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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체이서의 보상을 받았다.

92화.

감옥에 들어갈 뻔한 체이서는 스태버나우의 빠른 도착에 풀려났다.

성수 앰플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스태버나우는 티아멧 교단과 꽤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성녀의 집무실로 들어간 체이서는 그녀를 설득하기로 했다.

어차피 대신전 부지 내부에 입구가 있는 이상, 티아멧 교단이 성수의 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용신상이 서 있던 반석 아래에 성스러운 샘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다만, 그곳에 들어가는 데 정해진 방법이 있습니다."

원래는 그곳에 배치된 「미궁의 핵」 사이에서 비밀번호를 찾아 그 순서대로 계단을 디뎌서 내려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박제 중 몇 개는 사라졌고, 액자는 뒤섞여서 순서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암호는 저만 알고 있습니다."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스태버나우 남작은 성수를 무한정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양이 어느 정도나 되죠?"

"웬만한 호수의 크기와 깊이에 계속해서 양이 늘어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티아멧 교단의 성지로 관리해야 할 공간이네요. 하지만 스태버나우 남작은 우리의 부탁을 자주 들어줬었지요. 그 혼자서 사용하는 거라면 허락하겠습니다."

성녀가 수락하자, 그녀의 뒤에 있는 용 가면을 쓴 이단 심문관이 박수치며 말을 건넸다.

"자네 티아멧 교단을 믿지 않으면 조상님께서 참 슬퍼하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따라오세요."

체이서와 성녀 일행이 무너진 반석 아래로 들어갔다.

잠시 뒤, 체이서의 말대로 정해진 계단만을 밟아 [0층 제어실] 문 앞에 섰다.

"이곳에 무트 대성당의 축복받은 샘이 있다는 거지요."

대신전 전엔 대성당으로 불렸던 티아멧 교단의 사원.

그 시절의 전설상엔 성수가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했다.

성녀는 체이서가 여는 문 너머로 들어가며, 그 전설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이 장소가 위험물 창고 안에 있었다는 건가요? ···왜죠?"

그녀는 답지 않게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의문을 말했다.

체이서가 상식백과에서 확인했던 내용을 말해주었다.

"지하에 봉인된 불길한 물건들이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마법사가 과거 티아멧 교단의 교황과 무언가 약속을 하고 옮겨둔 듯합니다."

그때 스태버나우의 주머니에서 알람이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태블릿이 아닌, 더 작은 통신 장비로 보였다.

스태버나우가 그걸 열자, 급박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발두르 사에 즉시 지원을 요청합니다. 황성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스태버나우가 침착하게 말했다.

"누구의 공격입니까?"

-수페르비아입니다.

그의 얼굴이 굳더니 체이서에게 물었다.

"슬슬 돌아가시겠습니까? 이 일대가 위험해졌습니다."

좋았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졌다.

성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얼른 나가죠. 이단 심문관도 수페르비아를 막는 데 도우세요."

그들이 서둘러 나가려 하는데, 체이서와 스태버나우는 무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페르비아가 「미궁의 핵」이 되기 전에 피 흘리는 검을 가져갔다고 했죠?"

"맞습니다."

"그럼 「피 흘리는 검」이야말로 그녀의 안배가 아닐까요?"

그녀의 방어력은 본래도 대단했을 것이다.

거기에 「미궁의 핵」이 되면 더욱 견고해져서 무엇도 그녀를 부수기 힘들 정도가 된다.

그런 그녀가 부러 「피흘리는 검」을 결합한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을 막아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저주의 무기에 담긴 기능은 다치지 않게 해주는 대신 어마어마한 수명을 빼앗아가니까.

"그렇다는 건 무수한 타격이 있다면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거군요."

다치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적. 수페르비아는 늘 강건한 모습으로 나타나 모두의 절망감을 자아냈다.

그러나 이제 겉보기와 달리 속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거인이 죽으면서 엄청난 저주를 토해냈습니다."

스태버나우는 그녀가 미궁의 핵이 되던 당시를 말했다.

"수천 년을 가둬둔 대마법사와 인간들에게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인간을 죽일 만치 지독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저주를 그녀 홀로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지하층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 앞에 있는 괴물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미궁의 핵」이 될 것을 먼저 예상하였다는 뜻이다.

비록 그녀의 힘으로 인해 이 일대가 황폐해진 것은 맞다.

그러나 미궁의 핵이 되기 전 무수한 괴물을 막아내어 근처 시민 대다수를 황성 내부로 들일 시간을 벌어낸 주역이 그녀였다.

거인이 황성을 무너뜨리는 것과 이 일대를 저주의 공간으로 바꿀 위기를 없앤 자도 그녀였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싸워준 그녀를 죽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방법이 없었다면 별수 없이 죽였겠으나."

스태버나우가 성수의 샘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젠 다른 방법이 생겼지 않습니까?"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스태버나우가 인벤토리에서 빈 앰플을 잔뜩 꺼내더니, 그곳에 성수를 채웠다.

체이서는 호수로 뛰어들어 잠수하더니, 호수 밑바닥을 디뎠다.

-꼬르륵

호수 속에서 「귀환 주문서」를 여러 장 꺼냈다.

이전에 스펜서 담당관에게 받은 주문서 묶음은 여전히 수십 장이 넘게 남아있었다.

-파팟

푸른 마력이 성수를 타고 흘렀다.

체이서가 꺼내든 귀환 주문서가 축복받은 샘을 귀환 장소로 지정해두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와 황궁으로 향했다.

먼저 나온 성녀 일행이 수페르비아와 전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황금색 방어막이 이단 심문관과 발터 공작, 그리고 이 세상의 올리비아와 황실 기사단장을 각각 감싸고 있었다.

모래 창이 회전하며 수페르비아에게 날아들자, 그녀는 자신의 신체와 일체화되어 있는 「피 흘리는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쾅!

수페르비아는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인 듯, 황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팔에 붙은 검이 황성 밖을 방어하는 장막을 거세게 가르자, 장막의 빛이 일시적으로 흐려졌다.

스태버나우는 그녀가 황궁을 목표로 삼은 이유를 알겠다는 듯 말했다.

"황성 안에 있는 마법사만 만 명이 넘습니다. 그중 대마법사는 서른 명이 넘고요. 사실상 그녀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아내면서 방어막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장막은 다시 짙은 푸른빛으로 달아올랐고, 황성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콰아앙! 콰과광!

황성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온갖 마법이 그녀를 타격했으나, 팔에 붙은 검에 의해 상처 입지 않는 듯 보였다.

모두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스태버나우는 이젠 저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더 강화된 자신을 막을 수 있도록 타격받을 때마다 수명을 깎는 저주의 물건을 장비했다.

타격받지 않는 상태로 보이지만, 그녀는 조금씩 죽어가는 중이었다.

체이서가 말했다.

"상점창이라고 아십니까?"

"들어보긴 했는데 아직 써본 적은 없습니다."

"저 검을 얻으면 사용할 수 있는 채널상의 기능입니다. TP는 좀 소모되겠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체이서가 말했다.

"이제 피 흘리는 검을 빼앗아 오죠."

스태버나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주 강화 망치」를 어깨에 메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의 온몸은 온갖 적의 시체나 잔해로 만들어져 있다.

수페르비아는 격이 높아 강화 시도를 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녀의 신체는 여러 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신체 일부라면 얼마든지 강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위해선 정확한 부위를 찾아 정확하게 때려야 했지만, 그에겐 채널이 있지 않던가.

-지금.

바이크를 타고 날아오른 스태버나우가 어깨에 멘 망치를 올려 쳤다.

들어 올리는 힘을 강력하게 보조해주었기에 정확하게 휘둘러진 망치는, 수페르비아의 「피 흘리는 검」이 붙은 팔뚝에 정확히 닿았다.

그 파괴력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아 수페르비아가 막지 않은 탓이었다.

-카앙!

-강화 성공!

수페르비아의 근처에 정교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발터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용의 마법···?"

그녀가 거센 이끌림에 불편해하는 동안, 스태버나우가 반대편으로 망치를 집어 던졌다.

그걸 받은 체이서가 무릎을 가격했다.

-까아앙!

-강화 실패.

무언가 파괴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작 신체가 부수어지진 않았다.

"···."

그 대신 그녀의 수명이 그만큼 깎여나갔겠지.

-전투 인형의 수명이라고 하면, 코어의 수명일 거야.

-보통 직접 타격만 당하지 않으면 반영구적인데, 지금 그녀는 외부 타격을 받으면 코어가 상하는 상태겠지.

수페르비아의 고개가 체이서에게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받은 모든 타격보다 그의 공격 하나가 더 강력했다.

그녀의 맨손이 공기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을 공격을 발터 공작이 앞으로 나와 막아냈다.

그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아 보였으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평했다.

"스태버나우. 언제 둘이 된 거야?"

"다른 세상의 접니다."

"그렇군! 또 이 상황을 타개할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나?"

"잠시만 막아주십시오."

"알겠어."

발터가 수페르비아의 공격을 대신 받아낼 때, 체이서가 스태버나우에게로 다시 망치를 던져 넘겼다.

그걸 붙잡은 스태버나우가 그녀의 발등을 내려찍었다.

-후우웅 쩌엉!

그녀의 발등이 강화에 성공했다.

대지에 마법진이 하나 더 생기더니 그녀의 몸을 빨아들였다.

그녀가 발을 굴렀다.

-쿠구궁!

막대한 힘으로 발을 대지에 꽂아 넣었다.

이단 심문관이 황금빛 창을 내리쳐 그녀의 몸을 멈추었을 때, 스태버나우가 「저주를 쥐는 손아귀」의 능력을 사용해 반대편 다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사아아

「미궁의 핵」의 힘을 약화하는 특수한 힘에 그녀의 반대편 다리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때 다시 체이서가 망치를 받고 그녀의 다른 팔을 내리쳤다.

-콰앙!

-강화 성공!

하나 남은 팔의 우측에서도 마법진이 생겨나 그녀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사지가 모두 제약된 상태였다.

그때 그녀가 제 몸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됐다!

어깨와 팔, 그리고 다리를 분리하자, 용의 보물고로 전송하는 마법진 안으로 그녀의 신체 일부가 빨려들어 닫혔다.

-철그렁.

대지 위로 「피 흘리는 검」이 떨구어졌다.

그녀가 대마법사의 전투 인형으로서 가지고 있던, 분리하고 합쳐 신체를 구성하는 기능은 살아있었다.

불필요하여 쓰지 않고 있었을 뿐.

그러나 원활한 목표물 파괴를 지속하기 어렵게 팔다리가 구속되자,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신체의 일정 부분을 포기해버렸다.

-꾸드득

그리고 재구성했다.

5년쯤 더 어려 보일 뿐, 다친 데 없이 건재한 소녀의 신체가 된 그녀의 오드아이는 여전히 체이서를 주시했다.

"막아주세요. 끝나갑니다."

그녀의 무게가 높았던 것은, 그녀가 수많은 적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높은 밀도로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조금 더 가벼워졌고 더 작아졌다.

그에 더해, 이젠 「피 흘리는 검」이 없으므로 그녀의 핵을 직접적으로 노후화시킬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더 강해졌다고도 볼 수 있는 일.

그러나 이 일은 스태버나우와 체이서가 바라던 상황이었다.

스태버나우가 안심한 채 「피 흘리는 검」을 주워들 때, 바이크를 탄 채로 날아오른 체이서가 자신의 뒤로 종이를 흩뿌렸다.

펄럭이며 떨어지는 종이 사이로, 더 빨라진 듯한 수페르비아의 몸이 움직였다.

"어딜!"

발터가 뛰어들어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수페르비아의 손이 발터의 검을 향해 휘둘러졌다.

발터의 검이 기이한 궤도를 따라 휘둘러져 종이를 피해간 것과 달리, 수페르비아의 손은 일직선으로 그어져 종이들을 찢어냈고.

-찌이익

「귀환 주문서」가 발동했다.

-우우웅

그녀의 발밑에 여러 개의 공간 마법이 새겨진다.

공간 마법에 저항하던 그녀의 몸은 끝내 어디론가 전송되어 사라졌다.

발터 공작이 땀을 닦아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어디로 옮긴 거야?"

"성수의 샘으로요."

"성수의 샘? 그런 곳이 있나? 뭐 어쨌든. 난 좀 잘게."

발터가 비틀거리며 황궁 입구로 들어갔다.

세계의 반대편으로 넘어갔던 그가 수페르비와 추격전을 벌이며 어떤 모험을 했을지 상상해보면 왜 저렇게 피곤해하는지 이해가 갔다.

뒤를 돌자 성녀가 서 있었다.

그들은 성녀의 차가운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미궁의 핵」이 된 그녀를 축복받은 샘 안에 전송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그들은 [0층 제어실]로 돌아갔다.

성수가 무릎까지 올 정도로 잔잔하게 줄어든 것을 확인했다.

"···."

성수 중앙에 쓰러져있는 꼬마 소녀 주변엔 적색과 황금색 성력이 일렁였다.

이단 심문관이 감격스럽다는 듯 말했다.

"강력한 성기사가 탄생했군요."

"···그래도 최악의 적이 최고의 아군이 되었으니. 신께서 주신 은총입니다."

근 수백 년간 쓴 성수의 양보다 오늘 하루 쓴 양이 더 많았다.

성녀는 수페르비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동그란 눈을 뜬 수페르비아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신이시여. 세상을 정화하겠습니다."

그녀는 세례로 인해 성기사로 다시 태어난 상태였다.

불안정했던 신체가 안정되었고, 낡아 부스러지기 직전이었던 코어도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오랜 기간 홀로 보내며 낡아갔던 정신이 완벽하게 회복한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제 이 세상을 되살리는 일을 위해 싸울 것이었다.

수페르비아가 몸을 일으켰다.

역으로 성녀를 안아 올린 뒤 샘 밖으로 나왔을 때, 성녀에게 빛이 쏟아졌다.

그녀의 눈이 지그시 감기더니, 다시 떠졌을 때는 용의 눈과 같이 세로 동공이 되어 있었다.

성수로 다가가 손을 대자, 호수에서 더 큰 빛이 일어났다.

-구구궁

열려있던 문에 붙은 [0층 제어실]이란 푯말이 떨어져 내리자 가려졌던 자리엔 [축복받은 샘]이란 신성 문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정석이 가득 박힌 천장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여 동굴 벽 같았던 천장이 매끈해지며 성석과 같이 새하얀 색의 천장으로 바뀌었다.

벽 역시 판판하게 다져지더니, 온갖 용의 형상이 양각으로 돋아났다.

글로든 바머의 상자가 놓여 있던 기둥이 위로 솟더니 일부가 저절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형태를 바꾸던 샘 중앙의 기둥은 어느새 그들이 잃어버린 것보다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 용신상이 되어 있었다.

-복원이다.

-오래전 저들의 성지였을 적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네.

용신상에서 빛이 내려오자, 황금빛 샘이 급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티아멧 신께서 5년에 한 번 이 샘을 가득한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녀는 체이서를 보더니 살짝 웃었다.

망가져만 가는 세상 속 이렇게나 좋은 일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께서 내려주는 계시를 해석해 전달했다.

"당신의 세상으로 돌아가서도 티아멧 교단과 함께하라고 하시네요."

체이서는 놀랐다.

성녀와 성스러운 샘이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으니까.

-좋은 사실을 알았네. ㅋㅋ

-이제 돌아가서 지하 0층으로 성녀 안내하면 되겠다.

***

체이서는 미리 수집해둔 「영혼 폭탄」과 「저주왕의 잔」, 그리고 이전의 싸움으로 얻은 「피 흘리는 검」의 조합으로 영혼의 격을 올리는 방법을 선보였다.

그 결과, 스태버나우도 상점창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론 반대로 체이서가 받을 차례였다.

스펜서와 스태버나우는 체이서를 끌고 다니며 이런저런 물건을 안겨주었다.

하나는 「호버 바이크」.

체이서가 애용하던 비행하는 바이크와, 그 제작 기술을 흔쾌히 넘겼다.

그리고 「비행요새」의 제작 기술 정보를 얻었다.

"아직 개발 중입니다."

그들은 이미 공중에 떠 있는 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술을 더 발전시켜, 공중에서 움직이는 이동 요새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그 공중 기술과 「발두르 사(社)」의 건축 설계도, 제작 재료에 대한 정보가 모두 담긴 「고대 최신 기록 장치」가 체이서에게 전달됐다.

"이 기록 장치는 우리에겐 골동품이네. 스태버나우는 손에 익숙한 게 좋다며 잘 쓰더군. 자네도 같겠지."

그들은 이미 발전된 통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은 체이서에게도 흔쾌히 제공될 것이었다.

그는 둥근 몸체에 넓적한 판이 달린 물건. 이미 완성된 인공위성 앞에 섰다.

"사실 다섯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생각처럼 쉽게는 안 되더군요."

-우주 기술이 만만하진 않지.

"이미 네 개를 띄웠고, 이제 이게 다섯 개째인데, 이걸 드리겠습니다."

스태버나우가 말했다.

"제작 기술도요."

그 정보 또한 얻어낼 수 있었다.

-체이서가 창고 관리하고 사건 막으러 돌아다닐 때 얘들은 기술만 죽어라 발전시킨 거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거지.

체이서는 돌아가기 전 스태버나우에게 글로든 바머의 물품을 전달했다.

그러자 스태버나우는 「창고지기 상식백과」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네요."

이곳은 이미 창고가 부서진 상황.

스태버나우에겐 [0등급 제어장치]조차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상식백과는 창고 안에 있던 것들, 필요했던 것들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으므로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우린 안전한 위험물 창고를 새로 만들 겁니다. 그때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체이서가 그를 배웅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차원의 거울 파편」을 향해 걸었다.

파편에 닿은 그의 몸이 다른 세상을 향해 전송됐다.

체이서가 눈을 뜬 곳은 그의 눈에 익숙한 위험물 창고의 1층이었다.

그곳을 걷던 체이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창고의 선반이 전부 비워져 있었다.

93화. 핵무기 관리자를 만났다.

93화.

빈 선반 사이를 걷던 체이서는 이곳이 E구역임을 깨달았다.

C구역으로 나아가자 조금씩 미궁의 핵이 보였고, A구역에는 아직 꽤 많은 「미궁의 핵」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펜서와 사이가 나쁜가?

-이거 딱 봐도 그거지?

이 배치는 아무래도 스펜서의 가호 「내려다보는 눈」을 피하기 위한 일인 듯했다.

창고 입구 앞에서 기다리는데, 그가 나왔던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

상병 마크를 달았으며 훈장이 없는 체이서가 토끼인형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준 반지는 있네.

-대체 어떤 세계인 거지?

체이서는 굳이 숨지 않았다.

잠시 뒤 그를 보며 의아해한 다른 세상의 체이서가 자연스럽게 검은 가방을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미궁을 터뜨린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체이서는 상대의 양손에 들린 가방을 해석했다.

「핵가방-1201」‗‗‗‗‗‗‗‗‗‗‗‗

바하무트 제국 미궁의 핵 무기화 시설 관리국에서 개발된 1201번 무기.

미궁의 핵 「검귀의 반지」가 재료로 사용되었다.

관리국에 S등급 판정을 받았다.

‗‗‗‗‗‗‗‗‗‗‗‗‗‗‗‗‗‗‗‗‗‗‗‗‗‗‗‗

「핵가방-0193」‗‗‗‗‗‗‗‗‗‗‗‗

바하무트 제국 미궁의 핵 무기화 시설 관리국에서 개발된 193번 무기.

미궁의 핵 「물어뜯는 방패」가 재료로 사용되었다.

관리국에 S등급 판정을 받았다.

‗‗‗‗‗‗‗‗‗‗‗‗‗‗‗‗‗‗‗‗‗‗‗‗‗‗‗‗

언뜻 봐도 위력적인 공방일체의 조합이었다.

체이서는 그걸 열기 전에 태블릿을 꺼내 「차원의 거울」의 해석을 띄웠다.

"다른 세상에서 잠깐 넘어온 겁니다."

태블릿을 읽은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을 집어넣었다.

"반갑습니다. 체이서- 아니, 사다드라고 불러주세요."

"체이서 헌트입니다."

둘은 악수했다.

"여기 미궁의 핵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슈나이더 가(家)의 비밀 실험실에 있습니다."

"···?"

체이서가 갸웃하자, 사다드가 질문했다.

"그쪽 세상은 많이 다릅니까?"

체이서가 자신의 세상에 대해 말하자, 사다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더 바쁘셨네요. 그만큼 계급도 더 높으시고."

사다드는 상병이었다.

"전 세상의 우리. 그러니까 스태버나우가 일하는 거점의 중요한 지역에 「차원의 파편」이 있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사다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움직이죠. 차원의 거울 파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움직였다.

그곳은 스태버나우의 저택과 마찬가지로 관리되지 않아 정원에 잡초가 가득했으며, 백색의 본 건물만 깨끗하게 서 있었다.

-아카노스를 안 만났는데?

스태버나우는 저택이 아니라 「발두르 사(社)」에서 지냈기에 이해가 됐으나, 사다드는 창고지기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집사를 구하지 않은 것이 특이했다.

-아무래도 스펜서와 친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13층에 오른 사다드는 체이서에게 「귀환 주문서」를 내밀었다.

"찢으면 됩니다."

-찌이익

사다드가 먼저 찢고 사라지는 것을 본 체이서가 뒤따라 주문서를 찢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그가 부쉈던 무기화 창고의 관리자실과 꼭 비슷한 공간이었다.

체이서가 앞을 보자 사다드는 어느새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는 이곳 관계자의 복장을 한 채 가슴팍에 특이한 황금빛 배지를 달았다.

사다드가 벽에 걸린 헬멧을 집어 들었는데, 그 생김새는 분명 올리비아가 준 캡틴 바하무트 헬멧과 유사했다.

-문양이 다르네.

다만 바하무트 문양이 없고, 그 자리에 검은 색상의 네모난 창고 문이 그려져 있었다.

어느새 헬멧을 눌러쓴 사다드가 테이블 앞으로 나아가 자리에 앉았다.

체이서는 넓은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명패엔 핵 무기화 시설 관리국장이라는 거창한 명함이 박혀 있었다.

「핵 무기화 시설 관리국장」

「사다드」

그곳엔 체이서라는 이름은 없었다.

사다드가 체이서에게 소파를 권했다.

"우선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슈나이더 가(家)를 도와 일하고 있습니다."

체이서가 처음 신병이 되어 오자마자 곧바로 창고에 투입되고, 위험물 창고 내부에 미궁이 터졌다는 것을 알아낸 뒤 보고했었던 때.

스펜서가 해결사를 파견하겠다며 체이서를 돌려보냈던 잠깐의 시간이 이 세상의 분기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사다드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아마 우연한 계기로 병사들 사이에 제 가호에 대한 정보가 퍼졌던 듯합니다. 그걸 듣고 찾아온 슈나이더 공작가의 일원들이 제게 제안했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주면 전역할 때쯤엔 귀족으로 살게 해주겠다고요."

"···."

체이서는 생각해보았다.

당시 그가 하던 고민이라곤,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는 보직에서 성실하게 근무를 마친 뒤 제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직업 군인까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때 누군가가 와서 미래를 보장하겠다고 말한다?

그럼 아마 당연한 듯 제안을 받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었다.

"그래서 무기 개발부와 만난 뒤 사다드라는 코드명을 받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근데 무기 개발부에 이상한 녀석들이 끼어들어 있더군요. 자꾸 위험물 창고 안에 폭탄을 터뜨린다고 하는 겁니다."

사다드는 반대했다.

굳이 실험할 거라면 한 구역을 통째로 비워줄 테니 그곳에서만 하라고 말했다.

안정성 있는 실험을 하고자 한다면 주변에 다른 「미궁의 핵」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게 좋았기 때문에 그의 의견은 곧바로 허가되었다.

"저는 E구역의 물건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치운 미궁의 핵은 다른 구역에 빈자리부터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슈나이더의 말에 따르면 어차피 전부 무기화되어 안전하고 유용해질 물건들이었으므로 위험도에 따른 구분을 하진 않았다.

단, 무기화했을 시 유용한 물건은 따로 빼서 관리했다.

사다드는 그 일을 하느라 시간 대부분을 빼앗겼다고 한다.

"3분의 1쯤 비웠을까.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달란 말에도 몇몇 사람들이 재촉하더군요. 더 빨리 만들어내야 한다며 설득하던 그들은 끝내 무기화 실험 명령을 받아냅니다."

사다드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명령에 따랐다.

"창고의 비워진 공간에 「미궁의 핵」 하나를 놓고 「영혼 폭탄」을 터뜨렸죠."

사다드의 말에 의하면, 영혼 폭탄에 담긴 영혼의 양과 얼마나 끔찍하게 죽었는지, 그들이 무얼 바랐는지에 따라 미궁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했다.

"그 자세한 실험 기록은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다드로 인해 특정 「미궁의 핵」을 밀반출하는 것도 쉬워졌기에 그들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창고 내에서 여러 차례의 미궁 실험이 있었고, 사다드는 E구역을 무기화 실험실로 바꾸어 나갔다.

사다드가 일어나 옆에 놓인 영상송출 장치에 구슬을 끼워 넣었다.

영상 속에선 조잡한 가면을 쓴 체이서의 얼굴이 나왔다.

"미궁 실험 #5. 「끝없는 곤충 채집함」. 참관자 사다드, 해결사 빈."

그들은 영상 속에서 미궁을 터뜨리는 실험을 시작했다.

"본래는 최고 약한 형태로 터졌어야 했습니다."

「끝없는 곤충 채집함」‗‗‗‗‗‗‗‗‗‗‗

들판을 뛰어다니며 벌레를 채집하던 소년은 커서 곤충 전문가가 되었다.

그가 바라던 것은 더 많은 곤충을 찾고 사람들이 곤충을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것.

그의 행보를 존경한 한 마법사는 그의 곤충 채집함 속에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곤충 전문가는 그 공간에 작은 생태계를 조성하여 수없이 많은 희귀 곤충이 서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유산인 곤충 채집함은 그저 무수한 벌레가 무한정 튀어나오는 흉물로 취급당하였고, 후인의 손에 쓰레기장에 내다 버려졌다.

뚜껑이 열린 채로 쓰레기장에 방치된 채집함에서 온갖 독충이 기어 나왔으며, 일대에 군락을 형성하였다.

독충에 물려 죽은 피해자들의 사념이 깃들어 미궁화하였다.

!이 물건을 보는 자에겐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을 준다.

!뚜껑을 여는 순간 무수한 독충이 기어 나온다.

‗‗‗‗‗‗‗‗‗‗‗‗‗‗‗‗‗‗‗‗‗‗‗‗‗‗‗

「끝없는 곤충 채집함」에 깃든 가려움의 저주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저주 방호구도 크게 깎지 않는 저위력의 저주였다.

위험한 것은 독충이었는데, 고위력의 미궁이 터져 나올 시엔 강화되어 벌레가 거대해지거나 더 지독한 독성을 내뿜는 벌레가 등장하는 미궁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위험한데요?"

"그걸 굳이 하겠다더군요."

적당한 가려움의 저주 속에서 정해진 숫자의 벌레를 사냥하는 시련형 미궁이 터진다면 성공이었다.

그때 TV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얼른 안 해?"

슈나이더 가(家)에서 포섭해둔 빈이라는 해결사가 재촉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건들거리며 사다드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곤 했었는데, 미궁이 터진 뒤에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콰과광

그들이 실험하기로 했던 「끝없는 곤충 채집함」의 미궁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벌레를 죽이면 끝나는 시련형이었다.

그러나 뜬금없이 동시에 터져나간 「저주를 먹는 뱀」 미궁으로 인해 체이서는 E구역이 녹색 늪이 되는 광경을 코앞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사다드는 창고를 박살 날 지경으로 만든 그 미궁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다행히 정리 중이던 온갖 「미궁의 핵」을 인벤토리에 잔뜩 넣어둔 상태라, 그런 물건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해결할 순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터뜨린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스펜서에게 말하지도 못하고 그냥 홀로 분투하며 처리했다고 했다.

사다드는 이 일로 무기 개발부의 몇몇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들의 비밀을 파헤쳤다.

그러던 중 사다드 이전 활약했던 클래드와도 알게 되었고, 그와 함께 한 편의 수사드라마를 만들어낸 듯했다.

"마침내 알아냈습니다. 그들이 가는 교회, 성당, 사원 그 외 모든 공간을 추적한 끝에 게헨나 교단의 정체와 그들이 창고를 터뜨리려 했다는 것을 먼저 파악했지요."

슈나이더는 분노했다.

웬 사이비 종교로 인해 자신이 역적이 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무기 개발부의 여럿이 갈려 나갔고, 게헨나 교단 지휘부는 그들이 도왔던 미궁의 핵으로 만든 무기의 위력을 직접 맛봐야만 했다.

이 일로 사다드는 슈나이더 가(家) 내에서의 직책이 말단에서 지휘부로 단숨에 치솟았다.

게헨나 교단의 수작을 미리 알고 막아낸 공으로 슈나이더 공작가에서 약속했던 작위 역시 수단계 상향됐다고 한다.

"바로 주지 않습니까?"

"네. 아무래도 주변의 눈이 있으니까요."

체이서는 아직 특무부대의 창고지기 소속 병사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론 「적색 구역」 미궁 이후로 별 탈 없이 창고지기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슈나이더 가(家)에서 그에게 보상하기 위해선, 지금 몰래 무기화 작업을 하는 사실도 밝혀야 했다.

"당장은 어떤 보상도 불가능하겠네요."

「저주왕의 잔」 미궁은 게헨나 교단 소속이었던 카라얀이 일찍 잡히면서 터지지 않았다.

「검귀의 반지」 미궁은 무기 개발부의 수뇌들이 반복된 실패로 분노하였을 때 체이서를 죽이기 위해 겸사겸사 터뜨린 것이므로 이 세상에선 터지지 않았다.

게헨나 교단이 끼어들었던 재상 아들에 대한 가해도, 슈나이더 공작이 피스가이아 왕국에 망명한 뒤 테러를 가한 일도 이 세상에선 벌어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다드의 대외적인 활약 역시 굉장히 축소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현재 평민이며, 상병이고, 「미궁의 핵」을 무기화하려는 비밀 단체의 국장이었다.

"오히려 보상은 담당관 쪽에서 나왔습니다. 오랫동안 무탈하게 창고를 관리하니 담당관이 수고했다며 신수의 알을 주더군요."

그나마 로키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지금은 무기화에 거의 성공한 상태입니다. 이제 전쟁에 투입하고 결과를 내면 양지로 올라서야겠죠."

"우리 세상에서도 성공하긴 했습니다."

체이서가 검은 가방 몇 개를 꺼내 놓았다.

그걸 본 사다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슈나이더 공자가 만든 것이고, 우린 공자의 가호로 진행되는 과정을 역설계하여, 불가능하다 판단되던 무기화 제작에 대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공자의 가호도 무한정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일정량만 제작할 수 있던 것을 사다드가 마녀를 설득하여 함께해 양산할 수 있게 되었다.

체이서는 궁금한 게 있었다.

"영혼 폭탄은 어떻게 충당하십니까?"

사다드가 말했다.

"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충당하고 있습니다."

체이서는 사다드가 「영혼 폭탄」을 보는 시선이 자신과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 사람들은 잘 있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사다드가 손가락으로 검은 가방을 두드리며 말했다.

"편지를 받고도 제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피스가이아 왕국의 병사들 때문에 밀려난 그들이 제노비아에서 여관을 차렸는데, 저희에게 밀려난 게헨나 교단이 그곳에서 터뜨린 참사로 인해 전부 죽었답니다."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성녀님이 정화해주셨다고 하니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랄 뿐입니다. 혹시 그곳에선 살아 있습니까?"

체이서는 자신의 세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허, 고용한 집사의 유능함으로 인해 일찍 아셨군요."

집사 아카노스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도 이렇게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집에 사람을 들이니까 좋더군요."

체이서의 눈에 그는 고독해 보였다.

"그전엔 슈나이더에게 다른 무기를 제안할까 생각했습니다."

사다드는 자신이 구상했던 이런저런 무기와 장비를 언급했다.

그 방향성은 전 세상에서 있었던 스태버나우의 발명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다드는 그걸 연구할 인력도 돈도 권력도 없었다.

"지인의 죽음을 접한 이후론 어쨌든 전쟁을 일찍 멈추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걸 위해서는 더 강력한 무기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사다드는 생각했다.

대안 없이 도덕만을 이유로 다른 무기를 연구하자 주장해 봐야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현 상황에서 전쟁을 종료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체이서는 자신의 태블릿에 미궁의 핵 무기화 기술과 미궁 실험 기록이 모두 담긴 것을 확인하고는, 영혼의 격을 성장시키는 방법과 스태버나우에게서 받은 기술을 전송했다.

"영혼 폭탄을 이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군요···. 이거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사다드는 흥미롭게 전달받은 것들을 보다가, 슈퍼카와 탱크, 그리고 공중요새와 인공위성 등에 대한 정보가 나오자 말을 잇지 못했다.

"···."

사다드에게 체이서가 조언했다.

"스펜서 담당관과 더 친하게 지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놀라운 결과물들은 다른 세상의 우리와 스펜서 담당관의 합작이거든요."

사다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죠."

그는 연구소 지하로 체이서를 안내했다.

-띵

사다드의 헬멧과 가슴의 배지를 스캔하는 것도 모자라 복잡한 암호문을 적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그 내부는 선반이 일정하게 배치된 공간으로, 무언갈 보관하는 창고로 보였다.

-ㅋㅋ 똑같이 선반 채우는 일을 하네.

-결국은 창고지기야.

다만 스태버나우의 선반엔 하얀색 정육면체였고, 이 선반에는 검은 가방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는 점만 달랐다.

"이곳은 검은 무기고라고 불리는 곳으로, 무기화된 미궁의 핵의 등급을 S부터 F로 나눕니다."

그가 들어가다 멈춰서더니 C등급에 놓인 검은 가방 하나를 꺼내 주었다.

"「피 흘리는 검」으로 제작한 핵가방입니다. 내부를 무적의 공간으로 만들고, 피해를 입을 때마다 수명을 깎습니다. 다른 자들에겐 별 볼 일 없으나 우리에겐 때에 따라 S급이나 다름없죠. 그 세상에서 쓰세요."

"감사합니다."

체이서는 흔쾌히 받았다.

안 그래도 스태버나우를 위해 피 흘리는 검을 두고 오며 조금은 아쉬웠었지.

"A등급 「발전기 곰」으로 만든 검은 가방입니다. 괴수형과 강화형의 복합 미궁이니 쓸모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A등급 「형광등 인형」으로 만든 검은 가방입니다. 일정 시간마다 무작위 지역으로 전송되는 넓은 시련형 미궁이 생기는데, 사용자는 미궁 내 원하는 곳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체이서는 검은 무기고의 더 깊숙한 안쪽으로 이동하며 값비싼 가방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S급이라 적힌 무기고로 들어서자, 드디어 「차원의 거울 파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서로 적이 된 상태에서 여기까지 오려고 했으면 ㅋㅋ

-그냥 서로 죽이라고 말하는 악질적인 미궁이네.

적당히 상대하다 밀린 사다드는 무조건 귀환 주문서로 회피했을 것이다.

이후론 핵가방 군단과 상대하고 슈나이더 공작가의 병력도 상대해야 했으며 핵 무기화 시설 관리국에 도착한 뒤엔 그 보스인 사다드도 상대해 쓰러뜨려야만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이서는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채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러 정보와 새로운 무기를 얻은 채로.

사다드가 물었다.

"또 올 수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 미궁이 잘 해결된다면 또 모르죠."

체이서는 사다드에게 말했다.

"오늘 얻은 기술은 스펜서 담당관과 상담해보세요. 저라면 그를 설득하겠습니다."

미궁의 핵 무기화는 터무니없이 위험한 일이어서 스펜서 담당관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사다드는 이미 그 모든 위험을 딛고 성공해버렸다.

지금이라면 스펜서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 설득할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아군을 얻은 셈이겠지.

"그럼 가겠습니다."

두 체이서가 서로를 향해 인사하고, 옆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투덕거리던 두 로키가 떨어졌다.

-뀻

-뀻 뀨웃

토끼 인형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폭

로키들의 인사를 끝으로 체이서가 「차원의 거울 파편」 속으로 들어갔다.

눈이 부신 빛에 눈을 감으며 체이서가 말했다.

"거울 조각의 크기로 보아선 다음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데요?"

그리고 체이서는 물속에서 눈을 떴다.

-꼬르륵

밖에서는 아스라이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인 듯했다.

94화. 드워프 광산의 미궁을 해결했다.

94화.

체이서가 수면 위로 올라가자, 하늘 위에서 내리꽂히는 대포알이 보였다.

텀벙거리며 떨어지는 대포알 주변에는 여러 가지 빛깔로 빛나는 온갖 마법이 날았다.

-슈웅 -콰과과광

수면을 때리는 마법과 공격을 외치는 고함.

체이서는 처음으로 정령사의 전투를 볼 수 있었다.

"노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뒤흔들리더니, 땅이 솟아오르며 강 너머로 나아가 붙었다.

강 너머에서 무수한 마법이 날아드는 사이. 그곳을 넘어가야 하는 피스가이아 왕국의 정령사들은 순식간에 다리를 연결해 그 위로 올라간 것이다.

반투명한 정령이 전장을 맴돌며 그들의 친구들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노움!"

활을 든 정령사가 외치자 그의 앞에 있던 대지가 퉁 하고 밀려 올라간다.

-끄아아!

정령사에게 달려들던 병사 여럿이 하늘 위로 튕겨 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운디네!"

체이서가 떠 있던 강물이 회전하며 솟아오르더니, 바하무트 소속으로 보이는 병사들을 휩쓸어 날려버렸다.

그 와중 화염구와 얼음 화살이 날아가 정령사를 얼리고, 정령이 만든 바람 칼날이 마법사를 갈랐다.

마법과 정령의 대결.

그 사이에서 평범한 인간은 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젠킨스! 젠킨스다!"

그때 마법사의 진영에서 사이에서 전신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 하나가 등장했다.

그가 검과 방패를 뽑아 들고는 전장 한복판을 달렸다.

-쿠과과광

그 광경은 기이했다.

빠르지 않고, 기술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공격을 피해내며 돌진했다.

그는 피스가이아 진영에 자연스럽게 도달한 뒤, 당황한 정령사가 내뿜는 불꽃을 반걸음으로 피한 뒤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정령사가 쓰러진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정령사들이 젠킨스를 노리고 공격하려 하나, 문제점은 상대 진영에서 멈추지 않는 마법이었다.

접근하는 젠킨스를 신경을 쓰다 보면 상대 마법사들이 쏘아내는 공격에 취약해진다.

"빌어먹을! 같은 편이 와있는데도 저렇게 쏟아붓는단 말이야?"

"지금 다가오는 젠킨스란 녀석은 막무가내 돌진으로 유명한 녀석이잖아."

그들은 쏟아지는 탄막 사이를 유유자적 뛰어오는 젠킨스란 기사의 모습에 묘한 공포를 느꼈다.

분명 젠킨스의 검술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정석적인 기본 베기로 칼을 휘두르는 그의 실력은 정령사조차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는 수준.

그러나 닿으면 죽는 온갖 마법 속에서 최적의 루트만 골라서 움직이는 효율적인 움직임과 공포를 모르는 듯한 침착함은 그를 도저히 죽일 수 없는 전쟁 기계처럼 느껴지게 했다.

정신없는 전장과 함께할 때 그는 진정으로 위협적이었다.

-챙! 카앙!

젠킨스는 검을 휘두르다가 옆으로 뛰어 굴렀다.

그의 뒤에서 날아들던 마력의 창이 젠킨스가 상대하던 정령사에게 꽂혔다.

몸을 일으킨 젠킨스는 이미 다른 목표를 잡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저놈부터 죽여!"

-끄아악!

정령 마법의 유용한 권능으로 화력전을 단번에 뚫어내려 하였으나, 마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정령대 마법은 비등하였고, 차이라 한다면 어떤 지휘관도 보내지 않을 전장 한복판에 들어가 대놓고 암살하는 저 기사였다.

사기가 꺾이고, 유능한 정령사가 죽는다.

피스가이아의 지휘관이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

"불리합니다."

"밀어붙이면 뚫어낼 순 있겠나?"

"정령 기사를 투입하면 가능할지 모르나, 피해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후퇴한다."

또 한 명 젠킨스의 손에 정령사가 죽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피스가이아의 지휘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저 빌어먹을 녀석이 일반 병사로 전장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전사라니. 당장 왕국 연구실로 보내서 해부해보고 싶군."

그들이 물러가려 하자, 젠킨스라 불리던 기사는 공격을 멈추었다.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쏟아지는 마법이 하늘 위로 빼곡한 전장 속에서 그 홀로 뒤돌아 걸어 자신의 진영으로 복귀하였다.

"젠킨스! 젠킨스!"

그에게로 함성이 쏟아졌다.

그는 전장의 영웅이었다.

체이서는 바하무트 군복을 입은 상태였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 앞에 나섰다.

"충성!"

「전쟁 영웅 훈장」을 달고 있는 그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경례를 받으며 부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중 젠킨스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천막으로 들어서자, 갑옷을 해제하고 있는 젠킨스와 종자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님 고생하셨습니다."

젠킨스에게 달라붙어 그의 갑옷을 벗겨내고 있는 종자는 인기척에 입구를 보더니 두 체이서를 번갈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 기사님이 둘이야!"

그때 젠킨스가 체이서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데 나랑 똑같은 모습을? 혹시 이 근방에 또 저주가 터진 건가···?"

젠킨스가 일어나서 검을 쥐었다.

체이서의 눈이 그 검을 확인했다.

「멍청한 검투사의 아집」‗‗‗‗‗‗‗‗‗‗‗‗

지방 도시의 한 검투 경기장에서 친우를 잃은 검투사는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죽이려는 자들을 이기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선 그들보다 압도적인 강함을 지녀야 했다.

그는 안정적인 회피에 모든 힘을 쏟았고, 고된 수련을 딛고 일어나 모든 승리를 불살로 장식했다.

그러나 그 장식은 관객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의 경기는 시시하다며 소문이 났고, 사람들의 발길은 줄어만 갔다.

그러나 경기장에서는 그자를 제명할 수 없었다.

그의 실력은 진짜였기에 너무도 아쉬웠던 것.

가장 영광된 제국 주최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한다면 그들에게 떨어질 이익은 무궁무진했다.

"성격만 개조하면 되지."

당장의 이익도, 훗날의 승리도 중요했던 경기장 관리자는 흑마법사를 초빙하였다.

흑마법사는 그 검투사의 음식에 독을 타고 저주를 내렸다.

강력한 두통에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지는 모두를 죽이라는 목소리였다.

그런 최악의 컨디션 속에 점점 더 강한 괴물, 점점 더 강한 외부의 강자, 점점 더 불리한 경기가 일어났고, 그는 어느 날 경기 도중 실수로 상대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 상황은 검투사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리게 했다.

그는 반대로 도살자가 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미쳐버린 검투사의 검에 죽은 자들의 사념이 담겨 미궁화하였다.

!이 검을 쥐면 상대를 공격할 수 없게 된다.

!위협적인 공격을 감지할 민감함과 민첩성을 제공한다.

!오래 쥐면 정신이 파괴되고 호전성이 극도로 강화된다.

‗‗‗‗‗‗‗‗‗‗‗‗‗‗‗‗‗‗‗‗‗‗‗

상대를 공격할 수 없도록 정신을 강제하는 검이나 체이서에겐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정신이 파괴되는 것도 마찬가지. 체이서에겐 의미가 없는 저주였다.

그 위험한 「미궁의 핵」은 체이서에 와서 뛰어난 회피 능력을 주는 보물로 쓰이고 있었다.

"미궁으로 인해 이 세상으로 넘어왔습니다."

"미궁이요?"

미궁을 모르는 듯 되묻는 상대를 본 체이서는 「고대 최신 기록 장치」를 두 개 꺼내곤 한 곳에 정보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원의 거울 파편」에 대한 정보를 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물건이 역시 많은 거군요."

젠킨스는 자신의 검을 흘끗 보더니 다시 구석에 세워 두었다.

종자는 그에게 당부를 받았는지 검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젠킨스가 투구를 벗어서 주자 종자가 꾸벅이곤 천막 구석에서 갑옷을 닦기 시작했다.

"체이서 젠킨스입니다."

"체이서 헌트입니다."

체이서가 먼저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특무부대로 넘어가서 일어난 온갖 사건들과 그로 인한 모험, 수많은 보상에 대해 말하자 젠킨스는 흥미롭다는 듯이 들었다.

"처음부터 다르네요."

젠킨스가 말했다.

"저는 특무부대가 아니라 마법 명단으로 갔거든요."

그는 가호로 인해 특별한 부대로 갈 운명이었지만, 그 당시 주문서 배정을 위해 지휘관 실에 방문했던 마법병단 소속 전투 장교로 인해 목적지가 달라져 버렸다.

"이 자를 우리 쪽으로 보내주면 두 달간 마법 물품을 두 배 배정하지."

그는 정신을 방어하는 가호를 탐냈고, 가서도 조수로 부리며 이런저런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근데 금방 흥미를 잃더군요."

체이서는 어떤 정신적 자극도 모두 버텨냈다.

천편일률적인 결과에 흥미로운 부분은 조금도 없었고, 곧 실험용이 아닌 전쟁용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일개 병사로 내던져졌고, 무수한 목숨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마법 병단에서 마법을 못 쓰는 일반인은 소모품이나 다를 바 없거든요."

능력 없는 자의 목숨을 하찮게 보는 것은 특무부대나 마법병단이나 다를 바 없는 듯했다.

"그나마 저는 대범함이 인정을 받아서 전장 보급이란 편제를 받았습니다."

그건 한창 전투 중인 마법사에게 온갖 소모품을 채워주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어느 날 산에서 전투 중이었던 때, 저는 여느 때처럼 전장 한복판을 뛰어다니며 마법 물품을 전달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산이 무너지며 계곡 사이로 떨어져 구르게 됐다.

그리고 일어나니 그곳에는 같은 편 다섯 명과 적군 스무 명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편은 낙석에 휩쓸려 많이 죽었지만, 상대는 대지의 정령을 다루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애초에 산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습니다."

대치 상태로 얼마간.

고함과 함께 달려들려던 정령기사와 병사들은 당황했다.

적을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끄아악!"

죽은 사람은 오직 한 명.

피스가이아의 병사였다.

그쪽으로 시선이 돌아갔고, 시선이 쏠린 젠킨스는 피가 묻은 칼을 쥔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는 죽어있는 마법사의 검을 주워 급하게 휘둘렀을 뿐이었다.

"너, 넌 어떻게 공격한 거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혹하던 때, 젠킨스는 현 상황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건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서 보급 업무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마법 물품이 없어 전투 효율이 떨어진 마법사가 늘고 있을 테니까.

"그곳에서 저 검을 얻었습니다."

젠킨스가 「멍청한 검투사의 아집」을 가리켰다.

그 이상한 장소에선 어설픈 검투 경기장에서 나올 법한 온갖 소형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슬라임 같은 괴물들은 각국의 정예병에겐 우스운 정도였으나, 문제는 그 괴물을 공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차분히 독침을 꺼내 준비하고 내쏘는 동안, 그곳에 빠진 사람들은 오직 도망 다니는 방법밖에 없었다.

홀로 자유로운 병사 하나가 있었지만.

"정령 기사의 조언에 따라 괴물을 처리했습니다."

그는 젠킨스의 운동신경에 대해 언급하며 끝도 없이 욕설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중심을 제대로 잡으란 말이야! 그대로 찔러! 그대로!"

시간이 흐르며 괴물들은 차근차근 죽어 나갔으나, 이미 긴 시간이 흘러있었다.

붉은 기운이 퍼져나가며 괴물과 몇몇 병사들을 광전사로 뒤바꾸었다.

"몸이 커지고, 더 빨라지고, 더 강해지는 녀석들 사이에서 꽤 오래 버텨냈습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살아남은 사람은 정령기사와 젠킨스 단둘이었다.

제한 시간 동안 버텨내자 미궁의 핵이 꽂힌 바위가 올라왔다고 한다.

"검을 잡아 뽑자 커다란 소음이 울리며 사방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졌습니다."

미궁이 뒤튼 세상이 되돌아오며 통로가 생겨난 것이다.

"통로가 생기자 곧바로 공격해오는 정령기사의 검격을 피해 도망쳤지요. 이 검에 깃든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시련형 미궁이었네요."

이후로는 그 검을 이용해 활약했다고 한다.

"갈수록 전장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전장 근처에 미궁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듯했다.

그것도 위협적인 것들로.

-이 세상에선 해결사들이 제대로 일을 못 하고 있나 본데?

-아마 체이서가 특무부대로 안 간 것으로 인해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전장에 이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가 가면 해결되는 일이 많다 보니, 점점 그를 인정하고 의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가 해결한 뒤 얻어 장비한 「미궁의 핵」이 늘어나면서, 마침내 그는 기사 서임을 받고 성까지 부여받았다고 했다.

"마법 명문인 놀란 가(家)에서 기사 서임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받은 성이 젠킨스라는 듯했다.

그는 체이서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제가 해결해왔던 게 미궁이고, 이건 「미궁의 핵」이라고 부른다는 거지요?"

"맞습니다."

"그게 잔뜩 있는 위험물 창고가 수도 근처에 있고요?"

"네. 그리고 원래라면 그런 건 더 강력한 해결사가 정리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일반 병사도 이상한 공간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되는 상황은 명백히 이상해요."

"···으음."

체이서는 젠킨스를 보면서 이 세상이 꽤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지금 전장에서 이긴 거죠?"

"네."

승전 직후. 전장에서 빠지기에 좋은 기회다.

"여기 지휘관이 누굽니까?"

"레온하트 놀란 소령님입니다."

"운이 좋네요. 뭣하면 탈영도 불사했겠지만, 아는 사람이 근처에 있으니 일이 훨씬 빨라질 것 같습니다."

체이서는 인벤토리에서 캡틴 바하무트 헬멧을 꺼내 쓰더니 말했다.

"바로 가시죠."

젠킨스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으나, 갑옷을 챙겨 입고는 체이서를 뒤따랐다.

가장 큰 천막 속에선 여러 사람이 오가며 지휘관의 물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레온하트 놀란 소령은 그런 바쁜 와중에도 갑작스레 들어온 젠킨스를 반겨주었다.

"오 어서 오게 젠킨스."

"충성!"

레온하트는 체이서를 보며 물었다.

"자네는 누군가?"

체이서는 품속에서 하나 남은 「대규모 공간이동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 물건을 알아보시겠습니까?"

"···?"

레온하트는 그 물건을 보더니 곧장 눈치챘다.

"이건 우리 형님께서 만든 물건이로군."

체이서는 그에 더해 포션 상자를 꺼내 내려놓곤 말했다.

"마탑의 수석 교수신 록하트 놀란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전방에 나가 있는 체이서 젠킨스를 비밀리에 마탑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필요하시면 즉시 연락해보셔도 좋습니다."

마탑의 포션까지 보자 레온하트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바로 연락을 해봐도 되겠나?"

"네. 그에 더해 이 말도 전해주십시오."

체이서는 태블릿에서 메테오 술식을 찾아 자신이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일부를 읊었다.

젠킨스는 외계어를 읊는 체이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으나, 레온하트는 반신반의하며 통신 수정구를 꺼냈다.

초고가의 장거리 통신 아티팩트를 지닌 것은 이곳이 과연 마법 병단임을 알게 했다.

"형님. 이곳에 형님께서 보내셨다는 자가 왔는데, ···이런 말을 전달하라더군요. 뭔가 중요해 보이는 수식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메테오 술식···? 그 사람 바로 보내. 아니, 내가 직접 가지. 붙잡아두게.

"알겠습니다. 형님."

레온하트는 종이 한 장을 뜯어다 휴가증을 작성해 젠킨스에게 쥐여주었다.

그리곤 말했다.

"금방 오실걸세."

"감사합니다."

체이서는 테이블을 하나 빌린 뒤 태블릿을 꺼내놓고 「고대 최신 자동 연필」을 쥐었다.

체이서가 터치펜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태블릿에 기록된 9서클 마법서의 내용 중 「메테오」에 대한 모든 술식을 깨끗한 종이 위로 적어넣고 있었다.

잠시 뒤, 천막을 걷으며 등장하는 록하트 놀란이 있었다.

그는 초장거리 텔레포트로 다소 지쳐 보였으나, 한 가닥 희망이 깃든 표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자네가 그 수식을 말한 자인가?"

"그렇습니다."

체이서는 곧바로 종이를 내밀었다.

"「메테오」입니다."

록하트는 급하게 종이를 확인하더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었다.

"무얼 원하나? 아니, 자넨 대체 누군가?"

록하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체이서가 헬멧을 벗으며 말했다.

"저희를 수도로 옮겨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체이서 젠킨스를 도와주십시오."

당연하게도, 록하트는 수락했다.

수도에 도착한 체이서는 특무부대로 향했다.

-똑똑

"담당관님. 기사 젠킨스란 자가 찾아왔습니다."

"누군지 모르겠군. 바쁘다고 말하고 돌려보내게."

"록하트 놀란 수석교수님과 함께 왔습니다."

"들이게."

체이서는 이 세상의 스펜서를 확인했다.

그는 조금 더 말라 보였다.

"위험물 창고는 어떻게 지켜지고 있습니까?"

"···?"

체이서가 「고대 최신 기록장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건 스펜서 가(家)에서 관리하는 유적에서 등장하는 유물로, 스펜서 가문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다면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제 말을 들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익숙한 듯 태블릿을 조작해 창고에 대해 깔끔히 정리된 내용을 확인한 스펜서는 이상한 가면을 쓴 사내를 보며 팔걸이를 두드렸다.

"들어보겠네."

체이서는 스펜서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결과, 미궁이 늘어난 상황과 아직 창고가 터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발터 공작님께서 지금 창고를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까?"

"관리라기보단 경비지."

스펜서가 설명했다.

"발터는 수많은 가호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하나는 강렬한 직감이네. 어느 순간부터 창고가 위험하다고 말하더니 이곳에서 버티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고 내에 미궁이 터지기 시작했네."

그건 온갖 방법으로 터지고, 심각하게 위험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발터를 부르지."

스펜서가 자신의 태블릿을 조작하자, 금세 발터 공작이 등장했다.

그는 체이서를 보더니 갸웃했다.

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젠킨스를 보자마자 환호했다.

"됐어! 됐다고! 빌어먹을! 이제 창고에서 벗어나도 되는구나!"

그는 마음속에 일렁이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대륙 각지에 강력한 미궁이 수없이 발견됐는데, 일정 이상 위험한 건 해결할 수가 없어서 내버려 둔 상태였지."

발터가 나서야 할 위험천만한 미궁이 방치된 상황이었다는 것.

그로 인해 젠킨스가 미궁에 휘말렸고, 결과적으로 「미궁의 핵」을 접할 순 있었다.

-체이서가 창고 근처로 안 가면 처음부터 발터가 막네.

-체이서가 있으면 안심하고 자기 일을 하는 거고.

"안 그래도 지금 미궁과 미궁의 핵에 대해 공표할까 생각 중이었거든. 이대로 숨기기엔 피해가 너무 커져서 말이야."

물론 말해봤자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냥 위험한 공간이 있을 수 있고 당신은 휘말리면 죽는다고 말할 뿐이니까.

"어쨌든 잘 됐군. 자네의 세상에선 자네가 창고를 잘 관리하고 있다는 거지?"

"네. 젠킨스도 잘할 겁니다."

"그럼 편제를 바로 바꾸지. 발터. 자네가 힘을 좀 써주게."

"당연하지."

체이서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마저 할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그가 일어나자 젠킨스가 따라왔다.

둘은 창고로 들어갔다.

그곳은 체이서가 정리하기 전처럼 그저 난장판이었다.

"이걸 정리해야 한다는 거군요."

쭉 걸어서 「나른한 학자의 눈동자」가 들어있는 상자를 열었다.

"윽!"

젠킨스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변한 것을 확인한 뒤엔,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를 찾아 지하층 계단으로 내려갔다.

정해진 곳을 밟아 「0층 제어실」로 들어간 체이서는 「0등급 제어장치」를 찾아 젠킨스에게 건넸다.

그리고 호수 중앙에 있는 글로든 바머의 상자 속에서 창고 현황판과 창고지기 안경, 백과사전까지 안겨 주었다.

"다음."

그들은 E구역에서 「오래된 마법 만년필」을 찾아 다시 성수에 담가 저주를 없앤 뒤, 스펜서 본가로 찾아갔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가문 시조의 보물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근래 없어서 불렀네만, 내 장담하지. 그 말이 거짓이면 자네는 평생 가난하게 살걸세."

체이서는 만년필 안에 담긴 정보를 일부 풀어냈고, 그 대가로 신수의 알과 카리스마 수치를 올려주는 물건을 얻어냈다.

"다음은 「호펜의 양피지」."

그 물건은 발터 공작에게 해결된 뒤 그냥 E구역에 널브러져 있었다.

체이서는 마녀의 찻집이 있던 위성도시에 조잡한 방을 붙였다.

[백색 숲의 마녀를 찾습니다.]

귀여운 고양이가 톳테마을의 분수대 앞에 앉아있던 체이서 일행을 찾아왔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뒤바뀌며 입을 열었다.

"무례하시네요."

"죄송합니다. 마리나. 조금 급해서요."

체이서는 그녀에게 「호펜의 양피지」와 9서클 마법서 중 [위시]가 적힌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이걸 어떻게?"

"이 친구에게 인벤토리와 「미궁의 핵 보관함」, 그리고 「저주를 쥐는 손아귀」를 만들어주시는 대가로 이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필요한 물건이 상당히 많을 텐데요?"

"이 친구가 준비할 겁니다."

체이서가 젠킨스를 보자, 그가 「오래된 마법 만년필」을 손에서 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의뢰 보상을 위해 이곳에 거점을 만들어야겠네요."

체이서가 말했다.

"톳테마을 4번 길 23번지. 마리나의 마법 찻집."

"네?"

"그곳이 좋겠군요. 아, 혹시 올리비아를 아십니까?"

"검투사의 왕을 말하는 건가요? 그녀가 절 찾아왔었죠. 그녀는 저주로 인해 휴식 중이에요. 티아멧 교단에서 저주를 지울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결국 발바닥에 깃든 저주를 해결하지 못한 듯했다.

체이서와 젠킨스는 창고를 뒤져 「저주를 먹는 뱀」을 찾아낸 뒤 티아멧 교단으로 쳐들어갔다.

체이서의 「티아멧 교 팔찌」를 본 성기사들은 경례하며 길을 비켜주었고, 안으로 들어가 성녀와 함께 있는 올리비아를 확인했다.

"올리비아의 저주를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체이서는 그녀의 다리에 있는 「불균형의 저주」를 「저주를 먹는 뱀」으로 빨아들인 뒤, 독을 뿜기 전에 성수통에 담았다.

그 모습을 본 성녀가 눈을 부릅떴고, 젠킨스가 자신이 담아온 성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더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올리비아는 자신의 발을 보더니 울컥한 듯 체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투사를 포기하기 직전까지 몰린 상태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었던 것.

아무리 담대한 성격이라지만 꿈을 잃는 선택을 하면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걸 해결해준 저 매력적인 헬멧을 쓴 상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체이서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젠킨스를 가리키곤 말했다.

"모든 게 다 저 친구 덕분입니다."

그는 성녀에게 「성스러운 샘」과 그 복원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곳을 안전하게 들어가는 「귀환 주문서」를 지속해서 제공하는 대가로, 젠킨스가 「저주를 쥐는 손아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성물을 여럿 얻기로 약속했다.

-삐빅

체이서는 자신이 가진 두 태블릿에 들어간 정보가 완벽히 똑같아졌음을 확인했다.

오랜 여행 중 얻은 모든 정보가 담긴 태블릿을 젠킨스에게 내민 체이서가 말했다.

"이젠 당신도 창고지기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겁니까?"

"할 수 있으니까요."

체이서는 이전 세상 속 자신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한 명은 자신보다 지식이 많고, 한 명은 자신보다 더 독해 보였으니까.

그러나 젠킨스는 아니었다.

그는 너무 크게 엇나간 운명을 살고 있었기에 그대로 두면 이전 거울 벽 속에서 보았던 다소 불행한 체이서의 모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였다.

록하트 놀란의 집에서 눈치 보며 기다리고 있는 종자를 확인했다.

"저 녀석을 많이 아낍니까?"

젠킨스가 말했다.

"저랑 비슷하더군요."

가호가 있다는 이유로 마법 병단에 소속되어 죽을 위기를 겪던 사병을 종자로 삼았다.

"충성스러운 녀석입니다. 그쪽 세상에서도 가능하면 찾아 주세요."

젠킨스의 말에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제가 가지고 있던 정보입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상부에선 큰 발견이라고 했었던 자료들이니 그 세계에서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젠킨스가 내어준 자료는 정령 기사와 정령의 종류, 그리고 정령 공학에 대한 온갖 정보가 정리된 서류 뭉치였다.

"우리 쪽은 조금 더 밀어붙이다가 상대의 진지에 깊숙이 파고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얻은 자료인데, 적을 알면 상대하기 좋으니 기록해두었다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걸 받은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곤 작별의 인사를 남겼다.

"그럼 가겠습니다."

체이서가 종자의 머리 위에 일렁이는 「차원의 거울 파편」에 손을 내밀었다.

눈을 감았다 뜬 체이서는 드워프 광산에 되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여기 있네요."

그의 몸은 「가능성의 거울」 앞에 있었다.

이전에는 벽에 반사되어 비칠 뿐 찾을 수 없었으나, 미궁이 내린 시련을 모두 해결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가능성의 거울」을 회수하자 광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매끈했던 벽이 울퉁불퉁하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해결했네요."

반짝거리는 마정석 광산.

이제 이곳에서 캐낸 마정석의 일부가 체이서의 것이었다.

-올란도가 잘 해줬을 땐 그렇겠지.

체이서는 광산에서 나와 올란도가 준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모습을 숨겨줄 망토 「뒤쫓는 자의 그림자」를 여민 뒤 드워프 왕국으로 향했다.

95화. 드워프 왕국의 손님이 되었다.

95화.

체이서는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바위틈 앞에 선 체이서는 과연 이래서 찾을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네요."

체이서가 고개를 낮추고 그 틈 사이로 들어가자, 곧바로 말끔하게 마감된 높은 천장과 곳곳에 선 기둥이 드러났다.

벽에 새겨진 섬세한 장식은 그의 저택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멋지네요."

-드워프들의 손재주는 유명하니까.

-세상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대개는 제작을 위해 사는 녀석들이지.

이들의 도시는 산 내부에 있는 만큼 산 크기의 건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그렇게 복도를 걷던 체이서는 오래 지나지 않아서 드높은 공동과 그곳에 지어진 생활 구역을 발견했다.

"올란도가 돌아왔다더군."

"나도 들었네. 양심도 없이 옹립제에 참여한다지?"

"전설적인 선왕 폐하의 이름을 망치는 어리석은 녀석들이야."

체이서는 올란도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들어오면 무조건 왕성으로 가서 올란도를 찾으라고 했었지.

체이서는 망토의 능력으로 그림자 속에 숨어서 움직였다.

마정석 광산에서 보았던 기둥은 장난이라는 듯, 내부를 파 내려간 산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지지한 두껍고 웅장한 기둥이 곳곳에 솟아있었다.

기둥의 규모가 드워프들의 건물보다 큰 경우가 많아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이쪽이네요."

각 공동은 근처의 광산으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미로 같은 땅에서 드워프를 만나지 않고 왕성으로 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체이서가 아니었으면 진작 잡혔겠네. ㅋㅋ

-올란도 은근 허당 아니야?

-그것보단, 발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평가가 상향조정 되어있는 듯.

체이서가 골목길을 타고 도시의 중앙으로 들어섰을 때, 불규칙하지만 그게 또 자연스러워 보이는 건물이 가득한 도시가 보였다.

산맥을 깎아 만든 벽면에 돋아있는 조각품 같은 왕성은 인간의 왕성을 4분의 1정도로 축소한 듯 작았으나, 수백 배는 더 정교해 보였다.

-묘하게 소유욕이 생기는 건물이네.

별 관심이 없던 물건이더라도 아름답고 특별한 장식품을 보면 탐이 나듯, 저 건물 역시 결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서 보는 순간 갖고 싶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체이서가 조용히 입구 앞으로 걷는데, 문지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는 특이한 생김새의 고글을 쓰고 있었는데, 탐지용 아티팩트로 보였다.

"인간···?"

드워프는 벽에 대충 기대놓은 몸만 한 망치를 주섬주섬 들어 올렸다.

체이서는 그림자 속에 숨어 움직이는 것을 관두었다.

모습을 드러내고 속도를 높였다.

"뭐야! 인간이야!"

"침입자다! 다들 모여!"

-탁

딴딴한 몸의 드워프들이 와글와글 몰려드는 것을 본 체이서는 서둘러 문지기에게 말했다.

"올란도의 손님입니다."

"그놈?"

주변에서 야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란도의 손님? 그럼 우리의 적이겠군!"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험상궂은 표정은 덤이었다.

문지기 드워프는 어깨에 기대놓은 망치를 내리칠까 말까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나랏일을 하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문지기 드워프는 망치를 다시 기대놓고는 그 옆의 푸른 단추를 눌렀다.

-기이잉

문지기가 지키던 성문이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렸다.

"올란도에게 옹립제 끝나면 양손을 다 부술 거라고 전해줘. 믿고 문을 열어준 날 배신한 대가는 클 거라고···."

"···."

체이서가 안으로 들어가자, 중후하게 나이 든 드워프가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올란도에게로 안내했다.

그곳은 뜨거운 불길이 솟는 대장간이었다.

-땅! -따앙!

올란도는 화로 앞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 일한 건지 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따아앙!

경쾌한 소리를 끝으로 올란도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드워프 흑철 도끼」‗‗‗‗‗‗‗‗‗‗‗

신이 내린 광물을 다루어본 드워프 대장장이가 양질의 철로 만든 도끼.

질 좋은 합금인 흑철로 만들어져 견고하고 날카롭다.

!대장장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굳기보다 다섯 배 더 견고하다.

‗‗‗‗‗‗‗‗‗‗‗‗‗‗‗‗‗‗‗‗‗‗‗‗‗‗‗‗‗‗‗‗

올란도가 자신이 만든 도끼를 대충 내던졌다.

-절그렁

그가 내던진 자리엔 온갖 장비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왔소?"

"해결하고 왔습니다."

"나도 해결했소!"

당당하게 말하는 올란도의 말에 체이서가 허탈하게 웃으며 반박했다.

"전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체이서의 예상대로 올란도의 손님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마정석 광산을 받는 것도, 사업에 도움을 받는 것도 모두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올란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밖에서 못 들은 거요? 곧 옹립제가 있을 예정이오."

올란도는 옹립제에 대해 말했다.

"전에 말했듯이 우린 1년마다 한 번 우두머리를 정하지. 왕을 뽑는 행사. 그게 바로 옹립제요. 모든 드워프가 완성품을 보고 가장 잘 만든 물건을 고르면, 그 숫자로 자신들의 왕을 정하오. 물론 나이는 들어도 기술은 녹슬지 않는다는 말처럼, 한 번 왕이 되면 최소 십수 년은 왕이 되오."

-투표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네?

마을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크게 이상하지 않았으나, 왕국이라고 하니 특이한 방식이었다.

"정치가 제대로 돌아갑니까?"

"우리에게 좋은 정치란 더 나은 제작법과 더 나은 기술과 더 나은 소재를 발견하는 거요."

올란도가 말했다.

"실력 없는 대장장이를 왕으로 두면 더 나은 소재를 찾지 않을 거요. 본인이 다루지 못할 소재와 제작하지 못할 물건이 이미 한가득한데 새로운 소재와 제작법을 찾아? 자신의 부족함만 늘리는 방향에 권력을 쓸 리가 없잖소. 괜히 다른 방면으로 시선을 돌리려고나 하겠지."

그는 옹립제에 상당히 큰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실력 있는 대장장이가 우두머리에 있으면 무얼 하겠소. 가장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권력을 쓰겠지. 새 광산을 파고 새 합금을 찾고 새로운 발명품을 만드는 모든 행동이 국력이 되고 기술 발전이 되오."

체이서는 옹립제에 대해 조금은 이해했다.

"인기로 왕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까?"

그렇다면 올란도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었다.

"우린 전부 대장장이요. 다른 직업을 맡고 있어도 그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일 뿐 다 장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지. 자신만의 기준이 있을지는 모르나, 오직 인기만으로 결과물을 판단하진 않소."

결국 잘 만들면 그도 왕이 될 수 있었다.

"뭐 이대로 왕이 된다고 하여도 역대급으로 인기 없는 왕이 되겠지만, 왕이 되고 나서 뭐라도 보여주면 되지 않겠소?"

그가 말했다.

"예로, 당신이 해결한 금지 구역과 자동차 사업 같은 거 말이오."

"그걸 업적으로 사용할 생각이시면, 인망을 어느 정돈 되찾으실 수 있겠네요."

"그래. 일단 당신이 일을 해결했음을 왕에게 보고하는 게 좋겠소."

올란도가 겉옷을 꺼내 걸치더니 체이서와 함께 대장간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두 칸 옆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엔 올란도와 비슷하게 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드워프가 있었다.

-까앙! 캉! 까앙! 캉!

일정한 소리가 박자를 맞추듯 울려 퍼지며, 드워프 특유의 기운이 물건에 스며들었다.

점점 형태가 잡혀가는 물건은 올란도와 마찬가지로 도끼였다.

「바람의 드워프 흑철 도끼」‗‗‗‗‗‗‗‗‗‗

정당하게 뽑힌 드워프 왕이 양질의 철로 만든 도끼.

질 좋은 합금인 흑철로 만들어져 견고하고 날카롭다.

!바람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무게보다 다섯 배 더 가볍다.

!공격 속도에 최상급 보너스를 준다.

‗‗‗‗‗‗‗‗‗‗‗‗‗‗‗‗‗‗‗‗‗‗‗‗‗‗

그는 자신이 만든 도끼를 거치대에 세워놓고 유심히 살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바람이 퍼져나가는 것이, 누가 보아도 최고의 명품이라 할만했다.

"흐음···."

"말레우스."

"음? 아, 올란도로군."

말레우스가 뒤돌아서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근육질의 팔뚝이 도드라져 강인한 인상을 주는 드워프의 왕.

그러나 왕이라기보단 그저 대단한 대장장이로 보였다.

"그래. 함께 온 그 사람이 우리의 금지(禁地)를 해결해줄 영웅이라고?"

올란도가 체이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체이서가 나서서 말했다.

"이미 해결하고 왔습니다. 드워프 왕이시여."

"···?"

잠깐 의아해하던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인간의 예의는 집어치우고 편하게 말하지. 자세히 설명해주게."

체이서가 태블릿을 꺼내 「가능성의 거울」에 대한 정보를 띄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미궁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마법 물품에 남을 원망하는 영혼의 힘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기괴한 장소라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기이하군. 우린 죽을 때 누굴 원망하지 않을 텐데."

드워프 왕이 말했다.

"우리의 시조는 땅정령이고, 정령은 죽어 땅이 된다네. 드워프는 수백 년을 살고, 그러다 죽으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광물이 된다고 믿네. 어떤 강렬한 바람이라도 그토록 좋아하는 광물과 하나가 되는 것보다 좋을까."

새로운 광물을 찾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믿음에 의해서였다.

훗날 자신이 되고 싶은 광물을 찾는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소재와 기술에 대한 욕심 때문인 듯합니다."

인간 세상의 저주 전문가라고 알고 있던 드워프 왕은 먼저 체이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태블릿에 적힌 「가능성의 거울」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드워프 왕은 머지않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올란도 대왕? 과연, 그분이 살아있고 그 기술과 소재를 얻을 방법이 있다면 강렬한 욕심이 생길 법도 하겠군."

말레우스가 올란도를 바라보며 손에 쥔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자네도 읽어보게."

올란도 역시 그 내용을 읽더니 매우 놀랐다.

"대왕께서 엮여 있던 일이었군."

드워프 왕국에서도 존경할만한 왕은 대왕이라고 칭했는데, 미궁의 핵에 적힌 올란도 왕 역시 이 왕국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위인이었다.

올란도 대왕의 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실력이 없던 평범한 대장장이가 어느 날부터 밤새도록 대장일을 했다.

밖을 나설 때마다 새로운 광물을 얻어 왔으며 특별한 물건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실력이 늘더니, 마침내 옹립제에 참여하여 왕이 된다.

이후로도 새로운 발명품을 무수히 만들어내며 업적을 쌓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말대로 갑작스레 떠나버린 인물.

올란도 대왕은 급사했다고 알려졌는데,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따라 대왕이 편찬하고 있던 제작서 역시 중도에 끊기면서 대왕이 가져온 소재가 어디서 왔는지, 그의 발명품이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분명해졌다.

"다른 세상의 드워프 황제가 만든 차원의 거울. 그게 우연히 우리 세상에 떨어졌고, 그걸 얻은 올란도 대왕이 대장장이답게 이용한 것이었군. 그분의 핏줄이며 그 이름을 물려받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올란도는 그 내용을 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업적과 실력이 이해되는군. 그분의 가호도 나와 같았다고 하니 더욱 그렇고."

「발명의 가호」‗‗‗‗‗‗‗‗‗‗‗

대장장이 신이 내리는 가호.

새로움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뜻으로, 선구자의 재능을 지닌 드워프에게 내려진다.

새로운 물건을 제작해낼 때마다 제작 능력이 크게 성장한다.

!세상 첫 발명에 성공할 시 최상급 제작 성장치 보정.

!새로운 소재를 이용한 제작 시 최상급 제작 기술 향상치 보정.

‗‗‗‗‗‗‗‗‗‗‗‗‗‗‗‗‗‗‗‗‗‗

올란도 대왕은 새로운 소재와 제작법, 기술 등을 수도 없이 찾아냈고, 그 유산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대왕이 타차원에서 가져온 온갖 소재와 재료들은 성물로 취급하며 귀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이유야 당연했다.

더 얻을 수 있는 사람도, 무슨 물건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보물로 내려져 온 것이었다.

올란도는 그걸 멋대로 사용한 죄로 쫓기게 된 것.

"집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소. 대대로 내려온 듯 보이는 제작법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주재료가 성물 중 하나더군."

올란도는 그때까지 꽤 유망한 대장장이로 불리고 있었는데, 대왕의 후손이자 그 이름을 물려받았기에 더 기대받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호처럼 선구자적인 그 성향은 그로 하여금 새 발명품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참을 수 없게 했다.

문제는 제작서에 적힌 문장이었다.

[이 제작법과 이 물건의 주재료를 「발명의 가호」를 지닌 자에게 주어라. 물건을 받은 후인은 드워프 왕국을 위해 헌신하라.]

그는 자신이 그 물건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왕궁으로 찾아가 제작법을 보여줬지만 전대 왕에게 단칼에 거절당했소."

"당연하지! 나 같아도 거절했을 거야. 어떤 물건인지도 모르는 몽둥이를 만드는 데 성물을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자네의 실력도 그땐 한참 부족했어."

체이서는 이전에 올란도가 사용하던 몽둥이를 떠올렸다.

곡괭이가 되었다가 석궁이 되던 물건은 꽤 특별해 보였었다.

"친우였던 문지기에게 부탁해 왕궁에 침입했고, 성물을 탈취했소."

드워프 왕이 한심하단 듯 말했다.

"나라면 존경받는 자신의 조상이 남긴 유산을 훔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걸세. 그 제작서를 지니고 있다 절치부심해서 실력을 갈고닦은 뒤, 왕이 되고 나서 정당하게 꺼내 썼겠지."

"그런 느긋한 성격이니까 바람신의 가호를 받았겠지."

올란도는 그 성물을 들고 즉시 비밀리에 만들어둔 대장간으로 숨어들었다.

성물을 제외한 모든 물건의 재료를 갖춰둔 상태였기에, 그는 곧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며 실수가 없도록 심혈을 기울였던 그는 마침내 물건을 완성했다.

"그때 실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했소. 다시 그 감각을 느껴보긴 힘들겠지. 그렇게 제작한 물건은 제작자의 생각을 읽어 들이오. 필요한 재료를 뇌리에 전달하고, 정해진 재료를 충족될 만치 붙이면 제작자가 원하는 장비가 되는 보물이지."

제작은 성공했으나, 올란도는 범죄자가 되었다.

그는 왕국의 성물을 멋대로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했다.

감옥에 가면 망치를 빼앗긴다.

그걸 견딜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올란도는 드워프 왕국을 도망쳐 나왔다.

그에 분노한 당대의 왕은 수감 명령을 추살 명령으로 바꾸어 버렸고.

그렇게 올란도는 존경받는 대왕의 이름이자, 도망자의 이름이 되었다.

"언제건 돌아갈 생각에 목말라 있었소."

인간 세상을 접하며 새로운 것을 보고 배웠고, 견문을 넓혔으며, 자리도 잡았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고향이 그리웠다.

지력이 가득하여 먹지 않아도 배부른 곳.

맥주만을 마셔도 살 수 있는 드워프들의 이상향.

올란도는 방법을 찾던 도중 체이서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체이서 당신 덕분에 일이 되겠다 싶었소. 저주 전문가라니! 금지된 구역을 바로 떠올렸소. 금지 구역은 공포의 대상이면서 오랜 염원이 담긴 장소였으니까 왕국에서도 받아줄 줄 알고 있었다오."

드워프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지(禁地)를 해결하고 마정석 대광산을 뚫는 대업적이라면 일단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네.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손도 대지 못한 깨끗한 광산에서 얼마나 양질의 소재가 나올지 기대되지 않나? 드워프 왕이라면 당연히 수락했어야 할 일이지."

물론 그렇다고 올란도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올란도 자넨 이번에도 성급했어. 분명히 말했지. 옹립제가 끝나는 순간 자네는 바로 감옥행이야. 저주 전문가를 데려온 공을 보아서 사형은 봐주도록 하겠지만, 최소 백 년은 망치를 빼앗길 각오를 하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이번 왕은 내가 될 거다."

"욕심쟁이 드워프같으니. 넌 왕이 되지 못해! 지금 실력으론 한참 부족하다고."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들의 언쟁은 올란도가 밀리며 끝났다.

"···그럼 보고를 마쳤으니 가보도록 하겠네."

"가서 연습이나 더 해. 어설픈 꼴 보여주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니까. 적어도 올란도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체이서. 자네의 공은 높이 사지. 다음에 누가 왕이 되건 괜찮은 장비와 귀한 광석 더미를 받을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광산에서 나오는 마정석을 일정량 납품한다던 보상이, 그저 일회성 보상으로 떨어져 내릴 위기였다.

올란도는 자신의 화로로 돌아와 주저앉더니 말했다.

"다른 자들이 화로 곁에서 먹고 잘 때, 나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적응하느라 시간을 보냈으니까 조금 위태롭긴 하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오.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연습하면 되니까. 정말 만에 하나지만, 내가 실패하게 되면 내 모든 유산을 자네에게 주겠소."

그는 다짐하듯 말했다.

"어차피 백 년 동안 갇힐 바엔 차라리 죽겠소. 맘 편히 미스릴이 되고 말지."

올란도는 미스릴을 제일 좋아했다.

그는 어느 정도 쉬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광물을 집어 들었다.

"저기 문으로 들어가면 당신 저택 못지않은 공간이 나올 거요. 이젠 내게 맡기고 거기서 쉬시오. 옹립제 참가자들에게 주는 방이니 쓰는 데 불편하진 않겠지. 고생했소."

체이서는 올란도의 지친 몸과 대장간에 동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있는 물건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노력을 들인 듯한 제작물은 현재 드워프 왕이 만들었던 물건보다 훨씬 많았다.

이곳에 들어온 뒤로 그는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정을 발휘하여 온종일 제작만 했던 듯했다.

체이서는 올란도를 왕으로 만들기로 했다.

"올란도 2세. 어감 괜찮군요."

"응?"

오직 발명에 외골수인 그의 성격은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으나, 체이서에겐 오히려 믿을만한 동료가 될 조건이었다.

체이서는 새로운 소재도, 제작법도, 그걸 만들 재산도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그것들을 조금씩 푼다면 올란도의 성격상 체이서와의 우호 관계를 결코 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더해, 올란도가 왕이 된다면 발터 공작이 말한 인간과의 우호 관계를 넘어, 아예 동맹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만큼의 친분이 쌓인 상태인데다, 사실 그만큼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친분이 있는 드워프는 없을 터였다.

체이서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장갑 속에 들어가 있던 로키가 튀어나와 머리에 앉자,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꺼내주었다.

-뀻.

토끼 인형이 아장아장 잘 꾸며진 드워프의 방 안을 탐색할 때.

체이서는 근처에 놓인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고대 최신 자동 연필」을 쥔 체이서의 손이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온갖 정보를 옮겨적기 시작했다.

"공중요새는 좀 과하겠죠?"

그럼, 하늘을 나는 자동차 정도로 타협해볼까.

96화. 킹메이커가 되었다.

96화.

방에서 나온 체이서가 올란도에게 제작법이 적힌 양피지를 내밀었다.

올란도는 체이서가 준 양피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런 자료는 어디서 구한 거요?"

놀라서 묻던 올란도는 문득 체이서가 보여주었던 미궁의 핵 「가능성의 거울」에 관한 내용을 떠올렸다.

그 물건이 있었던 공간을 해결하고 온 체이서가 현 기술력에 맞지 않는 제작법을 가지고 있다는 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혹시 우리 조상님처럼 다른 세상을 다녀온 거요?"

"맞습니다."

"이건 내게 주는 거고?"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란도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일어났다.

그리곤 체이서를 안내해줬던 중후하게 나이 든 드워프를 불러 재료를 요구했다.

"곧 갖다주겠네. 올란도."

"고맙소 장로."

잠시 뒤 대장간에 들어차기 시작하는 재료는 다름 아닌 합금의 재료였다.

「발두르 사(社)」의 마공학자들은 「미궁의 핵」이 돌아다니는 세상 속에서 안전한 비행을 위해 온갖 특수 소재를 연구해야 했다.

멸망한 세상을 되살리겠다고 모여든 수준급의 마공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찾아낸 최적의 합금.

마력이 잘 통하면서 탄력이 좋고 가벼운 특성을 갖춘 합금을 제작하는 것은 호버 바이크에서 공중요새로 가는 비행 기술 중에서 가장 기초였다.

푸른 색상의 그 신소재를 마공학자들은 편하게 청철(靑鐵)이라고 불렀다.

"기가 막히는군. 이 대단한 합금을 만드는데 부족한 재료가 하나도 없다니."

당연했다.

그 물건은 이 세상과 똑같은 곳에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단지 더 빠르게 시작한 연구로 더 빠르게 기술이 발전됐을 뿐.

드워프 왕국에 없는 재료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화르륵

초고열 용광로가 불타올랐다.

올란도가 작업을 시작하자 체이서는 방에 들어가 휴식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체이서의 휴가 기간이었다.

며칠 뒤. 일찌감치 일어난 체이서는 올란도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엔 괜찮은 질의 청철이 널려있었으나, 올란도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치이익

뜨겁게 달구어진 쇳물이 식으며 일정량의 철괴가 제작되었다.

"됐군."

그 순간 올란도의 주변에서 빛이 번쩍였다.

가호로 인해 성장한 듯했다.

대장장이의 신이 내려주는 성장의 축복으로 인해 올란도의 머릿속에 제작 기술이 스며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무수한 실수와 실패, 결점을 교정하고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빛은 단숨에 올란도의 실력을 수단계 상승시켰다.

올란도가 성장을 마치고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엔 체이서가 서서 새로운 종이를 내밀고 있었다.

"시간이 급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올란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다음 종이를 받아 읽어보았다.

"이것도 합금이로군. 고맙소 체이서."

비행체의 외부에 쓰일 그 소재는, 마찰에 강하고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지녔으며 마찬가지로 마력이 잘 흘렀다.

"그럼 시작하겠소."

-화르륵

용광로에 다시 고열이 흘렀다.

-까앙! 깡!

광물을 적정량 쪼개고 녹이고 뒤섞는 것을 복잡한 계측 장치가 없이 손으로 해낸다.

그 난도는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실력이 오른 올란도는 가까스로 성공해낼 수 있었다.

몇 번의 질 낮은 백철(白鐵)을 만들어낸 끝에, 무결점한 백철을 만들어낸 올란도가 성장의 빛에 휩싸였다.

만족감에 흐뭇하게 웃던 그는 눈을 뜨곤 다시 체이서의 양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엔 이거에요."

"좋소. 이번엔···. 과연. 이건 중앙핵이 내리는 명령을 빠르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합금이군."

비행기기는 웬만한 기계장치보다 훨씬 복잡한 연산을 해야 했다.

정해진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면서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선, 비행체의 핵과 각 주요 장치가 연결된 마력선의 소재에 데이터 손실을 줄이고 더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소재를 사용해야 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 건 드워프가 알아서 하겠지.

드워프는 이해한 듯했다.

다시 초고열 용광로가 불을 뿜어내기 시작했으니까.

-콰화확

이전보다 더 안정된 솜씨로 일하던 올란도는 다시 오랜 고생 끝에 성장의 빛을 누릴 수 있었다.

"으음."

그의 앞에는 루비처럼 반짝이는 완전무결한 적철(赤鐵)이 널려있었다.

그러나 만족감의 웃음보다는 묘한 피로가 그를 사로잡았다.

아무리 튼튼한 드워프라고 해도 반복적으로 새 기술을 익히는 정신적 피로감과 쪽잠을 자며 고된 대장일을 하는 신체적 피로감을 모두 이겨내긴 힘들었으니까.

피곤하군.

올란도는 왠지 눈을 뜨기 싫은 기분을 느꼈다.

"···."

살짝 눈을 뜨자 역시 체이서가 그의 앞에 와서 양피지를 내밀고 있었다.

"자. 힘내서 계속 가시죠."

체이서는 다음 제작법을 넘겼다.

올란도는 애써 웃으며 체이서가 내민 양피지를 확인했다.

「호버 보드」‗‗‗‗‗‗‗‗‗‗‗

초기형 비행 탑승물.

좁은 판에 발을 고정하는 장치가 달려 있다.

보드의 전면을 위로 들어 올리면 상승, 낮추면 하강. 몸의 기울기에 따라 방향을 결정한다.

‗‗‗‗‗‗‗‗‗‗‗‗‗‗‗‗‗‗‗‗

이젠 소재가 아니라 제작품이었다.

초기형이라 하지만 담겨 있는 기능만 수십 가지.

마공학 전문가라고 해도 쉽지 않은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좋군. 좋아."

올란도는 힘을 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청철과 적철, 백철과 미스릴 소량을···."

그동안 그가 만들었던 소재를 이용하는 것이었으나, 정교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선 그 형태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드워프는 굉장했다.

광물을 원하는 형태로 빚어내어 정교한 장치를 조립하는 것은 그들의 특기였던 것.

-까앙! 깡!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철괴가 형태를 바꾸며 형태가 갖춰지는 모습을 잠깐 구경하던 체이서는 다시 휴가를 즐기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뀻

"다 네가 치워 로키."

시간이 흘렀다.

-번쩍.

대장간에는 이제 도끼가 아닌 보드가 널려있었다.

물론 그 물건들은 실패작이었고, 드디어 하나 성공작이 나오며 그에게 성장의 빛을 허락했다.

올란도는 자신이 완성한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확인했다.

본래 단순했던 스노보드 형태의 디자인은 드워프의 미적 감각으로 수백 배는 아름다워져, 날아다니는 예술품이 되어 있었다.

"오. 멋있네요."

올란도가 흠칫했다.

언제부턴가 나와 있던 체이서는 올란도에게 호버 보드를 받아 중앙부의 홈에 마정석을 박고는 탑승해보았다.

체이서가 호버 보드를 타고 널찍한 대장간을 한 바퀴 도는 모습을 보곤 올란도는 조금 안심한 눈치였다.

"실력이 크게 늘었지. 덕분에 고맙네."

-우우웅

체이서가 둥실 떠오른 호버 보드를 멈춰 세우더니 올란도를 보며 갸웃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근처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다음은 저겁니다."

올란도는 눈가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책상 위에 놓인 제작법을 들어 올렸다.

새로운 기술이 주어진 이상 확인하지 않곤 참을 수 없었다.

"호버 바이크라. 단숨에 난이도가 훌쩍 뛰었군."

그리고 확인하고 나면 만들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화르륵

다시 불길이 솟고.

-까앙!

다시 망치질이 시작됐다.

체이서는 호버 보드를 인벤토리에 담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시 쉴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체이서는 발터가 왜 백지 휴가증을 줬는지 알게 되었다.

"드워프의 시간도 마녀들의 시간과 다를 바가 없네요."

이들이 곧 열린다고 했던 옹립제는 한 주가 넘어가도록 열리지 않았다.

-까앙!

번쩍.

마지막 망치질과 함께 완성된 차량.

더 우락부락해진 듯 보이는 올란도의 몸이 다시금 성장의 빛으로 반짝였다.

그가 지금 만들어낸 물건은「호버 바이크」의 최종 모델로, 스태버나우가 타고 다니던 비행 차량이었다.

새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형태의 공중 부양 차량은 바이크치고는 컸으나 탑승석이 개방되어 있어서 오토바이의 개량형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

그러나 체이서는 만족했는데, 역시 드워프의 미적 감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저건 스태버나우가 보아도 탐낼 만큼 멋진 차량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체이서의 말에 올란도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맙소."

"그래서 옹립제는 언제 열립니까?"

"아마 일주일 뒤쯤? 이제 코앞이지."

체이서는 올란도의 말을 듣더니 자신 앞에 놓인 호버 바이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올란도 앞에 슈퍼카 「루미니부스」를 꺼내 놓았다.

본래 드워프 마을 촌장에게 선물하면서 호의를 사려고 했던 차량이니 앞으로 왕이 될 그에게 넘겨준다고 하여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제 이걸 재료로 진정한 「호버 카」를 만드신다면 어떨까요?"

올란도는 체이서가 보여준 슈퍼카를 확인하곤 충격을 받았다.

그건 대지 위를 구르는 용도로는 최고의 기능과 기술을 구현해 놓은 상태였다.

그 모든 편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선 드워프 대장장이가 갖춘 마공학 기술로는 힘들었다.

각 계통에 통달한 마법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슈퍼카를 재료로 사용한다면?

이미 하늘을 나는 기기에 대한 이해도가 최고에 이른 올란도의 손에 재탄생할 비행차는 진정한 명작이겠지.

-비행기 아니야?

-비슷하지 ㅋㅋ

다른 점은 기준 이하 속도에도 비행할 수 있는가, 최고 속도가 어느 정도까지 나오는가의 차이일 터였다.

체이서가 말했다.

"이런 물건이면 왕이 되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올란도는 고민했다.

이번엔 제작법이 없다.

자신이 지금까지 익힌 제작 기술을 응용하는 단계.

고민하던 올란도는 체이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심혈을 기울여 루미니부스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저 섬세한 손에 풀어진 차량은 기능 대부분이 살아있는 채로 다른 물건이 되겠지.

체이서는 다시 방에 들어가 쉬었다.

옹립제가 열리기 하루 전.

올란도의 대장간에는 또 한차례 강렬한 빛이 반짝였고, 이후론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던 드워프의 왕 말레우스는 멈칫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중인 후보들의 망치 소리가 꾸준히 울렸지만, 올란도의 방에서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쯧 하며 발걸음을 뗐다.

"무리해선 될 일도 안 되거늘. 결국 고생하다 쓰러졌나 보군."

그렇게 옹립제가 열렸다.

드워프의 도시는 산을 파서 만들어졌고, 가장 큰 구역은 왕성이 있는 구역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광장엔 휑할 정도로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매년 옹립제가 열리는 물건을 출품하는 공간. 후보자의 전시관이었다.

그곳에서 둥실 뜬 채로 존재하는 백색의 날렵한 차량은 왕을 선택하기 위해 온 모든 드워프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그나 루미니부스」[S]‗‗‗‗‗‗‗‗‗‗‗‗

역대 가장 뛰어난 실력의 드워프 대장장이가 최신 기술을 이용해 최고의 재료로 만든 비행 차량.

자신이 한 번에 제작해낸 물품에 드워프 최고 제작 레시피의 이름을 당당히 붙였음에도 전혀 오만하지 않다.

아름다움과 힘, 속도, 안정성, 편안함 등 모든 부분에서 결점이 없는 최고의 탈것.

!대장장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굳기보다 다섯 배 더 견고하다.

‗‗‗‗‗‗‗‗‗‗‗‗‗‗‗‗‗‗‗‗‗‗‗‗‗‗‗‗‗

전면부의 활 마크 아래로 망치 모양의 그릴이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더 균형이 잡혔으며, 더 공기역학적으로 변했으며, 그저 보는 것만으로 편안한 기분을 만드는 분위기가 차체에서 흘러나왔다.

-걸작 조각품은 배치해둔 것만으로 특유의 분위기를 내지

-저건 그냥 생김새만으로도 걸작 취급을 받겠네.

올란도의 실력이 이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진 듯했다.

드워프들은 이 걸작을 만든 기술과 실력이야말로 드워프 왕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인당 한 표씩 행사할 수 있는 투표권의 과반이 「마그나 루미니부스」 앞에 놓였다.

그렇게 왕을 정하는 행사가 끝나고, 그들의 새로운 왕이 될 자가 모두의 앞에 섰을 때 모든 드워프들은 경악했다.

단상에 오른 드워프 장로가 말했다.

"다음 왕은 올란도 2세로 결정되었다."

그의 뒤에서 올란도가 나왔다.

평소엔 일하느라 방해된다며 벗어던지지만, 멋들어진 중갑에 왕관과 일체화한 투구를 쓴 올란도는 분명한 드워프 왕이었다.

"내 과거의 일에 사과하오. 내가 쓴 성물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지 밝히어, 모든 드워프에게도 그 물건을 쓸 수 있게 하겠소. 그에 더해 앞으론 나의 조상 올란도 대왕의 유지대로, 드워프 왕국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겠소."

그의 공약이었다.

"금지(禁地)가 개방되었소. 나와 함께 온 인간 손님이 그곳에 있던 끔찍한 저주를 해결하고 돌아왔소."

올란도의 말을 듣던 드워프들이 웅성거렸다.

"먼저 그곳을 개발하도록 하지. 그게 내 첫 명령이오."

모두 불만 없었다.

"그리고 저 비행하는 차는 아직 공개하기에 이르오."

올란도가 말했다.

"···처음은 땅을 구르는 자동차란 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거기엔 불만이 있었으나, 그의 말에 사그라들었다.

"우선 자동차부터 만들고 내게 가져오시오. 실력이 됐다 싶으면 다음 기술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더 빨리 숙달하고 싶다면 내가 만들 차량 제작자 모임에 가입하시오. 그곳에 들어가면··· 싫어도 금방 숙달될 테니."

차량 제작자 모임이란 다름 아닌 체이서에게 약속했던 자동차 기업을 말했다.

올란도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완성품이 나올 때마다 체이서가 계속해서 내밀던 일감.

그 모습이 인간들이 말하는 기업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럼. 잘 부탁하지."

올란도가 단상에서 내려갔다.

기가 막히게도 드워프들은 왕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 말세군! 올란도가 왕이 됐어!"

"에이! 기분 나쁜데 마정석 광산이나 같이 가세나."

"금지된 구역으로 간다고?"

"이젠 금지 구역이 아니라고 하잖나! 최상급 마정석 구하러 갈 건데 같이 가자고."

"자네 무서워서 그러지? 혼자 가게. 난 나중에 진짜 안전하다고 하면 갈 거야."

"···."

그러나 투덜거릴 뿐 왕에서 끌어내린다거나 극렬히 욕설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대 왕 말레우스 또한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제작법을 구했는지 궁금해하며 올란도에게 달라붙어 질문할 뿐이었다.

말레우스를 떼어내고 온 올란도 2세가 자신이 만든 걸작 앞에 서서 말했다.

"체이서. 모든 약속은 지켜질 거요."

"감사합니다."

"이 차량에 담긴 기술은 언제까지 숨기면 되겠소?"

"인간과 발맞춰서 가면 됩니다. 아마 십여 년간은 상용화되지 않을 듯한데···."

"십여 년?"

올란도가 씩 웃었다.

"그건 드워프에겐 긴 시간이 아닌데."

"그거 다행이네요."

"뭐 그 짧은 시간 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괜히 이 보물을 여기다 뒀다가 여러 드워프 장인들에게 호기심만 불러일으키는 것보단 당신에게 맡겨두는 게 낫겠소."

올란도는 「마그나 루미니부스」 차량을 체이서에게 넘겼다.

"그럼 다 된 거지?"

입맛을 다신 올란도가 드디어 본론을 말했다.

"다음 기술은 언제···."

그가 자신의 걸작을 넘긴 이유 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체이서가 지닌 다음 제작법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아는 것 말고 더 새로운 것을 원했다.

"아, 그건 다음에 상담하죠."

다음 기술.

그건 올란도가 약속했던 모든 일이 발 빠르게 진행되도록 만들 주요한 자원이었다.

그들의 긴 수명을 보았을 때, 약속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순간 시대가 변해버리고 말 테니까.

"우선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받아서 기업부터 차려주시고요, 마정석 광산에서 언제 얼마나 보내주실지도 그쪽이랑 상담해주세요."

-지이잉

체이서가 올란도 2세에게 양해를 구한 뒤 태블릿을 열었다.

-회장님. 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갈게요.

신사업도 아멜리아가 맡아줄 것이다.

***

담당관실.

체이서는 긴 휴가를 끝내고 복귀 신고를 위해 방문했다.

"그래. 이번에도 잘 해줬군."

스펜서는 체이서가 내민 자료를 살핀 뒤 말했다.

"자넨 매번 상을 다 받기도 전에 새로운 업적을 쌓는군."

옆에 있던 발터 공작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드워프 왕국이 동맹이라니! 심지어 대외적으론 마을이라고 밝힐 정도로 호전적이지 않다는 점이 더 맘에 들어. 다만 다른 차원에서 가져온 비행 기술을 그들에게 먼저 밝힌 건 성급했던 것 아닌가?"

"그 우려는 걱정하실 필요 없을 듯합니다. 드워프들은 인간 세상과 힘 싸움을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기술력은 드워프 쪽이 앞서있었기에 인간에게 바라는 게 없었을지 모르나, 이젠 우리쪽이 훨씬 앞서있기에 제작법 때문에라도 친절하게 나올 겁니다."

"그렇군."

"그리고 그들이 만든 제작품을 꾸준히 납품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아멜리아가 말하기로는 불량률이 적을 수록 좋은 군수 사업을 드워프 쪽으로 넘긴다더군요."

탱크 역시 그들에겐 완전히 새로운 기술로 취급될 테니, 한동안은 미친듯이 파고들어 제작할 터였다.

그들이 제작한 대부분의 결과물은 바하무트의 전장에서 쓰이게 될 것이었고.

"그거 좋은 소식이네. 전장에 탱크를 더 빨리 투입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고, 이건 완전히 특급 정본데?"

발터는 젠킨스가 내어준 피스가이아의 비밀정보를 읽더니 체이서의 하사 약장을 바라보았다.

"최소 특진감이잖아. 진급식을 준비해뒀는데 이걸 올리면 머지않아 또 진급하겠어···."

스펜서가 팔걸이를 경쾌하게 두드리더니 체이서에게 말했다.

"자네 한동안 바쁘겠군."

한동안 체이서에게 잇단 보상이 예정되어 있었다.

"자네가 돌아왔으니 이제 곧 시작할걸세. 제국 수호 훈장 수여식과 황실 보물창고 개방."

"황실의 보물창고는 여간해선 열리지 않는데, 이번에 좋은 구경 하겠네."

97화. 차원의 거울을 고쳤다.

97화.

체이서는 스펜서의 말대로 바빴다.

그가 휴가를 보내는 동안 쌓인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창고를 정리하던 그는 이내 훈장을 받으러 나가야 했다.

제국 수호 훈장을 받는 행사는 수도 중앙의 광장에서 치러졌고, 체이서는 그곳에서 음악과 함께 단상에 올라 훈장을 수여 받았다.

"체이서 헌트 자작에게 「제국 수호자」의 칭호와 「제국 수호 훈장」을 내린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제국에선 최고의 상을 받는 영웅을 더 많은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하여 이날 수많은 상을 만들어 시상했다.

그렇게 수많은 시상자와 수많은 관계자가 행사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체이서가 영웅이 됐음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체이서는 두 개의 상을 더 받았는데, 엄청난 납세액으로 「성실 납세자상」, 캡틴 바하무트의 인기로 「화제의 검투사 상」을 받았다.

로키도 상 하나를 받았는데, 「최고의 마스코트 상」이었다.

체이서의 공연과 검투 경기 두 차례나 등장한 토끼 인형.

그와 완벽히 똑같이 생긴 스펜서 완구의 상품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단상 위로 다섯 배쯤 확대된 「아이슨의 애착인형」이 올라가서 받았는데, 체이서의 눈으로 해석한 결과 완구에 전투 골렘에 쓰이는 기술을 탑재해 버린 이벤트용 물건이었다.

내용물이야 어찌 됐건 어린아이들의 환호와 박수를 잔뜩 받은 새하얀 이족보행 토끼의 디자인은 「스펜서 완구」에 귀속되어 있었기에 체이서에게 떨어지는 건 없었다.

그러나 로키에게 떨어지는 건 있었다.

꾹꾹 당겨지는 머리카락에 체이서가 스펜서에게 연락해 해당 물건을 양도받은 것이다.

납세자상은 그의 집사 이카노스가 대신 받아왔으며, 화제의 검투사 상은 원형 경기장 쪽으로 보내져 올리비아가 체이서의 저택으로 가져왔다.

그녀는 체이서의 테이블 위에 놓인 책자를 슬쩍 훑었다.

본 훈장의 혜택은 수여자 3대까지 상속된다는 내용.

사망 시 제국 영웅의 전당에 조각상이 세워진다는 내용.

현재보다 한 단계 위의 작위인 백작 대우를 받게 되며, 모든 사업에 세금 감면 등 그가 제국에서 받을 수 있는 온갖 권리와 혜택이 줄줄이 적힌 책자를 관심 없다는 듯 툭 덮은 그녀가 말했다.

"검투 경기를 잡고 싶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거든."

"알겠습니다."

체이서는 여러 공연에 불리기도 했었는데, 물론 모두 거절하였다.

-공연도 하지.

-맞아. TP도 꽤 걸렸었는데.

체이서가 의문의 가수라는 사실이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나 스펜서에게 축제 무대를 떠넘겼던 전쟁부의 콧수염 장교가 해당 시간에 무대를 준비했던 부대가 특무부대였음을 알아채곤 스펜서 편으로 반협박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 의문의 가수가 누군지 말해. 그렇지 않으면 그 가수가 스펜서 가문과 연관되어 있다고 만천하에 퍼뜨려주겠다.]

스펜서는 콧수염 장교를 무시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자신에게 피해를 주긴 어려울 것이었다.

다만 콧수염 장교가 이득도 없이 체이서를 궁금해할 리가 없었으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누가 체이서를 찾는지 알아보았다.

스펜서는 뜻밖에 체이서를 찾는다는 사람이 황녀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맡은 황실 행사에서 무대에 세우고자 한다는 공식적인 이유와 그녀의 음성 방송에 초대한 뒤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장려할 거란 비공식적인 이유를 모두 알게 된 스펜서는 체이서에게 의사를 물어보았다.

"자네 인제 와서 가수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이건 거절하겠네."

"알겠습니다."

그 이후 스펜서는 축제 기간 올라갔던 모든 공문에서 체이서를 특정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삭제해 버렸다.

체이서의 일거리가 그나마 할만할 정도로 줄어든 이유였다.

그간 보관함에 쌓여있던 「미궁의 핵」을 정리, 보관하며 열심히 일하던 그는 마침내 시간이 나자 성스러운 샘을 찾았다.

발목까지 오는 샘물 앞에 선 체이서는 인벤토리에서 「가능성의 거울」을 꺼내 들었다.

죽어가던 드워프 왕이 남긴 후회의 사념에 의해 만들어진 「미궁의 핵」.

다르게 살았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하며 죽었기 때문인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신에게 통로를 여는 물건이 되었다.

"하지만 충전할 수 없어졌죠?"

연달아 차원의 문을 열어내던 힘은 미궁이기에 가능했다.

무한한 수준의 에너지를 잃은 미궁의 핵은 이제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가능성의 거울」‗‗‗‗‗‗‗‗‗‗

!통로를 개방할 에너지를 충전할 방법이 없기에 영구적으로 봉인되었다.

‗‗‗‗‗‗‗‗‗‗‗‗‗‗‗‗‗‗‗‗‗‗‗

이렇게 새로운 정보가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저주가 벗겨진다면 올란도 1세가 사용했을 적처럼 다른 차원을 여행할 수 있는 희대의 보물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게 가능하면 영웅 파견을 일찍 시작하는 셈인가?

-지금 가도 잘할 것 같긴 한데.

"영웅 파견이요?"

-저번에 안쿠 신의 시련 속에서 만난 영웅 있잖아.

체이서는 창을 다루던 강력한 영웅을 떠올렸다.

그녀는 빛의 신의 부름을 받아서 자신의 세상이 아닌 곳을 위해 싸웠었지.

안쿠가 아끼던 영웅을 하나하나 죽이며 그 세상이 빛으로 물들 수 있도록 움직였었다.

그런 식으로 일시적으로 다른 세상에 넘어가 일을 돕는 것을 영웅 파견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 세상 쪽에서 도와달라고 부르는 건가요?"

-그렇지.

-아마 TP도 꽤 쏠쏠하게 받을 수 있을 거야.

어느 정도 힘이 갖춰지고 나면 새 상점창과 경매창에 이은 새로운 탭이 생겨나는 듯했다.

체이서는 그 전장을 떠올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바쁜데 다른 세상의 일마저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에이 둘은 다르죠. 하필이면 제가 다른 세상으로 넘어갔을 때 위험한 일이 터지겠어요?"

체이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냥 적당히 귀한 소재와 제작법 등을 구해서 나오면 되겠죠."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게.

체이서는 「가능성의 거울」을 성수에 담갔다.

-치이익

성수의 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가능성의 거울」에 깃든 저주의 힘을 비워내고 일반적인 마법 물품으로 되돌리는 과정.

그러나 물건이 지닌 힘의 크기가 워낙에 컸던 탓일까. 평소와 달리 더 많은 성수가 증발하며 뿌연 연무를 만들었다.

-바닥나겠네.

그 말대로였다.

안개가 사라지자 드러난 성스러운 샘에는 이제 성수가 없었다.

드디어 푸른 동굴바닥이 드러난 것.

체이서는 호수를 비워버리고야 말았다.

"이런 식으로 차오르네요."

체이서가 바닥 중앙에서 아주 조금씩 솟아나는 성수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더니 「가능성의 거울」로 향했다.

「차원의 거울」‗‗‗‗‗‗‗‗‗‗‗‗‗‗‗‗‗

드워프가 세상의 패권을 가진 세상에서 드워프 제국의 황제가 지니고 있던 두 번째 보물.

차원 에너지를 이용해 다른 세상과의 통로를 연다.

악한 기운에 변질하였다가 성스러운 기운에 정화되는 절차로 인해 주변의 영력과 성력을 차원 에너지로 바꾸어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이 충전되면 다른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다.

!충전된 힘 0%

!무언가 지독한 사념이 깃들어 있었으나, 이젠 사라졌다.

‗‗‗‗‗‗‗‗‗‗‗‗‗‗‗‗‗‗‗‗‗‗‗‗‗‗‗‗

충전할 수 없는 제한은 사라졌으나 충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에 충전을 위한 장치로 보이는 곳이 있었기에 그곳을 통해 영력을 불어넣어 보았으나 충전 게이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력이나 영력은 직접 주입할 수 없어 보이는데, 상점에서 차원력을 사서 넣어보던가.

체이서는 나중에 상점창을 확인해보기로 하고, 티아멧 교단으로 향했다.

티아멧 교 팔찌를 이용해 걸림 없이 진입한 그는 다시 성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신가요."

"티아멧 여신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단 심문관을 불러 저 무도한 범죄자를 벌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듯했다.

계시란 성자, 성녀나 갓 세례받는 성기사 또는 사제 외엔 받을 수 없는 특별한 일로, 체이서는 그 중 무엇도 아니었다.

"티아멧 교단에게 밝힐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체이서의 말을 듣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세상의 성녀가 받은 계시를 자신에게 전달한다는 특이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말은 세세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제가 다른 세상에 있었을 때···."

성녀는 체이서가 설명하던 내용을 차분히 듣곤, 자신의 세상이 유독 평안하단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성스러운 샘」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바로 보고 싶네요."

그녀가 길을 나서자 두 명의 성기사와 이단심문관이 따라나섰다.

체이서는 이전 마녀를 안내했을 때와 똑같이 움직였다.

「저주 물품 임시 보관함」을 수레에 올린 뒤 밀며 들어간다.

이러면 보관함 근처에 생겨나는 강력한 저주 방호벽으로 인해 일정 반경까지는 저주에서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성녀야 괜찮겠지만 그녀의 일행까지 저주에 안전하진 않을 테니까.

그녀는 성스러운 샘이 있던 공간에 도착했다.

그리곤 갸웃했는데, 그저 푸른 석벽의 동굴이 보일 뿐 전설상의 호수나 샘이라고 보일 구석은 없었다.

-파앗

그때 다른 세상의 성녀가 그랬듯 그녀 역시 황금빛 축복을 받았다.

-구구궁

그녀의 눈이 떠지며 이채가 감돌았다.

성녀는 신의 축복으로 인해 다른 세상의 자신과 잠깐 연결되면서 다른 차원의 성녀가 지닌 기억과 감각, 기쁨까지 함께 전달받았다.

그녀의 손길에 샘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험물 창고에서 떨어져 나간 뒤 티아멧 교단의 지하에 위치하게 된 다른 차원의 샘과는 다른 형태였다.

대마법사가 조형해놓은 듯한 푸른 동굴 형태는 유지한 채로, 성수만이 급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솟아나는 성수를 본 이단심문관과 성기사들이 매우 놀랐다.

아무리 샘 또는 호수라고 불렀다지만, 이 드넓은 동굴을 가득 채울 만큼 가득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의문은 한 가지 질문거리를 끌어냈다.

"대체 이만한 성수를 어떻게 다 쓴 거지···?"

체이서는 대답 대신 이곳을 귀환 장소로 맞춰둔 「귀환 주문서」를 성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협상했다.

"앞으론 아껴 쓰겠습니다."

이 위험한 공간을 입구부터 들락거리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수가 필요할 때마다 체이서에게 안내해달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러니까 성스러운 샘과 연결된 「귀환 주문서」로 이 공간에 와 성수를 챙기고, 티아멧 대신전과 연결된 「귀환 주문서」를 이용해 되돌아가는 방법이 제일 안전하고 간편했다.

값비싸다는 귀환 주문서였지만, 이만한 성수를 퍼 올릴 수 있다는 것에 비하자면 큰 지출도 아니었기에 성녀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성녀는 5년마다 한 번씩 성스러운 샘을 도로 채울 수 있는 축복을 믿었다.

설마하니 그전에 또 이만한 양을 다 써버릴 리는 없겠지.

성녀 일행을 배웅한 체이서는 성스러운 샘 근처에 두었던 「차원의 거울」을 확인했다.

[충전된 힘 0.2%]

성스러운 샘이 가득 차자 일대에 퍼져나간 성력의 농도가 달라졌는지 조금씩 충전되기 시작한 듯했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네요."

또 다른 세상이던, 이미 갔던 세상이던 그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

"명예 백작 체이서 헌트에게 황실 보물 창고의 입장 권한을 내리노라."

황성 지하 1층의 중앙홀.

귀족들이 모여 황실 창고가 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황실 시종장의 손짓에 따라 마법사가 움직이는 거대한 갈색 열쇠가 그만큼 거대한 열쇠 구멍에 끼워졌다.

"혼자서는 못 열겠네요."

-철컥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열쇠가 돌려지자, 황실 창고의 문이 좌우로 개방되었다.

"이 팔찌를 착용하고 들어가십시오. 안에는 창고지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자신에 걸맞은 보물을 찾아 나오시길. 제국의 영웅에게 최고의 보물을 얻을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팔찌를 착용한 체이서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쿵

체이서의 뒤로 문이 닫혔다.

조금 걷자 로비가 나왔는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창백한 표정이었다.

"창고지기십니까?"

"그렇소. 헌트 명예 백작. 영웅을 보아 반갑다고 해야 하나 내가 당장 그럴 정신이 아니로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군.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게 됐어."

체이서는 자신을 안내해야 할 창고지기가 자신에게 사과하자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네는 어쩔 수 없이 로비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야 하네."

체이서는 로비에 있는 물건을 둘러보았다.

상당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굉장한 보물은 맞으나 전부 전시품이었다.

수집가가 아닌 이상 보물 창고에 있다는 전설적인 마법 물품을 포기하고 예술품을 선택하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나?"

"좋습니다."

"난 제국 황실의 보물 창고를 관리하는 아델 미나스라네. 변변찮은 공간 마법사로, 이 창고에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권능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지."

아델 미나스가 사연을 말했다.

"슈나이더 그 빌어먹을 역적이 날 찾아왔네. 그리고 내가 보관하고 있던 여벌의 창고 열쇠를 훔쳐 갔지."

그 열쇠는 사용 중인 열쇠가 망가질 시 복사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미나스 가(家)의 비밀스러운 방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미나스는 창고를 들어갈 때 열쇠를 사용하지 않았다.

열쇠를 사용해 창고 문을 여는 건 황실의 개방 허가가 났을 때 공식적으로 하는 행사였고, 일하러 들어가는 그는 공간 마법으로 오갔으니까.

슈나이더와 미나스 두 가문은 본래 깊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외교를 담당하는 슈나이더 가(家)에선 중요한 외교가 있을 때 종종 황실의 수집품을 사용하곤 했기에 사람을 만날 일 없던 미나스 가(家)의 일원들이 유독 슈나이더 가(家)와 왕래했다.

그런 수백 년간의 친분이 단번에 배신당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알았지."

어느 날 슈나이더가 역적이라는 말을 들은 그는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 현명하던 친구가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슬퍼하며 창고에 들어섰던 그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황금 열쇠는 그냥 문을 여는 도구일 뿐, 진짜 입장 권한은 자네 팔에 끼워진 팔찌에 있네. 그의 수하가 창고에 들어왔었으나 이곳은 입장이 허가된 자만 들어올 수 있지."

창고의 마법은 불법 침입자를 죽여버렸다.

"근데 그 빌어먹을 녀석이 죽으면서 무언갈 한 것 같아."

미나스가 단추가 달린 장치를 꺼내 놓았다.

체이서는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영혼 폭탄의 격발기였다.

체이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태블릿을 꺼내 보았다.

외부와의 신호가 연결되지 않는다.

"외부에선 터지지 않으니 들어와서 터뜨린 거네요."

체이서가 질문했다.

"혹시 슈나이더 공작이 그 이전에도 무언가 한 적이 있나요? 이 안으로 무슨 물건을 들여놨다거나···."

"그가 황실에 바친 보물이 있지. 그걸 창고 안에 보관하기 전날에도 내 집에 방문했었네. 혹시 그때도 무언갈 했을 거란 겐가?"

그때 영혼 폭탄을 장착했을 것이었다.

한 층 더 표정이 굳은 창고지기가 말했다.

"거대한 열쇠가 산산조각이 나 이리저리 사라졌고, 창고의 구조가 완전히 뒤바뀌었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해 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어떤 문을 열어도 이 로비로 통하더군."

결국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장 물건을 받고 나가려면 이 로비에 놓인 물건 중 하나를 챙겨야 한다는 뜻이었고.

"제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체이서가 말하자 아델 미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웅인 자네라면 뭔가 알 수도 있겠지. 안내해줄 수 없어 미안하군. 허나 보장하지. 자네가 저 안에서 어떤 보물을 들고나와도 그건 자네 것일세."

그의 말에 따르면 황실 보물창고를 지키는 자들은 이곳에 들어온 제국의 영웅이 장비와 맞는 파장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숨겨진 공간으로 안내해 해당하는 보물을 쥐여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조화의 가호」로 보면 그 장비와 맞는 파장인지 알 수 있는데 자네에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군. 본래는 자네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도 많다네. 그러나 자네가 그곳의 물건을 가지고 나오더라도 군말하지 않겠네."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사죄의 의미였다.

"한데 그게 가능하겠나?"

체이서는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창고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미궁을 해결하거나, 만일 불가능할 때는 적당한 물건을 챙겨 나오면 된다.

-끼이익 쿵.

로비의 한 문으로 들어선 체이서는 로키에게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꺼내주었다.

"가자. 로키."

체이서가 미궁이 터진 창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98화. 황실 창고에 들어갔다.

98화.

황실 창고의 복도는 위험물 창고와는 달리 화사했다.

훌륭한 장식품들이 꾸며주는 데다가 조명도 밝았기에 분위기 자체는 어둡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는데, 이곳은 미궁이었다.

침입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죽이려 드는 공간.

체이서는 얼마 걷지 않아 문을 발견했는데, 문 위에는 붉은 글씨로 1이라 적혀있었다.

내부를 살필 목적으로 문을 살짝 열어본 체이서는 한숨 쉬었다.

방 내부가 새카만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지 않으면 방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게 해놨네.

체이서는 지체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델 미나스가 말했듯 황실 창고의 복도로 되돌아왔다.

"그 방향은 틀렸다는 걸까요?"

체이서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문은 그대로 지나쳤다.

대신 다음으로 발견한 문으로 들어갔는데, 그곳 역시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문이었다.

체이서가 슬쩍 뒤를 보았다.

로비에서 이곳으로 통한 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이 방금 들어온 문을 도로 열어보았다.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아델 미나스가 말했다.

"둘러보았나? 내부가 조금 이상하다네. 자꾸 처음으로 되돌려버리지. 포기하는 게 어떻겠나?"

"좀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입을 달싹이던 미나스가 한 마디를 더했다.

"백여덟 번째 문은 조금 다르더군. 참고하게. 몸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체이서는 다시 복도로 들어가서 세 번째 네 번째 문을 열어보았다.

처음으로 이어진 걸 확인한 체이서는 다른 문을 확인하기에 앞서서 가장 끝으로 가보았다.

-커다란 열쇠 구멍. 딱 봐도 이쪽으로 가야 미궁의 핵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네.

-황실 창고 열쇠가 들어갈 만한 크기인데?

-미나스가 부서진 열쇠를 말했었지. 그걸 모두 모은 뒤 조합해야 들어갈 수 있을 듯.

체이서는 주변을 살핀 뒤 다른 무언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문으로 들어갔다.

-저벅

순식간에 첫 복도 앞으로 돌아온 그는 아델 미나스가 말한 백여덟 번째 문을 열었다.

"이곳이 맞네요."

드디어 미궁다운 공간이 나왔다.

좁은 발판이 띄엄띄엄 놓여있고, 발판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방 반대편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으며, 문 형태조차 달랐다.

그리고 천장에는 왠지 신경 쓰이는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0]

"떨어지면 안 될 것 같죠?"

체이서는 저 숫자가 뭘 의미하는진 모르겠지만, 우선 태블릿을 꺼내 메모해두고 뛰어올랐다.

-푸콰칵

그에겐 바람신의 장화가 있으니 그리 어렵진 않은 일이었다.

체이서가 반대편에 도달해 문을 열자 다음 방이 나왔다.

체이서는 천장에 쓰인 숫자를 확인했다.

[4]

"저게 뭘까요?"

-글쎄.

-이곳은 송곳 함정이네.

송곳이 솟아 나왔다가 들어가는 함정 장치들이 바닥과 벽에 빼곡한 공간.

-키이잉 챠칵

빠르게 튀어나왔다가 천천히 들어가는 송곳 함정은 제각각 다른 타이밍에 솟아올랐다.

정해진 시간 내에 단숨에 건너지 않으면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꿰뚫리는 함정.

심지어 바닥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벽에서 튀어나오는 송곳마저 고려해야 하기에 넘어갈 방법을 찾기 어려워 보였다.

-왼쪽에서 세 번째 칸에서 시작한 다음 네 칸 직진하다가 우측으로 세 칸. 그리고···.

채널이 없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체이서는 그 말대로 움직여 이 함정도 단번에 통과하고는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화르륵

체이서는 불길이 솟는 땅을 확인했고, 천장에 적힌 숫자를 확인했다.

[102]

"저 숫자가 뭔지 대충 알겠네요."

함정은 위협적이었지만 체이서의 목숨을 노리기엔 부족했다.

가시 박힌 통나무 수십 개가 천장에 매달려 좌우로 흔들리는 방.

디디면 녹아내리는 발판.

원형 칼날이 끊임없이 방을 오가는 방.

지나칠 때마다 숫자를 확인했는데, 난이도에 따라 숫자가 커졌다.

[982]

"다음으로 가죠."

문을 열고 들어간 체이서는 첫 장애물과 비슷한 낭떠러지가 있는 공간에 도착했다.

그러나 더 어려웠는데, 그곳에선 석궁을 겨누는 고블린이 배치되어 있었다.

-캉!

체이서는 「물어뜯는 방패」를 꺼내 쥔 뒤 쏘아지는 투사체를 막아냈다.

이후 망토를 여미고 뛰어올랐을 때는 이미 로키가 활약하는 중이었다.

-뀨우웃!

적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간 로키는 이제 전의를 잃은 적을 패느라 시간을 쓰지 않았다.

더욱 효율적인 전투법을 이해한 듯, 전의를 상실한 적은 내버려 두고 호전적인 적에게 바로바로 달려들어 제압해냈다.

[1001]

모든 함정이 이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이전에 나왔던 온갖 함정 장치에 원거리 공격을 하는 적이 추가로 배치되어 길을 지나려는 자를 방해했다.

갈수록 천장에 적힌 숫자가 올랐고, 마침내 거대한 문을 열고 진입한 체이서는 천장에 적힌 커다란 숫자를 볼 수 있었다.

[14021]

그곳에서 등장한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 강력한 괴수였다.

「혼돈의 경비 골렘」‗‗‗‗‗‗‗‗‗‗‗

황실 창고를 지키는 골렘.

대대로 황실 대마법사가 관리하여 훌륭한 성능을 보인다.

기이한 힘으로 수많은 장비의 권능이 골렘에 깃들었다.

!내려칠 때마다 번개의 파동이 뻗어나간다.

!첫 공격은 열 배의 공격력을 낸다.

!중독시키는 광선을 내쏜다.

!불태우는 안개를 내뿜는다.

!피해를 일정량 반사하는 가시 방호벽을 펼친다.

‗‗‗‗‗‗‗‗‗‗‗‗‗‗‗‗‗‗‗‗‗‗‗‗‗‗‗‗

보랏빛 거대한 골렘의 양 주먹엔 기이한 광채가 서려 있었다.

눈에선 불길한 에너지가 몰려들고, 골렘의 몸을 휘감은 안개의 열기는 주변의 상을 일그러지게 했다.

주변의 반투명한 장막은 어떤 공격이든 되돌려 줄듯했다.

"이건 그냥 로비에 놓인 물건 가져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맨몸으로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법한 괴물이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잃어버린 무구들을 그리워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체이서에겐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 「피 흘리는 검」이 있었다.

체이서는 「아군의 휘장」을 착용한 뒤, 사다드에게서 받은 검은 가방을 꺼내 열었다.

-철컥

열린 가방에서 강렬한 힘이 쏟아져 나오더니, 벽과 천장, 바닥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뚝

바닥에 떨어지는 붉은 피.

이로써 동등해졌다.

저 골렘과의 전투가 힘든 이유는 공격력이 아니라 방어력이다.

상대는 여러 번 맞아야 죽지만 체이서는 맞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젠 둘 다 한 번에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체이서는 「마그나 장검」을 꺼내 들고 영력을 피워 올렸다.

체이서의 검과 골렘의 주먹이 맞닿았다.

-쩌엉

열 배 강화된 주먹과 다섯 배 견고한 검이 맞닿자 그 여파로 인해 가벼운 토끼 인형이 저만치 날아갔다.

-뀨웃!

전의랄 게 없는 골렘은 로키의 저주가 통하지 않았다.

골렘의 눈에서 쏘아지는 녹색 광선이 바닥을 그었다.

-치이익

바닥에 깔린 붉은 액체가 단숨에 기화했다.

커다란 주먹이 땅을 내리치자 주변으로 전격이 퍼져나갔다.

-파지지직.

피를 타고 흐르는 전격이 체이서의 몸을 흘렀으나, TP만 깎아낼 뿐 피해를 주지 못했다.

-스카가각

체이서의 검이 골렘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골격이 다시 잡히며 가웨인 왕의 검술과 조금 더 유사해진 체이서의 검격은, 더 빠르고 더 거칠었다.

-콰앙! 쾅!

골렘을 지켜주는 가시 방어막이 체이서에게로 일정량의 힘을 되돌렸으나, 그 역시 큰 의미는 없었다.

그 역시 이젠 상당한 공격력을 갖춘 상태였다.

-누가 더 생명력이 넘치는지 겨루는 경기지.

골렘의 주먹을 검으로 받아낸 체이서는 TP가 깎이는 것을 확인해보았다.

[-15TP]

이전이라면 백 이상의 TP를 잃었을 타격이었으나, 「아군의 휘장」을 찬 체이서의 수명은 과하게 가져가지 않는 듯했다.

한동안 이어진 난타전에 골렘의 몸이 급격히 노후화되기 시작했다.

-키이잉!

매끈하던 관절부의 빛이 바래고, 강력한 광선을 내뿜던 안광이 흐릿해지며 깜빡거린다.

-콰앙! 쾅! 콰아앙!

패배의 위기에 골렘은 더 거칠게 움직이며 날뛰었다.

벽과 천장을 박차고 드높이 뛰어올라 눕듯이 내리찍는다.

양손을 모아 멈추지 않고 내리치며 온 방 안을 전기 함정으로 만든다.

신체를 분해해 방 전체로 흩뿌리자 각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 안개가 피할 곳 없이 퍼져나간다.

눈에서 광선을 쏠 때는 빠르게 회전하여 베어내듯 공격했다.

실시간으로 발전하는 골렘의 전투 방식은 분명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강력해질 가능성이 커 보였다.

-콰앙!

체이서가 거대한 주먹에 얻어맞고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머리에 「마그나 장검」이 박힌 골렘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쿵 쿠웅

거대한 양팔이 힘없이 바닥에 닿고, 몸이 무너지며 깜빡이던 안광은 완전히 꺼졌다.

"음?"

골렘의 머리에 꽂혀있던 검을 뽑은 체이서는 골렘에 깃들었던 온갖 광채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망가진 경비 골렘」‗‗‗‗‗‗‗‗‗‗‗

노후화되어 완전히 폐품이 된 듯하다.

!모든 기능을 잃었다.

‗‗‗‗‗‗‗‗‗‗‗‗‗‗‗‗‗‗‗‗‗‗‗‗‗‗‗‗

다시 골렘을 해석해보자 지니고 있던 모든 힘이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었다.

골렘에서 빠져나온 빛이 이리저리 휘돌더니 벽으로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두 개의 빛은 체이서에게로 왔는데, 하나는 장검에 하나는 신발에 깃들었다.

"음?"

체이서가 자신의 검을 해석했다.

「마그나 장검」‗‗‗‗‗‗‗‗‗

!대장장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굳기보다 다섯 배 더 견고하다.

!첫 공격은 열 배의 공격력을 낸다.

‗‗‗‗‗‗‗‗‗‗‗‗‗‗‗‗‗‗‗‗‗‗‗

장화 역시 비슷했다.

「바람신의 장화」에는 뛰어오를 때마다 피해를 일정량 반사하는 가시 방호벽을 펼치는 능력이 깃들어있었다.

"···근처 장비의 권능이 골렘에 깃들었다고 했었죠?"

-제멋대로 다른 장비의 기능을 흡수하는 미궁인가?

체이서는 골렘 뒤편의 방으로 들어갔다.

전시품을 올려놓는 듯한 화려한 탁자 위에 부서진 열쇠 조각이 놓여있었다.

열쇠 조각을 주워든 체이서는 크기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두 개는 더 찾아야 할 것 같네요."

열쇠가 놓여있던 방에도 문이 있었으나, 그 문은 로비로 통했다.

기다리던 미나스가 말을 건네왔다.

"왔군. 이번엔 좀 오래 걸렸는데 무언가 알아냈나?"

"열쇠 조각을 찾았습니다."

미나스가 놀랐다.

"어느 방에 있었나?"

"골렘이 지키던 곳 너머에 있었습니다."

"···역시 그곳이었나."

체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곳까지 가신 게 맞는군요."

"그렇네. 그럼 각 방 천장 위에 적힌 숫자도 보았겠군. 그건 내가 죽은 숫자이네."

그는 처음 창고가 이상해진 뒤, 이대로 보고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역적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문제인데, 역적이 내가 지닌 열쇠로 내가 지키던 황실 창고를 들어와 일을 터뜨렸네. 그걸로 한두 개의 보물만 망가져도 목숨이 위태로운데, 지금 상황 알지 않나. 이곳 보물 대다수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상태지."

그는 알았다.

이 상황은 자신 혼자서 죽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 안의 보물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난 무조건 사형이네. 나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전부 무사하지 못하겠지."

그간 공간 마법과 황실 창고에 보관된 보물들, 관리법 등을 익히며 평생을 준비해온 장남은 자신의 실수로 인해 허무하게 죽을 것이었다.

학회에서 논문을 쓰던 둘째 아들 역시 갑작스럽게 죽을 것이었고.

"역적의 말로란 그런 것이네."

아내와 딸까지는 참작되어 벌을 덜 받는다고 해도 최소한 직책과 귀족 작위는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해결하고 나서 사후 보고를 할 때 죄를 청하면, 홀로 형장으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체이서는 이 국가의 기조를 떠올렸다.

중요한 것은 결과.

과정이 우수해도 결과가 나쁘면 죄인이요, 과정이 쓰레기 같아도 결과만 좋으면 되는 제국의 분위기상 만약 그가 스스로 해결해낸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제국에 충성해온 미나스 가문의 헌신을 인정해 그의 장남에게 황실 창고지기 직책을 물려주고 몇 년간의 투옥 정도로 좋게 마무리될 수도 있겠지.

멸족과 아무도 죽지 않는 결과 중 무엇을 위해 움직였을지는 분명했다.

-근데 그게 잘 풀리진 않은 것 같네.

아델 미나스는 좋은 결과를 위해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계속해서 처음으로 되돌아오는 창고의 모든 방을 뒤지며 헷갈리지 않도록 문 위에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마침내 108번 방을 발견하였다.

"그곳은 어떻게 보아도 죽을 자리로 보였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더군."

다른 문은 복도 초입으로 통했고, 117번 방과 160번 방은 잠겨있었다고 했다.

"유일하게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그곳이었어."

그는 그곳에 들어갔고, 낭떠러지가 있는 방은 넘어갈 수 있었으나 송곳에 꿰뚫려 죽었다.

"난 몸을 움직이는 것엔 젬병이지. 공간 이동으로 절반 부근을 이동한 뒤 걸음을 옮기려 하자마자 송곳이 솟으며 내 온몸을 꿰뚫었네."

그렇게 죽으며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고통은 잠시. 익숙한 느낌에 눈을 뜨자 그는 첫 복도 앞이었다.

"놀랍게도 되돌아오더군."

그리고 뇌리에 어떤 정보가 새겨졌다.

"이제 나는 이 창고와 한 몸이라는 걸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네. 기이한 힘으로 목숨을 연장하고 있을 뿐, 이미 죽어버린 셈이지."

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념은 말했다네. 이 상황을 해결하면 너도 죽으니, 더 해결할 생각 하지 말고 이곳에 새로운 사람을 불러오라더군. 더 많은 희생자와 창고를 지킬 병사를 만들라는 거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바깥의 가족이 다 죽고 이곳에서 영생을 누리느니 이 괴악한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훨씬 컸으니까.

아델 미나스는 포기하지 않고 무한정 재시도하며 저 함정들에 계속해서 죽었다.

수천 번을 죽으면서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가늠하기 힘들었기에 홀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골렘 앞까지 도달했으나, 그곳은 만 번이 넘는 시도에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었다.

"그 골렘. 말도 안 되는 괴물이야. 난 이 창고에 있는 모든 물건을 알지. 「천둥신의 망치」, 「전쟁신의 돌격창」, 「독 안개 지팡이」, 「염화검」, 「가시 방패」의 각 특성이 한 몸에 담겼더군."

그는 터무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 중 「독 안개 지팡이」와 「염화검」의 기능은 서로 뒤섞여서 독 광선과 화염 안개를 뿜기까지."

그는 계속 죽었다.

"미궁이라고 했나? 난 그걸 몰랐네. 이런 괴악한 곳을 전문적으로 해결하는 자들이 있었다니···. 알았다면 조금 달랐겠지."

그는 심지어 나갈 수도 있었다.

창고의 힘으로 목숨을 유지하면서, 외부로 나가 이 창고로 적당한 적을 끌어와 동료를 늘릴 수 있었다.

정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온 가족을 다 창고 안으로 불러들여 함정으로 들여보내 죽게 했을 것이다.

그럼 자신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 되고, 이 미궁과 일생을 함께하게 됐을 테니까.

아델 미나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었네."

결국 체이서가 황실 창고를 개방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체이서에게 창고 안을 권하기보단 로비의 물건을 받고 나가길 권했다.

"혹여나 자네가 죽고 미궁과 한 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 예상할 수 없었네. 영웅이 제국의 적이 된다면 제국엔 재앙이잖나."

그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로 체이서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가지고 나온 어떤 장비든 허가한다는 말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과 누군가가 해결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뒤섞여서 나온 약속이었다.

"아까 열리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셨던 방이, 117번과 160번 방이 맞습니까?"

"맞다네."

"알겠습니다."

체이서는 다시 황실 창고의 복도로 들어섰다.

그의 노력은 쓸모없지 않았다.

-찰칵

체이서는 잠겨있었다는 방 중 하나를 들어갈 수 있었다.

108번 방을 해결하면서 새로운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거겠지.

직접 찾으려면 한참을 헤매야 했을 것이다.

미나스의 노력은 체이서가 미궁을 해결할 시간을 크게 단축하게 해 주었다.

무기 거치대가 많은 방 안에서 체이서는 새로운 시련을 받았다.

-파아앗

체이서가 장비하고 있던 모든 장비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무기 거치대로 빨려 들어갔고, 무기 거치대에 놓여있던 무수한 장비의 빛이 체이서의 장비에 깃들었다.

-멋대로 재련됐네.

이후 방이 형태를 뒤바꾸기 시작했다.

-철컹

바닥이 허물어지며 무기 거치대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후 솟아오르는 좁은 발판과 멀리서 활을 겨누는 오크.

이젠 이 위험한 공간을 익숙지 않은 장비로 넘어가야 하는 듯했다.

99화. 황실 창고가 어렵지 않다.

99화.

체이서는 쾌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일정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나면 수준의 차이가 중요해진다.

체이서는 그 수준을 넘었기에, 이제 단순한 물량 공세로는 체이서를 죽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체이서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춘 전사가 등장하지 않는 한, 그는 그저 번거로움을 느낄 뿐 목숨을 위협받지 않을 것이었다.

적 사이에 둘러싸였거나 자신의 무기가 쓸모없게 뒤바뀔 수도 있다는 공포 역시 느끼지 않는 상태였기에, 체이서는 그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며 미궁이 꺼내는 함정을 차근차근 뚫어나갔다.

-슈욱

오크가 화살을 쏘아냈다.

-카앙!

체이서는 망토를 휘둘러 화살을 쳐내며 고개를 숙였다.

골렘의 팔이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훌쩍 뛰어오르자 바닥에서 솟구치는 송곳이 그의 신발에 가까스로 닿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더이상 그의 몸을 밀어 올리는 바람의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차."

오랫동안 익숙해진 「바람신의 장화」와 달리 점프력이 낮아진 탓에, 거세게 다가오는 가시 통나무를 뛰어넘지 못했다.

-스카가각 콰아앙!

체이서는 검을 휘둘러 통나무를 막아내곤 공중을 날았다.

「마그나 장검」‗‗‗‗‗‗‗‗‗

!신체를 마비시킨다.

!공격 시 화염 폭발.

‗‗‗‗‗‗‗‗‗‗‗‗‗‗‗‗‗‗‗‗

그의 검은 이제 휘두를 때마다 폭발을 일으켰고, 공격의 여파에 날아갈 수밖에 없었다.

성가시단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보던 체이서는 바닥을 굴러 몸을 일으켰다.

-우웅

신체의 영력을 휘돌려 검을 뽑아낸 그를 향해 골렘이 도움닫기 자세를 취했다.

덤프트럭 이상의 금속 거인이 당장이라도 그를 향해 몸을 던져올 듯한 기세를 내뿜었다.

-푸콰칵

골렘이 뛰어올랐다.

체이서의 신발에 있어야 할 능력은 금속질의 골렘에게 가 있었다.

치솟는 골렘 밑으로 소용돌이가 생겨나며 거체를 밀어 올렸다.

다시금 날아드는 화살을 망토로 쳐낸 체이서가 골렘을 피해 달렸다.

-화르륵

그 와중 그는 자신의 손에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기괴한 지휘자의 악수」‗‗‗‗‗‗‗‗‗‗

!지옥 화염구를 사용할 수 있다.

!공격 시 장비의 마력을 상당량 회복한다.

!에너지 충전 : 105%

!과부하 상태. 역류 3s....2s....1s....

‗‗‗‗‗‗‗‗‗‗‗‗‗‗‗‗‗‗‗‗‗‗‗‗‗‗‗‗‗‗‗‗‗‗

리듬감을 바로잡아주던 장비는 특성이 뒤바뀌며 보조 공격용 장비가 되었는데, 충전 효율이 과하게 좋아서 툭하면 과부하 상태가 되곤 했다.

즉시 사용하지 않으면 넘실거리는 화염이 역류하기에, 이렇게 가득 찰 때마다 마법을 시전해야 했다.

-딱!

체이서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얀 장갑 위를 불태우던 불길이 그의 머리 위에서 일렁였다.

악마의 얼굴과 같은 형상을 취한 화염구는 그에게 날아드는 화살을 감지하곤 공격자에게로 날아갔다.

-화르륵

일직선으로 날아가며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던 화염구가 오크에게 닿아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화륵

재만 남은 자리에 로키가 내려섰다.

-뀻

로키는 체이서를 보며 자신의 가슴을 툭 두드렸는데, 오크는 내게 맡기라고 말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의욕이 높은데요?"

로키는 발판 위를 뛰어다니며 저격수들을 제압하거나 낭떠러지로 떨구었고, 체이서는 잠깐 집중을 잃었던 골렘을 확인했다.

-두둥실

거대한 골렘은 육중한 어깨를 체이서에게로 향한 채 아주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뛰어오를 때는 사납기 그지없었으나, 정작 착지할 때는 조용한 이유는 「바람신의 장화」가 가진 낙하 속도 저하 능력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골렘이 지닌 전투 지능으론 저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듯했다.

"창고 가디언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이게 정상이지.

-위험물 창고가 그 위험성에 비해 안일한 거지. 중요한 보관고는 원래 여럿이 지키는 거야.

-너도 혼자서 다 하지 말고 인력을 배치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들은 조언했다.

-인간은 안 되겠지만, 저런 골렘이라던가.

"글쎄요. 골렘은 만날 때마다 좋은 기억이 없어서···."

골렘은 이제 방마다 등장해 체이서를 괴롭혔다.

열쇠를 지키는 가디언 골렘처럼 여러 보물의 특성을 몰아받아 과하게 강화된 개체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개체는 체이서가 지닌 장비의 능력을 빼앗아서 사용했다.

-이곳 아무리 봐도 설계 자체가 여럿이서 함께 들어올 것을 상정한 것 같아.

-입장한 자가 여럿이고, 그만큼 장비도 여럿이면 골렘이 지닌 특성은 이전 혼돈의 골렘보다 더 많고 더 강할 수도 있지.

그러나 방을 해결하더라도 얻어가는 특성은 고작 한두 개에 불과했다.

-결국 주는 건 적고 가져가는 건 많은 미궁 그 자체인 거네.

골렘은 체이서가 지닌 장갑, 신발, 장검, 액세서리, 군복이 지닌 모든 능력을 가져갔다.

「화염의 경비 골렘」‗‗‗‗‗‗‗‗‗‗‗

!정확한 박자감을 제공한다.

!지휘력과 매력에 최상급 보너스를 준다.

!충전식 방어막 : 0%

!자동 세척 외 13종 생활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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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전투에는 쓸모가 없는 능력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화염의 경비 골렘」‗‗‗‗‗‗‗‗‗‗‗

!바람신의 가호가 깃들어 도약할 시 밀어 올리는 돌풍이 생성되며, 낙하 시엔 감속한다.

!도약 도중 공격을 반사하는 가시 방어벽을 펼친다.

!첫 공격에 열 배의 피해를 준다.

!대장장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굳기보다 다섯 배 더 견고하다.

‗‗‗‗‗‗‗‗‗‗‗‗‗‗‗‗‗‗‗‗‗‗‗‗

체이서가 유용하게 써온 능력, 새로 얻은 능력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 대신 내어준 것이 지금 체이서가 사용하는 화염계 전투 능력이었다.

장검에 「화염 폭발」, 장갑에 「지옥 화염구」가 깃든 데 이어 체이서의 신발에 붙은 능력은 「지옥 발걸음」.

-화르륵

「바람신의 장화」‗‗‗‗‗‗‗‗‗‗

!발걸음에 고열의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

‗‗‗‗‗‗‗‗‗‗‗‗‗‗‗‗‗‗‗‗‗‗‗

"로키!"

체이서의 부름에 즉시 달려온 로키가 기민하게 움직여 몸을 댔다.

-탓

조막만 한 양손으로 체이서의 몸을 힘차게 밀어 올려준 로키가 데굴 굴러 다른 오크에게 향하고, 체이서는 벽을 한 차례 박차고 뛰어올랐다.

-후우웅

아직도 두둥실 허공에 머물던 골렘의 팔이 휘둘러졌으나, 침착하게 타고 올라선 체이서가 신발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화르륵

강력한 권능 지옥 발걸음이 그 힘을 드러냈다.

팔부터 등까지의 걸음마다 불길이 치솟았다.

골렘이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으나, 골렘의 목에 망토를 감은 채로 중심을 잡고 버티었다.

-치이익

체이서의 장화가 닿은 자리가 지글거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는 체이서의 몸까지 태울 수 있을 정도의 고열이었으나, 「전쟁 영웅 훈장」의 능력으로 인해 안전했다.

「전쟁 영웅 훈장」‗‗‗‗‗‗‗‗‗‗

!화염 내성에 최상급 보너스를 준다.

‗‗‗‗‗‗‗‗‗‗‗‗‗‗‗‗‗‗‗‗‗‗‗

-저 정도면 완전 내성인가?

-용암에 발 담가도 될 정도.

-역시 황실 창고에 있는 보물들이라 남다르네.

결국 홀로 들어와 경비 골렘이 지닌 모든 화염 계열 대마법을 지닌 덕분에, 그는 도리어 강해져 버리고 만 셈이었다.

고열에 녹아내린 골렘의 몸 안쪽에 핵이 드러났다.

체이서가 망토에 몸을 단단히 묶은 뒤, 골렘의 핵에 검을 휘둘렀다.

-콰앙! 콰아앙! 쾅!

연달아 화염 폭발이 일어났다.

「라그나 장검」의 능력을 받아 다섯 배 더 견고해진 탓에 단번에 부수어지진 않았으나, 계속된 타격에 흠집이 생긴 핵이 오작동을 일으키며 기능을 멈추었다.

-툭

거대한 골렘의 몸이 떨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그마한 소음이 들려왔다.

바람신의 장화가 지닌 권능이란 그토록 대단했다.

-파아앗

이제 능력을 재배치하는 시간.

골렘의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나와 체이서에게로 돌아오고, 체이서의 장비에서 빛이 빠져나가 뿔뿔이 흩어졌다.

체이서는 장비를 확인했다.

군복에 가시 방어막이, 장갑과 신발에 매력 보너스가 부여되는 등 뒤죽박죽이 된 상태였지만 새로운 특성을 얻었다.

장갑에 「화염 폭발」이, 신발에 「지옥 발걸음」이 부여된 채로 남은 것이다.

-검 상태 봐라.

마그나 장검은 견고함 특성을 다시 돌려받은 상태였으나, 이미 무수한 화염 폭발 공격으로 인해 검날의 이가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체이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올란도가 만들어준 「마그나 장검」은 그 위명에 어울리지 않게 벌써 낡아버렸다.

"이거 수리되겠죠?"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볼 듯.

체이서가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좁은 외길이 나왔다.

이번에도 골렘과 괴물이 존재했다.

그러나 괴물의 등급이 단숨에 올라가, 소의 머리를 한 괴물이 콧김을 내뿜으며 체이서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네.

-최소 영웅급 괴수지.

강인한 신체를 지닌 미노타우로스는 벽에 붙어있는 발코니에서 그물을 쥐고 대기 중이었다.

외길을 지나칠 때 그물을 던진 뒤 끌어당겨 길 바깥으로 떨구거나 자신에게로 끌어오려는 듯했다.

저 근육질의 몸에 잡혔다간 웬만해선 단숨에 찢겨나가고 말겠지.

-뀻

그때 로키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더니 양팔을 크게 벌려 무언가를 요청했다.

-뀻 뀨웃! 뀻

-자신의 커다란 인형을 꺼내 놓아달래.

주먹을 내밀었다가 힘껏 휘저었다.

-뀨귯 뀻.

-자신도 큰 몸만 있으면 다 이길 수 있대.

"한 번 쓰면 버릴 텐데?"

-뀻!

-또 사달래.

"···."

체이서는 스펜서 완구가 주문 제작에 어떤 금액을 요청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으나 기꺼이 내어주기로 했다.

커다란 토끼 인형에 들어간 로키가 양팔을 벌리며 기뻐했다.

-꾸우웃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뛰어들었다.

-후웅

놀랍게도 미노타우로스는 즉시 그물을 놓고 로키를 맞이했다.

바람 소리가 울릴 정도로 빠르게 내질러오는 주먹은 굉장히 날카로워서, 고수라 하더라도 방심한 채 달려들었다간 단숨에 제압당했을 듯했다.

그러나 로키는 강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부드럽게 잡아내더니, 미노타우로스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여 단숨에 발코니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결투의 신이라 불리던 아이슨의 체술을 완벽히 체득한 듯했다.

제압한 뒤에도 맞은편 발코니로 돌진하는 로키의 활약 덕분에, 체이서는 다시 골렘과 일대일을 할 수 있었다.

-쿠구궁

전투는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체이서의 힘을 빼앗은 골렘과, 골렘의 힘을 받은 체이서의 전투는 체이서의 승리로 끝났다.

「빙결의 경비 골렘」을 역으로 얼려 고정한 뒤, 지옥 발걸음으로 녹여 핵을 부순 체이서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견고함 특성을 빼앗기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성장하는 자의 검을 쓰는 것보단 낫겠지.

-성장 특성을 내주면 체이서와 싸우며 실시간으로 강력해지는 골렘을 볼 수 있을 듯.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면 즉시 골렘에게로 특성이 옮겨지기에 웬만하면 적은 장비로 쓰러뜨리는 게 좋았다.

점점 골렘의 능력에 익숙해져 가는 체이서는 무리 없이 각 방을 클리어할 수 있었는데, 로키가 스스로 거대 로키를 포기해왔다.

-뀻 뀨웃

-이제 됐으니까 보관해달라는데?

체이서가 인형을 해석해보았다.

「거대한 고급형 토끼 인형」‗‗‗‗‗‗‗‗‗

튼튼하고 부드러운 소재.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

주변을 걸어 다니며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들의 좋은 친구.

스펜서 완구의 스테디셀러를 제국 행사 참여를 위해 거대하게 만든 희귀품.

몇몇 귀족에게 가져가면 부르는 값을 지불할 듯하다.

!자동 청결 마법이 깃들어 있다.

!공격 시 최상급 마력 회복.

!대장장이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재료로 쓰인 광물의 굳기보다 다섯 배 더 견고하다.

‗‗‗‗‗‗‗‗‗‗‗‗‗‗‗‗‗‗‗‗‗‗‗‗‗‗‗

-꾀부리네! 로키.

-저렇게 붙으면 미궁의 핵 수준으로 오래 쓰겠는데? 어차피 전투 시에만 살짝 쓰는 거니까.

-근데 좀 폭력적으로 변할 듯.

로키는 지금 마그나 장검의 견고함 특성을 완전히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건에 깃든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무언갈 때려서 채워야 하니 손버릇이 나빠질 것 같았으나, 저 커다란 인형을 「미궁의 핵」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니 오래 쓸 수 있도록 하려면 이게 최선이긴 했다.

체이서는 잠깐 생각하다가 오늘 열심히 일해준 것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가 빠진 무기를 계속 쓸 수는 없으니 올란도에게 새 무기를 요청하거나 새로 사야 할 듯했다.

로키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하고, 체이서는 다시 커다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골렘이 아닌, 무기로 이루어진 산이 있었다.

체이서가 첫 번째 미궁을 해결하고 나서 보았던 「미궁의 핵」의 잔해와 비슷했으나 조금 달랐다.

이 산에 놓인 물건은 모두 잘 관리된 보물이었으니까.

"장비들의 이름에 전부 혼돈이 붙어있네요."

「혼돈의 달그림자 낫」‗‗‗‗‗‗‗‗‗‗

불사의 존재인 사신을 끝까지 추적해 영락시켜 인간으로 만든 뒤 암살한 전설적인 용병 로나탄은 사신이 사용하던 대낫을 전리품으로 삼았다.

기이한 힘이 깃들어 모든 특성이 사라진 상태이다.

!타격 시 무작위 도검류 무기 장비의 특성을 발휘한다.

‗‗‗‗‗‗‗‗‗‗‗‗‗‗‗‗‗‗‗‗‗‗‗‗‗‗‗

그 특성은 체이서의 검에도 붙어있었는데, 「혼돈의 마그나 장검」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특성을 잃은 대신 타격 시 무작위 도검류 장비 특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나마 도검류에만 해당하는 기능이라 다행이네요."

이 창고에 있는 무기도 모두 도검류였다.

무수한 날붙이가 스스로 떠올랐다.

「호펜의 양피지」의 붉은 미궁과 비슷한 공격이었으나, 훨씬 위협적이었다.

"설마 저걸 다 부수라는 건 아닐 테고요."

체이서는 허공에 뜬 채 자신을 조준하는 무수한 무기를 살피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창고 열쇠 조각」‗‗‗‗‗‗‗‗‗

부서진 황실 창고의 열쇠 조각.

기이한 힘이 깃들어 모든 특성이 사라진 상태이다.

!타격 시 무작위 도검류 무기 장비의 특성을 발휘한다.

‗‗‗‗‗‗‗‗‗‗‗‗‗‗‗‗‗‗‗‗‗‗‗

열쇠의 부러진 단면이 날카로움을 뽐내었다.

커다란 창과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그건 분명 자신이 찾아야 할 열쇠 조각이었다.

저걸 쥐면 이번 방도 끝.

그러나 저 대단한 보물을 버텨낼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체이서는 미안하지만 약속을 깨기로 했다.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고급형 토끼 인형」을 꺼낸 뒤 지퍼를 내렸다.

-드르륵

인형 안에 있는 전투 골렘의 골격을 꺼낸 뒤, 그 안에 들어가 지퍼를 닫았다.

-로키가 둘이 됐어.

"푹신하네요."

그러나 견고함 특성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폭

다리를 때리는 솜주먹에 체이서가 내려다보자, 작은 토끼 인형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뀻.

-실망했대.

"강아지, 고양이, 늑대, 여우 등 종류별로 다 사줄게."

-뀨웃

-알겠대.

체이서는 저택에 로키 방을 하나 꾸며둘 생각이었다.

그때 종류별로 수집할 인형 거치대라도 하나 만들어 두면 되겠지.

그동안 수고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을 듯했다.

제작 의뢰는···. 올란도에게 부탁해볼까.

그가 만들면 처음부터 견고함 특성이 부여될 테니까.

무수한 무기가 하늘로 떠오르는 방 안에서 토끼 인형이 검을 꼬나잡고 기다렸다.

방어구를 얻은 그는 날아드는 도검류를 당당히 서서 쳐냈다.

-카앙! 기기긱-

공기가 일그러지더니 체이서를 공격한 대검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무작위 전송이네.

다시 날아드는 장검을 쳐내자 이번엔 체이서의 검이 크기를 키웠다.

-부우웅

거대한 검을 휘둘러 내리쏘아지는 무수한 무기들을 단숨에 밀어냈을 때, 체이서의 「마그나 장검」은 구멍이 뚫린 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

-캉!

그 상태로 단검을 막아낸 「마그나 장검」이 크기가 줄어들어 목걸이 장식처럼 변해버렸다.

장식처럼 변해버린 칼로 날아드는 보물을 쳐내던 체이서는 아직 자신의 수준이 이 정도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아져 버린 검을 인벤토리 속으로 집어넣고 「성장하는 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캉! 카가각! 카아앙!

연달아 쏘아지는 검을 막아내며 기다리던 그는 마침내 열쇠가 쏘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검을 휘두르는 듯했던 체이서는 순간 검을 놓고 열쇠를 잡았다.

-카직

투창처럼 쏘아져 내려오는 열쇠 조각은 날카로웠으나, 견고함이 강화된 인형과 체이서의 「기괴한 지휘자의 악수」를 뚫어낼 수는 없었다.

몇 번 꿈틀거리던 열쇠 조각이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 위로 떠 있던 무기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튕길 때마다 온갖 마법을 쏟아내며 방 안을 지옥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나, 체이서는 진작 밖으로 향하는 문에 도달해 있었다.

로비에서는 미나스가 반겨주었다.

"왔군. 어떻게 됐나? 아직 죽은 건 아니겠지?"

"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체이서는 이제 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00화. 황실 창고의 미궁을 해결했다.

100화.

체이서는 마지막 방으로 들어갔다.

미궁은 이전과 같이 체이서의 장비에 깃든 힘을 앗아갔다.

-파앗

체이서의 모든 장비에서 힘의 원천, 축복, 정수 등이 빨려 나간다.

「혼돈의 기간틱 가디언」‗‗‗‗‗‗‗‗

골렘 다섯을 합쳐 만든 초거대 골렘.

황실 창고의 심처를 침입하는 자를 박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이한 힘으로 수많은 장비의 권능이 골렘에게 깃들었다.

!바람신의 가호가 깃들어···

‗‗‗‗‗‗‗‗‗‗‗‗‗‗‗‗‗‗‗‗‗‗‗‗‗‗

체이서가 지닌 장비의 능력을 모두 빼앗은 골렘은 전과 달리 자신의 능력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체이서의 모든 장비를 아무 능력 없는 일반 장비로 바꾸어 버렸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잡을까요···."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동안 가져가지 못하는 줄 알았던 「미궁의 핵」의 저주 역시 뽑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카드드득

그의 망토 「뒤쫓는 자의 그림자」에서 새카만 기운이 뽑혀 나왔다.

-끼아아아!

저주가 뽑혀 나오며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사념이 강제로 잡아 뜯기는 듯한 소리는 지금까지 왜 저주를 가져가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궁의 핵에 깃든 사념을 통째로 뜯어내 버렸네.

-저게 가능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게 미궁이었다.

-콰드득

체이서의 장갑 「기괴한 지휘자의 악수」에서도 새카만 힘이 뽑혀 나오더니 가디언에게 향했다.

-뀻 뀨우웃!

체이서가 로키를 확인하자,「아이슨의 애착인형」에서도 검은 힘이 뜯겨 나오고 있었다.

모든 힘을 빨아먹고 새카만 기운을 흡수하는 거인의 모습은 굉장히 불길했다.

체이서가 가디언을 해석했다.

「저주의 기간틱 가디언」‗‗‗‗‗‗‗‗‗

무패의 전설을 지닌 결투의 신과 수많은 자를 미치게 했던 기괴한 천재 지휘자, 그리고 성물을 타락시킨 수천의 악령이 깃들었다.

기이한 힘으로 수많은 장비의 권능을···.

‗‗‗‗‗‗‗‗‗‗‗‗‗‗‗‗‗‗‗‗‗‗‗‗‗‗‗

그때 체이서의 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남다른 격을 갖추고 있는 「현자의 눈동자」에도 미궁이 그 마수를 뻗어온 것.

-설마 해석 능력도?

-그건 안 되지.

대마법사인 록하트 놀란과 창고지기 중 권한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는 글로든 바머를 제외하곤 그의 주변에 해석 능력을 지닌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것만 봐도 「현자의 눈동자」가 가진 특수성을 알 수 있었다.

체이서의 렌즈에 깃든 최상급 해석 능력은 아카식 레코드와 연결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볼 수 있었다.

-파지직

그러나 미궁은 마침내 렌즈에서도 황금빛 광채를 뽑아냈다.

능력을 가져가진 못했지만.

-지이이잉

허공에 구멍이 뚫렸다.

우주가 비치는 구멍에선 빛이 흘러나왔는데, 일대를 스캔하듯 훑은 빛이 사라진 뒤엔, 렌즈에서 나온 황금빛 광채를 빨아들였다.

-팟

구멍이 닫히자 체이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뭐죠?"

-도서관 관리자가 손을 썼나보네.

-접속 권한을 멋대로 다른 물건에 부여하게 두지 않은 거야.

-일 끝나면 돌려줄 듯.

"···신의 물건도 뒤바꾸는데 신기하네요."

-적극성의 차이지.

-신도 자신이 신경쓰는 물건을 멋대로 뒤바꾸려 하면 즉시 움직일 걸?

체이서가 저주를 잃은 미궁의 핵을 확인할 때, 엎어져 있던 로키가 일어나더니 말했다.

-뀻 뀨웃!

-함께 있던 대머리가 사라졌대.

"대머리?"

-뀻.

-무술 가르쳐준 격투가.

아이슨을 말하는 듯했다.

-뀻 뀨웃

-근데 여전히 먹을 게 많대.

로키는 보물이 지닌 힘을 먹는데, 「미궁의 핵」처럼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담기지 않았다면 금방 모든 힘을 흡수하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뽀송한 털을 자랑하는 「아이슨의 애착인형」을 보자면 저주만 잃었지 막대한 힘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념과 저주를 잃어버린 채로 힘만 남는 건가?"

그렇다면···. 오히려 좋다.

체이서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궁의 핵」을 꺼내 놓았다.

「마법사를 해체하는 열쇠」

「물어뜯는 방패」

「저주왕의 잔」

「혁명가의 마공학 소리 증폭 장치」

「2원소 정령 개구리」

「광신도의 마법 클로」

그가 가진 「미궁의 핵」은 생각보다 많았다.

대개 위험천만한 저주가 깃들어 있었고, 그렇기에 외부에서 쓸 때는 조심해야만 했다.

「검은 가방」 역시 그가 홀로 다니기에 사용할 수 있었지, 만약 주변에 지킬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긴다면 사용하기 힘들어질 것이었다.

핵가방이 만든 미궁은 「아군의 휘장」을 착용한 자만을 동료로 생각할 테니까.

"유용하지만 밖에서 꺼내 놓기 힘든 물건들이 많았는데 잘됐네요."

몇몇 능력은 소실되어 사라지고, 몇몇 능력은 뒤죽박죽 섞일 것이었다.

그러다 저주가 소실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사념만 뽑아낸 「미궁의 핵」이 그 막대한 에너지는 그대로 유지한다?

그건 전설적인 보물이라 불러야 할 테니까.

만약 저주만 몰려 있는 물건이 생긴다면 그것대로 좋다.

성스러운 샘을 이용하면 하나를 정화했지만 여러 개의 미궁의 핵을 정화한 것과 같은 일이 될 테니까.

-카드드득 카득

체이서가 꺼내 놓은 꺼림칙한 물건들에서 검은 힘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 끄어어어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공간.

검은 머리에 황금빛 눈을 가진 사내가 어두운 아우라에 파묻혀 웃고 있었다.

검은 힘은 체이서의 의도에 따라 기간틱 가디언에게 전부 빨려 들어갔으며, 적은 점점 더 강력해져 갔다.

마침내 모든 힘을 가져간 거인 골렘은, 스스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구구궁!

거인의 눈빛이 깜빡거렸다.

서로 파장이 맞지 않는 강렬한 사념들이 하나로 들어갔으니 서로에게 적의를 품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파지지직

아이슨이 제노비아를 떠돌던 영혼을 잡아 팬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휘두르자 수많은 영혼이 머리를 잡고 고통받는다.

액체 고양이가 정령 개구리를 집어삼키고, 사랑하는 자의 방패가 되고자 했던 연금술사의 영혼이 새로운 신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주변의 영혼을 물어뜯었다.

그러한 난장판이 벌어지는 공간은 다름 아닌 가디언의 핵.

-꽈드득 까직

미궁의 현실 개변은 모든 능력을 핵 속에 불어넣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내부에서 날뛰는 사념을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가디언은 그저 이용당하는 중인 개체였고, 그에 불어넣어 진 사념은 엄연히 「미궁의 핵」의 것이었으니.

-쿵

가디언은 홀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아앙!

상체에 구멍이 뚫려 침몰한 적을 의아한 채 바라보던 체이서의 정면에 구멍이 생겨났다.

-지이잉

별빛 가득한 구멍 안에서 황금빛 광채가 빠져나오더니 체이서의 렌즈에 부여되었다.

해석 능력을 되찾은 체이서는 자신 앞의 가디언이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팟 파앗

적에게 빨려 들어갔던 빛과 어둠이 가디언의 몸에서 도로 빠져나왔으니까.

체이서는 그 광경에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바닥에 놓여있던 온갖 물건과 자신의 장비 대다수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체이서가 서둘러 「호버 보드」를 꺼내곤 날아올랐다.

-우우웅

가속하는 비행체는 굉장히 빨랐다.

그에게로 날아드는 빛무리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검은빛은 피하고 황금빛은 부딪친다.

체이서의 머리에 닿은 광채는 반짝이며 그 권능을 가장 가까운 물건에 불어 넣었다.

-팟 파앗 팟!

그는 밖으로 나가려는 광채까지 따라잡아 몸을 부딪쳤다.

연달아 빛이 터졌다.

몇몇 저주는 피하지 못했으나, 몸이 바뀌며 훌륭해진 운동신경 탓에 이젠 그를 쫓는 검은 광채만이 남았다.

"저건 이제 하나에 몰아넣어 볼까요?"

체이서는 「마그나 장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가 나간 조그마한 장검을 휘둘러 검은 광채에 찔러 넣었다.

저주의 사념이 담긴 빛이 「마그나 장검」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마그나 장검에 저주를 몰아넣으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몇몇 저주가 잡히지 않는 체이서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뀨우우웃!

남은 모든 저주가 로키에게로 날아들었다.

로키의 속도로는 광채를 벗어날 수 없었기에 모든 사념을 몰아받았고, 그렇게 「아이슨의 애착인형」은 더 괴악한 물건이 되었다.

「아이슨의 애착인형」‗‗‗‗‗‗‗‗‗

!이 인형과 전투한 자는 영원히 전의를 잃는다.

!닿는 자의 영혼을 불태운다.

!닿는 자의 온도를 뒤집는다.

!닿는 자의 영혼이 얼어붙는다.

!닿는 자의 성정이 잔혹해진다.

!힘이 가득 채워지면 저주왕의 군세가 나타난다.

!힘이 모두 소모되면 저주왕의 군세가 사라진다.

‗‗‗‗‗‗‗‗‗‗‗‗‗‗‗‗‗‗‗‗‗‗‗‗‗‗

모순된 능력과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 한데 모였다.

물건에 있는 사념은 가디언 내부에 있을 때처럼 서로를 잡아먹으려 했다.

-퉁

애착인형 안에서 로키가 튀어나왔다.

체이서의 머리 위에 안착한 하얀 털뭉치가 억울하다는 듯 콩콩 뛰었다.

픽 쓰러진 토끼 인형이 거세게 발버둥쳤다.

"로키. 괜찮아."

체이서는 투덜대는 로키를 달래려 했으나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물건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체이서는 「전쟁 영웅 훈장」과 「왕의 증표」를 꺼내 착용했다.

로키는 내키거나 무언가를 원할 땐 말을 잘 듣지만, 이렇게 불만이 있거나 내키지 않을 때는 카리스마 수치가 없인 말을 듣지 않았다.

"괜찮아. 다시 들어가도 돼."

로키가 진정한 뒤 「아이슨의 애착인형」으로 들어갔다.

「아이슨의 애착인형」‗‗‗‗‗‗‗‗

!이 인형과 전투한 자는 영원히 전의를 잃으며 자학 성향이 생겨난다.

!닿는 자의 영혼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주변의 영력을 끌어모아 저장한다.

!힘이 가득 채워지면 저주왕의 군세가 나타난다.

‗‗‗‗‗‗‗‗‗‗‗‗‗‗‗‗‗‗‗‗‗‗‗‗‗‗

「물어뜯는 방패」의 잔혹해지는 저주는 자신에게 잔혹해지는 저주로 뒤바뀌었다.

영혼을 불태우는 「액체 고양이」, 영혼을 얼리는 「광신도의 마법 클로」, 영혼의 온도를 반전시키는 「2원소 정령 개구리」의 능력은 멋대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뀌었다.

「저주왕의 잔」에 깃들어 있던 군세를 부르는 권능은 주변의 영력을 끌어모으는 능력으로 쓸모를 갖추었다.

"오히려 좋아졌잖아."

-뀻 뀨웃.

-대머리와 연금술사가 선을 그어놓고 침범하지 말라고 한대.

-뀨우웃

-정령 둘이 돌아다녀서 정신없대.

로키의 집에 구성원이 늘어난 듯했다.

-넌 어떻게 됐어?

-체이서의 장비도 시간 내서 찬찬히 살펴봐야 할듯.

체이서는 이번 일로 렌즈에 수많은 능력을 몰아넣을 수 있었다.

"제가 가진 장비 중 쓸모있는 능력이 거의 다 렌즈에 갔네요."

첫 공격에 열 배 강력한 공격을 하거나 발걸음에 불길을 내뿜는 등의 능력은 체이서의 렌즈 하나로 수렴됐다.

"그럼 다음으로 가볼까."

체이서는 가디언의 머리 위에 붙어있던 마지막 열쇠 조각을 챙겼다.

세 조각을 모두 뽑아놓자, 절로 붙어 하나의 거대한 열쇠가 완성되었다.

열쇠를 인벤토리에 넣은 채 밖으로 나오자 미나스가 없었다.

"어디 가셨지?"

체이서는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의 끝에 도달한 그가 거대한 열쇠 구멍을 열었다.

-찰칵

안으로 들어가자 온몸에 보물을 두르고 있는 처음 보는 남자가 황금이 가득한 창고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난 게랄드라고 하네."

남자의 뒤의 거대한 벽엔 숫자가 적혀있었다.

[35,341]

"이곳에서 특별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진실을 외부로 퍼뜨려준다면 내 자네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지."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황실 창고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뛰어나 보이는 보물이 그의 손에 올라왔다.

태엽 장치로 이루어진 공은 말도 안 되는 보물이었다.

「행성의 복원 기록」‗‗‗‗‗‗‗‗‗‗‗

시간의 신이 실수로 내린 물건.

이 바하무트 가(家)의 보물은 총 10번의 기록 횟수와 세 번의 사용 횟수를 제공했다.

사용 시 기록된 복원지점으로 되돌린다.

기록된 시기 : 바하무트 제국 1년.

!새로 지정 가능 횟수 1회.

!한 번 더 사용 시 신에게로 돌아간다.

‗‗‗‗‗‗‗‗‗‗‗‗‗‗‗‗‗‗‗‗‗‗‗‗‗‗

그는 체이서를 설득하려 했다.

"나는 그저 신의 무구를 만들고 싶었던 대장장이네. 마침 이렇게나 좋은 재료가 많은 공간을 얻었는데 포기하고 싶진 않군."

그는 꽤 정상적으로 보였다.

"내 능력을 자네도 알지 않나? 무기의 특성을 뽑아다 다른 물건에 부여하고 싶다면 날 찾아오게. 본래 수년마다 한 번도 힘들었던 내 혼돈의 권능이 여기선 매일 쓸 수 있더군. 내 생전 그걸 재련이라고 불렀는데, 내게 부와 명예를 준 대단한 권능이지."

그리고 꽤 유능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체이서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일단 상대는 유령이며, 그는 이미 그가 말하는 '재련'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자네 장비들이 모두 뒤죽박죽이지 않나? 날 위해 몇 가지 일을 해준다면 기꺼이 모든 장비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주겠네."

"싫습니다."

그렇게 단숨에 거절당하자, 상대의 얼굴이 굳었다.

"별수 없군."

게랄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새겨진 숫자를 읽는다.

[35,341]

"삼만이라···. 처음 귀속된 영혼이 그래도 일을 해준 모양이야. 강자가 너무 일찍 왔군. 썩 많지는 않을 테지만 불러볼까."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구구궁!

"이들은 이곳이 부서지면 함께 죽는 자들이지. 그러니 날 지키는 데 도움을 줄 걸세."

그는 당당히 말했다.

"영웅이여. 이 창고에 들어왔던 모든 모험가는 나의 병력이다."

황금이 가득한 공간에 화려한 마법진이 새겨지며 빛이 들어왔다.

"나는 그들의 장비에 여기 있는 최고의 보물들의 권능을 불어넣어 줄 걸세. 자네는 그들 모두와 싸워야 할 거야!"

황금의 산에서 황금빛 광채가 무수히 솟아올랐다.

그 하나하나가 굉장한 능력을 품고 있는 권능.

마침내 혼돈의 대장장이를 위해 싸워줄 영웅이 빛과 함께 전송되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바로 움직였다.

적이 준비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은 하수다.

그가 어디선가 병력을 불러올 듯한 상황이라면, 불러오기 전에 처치하는 게 최고였다.

-파아앗

"어딜!"

게랄드가 손을 휘저었다.

어느덧 마법진 위엔 실루엣이 생겨나고 있었고, 보물의 산 위에 떠 있던 황금빛 광채가 그의 병력이 그 자리로 쏟아져 내려왔다.

눈 부신 빛이 연신 번쩍이다 멎었을 때.

체이서는 자신 앞에 선 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단한 힘이로군."

황실의 창고지기 아델 미나스.

그의 평범했던 장비들은 하나같이 밖에 나가면 세상을 뒤흔들 물건이 되어 있었다.

믿을만한 병력에 내주어 당장 전투력을 띄우기보다, 혹여 빼앗겨 리스크가 될까 숨겨놔야 할 정도의 보물을 홀로 독식한 자.

가히 천의 권능을 지닌 자라 할 만했다.

"아니···! 홀로 저 숫자를 채웠단 말인가!"

게랄드는 경악했다.

자신의 안배는 틀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유적지를 탐사하는 모험가들은 보물을 갖기 위해선 어떠한 위험이라도 감수해 뛰어들었으니까.

원래라면 이맘때쯤엔 최소 수백 명의 모험가가 목숨을 저당 잡힌 채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건만.

자신이 계획한 던전은 저 빌어먹을 멍청이에 의해 아무에게도 선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익!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구나! 그래도 괜찮다! 저 녀석을 죽인 뒤 이제라도 외부인을 불러와!"

미나스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모든 능력을 무작정 펼쳐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대지의 기류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체이서의 앞에 있던 그가 사라졌다.

체이서는 검을 내렸다.

그리고 거대 로키 인형을 꺼내 지퍼를 내리고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다시 드러난 미나스는 「미궁의 핵」의 사념인 게랄드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

"불러줘서 고맙군."

미나스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자신 앞에 있는 자를 자그마치 삼만 오천 번 죽을 만큼 보고 싶었으니까.

부릅뜬 게랄드의 눈이 흔들렸다.

"하필 너 같은 놈이 창고지기라니···!"

-콰아앙!

게랄드의 몸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망치가 널브러졌다.

「혼돈의 망치」‗‗‗‗‗‗‗‗‗‗‗‗‗

혼돈의 대장장이라 불리던 게랄드는 물건의 능력을 옮기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단한 능력과 제작 실력으로 승승장구했는데, 비대해진 에고와 실패 없는 삶은 신을 목표로 하게 했다.

신의 무구를 만드는 순간 자신도 신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 그의 삶이 불행해졌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돈으로 온갖 신의 무구를 수집하였으며, 그 능력을 이리저리 옮기고 조합하고 뒤트는 과정 중 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더 큰 불행은 그의 실력이 진짜였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신이 될 가능성이 있었고, 그의 노력은 권능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보였다.

신들은 분노하였고 그를 심판하기 위해 수많은 교단이 성기사를 보냈다.

게랄드는 살아남기 위해 유적지로 숨어들었고, 수많은 교단과 싸워줄 용병을 고용하였다.

오랜 싸움 끝에 한 용병의 배신으로 그가 숨은 자리가 드러났다.

성기사의 검에 죽은 게랄드의 망치에 사념이 담겨 미궁화하였다.

!물건의 능력을 뽑아낸다.

!물건의 능력을 부여한다.

!소지자는 백 오십육 개 교단의 적이 된다.

‗‗‗‗‗‗‗‗‗‗‗‗‗‗‗‗‗‗‗‗‗‗

아무래도 성수의 샘을 사용할 일이 생긴 듯했다.

저 물건은 인벤토리에 담고 있기도 꺼림칙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회수하지 않으면 미궁이 끝나지 않는다.

"고생했네. 정말 고마워."

미나스가 다가왔다.

"몸 쓰는 거 못하신다면서요?"

"도합 수만 번 전투하니까 단련된 것 같군."

-35,341 로그라이크 용사.

-그 정도 싸우면 그래도 늘지.

체이서는 「혼돈의 망치」를 회수해 미궁을 해결하기 전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혹시 다른 창고를 지키실 생각 없습니까?"

미나스는 「조화의 가호」를 지닌 인재다.

모든 정리에 강점이 있으며 쓸모있는 물건을 파악할 안목도 있었다.

"미궁과 함께 죽는 것보단 직장을 옮기시죠."

"그게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잠시 뒤, 체이서는 황실 창고에서 나왔다.

-쿠구궁

문이 열리자 마법사와 황실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이서의 손에는 「행성의 복원 기록」이 들려 있었는데, 창고지기가 아니기에 그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 보물인지 몰랐던 그들은 절차대로 문을 닫으려 했다.

체이서가 시종장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내부에 미궁이 터졌습니다."

"···!"

황실 시종장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근데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주 잠깐만 기다렸다가, 한 번만 더 들어갔다 나오면 됩니다."

체이서의 말에 잠깐 고민하던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거짓이 아니길 바라오."

시종장이 모두에게 멈추란 신호를 보낼 때, 체이서가 「귀환 주문서」를 꺼냈다.

그 주문서의 목적지는 창고의 3층.

수페르비아가 있는 곳이었다.

101화. 미나스를 구했다.

101화.

3층에 도착한 체이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원 위에 아담한 오두막이 보인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푸른 잔디밭 위에서 이파리 하나를 문 채 양팔을 베고 누워있는 회색 머리칼의 소년이 보였다.

창고를 습격했다가 창고에 갇혀버린 애쉬포드였다.

그는 행복한 표정으로 한가롭게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또 오셨네요."

"잘 지냈어요?"

체이서의 말에 수페르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조금 더 빠르게 흐르더군요."

변화가 없는 넓은 세상 속에서 홀로 있다 보면 시간이 느리게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일상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저 녀석은 어떤가요?"

"처음엔 두려워하더니 금세 적응해서 투덜대고 장난치고 웃고 떠들더군요."

수페르비아는 그에 덧붙였다.

"일머리도 있습니다. 영리하게 알아듣고 잘하더군요. 조금 게으름 피우는 경향은 있지만요."

후임자를 가르치는 게 나름 재밌는 듯했다.

그녀는 애쉬포드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게 했다.

"저주 면역력이 강한 괴수의 신체 일부를 꺼내주었습니다."

신체를 저주 방호구로 만드는 것.

체내 마력핵에서 에너지를 받아, 고갈되기 전엔 저주에 상당한 면역력을 갖게 된다.

영혼에 치미는 저주를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전처럼 1층에서 오고 간다고 미쳐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잘 들리라고 좋은 귀를, 빨리 오라고 좋은 다리를 선물했지요. 제게 어울리지 않아 쓰지 않았던 적당한 재료로 살집도 키웠습니다."

체이서는 오두막집 옆에 붙은 그녀의 자그마한 창고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수페르비아가 인정할 만한 강자의 잔해겠지.

애쉬포드에게 주어진 재료는 절대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

"자세히 보니까 조금 달라지긴 했네요."

강화로 인한 변화인지, 애쉬포드의 귀가 살짝 뾰족했다. 키와 덩치도 조금 커진 것 같았고.

애쉬포드는 전투인형답게 착실히 강화되고 있었던 듯했다.

체이서는 그녀의 강함을 알았으나, 자신을 약화하면서까지 애쉬포드를 강화하는 것은 꺼려졌다.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해주세요. 가져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때 애쉬포드가 체이서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났다.

"너!"

단숨에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잡을 듯하던 애쉬포드는 체이서에게 가까워질수록 걸음을 늦추었다.

자신을 가뒀으니 화가 난 건 맞는데 잘못은 자신이 먼저 했다.

그에 더해, 체이서는 약속을 지켰다.

무서운 액자에 갇혀 어둠 속에 홀로 갇혀있던 그를 꺼내준 데다 새로운 몸을 준 일은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비록 원치 않았던 직장에 갇혀있었으나, 처음에만 원망스러웠지, 지금은 마음에 들기도 했다.

물론 체이서에게 덤비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체이서가 무섭기 때문이었다.

위험한 테이블 앞에 앉아 신병들을 기다리던 체이서의 모습을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애쉬포드는 체이서 앞에 서선 우물쭈물했다.

"편하게 말해. 우린 동기잖아."

애쉬포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집에 갔다 오게 해 줘. 진짜 잠깐이면 돼. 나 어디 안 갈게. 막 돌아다니지 못하는 점은 조금 아쉽긴 해도 여기도 나쁘진 않아. 특별해서 좋거든."

이내 애쉬포드의 표정이 무언갈 떠올린 듯 공포에 질렸다.

"어차피 해결사는 죽어도 안 할 거니까."

애쉬포드는 나가서 생존 신고를 하더라도 특무부대 군인이 되거나 군인을 관두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둘 다 싫었다.

해결사가 되는 건 그 무서운 액자를 찾아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싫었고, 이 전쟁 시기에 군적에서 빠지는 건 자신의 가문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장 좋은 건 이미 적응한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네가 이곳의 관리자라며? 나도 이곳에 배치해줘. 레릭 본가에 갔다 온 뒤에는 일 열심히 할게."

이전 두려움에 떨었을 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자신은 돌아올 곳이 생겼고, 그를 쓸모없다고 내버린 가족들에게 군대에서조차 도망쳐 나왔다고 비치는 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레릭 가문?"

체이서는 새삼 애쉬포드도 귀족 신병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레릭 가문이면 이전에 귀족 명부 봤을 때 읽었는데.

-아마 현 변경백이었던가.

레릭 가문은 수도 인근에서 활동하지 않았기에 체이서와 엮일 일이 없었다.

애쉬포드는 자신의 가문에 대해 평했다.

"그냥 잘난 척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게으름뱅이들이야."

제국은 무수한 왕국을 잡아먹으며 크기를 키웠고, 멸망한 왕국의 방계 왕족이었던 레릭 가(家)는 바하무트에 완전히 항복하면서 왕국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곳은 곧 제국의 변방이 되었으며 현재 피스가이아 왕국와 인접한 격전 지역 중 하나였다.

-레릭 가(家) 성격은 좋게 말하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면 뺀질대어서, 가진 능력은 출중하나 업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네.

언변이 좋은 데다 일까지 잘하니 인기가 좋아 왕으로 추대된 게 왕국의 시초였지만, 강력한 적인 제국 앞에 몇 번의 노력이 파훼 되자 이길 수 없다며 항복한 가문이기도 했다.

"살아있다고 말하려고. 이대로 있으면 내가 죽은 줄 알 거 아냐?"

체이서는 이전에 애쉬포드의 시체를 레릭 가문으로 보내주었다.

그들은 분명히 애쉬포드가 죽은 줄 알고 있었다.

"그건 도플갱어의 시체였고, 진짜 나는 살아있었다고 말하면 돼. 어차피 나에겐 관심도 없을 테니 적당히 내가 알고 있을 법한 말을 하면 수긍하겠지. 이번에 집에 가면 내 짐 전부 챙겨오려고. 군 숙소에서 못 쓰는 물건도 여기선 쓸 수 있으니까."

애쉬포드의 말에는 가문에 대한 애착이 담겨있지 않았다.

체이서는 그를 밖으로 보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좋아."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집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년을 막을 정도로 악독하진 않은 듯했다.

그러나 체이서는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며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단, 그보다 먼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말한 체이서가 수페르비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빌려 갈게요."

"알겠습니다."

체이서는 애쉬포드와 함께 승강기에 올랐다.

-지이잉

내려가는 승강기에서 애쉬포드가 기쁘게 웃었다.

이렇게 쉽게 나갈 수 있을 줄 몰랐던 듯했다.

-궁.

승강기에서 내린 뒤 어두운 구름다리를 건너 2층 복도로 진입한 체이서는 [11411호]를 보곤 잠시 고민했다.

"저기에 대악마 무르무르의 영혼석이 남아 있었죠?"

이전 체이서가 애쉬포드의 몸을 만들기 위해 저 안에 있는 푸르푸르의 영혼석을 성수로 정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허벅지까지 오던 성스러운 호수가 단숨에 발목까지 내려갔었죠."

황실 창고지기 아델 미나스 역시 저 영혼석에 담을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얼마 전 성녀와의 약속이 걸렸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대신 애쉬포드가 조금 고생하면 되겠지.

훗날 자신이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는 애쉬포드는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잠시 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도착한 애쉬포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수많은 액자가 나오자 그 두려웠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심지어 체이서에게 어떤 능력이냐 묻자, 비슷한 능력이기까지 했다.

보는 자의 영혼을 빨아들이거나, 죽이거나, 미치게 하거나, 빨아들인 뒤 죽이거나.

"안 보면 되는 거 맞지?"

"그래."

전투 인형이 되면서 감각이 발달한 그는 눈을 감고 계단을 내려가는 데는 문제 없었다.

이후 1층에 도달한 애쉬포드는 저주 방어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위험물 창고에서 안일하게 행동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온몸으로 학습한 결과인 듯했다.

이전에 깔아두었던 함정은 성녀 일행을 성스러운 샘으로 안내할 때 이미 치워두었기에 애쉬포드는 별다른 문제 없이 창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후우···."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한숨을 내쉬고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곳에서 나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비현실적으로 맑기만 했던 3층의 하늘과는 달리 비가 올 듯 우중충한 구름이 퍽 감동적이었다.

-부우웅

애쉬포드는 부드러운 엔진음에 시선을 내리곤 크게 놀랐다.

그의 앞에 말 없는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황궁으로 갑니다."

어느덧 마이클이 창고 앞으로 차를 끌고 온 상태였다.

그가 운전하는 차량에 오른 애쉬포드는 자신이 없었던 동안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이, 이게 새로운 마차야? 뭐라고 불러?"

"자동차."

"이런 건 얼마나 해?"

체이서는 가격을 몰랐다.

그것보다 레릭 가(家)에 갈 때 차에 태워 보내려면 한 대가 더 필요할 듯했다.

태블릿을 꺼내 아멜리아에게 연락했다.

-아멜리아. 녹티부스 한 대가 더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저택에 보내놓겠습니다.

애쉬포드는 방금 자신에게 차 한 대가 배정됐음을 알지 못하고 연신 차 안을 살폈다.

잠시 뒤, 체이서가 보물고 앞에 도착했다.

그곳엔 3황자 알데바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자네가 부탁한 팔찌."

그는 체이서의 부탁에 따라 창고의 입장 권한인 팔찌를 하나 더 챙겨온 상태였다.

개방된 보물 창고가 닫히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궁 내의 일을 모를 황실이 아니었고, 황자 하나를 내려보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라고 한 듯했다.

그때 체이서의 부탁을 받은 알데바란이 나서서 내려왔고, 주변의 대부분을 물린 뒤 체이서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는 중이었다.

그렇게 지금 이곳엔 황실 시종장과 창고 문을 닫을 마법사 둘. 그리고 황자밖에 없었다.

"괜찮은 거 맞지?"

"안에 미궁이 터졌으나 거의 다 해결했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잘해주겠지. 그럼 얼른 마무리하고 나오게. 어, 근데 옆엔 누군가?"

"이쪽은 이번 일을 도와줄 친구입니다."

"알겠네! 뭐가 됐든 좋으니 서둘러주게. 일이 끝나지 않았을 때 형님 중 하나라도 내려오면 일이 복잡해질 걸세."

체이서는 애쉬포드에게 팔찌를 건네곤 황실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를 지나 복도로 들어가 거대한 열쇠 구멍이 있는 문을 통해 보물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서자 애쉬포드가 탄성을 지르더니 말했다.

"이곳도 뭐 만지면 큰일 나는 거지?"

"비슷하네. 자넨 이곳에서 보물을 가져가길 허락받지 못했잖나. 손만 대도 역적이 될 걸세."

아델 미나스의 말에 애쉬포드가 퍼뜩 놀라 뒷걸음질 쳤다.

몸이 변하고 난 뒤 처음으로 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대였다.

"이곳의 물건을 탐내지만 않으면 적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체이서가 망치로 다가가 집어 들었다.

-조심해. 신의 적의를 사면 진짜 골 아파진다.

체이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 물건이 그렇게 싫다면, 완전히 파괴했을 시엔 얼마나 기뻐할까.

바로 부술 거니까 그 전에 조금 사용하는 건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