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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

"이, 이이익! 왜 왜 안 받는거야!"

그 시각 사원 한민선은 모니터 앞에 앉아 열심히 사냥만 하고 있는 강철민을 향해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도 그럴 게 자기가 계속해서 게임의 시스템을 조작하며 그에게 일반 유저라면 바로 군침부터 흘릴 여러 이벤트를 주었건만 그는 단 한 번도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답답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

"간단하지."

그렇게 말하며 책상을 콰앙 내려쳤을 때, 한민선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틀었다.

거기에는 곽 부장이 있었고, 그는 사냥하고 있는 강철민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분은 그런 사람이야. 절대로 쉬운 길을 가지 않지. 아무리 주위에서 좋은 걸 줘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사용하는 그런 법칙을 가진 남자란 말이지."

"아니, 방금까지도 곽 부장님이 강철민에게 뭐든지 해 주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딴소리에요?"

"내 마음은 늘 그분의 뜻을 따를 뿐이야. 받지 않겠다면 받지 않는 것이지. 어쩔 수 있나? 이런 우직한 사내에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는 거야."

"제가 보기엔 그냥 의심 많은 똥고집인데."

"어허,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닐세. 월급 떨어지는 소리 어디서 안 들리나? 이제 곧 연말인데."

"하하. 의심이 많다는 것은 신중하다는 의미이고, 똥고집이라는 말은 자기 생각에 확고함이 있다는 뜻이죠. 얼마나 멋져요."

"그렇지. 그렇지."

비위 맞추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한민선이 한숨을 푹 내쉬자 곽 부장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도 저거라면 우리가 좀 도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말에 한민선이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자, 거기에는 방금 막 마을에 도착하여 대장간을 찾아가는 강철민이 있었다.

그는 검의 수리를 맡기려는 듯하였고, 한민선은 그 즉시 키보드로 손을 뻗었다.

"그러네요. 기왕 수리받는 거 여러 혜택 붙여서 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래, 그런 식으로 슬쩍슬쩍 도움 주는 게 우리 역할인 거야. 한민선이 슬슬 눈칫밥 좀 먹더니 많이 컸구만. 유능해. 유능해."

방금까지 월급 깎겠다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한 주제에 금방 태도를 바꿔 유능하다고 평가한 곽 부장을 뒤로 한 채, 한민선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래 보여도 대기업 면접을 한 방에 뚫고 올라온 한민선은 엘리트다.

VR 게임 쪽의 잠수함 업데이트 위 들키지 않고 쉽게 해낼 정도로 뛰어난 인재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유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고쳐 온 버그만 해도 수천 가지 이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곽 부장도 한민선에게 강철민의 모니터링을 믿고 맡겨 놓은 것이기도 했다.

열심히 일하는 한민선의 뒷모습을 보며 곽 부장은 만족한 표정을 짓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잠시 후 그녀의 비명을 듣기 전까지는.

"이 나쁜 새끼! 무기 안 돌려받고 접속 종료했어!"

그녀의 눈물겨운 사투는 계속된다.

93화

게임을 종료한 나는 VR 기기를 벗곤 조금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해 본 게임은 내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한 건 쭉 사냥밖에 없기는 했다만, 그것만으로도 억눌린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충분했기에 기지개를 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강북 일대 지역 A급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헌터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게임 중 문자로 날아왔던 게이트 알림.

내가 빙의한 강철민의 본직은 헌터이기에 나는 발생한 이벤트를 따라가고자 게임을 종료한 것이다.

'어디 보자.'

기억을 더듬으며 강철민의 집 위치가 어디쯤인지 떠올린 나는 대검을 쥐곤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곤 집 앞에 주차된 강철민 전용 바이크를 꺼냈다.

오러로 움직이는 이 바이크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거라면 주위 방해 없이 금방 강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띠링띠링!

바이크에 올라타 강철민의 기억에 따라 오러를 주입하며 조작하는 순간 들려온 메시지 소리에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자자, 일해라 기억아."

한 번 더 기억을 이용해 바이크의 구멍에 휴대폰을 넣자 그 순간 앞 유리에 우수수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기한 미래 도구를 보고 있자, 곧 방금 온 메시지가 어디서 왔는지 표시되었다.

이 메시지는 헌터 랭커들 전용 연락 방에서 온 듯하였다.

[21] 서고니 : 오랜만에 A급 게이트 떴는데 가시는 분.

[11] 역루성 : 멀다. 나 지금 울산.

[7] 도각 : 아, 난 부산인데 또 내 없을 때만 뜨지.

[6] 선룡 : 도각, 너는 어디 가도 할 수 있는 거 없다. 걍 부산에 짱 박혀 있어라.

[7] 도각 : XX 선룡 이 새끼야! 나 지금 우리 부모님 보러 간 거라고! 패드립이야 이거! 지금 이거 캡처해서 내 당장 뿌린다!

[5] 뱁새 : 시끄럽다. 둘 다 나가 그냥. 랭커 챗방에서 좀 사라져. 제발.

[9] 무사 백당수 : 가는 중. 가는 중. 거기 있는 사람. 브리핑. 브리핑.

열심히 글자들이 올라가는 채팅방을 보며 나는 바이크를 움직였다.

그 순간 울린 배기음과 함께 바퀴가 안쪽으로 들어가며 공중으로 날기 시작한 바이크는 순식간에 차들 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는 채팅방의 말을 입력했다.

[2] 강철 : 내가 간다.

[5] 뱁새 : 강철 오빠, 저 가는 중이에요! 거기서 봬요!

[7] 도각 : 저년 또 저런다. 지금 쟤 위에 채팅창 지웠지. 미친년.

[6] 선룡 : 하루 이틀 보냐.

[3] 서쪽강 : 뭐야? 게임 좀하고 쉬라 했더니, 강철이 벌써 움직이냐.

[9] 무사 백당수 : 강철 형님 가면 나 갈 필요 없지 않음?

한마디를 적은 순간 채팅창에서 곧바로 여러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그 내용들을 보자마자, 강철민의 기억이 멋대로 머릿속으로 주입되었고, 이윽고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연기하면 될 거 아니야."

지금 이 연극에서 나는 강철민이다.

그렇다면 그 연기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 줘야겠지.

게임에서는 강철민이 아니니 내 마음대로 했지만, 현실에서는 강철민이니까.

이 녀석의 입버릇이 나보다 무뚝뚝하고 험한 편이긴 하지만, 적응해 나가야겠지.

['서릿발의 고양이'가 당신의 생각에 의문을 표합니다.]

['이매망량의 속앓이'가 마찬가지로 의문을 표합니다.]

['오만의 아틀리에'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의문을 표합니다.]

['돌원숭이'가 비웃습니다.]

닥쳐. 이것들이 단체로 뒤질라고.

'그것보다.'

나는 채팅방을 보던 중 이름 앞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저 숫자들은 분명 랭커들의 랭킹을 알려 주는 것일 것이다.

강철민의 앞에 붙은 숫자는 2.

이 세계에 이 몸보다도 강한 녀석이 있다는 소리였다.

바이크를 운전하며 나는 채팅창을 위로 쭈욱 올려 보았다.

그러나 채팅창 어디에도 랭커 1위가 채팅을 친 적이 없다.

거기에 강철민의 기억 속에서도 랭커 1위는 제대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즉, 1위 랭커는 게이트 최전선을 달리고 있는 랭커들 사이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인 것이다.

'슬슬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억 속 랭커 1위가 세간에 제대로 보인 모습은 한국에 첫 게이트가 열려 나라가 거의 불바다로 변했을 때 딱 한 번.

그 이후로는 정말 한국이 위험한 상황이었을 때만 어쩌다가 한 번씩 나타났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게 바로 층의 공략 열쇠다.

'그리고 게임.'

성좌가 설계한 층에 우연은 없다.

모든 것은 필연.

'1위가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게임에도 그와 관련된 단서가 있다는 소리인가.'

아직 층의 클리어 조건은 불명확하지만, 1위 녀석을 게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건 순전히 5회차씩이나 크라운 로드를 반복해 온 내 감이었다.

끼이이익.

강북에 도착한 나는 열심히 울리고 있는 비상경보를 뒤로 한 채, 20층짜리 건물 하나를 통째로 잡아먹으려는 게이트를 발견했다.

그와 인접한 건물 안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이 창문을 두드리며 비명을 내질렀고, 빌딩의 유리 안쪽에서 몬스터들의 모습이 얼핏얼핏 드러났다.

평소라면 모를까, 강철민의 몸으로 20층을 곧바로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건물의 1층으로 뛰어 들어갔다.

"강철, 자네 왔는가?"

나는 1층의 들어오자마자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칼 한 자루를 쥔 노인 한 명이 있었고, 나는 강철민의 기억을 통해 그가 헌터 랭킹 9위 무사 백당수의 할아버지 백노현이라는 걸 눈치챘다.

올해 77세임에도 불구하고 조카 백당수보다도 위인 8위에 자리한 그는 노련한 솜씨로 달려든 몬스터 한 마리를 베었다.

"어르신도 방금 오신 모양입니다."

나는 곧바로 강철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메인 게이트는 멈춰도 서브 게이트는 늘 열리니까. 게다가 최근에 발생하는 게이트들은 갈수록 몬스터가 강해지고 있네. 내가 보기엔 A급도 세부적으로 급을 나눠 놔야 할 텐데. 헌터 총회 녀석들은 일을 너무 대충하고 있어. 이대론 애꿎은 젊은 헌터들까지 죽을 걸세."

"서쪽강이 들으면 마음 아파하겠군요."

"젊을 때는 욕도 먹고 그래야지."

내 능숙한 연기에 백노현은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나를 강철민으로 대했다.

[현재 동화율 51%]

거기에 마침 내 연기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바로 오르는 동화율에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역시 내 연기력 하나는 알아줘야 할 모양이다.

[현재 동화율 50%]

...왜 떨어진 거지?

동화율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을 즈음, 검 자루를 늘어트린 백노현이 점점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에 사람들이 있네. 각자 다른 길로 가도록 하지."

"예, 그렇게 하죠."

계단을 올라가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곧바로 다른 층계를 찾아 오르기 시작했다.

가급적이면 이번 이벤트에서 무언가 단서를 잡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간 나는 곧바로 달려드는 몬스터를 대검을 휘둘러 박살 내 놓았다.

이 정도 몬스터들은 강철민의 몸으로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10층 정도 올랐을까, 저 멀리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재빠르게 그쪽으로 뛰어가자 몬스터 한 마리가 책상 아래에 숨은 사람을 공격하려는 광경이 보였고, 나는 그 즉시 몬스터를 걷어차 죽여 놓았다.

"괜찮습니까?"

"아, 으아아."

두려움에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는 여성을 보고 나는 우선 책상에서 그녀를 빠져나오게 한 후 일으켜 주었다.

온몸을 덜덜 떠는 그녀에게 내가 입은 양복 외투를 벗어 둘러 주었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뒤 물었다.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더 있습니까?"

내 행동에 조금은 진정한 것일까, 그녀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은 곧바로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자세히 알려 주었고, 곧 내가 그곳으로 가려 하자 그녀는 급히 내 옷깃을 잡았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함께 가려던 순간, 나는 그녀의 다리가 풀렸음을 깨닫곤 안아 들었다.

다행히 그녀는 별 저항 없이 안겼고, 나는 여성을 든 채로 방들을 지나쳐 회의실 앞에 도착하였다.

그녀를 옆에 내려 둔 나는 회의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앞에 막아 둔 게 있는 듯 문은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오러를 불어 넣어 문을 억지로 열었다.

"문이 열렸어요! 어떡해요?!"

"으아아아아, 우린 다 죽었어!"

덜컹하고 문이 열린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무언가가 내리쳤다.

굳이 피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대로 맞은 내가 조금의 통증도 못 느낀 채로 힐끔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철봉 같은 것을 든 사람이 보였다.

보아하니 몬스터가 들어오면 저걸로 선제공격을 해 보려는 듯하였다.

그는 내가 사람임을 깨닫고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나는 앞을 가로 막는 책상을 치우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헌터입니다. 구조를 위해 왔습니다. 이제 괜찮으니 밖으로 나오시면 됩니다."

"허, 헌터?"

"강철민이다! 강철민이야!"

"살았다. 살았어!"

내가 헌터임을 밝히자 바로 알아본 그들에게서 안도감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전부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 나는 이후 혼자 남겨졌던 여성을 구출한 사람들에게 합류시키곤 말했다.

"제가 올라온 계단 쪽에 있던 몬스터는 전부 처리했습니다. 그곳으로 내려가면 무사히 밖으로 탈출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저희랑 가, 같이 안 가시고요?"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구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다들 아직 불안한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헌터로서 구출 지원이 늦은 점 죄송합니다. 지금쯤 다른 헌터들도 오고 있을 겁니다. 저를 믿고 이동해주십시오."

"가, 강철민씨가 고개를 왜 숙입니까? 내려가는 건 저희 발로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해 주세요. 그리고... 아까 봉으로 때린 거 죄송했습니다."

내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겁니다."

그의 사과에 내가 너그럽게 대하자 사내는 더더욱 미안해하였다.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내려가기로 한 그들은 이동을 시작했고, 나는 그런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보통 랭커 헌터면 자존감이 엄청 높지 않나요? 늦어서 미안하다고 고개까지 숙일 줄이야."

"정말 강철민에 관한 이야기는 뉴스나 인터넷에서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대단한 사람이네요."

"저런 사람이 진짜 헌터구나."

사람들이 계단을 이동하며 떠드는 목소리를 들려왔다.

내가 방금 한 것은 강철민이 평생토록 살아오며 남들에게 한 행동으로, 일부러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하는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강철민은 이런 사람이었다.

자존심은 언제나 굽힐 줄 알고, 사람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게이트를 막는 그런 헌터였다.

"미련한 녀석."

이런 성격의 녀석들은 언제나 금방 죽는다.

왜냐하면 언젠가 자신이 가진 힘이 모자라 누군가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나서 버리고 마니까.

과거에 비슷한 부류의 몇몇 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녀석들은 이번 회차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면 제명도 못 살아. 인간아, 사람은 이기심이 있어야지."

강철민에게 혀를 차 주며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구해 나갔다.

동화율이 있는 이상 나는 강철민을 연기해야 했고, 그와 같이 행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출에 열을 올리고 있던 도중.

쩌저적하고 벽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건물 전체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 밖을 본 순간, 나는 지진이라도 난 양 지면이 멋대로 갈라지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저건."

눈에 오러를 주입하며 시야를 강화했고, 나는 갈라진 땅 사이로 게이트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94화

아무래도 게이트는 이 건물뿐만 아니라 건물 아래의 지하에도 열린 듯하였다.

갈라진 땅 사이로 몬스터들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방금 막 도착한 듯한 헌터들이 급히 몬스터들과 싸워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게이트 탓에 갈라진 땅이 지반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바로 위에 있는 건물이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건물이 붕괴한다.

이곳은 복잡한 도심이다.

이대로 건물이 붕괴한다면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바깥에 있는 시민들까지 그 여파에 휘말려 또 다른 피해가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땅 계열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녀석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그런 걸 할 수 있는 녀석은 밑쪽에 보이지 않았다.

"피해요! 피해! 이대로면 건물이 무너져요!"

"소방관들도 다 빠져요! 헌터들도 A급 이하는 전부 다 빠져! 마법 쓸 수 있는 녀석들은 어떻게든 시간 벌게 건물 쪽에 붙어!"

그 순간 건물의 울림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에 의해 급격하게 기울어져 가기 시작하는 건물을 보고 나는 이를 아득 갈며 즉시 창문을 깨부쉈다.

그러곤 바닥을 향해 뛰어내리며 강철민이 가진 스킬을 발동했다.

[A클래스 백귀화를 발동합니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물들며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10m 크기만큼의 괴물이된 나는 쿠웅하고 바닥을 찍으며 착지했다.

"우와악?! 몬스터가 떨어졌어!?"

아래 있던 헌터들이 놀라 소리칠 동안 나는 그대로 달려가 건물이 무너지고 있는 방향에서 등으로 받쳤다.

백귀화를 했다 한들 기껏해야 3, 4층밖에 안 되는 몸인지라 20층 건물이 무너지는 것 자체를 막는 건 불가능했지만 시간이라도 벌 속셈이었다.

"강철민이다."

"미친, 설마 무너지는 건물 막으려고 저렇게 버티고 서 있는 거야?"

내 모습을 보고 놀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나는 오러를 일으켜 힘을 쏟아부었다.

내가 만약 마음먹고 오러를 쓴다면 이런 건물 따위 한 줌의 재로 지워 버릴 수 있지만, 그랬다간 동화율이 박살 난다.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 그때까지 무너지지 않게 버틸 테니, 모두 근방의 사람들을 어떻게든 대피시켜라."

내 의지는 조금도 안 담긴 강철민의 말을 듣고 헌터들은 서둘러 여기저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우득우득 하고 울리는 근육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그렇게 묵묵히 헌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킬 때까지 기다렸다.

속으론 죽을 맛이었지만 강철민의 성격상 그런 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었기 때문에 참았다.

그러던 순간 갈라진 게이트 사이로 몬스터들이 다시금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난전이 벌어지고 그중 몇몇은 내게로 달려들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 내가 그대로 몬스터의 공격에 노출되려던 순간 한 여성이 뛰어들었다.

"강철 오빠!"

쏟아진 얼음 조각들이 지상에 나타난 몬스터들을 모조리 분쇄했다.

내가 시선을 옮기자 이제야 왔는지 뱁새가 흰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했고, 그녀는 건물이 무너지는 걸 눈치채곤 곧바로 얼음으로 갈라진 땅을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무너지고 있는 건물이 붕괴하는 걸 막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썩을.'

아직 건물 안쪽에 사람이 있다.

어떻게든 헌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근처에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이대로 건물이 무너질 시,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3분 남짓.

3분 안에 모두가 대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안에 있는 사람 전부 다 나왔네!"

2분이 지난 순간 그나마 다행히 백노현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구출했다.

구출된 사람들을 데리고 빠르게 빠져나가는 그를 보고 나는 한 차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철 오빠! 얼른 빠져나와요! 건물이 무너지는 걸 막던 다른 헌터들도 힘이 떨어져서 빠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고자 무너진 건물 부분을 얼음으로 수복시키고 있던 뱁새가 외쳤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직 많다. 시간을 벌 테니, 최대한 대피시켜라."

"무슨 소리예요! 강철 오빠, 백귀화의 지속 시간은 저도 알고 있어요. 곧 끝나잖아요. 아무리 오빠라도 건물 아래 깔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걸 안다면 더 빨리 사람들을 대피시켜."

"오빠!"

나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강철민 이놈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를 않는다.

'젠장, 직감이 말해 주고 있다고. 여기서 내가 빠져나가면 그 즉시 동화율이 박살 날 거란 말이야.'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오러를 써서 건물을 날려 버리는 게 동화율이 덜 떨어지지 않을까.

백귀화가 30초가 채 안 남았을 때 나는 이를 아득 갈며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판사판이다.

이쪽도 건물에 깔리는 건 피하고 싶으니까.

화아아아악.

그 순간이었다.

등 위가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뒤로 돌린 순간 나는 무너지던 건물 일부가 허공으로 띄워졌음을 발견했다.

이윽고 그 건물이 자연스레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언제 무너졌냐는 양 굳건하게 곧추세워졌다.

"...뱁새, 네가 했나?"

"아뇨.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아는 한 어디에도 없어요."

혹시나 한 물음이었지만 역시 뱁새가 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뱁새의 말대로 강철민의 기억 속에서도 이런 걸 할 수 있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1위, 용."

그 순간 뱁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과 함께 내 백귀화가 시간이 다해 풀렸다.

옷이 전부 찢어졌기 때문일까, 알몸 상태가 된 날 보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뱁새를 둔 채 나는 1위 용의 기척을 쫓았다.

'쫓을 수 있겠는데.'

방금 불러일으킨 본신의 오러 탓에 동화율이 상당히 깎여 나가긴 했지만, 그 덕분에 용의 위치를 알아챘다.

쫓으려면 쫓을 수 있겠지만, 이건 내 본래 힘 덕분에 알아낸 정보.

'성좌가 원하는 건 아니겠지.'

차차 다시 연결될 거라 생각하던 순간 나는 내 앞에 던져진 옷뭉치를 받아 들었다.

"백귀화를 쓸 거면 옷 정도는 들고 다녀. 그나저나 좀 늦었네. 미안."

"고맙다."

거기에는 3위 서쪽강, 강철민의 오랜 친구 서강선이 서 있었다.

그에게서 받은 옷을 받아 입은 나는 이전에 열렸던 게이트를 돌아보았다.

용이라는 녀석 등장하자마자 게이트까지 모조리 닫혀 버렸다.

'괜히 1위가 아니라 이 말이지.'

말 그대로 세계관 최강자급.

이후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흥미가 가는 상대였다.

"돌아가지."

"아, 강철 오빠, 같이 가요. 고생했잖아요. 제가 밥이라도 살게요."

"그럼 나도 좀 사 주지."

"서쪽강 씨는 눈치껏 하죠?"

"와, 매정해라."

내가 몸을 돌리자마자 쪼르르 달려온 뱁새의 아양에 슬쩍 서강선이 끼려 하자 그녀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러나 나는 그 둘을 보며 옷깃을 정리한 채 말했다.

"둘이서 먹어라."

"매정해요!"

뱁새가 울먹이며 불쌍한 척을 했지만 내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상당히 예쁜 얼굴인 뱁새였지만 내 눈에 그녀는 동화율을 떨어트리기 위한 성좌의 방해 요소로 보였기 때문이다.

강철민은 여자를 사귀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이 몸에 들어온 크라운 로드 참가자가 여자에게 상당히 약한 녀석이라면 뱁새에게 칼같이 굴지 못하고 넘어갔다가 동화율이 잔뜩 깎여 나가는 참상을 겪으리라.

'이런 거에는 안 넘어가는 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미인에게 약한 녀석들이 꽤 있으니, 여기서 동화율이 깎이는 놈들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는 기껏 동화율이 손실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야, 그러고 보니 철민아. 게임은 해 봤냐?"

"그래."

그때 들려온 서강선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뱁새가 이때다 싶어 우리 이야기에 파고들었다.

"게임? 무슨 게임이요? 강철 오빠, 저도 할래요."

"쟤네 아버지 회사 게임. 근데 뱁새 게임 같은 거 안 하는 타입이지 않아?"

"디스 헌터요? 아버님 게임이니 저도 잘 알아요! 바로 시작할게요!"

어느새 강철민의 아버지는 뱁새의 아버님이 되어 있었다.

이 무뚝뚝한 녀석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두 사람을 두고 바이크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바이크에 오러를 불어넣은 채로 말했다.

"알아서 해라. 난 갈 테니."

그렇게 나는 곧바로 현장을 떴다.

아마 조금 있으면 사고 현장을 취재하러 올 기자들로 가득 찰 것이었기에 그전에 자리를 뜬 것이다.

[5] 뱁새 : 강철 오빠, 게임 시작하면 바로 연락할게요!

[7] 도각 : 뭐야? 일 해결 했나? 우예 됐노?

[8] 백노현 : 잘 끝났네. 강철이 수고했네. 1위도 수고했고.

[7] 도각 : ???

[6] 선룡 : ???

[9] 무사 백당수 : ???

1위가 등장했다는 말에 수많은 물음표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도 1위의 존재는 줄곧 궁금한 것이었는 듯싶었다.

그러는 동안 집에 도착한 나는 바이크를 주차한 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종말을 부르는 늑대' 빨리 좀 진행하자고. 자꾸 떡밥만 던지지 말고."

['33층의 주인' '종말을 부르는 늑대'가 뒷발로 귀 뒤를 긁습니다. ]

똥개새끼.

한 차례 욕설을 내뱉으며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욕실로 걸음을 옮겨 재빠르게 목욕을 하고 나왔다.

그러곤 TV를 틀어 놓은 후, 기운 빠진 몸을 회복할 겸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잘했네."

아무래도 참가자의 기억을 토대로 국적을 잡은 듯 나는 오랜만에 보는 한국 라면의 모습에 만족했다.

게임도 그렇고, 먹을거리도 고향의 그리운 느낌을 풍기고 있으니.

'짜증 나네.'

계란을 꺼낸 채로 갑자기 눈살을 팍 찌푸린 나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을 잠시 바라보았다.

크라운로드를 5회차나 반복해 온 만큼 향수병은 나았었지만 이런 상황과 마주하니 새삼 지구의 풍경이 생각났다.

'제대하기 직전이었는데.'

돌아가도 제대하기 전날이라는 사실에 치를 떨며 나는 계란을 깨어 라면에 풀었다.

대체 언제까지 크라운 로드에 갇혀서 뺑뺑이만 돌는지.

"이번 회차에서 무조건 끝내야지."

이를 아득 갈며 젓가락과 라면을 들고 식탁으로 온 나는 TV 쪽을 힐끔 보았다.

TV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아까 전 사건을 열심히 보도하고 있었고 나는 그 뉴스를 보며 라면을 먹었다.

아직도 1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톡방을 힐끔 본 나는 라면을 우물거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를 풀 요소들이 한두 가지씩 모이고는 있는 듯한데 결정적으로 이야기를 끝낼만한 단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움직여야 하는 건 맞겠지만.'

내 역할인 강철민은 일상생활에서 헌터일 때 말고는 집에서 지내는 아싸였다.

즉, 나는 동화율 때문에라도 게이트가 터지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히 게임은 동화율에 영향을 안 주는 것 같긴 한데.'

아마 이 부분은 지금까지 강철민이 디스 헌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내가 강철민이니 게임에서 내가 하는 것이 곧 강철민의 행동이 되어 동화율에 영향이 가지 않는 거 같다.

'교묘하게 만들어 놨네. 똥개.'

현실의 제약을 두고 일부러 게임에서는 자유를 만들어 뒀다라.

라면 국물을 전부 마신 나는 대강 싱크대에 던져 두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가 잘나가는 게임 기업 회장임에도 굳이 나와서 자기 돈으로 혼자 사는 녀석이니, 내가 나중에 치워야 할 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단서는 모두 게임에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어디 똥개가 하라는 게임 잔뜩 해 보자고."

95화

디스 헌터.

최근 가장 핫한 RPG 게임이자, 정체기였던 한국 RPG 시장을 뒤집어 놓은 VR 게임.

당연히 그 게임을 즐기는 자들은 세계적으로도 많았고, 그 덕분에 디스 헌터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유튜버들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런 인터넷에 한 영상이 올라왔다.

[레벨 2가 레벨 100 몬스터 잡는 영상]

심플한 제목의 게임 영상.

하지만 바로 몇 시간 전 섭섭이의 방송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미 디스 헌터와 관련된 사이트들의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본 자는 사실이라고 외치고 못 본 자는 거짓말 말라고 하는 등 여러 말들이 오고 갔으나 정작 그 영상을 촬영한 섭섭이는 영악하게 다시 보기 영상을 지워 놓았다.

그 결과 게시판을 뒤덮었던 레벨 2짜리가 파자몽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미궁으로 빠질 무렵.

섭섭이의 영상 채널에 빠르게 만들어진 영상이 업로드되고 순식간에 모든 게시판으로 퍼져 가기 시작했다.

그 영상에는 레벨 2짜리가 정말로 레벨 100의 파자몽을 죽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너도나도 말도 안 된다며 소리쳤지만, 그 영상의 내용은 조작 없는 진짜였다.

그러자 그걸 본 사람들이 하나둘 부캐를 만들어 파자몽을 직접 잡아 보겠다며 나섰다.

당연히 나선 모든 이들이 파자몽의 먹잇감이 되었고, 누구도 그 몬스터를 죽이지 못했다.

[이거 무조건 헌터야. 그것도 랭커급. 나 친형이 랭커급 헌터인데 이거 보여 주니까 무조건이래.]

그러던 순간 게시판 중 누군가가 그럴듯한 댓글 하나를 달자 그것에 무수한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랭커급 헌터가 뭐 하러 게임을 해?]

[랭커급 헌터는 사람 아니냐? ㅋㅋ 게임 할 수도 있지.]

[아니, 그딴 게 중요하냐. 영상에서도 두루뭉술하게 대답한 걸 보면 확실히 헌터는 맞는 거 같긴 한데.]

[전 헌터인 섭섭이가 놀란 시점에서 이미 헌터인 건 기정사실 아님?]

[섭섭이 고작 D급 헌터인데? 쟤가 놀래봤자 뭐 B급 정도인 거 아닌가. 랭커급 헌터는 오버 같은데.]

[윗 댓 등신이지? 헌터 두 눈으로 본 적 없냐? D급이어도 일반인 수백 명이 덤벼도 못 이김; 10년 동안 복싱만 한 선수랑 D급 헌터랑 링 위에서 붙였더니, 신체 능력 차이 하나로 압살한 거 본 적도 없냐? 랭커가 아니라 그 윗 급정도만 되어도 진짜 미친 거임;; 랭커급이면 진짜 돈 거고.]

[근데 랭커급 헌터들 바쁘잖아? 오늘 자 뉴스에 뜬 강철만 해도 서브 게이트 막느라 출동하던데. 게임할 시간이나 있나?]

[혹시 1위 아님? ㅋㅋ 1위는 만날 안 나오잖아.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을 수도 있지.]

[너 급식이지? 용은 마법사다.]

[윗 댓이야말로 잼민이겠지. 맨 처음 게이트 사건 터졌을 때 용 모습 조금이라도 본 사람들은 다 알아. 용 마법이랑 오러랑 전부 다 다뤄. 하여튼 애들이 급식급식거리는 거 진짜 꼴 보기 싫네.]

[이번 게이트 용 떴데요. 강철이 막던 그 건물 다시 세워 준 게 용이래요.]

[ㅇㅇ 강철민 깔아뭉개질 뻔한 거 용이 구해 줌 ㅋㅋㅋ 세계에서도 2위 한국에서도 2위 만년 콩철민 수듄. ㅋㅋ]

[와, 넷상이라서 그런가. 강철민 무시하는 사람이 있네. 처음 본다. 위에 강철민이 지금까지 살린 사람 몇 명이나 되는지 알고나 있냐? 우리나라가 지금 헌터 보유한 국가 중에서도 최고인 이유가 세계 랭커 1위, 2위 둘 다 보유해서인데.]

[그게 뭔 상관? 그냥 용에 비하면 딸리는 게 현실 아님? 급해지면 "도와줘 용! 게이트가 괴롭혀!" 외치는 게 랭커 헌터들 현실이잖아.]

[너 그러다 강철 빠돌이들한테 사냥당함. 걔들 넷상에서도 안 봐 준다.]

[해보던―]

※ 댓글이 삭제되었습니다.

※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레벨 2가 레벨 100을 사냥 했다는 이야기가 어느새 삼천포로 빠지는 와중.

어찌 되었든 섭섭이가 올린 영상은 승승장구하며 해외에까지 퍼진다.

업로드되자마자 폭발적으로 올라간 조회 수는 벌써 100만을 가뿐히 넘겼다.

랭커급 헌터는 현 게이트 상황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들.

혹시나 영상의 주인공이 랭커급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지며 기사까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영상의 주목도가 더더욱 올라간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영상의 주인공 하천성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한다는 말이 터져 나오고, 이 대세에 편승하고자 수많은 유튜버들이 하천성을 향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할 무렵.

그 영상의 주인공인 하천성은 그 사실은 조금도 모르고 대장간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검 수령 안 해서 증발했네."

유일하게 있는 무기를 잃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 채 말이다.

* * *

"곽 부장님."

"응."

"저희가 뭐하기 전에 이미 저절로 떠 버렸는데요?"

"응."

"그냥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하천성 유저가 누군지 밝히면 광고 효과 대박이지 않을까요?"

"안 돼."

"왜요? 지금이 기회잖아요. 그냥 기사로 은근하게 흘리기만 해도 충분하다니까요."

"그분이 게임을 즐기게 해 줘야지. 아직 다 못 즐기셨잖아."

곽 부장의 말에 한민선은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똑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자신의 상사라 한 대 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강철민 홍보 효과 보려고 이런 거 아니에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지금은 디스 헌터 즐기시게 내버려 둬."

"정말 곽부장님."

"그것보다 게임이나 옆에서 잘 도와드려. 지원 팍팍 해 드리고. 혹시 디스 헌터 재미없으실라. 이번에 게이트로 고생하셨던데 스트레스 풀으셔야지."

"그 지원을 받지를 않는데 어떡하라고요."

"그게 네 일이란다."

이건 역시 한 대 패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곽부장의 말대로 지금은 그냥 여론이 흘러 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랭커급 헌터가 디스 헌터를 한다는 소문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홍보 효과를 거두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세간에 랭커급 헌터라는 존재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광고 시장은 유명 연예인마저도 비빌 수 없는 것이 랭커급 헌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강철민은 다른데.'

세계 랭킹 2위, 1위보다 훨씬 더 게이트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광고 한 번 안 찍어 모든 광고주가 탐내는 남자.

이 남자의 첫 광고를 따는 회사가 앞으로의 광고 시장의 판도를 뒤엎을 거란 말이 있을 정도이건만.

자기 아버지 회사 광고도 안 받아 주는 이 돌 같은 인간을 움직인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본인이 세계 2위 헌터인 시점에서 국가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고 거기에 재벌 2세이니 돈으로 그를 꼬드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정말 나중에 곽 부장 깨져도 난 몰라.'

눈앞에 있는 광고계의 왕을 놓칠 수도 있음에도 태연한 곽 부장을 보며 한민선은 또 씁쓸히 강철민의 뒷바라지를 하고자 컴퓨터 앞으로 갈 뿐이었다.

* * *

현실성이라면 현실성일까.

내가 무기를 찾아가지 않자 폐기 처분해 버린 대장장이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 나는 아이템 창을 열었다.

섭섭이라는 놈이 갑자기 말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 파자몽을 잡고 아이템을 회수하는 걸 깜빡 잊었다.

오랜만에 하던 게임이다 보니 RPG의 기본 상식을 잊은 것이다.

그 결과 처음에 주어지는 돈은 수리에 맡기느라 전부 써 버렸기에 내 잔고는 0으로 되어 있었다.

"이거 참."

이 게임 무기가 없어도 싸울 수 있으려나.

"거기 유저님."

대장간 앞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나보다 20cm 정도 작은 듯한 키를 가진 여자애가 있었고, 그녀는 내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있나요?"

머리 위에 떠 있는 닉네임은 하원, 유저다.

내가 게슴츠레 눈을 뜨자 그녀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적의가 없다는 양 굴었다.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랍니다. 그냥 곤란해 보여서 도울까 해서요."

"날 돕는 이유는?"

"고인물은 뉴비를 돕는 법이거든요. 유저님, 아, 하천성 님이라고 해도 되죠? 여기서 계속 가만히 계신 걸 보니 느낌상 하천성 님은 대장장이한테 무기를 맡기고 접속을 종료하신 거 같은데, 맞나요?"

내 실수를 바로 알아챈 그녀의 말을 듣고 나와 같은 행동을 한 녀석들이 꽤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냥 선의로는 보이지 않는데.'

순전히 감이었지만 하원의 얼굴에는 왠지 모르게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역시 그렇죠? 저도 예전에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있어서 지나가던 다른 유저분한테 도움받은 적 있거든요. 격투가가 아닌 이상 무기 없이 공격하면 본인도 데미지를 입으니 난처하던 때에 정말 큰 도움이었죠."

그런 말을 하며 그녀는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성능을 가진 듯한 검을 꺼내 든 그녀는 나를 보며 짜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천성 님께 고인물의 덕목으로서 뉴비 돕기를 할까 하는데 어때요? 받아 주시겠어요?"

하원의 물음에 나는 잠시 동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곧 검을 힐끔 보며 툭 하니 말을 던졌다.

"난 검 안 쓰는데."

"네? 엥? 그럴 리가."

내 유도 신문에 걸려 덜컥 대답해 버린 하원은 앗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도 따라 히죽 웃어 주었다.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뭐냐?"

딴청을 피우려는 하원에게 못 박듯 말하자 그녀는 검을 넣곤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하천성 님, 혹시 본인이 나온 영상 보셨나요."

"영상?"

영상이라는 말에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게이트 사건으로 보도되던 뉴스였다.

내가 강철민이라는 게 게임에서 드러나기라도 했었나.

"저번에 파자몽을 사냥하셨잖아요."

"아, 그거."

그러고 보니 그때 섭섭이라는 놈이 자기를 유튜버라고 이야기했었다.

영상을 업로드한다고 하더니 그새 올렸었나.

"그게 왜?"

"왜라뇨. 디스 헌터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고요. 레벨 2로 레벨 100 파자몽을 사냥했으니 랭커급 헌터가 아니냐면 서요."

분명 그 녀석이 영상을 찍어 가고 나서 시간이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한 번 디스 헌터 관련 사이트 들어가 보세요. 아니면 제가 영상 링크라도 드릴까요?"

"됐어. 내가 찾아볼 테니."

하원을 두고 인터넷을 킨 나는 '레벨2'라는 글자를 쳐보았다.

그 순간 관련 검색어가 주르륵 나왔고 거기에는 기사까지 몇 개 있었다.

'뭔 이걸로 기사까지 쓴 거람.'

기사의 내용을 대강 보자 랭커급 헌터가 디스 헌터를 플레이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내가 쓴 닉네임도 버젓이 드러나 있었고.

기사를 따라 관련 영상 링크로 넘어간 나는 벌써 200만을 찍은 영상을 찾아냈다. 업로드한 지 아직 3시간이 채 안 되었음에도 앞서 말한 대로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분명 내가 게이트에 왔다 갔다 한 시간을 포함하면.'

섭섭이는 나랑 만나고 나서 2시간도 안 되어서 영상을 업로드한 게 분명하다.

그 아래의 댓글 창에서는 내가 랭커급 헌터가 맞느냐 아니냐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인 강철민은 세계 랭커 2위 헌터이니 따지고 보면 랭커급 헌터가 맞긴 하다만.

'던져 둔 미끼가 이 정도로 효과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미끼의 화려한 효과에 나는 으음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주목받는 걸 목표로 잡긴 했지만, 막상 이 정도로 효과를 보니 떨떠름할 정도였다.

96화

"네가 뉴비 돕는 척한 것도 이거랑 관련 있는 거냐?"

내 말에 하원은 부끄러운 양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저 최근에 영상 채널을 막 시작해서요. 브이로그도 찍고 디스 헌터 영상도 찍었는데 조회 수가 영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화제의 하천성 님을 대장간을 지나가던 도중 우연히 발견해서 기회다 싶어 가지구."

성좌 방송을 해대던 나락이 나를 화제의 인물로 삼았던 전적이 있기 때문일까, 하원의 이야기에 나는 영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던져 놓은 미끼를 물고 온 녀석이다.

흐름상 이런 미끼를 물고 온 녀석들은 층 공략과 늘 연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섭섭이라는 놈이 찍어 간 영상도 이렇게 연결점을 만드는 요소가 되었고.'

그렇담 하원이라는 이 여자애도 층 공략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

"나를 찍으면 조회 수가 나오는 거냐?"

"엄청 나오죠!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시끌시끌할 거예요!"

"그래, 그럼."

내가 순순히 협조해 준다고 하였기 때문일까, 하원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리어 이 녀석 쪽에서 살짝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 혹시 저한테 흑심 생겼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저 아직 여대생이라서 막 흑심 품거나 그럼 저 곤란한뎅."

부끄러운 양 과장되게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하원을 보고 나는 주먹을 들었다.

"그래, 네 첫 영상은 하천성한테 두들겨 맞아 보았다가 어때? 이것도 꽤 조회 수가 잘 나올 거 같은데."

"폭력 반대에요! 조크에요. 조크!"

진심으로 두들겨 팰 생각인 것을 눈치챈 건지 양손을 들어 변명하는 하원을 보고 나는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게임 캐릭터 보고 흑심 품는 사람이 어디 있냐? 얼굴도 모르는데."

"저 게임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했는데, 하천성 님이 생각하시는 거랑 다르게 제 목소리만 듣고 그러는 사람 엄청 많아요. 넷상에서는 고백도 열 번 넘게 받은 거 같은데."

"...뭐,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지금 잘 이해 못 하겠으니까 어물쩍 넘기시는 거죠? 저도 가끔 그런 사람들이 피곤하게 해서일 뿐 폄훼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 하천성 님도 저한테 흑심 품어도 괜찮아요."

그러자 나는 하원을 걷어찼다.

"영상 찍히는 거 도와줄 테니 검이나 내놔."

내게 걷어차인 엉덩이를 매만지며 울상을 짓던 하원은 내 말에 순순히 따르며 검을 주었다.

[이시아의 검(매직)]

공격력 : 40

레벨 제한 : 20

내구력 120/120

명장 이시아의 대량 생산 검.

완성도는 낮으나 쉽게 부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이것만 받고 그대로 갈 거라고는 생각 안 하는 걸까.

'...아니, 그렇담 그걸 그대로 영상 채널에 업로드하겠지.'

그것도 하원이 원하는 만큼의 조회 수를 기록하긴 할 테니까.

언젠가 내가 강철민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현실의 강철민에게도 영향이 오리라.

그리고 그건 곧 동화율을 깎아 먹는 것과 같겠지.

"그럼 거래 성립이죠? 좋아요. 바로 영상을 찍죠!"

"뭘 찍을 건데?"

내 물음에 의욕을 보이던 하원은 곧 새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겠죠?"

계획조차 없이 접근한 건가.

내가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원은 당황한 듯 양손을 흔들어댔다.

"그, 그래도 금방 생각해 볼게요! 영상이야 생각해보면 뭐든 지 안 나오겠어요? 하천성 님이랑 찍으면 무조건 조회 수는 대박 날 테니까요!"

그리 외친 그녀는 내가 그냥 가 버릴까 싶어 내 손을 탁 낚아채었다.

그러곤 헤실헤실 웃으며 이 손 부디 놓지 말라 달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정중히 떼어 내었다.

"알아서 해. 검 받은 만큼 협조는 해 줄 테니까."

"다행히 상도덕은 있으신 분이네요."

"아까부터 슬쩍슬쩍 긁지 마라. 또 맞는다."

"네. 아, 그러고 보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해도 되겠냐는 하원의 말에 물어보라는 양 눈짓했다.

"랭커급 헌터라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그러자 하원은 손을 든 자세로 물음을 던졌다.

하긴, 내가 화제가 된 이유도 그런 이유이니 궁금할 법도 했다.

"가르쳐 주면 그걸 영상으로 만들 속셈이잖냐."

"절대 안 만든다고 다짐할게요."

과장되게 양손을 모은 채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는 양 다짐하는 하원을 보고 나는 대강 말해줬다.

"그냥 헌터라 생각해라. 깊게 알아봤자 좋을 건 없을 테니."

"부정은 안 하시는 거군요?"

"깊게 파지 말랬을 텐데."

"히히, 알았어요."

그리 말한 하원은 내 옆을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담 사냥 영상을 찍죠! 일단 하천성 님의 가장 큰 메리트는 사냥이니까요."

"그거야 어려울 건 없긴 한데. 네 영상 채널이면 네가 나오는 영상을 찍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사냥하는 걸 찍어서 어쩌자는 표정으로 보고 있자 하원은 엣헴 하고 허리를 편 채 말했다.

"전 유명해지는 것보다 제 채널이 떠서 부자가 되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그게 돈 좀 벌던가.

과거 재벌가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이런 쪽의 금전 감각은 은근히 약한 나는 머리를 기울였다.

애초에 내 금전 감각이 이상하단 걸 확인 했던 것은 군대에 가고 나서였으니까.

"그래도 제 영상 채널이긴 하니 인터뷰처럼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 아예 이 컨셉으로 밀고 나가는 거죠! 디스 헌터 내에 유명인을 취재하며 영상을 만드는 그런 취재진 콘셉트!"

망상 회로를 돌리며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하원을 보고 나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곤 걸어갔다.

"하천성 님은 이번에는 어떤 몬스터를 사냥하실 건가요?"

"100레벨 사냥은 별로 안 어려웠으니까, 150레벨대로 가 볼 거 같은데."

"앗! 좋아요, 좋아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

그리 외치던 하원은 문뜩 무언가 생각났는지 내게 질문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영상에서는 안 나왔는데 하천성 님 직업은 뭔가요?"

"아직 전직 안 했어."

"...전직도 안 하고 100레벨 몬스터를 잡을 수가 있어요?"

"이 게임 레벨 몇 때 전직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2레벨에도 전직이 가능한 거냐?"

"아, 제가 깜빡했네요. 하긴, 영상이 찍혔을 때가 레벨 2였으니 그럴만하네요. 원래 다들 레벨 10때 전직하니까요. 그래도 디스 헌터는 직업이 꽤 많으니까 전직해 보는 것도 재밌어요. 몬스터만 잡다 보면 금방 질리실 거 아니에요?"

하원의 말대로 지금이야 흐름을 타서 몬스터 사냥에 재미를 느끼고 있지만, 조만간 질릴 거라는 생각은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잠깐 마음이 들떴을 뿐이니까.

"전직 종류는 뭐가 있는데?"

"보통 히든, 일반 직업군이 있는데요. 일반 직업군은 밸런스가 적절한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직업군이고, 히든 직업군은 특정 퀘스트들을 따라서 찾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는 대신 특이하고 성능이 좋은 게 많아요. 물론 특이한 만큼 스킬 밸런스가 안 맞아서 레이드에 좋다가도 일반 사냥에서는 못 써먹을 정도라던가 하는 단점이 있어요. 가끔 둘 다 안 좋은 마궁사 같은 직업도 있지만요."

그리 말하던 그녀는 나를 돌아보더니 곧 씩 웃었다.

"하지만 하천성 님한테는 별 상관없을 거예요. 직업 보정 없이도 컨트롤 하나로 2렙 때 100레벨 몬스터를 잡았으니까 히든 직업이든 일반 직업이든 입맛대로 골라도 괜찮을 거에요. 결국 직업 성능은 파일럿에게 달렸거든요."

직업이라.

[히든 직업 발생! 이 퀘스트....]

그렇담 아까부터 시끄럽게 뜨던 이것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건가.

[히든 직업 발생! 이 퀘스트....]

[히든 직업 발생! 이 퀘스트....]

[히든 직업 발생! 이 퀘스트....]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더 많이 뜨는 창을 보고 나는 손을 휘저었다.

왠지 이걸 선택하는 건 그다지 마음에 안 들었다.

'직업 스킬이면 클래스 같은 거려나?'

좀처럼 클래스 운이 없는 나였기에 스킬 자체에는 조금 관심 있다.

하지만 마법 같은 건 체질적으로 안 맞고, 그냥 붕붕 휘두르는 스킬 같은 것도 그다지 재미는 없는데.

'그러고 보니.'

나는 게임 시스템을 한 번 쭉 훑어 보았다.

디스 헌터 게임에는 피로도 시스템이 존재한다.

피로도란 게임 캐릭터 자체에 걸려 있는 제약으로 저레벨대 일수록 캐릭터가 쉽게 지치며, 이 경우 행동이 느릿해지거나 심하면 체력도 꾸준하게 깎이기 시작한다.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피로도 통은 늘어나니 별문제는 없는 듯싶지만, 게임 하는 내내 은근히 방해되는 요소였다.

'이걸 해결할 직업도 있으려나.'

이에 관해 물어보기로 한 나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하원을 돌아보았다.

"피로도를 해결할 수 있는 직업은 있냐?"

"피로도요? 보통은 레벨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피로도를 늘리는 아이템을 구매하기는 하는데 직업으로 이야기하면 버프를 주는 성직자 직업이 있죠."

"그럼 그걸로."

"네? 성직자는 버퍼라서 인기가 많긴 한데, 하천성 님은 사냥을 하고 싶은 것 아니었어요? 성직자는 사냥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데요."

"딱히 사냥에 도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어."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짓던 하원은 혹시나 하고 물어왔다.

"설마 피로도 하나 때문에 성직자 직업을 선택하시려는 거예요?"

"맞는데."

"그거 하나만 보고 선택하다뇨. 하천성 님, 지금 스텟 뭐 찍고 계세요?"

"힘이랑 민첩."

"성직자의 주 스텟은 마력과 지력이에요! 이 두 개를 찍어야 버프 효율이 올라가는데, 힘이랑 민첩을 찍는 분이 성직자가 되어서 뭐하게요!"

도저히 내 캐릭터가 똥캐가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양 열심히 뉴비를 구제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는 하원을 보고 나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너 특이한 걸 찍어서 채널에 올리고 싶은 거 아니었냐?"

"...그건 그렇기는 한데."

"그럼 그냥 찍어 올려. 게임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왜 자꾸 태클을 걸어."

"망캐가 되어 가는데 그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 안타까워서 그런 거예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내 말에 하원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하원은 결국 포기했다는 양 나를 성직자 전직 센터로 안내해 주기 시작했다.

초보자 전용 마을이었기 때문일까, 직업 전직소는 마을 내에 전부 있었고 우리는 손쉽게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성당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주교가 보였다.

머리 위에는 전직 NPC라는 글자가 떡하니 있었고, 하원은 주교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을 걸고 부탁하는 걸 들어주면 성직자로 전직시켜 줄 거에요."

"그래."

하원의 말을 따라 나는 주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80세 정도로 되어 보이는 늙은 주교는 나를 돌아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어린 양이여,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성직자가 되고 싶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 앞에서 기도하시지요. 그러면 신께서 당신에게 성직자의 가호를 내리실 겁니다."

생각보다 손쉬운 직업 퀘스트에 나는 곧바로 기도를 올리고자 손을 모았다.

'하일성 개새끼, 길 지나가다가 엎어지게 좀 해 주세요.'

덤으로 크라운 로드 창시자 천상에게 저주를 퍼부어 줄 즈음, 귓가에 띠링 하는 알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전직 창이 하나 떠 있었다.

[무신 권맥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무신 권맥의 신도가 되시겠습니까? YES/NO]

[신도가 되면 직업이 무신의 권맥의 화신(전설)으로 전직됩니다.]

왠지 성직자랑 거리감 있어 보이는 녀석이 나타났다.

'그것보다 이렇게 되면 히든 직업을 넘어서는데.'

하원이 전설 직업군 같은 것은 이야기해 준 적 없었다.

그렇기에 의문을 품은 채 창을 보던 나는 이번에는 주교 쪽을 힐끔 보았다. 그의 얼굴은 인자한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 전혀 놀라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시 기도를 올리면 어떻게 되지.'

나는 망설임 없이 NO를 누르고 다시금 기도를 해 보았다.

97화

[무신 권맥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무신 권맥의 신도가 되시겠습니까? YES/NO]

[신도가 되면 직업이 무신의 권맥의 화신(전설)으로 전직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창이 또다시 떠올랐다.

마치 내 기도는 자신에게 밖에 닿지 않는다는 양.

왠지 기분 나쁜데. 가만 보니 이거 성좌들이 무언갈 강요할 때랑 비슷한 짓이잖아.

[무신의 화신이 되면 피로도 제한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창에 그럴듯한 메시지를 띄워 유혹을 해 오기 시작했다.

'됐다. 그냥 하자.'

원래 피로도 때문에 온 거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층을 클리어하는 거와 관련 있다는 걸 테니.

나는 대충 YES를 눌렀다.

[축하합니다! 무신의 화신(전설)으로 전직되셨습니다.]

[무신 권맥의 신도를 모집할 수 있습니다.]

[무신 권맥의 화신 스킬이 생성됩니다.]

[무신 권맥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특정 교단과 적이 되었습니다.]

[특정 인물들과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무신의 화신(전설) 직업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끄아아아악?!"

그 순간 비명이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바닥에 넘어진 주교가 있었고, 그는 방금까지 지었던 인자한 미소가 박살 난 채 나를 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의문을 느끼며 하원을 쳐다보니 그녀도 교주의 반응이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넘어진 교주의 앞에 자세를 낮춰 앉았다.

"뭐야. 왜 그런 반응을 보여?"

"지, 지금 자네 대체 어느 신의 선택을 받아들인 겐가?!"

"무신 권맥이라는 놈인데."

심상치 않은 반응에 내가 말하자, 그는 양손을 모은 채 '오, 신이시여.' 하며 기도를 올렸다.

"무신 권맥이 뭔데?"

대체 왜 이러냐는 듯 빨리 말하라고 채근하니, 그는 눈을 감은 채 피를 토하듯 외쳤다.

"...무신 권맥은 마신일세. 한때 이세계에서 넘어와 세상을 멸망시키고 타락하여 신이 되어 버린 마신이란 말일세!"

이세계라는 건 무신 권맥이라는 놈은 우리랑 같은 유저라는 컨셉인가.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고 뒷머리를 긁적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갈 낌새를 보이자마자 주교는 급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기다리게! 지금 이건 보통 일이 아닐세! 이대로라면 세계는 또 멸망할지도 모르네! 자네를 어서 대성당에 보내서 정화를...."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 하는 주교의 외침에도 나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하원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주교는 다행히 성당 밖으로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지금 주교 NPC가 뭔가 더 설명해 줄 듯한 느낌 아니었나요?"

"저런 거에 얽히면 귀찮아."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세계를 구해 본 입장으로서, 마신이라든가 뭔가 하는 그런 게 얼마나 귀찮은 건지 잘 안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이벤트에 대한 설명은 주의 깊게 들어 봤자 쓸모없는 것들도 많았고.

'아마 게임 안에서도 무언가 진행 시키려는 모양인데.'

또 중요한 스토리가 시작될 확률이 높았다.

'적당히 생략해야지.'

그렇다고 이런 거 하나하나 다 들어 줄 시간은 없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솔직히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거 같다는 감이 확실히 들었다.

그런 거에 시간 낭비할 바에야 크라운 로드를 5회차 반복한 내 감을 믿는 게 더 낫다.

"그나저나 전설 직업은 뭐냐?"

그렇게 나는 전직한 뒤, 얻은 스킬을 한 번 살펴보고자 스킬 창을 열며 하원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런 내 말에 성당 쪽을 바라보던 하원은 고개를 삐그덕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반응을 보니 이것도 상당히 귀찮은 상황을 초래할 거 같은데.

"아, 잘못 봤네. 히든 직업이야. 히든."

"제가 전설 직업 같은 건 설명도 안 했는데 갑자기 물을 리가 없잖아요! 아까 주교의 반응도 그렇고, 전설 직업을 얻은 거죠?"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하원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양 엉겨 붙어왔다.

그런 하원의 이마를 손으로 밀어내 보았지만, 게임 스텟은 이 녀석이 더 높았기 때문에 내 힘을 억누르고 나를 꽉 붙잡았다.

"쯧, 그래. 방금 얻은 게 전설 직업이야."

결국 내가 포기하고 혀를 차며 말해 주자 하원은 입가를 천천히 가리더니 경악하듯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거 귀찮은 종류다.

"이렇게 된 거 빨리 설명이나 해."

"...전설 직업이란 건 디스 헌터 게임 메인 스토리 진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군이에요. 일종의 이벤트 직업으로 딱 한 명만 선택 가능한 고유 직업이죠. 전설 직업이 열릴 때마다 디스 헌터 게임에 새로운 메인 스토리 하나가 풀린다고 봐야 해요."

"그런데 유저 한 명한테 게임 메인 스토리 하나를 맡기는 건 이래저래 문제 있지 않냐?"

"앞서 말했듯 일종의 이벤트고 어디까지나 운으로 얻는 거니까요. 누가 어디서 얻을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기존에 이미 전직했더라도 전설 직업으로 다시 전직할 수 있는지라. 디스 헌터에 빠질 수 없는 재미 요소죠. 무엇보다 유저가 게임을 개척해 나간다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리 말하던 하원은 곧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눈 치워. 짜증 나."

그 눈이 하늘에 있는 별보다도 심하게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자 나는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보였지만, 하원의 눈빛은 그칠 줄은 몰랐다.

"하천성 님, 그거 아세요? 전설 직업을 얻어서 디스 헌터 영상 100만을 찍은 사람이 있다는 거?"

"몰라."

"아무리 못해도 최소 10만은 찍을 거예요! 요즘은 자동 번역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설정만 해 두면 해외 디스 헌터 유저들도 엄청 많이 보니까요! 게다가 하천성 님의 컨트롤 실력 때문에 한창 주목이 몰려 있으니 무조건 대박 날 거에요!"

"왜 네가 대박 난다는 식으로 말하냐?"

"왜 이래요. 저희는 한배를 탄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빠지실 거예요?"

언제 한배를 탄 건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아양 부리는 하원을 두고 스킬창을 쭉 살폈다.

[무신의 화신]

1. 힘은 곧 모든 것 (EX)(패시브)

무신 권맥은 오로지 힘을 중시하는 자입니다.

무신 권맥의 아래 찍을 수 있는 스테이터스는 오직 힘.

그러나 그의 초월자 같은 능력 아래 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 수치가 하나로 통일됩니다.

―아이템 및 스텟 관련 모든 스킬의 효과는 가장 높은 스텟을 기준으로 올 스텟 상승으로 취급합니다.

2. 무신의 가호(S+)(패시브)

무신에게 배움은 의미 없습니다.

다른 이와 같은 무술, 기술 같은 것은 전부 약자의 발버둥.

당신은 오로지 그 두 손으로 모든 걸 헤쳐 나가야만 합니다.

―올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피로도 누적이 더 이상 없습니다.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습니다.

―패시브 스킬을 제외한 다른 어떠한 스킬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MP가 신력으로 변경됩니다. 신력의 소모량에 따라 올 스텟이 상승합니다.

3. 무신의 기운(A)(패시브)

무신의 기운은 당신보다 약한 자에게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할 수 있게 됩니다.

―스텟이 본인보다 낮은 수치의 상대에게 공포(상태 이상)를 부여합니다.

―적의 스텟이 본인보다 낮을 경우, 상대의 스텟을 일부 떨어트립니다.

4. 무신 권맥의 무기(A)

당신이 드는 무기에 무신 권맥의 가호가 내립니다.

―무기 내구도가 30% 상승합니다.

―총 스텟 수치에 따라 무기 공격력이 상승합니다.(현재 상승률 5.2%)

―무기 스킬이 제한됩니다.

피로도 누적이 없다는 말은 환영할 만한 것이었지만, 모든 설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눈가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게임에서 마저 스킬이 없다, 이거냐.'

크라운 로드에서도 액티브와 관련된 스킬 운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던 나였기에 게임에서나마 조금 기대해 봤는데, 그런 바람을 철저히 무시하는 스킬 설명에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팔자가 이런 거겠지.

아니, 오히려 잘된 셈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쓰지도 못할 스킬보다 내 몸 하나 믿는 것이 더 좋으니까.

"지금 스킬 읽으셨죠?"

내가 스킬 창을 읽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어서 설명해 달라는 투로 말하는 하원을 보고 나는 성능을 체크 할 겸 녀석에게 스킬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한동안 듣고 있던 하원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신력이란 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다 치고 스텟이 통일된다는 거나, 패시브 자체만 하면 말도 안 되게 괴랄 한데. 액티브 스킬이 하나도 없다는 건 좀...."

곰곰이 생각하던 하원은 곧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하천성 님 같이 컨트롤 좋은 사람한테는 엄청 좋을 것 같아요. 컨트롤만 된다면 무궁무진하게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니까요. 대신 화려함은 부족할 테니 조금 아쉽네요. 사람 눈 홀리기에는 그런 게 좋은데."

이 녀석은 이미 나를 주제로 영상을 만들 생각을 굳힌 건가.

괜히 어울렸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하원을 두고, 신력이라는 걸 사용해 보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MP게이지를 확인하며 손을 들어 올린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MP는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오러와 비슷한 걸까.

혹시나 하고 오러를 쓸 때의 감각을 되살려 기운을 끌어 올린 순간 나는 손 위에 연하게 둘리는 신력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오러랑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잖아.

'대충, 대충 만들기는.'

속으로 성좌 녀석에게 핀잔을 주며 나는 손을 내렸다.

오러랑 비슷하다면 연습이고 뭐고 할 것도 없다.

매일 쓰던 게 오러였으니까.

'소드 유저 수준인가.'

미약하게 둘린 오러를 보며 나는 게임 캐릭터의 수준을 가늠했다.

'그래도 이거....'

나는 방금 나온 오러에서 조금은 흥미로운 부분을 확인했다.

그도 그럴 게 이 오러, 속성에 제한이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속성을 쓸 수 있는 오러는 다뤄 본 적 없는 나였기에 흥미가 일었다.

"사냥하러 간다."

전직도 했겠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나는 그리 말하며 걸음을 옮겼고, 하원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몬스터 사냥을 좀 한 다음, 보스 몬스터 레이드도 있으니. 그걸 하면 어떨까요? 일반 몬스터들 보다 훨씬 강력해요."

"그건 좀 관심이 가네."

"그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컨텐츠가 생겨서 좋다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며 사냥터로 향했다.

* * *

그 무렵 운영진 한민선은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철민이 얻은 전설 직업을 보며 그녀는 말문이 막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준 이벤트는 하나도 안 받고 인공지능이 멋대로 준 전설 직업만 받아 갔어."

강철민에게 줄곧 이벤트를 쏟아붓듯 주었지만, 강철민은 그때마다 그것들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자신이 반 포기한 상태일 때 뜬금없이 그에게 인공지능 컴퓨터가 전설 직업을 쥐어 준 것이다.

한민선은 머리에서 극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아무리 좋은 것들을 퍼 주려고 했던 한민선이라지만, 전설 직업까지 줄 생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전설 직업은 게임 메인 스토리 내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만큼, 자신의 권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노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끼고 있자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전설 직업 해금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일거리가 또 늘어났구만. 얼른 모니터링 돌려. 게임 메인 이벤트다."

"저번 전설 직업군도 아직 스토리 다 못 깬 거 같던데 이번에는 발견이 빨랐네요."

"닉네임은? 닉네임은 뭐에요?"

"하천성이라는데. 자기 이름인 거 같아."

하천성이라는 유저가 강철민이라는 사실을 아는 건 곽부장과 자신뿐.

그렇기에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운영진들의 소란스러운 소리 속에서 그녀는 모니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선아."

그런 순간 그녀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곽 부장이 서 있었고, 그는 그녀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잘했다."

잘하기는 개뿔이.

한 것도 없는데 졸지에 칭찬받게 된 그녀는 멀어져 가는 곽 부장의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볼 뿐이었다.

'회사 때려 칠까?'

98화

이후 나는 열심히 쫑알거리는 하원과 함께 사냥터의 레벨을 계속 높여 가며 사냥을 반복했다.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스텟은 불어났고, 그 결과 나는 육체가 강해지고 있음을 확실히 느꼈다.

'거참, 재밌네.'

내가 살다 살다 성장하는 재미를 다 느끼게 될 줄이야.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이전 회차에서 매일같이 아등바등 강해지고자 발버둥 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쓴 물을 삼켰다.

'하천성, 이 물러 터진 자식이.'

자기 자신에게 모진 말을 내뱉으며 나는 쓰러트린 몬스터 위에서 기다랗게 숨을 내뱉었다.

현실의 내 육체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분명 육체만 놓고 보면 나는 최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등급의 클래스 부재는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성장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다니.

'5회차씩이나 반복해 온 주제에 멀었군. 나도.'

괜스레 게임이라 나오지도 않는 땀방울을 느끼며 나는 검을 넣었다.

"지금 거 300레벨인데 기어코 잡으셨네요."

그러는 동안 줄곧 나를 따라온 하원이 몬스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계속해서 더 높은 사냥터로 옮기긴 했지만 벌써 300까지 왔나.

현재 내 레벨은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한 덕택에 62레벨.

하원의 말대로라면 이 게임은 레벨 제한이 딱히 없으며, 그런 만큼 1,000레벨대에 몬스터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쯤 오니까, 슬슬 컨트롤로는 힘들어 보이시네요."

확실히 이번 녀석은 꽤 잡기 까다로웠다.

레벨 사이에 격차가 느껴진 달까, 잡는 데도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다.

"물론 그 레벨대에 전설 직업을 얻었다고 해서 이런 몬스터를 잡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요."

처음 내가 몬스터를 잡을 때는 믿을 수 없다는 양 경악하던 하원도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덤덤히 몬스터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그녀는 나를 힐끔 본 채 슬그머니 물었다.

"솔직히 그냥 말해 주면 안 돼요? 역시 하천성 님, 랭커 헌터죠?"

"말했을 텐데."

"네네, 알아요. 깊게 파지 말라 이거죠."

좀 친해졌다고 친숙하게 굴려는 하원을 두고 나는 또다시 몸을 돌렸다.

"어디 가시게요?"

"몬스터 찾으러."

"설마 이것보다 더 높은 몬스터를 잡으시려고요?"

"새삼스러울 게 있냐."

내가 아까 전부터 쭉 이러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라는 반응을 보이자, 하원이 내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300레벨대 이상 몬스터부터는 에덴이라는 특성이 있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몬스터에게 데미지가 안 들어가니까요."

그런 것도 있나.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귀찮은 시스템은 죄다 가지고 있네."

"원래 레벨 200쯤 되면 자연스럽게 얻는 특성이라 별문제 없는데, 하천성 님만 이상한 거에요."

"그래서 그건 어떻게 얻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아까 말했듯이 200레벨을 찍어 가호를 받아 에덴 특성을 얻거나, 혹은 직업 퀘스트를 일정 단계 이상 클리어하면 생겨요. 직업 퀘스트는 클리어에 레벨 제한이 딱히 없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전 떠오르던 창 중에 직업 퀘스트라는 말이 있긴 했었다.

"일단 확인해 보세요."

하원의 말에 나는 퀘스트 창을 켰다.

퀘스트 창에는 아까 전 받았던 퀘스트가 적혀 있었고 나는 퀘스트 내용을 확인 해 보았다.

[무신의 화신 직업 퀘스트(1)]

무신의 화신으로서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강자를 쓰러트려야 합니다.

당신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를 5명 쓰러트려 증명하십시오.

―퀘스트 진행 중 PK 제한이 없어집니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의 닉네임은 주홍색으로 표시됩니다.

(현재 0/10)

*퀘스트 클리어 시 무신의 화신 직업 퀘스트(2)가 진행됩니다.

생각보다 간단한 내용의 퀘스트가 나왔다.

"어때요? 어려운가요?"

"나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를 쓰러트리라는데? 상대는 유저고."

"아, PK 퀘스트네요. 원래라면 레벨이 높은 상대를 잡으라는 건 까다로운 건데, 하천성 님한테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겠네요."

나는 하원을 돌아보았다.

하원의 닉네임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내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몸을 움츠러트린 하원이 급히 제지하듯 외쳤다.

"그 눈! 저, 저랑 PK하려고 생각하시는 거죠? 폭력 반대! 그런 나쁜 짓 하지 않기!"

"내가 협조해 주고 있는 만큼, 너도 좀 도와주는 건 어때? 너도 내가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 잡을 수 있는 영상 만들면 좋잖아. 그러기 위해서는 에덴 특성 필요하니까."

"PK로 죽으면 하루 동안 접속 못 한다구요! 싫어요! 절대 싫어!"

하원을 보고 입맛을 다신 나는 됐다는 양 손을 흔들었다.

"그냥 다른 놈을 잡으면 되겠지."

이 게임에서 내 레벨은 아직 한참 저레벨인 모양이니, 목표물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래도 무차별적으로 PK하시면 욕먹을 텐데요. 가뜩이나 랭커급 헌터라고 소문나 있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

"딱히 그런 건 신경 안 쓰는데."

걱정스레 말하는 하원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나는 문뜩 강철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강철민의 본모습은 청렴결백인 머저리인데.

'이거 나중에 영향 주려나?'

동화율이 깎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자 나도 살짝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멋대로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행동은 역시 피하고 싶었다.

"아, 저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런 순간 문뜩 떠오른 게 있다는 양 하원이 말해왔다.

내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자 하원은 서둘러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하천성 님은 지금 꽤 유명하잖아요? 저처럼 하천성 님으로 한몫 챙기고 싶은 사람들도 꽤 있을 거예요. 그렇담 하천성 님이 직접 PK할 상대를 모집하면, PK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하는 유튜버 같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까요? 이거라면 욕먹을 일도 없을 거고요."

괜찮은 제안인 거 같기는 한데.

"...솔직히 내가 그만큼 유명해졌냐?"

내 두 눈으로 영상을 확인하긴 했지만,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던 시간인 만큼 조금 미심쩍은 느낌이 있었다.

"랭커 헌터라고 소문났잖아요. 디스 헌터 게임도 영상 조회 수가 잘 나오긴 하지만, 헌터랑은 급이 달라요. 랭커급 헌터들이 찍힌 영상의 조회 수는 1,000만 돌파가 기본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해요. 솔직히 제가 하천성 님을 이렇게 만나게 된 건 운이 좋은 거였지, 아마 내일만 되어도 하천성 님을 찾으려고 유튜버들이 난리일걸요?"

그리 말하며 하원은 인터넷 창을 키고 나에 대해서 한 번 더 확인 해 보고 있는 듯하였다.

"이슈 영상 올리는 유튜버들도 하천성 님 관련으로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네요. 몇 개는 벌써 100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어요. 이 정도면 체감하시겠나요?"

지구에 있었던 적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애매한 현실 감각 속에서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게시글 올리실 거에요? 아마 본인 확인만 시켜 주면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디 올리면 되는데?"

"도와드릴게요."

이후 나는 직업 퀘스트를 위해 하원과 함께 게시글을 업로드 시켰다.

잠시 기다리면 될 거라는 말에 하원과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이제는 되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게시글을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을 깜빡이었다.

"왜요? 너무 많이 달렸어요?"

"아니, 아무 반응도 없는데."

"네?"

기대감에 눈을 반짝거리던 하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도 게시글을 확인해 보았다.

"어라."

그리고 내 말이 진짜임을 확인한 하원도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올린 게시글에는 아무런 댓글도 안 달려 있었다.

조회수는 64.

처참할 정도로 무관심한 반응에 내가 하원을 슥 돌아보자 그녀는 무언가 눈치챈 듯 아 하며 소리를 내었다.

"지금 사칭이 너무 많아요. 자기가 하천성 님이라고 자칭하는 게시글들이 있어서 이것도 덩달아 묻혀 버린 거 같아요. 가뜩이나 지금 하천성 님 관련 게시글도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

그녀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양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방송이라도 킬까요? 방송은 본인 확인이 가능하니까 몰릴지도...."

"됐다. 그냥 직접 움직이는 게 더 빠르겠다. PK하고 싶어 하는 녀석을 찾으면 되겠지."

미안해하는 하원을 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띠링!

[선물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던 순간 나는 갑작스레 도착한 선물에 고개를 기울였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선물이 날아온 것이다.

수신인을 확인해 보자 거기에는 섭섭이라는 닉네임이 적혀 있었고 나는 곧 내 영상을 업로드 시킨 그 녀석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영상이 잘되면 선물을 보내겠다고 했던가.'

하원과 움직이며 꽤 시간이 흐르긴 했다만.

"야, 지금 몇 시냐."

"네? 새벽 2시인데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었나.

머리를 긁적인 나는 선물 내용물을 확인하려다 문뜩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섭섭이라는 녀석은 나름대로 인지도 있는 유튜버인 듯싶었다.

그렇담 하원이나 내가 쓰는 게시글보다 훨씬 효과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나는 곧바로 수신인에게 그대로 내 생각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메일이 날아간 지 1분도 채 안 되어 답장이 왔고,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혹시 다른 방법이 생긴 건가요?"

눈치 빠른 하원이 내게 궁금증을 표하자 나는 '그래.'라고 대답해 주었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있다고 하더니 그 말 그대로다.

* * *

뚜벅, 뚜벅.

세련된 복도를 밟는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색 와이셔츠 위에 붉은색 양복을 입은 나는 20층 높이의 건물 안을 걷고 있었고, 이곳은 바로 한국 헌터 총회국이었다.

어제 A급 게이트가 터졌기도 하고, 원래도 세 달에 한 번 있는 모임 날이었기에 나도 참여한 것이었다.

'귀찮네. 게임 하느라 바쁜데.'

어제 밤을 새운 것은 물론 여기 오기 전까지도 게임을 한 탓에 나는 피곤함을 느끼며 기다랗게 하품을 내뱉었다.

내 몸이라면 괜찮았을 테지만 강철민의 몸이라서 그런지 게이트를 막고 밤샘 게임까지 한 게 겹쳐 피로가 쌓인 듯하였다.

'이거 돌아가면 자야겠구만. 게임을 좀 더하고 싶었는데.'

"왔냐. 철민아."

참 약해 빠진 몸이라고 생각하며 걷고 있자 서쪽강 서강선이 다가왔다.

"이런 모임은 별 의미 없을 텐데."

"우리 아버지가 한국인은 뭉쳐야 산다면서 꼭 필요한 일이라잖냐. 뭐, 그래도 덕분에 제멋대로인 랭커 녀석들이 이렇게라도 얼굴 보면서 지내니, 한국이 어떻게든 잘 굴러가고 있는 거고."

강철민의 친구 서강선의 아버지는 헌터 총회장이었다.

게이트가 반발했을 때부터 가장 오랫동안 활동해 온 그는 젋은 피에게 밀려 현재는 비록 랭커 12위에 머물러 있지만, 한때는 1세대 게이트에게서 한반도를 지켜 낸 영웅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제멋대로인 신세대 랭커들이라도 총회장의 말만큼은 최대한 따르고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들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때, 디스 헌터 할 만하디?"

"그럭저럭."

"네 입에서 그럭저럭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흥미는 있나 보네. 조만간 친추하자. 요즘 총회 일이 좀 바빠서 못 들어가고 있긴 한데, 시간 날 때 들어갈게."

총회장의 아들인 만큼 나보다도 훨씬 바쁜 녀석이 게임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다니.

하긴, 내가 보기에도 강철민이 그동안 밟아온 행보는 옆에서 보면 걱정될 것들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우직해도 한숨 돌릴 줄은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정작 나는 근래에 한숨을 돌린 적이 없지만 말이야.'

"강철 오빠."

그러던 순간,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키 차이 탓에 내 팔목에 팔을 두른 뱁새가 보였다.

99화

황금색 눈망울로 생글생글 웃은 그녀는 서강선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게만 말을 걸어왔다.

"저 디스 헌터 어제 가서 바로 구매하고 깔아 뒀어요. 개인 톡으로도 말했는데, 강철 오빠는 게이트 뜰 때 말고는 톡을 안 보시니까 오늘이 총회 날이라 마침 잘 됐다 해서 기다렸어요."

보통 개인 톡을 안 보면 자신에게 관심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나.

그리고 같은 남자가 보기에 강철민은 전혀 매력 없는 놈인데 이런 놈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뱁새에게 말했다.

"그래서?"

"저희 친구해요! 강철 오빠 닉네임 가르쳐 줘요. 제가 친구 추가 신청 걸게요."

내가 게임에서 하루 사이에 해 놓은 일이 있어서일까, 나는 속으로 살짝 곤란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강철민 놈이라면 이때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왠지 그냥 닉네임을 말했을 것 같았기에 더 고민되었다.

"또 저러지 또. 어이구, 저 가시나."

그러던 순간, 내 대답 대신 한 남자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에는 머리카락을 샛노랗게 물들인 20대 중반 정도의 외모에 가죽 재킷을 입은 남성이 불량스럽게 오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자마자 뱁새가 표독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도각,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갈 길 가지?"

"이쪽이 총회 가는 유일한 길인데, 가긴 어딜 가냐. 니랑 내랑 어차피 똑같은 방향으로 간다, 이것아. 그리고 강철 형 좀 피곤하게 만들지 마라. 이 가시나야, 형 눈에 낀 다크써클 안 비나?"

참고로 이건 어제 밤새도록 게임을 해서 생긴 거다.

부산 억양이 강하게 들어간 도각의 말에 뱁새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강철 오빠 피곤한 거야 다 알죠. 아, 제가 좋은 호텔 하나 알고 있어요. 거기 경치도 엄청 좋고 온천도 있거든요. 제가 등 좀 밀어 드릴 테니까 어떠세요?"

"네가 형 등을 와 미는데. 형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응, 넌 뇌가 없지."

"싸우자는 거가?"

뱁새와 도각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맞부딪쳤다.

"도각, 뱁새가 좋으면 좋다 해라. 만날 속 좁게 괜히 강철 형님 걸고넘어지지 말고."

그리고 연이어 한 명이 더 등장했다.

청록색 머리카락에 양복을 입은 그는 한국 헌터 랭킹 6위 선룡이었다.

이쪽은 도각 만큼 심하지는 않으나, 은근히 대구 사투리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니 미쳤나! 내가 저 미친년을 왜 좋아하는데?!"

"만날 이러는데 누가 모르겠냐?"

한심하다는 듯 선룡이 말하자 도각이 노발대발했다.

그러면서 도각의 시선이 힐끔 뱁새를 향했고, 그녀 또한 한심한 눈으로 도각을 보고 있자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내 오늘 니들 다 죽이고 게이트에 목숨 바치련다. 오늘 눈에 뵈는 거 없다!"

"내가 말했을 텐데 니 그냥 부산에 짱 박혀 있으라고. 나보다 랭킹 하나 낮으면 알아서 기어야지."

"니 X발 분명 저번까지만 해도 내 밑이었던 거 까먹었나?!"

"이제는 위다."

퍽퍽!

그 순간 명쾌한 소리가 울렸다.

싸우기 직전인 선룡과 도각의 머리를 내려친 사람은 30대 중반의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헌터 랭커 4위 맑은가람이였다.

"너희는 눈만 마주치면 싸우니? 이럴 거면 둘 다 오늘부터 나한테 다시 교육받는 건 어때?"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녀는 헌터 교육을 주로 담당하고 있으며, 더불어 제멋대로인 랭커 녀석들의 성질 머리도 한 방에 잡는 헌터계의 어머니였다.

도각과 선룡은 그녀에게 직속으로 교육받은 녀석들이었기에 금방 꼬리를 내렸다.

"강철 씨, 들어가죠."

나에게 고운 미소를 보인 그녀는 앞서 걸어가 총회장의 문을 열었다.

방에는 각자의 이름이 적힌 자리가 보였고, 우리보다 먼저 온 랭커급 헌터들도 여럿 있었다.

이 자리는 한국 헌터 랭킹 20위까지만 모이는 자리인 만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는 않았다.

내가 강철민의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 앉자 내 옆에 서강선이 따라 앉았다.

흘깃 옆으로 눈을 돌리자 거기에는 1위인 용의 이름표가 있었다. 그러자 서강선이 그런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이번에도 초청은 했다. 오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번 게이트 때는 나타났잖아. 이번 일은 큰일도 아니었는데."

"30층짜리 빌딩 하나가 쓰러질 뻔했는데, 뭐가 큰일이 아니었냐? 뭐, 확실히 평소에 모습을 드러내던 때에 비하면 작은 규모긴 했지만 아마 변덕이겠지."

"용이 살고 있는 곳은 아냐?"

"몰라. 휴대폰 번호는 아니까 그냥 문자만 보내는 거 뿐이야. 전화 걸어도 한 번도 받아 준 적 없고. 그런데 웬일로 용한테 관심을 가지네."

[현재 동화율 49% → 48%]

"아니, 그냥."

정보를 뜯어볼까 했더니 강철민이 하는 평소 행실이 아니라서일까, 기껏 조금 올려 놓은 동화율이 또 깎였다.

똥개 녀석, 까다롭기는.

'이래선 정보도 마음대로 못 알아보는군.'

직감이 이번 층의 클리어는 용과 관련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작 그 용을 찾지를 못하니.

'게임 쪽 동화율을 마음대로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역시 그쪽에 무언가 단서가 있다는 소리인가.

"내가 용과 관련해서 아는 건 딱 하나밖에 없어. 처음 각성했을 때 가족이 사고로 전부 죽었다더라. 정확한 정보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냐."

그래도 단서가 없는 것보단 괜찮겠지.

"시작하지."

그러던 순간 내 생각을 깨듯 총회장 서호랑이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그간 게이트 상황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졌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랜만에 대학교 때 듣던 지루한 교수의 강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준비된 식사를 뒤로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허리를 한 번 쭉 피자 두둑하고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 내 손은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있었고, 익숙하게 입가에 담배를 문 순간 멈칫하였다.

"하, 나 원."

강철민의 몸에 밴 행동을 나도 모르게 한 건가.

담배를 입에서 뺀 나는 그걸 도로 담뱃갑에 넣었다.

아무리 역할극이라지만, 이것까지 따라 줄 마음은 없었다.

"피지 마라. 피지 마. 뒤질 때 곱게 가려면 이런 거 펴서 좋을 거 없다."

혼잣말을 내뱉으며 담뱃갑을 구긴 뒤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하나 내가 던지던 담뱃갑은 허공을 날다가 누군가의 손에 탁 하니 잡혔다. 그걸 잡아챈 사람은 이름 모를 소녀였다.

"아저씨, 이거 버릴 거면 나 줘."

모자를 꾹 눌러쓴 딱 보아도 10대 중후반밖에 안 된 듯한 여자애의 등장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헌터 총회국 앞인 만큼 사람들이 꽤 많긴 하지만, 10대 헌터들은 교육소에 있지 이곳에 있을 일은 없다.

'누구 딸인가?'

괜스레 연지 녀석이 떠오르자 나는 여자애에게 다가가 조그마한 손에서 담배를 되찾았다.

"어른 되어서 펴라. 미리 펴도 좋을 거 없다."

"그런 훈수는 오히려 역효과라고 생각하는데. 어른의 기준이 뭔데?"

"옳은 말을 옳게 못 받아들이는 녀석은 적어도 어른이 아니다."

내 말에 여자애는 살짝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담뱃갑을 주머니에 다시 넣자 그녀는 나를 한 차례 올려다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어른이니까 매번 게이트로 가는 거야?"

내가 강철민이라는 사실을 아는 듯 그녀는 물어왔다.

"그래."

"그래봤자 결국 달라지는 건 없잖아. 게이트는 앞으로도 계속 열릴 테고, 언젠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게이트가 열리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저씨는 그때도 게이트에 갈 거야?"

덤덤한 내 대답에 여자애는 꼬치꼬치 따져왔다.

10대 특유의 반항적인 기운이 섞인 말투에 나는 또다시 덤덤히 말해주었다.

"그래."

"왜?"

"그게 내 일이니까. 적어도 너희 같은 꼬마들이 발 벗고 잠잘 수 있도록 해 주는 일."

여자애는 잠시 동안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곤 곧 자신에게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했다는 양 혀를 차곤 내게서 몸을 돌려 총회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보던 나는 어느새 어둑해져 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멋대로 말하기는.'

그저 강철민이 했었을 말을 내뱉긴 했지만, 나는 이 녀석의 인생은 참 피곤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부스스 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켰다.

시간은 벌써 점심.

헌터 총회가 끝나자마자 돌아와 잠을 잤던 나는 피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강철민의 몸에 들어온 지도 이틀.

이제는 조금은 적응된 몸을 풀며 침대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섭섭이 녀석과 약속한 시각은 아직 멀어 여유가 조금 있는 상황이었다.

샤워하고 늦은 점심 식사를 먹은 나는 영상을 한 차례 확인해 보았다.

어제 일 이후로 내 캐릭터는 세간에 더더욱 크게 퍼져 있었고, 섭섭이가 올린 영상의 조회수는 1,000만에 다다르고 있었다.

고작해야 이틀 사이에 벌어진 상황에 잠깐 댓글을 훑어본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참 남 일에 관심 많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뭐, 나야 잘된 일이지만.'

이렇게 잘 퍼져 주면 어딘가에 있을 물고기가 떡밥을 물듯 어련히 알아서 내게 와 줄 테니.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섭섭이가 올린 영상 채널의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았다.

거기에 적힌 제목은 간단했다.

[섭섭이가 주관하는 천하제일 PK 대회! ※하천성 참가※]

딱 하루만 달라고 부탁한 섭섭이가 곧바로 준비한 대회.

내용은 제목 그대로 그가 주관하는 PK 대회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녀석은 나름대로 실력 있는 유저였고, 이전에도 이런 대회를 연 적이 몇 번 있었기에 능숙하게 준비할 수 있던 것이다.

거기다 이번에는 랭커급 헌터라고 소문난 엄청난 실력의 루키가 참가한다고 했으니, 너도나도 이목이 쏠린 모양이었다.

[요단강 : 하천성 님 꺾고 랭커급 헌터 되겠습니다. (좋아요 : 2만 개)

└ 와 디스 헌터 PK 7위 요단강 떴다. ㅋㅋ

└ 아무리 랭커급 헌터라도 요단강 뜨면 끝난 거 아니냐? 이분 컨트롤 미쳤잖아.

└ 랭커급 헌터라도 사람 상대로는 힘들 거 같은데

└ ㅁㅊㅋㅋㅋ 멍청한 소리 하네. 사람이 무섭냐? 몬스터가 더 무섭지. ㅋㅋㅋ 랭커급 헌터한테 사람은 걍 벌레임. ㅋㅋㅋㅋ

└ 게임이라 보정 받고 하면 또 다를 거 같은데? 요단강 PK 7위에 디스 헌터 종합 랭킹도 11위잖아. 레벨 개 높음.

└ 정식 PK라 레벨 낮은 쪽이 보정 받아서 렙차는 사실 크게 의미는 없지. 그래도 템 차이는 많이 날듯. ㅇㅇ]

여러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손 위로 턱을 괴었다.

보아하니 꽤 강한 녀석들도 잔뜩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서 빨리 층을 클리어하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도 디스 헌터에 접속했다.

[오셨군요!]

그런 순간 들어오자마자 섭섭이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저번에 미리 친구 추가를 해 뒀기에 내가 들어 온 사실을 알고 연락을 넣은 듯싶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지금 이동 스크롤 보내드릴 테니 이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 말과 함께 선물함에 스크롤 하나가 들어왔다.

스크롤을 사용하자 곧바로 주변 경치가 변했고, 나는 이내 이곳이 어느 방 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기장의 대기실 중 한 곳입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섭섭이가 서 있었고, 그는 내게 한 차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틀 만에 뵙네요. 하천성 님."

그와는 그 이후 메일로만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섭섭이의 말이 맞았다. 대충 내가 답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깍듯이 감사를 표했다.

"저번 영상 올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덕분에 영상의 조회 수가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게다가 이런 이벤트 주최까지 맡겨 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듣자 하니 그는 이번 일로 채널 구독자와 방송 시청자가 대거 늘었다고 한다.

아마 그 때문에 나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100화

"뭔데."

"저희 방송에 고정 출연 멤버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지급하겠습니다."

"싫어."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그는 갑자기 넙죽 무릎을 꿇었다.

"제가 준비는 다 하겠습니다! 절대로 귀찮게 안 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하다못해 그저 하천성 님의 영상만 찍어도 괜찮으니까요! 따라만 다니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녀석은 자존심도 없는 건가.

자신에게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놓치기 싫다는 양 머리까지 조아리는 그를 보고 나는 벌써 귀찮음을 느꼈다.

[하천성 님, 들어오자마자 어디 가신거에요?]

그러던 순간 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상대는 하원이었고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

"네!"

"스크롤 하나만 더 줘 봐."

내 말에 그는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고 아이템 창에서 스크롤을 꺼내 내게 주었다.

그 스크롤을 받은 나는 곧바로 하원에게 보냈고,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뭔 상황이래요?"

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섭섭이와 나를 의문스럽게 번갈아 본 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하원을 보며 나는 섭섭이에게 말했다.

"나는 저 녀석이랑 영상 찍기로 미리 이야기해 뒀어. 날 찍고 싶으면 쟤랑 상의해."

그리고 나는 폭탄을 돌렸다.

"하원 님!"

"우아아! 이분 왜 이래요?!"

내게 무릎 꿇던 자세에서 하원을 향해 몸 빙글 돌리자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하원은 그가 누군지 눈치채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라, 섭섭이 님 아니세요?"

"절 아시는군요!"

"아, 네, 저 디스 헌터 유튜버분들 많이 보거든요."

아마 날 발견한 것도 섭섭이의 영상을 봐서일 테니, 그녀가 섭섭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하천성 님, 뭔가 일을 해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더니 섭섭이 님한테 부탁한 거였어요?"

"어제 천하제일 PK 대회 모집 공고 올렸었는데, 혹시 못 보셨습니까?"

섭섭이의 물음에 하원은 금빛 머리카락을 소심하게 매만졌다.

"어제는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인터넷에 뜬 영상을 볼 시간이 없어서 전혀 몰랐는데, 대체 뭔 일을 벌이신 거예요?"

하긴, 나도 어제는 헌터 총회 전까지만 게임을 하고 접속하지 않았었다.

하원은 그보다 전에 접속 종료를 했었고.

그녀가 게임을 끄기 전에 친구 추가를 해 달라며 귀찮게 매달렸던 것이 아직도 떠올랐다.

"제가 하천성 님의 부탁으로 천하제일 PK 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하원의 물음에 재빨리 섭섭이가 하원에게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섭섭이에게서 내용의 전말을 들은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회 수 잘 나오겠네요."

"그죠?"

어느새 죽이 맞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공식 홈페이지에 전설 직업 하나가 또 나왔다는 공지가 올라왔더라고요."

그러던 중 섭섭이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근데 그런 것도 사이트에 공지하는 건가.

"이번에도 닉네임은 비밀인데, 그분도 영입해서 대회에 참가시켰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네요."

입맛을 다시는 섭섭이의 말에 하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게 저 이야기의 당사자가 나였으니까.

하지만 하원에게 말하지 말라는 듯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입가를 길게 그어 보였다.

날 도와줬다곤 하나 지금도 귀찮게 하던 섭섭이다.

내가 전설 직업까지 가졌다는 걸 알면 훨씬 더 귀찮게 할 것이었다.

"하천성 님은 직업을 정하셨나요?"

"성직자."

"성직자요? 전 당연히 전투계열을 고르실 줄 알았는데요."

"피로도 버프가 있어서 골랐어."

내가 대충 대답하자 그는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곧 전율한 양 몸을 떨었다.

그 반응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내가 맹렬한 거부감을 보이자, 그는 감동한 듯 외쳐 대었다.

"하천성 님은 역시 타고 나신 모양입니다! 파티 사냥 최적화에 별다른 공격 스킬도 없는 성직자를 택하시다니. 이건 사실상 컨트롤로 전부 헤쳐 나가겠다는 소리이지 않습니까! 하시는 거 하나하나가 정말 주옥같습니다!"

이 녀석 내 신봉자라도 된 것 같은데.

"내가 원래 그래."

하나 이미 앞에서 태양신도 같은 또라이들한테도 떠받들어져 봤던 나는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러자 내 옆으로 다가온 하원이 귓가에 속닥거렸다.

"안 말해도 되어요? 하천성 님 영상 업로드로 섭섭이가 흐름을 타서 많이 성장하고 있는지라. 하천성 님을 절대 안 놓치려 할 텐데."

"그럼 접속 안 할 거라고 협박할 거야. 아이디야 또 만들면 되니까."

"그럼 그때는 저한테 말이라도 해 주세요."

얘도 은근히 보통내기는 아니군.

"아, 슬슬 시간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가시죠."

"그래."

시계를 살펴본 섭섭이의 말에 우리는 대회장으로 이동하였다.

돔 형태의 전형적인 대회장의 도착하자, 넓은 관중석을 관객들이 가득 메운 광경이 보였다.

"여기부터는 저 혼자 가서 진행하겠습니다. 하천성 님은 경기가 시작하고 나서 등장하시는 게 더 극적일 테니까요. 이쪽 길을 따라가시면 선수 대기실이 있으니, 거기로 가시면 되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섭섭이가 경기장 위로 올라가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회 진행을 하는 섭섭이를 둔 채 선수 대기실 쪽으로 가던 도중 하원을 힐끔 보았다.

"근데 너 이렇게 따라 다녀도 되냐?"

"아까 섭섭이랑 이야기해 뒀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제가 선수 쪽 영상을 찍기로 했어요. 아, 그리고 제 채널도 홍보해 준데요."

아까 뭔가를 쑥덕거리더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대가는?"

"아시잖아요?"

나와의 자리를 어떻게든 더 주선해 달라는 거겠지.

귀찮은 표정을 지은 나는 알아서 하라는 양 손짓하곤 선수 대기실 방 문을 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온 순간 시선이 내게로 확 몰렸다.

32명, 섭섭이 말로는 사전에 예선전을 치렀다 하니 그중에서 남은 녀석들이겠지.

"하천성이다."

"하천성!"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대기실 문을 닫은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하원은 내 곁에서 떨어져 다른 이들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할 때는 제대로 하겠다, 이건가.

"반갑습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앞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 사람의 닉네임을 슬쩍 보니 '요단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고, 곧 나는 그가 게시글에 달린 댓글에서 보았던 PK 랭커 7위임을 눈치챘다.

이내 요단강이 내게 정중히 악수를 청하니, 나도 적당히 그걸 받아 주었다.

그러자 주변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랭커급 헌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사람들은 원래 꾸며 내기를 좋아하는 법이니까요. 본인이 정정하지 않은 시점까지는요."

정정할 거라면 지금 하라는 건가.

웃는 그의 얼굴 너머에서 희미하게 분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도 헌터 일을 예전에 잠깐 해 봤기 때문에 압니다. 랭커급 헌터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그리고 그 분노는 곧 얼굴 위로 표출되었다.

랭커급 헌터의 신봉자라도 되는 듯 그의 두 눈이 이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랭커급 헌터라는 말을 함부로 몸에 두르는 거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쉽게 논하여서 되는 분들이 아닙니다."

"네가 뭔데?"

"헌터를 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분들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본 랭커급 헌터라는 녀석들은 다 나사 빠진 녀석들이었는데.

"앞으로 그런 이야기가 다시는 안 나오게 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당신이 강철 님이 아닐까라는 말은 절대로 나오지 않게 할 겁니다."

그걸 끝으로 요단강이 돌아서서 걸어가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지. 내가 강철민인데.

"그러고 보니 요단강, 강철민 신봉자였지."

"맞아요. 강철민이 관련된 일이 있으면 가장 앞에서 의견 표출하던 사람이죠."

"그래서 이번에 참가했구만. 하천성이 혹시나 강철민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랭커급 헌터라고 하니 한국 랭커인 사람들 전부 하나씩 의심받고 있었잖아. 누가 언급되던 이상할 건 없는데 말이야."

요단강과 내 대화를 엿듣던 다른 유저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내 실상을 알게 되면 저 요단강이라는 녀석 어떻게 되는 걸까.

괜스레 조금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즈음, 어느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취재를 마친 하원이 내게 다가왔다.

"요단강 님은 어때요?"

"나중에 골치 좀 썩을 거 같다."

"와, 아무리 하천성 님이라도 요단강 님은 역시 힘들 것 같나요?"

"아니, 내가 아니라 쟤가."

내 말에 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요단강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쪽과 눈이 마주친 요단강은 자연스레 샤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요단강 님 현실에서도 정말 잘생겼는데, 게임 캐릭터도 멋지게 잘 만들었다. 그죠?"

"몰라. 관심 없어."

"에이, 그렇담 현실의 하천성 님은 어떤데요?"

이 녀석 일부러 이 주제를 꺼내려고.

내가 경고하듯 쏘아보자 하원은 혀를 찔끔 내뱉으며 물러섰다.

[참가자분들은 호명하는 순서대로 입장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대기실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대기실 입구 쪽에 달린 TV에서 열심히 외쳐대는 섭섭이의 모습이 보였다.

컨텐츠를 성공시키고자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앞에서 호명된 몇 명이 대기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자리가 비자, 나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안녕하세요. 하천성 님."

"와, 하천성 님 팬이에요!"

"하천성 님, 저 방송 중인데 혹시 이야기 좀 나누어 봐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순식간에 내 곁에 아직 호명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이에나같이 눈을 번뜩이는 그들의 모습에 내가 입을 떼려 하자, 하원이 불쑥 사람들의 앞을 막아섰다.

"자자, 아까도 말했듯이 하천성 님에 관한 질문들은 저를 통해서 해 주세요."

이 녀석 자연스럽게 나를 통해 대기실의 사람들을 통제할 권한을 쥐었구만.

그런 하원이 막아서자, 아쉬운 소리를 내뱉던 사람들은 곧 기자회견처럼 그녀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을 적당히 커트하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한 번씩 헛소리하는 탓에 내게 머리를 수도로 한 대 얻어맞긴 했지만, 나름대로 괜찮게 잘 처리해 냈다.

'옆에 두기에 불편하지는 않다는 걸 어필한다 이거지.'

섭섭이 같은 자기보다 훨씬 유용한 유튜버가 내 옆에서 알짱거리기 시작했으니, 괜스레 초조해져서 그러는 걸로 보이긴 하지만.

'뭐가 되었든 유용한 건 유용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간 하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슬그머니 곁에 다가온 한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란스러운 참가자들 사이에서 하원의 눈을 피해 다가온 그는 내 옆에 턱 하니 앉곤 곧바로 다리를 꼰 채 건방 떠는 자세를 취했다.

"마, 니 랭커급 헌터라메."

어디선가 들어본 부산 억양 사투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왠지 모를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내 아는 아들 중에 한 손 검 그렇게 다루는 놈은 없는데 니 누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이미 한 번 들어 본 목소리와 태도.

그를 본 나는 실소를 내뱉었다.

이 녀석들은 다 할 일도 없나.

"랭커급 헌터들은 다 시간이 남아도냐? 도각."

그는 랭커급 헌터 7위 도각이었다.

101화

아무래도 원래 디스 헌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나보다도 높은 레벨인 듯하였다.

"내 한눈에 알아보는 거 보니까 헌터는 맞긴 맞나 본데, 그러면 더더욱 랭커급 헌터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지 않나?"

"아는데. 귀찮게 괜히 이러지 말지?"

"그럴 순 없다. 우리 아들이 자유 분방하긴 한데 그래도 랭커급 헌터라는 것에 자부심은 가지고 있다. 어디 누군지 모르는 놈이 랭커급 헌터라고 자칭하고 다니는데 그냥 둘 순 없지."

도각은 강철민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본래 대검을 사용하고 나와 싸우는 패턴 방식도 너무 다르니, 도각은 내가 강철민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생각 안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진짜 랭커급 헌터라고는 조금도 생각 안하는 모양이지?"

"맞다. 내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니는 절대 우리 아들 아니다. 그래도."

일순간 도각의 몸에서 위압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니가 내 이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간덩이 부운 녀석인 건 잘 알겠다."

"내가 진짜 랭커급 헌터면 어쩔 생각이냐."

"그때는 내가 대가리 박고 사죄하지."

나는 도각에게 대가리 박으면서 하는 사죄를 예약해 두었다.

근데 이 녀석들 나중에 자기 말을 어떻게 책임지려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거지.

"앗! 하천성 님과 대화 하려면 저를 통해 해 주세요!"

그 순간 이제야 도각을 알아차렸는지 하원이 급히 도각을 막았다.

그러자 도각은 나를 힐끔 보곤 '알아서 처신 잘하그라.' 하고 일어나 가 버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몰라."

도각을 모르는 놈 취급한 나는 그렇게 경기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경기가 되었을 때 나는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대망의 32강전 마지막 경기는 바로 도새 님과 하천성 님입니다!]

일이 꼬이면 계속 꼬인다더니.

도새는 도각의 디스 헌터 닉네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도각과 눈이 마주쳤다.

그 또한 나와 바로 만날 거라곤 생각 못했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고, 곧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잘됐다. 어차피 니랑은 빨리 붙어야지 생각했으니. 내가 이기면 니 랭커급 헌터가 아니라고 사실대로 밝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각이 먼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경기장으로 향했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으로 나온 순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질 듯 들려왔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이 나였던 만큼 모두 기대감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랭커급 헌터는 어떻게 싸울까, 그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관전 포인트였다.

반면에 도각 쪽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실제론 랭커급 헌터 두 명의 싸움이었지만, 그들의 눈에 도각은 평범한 유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자신만 랭커급 헌터라고 생각하는 도각은 나를 위협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세계의 비밀을 혼자 간직한 용사가 추앙받는 마왕을 쓰러트리러 오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세상사 본인이 다 정의인 건 아니건만.'

도각을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며 나는 열심히 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섭섭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섭섭이는 짧게 이야기를 마치곤 곧바로 경기를 시작할 준비를 했고, 곧 천장 위에 카운트가 나타났다.

"3!"

"진짜 랭커급 헌터가 뭔지 내 알려 줄 테니 앞으론 사칭 같은 거 하지 마라."

모두가 입을 모아 외친 순간 도각이 말해왔다.

"2!"

그런 그의 말에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 해주었다.

"아까 대가리 박고 사죄하겠다는 말이나 지킬 준비해."

"1!"

경기가 시작했다.

* * *

도각은 오랜만에 디스 헌터에 들어왔다.

원래 헌터로 각성하기 전부터 디스 헌터 게임을 즐겨 했던 그는 언제나 헌터를 꿈꾸고 있었고, 이 게임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였다.

그러나 진짜 헌터로 각성하고부터는 그는 헌터 일에 푹 빠져 랭커에 오를 때까지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였다.

그런 지금 그가 다시금 디스 헌터를 찾은 이유는 사실 다른 이유에서였다.

슬쩍 들었던 뱁새가 게임을 한다는 말.

입이 거칠고 늘 그녀와 투닥거리는 도각이었지만, 그에게 뱁새는 우상이었다.

재작년에 각성한 자신과 달리 10대 때부터 일찍이 헌터 활동을 해온 뱁새는 헌터가 되기 전 시절, 도각이 제일 좋아하던 헌터였으니까.

하나 헌터가 된 이후 불과 1년 사이에 급속도로 성장한 도각은 어느새 뱁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랭커가 되었고, 그러던 그때 보고 말았다.

강철민을 향해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뱁새의 모습을.

분명 원래는 일종에 동경이었다.

그러나 동경은 곧 사랑으로 변모한다던가.

몇 번이고 사선에서 뱁새와 함께 굴렀던 도각은 어느샌가 그녀에게 깊은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본인조차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남자인 강철민을 좋아하는 뱁새가 자신 따위를 돌아봐 줄 일이 있을 리가 없었고, 괜스레 그것에 시기심을 느낀 도각은 뱁새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는 초등학생이 할 법한 짓이었지만, 그러한 시비 걸기는 어느새 그에게 익숙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도각은 이러한 행동 때문에 친구이자 동료로서 뱁새와 가장 친해졌다.

서로 투닥거리기는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사선을 넘은 동료로서의 우애는 둘 다 확실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자신일 뿐이다.

자신만 뱁새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는다면 그는 우애 좋은 동료로서 뱁새와 함께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말로는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다.

그러나 이놈의 마음이 강철민에게 달라붙는 뱁새를 볼 때마다 제멋대로 휘둘렸다.

디스 헌터를 다시 접속한 지금만 봐도 그렇다.

도각이 다시 이 게임에 접속한 이유는 뱁새가 강철민을 따라 디스 헌터를 하겠다고 하여서였다.

원래도 디스 헌터를 즐겨 왔던 자신이니 혹시나 처음 하는 뱁새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속에 품으면서 말이다.

물론 자존심이 강한 도각이었기에 디스 헌터에 다시 접속한 이유를 다른 이에게로 돌렸다.

그 대상은 바로 하천성.

디스 헌터에서 랭커급 헌터라고 사칭하고 다니는 녀석이 등장했다는 것을 보고, 도각은 괜스레 그를 걸고넘어지며 나타난 것이었다.

랭커급 헌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데 '감히 사칭하고 다녀?'라는 분노를 품은 채로 말이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당장 뱁새가 어디에 접속했는지 알아내 찾아가고픈 마음이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며 애써 관심을 돌렸다.

"1!"

그리고 경기가 시작한 순간 도각은 땅을 박찼다.

그의 두 손에는 현실에서도 즐겨 사용하던 길이의 단검이 쥐어져 있있었고, 도각은 재빠르게 하천성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식 PK는 레벨 차이를 일정하게 맞추기에 서로의 스텟은 크게 차이가 안 난다.

그렇기에 능력치는 비슷한 수준.

그러나 레벨을 올리며 쌓아온 스킬과 아이템은 역시 레벨이 높은 쪽이 유리하다.

그리고 그런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파일럿의 차이였다.

도각은 랭커급 헌터.

아무리 디스 헌터를 2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한들 그의 기술은 최상위 PK 랭커들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초 단위로 죽음을 넘나드는 랭커급 헌터에게 있어서 디스 헌터는 장난에 불과했으니까.

하천성에게 날아든 도각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빛났다.

스킬 '압도성의 진혈'은 그의 민첩을 3초간 두 배 가까이 올리는 액티브 스킬이었고, 그의 단도가 잔상을 남기며 하천성의 목을 베어 들어갔다.

'끝났다.'

속도에서 완전히 우위를 점한 도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띄워졌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걸로 끝내고 뱁새나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채엥!

그러던 순간이었다.

자신의 단도를 쥐고 있던 검으로 아무렇지 않게 막아낸 하천성의 눈과 마주친 것이.

분명 반응도 못 할 거로 생각했던 건지 끝이라 여기며 잠시 감았던 도각의 눈이 희미하게 떠지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복부를 향해 날아든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하천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먹을 내지른 자세에서 몸을 급속도로 틀며 하천성은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뒤쫓았고, 도각은 급히 단도를 들어 올리며 그것을 맞받아쳐야 했다.

화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도각의 귓가에 얼핏 들려왔다.

그와 함께 하천성의 검에 휘감긴 불꽃이 그의 단검을 타고 올라왔고, 그걸 본 도각의 눈이 경악하듯 크게 떠졌다.

'이건.'

헌터가 사용하는 오러와 같은 형태의 불꽃의 느낌을 받은 그는 그 즉시 자신도 오러를 끌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곳은 디스 헌터 게임 속.

당연히 그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대신 발을 주축으로 급히 몸을 회전시켜 불꽃을 억지로 떨어트려 내었다.

"어떻게 게임에서 오러를?"

"착각하지 마. 스킬이야."

눈살을 찌푸린 채 도각이 하천성을 쏘아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현실의 오러와는 다르다는 듯이 이번에는 위에 바람을 휘감은 하천성의 검이 도각을 향해 뻗어져 왔다.

아슬아슬하게 검 날을 피한 도각은 이를 아득 갈곤 지지 않고 하천성에게 단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서로의 공방이 매우 빠른 속도로 오가기 시작했다.

하천성의 검과 도각의 단도가 맹공을 펼치며 부딪쳐 나가고, 주위에는 검과 단도가 충돌하는 소리가 가득 메워졌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관객과 실시간 송출을 하던 섭섭이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지켜만 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디스 헌터를 즐기는 유저들.

그렇기에 알고 있다.

둘의 움직임이 자신들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

'또 누구냐? 저 녀석은.'

경악한 섭섭이가 멍하니 두 사람의 경기를 바라보았다.

하천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도각 역시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콰앙!

그 순간 도각이 발동시킨 히든 직업 '암수'의 스킬이 발현되었다.

이내 두 개의 단도가 꽃잎과 같이 변하여 주변에 흩뿌려졌다.

보기엔 아름다우나, 꽃잎 한 장 한 장이 폭탄과도 같은 위력을 가진 위협적인 스킬이었다.

하지만 하천성은 그러한 공격을 단 한 번의 검놀림으로 모조리 터트리곤 그 폭발력을 이용해 도약했다.

채엥!

검과 단도가 또 한 번 교차한 순간. 도각의 눈은 일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 하천성을 무시하던 그였지만, 몇 번의 공방을 반복하고 나서 깨달았다.

'이놈 내 수준,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랭커급 헌터 사이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술과 스타일.

그러나 전투 센스만큼은 랭커급 헌터에 버금갔다.

'네놈은 누구냐 대체.'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자 도각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진정하자. 이건 승부지만 게임, 저쪽이 오러 같은 걸 쓴다면 나도 스킬로 대응하면 된다.'

심호흡을 한차례 내뱉은 도각은 어느새 하천성을 전력을 다해서 쓰러트려야 하는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내 도각의 인영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102화

암수

그림자 밟기

암수의 스킬 중 하나인 그림자 밟기가 발동된 순간 그의 모습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하천성이 경계의 눈빛을 띄우고 있을 때,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걱!

그 즉시 휘두른 검 날이 인기척을 베어 가른 순간, 하천성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떠졌다.

그곳에 있는 것은 반투명한 형태의 도각이었다.

암수

그림자 분신

아차 한 순간, 하천성의 그림자 아래에서 나타난 도각의 눈이 곧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암수

진혈(震血)

액티브 스킬을 사용한 순간, 3배 이상 빨라진 단도가 즉시 하천성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암수

선공필사(先公必四)

한 번 더 액티브가 덧씌워진 도각의 단도는 보통 인간이라면 반응도 못 할 정도의 공격 속도를 가졌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하천성은 가까스로 몸을 꺾어 피했으나, 반응이 늦어 목 일부분이 잘려 핏물이 튀었다.

그런 상태로도 즉시 자세를 바로잡은 하천성은 도각에게 검을 내려쳤으나, 그는 이미 다시금 그림자 밟기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쪽 손으로 목가를 감싼 채 하천성은 주변을 경계하며 눈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거, 오러랑 은근히 달라서 조금 짜증 나는데.'

본래 오러라면 오러 감지를 이용해 도각의 위치 정도는 손쉽게 알 수 있었을 터이다.

오러가 아닌 신력은 신체의 강화만 가능했지만, 오러 감지로 찾아낼 수는 없었다.

긴장된 상황 속에서 쉬게 해 줄 생각은 없다는 양 도각의 연격이 계속해서 펼쳐졌다.

중간중간 페이크를 섞으며 팔과 다리를 연이어 베고 간 도각은 잡힐 거 같으면 금세 그림자 밟기로 숨어 버렸다.

대응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상황에 하천성의 눈빛에 날이 서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싸움을 통해 도각이 사용한 선공필사가 무슨 스킬인지 깨달았다.

창 아래쪽에 뜬 4분의 3이라는 숫자와 점점 윤곽이 확실해지는 해골 모양.

어떤 효과인지는 몰라도 저 숫자가 다 채워지는 순간 상당한 양의 데미지를 받을 것이었다.

'다른 것 좀 시험해 보려 했더니.

천성은 바꿀 수 없다던가.

희미하게 미소를 띤 하천성의 눈동자에서 한줄기 스파크가 튀었다.

확실히 이 신력이라는 것은 오러와는 다르다.

그러나 몸을 강화한다는 것만큼은 오러와 같았고 그것은 곧.

암수

오화만상(五畵謾狀)

그 순간 다섯 명의 도각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 나왔다.

그들의 눈은 전원이 스킬 진혈로 인하여 붉게 물들어 있었고, 단도에는 선공필사를 두르고 있었다.

파직.

이내 전깃불 타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크학?!"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것은 하천성이 아니었다.

가슴팍에서 흐르는 핏물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도각.

그것도 다섯 명 전원이 똑같이 당하여 뒹굴고 있었다.

"어떻게...?"

일순간 하천성의 움직임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했던 도각은 경악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하천성의 주위에는 일렁거리듯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칠식(七式)

뇌신일체(雷神一體)

전 속성의 오러를 반사 신경에 주입 시켜 유지 시간 동안 자신에게 향하는 모든 공격을 대응하게 하는 검술.

진 · 낙뢰의 비하면 한참 하위 호환 기술이라 최근 들어서는 거의 쓸 일이 없었던 검술을 오랜만에 써 본다.

하천성은 검 위에 전 속성의 오러를 둘렀다.

역시 이쪽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네 스킬. 아무래도 공격에 실패하면 다시 카운트 세야 하는 모양이지?"

하천성이 히죽 웃었다.

선공필사는 4번의 공격을 성공시키면 상대에게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지만, 반대로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할 경우 그 즉시 쌓아 놓은 카운트가 초기화 된다.

게다가 동시에 같은 대상에게는 하루 동안 다시 발동 못 하는 제약이 있어 잘 쓰면 PK에서 최강의 스킬이지만, 실패하면 두 번은 못 쓰는 거나 다름없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기껏 상대가 암수 스킬의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기에 사용했건만, 그르친 상황에 쓴 물을 삼킨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작해야 스킬 하나 막혔을 뿐이다.

하천성의 주위에 돌고 있는 저 스킬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뚫어 낼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슬슬 끝내자."

하나 그런 그의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그의 검을 향해 맺히기 시작한 신력이 불길한 기운을 감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헌터의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하천성이 저걸 사용하게 두면 자신은 끝이다.

상황을 알아차리자마자 그림자 밟기도 잊고 진혈을 발동하며 준비 동작을 하는 하천성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는 단도를 하천성에게 내지를 때 보고 말았다.

희미하게 그의 입가에 지어진 웃음을.

'당했다?!'

일부러 큰 스킬을 쓸 것처럼 굴어 자신의 공격을 유도했음을 깨닫고 도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자식, 마치 최강자인 것처럼 정직하게 싸우더니. 여기서 페이크를 섞어?!'

실제로 하천성의 태도는 아까까지 자신이 최강자라는 듯이 여유만만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각의 맹공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그는 과거 처음 회귀했을 당시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사용하던 악바리 모드로 바뀐 것이다.

몸에 발동된 뇌신일체가 랭커급 헌터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반응 속도를 하천성의 손아귀에 쥐어 주었다.

그런 하천성의 움직임에 어떻게든 검을 피하고자 도각이 억지로 몸을 뒤틀었으나, 진혈로 빨라진 그의 육체의 속도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닥쳐들었다.

'어쩔 수 없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담 승부수를 걸기로 한 도각의 눈동자가 더더욱 붉게 타올랐다.

암수

진홍혈(眞紅血)

암수의 최종 스킬.

체력과 마나를 3분의 1만을 남기고 모조리 바쳐 전신의 힘과 민첩을 10배 가까이 끌어 올리는 스킬이 발동되었다.

마지막 일격을 두 개의 단도에 담은 그는 대기를 우그러트리며 하천성을 죽이고자 달려들었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그리고 번개가 움직이었다.

도각의 진홍혈보다도 빠른 최속의 빠르기가 하천성의 검을 타고 흐른 순간, 도각의 목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뭔.'

뒤늦게 튀어 오른 핏물, 핏발 선 눈,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도각의 입에 피거품이 오른 순간.

그 즉시 급소를 타격당했다는 판정이 뜨자, 모든 체력이 소모된 그의 몸이 데이터화 하며 사라졌다.

"니, 대체 누고."

그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도각이 사라진 순간, 고요함이 주변을 메꾸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느라 숨을 삼킨 관객들의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런 고요함을 깨듯 하천성이 검을 가볍게 한 차례 휘두르자 겨우 사람들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와, 와아아아아."

"와, 와, 와, 와!"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천성! 하천성! 허천성!"

처음에는 차원이 다른 공방에 얼떨떨함을 보이던 그들이었지만, 점차 수준 높은 대결에 몰입하였다.

경기가 끝난 직후, 방금 싸움을 되새기기 시작한 사람들의 환호성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끝끝내 하천성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와, 미쳤다. 이게 뭔 상황이냐.]

[지금 우리 뭐 본거임? 저거 사람 맞냐? ㄷㄷ]

[시청자 수 5만 돌파 했다! 미친 계속 느네. ㅋㅋㅋㅋㅋ]

[도재라는 놈은 또 누구야. 하천성이 랭커급 헌터라며. 그럼 저 정도면 쟤도 랭커급 헌터냐?]

[랭커급 헌터가 흔한 줄 아나 결국 하천성한테 졌으니 그냥 일반 헌터 아닐까.]

[진짜 헌터가 괴물이긴 괴물이구나. 어떻게 저런 식으로 싸우냐. 이거 내가 알던 디스 헌터 맞아? 핵 의심할 정도인데.]

[PK 접어야지. 랭커급 헌터 뜨면 바로 털릴 거 왜 함? ㅋㅋ]

[결국 하천성이 누군데?]

눈으로 좇아가기 힘들 정도로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던 섭섭이는 입을 틀어막은 채 하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 지금 자신이 찍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의 수준 높은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는 마찬가지로 지금 현재 상황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취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PK랭커 7위 요단강.

랭커급 헌터들의 광팬인 그는 지금까지 랭커급 헌터들의 영상을 몇만 번이고 돌려 보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방금 하천성과 전투를 한 자는 랭커급 헌터 도각이다.

그의 전투 패턴, 방식, 그리고 아까 전 대기실에서 들었던 부산 억양의 말투와 목소리.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긴 했지만, 그는 정말로 도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도각이 지금 하천성에게 지고 말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천성은 도각 님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담 그는 정말로 랭커급 헌터라는 소리란 말인가.

요단강의 눈에 혼란이 깃들기 시작했다.

랭커급 헌터의 영상을 매일 같이 보고 있는 그의 눈에 하천성의 말투는 물론 그와 같은 싸움 방식을 하는 랭커급 헌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일반인보다 뛰어난 헌터라지만, 사람인 이상 저런 싸움 속에서 자신의 전투 버릇 한 번을 흘리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잘 숨기고 있다든가 혹은....'

요단강은 그나마 높은 가능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설은 그가 한국에서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헌터라는 것.

헌터 총회에게도 히든카드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곧 그 가설을 부정했다.

그러한 히든카드가 이런 게임에서 활개 치고 다니게 둘 만큼 헌터 총회는 바보가 아니다.

두 번째 가설은 외국의 랭커급 헌터일 가능성.

세계 1, 2위 랭커 헌터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만큼 한국은 세계적으로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

요즘에는 제2 외국어로 한국어가 당연시될 정도이며, 외국 헌터들 중에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쓸 수 있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그렇담 한국 랭커급 헌터에만 관심이 있는 요단강 입장에서도 하천성의 존재를 모를 만도 했다.

차라리 첫 번째 가설보다는 이쪽이 더 신빙성 있음을 느끼며 요단강은 턱을 매만졌다.

'만약 하천성이 정말로 외국의 랭커급 헌터라면.'

요단강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정말로 그가 랭커급 헌터라면, 아무리 디스 헌터라 한들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그 도각마저 그에게 패배하고 말았는데.

그 사실을 깨달은 요단강은 서둘러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떠올리기 시작하며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그가 착각하고 있지만, 하천성의 헌터 세계 랭커 2위 강철민이다.

이 사실을 요단강이 알게 되는 것은 지금보다 더 후에 일이었다.

* * *

'그럭저럭 인가.'

사람과의 싸움을 오랜만에 길게 해 봤다고 생각하며 나는 어깨를 가볍게 푼 채 대기실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32강을 넘긴 참가자들이 있었고, 아까 전 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던 그들이 이제는 나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오셨어요?"

왜 그런가 하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하원이 다가왔고 나는 곧바로 의문을 해소하기로 했다.

"이 녀석들 왜 이러냐?"

"그야 방금 싸움을 보고 전의를 상실한 거겠죠. 반신반의하던 상황에 하천성 님이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만한 실력을 보여 줘 버렸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다른 참가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나와 눈 하나 마주치지 않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보며 쓴 한숨을 내뱉었다.

'패기 없기는.'

전부 싱거운 녀석들뿐인 건가.

첫 경기였던 도각이 가장 괜찮은 상대였음을 깨달은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짓곤, 내게 도발하던 요단강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놈이 보이지 않자, 하원에게 물었다.

"요단강이라는 놈은?"

"아까 직접 경기 보겠다고 나가고 나서는 안 돌아오시네요."

설마 이놈도 도망친 건 아니겠지.

왠지 다른 녀석들이 다 기권할 것 같은 상황이 되자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방금 도각과의 싸움을 보고 이 녀석들이 전의를 잃었기에 앞으로도 나와 싸우려는 상대가 더 없을 수 있다.

그렇담 직업 퀘스트 완수를 위해 앞으로 치러야 할 4번의 PK가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다.

'어쩐다.'

어떻게든 이놈들을 설득해서 대회를 진행하긴 해야 하는데.

103화

'아.'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내가 뭐 하러 토너먼트 따위를 하고 있었담.

이 방법이 있었는데.

"어이, 너희들."

나는 참가자들을 한 데 모으곤 그들에게 내가 생각한 의견을 물었다.

내 의견을 들은 그들은 이거라면 해 볼 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듯하였고 나는 만족한 미소와 함께 열심히 사회를 보고 있을 섭섭이를 귓속말로 불렀다.

―네?

내 귓속말을 들은 섭섭이에게서 당황한 음색이 들려왔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거냐는 물음이었고 나는 차라리 처음부터 이렇게 하는 게 좋았다고 되받아쳤다.

―아, 으으 으음, 알겠습니다. 관객분들도 그걸 더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이렇게 된 이상 토너먼트도 식상하다면 식상하죠.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내 말은 최대한 들어 주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여러분 방금 막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참가자들 측에서 규칙 변경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섭섭이는 방송으로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외치기 시작했다.

[규칙의 변경 내용은 간단합니다. 제목은 하천성 님을 이겨라. 지금부터 치러질 경기는 토너먼트가 아닌 1대 15. 하천성 님 혼자 대 현재 남은 참가자 전부입니다!]

그리 외치자 관객들이 거친 환호성을 토해 내었다.

32강을 전부 본 그들도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남은 멤버 중에 나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남은 경기는 참가자들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싸워도 결국 내가 이기겠지 하며 긴장감 없는 경기가 진행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냥 경기장에서 하면 또 재미없겠죠! 이후 경기는 제가 협찬받아 둔 사설 지형에서 진행되겠습니다! 사설 지형의 내부는 숲! 거기에 15명의 참가자는 하천성 님보다도 먼저 입장하게 될 예정! 아무리 하천성 님이라 할지언정 그의 레벨과 체력을 고려했을 때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아, 참고로 15분이 하천성 님 상대로 이기시면 1등 상금을 인원수대로 나누어 개인에게 전원 다 드릴 겁니다.]

이번에는 참가자들 쪽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섭섭이 녀석 사회 보는 법을 잘 아는구만.

이걸로 참가자들의 사기도 치솟았다.

[그럼 10분 뒤 경기 진행할 테니, 시청자 여러분들 얼른 치킨 주문 해두시고 시청 기다려주세요! ]

그걸 끝으로 섭섭이 쪽 방송이 끝나자 하원이 내 옆에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15명 상대로는 좀 힘드시지 않겠어요?"

"나 못 믿냐?"

"솔직히 이건 좀 믿기 힘들긴 하죠."

솔직하군.

"지든 이기든 상관없어. 어차피 난 4명만 더 쓰러트리면 되니까."

그리고 그런 내 말에 하원은 '하긴, 이거 직업 퀘스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죠.' 하고 순순히 납득했다.

물론 내 진심은 15명 다 쓰러트릴 속셈이지만.

'재밌겠네.'

일대일로 싸우는 것과 1대 다수는 또 다르니까.

저쪽도 사기가 끓어 오른 것 같으니 꽤 여러 수를 준비해 줄 거다.

그리고 10분 뒤 준비를 끝마친 섭섭이가 다시금 진행을 시작했다.

그 진행을 따라 앞서 말했던 대로 먼저 들어가기로 한 참가자들이 대기실 밖으로 나가고, 나는 그 모습을 느긋이 지켜보았다.

"이번 영상 조회 수 진짜 대박이겠다. 그죠?"

"그래."

"완전 관심 없다는 투네요."

"내 것도 아니고, 남의 건데. 관심 가질 이유가 있냐?"

내 말에 하원은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네 유튜브는 뭐라 치면 나오냐?"

"아, 보시게요?"

"왜 보면 안 되?"

"아뇨. 부끄러운 건 전혀 없으니까요. 영어로 하원이라 치면 나와요."

문뜩 떠오른 생각에 나는 섭섭이 녀석이 호명하기 전에 하원의 유튜브를 들어가 보았다.

그러곤 딱히 흥미 없는 눈으로 영상들 몇 개를 보다가 '우리 가족 vlog'라는 제목의 영상을 눌러 보았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그저 반반하게 생긴 20살 초반의 하원의 얼굴이 나왔고, 그녀는 자기 가족들에게 장난스레 말을 걸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그러던 순간 나는 영상 속에서 이전에 본 적 있는 얼굴과 마주했다.

한 명은 하원의 언니.

그녀는 얼마 전에 열린 게이트에서 첫 번째로 구했던 여성이었다.

'이건.'

절대 우연일 리가 없다.

"하원, 네 언니 얼마 전에 게이트 사고 당하지 않았냐."

"어? 어떻게 알았어요?"

놀란 표정으로 하원이 나를 돌아보자 나는 역시하고 생각했다.

'그럴듯한 연결점이 생겼어. 내 추측으론 이 층은 헌터 랭킹 1위인 용이 가장 중요한 녀석일 게 분명한데.'

나는 영상을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원의 언니, 게이트 사건에서 등장한 용,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하원.

나는 혹시나 하며 하원을 돌아보았다.

'이 녀석이 용?'

아직까지 추측이라곤 하나 나는 용이 이번 게이트 사건에 개입한 이유가 건물 내에 지인이 있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생긴 연결점을 본다면 그 지인은 내가 구했던 하원의 언니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하원은 내 옆에서 종종 사냥을 돕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조력은 솔직히 형편없었고, 전투는 조금도 해 본 적 없는 초짜였다.

'숨기고 있는 건가.'

예리한 내 눈빛이 하원을 향하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동안 영상은 계속되었고, 이내 하원이 자신의 여동생 방문 앞에 가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 싫다고! 그런 거 절대 안 찍어!]

[하여튼 하나 있는 여동생이 이쁜 짓 하는 꼴을 못 봐요.]

[네 얼굴 보면 이쁜 짓 하려는 마음도 싹 사라지거든?]

[뭐? 이게!]

그렇게 싸우다가 곧 영상이 끝마쳤다.

"우리 언니는 어떻게 알아요?"

"게이트 때 잠깐...."

나는 대답하다 말고 하원을 휙 돌아보았다.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원은 이미 내가 헌터라는 사실을 확신한 표정이었다.

이번 거는 명백히 내 실수였기 때문에 나는 혀를 찼다.

'만약 이 녀석이 정말로 용이라면.'

내가 강철민이라는 걸 아는 즉시 피할 확률이 있었다.

혹은 하원이 아닌 그녀의 지인이 용이라 한들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는 곧바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경기장 쪽으로 나갔다.

"저희 언니 꽤 괜찮죠. 회사에서도 일 잘한다고 소문났어요."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기회를 잡은 하원이 옆에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자기 언니를 빌미로 나의 정체를 캐내 볼 속셈인 듯하였다.

"미안한데, 네 언니는 내 타입 아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타입인데요? 혹시 저?"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하원이 벽 쪽으로 쪼르르 도망쳤다.

"됐다. 혹시 네 가족이나 아니면 지인 중에 헌터라도 있냐?"

"헌터요? 딱히요."

내 말을 듣고 하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 하천성 님이라면 아는데요."

이 녀석 갈수록 날 쉽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한숨을 내쉰 나는 하원을 두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서 하천성 님이 입장하겠습니다!]

"떴다!"

"전설 함 써 보자!"

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들으며 나는 경기장 앞에 만들어진 포탈 앞에 섰다.

CHE―21이라 적힌 포탈을 잠깐 보고 있자 연이어 섭섭이의 중계가 들려왔다.

[15명의 참가자들은 전원이 이미 들어간 상황! 포탈은 등록된 맵에 무작위로 떨어지는 랜덤 포탈입니다! 15명의 참가자들은 과연 지금쯤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요!]

섭섭이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일으키는 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참가자 15명의 레벨은 평균 487. 하천성님의 현재 레벨은 65. 이거 까마득한 차이네요! 이 맵은 PK 지역으로 설정해 뒀으니 스텟은 참가자 전원이 평균으로 맞춰지겠지만, 과연 혼자서 자신보다 강한 15명의 합공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포탈 안으로 들어섰다.

첨벙.

그 순간 들려온 물소리와 함께 나는 몸 위로 느껴진 부유감에 멈칫하였다.

반사적으로 숨을 참고 시야를 올리자 저 멀리 햇빛이 보였다.

'분명 숲이라고 하지 않았나?'

뜬금없이 등장한 물에 나는 헤엄을 쳐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옆에서 날아든 수십 개의 물로 된 탄환이 내 몸을 급습한 것이.

신력을 물 속성으로 끌어 올리며 급히 탄환을 쳐 낸 나는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 내게 총 같은 것을 겨누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재빠른 속도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군. 이것도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해 본 함정이라 이거지.'

머리는 잘 썼다.

도각과의 경기에서 내가 사용한 속성은 뇌 속성과 화 속성.

둘 다 물속이라면 제약이 있는 속성이니 그걸 감안하여 이런 함정을 판 것이리라.

'게다가 저쪽은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스킬을 가진 모양이고.'

랜덤 포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이밍 맞게 내가 여기에 떨어진 걸 보면 분명 이 물도 어떠한 종류의 스킬일 확률이 높았다.

사아아아악!

이번에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수십 마리의 상어가 날 덮쳐오기 시작했다.

나는 물의 저항력에도 불구하고 검을 뽑아 얼음 상어들의 공격을 받아 내었다.

그러는 동안 또다시 어디선가 물로 된 탄환이 날아들자, 나는 한 차례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위로 올렸다.

'그렇담.'

그 순간 내 검 위로 바람 속성의 신력이 맺혀 들기 시작했다.

꽤 옛날이지만 2회차 시절 때 함께 다니던 녀석의 기술을 써보기로 하였다.

글렌다 3형

폭풍우(暴風雨)

검에 맺힌 바람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물속에서 몰아친 소용돌이는 거대한 물살을 만들어 내었고, 곧 나를 중심으로 모든 물들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탄환이고 얼음 상어고 뭐고 모조리 물속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으아아악?!"

이윽고 비명을 내지르며 물속에 숨어 있던 다른 녀석들도 소용돌이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검을 올려 든 상태에서 이번에는 빙 속성의 신력을 끌어 올렸다.

소용돌이를 중심으로 몰려든 물들이 순식간에 빙 속성 오러에 의해 얼어붙자, 그 순간 내 주위에 있던 물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어느새 숲속에 덩그러니 놓인 나는 얼음 속에 갇힌 두 명의 유저를 보곤 그 즉시 얼음을 내려쳐 둘을 박살 내 주었다.

'일단 둘.'

아직 열셋이나 남은 마당인 만큼 갈 길이 멀다.

'여러 속성을 쓸 수 있는 건 이럴 땐 좋군.'

물론 현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스텟 때문일까, 기대한 수준의 위력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익숙하지 않은 속성은 출력을 조절하기 까다로워서인지 방금 걸로 신력이 상당히 많이 소모되었다.

이건 회복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리라.

그 순간 내가 이렇게 될 거란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양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유저가 불쑥 튀어 나왔다.

아무래도 도각과 같은 암수 직업군인 듯 내 뒤를 노리는 녀석의 등장에 나는 몸을 빙글 돌려 녀석의 단도를 피하곤 그대로 머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그런 나를 향해 다섯 개의 화살이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고, 동시에 바닥에 내리꽂혔던 암수 유저가 내 팔을 자신의 팔로 휘어 감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팔이 땅에 어깨까지 박힌 나는 날아드는 화살을 피할 방법이 없었기에 검의 신력을 끌어 올려야만 했다.

104화

사식(四式)

뇌도탄룡(雷刀彈龍)

전 속성의 신력이 용의 현상을 한 기탄이 되어 화살을 집어삼켰다.

그러는 동안 나는 팔의 힘을 주어 땅에서 뽑아내곤 숲으로 뛰어들려 하였다.

그러나 내게 도망칠 시간을 줄 생각이 없다는 양 내가 숲 쪽으로 접근하자 나무들이 뿌리째로 올라오며 내게 나무줄기를 휘둘러 왔다.

'빡세게 나오는구만.'

나무줄기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나는 또다시 날아드는 화살을 나무 괴물이 대신 맞도록 움직인 다음 발끝에 신력을 모았다.

그러곤 검 하나에 응축하듯 집중적으로 뇌 속성의 신력을 끌어모은 나는 폭발적인 힘으로 바닥을 박찼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최속의 찌르기와 도약력이 합해진 순간, 나는 내게 나무줄기를 휘두르려던 나무 괴물들을 모조리 꿰뚫고 숲 안에 무사히 도달했다.

그러곤 거의 다 떨어진 신력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숲속을 뛰기 시작했다.

생각 이상으로 재미난 상황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 * *

"요단강님 하천성이 도망갑니다."

그 무렵 하천성의 상대인 유저들은 한 사람의 지시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가장 랭킹이 높은 요단강.

처음 하천성이 정말 랭커급 헌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했던 그지만, 자신이 괜히 디스 헌터의 랭커가 아니라는 양 침착하게 유저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계획한 대로 메타망 님과 감귤 님이 그의 뒤를 쫓아 주십시오. 다른 분들은 진로를 정해 둔 곳으로 향하도록 공격을 계속해 주셔야 합니다."

하천성을 확실하게 몰아넣고 있는 그는 이제는 냉정을 되찾고 상황을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 하천성의 레벨은 앞선 두 사람을 제거했음에도 73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이곳이 PK 전장인 이상 그의 스텟은 자신들과 비슷할 것이다.

그렇담 그가 무슨 직업을 했는지는 잘 몰라도 스킬을 사용하는 MP의 양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리.

'헌터가 사용하는 오러와 비슷한 요상한 스킬이었지만, 아까의 전투로 그걸 몇 번이나 난사했어. 지금쯤이면 적어도 MP가 한계점에 다다랐을 거다.'

그가 현실에서는 랭커급 헌터일지도 모르지만, 게임에서는 일개 유저다.

일대일이라면 결국 파일럿의 성능 차이로 밀릴 테지만, 1대 다수라면 소모전 양상으로 끌고 가 확실히 승기를 거머쥘 수 있다.

'우리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시점에서 MP는 분명 다 떨어졌다. 분명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하겠지.'

다수를 상대로 시간을 벌겠다는 그 안일한 생각이 함정이다.

그것에만 정신이 팔려 하천성은 스스로 자신들의 함정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못 채게 될 테니까.

'자, 당신이 아무리 랭커급 헌터라도 이걸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전에 잃었던 자신감을 다시 되찾은 요단강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하천성을 바라보았다.

* * *

그리고 그 시각 디스 헌터 운영자 실.

그곳 한구석에서 하천성의 영상을 줄곧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하천성 담당 한민선이었다.

"위험한데."

유저들에게 열심히 쫓기고 있는 하천성을 보며 그녀는 섭섭이의 방송에도 중계 되고 있는 상황을 엿본 채 홀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 주지 않는 하천성에게 이래저래 속을 많이 썩은 그녀이지만. 한민선은 하천성, 정확히는 하천성이란 캐릭터의 주인인 강철민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자신이 이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강철민을 이용한 디스 헌터 홍보를 하기 위함.

이만큼이나 기대감을 모아 놓고 혹여나 하천성이 패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몰린 관심도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고 자연스레 기대한 광고 효과도 급감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강철민이라고 세간에 밝혀 봤자 제대로 된 홍보가 될 리가 없으니까.

'어떡하지.'

지금은 한창 PK 중, 지원하고 싶어도 마땅히 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혹여나 하천성이 질까 하며 계속 애를 태울 뿐이다.

"그냥 봐라."

괜스레 긴장되어 손톱까지 물어뜯고 있을 때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니나 다를까, 곽부장이 와서 그녀와 함께 화면을 보고 있었고 그녀는 그에게 퉁명스레 말했다.

"어떻게 그냥 봐요? 지면 이때까지 한 노력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믿어. 그냥 믿으면 되는 거야."

이 강철민 빠돌이가.

대체 뭘 믿으라는 걸까.

지금 화면에서만 봐도 계속 도망만 치고 있는 하천성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을까, 그녀는 순간 멈칫하였다.

잠깐 눈을 뗀 사이 하천성이 자신에게 화살을 쏘던 유저를 어느새 제압해 두었기 때문이다.

"뭐야. 갑자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까지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화살을 날리던 사람을 어떻게 찾아서 이렇게 순식간에 제압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상황을 보고 있자 활 쏘던 유저를 구하려던 다른 한 명도 결국 하천성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걸로 상황은 순식간에 11대 1.

아직 다른 참가자들이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수가 착실하게 줄고 있다.

"거봐, 믿으라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믿어야만 하는 걸까.

눈꼴 시릴 만큼 강철민의 광신도인 곽부장을 힐끔 본 한민선의 속은 오늘도 그렇게 썩어 들어간다.

* * *

겨우 화살 놈과 암수 녀석을 처리한 나는 손을 가볍게 풀었다.

뒤쪽에서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턱을 매만졌다.

'이 녀석들 어느 장소로 날 유도 시키고 있네.'

아무리 게임을 오랫동안 했다 한들 이들은 일반인.

이런 식의 작전에 능숙할 리가 없다.

지금도 두 명이 당하자 당황한 눈치지 않는가.

'신력은.'

완전히 회복되려면 아직 좀 더 시간이 걸린다.

오러에 비하면 회복력이 훨씬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건 좀 귀찮구만.'

오러와 비슷하게 만들 거면 성능도 아예 똑같이 만들어 줄 것이지.

어정쩡하게 닮게 만들어서는.

"야, 줄 거면 스킬이라도 좀 줘 봐. 나만 이게 뭐냐? 누가 보면 스킬 없는 게 콘셉트인 줄 알겠네."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