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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웁웁(1)

만족스러운 동영상을 뽑아내기 위한 최우선 조건.

불꽃솔로가 말하길, 방송에서의 모든 상황은 헨리 자신이 미리 깔아 둬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변 인물을 섭외한다거나, 장소를 세팅해 두란 말이 아니었다.

단지 머릿속에 발생 가능한 상황들을 빠짐없이 그려 두란 의미.

그래야만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방송의 흐름을 자유롭게 이어갈 수 있을 거란 게 조언의 골조였다.

또한.

[M : 지금은 후원이... 더 크지만... 아, 그냥 매니저 채팅에선 컨셉 빼고 쓰겠습니다. 아무튼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엔 실질적인 소득이 동영상 조회수에서 발생할 겁니다.]

"조회수... 그렇습니까?"

[M : 사실 저 회사 안 다닙니다. 다른 유명 스트리머 분의 채널을 관리하는 게 제 일이라서요. 두 분 계십니다. 제가 전담하는 분들이. 그 외엔 가끔 두어 개씩 만져 드리는 거고요.]

"...저 같은 분이 또 계시는 겁니까?"

[M : 많죠. 셀 수 없을 만큼. 아무튼 장담컨대, 제가 있는 한 영상 관리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월급도 필요 없어요. 기사님은 제가 즐거워서 도와드리는 거니까.]

놀라운 사실.

하지만 이해 못 할 내용은 아니다.

약간의 설명까지 더 들은 이후, 헨리는 이 불꽃솔로라는 마법사의 가치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야.'

이게 대마법사의 취미라고 생각했을 때, 그 대상은 헨리 한 명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또한 그들 중 '잘나가는' 이들 몇몇이 불꽃솔로에게 '동영상 관리'를 부탁한 상황.

그런 이들이 나름의 대가까지 치러 가며 붙잡는 존재라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겠는가.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M :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기사님 스타일 좋아해요. 또 이런 스타일은 귀하거든요. 아, 그리고.]

[M : 아예 업로드용 영상 촬영하실 땐 비공개로 진행하시는 것도 방법이겠죠. 매니저들만 들어올 수 있게. 과정은 지루하지만 하이라이트로 삼을 만한 장면 몇 개는 나오는 그런 경우에요.]

"비공개 방송은...."

[지금부터 비공개 방송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대마법사의 지원은 시기적절했다.

불꽃솔로가 잠시 조용해진 가운데, 이번엔 포포리쟝이 채팅을 치기 시작했다.

불꽃솔로만큼 유능한 인물은 아니지만, 헨리에 대한 호의만큼은 절대적인 게 바로 포포리쟝이었다.

[M : 제 생각엔!! 불꽃솔로님이 대단하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M : 저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M : 아무튼요! 아무튼!! 기사님도 장기적으로 채널 키우셔야 하는 거 생각하면, 실시간 방송보단 동영상에 집중하시는게 낫지 않을까요????]

역시나.

그녀가 꺼낸 의견은 전적으로 헨리를 위해 고민한 결과물이었다.

실시간 방송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필요한 건 충분한 개수의, 또한 흥미로운 동영상이 우선이었으니까.

또한 너무 잦은 방송은 헨리가 '익숙해지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같은 일에도 호기심과 흥미를 떨어뜨리게 될 거란 게 포포리쟝의 의견이었다.

[M : 저도 동의합니다. 극단적으로 줄이실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쪽을 주력으로 생각하셔야 되는 건 사실이니까요.]

두 매니저의 의견이 일치했다.

헨리 역시 기쁘게 받아들였고, 이젠 결정 난 사실을 일반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블라인드가 해제됩니다.]

다시 화면이 켜졌다.

헨리는 취합한 의견에 자신의 생각을 섞었다.

차분하게 이유를 늘어놓은 다음, 결론을 꺼냈다.

"...그러한 이유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분간 실시간 방송은 일주일에 1회만 켤 예정이며, 채널의 기반을 다질 때까진 동영상 위주로 시청자님들을 뵙게 될 것 같습니다."

[일케 갑자기요?ㅠㅠㅠㅠ]

[아 요즘 퇴근하고 이거 보는게 낙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또한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곳은 아카데미이고, 저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계속해서 같은 모습만 비춰 드리는 것도 그리 긍정적인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양성이 떨어진다고요??]

[활동 범위가 좁다는 말씀이신듯;; 요즘 이거 보는게 낙이었는데ㅠㅠ]

[영상이라도 자주 올려주신다니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아쉬운 건 사실이네요. 이렇게 컨셉 빡시게 잡은분은 찾기가 힘들어서.]

[혹시 수익이 안나와서 그런건 아니죠?]

"감사하게도 시청자님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사실 아직 양쪽 모두에서 큰 소득이 나오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물론 저는 돈을 목적으로 방송을 진행하는 게 아니지만, 우선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헨리는 진심으로 설명했다.

돈도 돈이지만, 우선 장기적인 성장을 목표 삼을 것이라고.

지금 구매해야 하는 재능의 구슬이 자그마치 188만 원이다.

그 정도까진 이렇게 방송을 진행하며 얻는 '후원'으로 채울 수 있을 테지만, 그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3단계부턴 가격이 더 크게 뛰겠지.'

아마 후원으로 채우는 게 불가능할 정도의 금액일 터.

'지금 같은 금액이 계속 벌린다면... 최소한 100일은 걸릴 테고.'

이게 맞다.

당장은 느려질지언정, 헨리 자신이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그리고 헨리는 기다리는 일에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그때였다.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진짜 돈때문 아니에요?">

후원 메시지에 반응하려다가, 헨리가 멈칫 굳었다.

'10만 원?'

자그마치 10만 원!

뜬금없이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평소엔 고된 미션을 해 내야만 2, 3만 원씩 받는 게 전부였는데!

하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금전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헨리는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매니저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후원은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이고, 거기 계속 휘둘려선 안 되는....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진짜로?">

"...."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정말 진짜로? 그럼 안 쏩니다 이제?">

그리고 매니저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선 아무런 조언도 해 주지 않은 상태였다.

10만 원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이 상황에서 저런 질문을 받았을 땐?

[기사님 굳어버리셨는데ㅋㅋㅋㅋㅋ]

[아~~ 드디어 큰손 등판ㅋㅋㅋ]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이래도 방송 안할거야??? 진짜???ㅋㅋㅋㅋ]

시청자들은 폭소하고 있었다.

이건 좋다. 반응은 좋은데, 그래서 이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그 정도 판단은 내가 해야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매니저 채팅은 조용했다.

너무나도 생소한 상황에 의지했었지만, 원래 헨리는 누군가에게 과하게 의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쯤은 진작 배운 지 오래였으니까.

판단은 빨랐고, 실행은 더욱 신속했다.

"하겠... 아니, 돈 문제는 아닌데... 그,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색한 표정. 곤란하기 그지없다는 태도와, 방금 한 말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도 머쓱하다는 듯한 얼굴.

꺾어야 할 상대 앞에서 헨리는 굳건해야 했지만, 마법사들을 상대할 땐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결과였다.

[아 오늘도 자본주의에 굴복하나요ㅋㅋㅋ]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ㅋㅋㅋㅋㅋ]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방송 하실거면 더 쏘고요. 며칠 더 볼랬는데 님은 제가 쏴도 될거같았음ㅎㅎ">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웁웁!]

[웁웁! 그는 신이야!]

눈 깜짝할 사이에 40만 원이 벌렸다.

조금 더 버텨 볼까.

찰나간 고민하고, 헨리는 결정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더 버틸 이유가 없다.

'웁웁'은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드러냈다.

괜히 미적거렸다가 놓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을 터.

<'웁웁!'님이 1,000원 후원!>

<"진짜 돈때문에 그러는건 아닌거죠?">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단지 제 능력이 두 가지 모두를 해 내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장기적으로 채널을 성장시키기 위해선...."

<'웁웁!'님이 1,000원 후원!>

<"장기적으로 채널을 성장시키는 이유가 뭔데요??">

"기사로서의 성장입니다."

[입에 침도 안바르고ㅋㅋㅋㅋㅋ]

[채널이 크는거랑 성장이랑 뭔상관이야ㅋㅋㅋㅋㅋㅋ]

[진짜 표정만보면 100% 진심같은데ㅋㅋㅋ]

"저는 진심입니다. 시청자님들께서 후원해 주신 금액으로 저는 재능의 구슬을 구매했고, 지금 이렇게 루소 수석 교관님의 연무장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겠죠."

재능이 없을 때의 헨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나를 다룰 수 있었기에 갈고닦았던 검술은 빛을 발했고, 또한 파이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수 있었던 거니까.

"저는 시청자님들께 즐거움을 드리고자 노력할 겁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후원을 얻어 내고자 하는 게 아닌, 이렇게 기회를 주셨음에 감사드리는 마음일 뿐입니다."

헨리가 말을 멈추었다.

가만히, 더없이 진중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무수히 올라오는 채팅.

하지만 이건 영양가 없는 내용들뿐이었다.

'진짜'들은 아직 헨리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웁웁!'님이 1,000원 후원!>

<"그럼 그냥 후원하는 건 의미가 없겠네요?">

웁웁이라는 마법사는 계속해서 천 원씩 붙여 가며 말했다.

자금을 과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헨리의 반응을 살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알 수 없는 상황에선.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게 헨리의 지론이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가 보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타깝겠지만."

<'웁웁!'님이 1,000원 후원!>

<"그럼 돈은 안 쏠게요. 지금처럼 그냥 쏘면 안 되겠네. 괜히 방송 흐름만 깨지고. 그렇죠?">

'잘못 판단한 건가.'

순간 그리 생각했으나, 헨리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시청자님들을 돈으로 보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건 거짓말이 섞였다.

돈을 벌지 못한다면?

당연히 후원 상점도 이용할 수 없을 테고, 그럼 방송을 해야 하는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하지만 돈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건 진심이었다.

고마운 마음도 사실이었고.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미션드림. B반 올라갈때까지 얼마나걸릴거같아요?]

웁웁은 새로운 제안을 건네 왔다.

"정규 시험은 한 달 뒤의 시험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 외의 시험이 불시에 진행될 수도 있으나,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그럼 너무 먼데. 아무튼 이제 미션으로 드릴게요. 꽁후원은 없어요. 기사님이 까신 거니까.]

[웁웁좌 ㅋㅋㅋㅋㅋ]

[기사님 그럼 방송하시는거죠? 계획 바꾸신거 맞죠??]

"이렇게까지 저를 반겨 주실지 몰랐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용이고, 지금 제가 완전히 잘못 짚었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제는...."

무어라 쓸데없는 말을 이어 가려던 찰나.

"방문자로군요."

방문자를 알리는 소리가 루소의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아마 루소 교관님이실 겁니다. 방송은 조금 뒤에 진행하겠습니다."

또 무슨 일일까.

아마 부정적인 건 아닐 터였다.

기대하며 문을 열었으나, 튀어나온 건 예상 밖 얼굴이었다.

"헨리!"

"...오스틴."

활기찬 목소리. 잔뜩 들뜬 표정. 항상 가볍기 그지없는 헨리의 룸메이트가 그곳에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주 중대한 일이 있지. 내가 설마 별것도 아닌 일로 네 수련을 방해했겠어? 시대의 천재 헨리 카밀턴을?"

"...그래서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으면 찾아오라고 언질해 두긴 했으나 이렇게 바로 올 줄이야.

별것 아닌 이야기라면 바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스틴이 꺼낸 내용은 헨리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내일 수업 참관 있을 거래! 명문가 기사들도 와서 지켜볼 거라고...."

"참관 수업? 우리랑은 상관없잖아."

비정기적으로 있는 행사이긴 했으나, C반은 해당사항이 없을 텐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헨리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티모시 후작가에서 꼭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베인이 널 칭찬해준 거 아닐까?"

BJ소드마스터

24화. 웁웁(2)

원래 헨리의 계획은 그러했다.

마법사들을 만나기 전에야 특별할 게 없었지만, 그 직후부턴 가급적 아카데미를 '정상적으로' 졸업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정상적이라는 건 속도와 주목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과한 시선을 끌지 않고, 적당히 '뛰어난' 수련생 취급이나 받는 정도.

또한 남들과 비슷한 시기에, 아주 약간 더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것.

그래야만 훗날 카밀턴 자작가로 돌아갔을 때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헨리는 자신이 마음속으로 세웠던 계획을 큰 폭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압도적인 속도로. 견제가 들어오더라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만 해.'

어제 갑자기 나타난 신규 시청자.

웁웁이라는 이름의 마법사는 헨리에게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고, 그만큼 압도적인 지원을 받을 건지.

혹은 평범한 성과로 평범한 지원을 받을 건지.

일단 어제 본 모습대로라면 웁웁의 자금력은 확실했다.

또한 헨리를 후원하려는 의사가 있음도 확인했고.

하지만 그에는 대가가 따랐다.

'반드시 충분한 성과를 보일 것. 그렇다면 자신이 그게 걸맞은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지. 그건 분명 내가 기대하는 것보다 클 거야.'

뜬금없이 나타나서 쏟아 부은 금액이 자그마치 40만 원이다.

그 자금력이라면 '만족'했을 땐 그보다도 큰 기대를 할 수 있을 터.

'게다가 흐름도 바뀌었었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후원이 이어졌었어.'

물론 금액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웁웁이 만들어 둔 분위기엔, 다른 마법사들마저 후원 행렬에 참가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해 내지 못한다면... 기회를 걷어찬 꼴이 되겠지.'

웁웁은 분명 기회를 건넸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며, 그래도 자신은 꾸준히 후원금을 건넬 거라고.

하지만 헨리는 그 호의를 쳐냈다.

무언가를 하고, 그에 걸맞은 걸 받겠다고 약속하며.

'...사실 이런 환경에서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받을 자격이 없는 거지.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겠어.'

[M : 꼭 잡으세요 기사님!! 꼭!!]

[M : 궤도에 올랐다는 증거입니다. 저런 큰손들이 있어야 방송이 안정권에 들어서거든요. 물론 저런 것 없이도 동영상 수익을 올릴 순 있지만, 기사님의 경우엔 실시간 방송을 먼저 시작하셨으니까요.]

매니저들마저 격하게 반응하는 게 웁웁이란 마법사의 존재였다.

당연히 헨리의 머릿속 우선순위엔 웁웁이라는 마법사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웁웁은.

헨리에게 첫 목표를 제시했다.

<방문하는 가문의 기사들로부터 2/3 이상 영입 제안을 받을 것>

이번 수업을 '참관'하는 명가의 기사들.

당연히 이건 그들의 독단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쓸 만한 인재를 찾아보라는 가주의 명령.

또 가주는 당연히 백작급 이상의 고위 귀족이었고, 그건 곧 기사 서임권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선택받으면서 바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지.'

그건 곧 기사가 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정상적으로 4년간의 과정을 수료했을 때, 해당 수련생은 왕실로부터 기사의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때부터 의탁할 주인을 찾거나, 혹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방랑 기사로서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가문에 소속된다면?

설령 신분이 1학년이라도 즉각적으로 해당 가문의 기사로 서임되는 것이었다.

'물론 1학년에게 그럴 일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그런 기회를 얻는 건 B반부터지.'

하지만 이번엔?

헨리가 속한 C반에도 기사들이 찾아올 거라고 했다.

이유는 뻔했고.

'베인이겠지. 어떤 이유로건 이쪽으로 오도록 했을 거야. 아버지 눈치가 보일 테니 내게 맞았다고 보고하진 못했을 테고.'

끽해야 가문 소속의 기사에게나 털어놓았을 터.

그것도 완전히 자신이 품었다고 생각하는, 추후 가주가 될 베인 티모시의 라인을 탄 기사들에게만.

'물론 그것도 본인의 착각이겠지만.'

티모시 후작가가 어떤 곳이던가.

헨리도 그곳을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으나, 티모시 후작의 성정은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가문의 식솔과 영지민들은 따스하게 챙기지만, 자식들에 대해선 엄격하기 그지없다고.

또한 후계는 오로지 '실력'으로만 정하겠다고 공표해 두기까지 한 사람이 바로 티모시 후작이었다.

또 여기서 실력이란 건?

당연히 기사로서가 아닌, 영주로서의 실력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미 후작 귀에도 다 들어갔을 거야. 모두 보고받고, 따라가 보라고 허락했겠지. 그러니까 후작가의 기사들이 움직였던 거고.'

발라란은 기사의 나라.

그리고 그런 이름에 걸맞게, 일단 주인을 정한 기사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맹목적인 충성을 지녔다.

최소한 진심은 아니더라도 겉으로는 그렇게 행동해야 했으니까.

그렇잖으면 이 땅에선 결코 기사라는 직책을 얻을 수 없었다.

'어쨌건.'

헨리가 해야 할 일은 변함이 없었다.

'반드시 미션을 수행한다. 성공시키고, 정해진 보수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웁웁을 포함해 다른 마법사들을 만족시킬 만한 그림도 그려야 할 테고.'

거기까지가 헨리 자신의 역할이었다.

또한, 지금 헨리의 머릿속엔 그 이후의 일까지도 꽉꽉 들어차 있었다.

***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샌슨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발라란 왕립 아카데미의 정문.

과거 샌슨이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곳이자, 지금의 자신을 있도록 해 준 고마운 장소였다.

물론 즐거운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원래 시간이란 건 부정적인 기억들조차 적당히 포장해 주는 법 아니던가.

잠시 추억을 되새기던 그가 우측을 바라보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루덴 경."

"그렇습니다. 샌슨 경께선 처음이시지요? 티모시 후작께서 샌슨 경을 인정하신 모양입니다."

"예, 기쁘게도."

샌슨은 흔쾌히 상대의 말을 인정했다.

아카데미의 수업을 참관하는 기사란 곧 가문의 미래를 일부 책임지는 사람이란 의미였으니까.

그가 괜찮은 인재를 찾으면 찾을수록 가문의 힘이 강대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말을 받은 건 테일러라는 기사였다.

그 역시 로드릭이란 명가의 기사였고, 샌슨과 달리 벌써 다섯 번째로 아카데미를 방문하던 참이었다.

"아, 저기 학장께서 오시는군요."

테일러가 손짓한 방향에서 괴상한 머리를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샌슨 역시 아는 얼굴이었고, 그제야 그는 상황을 재차 실감했다.

'진짜 내가 이곳에 오다니.'

기뻤으나, 이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얼간이 도련님의 똥을 치우는 것만 아니라면 두 배는 기뻤을 텐데. 유감스럽군.'

사실 그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었다.

명목상 그는 베인 티모시를 충실히 따르는 입장이었고, 베인은 그런 그를 철저히 믿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후작에게 그대로 보고되는 줄은 상상도 못 한 채로.

티모시 후작은 샌슨을 아카데미로 보냈다.

참관의 목적은 유지하되, 멍청한 아들놈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라는 명령과 함께.

불합리한 명령이 주어지더라도 일단 따른 뒤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명령도 있었다.

"이렇게 반가운 얼굴이! 샌슨 경 아닌가요? 정말 오랜만이군요!"

"학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런 딱딱한 태도는 저를 슬프게 만든답니다, 샌슨 경. 경이 이곳을 떠나 멋지게 기사가 된 순간부터 우린 대등한 관계가 된 거예요. 이 학장은 정말 뿌듯하군요."

'정말 여전하시군.'

샌슨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학장은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으니까.

'한때는 이분이 돈만 밝히는 수전노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머쓱한 웃음과 함께 샌슨은 학장을 따라 들어갔다.

동행한 10여 명의 기사도 함께.

이들은 모두 저마다 발라란을 대표하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적당히 의례적인 절차를 마치고, 학장이 직접 대접하는 차까지 마시며 샌슨은 구체적인 일정을 파악했다.

가장 먼저 들를 곳은 당연하게도 A반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 수련생들이 모인 곳이었고, 사실상 예비 기사들이라 봐도 부족함 없는 수준.

얼간이 도련님의 똥을 치우는 것보다도 중요한, 이번 방문의 핵심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오오, 정말 대단합니다. 올해는 뛰어난 수련생들이 정말 많군요!"

퓨렛 공작가의 기사가 감탄하는 것처럼, 샌슨 역시 내심 감탄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이건... 우리가 선택을 바라야 하는 입장이로군.'

단번에 샌슨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이 아래라면 모를까.

A반의 수련생들은 수많은 러브콜을 받고, 그중 가장 끌리는 곳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일단 들어온 후엔 후배 기사일 테지만, 들어오기 전엔 반드시 포섭해야만 하는 존재.

그러나 아쉽게도.

"샌슨 경은 처음이시니까요. 티모시 후작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저를 믿고 맡겨주셨음에도 한 명도 데려가지 못하다니."

샌슨을 따라 티모시 후작가로 들어가려는 수련생은 한 명도 없었다.

티모시의 이름값이 부족해서?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다.

단지 숙련된 타 기사들에 비해 샌슨의 '영업'이 부족했을 뿐.

'B반에서는 반드시 한 명이라도 건져야 할 텐데.'

샌슨이 다시 이동했다.

B반.

A반에 비해선 떨어지지만, 이들 역시 재능 있는 수련생들임에는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재는 있지만, 당장 기사로서 활동할 수 있는 녀석은 거의 없군. 그나마도... 모두 뺏겼고.'

입맛이 썼다.

어쩐지 내년부턴 이곳에 올 일이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기존까지 계속 보내오던 기사가 샌슨 대신 찾아오게 될 터.

'...티모시 후작가에도 그편이 낫겠지. 아, 내가 이토록 무능했다니.'

사실 이건 경험의 문제일 뿐이었으나, 샌슨으로선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아무 성과도 올리지 못한 가운데, 이제부턴 베인 티모시의 덜떨어진 명령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란 게 더 절망적이었고.

'...그래도 해 내야겠지. 나는 명예로운 티모시의 기사다. 후작님께서 명령하신 바, 그 내용이 무엇이건 완수하는 것이 나의 임무니까.'

샌슨은 결의를 다졌다.

반드시 명예롭게 일을 끝마치리라 다짐했으나, 그건 오래 가지 못했다.

"겁만 좀 줘. 내가 누군지 확실히 인지할 수 있도록. 같은 곳에 있다고 같은 입장이 아니란 걸 알려주란 소리야."

"...예?"

"이해 못 했어? 샌슨 경은 주인이 두 번씩 말하게 하는 사람이었나?"

베인 티모시.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으려 애쓰는 얼굴이었으나, 당연히 샌슨에겐 아무런 위압감도 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한숨.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샌슨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방식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경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제시했으니, 경의 임무는 내가 원하는 걸 내게 가져오는 거야."

"...잘 알겠습니다."

물론 티모시 후작에게 그대로 보고하겠다는 의미의 대답이었다.

베인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하긴 해야겠지.'

후작이 명령하지 않았던가.

설령 불명예스런 명령이라도 일단 따르고, 그 후에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저 녀석인가.'

훈련장을 가득 채운 C반 수련생들.

그사이에서 샌슨은 베인이 지목했던 소년을 볼 수 있었다.

헨리 카밀턴.

몰락한 카밀턴 자작가의 장남이자, 매우 짧은 기간 만에 숨겨졌던 재능을 꽃피웠다는 수련생.

'루소 수석 교관님이 스승으로 계신다는 말도 있었지. 이... 도련님은 내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지만 말이야.'

루소는 샌슨이 수련생일 때도 교관이었다.

베인도 그 사실을 알기에 굳이 말을 전하지 않은 것일 테고.

'...어쩔 수 없지.'

벌써 몇 번째로 같은 생각을 하며 샌슨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덜떨어진 도련님이 만족할 만한 계획을.

BJ소드마스터

25화. 웁웁(3)

'저 사람들인가.'

한창 수업이 진행되던 도중.

헨리 카밀턴은 훈련장 구석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나타낸 걸 확인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구.

성별 가릴 것 없이 탄탄한 체격은 아무리 평범한 옷을 둘러도 감춰지지 않는 종류였다.

'특히 저 눈빛. 일반인들에게서 저런 눈빛이 나올 리가 있나.'

굳건하고, 깊은 눈이었다.

지금 그 눈에 드러난 목표는 탐색.

혹시나 건져갈 수 있는 인재가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조금 달랐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듯했으나,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세심히 뜯어보는 분위기가 남다른 자였다.

'저 사람이군.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베인이 징징거리며 불러온 사람인 게 분명했다.

얼굴에 찝찝함이 걸려 있는 걸 보니 이미 좋지 않은 명령을 받은 것 같았고.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진 못할 테고, 가능성이 높은 건 참관인의 지위를 이용한 무언가겠어.'

그때였다.

"전원 주목."

한창 수업을 진행하던 교관, 키아나가 수련생들을 멈추었다.

그녀가 진행하는 수업은 무기술.

실전 무기를 다루는 만큼 매 수업마다 날이 선 긴장감을 강요하는 키아나였으나, 오늘만큼은 평소의 의욕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귀찮음만 얼굴에 드러날 뿐.

"여러분에게 전할 사항이 있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은 여러분을 지켜보고자 오신 손님들이 계신다."

힐끗.

머쓱하게 서서 기다리는 기사들을 한번 보고, 키아나가 다시 말했다.

"열 곳의 명문가에서 오신 기사님들이시다. 너희들에게 재능이 있다면 이후의 교육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당장 기사로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훌륭한... 기회이니 능력이 된다면 반드시 잡도록."

물론 이곳에 그럴 만큼의 수련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교관 키아나도 그걸 아니까 저렇게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인 거고.

당장 배우기 급급한 녀석들의 시간을 왜 뺏는 건지 모르겠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야 어쨌든.

"둘러보시죠. 특별히 보시고자 하는 게 있다면 말씀하시고."

이건 학장의 지시였다.

또 그녀는 학장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편에 속했고.

"감사합니다. 교관님."

"제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학장님께서 신경 써 주신 거니까."

"...수업 시간을 뺏게 되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끄덕.

그제야 키아나의 기색이 조금 풀렸다.

사실 이곳에서 교관직을 수행하는 기사들은 기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발라란의 국왕은 인재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교관들의 위세를 결정짓는 건 기사로서의 실력이 아니었다.

'다행이군. 기분이 좀 풀린 모양이야.'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샌슨은 겨우 안심하고 본격적으로 헨리 카밀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기세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과연 매서웠다.

베인 정도는 충분히 찜 쪄 먹고도 남았을 정도로.

다른 기사들 역시 생각이 비슷했는지 어느 샌가부터 헨리 쪽만 유심히 지켜보는 상황.

물론 그 이상 가진 않았다.

단지 싹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때.

"키아나 교관님. 혹시 수련생들이 마나를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경께서 원하신다면 보여 드려야죠.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고자 하시는 겁니까?"

"전체적인 운용 능력을 보고 싶습니다."

키아나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경께선 아카데미의 선발 과정을 믿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충분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저희가 B반으로 올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키아나 교관님."

그때 다른 기사들이 샌슨을 돕고 나섰다.

불쌍하기도 하고, 티모시 후작가 쪽으론 한 명도 데려가지 못했다는 게 마음이 쓰이기도 해서였다.

"예, 류드 경."

"티모시 후작가는 올해부터 개인의 잠재력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단지 그런 것이겠지요. 잠시... 괜찮으시다면 바깥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수업 중입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단지 키아나 교관께서 지니신 교육 방침이 어떠신지 궁금하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또한 최근 개인적으로 얻은 성취를 나누고자 하는 목적입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한껏 짜증난 키아나를 진정시키고, 함께 온 샌슨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시간을 주려는 행동일 터.

잠시 말을 걸어 온 기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키아나는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샌슨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아나를 비롯한 기사들이 나가고, 이제 수련생들은 수련하는 척 하며 샌슨이 서 있는 쪽만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엿보였다.

'싹은 몇몇 보이지만, 아직 너희들이 발을 들일 곳은 아니다.'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호응부터 끌어내는 게 순서였다.

"나는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샌슨이다. 키아나 교관께서 기회를 주신 덕분에 이곳에서 너희를 만나게 되었군. 소속된 가문을 떠나, 발라란 왕국민으로서 왕국의 미래가 보장되었음을 느낀다."

꿀꺽. 수련생들이 침 삼키는 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어차피 아직은 새내기들.

이런 입 발린 몇 마디만으로도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기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왕국에 충성하겠다는 마음가짐이겠으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하겠지?"

스릉.

샌슨이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검이었다.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가 된 이후, 수년간 함께해 온 애병.

수련생들을 향해 뽑기엔 과한 감이 있었으나, 그렇기에 수련생들은 더더욱 동요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한 명씩 검을 들고 나오도록. 반드시 너희가 얻어가는 것이 있도록 해 주마."

번쩍.

누군가 손을 들었다.

"할 말이 있나?"

"예! 순서가 궁금합니다!"

"그런 것까지 정해 줄 필요는 없겠지. 뜻대로 하도록. 하지만 기회는 한 번뿐이며, 자신의 차례가 끝났더라도 곁에서 지켜보길 권한다."

"그, 그럼 저부터...."

끄덕.

샌슨이 방금 손을 들었던 수련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과 같은 패기 역시 기사의 덕목 중 하나이지. 훌륭하다. 최선을 다해 보도록."

***

진짜 기사와의 대련!

그 한 문장은 C반 수련생들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역시 기사에게 요구되는 능력이었으나, 어찌됐건 그들은 아직 어린애였으니까.

하물며 눈앞의 기사, 샌슨은 그들이 동경해 마지않던 기사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특히.

"훌륭하다. 자리로 돌아가도록."

"감사합니다!"

지도하는 과정에서 샌슨이 펼치는 검술은 그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역시 진짜 기사는 다르구나. 우리랑은 비교도 안 돼."

"아까 봤어? 검은 한 번도 휘두르지 않으시고 마나만으로...."

"다음 차례는 누구지?"

이미 대련을 마친 수련생들이 옹기종기 모인 채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기대 따위 내려놓은 지 오래.

진짜 기사와 자신들 사이의 벽을 직접 체감한 탓이었다.

또한 샌슨이 장담했던 대로, 그는 이 수련생들을 위해 매번 '새로운' 방식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련생들도 더없이 흥미로운 눈으로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때였다.

"헨리다. 언제 나서나 했더니 드디어 나오는군."

"쟤도 다를 거 없을걸? 직접 겪어 봤잖아."

"그래도 우리보다 조금은 낫지 않을까? 저 녀석이 그간 수업에서 보여 줬던 모습을 생각한다면...."

헨리 카밀턴.

얼마 전 뜬금없이 부상한 수련생이 샌슨 앞에 섰고, 수련생들은 더더욱 흥미롭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샌슨은.

'미안하다.'

속으로 사과부터 하고 있었다.

"이름은?"

"헨리 카밀턴입니다."

"카밀턴이라."

"카밀턴 자작님께선 왕국 동부, 헤리츠 지방에 계십니다. 별도의 영지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유감이로군.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기백은 훌륭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 탐탁찮은 환경임에도 한 점 부끄럼조차 없는 당당함.

베인 티모시와 비교하자면 헨리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씁쓸하군.'

힐끔.

그 와중에 베인 티모시는 곧 벌어질 상황이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답답해진 마음으로 샌슨은 검을 들었다.

"들어와라. 어떤 수든 써도 좋으며, 마나 역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활용하길 권한다."

"예."

헨리도 검을 뽑았다.

선공권을 넘겨받았고, 이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작하란 의미였다.

우우웅.

빠른 속도로 마나가 순환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구를 예열하듯, 전신이 전투에 적합한 상태로 접어들었다.

'...깔끔하군.'

샌슨은 건조한 눈으로 평가했다.

마나의 움직임은 안정적이었고, 이건 이후 펼쳐질 기술들을 든든히 받쳐 줄 터였다.

그리고 헨리가 검을 휘둘렀다.

'포기한 건가?'

순간 샌슨이 그리 생각했다.

마나조차 실리지 않은 검은 나뭇가지와 다를 바가 없다.

이미 샌슨의 검엔 마나가 형형히 빛나는 빛을 뿌려 대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부딪친다면 헨리의 검은 부러질 테고, 대련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다.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군.'

망신당하지 않고 끝나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차라리 맥없이 끝나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러나.

깡!

검과 검이 부딪쳤을 때 벌어진 상황은 샌슨의 기대와 달랐다.

'...그 잠깐 사이에 집중을?'

이건 정말 놀랍다.

단순히 뛰어나단 말로는 부족할 만큼.

상대가 기사라면 모를까, C반 수련생이란 걸 생각하면 기대를 한참이나 벗어난 실력인 것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샌슨은 헨리가 자신의 의도를 꿰뚫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지더라도 웃음거리가 될 생각은 없단 거야. 이런... 더욱 부끄러워지는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기사의 숙명인 것을.

샌슨은 마나를 바짝 끌어올렸다.

다치진 않게, 하지만 압도적으로 헨리를 꺾어 버릴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 편이 상호간에 나을 테니까.

"오오!"

"이게 기사...!"

수련생들의 감탄이 터졌다.

그야말로 강맹한 기세.

자신들로서는 감히 따라가지 못할, 압도적인 힘이 샌슨의 검에 담겨 있는 탓이었다.

'물러나라. 맞섰다간 우스꽝스런 꼴을 보이게 될 거야.'

아마 검은 부러지다 못해 박살나다시피 할 테고, 그 충격의 여파로 헨리는 엉덩방아를 찧게 될 터.

'도련님은 만족하지 못할 테지만, 이거면 나도 최선을....'

생각이 멈추었다.

순간 샌슨은 굳었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뜬 채 헨리를 바라보았다.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단지 미끄러지듯 빗겨 갔을 뿐.

이 헨리 카밀턴이란 수련생은 놀랍게도 샌슨의 검격을 '흘려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잔뜩 놀라 버린 샌슨의 앞에서,

'약간 위험했어.'

헨리는 아직 여유를 잃지 않은 상태였다.

뛰어난 기사의 검을 막았다.

적절한 검술과, 적절한 마나 운용.

결정적으로 C반 수련생에 불과하다는 상대의 방심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지만, 그렇다곤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이젠 잘 끝내도 본전일 거다.'

수련생들의 반응이 그랬고, 베인 티모시의 반응이 그랬다.

눈앞의 기사, 샌슨 역시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고.

'당장 공격적으로 검을 쓸 수도 없겠지. 그랬다간 자칫 열 받아서 화풀이하는 걸로 비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결국 할 수 있는 건 적당한 공격뿐이고, 헨리는 그 모든 걸 전부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할 거면 처음부터 찍어 눌렀어야지.'

물론 이 기사가 자신의 사정을 봐주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헨리가 피해를 봤으리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헨리는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자존심이나 세울 생각은 아니지만.'

<'웁웁!'님이 50,000원 후원!>

<"캬ㅋㅋㅋ 공격 한번 막을때마다 5만원씩!!">

'돈이 걸렸으니 어쩔 수 없지. 미안하게 됐군.'

BJ소드마스터

26화. 방송용 장비(1)

발라란 왕립 아카데미의 제5수련장에선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C반.

나름 실력을 갖춘 수련생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단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두 명.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샌슨과, C반 수련생 헨리 카밀턴이었다.

공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기사 샌슨은 공격했고, 수련생 헨리는 방어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자리의 수련생들을 경악시키기엔 충분했다.

막고, 빗겨 내고, 피하는.

일견 단순해 보이는 반응이지만, 헨리는 단 한 번도 샌슨에게 유효타를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웁웁!'님이 5만원 후원!>

<"아 무빙 너무좋고ㅋㅋ">

<'웁웁!'님이 5만원 후원!>

<"아~ 위태위태했어요~">

<'웁웁!'님이 5만원 후원!>

<"ㅋㅋ어림도없지! 바로 5만원 받아버리고ㅋㅋ">

쉴 새 없이 떠오르는 후원 메시지.

하지만 그에 기뻐할 틈은 없었다.

깡! 까가강!

기사의 검격을 받아 내는 건 헨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극도로 집중한 탓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나마도 진심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라도 버티는 것일 터.

하지만 다른 수련생들에겐?

헨리의 활약은 동경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다.

"또, 또 막았어!"

"기사님이 봐주고 계신 거겠지?"

"당연하지! 하지만 봐주신다고 해도... 점점 강해지는 것 같지 않아? 마치 시험하듯이...."

"헨리 저 녀석, 설마 티모시 후작가로 가 버리는 건 아니겠지? C반에서 단번에 기사라니!"

격한 반응이 일었다.

개중엔 과거 헨리를 무시하던 이들까지 섞여 있을 정도였다.

실력이 없기에 깔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뿐이었다.

이후 그 감정은 질투나 당황으로 이어졌으나, 지금 저 모습을 마주한 순간 '인정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물론, 베인 티모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왜 봐주는 거야? 분명 그렇게 말했을 텐데!'

베인은 헨리 카밀턴에게 겁을 주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그 방법은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지금 이대로라면 오히려 자신감만 불어넣어 주는 셈 아닌가.

'나서고 싶지만....'

아무리 베인이라도 차마 이 자리에서까지 나설 순 없었다.

아카데미 수련생으로서의 베인 티모시는 그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헨리는 점차 단계가 올라가는 샌슨의 공격을 막거나, 빗겨 내거나, 피하고 있었다.

'할 만한데?'

할 만하다.

헨리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과거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일.

애초에 현재 헨리의 마나 수준으론 불가능한 게 당연한 일이었다.

단지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건, 압도적인 '숙련도'였다.

적어도 기초적인 부분에서.

헨리는 C반의 어느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기술을 지닌 셈이었으니까.

게다가.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압도적인 공격을 막아 냈습니다.]

[대상의 레벨이 몹시 높습니다! 검술 숙련도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공격을 받아 내는 순간마다, 헨리는 자신의 실력이 점차 상승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것도 검술 숙련도에 영향을 미치는 거였어!'

검술 숙련도.

루소의 연무장을 사용하고, 루소의 검을 사용함으로써 헨리는 꽤나 큰 성장을 거둘 수 있었다.

즉 환경과 장비가 성장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또한.

상대의 수준 역시 몹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후우. 대단하군."

그때 샌슨이 검을 거두고 말했다.

헨리와는 달리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모습.

또한 그 얼굴엔 이제 확신이 걸려 있었다.

"헨리 카밀턴이라고 했나?"

"예."

"티모시 후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명예를 아시는 가주께서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엔?"

"겪지 못한 것을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헨리는 눈치 챘다.

드디어 첫 번째 입질이 오고 있다는 걸.

설렘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

곧 '웁웁'의 미션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5만 원짜리 후원이 끊겼다는 아쉬움이었다.

'몇 대만 더 치고 넘어가지. 벌써 포기하다니.'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하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헨리는 일단 샌슨을 상대하는 데 집중했다.

'방금 한 대답에도 만족하는 눈치군.'

무례하지 않되, 비굴하지도 않았다.

이 나이 또래에선 나오기 쉽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과거의 헨리라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헨리가 충분히 스스로를 돌이켜보도록 도와주었다.

'그것 외엔 할 게 없기도 했고.'

"조금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눠 봤으면 하는데, 헨리 카밀턴. 생각이 있나?"

"어떤 대화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지?"

"어느 정도는 예상되오나, 단지 저는 스스로가 그러한 대화를 나눌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장은 그렇겠지."

"티모시 후작가에선 기사 수련생의 육성도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 어찌 됐건 이곳에서 나눌 대화는 아니로군. 내가 키아나 교관께 요청할 테니...."

"샌슨 경!"

그때 묵직한 외침이 터졌다.

베인 티모시.

후작가의 장남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베인 티모시 수련생. 나는 지금 이곳에 참관인의 자격으로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즉시 자리로 돌아가도록."

"...실수하는 거요, 샌슨 경."

"경고는 한 번뿐이다. 실수가 반복된다면 키아나 교관께 정식으로 처벌을 요청할 것이다."

"어떻게 내게...."

베인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샌슨의 단호한 기색에 결국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헨리 카밀턴은 이 수업이 끝나고 남도록. 이후 수업의 교관께 내가 정식으로 요청해두겠다. 그리고 베인 티모시 수련생."

"...."

"잠시 밖으로 나오도록. 가슴에 새겨야 할 충고를 해 줄 테니."

***

수련장 복도.

수련장 내부와는 완벽히 격리된 장소에서 샌슨은 티모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과는 달라진 분위기였다.

이 순간 그는 아카데미의 참관인이 아닌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샌슨은 난처한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지? 그것도 저 수련생들 앞에서, 어떻게 내 명예를 깎아내릴 수 있느냐는 말이야."

"도련님께서 생각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하, 이번엔 또 충고까지 늘어놓으려 하는군. 한 가지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기사 주제에...."

"차기 가주가 되실 분께 드리는 조언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럴 뜻이 없으셨다면 이런 말씀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차기 가주!

그 마법의 단어에 베인은 분노가 삭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훌륭한 주인은 이러한 충고도 귀담아들어야겠지."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련님께서도 보셨겠지만, 헨리 카밀턴의 재능은 제 기대를 한참이나 넘어섰습니다."

"경이 보기에?"

"장담컨대, 다른 가문의 기사들도 그 모습을 봤다면 저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어떤 결정이지?"

"반드시 저희 가문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결정입니다. 당장 기사로서 활동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머지않았다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불쾌해. 불쾌하기 그지없어. 나의 기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니. 그것도 혼내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에서."

샌슨은 입을 닫았다.

이 골 때리는 도련님을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하던 사이, 베인은 놀랍게도 여유로운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걸 참아내는 인내력 역시 가주로서의 덕목이겠지?"

"훌륭하십니다."

"티모시의 기사가 된다는 건, 결국 나를 주인으로 섬긴다는 것과 같으니까. 언젠가는 말이야."

물론 그리 깔끔한 이유는 아니었다.

가문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단, 언젠가 저 밉상인 헨리를 제 발아래 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나온 대답일 뿐.

하지만 그게 어딘가.

샌슨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또한 가주께 빠짐없이 보고하겠습니다. 도련님께서 훌륭한 인재를 포섭할 수 있도록 힘써 주셨다는 내용으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물론이지. 내가 경을 부르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저 헨리가 그렇게까지 뛰어나던가?"

"그렇습니다."

샌슨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처음에 웬 낙제생이 일주일 만에 C반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으나, 방금 몇 번인가 검을 부딪쳐 보곤 깨달았다.

저 헨리 카밀턴이라는 수련생이 진짜 천재라는 사실을.

"고작 몇 번 검을 나누는 사이, 헨리 카밀턴은 최소 한 단계 이상 성장했습니다."

***

샌슨이 망나니 도련님을 데리고 나간 사이.

헨리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시선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이런 류의 관심은 영 익숙하지가 않단 말이지.'

물론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그렇게 신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좀 생소할 뿐이었으나, 다른 때와 달리 지금의 헨리는 꽤 곤란하다는 심정이었다.

'진행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바로 방송이 그 이유였다.

헨리가 방금 보인 모습 탓에, 지금 채팅창은 거의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너무 잘해버렸고ㅋㅋㅋ]

[헨리! 헨리! 헨리! 헨리! 헨리!]

[샌슨 어디갔나요? 밖에 나갔죠?]

[베인 쟤가 방금 그 기사랑 같은 가문 아니었음? 귀족가라고 하셨던것 같은데.]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ㅋㅋㅋㅋ]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수련생들.

또한 샌슨이 방금 보인 모습과, 베인 티모시의 태도.

또한.

시청자 중 한 명인 '웁웁'의 반응을 궁금해 하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의 기대로 채팅창은 쉴 틈을 몰랐으나, 정말 유감스럽게도 헨리는 지금 그에 호응해 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미친놈 취급 받기 딱 좋지.'

마법사님들이라거나, 시청자님들이라거나.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헨리를 둘러싼 루머들이 아카데미 전체로 퍼져 나갈 터였다.

'특히 마법사라는 표현이 들리는 순간 파이크가 미쳐 날뛰기 시작할 테고.'

그는 여전히 헨리가 모종의 수단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뭐든 방법이 필요해.'

이런 상황에서도 방송을 진행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거금을 쏟아 부어 주는 시청자가 있을 땐 더더욱.

<'웁웁!'님이 10,000원 후원!>

<"지금 방송 진행하시면 1분에 10만원!">

단순히 할 말이 있을 때조차 1만 원을 쾌척하는 게 바로 저 시청자였다.

하지만 그 밑에 달린 조건.

저런 것 때문에 헨리는 돌아 버릴 지경인 것이다.

'샌슨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진행해도 2레벨 구슬은 사고도 남겠군. 망할.'

속이 타들어가던 그때.

[아ㅋㅋ 이걸 못먹나요ㅋㅋㅋㅋ]

[1분에 10만원 미친ㅋㅋㅋ 웁웁좌ㅋㅋㅋ]

[후원상점에 그런거 안팔아요? 무조건 세지는것만 파나?]

[저도 시켜주십쇼 엉님!!! 저는 천원만 주셔도 됩니다!!!]

무의미한 채팅 사이, 헨리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원 상점! 맞아, 그게 있었지.'

처음 상점이 개방됐을 때.

헨리는 물품 대부분을 확인했었다.

하지만 구독자 조건을 충족시킬 때마다 판매하는 물품의 종류가 크게 늘어나던 걸 보지 않았던가.

'이번 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

최근 헨리는 구독자를 200명까지 늘린 상태.

그때도 후원 상점 품목이 늘어난다는 메시지가 올라왔었다.

그리고 상점을 켠 순간.

[후원 상점에 입장했습니다.]

[새로운 기능이 개방되었습니다.]

['카테고리 분류'가 가능합니다.]

['상품 검색'이 가능합니다.]

헨리는 대마법사로부터 또 한 가지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카테고리 분류 기능.

예전엔 무작정 목록을 내려 가며 확인해야 했다면, 이젠 원하는 것들만 골라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검색 기능까지.

모든 설명을 확인하고, 헨리는 곧바로 주어진 선물을 활용해 보았다.

'카테고리는 방송으로. 검색은... 일단 비워 두는 편이 낫겠어.'

좌라라락.

삽시간에 갱신되는 상점 품목.

그 목록을 확인하고, 헨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거다.'

BJ소드마스터

27화. 방송용 장비(2)

헨리가 원하는 건 단순했고, 추가된 물품 목록은 다양했다.

[카테고리 : 방송용 장비]

* 방송용 기본 마이크 : 18,000원

* 방송용 기본 위장 인형 : 156,000원

* 방송용 기본 영역 표시기 : 870,000원

...

단순히 이름만 봐선 기능을 짐작할 수 없었다.

헨리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가장 저렴한 물품부터 건드려 보았다.

[방송용 기본 마이크 : 180,000원]

* 마이크를 착용했을 때, 진행 멘트를 '비교적 적절한 대사'로 출력합니다.

* 1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 최대 10명에게 적용됩니다.

'...적절한 대사?'

다행히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상세 정보를 확인했을 때, 헨리는 이 마이크의 용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거군. 내가 방송을 진행해도, 주변에선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느끼지 못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헨리가 진행할 때의 멘트는 기사 수련생이 꺼낼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마이크를 사용한다면?

마법사네, 뭐네 떠들어 대는 내용이 '상황에 맞는 대사'로 변경되어 들린다는 뜻이었다.

'훌륭해. 하지만 이걸론 부족하겠어.'

금액이 저렴한 만큼 효과도 떨어졌다.

고작 1시간 동안 지속되며, 적용되는 사람도 10명뿐이라는 설명.

헨리는 상점 페이지를 넘겼다.

[방송용 마이크 강화의 구슬]

* 마이크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 강화할 때마다 비용은 점차 상승하며, 효과는 즉시 적용됩니다.

'이거야.'

강화라고 했다.

개념은?

당연히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결국 필요한 만큼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적용되는 인원 수, 지속 시간이나 '적절한 멘트'의 질을 올릴 수 있단 뜻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겠지.'

이건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다.

헨리는 삽시간에 대금을 치르고 강화용 구슬을 선택했다.

'지속 시간은 두 시간. 인원은 100명으로. 멘트는 꽤 적절한 내용이 흘러나오도록.'

[447,000원을 결제했습니다!]

피 같은 돈이 사라졌다.

아쉬워할 틈도 없이, 헨리는 주머니 속에 잡힌 구슬을 슬쩍 꺼냈다.

바로 뒤돌아선 채, 보이지 않는 각도로 입에 넣었다.

'...썩 좋은 맛은 아니네.'

복잡 미묘한, 몸에 좋다는 약초를 달여 먹었을 때와 비슷한 맛이었다.

[기사님 뭐 또 드셨는데?]

[벌써 돈 다 모였어요? 180만원이라고 안했음?]

[아ㅋㅋ 뭔데ㅋㅋ]

수련생들은 방금 벌어진 일을 보지 못했으나, 화면엔 그대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

그리고 헨리는.

[마이크 : OFF]

화면 곁에 새로 추가된 버튼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딸깍.

손을 뻗어 건드리자.

[마이크 : ON]

* 남은 시간 : 1시간 59분 59초

* 주변 인원 : 95

강화 효과가 완벽히 적용된 마이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된 건가?"

슬쩍. 헨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반응은 없었다.

다시 한번, 대마법사를 믿고 헨리는 재차 시도해 보았다.

"마법사. 크흠. 마법사. 마법사님들."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반응.

수련생들은 여전히 흥미롭다는 눈으로 헨리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 건진 알 수 없었으나, 설명에 적혔던 것처럼 꽤나 '자연스러운' 내용이 흘러나오는 모양.

그렇다면.

"...방금 저는 마이크를 구매했습니다. 기능은 이렇게 진행하는 목소리를 다른 내용으로 바꿔서 들려준다는군요. 마이크의 값은 1만8천 원이었으나, 수용 인원을 늘리기 위해 44만7천 원을 결제함으로써...."

밀린 멘트를 쏟아낼 차례였다.

헨리는 빠르게, 하지만 덤덤한 목소리로 시청자들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마이크를 구매했고, 덕분에 방송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허용 인원은 100명.

얼추 두 시간 정도 진행할 수 있을 테니, 샌슨이 돌아올 때까진 계속 지금처럼 유지하겠다는 내용까지.

그 반응은?

당연하게도 폭발적인 웃음이었다.

[아니 또마법사 너무 편한데ㅋㅋㅋㅋㅋ]

[또 치트키를 썼느냐!!!]

[10만원에 컨셉 흔들린거 아님??ㅋㅋㅋㅋ]

[ㄴㄴ이분 원래 이런식이었음ㅋㅋ 후원상점이랑 대마법사가 치트키임ㅋㅋㅋ]

어처구니없다는 반응.

필요한 순간마다 필요한 게 나오는 상황이 우스웠으리라.

'나도 비슷한 심정이지만.'

대마법사가 필요할 때마다 던져 주는 걸 어쩌란 말인가.

헨리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어떤 경우에서건, 솔직한 태도가 끝까지 살아남는 법이었으니까.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아ㅋㅋ 뭔가 당한것같은데ㅋㅋㅋ">

[믿음과 신뢰의 웁웁좌ㅋㅋㅋㅋ]

[웁웁좌 호구행ㅋㅋㅋㅋ]

[1분에 10만원ㅋㅋㅋㅋ 미쳣냐고ㅋㅋㅋ]

"10만 원 후원 감사합니다. 마이크의 효과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쪽에선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군요."

벌써 10만 원이 복구됐다.

이대로 5분만 버티면 마이크에 들어간 지출을 메우고도 남을 터.

제발 베인과의 푸닥거리가 오래 걸리길 바라며, 헨리는 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가문에 대한 집념이 강하다라.'

헨리가 방송을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 때.

티모시 후작가의 기사 샌슨은 다시 아카데미의 제5수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베인 티모시는 처음과 달리 꽤 호의적으로 변한 상태였다.

샌슨이 적당히 띄워 주기도 했고, 베인이 기본적으로 '차기 가주'라는 표현에 약하기도 한 덕분이었다.

적당한 대화가 오간 직후.

베인은 샌슨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때 언급된 게 바로 헨리의 가문이었다.

카밀턴 자작가.

동부의 몰락한 귀족 가문이었고, 사실상 영지조차 없는 유명무실한 입장.

헨리가 3년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 온 이유는 바로 그 영지를 살려 내기 위해서라는 배경까지.

'쉽사리 넘어오진 않겠군.'

사실 귀족이라도 누군가의 기사가 되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자식들이 가문을 이어받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헨리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데려올 수 없음을 의미했다.

'가주가 기사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으니. 후작님께서 그걸 받아들여 주셔야 할 테지만... 내가 아는 분이시라면 분명 허락하실 거다.'

남은 건 한 가지.

다른 기사들이 눈독을 들이기 전에, 헨리 카밀턴이라는 기대주를 티모시 후작가로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모두 주목."

수련장으로 들어선 샌슨이 말하자마자 수련생들의 시선이 쫙 몰렸다.

얼핏 보면 처음과 다를 것 없는 분위기.

하지만 샌슨은 명백한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이었다면 내가 들어오자마자 이쪽을 바라봤을 테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들의 정신은 어딘가에 팔려 있었다.

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기사가 들어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헨리 카밀턴이 그 대상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샌슨조차도 저도 모르게 헨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키아나를 진정시키려면 그의 역할부터 마치는 게 급선무였다.

"대련을 마저 진행하겠다. 한 명씩 나오도록."

수업은 금세 끝났다.

수련생들은 여전히 대련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나, 처음과 같은 기대는 없었다.

이미 헨리의 모습을 보았으니까.

자신이 그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가능성이 없단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아나 교관님. 최선을 다해 지도했습니다."

"수련생들의 실력이 진전된 것은 저도 느꼈습니다. 저야말로 앞서 저지른 무례에 사과드립니다.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교관, 키아나는 이제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샌슨이 단지 장난삼아 C반을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샌슨의 지도는 진심이었고, 그 여파는 교관인 키아나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아, 헨리를 보고자 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가능성을 보신 건가요? 말씀해 주신다면 추후 지도에 있어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놓친 부분이 있다면 확인하고, 이번 학기의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샌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후작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이것은 가벼운 결정이 아니고, 이미 후작님께 마법 메시지를 보내 두었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솔직히 놀랍습니다. 보는 눈이 부족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요."

"아닙니다."

샌슨은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헨리 카밀턴은 제가 지도하는 사이 급격히 성장한 것이니까요. 키아나 교관님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단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샌슨은 성장의 순간을 목도했고, 키아나는 그러지 못했을 뿐이었다.

특히 직접 검을 맞대기까지 했고.

키아나를 보내고, 샌슨은 곧 다른 기사들에게도 대충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진짜 '대충'이었다.

그럭저럭 쓸 만한 수련생을 발견해서 이야기나 좀 나눠 볼 생각이라고.

'헨리까지 뺏길 순 없지.'

헨리 카밀턴이야말로 아카데미에서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이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리다. 느긋하게 다녀오시오."

"감사합니다, 류드 경."

먼저 떠나 줬으면 했으나, 그것까진 무리였다.

마침내.

복잡하게 들러붙는 사람들을 쳐내고, 샌슨은 헨리와 단 둘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헨리 카밀턴."

"예."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짐작하고 있을 테지? 너라면 분명... 아니,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겠지. 너와 같은 상황이라면."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악감정은?"

"제가 피해를 본 것이 없습니다. 당연히 악감정을 품을 이유도 없겠죠."

"말에 날이 서 있군."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샌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안타까울 뿐이지. 너와 같은 인재와 벌써부터 척을 질 뻔했다는 사실이. 하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는 듯 보이는군."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때 헨리가 치고 들어왔다.

이 상황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명백한 상황.

헨리는 샌슨이 이끄는 대로만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얼마든지."

"저는 티모시 후작가로 갈 수 없습니다."

"가문 때문이겠지?"

"...예."

이건 좀 의외였다.

아무래도 베인이 순순히 다 불어 버린 모양이었다.

"카밀턴 자작께 여쭙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네게 먼저 묻도록 하마. 티모시 후작께선 가신 가문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시다."

이건 더더욱 의외였다.

가신 가문이란 게 어떤 의미던가.

어차피 입지 확실한 후작가와 몰락한 자작가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카밀턴 자작으로선 티모시 후작의 얼굴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이 현실.

하지만 가신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카밀턴 자작가 전체는 티모시 후작이 '돌봐야만 하는' 곳이 된다는 의미였다.

'파격적인데.'

이건 정말 파격적이었다.

일개 기사가 결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아마 지금쯤 티모시 후작에게 전갈을 보내 뒀겠지.'

하지만 헨리가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싸가지 너무 터졌는디???]

[집안을 통째로 부하 삼겠다는 뜻이죠? 갑질 너무한거 아님?]

<'웁웁!'님이 10,000원 후원!>

<"미션에서 티모시는 빼드릴테니까 걍 꺼지라고 하면 안됨?">

시청자들은 이 발언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네게는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하지."

"수련생 신분으로 불러 주시는 겁니까?"

"기사로서의 자격이다. 즉각 서임식을 진행하되, 실전에 나서는 것만 조금 늦춰질 뿐이야."

"말씀하신 지원에 아까처럼 저를 지도해 주시는 것도 포함된 것이겠지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샌슨이 확 밝아진 얼굴로 긍정했다.

헨리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헨리는 지금부터 앞서 받았던 웁웁의 미션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한 번 더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 말이냐?"

갸웃하는 샌슨에게, 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후작가에서 얻을 보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BJ소드마스터

28화. 밀려드는 관심(1)

샌슨은 헨리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샌슨의 제안을 받아들이되, 그 전에 조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뜻을 정중히 내비쳤으므로.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헨리는 그때가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대답만 돌려주었다.

'상황이 어이가 없군.'

C반 수련생이 영입 제안을 두고 뜸을 들이다니.

보편적인 경우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런 제안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경우였고.

하지만 압도적인 재능과, 설령 몰락했을지언정 돌아갈 가문이 있다는 특수성이 이런 상황을 빚어 낸 것이었다.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샌슨은 슬슬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타 가문의 기사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어진다면 예의가 아닐 터.

'짧은 시간에 확신을 심어 주려면... 어중간하게 해선 안 되겠어.'

대충 받아 줬다간 헨리가 부족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검을 들어라."

샌슨은 참관자의 직권으로 진검을 선택했다.

헨리도, 샌슨 자신도.

"바로 시작할 테냐?"

"예."

"무엇이건 좋으니 들어오도록. 티모시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만끽하도록 해 주마."

두 사람이 검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지금 수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구경꾼 하나 없는, 단 둘 만의 훈련.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샌슨의 입장에서였다.

[이번에도 피하면 10만원 줍니가??]

[웁웁좌 침묵ㅋㅋㅋㅋㅋㅋ]

[와 이걸 안맞네ㅋㅋ 피지컬 미쳤다ㅋㅋㅋ]

헨리는 자그마치 백오십 명의 구경꾼을 데리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샌슨을 앞에 둔 채로 헨리는 방송을 진행하기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저는 시간을 끌 겁니다. 웁웁 마법사님께서 주신 미션은 아카데미를 방문한 기사들 중 2/3 이상이 제게 포섭 제안을 건네는 것이었죠."

"기합이 좋군!"

"...아무래도 지금 말하는 내용이 기합으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기다리다 지친 기사들이 이곳으로 찾아올 겁니다. 제가 대체 무엇이기에 샌슨 경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건지 궁금할 테니까요."

"훌륭하구나!"

[졸지에 백치미 풍기네ㅋㅋㅋㅋ]

[샌슨 너무 커엽고ㅋㅋㅋ]

[기사들이 안오면 어떡해요? 확실한거임?]

"확실합니다. 지난 3년간 제가 할 수 있었던 건 성장과 관련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아카데미가 돌아가는 구조는 수련생 중에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참관에 참여한 기사들은 함께 입장하고, 함께 퇴장한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었다.

"그리고 일단 기사들이 오면 사용하려고 준비해 둔 게 있습니다."

아까 샌슨은 말했다.

대련 도중, 헨리가 성장했다고.

그건 분명 검술 숙련도가 한 단계 상승한 덕분일 터.

[2레벨 재능의 구슬(변형)]

그래서 헨리가 준비한 게 바로 이것이었다.

웁웁이 퍼준 후원금을 바탕으로 구매한 구슬.

'묶음으로 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쉬운 건 사실이다.

그런 만큼 효과도 확실할 터.

남은 건, 이 샌슨의 조바심을 억누른 채 기사들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뿐이었다.

***

발라란 왕국엔 수많은 귀족들이 있지만, 개중에서도 강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은 대충 10개 정도로 분류됐다.

공작가 두 곳.

후작가 세 곳.

백작가 다섯 곳.

그들이야말로 실질적으로 왕실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이었고, 그 영향력의 근간엔 훌륭하게 키워 낸 가문 내 기사단이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압도적인 건, 당연하게도 퓨렛과 로드릭으로 대표되는 두 곳의 공작가였다.

단순히 작위 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퓨렛 공작과 로드릭 공작.

두 사람이 거느린 기사단이 왕실기사단에 준하는 수준인 덕분.

기사의 나라에서 거느린 기사의 수준은 곧 주인의 입지와 직결되었다.

그렇기에.

"샌슨 경이 생각보다 늦어지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로드릭 공작가의 기사 루덴.

퓨렛 공작가의 기사 테일러.

두 사람은 이번 발라란 왕립아카데미의 참관인들 중 가장 강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이 샌슨을 얌전히 기다렸던 것도 그 두 사람이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기껏 시간을 내어줬더니....'

'사람을 너무 오래 잡아 두는군. 서둘러 돌아가야 할 텐데 말이야.'

이제 그 둘의 인내력은 슬슬 바닥나는 참이었다.

단지 조금 미안한 마음에 신경 써 줬을 뿐이다.

공작가라는 배경은 이곳에서 가장 많은 수련생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까.

그나마 경쟁자에 속하던 티모시 후작가에서 초행이 온 덕에 더욱 많이 건질 수 있었고.

하지만 이건 선을 넘은 수준이었다.

"한번 가 볼까요?"

"그럽시다.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가 도와야겠지요. 시간이 꽤나 늦었으니...."

제5수련장.

샌슨 홀로 방문했던 장소로 기사들이 우르르 이동했다.

수련생들의 시선이 몰렸다.

이런 동경의 시선은 그들에게 익숙했다.

그리고 수련장에 도착했을 때.

"대련... 중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상대는 누굽니까?"

"수련생 같습니다. 저희가 보지 못한 아이이니 C반에 속했겠군요. 하지만 저 마나 운용... 흠, 깔끔합니다."

루덴의 감탄에 테일러가 슬쩍 안을 쳐다보았다.

다른 기사들도 뒤따랐다.

샌슨과 검을 겨누는 수련생에 대한 평가가 이어졌고, 그건 루덴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과연 훌륭합니다. 기초가 탄탄히 닦여 있어요."

"하지만 기사로선... 글쎄요. 샌슨 경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검술도 비교적 훌륭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헛."

테일러가 멈칫했다.

먼저 말을 꺼냈던 루덴도,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켜보던 사이, 헨리의 수준이 분명 한 단계 나아간 탓이었다.

"...제가 본 게 맞습니까?"

"놀랍군요."

"깨달음을 얻은 모양입니다. 축하할 일이에요."

[변형]. 마나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기술이 훨씬 정교해졌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직 남았었군요. 또 성장했습니다."

"과연... 샌슨 경의 마음을 끌었던 것도 이해는 됩니다."

또 한 번, 수련생의 실력이 성장했다.

이번엔 [집중].

필요한 곳에 마나를 집중시키는 기술이 더욱 깔끔해진 게 보였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몇 번인가 검을 주고받는 사이, 저 수련생은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 것이었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기사들은 입을 닫고 헨리 카밀턴의 훈련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방금 본 장면이 우연인지, 우연이 아닌지를 가늠하며.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백작가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시종일관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입장.

하지만 공작가의 기사들이 지금 저 수련생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그는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했다.

"제가 들었던 소문이 있습니다. 아까 키아나 교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걸 보면 꽤나 믿을 만한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흥미로운 시선들을 받으며 기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수련생의 이름은 헨리 카밀턴이고, 지난 3년간 마나를 느낀 적조차 없는 입장이었다고.

짧은 방학이 흘러가는 사이 급격한 성장을 겪었고, 그에 미루어볼 때 저 성장은 우연히 아닐지도 모른다고.

"...티모시 후작가의 공자께서 아카데미의 학생이었지요?"

"저 헨리 카밀턴과 같은 C반이었습니다."

그제야, 기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샌슨은 멍청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었다.

뒤늦게 개화한, 압도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합당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일 뿐.

'어쩌면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던 것도 의도된 것일지 모르겠군.'

다른 수련생을 모두 포기하고, 저 헨리 카밀턴 한 명만 데려가려는 생각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마음의 빚을 지우고, 지금과 같이 단 둘만 있을 시간을 확보하려는 거였다면.

'완전히 잘못 판단했군.'

'보석을 놓치고 있었어. 어쩐지. 단순히 티모시 후작께서 내린 명령을 수행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더니.'

사실 그랬다.

베인 티모시가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그런 만큼 자식에게 힘을 좀 실어주려는 후작의 뜻으로만 이해했었으니까.

"큼큼."

기사 루덴이 콧소리를 내며 수련장으로 들어섰다. 눈치만 보던 기사들도 함께였다.

"아, 루덴."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와봤습니다. 흥미로운 대련이었어요."

"...지켜보셨군요.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 끝났으니 서둘러 정리하고...."

"아니, 괜찮습니다. 우리도 저 수련생과 대화를 좀 해 봤으면 하는데요."

"...예?"

샌슨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너무 노골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쓸 만한 수련생과 대화하고자 할 땐 방해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과한 것 아닌가.

그리 느끼다가, 샌슨은 다시금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저들은 헨리의 배경을 모른다.'

설령 알아낸다 한들.

카밀턴 자작가라는 짐까지 통째로 짊어질 만한 위인도 많지 않았고.

'괜찮겠지.'

괜찮을 터였고, 그래야만 했다.

또 헨리가 지금껏 보인 반응을 생각한다면 그리 걱정할 일만도 아닐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때 헨리는.

"드디어 기사들이 왔군요. 다행히 버티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게 매력을 느낀 건 분명하지만, 그 정도에서 포기해선 안 되겠죠."

이미 스스로를 상품 삼아 협상할 준비를 마친 지 오래였다.

얻어내려는 건?

당연하게도 웁웁의 미션을 수행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겸사겸사 시골에서 고생하고 있을 카밀턴 자작을 돕는 것까지.

까다로운 목표였으나, 헨리는 자신이 있었다.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려 줘야겠군요."

***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헨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결론을 냈다.

'샌슨에게 말했던 문제들부터 밝히는 게 순서야. 그와 별개로, 대화는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나눠야겠지.'

이미 능력은 보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헨리 카밀턴이 어떤 인간인지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을 터.

먼저 손을 뻗어 준 샌슨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헨리는 스스로의 몸값을 더욱 올려야 했다.

'사실상 경매랑 다를 바가 없지. 헨리 카밀턴이라는 상품을 두고 벌이는 경매. 리스크부터 알리고,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조건으로 내 몸값을 올리는 것까지.'

그 이후 결정될 낙찰가는?

오로지 헨리의 말재간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물론 얼마를 부르건 팔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샌슨 경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시작은 거절이었다.

나는 당신들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태도.

가장 기초적인 흐름이었으나, 지금 헨리에겐 이 정도 배짱을 부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헨리, 능력을 증명한 수련생들은 우리 모두와 대화를 나눌 자격이 있지."

"저를 좋게 봐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제겐 까다로운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엔 리스크를 설명했다.

자신에겐 물려받아야만 하는 가문이 있고, 정확히 어떠한 상태이며, 결코 그 상황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지만 샌슨은 그런 자신의 처지를 감안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조치를 해 주었다는 것까지.

기사들의 입장에선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고, 당연히 헨리의 어필도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게 이런 상황은 생소합니다. 고작 2주 전만 하더라도 저는 마나 한 줌조차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단기간에 급격히 성장하긴 했지만, 이게 정말 제 실력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겸손으로 포장한 채, 스스로의 가치를 확실히 주지시켰다.

'헨리 카밀턴은 2주 만에 이 단계에 이르렀다.

너희도 방금 봤겠지만, 그 헨리는 잠깐의 대련 사이에도 성장을 이뤄냈다.

이건 확실히 헨리 카밀턴의 실력이며, 요행이 아닌 만큼 이후로도 이런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이미 기사들은 직접 두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한 상태.

당연하게도.

[눈 돌아갔네ㅋㅋㅋㅋ]

[지금 최소한 세명은 ㄹㅇ눈돌아갔음ㅋㅋㅋㅋ]

[샌슨 나라잃은표정ㅋㅋㅋㅋㅋ 배신감으로 꽉찼는데ㅋㅋㅋㅋㅋ]

기사들의 호응은 정확히 헨리가 기대한 대로였다.

BJ소드마스터

29화. 밀려드는 관심(2)

발라란 왕립 아카데미 제5수련장.

헨리 카밀턴을 둘러싼 상황은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기사들은 번갈아가며 확인을 위한 대련을 요청했고, 검증을 마친 이들은 황급히 자신이 소속된 가문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바빴다.

'이 인재는 놓쳐선 안 되고, 그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물론 가장 먼저 침을 발랐던 샌슨은 이제 속이 거의 타들어가다시피 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또 성장했군!"

"믿을 수 없는 속도요. 이런 압도적인 재능이라니!"

추가로 구매한 구슬을 통해, 헨리는 그들 앞에서 또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그걸 지켜본 기사들로선 과장 없이 눈이 돌아 버리기 직전인 상황.

그렇다고 모든 가문이 쟁탈전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영향력이 비교적 낮은 백작가 두 곳은 알아서 발을 뺐고, 또 다른 한 곳은 가주가 허락하지 않아 포기했다.

참여한 가문은 총 일곱 곳.

공작이 둘이고, 후작이 셋, 나머지 둘은 또 백작이었다.

고작 C반 수련생을 둘러싸고 벌이는 각축전이라기엔 과한 느낌을 풀풀 풍길 정도였다.

[근데 이러면 무조건 이중 한곳 가야하는거 아님? 안간다고하면 날뛰어도 합법이겠는데ㅋㅋ]

[ㄹㅇ이렇게까지 찔러놓고 안간다?? 바로 엎어도 인정이지 암ㅋㅋㅋ]

[수습 가능해요 이거??]

과열된 분위기는 시청자들 역시 걱정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잘못 본 것도 아닌 게, 상황이 이 정도까지 치달았을 땐 그 누구라도 발을 뺄 수 없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청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헨리 카밀턴에겐 아직 사용하지 않은 '치트키'가 남아 있었다.

"공작께서 흔쾌히 허락하셨다. 헨리 너만 괜찮다면 언제든 이곳으로... 특히 지도는 내가 전담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마. 나의 명예를 걸고!"

"이쪽도 마찬가지야, 헨리. 후작님께서...."

"헨리! 방금 답신이 도착했고...."

이제 뿌려 둔 씨앗이 순차적으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각 귀족가는 흔쾌히 헨리 카밀턴을 받아들이고, 카밀턴 자작가라는 짐까지 짊어지기로 결심했다.

이중 어느 곳으로 가더라도 카밀턴 자작가는 단번에 몰락 귀족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던지게 된다.

왕국의 중추까지 닿는 건 무리겠지만, 그런대로 명예로운 귀족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헨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이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뿐이야. 내 다음 대, 또 다음 대까지 생각한다면 언제고 또 이런 상황에 놓일지 모르지.'

이미 뼈저리게 겪었던 일이다.

한 가문이 망하고, 흥하는 건 순간의 일이었으니까.

특히 왕국 전역에 영향을 미칠 만한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헨리, 어디로 갈 거냐? 우리도 이제 가문으로 돌아가야만 해. 서둘러 결정해 다오. 아무도 그 결정에 책을 잡지 않을 것이다."

기사 루덴이 이 자리의 대표격으로 말했다.

물론 샌슨은 몹시 섭섭할 테지만, 그렇다 한들 그 역시 책은 잡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젠 정말 선택만 하면 되는 상황.

헨리는 일부러 고민하는 모습을 비추었다. 감히 선택할 수 없다는 듯, 어딜 가도 과분하다는 그런 분위기로.

조바심에 기사들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를 때가 되어서야.

헨리는 답을 내놓았다.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헨리! 이때까지 우리가...."

"이건 제가 아닌 가주께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입니다. 기사님들께서 제안해 주신 모든 곳이 제겐 과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로 가볍게 선택했다간 제게 써 주신 마음을 욕보이는 것일 테고요."

'아니다! 전혀 아니니까 고르기만 해 다오!'

기사들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드러났으나, 자고로 기사들의 가장 큰 약점은 '명분'이었다.

"카밀턴 자작님께선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됐고, 그쪽에 연락하라는 결론.

기사들은 애써 허탈한 표정을 감추었다.

여기서 포기하기엔 헨리 카밀턴이라는 인재가 너무나도 탐스러웠으니까.

"그러도록... 하마. 여기서 약속하지. 내가 직접 찾아뵐 테니, 당분간 아카데미에서 기다리도록."

"티모시 후작가 역시 같은 마음이다. 카밀턴 자작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겠군. 훌륭한 아들을 두셨구나."

기사들이 연달아 약속을 내뱉었다.

자신들의 주인이 직접 갈 수는 없으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로 자신들이 직접 방문하겠다고.

아마 카밀턴 자작은 조만간 귀한 손님을 상당수 맞이할 게 분명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꼭 다시 뵐 수 있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나 역시!"

"반드시 그럴 거다! 이만 돌아가야겠군. 다들 가십시다."

"예,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 조만간 다시 뵙게 될 것 같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기사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발을 뺀 셋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꽤나 다급한 기색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헨리에게 눈인사는 잊지 않았고.

진중하게, 헨리는 그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기사들이 잡담하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헨리도 긴장을 풀었다.

아무리 계획을 그려 놨다곤 해도 상대가 상대다.

혹시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으나, 다행히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고 끝났다.

[이걸 해내네ㅋㅋㅋ]

[웁웁좌 지금 계심??]

[이거 얼마짜리 미션이었죠?ㅋㅋㅋㅋ]

[성공한거에요? 조건이 뭐였어요?]

[2/3이상 지네 가문으로 오라고 부르는거였음ㅋㅋㅋㅋ]

반응은 당연하게도 몹시 긍정적이었다.

검술도 적당히 펼쳤고, 그럭저럭 쓸 만한 처세술도 보였다.

오로지 헨리와 관련된 사건들에만 흥미를 느끼는 마법사들로선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결과.

또한.

<'웁웁!'님이 1,000,000원 후원!>

<"아ㅋㅋㅋ 이걸 진짜 하네ㅋㅋㅋ">

미션을 걸었던 마법사는, 약속을 지켰다.

<'웁웁!'님이 1,000,000원 후원!>

<"사실 너무 빡센가 싶어서 내용 바꿀랬는데ㅋㅋㅋ 아ㅋㅋㅋㅋ">

그것도 두 배로.

본래 백만 원짜리 미션이었으나, 웁웁은 자그마치 두 번이나 같은 금액을 후원해 버렸다.

"맙소사."

이번 감탄은 진심이었다.

이백만 원.

기존에 모아 뒀던 금액까지 합친다면, 2레벨 구슬 정도는 사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깨달은 게 있지.'

급격한 성장보단 단계적인, 특히 상황에 맞추어 성장하는 편이 방송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데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헨리에게 주어지는 미션은, 일반적으로 그 순간 헨리의 수준에 맞춘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감사합니다. 다행히 주신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님의 관심이 아니었다면 해 낼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해 냈더라도 지금만큼 머리를 쓰진 않았을 테고, 비교적 적은 성과를 거뒀을 터였다.

<'웁웁!'님이 1,000원 후원!>

<"다음 미션 걸어드릴 만한 거 있어요?">

시청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헨리에게 새로운 목표가 주어졌다.

***

'이런 식으로 집에 연락하게 될 줄이야.'

사건이 대충 정리된 후.

헨리는 오늘도 기숙사 대신 루소의 연무장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카밀턴 자작.

헨리의 아버지이자, 몰락한 귀족이자, 헨리가 아는 가장 현명한 남자.

헨리는 아직 그에게 최근 벌어진 일을 전달하지 않았다.

카밀턴 자작은 여전히 헨리가 한 줌의 마나도 없는 생활을 보내리라고 생각할 터.

'그럼에도 내게 부담이 될까 봐 근황조차 묻지 않으시는 분이지.'

헨리의 아버지는 이따금 안부 인사만 전해 오곤 했다.

최근 어떤 농작물을 기르기 시작했고, 기르는 동물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며, 올해는 그럭저럭 수확량이 괜찮았다는 그런 종류의.

그리고 간혹.

이런 생활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내용도 도착하곤 했었다.

그건 아마 헨리를 배려한 이야기였을 터.

기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진심과는 반대로 건네는 빈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부담을 준 것 같다며 괴로워하시던 분이니까.'

헨리는 알고 있었다.

카밀턴 자작이야말로 누구보다 가문의 부흥을 원하는 사람이란 걸.

다만 하나뿐인 아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조만간 연락이 오겠지.'

카밀턴 자작은 그런 사람이었다.

기사들의 앞에선 태연을 가장할 테고, 성급한 대답 대신 충분히 고민해 볼 시간을 얻을 터.

그런 다음엔?

헨리에게 연락한 후, 충분히 의사를 묻고 나서 결정을 내릴 게 분명했다.

'그때까진 기다려야겠어. 흠, 그나저나 오늘 기숙사로 돌아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조금 전.

오스틴이 헨리를 찾아왔었다.

아카데미 전체에 헨리와 관련된 소문이 파다하다고.

그리고 자극적인 소문은 점차 덩치를 불려 가기 마련이었다.

'처음엔 기사가 되길 권했다는, 정상적인 소문이었다고 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할 정도로 커졌고.'

웬 후작이 직접 찾아왔다거나, 심지어는 발라란의 국왕이 직접 찾아와 왕실 기사가 되길 종용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다못해 옆의 국가들조차 사람을 보내 헨리를 보고자 했단 내용까지.

모두 정신이 나간 것들뿐이었고, 그래서 헨리는 일단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자칫 위험한 소문에라도 휘말리면 곤란하니까.'

어설픈 루머 하나하나에 반응할 만큼 왕실이 어수룩하진 않다.

하지만 당사자가 무언가 실수라도 저지르고, 그래서 거의 사실인 것처럼 퍼지기 시작한다면?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헨리는 다시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늦은 밤.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질 때까진.

그때였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날카로운 소리에 헨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문자였다.

오스틴, 혹은 루소. 어쩌면 오늘 사건으로 인해 찾아온 제삼자일지도 모르는 일.

그 상대는.

"교관님."

초췌한 안색의 수석 교관, 루소였다.

***

수석 교관 루소.

그는 지금 최근 몇 년 들어 가장 불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교관 키아나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직후였다.

티모시 후작가의 샌슨이 헨리와의 대화를 원했다는 내용.

물론 그걸 듣자마자 흔들린 건 아니었다.

다만 얼마 후, 나머지 기사들까지 모두 몰려갔단 내용을 들었을 때부터 거의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내 욕심이었나? 감히 나 따위가 그런 재능을 품을 생각을 했던 것부터?'

낙오한 기사.

교관 나부랭이가 품기에 헨리의 재능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가르치고 싶었다.

교육자로서 가슴에 품었던 불꽃이 어느 순간 누구도 꺼뜨릴 수 없을 정도로 타올랐을 정도로.

'...피할 수 없는 흐름이겠지.'

루소가 그렇게 체념한 순간.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헨리가 떠나지 않았다고?"

헨리 카밀턴.

희대의 재능을 지닌 천재가 그 어떤 가문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인 카밀턴 자작에게 선택권을 넘겼다는 내용으로 끝났으나, 루소는 그걸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지금.

헨리가 훈련 중인 연무장까지 헐레벌떡 찾아온 것이고.

"갈 생각이 없는 거겠지, 헨리. 내가 아는 너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괜찮은 겁니까?"

"그래 준다면 고맙겠지."

"갈 생각 없었습니다. 저는 아직 아카데미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역시!"

탄성처럼 내뱉고, 루소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극명히 안도하는 반응이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루소는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고 헨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헨리."

"예."

"네가 내 가르침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내가 너를 가르치고 싶어 한다는 사실도 너는 알고 있었을 테지."

"...예."

"하지만 참겠다. 이유도 묻지 않으마. 다만 나 역시 솔직해지기로 했다. 나 역시 이전의 네겐 손을 건네지 않았고, 이제 와서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닙니다. 교관님께선...."

"되었다, 헨리. 되었으니 더 말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이 순간부로 욕심을 버리고, 자존심도 버리도록 하마. 다만 네게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줄 수 있도록 해 다오."

루소의 감정은 격했고, 헨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애초에 가르침이란 건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만큼 방송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테고.

그러나.

루소가 제시한 건, 조금 '다른' 도움이었다.

"네게도 이제 자신만의 검이 필요한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내겐 수석 교관이란 지위를 이용해 만들어 둔 인맥이 있지. 내가 괜찮은 대장간을 소개해 주마."

"...아."

그런 거였다니.

헨리는 예상 밖 내용에 멈칫했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도움이라면 마침 헨리도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BJ소드마스터

30화. 오슬란드산 순강(1)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무기'를 지닌다는 건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검에 투자할 만큼 금전적 여유가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최소 B반 이상에 속한 수련생이라 개인 무기 소지를 허가받았다는 것.

또 세 번째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의미가 있는 무기일 경우라는 것.

가령 세 번째라면?

가문 대대로 전해져 오는 보검이라거나, 왕국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검이라거나 하는 경우였다.

그 와중에도 검을 대신 맡아 줄 만한 사람이 없어야만 했고.

하지만 반드시 그 경우에 들어야만 개인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도검류에 한정했을 때, 특정 교관의 허가가 있다면 그 아래의 수련생도 얼마든지 무기를 소지할 수 있었으니까.

헨리가 속한 게 바로 이 경우였다.

'마침 잘됐어. 슬슬 구하러 나가려던 참이니까.'

루소의 제안은 정말 시기적절했다.

어디서 혼잣말이라도 들은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헨리가 그간 수련하며 느낀 것 중 하나가 바로 '검술 숙련도'의 중요성이었다.

특히 어제 일로 더더욱 확실하게 느꼈고.

'마나 문제가 아니었어. 검술 문제지.'

아니, 사실 마나 문제가 맞긴 했다.

그러나 헨리는 후원 상점을 통해 기술을 익혔고, 어차피 숙련도는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거기서 변수를 가져올 수 있는 요소가 바로 검술 숙련도였다.

그리고 숙련도의 상승폭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가 무기의 질이었다.

'사실 무기의 품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지. 환경 같은 것보다도 말이야.'

물론 최선의 경우는 뛰어난 상대와의 대련일 테지만, 어쨌든 대련을 할 때조차 뛰어난 무기를 쓴다면 상승폭이 더더욱 올라가는 셈.

루소의 의도는 단순히 축하의 의미였으나, 헨리에겐 그보다 훨씬 큰 기회였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검을 한 자루 만들 생각이고, 현재 가능한 가장 뛰어난 품질로 의뢰를 맡길 생각입니다."

당연히 헨리는 그 사실을 방송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이것도 컨텐츠의 하나였으니까.

[루소가 소개시켜주기로 한거에요?]

[근데 뛰어나봤자 별로인거 아님? 무슨 전설의 대장장이나 그런것도 아니고. 나중에 바꿀 순 있는 거죠?]

[평생 간다 이런거 아님?ㅋㅋㅋ 검은 목숨이고 어쩌고 하면서ㅋㅋ]

"아닙니다. 검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품질이 뛰어나단 이유로 검을 동반자처럼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요?]

"그 검을 쥔 채 겪은 경험들이 쌓이고 나서야 검은 비로소 의미를 얻습니다. 기사들이 애병이라 일컫는 무구들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기사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온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뛰어난 검은 많다.

하지만 역경을 함께 극복해 온 검은 한 자루뿐.

그때가 되어야 검은 동반자로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었다.

[먼가 있어보이는데ㅋㅋㅋ 결론은 아무때나 바꿀수 있단거죠?]

"그렇습니다. 아마 이번에 구매하는 검은 제게 특별한 도구가 되기 힘들겠죠. 기회가 온다면 교체할 생각입니다."

물론 혹시 모르는 거긴 하다.

동시에 그럴 가능성이 낮기도 하고.

"어쨌건 검을 제작함에 있어 대장장이의 실력만큼이나 재료의 질도 중요합니다. 대장간에서 확보해 둔 물량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뭔 방법이요?]

[또또또 빌드업 들어갔네 ㅋㅋㅋ]

[뻔하잖아요 님들ㅋㅋㅋㅋ]

[다른 방법(후원상점)]

시청자들은 이제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후원 상점 맞습니다. 그곳에서 제게 쓸 만한 재료를 함께 팔더군요. 이게 다 시청자님들 덕분입니다."

헨리는 쿨하게 인정했다.

최근 웁웁의 후원도 받았고, 동영상 수익도 차츰차츰 누적되고 있었다.

여차할 때 재능의 구슬을 살 수 있을 만큼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검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슬슬 시간이 됐으니 교관님께 외출증을 받아 와야겠습니다. 아카데미를 벗어나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요."

적어도 1년은 넘고도 남았다.

이전엔 나갈 이유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묘한 설렘마저 느끼며 루소의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헨리는 늘 그렇듯 자신을 둘러싼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아, 자네가 그 헨리 카밀턴이로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루소 수석 교관께선 안쪽에 계시네."

"감사합니다."

"어머, 헨리!"

"...미네르바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축하해. 진심이란다. 너처럼 열심히 하는 아이에겐 반드시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

"감사합니다."

평소엔 관심조차 없던 이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대귀족들이 헨리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어중간한 교관이나 교수들은 단번에 헨리와의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헨리."

그러나 루소는 한결같았다.

자그마치 수석 교관이다.

설령 기사로서의 실력은 밀릴지언정, 그 명예만큼은 다른 기사들도 존중했다.

다만 차이가 생겼다면, 이제 헨리에게 스스로의 속내를 드러냈다는 것뿐이었다.

"외출증이다."

"감사합... 어, 교관님?"

"왜 그러지?"

"날짜가 비어 있습니다."

루소가 건넨 외출증.

출발 일자는 오늘로 적혀 있었지만, 복귀 일자를 적는 칸은 텅 비어 있었다.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야. 적당히 돌아오는 날에 맞춰 빈칸을 채우도록."

"그럼 교관님께선...."

"수석 교관이란 위치는 이곳에서 꽤 많은 권한을 누릴 수 있어. 그리고 헨리 네가 외출하는 게 2년 만의 일이더군. 기록을 살펴보니까 말이야."

"아...."

"조금 여유롭게 다녀와도 괜찮겠지. 네가 거둔 성과는 적지 않아, 헨리. 이제 올해는 네게 마지막이 아닐 거다."

적당히 놀다 오란 뜻이었다.

먹을 것도 좀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도 좀 하고.

"감사합니다."

"거절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이건 지도와 소개서다. 찾아가서 보여 주면 잘 챙겨 줄 거야. 마음 같아선 같이 가고 싶지만, 일정이 그리 여유롭진 못하군."

"감사합니다."

"그만 감사하도록. 또 나가는 길에 출입 관리인에게 맡겨 둔 물건이 있으니 꼭 챙겨 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와라, 헨리. 돌아오면 보고하고."

***

왕국 기사의 요람.

발라란 왕립 기사 아카데미는 왕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왕궁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

사실상 외곽에 가까웠으나, 왕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예비 '왕의 기사'라는 느낌을 주기엔 충분했다.

또한 거리상 외곽이라고 표현한 것 일뿐, 아카데미 주위론 이미 거대한 상권이 형성된 상태였다.

아카데미에 포진한 교수, 교관들.

매 외출 때마다 나와 이런저런 것들을 소비하는 수련생과, 그런 수련생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가족 및 지인들까지.

그들만으로도 근처 주민들이 먹고 살기엔 충분한 소비가 발생되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활기가 넘치는군요. 지금은 아카데미 수련생들이 나올 수 없는 시간인데도... 아예 아카데미 인근이 관광지화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무작정 놀러 오는 관광지가 아니다.

'기사' 아카데미인 만큼 주위 상권은 기사와 관련된 업종들에 특화되어 있었다.

가령 무기나 방어구를 판매한다든가, 정체 모를 검술 교습서 따위를 판매하는 서점이라든가.

당연히 그런 목적을 지닌 여행자라면 한 번쯤은 들리곤 하는 게 이곳이었다.

"당장 수련생 신분이라 하더라도 그때 보인 베인 티모시처럼 귀족가의 자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비하는 금액이 적진 않을 겁니다."

아마 물 쓰듯 주머니를 열어 금화를 뿌려 댈 터.

[관광지면ㅋㅋ 100% 바가지씌우겠는데ㅋㅋ]

[국수 한그릇에 2만원씩할듯ㅋㅋㅋ]

[근데 왕도면 왕궁있는 동네 아니에요? 배짱부리다가 진짜 배 터질것같은데?]

"맞습니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상품의 가격대는 오히려 타 지역보다도 저렴합니다. 자칫 신고라도 들어간다면 해당 상인은 꽤 강한 처벌을 받게 되니까요."

[어떤 처벌인데요?]

[사형이라도 당하는거 아님?]

"아닙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고... 단지 왕도 밖으로 추방됩니다. 모든 재산을 압류당한 채로. 추징 과정엔 왕실 마법사께서 나서주시기에 빼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새로 시작할 기회는 주되, 그간 부정하게 쌓아 온 밑천은 모두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다시 왕도로 들어오고 싶다면?

압류 당했던 금액을 다시 지불함으로써 입장 권한을 얻을 수 있는 거였다.

"그나저나... 아, 저기 있군요. 루소 교관님이 알려 주신 대장간입니다."

딱 봐도 손님이 가장 많다.

근처의 다른 대장간과 비교했을 땐 최소 세 배 이상 북적거리는 인파.

아마 저런 인기라면 분명 예약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테고, 제작품을 받기까진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 같았다.

순간 다른 곳으로 갈까도 싶었으나, 헨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기다림 끝에 정말 뛰어난 검을 얻을 수 있다면?

그편이 무조건 이득이었으니까.

"이걸 좀 사겠소! 이...."

"좀 기다려요! 바빠 죽겠는데. 지금 다른 주문 받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이토록 무례할 수가!"

"무례하면 다른 가게 가시든가! 아니, 가! 당신한텐 안 팔아!"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귀를 팍팍 찔렀다.

헨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손님이 억지를 부리나 봅니다.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루소 교관님께서 제대로 된 곳을 추천해주신 것 같습니다."

아직 나이가 젊은 것으로 보아, 대장장이의 아들이거나 종업원 같았다.

헨리는 차분하게 순서를 기다려 방금 소리치던 청년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왕도에서 가장 뛰어난 물품을 제작, 판매하는 검은 손입니다. 뭘 하러 오셨죠?"

청년은 생각보다 밝은 인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화를 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

"제작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제작 의뢰! 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희 매장의 품질이 원체 뛰어난 탓에 예약이 엄청나게 밀려 있거든요. 한 달은 넉넉히 잡아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예외의 경우가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질문.

청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손님은 경우가 있는 분이시군요! 다른 분들은 다짜고짜 내가 누구고, 누구 소개를 받았고, 어쩌고저쩌고 먼저 내놓으란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말이에요."

"...."

"예외 있습니다. 손님은 누구시고, 소개를 받았다면 누구의 소개를 받으셨죠? 그 외의 조건이 또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저는 왕립 아카데미의 수련생 헨리 카밀턴입니다."

"아카데미! 좋군요."

"소개해 주신 분은 루소 수석 교관님이십니다."

"...어?"

청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소 삼촌이 소개하셨단 거죠? 그러니까 아카데미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시는... 이야, 축하드립니다! 예외 경우에 포함되셨어요. 아, 소개서는요?"

"여기 있습니다."

"루소 삼촌 도장 확실하고. 잠시만 기다리실래요? 진짜 대단하신 분인가 보네. 이 삼촌이 추천을 다 하고. 아무튼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아, 하나 더 있습니다."

달려가려던 청년을 헨리가 멈춰 세웠다.

헨리가 알기로, 이곳의 모든 대장간이 원하는 중요한 조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재료를 직접 구해 왔습니다."

"재료, 아!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신 분이시네요. 어떤 재료죠?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그 역시 어느 정도 예외 범위에 포함되고... 이야."

헨리가 꺼내 든 물건에 청년은 입을 쩍 벌렸다.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눈빛이었다.

동시에 대장장이로서의 작업 욕구를 자극받았다는 표정으로, 그가 헨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슬란드산 순강(純鋼)이네요. 맞죠? 딱 검 하나 넉넉히 제련할 수 있을 만큼의 양... 좋습니다. 정말 잠시만 기다려요. 아마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그제야 헨리는 한 발 물러났다.

재차 손님들과 투덕거리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고, 곧 청년이 다시 헨리 쪽으로 달려왔다.

"들어오세요. 손님은 대기하실 필요 없습니다! 최우선 순위로 제작을 도와드리죠!"

BJ소드마스터

31화. 오슬란드산 순강(2)

오슬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 기술을 보유한 국가였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혹자는 오슬란드 왕실의 일원이 드워프와 연이 닿았을 거라 짐작했으나, 사실로 확인되진 않았다.

어쨌든 오슬란스산 강철로 제조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자체로 인정받았고, 특히 발라란 왕국은 그 정도가 심한 편이었다.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오슬란드는 발라란 왕국에 광물의 수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소량의 제련된 광물만이 매년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비정기적인 시기에 공급되곤 하는 게 전부였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으로.

혹자는 오슬란드의 주인이 다 알면서 묵인하는 거라 주장했으나, 그게 진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오슬란드산 철광석이 귀하디귀하단 것만 알면 되는 거니까요. 발라란의 고위 귀족도 넉넉히는 구할 수 없을 만큼."

대장간에서 헨리를 맞이했던 청년, 펄은 호의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곳을 운영하는 대장장이는 그의 아버지였다.

지금 펄의 아버지는 헨리가 가져온 선물에 정말 신난 채로 작업을 시작한 상태였다.

귀한 재료로 작업할 수 있는 상황에 감사하며.

"그래서, 어떻게 구했어요? 쉽진 않았을 텐데. 역시 암시장이겠죠?"

"사정이 있어서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그렇죠, 그럴 거예요. 물론 지금 말씀해 주신 것만 해도 충분한 대답이 됐을 거예요. 평범한 강철이었다면. 하지만 순강이라!"

순강이 무엇이던가.

오슬란드산 강철 중에서도 가장,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물건들만이 그렇게 불렸다.

제련된 순강 주괴엔 오슬란드 왕가의 직인이 찍혀 있었으며, 이제 그쯤 되면 발라란 왕실에서도 쉽사리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암시장이라도 순강은... 사실 저희도 그쪽은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매물이 나왔다는 소식도 못 들었거든요."

"말씀드렸지만...."

"사정이 있으시겠죠. 대충 알 것 같긴 해요. 고객님이 구하신 건 아닐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삼촌을 자극해 보든가 해야겠죠?"

슬쩍 찔러 보는 질문.

헨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소가 순강을 구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수석 교관이라면 일반인들과 다른 공급 수단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작업은 오늘 중으로 끝날 거예요. 순강만 아니었다면 아무리 삼촌 소개라도 일주일은 미뤘겠지만요. 이제 나가서 식사라도 하고 오시는 게 어때요?"

"여기서 기다려도...."

"오늘 가게 문 닫을 거예요. 저도 곁에서 아버지 작업하시는 모습 구경할 거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녁에 돌아오면 될까요?"

"음, 아마 그쯤요. 이따 뵙죠!"

펄은 미련 없이 떠났다.

다시 입구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철컹! 단단한 철문을 내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헨리는 대기실에 따로 마련된 뒷문으로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순강은 쓰지 말걸 그랬나.'

새삼 걱정이 들었다.

적당히 오슬란드산 강철만 사용했어도 검의 품질은 그럭저럭 괜찮았을 것이다.

왕실도 쉽사리 구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든 검을 떡하니 들고 돌아온다면 시선이 너무 몰리지 않겠는가.

'실력으로 끄는 시선은 상관없지만, 아무래도 이건....'

절레절레.

헨리는 고민을 접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또한 이번 기회가 아니었다면 순강이 그렇게까지 귀한 물건인 줄도 모르고 있었을 터.

[오슬란드산 순강(1kg) : 188,000원]

'여기선 이렇게 저렴한데 말이야.'

물론 18만 8천 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다.

다만 동급의 다른 상품에 비해 과하게 저렴하단 의미였다.

대표적으로 발라란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오슬란드산 순강과 비슷한 급으로 취급되는 '첫 번째 가지의 이슬' 같은 경우엔 자그마치 270만 원이었으니까.

다른 물건들도 비슷했으나, 유독 이 순강만 저렴하게 등록되어 있었다.

'사실 그래서 선택한 거였지.'

저렴하기도 하고, 지금 헨리가 구매할 수 있는 재료 중 가장 뛰어난 품목.

헨리는 나름대로 순강의 값이 저렴한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오슬란드에서의 가치를 기준으로 값을 책정한 거겠지. 발라란에서만큼 귀하진 않으니까.'

사실 진짜 수확은 이 사실을 알아 낸 데 있었다.

후원 상점의 값은 발라란을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는 것.

그 의미는?

유독 발라란에서만 귀한 물건들을, 헨리는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단 뜻이었다.

그건 곧 저렴한 물건을 되팔아서, 비싼 것들을 구매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가능해. 충분히 가능해. 후원 상점에서도 모든 물건이 저렴한 건 아니니까. 일부 상품만 그런 식의 구조를 갖고 있을 뿐이야.'

지금 당장 순강 같은 물건을 찾아 되파는 식의 작업을 하긴 힘들다.

시세를 파악하려면 기본적인 지식은 머릿속에 있어야 할 테니까.

들뜬 기분을 진정시키고, 헨리는 다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왔다.

[검술]

* 숙련도 : 9레벨, 55%

* 숙련도 100% 달성 시 10레벨로 성장합니다.

* 10레벨 달성 시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추가 보너스. 또 뭔가 주시겠다는 의미야.'

최근 헨리의 검술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비록 진심은 아니었다고 하나, 정식 기사의 검마저 견뎌 냈을 만큼.

마나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이 검술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어떤 조건에서 얼마나 성장하는 건지. 또 특별한 조건이 있는지. 그리고... 후원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품들도.'

그간 방송에 집중한 탓에 신경을 못 썼던 부분이었다.

웁웁이라는 마법사의 등장으로 인해 거의 온종일 실시간 방송을 켜 두기도 했었고.

'확인해 봐야지. 내가 뭘 놓치고 있었는지.'

***

아침 일찍 아카데미에서 나온 덕분에, 검이 완성되기까진 꽤나 넉넉한 시간이 있었다.

그사이 헨리는 필요한 정보를 빠짐없이 체크했다.

우선은 무기술 숙련도.

아쉽게도 기존과 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헨리의 정보란 대마법사가 허락한 범위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검술 숙련도는 10레벨을 달성하는 게 우선이겠어.'

하지만 후원 상점에선 아니었다.

이번에 구매했던 '방송용 장비'에서 느꼈듯, 이곳엔 헨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다양한 물건들이 포진되어 있었으니까.

'이런 걸 놓치고 있었다니.'

물품이 추가되기도 했고, 이전까진 '카테고리' 분류가 없기도 했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이제라도 찾은 게 어딘지.'

머리를 식힐 여유를 선물해 준 루소에게 감사를 느끼며, 헨리는 정리해 둔 목록을 재차 확인했다.

장비, 영약, 현금화가 가능한 귀중품부터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보물들까지.

물론 그 값은 어마어마했지만, 애초에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없는 물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살 수만 있다면?

성을 팔아서라도 달려들 귀족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특히 마법사들이나... 흠, 시청자들 앞에선 꺼내지 않는 게 낫겠어. 이런 아티팩트를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지.'

대장간에서도 느끼지 않았던가.

지금 헨리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곤란한 상황에 놓일 수 있었다.

'언젠간 구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이것들이라면 말이 다르지.'

헨리가 관심을 보이는 건 조금 다른 물건들이었다.

그러니까, 후원 상점 외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들.

가령 이번에 써먹었던 [방송용 마이크]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카테고리 : 방송용 장비]

방송용 장비 카테고리엔 오로지 방송을 위한 물건들이 있었다.

언젠간 마련해야 하고, 값도 만만치 않으며, 굳이 지금 당장 써야 할 것들은 없는.

일단 여기선 '알아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진짜는 바로 다음.

[카테고리 : 정보]

이 '정보' 카테고리였다.

[세부 카테고리가 분류됩니다!]

[정보 : 헨리 카밀턴(개인)]

[정보 : 외부(개인)]

[정보 : 외부(사물)]

[정보 : 일반]

정보의 중요성은 헨리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후원 상점에서 방송용 장비를 판매한다는 사실조차 정보의 일종이었으니까.

'이번 순강 일도 그렇고. 모르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지. 그게 내 수준을 벗어난 일이라면 말이야.'

하지만 헨리 카밀턴의 현실은 좁았다.

발라란 왕립 아카데미라는 좁은 배경.

그나마도 기숙사와 몇몇 수련장, 루소의 연무장 정도가 헨리의 활동 범위였으니까.

그런 헨리를 위해, 대마법사는 이런 장치를 안배해 둔 것이었다.

[정보 : 헨리 카밀턴(개인) : 88,000원]

* 헨리 카밀턴의 정보를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단계에선 일부 정보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추가 정보를 해금하려면 상품을 구매해야 합니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

고작 8만8천 원이면 헨리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아래의 상품도 마찬가지였다.

[정보 : 외부(개인) : 2,283,000원]

* 타인의 정보를 구체적인 수치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보 : 외부(사물) : 887,000원]

* 특정 사물의 정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설명에, 같은 조건.

헨리 자신의 정보에 비해 압도적으로 비싼 값이었으나, 여기 적힌 설명대로라면 최우선 순위로 구매해야 하는 물품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 가령 베인 티모시의 정보도 내가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니까.'

또한.

[정보 : 일반]

이 상품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앞의 상품들이 특정 인물, 혹은 물건의 정보를 알려 주는 거였다면, 이건 진짜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보'라는 의미였으니까.

[정보 : 일반]

* 상품의 가치에 따라 값이 변동됩니다.

* 매일 세 개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으며, 내용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 상품의 내용은 '헨리 카밀턴'과 가깝거나, 관련이 있거나, 활용할 수 있는 종류로 제공됩니다.

* 정보1 : 9,999,000원

* 정보2 : 3,300원

* 정보3 : 475,000원

상품의 가치에 따른 값의 변동.

또한 내용을 미리 알 수 없다는 내용까지.

'게다가 나와 가깝거나... 저 항목은 쓸데없는 정보는 팔지 않겠단 뜻이야. 가령 반대편 대륙의 정보를 구매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이겠지.'

[정보2를 구매했습니다!]

[상품은 매일 자정에 재입고됩니다.]

시험 삼아 가장 저렴한 정보를 구매해 보았다.

그 즉시.

[금일의 저녁 식사 메뉴는 다음과 같습니다. 옥수수 수프와...]

헨리는 3,300원짜리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카데미에서 제공할 저녁 메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으나, 확신을 얻기엔 충분했다.

'훌륭해. 그럼 다음으론.'

8만8천 원.

그리 저렴하다곤 할 수 없는 값의 정보였다.

헨리 카밀턴 자신의 정보를 수치화해 두었다는 내용.

[상품을 구매했습니다.]

[지금부터 '정보 : 헨리 카밀턴(개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건가?'

아직 방송을 켜지 않은 검은 화면.

그 곁에 무언가가 추가됐다.

마치 기사가 갑옷을 입고 서 있는 듯한 그림이었다.

헨리가 손을 뻗어 건드렸고, 녹색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헨리 카밀턴]

[종합 평가]

* 동일 연령, 성별 대비 압도적으로 뛰어난 ** **을 지녔습니다. 또한 **를 다루는 실력도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 소속 집단 대비 뛰어난 ** **을 지녔습니다. 또한 **를 다루는 실력은 중간 정도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

하지만 반쪽짜리다.

이래선 뭘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가려진 글자를 건드려 보았으나, 나타난 내용은 헨리를 섭섭하게 했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10,000원이 소모됩니다.]

"...."

별 수 없다.

헨리는 총 2만 원을 지불했다.

위쪽과 아래쪽의 내용이 겹친다는 이유였다.

* 소속 집단 대비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습니다. 또한 마나를 다루는 실력은 중간 정도입니다.

[공개된 모든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추가 정보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하겠습니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100,000원이 소모됩니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

헨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BJ소드마스터

32화. 오스틴(1)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은 건 근 2년 만이군요."

검은 손 렌드.

왕도에서 손꼽히는 대장장이는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헨리에게 완성품을 건넸다.

은백색 검날이 움직일 때마다 서늘한 빛을 뿌리고, 손잡이엔 고급스러운 사자 무늬가 양각된 모습이 척 봐도 명품의 반열에 들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작업이었소. 하지만 훌륭한 물건을 어울리는 고객께 넘기는 순간만큼 즐겁진 않지. 비용은 1골드만 받겠소."

"...예?"

"아버지, 1골드라뇨?"

동시에 반문이 터졌다.

하나는 헨리의 것이었고, 하나는 렌드의 아들 펄의 목소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저렴했으니까.

왕도 최고의 대장장이라 일컫는 렌드의 작업 비용으로는 터무니없는 값이었다.

"아드님의 반응이 맞습니다. 제게도 적당한 대가를 드릴 만큼의 돈은 있습니다."

"맞아요, 아버지. 그러다가 또 적자만 난다니까요? 저거 순강 녹인다고 들어간 연료에, 다른 직원들 임금에, 손잡이에 조각까지 넣는답시고 쓴 돈이 자그마치...."

"펄. 시끄럽다."

렌드는 아들의 말을 끊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내 뒤를 이으려면 사람을 보는 눈부터 길러야겠다. 우리 대장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유가 뭐지?"

"그야, 당연히 아버지 실력이 뛰어나서...."

"그럼 대장장이로서 실력을 기르는 방법은?"

"많은 작업을 통해...."

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뭔가 느낀 게 있는 모양.

렌드는 굳이 더 말하지 않고 다시 헨리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또 생기면 언제든 찾아오시오. 비용은 가장 저렴하게, 또 신속히 작업해 줄 테니.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소."

"감사합니다. 루소 교관님께도 말씀 전해 드리죠."

"고맙소."

헨리는 렌드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이건 사실 거래를 제안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뛰어난 재료를 다룰 수 있는 기회.

렌드에겐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돈보다 값진 기회였다.

'그나마 검집은 수수해서 다행이네.'

대장간을 빠져나오며 헨리는 새로운 검을 살펴보았다.

일단 보는 순간 누구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보낼 만한 물건이었지만, 헨리의 요청 덕분에 검집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건이었다.

일단 허리에 메고 다니는 것만으론 시선을 끌 일이 없을 터.

또한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이 검은 정말 뛰어난 물건이었다.

[검술]

* 숙련도 : 9레벨, 55%

* 숙련도 100% 달성 시 10레벨로 성장합니다.

* 10레벨 달성 시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착용한 무기의 품질이 몹시 뛰어납니다!]

* 무기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습니다.

* 해당 무기로 훈련 시 무기 숙련도 상승폭이 크게 증가합니다.

* 해당 무기로 훈련 시 매우 낮은 확률로 [깨달음]이 발동합니다. 발동 시 무기 숙련도가 큰 폭으로 성장합니다.

루소의 훈련검에조차 없던 설명이 추가되었다.

그런 만큼 압도적인, 재료가 아깝지 않은 물건이 완성된 증거일 터.

'하지만 이것보다도 뛰어난 게 많아. 재료뿐만 아니라, 완성된 물건들도.'

후원 상점.

그곳엔 수많은 물건들이 팔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마법사의 선물이라 일컬을 만한 물건들.

손에 쥐는 순간 헨리의 삶 자체를 바꿔 놓을 만한 것들도 있었고, 그걸 얻기 위해선?

'조금 쑥스럽지만, 배운 지식은 써먹어야겠지.'

[실시간 스트리밍]

[(신상 무기 언박싱)이게 대체 얼마짜리야?]

이런 컨텐츠 하나하나를 살려서 활용해야만 했다.

***

헨리가 아카데미로 돌아온 건 슬슬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렌드의 작업은 일찍 끝났고, 덕분에 시청자들에게 아카데미 바깥세상을 보여 줄 기회가 있었다.

'은근히 흥미로워하는 눈치였지?'

이번 방송에서도 시청자들은 꽤 관심을 보였다.

아카데미 외부의 광경이 독특하게 느껴졌던 모양.

항상 마탑에 갇혀 있는 그들이기에 당연한 일일 터였다.

'이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일 테고.'

마법사라고 기사의 삶만 원하는 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고, 마나를 쌓고, 누군가와 경쟁하는.

그런 내용도 좋지만, 이따금은 오늘처럼 소소한 무언가를 보여 주어도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헨리가 루소가 머무르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수석 교관의 스케줄은 빡빡했고, 아직 상위 클래스를 위한 야간 수업을 진행 중인 상태.

'일단 돌아가야겠군.'

어차피 루소와는 언제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의 연무장에서 적당히 검을 휘두르다 보면 수업이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올 테니까.

그리고.

오늘 방송을 진행할 때, 헨리는 시청자들로부터 꽤나 흥미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오스틴 걔 분명 뭔가 있을걸요??]

[클리셰잖음 클리셰ㅋㅋ 막상 까보면 배경도 뭐 있고 실력도 엄청 뛰어나고]

[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자기 얘기는 한적이 없긴 했어요. 그니까 자기 외의 얘기. 주변 환경 같은거요.]

[애초에 이 단계에서 만났다는 건 100% 뭔가 있는 캐릭터란 소리죠ㅋㅋ]

그건 분명 마법사들의 통찰력에서 비롯된 결론이었다.

오스틴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아니, 숨긴다기 보단 그것들이 오스틴에게 큰 의미가 없는 거라 보는 편이 맞을 터.

'이유가 뭐든 중요한 건 아니지. 한번 확인은 해 봐야겠어.'

***

오스틴.

헨리의 룸메이트는 하루의 수업을 마치고 외롭게 기숙사에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외출이라니!'

그는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헨리 카밀턴.

정말 오랜만에 친해진 룸메이트가 뜬금없이 외출을 나갔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특별한 행사가 있는 시기도 아니고, 방문자가 왔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당연히 헨리 본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것도 없었고.

사실상 스승이나 마찬가지라던 루소에게 찾아가 보았으나, 돌아온 건 말해 줄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오스틴 역시 헨리의 사정을 대충은 아는 입장.

이렇게까지 갑작스레 자리를 비울 정도라면 분명 가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달칵.

"어? 헨리?"

"왜 놀라?"

"아니, 나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이런. 그런 게 아니었어. 세상에! 네 검이 생겼구나! 봐도 될까?"

누가 허가해 줬냐든가, 어떻게 얻은 거냐든가 하는 질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오스틴은 단지 친구인 헨리라는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조금은 무례한 요청을 할 수도 있는 거였고.

'나쁜 녀석은 아니야.'

헨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오스틴은 시끄럽다는 것만 빼면 좋은 친구에 가까웠다.

"얼마든지."

"고마워. 어디... 맙소사. 왜 하필 이런 검집을 선택한 거야? 눈에 띄기 싫어서?"

"너도 그렇게 반응하고 있네."

"듣고 보니 그래. 이야, 이건 정말... 뛰어나. 솔직히 수련생들에게 지급되는 검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어. 어쩌면 교관님들까지 포함해야 할지도 몰라. 정말 대단한 검이잖아?"

경이로운 걸 본다는 듯 오스틴은 헨리의 검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조심스레 날을 눈가로 가져가서 보고, 손잡이를 쥔 채 앞뒤로 살짝 움직여 보기도 했다.

마지막엔 두 손가락만으로 든 채 무게까지 가늠하더니,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슬란드산 순강(純鋼). 훌륭한 재질이야. 그런 걸로 제련했으니 이런 물건이 나올 수밖에. 장담컨대, 정말 쓸 만할 거야. 대장장이도 괜찮은 사람으로 골랐네? 의외로 사람 보는 눈이 있는걸?"

"흠."

헨리는 가타부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스틴은 여전히 진지한 눈으로 검을 살피는 중이었고, 이건 정확히 헨리가 기대했던 상황이었다.

'이걸 한눈에 알아봤단 말이지.'

게다가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다.

무언가 있긴 있고, 오스틴은 그 사실을 별반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 터였다.

"오스틴."

"어?"

"묻고 싶은 게 좀 있는데."

"어, 뭐든 물어봐. 우리 사이에 질문 하나까지 눈치 보면서 해야 해?"

"너 귀족이지?"

"응."

"어딘데?"

"로드릭 공작가."

태연한 질문에 태연한 대답이었다.

헨리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장남은 아니겠고."

"설마 공작가의 자제라며 치켜세울 생각이라면 관둬 줘. 나는 가문이랑 가까이 지낼 마음이 없거든."

"설마.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지. 여태까진 다들 그랬나봐?"

오스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진 항상 그랬다.

누군가 이런 질문을 건네고, 대답한 후엔?

둘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오스틴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 가문을 언급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본다면 굳이 피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괴상한 행동거지 덕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었고.

"그냥 물어본 거야. 검 재질을 한 번에 알아보길래. 귀족이 아니라면 어디 상계의 거물 쪽인가 싶었거든."

"구해야 할 물건이라도 있어?"

"딱히. 그냥 물어본 거라니까?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그러니까 지금 내 질문은... 딱 그 정도지. 오늘 저녁 메뉴 뭐냐고 묻는 정도의 궁금증. 이해했어?"

오스틴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저렇게 말하는 헨리의 얼굴이 너무나 덤덤한 까닭이었다.

오히려 그런 오해를 샀다는 게 우습다는 듯한 얼굴.

"다행이야."

"뭐가?"

"정말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인데. 궁금하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어, 괜찮을 것 같아. 그래서 장남이야?"

"둘째야. 위에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아마도 차기 가주가 되시겠지. 나는 후계니 뭐니 하는 것들엔 관심이 없어. 그때도 말했지만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유도 아버지가 억지로 등을 떠미셔서...."

"어차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일단 아카데미는 졸업해라?"

오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랑 기사.

소속이 공작가건, 후작가건 방랑 기사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오스틴의 아버지인 로드릭 공작도 별 말은 안 했던 거고.

"형제끼리 피를 흘릴까 봐 걱정하는 분이시거든. 다행히 큰형님도 내가 진심이란 건 알아주시는 상황이고, 막내는 아직 너무 어려. 덕분에 우린 가정의 평화를 찾았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 어릴 적부터 꿈이었어. 세상을 돌아다니고,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는 삶. 얼마나 낭만적이야?"

"낭만으로만 치부하기엔...."

"물론 실력도 있어야겠지. 즐거움만큼이나 위협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그편이 공작이랍시고 위세 부리며 사는 것보단 나을 거란 거야. 내게 있어선."

대충 견적이 나왔다.

꽤 흥미로운 내용이었고, 어제 참관 차 방문했던 로드릭 가의 기사가 찾아오지도 않았던 걸 보면 백 퍼센트 진실일 터.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지만, 개인사까지 팔아먹긴 좀 그렇지?'

일단 헨리는 참기로 했다.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방송에서 언급할 일이 생길 테니까.

어차피 본론은 이게 아니기도 했고.

"이번 시험 때 B반으로 올라갈 거야."

이게 바로 헨리가 준비했던 본론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험.

거기서 충분한 실력을 증명하고, 기사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거라는 선언.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거야? 아님 결심을 다지는 건가? 반드시 해 내야지, 하는...."

"마음대로 되는 거야."

"역시. 그동안 어떻게 참았던 거지? 내가 헨리 너였다면 그리 오랜 시간을 참진 못했을 텐데. 그런 취급을 받아 가면서까지."

"참았다기 보단...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는 어쩔래? 아마 B반으로 올라가는 순간 기숙사가 바뀔 텐데.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만났다며?"

오스틴의 표정이 묘해졌다.

헨리의 질문은 분명 뜬금없는 느낌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오스틴이 숨겨 왔던 사실을 모른다면.

"...그럼 나도 올라갈까?"

헨리가 3년간 몸을 웅크린 채 기다려 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과한 실력은 분명 소문을 낳고, 그 소문이란 건 자신의 큰형님이 좋아하지 않을 만한 내용인 게 분명했으니까.

"괜찮은 룸메이트를 찾는 건 꽤 까다롭거든. 나는 다른 녀석들이 골치 아프게 구는 걸 받아 줄 생각이 없어."

"그럼 나는?"

"네가 나를 보고 느끼는 거랑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것들엔 관심이 없잖아? 단순히 귀찮은 거랑, 골치 아프게 구는 건 다르거든."

BJ소드마스터

33화. 오스틴(2)

오스틴 로드릭.

후계에 관심 없는 공작가의 차남이자, 귀족으로서의 명예보단 자유를 추구하는 청년.

마법사들은 분명 그에게 무언가 숨겨진 사실이 있으리라고 짐작했고, 그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오스틴 역시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일념 아래 겉으로 드러나는 실력을 조절하고 있었으니까.

"나도 같이 올라가? B반으로?"

"이번엔 내가 그 질문을 다시 해야겠는데. 마음대로 되는 거야?"

이미 대충 짐작했으면서도 헨리는 질문했다.

본인의 입으로 확답을 듣고 싶었으니까.

"마음만 먹는다면야. 사실 일부러 안 가고 있던 거거든."

"왜?"

"아무래도 B반부턴 시선이 좀 몰리니까. 평범한 입장이라면 모를까, 우리 가문 내에선 큰형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거든."

자그마치 왕국 최상위의 공작가다.

가문 내부엔 이미 파벌이 갈렸고, 개중 일부는 후계에 관심을 꺼 버린 오스틴을 따르겠답시고 설치는 이들이었다.

수련생으로서 아카데미 B반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날뛰기엔 충분한 이유가 되어 줄 터.

"기사로서의 재능 어쩌고 하면서... 억지로 등을 떠밀겠지.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야. 으, 생각만 해도 끔찍한걸."

"그래서, 할 거야?"

"따라가도 괜찮겠어?"

"괜찮은 룸메이트를 찾는 건 꽤 까다롭거든. 나는 다른 녀석들이 골치 아프게 구는 걸 받아 줄 생각이 없어."

"그럼 나는?"

"네가 나를 보고 느끼는 거랑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것들엔 관심이 없잖아? 단순히 귀찮은 거랑, 골치 아프게 구는 건 다르거든."

그건 사실이었다.

헨리도, 오스틴도.

두 사람 다 평범하지 않았으나, 서로 결코 과한 관심을 드러내진 않았다.

단지 그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때 오스틴이 다시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헨리."

"왜?"

"B반부턴 독실을 사용할 수 있어."

순간 헨리는 할 말을 잃었다.

독실이라니?

'혼자 기숙사를 쓰는 게 허락된다고?'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졌다.

방송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혼자 있는 편이 낫다.

오스틴이 필요하다면?

단지 그때만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오스틴,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네가 B반으로 올라오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차라리 네 큰형님이라는 사람이 완전히 후계 구도를 굳힌 뒤에...."

"구도는 이미 굳어졌어. 날 따르겠다고 설치는 것들은 얼마 되지도 않아."

"괜히 부적절한 의심을 산다거나...."

"다행히 큰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고. 아버지께서도 내 의사를 확실히 알고 계시고. 내가 나서서 조심했던 거지, 반드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은 아냐."

"...난 독실을 써야겠어."

"당연하지. 선택권이 있는 게 아냐."

"아, 그래?"

"옆방을 얻어낼 순 있겠지. 서로의 생활을 보장받으면서도, 필요할 땐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어때?"

그런 거라면 나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더.

헨리가 허락을 구해야 할 게 있었다.

"그렇다면 나쁠 것 없지. 또 물어볼 게 있는데, 네가 로드릭이란 거 말이야."

"원한다면 드러내도 돼."

"그렇게 쉽게 대답한다고?"

"애초에 교관님들은 다 알고 계시니까. 다른 친구들이야 알건 말건 중요한 것도 아니고."

허락이 떨어졌다.

오스틴은 정말 상관없다고 여기는 거였고, 그건 곧 시청자들에게 사실을 털어놔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아주 좋아. 또 컨텐츠 하나 생겼네.'

이 내용으로 방송한다면 동영상까지 하나 건질 수 있을 터.

"좋아. 가자."

"어딜? 나도 가자고?"

"훈련하러."

"그러니까 어디로 가는데?"

"매일 가는 곳."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오스틴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매일 가는 곳이라면 거기잖아. 루소 수석 교관님 연무장.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거야? 네게만 허락된 공간 아니었어?"

"지금까진 그랬지."

"...?"

"말씀드려야지. 허락해 달라고."

오스틴의 웃음이 훨씬 환해졌다.

그로선 상상조차 하지 않던 일이었으니까.

다른 수련생과 훈련을 같이한다는 것도 그렇고, 자그마치 수석 교관의 연무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그랬다.

"기분이 정말 좋은데."

스스로 정체를 감췄고, 굳이 누군가와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

이대로 시간만 죽이다가 졸업하는 게 가장 낫다고 판단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이유가 생겼다.

단순히 승급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지루한 과정을 덜 지루하게 해줄 친구가 생긴 거였으니까.

"그래서 무슨 훈련을 할 생각인데? 교관님들의 연무장은 마나의 농도가 높다고 했었으니까... 마나 쌓기? 아니면 검술 교본을 보고 익힐 생각인가?"

"대련."

"대련! 그거 좋지! 헨리 너와 내가 검을 들고 겨룬단 뜻이지? 그것도 사용할 거야? 오늘 얻어온 검."

"쓸 거야."

"용건이 끝나자마자 이리 삭막해지다니. 하지만 걱정 마, 헨리. 귀찮은 건 알겠지만, 나도 검을 들었을 때만큼은 수련에 집중하는 성격이거든. 그러니...."

잔뜩 신난 오스틴이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헨리는 지금 귀찮아서 말을 대충 받는 게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시청자님들께서 짐작하셨던 대로, 오스틴은 로드릭 공작가의 일원이었습니다. 차남이고, 후계 구도엔 관심이 없다는군요. 형에게 양보하고 본인은 방랑 기사로서 떠돌아다닐 생각이랍니다."

방송을 진행하느라 바빴을 뿐이었으니까.

지금 오스틴에게 돌아가는 대답은 [방송용 마이크]가 적절하게 바꿔 둔 내용이었다.

[지금은 어디 가시는데요?]

[와ㅋㅋ 로드릭이면 거기 아니에요? 저번에 왕국에서 제일 세다고 한곳ㅋㅋ]

[거기 맞는듯. 와, 그걸 포기했네.]

[얘가 공작만 딱 찍어주면 엄청 도움될것같은데ㅋㅋ 절대 안할거래요?]

"절대 할 생각이 없답니다. 제가 느끼기엔 확고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매일 훈련하던 루소 교관님의 연무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서 할 건 대련이고요. 아마 진검으로... 물론 저는 아까 오후 방송에서 보여 드렸던 제 검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이미 기대감은 잔뜩 키워 둔 상태였다.

헨리의 새 검은 무기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물건이었으니까.

살짝 움직일 때마다 번뜩이는 검광은 마법사들조차 기대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 웁웁 마법사님께서 제안하신 미션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얼마 전.

자그마치 수백만 원을 쾌척한 '웁웁'은 헨리에게 새로운 미션을 제시했다.

바로 곧 있을 시험에서 B반으로 올라가라는 내용.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마법사님들께서 제게 걸어 주신 기대를 배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미션을 제안 받았을 때.

헨리는 일단 뜸부터 들였다.

미션은 몹시 까다로우며, 아무리 헨리라도 쉽게 해 낼 수 없다는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은 웁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헨리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300만 원이 탐나서 도전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거금을 제게 투자하실 만큼 기특하게 봐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며...."

[누가봐도 돈때문인데ㅋㅋㅋㅋㅋ]

[그럼 돈 안줘도 할거에요?]

<'웁웁!'님이 10,000원 후원!>

<"그럼 돈 안드려도 하실거임??">

"물론입니다. 저는 제가 한 번 꺼낸 말을 어기지 않습니다. 특히 마법사님들처럼 제게 소중한 분들께는요."

<'웁웁!'님이 10,000원 후원!>

<"아ㅋㅋㅋ 이렇게 말하면 발 못빼지ㅋㅋㅋ">

<'웁웁!'님이 10,000원 후원!>

<"300받고 100더! 400짜리 미션인걸로ㄱㄱ">

자그마치 한 달짜리 미션.

그만한 거금이 걸렸고, 헨리가 보아온 웁웁의 성격상 저것보다 더 주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소소한 미션을 끊임없이 걸어 대는 게 바로 웁웁이라는 마법사였고, 그 미션을 끌어내는 게 바로 헨리의 능력과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바짝 모아야 돼. 지금 상태론 조금 부족할 거야. 최근 동영상도 꽤 늘어나긴 했지만... 만족할 수준까진 아직 한참 남았고.'

B반에 확실히 붙으려면 지금 상태론 좀 부족했다.

거기부턴 언제, 어디서든 기사로 활약할 수 있는 수련생들만 모아 둔 상태였으니까.

단지 성장의 여지가 남았을 뿐, 실력 자체는 어지간한 평기사들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 이들이 바로 B반 수련생들이었다.

그리고 헨리가 방금 미션을 받아들이겠다 한 행동은.

한 달 만에 그들과의 격차를 완전히 좁히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았다.

***

수석 교관 루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스틴과의 대련을 원한다는 요청에 흔쾌히 사용 허가를 내어주었고, 오슬란드산 순강으로 제작한 검에도 감탄의 눈빛만 비추었을 뿐.

그가 입구에 맡겨 뒀던 돈주머니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엔 다소 섭섭한 눈치였으나, 그것도 그리 크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루소가 제시한 조건이 있었다.

"대련을 참관하게 해 준다면 허락하마."

헨리와 오스틴의 대련을 지켜보고 싶다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다.

예전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

하지만 지금은?

방송용 마이크 덕분에 헨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고맙다, 헨리. 또 훈련 스케줄을 변경한 이유가 있나? 단지 검을 사용해 보고 싶은 것뿐이라면...."

"B반으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B반이라. 이번 시험에서 말이겠지? 쉬운 일은 아닐 텐데."

"교관님께서 제게 진심으로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다짐하고자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훌륭하다. 더없이 훌륭해."

루소는 그리 말하곤 손뼉만 쳤다.

눈에 드러난 감정은 거의 경탄에 가까웠을 정도.

헨리의 재능이란 건 매번 그가 생각했던 한계를 벗어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보러 갈 수 없겠군. 나중에 들리마, 헨리."

수석 교관의 업무는 끝이 없었다.

헨리는 오스틴과 먼저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다른 이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장소.

일단 들어선 후에 그 고요함을 만끽하는 게 헨리의 일상이었으나, 아쉽게도 오늘은 그게 불가능했다.

"세상에! 이게 교관님들께 제공되는... 아, 아니지. 수석 교관님이셨군. 차이가 명백하겠어. 그런 만큼... 와, 본가의 연무장보다도 뛰어날 것 같은데?"

격하게 날뛰기 시작하는 오스틴.

지금 상태의 그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영양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검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검술 숙련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검술]

* 숙련도 : 9레벨, 55%

* 숙련도 100% 달성 시 10레벨로 성장합니다.

* 10레벨 달성 시 추가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헨리가 메시지를 띄웠다.

이건 시청자들도 볼 수 있었고, 당연히 새로 추가된 메시지도 마찬가지.

"보시다시피 10레벨을 달성하면 새로운 무언가가 주어질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반드시 저걸 얻어 볼 생각이고, 다른 소득도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소득(후원상점)ㅋㅋㅋㅋ]

[또 뭔데요?]

[이젠 이런게 떠도 어색하지가 않네ㅋㅋㅋ]

"일단 보여 드리겠습니다."

[헨리 카밀턴]

[종합 평가]

* 동일 연령, 성별 대비 압도적으로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습니다. 또한 마나를 다루는 실력도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 소속 집단 대비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습니다. 또한 마나를 다루는 실력은 중간 정도입니다.

* 추가 정보를 확인하려면 요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두 번째 창을 띄웠다.

2만 원을 추가로 투자해 숨겨진 정보까지 드러낸 내용이었다.

[어김없이 상태창 등판ㅋㅋㅋ]

[??? 진짜 돈내라는데요??? 컨셉이 아니었던거임???]

[요금을 지불ㅋㅋㅋㅋㅋ]

[저거 진짜 현금 내란 소리임?ㅋㅋㅋ]

[게임돈이겠죠ㅋㅋㅋ 설마 미쳤다고 현금이겠음ㅋㅋㅋㅋ]

[하지만 우리 기사님은 현금인것처럼 말씀하실거고ㅋㅋㅋㅋ]

"현금... 음, 말씀하시는 바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 어쨌든 다음 정보를 확인하려면 10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아, 그리고...."

[10만원 돌았냐고ㅋㅋㅋㅋ]

[진짜 너무창렬겜인데ㅋㅋㅋㅋ]

어이없다는 반응이 줄지어 올라왔다.

다행히 긍정적인 쪽에 가까웠고.

그러나 그 가운데.

<'웁웁!'님이 100,000원 후원!>

<"ㅋㅋ함 까보셈 뭐나오나">

또 한 번, 웁웁은 독보적인 자금력을 과시했다.

BJ소드마스터

34화. 1성 기사(1)

[새로운 정보가 개방되었습니다.]

[헨리 카밀턴 : 기사 수련생]

* 8레벨

* 성향 : 선(善)

* 주무기 : 검

*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전투를 선호합니다.

* 10레벨 달성 시 '1성 기사'로 승급합니다.

이제 헨리의 '정보'는 처음 나왔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다.

여기까지 들어간 돈만 30만 원.

당연히 웁웁이 지원해 준 것이었고, 덕분에 헨리는 본인의 수준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1성 기사까지 고작 2할밖에 남지 않았다니.'

1성 기사가 어떤 존재이던가.

헨리가 알기론 B반의 상위권이 해당 수준에 이르렀고, 또 A반 대부분이 1성 기사 수준이었다.

그쯤은 되어야 각종 가문에서 건너오라는 제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고.

또한 A반의 최상위권 역시 1성 기사인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몇 개의 벽을 더 넘었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2성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만약 수련생 시절에 2성을 달성한다면?

과장 없이 왕실 기사단에서 러브콜이 오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거.'

헨리는 '8레벨'이라고 적힌 부분을 건드려보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까지 나와 있어.'

[레벨 산정 기준은 복합적입니다. 사용자가 지닌 마나의 총량, 마나를 다루는 기술, 무기술, 다룰 수 있는 무기의 수, 경험, 육체적인 능력 및...]

기준은 다양했다.

사실상 원론적인 것들만 적혀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행히, 이곳엔 우선순위가 적혀 있었다.

[비교 기준 : 1성 기사]

* 마나의 총량 : 30%

* 마나를 다루는 기술 : 80%

* 무기술 : 95%

* 다룰 수 있는 무기의 수 : 100%

* 육체적인 능력 : 100%

...

지금 헨리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고, 충분한 건 무엇인지.

'거의 다 왔었네.'

묘한 기분이었다.

한참 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던 목표는 헨리의 코앞에 있었다.

검술만 조금 올리고, 부족한 마나를 쌓고, 2레벨 재능의 구슬만 모두 구매한다면.

'그럼 1성 기사가 되는 거였어.'

B반에 올라가는 것쯤은 일도 아닌, 오히려 그다음 단계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

물론 경험이 뒷받침되어야겠지만, 그건 헨리에게 있어 노력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방송 진행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법사님들이 계셨기에 제가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방종하신다고요?]

[아니 지금 방종은 좀 오반데ㅋㅋㅋㅋ]

[대련 한판도 안하고? 이걸? 여기서?]

"아닙니다. 그... 마이크의 지속 시간 문제입니다. 방송은 계속 켜 둘 거고, 누군가랑 같이 있을 땐 제가 마법사님들께 이런저런 말씀을 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아 고건 이해 가능하죠ㅋㅋ]

[저희 신경끄고 진행ㄱ]

[드디어 대련하네ㅋㅋ 오래 기다렸다]

방송용 마이크.

두 시간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아무리 오스틴이라도 시청자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터.

화면을 곁에 띄워 둔 채, 헨리가 오스틴을 바라보았다.

"이제 할까?"

"오, 드디어 눈에 생기가 돌아왔어. 진심으로 받아 줄 마음이 생긴 거야?"

"수다 말고, 검이라면 받아 줄 생각인데."

"그거 좋지! 검은 뭘 사용해야...."

"아무거나 써. 전부 수련검이니까. 교관님께 허락은 구해 뒀어."

"그렇다면야."

오스틴이 주의 깊게 거치된 검들을 살폈다.

헨리의 검을 몇 번인가 힐끔거리더니, 곧 한 자루를 집었다.

"이거면 어떻게 비벼 볼 만은 하겠는데. 많이 부족하겠지만."

"시작도 전에 약한 척이야?"

"그게 지금 고민 중인 부분이었거든. 내가 어디까지 해야 할까? 저번에 샌슨 경인가? 왜 티모시 가의 기사 있었잖아?"

"그랬지."

"그 사람이 했던 만큼이면 되겠어?"

이건 또 의외다.

헨리는 재밌다는 듯 오스틴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숨겼던 거야?"

"좀 많이. 마음만 먹으면 B반이 아니라, 그 위로도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아무래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잖아?"

오스틴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허세라 생각했을 터.

하지만 오스틴이기에 저건 진심인 게 분명했다.

'나름 공작가 핏줄이라 이거지.'

로드릭 공작은 발라란 왕국에서도 손에 꼽은 검수 중 하나였고, 그 재능은 오스틴에게도 그대로 이어진 게 분명했다.

'이것도 살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88만 원만 있다면 상대의 정보도 확인할 수 있는 게 헨리의 현 상황이었다.

지금은 돈이 좀 빠듯했지만.

'어쩔 수 없지.'

"최대한 해 봐. 나도 최대한 할 테니까."

"괜찮겠어? 이게 그... 나도 그리 뛰어나진 않거든. 조절이 잘 안 돼. 정련되지 않았다고 해야겠지?"

"죽지만 않으면 돼."

"부상은?"

"상관없어."

아카데미의 의료진은 몹시 뛰어나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후원 상점'엔 고성능 치료제 역시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고.

스릉.

헨리가 은백색 검을 들어올렸다.

"해 보자고."

***

수석 교관 루소는 마음이 급했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업무가 밀려드는 건지.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나, 그는 자신의 역할을 팽개치고 뛰쳐나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 봐야 할 게 있습니까?"

"없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예, 그럼."

거의 다섯 시간에 걸친 작업이 끝났다.

담당 교수에게 마지막 자료를 넘기고, 루소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의아한 기색.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이미 루소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서둘러 가야....'

루소가 묵직하게 땅을 박찼다.

탄탄히 단련된 육체.

거기에 마나까지 돌려가며 신체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단지 아카데미 내부를 이동하려는 목적이라기엔 사치스러운 능력이었으나, 루소에겐 곧 마주할 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 전에 끝나진 않았겠지.'

연무장까지 이동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도중 마주친 사람들의 인사까지 포기하며 달린 결과였다.

조심스레, 루소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

방문자를 알리는 소리까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나 문이 열린 순간.

어색한 정적만이 감도리라 생각한 방에선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맹렬했다.

방문자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격렬함.

곧 보인 모습은, 헨리와 오스틴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광경이었다.

'...다행이야.'

두 사람의 집중력은 자신 하나 때문에 흔들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루소는 조용히 구석으로 향했다.

의자를 하나 당겨와 앉은 채, 본격적으로 대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교관으로서 실격이군. 오스틴마저 이랬다니. 수석이란 딱지를 떼야겠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고작 C반에 머무를 수준이 아니었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조차 흔들리지 않는 마나. 삽시간에 몇 번씩 형태를 바꾸는 검과, 집요하게 타격점을 중심으로 마나를 밀집시키는 기술까지.

이건 고작 수련생들 사이의 대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실전에 가까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자칫 삐끗했다간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지고도 남을 정도로.

'말려야 하나?'

그제야 루소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홀린 듯 구경한다고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순 없지. 그사이에도 성장하고 있는 녀석들을....'

문제가 생긴다면 자신이 수습하면 된다.

수석 교관의 요청이라면 새벽에도 의료진이 쏜살같이 달려올 테니까.

루소는 본격적으로 구경꾼의 위치를 차지했다.

'아직은 오스틴이 우위로군. 역시 로드릭이야. 하지만...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어. 매번 검을 주고받을 때마다.'

이 광경을 알렉스가 본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다.

매번 대화할 때마다 빠짐없이 로렌을 언급하고, 로렌이 얼마나 천재인지를 줄줄 늘어놓던 친구였으니까.

얼마 전, 헨리가 시험 치르는 모습을 봤을 때도 약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마 이번 건 그냥 충격으로 끝나지 않겠지.'

로렌이 천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천재도 천재 나름.

지금 루소 앞의 두 수련생은 이미 그 범주를 한참이나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어. 지금 헨리라면 B반엔 충분히 들고도 남겠군. 마나량이 적은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런 것 따윈 단순히 시간만 투자하면 메꿀 수 있는 부분이고.'

루소는 홀린 듯 대련을 지켜보았다.

이미 머릿속엔 자신이 헨리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는지 목록으로 쫘악 뽑아 둔 상태였다.

창고에 쟁여 뒀던 영약.

귀하디귀한 광물.

또한 헨리를 위한 연무장 시설 개선.

아예 저 대련을 자신이 직접 해 준다면 어떠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까지도.

루소의 애가 잔뜩 달아오른 가운데, 마침내 대련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헨리가 루소의 존재를 알아챈 것도 그때였다.

"교관님?"

"어? 언제 오셨습니까? 와, 역시 교관님들께선 기척도 자유자재로 제어하시는군요! 감탄했습니다!"

오스틴도 검을 내리고 루소를 바라보았다.

듣던 대로 말이 정말 많다.

그리 생각하고, 루소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나 계속 하도록.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둘 다 훌륭해."

"세상에! 루소 수석 교관님께 이런 칭찬을 받는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 어이쿠!"

오스틴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헨리의 검이 날아든 탓이었다.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으나, 다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한 기세.

"계속 하겠습니다, 교관님."

헨리가 조용히 말했다.

루소의 진심이란 걸 알았기에, 그리고 당장 제 마음이 몹시 급했기 때문에 내뱉은 말이었다.

[검술]

* 현재 숙련도 : 9레벨 95%

남은 숙련도는 고작 5퍼센트.

조금만 더 이어가면 '벽'을 넘고, 1성 기사의 조건을 채울 수 있었다.

오스틴의 눈도 진지해졌다.

검을 잡을 때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

로드릭의 피를 받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사납게 웃으며 오스틴도 반격을 가해 왔다.

[개쩐다ㄹㅇ...]

[걍 혼자 훈련한다고 할때랑은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네요]

[눈호강하네 진짜ㅋㅋㅋㅋ]

[얼핏보면 광선검들고 싸우는것같음ㅋㅋ]

재차 맹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명백한 헨리의 수세.

그러나 루소가 느꼈듯, 시청자들 역시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점점 따라잡고 있는거 맞죠?]

[저도 그렇게 보임ㅋㅋ 아깐 세 번은 막아야 한번 공격하던데]

[검술 10렙 찍으면 다따라잡겠는데요?? 무슨 보너스 또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헨리와 오스틴의 격차는 점차 좁혀지는 중이라는, 또한 10레벨을 달성했을 때 주어질 무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헨리를 상대하는 오스틴도 마찬가지였고, 루소 역시 그걸 '한 겹의 벽'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검의 품질이 몹시 높습니다! 추가 숙련도가 주어집니다!]

[훈련에 적합한 환경입니다! 추가 숙련도가 주어집니다!]

[상대와의 격차가...]

...

매 합을 주고받을 때마다 헨리는 저런 메시지를 마주하고 있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검술 숙련도를 올리기 위한 최적의 조건.

빠른 속도로 상승하는 숙련도가 보였고, 곧 99퍼센트에서 다음으로 넘어간 순간.

[검술 숙련도가 10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조건 달성!]

[추가 보상으로 '특성 : 이해'가 지급됩니다.]

메시지뿐만 아니라, 헨리 자신이 느끼기에도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났다.

'...?'

생소한 느낌.

그 탓에 헨리의 검이 한 박자 느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째선지 알 것 같은데? 이게 보상인가?'

곧 헨리의 검이 종전보다 날카로워졌다.

공격적이란 의미가 아니었다.

오스틴의 검격에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었으니까.

알 것 같다는 건, 오스틴이 어떻게 검을 휘두를 건지 알 것 같단 소리였다.

지극히 단순한 현상.

똑같이 왼쪽으로 뻗어도 이게 위장인지, 진심으로 공격하는 건지 느낌이 전해져 온단 소리였다.

갸웃거리는 오스틴에게, 헨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알 것 같아. 다시 해 보자. 그대로 이어서."

BJ소드마스터

35화. 1성 기사(2)

[특성 : 이해]

* 검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직관적인 이름에, 간단한 설명.

이게 바로 검술 숙련도 10레벨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저 특성을 얻은 직후.

헨리는 오스틴과 검을 주고받으며 이 보상의 가치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이야.'

그간 대마법사에게서 수많은 것들을 받았으나, 이번 건 그런 헨리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검술의 '이해'도가 올라간다는 건, 곧 상대의 공격을 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검술이 있고,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본인이 익히지 않은 검술은 사용할 수 없다.

물론 경지를 벗어난 일부라면 모르겠으나, 그쯤 되면 검술이네 뭐네 하는 게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고.

"헨리, 굉장한데?"

오스틴이 짧게 감탄했다.

그 외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였다.

헨리는 검을 겨룰 때마다 성장했고, 방금은 벽을 넘어선 듯 보이더니 매서운 역공까지 가해 왔다.

여유롭던 오스틴이 일순 식은땀을 흘렸을 정도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런 거였어."

"무슨 말이야?"

"내 위에 있던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 너처럼 말이야."

"내 생각엔 글쎄. 아마 다를 것 같은데?"

"다르다고?"

오스틴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했다.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과정을 겪는 속도가 문제야. 아마 네가 느끼는 건 내가 그 단계에서 느낀 것과 많이 다를걸?"

"그래?"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이기도 한데... 내가 교관도 아니고. 일단 감상을 말하는 선에서 끝내는 게 어떻겠어? 괜히 조언이라도 하는 꼴은 너무 우습잖아?"

맞는 말이다.

헨리는 수긍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입을 쩍 벌린 채 헨리만 빤히 바라보고 있는 루소가 있었다.

"교관님께선...."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헨리. 잠깐 기다려라. 금방 다녀올 테니."

"예?"

"기다려! 절대 떠나지 말고! 곧 돌아올 거다!"

루소가 이리 급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헨리나 오스틴이나 벙 찐 채 그가 사라진 출입구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스틴이 헨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정말 급하신 것 같지?"

"동감이야."

"그럼 검이나 좀 더 겨루고 있을까? 널 보니까 나도 간질간질해져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아니, 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금방 오신다고 했으니까."

루소가 떠난 이유는 당연히 헨리 자신과 관련 있을 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특별한 걸 가져오리란 건 분명했다.

그리고 10분쯤 지났을까.

헨리와 오스틴의 땀이 슬슬 서늘하게 식을 때쯤, 조금 전만큼이나 다급한 태도의 루소가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었군. 잘했다. 헨리?"

"예?"

"이걸 받아라. 이건 네게 쓰이기 위해 기다리던 것들이다. 드디어 오랜 시간 보관해 왔던 이유를 찾았군!"

"이게... 이걸 제게 주신다는 겁니까?"

잔뜩 상기된 얼굴로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고, 헨리는 미간을 좁혔다.

[ㅋㅋ딱봐도 영약이네]

[뿌리 생긴것부터 마나로 꽉 차있게 생겼죠?ㅋㅋ]

[과연?? 이걸?? 받을것인가??]

시청자들은 신나서 채팅을 올려 대고 있었다.

헨리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것들은 영약이다.

꽤 화려한 박스를 가득 채운 물건들.

무슨 식물의 뿌리처럼 보이는 것부터 마법사들이 제작한 마나 포션. 끔찍한 외형의, 흡사 몬스터의 심장처럼 보이는 것까지.

아무리 문외한인 헨리라도 이걸 다 먹으면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고.

"와... 교관님 정말 엄청 모아두셨군요? 오, 저 포션은 마법사들도 없어서 못 마시는 건데. 골드 엄청 쓰셨겠는데요? 사실 이쯤 되면 골드 문제가 아니긴 한데...."

오스틴 역시 헨리의 짐작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자그마치 로드릭 공작가의 일원이다.

오슬란드산 순강을 한눈에 알아봤던 것처럼, 그는 이 영약들의 가치 역시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받아 다오, 헨리. 부탁이다."

"이건 너무 많습니다."

"많다니! 이게 뭐가 많단 말이냐. 나는 더 모아 두지 못한 게 슬플 지경인데. 지금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들만 있으면 네가 다음 단계로 넘어설 수 있는...."

"우선 하나만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하나?"

"예."

루소가 잠시 생각했다. 일단 챙겨 온 박스를 내려놓고 그가 다시 질문했다.

"이유를 알 수 있겠나?"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그 영약 하나가 제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요. 또 그 양을 수련으로 메꾸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그런 이유라면! 일단 나는 이걸 추천하마. 지금 네게 가장 적합한 물건일 거다."

"오, 마나 보석! 페어리의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를 정제해 만들어 낸 물건! 저 귀한 걸 갖고 계셨다니!"

루소가 푸른 사각형의 보석 같은 걸 건네고, 오스틴은 자신이 더 신나서 떠들어 댔다.

헨리는 일단 보석을 받았다.

"먹으면 됩니까?"

생긴 것만 봐선 모르지만, 그 외의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루소는 긍정했다.

텁.

입에 넣었다.

맛은 없었다. 그러니까, 아예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단단한 무언가를 입에 넣은 듯한 기분.

다음 순간.

헨리는 마나 보석이 흡사 기체처럼 흩어지기 시작한 걸 느꼈다. 그러더니 무언가 헨리의 육체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마나였다.

그것도 아주 고농도의 마나.

'온몸이 마나로 꽉 차는 느낌이야.'

헨리로선 처음 느껴 보는 감각. 단순히 소량의 마나를 순환시킬 땐 맛볼 수 없던 기분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헨리 카밀턴 : 기사 수련생]

[비교 기준 : 1성 기사]

* 마나의 총량 : 30%

헨리가 정보창을 띄웠다.

1성 기사까지 얼마만큼의 수련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 주는 내용.

'아직 흡수된 건 아닌 것 같고.'

마나량은 아직도 30퍼센트로 나오고 있었다.

영약이 효과를 보기까진 조금 기다려야 할 모양.

그리고 잠시 후.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헨리는 마나 보석의 효과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마나의 총량 : 47%

자그마치 17퍼센트의 성장.

'고작 하나로?'

충격적일 정도였다.

귀한 영약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

마나를 느끼지 못하던 때, 카밀턴 자작은 헨리에게 이것과 비슷한 물건을 건넨 적 있었다.

'그땐 아무 효과도 볼 수 없었는데.'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던 거였다. 일단 거절하려는 뉘앙스를 풍겼던 것도 그런 이유였고.

심각해진 표정의 헨리에게, 루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속이 들끓을 거다. 일단 자리를 잡고 앉도록 해라. 막대한 마나이지만, 그걸 온전히 흡수하는 건 불가능해. 아마 흡수할 수 있는 건 일부에 불과할 거다. 그러니...."

"교관님."

"말을 해?"

루소의 눈이 커졌다.

오스틴도 마찬가지.

이런 영약들이 어떤 물건이던가.

일단 몸속에 들어가는 순간 거세게 요동치며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그 고통을 참아 가며 애써야만 제대로 흡수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극도의 집중을 요하는 과정으로 인해 말을 내뱉긴커녕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는 게 정상 아니던가!

그런데 말을 하다니?

"다 흡수한 것 같습니다."

"말을 또 해? 다 흡수했다고?"

"진짜야? 정말? 다 흡수했다고?"

오스틴마저 그런 질문을 쏟아냈을 정도.

원래는 루소가 곁에 있기에 좀 자제하는 눈치였으나, 지금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온전히 흡수했습니다. 기존에 제가 지녔던 마나량 대비 절반 정도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절반이 늘어나?"

루소는 이제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현상이었으니까.

루소는 대충이나마 헨리의 마나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고작 이 마나 보석 하나로 그 절반이 늘었다면?

애초에 난다 긴다 하는 귀족가의 자제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영약들을 쏟아 붓는 게 정상일 터.

하지만 그러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연히 극도로 비효율적인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다. 아무 헨리 너라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그걸 모두 흡수할 수 있는 인간은 절대로 세상에... 세상에...."

루소는 볼 수 있었다.

증명하겠다는 듯 바짝 일으킨 헨리의 마나를.

몸 위로 일렁이는 푸른 물결은 분명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그리고 루소가 알기로, 마나 보석에 농축된 마나는 분명 딱 저 정도였다.

"...와, 헨리 이 녀석. 정말 천재였구나? 검술 감각만 좋은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육체 천재? 마나 흡수의 천재?"

오스틴이 감탄을 내뱉었다.

익살스레 말하긴 했으나,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루소도 같은 마음이었고.

"헨리."

"예."

"처음으로 수석 교관의 직권을 사용해야겠다. 현시간부로 너는 모든 수업에 나가지 않아도 좋아. 지금 네게 필요한 건 아카데미에서 진행되는 수업이 아닌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오스틴도 함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오스틴이 원한다면."

"당연히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침내 공식적으로 수업을 빠질 수 있게 되었군요!"

오스틴 역시 C반의 수업이 무의미하다 여기던 참이었다.

루소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헨리에게 두 번째 직권을 사용했다.

"또한 강력히 권하마. 현재 헨리 네게 가장 필요한 건 절대적인 마나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다른 훈련보다도 해당 훈련에 집중시킨 스케줄을 짜도록 해라."

"교관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헨리 네가 그렇게 요청한다면 할 수 없지. 수석 교관으로서 담당하는 수련생의 훈련 스케줄을 다른 교관에게 떠넘길 순 없는 일이니까."

힐끔.

루소가 헨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헨리, 너도 알고 있듯 교관이 한번 작성, 제출한 훈련 스케줄은 반드시 이행되어야만 한다. 극히 드문 예외의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제가 짜겠습니다."

"...역시 그게 낫겠지? 일정 수준 이상의 수련생에겐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게 우리 아카데미의 원칙이니 말이다."

원래 그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원하는 게 있으면 혀가 길어지는 법 아니던가.

헨리도 그 마음을 알았으나, 강제적인 스케줄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루소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을 생각도 아니었고.

"교관님께서 주신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게 효과가 없을까 걱정했으나...."

"잘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일단 하나씩 차분히 먹어 보도록 하자, 헨리. 오스틴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저희 집에도 많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고, 저는 수업을 빼 주셨다는 것만으로 루소 교관님을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다행이군."

루소는 근엄하게 끄덕이고, 헨리를 보자마자 다시 설렘 가득한 아이처럼 웃었다.

스케줄이고 뭐고 루소는 이제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훈련?

그런 것 따윈 알아서 할 수 있는 모범생이 바로 헨리 카밀턴이었으니까.

루소 자신의 역할은 그 여건을 마련해 주고, 지금처럼 밑천을 마련해 주는 정도로 충분했다.

"마나 보석처럼 흡수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혹시 모르니 대처 방법부터 알려 주마. 우선 이 아쉬칸디의 심장 같은 경우엔...."

보물들과, 그런 보물들을 활용하는 방법이 쏟아져 나왔다.

루소의 노하우라는 건 충분히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다시 다음 물건을 입에 밀어 넣었을 때.

"...다 흡수했습니다."

헨리는 자신에겐 해당사항이 없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뭔지 몰라도 이것 역시 대마법사의 조치일 터.

경악하는 두 사람 앞에서 서너 개쯤 주워 먹었을까.

정보창 속 마나량은 밑도 끝도 없이 치솟았고, 요구치를 채우는 건 한 순간이었다.

* 마나의 총량 : 100%

백 퍼센트.

정확히 1성 기사의 기준을 충족시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레벨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마나량이 추가로 증가하지 않습니다.]

[한계치 증가를 위해선 '1성 기사'를 달성해야 합니다.]

제한이 걸렸다.

1성 기사까지 채우지 못한 조건은 하나.

'2레벨 재능의 구슬' 중 남은 재능을 채우는 것뿐이었다.

BJ소드마스터

36화. 1성 기사(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