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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rvival>

올해 출시 예정인 신작 게임의 이름이었다.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흔한 장르였지만, 현대를 무대로 두지 않는다는 특이점이 있었다.

'이 게임, 쉽지 않네.'

'THE Survival'의 배경은 아카데미였다.

중세와 판타지가 적절하게 섞인 이곳은, 검과 마법을 배운다는 흔한 설정이었다.

하나 만들어진 캐릭터는 이곳에서 어떠한 강의도 듣지 못한다.

학창 시절의 풋풋한 일상 또한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 불명의 이유로 좀비들이 들끓는 세상으로 바뀌었고, 아카데미 또한 안전하지 못했다.

마법으로도, 연금술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상 현상.

아카데미는 교육의 장에서 생존을 위한 아지트로 변하였다.

좀비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현대에선 익숙한 괴물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무명(無名)의 괴물이었다.

무엇이 약점인지, 어떤 변종이 존재하는지.

살아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걸 찾아내어 공략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역할이자, 실력이었다.

1회차에서는 보름을 생존했다.

2차에서는 한 달.

3차에서는 두 달.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생존 기간이 늘어났고, 참여한 유저들 중에서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끝끝내 클리어는 실패했다.

"음?"

어느 날.

나는 소문으로만 듣던 운영자라는 사람과 연락이 닿았다.

-다음이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얼마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게임에 대한 감상을 물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는 이상한 질문을 해 왔다.

-글쎄요, 열심히는 할 생각입니다만.

-그런 마음가짐으론 곤란합니다. 다음번에는 끝까지 살아남는 걸 목표로 해 주세요.

-클리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중간한 각오로는 다음 회차 때 살아남기 힘드실 겁니다.

-게임이 더 어려워진다는 말씀인가요? 지금도 밸런스 개판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릅니다만, 분명 지금보다도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조건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세요. 그래야 도전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성격이라도 고를 수 있도록 패치해 주세요.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그저 홧김에 저질러 본 요구였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캐릭터의 성격은 중요한 요소였다.

캐릭터의 성격에 문제가 많으면 플레이할 때마다 디버프에 걸렸다.

디버프가 쌓이면 캐릭터는 자해를 하거나, 미쳐 버리고, 우울증에 빠졌다.

-원하는 성격을 말씀해 보세요.

나는 당황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이 정도만 들어가도 좋을 것 같은데.

바라는 성격은 그보다 많았지만, 이 이상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

아니, 이미 과분할 정도였다.

공포 게임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만큼 사기적인 성격은 없으니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만들겠다, 추가하겠다 같은 대답이 아닌 찾아보겠다는 대답.

이미 만들어진 캐릭터 중에 알아보겠다는 뜻일까?

-그거면 충분한가요?"

-가능하다면 회복 마법을 가진 캐릭터가 좋을 것 같습니다. 게임 내에서 조사하기로 마법의 속성 가운데 '성 속성'이란 게 있다고 하던데,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는 아직 없더라고요.

THE Survival은 견습 기사 또는 견습 마법사로 시작한다.

양쪽 모두 질리도록 플레이해 왔다.

하지만 마법사 중에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속성이 남아 있었다.

'성 속성'.

방어와 치료에 집중된 속성이었다.

-알겠습니다. 두 조건 모두 수용해 드리겠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럼 이번에는 끝까지 살아남길 바라겠습니다.

단순하게도 그때의 자신은 '살아남는다'라는 뜻이 게임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었다.

거기까지가 책임자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이후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을 때.

자신은 운영자가 했던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 * *

'몇 시간이 흘렀지?'

강민혁은 벽면에 붙은 시계의 초침을 살펴봤다.

깨어난 뒤로 한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충분할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게임을 끝내고는 침대에 누워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게 어제 한 일의 전부였다.

눈을 떴을 때는 소파가 아닌 벽에 기댄 채로 쓰러져 있었다.

강민혁이 아닌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

'이거 빙의 맞지?'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 보고는 한다.

게임이나, 소설에 빙의하면 누리게 될 판타지 라이프.

검과 마법을 배우고.

용이나, 요정 같은 존재들과 관계를 쌓으며.

명성을 얻은 다음에는 검성이라든지, 현자라든지 불리며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강민혁.

그 또한 빙의가 행복을 향한 지름길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게임 중에서 왜 여기에 들어온 거냐고.'

최악의 빙의였다.

숱한 기회가 있었건만 끝끝내 클리어에 실패한 게임.

THE Survival.

미래에 예정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빙의한 캐릭터조차 자신이 해 보지 못한 캐릭터였다.

뺨을 강하게 꼬집어 본다.

그럴수록 이곳이 현실이란 사실만이 생생해졌다.

'움직이자.'

언제까지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이 자신이 알던 게임이 맞다면 서두를수록 좋았다.

이 게임은 스타팅 지점이 랜덤이었다.

물자가 풍부하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떨어질 확률은 드물다.

튜토리얼로 알려 주는 정보도 없었기에, 유저는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붙은 거울 앞에 다가섰다.

외모는 훌륭하다.

체격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편이다.

'이게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면 꽤나 먹혔을 얼굴이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

THE Survival은 공포, 생존 어드벤처였다.

단지 게임의 장르가 바뀐 것만으로 중요한 것의 순위가 바뀐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어두운 시야 속에서 푸른 불빛이 모여들더니 글자로 변하였다.

캐릭터의 배경과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조슈아 팔라리온.

그는 몰락한 가문의 장남이었다.

귀족도 그렇다고 평민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인물.

아카데미라는 거대한 사교장에서 그는 어느 무리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이미지라도 좋으면 친구 하나쯤은 곁에 있을 법도 하거늘.

그는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 동안 게으른 모습만을 보여 준 인간이었다.

'타고난 한량이었네.'

툭 하면 수업에 결석하고 교칙을 우습게 여겼다.

성적도 형편없었다.

학년만 5학년일 뿐.

실력을 나누는 기준인 클래스에서는 가장 아래인 노비스였다.

본인이 원하지 않은 입학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항심으로 공부를 소홀히 한 게 원인이었다.

'일단 배경은 엉망이고.'

이 세계에서도 배경이 빵빵하면 도움이 된다.

안타깝게도 조슈아의 배경은 좋지 못하다.

다음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생존에 필요한 능력이었다.

'스테이터스도 생각했던 것보다도 심각하네.'

[이름 : 조슈아 팔라리온]

[5학년(18) – 노비스]

[잠재 능력 – 미발견]

[성격적 특성 –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외톨이) (야행성)]

[후천적 특성 – 미발견]

[보유 코인 – 0]

[독창성 LV1 – 신성 마법]

[체 력: 10]

[근 력: 5]

[민 첩: 10]

[마 력: 150]

[신성력: (1,000)]

이 녀석이 얼마나 나태한 학창 시절을 보내 왔는지 상태창에 전부 나왔다.

마력을 제외한 3개의 스탯이 평균 미달이었다.

'마법사 지망이라도, 아카데미 입학 과정에서 신체 능력 테스트를 받았을 텐데, 어떻게 통과한 거야?'

의문이 치솟는 스테이터스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마력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가 지닌 가문의 혈통이었다.

성 속성.

자신이 운영자에게 말했던 속성을 조슈아가 보유하고 있었다.

[독창성 LV1 – 신성 마법]

[신성력: (1,000)]

각 캐릭터마다 고유한 독창성(Originality)이 존재한다.

신성력은 기적을 쓰기 위한 마력의 일종으로, 혈통으로만 지닐 수 있는 희귀한 마력이었다.

현재 독창성의 레벨은 1.

다른 캐릭터들과 똑같다면 레벨이 증가할 때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외톨이] [야행성]

성격은 총 6개.

이만하면 캐릭터들 사이에서는 최상급에 속한다.

무려 1티어 성격 4개와 2티어 성격 2개였다.

이 중 몇 개는 자신이 운영자에게 부탁했던 성격들이었다.

'...이 상황이 그 운영자의 짓이라고?'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가 조슈아라는 캐릭터에게 없던 성격을 불어넣은 것인지.

아니라면 본래 잠재된 개성이 그랬던 것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머리가 금세 차가워졌다.

[냉정함]의 효과였다.

'우선은 주변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나는 자리에 일어났다.

그러고는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밖은 음침할 정도로 고요하다.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대신하여 다른 녀석들이 눈에 띄었다.

탁한 눈빛과 문드러진 살점.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너덜너덜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배회했다.

"저것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좀비.

설정대로라면 놈들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괴물이나 악마라고 불리는 게 흔하며, 어떤 이는 죽음 그 자체라고 불렀다.

놈들은 한 달이란 짧은 시간에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세력은 계속해서 덩치를 불려 갔다.

시커먼 탁류는 이곳 왕립 아카데미마저 덮쳤고, 학생들이 고립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아마 대다수의 병력들은 수도를 지키는 데 투입되었겠지.'

구조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했을 때도 외부의 누군가가 찾아오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지금은 낮이라 조금 잠잠한 편이네.'

몸을 틀어서는 방 안을 살피기로 결심했다.

책상과 침대부터 시작하여 눈에 보이는 공간은 닥치는 대로 뒤졌다.

찾아낸 물건 중에 쓸 만한 것은 세가지였다.

건물 안이 그려진 지도와 신성력을 사용할 때 쓰이는 십자가.

팔라리온 가문이 모시는 신에 관한 책이었다.

"다른 건 더 없는 건가?"

물과 식량은 보이지 않았다.

이 방안을 나서서 수색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나는 들고 있던 지도를 펼쳤다.

기숙사 4동.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곳은 5학년 학생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정석대로라면 한동안은 여기서 머무르는 게 좋겠네.'

왕립 아카데미의 부지는 대단히 넓었다.

본래 어느 대귀족이 소유하였던 영지 전체를 학교를 위한 시설로 개조한 결과였다.

기숙사만 하더라도 15동이 존재하며, 건물들 사이의 거리도 상당하다.

"...후."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스스로에게 위화감이 느끼던 중이었다.

현대의 강민혁이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들을 거침없이 해 나가고 있었다.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서두르자."

시선을 돌려서 창가를 바라봤다.

햇볕이 비집고 들어온 자리에는 어느샌가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방문으로 다가갔다.

나가기에 앞서서 귀를 대고는 바깥의 소리에 집중했다.

바람이 흘러 들어와 좁은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음색.

그 소리 속에 좀비의 신음은 섞여 있지 않았다.

끼이익.

문을 열어젖혔다.

예상대로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은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분명히 알려 주었다.

피로 얼룩진 바닥.

깨진 창문.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냄새.

몇몇 방은 문이 활짝 열린 상태로 개방되었다.

"내가 하던 게임이 맞네... 그나저나."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누구라도 소름이 돋을 만한 분위기 속에서, 내 심장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특성이 지닌 효과였다.

[강심장] [냉정함] [인내심]

본래 하나만 있더라도 강력한 특성들이 합쳐지며 효과가 강해졌다.

'현실의 나라면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기만 했을 텐데.'

공포 게임을 하는데, 공포를 모르는 인간이 되었다.

"이 능력은 여러모로 편리하겠어."

매번 THE Survival을 플레이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인한 디버프로 얼마나 고생했던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캐릭터가 얼어붙었다.

"이제 그럴 일은 생기지 않겠지."

지금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었다.

천천히 발을 떼었다.

망설임이 사라진 움직임이었다.

바람 소리가 이따금 창문을 두드릴 때에도 내 시선은 언제나 정면이었다.

"헉헉, 도와주세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 근처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남학생과 여학생이 기숙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바로 뒤로 좀비들이 쫓아왔다.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까."

둘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다리가 점점 느려지고, 이내 여학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학생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업어서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겠지만, 그 행동이 실수였다.

포식자들.

좀비는 지치지 않는다.

굶주림에 지배당한 괴물들은 쓰러진 먹이를 향해 나아갔다.

"꺼져! 오면 죽여 버릴 테다."

남학생은 검을 뽑았다.

그는 장래에 기사를 목표로 한 생도였다.

자세를 잡으며 놈들에게 위협해 보지만 효과는 없었다.

좀비에게 지성은 없다.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을 먹어 치운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남학생은 뒤늦게 자신만이라도 살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다.

몇 마리가 그의 공격에 당했다.

하나 쓰러진 좀비들보다 많은 숫자가 다시금 빈자리를 채웠다.

이젠 끝이었다.

나는 창틀을 움켜잡았다.

내가 구하지 못한 생명이었다.

그리고 저 상황이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음을 상기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특성의 영향인지 곧 진정되었다.

"...."

모여든 좀비들이 흩어졌다.

피가 낭자한 바닥에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역시 이 아카데미는 지옥이 틀림없었다.

2화

난생처음으로 사람이 죽는 광경을 보았다.

죽어 가던 학생들의 단말마가 아직까지 귓가를 맴도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제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

입 밖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곳이 게임 속이란 증거들이 잇달아 나왔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으론 부정하고 싶었다.

왜, 하필이면 여기인가?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야 할 만큼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던가?

마음속이 복잡하다.

"...미쳤군."

생각이 깊어질수록 조슈아가 지닌 성격들이 채찍질해 왔다.

나는 몸을 틀었다.

살아남으라는 조언을 무시할 수가 없었고, 그 조언이 옳다는 걸 받아들였다.

학생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수색을 이어 나갔다.

처음 들른 곳은 옆방이었다.

조심스레 들어간 안쪽은 이미 누군가의 손길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 방에서 지내던 학생 짓이겠군.

그리 생각하며 놔둔 물건이 없는지 살펴봤다.

수납장을 열었다.

몸을 숙이며 좁은 공간들을 보았다.

바닥을 두드려 보고 천장을 확인해 보는 수고도 잊지 않았다.

그런 노력에도 나는 빈손으로 방을 나와야만 했다.

"게임하던 때와 비슷하다."

허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게임이 얼마나 불친절한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차례대로 남은 방들도 확인했다.

마지막 방까지 둘러보고 나왔을 때도 내 손은 여전히 빈털터리였다

"물과 식량을 구하려면 내려가는 수밖에 없나."

서 있던 자리 왼편에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는 목을 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웠다.

그리고 미약한 신음이 들려왔다.

몇 마리나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좀비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당장 물과 식량이 급하지는 않았다.

[인내심] 덕택에 일주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버틸 수 있으니까.

하나 그렇게 버티는 사이에 누군가는 움직였다.

급해서도 안 되지만, 느긋하면 전부 잃는다.

1회차 때 얻은 교훈이었다.

일단 깨어났던 방으로 돌아왔다.

방안은 위태로운 전등 하나가 어둠을 밝혔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피로감이 몰려온다.

한 층을 확인하는 간단한 작업이었는데도 힘에 부쳤다.

"...내려갈 계획을 세우자."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것이 [외톨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러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답답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일단 현재 사정을 되짚어 보면...."

무기는 구하지 못했다.

만들기 위한 재료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 마법은 사정이 나았다.

게임을 플레이해 온 덕택에 이쪽 분야의 지식은 상당한 편이었다.

나는 간단한 마법 하나를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술식과 이론을 떠올리고는 마력을 끌어 올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팍!

빛이 번뜩였다.

"음?"

단 한 번의 시도로 성공했다.

처음은 실패하리라고 생각했다.

술식과 이론을 외우고 있었지만, 나는 게임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단축키를 누르면 스킬이 나가는 것과는 달랐다.

"수백 번은 실패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THE Survival.

이 게임에서 마법은 어렵기로 소문난 학문이었다.

아카데미의 학생 중에 마법사로 졸업하는 이들은 고작해야 30%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스스로에게 재능이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전공을 바꿨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로는...."

떠오르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조슈아라는 캐릭터가 지닌 재능이었다.

그에 관한 설정을 되짚어 보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면서도 공부를 소홀히 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잠재된 재능을 꺼내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의 단점을 보완해 주었다는 뜻인가?"

그가 배우길 거부했던 지식들이 내 머릿속에는 한가득이었다.

수차례 플레이하며 쌓은 지식.

그것들이 조슈아의 육체와 합쳐진 결과였다.

[잠재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격세 유전(신성) / 습득의 대가(마법)]

[격세 유전(신성)]

-조상의 재능이 세대를 뛰어넘어 발현되었다.

신성 마법에 한하여 성공률이 크게 증가하고, 위력을 1랭크 상승시킨다.

[습득의 대가(마법)]

-마법을 훈련하여 얻는 숙련도가 증가한다.

실패할 때마다 문제점을 보완하며 최종적으론 100%에 이른다.

잠재 능력.

THE Survival의 시스템 중 하나였다.

이 게임은 캐릭터에 대한 정보를 모두 공개하지 않았다.

몇몇 종류는 플레이하는 와중에 발견해야 하며, 잠재 능력이 그런 종류에 해당되었다.

"이렇게 좋은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버려 두고 있었구나."

문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잠재 능력의 해방에는 진심이 필요했다.

조슈아는 학업에 불성실했기에 이것들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진지하게 마법을 배웠다면 네 운명이 변했을지 모를 일인데."

나는 게임을 하던 동안 조슈아를 만난 적이 없었다.

수많은 그룹을 겪어 왔고, 몇 년이란 시간을 버티는 데 성공했지만.

그에 대한 소식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제길, 또다시."

[냉정함]이 감상을 떨쳐 내라고 조언한다.

"내 몸뚱이에 대해서 걱정하는 건데도 불만이냐?"

나는 혀를 찼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것이 운명이든, 우연이든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마법 연습이 먼저였다.

재차 마법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이 빛이 번뜩였다.

"뭔가 실수하고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술식은 불 속성의 기본이었다.

원래라면 작은 불씨가 튀어나와야 했다.

"...설마."

눈을 감고 능력치를 살펴봤다.

[신성력 - 995]

짐작대로 신성력이 조금 떨어졌다.

"그런 건가."

나는 몇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마법은 실패했다.

아니, 다른 형태로 성공을 거듭했다.

"다른 속성의 술식도 성(聖) 속성으로 치환하는 건가?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건 가치가 높을지도 모르겠어."

성 속성은 치료와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THE Survival에서 갖는 이점은 상당했다.

이 세계에서 상처를 치료할 수단은 연금술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반면 그 필요성에 비해 공급은 한없이 부족하다.

포션을 제조하는 데 쓰이는 약초가 귀한 탓이었다.

하여 부상자는 상처를 방치하거나, 붕대로 감는 게 전부였다.

"상처를 고칠 수 있다는 건 대단히 유용하다."

환부를 놔둔다면 문제가 생겼다.

상처가 썩거나, 2차 감염으로 이어져 위독한 처지가 된다.

그때부터는 동료들도 외면하기 시작한다.

살릴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항생제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약을 구할 수도, 아는 사람도 없다."

신성 마법은 그런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 마법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너에 대해 한 가지 알았다."

이제는 들릴 리 없는 이 몸의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걸 바라고서 입을 연 것은 아니었다.

"정해졌군."

해야 될 것이 정해졌다.

현재 독창력의 레벨은 [LV1]이다.

이 레벨에서 가능한 신성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 숙제였다.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 *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잠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4층을 탐색하며 쌓였던 피로가 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럼에도 잠에 들지 못한 것은 경계심 때문이었다.

새벽에 일이 터졌다.

어제 해 질 녘에 있던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어떤 이유로 건물을 빠져나온 학생들의 무리가 좀비들에게 쫓겼다

그들 중 일부는 어제 보았던 학생들과 같은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몇 명은 살아남아 내 시야에서 벗어나 사라져 버렸다.

어떤 이유일까?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내던 거주지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게도 저런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건 현장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루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네댓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앞으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고, 그중에는 내가 포함될 수도 있었다.

기분이 뒤숭숭하다.

무섭기도 했지만, 괜찮다는 마음도 있었다.

강민혁이라는 본래의 인격과 조슈아라는 캐릭터의 인격이 부딪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 도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동이 틀 무렵까지 신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신성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힘을 빌려 주는 신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잠재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속독]

[속독]

-책을 읽어 내는 속도를 증가시키고, 이해력을 높인다.

책을 읽던 중에 또 다른 잠재 능력을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책 1권도 열중하여 읽은 적이 없는 거냐?"

눈앞에 조슈아가 있다면 한마디 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이제 그 몸의 주인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념을 떨쳐 내고는 책을 읽는 데 집중했다.

"이런 종교는 처음 보네."

책에 적힌 신은 자신이 알던 신들과는 달랐다.

이름은 외톨이 신.

[신은 모두를 구원하지 않는다]

[신은 오직 도움을 받을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은총을 베푼다.]

[신은 이타심을 존중하나, 이기심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신자는 선교할 의무가 없다]

[신자는 신보다도 스스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신자는 강자가 될 필요는 없으되, 약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에 대한 이해가 증가하여 신성력 사용량이 증가합니다.]

[신성력 1,000 -> 1,500]

['방패'가 사용 가능합니다.]

['정화'가 사용 가능합니다.]

신을 설명하는 글귀 중 일부였다.

그는 신이라는 위치에 걸맞지 않게 무척이나 현실적인 양반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신자들에게도 분명히 하였다.

나는 웃으며 책을 덮었다.

어쩌면 이 신과는 제법 마음이 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뭘 할까?

이번에야말로 잠을 자야 한다.

[인내심]은 피로도도 억눌렀지만, 한계는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대로 향하던 중.

"...음?"

쿵!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 아니었다.

젠장!

어떤 녀석의 소행인가?

좀비는 청각에 예민하다.

조금 전 소리로 내부에 있던 좀비들이 흥분하거나, 외부에 좀비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골치 아프게 만드네."

잠자코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내 목숨과도 직결된 일이었다.

나는 소리가 들렸던 장소를 추려 냈다.

가까웠다.

바로 옆이나, 뒤쪽이라는 느낌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4층으로 올라온 건가?

아니,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3층이 조용했을 리는 없다.

4층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답은 하나다.

아래층에 생존자가 있었다.

학생인지, 교수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모르나 누군가가 있었다.

무슨 이유일까?

본인이 탈출하기 위함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인가?

이유야 어떻든 내게는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어젯밤 시험했던 마법을 사용했다.

탁!

손가락에서 빛이 번뜩였다.

하늘이 어두웠기에 빛은 눈에 띌 정도로 번뜩였다.

"마법이다! 혹시 거기 누구 있나요?"

사람이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아래층 창문에서 손이 튀어나와서는 휘적거렸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목소리로만 판단하면 여성이었다.

팔의 소매 부분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아카데미의 정복이다.

즉, 학생이란 뜻이다.

"그렇습니다."

침묵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사고를 일으킨다면 나 또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아!"

감격한 듯이 그녀가 신음했다.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3학년 기숙사에 지내니, 역시 3학년생이시겠죠? 4층은 어떤 상황인가요?"

질문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낯선 사람에게 곧바로 자신을 소개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제가 먼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네? 아, 말씀하세요."

"조금 전 '펑' 터지는 소리. 당신이 낸 건가요?"

"마, 맞아요.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릴 방법이 그것밖에 안 떠올라서."

"멈추세요. 죽고 싶지 않으면."

일부러 쌀쌀맞게 대답하였다.

그녀가 내 뜻을 경고로 받아들이길 바랬다.

"...죄송합니다."

염치가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쉽게 흥분한다.

그건 게임 속 캐릭터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다.

반면 그녀는 침착했다.

"저기 아직 계세요?"

내가 사라진 줄 알았던 건지 다시금 대답해 왔다.

"아직 있습니다."

"저도 질문에 대답해 드렸으니,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은 혼자인가요?"

"맞습니다."

"...그렇군요."

목소리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내게 동료가 있길 바란 마음에 물은 것이겠지.

쿵쿵쿵!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또다시 소음이 들려왔다.

"헉!"

그녀가 당황했다.

아마도 그녀의 방에 좀비가 몰려온 모양이었다.

원인은 조금 전 마법이었다.

"노, 놈들이 왔어요."

"목소리를 낮추세요. 비명을 지르면 안 됩니다. 아침이니, 어두울 때만큼 끈질기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죠? 마치 놈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안다.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내게 강력한 무기가 있다면, 그건 신성력 따위가 아니라 좀비에 대한 이해였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약해졌다.

나는 속으로 저들이 두들기는 나무 문이 끝까지 버티길 바랐다.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하지 마세요. 다리가 망가질 겁니다."

기숙사 3층은 대략 10M 정도의 높이였다.

이만한 높이라면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

하나, 부상을 피하기는 어렵다.

떨어진 후에 계획이 있다면 모를까, 살기 위한 선택이라면 최후에 실행해야 한다.

"...떠난 것 같아요."

짧은 파란이 한차례 지나갔다.

그녀에게도, 나로서도 공포스러웠던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조용히 지내야 할 겁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이미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당신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아직 정해 놓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지닌 계획을 그녀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도 내 경계심을 눈치챈 모양인지 입을 열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어젯밤 잠을 못 자서 일단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러세요.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대화를 끝내고는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게 꿈이었다, 라는 상상을 해 봤다.

...제기랄.

[냉정함] 특성이 나를 상상 속에서 끄집어냈다.

오롯이 수면에 집중하라는 것처럼, 나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잠을 청하였다.

3화

일어났을 때는 밤이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묵직하고, 두통이 있었다.

잠자리가 어수선했던 탓이다.

자던 도중에 몇 번이나 눈이 떠졌던 것을 떠올렸다.

"으어어어."

바깥에서 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 소리들이 내 몸에 없던 힘을 불어넣었다.

행동하자.

나는 어제 못다 한 마법 연습을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강렬하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

이전에 연습했던 빛 마법을 떠올렸다.

책상 위에 올려 둔 십자가로 시선이 향했다.

마법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

매개체와 술식, 그리고 마력이었다.

어제 연습할 당시에는 술식과 마력만 이용했다.

여기에 매개체를 더한다면 원하던 이미지에 가까워질 것이다.

"술식을 계산하고, 마력을 끌어 올려 매개체로 발현한다."

마법에서 매개체는 마법을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들을 일컬었다.

주로 스태프나, 완드가 일반적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도구가 선택되는 경우도 있었고, 내게는 십자가였다.

오른손으로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을 튕겼을 때의 감각을 되새겼다.

뇌에서 술식을 계산하고, 신경을 통하여 마력을 운반한다.

끝에 다다랐을 때는 터뜨리는 느낌이 아니라 머물게 한다는 느낌으로.

콰직!

십자가에서 푸른색 전류가 치솟았다.

마법이 실패하였을 때 일어나는 반작용이었다.

나는 어깨를 움켜잡았다.

피부 안쪽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괴롭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통증은 오래 남았고, 정도는 심하여 다시 마법을 쓰는 데 망설임을 낳았다.

"쉽지 않네."

처음에 마법을 썼을 때와 비교한다면 단계가 하나 늘어났다.

그것만으로 난이도는 크게 상승했다.

매개체 수련은 아카데미 3학년생의 실기 과제였고, 반년이란 시간을 들여 공부했다.

그걸 한 번에 성공하길 바라는 것은, 재능이 넘치는 조슈아로서도 욕심이었다.

"...고민할 시간도 아깝다는 거냐?"

떨고 있던 손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되었다.

[냉정함]이 내린 판단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마법을 연습하는 것은 필수적이었고, 그 과정에 있을 고통은 죽음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다.

나는 웃었다.

늦든, 빠르든 도달했을 결론이다.

다시 마법을 연습했다.

[강심장] 특성 덕택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지워 버렸다.

마력을 집중한다.

그리고 실패했다.

신성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피나는 노력은 빠르게 성과를 보였다.

조슈아가 지닌 [습득력]이란 특성은 훈련에 한해서는 0티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실패를 겪으면 문제점을 조금씩 보완했다.

그렇게 100%에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특성이었다.

그 결과 못 쓸 수준이었던 마법이, 급한 대로 써먹을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신성력: 150]

신성력은 조금 남겨 놓았다.

만약을 위한 보험이었다.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의자에 앉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법을 연습하여 실력이 향상된 것은 좋은 일이나,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있었다.

체력이었다.

체력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내 몸은 그것을 채워 줄 무언가를 요구했다.

식량과 물이었다.

찾아야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이 몸에 어떤 디버프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인내심]은 참을성을 길러 줄 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니까.

그건 그저 벽일 뿐이다.

제아무리 튼튼한 벽이라도, 막기만 할 뿐이라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저, 저기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제 저 목소리에 당황할 필요가 없어졌다.

"말씀하세요."

창가로 다가가 오전에 구해 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구해 준 답례를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요."

그녀는 창문 바깥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는 채였다.

내 눈은 그것이 물병이란 사실을 어렵잖게 알아차렸다.

"던질 테니까, 받아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에 들려 있던 물병이 크게 뛰어올랐다.

나는 즉시 손을 뻗었다.

탁! 물병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괜찮아요. 사람 손길이 아니면 풀리지 않게 끈으로 잘 묶어 놨어요."

그녀가 설명하지 않아도 손에서 놓쳤을 때 끈의 존재를 확인했다.

아주 멍청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두 번째로 뛰어올랐을 때는 제대로 물병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묶여 있던 끈을 풀고는 물병을 살펴보았다.

완전한 새것은 아니었다.

물이 반쯤 들어 있었고, 뚜껑에는 개봉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고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순수한 호의에서 건네준 것일까?

독이 들지는 않았을까?

내게서 무엇을 원하기에 이것을 보낸 건가?

누군가가 지나친 생각이라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안다.

"미적지근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아직 마시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내게 호감을 사려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 물이 나에게 보내는 관심이라면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뚜껑을 따고 물을 들이켰다.

몸 안쪽에 수분이 차오르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맛있다.

지금껏 살아오며 마신 물 중에서 가장 청량감이 좋았다.

"저에게 이 물을 건네도 괜찮은 겁니까?"

"괜찮아요. 아직 새것이 2개나 남았으니까요."

넉넉한 양은 아니었다.

물 2병은 나눠 마시더라도 보름을 넘기기 어렵다.

그녀의 판단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는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기숙사 안의 사정이 어떤지는 알고 있습니까?"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아는 게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그쪽 말고도 대화한 사람이 있었어요.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층인 것은 확실해요. 두 사람이었고, 모두 남자였어요. 마지막으로 얘기를 나눈 게 이틀 전이었어요."

놀랍지는 않았다.

이런 큰 건물에 생존자가 둘밖에 없을 리는 없다.

그녀의 설명을 곱씹으며 지니고 있던 지도를 펼쳐 보았다.

이 기숙사에서 우선적으로 수색해야 할 방들은 죄다 1층에 밀집되어 있었다.

간이 식당.

개인 물품 보관소.

기숙사 사감의 휴게실.

"그 두 사람이 함께 있던가요?"

"네, 맞아요."

"그들이 이곳에 남아 있다면 당신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네요."

아래층에서 4층의 목소리를 엿듣기는 어렵다.

하지만 3층이라면 얘기는 달랐다.

이전에도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닿는 곳에 있었다.

짐작하건대 2층이었다.

우려가 되는 점은 그들이 나보다도 먼저 행동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미 떠난 것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저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네요."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는 것과 바깥으로 나가는 것.

어느 쪽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는 뻔하다.

그리고 준비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였다.

만약 그들이 1층을 점령했다면 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다.

"아니면 죽었을 수도 있고."

그녀가 들리지 않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수색 과정에서 죽었다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건 바람이다.

확인도 없이 마음 편히 기다리기에는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아래층의 수색이 끝났다면 그들에게 남는 것은 위층밖에 없다.

4층은 자신이 둘러보았지만 빈털터리였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남은 구역은 3층뿐이었다.

거기마저 그들에게 빼앗긴다면 한동안 궁핍한 삶을 보내야 한다.

[냉정함]이 생각을 정리한다.

회복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가, 아니라면 지금 나서야 하는가?

나는 최선책을 골랐다.

"지금부터 3층으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여유가 된다면 들를 테니 알아 두세요."

"네? 방금 뭐라고!"

천천히 복도로 나왔다.

오늘은 달빛이 약했다.

연습했던 마법을 시험하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마력을 불어넣은 십자가를 손전등 삼아서는 이전에 멈췄던 계단까지 걸어 나갔다.

"...후."

3층에 있는 좀비들을 위쪽으로 유인해야 한다.

소리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마법이 실패하였을 때 일어나는 반작용 중에는 굉음이 존재했다.

바로 과도한 마력 주입이 원인이 될 때였다.

양손을 모으고는 안쪽으로 마력을 모았다.

술식은 더하지 않았다.

마력 덩어리가 비대해지면 알아서 폭발할 것이다.

쿵!

가까운 곳에만 들릴 정도로 가벼운 파공음.

이 정도만 되더라도 밑에 있는 녀석들을 유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으어어."

오싹한 신음 소리와 함께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굶주린 배를 채우는 것에만 혈안이 된 존재들.

팍! 팍!

서로를 밀치고 짓밟는 것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처음 눈으로 확인한 건 5마리.

그중 일부가 다른 녀석들에게 떠밀려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치며 몸 어딘가가 찌그러졌지만, 눈빛에 담긴 탐욕은 그대로였다.

곧이어 양팔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멀쩡한 좀비들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듯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나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눈앞의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곧 내가 지닌 특성들이 내 몸의 자유를 되찾아 주었다.

"이쪽으로 와라."

좀비를 복도 중간까지 끌고 왔다.

이쯤이면 좋겠군.

그렇게 판단하였을 때 십자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법을 준비했다.

머릿속에 떠올린 술식에 따라서, 십자가에서 쏘아 낸 빛이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방패]

문자 그대로 방패를 만들어 내는 기적이었다.

크기는 복도 가운데에 딱 들어맞을 정도의 크기였다.

"기본기를 연습한 보람이 있네."

나는 감탄했다.

실전에서 쓴 첫 마법이 한 번에 성공했다.

독창성의 레벨이 낮아서 마법의 완성도는 떨어졌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쾅쾅! 좀비들은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방패 위로 피 묻은 손자국이 두드렸다.

쾅쾅!

놈들의 팔다리 관절이 기괴하게 꺾인다.

방패가 금이 가며 떨어져 나간 파편에 피부가 벗겨졌다.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워해야 할 상처들이, 사람이 아니기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아직은 지성이 낮다."

지성이 낮아 반대편 계단을 통해 뒤를 노릴 생각은 못 한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생긴 틈을 이용할 생각도 못 했다.

콰직!

하지만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급하게 익힌 마법이라 강도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길어 봐야 20초 남짓.

좀비들의 공격 앞에서 방패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 정도가 한계였다.

나는 움직였다.

뒤돌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재빨리 계단을 통하여 3층으로 내려오고는 열려 있는 방부터 뒤졌다.

그녀의 방은 가장 나중에 들를 생각이었다.

함께 수색하면 찾아낸 물건에 대한 소유권으로 말썽이 생길 우려가 있으니까.

빵 3개와 물 한 병.

몽둥이 한 개를 주웠다.

상태를 확인해 볼 여유는 없었다.

물건들을 챙기고는 그녀가 있던 방문을 노크했다.

"접니다."

"...설마, 당신이에요?"

그녀는 곧바로 문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당황스러울 것이다.

내려온다고 얘기해 두었으나, 좀비를 뚫고 찾아오는 게 쉽지는 않다.

"...들어오세요."

그녀는 의심을 거두고 문을 열어 주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짐작대로 학생이었다.

붉은 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 알고 있다.

타니아 레인우드─

직접 플레이할 수 있는 네임드 캐릭터 중 한 명이었다.

"3층에 있던 괴물들은 어떻게 한 건가요?"

"4층에 묶어 놨습니다. 다시 내려올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괜찮습니다."

그녀의 몸이 굳었다.

방 안에 갇혀 구조만을 기다리던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였다.

분위기를 환기시켜야 한다.

어색한 기류가 맴돌면 한 방에 있기 껄끄러워진다.

"2학년?"

아카데미의 정복 가슴팍에는 배지가 있었다.

이 배지의 색깔로 학년을 구분했다.

그녀가 달고 있던 노랑색은 2학년을 뜻하였다.

"아, 맞아요."

"2학년 기숙사는 여기에서 떨어진 곳에 있을 텐데."

"일에 휘말렸을 때, 이 건물이 가장 가까운 피신처였어요.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까 3층까지 오게 되었고."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모를 때가 있는 법이다.

"그쪽도 학생이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녀와 달리 정복을 입지 않았다.

깨어났을 때부터 사복 차림이었다.

조슈아로서는 원하지 않았던 입학이었으니, 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맞습니다. 5학년입니다."

왕립 아카데미는 6년제 교육 기관이었다.

14살에 입학하여 20살에 졸업하게 되어 있었다.

"하하, 그럼 제게는 선배가 되네요."

그녀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제 이름은 타니아 레인우드예요. 저희 가문은 왕국 서쪽에 위치한 마법사 가문이에요."

타니아 레인우드.

2학년 신동들 중 한 명인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행적은 매번 변하였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왕립 아카데미의 수호 기관인 기사단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하다.'

나는 조슈아의 미래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네임드와 관련된 일들이라면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으려면 그들이 지닌 운명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저는 조슈아입니다."

팔라리온이란 성은 소개하지 않았다.

작위와 영지를 잃은 가문의 이름 따윈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아아."

그녀가 말을 삼켰다.

조슈아에 대하여 아는 눈치였다.

표정을 살피건대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4화

조슈아는 평판이 좋지 못했다.

평생을 나태하게 살아 온 대가였다.

학급이 5학년인 학생들 사이에서 유일한 노비스 등급.

하지만 그리하여 생겨난 가십거리 중에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망나니라든가, 악동이라는 말들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었다.

그는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방에서 나가지 않으니 누군가와 엮일 일도 없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나이가 어리고, 선배보다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으니까요."

타니아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불편해했다.

눈빛에 두려움이 엿보였다.

짐작하건대 그녀는 주워들은 소문으로 자신을 평가한 것이다.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너무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네?"

"나에 대해 어떤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얘기야."

정곡을 찔렀던 모양인지 그녀의 울대가 꿈틀거렸다.

"우린 처음 본 사이야, 그렇지?"

"맞아요."

"그럼 네가 본 눈으로 나를 판단해."

빙의되기 이전의 조슈아는 쓰레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인식은 천천히 개선하면 될 일이었다.

처음은 타니아였고, 그녀가 신뢰해 준다면 이후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그럴게요."

그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자리 잡은 의자에 앉았다.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이라도 있을까요?"

타니아는 적극적인 성격이었지만,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수동적으로 변했다.

생존 능력은 이쪽이 우수하다.

4층에서 이곳까지 내려오며 증명한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애써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문 앞을 경계해 줘. 혹시나 괴물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내게 말해 주고."

그녀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3층에서 회수한 물건들을 살필 시간이었다.

[쇠몽둥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둔기. 휘두르고 내려치는 데 적합하다.

현실의 야구 방망이와 비슷한 생김새의 둔기였다.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날붙이에 대한 숙련도가 낮은 상황에서는 이런 무기가 보다 유용했다.

호밀 빵 – [신선도 30%]

-호밀이 주된 재료로 만들어진 기본 빵.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빵이다.

이 세계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발견한 식량이었다.

"이대로는 먹기 어렵겠네."

곰팡이가 폈다.

따로 보존한 것이 아니기에 예상된 결과였다.

곰팡이가 번지지 않은 부분만을 뜯어먹기에는 양이 부족하다.

생각에 잠겼다.

이때 머릿속이 번뜩했는데 [영리함] 특성이 발동되었다.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조언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화.

신성 마법에 포함되는 술식 중 하나였다.

완벽하게 성공시킨다면 대상의 해로운 효과를 제거한다.

현재로서는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어느 정도 효과를 진정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시도해 보아서 나쁠 것은 없겠지."

손끝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몸 안의 마력을 이루는 신경들이 사납게 날뛰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하여 신성력을 대부분 소모했다.

앞으로 딱 한 번.

양손에 모여든 빛이 빵을 뒤덮으며 발광했다.

호밀 빵 – [신선도 40%]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빵의 상태가 변했다.

정화 마법이 곰팡이에 효과가 있다는 증거였다.

손으로 빵을 뜯어내어 맛과 상태를 확인했다.

맛있다!

평범한 빵 한 조각에 기분이 도취되었다.

그러나 흥분된 마음도 잠시, [냉정함]이 정신 차리라며 다독인다.

"잠시 괜찮으니까, 이쪽으로 와 봐."

문 앞에서 망을 보고 있던 타니아를 불렀다.

그녀의 눈빛이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빵으로 향하였다.

표정에 본 적 없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식욕, 본능이었다.

타니아의 몸 상태는 척 보기에도 야위었다.

굶었던 시간이 길었던 거겠지.

그럼에도 먹을 것 앞에서 이성을 유지한 것은 대견스럽다.

"받아."

나는 빵을 내밀었다.

타니아는 얼빠진 얼굴을 하였다.

세상이 변하기 전에는 나눠 먹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게 당연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상은 없다.

이 빵 하나만 하더라도 예전과는 가치가 달라졌다.

"정말로 받아도 되는 건가요?"

"그래."

내가 동의하자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낚아채듯이 빵을 가져가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땅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손가락을 이용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체면은 잊은 지 오래였다.

"고마워요."

식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타니아는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어째서 저에게 빵을 준 건가요?"

"너도 나에게 물을 줬으니까. 먼저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나 몰라라 하기는 싫거든."

빵을 준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녀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게 그녀를 도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그녀였고, 빚은 갚아야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었네요."

타니아가 싱긋 웃었다.

지저분한 몰골이었는데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구조를 기다렸어?"

"이곳에 갇힌 지는 일주일쯤 지났어요.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기숙사로 향하는 모습을 몇 번인가 본 적은 있지만...."

타니아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묻지 않아도 그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창문으로 엿보았던 두 소년 소녀처럼 끔찍한 일을 당했겠지.

"선배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내려갈 생각이야, 지금 바로."

타니아는 경악했다.

그녀는 아직 밖을 나가 본 경험이 없었다.

스스로도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지만,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을까요?"

"1층에는 물건을 보관하기 용이한 장소들이 있어. 그곳을 수색하면 식량과 물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런 거라면 나중에 가더라도."

"문제는 네가 말했던 아래층의 사람들에 대해서야. 너는 그들과 대화를 했었다고 말했고, 최근에는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고 했었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있어."

게임의 흐름을 떠올렸다.

타니아가 머문 건물에는 높은 확률로 기사단이 찾아온다.

기간은 한 달 전후였다.

그때까지 버틸 만한 물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기사단이 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돼."

지켜 주겠다든가, 괜찮다든가,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문을 나서는 순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타니아는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무기는 없지?"

"네."

"그렇다면 천천히 내 뒤를 따라와. 주변을 경계해. 보이는 게 있다면, 내게 곧바로 알리고."

"그럴게요."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철근을 매단 것처럼 무겁다.

4층에서부터 마법을 사용하며 이곳까지 도망쳐 왔다.

피로도가 상당하다.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으리라.

문을 열었다.

복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위쪽에서 미약한 진동이 전해진다.

마법을 사용해 묶어 두었던 좀비들은 아직 위층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아아."

타니아가 제자리에서 허둥거렸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탓이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눈이 주변에 익숙해지더라도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에게는 [야행성]이 있기에 밤눈이 밝은 편이지만, 그녀로서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앗."

그녀의 입에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을 붙잡았다.

후방을 맡길 생각이었지만, 이대로는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고가 터질 수 있었다.

"불을 피우면 앞이 보일 거예요."

내 귓가에만 들릴 정도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타니아는 불과 관련된 술식에 뛰어난 두각을 보였다.

아직 2학년생이지만, 매개체 없이도 불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위험 부담을 줄이고 싶어서 그래. 놈들은 시야가 나쁜 편이지만, 작은 불빛도 인지하는 경우가 있어. 그렇게 한 녀석에게라도 발각되면 나머지가 소리를 듣고 몰려들지.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조심하고 싶고."

4층에서 빛을 사용한 것은 좀비를 유인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내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타니아에게 의지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최대한 싸움을 피할 생각이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를 억제하며, 눈에 띌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우리의 적은 좀비만이 아니다.

사람 또한 조심해야 한다.

지성을 지닌 만큼 초반에 만나는 좀비들보다도 훨씬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대단해요. 놈들의 행동 패턴이나, 특징들을 조사한 건가요?"

"그래."

타니아는 감탄했다.

본인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한심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 게임의 다른 캐릭터들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안해요. 짐이 되는 기분이라."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그때 신호를 줄 거야."

고개를 떨군 그녀를 위로했다.

하나 조금 전에 건넨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타니아를 3층에 두고 내려간다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데리고 나왔다.

아래층의 생존자를 생각해서다.

만약 존재한다면 우선은 대화로 풀어 나간다.

평화적인 협상이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상황적으론 어려웠다.

우리에게는 주도권이 없었다.

상대방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무언가가 부족하다.

만약 이권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래층에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모르겠어요. 환영할지, 아니면 배척할지."

그녀가 숨을 죽였다.

붙잡은 손바닥 안쪽에서 식은땀이 느껴졌다.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상황이 꼬였을 때의 일을 상상하고 있는 거겠지.

틈틈이 타니아의 안색을 확인하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원만하게 풀렸으면 좋겠어요. 저랑 선배처럼요."

"나도 그러길 바라."

우린 2층으로 내려왔다.

자세히 둘러볼 마음은 없었다.

이곳은 우선 순위가 낮았다.

입구가 열려 있는지 확인했다.

몇몇 문이 누군가에 의하여 과격하게 열어젖혀졌다.

좀비가 벌인 짓은 아니었다.

좀비라면 수적으로 문을 밀듯이 부쉈을 것이다.

하나 열려 있는 문들은 손잡이를 정확히 겨냥하여 부수고 들어갔다.

사람이 한 행동이다

"잠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엿보았다.

나와 타니아는 벽에 밀착했다.

좀비인가? 사람인가?

이 거리에서는 단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곧 그들이 누구인지 판가름할 순간이 찾아왔다.

"여기에는 이제 볼일이 없는 것 같은데, 위쪽으로 올라가 봐야 하지 않을까?"

"좋아. 그러고 보니 3층에 여학생이 한 명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있었지."

"죽지는 않은 모양이야. 소리가 들렸거든. 마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마법이었던 것 같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나? 미쳤네. 괴물들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갔을 거야."

"우리가 3층을 피한 이유도 그거였었지. 괴물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튼 무지하게 많을 거야."

"보고만 내려오자. 여차하면 위쪽은 버리더라도 당분간은 걱정 없으니까."

모두 3명이었다.

정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학생들이었다.

2명은 검을 쥐고 있었다.

한 명은 맨손이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된다.

"앞에 무언가 보이나요?"

타니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생존자가 있다."

그녀는 말없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기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들이 생존자인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밝혀진 것이 없다.

식충이가 늘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동료가 늘어났다는 생각에 기뻐할까?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지만, 기분에 따라 쉽게 검을 뽑는 곳이 여기니까.

사형 제도가 성행하고, 심문 과정에서 고문이 허용되는 세상.

노예가 존재하며, 선민 의식이 뚜렷한 세상.

현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대입해서는 곤란하다.

질서가 존재하더라도, 강민혁으로서 기억하던 것과 비교하면 많은 게 달라졌다.

신중해야 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돈다.

세 사람은 아직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

"싸울 건가요?"

잡고 있던 타니아의 손길이 떨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내게 질문이 아닌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우린 싸우지 않을 거야."

떨고 있던 그녀를 안심시켰다.

감정에 휩쓸려 계획을 수정한 건 아니었다.

"저들 중의 두 사람은 기사 견습생이야."

정복에 기사 견습생을 상징하는 검이 그려져 있었다.

짧은 단검.

클래스는 노비스의 다음 등급인 페리티였다.

육체적인 능력으론 밀릴 것이다.

배후를 잡은 이점만으론 제압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저 셋이 아래층의 생존자 전부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까."

동료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된다.

어중간하게 사태가 마무리되면 저들이 속한 그룹과는 척을 진다.

싸움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위기를 넘기려면 무력이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하다.

"따라와. 너는 곁에서 조용히 있기만 하면 돼."

5화

천천히 학생들이 모여 있던 복도로 나아갔다.

인기척을 느낀 소년 하나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칼끝을 이쪽으로 겨눈 채였다.

"누구야!"

소년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위쪽에 몰아넣은 좀비들이 내려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다른 두 사람도 소년의 외침에 잔뜩 경계했다.

"우린 괴물이 아니야. 너희처럼 이 기숙사에서 놈들을 피해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지."

나는 타이르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디서 온 거야? 정문은 단단히 막아 놓았을 텐데."

"위층에서 왔다. 나는 4층, 그리고 이쪽의 여학생은 3층에서."

곁에 있던 타니아를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당황한 눈동자였다.

조금 전까지 그녀에 대하여 떠들고 있던 탓에 놀란 모양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거겠지.

"당신이죠? 나와 이전에 대화를 했었던 사람이."

타니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확신이 가득한 사람처럼 빛났다.

"아, 안녕. 다행히도 괜찮은 모양이네."

"걱정했었어요.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겼던 탓에, 놈들에게 당한 건 아닌가 하고."

"몇 번 위기가 있긴 했었지. 이쪽 사정이 정리되면 널 구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늦어지고 말았어."

소년은 어물쩍 넘어가고 싶어 하는 태도였다.

나는 의중을 캐묻지 않았다.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타인의 사정을 모른 척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흔한 일이었다.

나 또한 언젠가 저들과 같은 선택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위선은 집어치우자.

"아래층의 사람들은 너희가 전부냐?"

"아니, 밑에 2명 정도 더 있어."

"식량이나 다른 물자들은 넉넉한 편인가?"

"잠깐, 자꾸 그쪽이 질문하려고 하는데, 지금 허리를 숙여야 할 입장은 그쪽 아니야?"

소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리 둔한 인간이라도 주도권을 쥔 쪽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내가 강하게 나올수록 상대에게는 반발심이 생긴다.

"잘 들어. 혹시 우리로부터 뭔가 얻을 생각이라면, 너무 기어오르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질문도 우리가 먼저 할 거고, 최종적인 결정도 우리가 하는 거야!"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캐릭터가 없었다.

게임의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엑스트라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종말이 아니라면, 평범한 삶을 살았을 운명이었다.

그런 그가 식량이란 권력을 손에 넣었고,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았다.

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명령을 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이해한 그대로야. 그게 싫다면 여기서 썩 꺼져! 여긴 우리 구역이라고! 그리고 경고하겠는데, 만약 우리 물건에 눈독 들이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각오?"

"그것도 못 알아 처먹는 거냐? 얼간이가 따로 없네. 들고 있는 검 보이지? 화가 나면 어떻게 쓸 것 같아?"

소년이 검을 내지르며 찌르는 듯한 시늉을 보였다.

뒤에 있던 두 사람이 낄낄거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만하면 위협을 받았다는 정황으론 충분하다.

"기분 나쁘게 왜 웃는 거야.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들려? 아니면, 내가 이 검을 휘두르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다."

소년은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등 뒤를 지키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로 기세가 등등하다.

나는 앞으로 다가갔다.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눈앞에 서 있던 소년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그가 중심을 잃고서 바닥을 뒹굴었다.

기사 견습생이라도 가까운 거리에서의 기습은 막기 어렵다.

예측이 가능한 상황도 아니었다.

한참 대화를 하던 도중에 느닷없이 닥쳐 온 일격.

고통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어안이 벙벙한 게 먼저였다.

"이게 무슨?!"

소년은 흥분했다.

얼굴빛이 단숨에 붉어졌다.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게 무슨?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지!"

당황하는 그를 향하여, 오히려 내 쪽에서 역정을 냈다.

소년의 몸이 얼어붙었다.

"너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실수?"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중죄이지."

"잘난 척 그만하고 말해 봐.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는 거지?"

"모욕죄. 내 옆에 있는 그녀의 이름은 타니아 레인우드. 국왕령 서부 지역을 수호하는 벨리엄 공작님의 영애이시다."

좀비들이 벌레 떼처럼 들끓고 있는 지옥.

이런 판국에도 신분이 지닌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레인우드 가문의 영애?"

"들은 적 있어. 2학년 중에 붉은 머리를 지닌 실력 좋은 여학생이 있는데, 그녀가 레인우드 가문의 딸이라고."

소년과 그의 친구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안색이 시퍼레진다.

타니아는 모르더라도, 그녀의 가문을 모르는 인간은 없었다.

아카데미 안에서 학생들의 서열을 결정짓는 것은 성적만이 아니다.

가문이 지닌 명성과 영향력.

레인우드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명문이었다.

"그녀가 이 일을 가문에게 보고한다면 넌 어떻게 될까? 가문의 병사들이 이곳을 쳐들어와 너에게 죄를 묻겠지. 누구도 널 도와주지 않을 거야. 누가 감히 레인우드와 대립하고 싶을까? 교수들도 방관할 게 분명해."

소년은 말문을 삼켰다.

아까까지 자신만만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쓰러진 상태 그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현실이라면 궤변으로 들렸을 말들도, 문화와 관념이 다르기에 설득력이 더해진다.

이곳 사람들은 좀비에 대해 몰랐다.

그리고 이 사태가 언제까지 지속되는지도 모른다.

바깥의 사정을 아는 자들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에, 대부분은 금방 해결되리라 믿었다.

눈앞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사건이 해결된다면 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잘잘못이 드러난다.

소년이 타니아에게 한 행동도 알려질 것이다.

그리 된다면 소년은 엄벌에 처해지겠지만 그럴 경우는 없으리라.

게임의 설정을 떠올렸다.

각 가문은 자신의 영지를 진정시키기에도 벅차며, 왕의 동원령까지 무시할 정도로 전국은 술렁였다.

나는 정보를 지녔고, 그것이 소년을 컨트롤할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

"기회?"

기회라는 단어에 소년이 반응했다.

"그녀는 수모를 겪었지만, 너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자비를 베풀 마음도 있거든."

소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하였다.

이 세계에서 귀족이 지닌 힘은 강력했다.

레인우드는 그 중에서도 손에 꼽는 권세를 지녔다.

한 소년이 머리를 숙였다.

뒤에 다른 두 사람도 군말 없이 소년의 행동을 따라 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레인우드의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면, 이처럼 오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타니아에게 손짓하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젖어 있었다.

머뭇거리던 사이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주도권은 이쪽이 거머쥐었다.

남은 건 마무리였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용서해 드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그때는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소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다른 학생들도 한시름 놓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표현하지 않고 참고 있을 뿐,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다.

[냉정함]이 정신 차리라며 채찍질한다.

"이제 너희들의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소,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탈레온, 뒤쪽의 제 친구들은 각각 브린델과 가비누라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정중하고 조심스럽다.

배짱 좋은 아이들이라고 해 봐야, 아직 10대들이다.

한번 두려움을 심어 주면 더 강한 권력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충실히 따른다.

"일 층과 이 층은 수색을 끝마친 건가?"

"예. 이 층은 전부 확인해 보았고, 일 층의 몇몇 방만 남은 상태입니다."

"왜, 들어가지 못한 거지?"

"술식으로 막혀 있었어요. 기숙사를 관리해 주던 교수님이 해 놓은 장치 같은데, 저희 중에는 풀 만한 실력자가 없어서요."

개인 물품 보관소와 사감의 휴게실.

이 2곳은 기숙사로 스타트했을 경우 늘 막혀 있었다.

보호 술식은 난이도가 높은 주문이기에, 마법 전공이 아니라면 풀지 못한다.

"위층은 우리가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이다. 다시 올라갈 이유는 없어."

"그렇다면 아래에 있는 것들로만 버텨야 한다는?"

"그래."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일단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야겠지. 그곳에서 너의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열어 보지 못했다는 문도 확인해야 할 거야.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탈레온이 이후 계획에 대해 물었을 때

그에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구성원이 내 손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만나지 못한 사람을 포함하면 총 5명.

이름 없는 엑스트라라고 할지라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라면 배경은 우수하다.

평민이라면 실력으로 입학했을 것이고.

귀족이라면 뒷줄이 든든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

아카데미가 사교의 장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이 때문이었다.

단지 걸림돌이 되는 건, 지금의 내가 조슈아에게 빙의했다는 점이다.

아카데미 학생들 중 비호감 1순위.

타인의 경멸 어린 시선과 수군거림이 누구보다 익숙한 캐릭터였다.

"저기 당신의 이름은 듣지 못했는데,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조슈아."

탈레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타니아는 몰라봤으면서, 조슈아라는 이름에는 꿈틀거리다니.

변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가야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쉬웠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거냐?"

"예?"

"네 표정에 다 쓰여 있다. 나에 대한 불신감이 가득하다고."

"...아닙니다. 제가 잠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입니다."

속내를 떨쳐 낸 얼굴이 아니었다.

단지 공개적으로 폭로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내뱉은 말과 행동들을 도로 주워 담기에는 무릎까지 꿇었던 몸이다.

이대로 덤벼들면 리더의 자격을 되찾더라도 부서진 채로 돌아온다.

나의 실수를 노릴 것이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가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조슈아가 아니었다.

"더 물어볼 것이 없다면 일 층으로 내려가자. 괴물들은 어떻게 했지?"

"하나도 없습니다."

"너희들이 처리한 거냐?"

"아뇨, 사실대로 말하자면 운이 좋았습니다. 며칠 전에 이 기숙사 앞에서 일어났던 소동에 대해 기억하나요? 웬 학생이 친구 한 명을 데리고는 도와 달라고 소리쳤던."

아아, 생각난다.

정신을 차리고는 복도로 나왔을 때 보았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탈레온이 말을 이었다.

"어찌나 목청이 크던지 일 층에 있던 괴물들도 죄다 뛰쳐나가더군요. 그 바람에 창문이나 문이 여럿 망가졌지만, 건물 안을 둘러볼 기회라는 생각에 퍼뜩 나왔죠. 다행히도 밖으로 나간 녀석들은 돌아오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차지한 겁니다."

"괴물들이 부순 문과 창문들은 어떻게 했지?"

"일단은 벽장이나, 소파로 막아 놓았어요. 임시방편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던 건지 최근에 침입한 녀석은 없었어요."

기사 수습생으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벽이었다.

탓할 생각은 없었다.

우린 계단을 통해 일 층으로 내려왔고, 이곳은 위층보다도 피비린내가 심했다.

타니아는 헛구역질을 참으려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깥을 데리고 나왔을 때부터 위태로운 표정이었다.

잘 버텨 왔지만 한계가 온 거겠지.

"그녀가 쉴 장소가 필요해. 먹을 것도 필요하고."

"식당에 식재료들이 조금 있습니다. 가비누, 부탁해도 될까?"

가비누란 불린 갈색 머리의 소년은 엄지를 치켜들고는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여성이니 따로 방을 마련했으면 하는데."

"어렵지 않죠. 이곳에 널린 방들이 모두 주인이 없는 빈방인데."

끝에 있는 방이 좋겠다며 탈레온이 앞장섰다.

길잡이를 자처하며 우릴 안내해 주던 도중에 불현듯이 걸음을 멈췄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보여 주기로 약속했던 방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었다.

왜일까?

그는 어떤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제자리에서 얼음장처럼 굳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피가 얼룩진 바닥이나 좀비의 떨어진 살점을 보고도, 미간을 찌푸리는 게 전부일 정도로 담력이 좋은 아이였다.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인 상황.

스스로 추리할 수밖에 없겠군.

그가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현재 시각은 깊은 새벽이다.

달이 꽉 찬 덕분에 별다른 도구 없이 달빛만으로 시야가 트였다.

타니아의 손을 놓은 것도, 그럴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한데, 바라보고 있던 방 안은 이상하다.

창문을 통해 비친 그림자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잔상이 흔들리곤 했다.

[영리함] 덕분에 그것이 촛불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않았다.

"네 친구들이 있는 곳이야?"

"...맞아요."

친구들의 모습을 본 것치곤 탈레온의 모습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이번에도 [영리함]이 판단을 도왔다.

"혹시 부상을 당한 거야? 예컨대 몸을 크게 다쳐서 움직일 수 없다던가."

"그,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좋지 않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 투시경이라도 달린 것처럼 문 너머의 풍경이 펼쳐졌다.

부상의 원인이 좀비라면, 그들은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어서지 못할 인간이 일어섰다면 때는 너무 늦었다.

돌이킬 수가 없었다.

꿈틀거리던 그림자가 몸을 틀어서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나지막이 중얼거렸는데도, 미약한 소리를 감지해 낸 것이다.

"무기를 집어."

"예?"

사정을 알려 주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걸어오는 정도의 속도였던 그림자가 이쪽으로 내달려 오기 시작했다.

6화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행위였다.

무기를 쥐고 있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더라도 막상 해야 할 때는 망설인다.

보이지 않는 제약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힘들다.

처음일수록 어렵다.

상대의 덩치나 위압감에 따라 주눅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제약들 중에서 무엇보다 거부감이 강한 것이 있다.

바로 아는 사람을 베어 넘기는 경우였다.

"아아."

좀비가 닫혀 있던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놈이 돌진한 충격에 창문이 산산조각이 났다.

거리가 가깝다.

그때까지도 탈레온은 자세를 잡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있는 힘껏 밀쳐 내고는 방망이를 들었다.

좀비가 팔을 휘둘렀지만 허리를 숙여 피하고는 오른쪽 무릎에 방망이를 휘둘렀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파쇄음과 함께 녀석의 몸뚱이가 비틀거렸다.

보통이라면 주저앉아야 정상이었다.

무릎이 부서졌는데도 멀쩡히 움직인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이거나, 초인이지.

그 추측대로 눈앞의 사람의 형상을 한 그것은 좀비라는 이름의 괴물이다.

역시 머리를 부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영리함]이 알고 있던 지식을 일깨워 주고, [강심장]이 그걸 해내도록 격려해 준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나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세 사람 모두 비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를 죽여야 한다는 공포.

멀리서 관찰해 왔던 괴물을 코앞에 맞닥뜨린 공포.

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디버프에 걸렸군.

게임 속 디버프는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게 많았다.

플레이하며 경험해 봐서 안다.

키웠던 캐릭터들 모두 어딘가 결점이 있었다.

단 한 번도 100%의 컨디션으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었을 부분들도, 게임이었기에 나는 늘 불평을 털어놓았다.

아마, 이들도 똑같겠지.

특히나 충격이 클 탈레온과 브린델은 2할의 힘도 쓰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감정이 일으키는 동요들을 끊어 냈다.

"으어어."

놈의 입에서 차가운 냉기와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한 마리의 짐승과 마주한 기분이다.

온다!

직감적으로 녀석이 나를 향해 뛰어오를 것을 예상했다.

발끝에 힘을 모아서는 바닥을 박차며 추진력을 더했다.

손쉽게 어깨를 붙잡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내 상체가 자연스레 뒤쪽으로 밀리며 벽에 부딪혔다.

뿌리쳐 나와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180cm 거구에 기사 훈련을 받아 온 탄탄한 하드웨어를 지녔다.

여태껏 방탕한 삶을 살아온 조슈아가 힘으로 어떻게 할 상대가 아니었다.

"두려움을 떨쳐 내. 이 녀석들은 너희 친구가 아니다. 보고도 모르겠어? 이대로라면 모두 죽을 거다."

주변에 있던 모두에게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혹여 다른 좀비들이 내 외침을 듣고 모여든다고 하더라도, 당장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냉정함]도 내 의견에 동의하듯 딴죽을 걸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극을 받아 정신을 차렸을까?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누구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크아아."

좀비가 끝을 내려는 듯 이빨이 드러난 얼굴을 목덜미에 들이밀려고 했다.

끝인가?

놀랍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쥐어짜 내려는 생각만 있을 뿐.

콰앙!

찰나의 순간, 붉은색 불빛이 날아와 좀비의 머리에 부딪혀 폭발했다.

번뜩이는 불빛이 가루처럼 쏟아지는 건 마력의 흔적이다.

타니아의 마법이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해낸 일이란 걸 알아차렸다.

어깨를 짓누르던 힘이 약해지자, 손으로 걷어 치우고는 반쯤 남아 있던 좀비의 머리를 방망이로 후려쳤다.

지푸라기처럼 맥없이 쓰러지더니, 다시 일어설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불안감에 몇 차례 방망이를 내려찍었고, 놈의 머리가 곤죽이 되어서야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악!"

호흡을 달래고 있던 와중에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브린델이었다.

왼편으로 빠졌던 좀비가 두 소년에게 향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도우려고 몸을 틀었을 때는 한발 늦었다.

좀비가 브린델의 어깨를 물고는 좌우로 거칠게 흔들어 댔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기어코 팔 한쪽을 뜯어 낸 좀비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서 소년의 흉부를 노렸다.

그때까지도 탈레온은 검을 휘두르기를 주저했다.

"멍청하기는! 장식용으로 들고 다닐 생각이면 내놔."

나는 탈레온의 손으로부터 검을 빼앗았다.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잡고서, 방심하고 있던 좀비의 목에 찔러 넣었다.

놈은 마치 춤을 추듯이 요란하게 상체를 흔들었다.

불규칙하게 휘둘러 대는 팔을 피해 가며 방망이로 머리를 후려쳤다.

쿡! 둔탁한 파쇄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살아 있는 먹이를 앞에 두고도, 방관한다는 것은 놈이 죽었다는 훌륭한 증거였다.

"...엄마, 엄마."

모든 것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던 순간.

내 정신을 현실에 붙들어 놓은 것은, 죽어 가던 브린델의 신음이었다.

쓰러진 소년을 살폈다.

팔이 떨어져 나간 어깨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심각한 중상이었고, 원래대로 고치려면 상당한 수준의 연금술이나, 신성 마법이 필요하다.

어느 쪽도 지금의 내게는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냉정함]이 포기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잔인한 결정이라 여기면서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어. 너무 무서워."

남아 있던 다른 손을 잡아 주었다.

"어떻게 살릴 수 없을까요?"

타니아가 황급히 다가왔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불과한 소년을 위해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렵겠지."

죽음으로 편안하게 보내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걸 선택하는 건 내 몫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가까운 사람이 마지막을 위로해 주도록 도울 뿐.

나는 쓰러진 탈레온을 일으켰다.

꾸짖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책임을 묻기에는 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친구를 좀비로 변하도록 방치했고, 변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죽이는 걸 지켜보았다.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죄책감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었다.

"네가 보내 줘."

"...예."

곧이어 쌀죽을 챙겨 온 가비누가 일어난 상황을 마주했다.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죽이 바닥을 더럽혔다.

그가 사정을 듣기도 전에 브린델에게 달려갔다.

죽음.

게임을 하던 당시에는 모니터 너머의 세상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생존 어드벤처 장르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단골 메뉴처럼 익숙한 이벤트이니까.

한데, 뒷맛이 씁쓸하다.

뻔한 연출이었지만, 직접 마주하는 것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상실감을 겪고 있을 두 사람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조슈아가 지닌 성격적 특성 중에 [상냥함]은 없었다.

[냉정함]은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조언했다.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 *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실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신입생들의 커리큘럼에도 멧돼지 같은 맹수 사냥을 꼭 집어넣었다.

그 수업에서 두각을 보인 아이들은 장래에 성공한 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타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의 재능이 있음을 알아챈 것은 8살 무렵.

그때부터 시작한 예습 덕택에 동기들 중에서는 누구보다 성장이 빨랐다.

특히나 마법 캐스팅 속도는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평가받았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어.'

실전에 가깝다고 포장되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업이었다.

학생이 유리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교수라는 안전장치까지 걸려 있던 현장.

그때 내보인 실력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되었다.

실전은 불합리한 것이다.

실패하면 날 위하여 막아 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 당연한 가르침을 깨우치지 못했던 자신에게 분노했다.

'한심한 타니아, 어떻게 평소보다 캐스팅이 5초나 늦을 수 있지? 게다가 불꽃의 크기도 너무 작아. 폭발한 게 기적이야. 게다가 조준도 너무 흔들렸고, 선배가 맞을 수도 있었어.'

자랑하던 기술들이 모두 빛이 바랬다.

전력이 100%라면 40%는 끌어냈을까?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더 형편없었는지 모른다.

우등생 소리를 들어 왔던 타니아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방해만 되고 있잖아? 다른 가족들과 만났을 때 이 꼴을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분명 배꼽을 잡으며 웃음을 터뜨리겠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야.'

상황을 운 좋게 넘겼다고 끝내서는 안 된다.

복습해야 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머릿속으로 그때의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창피함에 얼굴을 감쌌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의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만약 선배가 앞에 없었다면, 놈은 나를 노렸을 거야. 아마도 저항 한번 못 해 보고 죽었겠지.'

죽은 브린델이란 이름의 소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일어나자.

이대로 침대에 누워 있어 봐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탈레온이 마련해 준 랜턴을 들고서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복도에 있던 세 구의 시체들은 조슈아가 남는 담요로 감싸 빈방으로 옮겼다.

그가 설명하기를, 이제는 일어설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괴물들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체가 사라졌다 한들,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야간 탐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작년 여름에 한참 유행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야간 탐험.

어둠이 드리웠을 때, 산을 오르거나, 폐허를 방문하여 담력을 테스트하는 놀이였다.

타니아는 그 놀이에 곧잘 참여했다.

밤에 훈련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어둠에 친숙해지자는 목적이었다.

아마, 제일 무서웠던 곳이 아카데미 서북쪽에 위치한 버려진 창고였다.

안쪽을 뒤지다가 동물의 사체를 발견하곤 비명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겠지만, 자신에겐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은 그때 보았던 사체보다 곱절은 무서웠다.

'저 사람은 미친 걸까? 아니면 비범한 걸까?'

으스스한 암흑 속에서 불빛 하나 없이, 조슈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주변이 고요한 덕분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천천히 다가갔다.

난데없는 발소리에 놀랄 법도 한데, 그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괴물이 아니란 걸 예상한 얼굴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조슈아는 의자에 앉아 기숙사 정문을 지켰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보다 피로도가 심할 텐데도, 불침번을 자처했다.

"피곤해. 하지만 이대로 잠들기에는 조금 전 싸움이 너무 소란스러웠으니까. 밖에 있는 놈들이 올 수도 있고, 위층에 있던 놈들이 내려올 수도 있겠지. 몇 시간 동안은 감시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제가 대신 할게요. 선배는 들어가 쉬세요."

"무리할 필요 없어. 너도 그 애들만큼이나 심적으로 힘들 테니까."

타니아는 생각했다.

그가 정말로 소문만 무성하던 낙제생이 맞을까?

어쩌면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일지도 몰랐다.

당당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되는 행동이란 것을 알기에 신중했다.

그와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식당은 확인해 보셨나요?"

"그래, 보름은 거뜬히 버틸 정도의 양이야. 극단적으로 아낀다면 그 이상도 버틸 수 있겠지. 관리는 내가 할 생각인데 불만은 없지?"

"없어요. 있을 리가 없죠."

적어도 기숙사 4동에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조슈아를 의심하는 인간은 없었다.

그는 은인이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손으로 깨닫게 해 주리라.

"우린 어떻게 될까요?"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것만은 단언할 수 있어."

"식량이 남아 있는 동안 말이죠?"

"아니, 그보다도 조금 더 오래 말이야."

"...선배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참 부러워요. 아니면 제가 힘들어하실 걸 염려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전 듣기 좋은 거짓말보다 진실을 훨씬 좋아하거든요. 그러니 다음부터는 담담히 말해 주세요. 우린 망했다고요."

조슈아는 피식 웃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망했다고? 아니야. 네가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망했을 때의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해서 그래."

이래서 뉴비들은 곤란하다.

지금의 스타트가 얼마나 퍼 주는 건지도 모르다니.

7화

1층으로 내려오고는 일주일이 지났다.

이 기간에는 내가 기억하던 게임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외부로부터 좀비가 침입해 오지 않았고, 식량에 대한 걱정거리가 줄었다.

계산대로라면 앞으로 며칠간은 이런 상황이 쭉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되겠지.

창문 바깥을 살펴봤다.

며칠 사이로 기숙사 근처를 배회하던 좀비의 숫자가 늘어났다.

기분 탓이라고 웃어넘길 수도 있었지만, 게임의 흐름을 알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역병 같은 현상은 아카데미 안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나라 전체로 창궐하여 좀먹듯이 불어나고 있었다.

"기사단이 올 때까지는 유지됐으면 좋겠는데."

창가에서 몸을 떼고는 식사가 시작될 간이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요리 담당은 타니아였다.

그래 봐야 늘 먹던 쌀죽을 따듯하게 데우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지겹다, 지겨워. 다른 요리는 없는 거야? 고기는 못 먹더라도, 생선이나 밀가루 정도는 먹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비누가 빈정거렸다.

타니아가 퍼온 쌀죽을 내려놓지 않고 무섭게 노려봤다.

"다른 반찬이 먹고 싶으면, 네가 밖에 나가서 구해 오면 될 것 아니야."

"저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공간을 탐색하고 오라고? 나보고 죽으란 뜻이잖아."

"그게 싫으면 얌전히 주는 대로 먹어. 한 번만 더 투정을 부리면 네 양을 반으로 줄여 버릴 거야."

"제기랄, 알았으니까 얼른 줘. 그거라도 안 먹으면 배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두 사람은 마치 만담을 나누는 것처럼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타니아는 레인우드라는 이름의 권위를 내려놓았다.

내 허락을 얻고서 그리했다.

리더의 자리가 확고해진 이상, 신뢰감 이상으로 친밀감도 중요해졌다.

다만 탈레온과 가비누는 그녀보다 한살이 많았는데, 존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전 이미 제가 지닌 힘을 내려놓았어요. 그것만으로도 저들은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인 거죠.

그리한 이유는 그녀의 자존심 문제가 원인으로 보였다.

얌전해 보이는 성격은 어디까지나 인정받은 사람에 한해서 그리 대할 뿐.

본성은 고집이 강하고, 왈가닥이라 불릴 정도로 드센 편이었다.

"아, 어서 오세요."

타니아는 내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다소곳하게 머리를 정돈했다.

가비누는 어이가 없다며 혀를 찼다.

"평범한 죽 하나에도 감사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 돼. 누군가는 이 죽 한 그릇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식탐이 터졌던 것 같아요."

"그런 기분이라면 나도 이해해. 나도 솔직한 심정으론 미친 듯이 다른 게 먹고 싶거든.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에게 있는 곡식은 쌀이 전부인 것을."

그럴싸하게 대답했지만, 나 역시 [인내심]이 없었다면 언제라도 응어리가 터졌을 것이다.

매일 끼니를 때우려고 먹던 라면이 그립다.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이젠 그때의 생활이 꿈이었던 것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냉정함]이 감상은 집어치우고 허기진 배를 채우라고 재촉했다.

"탈레온, 먹지 않을 생각이냐?"

탈레온의 얼굴은 지난 일주일간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그가 자신을 협박했던 소년이 맞는가 의구심이 치솟을 정도였다.

"입맛이 없어서요."

"억지로라도 삼켜. 안 그러면 힘을 써야 할 때, 쓰지 못하는 순간이 올 거다."

"...일전에 말씀드린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위층에 있던 괴물을 죽이고 싶다는?"

"네."

며칠 전 새벽이었다.

쉬고 있던 와중에 탈레온이 찾아와서는 위층으로 향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는 알기 쉬웠다.

소년의 눈동자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듣기로는 죽은 친구에게 부상을 입힌 좀비가 2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경황이 없어 친구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게 먼저였고, 놈은 놔두고 떠났다고 한다.

소년은 녀석을 제 손으로 없애길 원했다.

"네 짐작대로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포기해라."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려 주세요."

"고작 한 마리에 쩔쩔맸던 너를 10마리는 족히 있을 위층으로 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건 제 친구라서 죽이지 못했던 거라고요!"

탈레온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호흡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거칠어졌다.

"대화할 때는 뭐라고 했었지?"

그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풀이 죽었다.

나는 세 사람에게 1층에 머무는 동안 몇 가지 규칙을 지키라고 얘기했다.

그중 하나가 언성을 높이지 말 것이다.

"죄송해요. 저는... 그저 죽은 친구들의 원혼을 위로하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속 알맹이가 서른이며, 성격적 특성의 도움을 받는 나와는 달랐다.

이제 겨우 열여섯.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 감정에 충실할 나이였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그건 너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네 목숨을 어떻게 쓰든, 그건 네 자유라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너 혼자만이 아니니까."

"그래, 우선은 진정해 봐, 탈레온."

가비누가 나서자 탈레온도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할 수는 없었다.

도로 자리에 앉고는 팔을 포개며 그 위로 얼굴을 묻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의 정신을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고,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되어 갔다.

차라리 바람대로 올려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느닷없이 터지는 불상사보다 인지하고 있는 사고가 훨씬 안전한 법이니까.

아니, 그건 옳지 않아.

탈레온은 스토리에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없더라도 내 계획에 차질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리더로 여겼고,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편리를 위하여 열여섯 소년을 사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네가 친구들과의 우정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잘 알겠다. 그걸 지키지 못했던 것에 분노했고, 떠난 보낸 뒤에는 복수밖에 떠오르지 않았겠지. 눈이 뒤집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하지만 꼭 복수만이 우정을 증명하는 방법은 아니지. 살아남는 것이 그보다도 더 가치가 있을지도 몰라."

말 몇 마디로 소년을 감화시킬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가비누, 탈레온을 잘 지켜봐라. 아주 작은 낌새라도 있다면 나한테 알리고."

"그렇게 할게요."

가까운 사람이 그를 돌보아야 했다.

내가 감시하는 것은 그의 감정을 자극하는 촉진제가 될 뿐이다.

위태로웠던 아침 식사를 끝내고는 방 안으로 돌아왔다.

스테이터스를 열어 볼 시간이었다.

[이름 : 조슈아 팔라리온]

[5학년(18) – 노비스]

[잠재 능력 – 격세 유전(신성) / 습득의 대가 / 속독.]

[성격적 특성 – (강심장) (냉정함) (영리함) (인내심) (외톨이) (야행성)]

[후천적 특성 – 리더십(하) 언변술(하)]

[보유 코인 – 0]

[독창성 LV1 – 신성 마법]

[체 력: 15]

[근 력: 10]

[민 첩: 10]

[마 력: 160]

[신성력: (1,500)]

THE Survival의 성장 방식도 여느 RPG와 똑같았다.

플레이를 통한 경험이 스테이터스에 축적되는 형식이었다.

이에 따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같은 컨셉 플레이도 가능하다.

"나쁘지 않네."

이 비루한 몸뚱이의 조그마한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초반부에는 힘쓰는 일이 많았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방망이를 휘두르는 힘은 근력이고, 도망치는 데 필요한 건 체력이었다.

만약 마력을 희생하여, 두 능력을 올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더십과 언변술도 생긴 모양이네.

눈길을 돌려 특성 부분을 살펴봤다.

후천적 특성은 세 사람과 함께 생존하며 터득한 특성이었다.

리더십은 무리를 이끌 때 신뢰감을 주었고, 언변술은 대화를 통한 호감도를 쌓는 데 유용했다.

모두 쓸모 있는 특성들이지만, 한편으론 책임감을 느꼈다.

두 특성은 내가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였다.

즉, 생존한 세 사람은 자신을 믿었다.

골치 아프군.

뒷목이 뻐근했다.

부담감이 짓누르는 기분이다.

적어도 내 손을 떠나기 전까지는 죽지 않았으면 했다.

계획을 되짚어 보기 위해 책상에 있던 달력에 손을 뻗었다.

기사단이 오기까지 앞으로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까지 남았다.

이 기간은 무리하기보다 조슈아라는 몸에 완벽히 적응하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일 층에서 아직 열지 못한 개인 물품 보관소와 휴게실을 목표로 삼았다.

"다시 연구해 볼 시간인가."

생각난 김에 잠겨 있는 방들 앞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잿빛 구름이 지상에 닿아야 할 빛을 막고 있었다.

쾌청한 땡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을까?

이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된다면 사람들은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에이!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은 거야. 술식을 삼중으로 엮어서 꼬아 놓다니, 아무리 보안을 위해서라지만 이래서는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못 연다고. 페미르, 이 변태 같은 교수."

선객이 있었다.

타니아가 술식을 걸어 놓은 교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투덜거렸다.

어찌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내가 근처까지 왔을 때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차근차근 풀어야지. 과정을 너무 건너뛰고 있어."

"으악!"

그녀가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곧장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건 말이죠. 안에 있던 물건을 독차지할 생각으로 그런 건 아니고, 선배가 하도 열심히 하시길래 저도 호기심이 생겼다고 할까요? 도,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많이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그 얘기를 웃으며 모두 들어 주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던데. 나쁜 의도가 없었던 것 맞아?"

"정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믿어 주실래요?"

"진정해. 농담이었어."

그녀가 문에 걸어 둔 술식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벽에 몸을 밀착하며 눈동자를 빛내던 모습은 마치 어린 고양이 같았다.

이윽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녀는 내가 자리를 비울 때면 본인이 직접 술식을 해석했다.

막지 않았다.

동성 친구 하나 없는 이곳에서 그녀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수단은 별로 없으니까.

"비켜 드릴게요."

"그럴 필요는 없어. 먼저 온 손님이 있는데, 예의도 없이 새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배려는 감사하지만, 저로서는 무리라는 걸 느꼈어요. 삼중으로 겹쳐진 술식에서 아직 한 가닥도 제대로 못 풀었으니까요."

"널 보면 너무 똑똑한 게 되레 독이 된다는 뜻을 알 것 같다."

"네?"

술식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손으로 툭 건드리자 푸른빛이 발광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원이 드러났다.

원 안에는 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주위를 룬이란 이름의 문자가 회전한다.

"술식을 해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공정이지. 이 술식은 네 말대로 삼중으로 되어 있고, 공정으로 치자면 3공정이야. 3공정은 27개의 룬 문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하겠지."

술식에서 공정은 연산을 뜻했다.

여기에는 현실의 숫자처럼 몇 가지 법칙이 존재했다.

괄호 안을 먼저 풀고, 지수를 계산하며, 다음에는 곱셈과 나눗셈을 푼다.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순서에 따라서 계산해 가면 정답에 이르지만, 이를 푸는 공식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내가 지닌 지식과 [영리함]을 통해 새롭게 정립했다.

수학은 정말 질색이었지만, 배웠던 것들이 쓸모없지는 않았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수학을 담당하던 연로한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우 엄격했던 사람이라 수업 시간에 졸면 가차 없이 매를 들었다.

버릇을 잡아 주겠다며 많이 야단치셨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그분에게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일단은 이쪽의 역삼각형하고,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타니아에게는 출발점만 짚어 줬다.

그것만으론 정답에 도달하기 어렵겠지만, 그녀가 다시금 열정을 불태우길 바랐다.

한데, 기대했던 반응과는 달랐다.

마치 다다를 수 없는 먼 경치를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전부 해석하는 데 성공하신 거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래."

"삼중이라고요! 이건 졸업생들 중에서도 풀 수 있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려운 거잖아요."

"목소리를 낮춰. 너무 흥분했어."

"하지만... 엄청 놀랄 일이에요. 5학년이 아카데미 최상위 필기 문제를 풀다니. 왜 지금껏 실력을 감추고 계셨던 거예요?"

"감춘 게 아니야. 과거의 나는 진짜로 구제 불능이었어."

내 얘기에도 그녀는 나에 대한 환상을 지우지 못했다.

돌아 버리겠군.

타니아에게 점수를 얻는 것은 나쁜 상황이 아니지만, 뭐든지 적당한 게 좋았다.

기사단이 당도했을 때.

괜한 오해로 이리저리 치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믿기 어려운 얘기네요. 혹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거라면 말씀해 주세요."

"거두절미하고, 거기까지 하자."

"...좋아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 능력을 감추시지는 못할 거예요."

타니아가 콧방귀를 끼었다.

차라리 서먹서먹할 때가 그립다고 생각했다.

"근데 왜, 술식을 해석하셨으면서 열지는 못하신 거예요?"

"해석하는 것과 그것을 푸는 데 필요한 마력은 다르니까. 완전히 개방하려면 내 컨디션이 최상일 필요가 있었거든."

"혹시 제가 첫 번째 장치를 해제하면, 선배의 부담을 덜 수 있나요?"

"그럴 거다."

타니아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르쳐 주었던 대로 술식의 공정을 만지작거렸다.

쿵!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기계음과 함께 첫 번째 가드가 풀렸다.

그 모습을 감상하며 역시 '네임드'는 다르다, 라고 생각했다.

이 아이는 마법의 재능이 있다.

"선배, 나중에 교수님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해가 쏙쏙 돼요."'

나머지 이중 잠금장치는 내 몫이었다.

푸른색 마법진에 손을 얹었다.

[영리함]이 저번에 풀었을 때보다 5초나 앞당기며 해석해 버렸다.

마치 옆에 있던 소녀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것처럼.

실제로 타니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이쪽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약 올리시는 거죠?"

"...이건 정말 고의가 아니었다."

8화

술식으로 봉인된 방들 가운데 처음으로 들어간 곳은 사감의 휴게실이었다.

페미르라 쓰인 팻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기숙사 4동을 관리하는 교수의 이름이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다행스런 감정이 들었다.

만약 합류하게 될 공동체에서 그와 만난다면 이 방에 대해 물을 것이다.

분명 껄끄러운 상황에 놓이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몇몇 교수들은 네임드로서 생존자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지만, 페미르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루트에서도 좀비에 의해 살해당하는 불운을 타고났다.

가엾은 페미르.

어디선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그의 명복을 빌며 안으로 들어섰다.

"으악, 구린내가 엄청 나요. 이 방이 방치된 지 오래된 모양이에요."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린 옷가지에서 케케묵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타니아는 그 냄새를 맡고는 넌더리를 냈다.

나는 군말 없이 주변을 들쑤셨다.

이 방에서 약간이나마 고향의 향수를 떠올렸다.

어느 세상이든 사회생활에 바쁜 남자들은 귀차니스트가 많은 모양이네.

더불어 복도에서 나던 피 냄새도 잠시나마 잊게 만들었다.

코끝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피 냄새와 비교하면 오히려 향기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챙겨. 분류는 나중에 하더라도 늦지 않으니까."

타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방 안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서랍과 장롱에서 담배를 찾아냈다.

이 세계에도 담배는 기호 식품으로서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종말이 도래한 지금에 이르러선 거래의 화폐로 쓰이기도 했다.

하나 피워 볼까?

현실의 나는 애연가였다.

하루에 한 갑은 꼭 피울 정도였고, 어느 장소를 가든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왜, 한 번도 찾지를 않았지?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하느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금연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피운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담배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냉정함]이 만류했다.

어찌나 억제력이 강하던지 손가락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그래, 그래. 안 피운다.

내가 속으로 포기하자, [냉정함]은 얌전해졌다.

"담배, 좋아하세요?"

옆에 있던 타니아가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방금 전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무척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테니까.

"좋아했었지."

"지금은 아니란 뜻이네요?"

"모르겠어. 다시 피워 보면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안 피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아직 연구 중에 있지만."

그녀가 무척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보고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럴게."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거에요?"

"최근 들어서 몸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어. 아침에도 바로 못 일어나고, 체력도 예전만 못한 느낌이고."

"맞아요. 분명 담배가 원인이에요! 이 녀석 안의 해로운 물질이 얼마나 많은데요. 분명 그것들이 인체에 영향을 끼친 거예요."

타니아는 잔뜩 들떠 있었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이유만으로 저리 흥분할 일인가 고민해 봤다.

[영리함]이 결론을 도출했다.

신빙성이 넘치는 얘기였기에 그녀를 향해 지체 없이 물었다.

"담배와 관련한 연구서라도 썼니?"

아카데미의 성적 관리 방법 중에는 논문과 유사한 연구서가 존재했다.

2학년에게는 이른 과제였지만, 타니아의 실력이라면 몇 개 정도 썼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게."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가 대답을 잇지 못하고는 침묵했다.

계속 들추어 낸다면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겠지만, 꾹 참았다.

"열심히 해 봐. 나도 네 의견에는 찬성이니까."

담배의 인기가 상당한 이 시대에서, 그것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은 금기였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부디 그 용기가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격려해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타니아가 놀란 듯이 대꾸하였고, 시선이 부딪치자 다시 피해 버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사를 마무리했다.

"수확이라고 부를 만한 건, 술과 담배, 배낭, 단검 정도인가."

"조금 더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타니아가 어깨를 떨구었다.

힘들게 들어간 것치고는 만족스럽지 못한 탐색이라 판단한 거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술과 담배와 같은 기호 식품은 다른 사람들과 물물 교환이 가능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화폐보다도 가치가 높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휴게실에서 얻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숨겨진 공간을 확인했습니다.]

[코인 5개를 획득합니다.]

THE Survival의 시스템 상점에 쓰이는 코인을 얻었다.

이 코인은 특정 몬스터를 처치. 히든 스테이지에 입장 등.

게임에서 업적이라 불릴 만한 일들을 해냈을 때 지급받았다.

코인을 얻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무리할 수는 없다.

코인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험이 뒤따랐다.

술식으로 막힌 문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아에게 마법적 재능과 [영리함]이 없었더라면, 술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

팔다리의 신경이 엉망이 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었겠지.

나와 함께 게임 테스트에 참여했던 유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코인을 얻는 과정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고.

나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아무리 좋은 보상이라도, 가능한 경우에만 공략해야 한다.

나는 그 법칙을 잊지 않았다.

내가 유저들 중에서 최고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법칙들 중 하나였다.

"아직 개인 보관소가 남았으니까, 너무 아쉬워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이건 지니고 다녀."

나는 방 안에서 찾아낸 단검을 그녀에게 주었다.

만약을 위한 호신용으로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제가 가져도 괜찮아요?"

"나는 방망이가 있으니까. 너도 하나쯤은 몸에 지니고 다녀라."

"고마워요."

"그럼 나중에 보자."

휴게실에서 타니아와 헤어지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 길목에는 탈레온의 방도 있었다.

소년의 방 앞에 멈추고는 문틈을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살아남은 두 소년이 침대에 걸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귀를 세우고는 엿듣기 시작했다.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롭다면, 차라리 그 사람 탓이었다고 원망해 버리는 건 어때?"

"누굴? 조슈아를?"

"그래."

"...아니, 그건 불가능해. 우린 도움을 받았어.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이었다고. 내가 화나는 건, 브린델이 당하는 모습을 넋 놓고 지켜봤다는 거야."

"어떤 심정인지 알겠어. 나도 너만큼이나 화가 난다고.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아. 네가 이 문제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이 진정 브린델이 원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 사람을 따라야겠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건 너도 동의하지?"

"그래, 조슈아는 좋은 사람이야."

그쯤 듣고는 벽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탈레온은 고뇌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규칙을 깨트릴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한숨을 내쉬었다.

내 주위의 사람이 모두 냉정하고, 신중한 모습을 보이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1순위가 아닌 경우도 있을 테니까.

어쩔까?

삐걱거리는 침대에 눕고는 생각에 잠겼다.

매몰차게 버려야 하는 걸까?

어차피 터질 사고라면 함께 돕는 편이 좋은 걸까?

하나같이 매력적인 아이디어이긴 한데.

이럴 때 앞뒤 따지지 않고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머리가 아프다.

선택지가 있는 게임이 아니란 게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늘은 아니길.

권태감이 몰려왔다.

문을 열기 위하여 마력을 너무 소모한 영향이었다.

눈을 감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 * *

며칠 후 새벽이었다.

탈레온은 여전히 위태로웠지만, 내 명령 없이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나는 소년의 자제력을 칭찬했다.

속마음은 어떻든, 그는 흘러넘치기 직전인 단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날따라 보초를 서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앙 복도에 놓아둔 의자에 앉았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상황을 염두에 두더라도, 사고가 터지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예측이 안 되기에 종말인 겁니다. 고난이 없다면 생존이 아닌 거죠. 그러니 항상 등 뒤를 조심하세요. 오래 살고 싶다면 말입니다.]

불침번을 서던 중에 선잠에 들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THE Survival의 운영자로부터 게임 팁을 듣고 있었다.

많은 기억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이것일까?

흔치 않은 자각몽이 이렇게 낭비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주실 수는 없나요?]

한 유저가 물었다.

[플레이어분들은 가장 먼저 사람을 경계합니다. 지성을 지닌 만큼 변수가 가장 많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좀비는 무지성이기에 최소한의 경계만 하면 될까요? 글쎄요, 경고하겠는데, 놈들은 쉽게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녀석들이에요.]

나는 눈을 떴다.

어디선가 불어온 찬바람에 몸이 떨렸다.

가을밤의 바람은 원체 쌀쌀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무언가 달랐다.

뼛속까지 시리는 듯한 감각.

한기였다.

[야행성]이 바짝 긴장했다.

이 특성은 어두워졌을 때,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 감각이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자각몽이 아니라, 예지몽이었나?

나는 좀비를 잊지 않았다.

결코 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위층의 좀비들이 아래로 내려올 가능성을 생각했다.

며칠 전, 두 소년과 함께 2층의 가구를 쓸어 모아 연결 통로를 막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최선의 방어였다.

하지만 최선의 방어가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불러오리라는 법은 없었다.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는데.

고작 넷이서 좀비를 쓸어 버리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래서 자중했다.

하지만 이 층의 방어선을 뚫는다면 얘기는 달라졌다.

적이 턱밑까지 쫓아왔다면 놔두어서는 안 된다.

내려왔군.

쿵!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의 굶주린 신음 소리가 먼발치인 이곳까지 전해졌다.

[돌발 퀘스트 – 기숙사에서의 혈투]

클리어 목표 – 기숙사의 좀비들로부터 살아남아라.

난이도 – F

보상 - 10코인.

퀘스트가 등장했다.

포기한다는 선택지도 있으나 불가능했다.

기숙사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봐야 더 많은 좀비에게 둘러싸였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방망이를 들었다.

잠든 아이들의 방을 하나씩 찾아가며 상황을 전달했다.

"탈레온, 아무래도 네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다."

"네?"

"나와라. 놈들이 왔다."

그토록 바라던 상황에 직면했건만.

탈레온은 기뻐하기보다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입 안에 흐른 침을 소매로 훔치고는 검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타니아와 가비누가 도착해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혹시 저희가 실수라도 한 건가요?"

타니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연결 통로인 계단을 바라봤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게 지금 일어났을 뿐이지."

그녀를 진정시켰다.

지금 동요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질문이 있습니다만."

가비누가 손을 들어 얘기했다.

"이 층에서 일 층으로 내려오는 연결 통로는 중앙 계단 하나뿐인데, 여기만 철저히 막으면 굳이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요?"

"계단의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내려올 구멍이 하나라도 있단 게 문제지. 놈들은 이번처럼 언제라도 내려올 수 있어. 위층은 준비할 여유가 있지만, 이 층은 코앞이다. 네가 지금처럼 침대 위에서 발 뻗고 자고 싶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쓸어버리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다소 위협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살얼음판 위를 딛고 있음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가비누가 마른침을 삼켰다.

"우린 싸울 거다. 어떻게 싸울지 생각해.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것들을 모조리 쥐어짜 내야 할 거다."

"두렵지 않으세요? 전 솔직히 겁이 나요."

타니아는 질문을 하면서도 여전히 2층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좀비의 신음이 강해졌다.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의 목소리가 더해져 소름이 끼쳤다.

두렵냐고?

[강심장]이 있는 이상, 내가 저들로부터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나를 통하여 안심하고 싶어 했다.

"두렵지 않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나는 혼자서 싸우진 않을 테니까."

9화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세 사람의 낯빛이 천천히 돌아왔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이제는 저들과 싸울 전략을 생각할 시간이다.

우선 전력을 따져 보았다.

페리티 등급의 견습 기사 둘과 마법사 한 명.

첫 번째 싸움에서 함께했지만, 그건 경험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버리기 아까운 패였다.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그들을 전투에 배치시켜야 했다.

"너희 두 사람, 복도에서 검을 휘둘러 본 적은 있는 거냐?"

"그게 중요한 건가요?"

"중요하지. 검술 훈련은 보통 실외에서 하니까. 실내라면 천장과 벽을 신경 쓰면서 휘둘러야 한다."

기사 캐릭터로 플레이하였을 때, 저질렀던 실수였다.

기숙사의 복도는 협소했다.

협소한 장소에서 무기는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아, 확실히!"

탈레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몸과 검의 길이를 생각해라. 잘못 휘두르면 괴물에게 당할 거다."

"조심하겠습니다."

소년들의 눈빛은 강인했다.

마음이 꺾일 일은 없으리라.

하나 실수는 마음가짐과 상관없이 생겼다.

'연계는 힘들겠지.'

두 소년이 복도의 나란히 섰을 때를 상정했다.

뛰어난 학생이라면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고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에게는 버거워 보였다.

이건 훈련이 아닌, 실전이다.

한 번의 실수로 생사가 오고 가기에, 기적에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되도록이면 적은 숫자를 맡겨야 한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위층의 상황을 둘러보고 올 테니까."

나는 세 사람을 남겨 놓고서, 홀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천천히 올라갔다.

놈들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거리를 가늠했다.

이 층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계단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모양이었다.

벽에 몸을 붙이고는 고개를 조금씩 움직였다.

왼쪽으로 여덟, 오른쪽에 셋.

[야행성]이 칠흑 같은 어둠에도 적의 숫자를 확인시켜 주었다.

한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각이 약한 덕분에 달려오지 않았지만, 희뿌연 탁한 눈동자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대강 살핀 뒤에는 도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놈들이 있던가요?"

타니아가 물었다.

"그래."

"얼마나요?"

"열 마리가 넘는다.

"저희끼리 할 수 있을까요?"

"해야지. 안에는 열 마리이지만, 밖에는 몇 마리나 있을지 모르니까."

나는 타니아를 뒤로하고서 두 소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들은 명령을 받으리라는 걸 예상했는지, 자신들의 검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너희는 별동대다. 나와는 따로 움직이게 될 거야. 지난번과 같은 도움은 기대하지 마라. 서로에게 의지해야 해."

"...예."

"목소리에 확신이 없구나, 탈레온. 친구의 복수를 할 기회가 찾아왔는데,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심 포기하고 있었어요. 생존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을 버려야 한다고 얘기하셨고, 그게 옳다고 받아들이는 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복수심이 흐려졌다?"

"첫날보다는 약해진 게 사실이에요."

소년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브린델이 죽었을 때의 태도와 지금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게 이유였다.

'기사도를 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불변, 변하지 않는 마음은 기사의 중요한 덕목이다.

이는 충성심하고도 관련이 깊었다.

덕목을 지키지 못한 기사는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받는다.

소년도 기사 견습생인 이상, 이러한 규율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운명이다.

'딱히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누구든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의 충격은 큰 법이다.

당시에는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상실감에 빠지기도 하겠지.

하지만 슬픔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차츰 희석되기 마련이었다.

탈레온도 똑같았다.

어떤 이들은 소년이 변덕을 부린다며 나무랄지 몰랐다.

명예롭지 못하다고 비난하겠지.

하나 나는 달랐다.

'나는 이 세계의 규칙을 존중하겠지만, 그것에 얽매일 생각은 없어.'

마음속의 의혹을 씻어 내고는 탈레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넌 개인적인 감정을 죽였다고 말했지?"

"네."

"그렇다면 무리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그래요."

"좋은 대답이야. 네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 너에게 등 뒤를 맡겨도 되겠어."

"가, 감사합니다."

탈레온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존경심이 담긴 듯한 시선이었다.

"이제부터 전략을 얘기하마. 탈레온과 가비누는 이 층으로 올라가면 오른쪽 복도로 향해라. 괴물 셋이 있을 거다. 놈들은 죽인 다음에는 그대로 계단으로 직진하여 3층으로 올라가. 그런 다음에는 다시 반대편으로 넘어가서 배후를 잡는 거다. 혹시 질문이 있나?"

가비누가 손을 들며 질문했다.

"3층에 다른 괴물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있을까요?"

"있지.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너희에게로 향할 일은 그다지 없으리라고 보거든."

"이유가 뭐죠?"

"왼쪽이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곳으론 가지도 않을 거야."

설명을 해 줘도 가비누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한 가지 경고하마. 이건 너희 셋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니까 잘 들어라."

가뜩이나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나는 한층 더 분위기를 잡았다.

뇌리에 새겨 넣어야 한다.

지난번처럼 실수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괴물들 중에는 너희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친구이거나, 아는 선배이거나, 혹은 교수이거나, 고용된 사람이거나. 누구라도 개의치 말고 쓰러뜨려야 한다. 괴물이 된 그들은 너희를 그저 먹이로만 바라볼 뿐이야. 망설이면 죽는 거다."

세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히 브린델의 죽음과 얽혀 있는 두 소년은 눈빛이 남달랐다.

"더 질문이 없다면 올라가자."

우린 2층으로 향했다.

뒤돌아 보지는 않았지만, 따르던 세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진 게 느껴졌다.

위로 도착하자 타니아의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나와 그녀가 맡기로 한 왼쪽은 오른쪽과 비교하여 수가 몇 배로 많았다.

두 소년도 순간 멈칫거렸다.

계획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역할을 다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너희의 명예가 더럽혀질지 모르니까."

두 사람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다그쳤다.

전투가 시작되면 상냥하게 타이를 여유 따윈 없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곤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뒷모습이 점차 멀어졌다.

어둠에 녹아들어 그림자만 보이기 시작할 때쯤에는 더 이상 그쪽을 보지 않았다.

"선배, 우리가 너무 손해 보는 것 아니에요?"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었어."

"알아요. 그렇지만... 후, 이제 와서 얘기해 봐야 의미는 없겠네요."

"인정하는 게 빨라졌네? 좋은 자세야."

"그만해요. 후회하려는 거,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잠시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좀비들이 이쪽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놈들과 가까워질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썩은 냄새가 풍겨 왔다.

그것들은 내게 불쾌감을 심어 주었지만, 두려움은 심지는 못했다.

[강심장]이 든든하게 버텨 주고 있었다.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해요? 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타니아는 떨고 있었다.

제자리에 주저앉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술식을 계산하고 있어."

"...계산이 돼요? 전 아주 기본적인 것도 틀릴 것 같은데."

"그걸 못 하면 죽는 거야, 우리 둘 다."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타니아가 혀를 찼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전투가 시작되면 정말로 필요할 말들 외에는 하지 못한다.

나는 십자가를 들고는 4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성 마법을 통하여 방패를 만들었다.

새하얀 빛이 한점으로 모여 좀비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복도를 가로막았다.

마력은 충분하다.

그때보다도 방패의 완성도도 높았다.

쾅! 하지만 첫 충격을 견뎌 내고는 이해했다.

저번보다도 강하다.

단순히 생각하더라도 4층에서의 전투보다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놈들이 흥분하여 울부짖자, 뒤쪽 계단에서 몇 마리의 좀비가 더 내려왔다.

열둘, 열셋....

세어 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상념을 떨쳐 냈다.

한자리로 모여든 좀비들이 동시에 방패를 두드렸다.

흡사 성벽을 부수기 위하여 공성기를 끌고 온 느낌이었다.

이윽고 방패의 모서리가 부서지고, 좀비의 팔이 넘어와 허우적거렸다.

나는 타니아에게 눈짓했다.

방패에 생긴 구멍 덕분에 그녀에게도 활약할 기회가 생겼다.

"떨어져!"

타니아가 휴게실에서 찾았던 단검으로 넘어온 팔을 내려찍었다.

살짝 빗나갔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속해서 찔렀다.

팔이 좀비에서 완전히 떨어질 때까지 쉴 틈 없이 반복했다.

마침내 바라던 대로 좀비가 물러섰다.

하지만 기뻐할 틈도 없이 다른 쪽에서 구멍이 생겨났다.

타니아는 쉬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 좀비를 막고, 또 막았다.

집념은 대단하나, 저런 식으론 체력이 버티질 못한다.

앞으로 3분은 더 끌어야 하나?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둘은 죽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곧 계획대로 배후를 노릴 거란 확신이 들었다.

"타니아, 내 뒤로 와. 그리고 불이 필요해."

"...불이요?"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마법사이면서도 굳이 단검을 휘두른 이유는 알고 있었다.

혼란스런 상황에선 더하기나, 뺄셈 같은 간단한 계산도 틀리곤 한다.

그리고 마법은 실패할 때 리스크가 존재했다.

그녀는 그것이 내게 피해가 되는 걸 우려했다.

"이전에도 넌 해냈어. 걱정하지 마. 잘될 테니까. 눈을 감고서 불을 일으키는 것만 생각해."

"네!"

타니아는 자신감 있게 대답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술식을 준비했다.

나 또한 준비를 해야 했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술병을 오른손에 들었다.

그것을 앞으로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무너져 가는 방패에 마지막 술식을 더했다.

전개된 마법의 이동 명령.

밀어낸다.

마법은 술식을 더할수록 난이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 방패에 '밀어낸다'는 명령을 더하는 것만으로 계산 값이 달라진다.

십의 자리가 백의 자리로.

백의 자리가 천의 자리로 넘어가듯.

실패할까?

[영리함]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방패가 밑에 바퀴라도 달린 것처럼 복도를 천천히 나아갔다.

좀비들이 바닥에 뒤엉켜서는 서로를 짓밟아 가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독한 놈들.

머리만 남더라도 끝까지 발악할 놈들이었다.

확실하게 끝장을 봐야 한다.

방패가 깨졌다.

찬란한 빛의 파편이 좀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내가 공중으로 던져 올린 술병이 타이밍 좋게 떨어졌다.

"지금이야, 불을 쏴."

타니아가 불을 피우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그것을 좀비를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불길이 타올랐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지만, 엉켜 있던 놈들에게도 금새 불이 옮겨 붙었다.

최종적으로 여섯 마리가 불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얀 연기와 시커먼 재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 속에서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느껴졌다.

나는 타니아의 손을 잡고는 뒤쪽으로 물러나, 연기를 뚫고 올 좀비를 주시했다.

하지만 놈들은 오지 않았다.

불길을 뚫고 올 용기가 없어 보였다.

이윽고 연료를 잃은 불꽃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잔불로 변해 갔다.

불은 더 이상 키워서는 안 돼.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불은 강력한 무기이지만, 신중히 다루어야 했다.

기숙사의 주요 자재는 나무였고, 최근 날씨는 쭉 건조했다.

만약 불이 커졌다면 좀비를 몰살시키더라도, 우리는 기숙사를 포기해야 한다.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탈레온이었다.

그가 가비누와 함께 뒤로 돌아와 좀비들을 공격했다.

방패에 부딪혀 몸에 하자가 생긴 녀석들은, 혈기 넘치는 소년들을 당해 내지 못했다.

상황은 역전되고, 포식자는 우리가 되었다.

"이 새끼, 여기 있었구나!"

아직 쓰러지지 않았던 좀비 중에는 탈레온이 원수로 여기던 좀비가 있던 모양이었다.

축하할 일일까?

소년은 잃어버렸던 복수심을 되찾았는지, 놈의 머리를 단칼에 베었다.

"화풀이는 그쯤 해라. 어차피 이 녀석에게는 네 친구를 죽였다는 자각조차 없으니까."

"하, 하."

"그것보다 다친 곳은 없는 거냐? 아주 작은 상처라도 감추지 말고 말해."

"없어요."

가비누도 양손을 들며 괜찮다는 신호를 주었다.

"그럼 됐다."

"...아."

가비누가 아쉽다는 듯이 뺨을 긁적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그게 말이죠. 이 일은 우리가 수업이 아닌 실전으로 처음 참여한 첫 전투였어요. 이럴 때는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축배를 들어야 옳은데."

그의 시선이 내 뒤편에 있던 좀비의 언덕을 보곤 말했다.

"저걸 보니까 제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져서 말이죠."

10화

전투의 뒤처리가 끝난 이후로 세 학생은 간이식당으로 향했다.

검을 든, 두 소년은 처음으로 세운 공적에 잔뜩 심취했다.

"들었어? 조슈아 경이 우릴 보고는 잘했다며 칭찬했어."

탈레온은 대답과 함께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고작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사람에게 이토록 존경심을 품을 줄이야.

하지만 직접 겪어 본 조슈아는 무척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리더이자, 지휘관이었다.

기사라면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성공을 거두었을 때는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들었지. 솔직히 2층으로 올라갔을 때는 어떻게 되는 줄 알았지만, 어떻게 잘 해결된 모양이야. 얘기 좀 들려 줘.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거야?"

가비누는 옆에 앉아 있던 타니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신 줄을 놨네. 혹시 당한 것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선배의 마법."

"마법이라면 아카데미 견습생 누구나 쓸 줄 아는 거 아니야?"

"바보야, 내가 본 마법이 누구나 사용할 줄 아는 거라면 이렇게 감탄했을 것 같아? 그건 특별해."

신성 마법.

타니아는 그 이름을 도서관에 있던 고서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술식에 담을 수 있는 원소는 그 종류가 수도 없이 많지만, 빛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혈통이란 재능이 필요했고, 다룰 수 있는 역량도 필요했다.

팔라리온 가문은 한때 두 조건에 부합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가 끊겼다고 들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팔라리온은 몰락했다.

이제는 누구도 빛을 다루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아니었다.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우린 기사 견습이라 그런 건 잘 몰라. 아무튼 신동이라 불리는 네가 대단하다면 대단한 거겠지."

"그것뿐만이 아냐! 선배는 이미 시전한 마법에 술식을 더해서 움직이기까지 했어. 술식 더하기라 불리는 작업인데, 이게 실패할 확률이 상당히 크거든? 근데, 그 사람은 그런 혼란스런 상황에도 단번에 성공했다고."

타니아는 잔뜩 흥분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좀비들을 소탕한 덕분에 조슈아가 정해 둔 규칙 몇 개가 사라졌고, 개중에는 언성을 높이지 말 것도 포함되었다.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네가 말해 주지 않아도 우린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어."

탈레온은 손짓으로 그녀를 억눌렀다.

"맞아. 그것보다도 우린 스스로가 한 일을 칭찬해야 해. 나와 탈레온은 이번 전투가 영광스런 첫 전투였다고! 이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알아?"

"...글쎄."

"마법사는 명예에 대해 모르나 보지?"

"그렇다기보단, 이번 일은 전적으로 선배가 해낸 거야. 우린 옆에서 거들었을 뿐이고. 숫자로 표현하자면 선배는 80, 우리가 20이지."

"그럼 그 20을 위하여 축하하면 돼."

타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비누의 행색은 승전을 축하하는 기사라기보다는 거나하게 취한 용병 같았다.

거칠고 투박했다.

한편으론 저런 장난스런 태도가 그의 천성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럴 때 술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 그 사람이 몇 개 지니고 있던데 하나 달라고 말해 볼까?"

"그만두는 게 좋을걸? 선배는 절대로 주지 않을 거야."

"역시 그렇겠지? 아쉽다."

가비누는 비어 있던 잔 3개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둥글게 파인 구멍에다가 남아 있던 물을 쏟아붓고는 다른 두 사람에게 나눠 줬다.

그리고는 누구보다 먼저 잔을 들이켰다.

'캬!' 그의 입에서 청량감이 가득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타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가 따라 준 물에 입을 맞췄다.

짐작대로 물이었다.

알코올은 1g도 들어가 있지 않은 순수한 물.

"어때, 속았지?"

"그래, 나쁘지 않은 연기였어."

타니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부디 자고 일어났을 때도 이 평화가 계속됐으면 좋겠어.'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속으로 해 왔었다.

그리고 기도했던 횟수만큼 실망했다.

이 바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기도했다.

이제는 버릇이나,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고 말았다.

* * *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기숙사 4동 좀비와의 혈투]

[코인 10개를 획득합니다.]

위험했어. 생각해 놓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만약 그때 깨어 있지 못했더라면....

아찔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자는 도중에 소리 소문 없이 좀비에게 둘러싸여 산 채로 온몸이 찢길 뻔한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전투의 가장 큰 수확은 코인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늘 경계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었다.

보초를 서길 잘했어. 몸은 피곤하지만, 목은 멀쩡히 붙어 있잖아. 이거면 된 거지.

살아만 있다면 다음을 꾀할 수 있었다.

나는 되새긴 교훈을 벗 삼아 기숙사를 누볐다.

그게 마지막이었던 건가?

학생들을 내려보내고는 3층과 4층을 다시 탐색했다.

간혹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좀비들이 있었다.

확실히 해 두어야 했다.

아주 작은 방심이 생각지도 못했던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니까.

확실해졌네.

쿵, 마지막 방문을 닫았다.

기숙사 4동은 청정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자신의 처지에 안식을 주진 못할 것이다.

내부가 청소되더라도 외부의 적은 여전하다.

그들은 매일 밤마다 수십에서, 수백은 늘고 있었다.

정문을 지키는 보초는 매일 서야 할 것이며, 기사단과 마주할 준비도 해야 한다.

막간의 휴식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못할지도 모르겠어.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내질렀다.

마력을 다루는 스킬은 늘어났지만, 매번 한계까지 사용한 여파였다.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서지도 못했으리라.

더군다나 신성력이 회복되면 곧바로 개인 보관실을 열어 봐야 했다.

끔찍한 스케줄이었다.

얘들은 뭘 하고 있지?

계단으로 내려오자 식당 방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껏 떠들게 하고 싶었다.

내가 가면 방해만 될 거야.

열여덟의 조슈아였다면, 저 틈에 끼어 청춘을 즐길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서른의 강민혁에겐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나는 자연스레 반대편으로 향하였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꿈나라에 빠지는 데는 10초면 충분했다.

* * *

며칠이 흘렀다.

내가 깨어난 지는 보름이 되던 시기였다.

타니아가 생존하였으니, 이후부턴 언제든 기사단이 방문할 수 있었다.

되도록이면 자신이 맞이하여야 한다.

아카데미의 수호자라는 이명이 뒤따르는 기사단이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타니아의 운명으로 도움을 얻는 건, 어디까지나 기사단과 조우하는 것뿐이지.

그들이 친절을 베풀 거란 기대는 버려야 한다.

"오늘 개인 물품 보관소 여실 생각이시죠?"

타니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예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그래."

"저도 돕게 해 주세요."

"상관없지만, 네게 맡기는 건 첫 번째 술식까지만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아, 이중 술식은 제겐 아직 벅차겠죠?"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술식을 푸는 과정은 경험치가 쏠쏠했다.

기본 술식이라면 모를까, 이중 술식부터는 양보해선 곤란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테니까.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가르쳐 줄게."

"아! 기대하고 있을게요."

대충 얼버무리고는 보관소 앞으로 향하였다.

술식이 걸린 문 앞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자 타니아가 앞으로 나섰다.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지난번 시도했을 때보다도 시간을 단축시켰다.

"혼자 남몰래 연습했어요. 이제 기본 술식은 눈 감고도 곧잘 해낼 거예요."

"...잘했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내 안의 특성이 눈에 불을 켰다.

[영리함]이 술식 앞으로 서라며 재촉했다.

부디 저 웃는 얼굴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녀와 똑같이 손을 뻗었다.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노력을 무너뜨렸다.

[영리함]은 만족했지만, 현실에서 곤혹을 치르는 건 나였다.

[숨겨진 공간을 확인했습니다.]

[코인 5개를 획득합니다.]

"이건 그러니까 말이지...."

"아뇨, 이젠 선배의 의중을 알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노력해서 내가 있는 경지까지 오라는 뜻이죠?"

그녀는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잠자코 있으면 타니아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좋은 선배로 기억할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해석해."

"후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나는 보관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3층 선반 위에는 사각형의 상자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상자 앞에는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하나 바닥으로 끄집어 내리며 안을 살펴봤다.

"주로 교과서가 많네요."

"정말로 중요한 물건이라면 이런 장소에 보관하기보다는 직접 들고 다닐 테니까. 하지만 아주 가끔은 쓸모 있는 물건들을 두고 가는 녀석들도 있어."

손을 뻗어서 상자에서 끄집어 올린 것은 지팡이였다.

짧고 뭉툭한 형태의 완드였다.

재질은 너도밤나무이며, 속에 심은 원천은 요정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완드에 흐르는 은은한 은색 기운이 증거였다.

나는 지팡이를 잡고서 마력을 방출했다.

심지 끝에 빛이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날 거부하고 있네.

지팡이는 적합한 주인을 찾아내는 특징이 있었다.

나의 마력과 이 지팡이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타니아, 이거 잡아 봐라."

"헉! 지팡이잖아요. 선배가 안 쓰실 거예요?"

"나한테는 안 맞는 모양이야. 매개체로는 십자가도 있으니까, 급한 것도 아니고."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요!"

그녀가 기뻐하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동안 매개체 없이 마법을 사용하던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지팡이를 감상하는 타니아를 뒤로하고 상자를 살폈다.

안쪽에 약병이 보였다.

붉은 물이 넘실거리는 그것의 정체는 시약이었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눈앞에 있던 것은 마력을 올려 준다.

총 3병.

정착지에 간다면 물물교환으로 써먹을 수 있을 테지만, 그때까지 무사히 들고 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나는 망설임 끝에 시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마력이 상승합니다!]

[마력이 상승합니다!]

[마력이 상승합니다!]

[마력이 30 상승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질이 좋은 시약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당 마력이 10씩 상승하였다.

방어구나, 무기를 더 구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네. 소동이 일어나자 죄다 챙겨 간 모양이야.

아쉬움을 뒤로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타니아는 지팡이로 해 보고 싶은 게 생겼다며 곁을 떠났다.

나는 중앙에 있던 복도로 향했다.

오늘 낮 시간에 보초는 탈레온 차례였다.

소년은 자신이 놓아 둔 의자에 앉고는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눈이 빠지겠다. 긴장하는 건 나쁜 게 아니지만, 지나치면 몸에 탈이 날 거야."

"아,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체력에는 자신이 있거든요."

"...알았다. 만약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가 기숙사로 접근한다면 곧장 날 깨워야 한다. 네 다음 차례인 가비누에게도 알려 주어야 하고."

탈레온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 말씀은 생존자가 온다는 뜻인가요?"

"어쩌면 말이다. 그럼 난 잠시 쉬어야겠다. 마력을 써서 온몸이 뻐근해."

"쉬세요."

방으로 돌아와서는 눈을 감았다.

과연, 기사단이 오늘 방문할까?

예정된 기한까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빠르든, 늦든 만나게 될 운명이었지만, 되도록이면 빠른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좋다고들 말하잖아?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어.'

나는 꿈속과 현실의 경계선에 걸쳐선 현기증을 느꼈다.

가위라도 눌리고 있는 건가?

눈이 떠지지 않았지만, 온몸의 신경은 깨어 있는 상태였다.

톡톡!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잠결에 들린 환청이라고 치부하였다.

톡톡톡!!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도 강도가 세졌다.

이건 꿈이 아니다.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켰고, 눈을 떴을 때는 가비누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옷깃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지금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이요!"

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