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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견습 기사가 수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흘렀다.

계단에서 내려오던 소년들과 마주칠 때면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루실을 찾아가 말했다.

"아직 살 만한 모양입니다."

"흠~"

루실이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 의미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기에.

내일 있을 훈련에서 소년들의 명복을 빌어 줄 뿐이다.

나는 그녀를 지나치며 상층부로 향하였다.

15층 회의실 아래인 14층에는 상황실이란 이름의 방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곳에 드나들 수 있는 기사가 아닌 유일한 생존자였다.

연구소 공략 이후.

싸늘했던 기사들의 태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로드웰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며 나에게 기사의 권한 일부를 나눠 주었다.

물론 직접 만나서 얘기한 것은 아니다.

타니아가 그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여 내게 전했다.

"어서 와라."

기사인 트루만이 자신을 반겼다.

다른 기사들보다 비만처럼 보이는 육중한 덩치의 사내.

그는 몸집에 맞지 않는 조그만 의자에 기대서는 하품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은 점심 먹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알고 있습니다."

트루만은 방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일부러 이 시간을 노리고 온 것이다.

갑작스런 권한 부여에 적지 않은 기사들이 불만을 품었다.

괜한 마찰은 피하고 싶었다.

"잠시 지도 좀 살피겠습니다."

"그래."

상황실에는 타워 일대가 그려진 지도가 벽면에 붙어 있었다.

지도 위에는 잉크로 휘갈겨 쓴 글자가 보였다.

근방을 순찰하거나, 보초를 서던 기사들은 이곳에 정보를 남겨 놓았다.

날짜와 시간.

좀비가 나타난 구역과 숫자.

다른 생존자와 접촉이 있었다면 규모는 어떠하며, 목적은 무엇인가.

"별일 없었던 모양이네요."

"뭐, 그렇지."

나는 미래에 일어날 시나리오를 알고 있다.

문제는 시나리오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짐작하려면 하나라도 더 많은 정보를 긁어 모아야 한다.

[영리함]과 함께 종합한 정보를 추론한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돌발 이벤트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타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길어 봐야 한 달 남짓이겠지만 지친 몸을 달래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처럼 약한 괴물들만 어슬렁거리면, 평화도 금방 찾아오지 않을까?"

트루만은 침묵이 지겨워졌는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약하더라도 저런 게 백 마리씩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좀비 중에는 군집형이 있다.

변종이 아닌 무리가 집단생활을 하듯이 몰려다니는 형태였다.

나는 그 규모가 천 마리가 넘는 것도 봤었다.

"끔찍한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군."

"그런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 얘기, 다른 기사들한테는 하지 마라. 미움받을 거다."

"남들한테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할 말 못 하는 성격은 아니라 괜찮습니다."

"지기 싫어하는 놈 같으니라고."

나는 트루만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용건이 끝난 상황실 밖으로 나왔다.

4층으로 향했다.

여성들이 지내는 숙소이기에 남자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하여 통로로 들어가지 않는다.

잠시 기다리자 만나고자 했던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이젤라였다.

"하하, 안녕."

루이젤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를 타워로 데리고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더러웠던 몰골은 깨끗해지고, 앙상했던 몸은 조금 살집이 올랐다.

그럭저럭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어떠세요?"

"나? 당연히 좋지. 조악했던 연구소 방과 비교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어. 전부 네 덕분이야. 고마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루이젤라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연구소에 있었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혼자서 도망치려고 했다는 죄악감.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그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당신이 아닌 누구라도, 그 당시에는 절 믿지 못했을 겁니다."

"...하하."

멋쩍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금세 피해 버린다.

꼭 얼굴을 보고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거북하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부탁할 게 있다고 했지. 어떤 일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불이 필요한 거야?"

그녀는 도움이라는 단어를 곧장 불과 연결시켰다.

타워 안에서 그녀가 하던 일이었다.

불을 피워 요리를 만들고, 사람들의 체온을 높이고.

가끔씩은 상처를 지지는 일도 한다는 모양이다.

불 속성의 마법사.

하얀 숨결이 흘러나오는 날씨에 그녀가 지닌 힘은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

"그렇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내 애매모호한 답변에 루이젤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녀를 이끌고 다른 층에 있는 방으로 향하였다.

"아!"

방에 먼저 도착해 있던 소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기척에 반응했다.

타니아였다.

루이젤라는 소녀를 보고서 자신의 역할을 짐작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거구나."

"그런 겁니다."

루이젤라가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내가 레인우드의 여식을 가르치게 되다니 영광인걸."

타니아도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챘는지 나와 루이젤라를 번갈아 바라봤다.

"언니가 제 스승이 되어 주시는 거예요?"

"그래, 혹시 불만이니?"

"아뇨, 단지... 제 예상하고는 살짝 달라서."

타니아의 목소리가 갈수록 잦아들더니 마지막엔 자신을 바라봤다.

내가 가르쳐 준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대단해. 연구소의 조수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야.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야 하고, 교수의 추천도 필요하지. 무엇보다도 마법은 같은 속성한테 배우는 게 제일 좋아."

실망한 그녀 앞에 정론을 펼쳤다.

타니아는 이내 포기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쉬워하는 소녀를 루이젤라가 꼭 끌어안았다.

"저런 무지한 남자한테는 말이지. 성장한 모습으로 복수해 주면 돼."

"그런가요?"

"그럼, 분명 나중에 후회할 거야. '그때 붙잡을걸' 하고 말이지."

"열심히 배울게요!"

여성 둘이서 죽이 잘 맞았다.

맡겨도 괜찮겠지.

나는 두 사람을 놔두고서 밖으로 나왔다.

소년 소녀들에게 각각 어울리는 스승들을 붙여 주었다.

THE Survival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팀의 밸런스도 중요하다.

혼자서 강해지는 것만으론 무리였다.

수차례에 걸쳐 실패하여 얻은 노하우.

나는 그들이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 * *

[마력이 5 상승합니다.]

[현재 마력: 400]

회담장으로 출발하는 당일.

마력초 30송이를 모조리 소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 번에 먹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다.

성급하게 해치웠다면 배탈로 인한 탈진으로 컨디션이 엉망이 될 뻔했다.

[인내심]도 이번엔 제법 고생한 모양이었다.

"전투 때보다 더 힘들었던 모양이네."

평소 여유를 잃지 않던 [인내심]이 지금만큼은 잠잠했다.

마력이 부족하면 마법을 못 쓰듯.

성격적 특성에도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삐악~ 삐악!"

병아리들은 3주라는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깨어났을 때와 비교하면 몸집이 세 배는 불어났다.

커진 몸집만큼 먹는 양도 배로 늘어났다.

모이가 든 포대를 바라봤다.

구석진 자리에 10층 높이의 포대가 탑처럼 층층이 쌓였다.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물자의 걱정은 떨어지기 직전에 하는 게 아니라, 넉넉할 때 해야 하는 법이다.

"얻을 수 있다면 얻는 게 좋겠지."

"삐악! 삐악~"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말에 병아리가 반응했다.

날렵한 놈들은 제 몸을 날려 가며 내 허벅지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제 둥지인 양 웅크렸다.

병아리는 본능적으로 온도가 높은 장소를 찾는다고 들었다.

병아리들끼리 뭉치는 원인도 그 때문이라고.

녀석들에게는 볏짚보다 내 허벅지 틈이 더 따뜻했던 모양이다.

"어떤 생물이든 간에 어릴 때가 가장 귀엽네."

병아리에게 한 번 더 [성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데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병아리들의 순수한 움직임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닭이 된다면 아무래도 그런 느낌은 희석된다.

[냉정함]이 말했다.

[성장]을 사용하여 닭으로 만드는 편이 이익을 빨리 챙긴다고.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때가 되면 그러겠지만, 굳이 시간을 앞당기면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네."

알을 낳는 기계라든가.

생존을 위한 먹이라든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된 선택을 내린 것인가?

만약 이 실수가 나비 효과로 돌아와 내 목을 죄어 온다면.

그때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다."

단전에 흘러 들어온 마력을 안정시켰다.

병아리들을 도로 내려놓고는 농장을 점검하고 밖으로 나왔다.

버려진 폐허.

인기척 하나 없는 삭막하고, 적막한 세계.

이 풍경을 바라보면 내가 한 선택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 * *

"오랜만입니다."

"크흠, 오랜만이네."

로드웰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출발 직전에 한 번은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만. 정말로 3주 동안 피해 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피해 다녔다고? 그건 오해야. 나는 몸이 아. 팠. 을. 뿐이라고."

의구심 가득한 은빛 눈동자가 이쪽을 쏘아본다.

단장으로서의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상관없다.

만약 대화를 나눴다면 세 치 혀로 물자를 털어 갔을 녀석이었다.

"회담장에서 저랑도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네요."

"미안하지만 너와는 다른 방을 쓰니까 만날 일은 없을 거다."

"제가 찾아가지 않아도, 로드웰이 먼저 찾아올 겁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회담장에서 벌어질 시나리오를 알고 있다.

자신이 굳이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로드웰이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그림이 눈에 선명했다.

"기분 나쁜 예언이군."

로드웰은 혀를 끌끌 찼다.

그가 입구 앞에 있던 바위에 앉았다.

웃음기를 지우고는 기사단장이란 이름의 어울리는 표정을 지었다.

근엄하고, 냉철한 시선.

통찰력의 로드웰이라 불리던 게임 속 별명과 판박이였다.

"조슈아, 이제부터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할 거다. 너, 뭘 한 거냐?"

무엇을 했느냐는 애매한 질문.

조슈아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간파했다.

마력에 대한 것이었다.

"특별히 한 건 없습니다."

"나는 기사라서 마력을 가늠하는 건 서툰 편이거든. 그런데도 네 마력이 달라진 걸 알 수 있었어. 살짝 변한 게 아니란 뜻이야. 눈에 띌 정도로 변했다는 거지."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5나 10이 오르는 정도는 구분하기 어렵다.

하지만 150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마력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조차도 위압감 따위로 느낄 수 있다.

"마력만 따지자면 루실과 비슷해. 베투스(6등급)란 얘기다. 이런 세상만 아니라면 신동이 나타났다, 괴물 유망주의 탄생이다. 그런 수식들이 뒤따르며 널 찬양하는 소리들이 아카데미 전체에 전해졌겠지."

로드웰은 한차례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갑작스레 강해지면 우러러보는 사람보다는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질투나 시기심으로 이어지는 사람이 더 많아."

"당신도 그런가요?"

거뭇거뭇한 눈가.

파리한 안색.

리더인 그는 싸우지 않더라도 짊어져야 할 게 많은 인간이었다.

"힘이 강해지면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다. 실제로 나보다 루실을 더 의지하는 단원들도 있어. 다행히 지금은 별일 없지만, 언젠가는 생길지도 모르겠지. 나는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싫다. 폭력을 써야 하니까."

조슈아는 그의 기분을 이해한다.

내부의 동료가 뒤통수를 친 경험은 자신에게도 있었고.

그런 일들이 늘 그렇듯.

본인도 모르는 상황에 돌연히 일어나기 마련이다.

"안심하세요. 당신이 걱정하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냐."

"그렇네요."

"그럼 나는 최강의 노비스(9등급)와 친구가 된 셈이군. 아쉬워서 어쩌나, 승급 시험을 치를 수가 없어서. 너에겐 노비스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닐 텐데."

"오히려 좋지 않을까요? 상대가 얕본다면 빈틈이 생길 테고, 그런 것들은 써먹을 수 있으니까요."

로드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탄식했다.

"권력욕이 없는 거냐? 너도 한때는 귀족이었을 텐데. 메이드가 수발을 들어 주고, 밑에 사람들이 준비해 주는 삶이 그립지 않은 거냐?"

"그다지."

로드웰은 경악했다.

사고방식이 귀족의 것이 아니었다.

그 달콤한 생활에 한 번이라도 푹 빠진다면 누구라도 헤어 나올 수 없다.

실제로 그의 가문이 필사적으로 회생하려는 이유 또한.

권력이 주는 안락함을 누렸기 때문이리라.

"너에 대해서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런 소리를 자주 듣네요."

로드웰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였다.

열린 틈 사이로 타니아와 루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출발할 시간이군. 잘 부탁한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41화

회담장은 타워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마을의 여관이었다.

일행은 야영을 해 가며 이틀 동안 전진했고 오늘로써 도착을 목전에 두었다.

"이제 곧 마을이 보일 거다."

말에 올라탄 로드웰이 말했다.

타니아는 이틀이 지난 지금도 말이 신기한지 눈길을 떼지 못했다.

말은 이 시대의 편리한 이동 수단이었다.

또한 재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로드웰이 말을 끌고 온 이유도 후자에 가까웠다.

귀부인이 사치품을 주렁주렁 달면서 권위를 과시하듯이.

그도 무리의 수준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을 골랐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잘 버티는구나."

로드웰이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투정 부리는 일이 없었다.

맛없는 식사를 할 때도.

딱딱한 마룻바닥에 몸을 누울 때도.

어떤 상황이든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어떤 환경이든 적응할 수 있는 몸을 만들라고 배웠거든요."

"누구한테서?"

타니아가 말없이 눈짓으로 조슈아를 가리켰다.

"상황이 끝나면 교수가 되어 보는 건 어떠냐? 잘할 것 같은데."

"그렇게 먼 미래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조슈아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럼 평소 명상을 할 때는 무슨 상상을 하는데?"

"주로 곧 닥칠 일들을 상상합니다."

"재미없네. 야한 상상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나중에 나와 함께 창관에 가 보는 건 어떠냐? 좋은 곳을 알고 있다. 열여덟이라면 그런 데 관심이 많을 것 아니냐? 이미 몇 명과 했을지도 모르겠네."

로드웰의 시답잖은 농담에 타니아가 홍조를 띄웠다.

15살의 소녀는 그런 쪽의 흥미가 있었다.

성년이 되기 이전에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것도.

어릴 적에 부모들에 의하여 혼담이 오고 가는 것도.

그게 탐탁지 않아 소년들이 여러 여자들과 동침하는 것도.

이 세계에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창관은 망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창부들도 괴물이 되었을지 모르죠. 아는 사람을 벤다는 건 아무래도 거북하지 않을까요?"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하네."

로드웰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후로는 몇 명과 했으며 나이 차이는 어느 정도였고, 스타일은 어땠는지.

그런 질문을 할 생각이었다.

"너 고자냐? 그게 아니라면 설마...."

이번에도 그의 질문에 동요하는 것은 타니아였다.

눈에 띄게 상기된 뺨으로 앞에서 걷던 조슈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하는 타입은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합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그래서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알려 드리고 싶지가 않네요."

"어째서?"

"친하지 않으니까요."

로드웰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뒤에 있던 타니아도 덩달아 아쉬워하며 고개를 떨군다.

"크어어어."

수다를 떨던 목소리에 이끌린 듯이 수풀 속에서 좀비가 나타났다.

수는 3마리며 변종은 아니었다.

성인 남성의 시체로 보이는 그것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내달려 온다.

로드웰이 안장에 있던 단검 3자루를 꺼냈다.

그리고는 좀비의 머리를 향해 집어 던졌다.

팍! 팍! 팍!

흡사 권총의 속사.

맹렬한 속도로 내던진 그것은 로드웰의 완력에 힘 입어 좀비의 머리를 관통했다.

땅바닥에 처박힌 단검에는 좀비의 뇌수가 끈적하게 묻어났다.

"미안하지만 회수를 부탁한다. 말에서 내리기가 불편해서."

로드웰이 명령조로 대답했다.

그것이 조금 전 친하지 않다는 대답에 대한 복수란 걸.

조슈아는 알고 있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인간.

누가 그 부하에 그 단장 아니라고 할까 봐 루실과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땅속에 박힌 단검을 회수하여 그에게 돌려주려 내밀었다.

로드웰은 받지 않았다.

그는 장난스러운 눈길로 손잡이에 묻어난 녹색 핏자국을 가리켰다.

"'상관에게 돌려줄 때는 깨끗이'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죄송하지만 전 기사단원 신분으로 동행한 것이 아니며, 이 일이 끝나고도 단원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회담장에 머무는 동안에는 너는 내가 관리하는 무리의 일원이다. 그룹의 일원이라면 엄연히 위계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는 법이지."

조슈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나중에 배로 후회하실지도 모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쪽도 체면이란 게 있는 거다. 이건 양보 못 해."

로드웰의 눈빛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조슈아는 한발 물러섰다.

입고 있던 코트 옷자락에 피를 닦아 내고는 그에게 다시 한번 내밀었다.

"드디어 한번 너를 이겨 본 느낌이야."

"그렇게나 좋으십니까?"

"너처럼 말 안 듣는 부하가 있다고 생각해 봐라. 이해가 될 거다."

로드웰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단검을 돌려받았다.

조슈아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자신은 분명히 경고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고.

3주나 도망쳤다는 사실이 불쌍해서 적당히 뜯어낼 생각이었건만.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마을이 보이는군. 저기가 로젠발트다."

그의 손가락이 언덕 아래에 있는 마을을 가리켰다.

트라이덴처럼 소규모의 사람들이 정착한 작은 마을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타니아가 마을의 특징을 잡아냈다.

여관으로 보이는 건물 굴뚝에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굴뚝과 연결된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린 단숨에 언덕을 내려와 입구 근처까지 다다랐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 앞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 노인이 다가왔다.

너저분한 장화에 똥으로 범벅이 된 작업복.

머리에 쓴 헌팅캡 아래로 연륜이 묻어나는 주름이 자리 잡았다.

마구간지기였다.

로드웰은 등자에 발을 걸고 내려와서는 고삐를 마구간지기에게 넘겼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마구간으로 보이는 건물로 말을 끌고 갔다.

"...세상에."

타니아는 보았다.

마구간의 열린 입구 안쪽으로 보인 네 마리의 말들.

관리가 잘됐는지, 하나같이 우아함과 기품이 넘치고 눈망울이 또렷했다.

"하나도 보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걸, 네 마리나."

그 나이 때 소녀다운 귀여운 목소리로 감탄을 내뱉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여기 있는 동안에는 감정을 숨기는 편이 좋아."

조슈아는 순진무구한 소녀를 향하여 충고하였다.

목소리나, 표정을 살펴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려는 인간이 이곳에 많았다.

마구간지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 노인이 왜 이곳에 있는 것 같아?"

"마을의 생존자가 아닐까요?"

"아니, 저 사람은 생존자가 아니야. 이 마을은 이미 죽었어."

타니아가 당황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여관만 불이 켜졌으니까."

"아!"

타니아는 이해한 듯이 눈을 끔뻑거렸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여관은 외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위한 접대 장소로 쓰였다.

그렇다면 여관이 아닌 다른 건물에도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져야 옳았다.

안타깝게도.

다른 건물에서 그러한 기척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 노인은 어디서 온 거죠?"

"누군가가 데리고 왔을 거야. 아마도 가장 빨리 온 무리겠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말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던 걸까요?"

"아니,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예?"

타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 있던 로드웰 또한 조슈아의 대화에 집중했다.

"왕궁이나, 가문의 사정을 메이드들이 잘 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 힘없는 노인이라면 말동무로는 괜찮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까. 그런 얘기들 중에는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그룹에 관한 것까지 다양할 거야. 그는 그것을 듣고 자신을 데리고 온 인물에게 전해 주겠지."

타니아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로드웰은 온몸이 전율했다.

소년의 식견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뛰어났다.

추측에 불과했던 사실들이 소년의 말을 빌려 확신으로 변하였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던 길에 다투었던 주제에.

재차 기사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해 보는 게 어떨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따라와라.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게서 떨어지지 말고."

로드웰은 상념을 떨쳐 내고 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입구에서 바람을 쐬러 나온 사람들이 로드웰을 보고는 하던 일도 멈추고 일어선다.

그리고는 예의를 갖추며 경례한다.

그가 빼 입은 남색 정장에는 공훈을 세워 얻은 훈장과 리본이 몇 개나 박혀 있었다.

명예의 상징.

이 세상은 아직도 그런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았다.

"만나서 반갑다. 로드웰 단달리온이라고 한다."

절도 넘치는 동작에 로드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손을 내저었다.

계단으로 오르던 중.

고개를 살짝 돌리며 조슈아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다른 학생들이 자신에게 보인 선망의 눈길.

타인의 평가를 필요 이상으로 과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자랑스러우시겠네요."

조슈아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가 보인 웃음의 의미가 노골적이었다.

입구에 맞닥뜨렸던 이들처럼 존경을 보여 보라는 뜻이었다.

가식적인 연기는 어렵지 않으나.

상대방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로드웰은 굳이 공들일 필요도 없이 내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무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로드웰이 투덜거리며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홀에는 중앙을 기준으로 다섯 개의 테이블이 있었다.

개중에 중심에 있던 테이블이 다른 것들보다 눈에 띄게 컸다.

라인 타워 회의실의 것과 맞먹는 크기.

상석처럼 보이는 그 자리는 당연하게도 리더들이 앉는 장소였다.

"늦었군요, 로드웰 경."

"오랜만입니다, 카리우스 경."

먼저 도착한 사내가 막 입장한 로드웰을 반겼다.

카리우스 길란.

태양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턱과 뺨을 잇는 커다란 흉터였다.

난폭함과 폭력으로 그룹을 관리하는 인간답게.

사교적인 성격이 강한 회담장에서도 정장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이 불편해 보이는군요."

"자고로 기사라면 언제 어디서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하는 법. 특히나 어떤 쥐새끼가 있을지 모를 장소에서라면 더더욱 준비를 해야겠죠."

"표현이 조금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나는 내 식구들이 아닌 이상에는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수상쩍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로드웰은 목을 조이고 있던 블라우스의 끈을 몇 개인가 풀어 버렸다.

카리우스의 반응을 미루어 보면.

이 회담은 시작 전부터 난항이 예상되었다.

"호, 타니아 레인우드를 보호하고 있는 거요? 월척을 건진 모양이군."

카리우스가 타니아를 단번에 알아봤다.

아카데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녀를 모르는 경우가 없었다.

"물건을 부르는 것 같은 어법은 고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짢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혹시 내가 한 말에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네, 타니아 양."

타니아는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두 사람이 내뿜는 위압감에 머릿속 사고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뭔가 말해야 한다.

하다 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든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카리우스 경의 얼굴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겠죠."

"하하하, 이 흉터에 겁을 집어먹을 정도라면 괴물과는 어찌 싸운다는 말이오."

카리우스는 시선을 돌려서 로드웰 옆을 지키던 소년에게 향하였다.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끈적한 눈길은 여전했다.

눈동자를 위아래로 몇 번 굴린다.

잿빛 머리에 은빛 눈동자.

하얀 대리석 같은 얼굴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웠다.

신의 축복을 받은 듯한 외모.

하지만 소년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저 외모를 업신여기는 도구로 쓰였다.

허우대만 멀쩡한 얼간이라고.

"이게 누구신가? 팔라리온 가문의 자제분이 아닌가? 아, 이거 실례했군. 몰락했으니 그렇게 부르는 건 옳지 않으려나."

조슈아는 덤덤했다.

로드웰이 주의했던 상황이었고, 자신 또한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노비스를 데리고 오다니. 별빛 기사단에는 쓸 만한 생존자가 그리도 없었던 모양이군요, 로드웰 경."

로드웰은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노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웃음을 참는 듯한.

그러나 그건 소년을 조롱하기 위한 의미는 아니었다.

눈앞의 기사단장조차도 조슈아의 진면목을 한 번에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

"실력이 없다면 인사성이라도 바르면 좋을 텐데. 자네는 허리가 너무 뻣뻣한 것 아닌가?"

로드웰이 침묵하자 카리우스는 신이 난 듯 조슈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조슈아가 한걸음 나섰다.

카리우스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전 로드웰 경에게도 인사를 잘 안하는 편입니다. 그 점은 밑의 사람으로서 고쳐 나가야 할 점이라고 의식하고 있습니다만... 카리우스 경, 당신에게는 영원히 인사할 일이 없을 것 같네요."

"푸하하하하!!"

조슈아의 놀라울 정도로 무정한 반응에.

로드웰은 기어코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42화

로드웰의 웃음과 함께 여관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쾅! 카리우스가 탁자 위로 손뼉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탁자 위에 있던 물잔이 바닥으로 나뒹굴고.

밑에서 떠받치던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다른 생존자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살을 찌르는 듯한 살기.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서야 이 중압감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많지 않았다.

"그 천박한 웃음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죄송합니다. 나쁜 뜻은 없었으니 오해는 하지 마시지요."

카리우스가 이를 갈았다.

그는 눈길을 돌려 사태의 원흉을 노려봤다.

"너 같은 놈이 인사하지 않더라도 나에게 충성하는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것 참 부럽네요."

"비웃는 거냐?"

"알아서 파악하시면 될 일이죠"

"네 녀석이 끝까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카리우스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얹었다.

상황은 불에 기름은 끼얹은 듯 점점 더 심각해졌지만.

지켜보던 이들만 애태울 뿐.

로드웰과 조슈아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서로 누가 나설 건지 정하는 듯한 흐름 속에서 조슈아가 입을 뗐다.

"이 회담장은 중립 구역입니다. 저는 별빛 기사단에 소속된 생존자 신분으로 이곳에 참석했습니다. 저를 벤다는 건 로드웰 경에게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더 나아가서는 태양 기사단의 평판에도 문제를 끼칠 겁니다."

"음음."

로드웰이 만담을 하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참으시죠. 오늘은 절 죽이실 날이 아닙니다."

카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소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힘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면.

정치와 술수가 난무하는 이런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결례를 범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로드웰 경."

카리우스의 사과에 조슈아는 포함되지 않았다.

같은 단장인 로드웰은 상관없지만.

이제 귀족조차 아닌 소년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행동이라고 믿었다.

"저보다도 먼저 사과해야 될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로드웰은 조슈아를 향해 눈짓했다.

"그건 무리인 것 같군요."

"어째서 말이죠."

"기사단장이 일개 평민에게 사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 또한 귀족들이 만들어 낸 부조리이죠."

"날 가르칠 생각은 마십시오."

로드웰도 이쯤에서 한발 물러섰다.

기사단장 중에서 가장 허리가 뻣뻣한 카리우스의 허리를 숙이게 만든 것만으로도.

이번 언쟁은 조슈아의 승리였다.

소년을 곁눈질한다.

그 또한 결과에 만족했는지 표정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의외였다.

조슈아라면 어떻게든 사과를 받아 낼 것이라고 상상했건만.

홀을 지나쳐 카운터로 향하던 와중.

로드웰은 참고 있던 호기심을 못 이겨 그에게 질문했다.

"너,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거냐?"

조슈아는 조금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로드웰을 바라보았다.

단장이란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토라진 얼굴이었다.

"상대는 기사단장입니다만."

"나한테는 콩알 한쪽까지 갈취할 것처럼 굴었잖아."

"그건 상대가 로드웰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있잖아, 내가 정말로 화내면 조금 전 카리우스가 내뿜은 살기 정도로 끝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조슈아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나란히 걷는 사내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다.

불량한 귀족들과 달리 그의 태도는 어딘가 천연덕스러운 면모가 있었다.

나사가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

그러한 행동들은 다른 이들에게 모멸을 받기 쉬웠다.

하지만 누구도 로드웰을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간단한 이유였다.

그가 강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강함을 증명해 왔기 때문이다.

"당신은 제가 양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단지 지금이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기회가 아니다?"

"저 인간을 무너뜨리기 위한 무대로 안성맞춤인 곳이 있습니다."

"오호라~"

로드웰의 미소가 깊어졌다.

무대 위의 배우에 자신도 포함된다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어서 오시지요."

카운터에 도착하자 바텐더가 서 있었다.

그가 테이블 위로 과일즙이 담긴 잔 세 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환영 인사로 드리는 겁니다."

"정말로 마셔도 되나요!

"물론이지, 아가씨."

타니아가 기쁜 얼굴로 잔을 손으로 붙잡았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안에는 노란 은행잎과 같은 색깔의 음료가 잔잔한 파동을 그렸다.

윗사람이 먼저라는 기본적인 예절조차 무시해 가며.

잔을 잡은 손 그대로 입으로 직행했다.

"독을 넣지는 않았겠죠?"

"푸우우!"

조슈아의 질문에 타니아는 입에 물고 있던 주스를 그대로 내뱉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런 타이밍에....

바텐더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감히 그런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겠습니까!"

"모를 일이죠.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무슨 일이든 하니까요."

몇몇 사람은 암살에 대해 착각한다.

그것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암살이란, 때때로 주위의 환경과 상관없이 일어났다.

자신은 게임을 하며 몇 번인가 그렇게 죽었다.

"먼저 먹어 봐라."

"저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은데요?"

"모두에게 탄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

로드웰이 바텐더에게 말했다.

바텐더는 스푼 하나를 꺼내서는 남아 있던 두 잔의 과일즙을 조금씩 떠먹었다.

문제는 없었다.

그가 이상하리만치 긴장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의심해서 미안하군."

"아, 아닙니다."

독이 없음이 밝혀지자 타니아의 아쉬움은 더 강해졌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들이켠 탓에.

잔에 있던 과일즙 절반을 애꿎은 바닥에 버리고 말았다.

"마셔."

조슈아가 자신의 것을 그녀에게 양보했다."

"이러면 선배 것은요?"

"괜찮아. 생각 없었으니까."

타니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잔을 받는다면 이성으로서의 매력은 떨어지고.

아무래도 여동생이란 이미지가 부각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싫다.

하지만 저 과일즙이 바텐더의 손으로 돌아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소녀는 식욕에 사로잡히는 길을 선택했다.

* * *

여관에서 지낼 방은 1인 1실이었다.

여관 주인은 최대한 많은 투숙객을 받는 게 목적이었는지.

방의 크기는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협소했다.

타니아는 입고 있던 정복의 외투를 벗어 던지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왜, 다들 홀로 나와 있는지 알겠네."

답답하다.

잠들 생각이 아니라면 되도록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남들과 같은 이유로 방을 떠났다.

올라왔던 계단에 몸을 싣고 아래로 내려간다.

조슈아와 로드웰은 보이지 않았다.

짐을 아직 풀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 여관의 테라스로 나왔다.

"역시 네가 맞았구나. 오랜만이네, 타니아."

테라스에는 세 명이 휴식을 취하던 도중이었다.

모두 아는 인물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셋은 아카데미의 엘리트 코스 수업을 받아 왔다.

인사를 건넨 인물의 이름은 아델라 그레이스.

자신보다 3학년 선배인 그녀는 올해 6학년으로서 나이는 19살에 해당했다.

조금은 시샘이 드는 또렷한 이목구비

푸른색 머리를 하나로 뭉쳐 땋아 등 뒤로 흘려 놓았고.

어딘가 성숙해 보이는 몸은 연상이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안녕하세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다시 만나서 기뻐."

"저도 선배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의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더라도.

타니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같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더라도 모두 친한 건 아니듯이.

소녀에게도 동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함께 수업을 듣던 이들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요."

타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겪은 일들을 말 몇 마디로 정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지옥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직 지옥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럼 화제를 바꿔서, 아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란 모호한 표현에도.

타니아는 어째선지 그것이 가리키는 게 조슈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로드웰 경을 만나기 이전부터 함께 생존한 동료예요."

"...동료?"

"네."

"음, 상상이 안 가네. 그야, 노비스잖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아닌데."

타니아는 내심 불쾌했으나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신조차 그에게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몇 시간이지만....

의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대단해요."

"음?"

아델라는 당황했다.

눈앞의 소녀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다.

어딘가 천진난만한 행동과 달리.

상대를 평가할 때는 진실된 눈으로 바라본다.

그건 레인우드 가문의 혈통인지, 언니인 루실도 마찬가지였다.

"...뭐, 확실히."

조금 전 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태양 기사단장의 분노가 방 안을 짓누를 때.

단 두 사람만이 그의 분노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였다.

"생각이 없는 거겠지. 생각을 못 하면 두려운 게 없는 법이니까."

테라스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레오널드 콘라드.

견습 기사들 가운데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그의 나이 열여덟에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었다.

"미안하지만, 선배는 레오 오빠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해."

그와는 어릴 적부터 부모들의 손에 이끌려 안면을 튼 사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이전부터 그와는 호칭 정리가 끝났다.

오빠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익숙함과 상관없이 그의 조금 전 말은 철회해야 한다.

"똑똑하다고?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실력이 길고 짧은 건 맞붙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머리로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선배에게 실례야."

"내가 실기에 비해 필기가 약하다는 걸 지적할 모양인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비스 따위에게 질 것 같냐."

레오는 귀족이었다.

글을 읽을 수 있고,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서는 중간에 들 만한 지식을 지닌 셈이었다.

그의 오만한 눈동자가 인정하기 어렵다는 듯 이글거린다.

"삼중 술식을 30초 만에 풀었다고!"

타니아가 소리쳤다.

레오는 마법에 문외한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

하지만 아델라는 달랐다.

마법사인 그녀는 타니아가 내뱉은 소리를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지?"

"장난이 아니에요! 진짜예요."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듯한 울먹이는 목소리.

처음에 내뱉었던 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한 고집처럼 느껴졌다.

아델라는 당황했다.

소녀가 감정이 벅찰 정도로 조슈아를 변호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타니아는 연구소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입 모양까지 완성시키며 목에 힘을 주기만 하면 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때렸다.

"아야!"

"적당히 해라."

타니아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여느 때와 달리 고조되어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제 동료가 쓸데없는 소리를."

조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저녁 시간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이봐!"

레오가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녀석이 낙제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여기 있는 누구도 널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조슈아는 고개를 돌리며 그에게 [분석]을 사용했다.

[레오널드 콘라드]

현재 LV 32 (견습 기사)

7등급 미티오스.

잠재 능력 - A++

고유 스킬 – 검기. 반사 신경 강화. 초인. 오러 감지.

조슈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큰소리칠 만한 성장은 아니었다.

이 세계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다.

[네임드]라면, 개중에서도 플레이어블 캐릭터라면

적어도 지금의 레벨보다 배는 올려야 했다.

'내가 레오널드로 플레이했을 때는 이때쯤 70을 넘겼을 텐데.'

짜증이 치솟는다.

이대로라면 반년도 못 버티고 그는 죽는다.

그건 바라던 상황이 아니었다.

조슈아는 한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했을 텐데."

"뭐?"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레오는 몸이 얼어붙었다.

일순간.

그가 자신을 꿰뚫어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43화

회담장에 도착하고서 첫 식사가 시작되었다.

에피타이저부터 시작되어 후식으로 끝나는 코스 요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식사였다.

귀족들은 여전히 사회적인 위신을 지키고 싶어 했다.

한심한 꼴이었다.

예전의 관습을 무리해서 지켜 봐야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상은 바뀌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행동을 답습하려 한다면.

머지않아 이곳의 어느 집단은 파멸할 것이다.

"선배."

옆에 앉은 타니아가 말했다.

"응?"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다 쓰러져 가는 여관에서 먹는 식사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느낌이라서."

"그렇네요. 분명 식사를 준비한 곳이 달빛 기사단이었죠. 그쪽은 물자가 풍부한 모양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자신은 침묵했다.

달빛 기사단의 사정은 넉넉지 않았다.

광산의 본부를 아지트로 삼은 그들은 오롯이 사냥과 탐색만으로 식량을 구했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나 축산업은 꿈에도 못 꾼다.

그런 면에서 별빛 기사단은 사정이 좋았다.

마을들의 중심에 세워진 라인 타워는 주변 토양의 품질이 최상이었다.

"두 사람 참 사이가 좋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델라가 끼어들었다.

이 테이블에는 자신과 타니아를 제외하고도 두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아델라 그레이스.

또 한 명은 조금 전 테라스에서 인사를 나누지 못한.

'세레나'라는 이름의 여학생이었다.

"아까 제대로 인사 못 했지. 나는 아델라 그레이스. 6학년이고, 마법 수습생이야. 현재는 달빛 기사단 밑에서 생활하고 있어."

"조슈아입니다."

"끝이야?"

"뭔가 실수라도?"

"자질구레한 설명은 하지 않을 수 있다 치더라도, 성 정도는 말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아델라는 자신의 라스트 네임.

팔라리온을 소개하지 않은 것에 놀란 눈치였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치더라도.

가문에 자부심을 지니지 않는 것은 이상한 모양이겠지.

"그 이름에 미련은 없어서."

"귀족으로서 부활을 꿈꾸려면 그래도 기반이 있는 편으로 시작하는 게 좋지 않아?"

"전 귀족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만."

"뭐, 정말?'

"생존을 위한 측면에서 보자면 신분은 아무래도 후순위라서요. 평민이 더 좋을 때도 많습니다."

"...잘 모르겠어."

아델라는 마치 동물원의 사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그녀가 앉고 있던 의자를 몇 칸이나 앞으로 당겨 왔다.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이 옆에 있던 소녀의 것이라는 걸 의식할 겨를도 없이.

아델라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너, 정말로 삼중 술식을 30초 만에 풀었어?"

"예."

"그럼 말이지, 이것도 풀 수 있어?"

아델라가 품속에 숨겨 둔 노트와 펜을 꺼냈다.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대략 30초쯤 흘렀을 때.

그녀의 필기가 멈추고 술식을 빼곡하게 채운 종이를 자신에게 건넸다.

나는 종이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제가 이걸 풀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너의 그 허무맹랑한 무용담을 믿는 사람이 한 명 늘겠지. 자의식 과잉이라며 욕먹을 것 같지만, 나랑 친해져서 너한테 손해는 아닐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델라 그레이스 또한 네임드 캐릭터였다.

그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향후에 도움이 되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였다.

[영리함]이 계산을 시작했고, 값을 도출하는 데 3초면 충분했다.

연구소의 술식과는 달랐다.

우선 삼중 술식이 아닌 이중 술식이라는 점.

또 하나는 공통 마법이 아니라 원소 계열이라는 점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자신을 시험해 볼 생각으로 이 문제를 내놓았다.

"물을 얼리고, 그것을 날린다는 명령을 집어넣었네요. 이대로만 된다면 얼음 화살이 되겠죠."

아델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침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겨우 제정신을 되찾은 그녀가 입 밖으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었다.

"...너 물 속성이었어?"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정답을 맞춘 거야? 자기 속성이 아니면 공부할 필요도 없잖아."

어째 이런 상황을 예전에도 한번 겪은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겸사겸사 배웠습니다."

"말도 안 돼."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선배는 엄청 총명해요."

타니아가 끼어들며 제 일인 양 흥분했다.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돌려준다.

종이를 돌려받는 아델라의 손길이 떨리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 내 마법적 가치관이 흔들리는 느낌이야."

그녀가 양팔을 베개 삼아 얼굴을 파묻었다.

상당히 분한 모양인지 탁자 아래로 놓인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앉아 있던 다른 한 명에게 눈길을 주었다.

정리가 되지 않은 부스스한 금발 머리.

피로감이 짓누른 것 같은 졸린 눈에 선홍빛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마치 '안녕'이라는 인사를 대신하려는 듯이.

"그러고 보니 세레나 선배, 아까부터 왜 한마디도 하지 않으세요?"

타니아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는 질문했다.

쓰러져 있던 아델라가 벌떡 일어났다.

"아... 그건 말이지."

세레나가 손짓한다.

본인이 직접 이유를 말해 주고 싶어 보였다.

펜과 노트 위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미안, 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실어증.

그녀는 이번에도 목소리를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 * *

로드웰은 자신의 방에 조슈아와 타니아를 불러들였다.

방이 비좁은 탓에

두 사람은 앉을 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로드웰이 걸터앉아 있던 침대의 남은 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앉아라."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단장님이 쓰실 침대 위에 몸을 눕겠어요."

쿵!

타니아는 사양했지만 조슈아는 거부감 없이 앉았다.

"...미친놈이냐?"

로드웰이 진저리를 치며 내뱉었다.

귀족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교양을 어기고

원색적인 욕설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앉으라고 말한 건 로드웰 경입니다만."

"예의상 물어본 거야, 예의상! 넌 꼭 자기가 편하려고 할 때만 눈치 없는 척하더라."

"그럼 다음부터는 솔직하게 말하세요."

로드웰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식사는 맛있게 했어?"

"너무 맛있었어요. 이런 식사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르겠어요."

타니아는 두 손을 뺨에 맞대며 신이 난 듯 춤을 췄다.

"조슈아, 넌 반응이 안 좋네."

"오늘 저녁을 양분했다면 3일은 거뜬히 버텼을 겁니다."

"너는 남이 차려 주는 식사에도 투정을 부리는 거냐?"

"사실을 얘기하는 거죠."

"그 정도면 병이다, 병! 너는 꼭 이 상황을 위해서 태어난 인간 같네."

로드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꺼낸 얘기조차.

조슈아가 있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됐다. 본론만 얘기할게. 이따가 9시부터 회의가 시작될 거다. 너희가 발언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만. 혹시 기회가 오더라도 대충 얼버무리거나, 답하지 않으면 될 거다."

"그럴게요."

"조슈아, 넌 말할 거지?"

로드웰이 의심 섞은 눈초리로 소년을 바라봤다.

"그럴 상황이 된다면 하겠죠."

"부탁인데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말해라."

"걱정하지 마세요. 선은 지키겠습니다."

"난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무섭다."

일행은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각자의 위치를 찾아갔다.

이번 회담에는 총 다섯 그룹이 참여했다.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기사단 셋과 상인 길드 하나, 그리고 자경단이었다.

마법 학회는 포함되지 않았다.

교수들이 생존을 못 한 것은 아니나.

기사단과 학회는 반목하며 서로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

조슈아는 로드웰이 앉은 자리 뒤편에 섰다.

정면으로는 태양 기사단이 앉아 있었다.

카리우스와 레오널드는 소년을 향하여 원한 섞인 시선을 보냈다.

"어지간히도 미움을 산 모양이네."

앉아 있던 로드웰이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사회는 저 달빛 기사단 단장 데릭이 맡겠습니다."

푸른 정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은 사내가 입을 열며 회의가 시작되었다.

몇 가지 안건이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아카데미 외부와의 소통은 되었는가?

괴물의 규모와 원인은 확인되었는가?

곧 다가올 겨울을 어떻게 버텨 나갈 생각인가?

두 시간이 흘렀다.

회의는 어떠한 진전이나 성과도 없이 현상 그대로를 유지했다.

막다른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서 있던 학생들은 다리에 쥐라도 난 모양인지 자세를 바꿔 가며 고통을 참아 냈다.

'성공적으로 끝나는 건 물 건너간 모양이네.'

회담 이벤트는 수차례 겪어 왔지만 단 한 번도 좋게 넘어간 적이 없었다.

여기 모인 그룹은 저마다 규모가 달랐다.

저울을 평평하게 맞추려면 어느 한쪽이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양보해야 한다.

누구도 바라지 않는 상황.

이기심만으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룹의 존망이 달려 있기에 몇 번이고 고민하고, 신중하게 검토한다.

하지만 도돌이표라는 점은 똑같고.

무엇 하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서 회의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은 첫날입니다. 모든 걸 당장 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죠. 잠깐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논점에서 벗어난 얘기를 해 보는 게 어떨까요?"

"찬성합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게 낫겠군요."

데릭은 주위 반응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 괴물들의 이름 말입니다만, 언제까지 괴물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용이나, 트롤 같은 것도 같은 괴물이지만 이름이란 게 있잖습니까? 다른 이름이 필요합니다."

"이름을 짓는 문제라면 우리보다는 젊은이들에게 맡겨 보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군요, 마르텔 길드장. 혹시 이것에 관련하여 의견을 내 보일 사람은 있는가?"

그때까지 한마디도 못 하고 서 있기만 하던 학생들이 눈을 번뜩였다.

옆에 온 동료와 함께 의논을 시작한다.

타니아도 어느 순간 조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잘만 말하면 나중에 학술지의 이름이 올라오는 것 아닐까요?"

"그럴지도."

"선배는 생각한 이름이 있어요?"

"있어."

"그럼 저는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게요."

타니아는 싱긋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누구든 자유롭게 생각을 말해 봐라."

데릭의 말과 함께 다양한 이름들이 거론되었다.

시체 인형, 크리쳐, 망자.

아직까지 선택받은 단어가 없던 와중에.

조슈아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왔다.

"그쪽은?"

데릭이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슈아입니다."

"아아."

데릭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좀비라는 이름이 어떨까 합니다."

"좀비라, 생소한 단어인데 그 단어의 기원을 물어봐도 괜찮겠나?"

"옛 주술사들이 죽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들 목적으로 의식을 치렀고, 그 결과 성공한 인간을 그런 식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일화이군. 그럼 자네는 이 사태가 그런 주술사들의 모략이라고 보는가?"

"글쎄요, 거기까지는."

데릭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이름에만 집중하여 그것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지 못한 반면.

눈앞의 소년만은 달랐다.

이후 투표가 시작되고 5명 중의 2표로 괴물의 이름은 좀비로 낙점되었다.

로드웰과 데릭이었다.

다른 리더들은 각자 자신의 부하들에게 표를 던졌다.

"좀비라는 표현은 기껏해야 여기 있는 다섯 그룹 사이에서 불릴 뿐이지만, 모쪼록 그렇게 불릴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중요 안건은 아니었으나.

이 회담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결실을 맺었다.

데릭은 계속해서 회담을 진행하였다.

"앞서 언급했던 세 안건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하기로 하고 우선 이미 통과된 안건에 대해서 다시 짚고 넘어가죠."

"통과된 안건?"

로드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로드웰 경. 사실은 당신이 도착하기 이전에 소회의가 있었습니다. 카리우스 경이 제안한 것입니다만. 그게 만장일치로 통과되어서 말이죠. 당신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하더라도 막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기분이 굉장히 나쁜데요."

"하하,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대신 다음 회의에 조그마한 특혜라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후, 일단 그 통과된 안건이란 게 정확히 무슨 내용입니까?"

"이걸 보시죠."

데릭이 미리 작성한 용지를 로드웰에게 건네줬다.

로드웰이 그것을 읽어 가던 도중.

콱! 의자에 있던 팔걸이가 그의 완력에 의하여 산산이 부숴졌다.

쥐었던 손을 도로 펼치자 나무 파편들이 바닥을 향해 우르르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란 눈치였다.

조슈아만을 제외하고서.

"로, 로드웰 경?"

"내가 이 내용을 인정 못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면 우리 넷과의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죠. 별빛 기사단의 평판도 함께 말이요."

안건을 제안한 카리우스가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홀에 있었던 말을 그대로 되갚아준 것이다.

그러나 로드웰은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이 안건의 내용을 확인하고서.

뼛속 깊이 찔러 오는 듯한 감정.

두려움이 가리키는 정체는 조슈아였다.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소년은 웃고 있었다.

44화

통과된 안건의 내용은 이렇다.

각 그룹이 동행한 생존자들 간의 대결을 펼친다.

명목상으론 회담장에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한다.

회담장에서 벌어지는 유망주들 간의 대결은 쭉 있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어떤 그룹이 협력할 가치가 있는지.

어쩌면 그저 구경거리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귀족은 자극적인 유희를 원한다.

창관에 방문하거나, 매음굴에 방문하듯이 중독적인 일상에 사로잡힌 놈들은.

이런 세상이 되고도.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놀잇감을 찾아낸다.

로드웰은 다른 리더들을 추궁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카리우스 경, 당신은 정말로 이 방법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물론이죠."

"다른 분들도 동의한 게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로드웰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고 하나 하겠습니다."

"경고?"

"이 안건, 파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입니다."

"하하, 그건 로드웰 경에게만 이로운 일이 아닙니까? 그야 노비스를 데리고 왔으니 말이죠."

카리우스가 비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홀과 합쳐져 유난히 크게 들렸다.

로드웰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이곳에 앉은 모두가 조슈아의 꼭두각시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의 비곗덩어리는 소년의 잠재력을 눈곱만큼도 알지 못한다.

들여다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들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군.'

원인 모를 이유로 정체불명의 괴물이 나타났다.

그 규모와 특징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회담의 안건은 괴물에 대한 것이 첫 번째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기사단 간에 힘겨루기를 우선했다.

한심한 인간들.

그들이 이번 결투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하나는 확실했다.

'모두 자기들이 데려온 유망주들이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바보 같은 놈들. 진짜 괴물은 따로 있는데.'

여기 있는 학생 누구와 승부하더라도 조슈아가 이긴다.

그의 능력은 학생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후, 마음대로 하시죠. 전 분명히 경고했으니까요."

첫날 회담이 마무리되었다.

분위기는 별빛 기사단을 제외한다면 그럭저럭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

"조슈아."

로드웰은 소년을 찾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에서 잠깐 얘기 좀 하자."

두 사람은 조용히 홀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서 침대에 앉고.

기지개를 켠 다음에야 로드웰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미안하다."

"어떤 게 말입니까?"

"동행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조금 전 안건에 적힌 내용, 생존자들끼리 싸우게 할 생각인 것 같더라."

"그렇군요."

"어디까지가 네 예상이었던 거냐?"

"일단 여기까지는 제 계획대로입니다."

"계획?"

로드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남몰래 안건을 통과시키려고 했을 때. 우린 아직 로젠발트에 도착하기 이전이었다고. 무슨 첩자라도 심어 둔 거냐? 아니면 마법인가?"

"어느 쪽도 아니죠. 그게 어렵다는 건, 로드웰 경이 더 잘 아실 거고요."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보통이 있더라도 정보가 오고 갈 만한 상황이 전혀 없었다.

우리 셋은 늘 함께였다.

잠깐씩 떨어진 적이 있더라도 기껏해야 몇 분이었다.

마법도 아니었다.

통신 마법은 공통 마법 중에서도 고난도에 속하며, 거리가 멀수록 힘들다.

소년의 기량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릿속이 깜깜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이 문제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았다.

다른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소년과 있었던 사소한 마찰들.

그때 해소하지 못한 응어리진 감정들이 뒤늦게 떠올랐다.

선수를 쳐야 한다.

로드웰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조슈아."

"듣고 있습니다."

"추가된 임무에 대한 보상 말인데, 식량 열흘 치로 합의 보는 건 어떠냐?"

"그걸로는 한참 부족하죠."

"역시 안 되는 건가..."

로드웰이 머리를 감쌌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그가 만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 순간을 기다렸던 인간처럼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서두르지 말죠."

"응?"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상은 그 뒤에 논의해도 괜찮겠죠."

"뭐, 그렇긴 하다만."

"기사단의 평판과 직결된 문제이니 저도 모른 척하지는 않겠습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 * *

조슈아는 눈을 떴다.

창문에 달린 커튼을 옆으로 젖히자 아직 새벽이었다.

검게 칠해진 땅을 드문드문 세워 놓은 횃불 기둥으로 밝게 물들였다.

[영리함]은 도로 잠드는 것을 추천했다.

며칠에 걸친 야영으로 인하여 몸의 컨디션이 나빠진 것을 이유로 들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무리야."

휴식을 취할 때도 몸에서 긴장감을 완전히 떼어 놓지 못했다.

언제나 예민했다.

그건 습관처럼 몸에 이미 배어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에선 주인 모를 코골이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서둘러 아래로 내려오자 홀은 이미 정리가 되어 깔끔해진 상태였다.

밖으로 나왔다.

새벽에 불어오는 바람은 축축하고 끈적거려서 기분이 나빴다.

곧 겨울이 온다.

그런 느낌을 실감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다.

"...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입구 근처에 다다르자 한 중년이 불 밑에서 잠들어 있던 것을 보았다.

추위를 견디기엔 겉옷이 너무 얇다고 생각했다.

그가 조는 와중에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그의 무기인 창을 집어 들었다.

그때까지도 중년은 꿈속에 빠져서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크아아악!"

불빛에 이끌린 좀비 한 마리가 내달려 왔다.

얼굴이 흉터투성이인 끔찍한 놈이었다.

변종은 아니었다.

[냉정함]이 놈의 다리가 절뚝거리는 것을 간파하며 배후를 노리라 조언한다.

재빨리 등 뒤로 돌아갔다.

왼발이 불편한 좀비는 몸을 돌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촤악! 들고 있던 창으로 목덜미를 꿰뚫었다.

손잡이에 힘을 더하며 내려치자 좀비의 목이 몸뚱이로부터 뜯겨 나갔다.

분리된 목과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꿈틀거렸다.

"음... 어, 어!"

모든 게 정리된 다음에야 중년은 일어났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표정으로 앉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이, 이게 무슨."

"어디 소속입니까?"

중년의 탁한 눈동자가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였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당겨 다문다.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태양 기사단."

"카리우스 경에게는 보초가 일을 소홀히 했다고 전하겠습니다."

"자, 잠깐만 기다려 줘!"

중년은 난색을 표하더니 돌아가려던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 멈춰 세웠다.

"부탁하네, 젊은이.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게. 이 일을 카리우스 경이 안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야!"

"제가 이 시간에 여기 오지 않았다면 좀비가 당신을 물었을 거고, 좀비 두 마리가 안으로 침입했겠죠. 그리된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지 생각해 보셨나요?"

"미안하네, 정말로."

중년은 거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외관상으론 불혹을 갓 넘겼을까?

정리되지 않은 수염 탓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쯤 되어 보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어제 6시부터였네."

나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12시간에 가까운 노동은 괴롭다.

하물며 장비도 소홀하며, 환경도 엉망이고, 기력마저 없는 사람이 버틸 수 있을까?

카리우스 길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며 분노를 삭였다.

게임을 플레이하던 당시에도 짜증나는 상대였지만, 직접 만나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다음 보초는 언제 옵니까?"

"6시 이전에는 도착하겠지."

"그럼 그때까지 이곳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아, 아닐세. 내 목숨을 구해 준 은혜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괜찮으니까 자네는 여관으로 돌아가서 쉬게."

"됐습니다. 애초부터 잠이 들지 못해서 이쪽으로 산책을 나온 거니까요."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난처한 기색을 보이던 중년은 포기한 모양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횃불 아래로 다리를 모아 웅크렸다.

입던 외투를 벗어 주고 싶을 정도로 동정심이 들었다.

하나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흘렀다.

교대하러 온 보초는 나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며 당황하다가.

중년의 설명을 듣고는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서 연신 감사의 인사가 들려왔다.

산책이 끝날 때쯤에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핫! 핫!"

좀비가 소리를 듣고서 찾아오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힘찬 기합 소리.

그 소리는 여관 뒤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레오널드가 무언가에 쫓기듯이 목검을 휘둘렀다.

동틀 무렵부터 수행이라.

성실하다고 칭찬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검을 들고 있는 내내 초조한 낯빛이었다.

레오널드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검술을 좋아했다.

그건 세상이 이 꼴이 되고도 변하지 않은 자세였다.

지금은 달라졌다.

마치 흥미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스스로가 검을 휘두르는 것에 아무런 흥미조차 못 느끼며 방황하는 눈빛이었다.

"음!"

그의 찌르기가 이쪽을 향한다.

소년은 지붕 밑에서 구경하던 자신을 발견하곤 숨을 삼켰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냐?"

"5분도 안 됐어."

"그렇군."

소년은 시선을 피하며 검을 아래로 떨구었다.

"널 의식하고 훈련하고 있었던 건 아니야. 오늘 결투에는 아델라나, 세레나도 나오니까. 그쪽을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

내 능청스러운 대답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다시 돌렸다.

"무섭지도 않은 거냐?"

"뭘 무서워해야 하지?"

"결투를 하면 어딘가 다칠지도 몰라. 포션도, 그걸 치료할 의사도 찾기 힘든 이 세상에선 아주 조그마한 부상이라도 치명적이란 말이다."

"그건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가?"

맹금류 같던 눈빛이 파르르 떨린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쥐고 있던 목검을 손에서 미끄러뜨렸다.

그는 실수가 아닌 척하며 그것을 도로 집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노비스인 너를 왜 걱정하겠어. 나는 단지 살아 있는 인간을 괴롭히는 짓거리는 하기 싫을 뿐이야."

"산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나?"

"없다. 그러는 넌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꽤나 죽였다. 내 손에 묻힌 피를 일일이 따질 수 없을 정도야. 만 명은 족히 넘길지도.'

레오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지나치군, 노비스. 나와 농담을 하고 싶다는 뜻인가?"

"마음대로 생각해라, 미티오스(7등급)."

"내 이름은 레오널드 콘라드다."

"내 이름도 노비스는 아니지."

레오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러다가 벌어진 틈새로 미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긴장감이 좀 풀어진 모양이다.

"너는 낙제생 주제에 매우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군."

"그런 말을 종종 듣지."

소년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물어보고 싶지만.

그것을 확인받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나 기사가 목표인 소년은 스스로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뭐든지."

"나는 정말로 성장하지 않았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놀랍게도 소년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계속 구경할 생각인 거냐?"

"방해가 된다면 사라져 줄 수도 있는데."

"마음대로 해라. 내 검을 살펴본 것 정도로 날 이기지는 못할 테니까."

그의 허락을 얻은 다음에는 연습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소년의 검술은 유려했다.

한 폭의 그림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탄탄한 기본기.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이 생기더니 끝에 이르러선 눈에 띄게 둔해졌다.

나는 이유를 깨달았다.

소년은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등 쪽의 옷맵시를 반복하여 고쳐 입었다.

"...그런 거였나."

그의 등은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 * *

오늘은 놀랍게도 쾌청한 날씨였다.

주변을 뒤덮었던 안개가 사라지고, 따가운 가을볕이 지상을 적셨다.

모두들 조금 들뜬 모양이었다.

몇몇은 콧노래까지 불러 가며 이 날씨가 영원토록 계속되길 바란다며 노래를 불렀다.

그 무리에는 타니아도 있었다.

"흥분한 것도 좋지만. 지금부터 대진표를 발표하겠다."

데릭이 찬물을 끼얹는 발표를 하였다.

떠들던 이들은 그가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침통해하였다.

"대진은 공평하게 각 리더들이 제비뽑기를 하여 결정했다. 여기에 한 가지 룰을 추가하였는데, 같은 그룹에 소속된 생존자와는 만나지 않도록 했다."

데릭의 설명에 타니아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원은 10명. 각각 한 번씩만 싸우는 규칙이다. 그럼 지금부터 서로의 상대를 불러 주도록 하지."

한 사람씩 이름이 호명된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은 일곱 번째였다.

상대는 레오널드였다.

그가 이쪽을 곁눈질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카리우스가 소년을 포함한 생존자를 데리고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금 수상쩍은 느낌이 없는 건 아니다만."

뒤쪽에서 로드웰이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제비뽑기에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너라면 괜찮을 거라 믿고서 저들이 하던 대로 놔두었다."

"잘하셨어요."

"뭐,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기쁘네요. 저에 대해서 조금씩 파악하실 수 있다는 게."

"어른을 놀리지 마라, 애송아."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현실의 강민혁은 올해로 30살이었고, 겨울이 지난다면 31살이었다.

그와는 그다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로드웰은 자신을 단지 뛰어나고, 간사한 소년이라고 평가했다.

"열심히 해 봐라. 이왕 이리된 거 결과만 좋다면, 나도 네가 무엇을 원하든 납득할 생각이야. 특히 저 녀석의 면상을 무너뜨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로드웰이 눈빛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카리우스였다.

그가 조용히 웃으며 생존자들의 어깨를 주물렀다.

격려가 아니라고 짐작했다.

얘기를 듣는 이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으니까.

"저도 그 생각에는 공감합니다. 저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이, 추락하는 꼴이 보고 싶네요."

45화

모든 대결은 기사단장들의 입회하에 이루어졌다.

조슈아와 레오의 대결은 네 번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형편없군."

각 그룹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대결은 번번이 어이없게 끝났다.

진검 승부라는 것이 발표되자 선수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커졌다.

상인회와 자경단 쪽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수장에게 달려가서 승산이 없다며 토로했다.

몇 분간 말씨름을 나눈 끝에 그들은 패색이 짙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렇게 시작된 첫 번째 경기.

자경단의 소년은 검을 버리고 백기를 들었다.

무언가를 겨뤄 볼 겨를도 없이 승패가 결정되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기사단끼리의 싸움뿐이겠군요."

승패의 판정을 주관하던 데릭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네 번째 경기에 희망을 걸었다.

차례가 도래한 소년들은 누군가가 그어 놓은 하얀 선 위로 올라갔다.

"지금이라도 포기해."

레오널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집중해라. 그렇지 않으면 꼴사납게 쓰러지는 건 네가 될 거야."

"...멍청한 녀석."

두 사람은 자세를 잡았다.

레오널드가 기사도에 입각한 자세로 검을 들어 올려 경례하였다.

조슈아는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지켜보던 관중들은 두 사람의 무기부터 차이가 심하다며 떠들었다.

"저 롱소드 좀 봐."

"멋지네. 과연, 콘라드 가문의 자제야."

레오의 검은 재료로 쓰인 광석의 빛깔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처럼 은은한 광택을 내뿜었다.

무기에 관심 없는 사람조차도 흠뻑 빠져 버릴 듯한 아름다운 청록색이다.

칼날은 잘 다듬어졌고, 표면은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그것은 소년의 긍지였다.

검을 쥘 때면 그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전장에 다가섰다.

이 결투를 대하는 마음가짐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건 상대가 귀족이 아닌 낙제생에 불과한 소년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저걸 봐. 저 소년의 방망이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네."

"도대체 어떻게 써 왔던 거야?"

조슈아의 방망이에는 핏자국과 끈끈한 타액이 뒤엉켰다.

척 보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듯한.

보는 이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피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그것은 무기로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곳곳이 흠집과 균열로 일그러졌다.

소년의 검과 대비되어.

그의 방망이는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몇 마리를 죽여야 저렇게 되는 거지."

데릭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부분이 조슈아의 무기를 흉보기 바쁠 때.

그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다.

방망이에 흔적이 저토록 선명하게 남으려면 한두 마리의 좀비론 어림없었다.

적어도 열 마리.

어쩌면 그 이상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만약 저 방망이가 주운 것이 아닌 써 왔던 물건이라면.

그의 실전 경험은 다른 학생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

"상대가 패배를 인정하거나, 내가 막을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면 된다. 그럼 시작!"

데릭의 신호와 함께 레오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잔뜩 힘을 모은 다리로 땅을 박차서는 조슈아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재빨리 상대의 시선을 확인한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방향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든 방망이는 여전히 아래쪽을 향한 채로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레오는 확신했다.

육체적인 레벨은 자신이 한 수 위라고.

움직임을 읽더라도 그것에 반응 못 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는 처음에 경고했던 대로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크윽!"

강렬한 파쇄음과 함께 손끝에 심한 충격이 전해졌다.

쥐가 뻗친 듯한 손길은 검 자루를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곤욕스러웠다.

뭐였지?

그 물음은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었다.

[방패]였다.

햇살이 한곳에 집중된 듯한.

성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연 모양의 방패.

그것이 껍질처럼 조슈아의 한쪽 면을 완전히 에워쌌다.

"마법사니까, 이런 것도 할 줄 안다."

레오는 거리를 벌렸다.

소년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기사는 마법을 배우지 않지만, 그것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웠다.

그는 교관이 자신에게 알려 준 가르침을 되새겼다.

'아카데미 안에서 네 공격에 반응하여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거다. 그건 이곳을 졸업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거짓말쟁이!

여기 눈앞에 버젓이 있지 않은가.

움직임에 반응하여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아카데미 학생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당장에 떠오르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방패를 부숴 버리는 것.

두 번째는 방패가 지키지 못하는 사각으로 파고드는 것.

레오는 갑작스레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을 했다면.

생각한 대로 행동하면 된다.

그건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이치였다.

그런데 발목이 납덩어리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어째서?

소년은 검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고서 이유를 알아차렸다.

떨고 있었다.

과거에 딱 한 번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해 보았다.

영지의 삼림에 홀로 들어갔다가 다 큰 곰과 마주하였을 때였다.

뒤따라온 호위 기사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상황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도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학년 1위를 만나며 실력의 차이를 느꼈을 때도.

이토록 등골이 싸늘하지는 않았다.

레오는 공포감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를 분노의 양식으로 삼았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다시금 움직였다.

떠오른 생각들은 모조리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처음엔 [방패]를 부수는 것.

속도를 살려서 상하좌우 가릴 것 없이 일격을 퍼부었다.

어느 순간 소년은 검을 휘두르기를 멈추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방패]는 멀쩡했다.

정확히는 흠집이 생겨도 부서진 부분이 삽시간에 복구되었다.

경이로울 정도의 마력 컨트롤.

어디선가 탄성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하이 톤에 꿀을 덧칠한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

아델라였다.

그녀의 감탄에 호응하듯 다른 이들도 눈앞의 광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한다.

레오는 귀를 닫았다.

객석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낯선 상황.

초조함이 호흡이 거칠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방패 뒤에 숨어만 있을 생각이냐! 공격이란 걸 해 보시지."

자신의 도발에도 조슈아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처음의 계획을 고집하겠다는 의미였는지

레오는 그가 방패로 막지 못하는 등 뒤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뛰었다.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듯이 돌아가자.

조슈아도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펼쳐진 [방패] 또한 주인을 따라서 방향을 바꿨다.

당황하지 않고서 검을 뻗었다.

검은 방패의 끄트머리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충격에 상체가 뒤로 크게 젖혀지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밀려났다.

밀려난 곳에는 운이 좋게도 큰 바위가 등에 닿았다.

이 바위가 아니었다면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뻔하였다.

"공격을 해 보라고 했지. 너, 방패에 맞아 본 적은 있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조슈아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아까 전의 질문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훈련 때 몇 번."

"그거랑 많이 다르겠지만, 일단 한번 맞아 봐라."

조슈아가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거인과 같은 방패가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앞으로 돌진해 왔다.

피해야 한다.

자신의 몸과 의식은 단 한 가지 사고에 사로잡히며 생존에 대한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땅바닥 위로 쓰러진 채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기절하여 모든 것이 끝난 다음에 일어서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서야 했다.

데릭 기사단장은 결투를 속행하라는 듯이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얼떨떨한 눈으로 어떤 장소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하."

레오는 실성한 인간처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슈아가 날린 방패가 지면을 파헤치며 일직선에 있던 모든 것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등을 받쳐 주던 바위 역시.

그의 마법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그것의 잔해로 보이는 파편만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이길 수 없다.

조금 전 어렴풋이 느꼈던 공포감은 점점 더 선명해지며 심장을 조여 온다.

"일어나."

고개를 돌린 사이.

근처까지 다가온 조슈아가 자신의 옷깃을 움켜잡고는 힘껏 일으켰다.

그의 손길에 저항하지 못하고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머릿속이 지끈거려서 두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겨웠다.

"오라 쓸 수 있지?"

조슈아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주변의 소리가 모조리 차단되고 심장의 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라.

마법사의 마력과 비슷한 생물의 자연 에너지.

그러나 마력과는 달리 모든 기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발현하는 이들은 극히 손에 꼽았고.

오라를 다룰 수 있는가, 없는가를 재능의 척도로 삼았다.

레오는 때가 되면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지금 뭐라고?"

"네가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아. 그러니까 실망시키지 말라고."

조슈아가 움켜쥔 주먹으로 복부를 찔러 넣었다.

마법사치고는 제법 손맛이 매웠다.

뱃속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위장에서 꿀렁거린다.

보기 흉하게 헛구역질을 한번 하고는.

봐 달라는 심정으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내가 졌... 컥!"

파악!

패배를 선언하려던 순간.

조슈아가 턱을 후려쳤다.

바닥에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지고 입 안으로 흙과 모래가 빨려 들어왔다.

그걸 뱉어 낼 여유도 없이 조슈아가 멱살을 잡아 상체를 들어 올렸다.

분명 타격이다.

이보다 훌륭한 마운트 자세는 없었다.

재빨리 양손을 가로지르며 방어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느닷없이 입고 있던 옷을 마구 잡아당겼다.

"뭘 하려는 거야."

"보면 알겠지."

그의 손길에 입고 있던 튜닉 셔츠가 찢어졌다.

레오는 뒤늦게 의도를 알아차렸다.

등이었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모두에게 등의 흔적을 공개해야만 한다.

"어떻게 안 거야?"

"아침의 훈련을 보고서."

"그만둬, 부탁할게."

"틀렸어. 조금 더 제대로 된 너였다면 여기서는 나를 깔봤어야 했어."

레오는 미간을 모았다.

그는 자신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만난 기억은 없었다.

우린 서로 남들의 입에 내린 소문으로밖에 알지 못했다.

왜, 초면인 견습 마법사에게 자신을 부정당해야만 하는 거지?

알 수 없다.

한데 그의 말은 왠지 모르게 가슴을 후볐다.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까지 약해진 거냐."

조슈아가 한심스럽게 대답하고는 기어코 자신을 위로 끌어당겼다.

등의 상처가 고스란히 보였다.

살이 터지고, 피고름이 맺히고, 딱지가 앉기 전에 다시 맞았다.

운이 좋게 흉터가 되는 데 성공한 상처들은 뱀이 들러붙은 것처럼 기다란 형상이었다.

굴욕이었다.

한편으론 홀가분한 느낌도 있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남몰래 고통을 참아 왔다.

차라리 누군가의 손에 밝혀지는 편이 명분으로서는 그럴듯했다.

"...저게 뭐야?"

"저런 부상을 안고서 싸우고 있었다고?"

"괴물한테 당한 게 아닌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레오의 등에 남은 상처.

저것은 채찍질의 흔적이었다.

노예를 다루거나, 하인들을 처벌할 경우 채찍은 자주 애용되었기에.

귀족이라면 눈에 익은 상처였다.

레오는 귀족이었고, 그런 소년을 처벌할 수 있는 사람도 귀족이었다.

용의자를 추리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태양 기사단의 단장 카리우스였다.

"설마, 카리우스 경. 아니지요?"

"해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카리우스가 흥분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생사람 잡지들 마세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레오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그에게 매질당한 것은 억울하지 않았다.

기사가 교육받는 과정에서 구타를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과거의 전통이라며 운운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여 자신도 각오한 바였다.

그렇지만....

훗날 서임을 약속했던 인간이 매질한 것을 발뺌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다.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와의 연결 고리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눈을 부라리는 거냐! 아카데미에서 손꼽히는 견습생이라기에 기대했더니 실망스럽구나."

카리우스는 뻔뻔하게도 레오를 손가락질하였다.

그의 태도가 사나워질수록 주변의 시선들도 곱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고함 소리에 묻어 버릴 생각이었는지.

레오널드를 향한 비판하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충분하냐?"

레오가 조슈아를 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충분? 아직 오라를 안 보여 줬어."

"너 설마, 이 상처를 공개해서 내게 수치를 준 이유가?"

"화나면 보여 줄 거라고 생각했다."

"미친놈."

레오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오냐.

그게 그토록 소원이라면 보여 주마.

3년 동안 갈고닦아 온 자신의 비술.

오러를 담아낸 비상하는 검기.

마지막 혼신의 힘을 쥐어짜 내며 양손으로 쥔 검을 뒤로 빼었다.

그리고는 전신에 오라를 끌어모은다.

오라를 흡수한 검은 여느 때보다도 더 크게 발광했다.

"제1 비검 광조(光鳥)!"

검을 힘껏 휘둘렀다.

조슈아와 거리는 검이 닿을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러나 이 공격이라면 상관없다.

검에서 뻗은 오라가 날카로운 칼날 형태로 허공을 갈랐다.

쾅! 조슈아가 끄집어 온 방패와 검기가 충돌했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도 무리라고?"

검기는 방패를 베었으나.

조슈아에게 닿기에는 세 뼘이 부족했다.

이젠 정말로 힘이 없었다.

검을 지지대 삼아서 쓰러지는 것만은 면했다.

"나쁘지는 않네. 고쳐 써먹을 수는 있겠어."

여태껏 무덤덤했던 그가 오라를 보여 준 다음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시험관이 학생을 채점하듯.

그 오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코앞에 두고도.

신기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야, 노비스."

"내 이름은 노비스가 아니야."

"그럼 이름을 알려 줘."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너에게서 직접 듣고 싶다는 말이다."

조슈아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조슈아다."

"그래, 조슈아. 하나만 묻자."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였다.

"네가 보기에 난 약하냐?"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싸워 보고 알았다. 역시 넌 내가 아는 레오널드 콘라드가 맞다."

레오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덮쳐 오는 권태감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이 결투는 처음부터 조슈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라고.

46화

마지막 대결은 타니아와 자경단에서 온 마을 소년의 싸움이었다.

대결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녀는 루이젤라와의 훈련으로 불꽃을 유지하고, 변형하는 것에 능숙해졌다.

지팡이를 휘두르자 머리 위로 불덩이 세 개가 떠오른다.

크기가 조그맣고 개수가 모자라지만.

그녀의 마법은 고든 교수가 연구소에서 보여 줬던 마법과 일맥상통했다.

"져, 졌습니다!"

마을 소년은 무릎을 꿇고는 양손으로 절하듯이 넙죽 엎드렸다.

타니아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정지했다.

앞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불덩이가 지상으로 충돌하며 폭발이 일어난다.

보여 주고 싶었다.

그동안의 성과를.

앞선 대결을 본 직후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기분에 도취되리라고 생각했다.

하나 눈앞의 소년은 학생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힘이 좋다는 이유로 불려 온 가엾은 생존자일 뿐.

그는 검도, 도끼도 아닌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조잡한 창을 내려놓고 몸을 떨었다.

"거기까지."

타니아는 마력을 회수하고는 일행 곁으로 돌아갔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네 번째 시합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오라를 사용한 견습 기사.

그것을 가뿐히 막아 낸 견습 마법사.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열기가 좌중을 압도하였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평가를 듣지 못하자 소녀는 조금 씁쓸해졌다.

"잘했어."

조슈아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것처럼.

무방비한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불꽃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술식도 완성도가 높았어. 저대로 내리꽂았다면 폭발하는 원리였지? 과연, 대단하네."

타니아는 싱긋 웃었다.

제대로 봐 주고 있었다.

그 한 사람뿐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보여 주고 싶었던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이었다.

이건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타워로 돌아갔을 때.

탈레온과 가비누가 부러워하는 표정이 머리에 그려졌다.

"열심히 했어요."

"알아. 네가 게을리할 리가 없지."

조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가 한 번 더 머리를 쓰다듬고는 로드웰과 함께 여관으로 걸어 나갔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등을 쫓기 시작했다.

처음 로젠발트에 도착하여 조슈아에게 보였던 미온적인 태도와는 달랐다.

마치 갈망하는 듯한.

원하는 것을 발견한 탐욕스러운 눈빛이었다.

서늘한 감각이 등을 훑고 지나가고, 자신의 발등이 차갑게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꺼림칙한 분위기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를 돕기 이전에 이 칙칙하고, 답답한 공기에 삼켜지지 않으려면.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 * *

조슈아는 사람들을 피하여 방으로 돌아왔다.

로드웰이 뒤를 따랐다.

그는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서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은 굉장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목이 근질거렸는지 탁자 위의 물을 찾았다.

컵에 한 잔 따르더니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책상 밑에 숨어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어떤 마법인 거냐?"

"마법사는 마법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만."

"나한테도 안 가르쳐 줄 생각인 거냐?"

"루실 경은 어떻게 하던가요?"

로드웰은 턱을 긁적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바람 마법에 흥미가 생겼고 그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추파를 던졌다.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자신과 그녀는 무려 일주일 동안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

루실의 경멸 어린 시선은 아직까지 가슴속에 대못으로 남아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줬던 것 같은데."

"거짓말이군요. 평소보다 대답이 5초나 늦었어요."

"...너는 피곤하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확인하니?"

"투덜거려 봐야 제 대답이 바뀔 일은 없을 겁니다."

"지독한 놈."

로드웰은 헛기침을 하고는 점잖게 말을 이었다.

"대단했다고 한 건 빈말이 아니다. 그건 정말로 굉장했어, 오히려 그게 문제가 될 정도로. 난 네가 승리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레오널드를 상대로 압도할 줄은 몰랐다. 이제 아무도 네게 험담을 하지 않는다. 모두들 너를 주시하기 시작했지."

"예, 알고 있습니다."

"카리우스의 표정을 봤었냐?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으락 했지. 그런데 어이없는 건, 레오널드가 오라를 내보이더니 태도가 또 바뀌었다는 거다. 가증스러운 놈."

그는 매우 언짢은 표정으로 카리우스를 힐난했다.

싸우던 도중에 몇 번이나 레오널드에게 손가락질했던 인간이.

소년에게서 오라라는 가능성을 확인하고는 침음을 삼켰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난색을 표했다.

같은 기사단장이란 게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기회만 된다면 그에게 직접 기사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다.

"조슈아, 그 녀석을 데려올 생각이지?"

조슈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과연, 통찰의 로드웰이란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게임 속 별명처럼 그는 자신의 계획의 일부를 엿보는 데 성공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완전히 찍어 눌러서 레오널드가 카리우스에게 버림받도록 유도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 아니었던 거냐?"

"그쪽으로도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건 아닙니다. 단지."

"단지?"

"위태로워 보이더라고요. 만약 결투의 내용이 일방적이었다면 그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 또한 가능성의 얘기였다.

어쩌면 소년의 감정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부딪치고, 휩쓸리고, 넘어져도.

강철은 쉽게 망가지지 않았다.

하나 그 어떤 단단한 원석이라도 사람의 손을 거치면 모양이 바뀐다.

자신은 그것을 메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길을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런 건가."

로드웰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도 레오널드에 등에 있던 상처를 생각하며 납득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생존자가 이동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얘기는 아니다."

생판 모르는 그룹이라면 어디서 왔든,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으나.

이곳에 모인 다섯의 그룹은 협력 관계였다.

아무런 상의 없이 상대방 그룹의 생존자를 데려와서는 안 된다.

정보의 문제였다.

인원과 물자, 위치 등등.

그것을 악용하여 침입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의도야 어찌 되었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해서 레오널드가 버림받는 쪽이 좋았다고 대답했다.

"몸값을 준다면 될지도 모르겠지만, 레오널드가 오라를 사용한다는 게 밝혀진 이상.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할 거다."

"제가 보기에 카리우스는 레오널드를 길들일 정도의 깜냥은 없어요."

"길들인다는 표현은 조금 웃기네. 녀석이 사냥개라도 된다는 말처럼 들려."

"그보다는 늑대에 더 가깝겠죠. 충성심보다는 자존심이 더 강한 타입이거든요."

로드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와의 조금 전 문답에서 두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첫 번째는 기사단장과 비교를 하면서 자신을 우위에 둔 것.

두 번째는 레오널드를 알고 지내 온 사람처럼 얘기한 점이다.

"매번 생각하는데 말이지, 네 말버릇 독특하다. 누구든지 한 번씩은 만나 본 것처럼 말해."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알거든요."

조슈아가 히죽거렸다.

"뭐, 일단은 지켜보죠. 안건에 따르면 아직 한 가지 시험이 더 남았잖아요."

"구역 탐험 말이냐?"

마지막 시험은 로젠발트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삼림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그 숲은 아직 다른 그룹에게 점령되지 않았다고 한다.

동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었다.

만약 운 좋게 가축이라도 발견한다면 그날은 인생 최고의 날이 될 게 틀림없었다.

"보고서는 그럴듯하게 작성했지만, 아마 꽝이겠지."

삼림에 누군가가 눈독 들일 만한 물건이 남아 있다면.

생존자를 시험할 장소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빛 기사단에 의하면 그 주변은 외부인이 다녀간 흔적이 없다고 한다.

임시 거점 근방에는 최소한의 좀비만 확인되었고.

학생들도 조사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겠죠."

한데 조슈아는 조금도 아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행동에는 꼭 실리가 따라야 한다고 믿는 소년이었다.

그가 여유만만일 때는 만선의 행복을 누리며 귀환한다는 걸.

로드웰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 뭔가 숨기고 있구나. 나한테만 조금 귀띔 좀 해 줘라."

"싫어요."

"너도 어차피 나한테서 원하는 게 있다면서! 그럼 서로서로 허물없이 지내도 좋은 것 아니냐?"

"당신과는 이 정도의 거리감이 좋아요."

"치사한 자식."

로드웰은 콧김을 내뿜더니 의자를 박차고 방을 나가 버렸다.

* * *

저녁이 되자 홀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어제 식사를 했던 테이블에 더 많은 인원이 몰렸다.

네 명이면 만석인 자리에 두 명이 더해져 여섯 명.

그들 모두가 여성이었다.

기억하기로, 잡일을 도맡기 위하여 달빛 기사단에서 데리고 온 이들이었다.

음식이 완성되면 나르고.

다 먹은 접시는 치우고.

바닥이 더러워지면 물걸레로 청소를 한다.

그 업무가 마무리될 무렵에는 기사단장들이 지내던 중앙테이블로 가서 시중을 들었다.

"오늘은 바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자리에 앉으며 능청스럽게 그녀들을 떠봤다.

어제보다 진한 화장에 가슴이 강조된 듯한 원피스.

목에는 향수를 뿌리고 왔는지 제비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후후, 오늘은 당신 곁을 지키라고 부탁받았거든요."

그녀들이 거리를 좁혀 왔다.

그 바람에 옆자리에 있던 타니아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더워진 것을 느꼈다.

"우린 지금 식사 중이에요. 당신들은 그걸 방해하고 있고요."

타니아가 용기를 내어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두 숙녀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는.

"아직 어린 레인우드 아가씨에게는 남녀들의 성숙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뭐예요!"

"앞으로 3년, 그 정도면 교양을 쌓는 데 충분하겠죠."

"저, 정말이지!"

타니아는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빛을 숙녀들이 아닌 나에게로 쏘았다.

[영리함]이 낄낄거렸다.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외면하며 식사에 집중하였다.

"어머, 생각했던 것보다."

"순순히 물러나네요."

두 숙녀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모양인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제 훼방꾼은 사라졌네요. 오늘 시합을 봤어요. 저는 마법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당신의 실력은 견습 마법사의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 경지까지 오른 거예요?"

"운이 좋았습니다."

"비밀이란 뜻이네요.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녀들은 이제 턱밑까지 다가왔다.

손을 잘못 움직이면 그녀들의 몸 어딘가에 닿을 것 같은.

[인내심]이 자신이 도울 차례인지 계속해서 되물었다.

이건 함정이다.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들과 하룻밤을 보낸다면.

달빛 기사단은 회담 내내 자신을 물고 늘어질 것이 분명하다.

"만약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면 당신께 좋은 걸 알려 드릴게요. 예를 들자면 남들은 모르는 밤 기술이라든가."

"아, 로드웰 경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데릭 경에게 알아서 해 주겠다는 약조를 받았으니까요."

"당신은 선택하기만 하면 돼요. 저희를 안을지, 말지."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영리함]은 그녀가 말한 밤 기술이란 것에 흥미를 보였다.

단지 호기심을 핑계로 그녀들의 옷자락을 벗기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런 식으로 매도하자 [영리함]은 길길이 날뛰었다.

[냉정함]은 조심하라며 경고한다.

[인내심]은 아직까지도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대로라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 터질지도 모르리라.

"여러분들이 한 말을 제가 로드웰 경에게 보고한다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걸 이해하고서도 이러는 건가요?"

두 사람을 떨쳐 낼 생각으로 모질게 대답했다.

그녀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그것은 함고한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유혹을 뿌리치고 경고를 한 것에 대한 반응처럼 보였다.

"그리해서 벌을 받는다면 어쩔 수 없겠죠."

"능력이 없는 여성들은 미인계가 아니라면 살아남을 방법이 마땅히 없거든요."

씁쓸한 미소가 되돌아왔다.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나 그 동정심에 휩싸여 계획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냉정함]이 신중하라고 조언했다.

"당신은 자상하네요. 보통은 자기가 뭐라도 된 양, 가슴을 주물럭거리거나, 입술부터 들이대는 사람들이 태반인데."

"빌미를 주지 않는 거죠."

"데릭 경의 명령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순수한 감정이라고 치더라도?"

"그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일까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한 눈동자였다.

"당신들이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단지 저는 아직 별의 기사단을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후후,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들은 싱긋 웃더니 자신을 가볍게 포옹해 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나와 아델라만이 남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신기한 생물이라도 본 것처럼 반짝거렸다.

"저기 있잖아, 한 가지 물어도 괜찮을까?"

"그래."

"어째서 안지 않은 거야? 미리나와 알리사는 우리 기사단 안에서도 손꼽히는 미녀들인데."

게임이었다면 같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잘못되더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저장도, 재시작도 없었다.

"약점이 잡히니까."

"모른 척 넘어갈지도 모르잖아."

"만약에 기댈 생각은 없어."

아델라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딱히 재미있어 보이는 내용은 없는 것 같음에도.

"넌 정말로 내가 아는 귀족들이랑 많이 다르네."

"그건 칭찬인가?"

"칭찬이야."

그녀가 깨끗이 비운 접시를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았다.

그녀도 앞선 두 사람처럼 스스로를 치장하는 데 신경을 썼다는 걸.

47화

회담 3일 차는 첫날 일정의 반복이었다.

그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논의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영리함]이 따분함을 토로한다.

이 얘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더라도 진전이 없었다.

마치 벽과 대화하는 듯한.

이날까지 회의를 통하여 새로운 방침은 단 하나도 결정되지 않았다.

합의라는 단어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단장들도 점점 지쳐 가는지 안색에 피로가 드러났다.

차라리 피를 보는 쪽을 선택한다면.

이 시답잖은 촌극에 어울리지 않고 힘으로 원하는 것을 쟁취할 텐데.

하지만 그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믿었다면 애당초 만들어지지 않을 자리였다.

단지 현실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냉혹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합시다."

데릭이 회의를 끝냈다.

평소라면 가장 늦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그가 오늘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이다.

다른 단장들도 저마다 홀에서 떠났다.

상급자들이 사라지자 비로소 자유를 얻은 학생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타니아는 눈꺼풀을 비비적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이들도 그녀처럼 지친 모양인지 홀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 층에 남은 것은 자신과 몇 명의 일꾼뿐이었다.

조슈아는 테라스로 걸어 나갔다.

밤이 되어 쌀쌀해진 그곳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태우며 시간을 보냈다.

상인회의 길드장인 마르텔이란 이름의 중년이었다.

"오오, 소문의 마법사님. 어서 오시지요."

상인 특유의 쾌활하고 높은 하이 톤.

푸근한 인상과 그에 어울리는 살집 많은 뱃살이 출렁이는 사내였다.

그가 일어서더니 가슴에 손을 대고 허리를 숙였다.

귀족의 인사였다.

"후후, 어떻습니까?"

"저는 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훌륭한 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는 들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마셨다.

숨을 내뱉자 하얀 연기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하하, 실례했습니다. 인사로 칭찬받는 게 처음이라. 다들 평민 주제에 귀족 흉내를 낸다며 아니꼽게 보더군요."

"그런가요."

"그래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조슈아는 이 남자가 이번 회담의 결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안다.

그는 뼛속까지 상인이었다.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이 돈과 인맥이라 믿는 부류.

빈손으로 왔을 리가 없었다.

귀족과 달리 평민은 이름값만으로는 재력이란 것을 과시하지 못한다.

마르텔이 아까보다 담배를 더 깊게 들이마셨다.

필터 끄트머리까지 단숨에 흡입하고서는 땅바닥에 모조리 쏟아 낸다.

연기가 바닥에 닿았다.

"어떻게 안 겁니까?"

"이곳은 무언가를 소개하는 데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상인이라면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없죠. 단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거죠?"

마르텔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디에서 발목이 잡혔을까?

내뱉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아도 특별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대충 얼버무릴까 생각하다가 소년의 눈빛을 보고는 포기했다.

확신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얼굴에 씌운 웃음이란 이름의 가면에 작은 균열이 일어났고.

더는 숨길 수 없다는 판단에 실토하기로 결심했다.

"이거 당했군요."

마르텔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휘적거렸다.

"말씀대로 전 장사꾼이라 이런 자리에도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보부상처럼 무언가를 들고 다니죠. 로젠발트에서 멀지 않은 장소에 제 동료들이 있습니다. 물건은 거기에 있고, 제가 신호만 한다면 언제든 이쪽으로 올 겁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전 아직 제 물건을 소개해 드린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요?"

"자수성가로 상인회의 길드장까지 되는 데 성공한 마르텔 씨라면 분명 없는 물건 빼고는 다 있겠죠."

"하하, 칭찬이 과합니다."

마르텔은 소년에게 호감을 느끼는 한편.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에 긴장했다.

진정한 상인이란 입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시의 상인은 밝은 곳에서 움직이지만.

암상인은 어두운 지하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하여 마르텔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잘 떠들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빈털터리에서 시작했다는 사실도.

가까운 지인 몇몇만이 아는 정보였다.

"거래의 방식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물물교환입니다. 제 쪽에서도 값에 맞는 물건을 내놓을게요."

"먼저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감정해 보고 필요한 것이라면 준비하겠습니다."

조슈아는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인지 허리춤에 있던 작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력초.

야생에서 자라는 약초 중에서도 희귀한 편에 속하였다.

생으로 먹어도 마력 시약과 같은 효과를 내며.

포션의 기본 베이스로도 곧잘 쓰였다.

소년의 손에는 그것이 세 송이나 들려 있었다.

"어디서 구한 건가요?"

"손님에게 정보를 묻는 건 실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조금 아쉬워서 말이죠."

"무엇이 말인가요?"

"마력초를 줄기째로 꺾는 게 아니라, 뿌리를 온전히 캐냈다면 재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거든요. 어떤 교수가 그것과 관련한 연구를 한창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성공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자신의 설명에도 아쉬운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가 넘쳤다.

"죄송합니다. 잡담이 길었네요. 그럼 원하시는 게 뭔지 말해 보세요."

"스크롤입니다. 마법을 담을 수 있는."

스크롤은 마법사가 아닌 인물도 마법을 사용하게 해 주는 물건으로.

훗날에는 화폐의 일종으로도 쓰였다.

무슨 마법을 담았느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이며, 주로 공통 마법을 담아 놓았다.

"몇 장을 생각하시는지?"

"10장입니다."

마르텔은 깜짝 놀랐다.

그가 말한 10장이란 숫자는 서로에게 가장 이상적인 가격이었다.

그러나 장사꾼은 이상적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몇 푼이라도 더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 짠돌이 마음가짐이 사라지는 순간.

상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했다.

"8장으로 합시다."

8장.

이만하면 양심이 넘치는 상인이다.

상대가 소년인 것을 생각하자면 구워삶는 것은 간단하다.

시작부터 반으로 깎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그와는 알고 지내고 싶다는 마음에.

단 두 장만을 빼었다.

"11장."

"...미안합니다. 잘못 들었는데 다시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1장이라고 했습니다."

조슈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제가 왜 8장을 제시했는지 근거를 설명하지 않았군요. 그러니까 현재 스크롤의 시세가...."

"12장."

그가 다시 한번 말을 끊으며 더 많은 개수를 요구했다.

마치 살얼음판을 딛는 느낌이었다.

말 한마디에 감정이 섞여 비수로 꽂히는 듯한.

속일 생각은 하지 말라며 경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르텔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장사 인생 30년 동안 소년과 같은 손님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전 제가 제시한 값에 대한 설명을 할 생각이라고요."

"13장."

이를 악물었다.

마르텔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마력초는 필요하다, 갖고 싶었다.

고뇌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것은 실수였다.

소년은 개수를 더 높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떠날 작정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은 허둥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을 붙잡았다.

"떠, 떠보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10장으로 거래하겠습니다."

"...두 번은 없습니다."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거래는 내일 아침에 하는 걸로 하시죠."

소년이 돌아섰다.

그가 테라스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에야.

마르텔은 가슴의 두근거림이 잦아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3시간이나 진행되었던 회담보다.

조금 전 소년과 대화를 나눈 10분이란 시간이 훨씬 더 체력을 갉아먹었다.

"제기랄! 이래서는 안 됐는데. 어떻게든 한 장이라도 더 깎지 않으면."

마르텔은 후회가 밀려왔다.

항의 한 번 하지 못하고 손님이 요구하는 금액에 맞춰서 거래를 했다.

그는 오늘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 * *

회담 4일 차.

마지막 시험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끝마치고, 시험의 장소인 삼림을 향하여 움직였다.

조슈아는 무리의 가장 뒤쪽에서 마르텔에게서 건네받은 스크롤을 작성 중이었다.

"세상에, 스크롤은 어디서 그렇게 많이 얻으신 거예요?"

타니아가 놀라며 물었을 때는 세 번째 스크롤을 완성한 뒤였다.

"파트너를 한 명 찾았어."

"그, 그게 누군가요? 아델라 선배인가요?"

"그녀는 아니야."

"아, 아니라면 세레나 선배?"

"그녀도 아니지."

"서, 설마! 엊그제 선배를 유혹했던 두 사람은 아니죠?"

타니아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부끄러워하였다.

파트너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모양이었다.

예컨대 서로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육체적인 관계에서의 파트너.

[영리함]은 그녀가 착각한 것이 즐거운 모양인지 낄낄거렸다.

"...선배는 결혼하면 내연녀를 두실 건가요?"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질문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세상이 안정되면 미래를 그려야 할 테고, 반려자 문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으니까요."

"...그렇네."

자신을 이곳에 떨어뜨린 게임의 운영자라는 인물.

그는 게임을 클리어하라는 말과 함께 이곳에서 생존해 살아남으라는 사명을 줬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가?

부모님과 친구들은 보고 싶었다.

현실을 아우르던 환경들도 향수로 느낄 정도로 그리웠다.

하나 그것들이 내 삶에 대한 원동력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이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본능이라고 치부하면 끝날 문제겠지만....

정신을 차리자 나는 10장의 스크롤에 모든 술식을 완성하였다.

"레인우드 아가씨, 미안하지만 잠시 그와 얘기해도 괜찮을까?"

무리의 앞쪽에서 후미로 내려온 사람이 있었다.

태양 기사단 단장 카리우스였다.

그가 타니아에게 양해를 구하자 그녀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크흠, 너와 대화하는 것은 첫날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구나."

"용건이 뭡니까?"

"이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까 너를 노비스라고 지칭하며 깔보았던 걸 말이다."

"그렇군요."

나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간 자신의 주위로 다가와 아첨을 떨던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들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대게 속이 빈 깡통처럼 실속이 없는 말들이었다.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는 나쁘지 않은 관계로 지내고 싶다만."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을 많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할 인물이 존재한다.

눈앞의 카리우스가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게임을 하던 당시.

태양 기사단 밑에서 일할 때 온갖 부정부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하, 네놈은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군. 윗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 받는 게 예의라는 것도 모르는 거냐?"

이런 다혈질적인 면모도 그를 기피해야 할 이유였다.

목소리가 변했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눈초리는 무척이나 사나워서, [강심장]이 아니라면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카리우스 경, 괜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앞쪽에 있던 로드웰이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다가올 때와 사뭇 다른 얼굴로 자신에게서 떠났다.

뻔뻔한 건지, 기억력이 안 좋은 건지.

대결에서 망신을 준 것 정도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에게 줄 선물은 아직 하나가 더 남았으니까.

[영리함]과 [냉정함]이 나와 함께 짠 계획에 차질은 없는지 계산한다.

걱정하지 않는다.

변수가 생겼을 때의 계획도 빠짐없이 준비했다.

무리는 걸음을 멈췄고, 경사가 심한 비탈길 아래로 삼림의 입구가 보였다.

쾌청한 날씨임에도 삼림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어둠에 잠긴 채로 꿈틀거렸다.

수십 년간 그곳을 지켜 온 소나무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그림자.

삼림이 있던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바람 안에 섞인 피 냄새를.

[서브 퀘스트 – 삼림의 시련]

클리어 목표 – 삼림에서 활동하는 변종을 사냥하라.

난이도 – A+

보상 - 50코인

48화

삼림이 잘 보이는 능선 위쪽으로 캠프를 짓기 시작했다.

일꾼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천막과 울타리를 만드는 동안.

시험에 참가할 생존자들은 데릭으로부터 과제를 전해 들었다.

"너희는 1박 2일 동안 이 삼림에서 생활하면서 너희들이 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점수는 어떻게 책정되나요?"

가장 의욕이 넘치는 레오널드가 질문했다.

"좀비의 사냥. 동식물의 채집. 거점을 만드는 능력이나, 다른 그룹과의 관계 등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거다."

"좀비를 사냥 수는 어떻게 증명합니까?"

"귀를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나는 침묵했다.

첫 번째 시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시험도 비합리적이었다.

좀비는 필요에 의해서만 없애야 하는 적이었다.

결단코 생존자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한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놈들은 위험하다.

기숙사에 있던 때와 달리 몇 마리는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좀비에 대한 경각심을 늘 잊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든 이쪽으로 와도 좋다. 다만 그때는 시험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할 거다."

데릭의 말은 저주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모두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돌아와도 좋지만.

뒷일은 알아서 감당하라는 듯한 대답.

그들은 자신의 수장들이 어떠한 처벌을 내릴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시간은 내일 저녁까지. 10분 뒤에 출발할 예정이니 그렇게 알아라."

데릭은 돌아섰다.

로드웰이 안건을 받아들인 이상.

자신이 항변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었다.

거부권이 없다는 것은 속이 쓰리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삼림에는 들어갈 가치가 있었다.

장비를 구할 시기였다.

방망이는 유용하지만, 그것은 마법사의 무기가 아니었다.

완드나, 스태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숲에는 그것의 재료가 되는 마력을 담은 심장이 있었다.

"너희들은 계획이 있는 거냐?"

나는 옆에서 창백한 낯빛의 소년 소녀를 바라봤다.

그들은 자경단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이었다.

선별하여 데리고 온 만큼 체격이 또래보다 크고 훌륭하였지만, 그뿐이었다.

훈련을 받아 온 아카데미 학생들과는 수준 차이가 심하며.

장비는 열악했다.

"아아, 마법사님."

레오널드를 이긴 다음부터 주변인들의 태도가 전부 바뀌었다.

개중에서도 자경단과 상인회의 아이들은 유독 자신을 어려워하였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

흡사 그런 명령이라도 건네받은 사람처럼 표정이 굳었다.

"님이란 경칭은 빼고, 조슈아라고 불러. 어차피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날 텐데."

"그, 그렇지만."

"그것보다 처음에 질문에 대해서야. 계획은 있어?"

"하하, 이 삼림에 온 것 자체가 처음인데 계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죠."

"그렇겠지."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냉정함]은 엉뚱한 곳에 힘을 쏟는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분명 물질적으로 얻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남아 훗날 자경단과 상인회와 접촉하였을 때.

그들에게 베푼 은혜를 돌려받을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시작하자마자 포기하는 건 어때?"

소년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랬다간 회담이 끝나고 단장님에게 반죽음을 당할 겁니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망신은 당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경단의 리더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

만약 이들이 자경단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먹칠을 한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서 본보기를 보일지도 몰랐다.

"상인회 소속의 너희들은?"

"저희도 되도록이면 버텨야 합니다. 만약 시험을 통과한다면 식량을 주겠다고 약속받았으니까요."

모두 포기하지 못하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영리함]이 생각하는 것을 도왔다.

[냉정함]과 궁합이 잘 맞던 녀석은 최근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성격적 특성에게도 상황에 따른 기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좋아, 그렇다면 너희들은 캠프에서 북서쪽으로 따라 쭉 내려가. 경사가 완만해지는 자리 근처에 동굴이 있을 거다. 그곳을 은신처 삼아서 하루를 버텨라. 입구에는 근처에 날카로운 나무들을 교차로 엮어서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걸 잊지 말고."

내 말을 듣던 네 사람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만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한 사람이 대표하여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선언과 함께 내 안에 내재되었던 무언가도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리더십(하)가 (중)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카리스마(하)가 (중)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의 권위와 대화는 상대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영리함]이 [냉정함]을 향하여 히죽거렸다.

스킬의 강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스킬은 아니지만, 변화가 있었다.

[냉정함]은 침묵했다.

패배를 인정하며 한 발자국 물러나겠다는 듯이.

나는 어느 쪽에도 힘을 싣지 않고 관망했다.

"...저기."

소년이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처음처럼 딱딱하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 이 조그마한 인연이 좋은 결과로 돌아오길.

* * *

삼림에는 최근까지 이슬비가 내렸던 모양인지 군데군데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젖은 땅은 내디딘 발을 늪처럼 깊숙이 집어삼켰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체력을 빼앗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학생들은 진땀을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까지도 능선 위쪽의 캠프가 시야에 버젓이 자리 잡았다.

"아, 안 되겠어."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델라였다.

그녀는 입고 있던 정복이 더러워지는 것이 싫었는지 치맛자락을 집으며 걸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남들보다 빨리 지쳐 버렸다.

"이래서 마법사들은 안 된다니까."

레오널드가 한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법사하고는 관계없거든? 그 증거로 조슈아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잖아."

내 이름이 호명되었지만 그쪽에 시선을 두진 않았다.

나는 일행들이 머무른 장소 주변에 널린 흔적들을 꼼꼼히 조사했다.

발자국이나 짐승의 털.

삼림에 들어오면 '적'엔 좀비만이 아니라 맹수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저 녀석은 돌연변이 같은 거야. 논외로 쳐야 한다고."

"네 말이 궤변이란 걸 아는지 모르겠네."

"궤변? 내가 만난 마법사들은 모두 허약한 놈들밖에 없었어. 그럼 반대인 놈이 이상한 거지."

"맨날 연습용 허수아비하고만 씨름하는 주제에 마법사를 몇 명이나 만나 봤다고."

"좀 조용히 하세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를 끊어 낸 것은 타니아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목소리가 너무 크면 좀비들이 이곳에 오게 될 거라고요."

"올 테면 오라고 해."

레오는 등에 멘 검을 뽑아서는 자신감 넘치게 휘둘렀다.

"몇 마리가 오든 전부 베어 버릴 테니까."

"...정말로 믿음직스럽지 못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아델라와 타니아가 동시에 한숨을 내뱉자 레오는 얼굴이 빨개지며 허둥거렸다.

소년은 이를 악물며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애당초 우리 여섯 명이 왜 함께 있는 건데?"

"내려오는 길목이 몇 개 없었고, 개중에서도 이쪽이 가장 안전해 보였으니까."

"그런 이유라면 우린 쉬지 않고 전진하겠어."

레오는 파트너인 더벅머리 소년에게 눈짓하였다.

소년은 마치 따라다니는 시종처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지지 않을 테니까."

그것이 나를 향한 선언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레오널드는 경쟁심이 강했다.

그것은 소년이 지옥에서 버틸 원동력이었지만 때때로 위험을 초래하는 화근이 되었다.

삼림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 숲은 옆에 있던 산맥과 합쳐진 곳이기에 대단히 넓었다.

길을 잃는다면 특정 도구나,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찾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를 삼림에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이 숲에는 괴물이 살고 있고, 그 괴물은 레오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막아서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괴물을 조심하라고 말해 봐야 설득력은 없었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그를 이 자리에 머물게 할 방법이 생각났다.

"네 멋대로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상관없지만, 나는 너처럼 애써서 좀비를 찾지는 않을 거다."

레오가 충격을 받으며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의 의미이지. 나는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그랬다간 단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걸. 너를 신임한 로드웰 경에게도 찬물을 끼얹는 걸 테고."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두려워할 이유가 못 돼."

듣고 있던 이들 모두가 경악했다.

하나같이 놀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봤다.

"우리 중 누군가가 로드웰 경에게 네가 한 말을 전한다면 넌 곤경에 처할지도 몰라."

"딱히 상관없어. 그리고 일러바친 사람이 오히려 곤란해질지도 모르지."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했고, 실제로도 관심이 없었다.

"아무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단지 이 시간이 끝나길 기다릴 뿐이지."

전의를 불태우던 레오널드는 표정에서 감정이 식어 가는 게 드러났다.

라이벌이란 서로가 서로를 목표로 할 때 투쟁심이 생기는 법이었다.

그러니 반대편에서 받아 주지 않는 태도만 보여도 상대방은 쉽게 의욕을 잃었다.

"제안 하나 할게. 승부는 내일로 미루는 거야. 그때가 되어서 서로 분발해 보자고."

"...내일은 정말로 최선을 다할 거냐?"

"그래."

소년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앉을 만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평평하게 깔린 바위를 찾아내고는 엉덩이를 붙이고.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을 칼집 채로 들어 올려서는 옆자리에 고이 놔두었다.

"푸흡, 마치 강아지 같네."

그 광경을 보면서 아델라는 즐거워 어쩔 줄 몰랐다.

레오널드가 저토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까.

"시끄러워."

"만약 머물 생각이라면 여기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찾고 싶은데. 너도 도와라."

"어째서? 나는 지금 너 때문에 힘이 쭉 빠졌는데."

"마법사가 허약한 녀석들밖에 없다면, 기사는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지."

"하하하."

"선배, 목소리 줄여야 한다니까요."

아델라가 폭소를 터뜨렸고 타니아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재차 경고했다.

그리고 레오는 절망 섞인 눈으로 자신을 올려 봤다.

* * *

삼림의 조금 더 안쪽.

사방이 소나무와 덩굴로 막혔고, 안쪽은 움푹 파인 구멍을 발견했다.

빗물에 젖어 축축해진 불쏘시개들은 타니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을 피우지 못했으리라.

학생들은 어렵사리 일으킨 불길 주위로 모여들며 몸을 데웠다.

밤이 되자 기온이 떨어지고.

숨결을 내뿜으며 일어나는 입김은 눈에 띄게 커졌다.

우리들은 단지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지만, 추위는 그런 우리를 비웃듯이 휩쓸며 괴롭혔다.

"둘러보고 왔어."

레오널드가 돌아왔다.

그는 요구하지도 않던 정찰병을 자처하면서 캠프 주위를 한 바퀴 수색하고 왔다.

나는 그가 뜻대로 하도록 허락했다.

정찰은 나쁠 것이 없거니와.

해야 한다면 마법사보다는 기사가 하는 편이 옳았다.

위기의 순간에 몸을 지키려면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검이 빠르고 편리하다.

"세 마리가 있었어. 아무래도 불을 보고 찾아온 모양이야."

레오가 좀비의 귀를 땅바닥에 던졌다.

그것은 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척 보기에도 여러 좀비를 상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제자리에 앉아서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무용담을 떠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흥미가 없다는 듯이 외면했지만.

나는 흘려듣지 않았다.

"레오널드."

"있잖아, 내가 너보다 한 살이 많은 선배란 말이야. 조금 더 예의를 차려 주면 고맙겠는데."

"혹시 상대한 좀비 중에 몸 어딘가가 없는 놈도 있었나?"

"...정말이지. 내 얘기는 귓등으로 듣고 있네. 뭐, 좋아. 질문에 대답하자면 있었어. 그것도 둘씩이나. 하나는 팔이 없고, 하나는 다리가 없이 기어 다니더라."

"알았다."

"저기 말이야, 질문을 했으면 왜 했는지 이유라도 들려줘. 궁금해서 미쳐 죽게 만들 생각이야?"

"검을 점검하는 게 좋을 거야. 피와 기름은 검신을 녹슬게 만드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거든. 정말이지... 그냥 대답하기 싫다고 말해."

그는 혀를 차더니 자신의 말대로 검을 돌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들은 잠들기 이전에 2명씩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은 세레나와 함께 두 번째로 결정되었다.

[냉정함]은 쉴 수 있을 때 몸을 회복하라며 조언한다.

그 조언을 받아들여 몸에서 힘을 빼면서도 귀와 코만은 감각을 깨운 채로 쉬었다.

전날에 내린 이슬비로 인하여 바닥에 가라앉았던 냄새들이 공기에 흩날렸다.

피와 오물이 섞인 듯한.

좀비 특유의 썩은 누린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귀로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리 지어 함께 행동하는 모양인지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떼 지으며 들려왔다.

어느 순간 멈춘 녀석들이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는 이쪽을 향하지 않고서 삼림 안쪽을 향하는 것 같았다.

늑대들은 다시 움직였고 그들의 발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며 곧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그들의 긴박감이 자신에게 전해져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이봐."

"조금 더 자지 그래? 네 순번까지는 아직 멀었으니까. 그리고 제발 경칭 좀 붙여."

"아까 너한테 승부는 내일로 미루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것 같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밤이 고비일지도 모르거든."

삼림을 조사하던 과정 중에서 부러진 소나무에서 어떤 흔적을 발견했다.

발톱의 흔적이다.

아직 세간에는 그렇게까지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지만.

좀비가 될 수 있는 건 인간만이 아니었다.

49화

자정을 넘기자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밤바람이 칼날처럼 외투 속을 파고들었다.

모포와 모닥불만으론 견디기엔 냉혹한 날씨.

학생들은 벌벌 떨면서도 한번 감은 눈을 좀처럼 뜨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극도의 피로감과 수면 부족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원인은 회담 그 자체에 있었다.

단장들이 말씨름을 할 때면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짓누르는 듯한 공기에 장시간 노출되면 웬만한 배짱이 아니고는 못 버틴다.

아직 경험이 미숙한 학생들로서는 힘들었겠지.

나야 [강심장]이 있으니 문제없다.

[힘들면 너도 쉬어도 괜찮아. 망은 내가 볼 테니까.]

함께 보초를 서던 세레나가 노트를 꺼내 적었다.

"나는 상관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배려를 뒤로하고서 근처에 모아둔 나뭇가지 끝을 단검으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건 어디에 쓸 생각이야?]

"근처에 부비트랩을 하나 만들어 놓으려고."

[그 괴물들을 상대할 목적으로?]

"아니, 조금 더 큰 표적을 위한 시간 벌이용으로."

보통 좀비가 변종이 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몇몇 네임드 중에는 시작할 때부터 변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이 숲의 주인이 그렇다.

놈은 곰이었다.

이름은 우르곤으로 이 근방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수호신 취급을 받던 영물이었다.

이제 녀석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 순한 곰도 없었다.

좀비가 된 곰은 단단한 모피와 강한 앞발, 치악력을 지닌, 말 그대로 마수였다.

[표적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곰이지."

[좋은 생각이야. 곰은 고기가 많이 나와. 특히나 겨울잠을 들기 전에 곰은 기름지고 맛있어.]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 생활 지식이 풍부한 시골 소녀였다.

"미안하지만, 그 곰은 먹지 못할 거야. 이미 죽었거든."

[죽었어? 죽었다면 움직이지 못하잖아.]

"보면 이해가 될 거야."

그녀는 노트와 펜을 내려놓고서 막대기를 집고는 모닥불을 들쑤셨다.

조금 덩치가 커진 불꽃을 멍하니 바라본다.

나는 그 틈에 남아 있던 나무들을 정리하였고 옆에는 정리된 창들을 겹겹이 쌓았다.

다음으론 지도를 펼쳤다.

지도에는 삼림 일대가 낙서처럼 어설픈 모양새로 그려졌다.

마르텔과 스크롤을 교환할 때 덤으로 받아 낸 것이다.

[그거 뭐야?]

"지도."

[어떻게 얻은 거야?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좋은 친구를 사귀었거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 위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봤다.

모험가들은 동서남북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

별자리를 통하여 방향을 읽어 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리함]이 별을 연결시켰다.

연결된 별들 가운데 끝자리에서 번뜩이던 것을 콕 집어 북쪽이라고 알려 줬다.

나는 반대편에 있던 그녀에게 향하였다.

"탐지 마법 쓰고 있는 중이지?"

세레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아주 미세한 마나 입자를 사방에 퍼뜨려 침입자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마력에 민감한 타입이라서."

탐지 마법은 적을 찾는 것만큼이나 들키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들통나면 상대는 계획을 바꾸거나 도망친다.

짐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감각만큼은 사람보다도 뛰어나서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우르곤이라면...

녀석의 굶주린 배는 이 삼림의 생명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이성을 잃고서 광기에 휩싸인 녀석은 능선을 넘어 평야로 향하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놈이 지나는 길목 한가운데 진을 쳤다.

[알아챈 건 네가 처음이야. 내가 말하지 않는 이상 다들 몰랐거든.]

"그만큼 네 능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겠지."

나는 그녀 옆에 앉으며 동시에 [분석]을 사용했다.

그녀의 레벨과 관련된 정보가 떠올랐으나.

내가 살펴보려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세레나]

상태 이상 – 트라우마[최상]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 이전까지 목소리를 잃습니다.

그녀는 고향을 잃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평생 안고 갈 상처로 남겠지만.

그녀에게 얽힌 운명은 잔인하게도 더 큰 상처를 남겨 놓았다.

괴물로 변해 버린 네 살 어린 동생을 제 손으로 죽인 것이다.

세레나로 몇 번이나 플레이하면서.

그 운명에 저항하고자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것만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로의 손을 가족의 피로 더럽혔다.

[너도 방금 뭔가를 썼네. 그렇지? 어떤 마법이었어.]

세레나가 살며시 웃었다.

탐지 마법의 달인답게 그녀 자신도 주위 변화에 민감했다.

"손을 줘."

세레나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요구한 대로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평정심]을 사용했다.

따스한 빛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닫혀 버린 그녀의 마음을 녹이기엔 부족했다.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세레나는 불우한 과거를 겪은 이후로부터는 언제나 웃었다.

그건 언뜻 보기에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주변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가면을 쓴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것이 아닌.

그것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눈동자의 안쪽은 여전히 어두웠고 끝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주 잠깐.

눈빛에 생기가 돌았지만 그건 착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고마워. 날 위해서 뭔가를 해 주려고 했었지?]

"...미안, 주제넘은 행동을 했어.

[어째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거야? 우린 이 회담장에서 처음 만났잖아.]

"그래, 우리는 처음 본 사이야. 그렇지만 난 널 그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몇 번이나 구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날 구해? 어째서?]

"그때는 그게 내 능력을 증명하는 방식이었거든."

세레나가 미소를 지었다.

사정을 모른다면 추상적이기만 할 뿐인 얘기에 그녀는 귀담아들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진중한 눈빛.

그녀는 다시 펜을 집어서 노트에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내렸다.

[나는 이미 모든 걸 잃었어.]

"알아. 나는 이번에도 실패했지."

그녀는 이번에도 구원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과거는 지울 수 없더라도 미래는 바꿀 수 있었다.

"네가 아직 삶에 매달릴 게 하나라도 남아 있고, 그걸 놓을 생각이 없다면...."

나는 재차 말을 이었다.

"날 도와줘. 나도 널 도울 테니까."

세레나는 웃었다.

하나 그 미소는 이때까지 보여 준 가식적인 것과 달리.

본인의 마음이 조금은 스며든 듯 한 밝은 미소였다.

[좋아, 내가 뭘 하길 바라?]

나는 지도를 내려놓고서 동그라미 친 부분을 가리켰다.

탐지 마법은 원형으로 감지하는 게 일방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범위를 좁히고 거리를 늘리는 방법도 가능했다.

이 캠프의 앞쪽 부근이었다.

뒤쪽은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우리보다도 훨씬 강한 괴물 셋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표시된 장소를 집중적으로 살펴 줬으면 해. 뭔가가 온다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거야. 놈은 우리보다 배로 크거든."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변에 흩뿌려진 마나가 한쪽 방향으로 밀집되어 간다.

[지금은 없어.]

"그래."

나는 장비를 챙기고는 오솔길을 따라서 함정을 놓을 장소로 향하였다.

구름이 조금 걷힌 모양인지 달빛이 나무 사이로 떨어지며 땅을 적셨다.

시야가 밝아지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좀비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크아아악!

부패한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괴성.

그 괴성에 주눅 들기보다 다른 놈들이 몰려온다는 걱정이 앞서자.

신속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녀석은 머리가 함몰되고도 팔을 휘두르며 매섭게 저항했다.

"마침 잘됐네."

곰을 유인할 미끼가 필요했다.

좀비는 신체가 뜯겨 나가도 한동안은 움직였다.

그 점은 주의해야 할 특징이었지만,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특징이기도 했다.

들고 있던 창 하나로 좀비의 상체를 깊숙이 찔렀다.

그 자리에 허수아비처럼 박아 두고는

근처의 땅을 만지작거리며 파기 좋은 자리를 선별한다.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도구 중에 삽을 꺼내어 땅을 파고는 창을 꽂았다.

크아아악!

작업을 끝내고 떠나려고 할 때도.

좀비는 내게 향한 시선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녀석의 울부짖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나무 사이를 오가는 게 보였다.

[괜찮아?]

캠프로 돌아오자 세레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탐지 마법을 쓰고 있었으니.

자신이 한차례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

가볍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걱정을 덜어내고는 모닥불 앞으로 다가갔다.

장작을 몇 개 집어넣어 불을 키웠다.

그럼에도 계속된 추위에 견디다 못한 학생은 고통스러운 잠꼬대와 함께 눈을 떴다.

레오였다.

그는 덮고 있던 모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는지 화난 표정으로 일어나서는 모포를 걷어치웠다.

"빌어먹을 단장 놈들. 지들은 천막 안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겠지? 전부 좀비에게 물어 뜯겨서 뒈져 버리라고 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년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나와 세레나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못 이겨 도로 자리에 앉았다.

"너희들은 동의 안 해? 내가 못 할 말을 한 거야?"

우리가 침묵으로 대응하자 그의 눈은 둘 곳을 잃었다.

한차례 혀를 차고는 무안한 모양인지 모닥불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얼핏 들었거든. 그 곰을 잡는다, 어쩌고 하는 얘기 말이야."

그는 나를 곁눈질하면서 조심스레 화젯거리를 던졌다.

기사는 기습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도.

어느 정도의 감각을 깨워 둔 상태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어려운 기술이었지만 그는 능숙하게 그것을 해냈다.

"그래."

"규칙 위반 아니야? 나와 한 약속은 분명 내일로 승부를 내자는 거였잖아."

"자정을 넘겼으니 날짜로 따지자면 내일은 맞아."

"...윽."

레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반격할 한마디를 찾고자 고심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로는 도통 떠오르지 않는 모양인지.

"세레나, 네 생각은 어때?"

이 일과는 관계없던 그녀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세레나는 힐끗 웃는가 싶더니.

[조슈아가 잘못했어.]

그녀의 노트에 적힌 한마디는 소년에 죽어 가던 기세를 살려 주기에 충분했다.

"거봐, 네가 나쁜 거야."

"그렇네. 내가 나쁜 게 맞아."

내가 순순히 인정하자 레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말 싸움을 할 때도.

상대의 열기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타입이었다.

"너만 상관없다면 이제부터 싸울 적은 함께 상대했으면 좋겠는데."

"그거 부탁하는 거냐?"

"부탁이지."

레오는 기분 좋은 콧방귀를 끼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 이름을 존경심을 가득 담아 불러봐. 호칭은... 그래, 선배님이 좋겠네."

나는 신음하며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지휘권이 흔들릴 일은 하지 않는다.

특히나 곧 전투를 치러야 할 상황이라면 더더욱 삼가야 한다.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런 상황이 생길 경우, 이따금씩 쓰려고 가져온 삶은 계란이었다.

"아쉽네. 함께 싸울 전우라고 믿고서 이걸 나눠 먹을 생각이었는데."

소년의 울대가 꿈틀거렸다.

이런 세상이 아니라면 평민이나 먹을 간식이라며 비웃었겠지만.

혹독한 추위, 그리고 이제는 구하기 어려운 계란이란 점에서.

이 동그란 물체의 가치는 엄청났다.

나는 시범 삼아서 세레나에게 그것을 하나 던졌다.

그녀는 당황한 눈초리를 보이다가 노트를 꺼내 들었다.

[먹어도 돼?]

"넌 이미 날 도와주고 있으니까."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눈앞에서 벌어진 거래에 레오는 무척이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소년의 사고방식은 단순했다.

뻔뻔스럽게 행동한다는 생각은 선택지에 없었다.

세레나가 계란의 껍질을 벗겼다.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그녀가 머리를 귓등으로 넘기며 한 입 베어 물자.

소년 안에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진 모양이었다.

"...잘못했습니다."

소년은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식욕에 굴복되어서는 몇 분 전의 상황을 까맣게 잊고서 무릎을 꿇었다.

동정심이 샘솟는다.

나는 들고 있던 계란 하나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허리가 조금 뻣뻣한 것 같은데."

"크윽!"

그는 망설였지만 일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식량이 지닌 가치는 대단했다.

소년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먹으면서 들어. 네가 할 역할이 뭔지. 그리고 말하겠는데 나는 기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하하, 명심하겠습니다."

레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모두에게 얘기할 상황이었지만, 우선 깨어 있는 사람에게라도 알려 줬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혼란이 커지는 걸 막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괴물이 접근하는 것을 세레나가 알아챘다.

[오고 있어. 네가 말했던 대로 커다란 녀석이야.]

숲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치 낮과 밤이 뒤바뀐 것처럼.

모든 동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북쪽에서 멀리 달아나려 한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어느샌가 장난기가 사라진 레오널드는 잠들어 있던 학생들을 일일이 깨우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이에요?"

"뭐야, 적이야?"

학생들이 깨운 이유에 대하여 묻고 있을 때.

쾅!

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벼락이 내려친 듯한 고함이 터졌다.

그건 잠결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소리였다.

우르곤이 설치해 둔 함정에 빠졌다.

그러나 놈을 죽이기엔 한참 모자랐다.

몇 분을 번 셈이었고, 그 시간은 이들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설명하는 데 써야 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고.

언제나 그렇듯이 살기 위한 전략을 머릿속에 그렸다.

50화

아델라는 눈을 떴다.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움켜잡고 강하게 흔드는 게 느껴졌다.

새우잠에서 벗어나며 잠이 덜 깬 눈으로 처음 마주한 얼굴은 레오널드였다.

경계심이 잔뜩 묻어난 심각한 표정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확인하였다.

곧 전투가 시작될 거라는 조짐이 강하게 풍겼다.

레오가 자신이 일어난 것을 보고는 타니아에게로 향하였다.

그녀가 일어나며 캠프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떴다.

"모두 일어난 건가?"

조슈아가 묻고 레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짧게 설명한다. 좀비가 나타났다. 변종이다."

변종이란 단어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좀비들 중에서도 지성을 지니거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괴물을 그리 불렀다.

아델라는 딱 한 번.

데릭 기사단장과 탐색을 떠났을 때 변종을 조우한 경험이 있었다.

근섬유가 드러나고, 두개골이 함몰된.

여느 좀비와 다를 바가 없는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무기를 들었다.

검을 든 괴물은 틀림없이 왕국 검술을 모방하며 덤벼들었다.

결판이 났을 때.

데릭은 턱 밑까지 떨어진 땀을 훔치며 귀찮은 상대였다며 빈정거리듯이 대답했다.

옆에서 보조하던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변종은 강했다.

세레나와 단둘이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괴물이 또다시 캠프 근처까지 다가온다고 들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10분 정도 시간을 끌었다. 나는 녀석을 사냥할 생각이야."

침울한 분위기를 뒤엎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동료였던 타니아를 제외하면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술렁거림이 격해지던 와중에도.

소년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는 여전했다.

"자, 잠깐만. 여기서는 능선의 캠프로 가서 단장들을 부르는 편이 안전할 거야."

그의 의견에 반대표를 던지듯이 냉큼 반박했다.

시험은 포기한다.

처음부터 부당하다고 생각했었다.

변종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그러한 의구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세레나의 탐지 마법을 쓴다면 밤길에서 캠프를 찾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여기서 능선까지는 2KM 정도 떨어져 있다. 평평한 길이라면 모를까 산행으론 얼마나 걸릴지 몰라. 녀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을 거고, 최악의 경우에는 여기 모인 여섯 중에 절반은 죽는다."

죽는다는 표현 앞에 자신과 칼빈이란 이름의 소년, 그리고 세레나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목숨이 걸렸다는 무게감에 짓눌리며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워진다.

아델라는 몇 번인가 생각을 거듭했으나.

결국 선택지를 넓히지 못하고 처음의 결심으로 되돌아왔다.

도망쳐야 한다.

그것을 다시 한번 어필할 생각으로 닫힌 입술을 열었다.

"싸운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얼마나 되는데?"

"도망치는 것보다는 높지."

"싸우는 방법도 위험을 동반한다는 의미잖아."

"그래."

"어느 쪽도 위험하다면 나는 도망친다는 판단을 굽히지 않을 거야."

도망치면 전멸은 피한다.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가 희생함으로써 생존하는 인간도 생긴다는 얘기였다.

반면 싸운다면?

레오를 압도한 조슈아는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실력을 지녔다.

그 부분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변종 앞에서는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배는 이미 변종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요."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의견을 제시한 사람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타니아였다.

그녀가 도중에 끼어들며 조슈아를 변호하듯이 대답했다.

아델라는 눈길을 거두고서 다시 한번 소년에게 향하였다.

"정말이야?"

"그래."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별로 대단한 업적도 아니란 듯이.

"어째서 말하지 않은 거야?"

"결심을 뒤바꿀 정도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변종을 잡았다는 말을 순순히 믿어 줄 리가 없잖아? 상대는 누구이고, 방법은 어떻고,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종국에는 의심으로 끝나겠지. 그러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델라는 반박하지 못했다.

용기를 쥐어짜 낸 소녀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심에 흔들림은 없었다.

조슈아가 의중을 꿰뚫은 게 통쾌한 모양이었는지.

조소를 섞어 가며 말했다.

"두 개로 집단을 나누자. 아델라 네가 능선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책임지고, 내가 변종을 상대하는 쪽을 맡는다."

담백할 정도로 깔끔한 상황 정리였다.

거울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아델라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상상이 갔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피부색이 창백해지며 입을 크게 벌렸을 것이다.

"힘을 합치지 않을 생각이야?"

"안 맞는 톱니바퀴를 억지로 끼울 필요는 없겠지."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타니아와는 달랐다.

시간을 들여서 신뢰를 얻지 못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문제로 힐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의심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작정 협력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실망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이 짧은 대화에만 5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함정을 빠져나온 우르곤이 캠프 근처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말씨름은 여기까지였다.

이미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이들이 흩어지며 우르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아 내었다.

캠프로 무사히 귀환하는 것까지는 자신의 영향 밖이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

가장 먼저 자신에게 다가온 것은 타니아였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레오널드가 뒤를 따랐다.

다른 세 사람은 자리에 앉은 채로 상황을 관망하다가.

아델라가 일어나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가 친구인 세레나의 손을 잡고서 돌아서려던 순간.

"...세레나?"

황금빛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던 소녀는 그 자리에서 동상처럼 서 있었다.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 사이에 미간이 구부러지는 것을 보고서 아델라는 침음을 삼켰다.

저항하고 있었다.

고향을 잃은 뒤로는 그녀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오라면 따라오라는 대로.

길 잃은 새끼 강아지처럼 타인의 말에 수긍하며 살아왔다.

"같이 싸우겠다는 거야? 좀비만 보면 벌벌 떠는 애가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아델라의 호통에 세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볼펜을 들었지만 글씨는 쓰지 못하고서 떠는 걸 반복한다.

그 광경은 무척이나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어떤 일들은 하루 만에 해결되지 않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야. 너하고 한 약속도 그런 종류일 테고."

조슈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대답이 소녀의 행동을 해방하는 열쇠라도 된 양.

얼어붙던 발걸음이 천천히 녹으며 친구의 손에 끌려 나간다.

"가 봐, 넌 아직 이쪽으로 올 때가 아니야."

조슈아는 앞으로 다가가 세레나의 손에 스크롤 한 장을 움켜쥐어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사용해라. 그리고 네 탐지 마법, 제법 괜찮았어."

아델라, 세레나, 칼빈.

세 사람이 캠프의 반대편으로 멀어져 간다.

숲의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키는 장면을 바라보며 레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마음이 심란했다.

"저 셋이 떠나는 것도 네 계획 안에 포함된 일이야?"

"물론."

"내가 남는다는 건?"

"그것도."

레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면을 걷어찼다.

이쪽의 행동을 읽고 있었다는 것처럼 거만한 얼굴이었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쪽은 변종을 앞에 두고도 네 편을 든 거라고."

"인사치레가 듣고 싶다면 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뒤에 해 주지."

"네 인사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나도 최선을 다할 거다."

레오는 혀를 찼다.

끝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작전은?"

"넌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놈의 시선을 끌면서 베는 것에만 집중해라."

"자, 잠깐만. 좀비잖아! 베이거나 물리면 감염 가능성이 있는 거고."

"그 부분이라면 안심해라. 열 번 정도는 맞더라도 안 죽게 할 테니까."

"진짜냐?"

"믿어라. 너는 지금부터 서포터의 캐리가 무엇인지 보게 될 거야."

"...서포터?"

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며 넘겨짚었다.

* * *

타니아는 숨을 죽였다.

등을 기대고 있던 소나무에서 목을 빼어 앞을 바라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회색빛의 번뜩임.

생동감이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동자였다.

곧장 들이닥치지 않았다.

틀림없이 이쪽에 자신들이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

그건 살아생전 짐승이던 때의 사냥 방법처럼 보였다.

'저게, 변종.'

호흡이 가빠 온다.

연구소에서 교수를 상대했던 것은 조슈아 혼자의 몫이었다.

자신은 보지 못했다.

그 압박감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며.

자신도 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지만.

그건 혼자만의 망상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일반 좀비와는 달랐다.

마치 좀비들을 몇 마리인가 한데 뭉쳐 놓은 듯한.

마법 용어로 해석한다면 이른바 키메라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편이 좋을까?"

곁에 있던 레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비 사냥에 일가견이 있어 보이던 그 또한 변종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오빠의 약한 소리 오랜만에 듣네."

"...그러는 넌, 저게 무섭지도 않냐?"

"무서워. 실금할 정도로."

"그런데 왜 조슈아의 편을 든 거야? 역시 정 때문인 거냐."

"아니야."

타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

레오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으쓱거렸다.

"선배는 자기희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거든. 스스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도망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야."

몇 달 동안 그와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는 냉정했다.

주변을 이용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자신을 거두어들인 것은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불]속성이라는 점이라든가.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순종적인 면모가 있다든가.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떤 이유로든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친해져서 좋은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 따라다니는 거야?"

"...냉정하지만 냉혈한은 아니야."

그는 함께한 동료들 중 누구도 저버리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게 최선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훼방꾼에 가까웠다.

지금에서야 1인분은 할 수 있다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조슈아는 혼자라면 더 잘했을 사람이었다.

그 얕디얕은 인연을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은.

상냥함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다."

참고가 된 모양인지 레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말을 잇지 않고서 맞은 편에 조슈아가 보낼 신호에 집중한다.

"잘 부탁해."

"응, 오빠도 힘내."

"내가 살아남길 바란다면 나보다는 저 녀석을 응원하는 편이 맞지 않아?"

"나한테는 레오 오빠가 훨씬 불안해."

"미치고 환장하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레오는 수풀 사이로 걸어 나갔다.

낙엽을 걷어차면서 주위를 끌자.

여태껏 숨만 고르던 곰이 표적을 결정한 듯이 으르렁거렸다.

천천히 다가온다.

땅에 떨어진 달빛을 조명 삼아서 상대의 덩치를 육안으로 확인하자.

"...하하하."

멋쩍은 웃음소리가 입가에 맴돌았다.

크다.

곰이 사람보다 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크다.

크기 4m에 다다르는 덩치.

육구를 드러낸 앞발의 크기만 자신의 상체와 엇비슷해 보였다.

"맞으면 좀비가 되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살아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겠네."

입으론 껌이라도 씹고 있는지 무언가를 질겅거리며 씹어 댄다.

자세히 관찰하자 그것은 사람의 팔처럼 보였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핏줄기가 상반신을 적시고 허리 아래로 이어졌다.

현기증이 덮쳐 온다.

눈앞에서 사람이 먹혔다.

몇 번이나 경험했던 일임에도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린다.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전신을 조여 온다.

"레오 오빠!"

타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시작된 명령이 몸 전체로 뻗어 나가지 않는다.

도중에 무언가가 꽉! 하고 틀어막은 듯한 느낌이었다.

검을 뽑아야 한다.

검은 어디에 있었지?

등 뒤에 있었다.

손을 목 뒤로 넘기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뽑아 낼 수 있었다.

그때 마음 한구석에서 실낱같은 감정 하나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손가락의 신호가 전달되고.

반사적으로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지만, 그보다 조금 빨리 곰이 덮쳐 왔다.

"으어어어!"

공기를 떨게 만드는 포효.

그러나 이미 자유로워진 몸뚱이가 적의 살의에 다시 움츠러드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공격을 받아 낼 방법이었다.

쾅!

곰이 허공에서 무언가와 부딪쳤다.

빛이 한데 모인 듯한 그것의 정체.

첫 번째 시험에서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조슈아의 방패였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자신을 공포로부터 지켜 준 실낱같은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싸움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가 자신에게 걸어 준 부여 마법이었다.

[평정심]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더 부여받았다.

[근력 강화].

평소보다 강해진 완력이 손끝에 똑똑히 느껴졌다.

화가 치솟았다.

같은 상대에게 두 번씩이나 도움을 받았다.

이를 악물었다.

세상이 이 꼴이 되며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자신은 지는 걸 누구보다 싫어했다.

51화

곰이 앞으로 돌진해 온다.

레오는 피할 생각도, 막을 생각도 없었다.

공격에만 집중해라.

조슈아가 해 주었던 말대로 오롯이 베는 것에만 몰두한다.

오라로 검신을 감쌌다.

하얀 열기가 피어오른 그것을 움켜잡고서 왼팔의 힘줄을 베었다.

검붉은 혈액이 튀어 올랐다.

곰의 팔목이 너덜너덜해졌다.

녀석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몸을 틀어서는 다시 한번 쇄도했다.

쾅!

조슈아의 [방패]가 다시 한번 자신을 지켜 주었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숲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레오는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곰이 [방패]를 피하여 오른쪽 빈 공간을 파고 들어왔다.

[방패]의 단단함을 학습하였다.

일반적인 좀비라면 생각하지 못할 방식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하얘지려던 것을 [평정심]이 억제한다.

검으로 조금 전 공격했던 왼팔을 겨냥하며 몇 번인가 휘둘렀다.

달빛을 머금은 강철이 번뜩일 때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곰에게 안겨 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손목을 부숴야 한다.

아니라면 다리를 노려야 한다.

자질구레한 상처들은 좀비에게 의미가 없었다.

"레오, 거리를 벌려라. 북쪽으로 150m 지점이다. 그쪽으로 가면 작은 낭떠러지가 있다."

어둠 속에서 조슈아의 지시가 들렸다.

선명하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레오는 그의 명령을 까먹지 않도록 입 밖으로 몇 번인가 되풀이했다.

그러던 사이에 그가 알려 준 지점 근처까지 왔다.

곰은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네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레오는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

슬쩍 고개를 돌렸다.

등뒤에 위치한 가파른 경사.

경사 아래로는 단검 따위로 뾰족하게 만든 나무 창들이 꽂혀 있었다.

이미 한 번 사용했던 모양인지.

몇 개는 부러지고, 몇 개는 날 끝에 피가 맺혔다.

"그 자리에서 대기해. 내가 신호를 보내면 몸을 숙이고서 눈을 감아라."

"자, 잠깐만 눈을 감으라고? 저 괴물을 상대로 시선을 피하면 죽는 것 아니야?"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레오는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다시 한번 곰과 격돌한다.

강하게 움켜쥔 검으로 집요하게 노려 왔던 왼팔을 베어 냈다.

튕겨 나간 팔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팔이 날아간 자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나 그것에 기뻐할 여유도 없이 곰이 남아 있던 오른팔을 휘둘렀다.

[방패]가 뻗어 오던 발톱을 막아 주었지만.

충격을 완벽하게 흡수하지는 못했다.

[방패]의 너머로 전해진 충격에 몸이 붕 뜨며 지면에 박혔다.

진흙탕에 파묻히며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참아 왔던 긴장감이 단숨에 터지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폐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자기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누가 내 신호도 없이 멋대로 숙이라고 했지?"

의식이 어지러운 가운데.

그의 목소리만은 이상할 정도로 똑똑히 들려왔다.

"네가 한번 맞아 봐! 숙이고 싶어서 숙인 게 아니라고."

"뭐, 됐어. 그대로 얌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로 있어라."

레오는 갈등했다.

지근거리에서 곰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이런 놈을 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기엔 너무 불안했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조슈아가 이쪽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연이어 경고한다.

이리 되면 믿고 맡겨야 한다.

크아아악! 곰의 포효가 귀를 찔러 왔고, 지면의 울림이 강해졌다.

소년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강렬한 빛 줄기가 감고 있던 눈 위를 뒤덮었다.

"크아아악!"

조슈아는 함정의 바로 뒤편에서 [섬광]을 사용했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은 곰이 허둥거리며 낭떠러지로 빨려 들어간다.

녀석의 배가 뒤집혔다.

"타니아!"

이번에 소녀의 차례였다.

하늘에서 불의 비가 떨어졌다.

곰의 털 위로 자욱한 불길이 휘감겼다.

"언제까지 처누워 있을 거냐. 일어나."

레오가 흙을 털어 내며 일어선다.

"으윽, 머리야."

레오는 두 눈을 의심했다.

쓰러져 있던 잠깐 사이.

함정에 빠진 곰이 불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보였다.

"이거 다 잡은 물고기 아니야?"

"아직 멀었다."

구멍 아래에서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곰이 경사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왔다.

놈의 몰골은 처음보다도 한층 더 흉측해졌다.

피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속살이 드러났다.

드러난 속살 사이로 근섬유와 하얀 골격이 비쳤다.

"레오, 오라는 얼마나 남았지?"

"거의 바닥났어."

"그렇다면 넌 이 자리에서 이탈해라."

"난 아직 더 할 수 있어."

"서 있는 것도 고작인 걸 안다. 강한 척은 그쯤 해 두고 방해되니까 사라져."

레오는 말을 삼켰다.

원래라면 공적을 가로챈다고 오해하며 물러서길 주저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라를 개방하면 체력 소모가 빨라진다.

곰과 싸우던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이었지만.

몇 시간은 치고받은 듯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여기까지였다.

못내 아쉬웠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차가워진다.

"고생했다. 나머지는 맡겨라."

레오는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여태껏 들어 왔던 칭찬 중에서도 특별히 더 기분이 좋았다.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건 아첨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동료로서 순수하게 격려해 줬다.

마음 한편이 간질거리는 것을 뒤로하고서 되도록 멀리 떨어졌다.

나무 근처에 몸을 숨기던 타니아와 만났다.

그녀도 마법을 쏘아 낸 여파로 숨을 헐떡거렸다.

"너, 무사한 거냐?"

"나는 괜찮아. 오빠는?"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이겠어."

레오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까스로 의식이 멀어지는 것만은 참았다.

고개를 내밀며 바깥을 살피자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조슈아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곰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운 것 같은데."

시작 전, 조슈아는 열 번까지는 공격을 막아 주겠다며 당부했다.

하지만 그 횟수는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섰다.

어림잡더라도 스무 번 이상.

옆에 있던 타나이를 살폈다.

표정이 일그러지며 식은땀을 흘렸다.

곰을 공격했던 불꽃은 그녀의 한계까지 쥐어짜 낸 공격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느낄 고통을 똑같이 겪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조슈아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크르르르."

우르곤은 으르렁거렸다.

눈앞의 인간을 바라보는 곰의 시선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지성으로 구분한 게 아니다.

냄새였다.

캠프 쪽으로 다가가며 함정에 빠진 이후부터 줄곧 소년의 냄새가 따라다녔다.

불쾌하다는 의식 정도는 남아 있었다.

변종이기에 미약하지만 그런 감정이 있는 것이다.

"크아아악!"

우르곤이 이빨을 앞세우며 공격했다.

쾅!

[방패]가 부숴졌다.

유리창을 깨부순 것처럼 작은 파편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강도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곰은 기세를 살리려는 듯이 이빨과 발톱을 휘몰아쳤다.

체구를 실어 가며 퍼붓는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바위도 산산조각 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조슈아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조금 전 상대했던 소년보다는 확실히 느렸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곰은 생각하지 않고서 계속해서 소년을 쫓았다.

"지치지 않더라도 말이야. 몸뚱이가 망가지면 능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우르곤의 몸은 레오와 타니아의 협공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의 방패가 무뎌진 것처럼.

놈의 상태도 처음보다는 약해졌다.

"아직은 많이 잡아먹지 못한 모양이네."

조슈아는 변종에 대한 지식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생명을 잡아먹을수록 강해지는 특징이었다.

살코기를 탐할수록.

지성을 되찾고 전생에 다뤘던 힘에 가까워진다.

우르곤이 더 많은 인간을 사냥했다면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네 입장에서 패인을 찾자면 그런 거고, 이 싸움은 이제 끝났다.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그리고 스크롤에 담긴 마법을 발동했다.

[방패]였다.

곰은 조금 전 [방패]의 방어력을 기억했다는 듯 발톱을 뻗었다.

콰직!

뻗은 발톱이 부러지고, 팔 가죽이 찢겨 나갔다.

스크롤의 장점은 담아 낸 마법을 사용할 때는 마력 소모가 적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담긴 마법의 능력 또한.

제작하던 당시의 마력을 기준으로 한다.

이 스크롤을 제작한 것은 어제였다.

"크르르르!!"

우르곤이 제힘을 감당하지 못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조슈아는 가지를 집었다.

그것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뿌리조차 제거되지 않은 묘목이었다.

그러나 이런 묘목이라도.

레오가 찢어 놓은 가죽과 타니아가 태워 버린 근조직을 뚫기엔 충분했다.

하나, 둘, 셋.

미리 준비해 놓은 그것을 사정없이 꽂아 넣었다.

살을 파헤치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끝이다."

남은 스크롤은 8장.

그중에서 일곱 장이나 되는 숫자를 허공에 흩뿌렸다.

모두 [성장]의 마법이 담긴 것들이었다.

스크롤이 빛나면서 우르곤에게 꽂힌 가지들이 일제히 발광한다.

콰지직!

곰에게 꽂혀 있던 수 개의 묘목들이 단숨에 성장하고.

자라난 가지들이 몸 안쪽을 파괴하면서 뚫고 나왔다.

뚫린 가지 위로 피와 뇌수가 흘렀다.

우르곤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브 퀘스트 – 삼림의 시련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코인 50개를 획득합니다.]

[화합의 신의 교리를 이행하였습니다.]

[코인 20개를 추가로 획득합니다.]

[보유 코인: 70]

화합의 신이라면....

트라이덴 마을에 있던 성당에서 알게 된 신이었다.

아무래도 이 싸움이 그에게 큰 감명을 준 모양이었다.

경전의 내용대로라면 그는 동료애를 중요히 여겼다.

이 코인이 두 사람과 함께 싸운 결과에 대한 보상이라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네."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이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곰의 심장 부근에 검을 찔러 넣었다.

기분 나쁜 감촉이었다.

[인내심]과 [강심장]이 아니라면 작업을 해낼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안쪽을 잘라 내며.

마침내 손이 닿는 위치에 원하던 물건이 보였다.

마력을 담은 심장.

그것은 사파이어처럼 영롱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부드러운 젤리보다는 딱딱한 원석에 가까운 질감.

심장을 꺼내고는 곧장 인벤토리에 남아 있던 공간에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정리되고 두 사람이 몸을 숨긴 장소로 향하였다.

"...너."

레오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사한 거냐? 그 변종은?"

"마무리를 짓고 오는 길이다."

레오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쪽은 오라를 사용한 여파로 탈진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직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상태는?"

"감염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디의 누구 씨가 기가 막히게 지켜 줬거든. 단지 마지막 공격은 아프더라."

"증상을 정확히 말해."

"매정하긴, 타박상이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진 모양이야. 숨쉬기가 괴로워."

"알았다. 타니아, 너는?"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력을 지나치게 쏟아 낸 것을 빼면, 그녀는 건강했다.

다시 시선을 레오에게 돌렸다.

"일어설 수 있겠어?"

"무리야."

"조금 아쉬운데."

"저런 괴물을 상대하고도 아직 움직일 수 있는 네가 이상한 거라고."

"너라면 더 잘할 수도 있었어."

레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모양새였지만.

그 기대에 부응할 힘이 자신에게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 좀비가 오면 어떡하지? 곰과 싸울 때 소리가 크게 났던 것 같은데."

"내가 경계한다. 괜찮다면 검을 빌리고 싶은데."

레오는 손을 뻗어서 옆에 놔둔 검을 집었다.

그에게 주려고 팔에 힘을 주어 본다.

손이 어깨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않았다.

"미안하지만 네가 직접 들어야 할 것 같다."

"알았다."

조슈아는 다가와서는 검을 집어 들었다.

허리를 숙인 그가 레오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잔소리만 해 댔지만 네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널 써먹은 거다. 100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50점은 되겠어."

"칭찬 맞는 거냐?"

"알아서 생각해라."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단 한 번도 90점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네 평가는 교관들보다 깐깐하네."

레오는 쓴 웃음을 지었다.

빈정거리며 말했지만 내심으론 흡족해하는 중이었다.

50점이란 말은 아직 채워야 할 부분이 절반이나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없던 승부욕도 활활 타올랐다.

조슈아는 자신의 성격까지 감안하여 이 점수를 책정한 것 같았다.

"너한테 하나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다."

"뭔데?"

"너, 나랑 함께 일해 볼 생각은 없냐?"

52화

캠프를 떠난 아델라는 아직까지 능선 위로 도착하지 못했다.

"얼마나 남았어?"

길잡이 역할을 맡아 주던 세레나에게 물었다.

그녀가 평소처럼 노트를 꺼내고 글자를 적어 간다.

[얼마 안 남았어.]

"그래."

아델라는 한숨을 흘렸다.

초조했던 마음이 점차 누그러지며 뒤편에 남겨 둔 이들을 걱정할 여유도 생겼다.

지금쯤이면 변종과 마주했을 것이다.

이겼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기대감과 불안감이 뒤섞여 어느 쪽으로 더 마음이 기우는지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곁에서 나란히 걷던 칼빈이 말했다.

그건 세레나를 향하여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서 주변을 수상쩍게 바라본다.

[좀비가 있어. 그것도 꽤 많아.]

아델라의 가슴이 요동쳤다.

들뜬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배낭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피할 수 있는 길목은 있어?"

세레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왔던 길목을 빼고는 사방에 가득해.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열 마리가 넘을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였다.

능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리더가 되어 있었다.

아델라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달빛 기사단에 합류하기 이전 사람들을 이끌었을 때.

몇 번인가 죽음과 삶에 대한 선택지를 강요받아 왔었다.

"...싸우자."

갈등 끝에 결단을 내렸다.

목소리는 불분명하고 흐릿하게 전해졌다.

석연찮은 기분을 느낀 두 사람이지만 달리 반대하지 않았다.

책임을 떠안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칼빈은 검을 뽑았다.

세레나는 이쪽에 시선을 주면서 노트를 보여 줬다.

[싸우려면 탐지 마법을 풀어야 해. 그리고 싸움이 끝났을 때 다시 쓰기는 어려울 거야.]

아델라는 침음을 삼켰다.

탐지 마법의 가치와 그녀의 전력으로서 가치가 충돌한다.

무엇을 고르는 게 유리하지?

속이 울렁거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하던 것을 참아 낸다.

"나와 칼빈이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세라나 너는 기다려 줘."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비들은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포위되려고 한다.

허둥대지 않고 머릿속으로 술식을 그렸다.

공기 중의 수분을 끌어 모으고 얼음 뭉치로 깎아 낸다.

고드름처럼 날카로워진 그것을 가장 앞에 있던 좀비에게 발사했다.

"크아아악!"

머리에 맞추려던 것이 어깨로 빗나갔다.

좀비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칼빈이 앞으로 달려 나가 머리를 베어 버렸다.

제법 괜찮은 솜씨였다.

회담장에 오기 위하여 선별된 만큼.

레오널드보다는 못하더라도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유한 학생이었다.

"이대로 한쪽 방향을 공격하면서 포위망을 뚫자."

그렇게 말하자 칼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조금 거리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기세 좋게 달려 나가서 두 마리 정도를 연이어 베었다.

"칼빈, 앞서 나가지 마!"

"너희들은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길을 열어 줄 테니까."

칼빈의 뒷모습이 어둠으로 물들어 갔다.

돌연히 등줄기에 한기가 내려앉는다.

몇 번인가 같은 일을 경험한 듯한 기시감.

말려야 한다.

그러나 목은 무언가에 꽉 막힌 것처럼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두려운 감정을 떨쳐 내려 안간 힘을 쓰고 있을 때.

속절없이 흘러가던 시간은 기어코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끄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자신 있게 따라오라던 소년의 것이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나며 시야가 흔들거렸다.

소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와줘!"

두 마리의 좀비가 소년의 몸 위로 올라타 물어뜯었다.

오른팔과 왼쪽 어깨였다.

물고 있던 부위를 턱으로 잡아당기자 근육인지, 살점인지 모를 것이 실타래처럼 늘어졌다.

소년이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떨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비명도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입고 있던 셔츠는 와인색을 띠었고, 점차 번져 나갔다.

아델라는 얼음 화살을 날렸다.

7개에 이르는 화살들이 좀비를 꿰뚫고 나아간다.

벌집이 된 놈들이 몸을 휘청거리며 소년에게서 떨어진다.

"헉헉, 칼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쓰러진 소년에게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보고서 후회했다.

콧물과 눈물, 침으로 뒤덮여 몰라볼 정도로 일그러졌다.

죽기 직전까지 소년이 느꼈을 공포가 전해지는 듯한.

그의 상처를 들여다본다.

살점이 벗겨지고, 벌어진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원인은 쇼크사였다.

아델라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세레나가 얼어붙은 자신을 잡아 끌었다.

"세, 세레나?"

노트에 대답을 적을 여유는 없었다.

이 두 마리가 포위한 좀비의 전부는 아니었다.

아델라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씩 냉정을 되찾자 조금 전 화살에 지나치게 많은 마력을 사용한 걸 알아차렸다.

두 마리를 상대하는 데 화살 일곱 개를 사용하였다.

"아아."

아델라는 탄식했다.

시선을 어디에 두더라도 좀비가 길목을 막고 있었다.

식탐에 짓눌린 괴물들이 천천히 간격을 좁혀 온다.

딱 한 번밖에 남지 않은 마력 한 방울.

그것으로 주변에 얼음으로 만든 벽을 세웠다.

이틈에 탈출할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더라도 살아 나갈 퇴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뭘 하려는 거야?"

세레나가 손으로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건 조슈아로부터 받은 스크롤이었다.

그는 위험하면 이걸 사용하라고 말하였다.

마력을 끌어 모으며 스크롤 안에 저장된 마법을 해방하였다.

스크롤 안쪽에서 강한 섬광이 흩뿌려졌다.

재빨리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시력을 빼앗겼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몇 초 후.

빛은 완전히 잦아들고 다시 한 번 어둠이 도래했다.

"이게 끝이야?"

좀비들의 반응이 둔해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이들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잠시 주춤거리던 녀석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얼음으로 된 벽을 두드렸다.

쾅! 쾅!

귀에 거슬리는 굉음이 들려온다.

좀비들은 제 몸을 아끼지 않으며 계속해서 들이박았다.

찌직! 벽에 균열이 일어났다.

굳어진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눈물만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싫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누군가, 누군가 제발 도와줘!"

힘없이 흐느끼는 목소리에 좀비들의 반응은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의 두려움을 이해하는 생물은 아니었다.

단지 먹이가 코앞에 있음에도 손이 닿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어떠한 의도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곧 죽는다.

산 채로 잡아 먹힌다.

허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자.

벨트에 달아 놓았던 단검이 고리 밖으로 튕겨 나갔다.

본래의 쓰임새는 재료의 손질이나, 채집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다른 목적을 지니고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세레나, 어디를 찌르면 안 아프게 죽을 수 있어?"

곁에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머, 머리인가? 아, 아니면 목이겠지? 할복은 어렵다고 들었어. 배를 찌르는 건 죽는 데 오래 걸린다고...."

얕은 지식을 내뱉으며 단검으로 찌를 부위를 골라 간다.

손은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떨림을 진정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번에 죽지 못하고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조슈아를 따라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내가 실수한 걸까?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묻자.

세레나는 그런 자신을 끌어안으며 위로한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식어 버린 몸에 열기가 스며들며 미약하게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그저 고마운 마음이었다.

자신을 탓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친구인 그녀는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미소밖에 지을 수 없는 그녀의 메말라 버린 감정 때문인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따뜻함은 중독될 것처럼 포근했다.

콰직!

벽이 무너졌다.

보지 않더라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몇 초 뒤면 괴물들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잡아 끌 것이다.

"으어억!"

쏴아악!

좀비의 탁한 신음 사이로 바람 소리가 휘몰아쳤다.

그게 착각이 아니란 걸 알려 주려는 것처럼 몇 번인가 반복된다.

이윽고 바람 소리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낙엽을 밟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은 했다만, 녀석이 날 불러낼 리가 없지."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델라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눈앞에는 웬 남자가 서 있었다.

그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조슈아에게 빚을 지게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거든. 한데 구한 게 너희들이라면 입장은 바뀐 게 없겠지. 이건 데릭 경과 상담해야 할 일인가?"

속상한 듯이 빈정거리는 말투.

아델라와 세레나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입 모양만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그 녀석에게 감사해라. 오늘 너희가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부 그 녀석 덕분이니까."

로드웰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칼집에 집어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