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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6화

36. 제36화

"고블린 주제에 엄청나게 잘 지어뒀네."

세운이 감시탑의 후면을 타고 올랐다.

잡을 곳도 변변치 않았지만 세운에게는 '발라탄 절벽의 개코원숭이'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 험한 바위산의 절벽도 올랐는데, 이 정도쯤이야 가뿐했다.

감시탑을 모두 오르는 순간.

서걱, 푹!

투둑.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움직임으로 감시탑 위에서 경계를 서던 고블린 두 마리의 숨통을 끊었다.

철저하게 목을 노린 일격이었기에, 둘 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해야만 했다.

폭식의 권능으로 사체를 처리한 후, 세운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고블린들은 발등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듯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기야, 외곽의 고블린들이 당해서 경계를 강화하는 것에 이어 부락의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 바쁘게 움직이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중에서도, 세운이 찾는 것은 바쁘지 않아 보이는 곳이었다.

부락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면, 이런 상황이라도 경계가 흩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세운의 귓가에 고블린 부락에서 들려오면 안 될 것 같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 살려줘!"

"으흑흑...."

"젠장...."

사람의 목소리.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부락 한편에 조잡한 나무 감옥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으로, 열 명가량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이 주변에서 튜토리얼을 시작한 사람들이겠네.'

전에도 말했듯이 튜토리얼은 세운의 캠프만 참여하는 게 아니다.

튜토리얼의 넓은 지역 곳곳에서 수많은 존재가 이 잔혹한 경쟁에 참여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들 역시 세운의 캠프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참여를 당한 듯싶었지만.

'당장 구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저들을 풀어주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세운은 물론, 저 사람들도 더욱 고통스럽게 죽고 말 것이다.

지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다.

던전을 공략하며 저들을 구할 수 있으면 구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저들을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던 중.

'찾았다.'

세운은 목표물로 보이는 장소 몇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궁궐처럼 화려해 보이는 오두막과 창고의 모습을 한 직사각형의 건물.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회귀 전에 다양한 던전을 공략해 왔던 세운이기에 그것들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앞에 건 족장이 거주하는 곳이겠고, 뒤에 건 창고겠지.'

고블린은 단순하다.

오히려 지능이 낮으면 건물이 다 비슷하게 생겨 추론이 어렵겠지만, 적당한 지능을 가진 몬스터를 상대로는 추론이 더욱 쉬워진다.

단순히 던전 공략을 위해서라면, 거대한 오두막에 숨어 들어가 보스 몬스터를 잡는 게 우선이겠지만....

세운은 창고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애초에 숲을 불태우지 않고 여기까지 숨어들어온 것부터가 단순한 경험치나 공적치 이상의 뭔가를 얻기 위함이었다.

"키엑, 크에엑!"

저마다의 이유로 바쁘게 움직이는 고블린 사이로 세운이 스쳐 지나갔다.

적절한 은신술과 혼란스러운 상황 덕분에 그 누구도 세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밖의 평지와는 달리, 부락은 온갖 다양한 구조물이 다양했기에 몸을 숨기기에도 최적이었다.

세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창고로 보이는 건물의 바로 옆에 도착하였다.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몰라도, 경계 한번 철저하네.'

밖에서 보았던 조악한 무기가 아닌, 제대로 관리된 무기를 들고 있는 고블린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이, 주위가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제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었다.

땅 밑으로 들어가거나,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녀석들에게 사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운에게 있어 빈틈이란 찾는 것이 아닌 만드는 것이었다.

'카샤의 불씨.'

화륵!

"키엑?!"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불꽃에 고블린 하나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반응이 꽤 격렬하였기에 경비의 시선이 한순간 녀석에게 모두 집중되었다.

다만, 불꽃은 짧게 한 번 타오름과 동시에 사라진 후였다. 때문에 고블린은 다른 고블린의 놀림거리가 되어야 했다.

필사적으로 불꽃에 대해 설명하는 듯했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는 사이.

'쉽네.'

세운은 이미 경계를 뚫고 창고의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변변한 자물쇠도 없어서 두꺼운 나무로 입구를 막아 두었는데, 그걸 치우는 것 정도는 고블린을 해치우는 것보다도 간단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운의 예상대로 그 안에는 온갖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먹을 게 안 보인다며 크게 실망합니다.

첫발을 내딛자마자 보인 것은 창칼과 방패를 포함한 다양한 병기였다. 그것도 튜토리얼 초반부에서는 구하기가 힘들다고 알려진 냉병기(冷兵器)들.

한눈에 보아도 제법 쓸 만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 옆에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정체 모를 광석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마치, '마몬의 보물창고'의 하위 버전이랄까?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감히 이런 보잘것없고 하찮은 창고와 자신의 창고를 비교하지 말라며 미간을 찌푸립니다.

아니, 정정하겠다. 극 하위 버전 정도로.

'일단, 전부 챙겨야겠어.'

튜토리얼의 초반부에서 쇠로 만들어진 냉병기는 귀한 편이다. 게다가 이렇게 다양한 장비들은 세운의 능력인 '탐욕의 권능'과 매우 잘 어울렸다.

다만, 문제라면 창고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다는 점?

탑에는 게임처럼 인벤토리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았기에, 혼자서 이 많은 아이템을 챙기기는 불가능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아공간 주머니 ]

- 무색의 마탑에서 만들어 낸 주머니로써 공간 마법이 새겨져 작은 창고 정도의 면적만큼 물건을 수용할 수 있다.

세운의 권능이 아닌, 현재 마몬이 가지고 있는 진짜 보물창고. 그곳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장검 하나를 주머니 입구에 밀어 넣었다.

본래라면 당연히 주머니의 밑바닥이 뚫려 찢어졌겠지만.

쑤욱!

기다란 장검이 주머니 속으로 거짓말처럼 쑥 들어갔다.

다른 장비들 역시 마찬가지.

검이든, 창이든, 방패든. 주머니는 마치 다른 세계와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창고의 장비들을 쑥쑥 받아먹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아공간 주머니.

탑에서는 '무한의 주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템이었다.

이는 플레이어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였기에 매우 고액에 팔렸다.

그런 아이템을 공짜로 얻은 셈이니, 뒤랑달을 빌려준 대가치고는 훨씬 이득이 남는 장사였다.

"장비는 다 챙겼고."

세운이 고개를 돌렸다.

크기가 큰 만큼, 장비만 보관하는 게 아니라 보석이나 보존 식량 등 다양한 것들이 존재했다.

아공간 주머니의 공간은 아직 여유로웠기에, 망설임 없이 모든 아이템을 쓸어 담았다.

그러던 중, 세운의 눈에 푸른 빛의 보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나석?"

보석을 채우고 있는 영롱한 기운. 마나가 분명했다.

그리 품질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수가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대충 세어 봐도 백 개 이상.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세운에게는 이 창고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을 통틀어서 가장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마나석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하니까.'

이전에 백현에게 사용한 흑마석처럼 사용해 마나를 흡수할 수도 있고, 여러 마법을 새길 수도 있다. 장비에 사용해 마법적 힘을 담을 수도 있었다.

그때, 세운의 머릿속에 하나의 계획이 떠올랐다.

'그 방법이라면....'

본래의 계획이라면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 후, 고블린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도망가거나 부락에 불이라도 지를까 생각했는데, 이 마나석이라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계획'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운의 신조 중 하나.

고민은 짧게, 행동은 빠르게.

창고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을 털어 버린 세운이 새로운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 *

고블린 부락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오두막.

그곳은 이 부락에 존재하는 수천 마리의 고블린을 지배하는 족장인 '코콩칵'의 처소였다.

그리고 오늘, 족장의 심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아 보였다.

"케륵! 아직도 못 찾은 것이냐!"

"키익...."

"이런 쓸모없는 것들!"

빠악!

코콩칵이 휘두른 두꺼운 방망이에 고블린의 머리가 거칠게 터져 나갔다.

엄청난 괴력.

그는 홉고블린으로 태어날 때부터 왕으로 선택받은 고블린이었다. 키나 덩치는 어지간한 오크만큼 컸고, 힘도 고블린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키륵...."

"키이익...."

그야말로 폭군.

머리가 터져 나간 동료를 지켜보며, 코콩칵의 앞에 자리 잡은 고블린들이 몸을 덜덜 떨었다.

성과나 충성심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의 심기가 좋지 않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모두가 저렇게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인간의 사회였으면 금방 반기가 일어났겠지만, 고블린 부락에서는 달랐다.

오로지 힘이 전부인 사회.

공포 정치는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한 정치 수단이었다.

"다 꺼져라! 얼른 그 침입자 놈이나 찾아와!"

"케륵!"

"그리고 너! 가서 제일 어린 인간 한 마리만 데려와라. 배를 좀 채워야겠다."

"켁! 케륵!"

인간은 코콩칵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였다.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근육도 별로 없고 연한 피부에 냄새도 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운 좋게 그런 인간을 열 마리가량 포획할 수 있었다.

코콩칵은 인간을 먹을 생각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조금 가라앉아 왕좌에 앉았다.

"케륵! 저 멍청한 놈들. 도저히 수준이 맞지 않는군."

"그러게 말이야."

"그렇지? 역시 이 몸은... 뭣?"

푸욱!

"컥!"

갑작스러운 공격.

코콩칵은 목에서 느껴지는 예리한 감촉에 다급하게 몸을 뒹굴었다.

가까스로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만, 경동맥이 베인 터라 초록색 혈액이 분수처럼 뿜어졌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경추가 끊어질 뻔했다.

다급하게 상처를 지압하며, 코콩칵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붉은 갑옷을 입은 인간이 단검에 묻은 초록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역시 네임드 몬스터인가. 반사 신경이 빠르네."

"케륵! 네놈은 뭐냐!"

코콩칵이 악을 쓰며 외쳤다.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인간은 마치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만 같았다.

공격 역시 얼마나 예리한지, 조금의 저항감도 없이 자신의 목을 베어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 위에 군림하고, 단 한 번도 위기감을 느낀 적이 없었던 코콩칵. 그가 처음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전신의 털이 바짝 섰다.

본능이 어서 도망가라고 외쳐대고, 쿵쾅대는 심장 탓에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글쎄, 네놈한테 설명해 주기는 시간이 아까운데."

인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코콩칵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다급하게 목청을 높였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일대일로 이 인간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가 다스리는 부락의 한복판이 아니던가?

"경비! 이 망할 것들아, 어서 와라!"

"늦었어."

"뭐라?"

이제 곧 있으면 수백, 수천의 고블린이 몰려올 텐데 남자의 얼굴에는 조금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곧이어, 남자가 의문의 행동을 보였다.

단검을 들지 않은 왼손을 들더니, 엄지와 중지를 가볍게 튕긴다.

딱, 소리가 그의 귀에 닿을 때쯤.

콰콰콰콰쾅!!

콰르륵!

쿠르르릉!!

코콩칵의 뒤편에서 고막이 터질 듯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들이닥친 풍압이 그의 몸을 밀어내,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지압에 실패한 상처에서 초록색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벌벌 떨리는 손을 꽉 쥐며 뒤를 돌아보자.

"내, 내 부락이!"

고블린 부락이 불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제 37화

37. 제37화

마나석.

말 그대로 마나를 품고 있는 광석으로, 마법사는 물론 모든 플레이어에게 유용하게 쓰이는 광석이다.

그 사용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강력한 사용법에는 대표적으로 한 가지가 있었다.

폭발 마법의 인챈트.

마나석을 일종의 폭탄으로 만들어, 내부의 마나를 모조리 폭발시키는 것이다.

마나석을 일회성으로 소모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파괴력은 가장 수준 낮은 마나석이라 할지라도 건물 하나는 가뿐히 터트리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세운은.

쾅, 쾅, 콰앙!!

콰르르르!!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은신술을 최대한 활용하며 고블린의 부락 곳곳에 마나석을 설치해 두었다.

마나석에 새긴 마법은 당연하게도.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

- 화탑의 가장 기초적인 폭파 마법으로써 일정한 범위에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사용한 마나의 양에 따라 위력을 조정할 수 있다.

파이어 버스트. 즉, 폭발 마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수준이 높은 폭발 마법인 익스플로젼(Explosion)을 새기고 싶었지만.

익스플로전은 2 서클인 세운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 아니고 질 낮은 마나석에 새길 수 있는 마법도 아니었다.

원래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는 파이어 버스트지만, 마나석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를 집어삼키고 터져 나가는 그 위력은 족히 건물 하나를 터트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세운은 고블린의 창고에서 얻은 마나석 대부분을 부락 곳곳에 설치해 두었으니.

콰아아아앙!!

"키에에에엑!"

"케, 케헥! 크헥! 켁!"

폭발의 여파로 이곳의 오두막도 반파된 후였기에, 밖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뜨거운 불길뿐.

고블린들은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을 굴렀지만, 숨을 통해 들어오는 열기는 어쩔 수 없었다.

폐가 까맣게 타들어 가며,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어디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부락이 자랑하던 감시탑과 성벽이 무너지고, 고블린은 몸에 불의 붙은 채로 비명을 내지른다.

그야말로 지옥.

유황불이 들끓는다고 알려진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내, 내 부락! 내 부락이! 내 수하들이!"

"뭐 어때. 어차피 전부 수준에 안 맞는 멍청하고 쓸모없는 것들이라며?"

"네, 네놈이 감히!"

고블린 부락의 족장. 코콩칵이 뭉툭한 방망이를 꽉 붙잡으며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이 뜨거운 불지옥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고, 수하의 지원을 바랄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세운을 쓰러트리는 것만이 살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콰앙!

코콩칵이 휘두른 방망이가 왕좌를 깨트렸다.

분명 세운을 노린 것이지만, 세운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거, 지혈 안 하면 곤란할 텐데?"

서걱!

"키악!"

기존에 잘린 오른쪽의 경동맥에 더해, 왼쪽의 경동맥이 잘려 나갔다.

머리로 올라가는 혈액이 끊기자, 코콩칵의 얼굴이 하얗게 물들어 갔다.

코콩칵은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다급하게 양손을 목에 감았다. 그에 자연스럽게 방망이가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고.

"그렇다고 무기를 버리면 안 되지."

푹.

세운의 단검이 코콩칵의 목 중앙에 박혀 들어갔다. 손잡이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깊숙하게.

수천의 고블린을 이끌던 네임드 몬스터가, 일 분도 채 견디지 못하고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당한 것이다.

-네임드 몬스터, '교활한 홉 고블린, 코콩칵'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8,000point 상승합니다.

-네임드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4,000point 상승합니다.

-'코콩칵의 육모방망이'를 획득하였습니다.

코콩칵은 경동맥을 꽉 붙잡은 채로 목숨을 잃었다. 네임드 몬스터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하긴, 애초에 이런 던전이었던 것 같으니까.'

튜토리얼 두 번째 장에서 고블린 수천 마리가 존재하는 부락이라니. 이런 던전에서 네임드 몬스터까지 강력하면, 그 누구도 공략하지 못했으리라.

사실, 애초에 이 던전은 두 캠프가 협동하여 도전해도 공략이 어려운 히든 던전이었지만, 세운에게 그런 조건 따위는 적용되지 않았다.

-히든 던전, '교활한 고블린 부락'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공략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개인 공적치가 20,000point 상승합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이는 세운으로서도 처음 보는 부사였다.

하긴, 던전을 공략하는 수준을 넘어 던전 그 자체를 터트려 버렸으니, 아마, 이보다 완벽한 던전 공략은 찾기 힘들 거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네네."

세운이 코콩칵을 향해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이건 뭐, 폭식의 마신이 직접 신경을 써주니 권능을 사용하는 것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권능을 사용하자마자 여러 이빨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급하게 나타나 아가리를 벌렸다.

아직 제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지 못하고 있던 코콩칵의 사체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교활한 홉 고블린, 코콩칵'을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민첩이 5,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소량의 내공과 마나가 단전과 서클에 흡수됩니다.

과연 네임드 몬스터. 5레벨에 상당하는 능력치를 제공하며 사라졌다.

거기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추가 문구.

'마나까지 흡수할 수 있다니. 이건 몰랐네.'

지금까지 폭식의 권능으로 상승시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능력치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나를 모을 때도 심법이나 마탑의 수련법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폭식의 권능으로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니?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내공을 모으고 서클을 늘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제한이 있겠지만.'

처음 겪는 경우지만, 세운은 그 제한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바로, 마나의 유무.

이런 규모의 부락을 지배하는 홉고블린이라면 사용하지는 못해도 소량의 마나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마나가 폭식의 권능을 통해 세운에게 흡수되었다.

이게 바로 세운이 추측한 조건이었다.

던전 공략이 끝났으니 몸을 돌리려던 찰나, 베엘제붑의 메시지가 추가로 나타났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아직 부족하다며 노릇노릇 잘 익은 거대한 쟁반을 바라봅니다.

'쟁반?'

세운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곧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노릇노릇 잘 익은 쟁반. 즉, 세운이 폭파한 부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부락에서 세운에게 목숨을 잃은 고블린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최소, 천 마리 이상.

그 모두에게 일일이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베엘제붑이 고블린에게 질린 지금, 굳이 권능을 사용하여도 더 이상 능력치가 오르지도 않았으니.

'그냥 무시할까.'

세운이 귀찮음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한 세운의 생각을 잃은 것일까?

베엘제붑이 세운에게 새로운 힘을 선사하였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폭식의 권능을 한 단계 강화합니다.

-'폭식의 권능'으로 범위를 설정하여 많은 수의 사체를 한 번에 포식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일정 수 이상의 사체를 한 번에 포식했을 시, 추가적인 양분 흡수가 이루어집니다.

"오호."

범위 설정.

최근 들어 많은 수의 몬스터를 상대할 일이 많았던 세운이었기에, 제법 편해 보이는 능력이었다.

사용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몬스터 하나하나에 권능을 사용하는 건 제법 번거로웠으니까.

게다가 '추가적인 양분 흡수'라니.

세운은 망설이지 않고 강화된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였다.

-폭식의 권능으로 '교활한 고블린 부락'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부락을 덮쳐옵니다!

콰직!

부락의 중심에 있던 고블린의 사체 하나가 짓이겨지는 것을 시작으로.

콰직, 콰직!

우드드득!

부락 전체에 베엘제붑의 이빨이 덮쳐왔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식탁을 가득 채워가는 먹잇감을 바라보며 환호합니다!

그때, 부락 전체를 덮쳐온 아가리를 보며 세운은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이 가진 힘을.

만약, 저 이빨이 단순히 세운이 쓰러트린 몬스터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대상에게도 사용이 가능하다면?

끔찍한 비명과 함께 대상이 된 존재들은 살아 있는 채로 베엘제붑의 배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나씩 볼 때는 몰랐지만, 수많은 이빨이 부락을 덮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스럽게 그가 '마신'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락에 존재하는 고블린의 사체가 모조리 사라지고.

-범위 내의 부락에 지정된 2,101마리의 고블린 포식하였습니다.

-대량의 양분을 흡수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대량의 내공과 마나가 흡수되기 시작합니다.

"마나까지?"

모든 능력치 10 상승. 즉, 총 40의 능력치 상승이라는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내공과 마나까지 상승하다니! 게다가 그 양은 세운이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우웅!

마치, '잊혀진 영웅의 수행처'의 공동에서 느꼈던 것처럼 해일같이 거대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고블린 한 마리에 존재하는 마나는 놈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만큼 미약했지만, 무려 2,101마리의 고블린에게 스며들어 있던 마나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아무리 미약한 마나라도 그 전부가 세운의 몸에 한꺼번에 닥쳐오니 그 존재감이 엄청났다.

우우웅!

세운이 빠르게 파극심공과 흑탑의 수련법을 사용하였다.

길이 막힌 듯이 거칠게 일렁이던 기운의 해일이 세운의 단전과 서클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미 반갑자의 내공이 쌓여 있던 단전이 빠르게 팽창됐고, 최근에 길이 다져진 두 번째 마나 서클 또한 팽팽하게 차올랐다.

깨끗이 다듬어진 내공에 비해 몬스터가 쌓은 기운이 마나의 형태에 더욱 가까웠기 때문일까? 서클에 스며드는 마나의 양이 엄청났다.

그 양은 두 번째 마나 서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고.

그 결과.

-흑탑의 수련법을 통해 세 번째 마나 서클(Mana circle)을 생성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새로운 서클의 생성에 따라 3 서클 마법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마나 서클의 수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준이나 위력, 속도 등이 상승합니다.

-흑탑의 수련법이 가진 묘리에 따라 사용하는 마법의 파괴력이 더더욱 상승합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고작 튜토리얼 두 번째 장에서 세운은 세 번째 서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제 38화

38. 제38화

세 번째 마나 서클의 생성.

세운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세운의 위치는 고작해야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의 중간쯤이었으니까.

재능이 뛰어난 마법사도 튜토리얼이 끝날 무렵에 가까스로 2 서클 마스터 수준에 오른다는 걸 생각한다면, 이건 길고 긴 탑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탑의 역사를 갱신하였습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point가 상승하였습니다.

세운의 눈앞으로 찬란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십만 포인트. 세운이 지금까지 모은 공적치의 절반에 달하는 양이었다.

-마법에 연관된 수많은 성좌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성좌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습니다.

당연하게도, 세운의 마법적 재능에 관심을 가진 성좌들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래 봤자 마몬의 보물로 인해 대부분의 통신이 차단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몬의 힘으로도 보물로도 통신을 막을 수 없는 존재.

성좌, 다섯 번째 날.

오딘을 받드는 여전사인 발키리의 수장이며, 오딘에게 마법을 알려 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의 마녀.

사랑과 미의 여신, 프레이야의 등장이었다.

'여기서 벌써 주신급 성좌의 관심이라니.'

프레이야는 오딘과 함께 아스가르드를 다스리는 주신 중 한 명이다.

그런 만큼, 그녀의 격은 탐욕의 마신인 마몬에 비해서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격의 성좌의 관심은 튜토리얼이 끝날 무렵 재능과 실력이 증명된 플레이어에게 찾아오는 게 정상인데.

아니, 그마저도 극히 일부만이 주신급 성좌의 선택을 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성좌가, 겨우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에서, 그것도 마몬의 방해를 뚫고 세운에게 간섭해 온 것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날카로운 부리로 발할라를 가리킵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알 수 없는 미소로 다른 성좌의 간섭을 무시합니다.

'하긴, 프레이야의 마법 실력은 모든 신 중에서도 수준급이니까.'

튜토리얼에서 세 번째 서클을 개방한 세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미 세운을 바라보고 있는 두 마신의 존재 때문에 조금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침묵과 미소로 세운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어떤 간섭도 보이지 않았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의 것에게 관심을 가지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경고를 내뱉습니다.

-성좌, '다섯 번째 날'이 여전히 다른 성좌의 간섭을 무시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의 깃털이 부르르 떨립니다.

주신급 선신과 악신의 대립이라니.

보는 세운이 다 아찔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상대가 프레이야라 다행이지.'

온화한 성격을 지닌 프레이야라면, 굳이 불화를 만들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다른 신이었다면 마몬의 태도에 어떤 행동을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뭐, 상관없으려나.'

하지만 프레이야가 바라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세운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튜토리얼의 히든 피스를 찾아가며 성장하면 될 뿐이다.

게다가 신마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마몬과 같은 악신의 진형은 물론 프레이야 같은 선신들과 친해질 필요도 있었다.

새롭게 생겨난 세 번째 서클을 가볍게 회전시킨 세운이 몸을 돌렸다. 고블린 부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으니, 사람들에게 돌아갈 생각이다.

그런데 아직 불타고 있는 부락의 사이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대략 열에 가까운 인기척이.

이에 당장 무기를 다잡을 만도 한데 세운은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저들은 세운이 살려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부, 부락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저기 계신다!"

부락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 세운은 마나석을 감옥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교묘하게 설치해 두었다.

다만, 폭발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운이 나쁘면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 다들 살갗이 조금 그을린 것 말고 별 피해는 없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안 잊도록 하겠습니다!"

"흐흑, 저 정말. 흑, 꼼짝없이 고블린의 먹이가 되는 줄 알았어요. 저, 정말. 흑!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세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 왔다.

이때, 세운은 잠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데려가야 하나?'

그들을 구한 꼴이 돼 버리긴 했지만, 세운은 영웅이 아니다.

회귀를 하고, 캠프의 사람들을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버려두고 가자니, 그건 이들을 다시 죽이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엇을 고민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은인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다음부터는 저희끼리 어떻게든 목적지까지 나아가 보겠습니다."

남자의 표정은 굳건했다. 다른 사람들도 불안감이 엿보이긴 해도 무언가 깊게 각오한 눈빛이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물에서 건져주니 짐 내놓으라는 격으로 세운에게 빌붙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들에게는 튜토리얼에 대한 수용과 삶에 대한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긴, 전부 튜토리얼의 첫 장을 거치고 생존한 이들일 테니까.'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을 통과한 만큼, 다들 실력도 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의 눈빛 덕분에 한없이 부정적이던 세운의 생각이 긍정적으로 물들었다.

"지켜줄 생각은 없습니다. 만약 따라온다면, 지금의 마음가짐 이상으로 각오를 다져야 할 겁니다."

"...!"

"거리를 줄이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 겁니다. 최소한 한나절 이상은 쉬지 않고 걸어야 하니 기운 내시길 바랍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세운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고블린이 보관 중이던 식량 몇 개를 꺼내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타는 고블린 부락에서 생명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한편, 세운의 동료들은 유서아의 지시하에 시스템의 방향을 따라 앞으로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박정필이 스켈레톤을 타고 적극적으로 정찰도 해 주었고, 고블린 이후로는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기에 행군에 막힘은 없었다.

그러던 중, 유서아가 후열의 마차로 다가와 강한철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너무 힘들면 잠깐 쉬거나 저희가 다 같이 밀어도 될 텐데...."

"이것도 수련이다. 문제없다."

"엄청나게 강해지셨네요. 아, 물론 한철 씨는 처음부터 강하셨지만요."

"강해진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리고 혈랑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세운 씨는... 뭐랄까,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니까요."

강한철은 스켈레톤을 대신해서 마차를 이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스켈레톤 한 마리는 백현이 다루고 있었다고 해도 다른 한 마리는 세운의 마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운이 고블린을 쫓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운의 스켈레톤은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고 강한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던 것이다.

뭐, 사람들 중에서 홀로 마차를 끌 수 있는 건 강한철이 유일했으니까.

게다가, 스스로도 몸이 근질근질했다며 자선해서 마차를 끄는 중이다.

수련이라는 말도 거짓말이 아닌 게.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내딛는 발걸음에 더 힘을 주라며 계약자를 가르칩니다.

실제로도 그는 성좌의 지시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한철이 내디딘 곳에는 그의 발자국 모양이 움푹 파인 채 존재감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세운 씨, 괜찮겠죠?"

"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약하지 않다. 분명, 전처럼 훨씬 강해진 모습으로 되돌아오겠지."

"거기서 더 강해지다니, 상상이 안 가네요."

유서아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했다.

모두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곳에서 유서아가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는 세운과 강한철 정도밖에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긴장을 풀고 있을 수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스켈레톤 하나가 빠르게 달려왔다.

여느 때처럼 정찰을 다녀온 박정필이었다.

다만, 그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우웨엑!"

"정필 씨!"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창백한 얼굴로 먹은 것을 싹 게워내는 박정필.

세운의 캠프. 아니, 이제 거점을 떠났으니 '클랜'이라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지.

아무튼, 클랜에서 유일하게 치료사 역할을 맡고 있는 마르바스의 계약자, 이하늘이 앞으로 달려 나가 박정필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곧 인상을 굳힌 그녀는 성좌를 통해 받은 힘을 이용하여 박정필을 치료하며 유서아에게 그 증상을 설명해 주었다.

"...독이에요."

"독이요? 설마, 또 고블린들이!"

"아니에요. 외상은 보이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호흡기로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아요."

여기까지 말한 이하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졌다.

호흡기로 인한 감염.

그렇다면, 공기 중에 독이 분포되어 있다는 뜻이고.

박정필의 상태를 보아하니, 급성 감염보다는 서서히 독이 중첩되어 이 꼴이 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들 천을 적셔서 코와 입을 막으세요! 공기 중에 독이 분포되어 있어요!"

"고, 공기 중에?"

어쩐지, 얼마 전부터 햇빛이 흐려진다 싶더니. 구름이 낀 게 아니라 흐릿한 독 안개가 햇빛을 막고 있었던 듯했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호흡기를 막아 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박정필처럼 심하진 않지만, 사람들의 몸에서 나쁜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마르바스 님!"

이에 이하늘이 다급하게 자신의 성좌, 마르바스를 불러보았지만.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환자의 수가 너무 많다며 선택의 순간임을 알립니다.

성좌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성좌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해도, 이하늘이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이 자리의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일단 후퇴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독 안개를 빠져나갈 때까지 무사할 듯한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꽉!

이하늘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제야 어엿한 치료사로서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자마자 이런 상황이 찾아오다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명의 남성이 떠올랐다.

가장 처음 부상자가 생겨났을 때, 부상자가 가장 많이 생겼을 때. 기척 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그녀에게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던 남자.

그 때문일까?

"벌써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네."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후우우웅!

"바, 바람?"

사람들의 주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숨을 조여오던 독 안개가 물러나고, 흐릿했던 햇볕이 강하게 쬐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붉은 갑옷에 회색 망토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왔다!"

"쿨럭! 형니임...."

이제는 사람들에게 혈랑이라는 이명으로 더욱 익숙해진 플레이어.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브리즈(Breeze) ]

- 녹색의 마탑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초적인 바람 마법 중 하나. 가벼운 산들바람을 일으키는 마법으로써 주로 공격보다는 생활용 마법으로 사용된다.

세운의 등장이었다.

제 39화

39. 제39화

독 안개.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마주치는 특이 환경이었다.

독성이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그 안을 걷다 보면 독성이 꾸준히 중첩되어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이거 때문에 꽤 고생했었지.'

회귀 전, 세운의 일행은 안개의 독성을 알아채자마자 빠르게 안개의 밖으로 후퇴하였다.

덕분에 안 그래도 적었던 일행 중 두 명이 중독 상태에 빠졌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독을 해독할 방법도, 피할 방법도 없었으니 독 안개를 피해 빙 둘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꽤 지연되었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

마몬의 보물창고에서 꺼내든 마법서 덕분에 주위의 독 안개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이 방법이라면 최단 거리를 통해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 일단.

"이하늘이라고 했나? 얼른 치료부터 하지."

"감사해요! 다들 순서대로 치료해 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하늘이 사람들의 독을 빠르게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캠프의 유일한 치료사로서 여러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성좌는 상처보다는 질병에 더욱 연관이 있었다.

그러니 독의 치료는 가장 자신 있는 분야나 다름없었다.

상태가 심하던 박정필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독이 빠르게 치료되었다.

'빨리 출발하려면, 나도 돕는 게 좋겠지.'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큐어 포이즌(Cure poison) ]

- 백탑의 가장 기초적인 해독 마법으로써 체내에 스며든 독을 중화시킨다.

우우웅-

이제 3 서클이 된 세운의 서클이 빠르게 회전한다.

서클마다 다른 마탑의 묘리를 섞을 거라는 계획과는 달리, 얼떨결에 삼 서클을 달성해 버려 아직 청탑과 흑탑의 묘리밖에 적용되지 않았지만, 극독도 아니고 가벼운 독성 정도는 세운도 가볍게 정화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며 클랜의 분위기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세운 씨! 돌아오셨군요!"

"강한철이 발자국을 워낙 깊게 찍어둔 덕에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수련법이었을 뿐이다."

"그보다 세운 씨, 저기 저 사람들은...?"

유서아가 세운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듯이 굳은 눈빛을 가진 열 명의 남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세운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남자 하나가 대표로 나섰다.

"이일중이라고 합니다. 세운 님 덕분에 저희 모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유서아라고 해요."

"혹시 허락해 주신다면, 세운 님을 따라 이 클랜에 들어오고 싶습니다. 물론, 저희 모두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남자가 말을 길게 이어갔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외부인이라는 걸 알다 보니, 신뢰를 주기 위한 듯했다.

하지만, 유서아는 남자의 말 대신 세운 쪽을 바라보았다.

세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서아는 설명을 계속 이어가던 남자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환영해요."

"...정말 저희를 다 받아주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세운 씨가 인정한 사람들이라면, 저희도 믿을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해라니요. 음,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은데. 아름아, 다운아?"

"네, 언니!"

"네, 언니!"

"이분들 옷 좀 챙겨드리고, 우리 쪽 상황 좀 간단하게 안내해 줄래?"

"네, 맡겨 주세요!"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여벌용으로 만들어 둔 가죽옷들이 남아 있거든요!"

쌍둥이 자매가 세운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안내해 주었다.

유서아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환영해 주는 분위기였기에 그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클랜의 규모에 놀라야만 했다. 세운의 클랜은 처음 튜토리얼을 시작할 때와 인원수가 거의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방금 독에 감염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부상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에는 온갖 소재와 침낭, 식량들도 가득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튜토리얼에 온 후 느껴보지 못한 '여유'가 묻어나 있었다.

"의외네요. 세운 씨가 사람들을 데려오다니."

"여기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면, 의지는 확실할 테니까."

"의지라.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마음가짐이긴 하죠."

유서아와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이하늘은 사람들의 치료를 모두 끝냈다.

독이 정화되자마자 박정필이 달려와 오른팔이니 존경이니 하는 말들을 내뱉었지만, 세운은 귀찮다는 듯이 박정필을 내쫓았다.

그리고 다시금 튜토리얼을 따라 목적지까지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저기 뿌연 게 전부 독 안개였단 말이지? 으, 아까까지 속 울렁거리던 것만 생각하면...."

"끔찍해, 정말."

세운의 마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발동되고 있었다.

2 서클이었을 때에는 마나의 사용에 조금이나마 부담을 느꼈겠지만, 지금 세운의 수준은 무려 3 서클. 브리즈 같은 기본 마법은 얼마든지 여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다른 힘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것.

기본 마법이라고는 해도, 클랜을 감쌀 정도로 범위를 확산 중이었기에 직접 전투에 나서면 마법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그것을 노리기라도 하는 듯이.

위이잉!

"찌직!"

다양한 몬스터가 나타나 클랜을 공격해 왔다.

팔뚝만 한 크기의 말벌이나, 허리까지 올라오는 크기의 쥐.

그중에는 검은 액체를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슬라임도 존재했다.

그러나.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유서아의 지시하에, 사람들은 훌륭하게 몬스터를 막아 냈다.

만약 다치거나 독에 감염되더라도 이하늘이 있었기에 더욱 당당하게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본래는 독 안개가 튜토리얼 두 번째 장에서 플레이어들을 가장 크게 괴롭히던 시련 중 하나였지만.

세운의 바람 마법과 이하늘의 치료 능력 덕분에 오히려 몬스터 웨이브 때보다 더욱 여유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 안개의 시련을 훌륭하게 막아 냈습니다.

-시련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0point를 제공합니다.

"바깥 공기가 이렇게 맑았었나?"

세운의 클랜은 무사히 독 안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그 이후로도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절벽 사이를 이동하거나, 산성 용액으로 뒤덮인 늪지대를 지나치거나, 몬스터의 공격을 받는 등.

하나같이 목숨이 걸린 시련들이었다.

회귀 전의 세운에게는 모두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것들.

그때는 저 시련들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안간힘을 썼었는데.

-휘청이는 다리 시련을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시련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000point를 제공합니다.

-산성 늪지대의 시련을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시련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1,500point를 제공합니다.

-붉은 곰 무리를 훌륭하게 토벌하였습니다.

-시련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2,000point를 제공합니다.

지금은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모든 시련을 일직선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부상자가 생긴다 해도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기에 치료사인 이하늘과 세운의 존재 덕분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도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형님, 저 앞에 길이 막혔는데요? 마차는 못 지나갈 것 같은데."

"그냥 가. 뚫으면 되니까."

"오오, 역시 형님이십니다!"

생각보다 훌륭하게 정찰병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박정필과.

"길이 험하니 다들 주의하세요! 아름아, 다운아. 마차 바퀴 좀 봐 줄래?"

"네, 언니!"

"내 거는 튼튼해서 절대 안 부서지겠지만. 후훗!"

"내 거도 절대 안 부서지거든!"

이제는 물 흐르듯이 능숙하게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는 유서아.

"저 바위인가? 내가 뚫겠다."

콰앙!!

와르르르-

"우와, 무슨 사람이 주먹으로 바위를 부숴...."

"우리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세 명은 넘사벽이네. 진짜."

압도적인 힘으로 장애물을 돌파하는 강한철 등.

세운 말고도, 다양한 이들이 활약을 보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히든 던전, '악충의 산란장'을 완벽하게 공략하였습니다.

-놀라운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보상으로 개인 공적치가 4,000point 상승합니다.

-'회악충의 갑각'을 획득하였습니다.

"갑각이라. 어르신한테 가져다드리면 좋아하시겠네."

세운은 시간이 날 때마다 조용히 빠져나와 각종 히든 던전을 찾아내 공략해 냈다.

회귀 전, 생존을 위해 시련을 피해서 필사적으로 돌아다니며 '여정의 지침표'를 사용한 덕에 위치를 알고 있던 던전들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던전을 발견했을 뿐이지 던전을 공략할 힘은 없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 던전이야 혼자서도 가볍게 공략할 수 있었다.

-폭식의 권능으로 '악충의 산란장' 전체를 지정하였습니다.

-폭식의 어금니가 부락을 덮쳐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 톡 터지는 식감은 언제 느껴도 환상적이라며 악충의 체액을 음미합니다.

던전의 몬스터를 모두 포식하는 것으로, 세운의 공략이 끝이 났다.

이번에도 꽤 많은 기운이 흡수되어, 단전과 서클에 쌓여갔다.

물론, 3 서클이 만들어졌을 때처럼 극적인 효과는 아니었지만, 이것으로도 어지간한 심공이나 마나 수련법 이상의 효율이었다.

이대로라면 4 서클 역시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님, 나오셨습니까!"

"네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정찰하다가 흔적이 보여서 따라와 봤습니다! 몬스터를 저런 식으로 학살할 수 있는 건 형님뿐이지 않습니까."

흔적을 발견했다니.

세운이 알기로 박정필에게 수색에 관련된 스킬은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즉, 그저 눈썰미만으로 세운의 흔적을 쫓아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회귀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강한철의 뒤에 붙어서 거들먹거리다가, 결국 방패막이가 사라지자 덩달아 목숨을 잃은. 그게 바로 세운이 회귀하기 전에 보았던 박정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회귀 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녀석에게는 재능이 충분했다.

"혹시 어디 더 들르실 겁니까? 사람들이라면 거리 여유 있습니다. 마차가 지나가기 힘든 길목이라 시간이 좀 걸려요."

"아니, 바로 돌아갈 거다."

"오, 형님이 웬일이십니까?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이곳저곳 싸돌아다니셨으면서?"

녀석의 말대로다. 사람들을 놓치지 않을 정도에 한해, 세운은 언제나 바깥을 돌아다니며 히든 피스를 찾아냈다.

그 덕분에, 벌써 공략해 낸 히든 던전만 해도 총 다섯 곳. 그 외에도 히든 아이템 몇 개와 추가 공적치를 대거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찾을 만한 건 다 찾아냈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진짜, 형님 공적치는 볼 때마다 깜짝 놀란다니까요?"

열심히 히든 피스들을 찾아다닌 결과.

세운의 공적치는.

[ 1위 : 정세운 250,080point ]

[ 2위 : 강한철 16,220point ]

[ 3위 : 유서아 15,980point ]

무려 25만에 육박해 있었다.

또 하나 바뀐 점이라면, 강한철과 유서아의 순위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유서아가 전투와 함께 사람들의 지휘까지 도맡아 하다 보니 개인으로서 획득하는 공적치가 줄어든 결과였다.

'이 정도면 못해도 순위권에는 들어 있겠지.'

솔직히 전체 랭킹 1위를 차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치지만, 애초에 종(種)부터가 다르거나, 시작부터 강력한 성좌의 힘을 받는 등. 탑에는 언제나 번외 급의 플레이어가 존재한다.

그러니 이것으로 자만을 가지는 것은 곤란했다.

게다가.

"얼른 가지."

"네, 형님! 제 백랑의 탑승감 한 번 느껴보시죠! 타다 보니까, 이제는 드라이브 솜씨가 늘어서 말입니다! 속도감이 아주...."

[ 튜토리얼 두 번째 장 – 이동 ]

-화살표를 따라 이동하여 목적지에 도착하여야 합니다.

-목적지 도착까지 남은 시간 : 116시간 22분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이다.

제 40화

40. 제40화

-비명의 숲 시련을 훌륭하게 통과하였습니다.

-시련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2,000point를 제공합니다.

세운이 합류한 후, 비명의 나무라 불리는 장애물의 정리 속도가 빨라지며, 마지막 시련이 무사히 끝이 났다.

물론, 이게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의 마지막 시련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세운뿐이었지만 말이다.

"으, 드디어 끝났다!"

"고막 찢어지는 줄 알았네."

"그것도 그거지만, 길을 막아대는 나무들 탓에 너무 힘들었어."

"다들 고생하셨어요!"

시련이 끝나고,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비명의 숲에서 얻은 소재를 정리하고, 치료와 식사 시간을 가진다.

뇌를 쿡쿡 쑤시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에 괴롭힘을 당하고 온 참인데도 사람들은 금세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실력이 는 탓인지, 튜토리얼의 유형이 달라진 탓인지.

몬스터 웨이브 때에 비해서 부담감은 적어지고, 그에 반해 자신감은 크게 는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만심이 는 건 아니다.

몬스터 웨이브에서 자만심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일중 씨도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다들 배려해 주신 덕에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다들 일중 씨 일행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세운이 고블린 부락에서 구한 사람들 역시 클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과연, 몬스터 웨이브를 통과한 정예들이라 그런가? 그들의 실력은 유서아나 강한철 같은 주력을 제외한다면 클랜에서도 돋보일 정도로 뛰어났다.

도축이나 요리 등, 잡일에 관해서도 적극적이었고 말이다.

"잘 돼 갑니까?"

"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제가 아는 해부학과는 다른 점이 많아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세운이 백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간만의 휴식 시간에 발을 뻗고 쉬는 동안에도, 그는 마차 위에서 눈이 빠져라 만티코어의 사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렵다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몬스터의 사체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천생 네크로맨서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성좌, '죽음을 짓밟는 말'이 아주 훌륭하다며 이제 꼬리를 살펴보아도 될 것 같다며 기분 좋게 푸르릉거립니다.

백현의 옆에 붙은 성좌, 가미긴도 그의 실력을 좋게 보고 있는 듯했다.

대상이 무려 만티코어의 사체였던 터라 시간 제한이 너무 촉박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가미긴의 반응을 보니,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현의 재능에 만족하며 등을 돌리는 순간, 누군가가 세운의 뒤에서 햇빛을 막아섰다.

세운의 클랜에서 이런 덩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대련을 부탁한다."

"아, 저두요! 식량 문제만 해결하고 바로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강한철.

시련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것이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와 대련을 신청하는 게 귀찮을 법도 하지만, 세운은 오히려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뛰어난 하드웨어와 열정.

그 두 가지 덕분에, 강한철의 실력은 미친 듯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유서아 역시 마찬가지.

세운에게 쌍검술을 배운 이후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것인지 강한철과 함께 대련을 신청해 왔다.

둘 다 잠재력이 워낙 높았던 터라, 세운으로서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미루지."

늘 알겠다며 주먹을 들어 올리던 세운이었는데 처음으로 대련이 거절당하자, 강한철의 얼굴이 아쉬움으로 물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심공을 알려 주기로 했었나?'

조급할 만도 하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공을 사용한 세운의 무공을 목격한 순간부터 심공에 대한 강한철의 관심이 엄청났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안 된다.

"어째서지?"

"이제 슬슬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거든."

"...알겠다. 그럼,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부탁하지."

"그래."

역시, 강한철.

다른 사람이라면 목적지에 다 와 가는 건 어떻게 아는 것인지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운은 강한철의 이런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궁금증을 가진 사람에게 회귀에 대한 것을 숨기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꽤 귀찮은 짓이었으니까.

강한철에게 대련이 취소되었다는 걸 전해 들은 유서아도 아쉬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동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평원이네."

"또 몬스터 기습인가?"

"이제는 솔직히 그게 더 편하지. 비명의 숲이나 산성 늪지대를 통과하는 것보다는."

"그건 그래."

사람들은 탁 트인 평지를 바라보며 안심했다.

기습이라고는 해도 박정필이 백랑을 타고 주변을 빠르게 정찰 중이었기에 걱정은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못 미더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적에게 들키지 않고 정보를 물어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형님, 적입니다! 몬스터예요!"

박정필이 앞길의 현황을 가져왔다.

"수는?"

"저, 그게 수를 말하기가 조금 애매합니다."

박정필이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세운이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유서아가 다시 한번 되묻자, 박정필이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기습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몬스터의 영역 같은 느낌이던데요? 그냥 사방에 몬스터가 가득해요. 무슨 게임 속 사냥터처럼."

"혹시 뭐, 토벌 시련 같은 걸까요? 몬스터들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거나...."

"그리고 또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뭔데요?"

"그, 들킬까 봐 더 깊게는 못 들어갔는데. 가까이 다가가니까 화살표가 아래쪽으로 기울던데요?"

"기울다니.... 그럼 설마!"

유서아가 무언가 알아챈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세운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도착이다."

* * *

[ 튜토리얼 두 번째 장 – 이동 ]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하였습니다.

-웨이브에 참여한 모든 인원에게 4,000point를 제공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을 훌륭하게 끝마쳤습니다!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을 54시간 41분 만에 완료하였습니다.

-목적지까지의 도착 시각을 크게 단축하여 튜토리얼에 참가 중인 모든 인원에게 4,000point를 추가로 제공합니다!

"저, 정말 도착한 거야?"

"끝났다! 이번에도 통과했어!"

화살표가 급격히 기울며 직각을 이루는 순간, 유서아의 예상이 적중하며,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에 막이 올랐다.

단 한 번의 시련도 피하지 않고 직진으로 전진한 덕분에 도착 시간도 크게 단축되어 많은 공적치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모두가 즐거워할 때, 세운은 혼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 등은 아닌가 보네.'

세운이 알기로, 두 번째 장에는 순위에 따라 그에 걸맞은 추가 공적치가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시스템 창에는 순위에 대한 언급 대신, 단축된 시간에 대한 언급만이 존재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먼저 두 번째 장을 끝냈다는 뜻이었다.

아마 세운의 클랜과 달리 짐도 챙기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까지 직행한 파티가 있는 것이겠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히든 피스에 비해서는 오히려 손해니까.'

순위권으로 획득하는 공적치보다, 세운이 히든 피스로 획득한 공적치의 양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 중, 전방에서 정체 모를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크게 들려왔다.

"그어어어-!!"

고개를 돌려보니, 박정필의 정보처럼 필드에 수많은 몬스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엉이 머리를 한 곰, 아울 베어. 기다란 손톱을 드러내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늑대 인간, 워울프. 흙으로 된 몸을 가진 난쟁이, 노움 등.

그들은 주변의 다른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집하고 있었다.

박정필이 말한 '사냥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때, 사람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목적지까지의 도착시간이 단축되어 남은 시간 동안 추가 혜택이 발생합니다.

-남은 시간 동안 자리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몬스터 사냥 시 1.5배의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튜토리얼 세 번째 장 – 충돌'까지 남은 시간 113시간 17분

"충돌? 자리 선점? 도통 무슨 말인지...."

"서아 씨, 어떻게 할까요?"

"으음...."

세 번째 튜토리얼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지 않았다. 알 수 있는 정보는 '충돌'이라는 이름뿐.

몬스터 사냥 시 추가 공적치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좋았지만, 세운을 제외하고는 공적치에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유서아도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간만의 휴식을 누리며 세 번째 튜토리얼을 기다릴지. 아니면 추가 공적치를 획득하며 앞으로 나아갈지.

그렇게 모두가 유서아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쯤.

"세운 씨?"

세운이 앞으로 나아가 몬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세운의 주위에 하얀 서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온도가 빠르게 낮아지고 서리의 크기가 점점 커지더니 무수하게 많은 얼음송곳이 되었다.

[ 프로즌 웨이브(Frozen Wave) ]

- 청탑의 얼음계 공격 마법으로써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의 파도를 일으켜 적을 공격한다.

세 번째 서클이 생겨난 후 처음 사용하는 3 서클 마법.

세운의 서클 기반이 '청탑의 수련법'이었던 만큼, 청탑의 마법을 사용하니 안정감이 엄청났다.

게다가, 거기에 흑탑의 묘리까지 겹쳐지니.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투명한 얼음송곳이 검게 물들어 갔다.

일렁거리던 냉기도 검은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세 개의 서클 중에 두 개의 서클이 흑탑의 묘리를 받아들인 덕에, 어둠의 속성력을 가장 많이 받은 듯했다.

곧이어, 세운이 활짝 펼쳤던 주먹을 꽉 쥐는 순간.

파바바밧!

시린 냉기와 함께, 검은 송곳이 몬스터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얼음 조각의 수는 눈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냉기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조차도 순식간에 얼려 버릴 정도로 차가웠다.

당연하게도, 이에 닿은 몬스터들은.

"그-어어...."

몸이 얼어가기 직전, 아주 짧은 신음만 남긴 채 차갑게 굳어가야 했다.

몸이 얼자마자 들이닥친 얼음송곳은 몬스터의 몸을 산산조각 냈고, 바닥에는 딱딱하게 얼은 몬스터의 잔해만이 가득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건 또 새로운 조리법이라며 시원한 먹잇감에 대한 기대를 드러냅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깊숙이 들어간다."

피부를 찌르는 냉기보다 차가워 보이는 세운의 눈빛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41화

41. 제41화

지금은 조금 나아졌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세운을 두려운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혈랑이라는 이명과는 다르게, 세운은 클랜을 마치 사자처럼 강하게 키웠으니까.

그러나 그런 만큼 세운에 대한 믿음 역시 존재했다.

세운이 존재한 덕에, 자신들이 이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세운이 있었기에, 자신들이 강하게 성장한 것은 모두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세운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드드득!

째앵!

평소와는 달리 스스로가 앞장서서 몬스터를 휩쓸고 있는데 그 누가 불만을 제시하겠는가?

사람들은 묵묵히 세운을 따르며 필드의 몬스터를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다행히도 몬스터들에게는 무리의 개념이 없어서, 자신의 영역이 아니면 전투가 일어나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정말 게임 같네요."

"형님, 제가 또 왕년에 어지간한 게임들 다 쓸고 다녔거든요? 이런 건 원래 몰이꾼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세운뿐만이 아니라 캠프의 모두가 몬스터 정리에 나서고 있다.

거기에 영역 안에서 꼼짝도 안 하던 몬스터들이 어찌 된 일인지 박정필의 도발에는 홀라당 넘어와 달려와 주기까지 하니.

세운의 마법 한 방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사라져 갔다.

이렇게 되니, 마차를 끄는 속도보다 몬스터가 쓰러지는 속도가 더 빠를 지경이다.

-'아울 베어'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1, 체력이 3 상승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차갑게 언 먹이를 우적거리며 머리가 찡해짐을 느낍니다.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가 많다 보니, 폭식의 권능이 발휘하는 효율 역시 올라갔다.

'이 속도라면 제법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겠어.'

세운이 굳이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이유는 다음 튜토리얼의 특징 때문이었다.

튜토리얼 세 번째 장, 충돌.

그 내용은 간단하다.

바로, 서바이벌(survival).

두 번째 장의 시간이 모두 끝나는 순간, 튜토리얼이 시작되며 목적지에 존재하는 플레이어 중 절반만이 세 번째 장을 통과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클랜끼리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특히, 목적지의 초입 부분은 전쟁의 한순간이나 다름없게 된다.

아니, 전쟁은 잦아 봤자 서너 개의 세력이 붙을 뿐이지.

세운이 회귀하기 전에는 세 번째 튜토리얼이 시작되는 순간, 초입부 부근은 치열한 '개판 싸움'이 벌어졌다.

보이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앞뒤 좌우할 것 없이 적으로 가득했다.

물론, 그곳을 통과하면 많은 포인트를 벌 수는 있겠지만. 세운의 클랜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여러 클랜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미리 최심부 부근을 선점해 두려는 것이다.

그렇게.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또 새로운 먹거리를 보며 침을 줄줄 흘려보냅니다.

한동안 세운의 클랜은 파죽지세를 유지하며 평원의 몬스터를 빠르게 쓰러트려 갔다.

* * *

세운의 클랜이 한창 전투를 벌이던 무렵. 상공 높은 곳에서, 매 한 마리가 그 바로 위를 맴돌고 있었다.

생각 없이 보면 그저 우연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먹이도 없는 곳에서 매가 지속적으로 맴돌고 있다는 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게다가, 매는 누군가의 명령이라도 받은 듯이 철저하게 세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힛, 저놈들입니까?"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긍정을 표하며 분노를 한껏 표출합니다.

혼란의 연주하는 산양, 판.

올림포스에 존재하는 성좌로서 표면적으로는 자연과 목축의 신이라 불리지만 실상은 공포와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신이었다.

그런 신이. 지금, 구불거리는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 남자를 통해 세운을 관찰하고 있었다.

목축의 신인 만큼, 매를 부려 시야를 빌리는 것 정도는 매우 간단했다.

"과아연! 신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놈들이군요! 아~주 강해 보입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저들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와 평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게다가, 그가 숨어 있는 위치 역시 상식의 선을 벗어나 있었다.

바로, 몬스터 사이.

영역 안이라면, 플레이어를 마주하는 순간 무조건 공격을 하게 되어 있는 게 바로 몬스터들인데, 이상하게 남자에게는 조금의 살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자를 숨기고 지키려는 듯이 남자의 주변을 넓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런데 신께서는 어째서 저들을 노리고 계신 겁니까?"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그건 알 것 없다며 얼른 자신의 지시를 이행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세운에게 관심을 가졌던 성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자마자 서클을 만들어 낸 세운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곧바로 차단당하고 말았다.

다시금 통신에 개입하려 해 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격이 낮다'라는 이유로 개입이 불가능했다.

격이 낮다니.

생각해 보아라.

올림포스 안에서 큰 힘을 가지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는 어엿한 올림포스의 신 중 하나다. 그런데 격이 낮다고 거절을 당하다니?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나서야, 자신에게 물을 먹인 상대가 '마신'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신이었으면, 이쯤에서 격의 차이를 깨닫고 물러날 법도 하지만 판은 그러지 않았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발굽을 부들부들 떨며 감히 자신을 당황시킨 상대에게 증오감을 느낍니다.

복수.

상대가 마신이건 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감히, 제우스를 아버지로 둔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 준 이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때문에 선택한 플레이어가 바로 이 인간이었다.

"히히, 뭐. 저야 상관없습죠! 신께서 지시하는 일이라면 뼈가 시리도록 재미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남자가 흥분을 표출하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에서는 광기가 뚝뚝 흘러내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이 크게 울부짖었다. 그게 남자의 천성인지, 판에 의해 세뇌되어 정신이 오염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당장 저들에게 공포와 혼란의 연주를 들려주기를 바랍니다!

"히히히힛!"

그가 세운의 클랜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세운의 클랜이 몬스터를 뚫고 전진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이틀이 지났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몬스터의 수준이 강해졌지만, 힘들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갑작스러운 기습도, 불편한 지형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몬스터를 상대하다 지치면 쉬고, 다치면 치료를 받으면 될 뿐이다.

심적 부담감이 없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그래도 이제 절반은 왔나.'

회귀 전에는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데. 다른 클랜의 견제 없이 자신의 영역에서 안주하고 있는 몬스터만을 쓰러트리며 나아가다 보니 생각보다 짧은 느낌이었다.

콰아앙!!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아주 마음에 드는 땅 울림이라며 귀를 기울입니다.

커다란 굉음에 고개를 둘러보니, 강한철이 검푸른 기운이 일렁거리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틀 전, 약속한 대로 세운이 알려 준 심공이었다.

덕분에 강한철은 진주언가권의 초식을 전보다 더욱 완벽하게 구사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강해진 힘은, 강한 근력에 근거하여 지진을 일으키는 아가레스의 권능에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반면에.

휘이익-!!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며 귀를 기울입니다.

강한철과 함께 심공을 배운 유서아는 내공으로 근력을 늘리는 대신 보법에 더 큰 내공을 치중하였다.

발걸음이 빨라지자, 그녀의 검은 더욱 빠르고 현란해졌고. 너무나도 빠른 검에 공기가 잘려 나가며 몬스터가 베이는 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 둘이 분발할수록.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그깟 바람 소리 따위, 이 웅장한 땅의 울림과는 비교도 안 된다며 누군가를 비웃습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무식하게 힘만 세 봤자, 속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누군가를 비웃습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저런 가벼운 검 따위 누군가의 다리처럼 약해 빠졌다며 조롱합니다.

-성좌, '왕관을 쓴 거미'가 무식하게 땅바닥이나 쳐대는 모습을 보니 누군가의 텅 빈 머리가 떠오른다며 조롱합니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둘의 성좌, 바알과 아가레스의 신경전이 더욱 거세지긴 했지만 말이다.

'뭐, 나쁜 일은 아니니까.'

조금 시끄럽긴 해도, 저들의 신경전은 유서아와 강한철을 더욱 강하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지금만 보아도 상대의 계약자를 이기기 위해 서로의 계약자에게 더 강한 권능을 하사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잠시 자리에 앉아 마나를 회복하던 세운이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전방을 바라보았다.

슬슬 박정필이 몬스터를 몰이해 올 때가 되었다.

'제왕 독수리의 척안'을 사용하여 시각을 강화해 보았지만, 전방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터라 먼지에 가려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어차피 아낄 이유도 없었던 터라, 세운은 곧장 창고를 열어 쓸 만한 보물을 뒤져보았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코볼트의 짝귀 ]

- 주로 광산 속에 살아가는 탓에 청각과 후각이 크게 발달하여 있는 몬스터로 코볼트는 뛰어난 청각으로 벽에 귀를 기울여 광석을 찾아낸다고 한다.

쫑긋!

보물을 사용하자마자, 주위의 여러 소리가 폭넓게 들려왔다.

청각이 좋아졌다고 해서 단순히 '크게' 들리는 게 아니다.

마나의 분배에 따라, 여러 소음 중에서 필요한 소리를 골라내거나 작은 소리에 집중하는 등.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청각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운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건 저 멀리, 박정필이 떠난 방향이었다.

두두두두두-!!

'역시, 오고 있네.'

영역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이곳의 몬스터라면 이렇게나 한꺼번에 이동할 리가 없었다. 박정필이 몰이를 해 오지 않는 이상, 들릴 리가 없는 소리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몬스터가... 너무 많은데?'

세운의 교육 덕분에, 박정필은 몰이꾼 생활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때문에 요즘에는 세운이 마법 한두 방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몬스터를 데려오고 있었다.

몬스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50마리 정도?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발걸음이 겹치고 겹쳐, 수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게감 역시 큰 것을 보니, 꽤 강한 몬스터들인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 누군가의 비명도 함께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악! 형니이이이임!"

박정필. 녀석의 외침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러던 중, 세운은 박정필의 비명과 몬스터의 발걸음 사이에서 미약하게 들려오는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코볼트의 짝귀 능력이 없었으면, 결코 듣지 못했을 아주 작은 소리. 그 소리는 마치, 두꺼운 나무관을 부는 듯이 웅장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 순간, 세운의 눈이 반짝였다.

'판.'

시링크스의 연주음.

세운이 회귀하기 전에도 들어본 적 있었던, 그 어떤 성좌보다도 나쁜 기억으로 남은 성좌가 가진 능력이었다.

제 42화

42. 제42화

'판의 시링크스 소리가 왜 여기서 들리는 거지?'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 판.

세운이 많은 성좌의 이명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 모두의 권능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세운이 탑에서 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 성좌인 판의 권능을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회귀 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닥을 구르던 세운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둔 게 바로 판이었기 때문이다.

으득!

세운이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주었던, 잘 모르고 보면 고마운 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설마 또 저놈이랑 엮일 줄이야.'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성좌의 관심을 받기 시작할 무렵.

세운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판이라는 성좌에 대해 큰 기쁨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이후에 판이 시키는 대로 구르고 또 구르며 온갖 고비를 다 넘겼었다.

이것만 끝내면, 힘을 하사하겠다고.

이것만 끝내면, 사도로 지정해 주겠다고.

이것만 끝내면, 권능을 내려주겠다고!

하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판은 그저 '여정의 지침표'라는 고유 스킬에 호기심을 느껴 잠시 고개를 내비쳤을 뿐이었고 자신의 말에 일희일비하며 따르는 세운을 보며 재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세운을 이용해 즐길 대로 즐긴 후, 판은 이제 질렸다는 짧은 작별을 고한 채, 세운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세운이 자신들을 선신이라 칭하는 세력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던 게 말이다.

"살려주십쇼-!!"

갑작스럽게 떠오른 나쁜 기억에 세운이 인상을 찌푸릴 때쯤, 박정필과 그 뒤를 따르는 몬스터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뭐, 뭐야! 저게 대체 몇 마리야!"

"수도 수지만, 저 몬스터는 너무 강해 보이잖아!"

"무슨 생각으로 저런 것들을 데려온 거야!"

다른 사람들도 그 존재를 알아챘는지, 여기저기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이미 상황에 여유는 없었다.

세운이 여느 때처럼 팔을 들어, 몬스터 쪽을 가리켰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리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꽈드드드득!

흑탑의 묘리에 따라 검게 물든 서리 바람이 차갑게 퍼져 나갔다.

뒤이어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움직임이 둔해진 몬스터들의 몸을 꿰뚫었다.

그것만으로 전방의 몬스터 수십이 쓰러지고, 냉기 마법의 특성답게 달려 오던 몬스터들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사이, 이제는 익숙하게 세운의 마법을 피해 낸 박정필이 추위에 벌벌 떨며 세운의 뒤에 숨었다.

"으드드드! 혀, 형님. 차라리 불 마법을 써 주십쇼. 얼음 조각은 피할 수 있어도, 냉기는 못 피하겠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제가 데려온 게 아닙니다! 저 앞까지 나가니, 저놈들이 떼를 지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흐음...."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쇼! 저 박정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에게는 절대 거짓말 안 합니다!"

세운이 대답 대신 머리를 굴렸다.

박정필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고 있었지만, 세운은 그 말을 못 믿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박정필의 정보로 인해 추론을 확신할 수 있었다.

'판의 계략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번 생에서 판과의 접촉은 없었는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세운의 머릿속에,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가 번뜩이는 듯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성좌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습니다.

세운이 단전을 개방하고, 서클을 생성했을 때, 여러 신의 관심을 귀찮다는 이유로 차단해 버린 마몬.

만약, 그 사이에 판이 섞여 있었다면?

세운이 아는 판의 성격이라면, 분명 앞뒤 가리지 않고 복수할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격이 낮다고는 하지만, 판은 올림포스의 최고 신인 제우스를 아버지로 두었다는 이유로 상당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거였나.'

이렇게 생각하니 상황이 모두 맞아떨어졌다.

세운이 추론을 끝낸 사이, 프로즌 웨이브의 냉기로부터 벗어난 몬스터들이 더욱 크게 분노를 토해내며 달려왔다.

그 뒤로도 수백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 대군이 달려들고 있었다.

저 몬스터들이 모두 고블린 같은 하급 몬스터였어도 꽤 귀찮았을 텐데, 저들 모두 아울 베어나 워울프 같이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몬스터들이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지지직!

검푸른 번개가 몬스터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수십의 몬스터가 쓰러져 나가는 위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더 이상 고블린처럼 약한 몬스터가 아니다.

처음 몇몇 몬스터는 내부가 타들어 가며 생을 잃었지만, 대부분의 몬스터는 몸이 경직되는 정도가 끝이었다.

게다가, 몬스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래서는 끝이 없을 텐데.'

원인을 몰랐다면 서클의 마나를 다 쏟아부어서라도 몬스터를 정리하려 했겠지만 원인을 알아챈 이상, 그게 의미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몬스터들은 지금 시링크스의 연주에 조종당하고 있다.

그러니 그 근원지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몬스터는 끝도 없이 밀려올 게 분명하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는 조종할 몬스터가 산더미처럼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빠져나가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

클랜이 무너질까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정을 붙이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세운은 자신도 모르게 클랜에 정을 붙이고 있었다.

근원지를 해결하더라도, 돌아왔을 때 클랜이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기는 싫었다.

그때.

콰아아앙!!

고막이 떨어져 나갈 듯한 거대한 굉음이 들려왔다.

세운이 알기로, 이곳에서 이 정도의 굉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진(震')을 사용합니다.

쿠르르릉!

검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강한철의 주먹이 바닥을 내려찍었다.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거친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갈라져 몬스터를 집어삼키고, 바위가 튀어나오며 몬스터를 꿰뚫는다. 쩍쩍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 강한철의 주먹에 깃든 내공과 같은 검푸른 기운이 넘실거린다.

"여긴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건만, 강한철은 마치 세운과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간 꾸준히 함께 몬스터를 상대하고 대련을 벌여왔기 때문일까?

강한철과는 대화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플레이어 유서아가 '타란튤라의 두 번째 다리'를 사용합니다.

휘이이익-!!

앞으로 나선 유서아의 주위로 검붉은 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바람에 닿은 적은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신체가 절단되었다.

눈으로 좇을 수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바람과도 같은 공격.

카밀식 쌍검술을 익힌 이후, 그녀의 실력은 놀랍도록 발전해 있었다.

"막아!"

"이런 거, 한두 번이야?"

유서아가 나서자, 뒤이어 클랜 사람들도 진형을 이루고 앞으로 나섰다.

예전이었으면 공황 상태에 빠져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텐데, 이제는 모두 이 '튜토리얼'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완벽히 적응해 있었다.

"세운 씨!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죠? 얼른 가세요!"

유서아가 몬스터에게 눈을 떼지 않으면서 크게 외쳤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 말에 긍정하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

회귀 전, 온갖 사기와 배신을 겪으며 살아온 세운에게는 다소 낯선 감정이었다.

"고맙다."

타앗!

세운이 대지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근원지를 해결하고 오는 게 답이다.

"크아아악!"

"크오오!"

그러나 몬스터들은 세운이 움직이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몇몇 몬스터들이 애초에 세운을 목표로 했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 채 세운에게로 달려들었다.

마법으로 정리를 한 번 하려던 중,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급하시지 않습니까? 이거 타고 가십쇼!"

"넌?"

"에이, 전 원래 이 두 다리로 먹고 살았지 않습니까? 대신, 다음부터는 그 얼음 마법 말고 다른 거로! 아, 그리고 마법 쓰기 전에 신호 좀 주십쇼!"

"...알겠다."

"그럼, 금방 돌아오리라고 믿습니다! 형님!"

박정필이 백랑에서 내리고, 자연스럽게 세운이 탑승하였다.

흑마석으로 박정필의 말을 따르게 해 두었지만, 애초에 백랑의 주인은 세운이었기에 다루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처음으로 박정필이 걱정되어 고개를 돌리니, 녀석은 도발까지 해가며 몬스터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어이, 거기 빡빡머리들! 뭘 먹고 자라면 그렇게 머리가 다 빠지냐? 어익후, 너는 이제 한 가닥 남았나 보네? 후 불면 날아가겠다!"

"크어어어!"

-성좌, '당나귀 머리의 날치기'가 계약자의 도발을 듣더니 불편한 감정을 표합니다.

본래라면 말도 통하지 않는 몬스터에게 저런 하찮은 도발이 먹힐 리 없겠지만.

-플레이어 박정필이 '용용 죽겠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몬스터들은 거짓말처럼 방향을 돌려 박정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시링크스로 조종을 당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도발하다니, 정말 보면 볼수록 예상을 뛰어넘는 녀석이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적토마의 갈기 ]

-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알려진 희대의 명마(名馬). 희대의 영웅 여포(呂布)와 함께 적진에 돌진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말, 적토마의 갈기.

백랑의 몸으로 보물의 힘이 깃들었다.

새하얗던 몸이 붉게 물들며, 몸 주위로 붉은 기류가 스쳐 지나갔다. 속도가 점차 빨라지더니, 이내 몬스터를 가볍게 제칠 정도가 되었다.

빠직!

다만, 백랑에게 가해지는 반작용 역시 엄청났다.

급격하게 강해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백랑의 뼈 이곳저곳에 작은 금이 일기 시작했다.

세운이 만들었다지만, 박정필이 제법 아끼던 녀석인데.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유서아와 강한철, 그리고 박정필이 노력한다고 하여도 끝이 없는 몬스터의 파도를 영원히 막아 내지는 못할 것이다.

클랜이 힘을 다하기 전에, 빌어먹을 판의 계약자를 쓰러트려야 한다.

"크어어!"

대체 연주의 영역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친 것인지, 세운이 달리던 와중에도 여러 몬스터가 공격을 해 왔다.

다만, 녀석들이 아무리 손을 뻗어봐도 적토마의 힘이 깃든 백랑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부우- 우우웅-

'코볼트의 짝귀'로 강화된 청력을 따라, 연주의 근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 43화

43. 제43화

부- 우우우-

부우우웅-

나무관을 울리는 듯한 웅장하면서도 날카로운 연주 소리. 춤과 음악을 즐겼다는 판에게 잘 어울리는 성물이지만, 그것에 담긴 힘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공포와 혼란.

듣는 자를 충동에 빠지게 하며, 이성을 흔들어 놓는다.

목축의 신이라 불리는 만큼 저 연주 소리로 몬스터를 조종하는 것도 가능했다.

즉, 저 악기만 부순다면 판이 계약자를 통해 몬스터를 조종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

"크어어-!"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는 다섯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누군가를 보호하듯이 진형을 꾸리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라니.'

튜토리얼에서 미노타우로스라는 존재는 네임드 몬스터에 필적한 정도로 강한 개체였다.

그런 몬스터가 무려 다섯이다.

때문에 세운으로서도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미노타우로스의 사이에서 연주 소리가 멈추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힛, 일찍 왔구나? 우리 애들이랑 조금 더 놀아주다 올 줄 알았는데!"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옆으로 물러나며,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천을 뒤집어쓴 듯이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에, 구불거리는 곱슬머리. 동물처럼 구부정하게 굽어 있는 등과 축 늘어진 손에 들려 있는 악기, 시링크스.

마지막으로, 개구리나 산양처럼 수평으로 길게 늘어진 동공까지.

'이미 변형이 시작됐다.'

애초에 이종족이었다면 세운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건 성좌의 과도한 권능에 의해 신체가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이 정도 힘이면 당연한 일이지.'

튜토리얼의 참가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 봤자 한계가 있다.

그런데 저자는 성좌의 권능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었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즉, 저 인간은 자신의 생명력을 담보로 하여 성좌의 권능을 과도하게 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말이 늘어지고 눈이 풀린 것을 보니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 오염도 진행 중인 듯했다.

그리고 이러한 세운의 예상을 모두 긍정하듯이.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과 그 뒤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바라봅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작업에 몰두하던 와중에 시끄러운 악기 소리를 듣고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멈춥니다.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

판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마몬의 힘으로 인해 세운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지는 못했지만, 계약자로 보이는 등 굽은 남자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히힛, 알겠습니다. 신께서 원하시면, 얼마든지!"

"크오오오!"

다섯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세운에게 달려들었다.

세운은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녀석들에게 자줏빛 번개를 뿜어냈다.

평소라면 아무리 못해도 한 마리 이상의 몬스터를 쓰러트리던 마법이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크- 오오오!"

체인 라이트닝은 미노타우로스의 움직임을 아주 잠깐 경직시킬 뿐이었다.

당황할 만도 하지만, 세운은 그 짧은 틈을 이용하여 조금 더 거리를 벌렸다.

애초에 미노타우로스 같은 몬스터에게 2 서클 마법이 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판의 고약한 성격이라면.

"히힛! 나의 신께서 원하시니, 이 세상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물들이겠습니다!"

이런 정정당당한 전면전이 끝일 리가 없었다.

부- 우웅-

드드드득!

남자가 팬플루트를 부는 순간, 세운의 발밑이 덜덜 떨려왔다.

기습은 이미 예상하였던 터라, 세운은 망설임 없이 높게 뛰어올랐다. 그러자 세운이 있던 자리에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 나왔다.

'자이언트 웜.'

거대한 지렁이를 닮은 몬스터로 지하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진동을 느껴 적을 공격하는 놈이었다.

만약 뛰어오르지 않았다면 갑작스러운 공격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원형으로 둘린 저 수백 개의 이빨에 물린다면, 사지 하나쯤은 가뿐히 뜯겨 나갔을 게 분명하다.

"히힛,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해요! 혼란과 공포가!"

마약에 취한 듯이 불안하게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그와 동시에 세운은 일순간 주변의 공기 흐름이 바뀐 게 느껴졌다.

'코볼트의 짝귀'로 강화된 청각으로 맹금류 특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세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언가를 외쳤다.

"백랑!"

타앗!

세운을 여기까지 데려다준 스켈레톤. 백랑이 적토마의 힘이 깃들어 붉게 물든 몸을 높게 띄웠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부리를 내세운 채 세운을 향해 급강하고 있던 독수리의 목을 물어뜯었다.

'레이즈 스켈레톤'을 사용하고서 세운이 얻은 지식은 단순히 스켈레톤을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었다. 스켈레톤을 다루고, 활용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애초에 백랑은 세운이 직접 일으킨 스켈레톤이었기에 다루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적토마의 힘까지 더해져 백랑의 힘은 일반적인 스켈레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무리 방어력이 약한 편이라고는 해도, 오크마저도 가볍게 낚아챈다는 자이언트 이글의 목을 단숨에 끊어 버렸으니 말이다.

우우웅!

백랑이 위를 해결해 줬으니, 이제 아래를 정리할 차례다.

자이언트 웜은 기습에 실패하자마자 다급하게 땅속으로 몸을 숨긴 상태.

청각에 귀를 기울이니, 그 수가 한 마리뿐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세운은 주먹을 힘껏 당긴 채로, 마몬의 창고를 열어 새로운 마법을 익히며 빠르게 하강하였다.

제법 높이 뛰었던 만큼, 추락하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바닥에 닿는 순간, 세운은 마법을 발현하며 주먹으로 대지를 힘껏 내려찍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 ]

- 황탑(黃塔)을 상징하는 지진계(地震系) 마법의 토대가 되는 기본 마법. 대지의 물결을 일으켜 적을 집어삼킨다.

쿠구구구!!

대지가 요동친다.

바닥에 착지한 세운을 노려오던 미노타우로스들은 갑작스러운 떨림에 중심을 못 잡고 몸을 휘청였다.

본래라면 여기서 강한철의 '개전'처럼 지면을 어긋 내어 바위가 튀어나오게 하거나 땅을 갈라 적을 빠트려야 했지만, 세운의 마법은 달랐다.

지면의 충돌은 최대한 억누르고 그 대신, 지면 아래에 더 큰 압력을 일으켰다.

콰득, 꽈드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세운의 주먹 아래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사방에서 압력이 닥쳐오고, 대지가 가라앉았다.

자이언트 웜들이 이동을 위해 파 두었던 통로가 폭삭 무너져 내리고, 그와 함께.

파직!

키에엑-

기습을 노리고 있던 자이언트 웜들의 몸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유명한 자이언트 웜들을, 단 일격에 전부 해치웠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격하게 화를 내며 어서 당신에게 공포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히힛, 알겠어! 신님!"

남자의 말투에서는 일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간간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이미 정신 오염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그런 만큼, 남자는 철저하게 판의 명령에 따랐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링크스를 붙잡고 나무관에 숨을 힘껏 불어넣는다.

부우우웅-!

"크오오오!"

다섯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렀다.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그 위로 굵은 핏줄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눈은 실핏줄이 겹치고 겹쳐 새빨갛게 물들었으며, 하얀 콧바람이 비정상적으로 새어 나왔다.

버서커(Berserker).

이전에 세운이 상대했던 네임드 몬스터인 '붉은 송곳니, 카닐'이 사용했던 스킬이었다.

튜토리얼 지역에서 네임드 몬스터도 아닌 놈들이 가지고 있을 만한 스킬이 아니지만, 판의 권능에 의해 강제로 광폭화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크오오오오!"

놈들은 터질 듯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운에게로 달려들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움푹 파이고 바람이 뭉개진다.

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던 중.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에게 빌렸던 무기를 잠깐 돌려주기로 합니다.

스르릉-

세운의 오른손으로, 익숙한 촉감의 손잡이가 잡혔다.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 마몬에게 빌려주었던, 잊혀진 영웅의 검이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얼른 저 냄새 나는 산양을 치워주길 원합니다.

씨익.

세운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탐욕의 마신이라 불리는 만큼, 세운에게 빌린 검을 다시 건네주는 게 가벼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마몬도 세운 못지않게 판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그럼 고맙게 사용해 줘야지.'

안 그래도 미노타우로스에게 어금니 단검의 위력이 애매할 것 같았던 참인데. 뒤랑달이라면 그런 걱정 따위 할 필요가 없었다.

"크오오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이 세운을 덮쳐온다.

안 그래도 강하기로 유명한 몬스터인데, 강제적으로 버서커까지 발동시켰으니 뒤랑달을 들어 올려 막아 낸다고 하더라도, 손목이 충격을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스르륵-

주먹을 막아 내는 대신, 주먹을 흘려보내기로 하였다.

태극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태극의 묘리가 담긴 검술로, 놈의 주먹을 이끌어 당긴다.

자신의 주먹이 검을 향해 자석처럼 끌려가자, 놈이 다급하게 몸을 꺾어보려 했지만 그쯤에는, 이미 세운이 유도한 경로에 다다른 후였다.

콰아앙!!

세운이 태극검의 묘리를 이용하여 두 미노타우로스를 충돌시켰다.

공격이 닿기 직전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지만, 두 미노타우로스는 관성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가격하였다.

근력을 상승시키는 대신 방어력과 체력을 포기하는 게 바로 버서커다.

그런 상태에서, 그런 힘에 당했으니.

빠직!

둘의 두개골이 동시에 깨져 나갔다.

판이 바라던 '공포와 혼란'은 세운이 아닌 미노타우로스들을 덮쳐오고 있었다.

타앗!

세운이 다음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높이 뛰어올랐다.

내공으로 인해 빨라진 몸놀림은 놈들이 이성을 잃은 놈들이 쫓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서걱-

바위처럼 단단한 가죽 역시, '바위를 쪼갠 검, 뒤랑달' 앞에서는 버티지 못했다.

동료의 머리통이 잘려 나가자, 남은 두 마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성을 내며 달려들었다.

이성을 잃은 놈들에게 작전이나 계획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쉬웠다.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공격은 직선적일 수밖에 없었고, 세운은 그런 단순무식한 공격에 당해 줄 사람이 아니었다.

푸북!

주먹의 경로를 예상한 덕분에, 세운은 놈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놈들의 허리를 꿰뚫었다.

일타이피(一打二皮)의 공격.

뒤랑달의 장신에 허리가 꿰뚫렸지만, 놈들은 버서커로 인해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상처를 불사하고 검에 꿰뚫린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흑탑의 묘리에 따라 '그라운드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다음 공격이 발현되었다.

그라운드 웨이브.

본래는 아까 보였던 것처럼 대지에 진동을 일으키는 마법이지만, 충분한 매개체와 상황만 준비된다면.

"크어어어어-!"

콰드드드득!

파직!

생명체의 내부에서부터 지진을 일으켜, 속을 터트려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주변으로 공포의 기운이 휘몰아칩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어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쓰러진 미노타우로스의 뒤로.

"힛, 히익...."

팬플루트를 부는 것도 잊고 다리를 떨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 뒤로, 겁에 질린 산양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제 44화

44. 제44화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계약자에게 당장 일어서라며 악을 씁니다.

판의 심정을 증명하는 메시지가 연이어 떠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원래도 정신이 오염되어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세운의 '공포'까지 더해져 사고의 판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히이익...."

보물이라도 되는 양 팬플루트를 꽉 껴안은 채로 바닥에 드러눕는다.

애초에, 평범한 플레이어가 성좌의 힘을 여기까지 받아들인 것부터가 비정상적이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변형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는데.

세운과의 전투에서 힘을 꽤 사용했던 탓인지, 지금은 피부에서 짐승의 털이 듬성듬성 자라나고 머리에 작은 뿔까지 돋아나 있었다.

성좌의 권능에 동화되어, 계약자의 생명력이 빨려 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저 정도까지 동화가 일어났다면, 이미 생명력 대부분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얼른 저 짐승을 죽이고 보검을 돌려주길 원합니다.

전투는 이미 끝났다.

세운 앞의 남자는 이성을 잃었고, 주변의 몬스터도 모두 정리되었다.

아버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가진 격에 비해 한없이 높았던 판의 자존심도 짓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되지.'

여기까지는 딱 이번 생에서의 복수일 뿐이다. 비록 판은 모르고 있겠지만, 세운은 이 정도에서 복수를 그칠 생각이 없었다.

"우습네. 신이라는 게 쪼잔하게 인간에게 붙어서 복수나 하려고 하고."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설마 지금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이냐며 황당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 너 말이야. 정작 마신에게 찾아갈 용기는 없으면서,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인간에게 빌붙어서 나한테 찾아온 거잖아?"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에게 도발을 해 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당신의 말에 비릿한 미소를 짓습니다.

"뭐, 틀려? 꼬우면, 지금 당장에라도 내가 아니라 마몬을 찾아가면 되잖아?"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만마전(万魔殿)은 언제든 열어 두고 있을 테니 올 테면 와보라며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칩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물듭니다.

"거봐, 정작 자기는 힘도 없으면서 아버지 등빨만 믿고 인간이나 괴롭히고. 아, 이런걸 '파파보이'라고 한다던가?"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파파보이.

세운이 탑을 올라가며 알게 된 일부 성좌들이 판을 조롱하기 위해 붙인 별명이었다.

사실, 거짓말도 아니다. 격도 낮은 주제에, 아버지의 휘광을 등에 업고 나대던 게 바로 판이었으니까.

이 사실은 세운이 아닌 그 누가 보아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본래 이러한 놈들에게는 그 어떤 선동과 날조보다도 팩트가 가장 큰 고통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그 증거로.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시링크스를 바닥에 내던지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당장 세운의 눈앞에 판의 분노가 메시지의 형태가 되어 떠올랐다.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처음 마몬의 관심을 받았을 때 느꼈던 뜨거운 시선이 머리 위로 느껴졌다.

"히, 히익! 이이이익!"

판과 계약한 남자의 몸이 떨린다.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뿔이 길게 뻗어나고, 전신에서 검갈색의 털이 마구 자라난다. 하관이 짐승처럼 툭 튀어나오고, 가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에서 붉은 기운이 번뜩인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강림을 시도합니다!

쿠르르릉!

남자의 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다.

강림.

자신을 따르는 신도의 몸에 깃들어, 탑에 영향을 끼치는 행동이다.

본래 성좌가 직접적으로 탑에 영향을 끼치는 건 금기되어 있는 만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첫째, 인과율을 어기며 성좌로서 가진 격이 낮아지고.

둘째, 시스템은 물론 다른 성좌들에게 경계의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실, 앞선 두 가지 제약보다는 이 마지막 제약 때문에 성좌들이 강림을 주의하고 꺼리는 편이다.

그건 바로.

서걱-

"컥-"

강림을 한 상태에서 적에게 당했을 때 얻게 되는 페널티였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의 강림 시도가 무산됩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강림에 들였던 힘이 사라져 갑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가진 격의 일부가 무너져 내립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게, 누가 대놓고 보는 앞에서 강신을 시도하래?"

이제는 완전히 산양의 모습으로 바뀌어 버린 남자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게 바로 세운이 판을 도발한 이유였다.

회귀 전, 판에게 놀림당한 세운이었기에 다른 누구보다도 판의 성향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 강림을 시도하리라는 것 정도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악!"

바닥에 떨어진 남자의 머리. 아니, 산양의 머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강림이 무산되긴 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격이 깃든 만큼 본체의 감정을 이어받은 것이다.

"감히, 감히, 감히! 용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산양의 머리가 괴이한 모습으로 비명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무려, 성좌의 저주.

다른 플레이어였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목소리겠지만, 세운에게는 아주 조금의 공포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회귀 후에 보인 모습 중에서도 가장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그러든가."

그도 그럴 게,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하던 판의 격을 떨어트렸다. 회귀를 하고 처음으로 회귀를 한 보람과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뻥 뚫리는 기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세운의 복수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세운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에 산양의 머리는 일말의 불안감으로 인해 털이 바싹 올라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더 이상 나를 건드린다면,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폭식의 권능."

콰직!

"...!"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이렇게 고급진 불량식품은 오랜만이라며 입을 쩌억 벌립니다.

폭식의 마신, 베엘제붑의 이빨이 산양의 주위로 떠올랐다.

산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그 바로 위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힌 듯 날카로운 이빨이 '콰직, 꽈직!'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벽. 그것은 곧, '격'이었다.

강심을 시도하며 신도에게 깃들었던, 이제는 미약한 힘만이 남아 주인에게로 되돌아가려 하는 판의 격.

그것이.

콰직!!

"크아아아악!"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베엘제붑의 송곳니에 꿰뚫리고 말았다.

이빨은 멈추지 않고 산양의 머리를 탐해갔다. 날카로운 뿔을 잘근잘근 깨부수고, 몸체를 검갈색의 털과 함께 꿀떡 집어삼킨다.

"내, 내 격이! 이럴 수는 없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두 마신의 권능을...!"

콰직-

말을 채 끝내기 전에, 가로로 찢어진 산양의 눈이 터져 나가며 그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이것으로, 판은 강림을 시도할 때 사용했던 격의 잔재마저 흡수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힘을 잃었다.

안 그래도 격이 높지 않은 성좌였으니, 거기서 격이 더 낮아진다면.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이 가진 격이 기준 이하로 추락합니다.

-성좌, '혼란을 연주하는 산양'의 격이 기준에 미치지 못해, 시스템의 권한이 박탈당합니다.

더 이상 성좌로서의 힘을 떨치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세운으로서는 후환을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된다.

걱정이라면 판의 뒤를 바쳐주는 든든한 후광, 올림포스의 왕 제우스인데. 실상, 세운이 탑을 오르며 알게 된 둘의 관계라면 이 역시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야, 제우스는 판의 말과는 달리.

-성좌, '번개를 다스리는 독수리'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자신의 못난 아들을 내려봅니다.

-성좌, '번개를 다스리는 독수리'가 추락한 아들의 다리에 번개를 꽂고, 올림포스의 한구석으로 집어 던집니다.

판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늘 망나니처럼 사건, 사고를 저지르고 다니며 자신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모습에 나중에는 올림포스의 감옥에 처박아 두었다고 한다.

그런 아들을 대신 정리해 주었으니, 세운을 원망하기는커녕 내심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해도 표면적으로는.

-성좌, '번개를 다스리는 독수리'가 앞으로 당신의 행보를 주시하겠다며 경고를 내뱉습니다.

왕으로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이겠지만 말이다.

특이점이 없는 이상, 앞으로도 제우스가 이 일로 세운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튜토리얼 중에 성좌를 떨어트린 플레이어는 당신이 처음일 것이라며 혀를 내두릅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산양의 고기를 물어뜯으며, 잡내가 느껴지긴 하지만 깊은 풍미 하나만큼은 일품이라고 외칩니다!

솔직히, 반쯤은 도박이었다.

폭식의 권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과연 세운의 손에서 펼쳐진 권능이 성좌의 격까지 씹어먹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그래도 역시 마신의 권능은 뭔가 다르다는 것일까?

베엘제붑은 먹잇감의 정체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그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근데 왜 능력치 흡수가 안 되는 거지?'

평소 같았으면 진작에 포식과 관련된 메시지가 떠올랐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성좌의 격을 포식한 만큼, 세운이 흡수하기는 무리인가 싶었다.

아쉽지만, 세운이라 하여도 시스템에 간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괜한 기대를 하는 대신, 산양이 사라진 자리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팬플루트를 주워들었다.

판이 자신의 성물인 시링크스를 하사했을 리는 없겠지만 남자가 몬스터를 다루던 모습을 떠올렸을 때, 미약하게나마 판의 힘이 깃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 요정을 닮은 악기 ]

분류 : 악기

등급 : B

설명 : 갈대 나무를 엮어 만든 악기로써 미약하게나마 성물의 힘을 이어받아 목신의 힘이 깃들어 있다.

능력 : 1. 목신의 구애 – 연주의 수준에 따라 동물형 몬스터를 조종할 수 있다.

2. 공포의 비명 – 연주의 수준에 따라 적을 '공포'에 빠트린다.

3. 혼란의 울음 – 연주의 수준에 따라 적을 '혼란'에 빠트린다.

"오호."

요정을 닮은 악기.

판의 악기인 시링크스의 힘이 깃든 만큼, 그 능력 역시 세운이 아는 시링크스의 능력과 흡사했다.

아이템 등급 역시 뒤랑달과 같은 B급에 달했다.

물론, 뒤랑달 같은 경우에는 봉인으로 인해 등급과 능력치가 전부 하향된 것이지만 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연주의 수준에 따라서'라...."

능력이 뛰어난 만큼, 그 기준 역시 상당할 것이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니 연주를 시작할 때 저 세 가지 중에서 단 한 가지 연주만 사용할 수 있었다.

능력이 뛰어난 만큼, 사용하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아이템이라는 거다.

그래도 언제 어떻게 쓸모가 있을지 모르는 일.

세운은 팬플루트를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판의 격'을 포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운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제 45화

45. 제45화

-'판의 격'을 포식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목축의 신, 판'의 격을 흡수하여 '사티로스의 성흔'이 생겨납니다.

성흔이 무엇이던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에게서만 생겨난다는 신의 힘 그 자체였다.

사도 중에서도 신에게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 사랑을 받는 극히 소수의 사도에게만 주어지는 힘.

새겨지는 순간, 인간의 격을 뛰어넘어 초월(超越)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이다.

당연하게도, 회귀 전 세운에게는 성흔이 존재하지 않았다.

판에게 놀림당한 이후, 신에 대한 세운의 호감은 싹 사그라들었고, 신들 역시 '여정의 지침표'를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능력의 세운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이번 삶에서는 두 마신에게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해도, 사도가 되거나 신뢰를 받는 것과는 별개였기에 성흔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성흔이, 세운의 오른 손등 위로 생겨나고 있었다.

'폭식의 권능, 생각 이상으로 사기적인 힘인데?'

물론, 플레이어가 감히 신의 격을 떨어트릴 수 있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아니,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신의 격을 눈앞에서 마주치는 것부터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세운이라면 가능했다. 세운은 판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좌의 성격이나 약점 등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다른 신의 격까지 흡수해 나갈 수 있다면....

'어쩌면.'

세운이 성좌 그 자체가 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손등 위에 새겨진 사티로스의 성흔이 완전히 자리를 잡아갔다.

산양의 뿔을 닮은 성흔은 스산한 검갈빛을 스멀스멀 내뿜고 있었다.

[ 사티로스의 성흔(봉인) ]

분류 : 성흔

등급 : ??

설명 : 자연과 목축의 신, 판의 힘이 깃들어 있는 성흔으로써 신격으로서의 잠재력이 잠들어 있다.

능력 : 1. (봉인)

2. (봉인)

3. (봉인)

성흔에 집중하자, 그 능력이 마치 아이템처럼 떠올랐다.

문제라면, 모든 능력이 봉인되어 있다는 점?

어떻게 해야 봉인이 풀리는 건지 의아했지만, 시스템이 금방 그 해답을 내놓았다.

-격의 흡수가 진행 중입니다.

-폭식의 권능을 통해 많은 양분을 흡수하거나 특정 조건을 통해 격의 흡수력이 높아집니다.

시간.

이제 막 튜토리얼의 두 번째 장을 마친 세운에게는 더없이 긍정적인 조건이었다.

폭식의 권능이야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테니, 가속도도 붙을 게 분명하다.

특정 조건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언젠가는 해결될 일이다.

단순히 복수심에 의해 판을 끌어내렸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격'을 획득하자, 세운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그어졌다.

"그럼, 돌아가 볼까?"

팬플루트의 연주음이 사라졌으니 몬스터들이 조종당하는 건 멈췄겠지만, 몬스터들은 이미 클랜과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조종이 풀린다고 얌전하게 제 영역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았다.

세운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만 해도, 몬스터의 수가 엄청났기에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타앗!

세운이 백랑, 아니 이제는 적랑(赤狼)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한 붉은 스켈레톤을 타고 클랜을 향해 도약하였다.

* * *

"크아아앙!"

"크오오!"

쾅, 콰아앙!!

세운의 클랜에 몬스터의 해일이 쏟아진다.

이곳까지 올라오며 보았던 모든 몬스터들이 총출동한 느낌이다.

마차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덕분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상황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젠장, 몬스터 웨이브 때 같잖아!"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우리도 많이 강해진 것 같지 않아?"

"확실히!"

튜토리얼 첫 번째 장, 적응.

당시에는 세운이나 강한철, 유서아를 제외하고는 클랜에 큰 전력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다들 어엿한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 제대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강한철이나 유서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지만.

진형을 이루니, 마차를 지키고 몬스터를 막아 내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이중에서는 특히 새롭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드득!

드드득!

쿠콰콰쾅!!

적진을 휩쓸고 다니는 두 마리의 스켈레톤.

바로, 백현이 소환해 낸 스켈레톤이었다.

그는 어떻게 된 건지 벌써부터 두 마리의 스켈레톤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 위력 역시 일반적인 스켈레톤과는 궤를 달리했다.

보통의 스켈레톤은 인대와 근육이 없어 방어력과 안정성이 극히 떨어지는데.

그의 스켈레톤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전장을 뛰어다녔고, 어지간한 공격 정도는 가뿐히 받아내고 있었다.

아직 만티코어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전력은 충분히 큰 도움이 되었다.

그다음은, 클랜의 치료사로 활약하던 이하늘.

세운의 조언하에 성좌와의 합을 맞추던 그녀는 새로운 능력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제는 치료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플레이어 이하늘이 '피에 젖은 병동'을 사용합니다.

푸홧!

몬스터들이 가진 크고 작은 상처에서 혈액이 미친 듯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상처의 크기 따위는 상관없었다.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혈액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간혹 재생력 좋은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녀석들도 가까스로 출혈을 억제할 뿐. 이전과 같은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덕분에 유서아는 물론 사람들의 전투 효율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며 계약자를 칭찬합니다.

"감사해요. 마르바스 님."

-성좌, '피투성이 사자'가 헛기침을 하며 자신에게 감사할 게 뭐 있냐며 전투에나 집중하라며 얼굴을 돌립니다.

"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았다.

막아 내고, 쓰러트려도 금세 다시 차오르는 몬스터를 바라보며 사람들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

부우우-

어디선가, 웅장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개울가에서 물이 바위와 부딪히는 소리, 숲속을 가득 채우는 풀벌레 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모두 뭉쳐놓은 듯한, 몽환적인 연주였다.

그러나 몬스터들에게는 그게 아닌 듯했다.

-몬스터들이 '혼란의 울음'을 들었습니다.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인해 상당수의 몬스터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혼란에 빠진 몬스터들이 피아분별을 하지 못하고 공격을 쏟아냅니다.

"이게 무슨...?"

몬스터들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방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은 듯이 방황하기도 하고, 바로 옆의 아군을 공격하기도 한다.

대략, 절반가량의 몬스터가 이상 증세를 보이니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대부분의 사람이 당황하고 있었지만, 유서아와 강한철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

정세운.

그가 돌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서아가 힘껏 외쳤다.

"지금입니다!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얼른 놈들을 몰아냅시다!"

"형님이 오기 전에 전부 정리하자고!"

"그래, 언제까지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지!"

콰아앙!!

팬플루트의 신묘한 연주와 함께, 사람들이 역전의 발판을 밟아 나갔다.

* * *

클랜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세운은 한창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다.

'잘 싸우잖아?'

몬스터의 수가 많았던 만큼, 고전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성장 속도는 세운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빨랐다.

도착하자마자 마법을 퍼부어 몬스터들을 빨리 정리하는 게 원래 계획이었지만, 이대로라면 세운이 끼어들 필요가 없어 보였다.

대신.

'거드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세운이 '요정을 닮은 악기'를 꺼내 들었다.

미약하게나마 성물의 힘을 이어받은 아이템이지만, 연주의 수준이 낮으면 D급의 무기보다도 쓸모가 없게 되는 아이템.

회귀 전에 모험가로서 굴러왔던 세운도 악기나 연주와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거친 바다의 악보 ]

- 반인반사(半人半蛇)의 모습을 한 수인, 나가 일족이 전장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해 연주했다는 군가(軍歌).

세운에게는 마몬의 보물창고가 있으니 말이다.

부우웅-

팬플루트가 연주를 시작했다.

군가인 만큼, 듣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웅장한 연주였다.

하지만, 적군은 달랐다. 아군에게는 용기를, 적군에게는 위협을 안겨주는 것이 바로 군가였으니까.

"크어엉?"

"크오오!"

몬스터들이 혼란에 빠져 날뛰기 시작했다.

동료를 공격하질 않나, 바닥에 쓰러지질 않나, 이성이 전부 날아간 듯한 움직임이다.

쾅, 콰앙!!

그와 함께, 클랜의 반격이 거세졌다.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몬스터들의 상황이 안 좋아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서아를 선두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처럼 우글거리던 몬스터들이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몬스터의 사체가 워낙 많아 마차를 움직이는 게 걱정될 지경이었다.

-서든 퀘스트, 목신의 복수를 훌륭하게 막아 냈습니다.

-기습을 막아 낸 모든 인원에게 5,000point를 제공합니다.

이로써, 판의 모든 계략을 무사히 막아 낼 수 있었다.

연주를 마친 세운이 팬플루트를 집어넣고, 클랜으로 돌아갔다.

한창 뒷정리를 하는 중인 사람들 앞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유서아가 나와 세운을 맞아주었다.

"역시, 세운 씨였네요."

"다들 잘 싸우길래 조금 거든 것뿐이야."

"얼른 사람들한테...."

"됐어. 난 시간만 단축했을 뿐이지 내가 없었어도 충분히 이겨냈을 거야."

이건 진심이었다.

판의 연주가 끝나고, 몬스터의 파도가 멈춘 순간부터 이미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형니이이임! 믿고 있었습니다아!"

달려드는 박정필의 이마를 잡고 밀어냈다.

이걸 미운 정이라고 해야 하나?

회귀 전의 기억 탓에 아무리 가까이 지내도 내심 불편한 마음이 있었는데.

백랑을 돌려주며, 두 발로 뛰어 몬스터를 유인해 길을 터 준 박정필의 모습에 조금은 마음이 간 듯했다.

"아, 고마웠다."

"오오, 백랑! ...어어? 새, 색이?"

"미안하다. 내가 좀 무리를...."

"세상에, 빨간색이라니! 형님, 제 취향은 어떻게 또 아시고! 제가 지구에 있을 때 탔었던 애마가 딱 이 색이었거든요! 키아!"

"...."

"네 이름은 지금부터 적랑이다! 아유, 이뻐! 으하하핫!"

애초에 세운이 일으켜 박정필에게 건넨 것이었기에 조금 마음에 걸렸었는데, 아무래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나 보다.

그래도 적토마의 힘이 깃들며 뼈에 무리가 간 상태였기에 주의를 하려 했는데.

"대단합니다! 뼈의 강도도 강해졌고, 관절도 더욱 탄탄해졌습니다! 다만 무리가 간 부분이 많아 보이는데... 제가 조금 손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근육이 없으니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전부 뼈로 흡수되는 문제라서, 이건...."

백랑. 아니, 이제 완벽하게 적랑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스켈레톤을 보자마자 백현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가미긴의 선택을 받은 백현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

떠들썩한 분위기를 피해 움직이니, 어느새 유서아가 따라와 있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건가요?"

"당연하지. 보이다시피 길이 전부 정리됐거든."

세운이 전방을 넓게 둘러보았다.

영역마다 몬스터가 자리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지금은 간간이 보이는 나무나 바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장애물도 보이지 않았다.

판의 연주 덕분에 몬스터가 전부 정리된 것이다.

"아마, 이제 하루면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본격적으로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을 준비할 때가 왔다.

제 46화

46. 제46화

-'튜토리얼 세 번째 장 – 충돌'까지 남은 시간 40시간 20분

"도착이다아!"

세운이 고개를 끄덕거리자마자, 박정필이 목청이 터지라고 소리를 내질렀다.

마침내, 세 번째 튜토리얼이 벌어지는 무대의 끝자락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세운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무대의 끝이라는 건 다들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야, 근데 이 절벽. 장난 아닌데? 무슨 바닥이 보이질 않네."

"경사도 심하고, 무슨 지옥의 입구라도 보는 것 같네요."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박정필이 말한 대로 바닥은 새까만 어둠에 숨겨 있어 시야가 잡히지 않았고, 그 위로는 날카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래서야 날개가 있어도 건널 수 없어 보였다.

게다가, 반대편의 절벽은 이곳보다 더욱 높아 그 건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뭐, 세운에게는 별개였지만 말이다.

"세운 씨, 계획대로 이곳에 거점을 꾸리면 되겠죠?"

"절벽을 뒤에 끼고 거점을 설치하면, 경계가 훨씬 수월할 거야."

"하긴, 저 절벽은 비행도 등반도 불가능해 보이니까요. 세운 씨라면 몰라도요."

세운이 고개를 저었다.

뒤에 보이는 절벽은 시스템이 세 번째 튜토리얼을 시행하기 위해 나누어 둔 구역의 경계였다.

시스템의 아래에서 성장해 가는 플레이어인 이상, 세운이라 하여도 저 절벽을 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침입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자연으로 이루어진 천연요새를 뜻했다.

"아름아, 다운아. 부탁해."

"네, 언니!"

"나 손이 근질근질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드디어 우리가 힘을 발휘할 때다아!"

-성좌, '검은 새'가 적들을 막아설 날카로운 울타리부터 설치하는 게 좋겠다고 말합니다.

-성좌, '거대한 새'가 높은 감시탑을 설치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그동안 지속해서 이동을 거쳐왔던 탓에 두 명이 힘을 발휘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기껏 해 봐야 마차를 관리하는 정도?

그 때문인지, 자신들의 차례가 오자 쌍둥이 자매의 얼굴에 평소 이상의 활기가 감돌았다.

둘을 지켜보는 성좌들 역시 조금은 흥분한 느낌이다.

"혈랑 오빠! 이번에도 나무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러지."

"아싸!"

"나도 따라가겠다."

"형님,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목표했던 위치에 도착했으니, 세운도 거점 설치에 협조적으로 나섰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나설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는 것만으로도,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은 통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구역의 초입부에서 전투를 벌이지, 여기까지 도착해서 공성전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판을 상대하며 세운의 생각이 달라졌다.

'판이 참을성 없이 나선 거라고는 해도, 악의를 가진 성좌가 더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마몬이 통신을 차단한 성좌들.

괜스레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던 세운이었기에 처음에는 그저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통신이 차단되니, 단순히 궁금증을 가지는 성좌뿐만 아니라 판처럼 자존심이 상했다고 생각하는 성좌도 꽤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가장 나서기 좋은 순간이 바로 지금,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이다.

'여긴 합법적으로 플레이어끼리의 전투를 지향하는 곳이니까.'

본래라면 플레이어의 절반이 사라질 때까지 살아남으면 그만인 미션이지만 세운에게 원한을 가진 성좌라면.

자신이 지켜보는 클랜에게 세운을 공격하라며 계시(啓示)를 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운의 클랜은 자신이 보아도 무척이나 강력한 편이었지만, 성좌의 선택을 받은 타 클랜의 힘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든, 불안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 *

[ '튜토리얼 세 번째 장 – 충돌'이 시작됩니다. ]

-현재 튜토리얼에 참여 중인 플레이어의 수가 절반이 될 때까지 살아남으십시오.

-'충돌'이 진행되는 동안, 쓰러트린 플레이어의 공적치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간단하다.

살아남는 것.

그 너무나도 간단한 설명에, 가까스로 두 번째 장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 몬스터가 나오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저기 보이는 몬스터들도 다 가만히 있고...."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을 떠올리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꽉 붙잡았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플레이어가 눈앞에 떠오른 마지막 메시지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쓰러트린 플레이어의 공적치를 획득하다니, 저건 무슨 말이야?"

"그건...."

움찔!

순간, 마지막 메시지를 이해한 플레이어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끔찍한 비명과 함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공격해!"

"자, 잠깐! 너희는 뭐야!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

"병X들, 아직 이해 못 했어? 그렇게 머리가 안 굴러가니까 열 명도 못 살아남았지."

"우린 같은 인간... 크헉!"

플레이어. 아니, 클랜들의 전쟁이 펼쳐졌다.

튜토리얼에 도착한 이후로 몬스터만 보다가, 드디어 마주친 인간이건만, 화기애애하게 악수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미 두 차례의 난간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이었기에, 같은 인간이라는 동질감보다는 생존을 위한 전투를 선택하였다.

"사, 살려줘! 여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고맙다. 네 덕분에 나는 살 수 있을 테니."

서걱!

몬스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들 살아남기 위해 만만해 보이는 플레이어를 찾아 공격해 나간다. 절반만 살아남으면 된다고 했으니, 한 명당 한 명씩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으로.

평원의 초입부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바람을 타고 비릿한 쇠 냄새가 퍼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

초입부와 꽤 떨어진 평원의 중간 지점에서, 한 클랜이 사람들을 피해 평원의 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지금이 바로 기회라며 노성을 터트립니다.

"그놈만 쓰러트리면, 정말 힘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자신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할 생각이냐며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을 더욱 크게 찌푸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놈은 물론, 클랜까지 전부 무너트리겠습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라며 호통 칩니다.

대답을 마친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초원의 끝을 향했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아무리 성좌라도 확인할 수 없는 남자의 속마음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무슨 노예도 아니고, 건방지게!'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

튜토리얼의 첫 번째 장을 수행하고 있던 남자의 클랜에 갑작스럽게 관심을 드러낸 성좌였다.

처음에는 무공과 관련된 힘을 내려주는 등, 다양한 도움을 주었기에 정말 신이라도 섬기듯이 그의 말에 따랐지만, 갈수록 성좌의 간섭이 심해졌다.

함정이 보여도 피해 가는 것을 금지했고, 몬스터의 기습을 눈치채도 당당하게 맞서라고 명하였다.

그 외에도 사생화를 포함한 온갖 일에 사사건건 개입을 해 왔다.

덕분에, 튜토리얼은 통과할 수 있었지만, 성좌에 대한 이미지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클랜원의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번에 힘만 내려받으면...!'

남자는 생각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지금이야 아직 더 큰 힘이 필요했기에 따르고는 있지만, 안정되는 순간 언제든지 저 시끄러운 성좌를 떼어 놓겠다고.

비록 성좌에게 들킬까 봐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생각은 남자의 클랜 모두가 똑같았다.

'그나저나, 멀리까지도 갔네.'

기껏해야 중간쯤에 자리 잡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벌써 평원이 다 끝나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몬스터가 없어...?'

단순히 가는 길목의 몬스터만 없는 게 아니었다. 주변을 넓게 둘러보아도, 몬스터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그가 도착했던 반대편의 초입부만 하더라도, 영역마다 몬스터들이 가득했는데.

원래 심부에는 몬스터가 적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설마.'

남자가 고개를 휘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많은 몬스터를 물리치고 심부까지 들어가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적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더! 저기!"

"저건 또 뭐야?"

절벽 끝자락에 존재하는 요새.

그래, 요새였다.

두 개의 마차를 중심으로 뒤쪽에는 깎아내린 듯한 절벽이 존재했고, 그 앞에는 날카로운 가시울타리가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높은 감시탑 덕분인지, 그 안으로는 이미 수십의 플레이어들이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성좌님, 저게...."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어서 돌진하지 않고 뭐하냐고 외치며 침을 튀깁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성좌가 처음부터 언급했던 것이었기에 쉽지 않으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저 정도라니.

튜토리얼 세 번째 장이 막 시작된 지금, 구역의 끝에서 진을 치고 있을 정도면 그 실력은 이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리, 리더! 저기!"

"저놈들은 또 뭐야?"

절벽으로 가는 길목에서, 새로운 클랜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미묘했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하여, 내 적의 적은 곧 친구라며 저들과 협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적의 적은 곧 친구라.

'이러면, 가망이 있겠어.'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저들은 자신들의 성좌인 '험악한 백발노인'뿐만 아니라 다른 성좌에게도 미움을 받고 있는 듯했다.

요새의 모습에 조금 위축되었지만, 이 정도 수라면 문제없었다.

자신감을 되찾은 남자가 뒤따라오는 클랜원들을 향해 외쳤다.

"놈들을 절벽에서 떨어트리자!"

"우오오오!"

-성좌, '험악한 백발노인'이 감히 자신을 차단한 존재에 대해 복수심을 불태웁니다!

평원이 울릴 정도로 힘찬 함성.

그러나 그들의 돌진은 얼마 안 가 멈춰야만 했다.

쿵, 쿵!

"컥?"

이게 무슨 일인가?

힘차게 돌진하던 클랜원들이 투명한 유리 벽에 부딪힌 것처럼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보아도 벽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은 반대편의 세력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손에서 불덩이를 쏘아냈지만.

화륵!

콰콰쾅!

그 역시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무언가를 눈치챈 남자가 내공을 동공에 집중시키자, 요새를 둘러싼 거대한 벽이 보였다.

마나로 이루어진, 성벽과도 같은 그것은 분명.

"...결계?"

결계였다.

튜토리얼 두 번째 장을 뚫고, 남은 시간에 몬스터를 정리해 끝자락에 도착해 요새를 설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결계까지 설치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지만, 요새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세운에게는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줄 권능이 있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카르멜더식 방어 마법진 ]

- 흑탑의 간부 중 하나인 카르멜더가 고안해 낸 간이 방어 마법진. 지속시간은 길지 않지만, 상대의 공격과 침입을 모두 막아 내는 만능형 마법진.

그것을 알아챈 남자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결계로 진군이 막힌 틈을 타 반격을 해 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미, 미친!"

"저거 뭐야!"

"도, 도망쳐!"

요새로부터 화살과 마법을 포함한 갖가지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 47화

47. 제47화

우우웅!

"우와...."

간이 거점. 아니, 요새라 부르는 게 더욱 어울릴 듯한 곳의 주변으로 거대한 원형의 결계가 떠올랐다.

이는 단순히 화살 같은 가벼운 공격을 막을 뿐만 아니라, 적의 침입과 마법까지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이러니 지켜보던 사람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당장 침입자를 대비하여 지시를 준비하고 있던 유서아는 더욱 벙찔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저번에 쫓은 고블린 부락에서 쓸 만한 것들을 발견했거든. 그걸 썼을 뿐이야."

고블린의 창고에서 발견한 마나석.

마나석은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사용처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 사용한 것은 '카르멜더식 방어 마법진'의 도안.

방어력이 높은 만큼 지속시간은 짧지만, 마나석의 수는 꽤 많았다. 이 상태라면 적어도 5분은 벌 수 있을 거다.

"세운 씨가 하는 것들은 볼수록 감탄밖에 안 나오네요. 마치 미래에서 온 것만 같아요."

"그보다, 오래는 못 버틸 건데. 얼른 공격 지시를 내려야 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들도 벙쪄 있는데."

"아! 다들, 공격 준비해 주세요!"

미래에서 온 것 같다는 유서아의 말에 내심 마음이 찔린 세운이 그녀를 닦달하였다.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집어 들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

세운이 고블린의 창고에서 발견했던 장비 중 일부.

부락의 규모가 워낙 컸던 덕분에, 활 몇십 개나 화살의 여유분은 충분했다.

다들 활을 배운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숙련도는 낮았지만, 이런 난전에서는 정확도보다는 수가 더 중요한 법이다.

피유웅-!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에 떠 올랐다.

모두 정확한 조준보다는, 대충 결계 바깥으로 날려 보내는 느낌의 엉성한 공격이었지만.

푹!

푸북!

"큭!"

"커헉!"

그 효과는 훌륭했다.

수십 개의 화살 중에 한두 개만 명중해도, 우리로서는 큰 손을 안 들이고 적의 수를 착실하게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결계를 뚫으려 가까이 붙어 있던 적군도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때.

부우웅-!

화살 소리와는 전혀 다른 묵직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세운이 옆을 바라보니, 바닥에 쌓아 둔 수십 개의 창을 하나씩 집고 힘차게 던지는 강한철의 모습이 보였다.

그 파공음은 마치 대포를 쏘는 것처럼 묵직했고.

콰아앙!

"미, 미친! 저게 무슨! 컥!"

결과 역시, 대포가 떨어진 것처럼 참혹했다.

그렇다고 해서 강한철의 공격이 제일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대포가. 아니, 폭탄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먼지가 휘날리는 자리를 보니, 다섯 명이 넘는 플레이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꺄악! 성공했어!"

"내가 뭐랬어, 언니! 이거, 된다고 했지?"

"인정!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럼 바로 한 발 더!"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이 시작하기까지 전. 쌍둥이 자매는 울타리나 함정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며 자신들이 운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었다.

바로, 공성병기(攻城兵器).

아니, 지금은 거점을 방어하는 중이니 수성병기(守城兵器)라 불러야겠지.

"자, 또 하나 갑니다아!"

"준비, 쏘세요!"

콰아아앙!!

트레뷰셋, 투석기 등으로 불리는 이것의 원리는 간단했다.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적군을 향해 바위를 던진다.

첨단 과학 무기와 비교하면 볼품없는 무기였지만, 첨단과학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밸런스를 파괴할 만한 강력한 무기였다.

'나도 질 수는 없지.'

세운이 손을 들어 올렸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볼'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르륵!

검붉은 불덩이가 적진을 강타했다. 바로 이어서, 검푸른 번개가 적진 사이를 휩쓸었다.

울타리나 함정이 부서지지 않도록 저서클의 마법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흑탑의 묘리가 더해진 덕에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다만, 저쪽도 바보는 아닌지 계속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륵!

파지직!

"마법?"

튜토리얼 중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얼음, 반짝이는 번개 등이 결계를 강타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상당한 수의 마법사가 저쪽에 존재하는 듯했다.

그리고 세운은 그 이유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마몬한테 차단당한 성좌 중 하나겠지.'

세운이 마나를 깨달았을 때, 마법에 관련된 신들이 관심을 가져왔지만, 판과 마찬가지로 마몬이 그들의 통신을 전부 차단하였다.

그들이라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플레이어에게 서클을 선사하여 마법을 사용하게 할 수도 있을 테니, 저런 공격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우우웅!

적군의 공격을 훌륭하게 버텨내던 결계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어형 결계의 특성상, 받는 충격이 커질수록 지속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나석을 꽤 많이 심어 두었지만, 대부분 최하급 마나석인 탓에 오래 버티지는 못할 듯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다 누구야?"

"성좌께서 무시하고 목표만 보라는데?"

"젠장,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합류해!"

세운의 클랜이 적을 쓰러트리는 속도보다, 새롭게 합류하는 적군의 수가 많아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느덧 전력 차는 대략 네다섯 배.

마몬의 통신 차단이 얼마나 많은 성좌를 거슬리게 했는지 알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아마, 같은 성좌가 여러 클랜을 유혹한 걸 수도 있겠지.'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전력 차는 압도적으로 불리하지만, 세운의 눈에는 그들이 전부 '공적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척-

마법을 난사하던 세운이 고블린 창고에서 얻은 것 중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던 활을 꺼내 들었다.

거리가 제법 먼 탓에 마법의 위력이 떨어지는 지금, 효과적인 공격을 날리기 위해서는 이게 필요했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그라드 제국식 사법(射法) ]

- 그라드 제국에서 병사들에게 활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 낸 사법으로써 그 위력은 숱한 왕국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고 한다.

드드드득!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난생처음 잡는 활이었지만, 그 사용법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금 잡고 있는 활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 정도야, 실력으로 커버하면 그만이다.

우웅!

마나 서클이 팽팽하게 회전하였다.

마나가 세운의 팔을 타고 이동하여, 화살촉에 담겨 붉은빛을 일렁였다.

활대가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겠다며 비명을 내지르기 직전.

피융!

붉은 촉을 가진 화살이 허공을 비상했다.

한 마리의 매처럼 우아하게 하늘을 유영하던 화살은, 곧 목표를 포착한 매처럼 날카롭게 하강했고.

푹!

생각 외로 먹잇감 대신 바닥에 내리꽂히는 것으로 움직임을 끝마쳤다.

주위에 가장 적이 많은 곳에 떨어졌음에도, 단 한 명도 맞히지 못한 것이다.

"뭐, 뭐야? 저기서 여기까지 활을 날린 거야?"

"그래도 조준 실력은 별로인가 보네, 얼른 결계부터 깨부수자고!"

화살이 떨어진 주위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안심하며 화살을 무시하려 했다.

그 순간, 세운이 화살촉에 담았던 마법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파이어 버스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퍼어어어엉!!

"크아아악!"

화살이 폭발했다.

단순한 화염의 폭발이 아니었다. 화살촉이 땅속 깊이 박힌 덕분에, 주변의 대지가 통째로 터져 나가며 인근의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흙과 바위가 퍼져 나가며 수류탄처럼 플레이어의 몸을 꿰뚫는다.

그러는 순간에도, 세운의 화살은 멈추지 않고 적진에 떨어졌다.

펑, 퍼엉!

퍼어어엉!!

그저 화살일 뿐인데, 그 위력은 쌍둥이 자매가 만들어 낸 투석기와 비견 될 정도였다.

수적 우세를 믿고 당당하게 나서던 플레이어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나갔다.

다만.

우웅-

세운이 펼쳐둔 결계가 더 이상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서서히 사라져 갔다.

솔직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오래 버텨 준 것이다.

결계가 뚫리자, 근접계 능력을 갖춘 플레이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땅을 박차고 전진해 왔다.

그것을 지켜보던 세운이 잠시 활을 아래로 내리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하나, 둘, 셋.

적이 적당히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세운의 엄지와 중지가 '딱!' 하는 소리를 내며 튕겼고.

그와 함께.

퍼어어엉!!

"뭐, 뭐야! 아까부터 대체 뭐냐고!"

달려오던 플레이어들의 발밑에서 갑작스러운 폭발이 일어났다.

게다가, 폭발의 수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기는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외곽을 향해 달려오던 플레이어들의 아래에서도 연신 폭발이 일어났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

방법은 간단하다.

파이어 버스트.

고블린 부락에서 사용했던 것처럼, 마나석에 폭발 마법을 새겨 바닥에 심어 두었다.

일부러 울타리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길목에 설치해 두었으니, 플레이어들은 꼼짝없이 함정을 밟게 되었다.

"다들 활 내리고 근접전을 준비하세요! 울타리를 방패 삼아서 최대한 방어적으로!"

"네!"

"드디어 근접전이군."

적의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세운이 설치한 함정이나 강력한 공격으로 모든 적을 쓰러트리진 못했다.

그러나 애초에 세운의 클랜은 장거리 공격이 주가 아니었다.

거기에 울타리까지 있으니, 사람들은 그저 그 뒤에 숨어서 기다란 창을 내지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푹, 푸욱!

덕분에 부상자 한 명 없이 착실하게 적의 수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특히, 유서아와 강한철은 근접전이 다가오니 전투에 더욱 빛을 발했다.

"어, 어떻게 뚫으라는 거야!"

"이건 무리야!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성좌께서...."

"지금 그게 문제야? 애초에 생존하려고 따랐던 것뿐이지, 죽게 되면 아무 소용 없다고!"

"그, 그래! 이건 아니야!"

"도망쳐!"

패배를 깨달은 적들이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했다.

승리에 흥분한 사람들이 그 뒤를 쫓으려 하였지만, 유서아가 나서서 그들을 막아섰다.

"요새 밖에서 싸우면 저희의 이점이 모두 사라져요. 난전이 돼 버리면 세운 씨의 도움도 받기 힘들 거구요."

그녀의 말에 세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번 세 번째 튜토리얼의 목표는 저들을 모두 쓰러트리는 게 아니다.

이곳에서 가만히 진을 치고 있기만 해도, 통과는 무리가 없을 거다.

적의 수도 1/10 수준으로 줄었으니, 다시금 반격을 해 오지는 못할 것이다.

-플레이어 '김태현'을 쓰러트렸습니다. 3,910point를 강탈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제임스 딘'을 쓰러트렸습니다. 4,180point를 강탈하였습니다.

전투가 끝나자 밀려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과연, 튜토리얼 세 번째 장.

고작 한 번의 전투로 엄청나게 많은 공적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순위권에 올랐던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여기서 많은 공적치를 얻었었지.'

플레이어 사냥.

튜토리얼에서 공적치 1등을 달성하려면 꽤나 매력적인 방법이지만, 세운은 이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폭식의 권능."

-올바른 대상이 아닙니다.

플레이어에게는 폭식의 권능이 적용되지 않았으니까.

판의 계약자에게는 사용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는 상대가 플레이어라기보다는 강림을 시도한 판의 신격 그 자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듯했다.

그러니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리는 것보다는.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플레이어의 수가 3/4 이하로 줄었습니다. 튜토리얼의 활성화를 위해 필드에 '굶주린 오우거'가 소환되기 시작합니다.

공적치는 물론, 폭식의 권능을 통한 능력치 상승과 추가적인 아이템까지 얻을 좋은 기회가 말이다.

제 48화

48. 제48화

굶주린 오우거.

이는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이 길게 늘어지지 않도록 시스템이 설정한 특별 몬스터였다.

지금이야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지만, 플레이어들은 점차 이성을 되찾으며 전투를 피하기 시작할 테니까.

'누군가가 대신 플레이어들을 쓰러트려 주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소문이긴 하지만, 한때는 플레이어 중 90% 이상이 무언의 협상을 벌여 전투를 하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게 바로 저것. 굶주린 오우거다.

필드에 나타나서 숨어 있는 플레이어들을 공격하며, 강제로 그 수를 줄이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몬스터는 클랜 하나가 전부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고.

'보상도 확실하지.'

쓰러트렸을 때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나 공적치의 양도 상당했다.

세운은 지금, 그런 몬스터를 혼자서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혼자 가시는 건 너무 위험해요. 방금처럼 다른 플레이어들이 무리 지어서 공격하기라도 하면...."

"무리 지어 와 봤자,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어. 영 어려우면 도망칠 자신도 충분하고."

"그래도!"

"큰 건은 넘겼다지만, 또 다른 클랜이 공격해 올지도 몰라. 네가 없으면 누가 사람들을 지휘하겠어?"

"...후우. 알겠어요."

유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운이기에 개인행동을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을 데려가 봤자 짐이 될 확률이 높았다.

클랜보다는, 굶주린 오우거의 존재 때문이다.

녀석의 힘은 그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나는 상관없겠지?"

"음...."

유서아가 물러난 후, 강한철이 특유의 거대한 덩치로 햇빛을 가리며 나타났다.

평소에는 세운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이유 한 번 묻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그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세운을 따라나서고 싶어 했다.

'강한철이라....'

이에 세운은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과연, 굶주린 오우거를 사냥하는 데 강한철을 데려가도 되는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고, 그 결론은.

"좋아."

승낙이었다.

강한철이라면 굶주린 오우거의 사냥에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긍정적이었다.

아무리 세운이라고 하여도 굶주린 오우거는 최소한 클랜 단위로 상대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으니까.

강한철이 사라진 만큼 거점의 방어력도 떨어지게 되겠지만, 세운이 보기에는 거점에 남은 이들만으로도 다른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서아가 아쉬움을 내보였지만, 클랜의 지휘관인 그녀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필아."

"넵, 형님! 얼마든지 타십쇼!"

"그래."

감시탑의 존재 덕분에 당분간 정찰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박정필의 적랑을 빌렸다.

다만 강한철의 체구가 워낙 거대했던 탓에 같이 타기는 힘들어서 마차를 끌던 멧돼지를 데려와야 했다.

멧돼지에 탄 강한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늑대 위에 태웠으면 모습이 꽤나 우스웠을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올게."

"무사히 다녀오세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타앗!

적랑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그 뒤로 강한철이 탄 스켈레톤이 다급하게 따라왔다.

아무래도 늑대형 스켈레톤에 비해 멧돼지 스켈레톤의 속도가 느렸기에 속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맨몸도 아니고 저 덩치의 강한철까지 태우고 있었으니.

그래도 평범한 사람이 달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빨랐으니,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났다.

"굶주린 오우거라는 몬스터. 강한가?"

"강하지, 엄청. 아마 너라고 해도 근력만으로 맞붙는 건 어려울 거야."

"기대되는군."

강한철의 눈에서 투기가 들끓었다.

생각해 보니 첫 번째 튜토리얼의 마지막 웨이브 이후로, 그는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인 적이 없었다.

기껏 해 봐야 판의 연주를 듣고 나타난 몬스터들을 상대한 게 가장 그럴듯한 전투였지.

그의 취향은 자잘한 몬스터보다는 강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었으니. 그토록 과묵했던 그가 굳이 나서서 세운을 따라가겠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죽여!"

"사, 살려 줘! 크윽!"

"젠장, 사람을 봤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하잖아!"

굶주린 오우거를 찾기 위해 달리던 중, 사방에서 전투의 함성과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유서아였으면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절부절못했을 텐데 강한철은 그저 묵묵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그 몬스터는 어디서 찾는 거지?"

"걱정하지 마. 애초에 굶주린 오우거는 한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충 가까이 가면 모르고 싶어도 위치를 알게 되니까."

"그게 무슨...."

세 번째 튜토리얼이 진행되는 필드는 플레이어의 수만큼이나 넓다. 그러니 그 안에 고작 한 마리의 몬스터만 소환될 리가 없다.

세운이 기억하기로, 최소 다섯 마리.

회귀 전의 기억은 혼란과 공포로 범벅되어 있었기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열 마리는 넘게 소환되겠지.

그런 세운의 대답에 강한철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콰앙!!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산 하나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워낙 컸기에 '코볼트의 짝귀'로 청각이 강화된 세운뿐만 아니라 강한철도 인상을 찌푸리며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

"그렇군."

타앗!

세운의 의지에 따라 적랑이 급격하게 방향을 돌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비명이 크게 들려왔고, 땅이 왕왕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한철이 소음의 근원지를 주시하며 스켈레톤의 갈비뼈가 위태로울 정도로 주먹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긴장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제는 강한철과 꽤 친해진 세운이었기에, 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기대감.'

자신보다 더욱 강한 적이라는 소리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존 본능을 무시하는 감정이지만, 이는 강한철이 더욱 강해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굶주린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오오오!"

"저 녀석인가."

"그래. 좀 마음에 들어?"

"상대할 만하겠군."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자신의 계약자에게 힘을 증명할 좋은 기회라며 악어의 가죽을 쓰다듬습니다.

4m가 넘어가는 키의 녹색 괴물.

피부 아래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근육이 드러나 있었고, 그 위로 거대한 혈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로 사람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턱 아래가 붉게 물든 것을 보니 이미 많은 플레이어를 학살한 듯했다.

주위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굶주린 오우거를 상대할 용기를 잃었는지, 등을 보이며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두 마리인가?"

"아니. 우연히 위치가 겹친 것 같은데."

도착한 곳에 존재하는 굶주린 오우거는 두 마리였다.

이러니 플레이어들이 손도 못 쓰고 도망칠 수밖에.

"잘됐네. 한 마리씩 상대하자고."

"알겠다."

세운과 강한철이 방향을 달리하며 찢어졌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러지 못했을 테지만, 강한철이라면 걱정 없었다.

거의 매일같이 대련을 반복하며 그 누구보다도 강한철의 힘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지는 않겠지.'

그렇게 믿으며, 세운은 조금 뒤쪽에서 양손에 두꺼운 나무 기둥을 쥐고 휘두르던 오우거를 향해 달렸다.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나무 기둥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려왔다.

"배...고프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탐스러운 힘줄을 보고 군침을 흘립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오우거는 금방 세운의 존재를 알아챘다.

은신술로 들키지 않고 다가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강한철의 전투를 지켜봐야 했기에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인간!"

-성좌, '배고픈 왕자'가 "쫄깃한... 오우거!"라며 오우거의 말을 받아칩니다.

후웅!

오우거가 거침없이 나무 기둥을 휘둘렀다.

이에 세운은 바람에 밀려나는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뛰어올랐고, 적랑이 고개를 숙이며 재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어서 세운이 도착한 곳은 오우거의 나무 기둥 위.

녀석이 당황하며 반대 손에 들린 나무 기둥을 휘두르려 하였지만, 이미 세운의 몸은 빠르게 앞을 향하고 있었다.

고창석이 만들어 준 무기. '어금니 단검'을 역수로 잡은 채로.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카밀식 단검술 ]

- 세상에 다섯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용병왕, 카밀의 단검술. 평소에 쌍검을 사용하는 그녀가 공격이 잘 통하지 않는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해 낸 검술이다.

일반적인 단검술이 아니다. 세운이 지금 상대하려는 오우거와 마찬가지로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된 단검술.

그야말로 지금 이 순간, 세운에게 가장 걸맞은 스킬이다.

슥-

장검을 휘두를 때와는 전혀 다른 깔끔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상처 역시 깊지 않았다.

오우거의 손목 부근에 옅은 실선이 생겨났고, 녀석도 통증이 크지 않았는지 세운의 공격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쿠웅!

"크어어? 손에, 힘이...."

오우거가 손에서 힘을 풀고 꽉 붙잡고 있던 나무 기둥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은 게 아니다. 힘줄이 잘린 덕분에 힘이 풀려 나무 기둥을 놓치고 만 것이다.

다만, 세운의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에 가까웠다.

슥, 서거걱!

세운이 오우거의 팔을 타고 빠르게 내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에 들린 어금니 단검은 쉴 새 없이 휘둘리며 수많은 혈선을 만들어 냈다.

푸홧!

별로 깊어 보이지도 않는 상처건만, 단검은 철저하게 오우거의 힘줄이나 혈관을 노렸고, 오우거의 팔에선 몬스터 특유의 초록색 피 분수가 솟아올랐다.

카밀식 단검술.

적의 몸집이 거대할수록 급소 공격이 어려웠기에, 이런 식으로 힘줄이나 혈관을 노려 상대를 말려 죽이는 공격법이다.

때문에, 그녀는 용병계에서 '혈귀(血鬼)'라는 이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피식.

세운이 짧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가 수십 년 동안 수행해야 익힐 수 있는 기술과 기억을 단지 보물을 한 번 사용하는 것만으로 획득할 수 있다니.

상식 따위 가볍게 짓이겨 버리는, 그야말로 사기적인 힘이었다.

파바바밧!

오우거가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세운을 떨어트리기는커녕 더욱 잔혹하게 피바람이 흩날렸다.

순식간에 팔 하나가 불구가 되었고.

세운이 녀석의 목 언저리에 도착한 순간.

서걱!

콰아아앗!

오우거의 목 양쪽 경동맥이 절단되며, 피 분수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오우거가 아무리 강한 몬스터라고 해도, 트롤이 아닌 이상 피가 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녀석이 필사적으로 팔을 올려 상처를 막아 보았지만, 반대쪽 팔은 이미 불구 상태.

두 개의 경동맥을 하나의 손으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혈액이 활공을 멈추며 소나기가 되어 아래로 쏟아지는 순간.

쿠웅!

굶주린 오우거의 동공이 빛을 잃으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퀘스트 몬스터, '굶주린 오우거'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point 상승합니다.

-퀘스트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5,000point 상승합니다.

-'오우거의 힘줄'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한 번에 오를 정도의 경험치와 추가 공적치까지 합해서 무려 만 오천의 공적치.

세운의 얼굴에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입을 벌린 채 먹이를 기다립니다.

베엘제붑의 재촉에 폭식의 권능을 사용하던 세운이 고개를 돌렸다.

'잘하고 있으려나?'

혼자서 굶주린 오우거를 사냥하고 있을 강한철을 향해서 말이다.

제 49화

49. 제49화

강한철이 선택한 전투법은 간단했다.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한 전면전.

키만 해도 두 배가 넘게 차이 나는데도, 강한철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오우거에게 맞섰다.

"큰 인간... 먹을 거 많아 보인다!"

쿵!

강한철과 오우거.

둘의 주먹이 부딪혔다.

주먹 사이의 공기가 찌부러지며 터질 듯한 굉음이 주위에 퍼져 나갔다.

'정말 강하군.'

강한철의 눈에 호기가 감돌았다.

세운이 말한 대로 오우거의 힘은 강한철을 상회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이다.

심법을 익혀 내공을 쌓지 않았으면, 방금의 부딪힘으로 밀려나고 말았을 것이다.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어서 자신에게 배운 힘을 증명해 보라며 당신을 재촉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힘의 차이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단순무식하게 이대로 힘의 대결을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운과의 대련을 거치며, 강한철은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효율적인 전투를 벌이는 게 가능해졌다.

부웅!

"크어...어?"

반대편 주먹을 내지르던 오우거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엎어치기.

세운에게 배운 태극권의 초식을 응용한 기술이었다.

주먹을 내지르던 힘을 주체하지 못한 오우거는 미처 손을 쓸 기회도 없이 허공을 반 바퀴 회전하고 바닥에 충돌했다.

바로 이어서, 당황하거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강한철의 주먹이 오우거의 머리를 노려왔다.

쿠웅!

"크어, 이 인간. 위험하다. 위험한 고기다."

간신히 주먹을 피해 낸 오우거가 바닥을 한 바퀴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작 인간의 공격일 뿐인데,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내려친 바닥이 움푹 파여 있었다.

저런 공격이라면 오우거라 하여도 두개골이 터져 나가고 말 것이다.

그러는 사이, 강한철은 오우거의 뒤편으로 보이는 세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벌써 끝낸 건가.'

세운의 뒤쪽으로는 한쪽 팔과 목, 머리가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로 난자되어 있는 오우거의 사체가 쓰러져 있었다.

주위에는 초록색 혈액이 가득했는데, 그러고도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니 소름이 쫙 돋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 소름은 공포나 두려움 때문이 아닌.

'언젠가, 꼭...!'

세운의 힘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다.

얼른 강해져서 세운과 힘을 겨루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강한철이 다시금 오우거에게 정신을 집중하였다.

"위험한 인간.... 그래도 먹을 거 많아 보인다!"

오우거가 두 팔을 넓게 벌리며 거세게 달려왔다.

그 모습이 호기심 넘치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마주하는 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 거친 손에 잡히는 순간, 몸이 두 갈래로 찢겨 나가고 말 테니까.

그런데도 강한철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오우거의 움직임을 지켜볼 뿐.

오우거가 빠르게 가까워지며, 크게 벌어진 두 팔이 강한철의 몸을 조여올 때쯤에야.

스윽.

강한철의 몸이 움직였다.

복싱을 하듯이 몸을 말고 상체를 흔들더니, 조여오던 오우거의 팔을 어깨로 툭 쳐내며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다.

이 역시 태극권의 초식을 개조한 것이었다.

태극권이 주로 두 팔로 태극을 그려 적의 공격을 흘려보낸다면 지금 강한철은 팔이 아닌 몸으로 태극을 그려내며 적의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초식을 멋대로 개조하다니?

이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무공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뒤 바쳐주지 않는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을 강한철은 완벽하게 성공하였고.

뻐억!

"크어-억!"

몸을 돌리던 원심력을 그대로 주먹에 담아 오우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우득!

두꺼운 근육이 전신 갑옷처럼 몸을 지켜주고 있었음에도 강한철의 주먹을 막아 내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폐라도 찔린 듯 오우거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 당신의 '힘'에 크게 만족합니다.

오우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던 강한철의 주먹이 다음 공격을 준비하듯이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개전.

성좌, 악어를 탄 노인이라 불리는 아가레스에게 받은 힘으로써 지금은 강한철의 대표 스킬이라고 불릴 만한 힘이다.

아가레스의 힘을 이어받아 대지를 진동시켜 지면을 가르고 바위를 솟게 하는 힘.

하지만, 그 힘이 대지가 아닌 몬스터의 몸에 적용되는 순간.

퍼어엉!

'개전'은 상대의 몸을 내부에서부터 헤집어 놓고 결국 폭사(爆死)하게 만드는 잔인한 살인기가 되었다.

* * *

"대단한데?"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굶주린 오우거를 혼자서 쓰러트리고 말았다.

그런 강한철의 모습에, 세운은 절로 입을 벌리고 감탄하게 되었다.

회귀 전에 지켜보았던 강한철도 괴물처럼 강했었는데, 지금은 괴물의 수준마저 넘어선 것 같았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회귀 전과는 달리, 지금의 강한철은 세운에게서 무공을 습득한 것은 물론 서열 2위의 대마왕인 '아가레스'와 계약을 해냈으니까.

-'굶주린 오우거'를 포식하였습니다.

-양분을 흡수하여 근력이 10 상승합니다.

그러는 사이, 날카로운 이빨들이 오우거를 모두 집어삼켰다.

과연, 오우거랄까? 다른 능력치는 관여도 안 하고, 오로지 근력 수치만 확 늘려주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오우거의 힘줄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 맛을 깊이 음미합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내린 세운이 강한철에게로 다가갔다.

짧은 전투였지만, 가진 힘과 내공을 전부 끌어올린 탓인지 바닥에 뻗은 채로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자, 마셔."

"...고맙다."

세운이 현 마몬의 보물창고를 열어 포션을 하나 꺼내 주었다.

창고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도 가장 하급 포션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탑에 존재하는 '하급 포션'과는 달랐다.

지금 세운이 생각하는 하급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마몬의 보물창고에 존재하는 보물' 중에서 하급이라는 뜻이었으니까.

꿀꺽, 꿀꺽!

그 증거로 포션을 들이켜자마자 강한철의 손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몸에 활력이 돌아온 것인지, 정신을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겠어?"

"멀쩡하다. 따라 나올 때부터 방해는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잠시 전장에서 이탈해 있던 적랑과 멧돼지 스켈레톤이 돌아왔다.

이 전장에 몇 마리의 '굶주린 오우거'가 소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운은 어떻게든 모든 '굶주린 오우거'를 찾아 사냥할 생각이었다.

* * *

굶주린 오우거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세운에게는 '놀의 들창코'나 '제왕 독수리의 척안', '코볼트의 짝귀'와 같은 감지계 능력이 많았으니까.

진득한 피 냄새나 시끄러운 굉음만 따라가도 척안으로 쉽게 굶주린 오우거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대략 열 마리의 오우거를 쓰러트렸을까?

슬슬 오우거를 상대하는 데 익숙해진 세운이 새로운 수를 꺼내 들었다.

-탐욕(眞)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게리오네스의 소 ]

- 에리테이아 섬에 살았던 게리오네스가 기르던 붉은 소의 고기.

소라고 해도 살아 있는 소는 아니었다.

소의 고기.

마몬의 보물창고의 입구 쪽에 쌓여 있는 보물 중 하나였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까마귀에게 어떻게 자신 몰래 저런 고기를 숨겨 둘 수 있냐며 항의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왕자에게 네가 다 먹을까 봐 일부러 숨겨 둔 것이라며 대답합니다.

-성좌, '배고픈 왕자'가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 테니 얼른 자신에게 가져다주라며 항의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고개를 돌려 외면합니다.

헤라클레스의 12 과업 중 하나가 바로 이 게리오네스의 소 떼를 훔쳐 오는 것이라고 했었지.

이 소 떼의 고기는 올림포스의 신들마저 욕심을 낼 만큼 귀한 고기였고, 세운은 그러한 고기가 보물창고의 입구 부근에 존재하는 것을 보고 놀라야만 했다.

알고 보니 마몬은 이것을 보며 '훼손이 심해 하급품으로 분류하였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의 희귀성은 엄청났다.

"크오오오-!"

고기를 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익숙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시각에 집중하니, 굶주린 오우거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이거, 엄청 맛있거든."

-성좌, '배고픈 왕자'가 음미의 개념조차 모르는 오우거 따위에게 게리오네스의 소고기를 빼앗길 수는 없다고 외칩니다.

-성좌, '고개를 숙인 까마귀'가 착각하나 본데 저건 자신의 보물이라며 단언합니다.

오우거의 후각은 예민하다.

거기에 녀석들은 '굶주린'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극심하게 배고픈 상태.

고기에서 나는 풍부한 향은 튜토리얼의 세 번째 장이 진행되고 있는 구역에 폭넓게 퍼져 나갔고.

"크오오!"

"고기, 고기다아!"

처음 달려오던 오우거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열 마리가량의 오우거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강한철, 괜찮겠지?"

"물론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우거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을 쳤을 텐데, 강한철은 오히려 호기를 불태우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어.'

열 마리의 오우거.

이는 아무리 세운이라고 해도 혼자서는 상대하기 힘든 숫자였다.

그러나 강한철과 함께라면 달랐다.

세운과 함께 오우거를 물리치지는 못하더라도, 오우거 몇 마리의 시선을 끌고 발을 묶어 두는 것만으로도 그사이를 틈타 오우거들을 빠르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플레이어 강한철이 '개전(開戰)'을 사용합니다.

콰르릉!

-흑탑의 묘리에 따라 '그라운드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콰르르릉!

강한철의 능력과 세운의 마법. 두 가지 힘이 시너지를 이루며 주변의 지형을 거칠게 부숴나갔다.

아무리 오우거라 하여도, 이토록 난장판이 된 대지 위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사이, 강한철과 세운이 오우거에게로 달려 나갔다.

서거걱-!

"크오오!"

오우거 사냥 따위, 이제 눈 감고 외울 정도로 익숙해졌다.

정면으로 돌진했을 때 기본적인 타격기를 시도하고, 그게 실패하면 어떻게든 상대를 잡기 위해 팔을 뻗는다.

공략법을 알고 있었기에, 오우거를 쓰러트리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쿠궁!

순식간에 한 마리의 오우거가 쓰러져 나갔다.

향기로운 풍미를 자아내는 게리오네스의 소고기에 도착하는 오우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놈들은 거친 지형을 힘겹게 통과하는 순간, 강한철의 주먹과 세운의 단검에 의해 피를 토하며 쓰러져야만 했다.

-퀘스트 몬스터, '굶주린 오우거'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개인 공적치가 10,000point 상승합니다.

-퀘스트 몬스터를 혼자서 처치하여 개인 공적치가 추가로 20,000point 상승합니다.

-'오우거의 힘줄'을 획득하였습니다.

전에도 보았던 똑같은 메시지가 눈앞에 연이어 떠올랐다.

곧바로 폭식의 권능을 사용한 덕분에, 소고기를 지키라며 시끄럽게 굴던 베엘제붑의 메시지를 잠시 동안 멈출 수 있었다.

-'붉은 늑대 갑옷'의 능력 '늑대의 위협'으로 인해 인근의 굶주린 오우거들이 공포에 빠져듭니다!

-'회색 늑대 망토'의 능력 '위압감'으로 인해 카리스마가 강화되며 적의 공포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위, 위험한... 인간!"

세운의 장비가 빛을 발하자, 전투는 더욱 쉬워졌다.

어느새 고기를 노리고 찾아오는 오우거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았네.'

최소 다섯 마리. 많으면 열 마리 정도일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사냥한 오우거의 수만 스물이 넘었다.

애초에 세운의 생각 이상으로 많이 소환되었거나, 오우거의 수가 줄어들자 추가 소환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끝.

서걱-

"...끝인가."

"고생했어."

마지막 오우거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연이어서 오우거를 상대하다 보니, 강한철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포션을 던져주며 재정비 시간을 가지려는 순간.

-필드의 '굶주린 오우거' 대다수가 쓰러졌습니다.

-숨겨진 조건을 완료하여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이 소환됩니다.

"...뭐?"

세운조차 처음 마주치는 히든 피스가 눈앞에 떠올랐다.

제 50화

50. 제50화

사람 수십 명은 가뿐히 수용할 수 있어 보이는 넓은 방. 신기하게도, 그곳의 벽면에는 모니터가 가득 붙여져 있었다.

바닥을 제외하고 방을 모두 뒤덮고 있는 모니터에서는 수많은 플레이어의 전투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제길, 이번 튜토리얼은 특히 바쁜 것 같군."

그리고 이 수많은 모니터의 사이에 앉아 새까만 블랙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남자.

그가 바로 튜토리얼의 책임자, 튜닝이었다.

"하필이면 유망주들이 한 번에 들어와서 이게 웬 난리야? 적당히 튜토리얼마다 유망주 두세 명씩 들어와서 알아서 순위권을 차지하면 좀 좋아?"

튜토리얼 책임자가 맡은 일을 간단했다.

튜토리얼의 진행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

어차피 시스템상으로 진행 방향은 모두 정해져 있었기에 그가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문제는, 튜토리얼의 참가자 수.

관찰과 기록이라고 해도, 튜토리얼에 참가하는 플레이어의 수는 한 번에 수천, 수만 명에 달한다.

그 모두를 전부 관찰하고 기록하라니.

일손이 더 필요하다고 매일같이 상부에 항의를 넣지만, 상부에서는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러니 튜닝은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이번 튜토리얼만 끝나면 플레이어 수가 확 줄겠군."

튜토리얼 세 번째 장.

확정적으로 플레이어의 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시련이다.

그 이후부터는, 업무가 한결 수월해졌기에 튜닝은 '조금만 더 버티자.'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삐리리-

튜닝의 책상 위에 있던 수십 대의 전화기 중 하나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한창 바쁜 순간에 걸려온 전화였기에, 튜닝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왜?"

"팀장님! 보셨습니까?"

"이 새끼가 다짜고짜 무슨 소리야? 유망주라면 당연히 다 감시 중이다. 예상대로 대부분 플레이어 사냥 중인데, 뭐가 문제야?"

"그거 말고, 굶주린 오우거 있잖습니까!"

"굶주린 오우거? 그게 왜?"

굶주린 오우거.

혹시라도 플레이어들이 전투를 피하며 튜토리얼이 한없이 연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치된 몬스터였다.

그 이름을 들은 순간 튜닝은 순간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보이지 않았다.

유망주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감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굶주린 오우거의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게...."

"몇 번이야!"

"B7-75번입니다!"

치직!

튜닝이 다급하게 모니터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튜닝이 찾던 굶주린 몬스터'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마리의 굶주린 오우거가 시체의 모습을 한 채로 말이다.

"미친, 이게 뭔 일이야?"

"플레이어 정세운과 강한철이 벌인 일입니다!"

"잠깐, 그거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인데...."

튜닝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정세운이라.

분명, 얼마 전에 꽤 많은 성좌들이 그런 이름의 플레이어의 정보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땅한 정보가 없었던 인물이었기에 대충 넘겼었는데.

그 플레이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었다.

"팀장님, 이대로라면 튜토리얼 기간이 너무 연기가 될 듯한데...."

"새끼야, 지금 그게 문제야?"

"네? 그럼 뭐가...."

"너 매뉴얼 안 읽었지? 플레이어의 수가 많이 남았는데도 굶주린 오우거가 90% 이상 사라지면...."

치지직!

튜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모니터 몇 개가 노이즈라도 낀 듯이 거칠게 떨려왔다.

그러고는 마침내.

"저놈이 등장한다고...."

크오오오오오-!!

정면의 화면에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포효를 내질렀다.

* * *

"뭐야 저건...."

숨겨진 조건이니, 굶주린 오우거의 수장이니. 세운으로서도 전부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었다.

"이건 뭐지?"

"나도 몰라."

"네 입에서 모른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군."

덕분에 강한철은 처음으로 세운이 당황한 모습을 직관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시스템은 빠르게 소환 절차를 진행했다.

크오오오오오-!!

고막이 아플 만큼 커다란 울부짖음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이 순간, 필드에서 전투를 벌이던 모든 플레이어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울부짖음이 내는 압박감은 그만큼이나 강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운의 눈앞에 쌓인 오우거 사체가 터져 나가며 시스템이 선언한 오우거의 수장, 크락 카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 먹이를 가져오지 않는 것이냐!"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6m에 달해 보이는 거대한 키는 탑의 상위층에 존재한다는 거인들과 키를 나란히 할 지경이었고, 전신에는 수장이 되기까지 얻은 영광의 상처가 가득했다.

다른 오우거들과는 달리 제대로 만들어진 철제 도기가 양손에 들려 있었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어깨 위에 달린 두 개의 머리였다.

'트윈 헤드 오우거.'

오우거 중에서도 돌연변이를 통해 극소수만 태어난다는 개체.

단순히 머리만 두 개인 게 아니라, 신체 능력이나 지능 등도 일반 오우거에 비해 두 배가량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머리가 반쯤 찌그러진 한쪽 머리가 제 기능을 못 하는 듯,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녀석의 몸에서 풍기는 기량은 주변의 공기마저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등장한 것은 비단 녀석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크락 카틀락의 주위에 나타난 네 마리의 오우거.

다른 굶주린 오우거와 큰 차이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성만은 그 이상인 듯했다.

아무래도 저 수장의 호위병 격의 몬스터겠지.

"세운, 어떻게 할 거지?"

"그야 물론...."

세운이 머리를 굴렸다.

이것은 세운조차도 알지 못했던 히든 피스.

세운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탑이 쓰러질 때까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히든 피스라는 말이었다.

원래는 굶주린 오우거만 사냥하며 포인트를 획득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쓰러트려야지."

"알겠다."

당장 눈앞에 히든 피스가 나타났는데 무서워서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환영이다.

세운 자신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희귀한 히든 피스라면, 그에 대한 보상 역시 엄청날 테니까.

다 집어치우고 녀석에게 폭식의 권능만 사용하여도, 근력 수치가 엄청나게 증가할 게 분명하다.

다만, 세운이라 하여도 보스 몬스터와 호위 몬스터를 모두 상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인데.

"작은 놈들은 내가 맡겠다."

"괜찮겠어?"

"오히려, 저 큰 놈을 잡는 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할 지경이다."

"미안하긴. 그걸로 충분해."

작은 놈들이라.

물론, 수장에 비하면 2m가량 작은 크기이긴 하지만, 강한철이 아니라면 절대 내뱉지 못했을 지칭이리라.

처음 굶주린 오우거를 보았을 때는 그토록 호기 넘치는 강한철이었는데 수장을 보는 순간, 힘의 차이를 느꼈나 보다.

옆에서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분한 기분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알겠으면 어서, 먹이를 가져오너라!"

"가져와라! 가져와라! 가져와라!"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네 마리의 오우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긴, 이 주위에 움직이는 것이라 해 봐야 세운과 강한철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 보이는 '게리오네스의 소'를 회수한 후, 둘도 오우거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렇게 살벌한 기류가 주위에 휘몰아칠 때쯤.

타앗!

세운이 빠르게 도약하며 네 오우거 사이를 통과하였다.

어느덧 100에 가까워진 민첩 수치는 오우거들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고, 놈들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을 뻗자.

쿠웅!

우드드드득!

"네놈들은 내가 맡겠다."

"인간...."

강한철이 지면을 강타해 대지를 망가트리며, 세운을 향해 돌아서려는 오우거들을 막아 냈다.

이에 세운은 방해 없이 오우거의 수장을 향해 직진할 수 있었다.

"먹이 주제에... 주제를 모르고 포식자에게 달려드는구나!"

"먹이! 먹이! 먹이!"

달려오는 세운을 마주하며, 녀석이 오른 도끼를 들어 올렸다.

크기나 속도, 위력만 다를 뿐 패턴은 똑같았다.

세운이 능숙하게 뛰어오르며 도끼를 피해 내고, 평범한 오우거보다 훨씬 두꺼워 보이는 놈의 팔뚝 위에 올라탔다.

이어서 망설임 없이 손목 힘줄을 향해 어금니 단검을 내려찍자.

깡!

"젠장."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소리가 귓등을 때려왔다.

깡이라니.

마치 쇠를 내려찍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세운이 내려찍은 자리에는 작은 찰과상만 남아 있을 뿐 가죽조차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작고 빠른 먹이, 귀찮다!"

"귀찮다! 귀찮다! 귀찮다!"

원래는 여기서 오우거가 무기를 놓치고, 당황한 틈을 타 급소를 향해 내달리는 게 정석인데 공격이 통하지 않으니, 세운의 공격 패턴 역시 깨져 버렸다.

당장 팔을 회수해 세운을 집어삼키려던 녀석을 피해 뛰어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뻗어오는 반대편 도끼.

우웅!

아직 공중에 떠 있는 탓에, 피할 길이 없었다.

세운이 다급하게 서클을 회전시켜 눈앞에 실드를 펼쳐냈다.

하지만.

째앵!

"큭!"

당장 세운이 배우고 있는 와이드 실드는 애초에 화살 등의 넓은 범위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한 마법이기에 이런 묵직한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근접 전용 실드를 펼쳤다고 해도, 저 도끼를 막아 내지는 못했겠지.

그나마 실드를 비스듬하게 꺾어 날을 휘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몸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귀찮게 하지 말고 어서 내 입으로 들어와라."

"들어와라! 들어와라! 들어와라!"

놈이 세운을 향해 달렸다.

도끼를 짧게 쥔 채로 달려오는 것을 보니, 굳이 풀스윙을 휘두를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라이트닝 체인'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파직!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였지만, 경직은커녕 눈을 한 번 깜빡이게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흑탑의 묘리에 따라 '프로즌 웨이브'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쩌정!

때문에 방법을 바꿔 얼음 마법을 날려 보냈다.

몸이 차가워지고, 바닥이 얼자 놈도 조금은 주저하는 티를 냈지만.

콰직!

놈은 오로지 근력만으로 바닥의 얼음을 깨부수고 앞으로 전진해 왔다.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

다만,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몬의 보물창고를 열어, 새로운 보물을 꺼낼 시간을 말이다.

-탐욕의 보물창고를 개방하였습니다.

[ 다크 플레어(Dark Flare) ]

- 흑탑의 마법사가 사용하는 대표적인 공격 마법, 어둠의 불길을 내뿜어 상대를 잠식한다.

콰르륵!

"크아아악!"

"까맣다! 아프다! 뜨겁다!"

놈의 몸에 검은 불꽃이 옮겨 붙었다.

아무리 가죽이 질기고 단단하다 해도, 어둠의 불꽃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법.

불을 끄기 위해 다급하게 바닥을 굴렀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다크 플레어는 흑탑의 마법인 만큼 화 속성의 원소보다는 어둠의 속성에 더욱 가까웠다.

사용자의 마나가 공급되는 이상, 어지간하면 꺼지지 않는다.

게다가.

-흑탑의 묘리에 따라 '다크 플레어'의 위력이 강화됩니다.

세운의 서클 중 두 개가 흑탑의 검은 마나 서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다크 플레어의 위력은 세운이 사용하는 그 어떤 위력보다도 강해져 있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큭...."

마나의 소모량이었다.

흑탑의 마법답게 강한 만큼 엄청난 양의 마나를 필요로 한다.

고작 십 초가 조금 넘게 사용했을 뿐인데, 서클의 마나가 텅텅 비어 버릴 지경이었다.

마나가 다 떨어지자, 영원히 타오를 것 같던 불길도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먹이... 따위가! 감히! 크아아악!"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죽인다!"

"진짜 괴물이네."

나름 혼신의 일격이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오우거를 보니 그리 치명상을 입히지도 못한 듯했다.

전신에 화상 자국이 자욱했지만, 그 속의 근육은 멀쩡하게 꿈틀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로써, 신체적인 공격과 마법적인 공격이 모두 통하지 않는다는 게 증명되었다.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더더욱.

"그래, 네놈한테 실험하면 되겠네."

여태까지 굳이 쓸 기회가 없었던, 계속 생각해 오던 공격법을 시도해 볼 때가 되었다.

제 5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