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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곧 내년이 올테고 야노프는 다시 마도공학국 내부로 숨어들것이다.

훗날을 도모해도 좋을 것이다.

약간의 잡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 계획은 순항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마도공학국과 야노프가 자연스럽게 무너지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가이엔 지나가 가져온 정보는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었다.

"마왕은 실험 때문에 제국의 수도에서 벗어날 겁니다. 황궁을 끼고 있는 수 많은 경비 병력과 충돌할 위험 없이 마왕을 공격할 수 있는 거죠."

마도공학국의 본부에 직접 공격을 간다는 건 여러가지 함의가 있었다.

마도공학국 자체가 황궁에 부속되어 있으니 결과적으로 제국 황실과 전면적인 마찰을 일으킨다.

그건 마도공학국의 비밀 기지를 하나 공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 될 가능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수 십의 용기사와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전마사들이 즐비한 황궁을 상대할만한 병력은 내게는 물론 론 왕국에도 아직 없었다.

게다가 이미 실험해보았던 것처럼 아직 총으로 마검사를 상대하는데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기술이 똑같이 발달하더라도 결국 마검사가 총을 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검사들은 필요하다면 양손에 소총을 하나씩 들고도 수 백 미터 거리에서 교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총알을 피하면서 말이다.

결국 지금 때를 놓친다면, 야노프를 공격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훗날이 되어서도 여러가지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고 그게 먹힐지 아닐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볼더의 사무실 모임에 있는 이들은 내 의견을 지지했다.

볼더가 말했다.

"정확히 거기가 어디오?"

"제국 수도인 체르페디오에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면 코엘란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마이닐은 제국 사람이니 알죠?"

"큰 도시다. 비체 호수를 끼고 있는 곳이지. 강의 지류가 많이 닿고 있어서 그 북쪽에 있는 도시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 곳이다. 제국 북쪽으로 물건이 들어오고 나가는 건 대체로 코엘란을 거치지. 멀리 보이는 북쪽 산맥들 덕분에 풍광이 아름다운 걸로도 유명해."

"그곳 외곽에 제국의 비밀 실험 기지가 있다는군요. 그리고 그곳으로 마왕을 데려간다고 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지나에게 받았습니다."

마이닐이 내가 건네는 자료를 받았다.

제국의 야경꾼들이 이 자료에 거짓이 없는지 확인을 해줄 것이다.

마이닐이 말했다.

"언제 출발할거지? 안식월이 끝나기 전이라면 아슬아슬하겠는데."

그 말에 볼더가 말했다.

"지금이 14일이니 그 위치라면 당장 말로 출발하면 빠듯하게 도착할 순 있을거요."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몸만 갈 수는 없어. 계획은 둘째 치더라도 가야할 인원과 장비는 맞춰야지."

"계획이 첫 번째 아닙니까?"

"아무튼."

뒤에서 지켜보던 노엘이 말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지. 코엘란까지는 아니라도 체르페디오는 가봤으니 재료만 구비할 수 있다면 곧장 갈 수 있을 걸세."

나는 대략 스무 명 인원으로 마법으로 이동 비용에 대해 물어보았다.

노엘이 답하자, 대다수의 반대로 노엘의 의견은 반려되었다. 너무 비쌌다.

투자할 가치가 없다곤 할 수 없으나 우리가 하고 있는 계획들이 휘청일만큼의 액수였다.

내가 말했다.

"뭐, 값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을 타거나 마법으로 이동하는 것 보다는 나은 것이 있지요."

볼더가 말했다.

"비행선 말인가."

"네."

물론 시안에는 비행선은 각 지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 별로 안착하는 귀족들의 호화 비행선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화물 비행선 따위가 비정기적으로 오갔고, 비행선 선착장마다 그런 비행선의 도착 예정표가 붙어 있었다. 보통은 그런 비행선 이동 계획을 보고 덤으로 얻어타는 것이 현재 비행선 교통의 현황이었다.

비행선 계획표만 잘 보면 경유지를 거치지않을 경우 로닌에서 체르페디오까지 이틀을 조금 넘었고, 만약 코엘란까지 곧장 가는 비행선이 있다면 사흘이면 충분했다.

"비행선 이동 계획을 수배 해뒀으니 별 일이 없다면 코엘란으로 빠르게 갈 수 있을 겁니다."

"인원은 어떻게 선별할거지?"

"야경꾼들을 불러야죠. 능력도 능력이지만 신용할만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계획은?"

"음."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말했다.

"지금부터 짜야죠."

13월 18일.

단순히 자신의 발로 국경을 넘는 것만이 아니라 열차와 비행선과 같은 교통수단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면서 국경 주변의 기차역과 큰 비행선 선착장에는 출입국 관리소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로닌을 빠져나가, 외곽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비행선 선착장으로 갔다.

일행은 없었다.

노엘과 같은 경우에는 여러가지 일로 바빴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게다가 노엘은 만에 하나 정말로 늦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체르페디오까지 순식간에 올 수 있는 마법사기도 했다. 일을 치루기 전 마지막까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렸다.

반면 마이닐은 먼저 떠난 뒤였다.

먼저가서 야경꾼들을 규합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국 사람인데다 코엘란에도 가봤던 마이닐이 마도공학국 비밀 기지의 위치와 주변 정세를 파악하는데 더 유용하리란 판단이 있었다.

덤으로 체르페디오에 들려서 서류를 되돌려 놓아야 하는 가이엔 지나도 이미 떠난 뒤였다.

일을 너무 과감하게 시도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긴 했으나, 가이엔 지나에겐 미안하지만 지나가 우리와 내통한 것이 들통나더라도 우리 계획 자체가 크게 흔들릴 위험은 없었다.

우선은 내가 지나에게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니 발설할 정보가 거의 없고, 대비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봤자 우리의 공격을 위험하게 생각해 실험 자체를 중단하고 야노프가 다시 마도공학국 본부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 경우에는 우리가 들인 품이 아쉬워질 뿐 큰 손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미 모두 다 예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내게 표를 건네준 남자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 표를 보여주면 안내해줄거요. 위험한 물건은 없소?"

위험한 물건이라.

"칼을 소지할 수 없습니까?"

"칼? 모험가로군. 칼을 뽑을 생각만 없다면야 상관없소. 어차피 비행선에 타면 제국군을 실컷 볼 수 있을테니. 내가 말한 건 불이 붙을만한 물건을 말하는 건데. ···앞으로 가면 제국군들이 개를 데리고 있을텐데 지금 미리 내놓는게 좋을 거요. 화약이나 기름 냄새는 보이기만 해도 짖거든."

"음, 없습니다."

"모험가들은 기름병 같은 걸 들고다니지 않나?"

"뭐, 이번에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라, 잡다한건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오? 그럼 좋은 여행 되시오."

남자가 말한대로 제국 비행선에 탑승하기 전 소지품을 검사하는 제국군들이 있었고, 개도 한 마리 있었다.

개는 내게 다가와 몇 번 킁킁거렸지만 화약 냄새가 이제는 희미해졌기 때문인지 고개만 몇 번 갸웃거리다 돌아갔다.

선착장에 들어서자 크기가 100미터는 넘을 법한 거대한 비행선이 몇 대나 묶여 있었고, 이미 올라타기 시작한 귀족 여인들이나 그 하인들을 볼 수 있었다.

비행선은 거대한 풍선 부분과 그 아래에 사람들이 탑승하는 갑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가 이번에 탈 호화 유람선은 대부분 갑판 아래에 탑승하도록 되어 있었다.

허공에 떠오르면 외부를 볼 수 있도록 갑판 아래쪽은 옆 부분이 트여 있었고, 복도가 나 있어 오갈 수 있었다.

방들은 1인실과 2인실, 4인실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는 2인실이었다. 방이 남으므로 1인실을 예약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내 위장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코엘란으로 가는 동안 론 왕국 지방에서 수도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이미 선진화 되어 있는 코엘란의 수도 시설을 견학하러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를 방으로 안내해준 여자 승무원에게 말했다.

"몇 시쯤 출발합니까?"

"탑승자 확인을 마치면 30분 이내로 출발 합니다."

"알겠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자 홀쭉한 노신사가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외눈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은 넓지 않았지만 양쪽으로 침대가 하나씩 있고 그 위로 짐을 올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노신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쁜 아가씨가 내리더니 이번엔 멀쑥한 청년이로군. 어디까지 가는가?"

"코엘란까지 갑니다."

"오, 그런가?"

내가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노신사가 중간중간 말을 걸었다.

"코엘란까지는 무슨 일로?"

"론에서 수도 사업을 하는데, 듣자하니 코엘란이 동부해안 최고라고 들었습니다."

"호오, 그렇지. 로닌은 아직 멀었어. 그놈들은 수 백 년전 수로를 아직도 쓴다니까. 큰 공부를 하려면 제국으로 와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말은 어폐가 있었다.

로닌은 수로 시설을 이제 새로 짜고 있었고, 그 전까지 수 백년간 수로 시설에 손을 대지 않은 것도 워낙 잘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몇 가지 현대화 하는 작업을 제외하면 거의 기존 수로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꼰대로군.'

하지만 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설정상 론 왕국 촌놈으로 제국을 동경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옷도 제국식 정장이었다.

노신사가 말했다.

"보아하니 제국의 핏줄을 많이 타고난 모양이군."

"예. 선조들이 모두 제국에서 내려오신 걸로 압니다."

"호오···."

"실례지만 그···"

"스티올이라 부르세."

"예. 스티올 씨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나도 코엘란까지 간다네."

소개한김에 나도 위장 이름을 가져다 댔다.

"그럼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궁금한가? 맞춰보게나."

"혹시 학자십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안경도 끼고 책도 들고 계시죠."

"자네의 추리대로라면 제국 황제라도 목욕을 하기 위해 벌거벗으면 짐승이나 다름없겠는걸."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뭐, 렌즈의 두께를 보아하니 그냥 노안이 아니라 근시용 안경이고 읽고 계시는 책도 작년 공국에서 출간된 철학 논문이군요. 정확한 출판 부수는 모르겠지만, 책 내용을 생각해보면 2천권 이상 팔 생각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학술원 학자들도 한 권씩도 못가질 책을 가지고 있다면 학자라고 생각하는게 더 합리적이죠."

"흠."

"틀렸습니까?"

"아니, 맞네. 9점 주도록하지."

"만점은 10점이겠죠?"

"자네 마음대로 생각하게."

그러고는 스티올은 끌끌거리며 웃었다.

아무튼 스티올은 꼰대임은 틀림 없지만 그리 지루한 사람도 아니었다.

잠깐 이야기를 하는 사이 비행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하늘을 나는 경험은 처음이라서 기분이 들뜰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나와 스티올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서 멀어져 가는 로닌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떠오르는군요."

"처음인가보군. 설레는게 얼굴에 보여."

"스티올 씨도 그렇게 보이는데요."

그 말에 스티올은 기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 언제나 날아오를 때마다 설렌다네. 하, 이게 과학이지."

"과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럼그럼."

"그럼 로닌에 있는 과학부에도 관심이 있으시겠군요."

"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사실 제대로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가 코엘란에 가는 것도 쬐끔은 관련이 있다네."

"학술원 모임 같은 것인가보군요."

"그렇지."

그러면서 스티올은 조용히 땅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난간을 붙잡지 않으면 떨어져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들지만 노인은 익숙한지 흔들림이 없었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던 스티올은 입을 열었다.

"자네도 과학에 관심이 있나보군."

"과학부에 들어다려다가 큰 코 다쳤죠. 그래도 수로 사업을 하면서 배운 게 많습니다. 과학부에서 지원도 나오고요."

"흠, 그럼 자네는 왕립과학부 인간들을 많이 만나봤겠구만."

"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말씀하시죠."

"그 인간들이 '영구 기관'에 대해서 이야기 한적은 없나?"

다행히 나는 전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굳은 채로 있지도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처음 듣는군요. 그게 뭡니까?"

"아,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말이지. 뭐 시간이 많으니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 피차간에 지루할텐데 말이야."

그리고 스티올은 내게 영구기관에 대해 설명할 생각에 벌써 기대감에 부푸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스티올이 마도공학국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 122

코엘란

"영구기관이라, 뜻을 풀자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 장치라는 말 같은데요."

"조금은 다르지. 이를테면 자네의 설명대로라면 강물을 끼고 있는 방앗간에서 물의 낙차를 이용해 돌아가는 물레방아도 영구기관이니까 말이지."

나는 스티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좀더 모르는척 할 필요가 있었다.

"잘 모르겠군요. '증기기관'은 목탄이나 마유를 통해서 움직입니다. 목탄이나 마유를 계속해서 넣는다면 기계 장치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럼 목탄이나 마유가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건가?"

"누군가 구해와야지요."

"아니. 가정을 해보자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목탄이 떨어지고, 마유도 사라졌다고 생각해보게. 마유도 어찌되었든 잡다한 재료가 드니까 말이지."

"그럼 뭐 나무라도 떼어야겠지요. 증기를 내려면 물만 끓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무도 다 사라지면?"

"어떻게 나무가 다 사라집니까?"

그 말에 스티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라질 수도 있다네. 자네는 제국 사람이 아니니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제국 동부의 울창한 수림이 얼마나 베어져 나갔는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거야. 철로가 많이 깔리면 그만큼 열차가 더 많아지고, 열차가 더 많아지면 그만큼 더 많은 연료가 필요하지. 마유는 마법사가 만드니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결국 목탄을 만들어 써야하니 나무를 더 베어야겠지. 아무튼 답해보게. 모든 연료가 사라지면 증기기관을 어떻게 움직이게 할건지."

나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이 물을 끓일 수는 없으니··· 움직이게 할 수는 없죠."

"바로 그걸세."

"뭐가 그겁니까?"

"언젠가 모든 연료는 사라질거야.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말이지. 늦든 빠르든 사람들은 연료를 소비할테고 이미 소비된 에너지는 결코 환원할 수 없지. 그럼 증기기관과 같은 물건은 더 이상 쓸 수 없지. 영구기관은 그런 연료 없이도 저 혼자 돌아가도록 고안된 기계 장치를 말한다네. 혼자서 도는 것이지. 영원히."

이쯤 이야기되면 내 개인적인 흥미를 그대로 미뤄버릴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태울 수 없는데 어떻게 기계를 돌아가게 만듭니까? 마법으로 만들어진 물건들도 결국엔 연한이 있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고대의 도시들도 시간이 흐르면 무너지게 되어 있을텐데요."

나는 마법사라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법의 문외한은 아니었다.

내가 마법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마법이 현실의 물리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가능은 하지만, 지극히 제한적이거나 일시적이었다.

특히나 가장 강력한 물리법칙은 시간이었다.

그 누구도 시간을 쉽사리 제어할 수 없다.

시간의 신의 유물 이후 노엘에게 비슷한 질문을 여러번 던졌지만, 마법사들이 시간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이를테면 공간이동 마법은 그 쓸모에 비해서 대단히 비싸고 난도가 높아 사용자의 능력에 많이 기대고 있는 주문이다.

만약 그런 주문이 자유로웠다면 인간은 시안의 동부해안에만 머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들이 개척민들을 빠르고 넓게 퍼트리고, 소수의 군대로도 빠르게 이동하며 적과 효율적으로 교전하고 보급로를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 마법은 단순히 사람이나 물건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렇지만 공간이동 마법은 제약이 심하다.

내가 이동 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노엘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이동 마법은 정말 드물게 구할 수 있는 진룡이나 이계의 괴물 같은 고등하거나 외차원적인 존재의 신체 부위와 시안에 그다지 존재하지 않은 희귀한 귀금속을 필요로 했다.

이렇듯 공간이동 마법이 어렵고 제약이 큰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물리법칙, 그 중에서도 시간과 공간에 대해 크나 큰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었다.

스티올이 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마법적 제약이 실상은 제어되고 있기 때문이야. 마법이란 애초에 할 수 없는 일이 없어야지. 하지만 누군가 그것을 붙잡아 틀어쥐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건···"

"그건···?"

대답을 하려던 스티올은 껄껄 웃더니 말했다.

"뭐 복잡한 문제니 넘어가지. 어차피 자네는 이해도 못할테니."

하지만 나는 스티올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주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파고들면 안되겠군.'

나는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었다.

"머리가 터질뻔 했는데 잘 됐군요. 언제까지 설명하시나 싶었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 마침 출출 했는데 잘 되었군. 수 백 미터 위에서 먹는 점심이라, 각별하지."

나는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비요른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대학자 중 하나일까?'

'그럴지도요. 늘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숨기고 살아야하니,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폭로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죠.'

'그럼 더 파고 드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는걸.'

'그렇지만 그러면 이 사람이 뒤늦게 후회했을지도 모르죠.'

'무기는 없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만나본 마도공학국 대학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무시할만한 수준은 잘 없었죠.'

'이니엔이 있긴 하지만 말이지.'

추리에 의하면 투명 마법이라던가 몇 가지 마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의 뒤를 공격한 결과에 따르면 기습에 대항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니엔에게 별 다른 유감은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는데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을 뿐.

플로트 백작이나 지나는 내게 제국의 정보국 요원을 조심하라고 일렀지만, 다행히 나를 수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무래도 볼더에게서 변장술에 대해 조언을 들은 것이 유효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호화 비행선이기 때문에 승객 대부분은 귀족이거나 그 하인들이었고, 나머지는 나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비행선에 끼어 탄 승객들, 아니면 그 귀족들을 상대로 공연을 보여주거나 어떻게든 인맥을 넓혀보려는 사업가들이었다.

격일로 있는 선상파티에 참가하는 등 비행선에 있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러 코엘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엘란에 도착하기 전날밤 까지 나는 고민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스티올을 이대로 보내줘야할까?'

이후로도 스티올과 대화를 몇 번 더 했고, 마도공학국에 소속 된 인간으로 볼 여지가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긴 생각하지 않고 일단 죽이고 나서 생각해볼 수도 있었지만, 대학자 한 사람이 살아있느냐 아니냐로 일의 성사가 갈릴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갈등을 하던 내가 끝내 스티올을 비행선 밖으로 떠밀어 버릴 마지막 기회를 놓치자 비요른이 말했다.

'잘했어요. 악인을 하나 잡는 것 보다 무고한 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죠.'

'옳다고까지 할만한지는 잘 모르겠군요.'

'적어도 선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시우 님은, 틀렸어도 다시 고칠 기회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는 일단은 실수를 해보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시우.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다른 짐승들과는 다른 겁니다.'

'알겠다고.'

스티올과 나는 비행선에서 내렸다.

"또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 며칠이나 체류한다고 했지?"

"확정은 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어림잡을 수는 있잖은가?"

"일주일 정도일까요?"

"새해가 시작 될 쯤? 하, 나랑 비슷하겠군. 나는 그 뒤로도 코엘란에 계속 남아 있을 것 같긴하지만, 기회가 되면 일이 끝날 쯤 같이 얼굴이라도 보지."

"좋습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나는 스티올에게 주소를 써놓은 쪽지를 받았다.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이 때문에 스티올과 나는 서로 다른 관문으로 들어간다음 헤어졌다.

흑차(黑茶)는 커피가 아니다.

그리고 보이차 같은 발효시킨 녹차잎으로 우려낸 차도 아니었는데, 시안에는 커피콩과 찻잎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슷하다면 차를 우려내는 방식과 닮았고, 맛을 비교하자면 커피와 비슷하긴 했다.

코엘란은 주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흑차 산지기도 했다.

비행선 선착장에서 마차를 타고 코엘란으로 들어가는 동안 시커먼 잎을 가진 키 작은 흑차 나무가 사람이 들어가서 따기 좋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흑차는 산지와 우려내는 시간에 따라 맛이 바뀌었고, 다섯 가지 맛을 모두 낼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향이 깊어 기호 식품으로 신화시대 때 부터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엔 흑차와 같은 식물은 지구에는 없었다.

아마도 시안의 고유종이거나, 내가 예상하는 것처럼 이세계가 시안에 침식되면서 등장한 식물인듯 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세계에서 넘어온, 정확히는 지구에서 넘어온 나에게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구의 진화론을 감안해보자면, 인간 이외의 다른 종족이 있을 가능성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시안에서 지구로 인간들이 넘어 갔을 가능성은 없지. 그럼 지구에는 인간들 말고도 다른 종족이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다른 종족들도 각자의 세계가 있는 걸까?'

비요른이 끼어들었다.

'복잡한 상상이군요.'

'좋아. 더 간단하게 설명해봐.'

'신들이 각 종족의 신체를 설계하고 만든 다음 소시아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것이죠.'

'아··· 그래. 그럼 지구에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잘 만들어져 있으니 누가 보고 베꼈나보죠. 지구의 신이 말이죠.'

신이 실제하니까 뭔가 이상하긴 했다.

내가 과학 시간에 배웠던 진화론이 다 틀렸던 건가?

이런 문제는 시안의 사람들에게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데 어느 정도 문제가 있기도 했다.

신이 실존하니까 그냥 신으로 설명이 되면 다 신이 하셨더라 하고 퉁치면 그만인 것이다.

'신이 없으면 깔끔할텐데.'

'너무 불경한 말인데요.'

그러고보니 셰런 아인데어는 소시아의 성인이었던가?

때문에 셰런은 죽음에서 몇 번이고 부활하며 자신의 적들을 물리쳐냈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권능은 없었고, 자칭 '지오'라고 불리는 놈은 내가 죽어버리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셰런은 세이브 포인트가 있는데, 나는 그냥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로그라이크 게임이었다.

'새삼스럽게 화가 나는데.'

'···?'

지오라는 존재의 힘 때문인지 이상하게 비요른은 지오에 대해 감지할 수 없었다. 뭔가 비밀이 있을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번에 야노프를 잡으면 끝날 거야.'

그럼 내게서 모든 권능이 거두어지는 걸까?

지오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지구로 돌아가는 걸까?

그럴 거라고 믿지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코엘란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얼굴이 날 맞았다.

"오, 이게 누구야."

코엘란에서 처음으로 날 맞이한 건 도박꾼 아슬론이었다.

내가 말했다.

"설마 당신도 참여합니까?"

"뭐라고? '설마?' 게다가 뭐야, 그 못미덥다는 표정은?"

"제대로 읽으셨네요."

"걱정 마. 이번엔 정말 제대로라고."

나는 전혀 신용할 수 없는 아슬론과 함께 코엘란의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 123

새 무기

코엘란 어딘가의 주점으로 안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슬론이 날 데리고 간 곳은 뜰이 있는 제국식 저택이었다.

코엘란 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뾰족한 세모꼴 지붕인 저택이지만 유력 귀족가인듯 건물의 높이는 제법 높았다.

나는 아슬론에게 물었다.

"누구 집 입니까?"

"몰로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모르는데요."

"보면 알 걸?"

의외로 아슬론의 말대로였다.

몰로이는 나이가 어린 귀족 청년으로, 내가 제국의 비밀 기지로부터 구출해낸 야경꾼 중 하나였다.

저택의 로비에서 불을 쬐고 있던 몰로이는 나를 알아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몰로이가 말했다.

"이제야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그런데···"

"말씀하세요."

"여기 계셔도 되는 겁니까?"

그 말에 몰로이는 무슨 말인가 싶은지 나를 보았다가 아슬론을 보았고, 아슬론은 몰로이를 봤다가 나를 보았다.

내 설명이 부족했나?

내가 말했다.

"제국에서 쫓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나 아슬론에 비하면 얼굴이나 인상착의도 많이 알려져 있을텐데. 정보도요."

"그건 저쪽 남부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설마하니 여기에서까지 저희를 쫓겠습니까. 게다가 필요한 물건은 다른 분들이 다 구해주시니까요."

"아."

코엘란은 큰 도시긴 하지만 제국의 중심에서 떨어진 곳이다. 같은 제국령에 속해 있다고 해도 각 지역의 제국군이나 영주들 사이에 그렇게 긴밀한 협조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요른이 말했다.

'제국은 큰 나라니까요.'

몰로이가 말했다.

"아, 그렇지만 위험한 건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어디 마음대로 나돌아다닐 수는 없죠."

아슬론이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몰로이는 돈이 많거든."

"돈이 많다고 해결이 됩니까?"

"해결을 못할건 없지. 막 나가다 걸리더라도 상대가 마도공학국이 아닌 이상 다 돈으로 매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많아요?"

"몰로이의 부모님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는데 사고로 돌아가셨거든. 이후에 몰로이가 모든 돈을 다 물려받았지. 야경꾼 활동이 들통나면서 마도공학국에 붙잡히고 각 지역 영주들이 재산을 몰수하려고 했지만, 부모님들이 계약해놓은 용병단 때문에 몇몇 지역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지."

"법교가 그냥 눈 뜨고 보고 있지는 않을텐데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법교는 움직이지 않아. 제국 법전에는 야경꾼 활동이 불법이라는 조항은 없거든. 몰로이가 한 것도 야경꾼에 대한 자금 조달 정도였고. 마도공학국이 대외적으로 조사 심문을 하겠다며 불법 구금하고 있었던 걸 가만히 보고 있었으니 법교가 몰로이를 편든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몰로이가 적극적으로 위법하지 않는다면 법교가 움직이진 않겠지."

콘츠를 생각해본다면, 법교는 마도공학국과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야경꾼을 잡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본인 앞에서 해도 괜찮은 겁니까?"

몰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새삼스럽게 뭘 이제 와서."

"괜찮다는데?"

몰로이가 말했다.

"짐을 풀고 쉬세요. 다른 사람들은 저녁 쯤해서 돌아올 겁니다. 그전까지 흑차라도 우릴까하는데, 시게 우려도 됩니까?"

"전 쓴 게 좋은데."

"그럼 저의 은인을 위해 준비해보도록 하죠."

몰로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아슬론이 내게 바짝 붙으면서 말했다.

"그럼 잠깐 짬이 났으니 우리 그거나 할까? 그거?"

"그게 뭐죠?"

"알면서 왜 그래?"

아슬론은 당연한 것 처럼 자신의 이동식 로로카프 판을 펼쳤다.

마이닐은 다른 야경꾼들과 함께 돌아왔다.

하인들이 입는 허드렛일을 할 때 입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아마도 위장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이닐과 인사할 틈이 없었다.

비요른이 말했다.

'어딜 보는 거예요? 시우 님이 고개를 돌리면 게임판이 안 보이잖아요.'

'알겠어.'

'이제 우리 용이 복수를 할 때가 왔어요. 우리의 병사들로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왕의 모가지를 비틀어요.'

'용을 왕 앞으로 옮기란 거야?'

'아니죠. 뭘 하는 거예요? 옆으로 붙여야죠.'

게임판 위는 한창 비요른과 아슬론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슬론을 상대로 처음 두 판을 내리 이겼지만, 이번 게임에서 실수로 비요른의 요구를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위치로 말을 옮기는 바람에 게임은 완전히 아슬론에게 넘어가버렸다.

그 뒤로는 비요른은 여유를 잃었고, 아슬론은 승기를 잡았다.

로로카프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마이닐과 함께 들어온 야경꾼 몇몇은 게임판을 내려다보며 훈수를 두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슬론이 말했다.

"과감한 수로군."

뒤에서 국을 떠와서 먹고 있던 마이닐이 말했다.

"아직 멀었나? 슈는 전혀 흥미가 없는 얼굴인데."

아슬론이 내 얼굴을 째려보았다.

내가 말했다.

"아닌데요. 저 지금 완전히 몰입해서 진지하게 게임이 임하고 있는 중인데요?"

"···그럼 게임을 하면서 일 이야기를 해볼까.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으니."

야경꾼들은 각자 의자를 잡고 자리에 앉았다.

아슬론은 왕을 잃었지만, 로로카프는 왕이 죽는다고 끝나는 게임은 아니었다. 나는 왕도 없이 시작했으니까.

나는 게임판을 보는 한편 야경꾼들을 슥 둘러보았다.

나를 포함해 모두 열 네 명으로, 당장은 모일 수 있는 인원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성별과 나이와 인종과 체격이 모두 다양했지만, 다들 입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기도(氣度)를 가지고 있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아마 '그 날'에는 사람이 더 모일거야. 다 합하면 서른 쯤 될까. 자기 소개는 구태여 할 건 없을 것 같고, 꼭 사이 좋게 지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작전 중에 합이 안 맞거나 얼굴 붉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그리고 여기 모인 사람 중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 있나?"

잠시 침묵, 하는가 싶더니 아슬론이 잠깐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 나 게임 하느라 제대로 못들었어."

"우리가 왜 모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는데."

"마왕··· 아니지. 말해도 되나?"

"말해."

노엘에게 전달받은 마법진이 이곳에도 적용되어 있었다.

"마왕 잡으러 가는 거 맞지?"

아슬론이 이렇게 가볍게 이야기하는데에도 저택 로비에는 무게감이 충만했다.

내가 잠깐 게임판에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마왕과 관련해서 내막을 다 알고 있습니까?"

내막이라는 건 마왕이 제국의 삼황제인 것과 마도공학국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이닐이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그 빌어먹을 게임은 끝내려면 아직 멀었나?"

"음, 아마도 다 끝나갑니다."

"전혀!"

'전혀요!'

아슬론과 비요른이 차례대로 말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이닐이 계속 브리핑했다.

"기지 위치는 계속 확인하고 있다. 근처에 가까운 귀족의 저택이 있는데 증축 공사 인부들을 모집하고 있어서 거기에 위장해서 접근 중이다. 아마 당일 날에는 그 저택을 임시 거점으로 공격해 들어갈 계획이야."

"마도공학국 기지 상태는요?"

"저번에 쳐들어 갔던 곳이랑 규모의 차이는 크지 않다. 하지만 주변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이 주변 숲을 오가는데, 그 친구들 말로는 그 기지 쪽에서 마치 사령들의 비명소리 같은 음침한 소리들이 밤이면 들려온다는군. 뭔지 알겠나?"

"글쎄요. 그렇게만 들어서야."

아마도 마도공학국 기지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어떤 발명품이 내는 소음일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런 두리뭉실한 비유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내부 사정은 전혀 모르고요?"

"규모는 비슷하지만 보안 등급은 더 높은 거 같다. 그리고 저번 기지 습격이 나빴기 때문인지 801부대 내통자들이 의심 받는 인원으로 분류된 건지 그쪽 부대로 전혀 들어가지 못했어. 과거에 그곳에서 경계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 있는데, 연구동은 일반 병사에게 접근이 불가했다는군. 이전에 습격했던 기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

"훨씬 더 수상하긴 하군요."

야경꾼 몇몇이 마도공학국의 기술이나 전투 능력에 대해 질문해왔고, 마이닐이 그에 대답했다.

마도공학국은 물론이고 총을 상대로 전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생경한 것은 당연했다.

마이닐이 말했다.

"부대 규모가 전처럼 300 정도라고 가정해볼 수는 있지만, 아마 마왕이 직접 등장하는 실험이니···"

"대학자들이 더 많이 붙겠죠. 역시나 내통자의 말에 따르면 마왕과 관련한 실험에 관여하는 대학자는 두 명이라고 합니다. 대학자 한 명에 학자 네 명에 조수 여덟 정도가 따라 붙죠. "

물론 내가 말하는 내통자는 가이엔 지나였다.

마이닐이 설명했다.

"대학자는 마도공학국 간부를 지칭하는데, 이 간부들은 모두 뛰어난 전투 능력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유용하게 알고 있는 과학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기술에 대해 그때그때 대비해줄 수 있는 건 여기 있는 슈 뿐이다."

처음에는 왕립과학부 소속의 학자들을 이 공격에 참여 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왕립과학부에는 나보다 과학에 대해 더 잘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도, 나보다 잘 싸우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과학기술을 통해서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므로, 조언이 필요한 상황이 꼭 오리라는 법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공격이 아니더라도, 총을 든 사람들을 상대로 단순히 칼과 같은 냉병기만으로 공격을 가할 수는 없어요."

모두가 마검사라면 모를까, 모든 야경꾼이 타고난 싸움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801부대원들과 학자들만이 아니라, 시간이 지체되는만큼 주변 제국군을 상대해야 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마왕을 상대할 가능성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무기가 필요했다.

"제가 냈던 아이디어는 어떻게 됐습니까?"

마이닐이 말했다.

"그 건은··· 여기 이 친구가 말하지."

우리의 시선은 몰로이에게 향했다.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서 쑥스러운지 몰로이는 말을 더듬더듬 열었다.

"마이닐 씨에게 부탁을 받고 이리저리 알아보았습니다. 국경 근처에서 금 밀매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저기 아슬론 씨게 만남을 주선해줬죠. 로닌에서 물건을 받아서 오늘 아침 안전하게 물건을 받았습니다."

마이닐은 몰랐다는 돌아보았다.

"벌써 물건을 받았어?"

"아, 확인해볼까요?"

몰로이는 하인을 부르더니 예의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하인 하나가 커다란 상자를 질질 끌면서 오자 야경꾼들이 그 물건을 함께 들어서 우리 중앙에 가져다 놓았다.

몰로이가 상자를 까더니 그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제가 원형을 몰라서 제대로 왔는지는 모르겠네요."

마이닐은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멀쩡해보이는데, 슈."

예의 물건이 나한테 던져졌다.

나는 가볍게 낚아채서는 조준경을 들여다보고 분해까지 하고 빠르게 재조립했다.

"멀쩡하네요. 휜 곳도 없고."

내가 확인을 끝내자 몰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금만 다루던 친구들이라 상품을 험하게 옮겼을까 걱정했는데. 아무튼 이걸 뭐라고 부른다고요? 그냥 총이라고 부르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기관총이요."

# 124

낯선 손님

기관총의 등장은 지구 전쟁사의 전환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총이 나타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냉병기로 무장한 전투병의 가치가 극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자동장전 되는 소총의 의미가 아닌, 보다 협소한 의미에서의 '기관총'이 등장하면서 화기로 무장한 부대와 냉병기로 무장한 부대 간의 격차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기관총을 장전하고 그것을 격발할 정도의 지능과 체력만 있다면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검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 수 백을 상대할 수 있었다.

기관총의 등장은 대형을 유지하며 진군하는 과거의 전쟁을 끝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긴 해도 정말로 그렇게 될지는 자신이 없었다.

시안에는 마법사도 있고 칼잡이들도 있다.

나처럼 가당찮은 마법사도 주문 한 번으로 여러 사람을 물리칠 수 있고, 나만큼 뛰어나지 않은 마검사도 총알이 발사되는 걸 본 다음 막거나 피할 수 있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이 무기로 정말로 군대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잘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탱크라도 개발 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물론 우리가 보유한 무기가 기관총만은 아니었다.

로닌에서 보급용으로 계획 중인 자동소총이 머릿수만큼 지급될테고 비교적 단순하게 설계된 수류탄도 있었으며, 보다 원거리에서 사격이 가능한 저격용 볼트액션 소총도 있었다.

현대전 병력이라기엔 통신 부분이나 지원 화력에서 모자란 부분이 많았지만, 당장은 시안 최고의 병력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이번 마왕 습격은 성공을 하더라도 뒷탈이 많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국이 아무리 넓다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공지(空地)는 없다. 코엘란 근교에서, 황제 직속 비밀기관이 공격 당한 사실에 대해서 황제가 가만히 있을리는 없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제국과 론 사이에 전쟁이 있을 수 있었고, 그 '최악의 경우'는 시아논 공작과 볼더의 생각에 따르면 꽤 높은 확률로 일어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런 보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익히 알려진대로 황제가 마왕을 언제든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물밑 협상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인 것이 '마왕'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공표 된다면,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제국민들의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성한 제국의 핏줄에서 마왕이 태어났다는 것은 제국민들이 황궁을 뒤흔들만한 사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용사와 마왕 이야기는 시안의 수 많은 전설과 역사에서 등장했고, 권선징악은 동부해안의 사람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이야기였다.

필요하다면 내가 용사라는 허명(虛名)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 야노프의 목이라도 들고 동부해안을 일주라도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하지만 제국은 일을 그런식으로 처리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의 귀족을 많이 상대해본 시아논 공작은 제국의 고귀한 피들은 숨기는 것이 많고, 자신들의 역사에 얽힌 수 많은 비밀을 스스로도 모두 알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제국의 학술원 역사학자인 타밀에 따르면 제국에는 기록되지 않는 역사가 많고, 그런 비밀의 힘으로 제국 그 자체가 지탱되고 있다고도 했다.

'물론 마왕이 죽고나면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야경꾼까지 모두 쓸어버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척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그 경우에는 론 왕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론이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만 아니라면 제국의 스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론 왕국에게 이득이었다.

플로트 백작의 말에 따르면 론은 비밀리에 군비 확장을 지속하고 있었고, 당장은 무리겠지만 근 시일내로 왕립과학부의 신형 무기들을 생산해 공급한다면 제국과도 능히 싸워볼만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부해안에는 제국과 론 왕국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나라들은 이제 기술을 독점하는 제국이 아닌 자신이 알고 있는 기술을 아낌없이 베푸는 론 왕국을 보다 지지했다.

제국은 이런 변화에 대해 아직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지만, 학술원의 정치학자들은 제국이 황제의 뜻에 좌지우지 되며 그 덩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제때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말했다.

변화의 주도권은 이미 론 왕국이 쥐고 있으며, 앞으로의 역사는 론 왕국에 의해서 쓰여질 거라는 론 왕국 대세론도 드문드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 시각은 성급하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론 왕국에서야 써먹기 좋은 선전 문구였다.

아무튼 뒤에 일어날 일은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결국엔 우리··· 아니, 내가 야노프를 잡아야 해.'

'혼자서 너무 무거운 짐을 질 필요는 없어요. 제가 있잖아요.'

'그래.'

'알겠으면 용을 이제 뒤로 옮겨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전혀 관심 없었던 것 같은데?'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용이나 옮겨요. 그대로 있으면 용이 죽는다니까요?'

나는 느닷없이 심술이 났다.

내가 용을 세 칸 앞으로 옮겨버리자 비요른이 외쳤다.

'뭐하는 거예요!'

그래도 로로카프 게임을 고의로 패배시킬 생각은 없었기에, 내 딴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싶었다.

하지만 아슬론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기사로 용을 잡아버렸다.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던 수였다.

'안돼! 다 이긴 게임이었는데! 이건 거짓말이야···.'

'···게임에서 졌다고 그렇게 충격적일 건 없잖아?'

'···.'

'비요른? ···비요른 씨?'

비요른은 다음날까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도공학국 기지에 대한 전력 파악은 쉽게 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우리가 직접 상대해야하는 것인 300명 가량일 거라 판단했지만, 코엘란 근교에 제국군의 파병 부대가 자리 잡으면서 상향 조정해야했다.

파병 부대는 첩보에 따르면 801부대가 아닌 코엘란 주변 지역 주둔군이었다.

아마도 마도공학국의 요구에 따라 코엘란 근교까지 자리를 잡은 듯 싶었다.

나는 마이닐에게 물었다.

"정보가 샌 걸까요?"

"판단하긴 이르지 않나?"

"하지만 샐 구멍이 좀 많아야지 말이죠."

우선 새어나가는 구멍 중에 하나는 나와 연관되어 있었다.

가이엔 지나는 우선은 체르페디오에 들렸다가 코엘란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나야 우리가 마도공학국 기지를 습격해서 마왕을 '유괴하는 작전'으로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속이려고 든다면 유괴하던 도중에 사고로 마왕이 죽었다고도 둘러댈 수 있으므로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문제는 작전일 전까지는 돌아오기로 되어 있던 지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만약··· 만약에 말이죠. 일이 크게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죠."

"말해."

"이게 마도공학국이 지나를 이용해서 만든 거대한 함정이라면요?"

"제국 내부의 야경꾼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말이지? 덩달아 로닌의 요인 인물인 슈도 잡고. 가이엔 지나를 이용해서 역으로 잘못된 정보를 풀고 함정으로 유인한다음 잡는다. ···너무 불안해 하는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곤 마이닐은 책상에 발을 올렸다.

마이닐이 계속 말했다.

"그럴 거라면 이미 우리에게 공격을 해왔겠지. 왜 전날 밤이 다 되도록, 우리가 군사 훈련을 하고 자기들을 들여다보면서 작전을 짤 때까지 기다리냐는 거야. 그리고 다른 야경꾼들도 눈 뜨고 당할 위인들은 아냐. 제국군의 동태에는 전혀 이상이 없어."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그럼 좀더 평범하고 그럴듯한 의심을 해보죠."

나는 정비를 위해 손에 쥐고 있던 기관총을 내려놓았다.

"지나가 잡혔을까요?"

"그럴지도.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놈들은 우리의 인원과 무장을 얕잡아 보고 있겠지. 마왕과 그 관련자들을 다 죽여버릴 게 아니라 얌전히 몰래 빼올 생각을 하고 있겠거니 할테니 말이야. 그럼 이 경우는 최악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마이닐의 말은 대체로 맞았다.

예언가 주얀은 내게 이번 이번 마왕 습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특별한 어떤 사건에 대해 그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도 했다. 주얀이 모든 미래를 보는 것도, 모든 사건을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책에 쓰여진 운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와 다른 이들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존재와의 격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혹시 그렇다면, 이번에 나와 마왕이 다시 만나는 건 이미 확정된 사건일지도 모르겠군.'

내가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몰로이의 저택 현관문이 열리더니 세찬 겨울 바람이 불어닥쳤다.

아슬론이 먼저 들어왔다.

"젠장, 너무 추워!"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흰 눈이 손님들과 함께 실내로 들이쳤다.

나는 아슬론에 이어 들어오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아, 노엘."

그리고 그 뒤로 지나가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온 겁니까?"

노엘은 옷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마차를 같이 타고 왔는데 내린 뒤에야 같은 목적지로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 운명은 재미있지 않나? 지나 양?"

"그렇네요."

"아주 흥미로운 대화였다네."

"제게도 유익했습니다."

"마법을 배운다면, 저기 내가 마법을 가르쳐준적도 없는데 마법을 배웠다고 자칭하는 친구보다 더 나을텐데 말이지."

"부장님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시나요?"

"그럼. 아주 헛바람이 가득 든 친구야."

"그럴줄 알았어요."

나는 두 사람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그새 아주 죽이 잘 맞으시는군요."

"농담이니 마음에 두진 말고. 바쁠테니 바로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됐습니다. 삐친 채로 있을테니 풀리는 사이 스프라도 한 접시 하시죠."

노엘이 하겠다는 '이야기'라는 것은 바로 마왕 야노프와 관련된 신화시대 이야기였다.

일전에 싸운 마도공학국의 대학자 포엠의 말에 따르면 야노프는 제국력 이후의 현세에 나타난 마왕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고, 신화시대에 봉인이 되었다가 20년 전에 다시 나타난 존재였다.

신화시대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 기록들은 아주 한정적으로만 존재했고, 그 이름을 아는 이들 조차 거의 없었다.

노엘이 늦게 온 것은 그것에 대한 조사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이 코 앞에 닥쳤다지만 뒤늦게라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좋을테니까.

노엘이 말했다.

"아닐세. 먼저 말하는 게 좋겠군. 보아하니 다른 친구들은 이미 일과 관련해서 나가 있는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덜 고생하는 게 좋지 않겠나."

"무슨 말입니까?"

"마왕과는 싸우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일세. 모두 철수를 준비하게."

나는 마이닐을 돌아보았다.

"마이닐,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니, 일단은 이야기를 들어보지."

"잠깐. 그 이전에요."

나는 지나와 노엘에게 말했다.

"노엘. 지나에게 마왕과 싸우겠다고 말한 겁니까?"

"아, 그랬지."

"왜요?"

"지나양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걱정할 건 없네. 지나 양도 모두 이해한다고 했으니."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함이 느껴지는 차분함이었다.

내가 말했다.

"···뭐, 좋습니다. 그럼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죠."

옆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아슬란이 말했다.

"그럼 내가 차라도 내올게. 우리집은 아니지만 다들 편히 쉬시죠."

아슬란이 부엌으로 걸어가자 노엘과 지나는 나와 마이닐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내가 먼저 물었다.

"그 마왕이 우리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군. 우리의 전체 전력과 비교하긴 힘드니. 하지만 강대한 마왕의 힘을 일반의 인간들이 모두 당해낼 거라 생각할 순 없어."

옆에서 뚱하게 바라보던 마이닐이 말했다.

"그럼 도전할 가치 조차 없다?"

"아, 그건 아닐세. 대화의 초점이 잘못 잡힌 것 같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자꾸 오해를 하게 만들잖습니까. 확실하게 말해주시죠."

노엘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같이 하찮은 존재들이 어찌 감히 야노프 님에게 칼을 들이미는 반역을 저지를 수 있겠나?"

나는 빠르게 비요른을 빼들었다.

# 125

배반의 밤

찰나의 순간 나는 비요른과 의식을 나누었다.

'진짜 노엘인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짜라 하더라도, 방금의 발언은 너무 위험해요.'

'그럼 죽이겠어.'

나도 알고 있다.

단 한 마디의 말로 그 사람의 의도와 진정성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노엘의 말과 행동이 아니었다.

눈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사특한 마기였다.

주저하며 무슨 일이냐고 설명을 요구할 수도 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노엘은 너무 위험했다.

노엘은 똑똑한 사람이기 전에 마법사였고, 마법사에겐 결코 주문을 부릴 틈을 줘서는 안된다.

잠깐이라도 말이다.

나는 노엘의 지팡이와 노엘의 목을 두 동강냈다.

그 사이 나와 같은 사고 과정을 지났는지 마이닐도 빠르게 가이엔 지나를 제압했다.

나는 왜 지나의 목을 베지 않았냐고 묻지는 않았다.

지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게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사람도 필요했다.

마이닐은 지나의 목에 칼을 대고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야노프께서···"

지나가 그 이름을 호명하자 공간이 가늘게 떨려왔다. 결계에도 불구하고 야노프가 이 저택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닐은 지나의 입을 걷어찼다.

"그 빌어먹을 이름은 말하지 마."

지나는 피칠한 입으로 고개를 들었다.

"···직접 나를 부르셨어요. 저희는 그 분을 도와야 합니다. 구출해드려야 해요."

지나가 미소를 짓자 부러진 앞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마이닐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짚이는 건 있다."

마이닐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부여잡았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 야경꾼 중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용사를 자칭한 인간이 있었지."

"예전에 말한 적 있습니다."

물론 이전 생에서지만.

"그 용사는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오염시켰고, 야경꾼들을 동조하게 만들었다고요. 하지만 그 용사는 사실 마인이자 악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마는 전염된다. 그리고 마인이나··· 마왕 같은 존재라면 다른 사람의 정신을 오염 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니 이야기나 포엠이라는 그 인간의 말에 따르면 그놈은 다른 존재를 조종하는 능력이 있었지."

"가이엔 지나는 마왕과 직접 접촉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 때···"

아마도 마도공학국의 다른 학자들은 그런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 다음에야 야노프와 접촉했을테고.

마이닐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그걸 어떻게 모를 수 있었지?"

비요른이 말했다.

'시우 님 때문이에요.'

'뭐?'

'···아마도 용사는 그런 정신 오염에 저항력이 있을 거예요. 때문에 가이엔 지나와 비밀스럽게 접촉했던 시우 님은 지나의 위험성에 대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죠.'

'그럼 노엘은?'

비요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엘은 저항하지 못한 것이다.

겨우 코엘란의 외곽에서 마차로 이 저택까지 오는 잠깐의 시간 동안 노엘은 오염된 것이다.

'그럼 가이엔 지나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되는 거야?'

'···아마도.'

열흘이 넘는 시간이다.

가이엔 지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이야기했을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나는 가이엔 지나의 손가락을 밟으며 말했다.

"누구에게 이 계획에 대해 말했지?"

"야높··· 크흑!"

나보다 마이닐이 빨랐다.

마이닐은 잘린 지나의 손가락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계속 말해."

지나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입가에 피거품이 물렸다.

지나가 말했다.

"그 분··· 그 분을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에게나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 하는 거야?"

다른 야경꾼들은 괜찮을까?

내 생각엔 괜찮았다. 가이엔 지나는 다른 야경꾼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문제는 지나가 제국의 수도인 체르페디오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지나는 로닌에서 나고 자랐으니 인맥은··· 아냐. 인맥은 의미가 없어.'

말을 잠깐 나누는 것만으로 마왕의 추종자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지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이엔 지나가 야노프를 만나고 와서 대화를 나누었을 때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마왕을 구하고자는 발언은 그저 연민에 이끌린 희망사항이라고만 믿었다.

게다가 서슴없이 야노프라는 이름을 발언하는 것은, 야노프가 몇 번이고 가이엔 지나를 들여다봤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다른 마법사들을 불러올게요."

"마법사? 아, 그래. 결계."

"네. 저택의 결계가 안전한지 확인해야겠어요."

함께 싸우기로 한 마법사는 노엘만이 아니었다.

이미 결전을 앞두고 몇 명의 마법사가 저택에 와 있었다.

"날 찾고 있나?"

나는 2층으로 올라가려다 멈춰섰다.

그곳에 내가 목을 잘랐던 노엘이 그 자리에 있었다.

노엘이 말했다.

"돌아볼 필요는 없다네.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잖나?"

그래도 나는 돌아보았다.

여전히 목이 잘린 노엘은 앉은 자리에 그대로 있다.

노엘은 모든 마법을 다루지만 스스로 환상 마법의 귀재라고 자찬하고는 했다.

내가 다시 2층 복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겉보기에 노엘은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이성도 의지도 있다.

그런데도 지나에게 정신이 오염된 것인가?

혹시 나는 나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희망을 가졌지만 허무하게 스러질 뿐이었다.

노엘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무엇 말인가?"

"마왕을 함께 죽이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생각을 바꿨다네."

"가이엔 지나와 단 몇 분이서 이야기하고서요?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생의 중요한 결단은 찰나의 순간 일어나지. 지나 양의 논리는 충만하다네. 그 논리에 설득 당했지."

"웃기지 마십시오. 결단이요? 당신은 마왕을 죽일지 말지 그런 갈등조차 했던 적이 없어요. 그런데 무엇에 설득을 당한다는 말입니까?"

"타인의 자신의 혼란한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나?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자네는 내가 아니거늘."

"다시 재고해보십시오."

"흐음."

그러면서 노엘은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적어도 그렇게는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지? 뭘 기다리는 거지?'

비요른이 말했다.

'잠깐, 누구 한 명이 없지 않아요?'

나는 부엌을 향해 외쳤다.

"아슬론!"

하지만 내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허망하게도 부엌이 아닌, 노엘이 서 있는 2층의 맞은편 복도에서 들려왔다.

"불렀어?"

아슬론은 막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언제 저곳까지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아슬론의 양손에는 사람의 머리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내가 찾으러 가려고 했던 야경꾼 마법사들이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그렇군. 마부가 수배되지 않아서 직접 마차를 이끌고 배웅 나갔었지."

내가 말했다.

"왜 죽인 겁니까?"

"너희 모두를 죽일 건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말에 노엘이 아슬론에게 말했다.

"허어, 설득을 해보겠다지 않았나?"

"지나를 봐요. 저 둘이 저희를 가만둘 것 같아요? 지나, 괜찮아?"

지나가 마이닐 아래에서 큭큭거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야노프 님에게 이렇게라도 봉사할 수 있다면··· 아니, 이렇게 봉사할 수 있어서 기뻐요."

마이닐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나의 복부를 걷어찼다.

지나가 그대로 의식을 잃은 걸 확인하고 마이닐이 내게 다가왔다.

"마법사가 상대다. 되겠나?"

"해봐야죠."

"···처리하고, 합류하지."

마이닐이 처리하겠다고 한 것은 아슬론이었다.

마이닐은 벽을 박찬 다음 곧장 아슬론의 목으로 칼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아슬론은 능숙하게 머리를 던져 칼을 막아서더니 등에서 소총을 꺼내들었다.

나도 가만히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노엘에게 비요른을 들고 달려들자 노엘은 급하게 지팡이로 비요른을 걷어냈다.

"노엘! 정신을 차려요."

"내 정신은 멀쩡하다네."

역시 마법사는 느리다.

나는 그대로 지팡이를 잘라버리고 더 깊게 칼을 찔러넣었다.

칼끝이 가슴뼈를 부러트리고 질긴 심장 근육을 베어버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두 번째 노엘이 쓰러지자, 세 번째 노엘이 뒷문에서 걸어나왔다.

"역시 유능하군."

"마왕에게 조종 당하고 있다는 자각은 없습니까?"

"조종? 말이 심하군. 이건 내 순수한 자유의지라네."

내가 미처 세 번째 노엘의 목을 따버리기 전에, 노엘이 먼저 바닥에 손을 올렸다.

눈이 깜짝하는 사이에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바닥이 폭발했다.

단순한 폭발 마법은 아니었다.

비산하는 나무 파편들은 잘게 쪼개지며 명백하게 날 향해 날아왔다..

'그래도 느려.'

청월로 공간을 점하자 푸른 빛과 함께 날아오던 파편 태반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세 번째 노엘의 머리 반쪽도 함께였다.

'다음은 어디지?'

내가 다른 문들을 경계하면서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았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두 번째 노엘이었다.

그리고 분명 죽어있는 것이 맞았다.

'···사령술?'

그리고 '허공에서' 네 번째 노엘이 걸어나왔다.

노엘은 그냥 허공에 서 있었다.

두 번째 노엘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목 위로 턱만 남은 세 번째 노엘이 내게 달려들었다.

네 번째 노엘이 말했다.

"'아인저의 가시'라는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나? 아니지, 인정을 생각하니 모르는 채로 죽는 게 좋을 거 같군."

그러더니 네 번째 노엘의 손에 검은색 끈으로 서로 꼬인 거대한 창이 생겨났다.

노엘은 그대로 자신의 다른 시체들과 나를 꿰뚫었다.

하지만 세 번째 노엘의 몸이 꿰뚫리는 순간, 나는 늘 허리춤에 차고다니던 분쇄자에 겨우 손을 넣을 수 있었다.

창 끝이 내 몸에 닿기 직전 나는 분쇄자로 그것을 막았다.

아인저의 가시에 찔린 세 번째 노엘은 조금씩 굳어가더니,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

창을 회수하고 허공으로 뒷걸음질 친 노엘이 말했다.

"···분쇄자라. 까다롭군."

"늘 생각하던거지만 당신은 말이 너무 많아."

"그럼 이건 어떤가?"

나는 노엘이 뭔가를 보여주기 전에 죽일 작정으로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노엘은 가볍게 부유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쇠사슬들이 쏟아지더니 그 가운대 창백한 피부를 가진 거인이 공간을 꿰뚫으며 떨어져내렸다.

오로지 뼈 위로 가죽만이 달라붙은 기괴한 거인은 눈과 입과 귀가 봉해져있고 팔과 다리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천천히 몸을 숙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라시."

노엘이 계약하고 있다고 말했던 이계의 괴물이었다.

본래의 소환 마법이란 이렇게 이계의 존재와 계약을 통해 그 생물을 소환해 부리는 것을 칭했다. 그에 비하면 내가 부리는 소환술은 하찮은 것이다.

노엘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알고 있나? 아, 그렇지. 과거의 삶에서 내 사역마를 본적이 있다고 했던가? 상대하는 방법도 가르쳐 줬는지 모르겠군. 부디 알고 있길 바라네."

사라시의 입을 막고 있던 봉인이 떨어져 내렸다.

# 126

사라시

사라시의 입마개가 떨어진 자리에는 있어야 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다만 그 입은 너무 컸다.

신장이 5미터에 이르는 사라시의 몸이 날 집어삼키기 위해서 기울었다.

나는 뒤로 돌면서 2층 복도로 뛰어 올랐다.

사라시는 온 몸이 묶인 그대로 내가 있던 바닥에 입을 처 박았고,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아무리 강하다고해도 저렇게 꽁꽁 묶여 있다면야···'

물론 내 착각이었다.

사라시는 자신이 나를 잡아먹지 못했다는 걸 바로 간파하고는 고개를 다시 내게 향했다.

그리고 한 번의 도움닫기도 없이 묶인 두 다리를 그대로 박차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빠르다.'

피해내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사라시는 그 육중한 신체로 2층 복도를 그대로 무너트렸다.

신체가 제한되어 있는데다 여러 감각이 봉인되어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빨랐다. 중간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비요른이 말했다.

'아니에요.'

'뭐가?'

'그냥 빠른 게 아니에요. 중간에 행동과 이동을 생략해버렸다고요.'

'공간이동을 한다는 거야?'

그리고 마치 정답이라는 듯 사라시의 거대한 발이 내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굴러 피해냈지만 저택의 파손된 잔해들이 먼지 구름을 이루고 모닥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노엘은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듯 구경하며 말했다.

"입을 푼 것만으로는 역시 안되나보군."

"더 푸시죠. 저 빌어먹을 놈의 봉인이 모두 풀리면 노엘 당신을 잡아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걸 기대하고 있나?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걸세. 손과 발만 풀려도 대적할 이들이 없을테니 말이야."

비요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했다.

'왜 자극한 거예요?'

'열 받잖아!'

노엘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사라시의 손과 발이 풀려났다.

사라시는 멍하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유효한 타격을 넣어야했다.

'제발!'

하지만 움직임이 빠른 것과, 움직임을 생략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빠르다고해도, 그 과정이 생략되는 것 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사라시의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손등이 내 가슴을 쳐냈다.

나는 2층 바닥을 뚫고 올라가 3층 천장에 처박은 다음 바닥에 떨어졌다.

총성과 함께 고개를 돌리니 마이닐이 아슬론의 머리 위로 칼을 내리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슬론이 그대로 절명하자 마이닐은 나를 돌아봤다.

"뭐야? 괜찮냐?"

나는 입 안에 가득찬 피를 뱉어내고 말했다.

다 쉰 목소리가 나왔다.

"아뇨."

마이닐은 아슬론의 머리통에서 자신의 칼을 뽑아냈다.

"기분 더럽군. 아래는 무슨 일이야?"

"노엘이 자신이 계약한 이계의 거인을 소환했어요."

"거인?"

"특징은···"

순간 나와 마이닐의 허공에서 사라시의 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서로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옆에도 바로 그 손이 튀어나온다는 걸 알았다.

마이닐과 내가 각각 서로의 옆에 있는 사라시의 손에다 칼을 찔러넣었다.

'얕다. 칼이 들어가질 않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놀란 것인지 손은 곧장 사라졌다.

'무적은 아니야. 감각은 예민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이상 완벽하진 않아.'

마이닐이 말했다.

"우리만으로는 안된다. 누군가는 나가서 알려야해.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면 저 가이엔 지나가 무슨 일을 벌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계획을 끝내고 나서 이곳으로 돌아온 거라고 생각된다."

"그럼 제가 남죠."

"···그래. 다른 야경꾼들을 찾아서 데려오지."

마이닐이 창문을 열려고 돌아섰다.

그때 창문을 열고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또 다시 노엘이었다.

"허어, 내가 그냥 보고만 있었을 것 같나? 저 속박된 사라시는 그냥 여흥일 뿐이야. 적어도 눈이 봉인되어 있는 동안은···"

마이닐은 노엘을 그대로 창 밖으로 걷어찼다.

하지만 노엘은 방 안의 다른 창문으로 튕겨지듯 들어왔다.

노엘이 말했다.

"거칠구만."

나와 마이닐이 창 밖을 바라봤다.

원래라면 코엘란의 도시 전경에 눈에 들어와야 겠지만, 이상하게도 방 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간을 구부린거지. 말했던 것처럼 나는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네. 이미 주문을 그리고 있었지. 그 누구도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네."

그 말과 함께 2층 나무 바닥이 솟아오르더니 사라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은 천천히 기어오르더니 그리 넓지도 않은 2층 방안을 몸을 웅크리면서까지 가득 채웠다.

나와 마이닐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말했다.

"목적이 뭡니까?"

"야노프께서 우리의 예속된 운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로 약속하셨다네. 오··· 아직도 지금도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는군··· 마도를 걸으며 단 한 번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 충만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말했다.

"노엘. 그 마왕의 존재가 사악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존재는 신화시대부터 있었고, 집행관 콘츠와 같은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 알기 위해서 뒤늦게 합류했던 것 아닙니까?"

"그랬지. 하지만 나는 새 지식을 얻었다네."

"그 지식이 뭡니까?"

"모든 존재가 생득적으로 존속된 운명에 관해 말이야. 야노프 님과 직접 대면해 지식을 얻은 지나 양은 그에 대해 아주 해박하더군. 야노프 님을 구해내는 일은 곧 우리 스스로를 구하는 일일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칼을 거두고 야노프를 받아들이게."

"돌겠군."

얼핏봐서는 대화가 이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론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노엘이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조차 착각일지도 몰랐다.

나는 마이닐과 눈길을 나누었다.

마이닐은 아슬론에게서 빼앗은 소총을 다른 손에 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시는 가죽과 뼈가 단단한 괴물이다.

마검사가 휘두르는 검 보다 총이 더 낫다고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라시와는 별개로 진짜 죽여야하는 것은 노엘이다.

아무리 내가 마법을 배웠다지만 노엘이 사용하는 마법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배우지도 못할 마법을 구태여 언급할 필요는 없긴 하겠지만···'

내가 마법의 견식이 부족한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최후의 수단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나는 마경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하는지 아직 감을 잡지 못했다.

비요른이 말했다.

'···최대한 청기(靑氣)를 이용해요.'

'청기? 왜?'

청기는 참마검이나 청월과 같은 검법에서 자연스럽게 빚어나오는 힘이다. 마(魔)와는 상극의 힘으로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어서, 청은 마를 극렬하게 태우고 밀어낸다.

비요른이 말했다.

'시우 님이 알고 있는 두 검법은 모두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서 고안된 거예요. 원래는 더 오래된 검법에서 유례되지만 사용하는 그 힘은 원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죠.'

'하지만 아까도 철월로 볼더의 머리를 갈랐어. 별로 타격은 없어보이는데.'

'저도 저런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분명 유효한 타격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청기는 특히 거짓과 진실이 혼재되어 있는 혼돈 속에서 더 힘을 발휘하죠. 진실이 묻혀서 보이지 않을수록 그 힘은 강력해져요. 마계 안에서 그 힘이 더 폭발적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뭐 그럴 수 있다면야 그렇게 하겠지만···.'

하지만 좀처럼 틈이 나지 않았다.

노엘은 계속해서 나와 마이닐이 자신에게 설득 되도록 가당찮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네. 자네들이라면 분명 야노프께서 사랑해마지 않을 것이야. 나는 자네들을 믿는다네. 나는 이것이야말로 야경꾼의 오랜 의지와 빛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

사라시는 우리가 조금의 수상한 행동이라도 하지 않는지 석상처럼 멈춰서서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방법이 없나? 뭔가··· 조금의 틈만 난다면···'

한 순간 굉음이 터졌다.

나와 마이닐은 물론이고 노엘까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나는 단번에 이 폭발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폭약이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쇠갑으로 만들어진 분쇄자의 틈으로 내 마법 문신의 희미한 빛이 흩어져 나왔다.

그리고 거대한 테트라포드가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총을 곧장 들어올리는 마이닐을 껴안고 테트라포드가 떨어져내리는 범위 밖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 사라시가 자신의 주인인 노엘을 위해 손을 번쩍 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라시가 중력가속도가 더해진 수 십톤의 무게를 지탱한다고 하더라도 저택의 바닥은 그렇지 못했다.

저택 한 가운데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부서진 외벽 밖으로 코엘란의 시가지가 보였다.

마이닐이 솟아오르는 먼지더미에서 입을 가리고 말했다.

"마법이 깨졌군!"

우리는 노엘과 사라시가 죽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그대로 저택 밖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몸을 굴리면서 일어나니 저택의 주인인 몰로이가 무장을 한 상태로 서 있었다.

몰로이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나는 몰로이 뒤에서 총을 든 채 대기하고 있는 다른 야경꾼들을 보았다.

"여러분이 저택을 공격한 겁니까?"

몰로이가 말했다.

"네. 들어가는 모든 문이 열리지 않아서요. 어떤 분이 마법 때문이라고 했고 어쩌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래서 마법을 깨트리기 위해서 화약을 썼습니다.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습격을 받은 건 맞는데, 다 모인 거죠?"

뒤에 있던 마이닐이 말했다.

"여기서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 코엘란에도 경비대 정도는 있어. 빨리 움직여야 해."

경비대야 쉽게 물리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발목을 잡을 건 틀림 없었다.

그 말에 야경꾼들은 술렁거렸다.

그야 난데없이 저택이 무너지고 도망쳐야 한다고 말을 하니까.

하지만 특별히 나서서 반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몰로이가 말했다.

"그럼 코엘란 외각으로 빠져나가죠. 어디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일정을 앞당겨서 곧장 마도공학국 기지를 공격하는 게 좋을 거 같군."

"그럼 미리 봐둔 별장으로 이동하죠.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이미 무너진 저택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경꾼들은 뒷골목의 담장 안으로 사람들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저택을 구경하는 인파에 뒤섞이지 않도록 숨었다.

몰로이는 야경꾼들을 빠르게 인솔해서 조를 나누고 따로따로 이동을 명령했다.

몰로이가 아슬론을 찾자 나는 모른 척 했다.

경비대원들이 하나씩 저택 주변으로 다가오자 나는 마이닐에게 말했다.

"노엘이 죽었는지 확인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죽지 않았으면?"

"그럼 최후까지 승부를 봐야죠."

"아직 우리 마법사들이 남아있어. 마법사들이 노엘의 마법을 부수기 전에 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게다가 필요한 물자는 이미 다 옮겼다."

"···으, 사실 노엘이 죽지 않았다면 물리칠 다른 방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너도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지금 그와 다시 마주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가 잠깐 발을 빼고 있는 거라면, 그의 물건 중에 그를 물리칠 방도가 있는 물건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책 입니다."

마이닐은 뭐라고 하려다말고 가까이 지나가는 경비대를 피해 두건을 뒤집어썼다.

"젠장할. 알아서 해. 나는 일단 먼저 올라가겠어. 니가 오지 않더라도 작전은 그대로 시행할거야."

"그러시죠. 부디."

나도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다시 저택으로 향했다.

인파가 많이 모여 있었고, 나는 그 사이를 뚫고 저택의 마굿간 앞으로 향했다.

'분명 있을 거야.'

'뭘 찾는 거죠?'

나는 비요른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마차로 향했다.

다행히 노엘은 없었다.

말들은 불 때문에 울고 있었다.

나는 그 가여운 동물의 울음을 들으며 그 앞에 서 있는 마차에서 나는 그 물건을 찾아냈다.

'푸른 궁전의 책.'

# 127

밤길

책을 들고 코엘란을 빠져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몰로이의 저택이 불타고 무너지는 사건은 코엘란 도시 내부에서는 작은 소요에 불과했다.

며칠전 코엘란 가까이 주둔한 지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끝내 도시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이닐에게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간다면서요? 왜 여기있어요?"

"생각이 바뀌었다."

"그러시겠죠."

마이닐은 민망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너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바로 너잖아?"

"아까는 알아서 하라시더니."

"생각이 바뀌었다니까."

"아무튼, 알겠습니다. 아무튼 더 자세히 들어보죠. 도시 곳곳에서 마차며 수레며 징발하는 걸 봤습니다. 그거랑 관계 있는 겁니까?"

나와 마이닐은 밤길을 따라 걸었다.

눈이 세차게 내리긴 하지만 눈들이 침엽수 위로 쌓이면서 오히려 숲길이 더 걷기에 좋았다. 시간이 지나면 발목이 푹푹 박히겠지만 아직까지는 아니었다.

노엘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소환해낸 그 거대한 돌덩이에 깔려죽었다면 좋겠지만 몇 번이나 칼에 맞아 죽고나서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등장한 것을 생각하면 장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가방 안의 노엘의 '푸른 궁전의 책'을 다시금 확인했다.

푸른 궁전이라 불리는 세계가 있고, 푸른 궁전의 책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과거에 노엘이 마법에 실패하고 조난당해 죽었을 때, 나는 노엘의 마도구를 탐내다 그 책을 건드렸고, 당시에 함께 있던 헤네시와 함께 그 궁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책 안에는 또 다른 노엘이 존재했다.

노엘 자기 자신을 복사해서 그 세계 안에 붙여넣은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노엘의 책과 접촉하진 않았지.'

노엘은 정기적으로 푸른 궁전의 세계 속의 자신과 정기적으로 소통했다. 다만 직접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이-아이니 마탑에 있는 조수들이나 다른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서신을 쥐어주고 그것을 건네주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후 노엘과 가깝게 지내고 그의 마법을 배우기도 했지만 푸른 궁전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일은 없었다.

기억에 따르면 흥미로운 곳이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노엘은 그곳에서 자신의 야경꾼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같이 일을 하는 마당에 흥미 본위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뺏기는 곤란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안의 노엘은 정신이 오염된 노엘과 접촉하지 않았을 거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할뿐더러 노엘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테니까.

코엘란의 외각에 있는 비행선 선착장에서 코엘란으로 들어오는 눈길 위의 마차 안에 있었던 것은 지나, 노엘, 그리고 아슬론 뿐이었다.

그리고 잘 설득한다면 푸른 궁전의 노엘은 우리를 도와줄 것이고, 도와준다면 정신이 오염된 노엘에 대해서 만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법사의 마법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은 마법사 자기 자신이니까.

마이닐이 말했다.

"듣자하니 코엘란 지방군이라더군. 원래라면 코엘란 주변 강과 호수를 경비하는 것이 주 임무인데, 이상하게도 군 내에 별 다른 움직임도 없이 코엘란시(市) 주변으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4일 전이다. 명목상의 이유는 훈련인데 누가 봐도 그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지. 야경꾼들도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전혀 알 수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징발을 한다는 건 전쟁 준비를 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는 제국의 국경 안인데 도대체 누구랑 싸운단 말이죠?"

"정답은 내전이지. 하지만 제국군 상부에서는 아마도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잠자코 있다는 게 중론인데··· 군대가 옆에 주둔하고 있으니 코엘란 영주만 잔뜩 화가 차올라 있다더군. 아무튼 여기까지는 실속이 없는 내용이라 지금까지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전 몰로이 녀석이 데려온 다른 야경꾼 몇 명과 이야기를 하면서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하더군."

"뭡니까?"

"코엘란 지방군의 장교 몇 명이 연수를 위해 체르페디오에 다녀왔다는군."

"하, 설마요."

나는 마이닐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알아차렸다.

그 시기는 가이엔 지나가 체르페디오에 있던 시기와 겹친다.

그들이 지나에 의해 정신이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나가 체르페디오에 있던 시기와 코엘란 지방군의 장교 몇 명이 있었다고한들, 그들이 접촉했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체르페디오는 시안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고, 인간의 세계라고 볼 수 있는 동부해안으로 제한하자면 그보다 큰 도시는 없다.

지나가 군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을까?

아무리 지나가 적극적으로 그들과 만나고자 하더라도 지방군 장교들이 관심이 없다면 지나가 말을 붙일 기회 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가이엔 지나는 피부색이 더 옅은데다 머리칼도 갈색인 외국인이다.

마이닐이 말했다.

"아주 말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요?"

"정신 오염이 지나에게만 있는 한정적인 능력이 아니라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체르페디오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정신오염 되었을 거라고 말하시는 건 아니겠죠?"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라면 어떤가?"

"···가능성은 올라가겠지요. 하지만 보셨지 않습니까? 노엘이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고 허황된데다 논리가 없습니다. 말 자체가 지리멸렬하다고요. 그런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조할리가···"

"아니다."

마이닐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농담입니까?"

"아니.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도 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알아. 하지만 흔들렸다. 니가 바로 옆에 있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받아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아마··· 그런 종류의 힘인 것이겠지. 용사만이 영향을 받지 않는 힘 말이다."

"···."

"상대가 어느 정도의 존재인 건지 감이 잡히나?"

나는 잠깐 멈춰섰다.

그리고 심장의 두근거림이 조금은 잦아지길 기다렸다.

비요른이 말했다.

'악은 풀려나면 한 없이 커지는 법이죠. 시우 님, 선대의 모든 용사들이 이미 걸어왔어요.'

'무섭지 않아?'

'무섭죠. 마왕 중에 얕잡아볼만한 존재는 없어요. 하지만 모두가 두려워 등을 보일 때, 맞서야 하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법이죠. 그게 꼭 시우 님이어야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 받은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다고?'

'네. 저는 그렇게 믿어요.'

마이닐이 말했다.

"괜찮나?"

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계속 가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서, 그 지방군이 결국 누구와 싸운다는 겁니까?"

마이닐이 다시 걸어가면서 답했다.

"몰로이가 급히 와서 자기 저택 문을 폭탄으로 터트려서라도 서둘러 우리에게 알려줘야할 정보였지. 어디겠나?"

"마도공학국이군요."

"그래. 놈들이 이미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이미 관측된 사실이다. 그 중간의 과정은 그냥 내가 추리를 한 것이고."

"좀 끔찍한 상상이긴 하지만요."

"···그렇지. 물론 내 예측이 꼭 맞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도 그 정도로 오염이 되었다면 아마도 체르페디오에서 엄청난 소식이 이미 들려왔어야겠지."

"그저 때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자고."

코엘란의 마도공학국 기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귀족 별장은 이미 야경꾼들이 완전히 받아넘긴 것 같았다.

몇몇 야경꾼이 우리를 알아보고 그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잠깐이라고해도 우리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와 마이닐은 야경꾼들의 행동과 모습을 신중하게 바라보았다.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문제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별장의 마법적 경계를 보다 철저하게 하길 부탁하면서 우리는 몰로이에게 갔다.

우리가 저택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다 하자 몰로이가 말했다.

"···다른 분들에게 어디까지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네요. 우선 마법사들을 시켜 이곳의 결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마왕의 정신 오염과 관련해서도 확실하게 알려주어야겠군요."

"구태여 뺀다면··· 아슬론 이야기는 빼죠.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아슬론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아마 사기에 영향을 줄겁니다."

"알겠습니다."

아슬론은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었고 성격이 원만해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금새 분위기가 무거워졌기 때문에 내가 다시 말했다.

"아무튼 마왕을 지키려는 마도공학국과 마왕을 데려가려는 코엘란 지방군 사이에서 마왕을 죽여야하는 저희가 있군요. 이 별장 위치는 위험하지는 않습니까?"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에는 이곳에 별장 주인이 있는 걸로 아는데. 뒤탈이 없지는 않을텐데···."

그 말에 몰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경꾼은 정의를 위한다지만, 내 생각에도 그리 정의로운 인간들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냉혹하게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기도 했고, 가끔은 의로운 행동을 하지만 그냥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야경꾼 그 자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작은 별장이 작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싹다 죽이진 않더라도 지하실에 가둬놓을 수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몰로이가 말했다.

"역시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제가 샀습니다."

"···아."

"할 수 있다면 그냥 돈으로 해결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죠."

물질만능주의라고 할만하지만 몰로이가 말하니 그리 부정적인 생각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마이닐이 말했다.

"지방군이 움직이고 있다지만 워낙 덩치가 크니까 시간이 걸릴거다. 그렇지만 내일을 넘기진 않을테고. 날씨가 풀리고 해가 떠 있을 때 공격하는 쪽이 더 편하니 아마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가장 그럴듯한 시간대로군."

"모인 지방군은 그 수가 얼마나 됩니까?"

"2천 정도."

"너무 많은데요."

옆에서 몰로이가 말했다.

"제국 곳곳에서 수상한 눈길로 보이지 않도록 소수의 장교들이 어떻게든 모을 수 있는 숫자인 것 같습니다."

마이닐이 말했다.

"어렵긴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승산은 있다고 본다."

"말씀하시죠."

"삼파전이다. 게다가 두 쪽 다 우리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신경쓰고 있진 않아. 마도공학국이야 우리가 공격해올지 어떨지 정확히 모르는 시점일테고, 지방군이 우리의 예측대로 마왕에 의에 정신이 오염되어 있는 놈들이라면 지나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칠 수도 있었다."

"지나가 야경꾼들을 정신오염 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한 거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리고 두 쪽 다 숫자가 너무 많아. 마도공학국이 기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공성전을 시작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 주변 일대는 난전이 될 거다. 그리고 우리 목표는 간단하고 단순하지. 오히려 우리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필요한 목표만을 위해서 움직이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냐는 것이지."

몰로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를 조금 나눠 볼 필요가 있겠군요. 다른 야경꾼들을 불러와야겠습니다."

"그럼 저도 잠시 일어나보죠. 작전 전에 가봐야 할 곳이 있군요."

미리 언질을 주었던 마이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해결책을 알아오길 바라지."

나는 푸른 궁전의 책을 손에 들고 별장의 외딴방으로 향했다.

# 128

여명

책 속의 세상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고, 주황색 구름들이 빛을 내며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위치는 조금 달랐다.

일전에 나는 궁전의 외곽 성벽에 서 있었지만 이번에는 성 안에 들어 와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가늠되지 않았지만 성 내부의 복도인 것 같았고, 층수는 1층인지 창 밖으로 정원이 곧장 보였다.

푸른 궁전을 지키는 수정 골렘 하나가 정원을 지나가며 둔중한 발소리를 냈지만 성 안에 있는 내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비요른이 말했다.

'궁전이 들어 있는 책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적은 있죠.'

'별로 관심은 없었나 봐.'

'마도구라고해서 항상 쓸모 있는 건 아니지만요. 이 궁전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노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푸른 궁전은 하나의 던전이었다.

열 개의 층수로 나뉘어져 있고, 각 층은 험난한 모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층을 격파한 이에게 엄청난 보물과 힘을 준다고 한다.

물론 그게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는 법이다.

비요른의 말대로 강대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고 해서 항상 쓸모 있는 물건을 만드는 건 아니니까.

노엘은 이 세계가 8천년 전, 그러니까 신화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했지만 그것도 얼마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 물건은 소수의 마법사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개중에 야경꾼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노엘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이 탑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탑을 오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모양이었고. 평생을 걸려 이 탑을 오르는 마법사들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이-아이니의 계층 주인인 노엘 다임은 꾀를 내었다.

자기 자신을 복사해서 이 탑을 오르도록하고, 시안의 본래 자신은 자기 자신의 삶을 따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선은 노엘을 찾아야겠군.'

다른 마법사들도 있겠지만 그때도 본적이 없다.

노엘은 이따금 외부와 소통을 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자신의 손님을 찾기 위해 궁전 밖으로 나온다고 알고 있었다.

복도는 길지 않았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궁전의 1층 홀까지 오자, 홀 가운데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는 거대한 입방체가 떠있었다. 궁전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으로 궁전을 관리하는 의사의지(擬似意志)였다.

그리고 뜻 밖에도 노엘이 바로 거기 서 있었다.

코엘란의 저택에서의 싸움 때문에 순간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노엘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자, 노엘이 고개를 들었다.

"내 책을 통해서 들어왔군."

"그걸 알 수 있습니까?"

"하지만 내 허락은 받지 않았어. 나는 늘 징표를 건네주니까 말이야. 그렇다고해서 낯선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긴건가?"

"네. 그래서 급히 왔습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소개하자면···"

"아니지, 괜찮다면 내가 맞춰보지."

"당신 신변에 문제가 있다니까요."

"내가 작은 수수께끼 풀이를 풀만한 시간도 없나? 여기는 지루하다고. 마법사들은 모두 쫌생이라네."

시간이 여유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노엘이 하고 싶은대로 두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노엘이 말했다.

"음, 일단 마검사로군. 하지만 밖에 있는 내가 만나고 소통하는 마검사는 어림 잡아도 스물은 넘어. 마검사로서의 역량이 적어보이지는 않는군.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그 품 속에 있는 건 야경꾼 인장인가?"

"아, 이게 보입니까?"

나는 품에서 야경꾼을 증명하는 인장을 꺼냈다.

노엘이 손을 저었다.

"아니 보여줄 필요는 없어. 보면 바로 알테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주자면, 냄새가 났다네."

"냄새."

"마법적인 감지 능력 중에 하나야. 5층에서는 필수적이라서··· 아니 그건 됐고. 보자. 그럼 야경꾼이니 절반은 줄었군. 그럼 나이는 이십 대 초반, 남자··· 다시 절반이 줄고. 알겠군. 자네는 용사 슈인가?"

"맞습니다."

"뭐, 밖에 있는 내가 자네와 큰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그곳은 시안이고 이곳은 푸른 궁전이라네. 엄밀히 따지자면 서로 다른 세계지. 뭣보다 밖의 나는 자네와 꽤 친할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안에 있는 나는 자네와 처음 만나는 것이고. 내 허락 없이 내 책을 통해 들어오는 건 여간 큰 일이 아니고서는 안 될 일이야."

"다 듣고나면 그 정도의 일이야 충분히 용서해주실 겁니다."

"···말해보게."

나는 몰로이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노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자신의 강력한 마법과 힘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숨길 필요조차 느낀적 없겠지.

하지만 지금의 노엘은 더 없이 침통한 얼굴이었다.

"밖에 있는 나는 고생이 많군. 듣자하니 자네의 이전의 생에선 숲 속을 헤매다 굶어죽었다고 했던가?"

"준비되지 않은 마법사란 어쩔 수 없죠."

"···그렇지. 아무튼 자네가 설명한 마법들은 지금의 나도 모두 알고 있는 마법이야. 특히나 모두 다 내가 애용하는 마법이라서 도저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군. 그건 더이상 나라고 할 수 없어. 죽어 마땅한 존재야."

"그럼 밖에 있는 노엘이 죽었을까요?"

안에 있는 노엘이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방식으로는 죽지 않아. 하지만 싸움을 한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무리를 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잠시 힘을 가다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어."

"그 마법을 쓰는 노엘을 상대하는 방법이 뭡니까?"

"거의 없어."

"그건 좀 곤란한데요."

노엘이 잠깐 고민한 뒤 말했다.

"'뮤다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마법이야. 근본적으로는 밖에 있던 내가 푸른 궁전 안으로 나를 복사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네.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어딘가로 자신을 복사해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있는 세계에 불어넣는 것이지."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복사한 자신이 같은 세계에 있으면 둘 다 소멸해버린다고 들었는데요."

"그게 핵심이야.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겹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그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아주아주 예리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하지. 인간의 인지 능력 이상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이런 마법은 부차적인 마법을 필요로하지. 마법사 대결에서는 주 마법과 부 마법의 정체를 밝히고 세밀하게 부 마법부터 공략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런 고난도 마법 전투를 자네에게 기대하기는 어렵겠군."

"다른 야경꾼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데려올까요?"

"이름을 불러보게."

내가 이름을 부르자 노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택도 없지. 그것 말고도 고대 마법 몇 가지도 사용한다네. 공간의 틈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이나 존재하지 않을 때도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실존과 관련된 주문이 필요해. 이미 알고 있지 않다면 시간이 많지 않은 지금에 와서 배우기 시작할 수는 없어. 그리고 그 친구들은 모두 그 주문들에 대해서 모르지."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겠죠. 그냥 칼로 찔러죽이면요? 몇 번을 죽여야 죽는 겁니까?"

나는 비요른이 했던 말이 기억나 물었다.

노엘이 말했다.

"이후에 자네에게 그럴 기회가 있다면 아마··· 잘 모르겠군. 밖에 있는 내가 컨디션이 좋고 마법의 논리와 계산을 다루는데 감각이 나쁘지 않다면··· 끝을 보기 힘들거야. 나는 그 마법에 노련하거든."

"청기(靑氣)라면 어떻습니까?"

"청기라. 칼잡이의 방법 중엔 가장 상책이겠지만 앞으로 자네 검을 맞아줄지 모르겠군. 보아하니 저택 안에서는 어떻게든 자네와 마이닐을 설득하려고 가까이 접근한 것 같은데, 자네의 공격을 받고서 경계심이 강해진데다 이제는 생각도 조금 바뀌었을 것 같군."

하긴, 노엘은 허공을 그냥 걸어다녔다.

마왕 야노프를 상대하기 위해서 마도구는 물론 마법에 필요한 온갖 재료를 가방 가득 담아 왔을테니 내가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있지 않은 이상 외부에서 노엘과 같은 마법사를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노엘이라면 자기 자신을 상대하는 방법을 가장 완벽하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노엘 자신이 강해서 난항인 것이다.

"게다가 내가 알고 있는 마법은 그것만이 아니야. 내 주문들은 전마사 같은 이들에 비하면 파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적들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크게 모자라진 않다네. 마법사들은 언제나 자신의 마도구와 지식을 탐내는 다른 이들을 견제해야하니까말이지."

"어렵군요."

노엘은 꽤 오래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긴한데···"

"그게 뭡니까?"

노엘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괜찮겠습니까?"

"문제 없으니 밖에 있는 노엘을 만난다면, 야경꾼 친구 하나를 이쪽으로 보내게. 그럼 내가 그걸 신호로 알고 조취를 취하도록하지."

"···알겠습니다."

분위기가 잠시 무거워진 것을 느꼈는지 노엘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자네 여기 들어와본적 있나?"

"이번 생에는 없죠. 뭔가 문제 있습니까?"

"아니. 첫 외부자는 저기 정원 너머의 궁전 외곽 성벽에서 등장한단 말이지. 궁전 내부에서 나타나는 건 처음이라 신경이 쓰였다네. 어차피 내 책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은 내가 감지해낼 수 있으니 자네를 만나러 갔을테지만."

"차후에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래. 차후에 말이지. ···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공간에 대해 소개해주고 싶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또 보도록하지."

나는 푸른 궁전의 의지에게 다가갔다.

<왕좌에 도전할 것인가?>

"밖으로 나가겠어."

<알겠다.>

푸른 궁전의 세계와 시안의 흐름은 시간이 거의 같은듯 했다.

내가 방에서 나오자 야경꾼들이 서로 모여서 회의를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성과는 있었나?"

"네. 아마 노엘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대신 몰로이가 좀 필요할 것 같지만."

몰로이는 자기가 느닷없이 호명된 것에 놀랐는지 물어보았다.

"네? 저요?"

"네."

몰로이는 성격도 좋고 카리스마도 있고 머리도 똑똑한데다 돈까지 많았지만, 전투원은 아니었다.

싸움 기술이 없는 건 물론이고 체력도 나쁘다.

물론 총을 쥐어주면 어린아이라도 군인을 상대할 수 있지만, 구태여 인원을 빼야한다면 최약체를 빼야하는 법이다.

나는 몰로이에게 대강 상황을 설명하고 푸른 궁전의 책을 넘겼다.

"노엘이 나타났을 때나, 제가 신호를 보내면 책을 펼치세요"

"그 정도면 됩니까?"

"그 전에 죽지도 많고 책을 빼앗기지도 마시고요

몰로이는 부여받은 임무가 부담스러운지 침을 삼켰다.

"예.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회의는 잘 되고 있어요?"

"저희의 새 무기가 얼마나 먹힐지, 그리고 마도공학국의 숨겨둔 저력이 얼마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야경꾼들 가운데, 탁자 위의 지도를 가리키며 마이닐이 말했다.

"슈도 왔으니 다시 정리해보도록하지. 제국군 장교들이 정신이 오염된 상태 그대로라도 제국군 교리를 사용하지 않을 것 같진 않아. 아무리 우리가 건재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자신들에게 익숙하면서 자신들이 아는 한 가장 합리적인 공격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마이닐이 말했다.

"놈들은 선형진으로 진군할 거야. 코엘란은 손대포병이 제법 많고 따라서 그에 걸맞는 전략으로 마도공학국 기지를 공격하겠지. 처음에는 사태를 관망한다."

내가 물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노리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아무리 마도공학국 기지의 전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정규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코엘란 지방군의 승리로 생각하는거군요."

"그래. 제국군 부대가 마도공학국 기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시작해서 내부에서 난전이 일어나면, 그때 우리는 승부를 볼 거야. 여기 기지 뒤에 있는 산을 넘어 외각 벽을 폭발 시키고 새 무기로 무장한 우리가 급습한다. 그리고 정예 소수가 마왕에게 접근하고 나머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새 무기를 동원해 시간을 번다. 일이 끝나면 갔던 길을 그대로 돌아나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건 지금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네요. 다만 그 계획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의 상황입니다. 코엘란 지방군이 마도공학국 기지를 성공적으로 공략해내고, 그 사이 노엘을 다시 등장하지 않거나 무리없이 처리하고, 마왕이 각성하지 않는다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지 않을때죠."

"그래. 우리가 한창 그 이야기 중이었지. 깔끔한 계획으로 다듬기에는 그 사이사이 변수가 너무 많아. 슈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말에 야경꾼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내가 말했다.

"그 때는 제가 용사라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그 말에 야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마이닐이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작게 귓속말로 말했다.

"뻔뻔하게 내질렀군 그래."

"알잖습니까? 계획이 없으면 사기라도 떨구지 말아야죠."

"아니. 나도 그 말을 믿는다는 말이다."

나는 무안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창 밖으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129

엄밀히 따지자면

정찰 임무를 띠고 나가있던 야경꾼이 뒤늦게 별장으로 뛰어들어왔다.

우리의 적들이 서로 맞붙기 시작한 것이다.

마흔 명 가량의 야경꾼이 각자의 무장을 마치고 별장에서 빠져나왔다.

코엘란의 마도공학국 기지는 야트막한 분지 지형에 자리잡고 있었고, 기지를 향해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험한 산지를 직접 넘거나, 하나 뿐인 좁은 계곡을 올라와야했다.

수심이 깊지 않은 시냇물을 따라 형성된 계곡이라 사람이 따라 오르기에 문제는 없지만, 많은 숫자가 오르기에는 상당히 불안한 지형이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하지만 군 지휘를 위해 대열을 갖추고 전진하기 위해서 들어갈 방법은 그곳 밖에 없지. 소수의 분대를 나누어 다른 방향을 타격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어차피 마도공학국 기지는 분지 가운데 있고 전방향으로 방어를 대비하고 있으니 별로 의미는 없어. 놈들은 결국 계곡을 따라 올라올 거다."

우리의 별장은 산지에 지어져 있었고, 능선을 따라 어렵지 않게 마도공학국 기지가 있는 분지 지형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몸을 숨긴 우리는 계곡을 관찰했다.

마이닐의 예상대로였다.

코엘란 지방군은 계곡을 따라 진군하고 있었다.

마이닐은 떠오르는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지긋이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숫자도 2천 가량이군."

뒤늦게 합류한 야경꾼의 말에 따르면 놈들은 마도공학국 기지를 반역죄를 물어서 공격하는 모양이었다.

마이닐의 말에 따르면 제국군 중 계급이 높은 장교들은 자의적으로 위급한 상황이라 판단한 경우, 필요하다면 자기 휘하의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마이닐이 말했다.

"그래도 저건 권한 남용이지. 놈들은 결국 법교 소속이 아니야. 뒤탈이 있겠지."

"만약에 놈들이 뜻대로 된다면 뒷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글쎄. 생각해보니 만약 우리가 예상한대로 체르페디오가 놈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황이라면···."

그건 끔찍한 상황이다.

놈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마도공학국을 성공적으로 반역죄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된다면 야노프는 저들의 손에 떨어질 것이고, 동부해안의 가장 강대한 나라인 제국이 마왕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다.

마왕은 다른 이들을 조종하는 재주를 가졌으니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어보이겠지.

'잠깐. 그럼 내 첫 번째 생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건 확신할 수 없죠.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이 없진 않겠죠.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몰랐을테니까요.'

비요른의 말이 맞았다. 변방의 삼류 모험가로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었겠지.

우리는 관측이 용이한 지점에 몇 명을 남겨두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전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전장에 뛰어들 생각으로 왔기 때문이다. 관측이 용이하다는 것은 관측 당하기도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도공학국 기지 뒤쪽으로 이동할 때, 몰로이가 말했다.

"마도공학국 기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네요. 방벽도 그대로예요. 코엘란 지방군의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기 시작한지 시간이 꽤나 되었으니 해자를 팔 시간은 없더라도 방벽을 강화할 시간 정도는 있었을텐데요. 경계병 숫자도 그대로예요. 도망치려는 기색도 없고요. 설마 아직도 지방군이 움직이는 걸 모르는 걸까요?"

뒤에서 마이닐이 대꾸했다.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하지만 의외로 '해볼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무리 성벽을 끼고 싸운다고 하더라도 300대 2000이 결코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을텐데요."

이 부분은 나도 몰로이와 같게 생각했다.

특히나 손대포의 등장은 공성전 양상을 바꾸었다.

시안에서의 화약 무기는 점차 소형화 되기 보다는 손대포의 형태에서 오랜 시간 정체되어 있었다. 단순히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로는 인간의 주된 적이 인간이 아닌 보다 강인한 신체를 가진 아인(亞人)인데다, 동부해안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부대끼며 살다보니 각각의 성채가 요새화 되기 쉬워졌고, 그에 맞춰 개인의 화력이 높아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손대포로 무장한 병력이 상당수 있다면 순차적으로 성곽 위를 때리면 성가퀴며 그 성가퀴에 기대 다음 대포알을 장전하는 손대포병이며 모두 박살을 내버릴 수도 있었다.

성벽 위 화력이 줄어들면 자연히 보병이 사다리를 걸거나 공성무기로 성문을 공략할 시간이 늘어난다.

게다가 마도공학국 기지는 요새화 되어 있다지만 내가 일전에 아슬론, 마이닐과 함께 공격했던 론 왕국과 제국 국경 인근에 있었던 마도공학국 기지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그 말에 마이닐이 가로저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랑 초점이 다르군."

마이닐은 안대 안쪽의 눈을 긁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마도공학국 놈들이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저런 자신감을 가지게 할만한 무기를 숨겨두고 있을 거라는 말이다. 마도공학국도 그리 많은 숫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국군 부대 하나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으니 코엘란 지방군의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 했을리가 없어."

해가 산 능선에 걸칠쯤 첫 번째 폭음이 들려왔다.

마도공학국 기지 뒤에 위치한 산 중턱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던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시작했군."

전쟁을 보기엔 적절한 위치는 아니었다.

전투는 기지의 전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우리 시야에는 가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도공학국 기지 내부의 전경은 훤히 보였고, 만약 코엘란 지방군이 성벽 공략을 끝낸 뒤 들어서기 시작한다면 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마도공학국 기지의 801부대원들은 총을 들고서 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열세인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벌써 방벽 위로 사다리가 기대어져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이닐이 말했다.

"생각보다 빠른데."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기지 내부의 거대한 창고로 보이는 건물의 문이 열리더니, 무언가가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결코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 옆에 서 있는 801부대 병사에 비해 키가 두 배는 컸기 때문이다.

몰로이와 마이닐이 말했다.

"···골렘?"

"저렇게 커다란 건 처음 보는군. 뭘로 만들어진거지? 황동인가."

나는 내 감상을 말했다.

"어··· 그러니까 저건··· 로봇 같은데요."

이미 로봇의 몸을 하고 있었던 대학자 위블론을 생각하면 로봇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순 있지만, 평범한 사람의 크기였던 위블론에 비해 세 배나 더 큰 녀석이었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형상을 띄고는 있다지만, 몸이 원통형에 팔과 다리가 되는대로 만들어진 것처럼 균형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밸런스가 맞아떨어지는지 로봇은 절뚝이면서도 앞으로 잘 걸어갔다.

로봇의 외피 황동 외피 안쪽으로는 마찬가지로 황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누렇게 빛나는 톱니바퀴들이 완벽하게 물려서 돌아가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로봇이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섯 대나 되는 로봇들은 각자 손에 냉병기들을 하나씩 들고서 걸어나와 성벽으로 향했다.

거대한 망치를 든 태엽 로봇이 먼저 성벽을 넘어가버린 순간, 군인들의 시체가 성벽을 넘어 비산하며 튀어올랐다.

너무 큰 충격에 잘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떨어져 나가는 몸의 부분들이 마도공학국 기지 내부로 떨어져 내렸다.

나머지 로봇들이 기지 밖으로 성벽을 마치 울타리라도 넘듯 가볍게 넘어가더니 튀어오르는 피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내가 마이닐에게 말했다.

"첫 번째 계획이 무너질 것 같은데요."

우리 계획은 코엘란 지방군이 마도공학국 기지 방벽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고, 그 사이 기지 내부가 난전으로 혼란한 틈을 타 마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이었다.

둘 중 누군가를 응원할 생각은 없지만 코엘란 지방군이 패배해버리면 곤란했다.

마이닐이 말했다.

"아니, 아직이다."

필요하다면 오히려 마도공학국 기지에 저 로봇들이 없는 지금 습격을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마이닐을 믿고 대기했다.

곧 마이닐이 기다리라고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방벽 외부 한쪽이 폭발하더니, 방벽을 이루던 돌들이 부서지며 마도공학국의 별관 건물을 덮쳤다.

우리는 별관 건물을 덮친 것이 방금 보았던 태엽 로봇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자욱했던 먼지가 걷히자 무너진 성벽 안으로 두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둘 다 마법사로군. 하나는 저 정도 규모의 부대에서 하나 정도는 따라다니는 전마사(戰魔師)와··· 그 옆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얼굴인 것 같군."

"노엘이네요."

평범한 사람의 시력으로는 보이지 않을 위치지만, 나는 노엘의 이목구비가 똑똑히 보였다. 잘못 볼 수 없다. 노엘이었다.

내게 소용이 없다지만 타격을 입고 물러났던 노엘은 아마도 곧장 코엘란 지방군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한 작전을 짜고 있었겠지.

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밖으로 뛰쳐 나갔던 태엽 로봇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하지만 전마사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천둥이 치는 폭음과 함께 성벽 안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젠장, 저 놈도 문제네요."

"그래도 저런 놈이 노엘 보다는 상대하기가 편해. 전마사란 놈들은 노엘처럼 어려운 주문은 잘 모르거든. 다른 마법사들이 지식이 가지는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그 마법을 익히고 배우는 것과 달리 어떻게 사람을 빠르고 쉽게 죽이나 연구하는 놈들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마검사와 다르지 않지. 칼과 마법의 차이랄까. 내 생각엔 맞붙기만하면 승리할 수 있어."

2천의 병사는 태엽 로봇 하나만으로 상대가 가능하다고 판단한건지, 아니면 두 명의 마법사가 너무 위험하다고 본 것인지 태엽 로봇 둘이 성벽을 다시 넘으며 재등장했다. 각자가 물고 있는 무기며 몸체에는 군인들의 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두 로봇이 나타난데다 쓰러졌던 태엽 로봇 둘이 삐걱대나마 일어나자, 전마사와 노엘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전마사가 허공에 있는 자신들을 보호하는 주문을 펼치는 사이, 노엘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소환진을 그려넣었다.

나타난 것은 이계의 존재 사라시였다.

이미 두 팔과 두 다리가 봉인이 풀려있는 상태인 사라시는 재빠르게 태엽 로봇 하나의 머리를 손으로 내려치고, 다음 순간 다른 태엽 로봇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렸다.

두 로봇 사이의 거리가 수 십 미터는 되었는데도 거의 한 순간에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급하게 몰로이를 돌아봤다.

"지금입니다. 책으로 들어가세요."

"지금요?"

"네."

몰로이는 주저하다가 책을 펼쳤다.

푸른 빛을 내며 번쩍이던 책은 다시 접혔고, 몰로이는 고개를 떨구며 정신을 잃었다. 그의 정신만이 푸른 궁전의 책의 세계로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시가 사라졌다.

소환 마법에 집중하고 있던 노엘이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이닐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책 속에 있는 노엘이 말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자기 자신에게 별다른 대책이 없을테니, 자기 자신을 상대하는 건 자기에게 맡겨달라고요."

그래서 책 속의 노엘이 사라시를 역소환(逆召喚)해버린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엘은 두 존재가 같은 세계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했죠. 그건 인과율을 크게 위배하는 일이고, 때문에 그 순간 쌍소멸(雙消滅) 해버린다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책 속의 노엘과 책 밖의 노엘이 따로 있는 것은 괜찮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직접 만날 수는 없는 거죠."

멀리서 보는 노엘은 머리를 부여잡더니 그대로 기지 내부의 별관 건물 옥상으로 추락했다.

태엽 로봇을 상대하던 전마사는 당황하며 노엘을 바라보았다.

노엘은 무언가에 저항하듯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대고 있었지만 쉬워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책 속의 노엘이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살인 셈이죠."

노엘은 제압이 되었지만 태엽 로봇들이 전마사를 상대하기 시작하면서 힘이 빠져갔다.

게다가 전마사와 노엘이 만들어낸 방벽의 틈이 결정적이었다.

코엘란 지방군이 마도공학국 기지로 들이닥쳤다.

마이닐이 말했다.

"노엘은 제압되었고, 코엘란 지방군이 들어왔군. 지금이 적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경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130

전마사

야경꾼 마법사의 주문과 함께, 마도공학국 기지의 방벽이 마치 물이 쏟아지듯 무너져내렸다. 돌을 모래로 바꿔버린 것이다.

801부대 군인들 몇 명이 그대로 모래에 휩쓸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난전 중에 이쪽을 향해 시선이 덜 오도록 신경을 쓴 마법이었다.

그렇지만 방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숫자가 적지는 않았다.

총알이 쏘아졌고 나는 전면에 서서 그 총알을 모두 베었다.

비요른에 탄두가 닿을 때마다 마찰로 붉은 빛이 튀었고, 경쾌한 파쇄음과 함께 잘려나간 탄두가 바닥과 하늘로 튀어나갔다.

내가 마이닐에게 말했다.

"계획대로 나눌겁니까?"

"그래."

안타깝게도 우리는 마도공학국 내부에 마왕이 어디있는지 특정 짓지 못했다.

야경꾼들은 마왕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무리가 기지 내부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지만 어떤 건물로 들어가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빛 한점 없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확인을 했더라도 마왕이 각 건물 사이를 오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무리로 나누기로 했다.

제일 유력한 곳은 군인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연구동으로 추측되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단순 창고로 생각되던 건물도 연구동 옆에 바짝 붙어 있었고, 우리는 황동으로 만들어진 태엽 로봇이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걸 목격한 상황이었다.

내가 말했다.

"1조가 창고로 가겠습니다."

"그럼 2조가 연구동으로 간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각각 네 명의 야경꾼을 이끌고 나와 마이닐은 좌우로 나뉘어졌다.

내가 연구동이 아닌 창고로 이동한 것은 현재 창고 쪽이 연구동에 비해 더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창고는 전마사와 노엘이 방벽을 박살낸 자리에서 멀지 않았다.

801부대원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자리를 잡고 방벽의 틈을 향해 사격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코엘란 지방군은 흡사 광기에 휩쌓인 것처럼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으며 기지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때문에 801부대는 우리를 대부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소수의 군인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기관단총을 든 야경꾼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포화로 적의 공세를 막아내며 길을 만들었다.

창고의 뒷문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다.

야경꾼들이 부상과 탄창을 확인했다. 부상자도 없고 총타도 여유가 많았다. 아직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야경꾼 데나일이 말했다.

"그럼 우리가 후미를 맡겠소."

코엘란 출신 사냥꾼 겸 나무꾼인 데나일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 남자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도공학국에 의한 이변을 감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다가 야경꾼에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 건물 내부로 들어온 이상은 우리가 더 유리했다.

일인당 화력이 압도적인만큼 복도 내부에 간부급 마검사가 있다 하더라도 총탄을 베거나 피해낼 재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방벽이 부서진 이상 아무리 코엘란 지방군이 801부대와 같은 근대 화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기지가 점령 당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어찌되었든 조악하나마 코엘란 지방군은 손대포로 무장하고 있고, 아직 전마사도 하나 남아 있다. 게다가 여력이 남은 801부대원들은 야경꾼들과 교전 중일 것이다.

'힘의 균형이 기울어지면 우리가 코엘란 지방군을 상대해야겠지.'

수 십명에 불과한 야경꾼이 2천에 이르는 정규군을 상대할 수 있을까? 기관총과 같은 뛰어난 무기가 있다지만, 나는 구태여 그걸 이 자리에서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몇 개의 문을 열면서 그 자리에 있는 마도공학국 관계자들을 붙잡고 마왕의 행방을 묻고 답하지 않는 이들을 모두 쏘아죽였다.

야경꾼 데나일이 탄창을 갈며 말했다.

"쉽지는 않구려."

"중앙으로 가보죠. 태엽 로봇들이 있었던 자리까지 가봐야겠습니다."

"지금쯤이면 코엘란 지방군들이 들이닥쳤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더더욱 가야겠죠. 놈들이 그놈에게 먼저 다가가기 전에요."

다행히 건물 구조는 간단한 편이었다.

중앙 쪽에 창고로 쓰이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을 따라 좌우로 복도와 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조인듯 했다.

2층으로 올라가 창고 공간으로 들어서자 희미하게 들리던 총성이 선명하게 들렸왔다.

1층에 엄폐물을 끼고 적을 막아내는 801부대원들과 창고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코엘란 지방군으로 창고는 난장판이었다.

내부에는 만들다만 것 같은 태엽 로봇들이 거치되어 있었고, 방금 급히 가동을 시작한 것 같은 외팔이 태엽 로봇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몸을 숙여 은폐한 상태로 있던 데나일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긴 저 황동 골렘 제작소인 거 같소만."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이곳 창고도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일단은 마왕이 실험을 위해서 이곳까지 이동했다는 건, 이곳에 있는 것이 마왕이 있는 체르페디오의 황궁까지 이동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마도공학국은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면서 마왕을 외부로 내돌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간접적으로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럼에도 마왕을 코엘란까지 데리고 와야한다는 건 이곳에 있는 것이 황궁까지 이동하기 곤란하다는 것이고, 그건 아마 물리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 태엽 로봇 때문일 거라고 판단했는데.'

그리고 비행선에서 만났던, 마도공학국 소속의 학자로 의심되던 스티올이 영구기관을 언급했던 것도 있었다. 무한한 동력이 있다면 그 동력으로 움직일 무언가도 있어야한다. 로봇을 봤을 때 그것과 연결짓지 않기란 힘들었다.

착오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이닐이 먼저 갔으니까.'

창고 건물은 연구동과 붙어 있지만 별다른 지하시설이 없었고, 있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도 없었다.

"그럼 연구동으로 이동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창고의 지붕이 부서졌다.

거대한 돌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한창 난전을 벌이던 코엘란 지방군과 801부대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군인들을 깔아뭉게고 나타난 것은 전마사와 노엘이었다.

노엘은 눈도 뜨지 못한 채 피눈물을 떨구고 바닥에 기괴한 마법진을 복잡하게 그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손으로 마법진을 그리는가 싶으면 다른 손으로 마법진을 뭉게서 지워댔다.

광기에 가득 차 움직이던 노엘은 번뜩 고개를 들더니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쏠. 저, 저자가 내 책을 가지고 있다."

"그럼 내가 받아오지. 그거면 되겠나?"

"책만 있다면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어서··· 빨리···"

쏠이라 불린 전마사는 서른 쯤 되어보이는 남자로,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두르고 있는 망토와 지팡이 덕분에 그 존재가 돋보였다.

801부대원 몇 명이 그를 향해 총을 쏴댔지만 전마사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맞지 않았다.

그는 총알이 가랑비 보다도 못하다는 듯 투명한 계단을 걸어오르는듯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비요른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나는 데나일에게 말했다.

"마법에 휘말릴 겁니다. 보시다시피 총알은 먹히지 않고요. 마이닐을 찾아 그를 도우세요."

"아래서 뵙겠소."

데나일이 도망치는 걸 확인하고 나는 왼손에 분쇄자를 착용했다.

쏠이 말했다.

"책을 내놔라."

"이 전장통에 무슨 책 말입니까?"

"가지고 있지는 않은건가? 어디에 있지?"

"노엘을 죽게 놔두십시오. 그게 노엘의 뜻이니까."

물론 필요하다면 내가 노엘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게 푸른 궁전에 있는 노엘이라도 살리는 방법이니까.

쏠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그럼 됐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니놈의 머리뚜껑을 따서 들여다보면 되니까."

그 말과 함께 쏠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다행히 쏠의 마법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하면 단순했다.

지팡이가 휘둘리자 내부 벽면과 천장이 그대로 박살이 나더니 나를 덮쳤다.

칼과 분쇄자로 막아내자 다음은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마계에 드나드는 것으로 단련이 된 육체에는 깊이 있는 타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허공에 떠버린 것이었다.

쏠은 일전에 노엘이 선보였던 '아인저의 가시'라는 창을 들고 허공에 있는 나를 찔러왔다.

'피해야 해요!'

본래라면 날개가 없는 것들은 허공에서 움직일 수 없겠지만, 나는 마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경화(硬化)된 마기를 걷어차면서 몸을 비틀었고, 거기에 더해 쏠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어. 곧장 끝낸다.'

다시금 경화된 마기를 걷어찼고 내 칼이 쏠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베이는 감각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지며 돌아보자 쏠이 목을 더듬으며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쏠이 말했다.

"방금 뭘 한거냐, 마검사?"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피차간에 질문을 하는 것을 깨닫곤 다시 격돌했다.

비요른이 말했다.

'아마도 왜곡 마법 비슷한 걸 쓰나봐요.'

'왜곡 마법?'

'놈이 총알을 맞지 않는 건, 애초에 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죠. 보이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다른 거예요.'

비슷한 효과를 내는 다른 마법들도 있겠지만, 당장은 그게 가장 그럴듯해보였다.

'그렇지만 완전한 허상이 아니라 분명 이 자리에 존재는 하고 있다는 거겠지.'

'보이는 것 보다 거리가 멀거나, 가깝다고 할까요?'

'어디서 들어본 말 같은데?'

아무튼 이 자리에 존재만 한다면 내게도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왼손을 들어 문신 되어 있는 소환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쏠이 말했다.

"꼴에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거냐?"

쏠도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런 단순한 마법은 역마법(逆魔法)으로 파훼되기 쉽다는 것도 스승이 가르쳐주지 않던가?"

그 말대로 쏠은 허공에 생성되려던 소환의 문을 즉시 닫아버렸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그냥 많이 열라고 하더라고."

허공을 비집고 내가 소환한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노엘이 가르쳐준 방법이었다. 내 마법 수준에선 마법사들에게 저지 당하기가 쉽다.

하지만 역마법을 구성하는 것도 시간이 걸린다. 오히려 역마법은 수준 높은 기예이기 때문에, 간단한 마법을 여럿 시전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니 그냥 재량 것 많이 소환하면 못 막는다."

내가 소환해낸 것은 'H빔'이었다. 건축 자재로 건축물의 기본 뼈대를 세우는데 쓰이는 바로 그 물건이었다.

둔중한 테트라포드는 많은 숫자를 소환하는데는 힘이 달리지만, H빔은 그렇지 않았다.

H빔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쇠가 바닥을 치는 굉음이 연달아 울렸다. 엉겁결에 마법에 휘말린 군인들과 완전히 초토화된 창고는 얼마 남지 않은 벽면이 허물어지며 검붉은 철골에 허물어질 조짐을 보였다.

쏠은 발치로 떨어져내린 H빔을 보고 황망한 얼굴이 되더니 또 지팡이를 휘둘렀다.

쏠은 그대로 H빔에 짓눌리는가 싶더니 다시 멀쩡한 모습이었다.

나는 빠르게 눈을 굴려 허공에서 아무것도 없이 튕겨져 나가는 H빔을 목격했다.

'찾았다.'

나는 벽면을 달려가며 비요른을 치켜들었다.

허공을 베는데도 이번에는 살과 뼈를 베는 느낌이 선명했다.

마법이 풀리며 쏠의 팔이 떨어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를 악 다문 쏠의 머리를 재차 베어냈다.

전마사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창고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은 군인들이 총구를 내리고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창고 바닥에는 수 십 개의 철골들이 박혀 있었고, 의도치 않게 외팔이 태엽 골렘도 끼어 있었다. 태엽이 돌아가다마는 듯 째깍 거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내가 바닥으로 걸어내려오자 남아있던 801부대원과 코엘란 지방군 군인들 모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는 듯 무너진 창고 외벽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노엘에게 다가갔다.

"이봐요."

하지만 노엘은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가볍게 몸을 뒤집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의 근육들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완전히 풀려 있었다.

비요른이 말했다.

'너무 늦었군요.'

'내려오자마자 노엘을 찾아서 죽여줬어야 했을까?'

'아뇨. 시우 님의 임무는 그게 아니니까요.'

만약 이대로 마왕을 죽이면,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이대로 세상이 고정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오로지 노엘을 위해 마왕을 죽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연구동으로 달려갔다.

# 131

스티올

연구동의 중앙 홀에는 외눈 안경을 낀 노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지만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니었다.

코엘란으로 오는 비행선에서 만나 마도공학국의 학자로 추측 되었던 스티올이었다.

스티올도 내 얼굴을 보자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그렇게 된 일이군. 코엘란 지방군이 습격하는 사이에 야경꾼들이 마도공학국 기지를 친다··· 좋은 작전이군. 그때는 왜 나를 살려둔거지? 자네는 내가 이곳의 기지장이라는 걸 몰랐나?"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스티올에게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아하게도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있는데, 마도공학국의 학자들은 물론이고 코엘란 지방군이나 야경꾼들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침입한 경로를 생각하면 홀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사실인지 총소리로 들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왔다.

내가 스티올에게 말했다.

"마왕은 어디 있습니까?"

"그를 어떻게 하려고 온 건가?"

"죽일 겁니다."

"의외로군. 그렇게 쓸모가 많은데 죽이는 건가··· 하지만 마찬가지로 곤란해."

나는 스티올과 대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코엘란 지방군과 저희는 별개의 세력입니다."

"무슨 말이지?"

스티올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설명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놈들은 마왕의 추종자에 의해 정신이 오염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왕을 풀어내서 자신들의 왕으로 삼을 겁니다. 저는 그걸 막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염되었다고? 하지만 마왕과 직접 접촉한 사람은 없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자네가 달 그림자 속에 숨어다닌다는 야경꾼이라지만 직접 관리하고 있는 이들 중에 하나인 나보다 잘 알리는 없지 않겠나?"

"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스티올은 내 말의 뜻을 깨닫고 당황했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이로군? 말이 안 돼. 마왕에 닿기 위해선 황제 조차 그 많은 보안 절차를 거쳐야 하고, 마왕 옆에 상시 붙어 있는 호위 병력이 몇 명인줄 아나? 도대체 무슨 천운이 닿아서···"

스티올은 말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가이엔 지나가 그곳에 간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마도 마왕의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마왕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마도공학국 기지 내부에 잔존했지만, 마도공학국의 학자들은 여러가지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그 힘에 대해 저항해왔다.

하지만 그 힘에 대한 저항력이 전혀 없는, 오히려 마왕을 만나기 위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리고 약간의 영리함을 갖춘 여자에겐 그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리라.

스티올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 코엘란 지방군을 손을 합쳐서 물리치는 건 어떤가?"

"2천의 군사를요?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마왕은 아직 저 아래에 남아 있겠죠. 다음에 마왕을 구하기 위해서 올 적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모릅니다. 그때도 똑같이 막을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군."

"예. 저에겐 지금이 적기입니다."

나는 비요른을 쥐고 검세를 잡았다.

스티올이 말했다.

"아래에서는 이미 다른 야경꾼들이 싸우고 있다네. 나는 더이상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서 자진해서 이곳까지 나왔지. 그러니 나를 쓰러트려야 이곳을 지나갈 수 있을 거야."

"제가 먼저 갑니까?"

스티올이 웃었다.

"다 늙은 노인네에게 너무하는군. 한 가지만 묻지."

"얼마든지."

스티올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운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언젠가··· 내가 마법에 심취해있던 시절 '운명의 도서관'에 대해 들은적이 있다네. 모든 사람의 운명이 그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 뭐, 그것까진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도서관엔 드나드는 이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대단히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 그렇지 않은가?"

이 자리에서 '운명의 도서관' 이야기인가.

'한 가지가 너무 긴데.'

'하지만 시우 님에겐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로군요.'

'그래.'

스티올이 계속 말했다.

"우리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서 살아갈 뿐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꼭두각시일 따름 아닌가? 운명의 도서관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고 알려진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어. 우리는 뜻대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도서관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앞서 말했듯 나는 그 개념을 좋아하지 않지. 그래서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씩 마법에 대한 흥미를 잃어갔다네. 그러다가 제국에서 고대의 봉인된 지식이 풀려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연구하는 모임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지. 뭐, 자네라면 놀랍지도 않겠지만. 무엇에 대해 연구했는가하면, '과학'일세. 과학을 공부하는 동안 조금씩 지식이 재정렬되며 내 마법을 잃어갔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네. 마법은 편집적이고 자폐적인 세계관의 추상에 불과해. '운명의 도서관' 같은 것 말이지. 아, 그래. 인정하지. 마법은 상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하는 힘이고, 그것도 아주 강력한 힘이긴 해. 하지만 나는 마법이 결국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규칙 안에서 놀아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네. 그 규칙의 빈틈을 찾아내 어떻게 활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머지는 다들 선대의 마법사나,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마법을 달달 외워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비싼 시약을 사모아서 그걸 성공해내고 진리를 탐구해냈다며 자위하곤 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런가? 그딴게 진리라고? 어떤 마법사들은 통달해낸 선각자처럼 행세하지만 그게 정말로 진리라면 왜 다른 이들을 구원해내지 못하는건가? 왜 운명의 도서관으로 들어가 만인의 비참한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나는 그러고자 했던 마법사를 하나 알고 있었다.

노엘의 스승이었다.

그는 운명의 도서관에 들어가는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제자가 뒤따라 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다.

사서에게 발각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제자의 책을 집어들고 그 운명을 바꾸어 제자를 살려보냈다.

'물론 성공적이지는 못했지. 그 한 사람의 운명 조차도.'

내가 말했다.

"그래서 과학입니까?"

"그렇다네. 과학도 만능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항상 한계가 있지. 어떤 수식은 완벽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증명하고도 있어. 하지만 마왕의 힘을 빌린다면 가능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이 뛰어다나 하더라도, 지나와 같은 존재에게 새어나와버릴 정도라면 언젠가 그 누구에게 그 힘이 풀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다.

마왕은 결국 다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하니까.

그럴 거라면 모두의 운명이 그 누구의 손에 닿지 않는 자리에 있도록 해야한다.

"스티올··· 모두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스티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엔 억지처럼 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초연함이 엿보였다.

"도박이 아니야. 과학은 분명 사람들의 운명을 바꿀걸세. 명백한 정황이 있어."

"'명백한 정황'이요?"

"마도공학국이 왜 제국의 그늘에 숨어 있어야하는지 알고 있나?"

"만신전의 반대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신들께선 과학을 좋아하시지 않아. 왜인 것 같나?"

"불경하다는 이유 때문 아닙니까?"

"불경? 불경하다는 건 이 지식이 신화시대에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결국 그건 이 지식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간접적인 이유에 불과해. 진짜 이유는, 과학이 모두의 운명을 뒤바꿀 것이기 때문이야. 운명의 도서관의 사서들은 자신들의 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되는 걸 두려워 한다네."

그런가?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생각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발 아래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직감을 느꼈다.

비요른이 말했다.

'왜 그래요?'

'마기가 차오르고 있어.'

세상은 순식간에 검붉은 마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연구동의 좌편이 폭발했다.

처음엔 스티올이 선수를 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스티올은 날아드는 돌파편을 위해 고개를 바짝 숙였다.

비요른에게 말했다.

'노엘과 전마사는 죽었을텐데? 더 있었나?'

'마도공학국의 다른 병기는 아닐까요?'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제와서 좋은 카드를 꺼내드는 건 전술적으로 어긋났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두의 예상에서 어긋나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기괴한 생물이었다.

부분적으로 뱀장어나 뱀을 닮았다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얼굴이 있을만한 부분은 죄다 촉수로 뒤덮여 있었다.

생김새보다 중요한 건 덩치였다.

허공에서 3미터 정도 떠 있는 이 생물은 그 높이가 10미터가 넘었고, 촉수 하나하나의 굶기가 오십센치미터 쯤 되어보였다.

스티올이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말, 말라이크?"

"뭔지 압니까?"

"'마수(魔獸)'중 하나일세.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양의 엄청난 마기에 이끌려서 나타날 수 있다네."

나는 칼레드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마경의 주변을 맴도는 마수는 쉽게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왜?"

칼레이드가 외눈 안경을 고쳐썼다.

"마왕이 깨어나려는 징조라네. 쉽게 설명하자면, 마왕이 각성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마기가 필요하고, 무한한 마기의 바닷물을 큰 대접으로 떠올리다보면 거기에 덩달아 물고기들이 딸려오는 격이지.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이지? 자네의 친구들은 아직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텐데."

그 의문은 둘째치고 우선은 자리를 피해야했다.

마왕이 등장하기 전 덩달아 딸려온 물고기 치고는 지나치게 위험했다.

내가 말했다.

"도망가야지 않겠습니까?"

"지하로 내려가지. 내가 길을 안내하겠네."

물론 노인의 느린 걸음에 맞춰줄 생각은 없다.

내가 스티올을 끌어안고 내달리자 말라이크의 촉수 몇 개가 나를 뒤따라왔다.

하지만 촉수가 닿기 직전 열린문을 향해 뛰어들자, 촉수는 더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촉수를 흐느적 거리던 말라이크는 연구동 안쪽으로 들어오려다, 유연하게 몸을 비틀며 외부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쏴대는 병사들을 향해 움직였다.

"스티올! 다른 침입자가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도공학국의 대학자이자 일전에 싸웠던 경험이 있는 위블론이 서 있었다.

온 몸이 강철 로봇이나 다름없는 그는 나를 보았다가 스티올을 다시 바라보았다.

스티올이 말했다.

"내 친구일세."

위블론이 금속성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다른 침입자가 있었다. 우리가 야경꾼들에게 힘을 쏟는 사이 그 침입자가 마왕에게 접촉한 모양이다."

내가 물었다.

"혹시 그 침입자가 여자입니까?"

"나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 갈색 머리칼을 한 여자라더군. 현재 마왕과 함께 사라졌다. 며칠간 그토록 열심히 보안에 열중하며 마도공학국 관계자 외의 그 어떤 '외부인'도 들이지 않았는데···"

나는 한숨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

그녀는 분명 가이엔 지나였다.

체르페디오에 있는 마도공학국 본부도 이미 마왕의 추종자들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그러니 외부인이 아니었던 지나는 들어갈 수 있었던 거겠지.

어젯밤 그녀를 확실하게 끝내지 않았던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줄이야.

내가 위블론에게 말했다.

"야경꾼에게 갑시다. 싸움을 중지시키고 마왕과 그 여자를 찾아야겠습니다."

"넌 누군데?"

"스티올?"

내가 도움을 구하며 스티올을 돌아봤다.

스티올이 말했다.

"이 친구 말대로 하지. 마왕이 아직 이 지하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확실한가?"

"그래. 자네가 아직 살아 있나 보려고 온 거야. 입구를 봉해버려야겠군. 보자, 가진 폭약이···"

내가 말했다.

"제가 하죠."

나는 비요른으로 지하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무너트렸다.

돌아서며 내가 말했다.

"마왕을 죽이지 않고서는, 오늘 이곳에서 그 누구도 나가지 못할 겁니다."

# 132

톱니바퀴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 계단에는 화약 냄새가 가득했다.

나선 계단 아래에는 시체와 탄흔들을 볼 수 있었다. 야경꾼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말이다.

내가 말했다.

"스티올 씨, 올라오는 계단은 이곳 뿐입니까?"

"그렇지."

"환풍구가 있을텐데요. 사람이 지나갈만큼 넓습니까?"

"···넓긴 하지만, 회전 날개 때문에 사람이 지나갈 수는 없을걸세."

아마도 마도공학국 본부에 있는 환기구와 구조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스크루가 있다고해서 딱히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가이엔 지나는 그곳을 통해서 빠져나갈 생각을 이미 하고 있을테니까.

"환기구를 막죠."

"그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식할텐데?"

"어딨습니까?"

"지하 시설이 커서 환기구 숫자가 적지 않다네. 게다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해질 수 있으니 그 위치도 은밀하게 숨겨져 있지."

"그럼 더 서둘러야겠군요."

내 말에 위블론이 돌아봤다.

"아까부터 너 뭐하는 놈이야?"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 죽더라도 마왕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게 첫 번째 원칙 아닙니까?"

"코엘란 지방군의 공세 때문에 이곳에 숨은 사람이 많다. 넌 그 사람들 모두의 목숨을 책임질 수 있다는 거냐?"

뒤따라오던 스티올이 말했다.

"위블론."

"스티올, 이놈은 대체 뭔가?"

"···이 친구 말대로 하지. 우리가 환기구를 막아야겠어. 자네가 모르는 환기구 위치를 내가 알고 있을 거야. 어차피 환기구를 막는다고해서 있던 산소가 갑자기 모두 소모되지는 않으니까 당분간은 괜찮겠지. 그리고 슈. 하나만 약속해주게."

"예."

"마왕을 죽일 때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군."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리신 건 이유가 뭡니까?"

"마왕이 각성하면 어차피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데, 현재 상황에선 그 각성을 막을 방도가 없어."

나선 계단을 모두 내려오자 위블론이 스티올에게 뭐라고 떠들었지만, 스티올은 그를 무시하며 내게 문 하나를 열어주었다.

"이쪽으로 가면 자네 친구들이 있을거야. 무운을 빌지."

나는 스티올, 위블론과 헤어지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원래 복도를 밝히고 있었을 백열 전구는 깨어지고 나서 필라멘트의 희미한 빛만을 남기고 있었다. 복도를 달려가자 자박거리는 유리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달려가는 복도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그 아래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뭐야, 슈였나?"

마이닐은 검을 내리며 말했다.

공동은 아마도 실험실로 쓰이는 공간인 것 같았다.

가운데 거대한 톱니바퀴가 절반 정도 드러나 있었는데, 다른 톱니바퀴들끼리 서로 얽히며 크고 작은 막대를 돌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톱니바퀴는 아주 느리게,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속도로 보아선 얼마가지 않아 멈출 것 같았다.

야경꾼들은 경상을 입은 이들은 있어도 모두 멀쩡해보였다.

나는 다가가려다가 잠시 멈춰섰다.

마이닐이 말했다.

"왜? 우리 정신이 오염되었을 거라 생각해서? 불행히도 아직 아니군. 개 같은 마왕 놈은 방금 코 앞에서 놓쳤다. 놈의 아가리가 열리기 전에 우리 친구들이 방아쇠를 당겨준 덕분이지."

"···뭐, 다행이군요."

"정비를 하고 곧장 쫓아가려는데 발소리가 들려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왜 놓쳤는지 궁금하지 않아?"

"들었습니다. 가이엔 지나가 있었죠?"

"누구에게 들은거지?"

"마도공학국의 다른 학자한테서요. 이제 마도공학국의 다른 학자들과 싸울 필요는 없어요. 마왕을 죽이는데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놈들도 급해졌다는 건가."

"서둘러야 할겁니다."

나는 마수가 나타난 외부의 상황과 더불어 환기구를 막기로 한 조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각성하기 이전이라면 무력한 것 같다. 우리만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야. 조를 다시 나눠서 움직이는 게 낫겠군. 아, 그 전에···"

마이닐은 품 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나는 당황했다.

"위지논의 호문쿨루스···."

그것을 삼킨 사람의 상처를 대신 받아 죽는, 사람의 목숨을 건져내는 기적의 물약이었다.

"그래. 필요할 것 같아서 볼더에게서 받아왔다. 그리고 이건 나보단 니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

"왜요?"

"이번 일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세상은 크게 바뀔 거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일을 지켜봐야하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보단 너여야 해. 너에겐 그 다음도 있으니까."

나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 물건을 받았다.

"···움직이죠."

실험실은 내가 들어온 입구를 제외하고 다시 두 개의 입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마이닐의 말에 따르면 이 두 통로는 다시 하나의 통로로 이어지고, 다른 길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마왕과 길이 엇갈리지 않기 위해선 두 길로 동시에 이동해야했다.

각각의 문으로 들어서려는데 사냥꾼 데나일이 뒤를 보며 외쳤다.

"잠깐, 저기 뭔가 있소."

우리 모두가 돌아보자, 거대한 톱니바퀴 위로 누군가 있었다.

가이엔 지나였다.

분명 오늘 새벽 마이닐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얕지 않을텐데도 이상하게도 지나의 얼굴은 희고 깨끗했다.

'뭔가 이상한데.'

지나가 말했다.

"어디로도 가실 필요는 없어요. 때가 되면 야노프께서 직접 이리로 오실 겁니다."

비요른이 말했다.

'시간 끌기에요. 마왕은 어디에선가 각성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내가 마이닐에게 말했다.

"마이닐, 마왕을 찾으러 가세요. 저는 지나를 맡겠습니다."

"알겠다."

안타깝지만 내가 갈 수는 없었다.

가이엔 지나가 다른 야경꾼들을 홀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물론 마왕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야경꾼들에게 더 경계되는 건 마왕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나와 관계된 일을 마무리 지을 책임도 느꼈다.

나는 지나의 머리 위로 H빔을 떨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저 혼자서는 무력할 지나는 가볍게 철골을 피해냈다.

무거운 철골이 황동 톱니바퀴에 부딛치면서 크게 울리는 금속음을 냈다.

내가 말했다.

"지나··· 이니엔은 잊은 건가? 그가 이런 일을 바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죽인 선생님 말입니까?"

"···."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군요. 노엘 씨가 저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줬습니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가?

지나가 말했다.

"당신이 용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했다지요. 당신이 제 삶을 과거에도 농락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다음 생에도요."

"아니 난···"

"하지만 괜찮아요. 몇 번의 생을 반복한 당신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저는 애가 아닙니다. 진실이 추악하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야노프 님을 만났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더러운 위선을 덮어두고 야노프께 머리를 조아리세요. 그분께선 용서하실 겁니다. 당신을 가엽게 여기시니까요."

데나일이 말했다.

"···슈, 더이상 말이 통할 거 같진 않은데."

"끝내죠."

나는 사격 명령을 내리고 칼을 들었다.

역시나, 지나는 엄청난 빠르기로 탄환의 비를 피해내며 톱니바퀴의 뒤쪽으로 숨었다.

내가 말했다.

"제가 들어가서 저 여자를 은폐 할 수 없는 곳으로 밀어내겠습니다."

"알겠소."

톱니바퀴 위로 뛰어들자 비요른이 말했다.

'기괴한 움직임이에요. 속도는 둘째치고 움직임이 인간같지 않아요.'

맞는 말이었다.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텐데.'

나는 지나를 발견하고 곧장 검을 날렸다.

지나는 그대로 허공으로 부유했다가 가장 큰 톱니바퀴의 안쪽으로 숨어들었다.

'그래. 마치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 같아. 인형처럼 말이지.'

'야노프가 직접 조종하는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설퍼.'

정말 그 뿐이었다.

기괴하고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피하는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더 쓸 수는 없지.'

나는 검으로 청기를 흘려보냈다.

마경에 들 수 있게 되면서 검을 휘두르는 재주에도 변화가 생겼다.

더 깊고 단단한 마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만큼 마검도 강화된다.

그렇지만 이전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강화되는 만큼 기존의 마계의 밀도에서 사용하던 기술들도 변화될 필요가 있었다. 예컨데 허공에서 휘두르는 검과 물 속에서 휘두르는 검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검을 휘두룰수록 보다 선명해지는 마기의 흐름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그 이전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던, 청기가 흘러나가는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단단하게 굳은 마기 안으로 청기를 담은 칼날의 궤적이 비집고 들어간다.

청월(靑月), 달먹이(月蝕)

폭발하듯 타오르는 마기에 휘말린 잡다한 톱니바퀴들이 청기가 만들어내는 회오리에 말려들며 수 십 갈래로 짜갈라졌다.

공간을 타고 흐르는 청기의 수 천 갈래의 빛의 균열이 가이엔 지나의 왼팔과 왼다리를 박살냈다.

지나는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마냥 균형을 잃고 허공을 빙글 돌더니 야경꾼들의 총탄 세례를 끝으로 그대로 추락했다.

나는 지나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지나의 사체 주변으로는 피 한방울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세히가서 살펴보자 나는 지나가 그저 속이 텅 빈 목각 인형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다.

"이건···"

상반신만이 간신히 남은 인형이 말했다.

"놀라셨나요?"

"살아있는 건가?"

"야노프께선 그 힘으로 모두에게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지요. 부디 이런 몸이라도 고치기만 하면 언제나 새 몸을 가질 수 있으니,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신들은 더이상 우리의 운명에 간섭할 수 없어요."

하지만 상반신만 남고 총 구멍이 곳곳에 남은 인형이 하는 말로는 전혀 설득력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나의 모습을 한 인형을 밟아 분질렀다.

튕겨져 나온 눈알 하나까지 밟아 없애려는데, 문 하나가 열렸다.

마이닐이었다.

마이닐은 팔을 다쳤는지 한쪽 어깨를 잡고 있었다.

"슈! 피해라!"

"뭡니까?"

"함께 간 야경꾼이 모두 죽었다. 우리가 놈의 힘을 간과했어."

마이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로 듣는다기 보다, 음습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퍼지는 말이었다.

<누가 또 내 인형을 박살냈구나.>

고개를 들어올리니 천장을 꿰뚫고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천천히 낙하하고 있었다.

그는 반쯤 부서진 톱니바퀴 위에 가볍게 올라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야노프."

<아··· 우리가 구면이었던가? 하지만 나는 처음 보는데.>

야노프를 처음봤을 때와 같은 강렬한 압박감은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느끼는 건 나 뿐인 것 같았다.

야경꾼들은 어렵사리 총을 겨누고 있지만 당기지 못하고 있었다.

야노프는 고개를 기울였다가 들었다.

<그렇구나. 너는 내 인형 중 하나가 속삭여준 '용사'로구나.>

비요른이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가 한 발 늦었군요.'

# 133

친구를 위해

'아니, 늦지 않았어.'

나는 마왕을 만나러 왔고, 이제서야 만났을 뿐이다.

마왕은 그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