

뒤틀린 황천의 시청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청개구리의 면모를 드러냈다.

"에이 무슨 사업이에요. 지금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할 겁니다."

체이서가 난감한 얼굴로 시청자와 대화하던 도중, 그를 노리는 자가 꾀를 쓰고 있었다.

***

도미닉. 그는 후작가의 막내아들로, 꿈이 아주 컸다.

자신의 형제를 모두 몰아내고 자신이 후작가를 차지할 30년 대계.

그 첫 번째는 군에 입대 후 압도적인 우월함을 보여 앞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군까지 달아 권력을 얻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해결사들을 부려 혈육을 암살할 계획이었다.

이 부대에 대해 알지 못하는 멍청한 혈육들은 최소한의 방비조차 못 하고 사망하겠지.

그날을 고대하는 도미닉은, 그저 연습한다고 생각했다.

미래 귀족 간의 암투와 권력 투쟁, 저열한 음모와 힘 싸움에 대한 연습.

"이깟 부대의 병사들 몇 명 제끼지 못하면 후작 위를 가질 자격이 없지."

그는 그렇게 일행을 구슬리고 설득해서 동료를 포섭해 나갔으며, 자신의 즐거운 '게임'을 지속해왔다.

그래. 이건 체스나 오셀로 같은 거다.

적을 잡아먹고 승리하는 간단한 놀이.

그런 도미닉의 영향을 받은 귀족 일행들은, 점점 진심으로 잔혹한 장난에 심취하게 되었다.

능력 있어 보이는 신병들을 처참하게 농락하고 돌려보내는 일을 계속해서 성공해왔고, 그 결과 훈련 성적 또한 올라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도미닉이 꺼낸 타겟은 체이서.

그들은 창고에 들어가기로 했고, 이번 놀이에 이름을 붙였다.

'창고 정리.'

체이서를 창고에서 정리한다는 뜻이다.

더없이 멍청한 짓이었다.

전장을 '웨어하우스'로 골라버리고 만 것이다.

"흐으으 기대된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홀로 고풍스러운 건물.

이 위험물 창고는 훈련 조교들조차 위험하다고 온갖 으름장을 다 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귀족 신병 무리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가문의 돈으로 갖춰둔 저주 저항 아티팩트가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저주로 가득 찼다는 그곳에 들어가며 방비를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꽤 고가의 장비를 두루두루 챙기면서 본인들의 개인적인 첫 계획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그러나, 사실 멍청하기도 했다.

똑똑했다면 그런 곳은 굳이 찾아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우리 하던 대로 하는 거 맞지?"

"그래. 반병신 만들고 협박해서 스스로 나가게 만들면 돼."

"강하게 발악하면 어쩌지?"

"죽여. 어차피 창고인데, 죽여도 뒤탈 없겠지."

"좋아."

"자유민 출신 신병 하나 죽인다고 누구 하나 신경 쓰겠어?"

"그렇게 위험하다고 지랄해놨으니, 거기서 일하는 창고지기 따위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 계획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흑막.

미래 그들이 할 암실 정치를 미리 경험하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도미닉과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잠들 시각.

새벽 4시였다.

***

-삐빅 삐빅

뇌리에 울리는 경고음과 함께, 스펜서가 눈을 떴다.

잠을 방해 받았지만 표정 없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의 눈 한쪽에 떠있는 「내려다보는 눈」에는, 귀족 출신 멍청이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미닉 풀바인」

「애쉬포드 레릭」

「워윅 리치몬드」

「로버트 게빈」

스펜서가 갸웃했다.

자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17화. 체이서가 기다린다.

17화.

스펜서의 눈엔 창고 내 입구 근처부터 A구역 초입까지가 보였다.

현재 스펜서가 위험물 창고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공간이 거기까지였다.

본래는 그저 안개 뿐이던 창고가, 체이서가 들어간 이 잠깐 사이 저만큼이나 트인 것이다.

창고도 점점 비밀을 벗고 그의 「내려다보는 눈」에 모조리 드러나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미궁의 핵이든 뭐든 전혀 두렵지 않다.

이렇듯 성과만 보여준다면 돈이야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지.

스펜서는 드넓은 침대에서 일어나 오른편 선반에 손을 뻗었다.

「고대 최신 기록장치」가 손에 잡힌다.

스펜서가 유능한 부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창고지기. 신병 몇이 창고 안에 들어갔네. 염두에 두도록.

-입구 근처에 함정을 설치하는군. 일어나면 적당히 병장들 완전무장 시키고 데려가서 그놈들 잡아다 담당관실로 오게.

스펜서는 거기까지 쓰고 끝내려다가 한 문장을 더 보탰다.

-살아있는 놈들만 데리고.

그는 선반에 태블릿을 올려두고는, 다시 침대 중앙에 자리 잡은 뒤 눈을 감았다.

창고 안에선 체이서가 최고 지휘관이다. 그는 말귀를 잘 알아들으니,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스펜서는 금세 잠들었다.

***

창고의 분위기는 결코 아늑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도 끝 A구역을 확인한 뒤, 그곳에서 보이는 무수한 「미궁의 핵」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야 대충 돌아봤으니 돌아가서 함정 깔자."

"그래. 어차피 저쪽까지 들어갈 일도 없어. 입구 근처에 설치해둔 함정도 피하지 못할 게 분명해."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 신병들은 강하게 반발했는데, 저 안쪽을 구경하고 싶다는 거였다.

회색 머리에 짧은 지팡이를 지닌 병사가 말했다.

"나는 저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참아 애쉬포드."

"하지만 여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나 들어갈래! 들어가게 해줘!"

그때, 근육질 거한이 말했다.

"조용히 하고 그냥 와라. 단독행동은 금지야."

습격자들은 창고 입구 근처로 되돌아가며 긴장을 풀기 위해 웃고 떠들었다.

애쉬포드는 잠깐 울적한 듯하더니, 다시 헛소리를 시작했다.

"체이서가 죽고 나면 이 자리에 지원해볼까? 그 뭐라더라? 창고지기?"

리치몬드가 한숨 쉬었다.

저런 조심성 없는 성격에 이런 장소에서 일하다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죽어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는 저 녀석의 말을 반박해서 이득 본 경험이 없었다. 괜히 심술이나 부리겠지.

주황 머리에 주근깨가 박힌 순박한 인상의 소년 리치몬드는, 보석을 깎아 만든듯한 보라색 룬 검을 그대로 드러내며 걷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의 검집을 장난으로 어딘가에 숨겨 놨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으며, 애쉬포드 녀석의 헛소리에 대한 것보다 한참이나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들을 설득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얼른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창고 뿐만이 아니다. 리치몬드는 이런 잔인한 일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무래도 일련의 일들이 자신에게 안 좋은 꿈을 꾸게 만든 듯했다.

오늘 꿈속에서 피의 지옥을 보았기 때문일까. 뭔가 치밀어 오르는 긴장감이 계속 이곳에 있다간 끔찍한 일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붉은 세상과 자신의 검에서 흐르는 피. 동료들의 시체.

그리고 체이서가 다리를 꼬고 앉아 웃는 장면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악몽을 꾸고 나온 그는 동료들을 설득하려면 무슨 말이 좋을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 무리에서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 그저 어중간하게 휩쓸려서 끼어 있는 탓에 발언권도 작았다.

이제 그만 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다간 없던 저주도 받게 될 텐데···.

이런 식으로 미신이나 감성에 호소해봤자 비웃음이나 받겠지.

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어떤 말을 해야 동료들이 일을 관두고 창고에서 나갈 수 있을까.

그 와중, 귀족 신병들이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그들은 훈련간 배운 대로 부지런히 함정을 깔기 시작했다.

그들의 분주한 작업에 의해 체이서를 사냥하기 위한 장치가 설치되었다.

밟으면 발목을 절단하는 덫이 입구 앞에 깔렸고, 문을 바라보는 위치에 이동식 연발 석궁이 설치됐다.

"이전과 달리 눈치 볼 것 없어서 편해."

"맞아. 몰래 하느라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제일 쉬운데?"

"고작 이 정도로 죽을 거면 딱 그 정도 수준이란 이야기겠지."

입구와 가깝게 설치한 탓에,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다면 이중 누구도 피하지 못할 함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좋아. 이제 주문서 준비."

그들은 어렵게 구한 「파이어 볼」 주문서를 원통에 집어넣고 허리춤에 매달았다.

원통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내부에서 즉시 찢어주고, 그들의 머리 위로 화염구를 띄워 올려줄 것이다.

"근데 도미닉. 걔는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잘나면 잘난 대로 우리 앞에 설 테니 처리하는 거고, 못나면 못난 주제에 줄을 잡아 이득 보는 게 역겨우니 눈에 띄지 않게 치우는 거야."

도미닉은 그렇게 말하곤 씩 웃었다.

"난 내 위에 올라서는 자들은 싹 다 치울 거야."

***

-사업하자 사업!

-아 그만 좀 해라. 자식들아 사업은 아무나 하냐 ㅋㅋ

-그러다가 백지 수표 그냥 버리는 거야.

체이서는 시청자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부의 맛을 조금 본 뒤로, 이렇게 끈질기게 사장의 꿈을 종용했다.

판타지치곤 너무도 화려한 세상이다.

돈이 많아도 고즈넉한 작은 집에서 푸세식 화장실을 쓰면서 사는 그런 미발달된 세상이 아니라, 고층 빌딩의 뷰와 역세권을 따질 수 있는 그런 세상이란 거다.

돈 버는 맛이 넘치도록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발전 속도에 가속이 붙은 듯했다.

이 세상은 현대 지구처럼 순식간에 발전할 것이다. 그럼 그가 지닌 현대 지식과 아이디어도 금세 쓸모없게 된다.

-넌 할 수 있어.

-그래. 요식업의 황제가 되는 거야.

그런가?

물론 어렵겠지. 어렵지만···. 세상에 쉬운 일도 없지 않은가.

프랜차이즈를 처음 만들면···.

창시자로서 훗날 「프랜차이즈 갓」이라 불릴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대기업의 횡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그마치 제국 1위 기업인 스펜서가 뒷배가 되어줄 테니.

시청자들의 사탕발림에 점점 혹해가던 체이서가 정신을 차린 것은, 창고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체이서는 스펜서의 연락을 확인했고,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체이서는 창고 문 앞에서 난감하게 서 있었다.

앞에 함정이 있다는 걸 아는데 바보처럼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

근데 「포피파의 전신 갑옷」같은 무적의 방어구도 없다.

그렇다고 스펜서 담당관의 말대로 병장들 생활관에 찾아가 저들을 꺼내 달라고 하기엔, 솔직히 그들이 자신의 안내를 잘 따라줄 것 같지 않았다.

본래 사람 관리가 제일 어렵고, 아무리 창고 내에선 자신이 지휘관이라지만 전부 FM대로 행동할 리가 없다.

누군가는 신병의 명령에 불만을 표할 거고, 그건 전부 리스크다.

더군다나 저들이 들어간다고 귀족 신병 녀석들이 순순히 잡혀줄까?

오히려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서 깊이 들어가 버리고, 병장들도 잡아오겠다고 쫓아 들어가는 순간, 별로 보고 싶지 않던 B급 공포 영화 한 편이 뚝딱 찍힐 것 같았다.

괜한 피해자만 양산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체이서는 웬만하면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들어가서 일과를 해야 하는데, 성격 나쁜 녀석들 때문에 썩 귀찮게 되었네.

-이건 어때?

잠시 뒤, 체이서가 창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처음에 받은 뒤 쓴 적 없던 「발광석」을 꺼내 들더니, 아래로 내던져 함정을 작동시켰다.

-철컥 -챠캉!

발광석이 덫에 깨지며 빛 가루를 뿜었다.

그것은 섬광탄처럼 기능했다.

귀족 신병들이 눈을 부여잡았고, 체이서가 그 사이로 굴러서 들어갔다.

침착하게 중간으로 세 번, 우측 사선으로 두 번 굴러 일어섰다.

석궁이 입구에서 가깝게 설치된 탓에, 구르기 몇 번 만에 석궁 지척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체이서가 석궁 사이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쏴! 그냥 쏴!"

병사들이 뒤늦게 볼트를 발사한다.

-타타타타

체이서가 바닥으로 미끄러져 석궁 사이를 지나치고, 볼트는 모조리 허공을 갈랐다.

그가 입구 근처를 막고 있던 신병들을 전부 제치고 넘어가는 데에 들어간 시간은 고작 20초 남짓이었다.

"뭐, 뭐야!"

"저 녀석이 저렇게 재빨랐던가?"

물론 아니다.

-그래 그거라고!

-100포인트를 선물했습니다.

-ㅋㅋㅋ 이야 말한 대로 기가 막히게 하네.

그냥 시청자의 의견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아주 세세하고 직관적이었던 고수들의 설명대로 행동하자, 그 조잡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했던 트랩을 단숨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던 것.

물론 채널의 시청자들이 체이서가 지닌 운동 능력으로 할 수 있을 법한 행동만 골라 시켰기 때문이기도 했다.

덫에 구슬을 던지고 앞 구르기 하는 정도는 체이서도 할 수 있으니까.

-문을 활짝 열고, 너 혼자 못할 것 같으면 닫으라고 할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바로 명령할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해.

-성공하면 포인트 줄게.

긴장이 없는 체이서가 가장 자신 있는 거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였다.

그렇게 성사된 거래.

체이서와 시청자들의 협업은 당연한 듯 성공해버렸다.

체이서가 복도를 달리며 말했다.

"왠지 속임수를 쓰는 듯한 기분이···."

-떽! 어르신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왜 속임수야! 예의 바른 청년이지!

-아 간만에 훈수 좀 두는데 그거 참 빡빡하게 구시네!

-이 프로 훈수꾼들 보소 ㅋㅋㅋ

-우리 월급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제 네가 알아서 해. 들어갔음 끝이지 뭐.

체이서가 익숙하게 선반 사이를 달리며 고민했다.

그는 「미궁의 핵」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기 있는 「미궁의 핵」들로 방어하면, 저들은 정말 끔찍하게 죽을 것이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나쁜 놈들이지만, 그래도 저주가 아니라 처형대에 오를 기회를 주고 싶었다.

기왕이면 내 눈앞에서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 말이라도 한 번 해보자.

체이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쇼핑하듯 선반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안전을 위해 「미궁의 핵」을 챙기긴 해야 한다.

근데 뭘 챙겨야 할까.

체이서는 선반들 사이를 걷다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죄다 잔혹하기 짝이 없다.

그러다 마침내, 생명에 지장 없는 물건.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떠올렸다.

그 물건에 닿으면 앞으로 전투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

그는 결단이 빨랐다.

금세 「아이슨의 애착인형」 앞에 도착했고, 토끼 인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물론 그건 체이서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인형은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여기서 겁줘서 쫓아내죠."

체이서가 바둥거리는 토끼를 인벤토리에 쏙 집어넣었다.

-오? 들어가네?

-보통 사념이 있는 물건들은 아공간에 잘 안 들어가는데.

-저 정도야 뭐.

체이서는 근처의 책상 앞에 앉았다.

「아이슨의 애착인형」이 놓여있던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이었다.

그가 조용히 테이블 앞에 앉아 턱을 괴었다.

-저렇게 보니까 장난 아니네.

-으음···. 뭐가?

-위엄이.

확실히. 그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에게로 가는 길 중턱엔 가시가 촘촘히 박힌 금속 관짝이 활짝 열린 채 세워져 있고, 그 오른편에는 고풍스러운 흔들의자가 아주 천천히 흔들리고 있다.

좌우로는 기괴한 물건이 수납된 5층 선반이 주르륵 세워져 있었다.

그가 턱을 괴고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저 혼자 붉은 글자가 사각거리며 적힌다.

그의 뒤편 벽은 당연하게도 온통 미궁의 핵이었고, 투구를 쓴 석고상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거나, 액체 고양이가 커다란 비커 속에서 출렁거리거나 했다.

그 앞에 앉은 검은 머리의 청년은, 불길한 황금안을 가지고 있었다.

-체이서. 그거 아냐. 네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는 않을 거다.

-저걸 보면 진심이라고 생각하겠지?

-ㅇㅇ 진심으로 음모를 꾸민 뒤 죽일 생각이라고 볼 듯.

체이서는 자신이 정리해둔 A구역을 불청객이 어지럽히게 두면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습격자들이 B,C구역 이상까지 따라 들어왔다가 저주에 당해 잔인하게 죽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 A구역 한구석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곳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둥근 원이 A구역이라고 할 때, 세 시 방향 끝이었다.

추적자들은 6시 방향에서 진입해 오고 있었고, 선반에 가려져 바로 보이진 않았지만 머지않아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체이서는 침입자들이 얼른 창고에서 나가서 자신의 죄를 보고하고, 걸맞은 죗값을 받길 바랐다.

바하무트 제국의 형벌이 세다고 들었는데, 계획적 살인 미수와 금지구역 무단출입 등이 어느 정도의 벌을 받을지는 몰라도, 저들은 충분히 고통받을 거다.

스펜서 담당관님의 눈에 범죄 사실이 들어갔는데, 귀족가 자제라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해도 다신 체이서의 눈앞에 보일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

아, 일해야 하는데.

체이서가 투덜대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습격자들이 오려면 아직 좀 기다려야 했다.

-난 쟤들 구경하러 간다.

-어휴 무슨 좋은 구경이라고.

***

신병들은 바로 쫓아가지 않았다.

침착하게 조를 나누었다.

도미닉이 이끄는 조는 체이서가 창고 밖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복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행동대장인 대머리 거한. 로버트가 이끄는 추격조가 실행에 나서기로 했다.

물론 제압 후엔 데려와서 함께 '처벌'한다.

"난 무조건 습격조야!"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고 싶은 애쉬포드가 손을 들고 말한다.

몇몇 모험심 강한 녀석들 역시 손을 들고,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끝인가?"

그때, 애쉬포드가 리치몬드의 손을 잡고 들어 올렸다.

"리치몬드도 간대!"

"내가 언제!"

로버트가 리치몬드를 바라보았다.

"갈 건가?"

"···."

리치몬드가 망설이는 듯하여 보이자 애쉬포드가 대뜸 말했다.

"역시 겁쟁이···?"

리치몬드가 순간 욱해서 대답했다.

"나도 간다."

물론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로버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도미닉에게 가서 보고했다.

"사냥조 준비됐다."

"그래. 갔다 와. 웬만하면 살려서 데려오고."

고개를 두둑 꺾는 로버트. 그는 두꺼운 어깨를 가볍게 이완시키며 도미닉에게 대답했다.

"최선을 다해보지."

그들이 체이서가 기다리는 A구역으로 향했다.

18화. 복선을 깔았다.

18화

로버트는 식당에서 체이서와 언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말에 '발터 공작님을 모른다.'고 답했던 건방진 녀석.

그 녀석에 대해서 꽤 낮은 평가를 하고 있었으나, 이젠 달랐다.

아무 방호구도 없이 저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걸 보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확실하다.

그가 복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긴장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그 긴장으로 인해 묘한 흥분감에 빠져있었다.

어디 놀러 온 녀석들 같군.

"모두 조용. 실전처럼 간다."

로버트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문다.

이제 도미닉이 없으니, 로버트가 이 일행의 명실상부한 일인자였다.

로버트가 복도를 지나가다 열쇠를 발견했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화려한 열쇠.

아까도 저기 있었나?

로버트는 묘한 찝찝함에 피해가기로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복도 가장자리로 붙어 지나쳤다.

바닥을 끄는 군홧발 소리가 어지러이 이어지고, 마침내 대도서관 같은 첫 번째 공동에 진입했다.

"흐음."

좌우로 선반들이 깔린 곳에 도착했을 때, 로버트가 커다란 손을 들고 가볍게 손짓했다.

정비하라는 뜻이었다.

"로버트.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 일도 안 생겼잖아? 그냥 좀 구경하며 가면 안 돼?"

"실전처럼 하자고 했잖아."

"에이, 그냥 좀 구경하며 가자."

이곳은 A 구역에서도 초입이었고, 귀족 신병들은 이 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창고를 정리할 때 체이서는 위험한 순서로 정리하고자 했고, 이곳엔 창고에서 가장 약하다고 볼 수 있는 물건들만 보관할 예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만지지 않는 한 위험하지 않은 물건과 만지더라도 즉시 문제가 생기지 않는 물건들 위주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체이서가 창고 업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간적 한계로 인해 아직은 A구역 중간만 지나가도 위험한 물건이 많았다.

신병들은 그런 내용을 알 리가 없었고, 그러니 기고만장해질 법도 했다.

"뭐야! 겨우 이정도야? 30명이나 죽었다며! 역시 다 개소리였어!"

30명의 해결사가 들어왔을 때와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정리 상태도 달랐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들은 이런 복도 인근에서 깔짝대는 것이 아니라 붉은 구역을 향해 깊숙히 들어갔다는 거였다.

결국 이 근처가 이렇게나 안전해진 것은, 체이서가 위험한 물건들을 죄다 치워놨기 때문이었다.

열쇠 빼고.

어쨌든 보다 빠른 수색을 위해 흩어지자는 말은 다른 병사들의 공감을 샀고, 결국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병들이 자유행동을 시작했다.

"와 엄청난데?"

몇몇 병사들의 눈엔 거대한 이 창고가 멋들어진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그들의 사이에서 입을 달싹이던 리치몬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스펜서 담당관님은 신경 쓰실 것 같은데. 우리 이쯤 하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

담당관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것.

리치몬드가 동료들을 설득하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고른 질문이었다.

결국 그만두고 돌아가자는 설득을 시도하긴 한 것이다.

그게 너무도 오래 걸렸지만.

그가 꺼낸 말은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뜬금없는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무시당했다.

"어휴 쟨 또 왜 저러냐."

"제발 눈치 좀 챙겨 리치몬드. 그런 말 해서 뭐할 건데. 이미 여기까지 들어왔잖아?"

"···나가면 돼. 아직 아무도 안 다쳤고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면 가문 도움 받아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어."

하지만 그 진지한 말에 제대로 대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 없는 그들의 실랑이를 지켜보는 신병들은, 저 말이 옳든 그르든 관심 없었다.

그냥 리치몬드의 말을 틀렸다고 단정 짓고 흘리는 중이었다.

"저 녀석, 아까 봤지? 체이서 도망칠 때 멍하니 있는거."

"그거 하나 못 잡냐."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은 체이서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뭉쳐서 떠들고 있었던 데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돌아보는 반응은 빨라서 죄다 시야를 잃었었다.

그런 상태에서 전투적인 가호를 사용한다는 건, 자멸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체이서가 아닌 동료를 공격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니까.

결국 이도 저도 할 수 없을 때, 체이서가 리치몬드를 스쳐 지나갔다.

시청자들의 훈수가 체이서를 진형의 빈틈으로 정확하게 인도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들은 그냥 리치몬드를 탓했다.

리치몬드는 우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 일단 저 리치몬드라는 소심한 녀석은 꽤 주요 인물이네.

-ㅋㅋ 맞지.

이때, 애쉬포드는 선반을 둘러보다가 왠지 기분이 나쁜 빛을 내뿜는 둥근 보석을 발견했다.

"음?"

-찰싹!

저도 모르게 때려놓고선 순간 멈칫했던 그는, 저주 방호구부터 확인했다.

반응이 없자 웃으면서 덥석 집어 들었다.

좋은 장난감이다···!

뒤에서 리치몬드의 지적이 날아온다.

"애쉬포드. 그거 얼른 내려놔."

"왜 내려놔야 하는데? 내가 착용한 보호구만 10개가 넘는데? 이 정도면 미궁에서도 한참을 버틸 텐데 고작 창고에서 무슨 걱정이야."

그는 단순하게 생각하길 좋아했다.

미궁이 창고보다 무서운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미궁에서 버틸 정도로 아티팩트를 껴입으면, 창고에서도 안전하다.

언뜻 듣기론 멀쩡해 보이는 논리로, 그는 긴장감 없이 행동했다.

선반에 널린 물건을 손에 쥔 미궁의 핵으로 툭툭 밀어 떨구며 걷는다.

-팅 –탱 –찰그랑

뒤에서 걷던 리치몬드가 기겁을 하며 물건들을 피했다.

"아, 하지 말라니까!"

애쉬포드는 그렇게 걷다가 한 물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의 눈에 피를 뚝뚝 떨구는 검이 보인다.

"와- 저 검 좀 봐. 미쳤다."

그는 가까이에 가서 검을 살폈다.

방금 무언가를 베어낸 듯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이 무기 거치대에 기대어 있었다.

"리치몬드. 나 사진 좀 찍어줘."

리치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사진기 안 갖고 왔어."

"내가 있지!"

애쉬포드가 리치몬드에게 촬영 아티팩트를 넘겼다.

잡기 좋은 직사각형 몸체에 둥근 구슬이 콱 박힌듯한 형태.

굉장히 초기 형태의 사진기였다.

이런 골동품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걸 눈에 들이댄 리치몬드가 애쉬포드를 비추려 했다.

"뭐야 어디 갔어."

피 흘리는 검 옆에서 자세를 취하던 녀석이, 사진기를 통해 보자 온데간데없었다.

그가 카메라를 내리자 애쉬포드가 빈 선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하하! 그거 여기에 올려져 있던 물건인데!"

"제기랄!"

리치몬드가 문제의 사진기를 냅다 집어 던졌다.

불길한 물건이다. 왜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못 비춘단 말인가.

-덜그럭

내팽개쳐진 사진기가 뒤에서 다가오는 일행들 쪽을 바라보도록 떨어졌으나, 당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

"야! 너 때문에 저주 방호구 깎였잖아!"

"에이 완전 조금 깎였구만 뭘!"

-이야 쟤는 좀 미쳤는데? 사이코패스인가?

-성격 엄청 나쁘네 ㅋㅋㅋ

-저렇게 나대는 놈은 명이 짧지.

-저 물건은 뭐야?

-「수명을 비추는 사진기」라는데?

「수명을 비추는 사진기」‗‗‗‗‗‗‗‗‗‗‗‗‗‗‗‗

성국의 대신관 베리타스는 사진 애호가였다.

그는 신의 품으로 향하기 전, 자신의 권능인 「생명력을 보는 가호」를 애장품인 사진기에 담아 후임자들에게 건넸다.

대신관은 그 능력으로 많은 사람을 구했으나, 사진기는 아니었다.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게 된 자들이 모든 걸 포기했다.

남의 수명을 알게 된 자들이 참을성을 잃었다.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사념이 담겨, 이제는 성스러움을 잃었다.

!이 사진기에 보이지 않는 자는 오늘 죽는다.

!이 사진기에 보이는 자는 자동으로 찍힌다.

!이 사진기에 찍히는 자의 영혼이 임시 저장된다.

‗‗‗‗‗‗‗‗‗‗‗‗‗‗‗‗‗‗‗‗‗‗‗‗‗‗‗‗‗‗‗‗‗‗‗

이 물건은 만지는 것 자체론 별다른 저주가 없다. 잡은 것만으로도 방호구를 닳게는 하겠지만, 진짜는 찍혔을 때였다.

렌즈가 그들을 향했지만, 찍히지는 않았다.

저 사진기가 그들 일행을 찍었다면, 그들의 저주 방호구는 순식간에 절반쯤 삭제되었을 것이었다.

금일 죽지 않는 자가 렌즈에 보이는 순간, 사진이 찍히고 영혼을 수납 당하는 물건이다.

영혼이 사라진 신체는 죽어버릴 것이고, 뒤늦게 풀어준 영혼은 돌아갈 곳이 없겠지.

그런 끔찍한 「미궁의 핵」이었지만, 신병들은 상황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전진했다.

날카로운 이를 딱딱거리는 방패와, 시선을 느낀 듯 스멀거리는 뱀 모양 목걸이를 지나쳐 점점 중앙 근처로 나아간다.

"이야. 분위기 미쳤다."

애쉬포드가 손에 쥔 수정을 이리저리 던지고 받았다.

"하아, 얼른 그거 내려놔 애쉬포드. 보호구가 아깝지도 않아?"

그러나 애쉬포드는 자신의 손목에 달린 마력 잔량을 보여주었다.

착용한 모든 방호구의 잔량을 하나로 모아 띄워주는 계측 아티팩트는, 아까 사진기로 인해 깎인 이후 미동도 없었다.

"뭐야, 전혀 안 줄었어?"

애쉬포드가 자신에게 잔소리하는 녀석에게 이죽거렸다.

"리치몬드는 겁쟁이."

"닥쳐. 넌 지금 몇 명을 죽였는지도 모를 물건을 아무 이유도 없이 만지작거리는 거라고."

애쉬포드가 장난스럽게 웃더니, 손에 든 보석을 리치몬드 쪽으로 툭 던져버렸다.

제게로 날아드는 미궁의 핵을 보던 리치몬드는, 순간 욱하는 마음에 허리춤에 걸린 검을 뽑아 들어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카앙!

미궁의 핵이 데굴데굴 굴렀다.

"애쉬포드! 저런 게 손에 닿으면 저주가 옮는단 말이다! 조심성 좀 가지라고!"

"푸하하하 그럼 난 이미 저주에 당했겠네? 근데 방호구 게이지는 왜 가득하냐고!"

그들이 다투는 땅에 널브러진 수정에서 음침한 갈색빛이 흘러나왔다.

「파괴를 바라는 수정」‗‗‗‗‗‗‗‗‗‗‗‗‗‗‗‗‗‗

이 둥근 보석은 가짜다.

그저 특이한 색으로 발광하는 수정구 아티팩트일 뿐이었다.

그러나 세기의 사기꾼 프랑키스에 의해 세상에 다시 없을 희귀한 보석이 되었다.

저 보석은 경매장에 올라 억만금에 팔렸으며, 대단한 보물을 얻기 위한 귀족들 간의 영지전이 벌어졌고, 전장의 승자는 가짜라는 감정서를 손에 들었다.

그는 영지전으로 인해 만들어진 무수한 적들에게 수백 차례의 암살 위협을 받았고, 끝내 암살로 사망하였다.

그 귀족은 자제력을 잃고 수정을 깨뜨리려다 가까스로 참아냈었는데, 이것이 사념으로 남았다.

'수정을 부숴라.'

!이 수정을 보면 부수고 싶어진다.

!자제력을 소실하는 저주로 예상됨. 혼자 있기를 권고함.

!잠복: 이 저주는 자신이 파고들 틈을 기다린다.

‗‗‗‗‗‗‗‗‗‗‗‗‗‗‗‗‗‗‗‗‗‗‗‗‗‗‗‗‗‗‗‗‗‗‗‗

애쉬포드의 방호구가 멀쩡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잠복」이라는 특성.

저 저주는 파고드는 것을 시도해봤자 방호구 잔량을 줄이고 끝날 지금은 조용히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방호구가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때 대상자에게 파고들어 인간을 망가뜨리는 집요한 특성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게이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쟨 그냥···.

-참혹할 최후가 보이네.

이 수정은 자신을 보는 자를 도발하여 공격하게 만들고, 한 번 공격하면 계속 공격하게 만든다.

자제력을 잃었으니 부수고 싶은 마음을 참을 길이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부수려 시도하지만 저 물건은 「미궁의 핵」이다. 저 수정을 때린 자는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저기다! 체이서를 찾았어!"

그렇게 한바탕 창고를 휘젓던 그들이 결국 체이서를 찾아냈다.

그는 놀랍게도, 이 공간에 책상을 두고 앉아있었다.

"다들 진정하고 천천히 접근해! 우린 아직 저 녀석의 가호를 모른다!"

그들은 신중하게 접근했다.

미궁 내 존재한다는 몬스터를 상대하듯, 주시하며 천천히 접근했다.

습격조는 꽤 걱정했었다.

미궁을 해결했다는 소문이 있는 녀석. 숨겨진 한 수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저항할 기미도 보이지 않고, 무기를 꺼내 들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대응도 없이 앉아서 기다리는 걸 보자, 다들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근데···."

"어, 좀 싸하네."

그들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모습이 잘 보였고, 문제의 기묘한 분위기에 기세가 밀리고 만 것이다.

***

체이서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전투 기계 같은 몸으로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대머리 거한이 눈에 띈다.

쟤가 로버트던가?

그러나 체이서는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자신 앞의 책상 덕분이었다.

-사각사각

태블릿이 올려진 책상에선 뭔가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전까지는 저주 방호 아티팩트만 잘 챙겨 입고, 굳이 무언가를 만지지 않았다면 안전했을 것이다.

일종의 순한 맛 창고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이곳은 아니다.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은 저주 방호 아티팩트가 있다고 무용해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덮쳐!"

그 앞에 앉아있던 체이서는, 적들이 달려들려는 순간 책상 위에 올려진 태블릿을 살짝 옆으로 치웠다.

-사각사각

로버트, 애쉬포드, 리치몬드 외 추적조로 온 귀족 신병들 모두의 시선이 책상 위로 흘렀다.

붉은 글씨를 발견한 자들의 머리가 핑 돈다.

가슴에 있는 무언가가 덜컹이며 떨어지는 느낌이 나며, 신체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 순간, 그들은 분명 죽고 싶었다.

사각거리는 소리엔 강제성이 있었다.

책상 앞에 있는 자들의 신경을 긁어서 읽게 만드는 것.

읽는 순간 절망감을 느꼈고, 절망감으로 끝난 것은 저주 방호구가 제 일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신병들은 당혹하며 한 명도 빠짐없이 걸음을 멈췄다.

로버트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방호구의 마력 잔량을 확인했다.

-우우웅

누가 지우개로 휙휙 지우는 듯 급속도로 손실되는 잔량을 보자 그가 다급하게 고함쳤다.

"다들 보호 아티팩트를 확인해!"

"헉! 이, 이게 왜 벌써 이렇게!"

병사들이 기겁하는 와중, 체이서가 다시 태블릿을 슥 움직여 붉은 글씨를 가렸다.

그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서 와. 창고는 처음이지?

"어서 와- 가 아니라. 흠흠."

체이서는 말을 멈춘 뒤 채널을 잠깐 노려 보고선, 다시 귀족 신병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19화. 그들이 자꾸 죽는다.

19화.

체이서는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물건은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인데, 보는 것만으로도 자살하게 만드는 미궁의 핵이야."

모두의 표정에 납득과 경악이 섞여들었다.

자신이 무슨 저주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위험한 물건 앞에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창고엔 이런 물건이 너무나도 많고, 너희는 아직 이런 물건을 버텨낼 수 없어."

체이서는 설득을 이어갔다.

"이제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 줄 알게 됐을 거야."

테이블에 앉아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체이서의 말을, 신병들은 뻣뻣이 서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 느낀 공포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러한 절망감을 느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결말은 자살이겠지.

심령이 뒤흔들린 그들은 결국 안정되어 보이는 체이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중간에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조용히 뒤돌아서 가면 돼. 그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체이서가 생각나는 게 있어서 물었다.

"누가 「파괴를 바라는 수정」과 「수명을 비추는 사진기」를 만졌다며? 그 사람들은 얼른 돌아가야 해. 잘못하면 혼자 당하는 게 아니라 전부 휘말려."

애쉬포드가 대뜸 반박했다.

"거짓말! 방호구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저주가 어떻게 침투해!"

"방호구가 줄어들 때까지 대기하거나, 눈을 속이거나, 다른 정신적인 피해를 일으키는 조건이 있거나 말하자면 끝도 없어."

다양한 물건들이 있지만, A구역에 있는 「미궁의 핵」 대다수는 만지는 순간 저주를 받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안전하게 보관된 물건들을 만지지만 않았다면 이곳까지 오는 데에 방호구를 잃을 일이 없다.

그렇기에 체이서가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이 가진 저주를 부담 없이 사용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위험했다면, 자살자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을 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싫은 애쉬포드에겐 그저 듣기 싫은 소리였다.

자신이 이미 저주 예정자라는 소리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애쉬포드를 향했다.

모두들 그가 미궁의 핵을 만진 것을 알고 있었다.

"애쉬포드. 너 수정 만졌었잖아?"

"그게 뭐! 혹시 쟤 말을 믿는 거야?"

"믿고 말고가 아니라 지금 네가 주변에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

무수한 욕설이 쏟아졌다.

하지만 애쉬포드는 꿋꿋이 버텼다. 여기서 홀로 돌아가는 건 원치 않았다.

리치몬드도 애쉬포드를 노려보았다. 저 녀석 때문에 자신도 「미궁의 핵」을 만져버렸다.

하지만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싱긋 웃는 체이서의 얼굴.

분명 친절하게 살 길을 안내하는 모습처럼 보였지만, 그의 꿈에서 본 모습이랑 겹쳐진다.

그 지옥같은 악몽 속 다리를 꼬고 웃는 체이서.

지금도 저 테이블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편하게 다리를 꼬고 있지 않나.

악몽이 현실이 되어가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 상황을 되새겨 보면 깨달을 수 있는 사실.

"그는 고작 몇 마디 말로 우리를 분열시켰어···."

그의 작은 읊조림은 다른 자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소름!

-체이서가 그런 놈이었어?

-그거 아니야 ㅋㅋ

더 무서운 것은, 저 녀석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의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애쉬포드가 무얼 만졌는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그는 우리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 그건 우리가 알려준 건데.

-쟤 착각 고순데? ㅋㅋ

더군다나, 아무도 체이서를 공격하겠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저 강력한 로버트마저도.

로버트는 체이서를 진지하게 관찰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주에 당하지 않으려면 그냥 뒤돌아 가면 된다 이거지?"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저 관이야."

체이서는 나가는 길목 오른편에 위치한 화려한 가시가 박힌 관짝을 가리켰다.

「거짓된 안식처」‗‗‗‗‗‗‗‗‗‗‗‗‗‗‗‗‗‗‗‗‗‗

300년 전만 해도, 이미 사망한 중죄인의 관을 가시가 박힌 관으로 바꾸어 쓰는 잔혹한 형벌이 있었다.

이때 관은 마법 물품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처벌에 대한 비용을 청구하는 대상이 죄인의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연좌제가 있던 시대. 다시 치르는 장례는 값비쌀수록 벌이 됐고, 관에 박힌 가시마다 온갖 흉악한 마법이 담기게 되었다.

이는 의도치 않게도 죽음을 위조하려 했던 자들의 수많은 목숨을 몸소 빼앗았다.

이 관 역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만들어냈고, 미궁의 핵으로 변질하였다.

!살고 싶은 마음을 증폭한다.

!그 답이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가장 믿는 사람의 목소리가 부른다.

‗‗‗‗‗‗‗‗‗‗‗‗‗‗‗‗‗‗‗‗‗‗‗‗‗‗‗‗‗‗‗‗‗‗‗‗

등 돌려 떠나는 자를 부르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환상을 제공하는 물건.

가시 하나 하나가 강력한 마법 무기나 다름 없기에 들어가면 시체조차 찾을 수 없다.

"아마 네가 가장 믿거나 안심되는 사람이 부를 거야. 하지만 절대로 되돌아보면 안돼."

로버트가 진지하게 듣고는 끄덕였다.

그가 당장 의심하지 않고 체이서의 말을 경청하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인간 관찰의 가호」‗‗‗‗‗‗‗‗‗‗‗‗‗‗‗‗‗‗‗‗

기록의 신이 내리는 가호.

영웅을 따라다니며 그의 이야기를 기록하라는 뜻으로, 기록자의 재능을 지닌 인간에게 내려진다.

인간에 한해 신체 움직임을 모조리 읽어 들이는 관찰력과 기억력, 그리고 글재주를 제공한다.

이 가호를 지닌 자들은 뭉크나 전투 사제, 무투가 등으로 활동하며, 영웅의 곁에서 전기를 작성한다.

!영웅에 매료됨.

!강자에 충성함.

‗‗‗‗‗‗‗‗‗‗‗‗‗‗‗‗‗‗‗‗‗‗‗‗‗‗‗‗‗‗‗‗‗‗‗

이 가호로 인해 그는 강력한 체술을 가졌고, 속임수에 당하지 않았다.

강력한 저주에 당하고 전의가 상당히 꺾인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그가 진실을 판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체이서가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위험이 있더라도 곧바로 체이서를 제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이 뭔가 꾸미고 있다면 오래 휘둘릴수록 위험하니까.

그러나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저 녀석은 지금까지 한 말 중에 거짓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진심으로 우릴 위하고 있으며 돌아갈 답을 말해주고 있다.

로버트는 체이서의 말에 따라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저주의 물건들에 대한 이미지가 확고해졌고, 이번 일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체이서의 가호는 저주 면역 같은 것일 테고, 이 창고 안에선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못 이긴다.

체이서가 뇌를 비우고 선반의 미궁의 핵을 무작정 집어 들어 던지기만 했어도 우리 일행은 모조리 죽어나갔을 것이다.

돌아갈 마음을 굳힌 로버트가 덜덜 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믿음직한 리더로서 먼저 시범을 보여야 한다.

자신이 모두를 챙기지 않으면 쓸데없는 희생자가 생겨날 수 있다.

그런 든든한 책임감으로, 로버트가 공포로 뻣뻣한 몸을 우두둑 풀었다.

-오 몸 봐라. 딱 무투가 하면 떠오르는 몸이네.

-덩치는 인정이지.

그가 스트레칭을 하면서 동료들에게 말했다.

"저 녀석의 말,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저, 정말? 쟤가 하는 말이 전부 진짜라고? 딱 봐도 흑막 같은데?"

"내가 어딜 봐서 흑막···."

"내가 먼저 움직일 테니까 별일 없으면 뒤따라와라. 창고 정리 작전은 실패다. 도미닉을 어떻게 설득할 지가 문제로군."

이미 이번 일은 끝났다는 듯, 미래의 일까지 언급하는 그의 태도에 병사들이 서서히 믿음을 느꼈다.

그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고, 로버트가 당당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었다.

리더쉽이 돋보이는 멋진 광경이었다.

-저벅.

그러나 그가 걷는 도중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가 그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로버트가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로버트! 돌아보지 마!"

"거기 아무것도 없어! 정신 차려 로버트!"

로버트의 매섭던 눈이 몽롱하게 풀리고, 저주 방호 아티팩트가 퍽 하고 기능을 잃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미궁의 핵」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네. 조금 일찍 돌아왔네요."

체이서가 당황했다.

자신은 분명 말했다. 절대로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근데 로버트는 그걸 죄다 숙지하고도, 정말 허무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온갖 강한 척은 다 하더니 그 정도 자제력밖에는 없었던 건가···!

체이서가 벌떡 일어났다.

"저거 그렇게 가면 안 되는데···."

이 순간에도 로버트는 누군가와 대화하며 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체이서는 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움찔한 귀족 신병들이 체이서를 보며 자신들의 무기나 주문서 버튼에 손을 올렸기 때문이다.

"로버트가 왜 저러는 거야! 넌 알고 있지!?"

"아까부터 뒤돌아 보면 안된다고 말했잖아? 뒤돌아봐서 죽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체이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았다.

아니 뒤돌아보지 말라는데 왜 뒤돌아보지?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체이서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정말 안타까웠지만, 달려가서 관을 닫는 등의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습격자들에게 등을 보였다가 어떤 일을 당할 줄 알고 저 녀석을 구하러 간단 말인가.

쟤를 구하다가 허무하게 잡혀버리면 그건 진짜 바보다.

그렇다고 다른 병사들한테 말리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로버트를 구하다가 다른 병사가 대신 들어갈 수도 있다.

체이서는 헛소리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로버트를 그저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네···. 죄송해요. 하지만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전 뭐든 할 수 있어요···."

로버트는 자신감 있는 말을 하며 특유의 힘 있는 걸음으로 관 속에 들어갔고.

-콰앙!

가시가 박힌 뚜껑이 닫혔다.

그들 사이에서 가장 강했던 자가, 가장 먼저 죽었다.

다들 경악해서 체이서를 바라보았다.

"아, 악마!"

"로버트한테 뭘 한 거야!"

체이서가 한심하단 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좀 진정해봐 멍청이들아. 지나가다가 뭐가 불러도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 된다고 말 했었잖아?"

물론 그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든든하게 믿던 로버트가 죽으며, 저들은 체이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못하게 된 상태였다.

"저 녀석의 말을 믿으면 안 돼! 우릴 죽이려는 수작이야!"

"맞아! 엄청 강력한 저주가 끌어당기는 걸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귀족 신병들은 로버트가 버티지 못한 유혹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쟤 말이 맞으면 어쩌지?"

그들은 생존을 위한 선택을 강요받는 기분이었고, 그 위태로운 심정 속에서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현재, 분노에 가장 취약한 자는 애쉬포드였다.

그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에 의해 깎여나간 방호벽 잔량은 「파괴를 바라는 수정」의 저주에 단숨에 꿰뚫렸다.

퍽 하고 애쉬포드의 방호구 아티팩트가 깨져나갔다.

-야 쟤 좀 이상한데?

-아, 성격 나쁜 놈 저주 터졌나 보다.

"내가 속을 것 같아?! 우리가 속을 것 같냐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분노를 내뱉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거짓된 분노였지만 바닥으로 향하는 자제력에 주체를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나 까불거리던 녀석이 싱글거리던 웃음을 지우고 미친듯이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씨발 비켜! 이 새끼가 책상 가리는 거 보라고! 저기에 뭔가 있겠지! 아니, 저 새끼가 앉아있는 거 보면 저 의자가 안전지대 아냐?"

고함치는 애쉬포드의 말에, 옆에 있던 리치몬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 분명히 책상 봤을 때 저주에 당한 것 같은데···."

"확실해? 이 인원 전부가 저 책상을 본 게 맞다고?"

리치몬드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엇을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아주 기분 나쁜 문장을 본 것 같았는데.

그의 문제는, 결국 맞는 말을 당당하게 못하는 것이었다.

체이서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네 말이 맞아. 좀 당당하게 주장해서 쟤들 진정 좀 시켜봐."

결국 참지 못한 애쉬포드가 허리춤의 지팡이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의 태블릿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체이서는 태블릿을 챙기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로 인해 붉은 글씨가 적히는 부분이 다시금 드러났다.

-까앙!

테이블을 때린 애쉬포드의 지팡이가 튕겨 올라가고, 태블릿을 치운 바람에 드러난 책상이 다시 붉은 문장을 작성했다.

-사각사각

대부분의 신병들이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에 시선이 끌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방전되기 시작하는 저주 방호 아티팩트.

"···."

체이서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봤든 보지 않았든 이미 늦었다.

이번에 본 병사들은, 너무 오래 테이블을 주시해버렸다.

-픽, 피잉, 우우웅.

갖가지 소리를 내며, 책상을 본 병사의 팔찌, 목걸이, 옷, 신발 등의 저주 방호 아티팩트가 꺼져버렸다.

그들은 광기 어린 얼굴로 화염구를 띄워 올리거나, 검과 도끼 등 자신의 무기를 꼬나쥔 뒤,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털썩 -털썩 -털썩

우르르 죽어서 나자빠지는 모습을 본 애쉬포드는 이 상황에 안절부절못했다.

남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

그가 아무리 무서울 게 없는 것처럼 굴어도, 이 정도로 사고를 쳐 놓고도 뻔뻔할 수는 없었다.

"흐아아아!"

애쉬포드가 비명이 들리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한 동료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다가 덜컥 멈추는 것이 보였다.

단체 자살에 패닉이 와서 무작정 도망치다가 뒤를 돌아본 듯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신적 저주에 취약해지기 때문에, 동료는 「거짓된 안식처」의 저주가 발하는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가 관을 돌아보며 헛소리를 시작한다.

"휴. 꿈이었구나. 꽤 무서운 악몽이었어. 근데 나 왜 여기서 잤지···?"

그가 눈을 비비며 터덜터덜 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메릴린. 시원한 물 좀 방으로 갖다 줄래?"

그렇게, 언제 다시 열린 지 모를 「거짓된 안식처」 안으로 들어갔다.

-콰앙!

관이 닫혔다.

애쉬포드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 때문인가?"

리치몬드가 체이서의 조언대로 강하게 대답했다.

"그래. 너 때문이야."

체이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저기서 저렇게 말한다고?

20화. 추격조를 완파했다.

20화.

리치몬드의 차가운 말은, 애쉬포드의 멘탈에 마지막 타격을 주었다.

그렇게 애쉬포드의 자제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미쳐버린 애쉬포드가 허리춤에 매달린 원통의 버튼을 눌렀다.

-화륵

화염구를 오른쪽에 있는 병사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콰아앙!

빠르게 대지를 밟는 군홧발 소리가 들리고, 폭발로 인한 연기가 걷혔다.

저주 방호 아티팩트를 주렁주렁 챙긴 애쉬포드가 도망치고 있었다.

이곳에 더는 못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저주 방호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한다.

저주 방호구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즉시 옆의 신병을 죽인 뒤 빼앗는다.

자제력이 제거된 사람의 행동은 이렇듯 극단적이었다.

바닥난 자제력은 그의 매 판단에 실수를 거듭하게 했는데, 「거짓된 안식」에 대한 공포는 그가 뒤가 아닌 앞으로 내달리게 했다.

그의 몸이 B구역을 향해 달렸다.

-타타탁

이게 틀렸다는 걸 안다.

그러나 깊이. 더 깊이 멈추지 않고 이동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중간에 방호 게이지가 떨어질 때마다 기겁하면서 방향을 바꿔야 했고, 그때 정해진 방향은 대개 틀린 방향이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그의 시선에 팔찌가 들어왔다.

잔량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표식이 보인다.

"···!"

이 잠깐 사이, 동료에게서 빼앗은 저주 방호 아티팩트가 모두 소모된 것이다.

아 안돼!

선반 한복판을 뛰던 그에게 가까운 저주가 파고들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느낌.

그러나 어느새 환경은 바뀌어, 온통 어두운 공간이었다.

-허억 허억.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미친 듯이 뛰어다녔는지, 숨이 거칠었다.

애쉬포드가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뭐야. 여긴 어디야.

어렴풋하게 계단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층계참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지만, 구체적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올라가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도 몰랐다.

잠깐 긴장하며 굳어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벽에 등을 대고 앉자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자제력의 저주란 끔찍했다.

무언갈 보면 생각이란 걸 하게 되고, 생각하면 바로 움직이게 된다.

그로 인해 제 몸속에 가둬져 억지로 끌려다니는 지옥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나 혼자 어둠 속에 있으니 생각의 흐름이 제멋대로 튀지 않아 조금 나았다.

그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노력했다.

괜찮아. 돌아갈 수 있어. 집으로 가자. 미궁도 싫어. 나, 난 돌아간다.

파편화된 생각이 이리저리 떠돌고, 조절되지 않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심호흡하는데, 확 하고 저만치에서 불빛이 켜졌다.

발광석이었다.

계단참을 밝혀 주는 그 빛은, 업무자를 위한 배려이자, 불청객을 향한 단죄였다.

-확

애쉬포드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확

네모난 액자들이 수십 개였다.

-확

그 액자 속 그림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확

애쉬포드는 자신 바로 정면에도 거대한 액자가 매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얼굴이 액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눈동자를 내리깐 채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올 리 없는 도움을 요청하며 온몸을 웅크린다.

그렇게 지독한 시간이 흘렀다.

"?"

아무 일도 없자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에 웬 회색 벽이 있다.

그가 의문을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파랗게 식은 자신의 시체가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를 내려다보던 여인의 액자.

자신이 여인 대신 그 안에 있었다.

애쉬포드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머리를 제외하곤 움직여지지 않았다.

"-! -!"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가 머리만 그려진 액자 속에서 소리 없이 절규했다.

층계참에 불빛이 꺼졌다.

***

"쟤는 아무래도 힘들겠네."

체이서가 달려나가는 애쉬포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저주에 잡아먹힌 듯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갔으면 아마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었다.

그때, 한 신병이 자신의 가호를 발동했다.

"군터! 설마 너!"

"그래. 그 가호를 사용했다."

「생존 경로의 가호」‗‗‗‗‗‗‗‗‗‗‗‗‗‗‗‗‗‗‗‗

정글의 신이 주는 소모성 가호이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0/1)

‗‗‗‗‗‗‗‗‗‗‗‗‗‗‗‗‗‗‗‗‗‗‗‗‗‗‗‗‗‗‗‗‗‗‗

군터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고는, 환하게 웃었다.

"너에게 「귀환 주문서」가 있다면서?"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있는데···?"

"그래. 내 가호가 그렇게 말하는군. 널 설득해서 「귀환 주문서」를 받는 게 '유일한' 생존 경로라고."

군터는 빼앗는 것도 생각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저 거물 같아 보이는 놈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거래하자. 「귀환 주문서」를 내게 팔아라."

체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자신의 예비 목숨이었다.

워낙 귀해서 자신도 두 장만 가지고 있는 물건을 자신을 죽이러 들어온 녀석에게 덜컥 넘겨줄 수는 없었다.

-수십 배로 팔고 다시 스펜서한테 받으면 되잖아?

-체이서 너무한 거 아냐? 돈이 장난이야?

-아니 안 파는 걸 뭐라 하는 게 돈 때문이냐고. ㅋㅋ

믿음이 있다면 또 모르지만, 당연히 저들과 체이서 사이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누누이 말했지만, 그냥 뒤로 돌아서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누가 말 걸어도 뒤돌아보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런 쉬운 일이 있는데 왜 이걸 스무 배나 주고 사려고 하는가.

파는 게 더 양심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귀환 주문서」의 위력은 대단했다.

신병들이 웅성거렸다.

"귀, 귀환 주문서라고?"

"그거만 있으면 바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냐?"

체이서는 난감한 듯 그들을 바라봤다.

괜히 일을 어렵게···.

체이서는 최대한 단호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여지를 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안돼."

"내 무기랑 바꿀래? 이거 엄청 비싼 거야. 귀환 주문서보다 열 배는 비싼 물건이라고."

"안 바꿔줘."

"어, 얼마야. 스무 배에 살게."

"바꿀 생각 없어. 돌아가."

그러자 슬슬 병사들의 눈이 돌아가려는 낌새가 보였다.

덮칠까? 덮치자.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느낌이었다.

-부들부들 잼.

-어? 어? 쟤 손 올라간다?

-드디어 싸움이야?

체이서는 분위기를 보더니, 마음을 바꿔서 귀환 주문서를 한 장 꺼내 들었다.

그래. 큰일이 나든 말든 하나만 팔자.

-탁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아. 한 장만 팔 테니까 너희끼리 잘 협의해서 가져가."

책상 위에 올려진 「귀환 주문서」는 물론 평화를 부르지는 않았다.

경매하던 녀석들은 이내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했고.

"너 이 새끼 좀 꺼져 봐!"

"내가 먼저 요구했잖아!"

"내 가호로 알아낸 건데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난장판이 되었다.

"싸, 싸우지 마!"

소심한 녀석. 리치몬드의 말은 당연한 듯 무시당했고.

"너 이 새끼 지금이 네가 끼어들 자리로 보여?"

"닥치고 짜져 있어!"

"아, 그러고 보니 너도 「미궁의 핵」 만지지 않았냐?"

"뭐야 근데 애쉬포드가 그렇게 당할 때 혼자만 닥치고 있었던 거냐? 이거 못 믿을 놈이네?"

"얼른 뒤돌아 뛰어가 겁쟁이 새끼야."

"야 쟤가 뛰겠냐?"

그들은 지독하게도 독설을 쏟아붓고 난 뒤, 다시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리치몬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 불길한 빛이 휘돌았다.

그도 드디어, 「파괴를 바라는 수정」의 저주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이···! 작작 좀 무시해!"

그의 고함에도 비웃는 병사들.

"와 쟤도 화를 내는구나."

"큭큭 하나도 안 무서워."

순간, 리치몬드의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이 보라색 잔상을 그렸다.

-촤아악

그리고 바닥에 점점이 붉은 선을 남겼다.

"큭, 끄윽 끅···?"

끅끅대며 비웃던 녀석 하나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무시하지 말라고! 나, 나는···."

리치몬드는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다음 녀석에게 달려갔다.

-촤아악!

그는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야 쟤 저주에 당한 것 같은데?"

"얼른 처리해!"

병사들이 원통의 버튼을 누를 시간조차 없이 죽어 나갔다.

리치몬드는 소심했을 뿐 상당한 재능이 있는 전사였고, 눌러 참아왔던 모든 울분이 자제심이 사라진 순간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중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몸은 정직했다.

운전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급가속.

진정한 의미의 '급발진'이었다.

「룬의 가호」‗‗‗‗‗‗‗‗‗‗‗‗‗‗‗‗‗‗

보석의 신이 주는 가호.

더 많은 보석을 찾아내라는 뜻으로, 광업에 재능이 있는 인간에게 내려진다.

보석으로 만든 장비에 마법 문자를 새겨 사용하는 룬 강화술을 강력하게 보조한다.

!룬 장비 제작법 부여

!룬 마법(성장형) 부여

!미약한 예측력 보정.

!금속제 장비 숙련 보정.

‗‗‗‗‗‗‗‗‗‗‗‗‗‗‗‗‗‗‗‗‗‗‗‗‗‗‗

공격 속도와 절삭력, 형태 변화, 무게 증감, 길이 변화 등 수도 없이 새겨진 보석 검이 열기를 토해냈다.

하나도 버겁던 룬 마법이 자제력 없는 주인에 의해 한꺼번에 발동했다.

그가 쥔 보석 검과 신체에 과부하가 걸린다.

-차르르륵

검이었던 무기는 부드럽게 형태를 변화하며 「룬 장비」의 최종 형태인 곡괭이로 뒤바뀌었다.

-후우웅 콰아앙!

그렇게 잔혹함을 더한 무기는, 그를 보며 당혹해하는 '적'들을 가차 없이 박살 내버렸다.

겨우 상황을 파악한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자, 리치몬드가 곧바로 허리춤의 원통을 잡아 눌렀다.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띄워지자, 손을 휘저어 왼쪽 신병에게 처박았다.

-콰아앙!

머리가 새카맣게 탄 병사가 쓰러진다.

-키이이잉

곡괭이 끝이 시원하게 회전했다.

리치몬드의 회전 드릴이 거침없이 휘둘러져 나머지 두 명을 동시에 파괴했다.

-콰드드득

그것으로 악몽이 완성되었다. 무투파들이 죄다 죽어 나간 탓에, 이젠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리치몬드는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그의 의지를 벗어난 채로 그가 꾼 악몽을 그대로 재현해냈으며, 그의 주황색 머리칼이 피로 인해 붉게 젖어갔다.

「파괴를 바라는 수정」의 위엄이었다.

마침내 덤벼드는 귀족 신병 모두를 학살해버린 녀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빠져있던 두 신병이 저만치 도망가고 있다.

리치몬드가 두 신병을 쫓아 달려갔다.

그렇게 정적이 찾아오며, 체이서는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와 다 죽네.

-야, 체이서가 저렇게 무서운 녀석이었나?

-아니, 모르겠다. ㅋㅋ

-대체 뭘 한 거야 체이서.

그가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기지개를 쭉 켰다.

"쉽게 갈 걸 되게 어렵게 가네요. 정말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구나."

-그건 너고 ㅋㅋ

-단숨에 끝날 일을 괜히 복잡하게 만들었잖아.

아무리 침입자라고 하더라도 당장 위험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다짜고짜 죽여버리는 건 원치 않았었다.

체이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이 붉은 구역 수준으로 새빨갛다.

이것들은 언제 치우지?

그는 난감했다.

도플갱어의 검은 피와 살점, 붉은 슬라임 등의 시체는 미궁이 사라지자 말끔히 사라졌었다.

그러나 미궁의 구성 요소가 아닌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E구역엔 여전히 부서진 「미궁의 핵」이 산처럼 쌓여 있다.

저기 있는 시체도 체이서가 치워야 한다.

체이서는 일거리가 자꾸 늘어나는 것이 안타까웠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자꾸자꾸 늘어난다.

그리고, 누구라도 인정하겠지만 시체를 치우는 일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이래서 그냥 내보내려고 했던 건데."

저 녀석들은 잘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체이서의 뒷배는 해당 부대의 행정 총괄이었다.

저들은 신병들이고, 신병들의 부대 배치는 윗선의 권한으로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살아있는 녀석들을 데려오라는 소리가 무엇일까.

스펜서는 자신이 저택까지 넘겨주면서 오래 두고 쓰려고 했던 인재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절대로 이 부대에 남겨두지 않았을 것이다.

체이서는 그걸 알았다.

자신이 받은 것은 상당히 크고, 그건 그가 받는 기대감의 크기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했다.

고층 저택의 높이처럼 드높은 기대감에는, 재능이건 귀족이건 다른 요인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저들이 밖으로 나와 무슨 짓을 하려 했건 그보다 먼저 스펜서의 얼굴을 봐야 했을 거고, 아마 꽤 강한 처벌을 받은 뒤 입막음 당한 채 다른 곳에 배치받았을 것이다.

아마 미궁 탐색 팀이나 미궁 공략조로 보내지 않았을까?

그럼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업적을 쌓아갈 수 있겠지.

금방 죽겠지만.

그것으로 더는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체이서는 그들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후환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20초 만에 뚫어버린 죽음의 위기를 빌미로 무작정 학살을 한 뒤 시체 청소를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건 일거리만 늘리는 행동이라고 느꼈다.

이전에 진입해 들어왔던 30인의 해결사 중 팀장의 잔해도 체이서가 처리했었다.

대다수는 붉은 구역. D~E구역에서 죽었기에 붉은 슬라임과 도플갱어의 먹잇감이 되어 자취를 찾을 수 없었지만, 네 명은 붉은 지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들었다.

붉은 구역을 뛰쳐나와 앞장서던 팀장이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을 마주해 죽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살아남아서 나왔다.

체이서가 찾은 죽은 팀장의 잔해는 한구석에 떨어져 있던 신발 한 짝이었다.

자신의 가호로 인해 전소된 탓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주검은···.

체이서는 일이 늘었다는 걸 생각하자, 이 이상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입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복도에 있는 녀석들도 얼른 해결하고 서둘러 일을 시작해야 하겠네요."

체이서가 복도 쪽으로 이동하면서, 땅에 내팽개쳐져 있는 「파괴를 바라는 수정」을 발견해 인벤토리에 넣었다.

사진기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나중에 찾아서 제자리에 갖다 놔야지.

잠시 뒤, 체이서가 복도 근처에 도착했다.

일정한 거리를 벌린 상태로, 도미닉과 대기조 인원들과 마주했다.

21화. 새 임무를 받았다.

21화.

도미닉이 체이서를 보며 물었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야?"

"다 죽고, 한 명만 미쳐서 날뛰는 중이야."

도미닉이 어이없다는 듯 체이서를 쳐다보다가, 이내 끅끅거리며 웃었다.

"애들이 다 죽었다고? 이거 미친놈이네. 귀족을 죽여?"

"내가 안 죽였는데?"

체이서는 당당했다.

그가 죽인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의 정신은 명료한 만큼, 상황을 오인하거나 괜한 자기 탓을 하지 않았다.

안 죽인 건 안 죽인 거다.

체이서는 자기 나름대로 생명 존중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걸 저버린 건 하나부터 열 까지 저들이었다.

처음부터 창고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도망치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테고.

「거짓된 안식처」의 경우, 자신이 말한 대로만 했으면 그냥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따로 강제력이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이 제일 믿는 사람 목소리로 부를 뿐이다.

돌아보는 순간 저주에 당하고 환상을 보는 물건이었다. 모르면 모를까 알고서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물건이다.

「마지막 사령관의 테이블」은 자신 말만 잘 들었다면 그냥 처음 겁주는 용도로 끝났을 것이었다. 그걸 굳이 보겠다고 온갖 난리를 친 것도 결국 저들이었다.

「파괴를 바라는 수정」을 가지고 놀다가 자멸한 것도, 「귀환 주문서」에 집착하다가 리치몬드라는 녀석을 폭발시킨 것도 그들이다.

어쨌든 그들이 다 자초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미닉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잘됐네. 이걸로 목표는 달성이야."

그가 고개를 젖혀 체이서를 깔아보았다.

"네 능력도 대충 알았고, 뭐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 정도론 일이 잘 풀렸네."

도미닉은 이런 상황도 가정했었다.

체이서에게 반격을 당하고 몇 명이 죽는 그림.

그렇게 되어도 도미닉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다.

체이서는 중범죄자가 되어 죽을 테니 더는 자신의 눈에 거슬릴 일이 없을 거다.

물론 자신들도 창고에 들어왔단 이유로 다소간 혼나겠지만, 귀족 자제들은 본래 적당히 가택연금 정도로 시간 끌다가 집행유예로 나오면 끝이다.

물론 스펜서 담당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제 나가서, 네가 여기 들어온 모두를 죽였다고 말하면 되는 거지?"

"난 안 죽였다니까?"

도미닉이 사악하게 웃었다.

"글쎄. 난 네가 죽였다고 보고할 건데?"

"누구한테?"

"죽은 녀석들의 부모님이라던가···. 아무리 내놓은 자식들이라고 하더라도, 병사로 들어오기 전에 천민이었던 녀석에게 죽었다고 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움직이시겠지?"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리고 너. 우리가 여기서 나가면 못 이기잖아? 그 잘난 「미궁의 핵」을 들고나와서 휘두를 수는 있나? 반출 불가능이지?"

아니다. 공격은 둘째 치고 들고 나가는 건 가능하다. 이미 스펜서에게 허가를 받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도미닉은 그렇게 비웃더니, 휙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녀석들도 체이서를 비웃으며 도미닉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이 일의 원흉들.

도미닉을 위시한 일행들이, 당당하게 창고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텁

"음?"

도미닉이 무언가를 밟고 헛디뎠다.

"뭐야 웬 열쇠가 여기 있어?"

하지만 투덜댈 상황이 아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저주 방호 아티팩트가 망가져 버렸다.

열쇠는 마녀조차도 버거워하던 물건이다.

신병들이 한 준비?

턱도 없이 부족했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가 마법사를 감지하고 저주를 발휘했다.

-키이잉

열쇠로부터 반원형 파문이 일어나 그와 일행의 몸을 스르륵 훑고 지나쳤다.

일행들의 아티팩트가 순식간에 줄어들고, 도미닉의 심장 부근에 푸른 발광점이 생겨났다.

심장의 푸른 점. 그 위치는 분명 마나홀이다.

발전된 마나 호흡법으로 인해, 귀족 자제라면 다들 흔적이라도 존재하는 것.

유아기때 마법 재능을 파악하기 위한 귀족가의 영재 교육은, 열쇠로 하여금 전부를 '마법사'로 감지하게 만들었다.

도미닉이 가슴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떨리는 눈은 최후를 직감한 듯했다.

"안 돼···."

-찰칵.

결계를 열 때 들리던 경쾌한 개방음과 동시에.

-사아아아

도미닉이 소멸했다.

그 자리에는 성격 나쁜 열쇠와 지글거리는 열기만 남았다.

"···."

귀족 신병들이 혼비백산했다.

체이서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줘."

체이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라고 어찌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목표물을 포착한 열쇠가 휙 날아올랐다.

-팅 탕 통 탕 팅 절그럭.

그리고 한 명 한 명에게 손수 그 저주스러운 몸을 들이박고 떨어졌다.

꺼진 방호구를 발견한 녀석들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앞에 놓인 열쇠를 멍하니 바라보는 자.

입을 딱 벌리는 자.

정신없이 뒤를 돌아 달리기 시작하는 자.

울음을 터뜨리는 자.

그리고. 눈을 감는 자.

-키이잉

다시 펼쳐진 장막이 도망치는 녀석까지 확실히 따라잡은 뒤 사라졌고, 다섯 명의 마나홀에 푸른 발광점이 생겨났다.

-찰칵.

그들은 각자의 자세로 소멸했고.

-사아아아

복도엔 한바탕 열기가 휘몰아쳤다.

-쟤들 진짜 뭐하냐?

-아니;;

-'아니'란 말이 절로 나오네...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대로. 귀족 신병들의 우두머리다운 최후였다.

-절그럭

그때, 리치몬드가 도착했다.

온몸이 피로 물든 살인마가 비틀거리며 적을 찾는다.

그의 분노는 아직도 활활 타올랐다.

바닥난 자제력이 적을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끼기긱, 끼긱

곡괭이를 땅에 질질 끌며 다가오는 리치몬드.

그와 눈이 마주친 체이서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핑크빛 귀가 손아귀에 잡혔다.

체이서가 인벤토리에서 꺼내진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바닥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살인마의 앞에 분홍색 토끼 인형이 곧게 섰다.

휘적휘적 화려한 움직임과 기수식을 선보인 뒤, 차분히 견고한 자세를 잡는다.

-삐잇

그에 따라, 리치몬드도 자신의 곡괭이를 쥐고 자세를 취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보석 곡괭이의 첨단이 음울한 빛을 내며, 파괴적으로 회전했다.

-키이이잉

그렇게 두 강자가 마지막 승자를 가릴 전투를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