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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벌써 몇 솔이나 지났지만 모럴 하인즈에서 단독 보도한 성매매 스캔들, 아니 이스턴 게이트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다.

불법 슬롯 이식, 브레인 워싱, 다단계, 디바이스 적출 등등 하나같이 자극적인 소재였던 거다.

하물며 음모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피해자가 있다면? 그리고 모든 정황이 드러났다면?

아무도 멈출 수 없는 특급 열차가 출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배후에서 조종한 자가 재벌 3세라는 게 밝혀지면서 재계는 집중 포화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슬롯 이식을 강제하는 연예계의 관행이 진정 올바른지에 대한 심도 있는 의견도 오고 갔다.

수많은 시민 단체가 성명을 발표하며 관련 법규가 보강되어야 한다는 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그렇게 폭풍이 한차례 불었지만 마스톱에 대해 언급하는 기사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메가콥 B&B가 잃어버렸던 방송국 셋을 업어 왔다는 소식만 짤막하게 나왔다.

전후 사정을 아는 가온이기에 물밑에서 극적인 타결이 이루어졌다는 걸 짐작할 뿐이었다.

이스턴은,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본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관계자들은 알게 모르게 남은 혐의와 죄악을 고스란히 그에게 떠넘겼다.

이스턴은 죽기 직전까지 마스톱이 복수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테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쓸데없는 불똥이 튀기 전에 전부 정리해버린 거다.

혹시나 마스톱에서 접근하지 않을까, 하고 경계한 가온이었으나 사건이 일단락될 때까지 그들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한 겁니다만, 괜한 짓이었습니까?"

"아니,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B&B 본사 회장실.

다시 만난 데미안은 어딘가 모르게 친근한 어투였다. 접견실이 아닌 회장실이라는 장소 선정부터가 그러했다.

057 농담 아니야

* * *

"마스톱 내에서도 말이 많았던 것 같더군요. 세를 확장하겠답시고 뒷골목을 돌아다녔다고 하니까요."

어떻게 해서 루카스의 눈에 띈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메가콥의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 아닌가? 어차피 사소한 해프닝 같은 건 없던 일로 할 수 있잖아."

"사건을 만드는 타입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이라서 처리도 할 수 없고 골치가 아팠는데...."

"내가 나타났다는 건가."

그 뒤는 직접 겪은 일이니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무튼 덕분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마스톱에게 압박을 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후속 보도를 준비하는 중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만으로 백기를 받을 수 있었던 거다.

B&B의 권세에 짓눌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접대부를 이용한 자들이 움직이는 걸 염려한 선택이었다. 의혹만으로 심대한 타격을 받는 건 마스톱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간의 치욕을 만회하듯 데미안은 생각하지도 못한 보물을 양도받을 수 있었다.

화성을 대표하는 종편, LOTV에 대한 권리도 그중 하나였다.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선출된 연습생과 계약할 수 있게 된 건 당연지사.

가온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쉽게도 헨델은 결격 사유가 워낙 분명한 만큼 데려가는 게 어렵게 되었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데미안이었으나, 가온으로서는 옳게 된 흐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쿠야를 버리고 갈 때부터 그녀의 밑바닥은 드러난 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어차피 나머지가 결백하다고 해도 비판이 쏟아질 테지."

미스틱 헌드레드를 후원한 건 마스톱이지만 실질적으로 조율한 건 이스턴이었다. 그의 치부가 드러난 이상 그녀들의 진정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래서 일단 미루기로 결정했습니다. 헨델이 빠진 탓에 숫자가 줄기도 했으니까요."

"안타깝게 탈락한 멤버가 있잖아. 그녀로 채워 넣으면 될 텐데?"

"사쿠야 양 말입니까?"

"아마 마스터피스가 될 거야."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 가온이기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미안에게는 생뚱맞은 인선일 수도 있었다. 열변을 토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건 그 때문.

"의외로군요. 가온 씨에게 그러한 제안을 듣다니."

"나야 문외한이니까 괜한 소리를 한 거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아닙니다. 충분히 고려해 봄 직한 인선입니다."

신중하게 고심하는 듯한 데미안을 앞에 두고 가온은 화두를 돌렸다.

"그래서 잡담이나 하고 싶어서 부른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뭐지?"

"아무래도 모른 척하기에는 워낙 커다란 사건이어서 말입니다."

데미안이 검지를 휘젓는가 싶더니, 계좌로 50억 피아가 입금되었다.

"이건 제 소소한 보답입니다."

50억 피아가 소소하다니, 통 한번 크다. 과연 젊어도 회장이라는 걸까.

"회장직에 오르면서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는 해결사라고 불리는 부류도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 거짓말에 능숙한 것도 모자라 게으르기까지 하더군요."

효율과 실력을 중시하는 B&B에서 자란 데미안에게는 상종도 하기 싫은 족속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다른 것 같더군요. 맡길 의뢰가 있다면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호감을 사기 위해 거금을 쾌척했다는 거였다. 실로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었다. 이렇게까지 속내가 훤히 보이면 도리어 시원할 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도의적이지 않은 것만 빼면."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가온은 데미안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 * *

페르난데스의 말마따나, 애비게일의 실종에 대해 파헤치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의뢰였다. 궁극적으로는 메가콥 마스톱과 적대적인 관계에 들어섰고, 메타 휴먼 측의 신경을 건드렸으며, 마피아와 마찰을 빚었던 거다.

그래도, 한 사람의 인생을 구제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 할 수 있었다.

"네 소원대로 애비게일,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은 이제 없어."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걸로 애비게일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라주는 후련한 표정이었다. '이제야 짐을 내려놓아 다행이다.'라고 해야 할까.

가온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모든 미련과 의심을 끊어낸 자의 것이었던 거다. 머지않아, 스스로 삶을 마감할 테지.

기껏 구한 의뢰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 일.

가온은 다른 길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그러지 말고, 새로운 걸그룹 하나 맡아 보지 그래."

"걸그룹 말입니까?"

"메가콥 B&B에서 야심 차게 준비하는 그룹이 있어. 아마 너라면 어렵지 않게 참가할 수 있을 테지."

현재 활동하는 인기 걸그룹 태반이 오르페우스, 그것도 라주의 작품이었다. B&B도 두 팔 벌려 환영할 터.

"미스틱 헌드레드 말입니까."

그러잖아도 주의 깊게 시청한 방송이었다. 콜롬버스에 갔을 때도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양산된 아이들을 육성하는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군요. 그녀들에게나 저에게나 못 할 짓인 것 같습니다."

"이건 곧 풀릴 정보지만 사쿠야도 합류할 것 같아."

그 한마디에 라주의 반응이 바뀌었다.

"그녀도 말입니까! 그렇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아, 그런데 말이야. 아이돌이랑 사귀는 건 이제 그만둬."

두 번 다시 슬픔은 겪지 말라는 가온의 배려가 느껴지는 것 같아 라주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후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마주한 가온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농담 아니야. B&B에 입사해서 내가 생각하는 아이랑 얽히면 가만히 안 둘 거야."

"...."

"이번 사건으로 내 실력을 보았을 테니,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 믿을게."

가온이 떠나간 자리.

의자에 그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진심인 것 같았다.

* * *

미스틱 헌드레드에서 선발된 5인은 메가콥 B&B의 비호 아래 데뷔했다.

이름하여 미스틱.

이스턴 게이트와 관련된 그룹인지라 모두가 미심쩍은 눈길로 주시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보증 수표가 떡 하니 합류한 거다.

미스틱 헌드레드 7위, 유키하나 사쿠야.

내추럴.

그건 모진 업계를 단신으로 헤쳐왔다는 증거이자, 이스턴의 마수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증표였다.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올라온 그녀의 스토리에 팬들은 열광했다. 이스턴 게이트에 놀란 그들에게 사쿠야라는 존재는 빛이요, 소금과도 같았던 거다.

그녀가 대세로 부상한 건 한순간이었다.

열풍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지경이었다. 고작 몇 솔 전까지만 해도 동정하기 급급한 대상이었는데 말이다.

달라진 건 사쿠야가 아니었다.

달라진 건 그녀를 둘러싼 환경일 뿐.

그래서 가온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일시적인 인기라는 건 자명해 보였으니까. 자극에 메마른 대중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은 것에 불과했던 거다.

진정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지금부터 전력으로 질주해야 할 터.

"절대 기계 장치 따위에는 지지 않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포부를 밝힌 사쿠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서 활보해도 되는 거야?"

언젠가 마주쳤던 24구역의 한 거리.

항공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빙빙 감아 얼굴을 가렸다고 하지만 들킨다면 일대에 소란이 일어날 터.

아이돌로 한창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사쿠야였다. 가온으로서는 이러한 만남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한동안 못 봤잖아요."

"꼭 봐야 하는 사이는 아니다만."

"무슨 말이 그래요?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붙어요, 붙어.

당연하다는 듯이 팔에 달라붙은 사쿠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고마워요. 회사 사장님에게 들었는데 B&B 회장님에게 저에 대해 말한 게 오빠라면서요?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오빠가 추천한 게 부끄럽지 않도록."

"네가 성공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추천한 게 아니야. 그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뿐이지."

"헤헤. 오빠도 정말, 그런 말 하면 간지럽다고요."

발을 동동 굴리면서 연신 등을 두드리는 사쿠야의 손이 유난히도 매서웠다. 기뻐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모를 지경.

화두는 금방 다른 데로 넘어갔다.

패션, 먹거리, 방송에 이르기까지.

사쿠야의 입에서는 색다른 주제가 자판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릴레이 끝에 가온이 도마에 오르는 건 필연.

"오빠도 우중충한 앞머리 좀 열고 관리하면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나이는 지났지."

"한창이거든요."

범인류적인 측면에서 그 말이 허용된다면 저령화 사회가 되리라.

실없는 가정에 가온이 쓰게 웃은 것과 사쿠야가 멈춰선 건 거의 동시.

누가 보아도 잘못을 저지른 아이, 그 자체인지라 가온은 뒤이어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 이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프로필 촬영이 있거든요."

어색하게 웃는 게 디바이스로 메시지 폭탄이 날아온 것 같았다.

"그래, 힘내라고."

사쿠야가 요란스럽게 퇴장한 자리.

홀로 남은 가온이 등을 돌린 순간, 옥외로 홀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고층 빌딩의 옆면을 가득 채운 소녀는 밝게 웃고 있었다.

방금 전과 같이.

* * *

시드 콜로니 외곽, 별도로 마련된 부지에는 비밀리에 운영 중인 수감 시설이 하나 있었다.

편제된 구역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오로지 특별한 수감자를 위해서 마련된 곳이었으니.

일명, 메이즈.

MUG―7에 해당하는 소재로 세워진 이 건축물은 우주전에도 유효한 수준이었다.

그래, 대기권 밖에서 추락한 셔틀이 적중해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엄중한 검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온 화성방위군 소속, 소령 파이퍼 프라이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부에는 무장한 교도관이 항시 순찰 중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진동 감지 센서, 벽에는 장애물 감지 센서, 천장에는 25mm 개틀링 기관포가 설치된 상태였다.

설령, 모종의 방법으로 위에 서술한 방범책을 피할 수 있다고 해도 난관은 남아 있었다. 메이즈는 그 이름대로 1시간마다 격벽을 이동시켜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올바른 장소로 가려면 중앙 통제실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어찌 보면 과한 조치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수감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천 명을 학살한 테러범부터, 콜로니의 전복을 꾀한 사상범, 그리고 초대형 데이터 센터를 해킹하려 한 튜너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악독한 죄수들이었다.

베테랑인 파이퍼로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장소였다. 하물며 그가 목표로 하는 곳은 심부 중의 심부.

경계를 넘을 때마다 따라붙는 교도관의 수가 늘어났다.

이윽고, 마지막 절차를 밟은 파이퍼는 홀스터의 잠금을 해제했다.

사방에서 감시할 수 있도록 투명한 합금으로 제작된 독방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사상 최악의 죄수, 아말 캄.

마른 송장처럼 비쩍 마른 노인을 내려다본 파이퍼는 침음을 흘렸다.

사지는 구속된 채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커넥터가 씌워 있었다.

그래, 아말의 정신은 현재 메이즈가 구현한 가상 현실 안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곳은 천국이 아니었다.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죄만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노괴는 어떠한 시술도 없이 세월에 저항했다. 이 꼴로 수감된 지 벌써 백 년이나 지났건만, 죽지 않고 건재했던 거다.

"풀어 줘라."

058 그래, 역시 그렇게 된 거였나

* * *

아말의 뒤로 걸어간 교도관들은 그의 사지를 속박한 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천천히 안면부에 장착된 고글형 단말기를 벗겼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졌던 아말이 정신을 차린 건 한 박자 뒤.

오랫동안 억류된 탓에 머리는 산발이고, 복장은 추레했지만 두 눈동자만큼은 별빛처럼 빛났다.

"정신을 기계 안에 격리해 봤자 변하는 건 없네. 나는 나로서 존재할 따름이니까. 먼 옛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네, 괴로움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난데없는 설법에 당황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 숙지했던 거다. 아말이 이러한 인종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제 괴로움이 집착에서 비롯된 것과 그 집착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거네. 삶, 관계, 육신, 건강, 이 세상에 태어나 저절로 씌워진 개념의 굴레에 얽매인다는 건 스스로 고통을 자처하는 꼴이니, 진정 깨닫고자 하는 자라면 모든 것에서 탈각해 열반에 다다라야 하네."

대청마루에라도 앉은 듯 편안하게 벽에 등을 기댄 아말이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이곳에 갇혀 평생 나갈 수 없다고 해도 조급해할 이유가 없지. 삼라만상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그건 인간사도 마찬가지. 그래, 자네가 이곳에 왔듯이 말이네."

심중을 꿰뚫는 듯한 안광이 쏘아졌지만 파이퍼는 무시로 일관했다.

"죄수 번호 0001. 맡아 줘야 할 일이 있다."

"또 '의뢰'인가."

"긴급을 요하는 사안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말이 파이퍼에게 다가갔다. 남자치고는 작은 체구지만, 연륜에서 비롯된 기백은 좌중을 압도했다.

발작을 일으키듯 교도관들이 총기를 꺼낸 건 한순간.

사방에서 총부리를 들이댔지만 아말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이, 진정들 하게. 오랜만에 만난 친우가 놀라지 않나."

"죄수 번호 0001, 주제를 알아라."

"'그때'는 조금 더 젊은 것 같았는데 말이야. 여전히 바깥세상은 복잡하게 돌아가나 보지?"

그때.

16년 전 그날을 떠올린 파이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말의 두 팔을 뒤로 꺾어 거칠게 수갑을 채운 건 당연지사.

"너도 그때와 다르게 말이 많군. 설법과 다르게 홀아비 생활이 괴로웠나 보지?"

곧장 아말을 끌고 나가자, 주위로 수많은 인원이 달라붙었다.

파워드 아머에 탑승한 인원이 넷.

기관단총을 장착한 사수가 넷.

그리고 파이퍼의 곁에 밀착한 교도관이 둘.

경호 인원만 해도 열에 달했다.

넓은 통로를 가득 채울 정도였지만 이것조차 파이퍼는 미진하다 느꼈다.

다섯일 시절에는 방심하다 넷이 죽었으니까.

이는, 1급 기밀로 여태껏 한 번도 유출된 적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도 파이퍼가 알고 있는 건 그가 최후의 생존자이기 때문.

그래, 저번에 아말의 먹잇감이 된 건 그의 동료들이었다.

얌전하다고 해도 아말은 죄수.

그것도 상종하지 못할 맹수였다. 허허롭게 웃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그래서 신속하게 밀실까지 압송했다.

설계상, 메이즈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지하에는 특수한 용도로 개조된 커넥터가 있었다.

이나토미 코퍼레이션에서 생산하는 의료용 포드처럼 생긴 장치.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제작한 물건이었다.

익숙한 몸놀림으로 그 안에 들어간 아말이 물었다.

"이번에는 몇 년짜리인가?"

"50년."

* * *

이사벨라 공립 대학 교수, 프레스턴 칼릭스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 심혈을 기울인 논문이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는 만큼 그의 일상은 연구와 실증의 연속이었다.

차량에 탑승한 프레스턴은 자율 주행 모드를 실행한 뒤, 곧바로 눈을 감았다. 집까지 고작 10분 거리지만 자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위화감을 눈치챈 건 첫 번째 신호등에서. 분명 직진해야 하건만, 우회전했던 거다.

집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었다. 교통 체증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현재 시각은 2시 35분이었다.

그것도 오후가 아니라 오전.

무언가 잘못되었다.

얼른 차를 멈춰 세워, 수동 조작으로 변경한 프레스턴은 운전대를 잡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벌써 수백 미터는 온 것 같았다.

명멸하는 전조등 사이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

예고도 없이 나타난 이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프레스턴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정면을 응시했다.

네온사인처럼 은은하게 발광하는 레인코트.

뒤집어쓴 후드 사이로 헬멧이 두드러졌다. 인상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바이저에는 문신처럼 새겨진 홀로그램이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었던 거다.

야차나 해태를 데포르메한 걸까.

위압적인 외형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택티컬한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착용식 전신 강화복.

프로텍트 기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묘한 대치는 길지 않았다.

평행을 이루는 저울추를 기울이고 싶은 건지 상대가 돌연 태도를 꺼내 든 거다.

그걸 보고도 그 뒤에 이어질 사태를 연상하지 못한다면 멍청이와 다를 게 없었다.

서둘러 후진한 프레스턴은 방향을 틀면서 공찰에 신고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왜...."

하지만 통화권 이탈이라는 메시지만 이어졌다. 일련의 상황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건 당연지사.

입술을 깨문 프레스턴은 하염없이 액셀을 밟는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 명만 따돌린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서였다.

순간, 거친 쇳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사이드 미러로 상대를 확인한 프레스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간과 기계.

분명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건만 상대는 당연하다는 듯 따라왔다.

문명 이기의 힘을 빌려서.

파지직.

상대의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스파크가 튀어 올라 하나의 선을 이루었다. 전자기력에 의한 반발을 이용해 가속하는 기술, 자기 부상.

거대 열차에나 쓰일 법한 장치가 상대에게 내장되어 있었다.

개인에게는 과분한 수준.

어떠한 세력이나 단체가 배후에 있을 게 분명했다.

계기판을 보니 200km/s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거리는 점점 더 좁혀졌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프레스턴은 구석에 있는 버튼을 하나 눌렀다.

그가 운전하는 차량은 일반적인 제품이 아니었다.

PAV(Personal Air Vehicle).

흔히 비행차라 불리는 이동 수단으로, 수직 이착륙까지 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오래전, 교수가 된 기념으로 구입한 프레스턴의 일생 처음이자 마지막 사치였다.

다만, 몇 번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관련 기능이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기이잉.

양력이 발생한 건 한순간. 차체가 중력을 거스르고 비상하고 나서야 프레스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리 탑재한 기능이 많기로서니, 하늘까지 쫓아오는 건 무리라 예상했던 거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대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쿵.

날았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파격적인 도약.

그 비범한 운동 능력에 프레스턴은 입을 벌리면서도 운전대를 돌리는 걸 잊지 않았다. 허공에는 발판이 없으니 한 번만 피하면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거다.

하지만 상대가 한 발 더 빨랐다.

태도를 장대 삼아 프론트 도어에 찔러넣었으니까.

운전석에 가느다란 틈이 생겨난 건 필연.

"크헉."

허벅지를 뚫고 들어오는 날붙이에 프레스턴은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글러브 박스에서 권총을 꺼냈다. 방금 전에는 사격 거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이렇게나 가깝다면 반격 정도는 할 수 있을 터.

칼날이 들어온 방향으로 상대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프레스턴은 방아쇠를 당겼다. 적어도 위협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하지만 그 기대는―

팅.

메마른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상대가 패용한 태도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

"쌍검?"

그리 읊조린 순간, 프론트 도어가 큐브 스테이크처럼 조각 났다. 상대와 가까워진 건 한순간.

"나는 지난날의 과오이자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 자네는 세상을 속였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세상은 속지 않았네."

홀로그램 헬멧 사이로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상대의 나이가 헤아릴 수 없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어투가 아니었던 거다.

"다만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뿐. 걱정하지 말게. 방금 자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사람은 전부 불귀의 객이 될 테니."

"그래, 역시 그렇게 된 거였나."

제 마음속을 읽은 듯한 말에 프레스턴은 두 눈을 감았다. 진실을 깨닫자마자 저항하는 게 부질없게 여겨진 탓이다.

두 개의 태도가 허공을 수놓은 순간, PAV가 폭발했다.

* * *

사건 현장에 도착한 진건은 반파된 PAV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한 품명은 오르트 NO.9.

메가콥 R&C에서 제작한 명품이었다. 구형이지만 우주선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디자인이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고 들었다.

"피해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프레스턴 칼릭스, 이사벨라 공립 대학의 교수라고 합니다."

이라이의 보고에 진건은 침음을 흘렸다. 그가 여기에 온 건 보안관으로서 활동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무언가에 빨려들어 가듯이 우그러진 프론트 도어를 내려다본 진건이 입을 열었다.

"양후가 남기는 흔적과 유사하군요."

"수집한 자료와 대조한 결과 68퍼센트 일치한 걸로 나왔습니다."

"애매하군요."

좌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붙잡고 있을 수만도 없는 수치였다. 무엇보다 범행 도구가 흥미로웠다.

"단분자 블레이드. 군의 통제에서 벗어난 게 있습니까?"

"분실했다는 신고는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간 게 몇 개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사양은 없을 겁니다."

"그 당시 가온 씨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택에 머물렀던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그가 받은 의뢰와 프레스턴 교수가 얽혀 있을 가능성은요?"

"지극히 낮습니다. 지난번에 완수한 의뢰가 만족스러웠던 건지 요 근래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도의적이지 않은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걸요."

그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나 발전된 검술을 사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PAV가 지나온 길 뒤로 스키드 마크가 새겨져 있지 않던가.

이라이도 그 점이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정보를 일부러 드러냈다는 게 미심쩍습니다. 그것도 무고한 자를 죽이면서까지. 어쩌면 모방범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 판단하기엔 이릅니다. 여기에 왔다 간 게 양후인지, 그리고 프레스턴 교수가 진정으로 무고한지."

주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진건에게는 익숙했다. 더구나 사건 현장에는 냄새가 가득했다.

그래, No.1 돔에 있을 때부터 항상 맡아 온 냄새.

바로 음모의 냄새였다.

059 좋은 곳으로 갔어

* * *

* * *

하늘 끝을 가리키던 가검이 땅바닥으로 내려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25시간.

"후우."

어제 새벽부터 시작된 수련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항상 죽는 걸 전제로 싸워온 가온이었다. 불로불사는 그만이 지닌 특장점이었던 거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활용하지 않는 건 우둔한 짓.

하나, 신분을 얻은 뒤로는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품새를 새로이 조정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전제를 뒤집어보니, 깨닫는 게 많았다.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 거다.

여태까지 멈춰 있던 경지가 미약하게나마 전진한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일.

머지않아 형태가 고정될 것도 같았다.

더 이상 고류 무술이라고 간결하게 칭할 수 없을 정도로.

여태 무명이었던 건 가온의 의사가 십분 반영된 결과였다. 명칭을 부여한 순간, 변질될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거다. 그때 당시만 해도 가온은 기어가는 방법도 몰라 헤매는 애송이 그 자체였다.

노승이 가르쳐 준 무예가 지향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 혼자서 함부로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모두 자기 확신이 없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팔을 뻗으면 손에 잡힐 듯 확고한 구상이 떠올랐으니까.

앞으로 한 걸음.

그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수련이 즐거운 건 수십 년만인지라 가온은 식음을 전폐한 채 두문불출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였다.

본격적으로 연구에 사용할 안드로이드도 구입해야 하고, 지난 전투에서 파손된 장비도 새로 구해야 했으니까.

때맞춰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주기적으로 방문해 기꺼이 가사도우미 역할을 수행해 주는 만능 안드로이드, 세라.

두 손을 가슴에 모은 그녀가 고했다.

"도비 도련님은 천재입니다."

"머리 괜찮냐?"

* * *

소파에 앉은 세라가 품속에서 스마트 기기를 하나 꺼냈다. 카드처럼 납작한 장치의 뒷면에는 카메라가 여럿 달려 있었다.

그 기기가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려놓기가 무섭게 홀로그램이 떠올랐던 거다.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순진무구한 미소.

실제 크기의 7분의 1도 되지 않건만 마치 거기 있는 것만 같은 현실감이 느껴졌다.

실제 질량 홀로그램.

그래, 세라가 가져온 건 휴대가 가능하도록 개량한 투영기였다.

"프로브라고 합니다. 도비 도련님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물품이죠."

"흥미롭네."

아무도 모르게 온 손님, 도비가 손을 흔든 건 그때.

"오랜만!"

"엊그제 게임에서도 만났다만."

"그것도 그러네."

레이드는 빠지지 않고 참가하는 가온이었으니, 적어도 주에 한 번은 만나는 두 사람이었다. 새삼스레 인사할 것도 없다는 소리.

"여기가 네 집이구나?"

세상 밖으로 나온 도비는 신기한 듯이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물론 그렇게 행동한다 뿐이지, 실질적인 감각을 대신하는 건 프로브에 내장된 렌즈와 센서였다.

"근데 이게 맞아? 내 방보다 조금 작은 것 같은데."

"어이, 내 보금자리를 폄하하지 마."

"아, 미안. 그럴 마음은 없었어. 왜 이런 곳에 사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아무래도 온실 속에서 사는 도련님은 일반적인 서민의 삶을 이해하는 게 어려운 것 같았다.

"그래서 도비가 천재라는 건 무슨 소리야?"

"무한 터널 검사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대충은."

다이버로서의 적성을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가 무한 터널 검사였다.

두뇌를 연산 장치로 활용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라는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세계와 마주했을 때 어떠한 화학 반응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뜻.

무한 터널 검사란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 대상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는 일체의 과정을 뜻하는 말이었다.

정보의 바다를 얼마나 헤쳐나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지표라고 해야 할까.

"도비 도련님의 점수는 995점. 이론상 최고 점수입니다."

"그건 의외네."

세라가 답지 않게 연신 경탄했지만 가온은 보수적으로 접근했다. 재능과 능력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단어였던 거다.

하물며 풀다이브는 홀로 깨우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필수였으니까.

재능이 충만했던 절친 토마스조차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어서야 정점에 오를 수 있었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고된지 말할 것도 없었다.

가온의 속내를 읽은 도비가 서운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믿지 못하는 눈치네."

"열성적인 헬리콥터 맘이 붙어 있어서 말이야."

"누가 헬리콥터 맘입니까. 도비 도련님은 의욕만 없었지, 한 번 마음만 먹으면 1등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세라. 날 그렇게 보고 있었구나."

"아니, 아닙니다. 도련님."

세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비가 훌륭한 다이버로 성장하는 건 예정된 사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과연 그는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시험 삼아 가온은 요구 사항을 몇 개인가 입에 담았다.

"내 집 앞에 사거리가 있어. 요 한 달간 통행 정보를 보고 싶은데. 움직였던 거라면 전부. 차와 사람, 지나가는 동물도 빼지 말고."

"한번 해 볼게."

순간, 도비의 주위로 수많은 창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이버가 정보를 가공하는 방법은 총 셋.

수집, 정리, 해석.

중요도 또한 위에 서술한 순서대로였다. 어떻게든 찾아내는 게 첫째요, 특정한 조건에 맞춰 나열하는 게 둘째, 암호를 푸는 건 마지막이었다.

수집과 정리가 선행되면 해석은 다른 사람에게 요청해도 되었던 거다.

물론 세 요소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만큼 어느 것 하나만 특출나게 잘하는 유형은 거의 없었다. 대성하려면 모두 고르게 경험을 쌓아야 했던 거다.

가온이 다이브가 어렵다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다 끝났어."

"벌써?"

"공찰에서 관리하는 CCTV는 실시간 교통 정보를 알려 주는 사이트를 통해 우회했고, 블랙박스는 보안이 취약한 차량만 골라서 수집했어. 그리고 부족한 부분은 위성 사진으로 대체했어."

"위성?"

뜬금없는 단어에 가온이 당황하자 도비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응? 말하지 않았던가? 맥시멈 노이즈에서 운용 중인 위성이 몇 개 있거든. 그중 하나를 빌렸어."

그러고 보니 게임 제작사 전에는 통신사로 이름을 날렸다고 했던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가온이었다. 범인류적으로 돈을 쓸어 담는 회사는 노는 물도 다른 듯했다.

디바이스를 통해 말했던 정보가 들어온 건 그때.

가온이 주목한 건 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길이었다.

차종이 바뀌고 인원이 변경되어도 그곳만큼은 주차 공간이 비지 않았던 거다. 마치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흠, 역시 감시하는 인력이 있었나.'

진건이 보낸 요원들이 틀림없었다.

나가서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금세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혐의가 풀려서 그런 건 아닐 터.

아마 커다란 사건이 터진 것 같았다. 대기하던 인원도 빼야 할 정도로 커다란.

"어때? 이 정도면 다이버라 자청해도 될 것 같은데."

칭찬을 바라는 듯한 도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가온은 무난하게 답했다.

"나쁘지 않아."

솔직히 말하자면 깜짝 놀랐다. 한 달 남짓한 시간에 이만큼이나 성장한 건 이례적이었으니까.

처리 속도도 독보적이었다.

재능이라는 말로 속단하기에는 꺼림칙할 정도.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까?"

"내가 하는 일?"

"그래. 해결사는 아는 다이버가 한 명쯤은 있다면서?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다이버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일은 하지 않아."

"그래? 이스턴 게이트, 네가 터트렸다면서?"

평생 아니마 안에서 지낸 도비가 알 수 없는 정보였다.

한숨을 내쉰 가온이 세라를 바라보았다.

"미스 시리."

"그러니까 돈은 제때 갚아야 하는 겁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정보를 풀었지 않습니까."

세라가 가진 돈을 밑바닥까지 긁어 빌려 간 전적이 있는 가온으로서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나를 도와주는 건 좋지만 그걸 게임처럼 여길까 봐 걱정이야."

숨겨진 소질이 밝혀진 지금,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 터. 하물며 뒤에는 맥시멈 노이즈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 않던가.

"현실은 그렇게 즐겁지도, 아름답지도 않아."

어느새 홀로그램으로 의자를 구성한 도비가 그 위에 앉았다.

"좋은 것만 눈에 담고 싶었다면 로스트 사가에 박혀서 5대 경관이나 보고 있겠지."

입가에 미소를 지운 도비가 덧붙였다.

"언제까지나 도련님으로 살 수는 없잖아? 그러니 나를 불러 줘. 적어도 네가 구해 준 보답은 할 수 있게."

* * *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지만,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조금 고심해봐야 할 것 같았다. 도비는 나름대로 각오한 것 같지만 그래도 순서라는 게 있지 않은가.

생각을 정리한 가온은 34구역 외곽에 위치한 총포사, 밀리터리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여느 때처럼 담배를 씹어먹을 듯 피우고 있는 올리버가 보였다.

"미스터 트리거 해피."

"또 윈도우 쇼핑인가?"

"아니, 오늘은 달라."

프로듀서 라주에게서 받은 보수와 별개로 메가콥 B&B의 회장, 데미안이 주머니를 열었던 거다. 수중에 꽤 많은 돈이 있었다.

"IVOD 하나 줘. 300이 아닌 500으로."

가온이 부른 건 보급형 라인이 아니라 플래그십 라인이었다.

MUG―1을 탈피했다 할 수 있으나, 2에는 다다르지 못한 비운의 작품.

레조넌스와 부딪치고도 형체를 유지했으니 품질은 입증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도 가온은 한참 동안이나 사지 못했던 물품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혹시, 블랙...."

반사적으로 지구에서 애용했던 도검류 통합 관리 보관함, 블랙 스미스를 입에 담으려던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돌발 상황에 대비해, 구입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괜히 진건의 눈에 띄었다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지양해야 했다.

"아니, 그것보다 총기 좀 봤으면 하는데."

"클락은 어쩌고?"

"좋은 곳으로 갔어."

"흐음, 명복을 빌지."

향 대신 담배 연기를 뿜은 올리버가 합장했다.

"추천할 건 많다만, 일단 총알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겠지. 그래,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지?"

"최대 5억."

"호오, 크게 나왔군."

총포상으로서의 자질을 시험받는 듯한 금액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콜렉터가 아니라 해결사. 외형이 아니라 오롯이 기능에 치중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

거기에, 특별함을 한 스푼 더해야 했다.

장비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세계였으니까.

"마침 생각나는 게 하나 있군. 아마 네 취향에 부합할 거다."

창고에 들어갔다 나온 올리버가 가온 앞에 밀폐된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2년 전에 발매된 녀석이지만 요즘에 나오는 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지. 콘셉트는 훌륭했지만 단가 문제 때문에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어서 단종되었거든. 마침 가격도 네가 말한 것과 비슷하다."

덮개가 열리면서 내용물이 드러난 건 한순간.

고개를 내린 가온은 시선을 빼앗겼다. 올리버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걸로 할게."

060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지 마

* * *

* * *

전과 다르게 고가의 장비를 갖춘 가온은 새로운 기분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물론 극적으로 변한 건 없다시피 했다.

애당초 뒷세계에서 해결사를 고용할 정도로 절박하다면 으레 이명이 붙은 이를 찾는 법.

가온도 이스턴 게이트를 통해 그러한 효과를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메가콥이 정보를 통제하면서 관련 사건은 축소, 은폐되었다.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루카스는 시정부 소속 요원, 진건이 데려가고 할드는 마피아가 흔적도 없이 처리했으니까.

전적으로 삼을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알음알음 이름이 알려지고 있다는 게 페르난데스의 설명이었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체급이 커졌다는 실감이 들긴 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의뢰를 맡기려는 의뢰인은 없어 대부분 단발로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콜롬버스에서 한잔하면서 하루를 털어내는 게 어느새 일과가 되었다.

페르난데스와 잡담을 나누는 건 필연.

주제는 여러 가지였다.

보기와 다르게 박학다식한 페르난데스는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아직 화성 생활이 익숙하지 않은 가온에게는 좋은 멘토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의뢰에서 마주친 마피아를 언급하게 된 것도 그 연장선.

익히 아는 사람인 듯 페르난데스는 인상착의를 듣자마자 기함을 토했다.

"타이런트와 싸웠다고?"

"타이런트? 이명인가 보지? 그럴듯해."

당시에 느꼈던 감상을 한 단어로 축약해놓은 것 같아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건가?"

"마치 죽는 게 당연한 말투네."

"설마 타이런트가 누구인지 모르나?"

"누군데 호들갑이야."

가온의 물음에 페르난데스가 입을 열었다.

이명, 타이런트.

본명, 오웬 커밍즈.

시드 콜로니를 4등분 하는 거대 암부 중 하나, 루케시아 패밀리의 간부로 차기 보스에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본인부터가 극렬한 무투파로―

"접근전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

"하긴 그럭저럭 강하긴 했지."

그래 봤자 민간인이었다. 화성방위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도망쳐야 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화력만 투사하는 병기와 부딪친 적도 있는 가온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소개였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선물해 준 장비가 그때 도움이 되었어."

"그렇다면 다행이군. 괜한 참견이 아닐까 했지만 그래도 신경 쓴 보람이 있구먼그래."

"그보다 블랙마켓 건은 어떻게 됐어? 조금 더 증명해야 할 게 남아 있는 거야?"

"그건...."

페르난데스가 답하려는 순간―

"칭찬이 박하군, 해결사."

어깨에 코트를 걸친 남자가 가온의 옆에 앉았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긴 그는 자유분방한 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야성미가 넘치는 남자, 오웬의 등장에 가온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하니 먼저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던 거다.

물론 경악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루케시아 패밀리의 간부라면 이제 막 시드 콜로니에 발을 디딘 해결사를 찾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그러니 묻는 건 어떻게가 아닌―

"왜 온 거지?"

"술집에 오는 이유는 두 가지뿐이지. 하나는 좋은 인연을 만나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공짜 술을 마시기 위해."

"나 보고 사라는 건 아니겠지?"

"박정하게 굴지 말라고. 이번이 아니면 나중에 사 주고 싶어도 줄을 기다려야 할 테니까."

괜스레 친근하게 구는 오웬이 못마땅한 가온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만도 없는 법.

"다음에는 네가 사라."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가온의 허락이 떨어지자 페르난데스를 향해 오웬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멕켈란, 온더락으로."

"알았네."

페르난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오웬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블랙마켓에 입장하고 싶다고?"

두서없는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저의를 모를 가온이 아니었다.

그간의 행적이 고스란히 읽힌 거다.

그것도 가장 얽히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가온은 글라스를 들고 온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았다. 정보가 새어나갔다고 한다면 의심할 사람은 한 명뿐이지 않던가.

"나는 아니네. 자네와 그런 일도 있지 않았나. 평생 교훈으로 새긴 참이네."

"어이,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이 자리에 있다 보면 여러 풍문을 듣기 마련이니까."

"네가 할말은 아닌 것 같은데."

"크큭, 그것도 그런가."

유쾌하게 웃은 오웬이 글라스를 잡자, 유난히도 빛나는 의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공진 유도 붕괴 장치, 유닛 레조넌스.

그 위력은 저번에 견식한 바 있었다. 건물이고, 도로고 모래성처럼 흩어졌던 거다. 지금이라도 오웬이 마음을 바꾼다면 콜롬버스는 오늘로 장사를 접어야 할 터.

"그렇게나 열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몸이 달아오르지 않나. 너도 그날 밤이 기억나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안심해라, 나는 함부로 주먹을 쥐지 않으니까. 그건 멋이 없지. 마피아가 아니라 왈패와 다를 게 없으니까."

"어차피 같은 말일 텐데?"

"내가 다르게 구분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

오만한 사내였다. 골치 아픈 건 그럴 만한 실력자라는 것.

혀를 짧게 차기가 무섭게 디바이스로 출처가 불분명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눈앞의 오웬이 보냈다는 건 명약관화.

"우리, 루케시아 패밀리가 운영하는 블랙마켓에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이다. 자랑 같아서 내 입으로 말하는 건 그렇지만 이곳에서 오래 활동해도 구하기 어려운 거라고?"

시드 콜로니의 음지를 넷으로 나누는 조직이라면 믿을 수 있을 터.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데스가 못 이긴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발품을 팔아도 그것보다 더 나은 걸 구해 올 자신이 없네."

"네가 신뢰하는 중개업자도 저리 말하지 않나."

다분히 의도적인 접근.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선물을 들고 온 마피아의 속셈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지 마. 실컷 즐기다 도망칠 테니까."

"화해의 표시라고 생각해라. 나 때문에 장비도 부서졌지 않나."

"퍽이나."

* * *

15구역은 번화가였다. 유통과 산업 그리고 문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이사벨라 공립 대학을 중심으로 탄탄한 학군이 형성되어 있어, 상류층의 공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경관 또한 수려했다.

수채화로 그린 듯한 도로와 청명한 하늘이 어우러져서 겨울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너나 할 것 없이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래, 지하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기 오기 전, 초대장에 적힌 장소를 확인한 가온은 잠시 눈을 깜빡여야 했다. 가당찮게도 음지 세력이 가장 피해야 하는 장소에서 블랙마켓이 개최되었던 거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공찰을 기만하는 측면에서는 이만한 전략도 없었다.

물론 루케시아 패밀리 같은 경우에는 아예 작정하고 벌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말이다.

그건 오·폐수 처리장으로 가는 하수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물기는커녕 건조한 게 천장만 막히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길로 오해할 지경이었다. 그 흔한 악취도 나지 않았다.

본래 기능과 다르게 활용되고 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

부정부패의 온상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벌써 몇 분째 걷고 있는 가온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쾌적하게 주위를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막다른 골목길에서 다다른 가온은 초대장에 첨부된 엑세스 코드를 컨트롤 패드에 입력했다.

격벽이 돌아가면서 숨겨진 공간이 드러나는 건 한순간.

그 끝에는 엘리베이터가 대기 중이었다. 모든 정황이 딱딱 떨어지니 모험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하물며 오면서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아마 날짜마다, 그리고 참석자마다 출입구를 따로 배정한 것일 터.

그러한 예상은 깊숙한 지하로 내려와 외길을 걸을 때 더욱더 명확해졌다. 다른 곳으로는 새지 못하게 구조적으로 막혀 있었던 거다.

다만, 벽 너머에서 낯선 기척이 다수 느껴졌다. 아마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서로의 경로를 제한한 것이리라.

밖에서는 철천지원수라고 해도 여기에서는 평범한 손님으로 지내라는, 루케시아 패밀리의 방침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어차피 경매에 참여하고 싶다면 조용히 격리 부스에 들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간 가온의 눈에 비친 건 커다란 스크린이었다. 좌석 옆에는 상품을 보다 면밀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홀로그램이 떠올라 있었다.

자리에 앉은 가온은 카탈로그를 불러왔다.

그가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은 50억 남짓.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상, 예상외의 소비는 지양해야 했다.

그렇게 예정된 시간이 다가오자 무미건조한 경매가 시작되었다.

온전히 구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된 만큼 진행 속도가 남달랐다. 겨루기라도 하듯 수많은 물품이 낙찰되고 유찰되었던 거다.

칩, 프레임, 바디, 암, 레그, 모듈을 포함한 불법 슬롯 일체와 회사의 사정으로 인해 완성 단계에서 폐기된 특수 유닛, 그리고 위험하지만 보다 개량된 유전자 조작 따위가 대표적인 예였다.

그중에는 화성방위군에서 흘러나온 장비도 몇 개인가 있었다.

군용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대개 한 세대는 가볍게 뛰어넘는 성능은 보여주는 만큼 가온도 흥미롭게 보았지만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락된 안드로이드가 없어?'

여러 형태로 개조된 개체가 출품되었으나 그중에서 진정 자유를 얻은 녀석은 없었다.

돈만 내면 들어갈 수 있는 블랙마켓이라면 납득할지도 모른다. 영세한 만큼 그때그때 선보이는 게 다를 테니까.

하지만 이곳은 루케시아 패밀리가 직접 주관하는 거래의 장이었다.

품질부터 품목까지 모자람 없이 관리했을 텐데도 이 결과.

혹시나 싶어 콘솔로 검색해도 나오는 매물은 없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리 판단한 순간, 덜컥 문이 열렸다.

예상치 못한 이변이었으나 가온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상대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 특유의 체취가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으니까.

"미스터 타이런트."

뒤를 돌아본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오웬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 한 사람이 기립해 있었던 거다.

당연하지만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무력시위냐? 딸랑이까지 데리고."

"딸랑이라고?"

욱한 청년이 나서려고 하자, 오웬이 팔을 들어 제지했다.

"갑작스레 방문한 건 사과하지. 하지만 초대한 손님을 홀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런 말은 진수성찬이라도 차린 다음에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날이 서 있는 걸 보니 마음대로 경매가 풀리지 않나 보군."

당당하게 가온의 옆자리를 차지한 오웬이 덧붙였다.

"살 만한 게 없었나 보지?"

"듣던 것과 다르게 빈 수레여서 말이야."

"무엇을 찾길래 그러지?"

061 듣고 나서 결정하지

* * *

그 물음에 가온은 잠시 고민했다. 오웬이 호의적이라고는 하나 쉬이 속내를 드러내기는 꺼려졌던 거다.

말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동맹부터 배신까지, 여러 경우의 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차피 여기에서 구할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도 구할 수 없다고 봐야 했던 거다. 차라리 결정권자에게 향방을 묻는 게 효율적이었다.

위험이 부담된다고 저어한다면 얻을 것도 얻지 못한다는 건 그간의 경험을 통해 질리도록 체득한 가온이었다.

결심과 동시에 시야 끝에 청년이 걸렸다.

가온의 심정을 읽은 오웬이 손짓했다.

"잠시 나가 있어라."

"알겠습니다."

청년이 나간 뒤, 가온은 품속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건 반향된 소리를 사방으로 쏘아 내 특정 공간의 소음을 차단하는 장치, 캔슬러였다.

"난리도 아니군. 대체 뭘 원하길래 그러지? 이사회에 소속된 이의 유전자 정보라도 구하나?"

"언락된 안드로이드."

순간, 멈칫한 오웬이 무릎을 탁하고 쳤다. 그제야 가온이 조심한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언락된 인공지능도 아니고 언락된 안드로이드라. 너, 이런 분야는 서툴군."

"그게 무슨 소리지?"

"언락된 걸 구한다면 안드로이드보다 인공지능이 훨씬 나으니까. 혹시 둘의 차이를 알고 있나?"

가상 세계에 구현된 알고리즘의 집합체가 인공지능이라면 안드로이드는 전신 의체에 그러한 자아가 깃든 걸 의미했다.

거기에 변주를 가미해 인공지능 대신 두뇌가 들어간 게 사이보그였고. 이는, 우주여객선에서 마주친 광신도 지네스를 떠올리면 쉬웠다.

공식으로 비유하자면―

전신 의체+인공지능=안드로이드.

전신 의체+두뇌=사이보그.

"이러한 흐름인 건 알고 있는데."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군. 그런데 왜 안드로이드를 고집하는 거지? 안드로이드는 전신 의체를 통해 들어오는 감각까지도 계산해야 하니 전체적인 리소스가 줄어드는 것을."

여태 생각하지도 못한 관점이었다.

"인공지능 제한법을 어기면서까지 안드로이드를 구입하는 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는 거네."

"부담해야 하는 위험에 비해 효용은 낮지. 네가 어떠한 곳에 활용할지 몰라도 단순 잡무는 아닐 테니까."

갑작스레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는 오웬이었지만 가온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웬 또한 대답을 바라고 지른 게 아닌 만큼 능청스럽게 화두를 돌렸다.

"그리고 안드로이드와 다르게 확장이 용이하거든, 인공지능은."

"더 자세하게."

"현재 안드로이드에는 실리콘 기반의 무기체 프로세서가 쓰이고 있지. 아쉽지만 아무리 잘 쳐줘도 인간의 인지 능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인공지능의 한계라기보다 구현 기술의 한계였다.

인공지능에게 영감은 없다.

그게 중론이자 상식이었다.

무의식적인 재치가 아니라 의식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계산해야 했다.

'무한 원숭이 정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작정 대입해서 연산할 뿐이니까.

인공지능이 경이롭다 여겨지는 이유는 그 속도였다.

영감의 힘을 빌릴 것도 없이 모든 경우의 수를 마이크로초 단위로 주파해 결과를 도출하니까.

다만, 처리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중앙 처리 장치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소비되는 전력 또한 늘어나는 건 필연.

당연하지만 그건 발열 문제로 이어졌다.

전신 의체에 깃든 인공지능보다 냉각 시설이 완비된 데이터 센터의 인공지능이 월등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인공지능 제한법이 지켜지는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했다. 인공지능을 최대한도까지 활용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수였던 거다.

"완벽한 상온 초전도체가 발명되면 집적 회로에서 발생하는 발열을 없앨 수 있겠지. 자그마한 머리에도 유기체 프로세서를 넣을 수 있는 길이 발견되는 거다."

상온 핵융합과도 연결되는 기술인 만큼 앞으로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리지."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설명을 끝낸 오웬이 목을 축였다.

어딘가 모르게 개운한 표정이었으나 가온으로서는 질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한계를 두지 않으려면 안드로이드보다 인공지능을 구매해 차차 스펙을 맞추는 게 좋다는 거잖아. 이게 그렇게 길게 할 이야기였나?"

"이거 미안하군. 관심이 많은 분야라서 나도 모르게 흥이 난 것 같군."

"얼리어답터, 뭐 그런 거냐?"

"몰랐나? 이 두 팔도 자작이다."

그러고 보면 오웬의 레조넌스는 시중에서 판매 중인 유닛과 형태도 출력도 달랐다.

"웃기지도 않네. 학구열에 불타는 마피아라니."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업계니까."

오웬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나 바람을 잡은 걸 보면 숨겨둔 인공지능이 있나 보지?"

"아, 그거 말이지. 무리다."

"내가 바라는 대답이 아닌데?"

콰직.

순간, 팔걸이를 부러뜨린 가온이 무게 중심을 옮겼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건 한순간.

"그래, 너도 내게 신뢰를 보여 줬으니 나도 네게 신뢰를 보여 줘야겠지."

가온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오웬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언락된 안드로이드가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공찰 측에서 단단히 통제하고 있으니 세간에는 퍼지지 않겠지만 완전히 비상사태라더군."

4대 기본법 중 하나가 흔들리는 상황.

더구나 살인이라니, 공찰이 어디부터 수색할지 눈에 훤히 보였다.

"너희도 눈치라는 걸 보나 보지?"

"집중 단속 기간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으니까. 뒤통수를 맞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괜히 서러워지는 법이다."

"그러면 당분간 인공지능은 물 건너간 건가."

"그리 낙담하지 마라. 너와 나 사이가 아닌가. 내 자그마한 부탁을 들어준다면 언락된 인공지능을 주지. 그것도 우리 패밀리에서 관리하던 특급으로."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가온은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선뜻 초대장을 건네더라니. 다 노리는 바가 있었던 거다.

"예상은 했다만 실제로 마주하니 유쾌하지는 않네."

"아무런 이득도 없이 나만 위험을 부담하라는 건 불공평하지 않나. 그리고 이건 음습하고 악의적인 강요가 아니다. 오히려 정의 구현에 가까울 수도 있겠군."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가온이 아니었으나, 오웬이 호언장담할 정도로 뛰어난 인공지능에는 관심이 있었다.

"듣고 나서 결정하지."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이 거리엔 전자 마약이 돌고 있다."

3차 세계 대전 전에는 두뇌를 자극하기 위해 여러 화합물을 섭취해야 했지만, 지금은 전기 자극만으로 그 배에 달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신체적인 후유증도 남지 않을뿐더러 기술적으로 검출하는 것도 어려웠다.

값이 비싸다는 점만 빼면 전자 마약은 단점다운 단점이 없는 물품이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극강의 의존성과 중독성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새삼스레 거론할 것도 없는 물건이네. 아니지, 너희도 유통하는 게 있을 텐데?"

"내가 말하는 건 신종 전자 마약이다."

"경쟁자 죽이기인가."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나을 텐데 말이야. 디바이스가 BCI를 활용한 기기라는 건 알고 있나?"

"대강은."

Brain–Computer Interface.

뇌와 기계를 직접 연결해서 조작하는 방식 일체를 뜻하는 용어였다.

"신종 전자 마약은 디바이스를 통해 곧바로 두뇌에 들어간다. 별도의 장치는 필요치 않지. 다른 전자 마약은 정밀 검사를 거친다면 원형을 알아낼 수 있지만 이 녀석은 아니다."

"아."

더 듣지 않아도 상상이 되었다.

생체 전기로 동작하는 디바이스는 중추 신경계와 연결되었으니까.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매개체는 없을 터.

활짝 열린 머리에 주사기를 꽂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그 쾌락이 어찌나 강렬한지 새로운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더군."

"새로운 자신이라."

"그 효력에 걸맞게, 붙여진 이름도 에덴이다."

물건을 팔아먹기 위해 주창하는 캐치프레이즈 따위엔 관심 없었다.

"그렇게나 위험한 거라면 공찰에 찌르는 게 더 빠르지 않아?"

"법을 개정하고 집행해야 할 높으신 분들의 자녀가 애용하는 중이다."

"방관한다는 거지."

공찰이 공찰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총대를 메게 되었다."

"해결사를 고용하는 건 너무 얌전한 방식이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어버리지 그래. 그런 건 너희가 더 잘할 텐데."

"패밀리 내부에서도 말이 많다. 수익을 보장해 줄 화수분이 나타났으니까. 경고에도 불구하고 통제에서 벗어나 유통하기 시작하는 녀석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더군."

감소하지 않고 증가했다는 건―

"꼬리를 잡을 수 없었나 보네."

"아마 4대 암부 중 한 곳일 테지."

루케시아 패밀리가 나섰는데도 해결하지 못한 게 그 증거였다. 오웬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의심된다고 해서 휘젓고 다니면 전면전이었던 거다.

"차도살인지계인가."

"앞서가지 마라, 피의 징벌 같은 걸 네게 요구할 생각은 없으니. 너는 어떤 놈들이 유통했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누가 물을 흐리고 있는지 찾아보라는 거지."

"우리가 보기에 녀석들은 선을 넘었다. 가만히 두면 썩을 뿐이겠지, 그것도 함께."

규율을 중시하는 마피아다운 해석이었다.

다만―

"내키는 의뢰는 아닌데. 남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도 취향은 아니고."

가온이 한 발자국 물러나자, 오웬이 검지와 엄지로 자그마한 틈을 만들었다.

"솔직히 요 정도는 네 업보이기도 하다."

"억지 부리지 마."

"패밀리를 탈퇴했던 할드가 에덴의 개발에 참여한 걸로 추정하고 있다. 누가 문답무용으로 죽인 탓에 캐는 게 어려워졌다만."

브레인 워싱 기술에 정통한 리퍼닥의 얼굴을 떠올린 가온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멋쩍은 듯 반응했지만, 그건 페인트.

그 아래에 감춰진 두 눈은 싸늘하게 빛났다.

할드를 비호한 건 루카스였다. 그 말인즉슨, 이번 사건 또한 메타 휴먼 측에서 관여한 걸 수도 있다는 소리.

그들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의뢰를 맡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잘 판단했다."

* * *

퇴장한 가온과 교대하듯이 들어온 청년, 휘트니 쿠퍼가 불만을 토로했다.

"왜 저런 햇병아리에게 의뢰를 맡긴 겁니까."

"크크크. 정말이지 너는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유난히도 귀가 밝은 휘트니라면 캔슬러가 있더라도 엿들을 줄 알았다. 대기하라는 지시를 어긴 거나 다름없지만, 오웬은 대범하게 넘어갔다.

유능한 이를 아끼는 그이기에 베풀 수 있는 자비.

가온에게 의뢰를 맡긴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녀석의 실력을 믿으니까."

"그 실력이라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오웬 님이 진심으로 상대했다면 저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녀석이라고 진심이었을까?"

"...."

"이 바닥에서 가장 빠르게 죽는 녀석은 누구일까. 실력이 없는 녀석? 뒷배가 없는 녀석? 아니, 감이 없는 녀석부터 죽는다."

입가에 미소를 지운 오웬이 휘트니의 가슴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바로 너처럼."

냉정한 지적에 휘트니의 얼굴은 붉어졌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을 뿐.

"내 행동을 보았다면 적어도 추측하려는 태도부터 보여라. 너 혼자 제멋대로 재단하고 결론을 내리지 말고."

062 경험이 끝났을 수도 있겠는데

* * *

"하지만...."

휘트니가 인정하지 못하고 말을 줄였다.

그게 그의 출신에서부터 비롯된 질투와 오기라는 걸 눈치챈 오웬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너도 패밀리에 들어오기 전에는 꽤나 이름을 날렸다고 그랬나."

이명을 지녔을 정도라고 하니, 가온에게 어떠한 경쟁 심리를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너에게도 저 녀석에게 맡긴 것과 똑같은 의뢰를 맡기겠다.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지."

뜻밖의 제안에 휘트니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만약 네가 먼저 완수한다면 두 번 다시 저 녀석과 얽히지 않도록 하지. 어때?"

"알겠습니다."

"대신, 녀석보다 늦을 시에는 오른쪽 눈을 가져가지. 자신보다 유능한 이를 선별할 수 없다면 필요 없지 않나."

모골이 송연해지는 건 한순간. 그제야 휘트니는 눈앞에 있는 오웬이 어떠한 인물인지 떠올랐다.

제 수하를 끔찍이도 아껴, 존경받는 강자이지만 본질은 마피아였다.

무엇보다 무법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변덕을 일삼는.

이제 와서 할 수 없다고 뒤로 빼는 건 항명이나 다름없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감춘 휘트니는 허리를 숙였다.

"먼저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야지. 걸린 게 많은 만큼 출발 시간도 공평해야 하니까."

휘트니가 떠난 뒤, 홀로 남은 오웬이 낮게 웃었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 승리하든 상관없었다.

경쟁을 붙인 건 빠르게 결과를 보기 위함이니.

과연 누가 먼저 정보를 물어 올까.

한 번 예상해 보는 것도 여흥이 되리라.

* * *

블랙마켓에서 나온 가온은 생각을 정리했다.

신종 전자 마약, 에덴의 출처를 파악하고 알리는 게 이번에 맡은 의뢰의 주요 골자.

기본적인 정보는 오웬에게서 받았다. 따로 발품을 팔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소리.

'일단 내부 정리부터 해야겠네.'

루케시아 패밀리 안에 에덴이 퍼졌는데도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건 비협조적인 인원이 있다는 뜻.

일단 그들에게서 유통 경로를 파악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물론 간부인 오웬에게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녀석들이 고작 해결사 따위에게 살가울 리 없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건 필연.

어쩌면 오웬이 진정으로 바라는 건 이거일지도 몰랐다

4대 암부 중 한 곳이 배후에 있다고 명확히 밝혀져도 루케시아 패밀리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한정적이었던 거다.

기껏해야 협정을 맺거나, 경고하는 게 고작이겠지.

차라리 내부 인원을 솎아 내기 위해 에덴을 이용한다고 판단하는 편이 적절했다.

그것도 제삼자의 손을 빌려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깔끔했다.

분명 상부의 결정에 의해 잘라냈는데도 분열하지 않고 결집할 테니. 모든 업보는 오롯이 가온이 짊어지는 형태였다.

언뜻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오웬에게 빚을 지울 수 있었던 거다.

그가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지만, 그러면 적대 세력에 투신해 집요하게 물어뜯으면 그만.

애당초 사태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방관할 정도로, 능력이 없다면 간부가 될 수도 없었을 테니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중요한 건 이러한 역학 관계를 이용해 최대한의 이득을 창출하는 것.

생각을 정리한 가온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클럽 999.

15구역의 한구석을 차지한 이 클럽은 39구역에 널린 유흥 업소와 다르게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요란스럽게 홍보하지도, 호객하지도 않았다.

이 장소에 흥미가 있다면 알아서 오라고 문을 활짝 열어 두었을 뿐.

클럽 가드들 또한 교육을 받은 경호 인력처럼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다만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00만 피아의 입장료와 더불어 엄중한 검사를 거쳐야 했다.

선별된 이만 통과할 수 있는 만큼 가온은 다른 때와 다르게 자신을 다듬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케케묵은 코트를 벗고,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르다 여겨 이마를 드러내는 건 물론이고, 패션 안약으로 홍채의 색을 바꾸기까지 했다.

다행히 이러한 노력은 클럽 가드에게도 닿았는지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개방된 댄스 플로어를 지나, 한쪽에 마련된 바 카운터에 앉은 가온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클럽 999는 에덴을 가장 먼저 도입한 업장이었다.

그리고 루케시아 마피아 내에 에덴을 유포한 것으로 유력한, 나카마치 히로가 운영하는 가게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는 간부였다.

루케시아 패밀리의 실세인 오웬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깃장을 부릴 수 있는 수준은 되는 셈.

'없나.'

혹시라도 에덴에 취한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공간에서는 취급 자체를 안 하는 듯했다. 물론 그게 없어도 난장판인 건 틀림없었다.

술과 이성이 혼합된 장소였다.

모두가 게 아니면 개였다.

실제로 몇 명인가 팔을 잡고 늘어졌다. 집요하게 가슴을 더듬는 손길은 덤. 조심스럽게 그들을 밀어낸 가온은 자리를 옮겼다.

"저나 형님이나 혼자네요. 아, 혹시 스무 살 아래는 아니죠?"

한 청년이 다가온 건 그때.

무언가 낌새를 느끼고, 클럽 측에서 파견한 조직원인 줄 알았지만, 평범한 시민이었다.

대화를 나눠 보니 바로 앞 이사벨라 공립 대학에서 수학 중인 학생이라고.

오늘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오지 않으면서 일정이 붕 뜨게 되었다는 게 청년, 로렌스의 부가 설명이었다.

"딱 보고 알았죠. 형님도 저랑 비슷한 사정이 생겼다는 걸."

"그런 셈이지."

"이럴 게 아니라 MD 불러서 적당한 곳에 들어가죠. 그 얼굴 가지고 술만 마시면 무기징역이라니까요?"

그제야 청년이 서슴없이 접근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는 마약보다 여자가 급한 부류인 듯싶었다.

"만나기로 했던 친구가 잘생겼나 보지? 나는 그 대타고."

"형님, 제가 그럴 놈으로 보입니까?"

과장되게 항변하는 게 영 미덥지 않았다.

아무래도 청년의 친구는 로렌스의 이런 모습을 짐작하고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가온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명품을 두른 티가 났던 거다. 게다가 졸부처럼 무작정 가격만으로 과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기 센스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상표가 없는 것도 기꺼이 걸칠 줄 아는 지혜가 있었으니까.

원래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보다 은근히 드러내는 사람이 더 부유한 법이었다.

더구나, 클럽 999에서 산다고 하니 어쩌면―

'경험이 끝났을 수도 있겠는데.'

적절한 상대가 나타났으니 넌지시 화두를 던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 나는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 있다고 해서 한번 와 본 거야."

은근한 어조에 로렌스는 가온이 무엇을 원하는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형님은 그걸 보고 오신 거군요. 그런데 이거 어쩌죠? 그쪽은 완전히 추천제로 운영되어서 VIP와 인연이 없으면 연결조차 되지 않아요."

"잘 알고 있는 걸 보니, 너는 몇 번 경험했나 봐?"

아차 싶은 로렌스가 이마를 짚었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쓸데없는 말이 나왔다.

"아니, 제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 들었어요."

"소개시켜 주기 힘들면 괜찮아. 나도 괜히 부담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가온이 순순히 물러나자 오히려 무안해진 건 로렌스였다.

로렌스가 멈칫하자 가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난데스를 떠올리니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혼자서 즐기기에는 심심했는데..., 아, 기분이다. 저만 따라오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로렌스는 가온에게 손짓했다

"혹시나 말하는 거지만, 수상한 행동은 하지 말고요. 형님을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예요."

"알았어."

입가에 미소를 지은 가온은 로렌스의 뒤를 따라갔다.

* * *

"히히힛."

자주 애용한 건지 클럽 가드는 로렌스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해당 MD와 바로 연결해 주었다.

위층에 있는 은밀한 룸으로 안내를 받아, 에덴을 한 움큼 받은 건 순식간.

그 과정의 결과가 이거였다.

"로렌스?"

"키힛."

로렌스는 에덴이 주는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유아로 퇴행했다.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

그런데도 만족스럽지 못한 건지 그는 자그마한 코인을 하나 들어 디바이스에 꽂았다.

이동식 저장 장치, 이른바 패키지 안에는 에덴이 들어 있었다.

그 안에 내장된 알고리즘이 디바이스에 연결된 신경계를 자극해, 두뇌를 주무르는 거다.

그 효력은 펜타닐의 100배에 달했다.

성인의 지성 따위는 가볍게 갈아 버릴 수 있는 수준.

"헤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상대였기에, 그 괴리는 더욱더 크게만 느껴졌다.

함께 즐기는 척 패키지를 사용한 가온이었지만 그는 현혹되지 않았다.

무허가 시술소에서 거금을 들여, 노인이 자랑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업데이트한 참이었던 거다. 정신 방벽을 뚫고 들어오는 데이터는 1byte도 없었다.

이로써 전자전에 대한 검증도 함께한 셈.

패키지를 몇 개 챙긴 가온은 곧장 밖으로 나왔다.

댄스 플로어가 주를 이루는 저층과 다르게 상층은 철저하게 벽을 나누어 사적인 공간을 형성했다.

슬그머니 다른 룸을 살펴본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성도착의 한계가 어디인지 도전하는 철인들이 즐비했던 거다.

허덕이면서 짐승으로 돌아간 이가 대다수. 의수가 떨어져 나간 줄도 모르고 발작을 일으키는 이도 몇몇 있었다.

놀라운 건 그들 전부 낯이 익다는 거였다.

사회 지도층에 가까운 지식인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장소가 장소이기에 급수는 떨어졌지만 말이다.

충격적이었지만 공찰에 신고한다고 해도 출동할지 의문이었다. 설령 기적적으로 조사를 받는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아무런 혐의점은 찾을 수 없을 터.

에덴이라는 게 그러한 물건이라는 것을, 가온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하."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일.

인류의 인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기술의 발전은 화려한 문명을 이룩하게 했다. 우주로 진출한 지금, 인간을 얽매는 제약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보다 나은 지성체가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인류는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밝은 면은 더 밝아지고, 어두운 면은 더 어두워졌을 뿐.

이 이중성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해결해야 할 숙제일지도 몰랐다.

덜컥.

눈을 감은 가온은 방금 전 보았던 광경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째서 오웬이 경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널리 퍼져서 이로울 게 없는 물건이었다.

* * *

사장실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혹시라도 MD나 가드와 마주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계단을 오를 때까지 그들의 뒤통수도 보지 못했다.

루케시아 패밀리의 위세만 믿고 경비가 소홀하다 평가할 수 있으나, 그게 아니라는 건 머지않아 밝혀졌다.

톡 하고 코끝을 스치는 혈향에 가온은 발걸음을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댔다.

힐끗, 고개만 내밀어 복도를 보니 시산혈해가 펼쳐져 있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토막 나 널브러진 상태. 오로지 베이고 찔린 흔적만이 가득했다.

'검?'

애용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웃기지만, 요즘 시대에는 보기 드문 무기였다.

063 그게 대답이라는 거지

* * *

서둘러 사장실로 들어가자, 격전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아수라장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현장.

철문과 탁자, 그리고 의자에 이르기까지, 잘려 나간 사물의 단면은 유리처럼 매끈하기 그지없어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나 파격적인 위력을 지닌 날붙이는 가온이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단분자 블레이드.'

그걸 다루는 이의 솜씨가 범상치 않다는 건 사망자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몇 발자국 움직이면 코가 닿을 정도로 좁은 장소인데도, 홀스터에서 권총을 반쯤 꺼내다 말았던 거다.

이는, 단숨에 제압되었다는 증거.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명횡사나 다름없을 테지만 애도할 시간 따윈 없었다.

떳떳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 무리의 명복을 빌어 줄 정도로 자비로운 건 아닐뿐더러, 이곳에 온 건 어디까지나 에덴의 출처를 알기 위함이었으니까.

하지만 컴퓨터와 금고는 보란 듯이 두 동강 나 사이좋게 등을 맞대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정보를 추출하는 건 어려울 듯싶었다.

"...!"

창밖에서 불명확한 고함이 들려온 건 그때.

반사적으로 창틀을 밟고 도약한 가온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건물 옥상에 착지한 그의 눈에 비친 건 예상외의 광경이었다.

홀로그램 헬멧에 레인코트.

그리고 프로텍트 기어.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 서 있는 건 완전히 무장한 괴한이었다.

그래서일까.

도심이 아니라 전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의 손아귀에는 나카마치 히로가 들려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누구인지는 명약관화.

"어이."

물론 가온에게 있어, 중요한 건 히로의 안위가 아니었다.

"죽일 땐 죽이더라도 잠깐만 심문해도 될까? 용건이 있거든."

"...."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내린 괴한은 히로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뼈와 살이 두부처럼 으깨지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게 대답이라는 거지."

마지막 말을 내뱉은 것과 동시에 질주한 가온은 주먹을 내질렀다.

쿵!

진각을 밟으면서 온몸의 중심을 앞으로 옮긴 일격.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괴력은 콘크리트 벽도 뚫을 정도지만 괴한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괴한이 착용한 프로텍트 기어는 탄소섬유 강화 중합체에 텅스텐 합금을 덧댄 특상품.

중장갑을 두른 파워드 아머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일반적인 화기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가온은 어떠한가.

손님으로 입장한 탓에 무장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우면 되는 법.

아래층에서 주운 권총을 괴한의 관절 부위에 욱여넣은 가온은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총구 화염과 함께 연기가 올라오는 건 한순간.

손잡이를 타고 올라오는 울림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인간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촉이 아니었던 거다. 굳이 따지자면 전신 의체―

"너는...."

오웬에게서 들었던 안드로이드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눈앞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궤적 하나가 허공에 아로새겨졌던 거다.

찰나의 순간을 파고든 일검.

허리를 비틀어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가온은 코등이 부분을 손등으로 후려쳐 궤적을 비틀었다. 그리고 검면에 총구를 가져다 대고 탄환을 쏟아부었다.

괴한이 소지한 무기가 단분자 블레이드라는 건 올라오기 전에 파악이 끝난바, 일단 가장 위협적인 흉기부터 박살 내야 하는 건 당연한 전술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노림수는 통하지 않았다. 그에 대응하는 괴한의 몸놀림이 표홀하기 그지없었던 거다.

파지직.

발에서 스파크가 때마다 괴한의 위치가 시시각각 변했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듯한 입체 기동.

그 앞에서 간격을 잰다는 건 무의미했다. 저 멀리 떨어졌나 싶다가도, 바로 앞까지 당도해 태도를 휘둘렀으니까.

무자비한 속도에 원근감마저 무너질 지경.

하지만 가온이라고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프로텍트 기어를 깨부술 기세로 두 주먹을 휘둘렀던 거다.

쿵!

차륜처럼 순환하는 맹격이 괴한의 가슴팍을 강타하며, 연신 폭음을 토해 냈으나 소용없었다.

머리를 꿰뚫을 기세로 쏘아지는 섬광을 피해 가온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었다. 괴한 또한 기꺼이 동참하면서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퍼붓는 공격은 대기 중에 파동을 일으켰다.

밀리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공방은 백중지세.

두 사람 모두 머릿속에서 배경을 지운지 오래였다.

가온으로서도 괴한을 놓아줄 수 없게 되었다. 손속을 겨루면 겨룰수록 잊어버렸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래, 낯선 검객에게서 노승의 향기가 새어 나왔다.

"너, 평범한 안드로이드가 아니구나."

빙하기 당시에도 찾지 못했던 과거의 잔재가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제약이 풀렸다고 해서 이리 극적인 반전을 보여 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전신 의체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주체는 다른 곳에 있다고 봐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허허. 나는 한 번도 내 자신에 대해 그리 소개한 적이 없거늘,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가."

괴한에게서 대답다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이보그?'

그렇다면 오웬이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없으니까.

"왜 히로를 죽인 거지? 루케시아 패밀리와 적대적인 관계? 아니면 단순히 고용되었을 뿐이냐?"

"자네니까 말하는 거지만, 남에게 해답을 구하는 건 그리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라네. 모든 진리는 오롯이 스스로 구해야 의미가 있는 법."

"무슨 개소리...."

"하지만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해 준 자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게 예의겠지."

파지직.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

아차 하는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괴한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운동 능력은 모든 면에서 가온을 상회했다.

이는, 인류 기술의 총체.

즉 역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연과 싸우며, 진리를 파헤치며 얻은 힘은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온의 안에도 수백 년의 세월이 담겨 있었다. 한낱 인간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쾅!

손등으로 검면을 정확하게 후려친 가온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격통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괴한이 지닌 검은 일찍이 가온이 사용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마주한 것만으로 손이 갈가리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맞부딪친 건 재생 능력을 믿기 때문.

인내하고 인내한 가온의 눈에 찰나의 틈이 보였다. 그가 노리는 건 단분자 블레이드 그 자체.

그래, 그것만 뺏으면 괴한이 얼마나 튼튼하든 단번에 벨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나 한 번 흐름을 끊은 괴한은 마지막 공세를 준비했다.

'두 개의 태도'는 어느새 그의 정수리까지 올라간 뒤.

얼굴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예상보다 하나 많다는 걸 깨달은 가온은 전율했다.

'쌍검?'

횡으로 그어지는 선이 하나,

종으로 그어지는 선이 하나.

두 개의 궤적이 교차되면서 十자를 그렸다.

상하좌우를 선점하는 검격.

아예 팔 하나를 버리고, 회피한 가온이었지만 괴한은 멈추지 않고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쌍검이 만개한 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순간, 가온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일찍이 그가 구현했던 기술이 눈앞에 있었다.

장비 하나 없이 파훼하는 건 어불성설.

뿌리쳐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남은 팔이 허공을 날았다.

원심력으로 말미암아 폭주하는 두 개의 태도는 자연재해와 다를 게 없었다.

이를테면, 소용돌이.

그 안에 발을 디딘 이상, 목숨을 부지하는 건 어려웠다.

속절없이 잘려 나간 사지가 그 증거였다.

뒤로 쓰러진 가온은 괴한을 올려다보았다.

"잘 가시게나."

이건 막을 수 없다.

그 생각과 함께―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 * *

'...!'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의식이 부상하는 건 순식간.

두 눈을 부릅뜬 가온은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했다. 자신이 한 번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 디바이스였다.

'정상 작동되네.'

눈을 감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감싼 효과가 있는 듯했다. 대신 호르몬 조절기가 망가졌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거야 다시 이식하면 그만이니까.

"후."

제멋대로 재생하려는 육체를 억누른 가온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분별하게 결손된 신체를 대체하려고 들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두 사람분의 고깃덩어리가 생겨나는 거다.

처치도 곤란할뿐더러, 들키면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일단 절단된 부위를 이어 붙이는 게 급선무.

불로불사로서 온갖 종류의 죽음을 목도한 가온이었다. 그는 이제 전신을 내달리는 고통보다 뒷정리가 더 참기 어려웠다.

이번처럼 저며진 경우라면 무엇보다 까다로운 건 역시나 의복이었다.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 몸은 어떻게든 끼워 맞출 수 있지만 옷은 아니었던 거다.

상의와 하의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좁은 면적을 자랑했다.

정말이지 피에로가 따로 없었다.

다행히도 출혈은 많지 않아, 눈으로 덮어 어떻게든 흔적을 지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옥상에서 내려온 가온은 즉시 의류 수거함에서 낡은 옷가지를 몇 개 입수했다.

도둑고양이가 된 기분이지만 참아야 했다.

클럽 999로 돌아가, 단서라도 찾아야 했으니.

냄새가 나는 걸 버리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걸 제외하니 그럴듯한 행색이 되었다.

클럽에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라 가드가 막아서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클럽 999 앞에는 폴리스라인이 설치된 후였으니까.

증강 현실로 구현된 홀로그램이 통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바삐 오가는 공찰 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기묘할 정도로 실눈이 어울리는 사내, 진건이었다.

"가온 씨?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마피아에게 받은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왔다.'라고 밝혀봤자 이로울 건 없는지라 가온은 적당히 둘러댔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왔다기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너를 봐서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보지?"

"별거 아닙니다. 조직 간의 항쟁이 일어난 듯해서요. 사상자가 스물이 넘습니다."

"늦은 시간에 고생하네."

진건과 마주친 이상, 염탐하는 건 무리였다. 명목상 보안관이지만 사실 그는 시정부에서 파견한 사냥개였던 거다.

'이번 건도....'

등을 돌리려던 가온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래. 메타 휴먼, 아니, 양후만 쫓던 진건이 구태여 클럽 999에 나타난 거다. 집 주변을 감시하던 인력이 빠진 것과도 연관이 있을 터.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번 건에 얽힌 사람은 제한적이었으니까. 인상 깊은 사람을 꼽으라면 괴한밖에 없었다.

그리고 놈은 검사였다.

그것도 회전의 묘리를 활용하는.

064 전직 보안관이었냐

* * *

'녀석도 양후라고 의심받고 있나?'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진건의 판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건 틀림없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또 언락된 안드로이드가 난동이라도 부렸나 했지."

"언락된 안드로이드 말입니까?"

역시나.

적당한 키워드를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진건의 눈빛이 바뀌었다.

"...뭔가 아시는 게 있는 겁니까?"

"산책 중에 마주쳤어. 아주 앙칼진 녀석이던걸."

"그 부분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 * *

클럽 999 근처에 위치한 카페.

한쪽 벽면을 차지한 통유리에 현란한 불빛이 들어와 명멸했다.

공찰차가 자아내는 경광등과 거리가 내비치는 네온이 섞인 공간.

가온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본 진건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길 가다 수상한 녀석이 보여 추격했는데, 그게 언락된 안드로이드였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대체 어디에서 접한 겁니까? 그에 대한 정보는 통제 중일 텐데요."

"뒷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접하기 마련이야."

"여기에 온 것도 계획된 거였군요."

"절반쯤은? 설마하니 마피아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이름이...."

"일단 저희는 엑스(X)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 엑스. 굳이 이런 데까지 와서 난동을 부린 걸 보면 알겠지만 평범한 안드로이드는 아니야."

"아무래도 정말 접촉하신 것 같군요."

진건은 놀라지 않고, 순순히 수긍했다.

그게 가리키는 바는 하나.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온으로서는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냐."

"직접 목격까지 하셨다고 하니 숨기는 것도 의미가 없겠죠. 저희는 엑스가 전신 의체를 원격에서 조종하면서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 추정하고 있습니다."

가온이 사이보그라고 추정했던 것과는 다른 결론이었다.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심정.

하긴, 그게 아니라면 진건이 엑스를 양후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안드로이드도, 사이보그도 아닌 제3의 선택지, 그건―

"액터라는 거지."

전신 의체에 의식만 맡긴 형태를 뜻하는 단어였다.

사실, 전신 의체에 두뇌를 이식한다는 건 커다란 모험이었다. 여태 인간으로서 쌓아온 가치나 개념을 내려놓아야 했던 거다.

그것도 오롯이 제 의지로.

유기체에서 무기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리와 본능을 거스르는 건 덤.

어지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대업이었다.

그래서, 전신 의체의 장점만 취하고자 나온 개념이 바로 액터였다.

장거리 통신을 이용해 대상을 조종하며 감각만 받아들인다면 앞서 말한 단점을 상쇄할 수 있었으니.

가상 현실에서 아바타를 움직이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도비 같은 환자에게는 나쁘지 않은 솔루션이 될 거라 예상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훗날, 부작용이 밝혀지면서 빠르게 사장되었다. 장기간 사용하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되었던 거다.

몸은 두 개인데, 의식은 하나이기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접속 시 들어오는 통각의 잔류, 간헐적인 오감의 괴리, 점차 비대해지는 전신 의체 의존 증세 등등 그 외에도 따라오는 난점은 많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의로 나서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정신이 망가져도 상관없는 죄수가 실험에 참가하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근거는 있는 거겠지?"

"지하로 들어가는 게 도망치는 데 유리할 텐데도, 지상에서 도주하는 걸 택하더군요. 실제로 통신이 제한된 곳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퍽 충격적이었다.

엑스가 액터라는 게 밝혀져서 그런 게 아니라, 그런데도―

'그런 실력이라는 거지.'

성간 간의 교류가 가능해질 정도로 통신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미묘한 오차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인간의 감각으로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극미했다.

하지만 본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타임 래그(Time-lag)라면?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목 안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릴 거다.

하물며 일상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전투에 나선다니, 쇠사슬을 발목에 걸고 달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엑스는 그런 제약 속에도 모두를 농락했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역추적하면 되잖아."

이는, 액터가 범죄에 이용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뒤를 밟기 너무나 쉬웠으니까. 중계기를 설치해 가용 거리를 늘린다고 해도 통신을 이용한다는 점은 변함없었다.

당연하게도 기본적인 인프라는 모두 콜로니 소유였다.

빙하기 이후 재편된 공권력은 상상 이상이었고.

"별도의 방법으로 주변을 장악하는 걸로 밝혀졌습니다. 누구의 것을 해킹한 건지 모르겠지만 보안관,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지고 있더군요."

아무것도 모른다면 공찰도 속일 수 있는 능력자라 수긍할 테지만, 가온은 진건의 뒤에 시정부가 있다는 걸 알았다.

비록 있는 장소가 화성이라 빛이 바래겠지만 그래도 그가 가진 권한은 초법적일 터.

그런데도 밀린다?

이건 엑스의 실체가 범상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가온이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진건 또한 고민을 이어 갔다.

처음 엑스가 나타났을 때 그는 사냥개의 존재를 눈치챈 양후가 꾀를 낸 거라 생각했다.

액터라면 본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테니까.

당연하게도 가온이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다.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해 제삼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가온의 반응으로 추측하건대, 원격으로 엑스를 조종한 건 그가 아닌 것 같았다.

가온이 진정 양후라면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까.

비상 재해 대책반도 빈번히 놓친 엑스와 조우했다 서슴없이 밝힌 것도 그중 하나.

물론 이는 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넘어간 건 조금만 살펴보면 들통날 수작을 부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백가온.'

무척이나 수상쩍은 인물이었다.

수사가 난항을 겪을 때마다 양후가 아니라고 항변하듯이 등장했으니까.

밀어붙이듯이 접근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색안경을 벗으면 얼추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일전에 선언했듯이 친해지고 싶다는 맥락에서 보자면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던 거다.

자신이 너무나 어렵게 해석하는 걸까.

오랫동안 함께한 직감이 이리도 갈팡질팡하는 건 처음이었다.

가온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언락된 안드로이드라고 소문을 낸 건 왜야?"

"그래야 공찰 당국의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조금 더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가온 씨도 보아서 알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추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건의 뇌리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양후라고 의심되는 존재가 둘이면, 붙여보면 그만이었던 거다.

그중에 진짜가 있다면 저절로 드러날 터.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랬지."

"마침 저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갑자기?"

"아마 조사관이나 수사관이 엑스와 마주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공찰특공대가 투입되어야 하는데, 몸집이 커다란 조직만큼 둔한 건 없어서 말입니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떤 진건이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가온 씨라면 다를 테죠."

누가 이기든 진건에게는 이득이었다.

그러한 속내를 읽은 가온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루카스가 남겨놓은 흔적과 접촉하기 위해 여지를 남겨둔 건데, 진건은 그걸 한 번 더 꼬아서 활용할 생각인 것 같았다.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습니다."

받지 않는다면 의심을 사게 될 테고, 받는다면 어떻게든 엑스를 처리해야 했다.

외통수처럼 보이지만, 어차피 진건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몸소 추격할 예정이었다. 놈에게는 갚아 줘야 할 빚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답변이 술술 나왔다.

"수사 현황을 공유해 준다는 전제하에서라면."

"당연히 그래야죠."

요사스럽게 웃은 진건이 손을 내밀었다.

"가온 씨에게는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 * *

무허가 시술소에 들러 호르몬 조절기를 다시 이식받고, 집으로 돌아온 가온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은 많은 사건이 있었다.

에덴, 죽음 그리고―

'엑스.'

어떻게 잘 다듬으면 진건이 의심을 거두게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놈만 단독으로 없앤다면 유리하게 상황을 조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각이 부족했다.

그건 바로 엑스의 정체.

확신이 필요했다.

놈이 시정부나 이사회 소속이 아니라는 확신이, 그리고 진건의 추격을 뿌리칠 거라는 확신이.

그래야 모순을 없애고 모든 걸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카마치 히로 쪽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지금쯤 공찰이 시신을 수습했을 테니, 루케시아 패밀리는 난리도 아닐 터.

소식을 전해 들은 오웬도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 언락된 안드로이드가 나섰다고? 방금 보고를 들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군]

"무엇 때문에 히로를 노린 건지 짐작이 가?"

[글쎄, 그 정도 위치에 있는 간부라면 어디에서 어떻게 죽든 알아서 납득해야 하는 수준이니까]

"히로의 오른팔은? 네가 준 파일을 보니까 한 명 있던데."

[숨었다]

"숨었다고?"

[그 난리가 일어났으니까. 패밀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잠적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시작인가."

[일단 꼬리라도 잡히면 연락해 주지]

"나도 따로 알아보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피로를 회복해야 할 때였으니까.

그렇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페르난데스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떡하니 숫자로 시작되는 문자. 무슨 일인가 싶어 계속 읽어보니 간략한 용건이 적혀 있었다.

[이 시간에 콜롬버스로 와 줄 수 있나?]

* * *

콜롬버스로 출근한 가온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는 페르난데스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일단 접견실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아무래도 의뢰인을 찾아온 것 같았다. 오웬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아 생긴 해프닝.

안으로 들어가니, 중년 여성이 차를 마시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금발을 뒤로 묶어 동그랗게 고정한 그녀는 척 보기에도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거나,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아니었다.

이지적인, 그러니까 학문에 정진하는 이에게서 느껴지는 정광이 뿜어져 나온다는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페르난데스의 소개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내 은사님의 따님이라네."

"은사?"

"내가 보안관이었을 시절, 수사에 관해 많은 자문을 해 주셨지."

돌연 거구의 흑인, 도미니크가 떠올랐다. 디바이스 적출에 관해 의뢰를 맡겼던 39구역 동부 담당 보안관.

그런 이와 어떻게 친해졌나 했더니, 직장 동료인 듯싶었다.

"전직 보안관이었냐."

어째서 다른 중개업자와 다르게 정의에 연연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이 업계에 뛰어든 걸지도 모르지만 가온이 알 바는 아니었다.

065 대단한 곳에서 오셨네

* * *

페르난데스의 재촉에 못 이겨,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칼릭스라고 해요."

"백가온이다."

"페르난데스에게 들었어요. 어리지만, 베테랑 못지않게 일 처리가 깔끔하다고."

스윽, 중년 여성이 플라스틱 명함을 내밀었다.

인식 태그를 확인해 보니 생각하지도 못한 이력이 떠올랐다.

[이사벨라 공립 대학, 인공지능학부 소프트웨어과 교수]

"대단한 곳에서 오셨네."

이사벨라 공립 대학.

그곳은 인공지능의 어머니, 이사벨라 리를 기려 설립된 교육의 장이었다.

인류 최고의 인재들만 모이는 건 입 아프게 설명할 것도 없었다.

연원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이사벨라 공립 대학의 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인공지능학부였다.

그렇게나 상징적인 곳에서 교수를 맡고 있다는 건 레이가 그 분야에서는 견줄 이가 없는 천재라는 소리.

프로듀서 라주와는 또 다른 케이스였다. 그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건 틀림없지만, 그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김 자체가 달랐던 거다.

그래, 공찰이든 언론이든 인맥을 통해 압박을 가할 수 있는 그녀가 왜―

"해결사를 찾는 거지?"

순수한 의문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궁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가온의 물음에 레이의 눈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지난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비행차 결함으로 인한 추락 사고였죠. 공찰에서도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요. 그런데 나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것 같아요."

"그리 단언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직접 비행한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몇 솔 동안 야근도 하셨고요."

"피곤한 마당에 익숙하지도 않은 비행을 할 리 없다는 거지. 근데 그렇게나 정황이 뚜렷하면 공찰에 말하면 되지 않나?"

"그게...."

한숨을 내쉰 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공찰이 아니네. 설령 고인에게 허물이 있었다고 해도 고발할 의무는 없다는 거지."

"사이코 살인마만 아니라면 말이야."

가온이 한마디 덧붙이자 페르난데스는 못 말린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실없는 말이 누군가에는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레이는 한결 긴장이 풀린 듯한 표정으로 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몇 달 전에 아버지가 성과급이라는 명목하에 거금을 받으셨어요. 당시에는 납부할 치료비가 없어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이었던 것 같아요."

"납부할 치료비? 가족 중에 누가 아픈가?"

"네, 어머니가 희귀병을 앓고 계세요. 벌써 20년이나 되었네요."

안타깝지만 현대 사회의 의료 서비스는 민영화된 상태였다. 살인적인 비용을 청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리적인 수준도 아니었다.

악질이라는 용어가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더구나 이 시대에 희귀병이라 판별될 정도라면 유전자 조작으로 해결이 불가하다는 거고, 그 말인즉슨 케어하는 데 생활비가 대부분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빚에 허덕이고 있을 테니 이성적인 판단은 내릴 수 없었을 터.

"아버지는?"

"같은 학교에서 일하세요."

프레스턴 칼릭스, 이사벨라 공립 대학 교수.

그리고 애처가.

차분하게 레이가 말하는 정보를 정리한 가온이 물었다.

"그러면 성과급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금방 눈치챘겠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연구 기술을 유출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이상하네. 순조롭게 거래가 완료되었는데 몇 달이나 지난 뒤에 죽인다고? 번거롭고 귀찮을 뿐이잖아."

흔적을 지우고 싶다면 아예 거래가 이루어진 직후에 처리하는 게 옳았다. 거금을 쥐여 줄 게 아니라.

"그 부분까지 함께 의뢰하고 싶어요."

"보아하니 돈 나올 구멍이 없을 것 같은데."

병든 노모가 있는 건 동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무상으로 처리해 줄 만큼 사안이 가벼운 건 아니었다.

"페르난데스에게 들었어요, 안드로이드에 관심이 많다고. 해결만 해 주면 내 능력이 닿는 선까지 도와드리죠. 그게 법적인 한계를 넘는 것이든, 뭐든."

페르난데스에게로 시선이 돌아가는 건 당연지사.

"미스터 페페, 아무래도 교훈이 부족했나 봐?"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였네. 그리고 필요하지 않나, 유능한 엔지니어가."

얄밉지만 억울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또 미안해졌다.

그래, 페르난데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기회였던 게 틀림없었다. 언락된 제품을 다루고자 한다면 전문가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했던 거다.

더구나 레이가 정통한 분야 또한 인공지능. 그것도 소프트웨어였다.

구미가 당기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미안하지만 요즘 일감이 많아서 말이야. 거기에 하나 더 얹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한 번에 세 개나 되는 의뢰를 받는 건 무리였다. 더구나 앞선 사건 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여도 모자란 수준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수가 있었다.

집중과 선택이 필요한 때.

과욕을 부리다 참사가 생기는 건 지양하고 싶었다.

"그러면 이거라도 봐 줄래요?"

근거리 통신으로 들어온 파일에 가온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거, 수사 기록이잖아."

"이래 봬도 명문대 교수니까요. 이 정도 연줄은 있어요."

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찍힌 사진이 주르륵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반파된 오르트 NO.9의 모습을 다각도로 살핀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사건을 급히 종결하기 위해 숨긴 것 같지만 그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프론트 도어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을음에 가려진, 절단된 면.

클럽 999에서 보았던 엑스가 구사한 검술과 유사, 아니, 동일했다. 그렇다는 건 레이의 주장대로 단순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이라는 소리.

"언제 일어난 사고지?"

"일주솔 전일 거예요."

하루는 저명 교수, 하루는 마피아 간부.

엑스의 행동 패턴은 참으로 일관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재미있네."

* * *

이사벨라 공립 대학.

캠퍼스 규모만 해도 15구역의 사분지 일에 달하는 초호화 단지였다.

모든 연령대를 아우르는 교육 환경은 물론이고, 내부에 온갖 종류의 편의시설과 체인점이 갖춰져 있었다. 원한다면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문명을 향유할 수 있을 정도.

유명 호텔과 리조트도 있어 시간만 된다면 마음껏 여가 생활을 즐길 수도 있었다.

순찰 드론도 특별 편성되어 치안 또한 다른 곳보다 출중했다. 가히 도시 안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

"따라오세요."

레이의 안내에 따라 가온은 대학 본관으로 들어갔다.

오전인데도 학내에는 활기가 흘러넘쳤다. 저마다 팔짱을 끼고 통학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오는 녀석도 있었다.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하나같이 정갈하다는 거였다.

과도한 문신이나 피어싱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슬롯을 과하게 추가해 혐오스러운 외형을 자랑하는 이도 없었다.

그래,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처럼.

그리운 시절을 돌이켜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지라 가온은 한동안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회한 정신이 젊음에 이끌리는 건 본능과도 같은 것.

진실을 모르는 레이로서는 그게 동경으로 비쳤던지라 저도 모르게 살포시 웃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가죠."

* * *

프레스턴의 숨결이 남은 곳은 14층에 있었다.

"여기가 아버지가 사용했던 사무실이에요."

들어가자마자 명패가 보였다.

[이사벨라 공립 대학, 생명공학부 뇌신경학과 교수]

오면서 다른 교수의 공간도 살펴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크네."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요."

레이는 직접 말하지 않고 교수실 한쪽 벽면에 위치한 진열장에 다가가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안에는 상패가 가득했다.

넷상에 검색해 보니 칭찬 일색. 학회에서도 인정받는 권위자인 듯싶었다.

다만, 진열장의 한 가운데에 빈 공간이 하나 있었다. 다른 곳은 무성해서 그런지, 언뜻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부러 내버려 둔 것 같은데."

"네, 이사벨라상이 들어갈 자리였거든요."

이사벨라상.

그건 인류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한 이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영예였다.

주최한 이사벨라 재단뿐만이 아니라 시정부, 이사회, 메가콥이 한데 모여 자리를 빛내는 만큼 수상한다면 막대한 후원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경합에서 떨어졌어요. 객관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압승이었는데 말이죠."

"다룬 주제가 뭐였는데."

"인공지능의 영감."

순간, 가온은 멈칫했다. 오웬의 설명이 떠올라서였다.

"그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들었는데."

"가설은 정립했어요. 일부분이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요. 하지만 아직 개발된 건 아니라 인정해 주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어요."

"방향은 맞는데 보여 준 게 없다는 거지."

"물론, 경쟁자들이 모두 한 자락 하는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겠죠."

"흠집을 잡아서 떨어트렸다는 거네."

학회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는 이론이었다.

순수한 학문적 성취가 아니라 정치에서 패배했을 때, 과연 프레스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뒤로 독해지셨어요, 보는 내가 위태로울 정도로."

평생 연금과 상금이 물 건너간 것도 모자라 연구한 노력도 인정받지 못했다.

가난한 학자로 회귀한 그에게 명성이란 티끌만도 못한 것.

"거금을 가지고 온 것과 연관이 있을까?"

"아마도 그렇겠죠."

인과 관계가 명확하다면 프레스턴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평생 먹물만 먹고 살아온 그였다.

학교 안에 답이 있을 터.

"관련 자료를 보고 싶은데."

"아마 랩(Lab)에 있을 거예요."

* * *

대학 본관에서 나온 가온은 곧장 생명공학부 부속 연구소로 향했다. 프레스턴에게 배정된 연구실은 교수실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체급을 자랑했다.

시설도, 지원도 그에 준해서 그런지 조교들의 분위기 또한 썩 나쁘지 않았다.

구심점이 되었던 프레스턴이 죽은 이상, 뿔뿔이 흩어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온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 부분은 지금 조율 중이에요. 다행히도 학교에 아버지의 뒤를 이을 인재가 있거든요. 마침 관심을 가져 주어서요."

"이대로 계속 존립할 수도 있다고?"

"네, 그런 거죠. 학교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거든요."

프레스턴의 논문을 쓰윽 훑어본 가온은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어떤 분야에 무슨 기술을 응용했는지 체험한 적은 있었다.

그것도 수십 년에 걸쳐.

가온이 보기에 프레스턴의 능력은 진짜배기였다. 이런 사람의 뒤를 누가 이을지 절로 궁금해질 정도.

그렇게, 단서를 찾아 데이터베이스를 뒤적거리고 있자니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총장님과의 대화가 길어졌네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가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반코트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양갈래로 묶어 내린 흑단 같은 머리칼.

어딘가 모르게 앙큼한 표정은 지난날을 떠올리게 했다.

설마하니,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미스 피톤치드."

"누가 냄새난다는 거예요!"

066 들었잖아, 당장 확인해 봐

* * *

한 박자 늦게 주위를 둘러본 소녀가 두 팔을 휘휘 저었다. 이곳은 그때 그 우주여객선이 아니라 연구실이었던 거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살포시 웃은 레이가 가온과 소녀를 번갈아 보았다. 이 묘한 기류를 보고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아는 사이였나요?"

* * *

레이가 단둘만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괜한 배려라고 말하고 싶지만, 무언가 할 말이 가득한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냥 거절할 수만도 없었다.

결국 가온은 연구소 뒤편에 마련된 산책로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벤치에 앉은 소녀가 후드를 뒤로 젖혔다.

순간, 터져 나오는 강렬한 체취.

이를테면 산록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냄새였다.

심신이 안정된다고 해야 하나.

"오랜만이네요, 미스터 페티시."

페티시.

돌연 상념에서 깨어난 가온은 잠시 턱을 툭툭 두드렸다. 그만큼 소녀의 단어 선정은 파격적이었던 거다.

"그거, 나를 말하는 거?"

"그러면 누구겠어요. 섬세함이 없잖아요, 섬세함이. 제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면서."

"뭐를?"

"그런 점이 섬세함이 없다는 거예요!"

피식 웃은 가온은 옆자리에 앉았다.

"아, 그래. 피톤치드라고 한 건 사과할게. 하지만 너와 잘 어울리는 별명이잖아."

"저는 피톤치드가 아니라 노아 리라고 해요. 아시겠어요?"

검지를 치켜든 소녀가 짐짓 노했다는 듯 강하게 어필했다.

"그래."

알겠다고 했지, 부르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요?"

"네가 알아도 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그러면 미스터 페티시라고 불리는 거에 동의한 거로...."

"백가온."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가온이 순순히 답했다.

"거봐요, 솔직해지니까 얼마나 좋아요."

연락처와 주소까지 실토하고 나서야 가온은 소녀, 노아의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는 레이 교수님의 의뢰를 받고 온 거죠?"

노아가 보기에 가온의 실력은 천외천.

아직 명성이 없을 뿐이지 알려지는 건 순식간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레이가 손수 의뢰할 정도로 성장했지 않던가.

"역시 프레스턴 교수님은 평범한 사고사로 돌아가신 게 아니죠?"

당돌한 질문에 가온은 침묵으로 대신했다. 관계자 외의 사람에게 의뢰에 대한 내용을 밝힐 수 없었으니까.

노아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닌지라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은 뒤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프레스턴 교수님은 그렇게 가면 안 되는 분이셨는데."

"잘 아나 봐?"

"제가 여기에 입학한 것도 그분 덕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프레스턴 교수의 유지를 잇기로 했던가. 그것도 그 나이에."

가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아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주여객선의 보안을 뚫을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튜너로서의 기량보다 교수로서의 성취가 월등한 듯싶었다.

"마침 관련 학위도 취득했으니까요."

"괜찮다면 프레스턴 교수가 남긴 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마지막으로 연구하신 건 바이오칩, 유기체 프로세서였어요. 상온 초전도체와 유사한 소재죠."

오웬에게도 들었던 주제였다.

초전도체.

그건 전기 저항이 한없이 0에 가까워 전력 손실이 일어나지 않는 물질을 뜻했다. 그리고 이는, 전력의 완벽한 사용을 의미했다.

다만, 특별한 환경에서만 발생하는 만큼 제한이 많았다. 절대 영도에 가까운 온도를 유지해야 했던 거다. 용도에 따라 냉각 장치의 크기와 규모가 커지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상온 초전도체는 달랐다. 일반적인 환경에서도 사용 가능했으니까.

그게 핵심이었다.

별도의 조건 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온갖 전자 기기의 효율을 극도로 높일 수 있으니,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상온에서도 발열이 일어나지 않는 회로를 설계할 수 있다면 안드로이드들의 성능도 끌어올릴 수 있을 테지."

"잘 아시네요?"

차마 마피아에게 배웠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준비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사실, 프레스턴 교수님의 주 분야는 뇌신경학이니까요. 어텐션 신경망을 활용한 연산 과정 단축이야말로 백미라고 할 수 있죠."

어텐션 신경망.

말 그대로 집중할 시 일어나는 두뇌 전반의 신경 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관측, 구현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이게―

"인간의 영감을 모방할 수 있다는 거지."

"완벽하게 입증만 할 수 있다면 이사벨라 리의 뒤를 이어, 인공지능의 새로운 어버이가 될 수 있는 연구예요."

거기까지 말한 노아가 탄성을 터트렸다. 주위를 한참이나 두리번거린 그녀가 가온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혹시, 이것 때문인가요? 프레스턴 교수님의 발견에 놀란 메가콥의 견제?"

"그럴 리가 있겠냐."

터무니없는 망상에 가온은 노아의 머리를 두드렸다.

설령 연구가 결실을 맺는다면 적당히 갈라 먹으면 되는 걸 가지고, 마찰을 일으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애당초 프레스턴을 처리한 건 엑스였다.

정체불명의 검객.

그의 행동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가온이 관심을 가진 건 프레스턴이 저술했다는 논문이었다.

"그래서 논문은 완성된 거야?"

"아직 한 발자국 부족해요."

노아의 설명으로 보아 하건대 프레스턴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연구는 그거 하나뿐. 그런데도 그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분명 누군가와 거래한 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거래가 엑스라는 자객을 불러들인 도화선이 되었을 터.

"이제는 제가 이어받아서 완성해야죠."

"응원할게."

"고마, 엇...."

콰앙!

노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때아닌 굉음이 장내를 훑고 지나갔던 거다. 잠시나마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폭발.

반사적으로 그녀를 감싼 가온은 시선을 돌렸다.

불길이 일어난 장소는 생명공학부 부속 연구소 5층 외곽.

프레스턴에게 배정되었던 연구실이었다.

* * *

연구실로 뛰어간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기자재가 전소된 건 물론이고, 바닥이 가라앉기까지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사망자는 없다는 것.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레이를 부축한 가온이 입을 열었다.

"레이 교수?"

"나는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빛이 번쩍하더니 이렇게 됐으니까요."

충격이 가시지 않는 듯 횡설수설하는 레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명을 해하기보다 시설 파괴에 집중된 공작이라는 건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한 조교가 멈칫한 건 그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레이 교수님이 오시기 전에 관리실에서 왔다 갔어요. 시스템을 점검할 게 있다면서."

"시스템 점검?"

순간,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클라우드 서버."

"네?"

"들었잖아, 당장 확인해 봐."

그 말에 클라우드 서버에 접속한 조교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었다.

"연구 자료가 전부 지워졌어요."

역시나.

물리적으로든, 비물리적으로든 프레스턴이 남긴 흔적을 완전히 말소하려는 게 분명했다.

"점검한 녀석은?"

"수염이 많이 났다는 것밖에 생각이 안 나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는 편이 적절하리라.

조교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대비를 갖추고 연구소 안을 들락거린 것일 테니.

이건 전문가의 솜씨였다.

연구실 밖으로 뛰쳐나간 가온은 구름다리에 멈춰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예상이 맞다면 상대는 두 눈으로 결과를 확인할 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사내의 관자놀이에는 밖으로 돌출된 금속부가 하나 있었다.

사이버네틱스 수술을 받은 것이 확실한 모양새.

순수한 학생들이 넘치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기도를 풍기는데 모를 리 없었다.

'저 녀석이다.'

육감이 판단을 앞질렀다.

5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그대로 떨어진 가온은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질주했다. 상대도 눈치챈 건지 서둘러 도망쳤다.

벽면을 밟고 담벼락을 넘어.

펜스를 구름판 삼아 도약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천 번은 반복한 듯 숙달된 파쿠르 동작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개방된 장소가 아니라 폐쇄된 길을 고른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은 가온이었지만, 끝까지 따라간 끝에 그 저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의 최하층.

평소에는 오는 사람도 없는 구석에 상하수도와 연결된 문이 있었던 거다.

주저하지 않고 진입한 걸 보면 처음부터 도주로로 선정한 것일 터.

사내의 선택은 옳았다.

계획 없이 개발된 상하수도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것도 모자라,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으니까.

물론 가온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작이었다.

그가 의지하는 건 소리가 아니라 진동이었으니.

얼마나 달렸을까.

헤매지 않고 곧장 사내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자, 주위의 경관이 바뀌었다.

이사벨라 공립 대학에서 벗어났다는 신호.

중간에 물웅덩이라도 밟은 건지 흐릿하지만 낯선 발자국 하나가 그림자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대단히 흥미로운 단서였다.

그 끝에 있는 건 블랙마켓이었던 거다.

그것도 루케시아 패밀리가 관리하는.

아무래도 녀석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피아의 관할이라면 제아무리 유능한 해결사라도 경거망동할 수 없을 테니까.

'주저하길 원하나.'

아쉽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콘크리트 바닥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질주한 가온은 선수 치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를 짐작한 지금, 구태여 사내를 뒤쫓지 않아도 되었다.

한 번 이용한 길로 돌아가자, 익숙한 벽이 나타났다. 본디 컨트롤 패드에 액세스 코드를 입력해야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애당초 없어도 되었다.

쾅!

부수면 되었으니까.

쓰러지는 벽을 발판 삼아 도약한 가온은 즉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빠르게 블랙마켓에 도착한 그는 발소리를 죽였다.

달려가는 기척이 벽 너머에서 느껴졌다.

격벽으로 둘러싸인 곳.

오직 외길뿐이기에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무리였지만 이 시간, 이 순간, 바로 이때, 저렇게나 황급한 녀석이 달리 있을 리 없었다.

사내의 위치를 가늠한 가온은 품속에서 새로운 무장을 꺼냈다.

구릿빛 코일을 감아 형성한 내총열과 그 위를 미려하게 덮은 외총열.

묵직한 총신은 용수철과 피스톤에 의지하는 기계식보다 반도체와 모터로 구성된 전자식에 가까웠다.

그래, 이건 화약 추진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가속으로만 발사되는 가우스 병기였다.

금속 탄자를 전자기력으로 가속하여 발사하기에 탄환을 소지할 필요가 없었다. 대못처럼 생긴 탄자를 챙기면 될 뿐.

덕분에, 부피가 획기적으로 줄어 한 탄창에 들어가는 탄자 수만 해도 무려 100발.

배터리팩만 충전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차세대 화기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수율 문제 때문에 폐기된 비운의 명품.

메가콥 진진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초소형 레일건, 궁기.

그게 바로 가온의 새로운 파트너였다.

067 역시, 미스 피톤치트

* * *

위잉.

내장된 전원을 눌러 코일을 예열시킨다.

디바이스와 연동된 궁기의 정보가 직관적으로 떠오른 건 그 순간.

[Set up. System all green]

[Charge..., 75%]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건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걸 뒤덮고도 남을 만큼 화력이 막강했다.

바로, 이처럼.

투쾅!

방아쇠를 당긴 것과 동시에 시뻘겋게 과열된 벽이 녹아내렸다.

한 번 가속한 금속 탄자는 멈추지 않았다.

가온이 겨냥한 목표물에 닿을 때까지.

"윽!"

빛줄기가 사라진 것과 비명 소리가 들려온 건 거의 동시.

바람구멍을 외시경 삼아 건너편을 살펴본 가온은 궁기를 품 안에 넣었다.

방금 전, 그 사내가 맞았다.

녹아내린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기어간다는 점만 빼면.

"세 개 정도인가."

가로막은 벽을 맨주먹으로 깨부순 가온은 서슴없이 그 앞에 당도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사내의 입에서는 진실된 감정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괴물 새끼."

"그건 민간인이 있는 연구실을 터트린 녀석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인데 말이야."

"...대체 누구지? 내가 아는 녀석 중에 너 같은 녀석은 없었는데."

"어이, 내가 할 말을 자꾸 가로채지 말라고."

사내를 걷어찬 가온은 그 위에 앉았다.

"누구의 사주 받은 거지?"

"그걸 말할 것 같나."

콰직.

가온이 힘을 주자 사내의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꺾였다.

"큽."

"다음은 목이야. 솔직히 네가 죽어도 네 시신은 내게 충분한 답이 될 것 같거든."

"루케시아 패밀리가 관할하는 곳에서 살인을 저지른다고?"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본인 몸부터 챙겨."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에 사내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리 허망하게 붙잡히는 시나리오는 계획에 없었다. 물론 의지할 곳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받아라."

기다렸다는 듯 디바이스에 발신자 불명의 전화가 걸려오자 가온은 침음을 흘렸다. 눈앞의 사내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건 명약관화.

아니나 다를까, 수락하자마자 귓가에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에게는 흔적을 지우라는 명령밖에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죄 없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나와 대화하자고]

그 말대로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폭발 범위를 세밀하게 조종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걸로 끝?"

"끄헉."

기긱.

사내의 팔꿈치를 비틀자 반응이 바로 나왔다.

[오해가 있군. 너는 엉뚱한 사람에게 분노를 토해내고 있는 거다. 프레스턴 교수는 마땅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니]

"남의 공과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단 말이지. 대체 너희들은 누구길래 그리 광오한 말을 내뱉는 거지?"

[노드테크다]

군산복합체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주요 분야가 무력과 연관된 만큼 메가콥 중에서도 남다른 체급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시정부와 긴밀한 연결 고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 노드테크는 디바이스를 직접 제조 배포하는 회사로 유명했다.

일개 교수를 견제하기에는 격이 맞지 않을 정도로.

[대답이 되었나? 해결사, 백가온]

* * *

블랙마켓의 시설을 일부 부쉈지만, 오웬을 뒷배로 두고 있는 가온이었다. 의뢰와 연관이 있다는 말만으로 루케시아 패밀리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번 건에 한해서는 마법의 단어와 다를 게 없었다.

적당한 곳에 사내를 내동댕이친 가온은 상황을 살피고자 즉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불길은 걷힌 후.

연소된 부분은 안드로이드들이 신속히 수리하는 중이었다.

진도로 보아하건대, 아마 오늘내솔 안에 완료될 듯싶었다.

"범인은 잡았나요?"

"아쉽지만 놓쳤어."

노드테크에 대한 걸 밝히기에는 시기상조.

그래서 가온은 레이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방금 전, 조사관과 소방관이 왔다 갔어요. 단순한 합선 사고라더군요. 증인이 이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리도 아니었다. 노드테크라면 그럴 만한 권력이 있었으니.

중요한 건 어째서 그들이 개입했냐는 것.

이는, 프레스턴이 저지른 업보와도 연결된 게 틀림없었다.

문제는―

"클라우드 서버는 복구할 수 없어?"

"불가능해요. 아버지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것도 모두 지워진 참이니까요."

단서가 뚝 끊겼다는 것.

그때, 조용히 경청하던 노아가 손을 들었다.

"그거라면 괜찮아요. 말했잖아요, 프레스턴 교수님의 유지를 잇기 위해 이 연구실에 왔다고."

제 머리를 두드린 노아가 덧붙였다.

"기록이라면 여기에 있어요, 전부."

* * *

일단, 장소부터 옮기기로 했다. 어수선한 연구실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기에.

마침 프레스턴, 그가 살던 집을 조사해야 했던 터라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들어오세요."

평소에도 자주 방문한 건지 익숙하게 손님을 맞이한 레이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쳐다본 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떤 정보가 필요하신 거죠?"

노드테크, 그들과 프레스턴 사이에 어떠한 교감이 오간 건 틀림없었다.

군산복합체와 교수, 둘 사이에 교집합이라고 한다면―

"디바이스에 관한 연구 중 프레스턴 교수가 제일 심도 있게 파고들었던 건 뭐가 있을까?"

"전기 자극에 의한 뇌신경 제어와 활성. 그리고 생체 전기를 활용한 무한 세동 정도가 있겠네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나온 대답에 가온은 안도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역시, 미스 피톤치트."

"한 글자가 틀린 것 같은 기분인데요."

"그만큼 흡족했다는 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레이가 첨언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3년 전, 노드테크로부터 초대를 받아 디바이스 운영 체제 설계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가온 씨가 지적한 연구 결과를 봤다면서."

"그렇단 말이지."

디바이스가 발명된 건 서기 2199년.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거다.

50년 전에 이식한 사람과 올해 태어난 아이의 디바이스는 동종인 건지.

결과만 말하자면 맞았다.

하드웨어는 그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모자란 성능은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으로 대체하면 되었던 거다.

통신이 끊기면 디바이스의 기능이 제한되는 면이 없잖아 있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다만, 매번 바뀌는 게 있다면 소프트웨어 쪽.

레이도 말했다시피 노드테크는 주기적으로 석학들의 조력을 받아 디바이스의 운영 체제를 개선했다.

"그러고 보니 거금을 가져온 건 몇 달 전이라고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7개월 정도 되었을 거예요."

일전에 세라에게서 건네받은 휴대용 투영기, 프로브를 두드렸다.

짧게 한 번, 길게 두 번.

사전에 도비와 약속한 신호였다. 다른 사람이 발견해도 함부로 다룰 수 없도록 말이다. 엇갈릴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항상 로스트 사가에 접속 중인 그였으니.

자는 시간 빼고는 모두 호출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르기가 무섭게 개구진 얼굴이 프로브 위로 떠올랐다.

"와, 미인분이 둘이나 있네."

난데없이 등장한 도비가 누구인지 노아와 레이 모두 궁금한 듯했으나, 가온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네가 나설 차례야."

"아, 필요한 정보가 있는 거구나!"

"한 사람의 행적을 훑어보고 싶어. 이름은 프레스턴 칼릭스. 3년 전부터 시작해서 7개월 전까지만 찾으면 돼. 이사벨라 공립 대학 안에서 활동한 건 제외하고, 유별난 것만 말해 줘."

연구에만 매진하던 학자의 활동 반경이 넓을 리 없었다. 몇 가지 제한하는 것만으로 추출할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달라질 터.

더구나 도비의 처리 속도는 여느 다이버의 그것을 아득히 상회한 상태. 몇 솔에 걸쳐서 진행되어도 모자란 정보 분류도 초 단위로 끝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디 보자. 가장 눈에 띄는 건 개척력 64년 14월 22솔부터 15월 10솔까지네."

그 말에 레이가 이상하다는 듯 덧붙였다.

"아버지가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서 지구로 떠났던 시기인데요."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해요."

도비의 옆에 새로운 홀로그램이 추가되었다.

CCTV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상은 정확하게 오르트 NO.9을 비추고 있었다.

차량이 나아가는 경로는 평이하기 그지없었다. 집에서 출발해 우주 공항으로 들어갈 때까지.

"특이한 건 없지 않나요?"

이해하지 못한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도비는 고개를 돌려 가온을 쳐다보았다.

"가온, 너라면 알 것 같은데."

"교차로."

"역시 눈치챌 줄 알았어."

도비가 손가락을 튕기자, 방금 전 영상이 재생되었다.

보다 느리게.

가온이 지적했던 대로 오르트 NO.9이 교차로에 정차하는 것과 동시에 이변이 발생했다.

통행량이 가장 많은 장소에서 녹화 장면이 밀리초 단위로 밀리더니, 어느새 저 멀리서 또 다른 오르트 NO.9이 나타난 거다.

이는 시간을 두고 면밀히 분석해 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결과.

"이게 무슨...?"

너무나 자연스럽게 화면이 넘어가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면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위장.

또 다른 오르트 NO.9이 16구역에 위치한 정비소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레이는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우주 공항으로 들어간 건 다른 차였다는 거죠."

"착각한 게 아니라요? 오르트 NO.9이 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많을 텐데요. 우연히 경로가 겹쳤다고 생각하면...."

"레이 교수."

당황하는 레이를 부른 가온이 단호하게 확정했다.

"의심할 거 없어. 저번에 들고 온 수사 기록이 있잖아. 거기에 찍힌 리어 도어와 C필러 사이의 유격으로 구분할 수 있어."

그걸 어떻게 파악하냐고 되물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구로 가지 않고 허름한 정비소에서 3주를 보낸 거다. 그 안에서 무얼 했는지야 뻔했다.

"외면하지 마. 바로 저곳에서 사건이 시작되었어."

"아."

의심이야 했지만 직접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자 레이는 어찌할 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 프레스턴은 청렴결백한 학자 그 자체였던 거다.

"그러면 아버지는 범죄에 연루된 건가요? 그것도 자의로?"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가온은 등을 돌렸다. 동시에,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그가 나서봤자, 그건 위선에 불과했으니까.

하물며 레이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적임자가 곁에 있지 않던가.

노아에게 레이를 맡긴 가온은 집을 나섰다.

"후."

방금 전까지 목구멍 안쪽을 떠돌던 한숨이 튀어나온다.

레이에게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얼추 알 것 같았다.

교수 프레스턴과 마피아 히로의 공통분모.

한 명은 디바이스 운영 체제 설계 참여. 또 다른 한 명은 디바이스를 이용한 신종 전자 마약을 유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끼어든 건 디바이스를 제조하는 메가콥 노드테크였다.

논리적인 비약이 있을 수 있으나, 핵심은 하나뿐이었다.

에덴.

프레스턴은 신종 전자 마약의 개발에 참여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엑스는 관계자 전원을 참살하고 있고.

068 인상적인 자기소개였어

* * *

* * *

정보를 정리하니, 정신이 한없이 맑아졌다. 그리고 새로운 길이 보였다.

디바이스에서 통화 기록을 살핀 가온은 곧 한 사람에게 연락했다. 처음에는 수신을 거절했으나, 반복된 구애에 대화가 성립되었다.

[뭐지?]

"이해했다, 네가 왜 프레스턴 교수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건지."

[축하한다. 그럼 나는 이만....]

"끊기 전에 조금만 더 들어. 너희도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일 텐데? 이럴 게 아니라 만나서 정보를 공유하자고."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프레스턴 교수를 끌어들인 녀석들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침묵은 길지 않았다.

[차량을 보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승합차가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가온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전부 군용 사양인가.'

즉시 시가전에 참전해도 이상이 없을 정도.

"타시죠."

프론트 도어의 창문을 반쯤 내린 남자가 그리 고했다.

붙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어투.

환대를 바랐던 건 아닌지라 가온은 군말 없이 탑승했다.

그렇게 미끄러지듯이 지하 터널로 진입한 승합차는 지정된 진공 튜브 속으로 들어가 바퀴를 올려놓았다.

이윽고 하이퍼루프가 운행되면서 주위의 경관이 모두 선으로 뒤바뀌었다. 반복되는 광경에 따분해할 것도 없었다.

느릿하게 하품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한 차량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으니까.

어디로 가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2구역은 주요 인프라가 집중된 요충지.

노드테크 본사가 자리 잡은 곳이었으니.

* * *

구름마저 따돌릴 기세로 높이 치솟은 마천루.

시드 콜로니에서도 특히나 발전된 거리에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외곽에서는 보기 드문 비행차가 참새마냥 착륙했다 이륙하기를 반복했던 거다.

지하와 지상 그리고 하늘까지 활용하는 공간 설계.

노드테크 본사도 그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는 중이었다.

요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둔탁하고 굴곡진 외벽. 사옥의 골조는 오로지 기술과 효율에 초점을 둔 듯했다. 미적인 관념은 없다시피 한 거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회사 이념은 사풍에도 적용되었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검문은 집요하다 못해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특히나 외지인에게 혹독했다.

금속 탐지기를 지나, 폭발물 감지기, 그다음은 엑스선 검색기. 지나쳐야 하는 기기만 해도 네댓.

컨베이어 벨트에 뛰어든 조립품이 어떠한 기분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노드테크 측은 그마저도 믿지 못하는 건지 몸소 확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안 요원이 다가와 몸수색에 나섰던 거다.

"또? 너희들 이 정도면 병이야, 병."

"두 팔을 벌려 주시기 바랍니다."

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사회였다.

기상천외한 묘수에 당하는 건 부기지수인지라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자."

곧 가온의 가랑이 사이에서 길고 두꺼운 물건을 발견한 보안 요원이 아연실색했다.

남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감촉.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무기. 접힌 상태인데도 꽤 크지?"

순간, 동요를 감추지 못한 보안 요원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금방에라도 폭발할 듯한 모양새인지라 그의 동료들도 하나둘씩 표정을 지우고 거리를 좁혔다.

"농담이야, 농담."

숨겨놓은 폴딩 나이프를 꺼낸 가온이 피식 웃으며 반납했다.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구한 것이건만, 역시나 노드테크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는 듯했다.

"여유가 없으니까 속는 거 아니야."

"다음부터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완전히 무장을 해제한 가온은 상층으로 올라갔다.

"여기부터 혼자 들어가시면 됩니다."

운전기사 노릇은 물론이고 길잡이까지 해 주었던 남자는 그 말만 남기고,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누가 남자에게 명령을 내린 건지 모르겠지만, 거물이라는 건 분명했다. 62층을 홀로 차지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여덟 개의 안광이 쏘아진 건 거의 동시.

거미를 연상케 하는 의안에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집무실 책상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사이보그라 칭할 정도로 많은 수술을 거친 건 아니지만 거한의 신체가 인간에서 멀어졌다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메가콥의 일원이라는 걸까.

극한까지 단련한 흔적으로 보아 하건대 오웬과도 일전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슬리니까 두리번거리지 말고 앉아라."

타박하는 소리에 관찰을 끝낸 가온은 거한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 소개는 필요 없지? 보니까 알고 있던데 말이야."

"이스턴 게이트는 인상적이었다. 데미안 회장도 만족한 눈치더군."

"아, 그러셔. 내가 궁금한 건 그런 자질구레한 감상이 아니라 네 정체인데 말이야."

거한은 말없이 손목을 휘둘렀다. 동시에, 플라스틱 명함 하나가 표창처럼 날아갔다.

가볍게 던진 한 수라고 보기에는 위협적인 속도.

당연하다는 듯 두 손가락으로 낚아챈 가온은 인식 태그를 확인했다.

[노드테크 리스크 관리2팀 팀장]

[부장 막시무스 콰이트]

"인상적인 자기소개였어, 미스터 스파이더."

"1팀과 다르게 2팀은 주로 사외 보안을 담당하고 있다."

말이 좋아 사외 보안이지, 첩보나 다름없었다.

부장이라고 하지만 비상시 직급은 임원을 웃돌 터.

실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수 재간은 있는 자리였다.

보아하니 직접적인 폭력도 불사하는 타입인 듯했다.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른 상완부와 전완부가 그를 방증했다.

하물며 노드테크는 군산복합체.

군에도 적용되지 않는 최신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접할 수 있는 장소였다. 막시무스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니, 보안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만큼 아예 회사 측에서 권유했을 수도 있었다.

"외부의 위협에서 회사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런저런 잡무를 대행하고 있지."

"대학 연구실을 폭파한 것도 그중 한 개인가 보지?"

"프레스턴 교수는 노드테크와의 계약을 어겼다. 디바이스의 운영 체제를 설계할 당시, 알려 준 소스 코드를 마음대로 유출했더군."

소스 코드란 소프트웨어의 근간이 되는 코드를 일컫는 단어. 바꿔 말하자면 디바이스 운영 체제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노드테크에 치명적인 손해를 입히는 행위일 뿐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체제의 일각을 부수는 행위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소스 코드가 악용된다면 디바이스의 내부 정보를 훔쳐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모르긴 몰라도 당분간 무정부 상태로 지내야 할 터.

하지만―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면 알고 있는 정보를 넘겨라."

그게 가온에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막시무스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소했다.

"분위기 잡지 마. 너희 지금 발등에 불 떨어졌잖아."

"뭐?"

"프레스턴 교수의 흔적만 지운 걸로 봐서는 너희도 이 건이 커지는 건 원치 않지?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되길 바라는 듯한 기색이 역력해."

노드테크의 입장에서도 뜻밖의 사건인 게 틀림없었다.

근거는 차고 넘쳤다.

에덴이 완성된 직후가 아니라 프레스턴이 살해된 뒤에 움직인 거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컸다.

프레스턴이 엑스에게 죽고 나서야 신종 전자 마약이 유통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는 거니까.

엑스가 일으킨 사고는 진건이 통제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전조도 감지할 수 없다는 소리. 설령 낌새를 느낀다고 해도 엑스는 제삼자에게 미치광이 살인마처럼 비칠 뿐.

노드테크 같은 메가콥이 주시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프레스턴 교수를 죽인 액터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그래서 경계하고 연결 고리를 없애려는 걸 테니."

막시무스에게 얼굴을 들이댄 가온이 덧붙였다.

"교환하자고, 프레스턴 교수를 재촉한 녀석들의 위치와."

* * *

나카마치 히로의 오른팔, 그랜트 모니엄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다. 제 목숨을 누구보다 아끼는 그인 만큼 히로가 죽자마자 잠적했다는 건 그리 놀랄 거리도 되지 못했다.

휘트니가 주목한 건 그런 그의 본성이었다.

안전을 우선시한다는 건 모르는 곳은 절대 가지 않는다는 소리.

차명으로 구매한 건물 속에 숨었으리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조사만 해도 몇 솔은 걸리는 작업이겠지만 휘트니에게는 특별한 귀가 있었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내부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이러한 재능 덕분에 해결사로 활동할 당시에는 래빗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때문에,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한 휘트니가 16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그랜트를 만난 것 또한.

"그래서 해결사 한 명이 우리를 쫓고 있다고?"

"정말로 곤란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인데 갑자기 사라지셔서요."

가온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히로의 죽음으로 시야가 좁아져 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형님을 죽인 녀석인가?"

은근히 유도하자 그랜트는 제멋대로 판단했다.

"글쎄요, 그건 조직에서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지만 섣불리 확신하면 의심만 살 뿐인지라 휘트니는 중립을 고수했다.

오웬의 의뢰를 받고 에덴의 출처를 추적하는 중이라 솔직히 말하면 바로 척살 대상에 올라가겠지만, 그래서야 원하는 걸 얻지 못했다.

그랜트도 내심 그러한 속내를 조금이나마 읽은 건지 넌지시 물었다.

"바라는 게 있으니 몸소 찾아와 알려 준 거겠지?"

"에덴의 유통 경로를 알고 싶습니다."

"하."

"오웬 님께서도 기껍게 여기실 겁니다."

"그럼 그렇지, 박멸하자고 말하면서도 결국 자기 이득이 우선인가."

한탄이 섞인 숨결을 내뱉은 그랜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나도 아는 건 없다, 에덴에 관한 건 전부 형님이 직접 관리하셨으니까."

"그렇다면...."

볼일은 없다.

무심하게 답한 휘트니가 일어나려던 순간, 그랜트가 서둘러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형님께서 자주 갔던 장소 몇 곳은 알고 있다. 아마 그중에 한 곳일 테지."

이런 꼴이어서야 조사하는 것도 여의치 않지만 말이다. 내놓을 수 있는 패는 한정적이었지만, 정보를 넘기면서도 그랜트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오웬 님께는 네가 잘 전달해 주었으면 한다. 모든 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니까."

그 시점에서 휘트니는 제가 모르는 내막이 있다 짐작했다. 그랜트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던 거다.

주장했던 대로 히로를 따라 에덴만 유통했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

하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가온보다 먼저 에덴의 출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이러든 저러든 그랜트는 어차피 사라질 사람이었다. 관심을 줄 이유가 없다는 뜻.

그래서일까.

"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거짓말이 스스럼없이 흘러나왔다.

069 그 이상 움직이면 사살하겠다

* * *

* * *

16구역 외곽에 위치한 정비소.

막시무스에게 빌린 차량을 몰고 당도한 가온은 입구에서부터 묘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정비하는 인원에서부터 바로 코앞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까지 전부, 눈길이 흉흉했다.

수리를 접수하기 위해 내린 찰나, 누군가 다가와 등 뒤에 총구를 겨누었다.

"형님께서 보자고 하신다."

가온조차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기민한 대처.

"이건 놀랍네."

그랜트를 비롯해 그의 똘마니들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한다는 계획은 아무래도 무산된 것 같았다.

무고한 시민들도 오가는 곳인지라 경거망동하는 건 불가.

허리춤에 밀착된 총기를 나침반 삼아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역 친화적인 가게 아래 마피아의 창구가 있을 줄.

따라 들어간 지하는 꽤나 널찍했다. 외부의 원조가 없어도 몇 주는 버틸 정도. 어째서 그랜트가 정비소를 대피소로 골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데려왔습니다, 형님."

"그래."

장내에 있는 사내들의 기도는 너나 할 것 없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사경을 헤치며 여럿을 살인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분위기.

하나, 가온에게는 아무런 감응도 줄 수 없었다.

설령 천장에 육박할 정도로 체구가 크고, 무장이 완비되었다고 해도 그들이 홍수를 피해 배 안으로 숨어든 쥐새끼라는 건 변치 않았던 거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내, 그랜트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 겁도 없이 우리를 노리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는 해결사라고?"

엑스가 히로를 죽인 만큼 상황이니만큼 제삼자의 개입을 고려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직종 중에서 해결사라고 특정하는 건 수상했다.

누군가 말해 주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으니.

오웬이 직접 넣은 의뢰였다. 잡음이 새어 나올 틈 따윈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한 명 있었다.

오웬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애송이.

초면부터 불만을 토로하던 청년이라면 능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았다.

'왜'와 '어떻게'라는 물음이 남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환담을 나눌 사이는 아니니 바로 본제로 들어가자고. 에덴의 개발에 너도 참여했지?"

이는, 프레스턴이 이곳에 출입했을 때부터 정해진 사안이었다.

애당초 정상적인 놈이라면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조직에 보호를 요청했을 거다.

아무리 엑스가 날뛴다고 해도 루케시아 패밀리라면 능히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랜트는 그것 또한 위험하다 판단했다.

왜?

들켜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질렀으니까.

애당초 오웬이 말했지 않던가.

할드 또한 참가했다고.

브레인 워싱 기술에 정통한 리퍼닥, 할드. 그가 애용하는 테마는 전기 자극이었다.

디바이스가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짐작일 뿐이지만, 루카스에게 할드를 소개해 준 것도 히로일 공산이 컸다. 조직 내부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가 아니라면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어려울 테니까.

오웬도 어렴풋이나마 이러한 인과 관계를 파악했으리라. 다만 의심만으로 처리하기가 껄끄러웠을 뿐일 터.

그래서 의뢰를 맡긴 걸 거다.

'사전에 예상은 했지만....'

규모와 깊이가 남달랐다.

히로가 독단적으로 에덴의 개발에 관여했다고 해도, 그가 루케시아 패밀리 소속이라는 것만으로 문제가 되는 거다.

프레스턴이 디바이스 운영 체제의 소스 코드까지 바치지 않았던가.

굳이 엑스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언젠가 철퇴를 맞았을 사안이었다.

"어이쿠,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였나. 어떡하냐. 너희들 지금, 좆된 거야."

지하에 설치된 시설부터가 땀내 나는 사내들이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최신 기기가 아닌 게 없었으니까.

조직원들도 느낀 바가 적지 않은 건지 술렁였다.

에덴을 유통하는 것과 개발하는 건 그 수위가 완전히 달랐던 거다.

방관자와 관계자의 차이.

마피아로서 지켜야 하는 마지막 선을 넘은 이상, 그들은 갱과 다를 게 없어졌다.

부하들이 하나둘씩 동요하자 그랜트는 분개했다.

"조용! 형님을 죽인 녀석의 말이다. 그대로 믿는 멍청이는 없겠지? 그러니 속단하지 말고 중심을 지켜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랜트가 손가락을 꺾자, 그의 관자놀이에 박힌 슬롯, 세컨드 브레인이 은은한 불빛을 토해냈다.

"내가 직접 나서서 누구의 의뢰를 받고 이리 날뛰는지 직접 묻도록 하겠다."

"미스터 타이런트의 의뢰를 받았다만."

"오웬 님이라고?"

당치도 않은 답에 그랜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휘트니가 누누이 강조했던 경고가 떠올랐던 거다.

"이것 참, 깜빡 속을 뻔했군."

같은 조직 사람과 오늘 처음 본 해결사 중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할지는 명확했다.

시기상, 공교롭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너 같은 녀석은 질리도록 봤다. 무턱대고 높은 사람의 이름만 거론하면 어떻게든 상황이 풀릴 거라 예상한 거겠지."

호가호위라고 해야 할까.

애석하게도 실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빈 수레에 불과했다.

"다시 한번 묻지. 누가 의뢰했지?"

"말했잖아, 미스터 타이런트라고."

"그래, 순순히 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위이잉, 위이잉.

벽면에 뚫린 환풍구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그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벌이 쏟아져 나와 그랜트의 주위를 둘러쌌다.

처음에는 때아닌 야생의 습격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살펴본 가온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벌과 다르게 유려하게 뻗은 동체. 그리고 유리 섬유 특유의 광택을 뿜어내는 날개까지.

그랜트를 호위하듯이 에워싼 건―

"드론?"

"정확히 보았다."

벌처럼 생긴 초소형 드론, 베스파.

그건 그랜트와 일생을 함께한 유닛이었다. 일심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그래서일까.

한 번이라도 그랜트와 대적한 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를 이렇게 불렀다.

비키퍼(Bee―keeper).

양봉가라고 말이다.

베스파 자체의 성능은 별 볼 일 없었다. 크기가 작은 만큼 결함이 많았던 거다. 화기를 내장할 수 있는 것도, 그렇다고 외피를 단단히 보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벌을 모티브로 했듯이 가져온 특징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엉덩이 부분에 장착된 기다란 세침.

본디 있으나 마나 한 무장이겠지만 베스파는 수백, 수천에 달하는 군집체였다. 반격을 시도할 수 있는 횟수 또한 그에 비례했다.

손톱 밑이고, 눈두덩이고, 사타구니고, 사방에서 무차별적으로 찔러댈 수 있다는 뜻.

날파리처럼 들러붙는 초소형 드론의 연계를 버틸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상처가 깊지 않다고 해도, 계속되는 자극에 쇼크사할 수도 있었던 거다.

가온 또한 대면한 즉시 그러한 특징을 파악하고, 덤으로 약점도 간파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우블렉 탄성 피부같이 별도로 시술한 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얕은 수작이었으니.

이는 피해를 주는 것보다 고통을 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생겨난 폐해였다.

물론 가온이 입고 있는 코트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밀리미터 단위로 가공된 침이 직조된 섬유 사이로 들어오지 못할 리 없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아차 하는 사이 목덜미에 따끔한 격통이 내달렸다. 통점을 정확하게 뚫는 공격.

"형님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출렁이는 파도처럼 끝없이 요동치는 베스파 앞에서 가온은 회전했다.

축으로 삼은 다리가 바닥에 깊은 스키드 마크를 새길 즈음, 이변이 일어났다.

잔상처럼 갈라졌던 가온의 신영이 하나로 합쳐진 거다.

지구에 있을 때보다도 숙련된 모습.

찰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스트로보 현상을 일으킨 가온이지만, 그랜트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베스파가 너나 할 것 없이 가온의 손아귀 안으로 빨려 들어갔던 거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제 발로 날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명령은 내린 적 없는 그랜트였다.

"뭣...."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모든 건 가온이 회전하면서 생긴 급변풍 때문이었으니. 자연재해의 편린 앞에서 벌떼가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 손에서 뒤엉키는 베스파를, 가온은 무심하게 으스러트렸다.

말아쥔 주먹 사이로 잔재가 떨어지는 걸 목도한 그랜트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죽여!"

차라리 전자기 펄스에 당했다면 이리 급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장갑이 극단적으로 얇은 베스파였으니 파훼법은 얼마든지 있었던 거다.

하지만 정면에서 깨부순다니.

듣도 보도 못한 묘기요, 기예였다.

이건 가온의 실력이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증거였다.

사살 명령을 내린 것도 그 때문.

하지만 조직원들이 화력을 모으기 전에 섬광 하나가 허공을 내달렸다. 궤적 안에 위치한 이의 신체 부위가 녹아내린 건 한순간.

애석하게도 피해자 중에는 그랜트도 있었다.

"크헉."

예상치 못한 총격에 허리를 부여잡은 그랜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제 안위만큼은 병적으로 챙기는 그였다. MUG―1에 해당하는 보호 장비를 칭칭 감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 건 두말할 것도 없는바.

하지만 일련의 준비는 모두 쓸모가 없었다.

"이 미친 새끼가...."

레일건을 들고 다녀?

조직 간의 분쟁에서나 나올 법한 병기의 등장에 그랜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

구심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볼품없이 쓰러진 지금, 루케시아 패밀리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게 밝혀진 지금, 의리와 충성을 다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사분오열하는 건 당연지사.

조직원들은 사전에 합의라도 한 듯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그 판단은 적절했다.

아무리 가온이라고 해도 사방으로 찢어지는 무리를 모두 참살할 수는 없으니.

애당초 그가 받은 의뢰는 세 가지였다.

에덴 출처 파악, 검객 엑스 처리, 그리고 프레스턴의 사망 경위 조사.

잔당을 소탕하는 건 무급 노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불렀다.

수적 우세라는 이점을 내세울 수 있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쾅!

일련의 무리가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조짐을 보이자마자 사방에서 무장한 인원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어깨에는 노드테크를 상징하는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은퇴한 노병, 퇴직한 해결사, 입사한 직원 등등 출신이 저마다 다르기에 이합집산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능력만큼은 수위를 다투는 무력 집단이었다.

노드테크 전속 PMC였던 거다.

루케시아 패밀리가 4대 암부 중 하나라지만 간부진도 아닌 조직원이 단독으로 대항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되는 건 당연지사.

모든 상황이 정리된 뒤,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왔다.

붉게 빛나는 여덟 개의 안광.

극한까지 제 몸을 개조한 거한, 막시무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이상 움직이면 사살하겠다."

070 찾기만 해

* * *

* * *

정비소 밖으로 나온 가온은 이름 모를 차량의 보닛에 앉아 막시무스가 나오길 기다렸다. 노드테크 전속 PMC가 투입된 이상, 그가 끼어드는 건 과유불급이었던 거다.

그게 심문이라면 더더욱.

얼마 지나지 않아 막시무스가 지하에서 올라왔다.

"그랜트에게 알아낸 건 있어?"

"심문 도중에 자살했다."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죽었다고?"

"어쩔 수 없었다. 콧구멍 안쪽에 숨겨놓은 초소형 드론으로 제 머릿속을 휘저었으니까."

막시무스의 얼굴을 보고 살아날 수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히로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졌으니 패밀리의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었었다.

어느 쪽이든 죽음보다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당연한바―

"엿이나 먹으라는 건가. 그래도 기개는 있는 녀석이었나 보네."

"그러잖아도 본사에 브레인 스토커의 사용을 허락받은 상태다."

브레인 스토커.

이름 그대로 타인의 기억을 엿볼 수 있는 장치였다. 설명만 들으면 누구든지 취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미완성품이었다.

일단, 기능 자체는 확실했다.

시점과 시간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밀리초 단위로 뒤죽박죽 섞인 기억은 세절기에 잘린 종이 부스러기와 다를 게 없었다.

완성된 퍼즐을 보기 위해서는 1,000억 개의 피스와 씨름해야 했다.

인간의 두뇌 용량을 데이터로 환산하면 2,560억 기가바이트. 거기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넘어야 할 난관이 많았다.

때문에 브레인 스토커는 시장 경제의 논리에 따라 자연스레 소외되었다. 차라리 집요하게 심문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던 거다.

물론 이번처럼 말해줄 녀석이 죽으면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해당 기억이 담긴 뇌세포가 사멸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망망대해를 헤매야 했으니.

그런데도 강행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열 받았나 보지?"

"노드테크의 눈을 피한 놈이다. 방심이란 있을 수 없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든 상관없지만 이 건은 빚으로 남길 거야, 잊지 말라고."

"누구 마음대로 짐을 지우겠다는 거지?"

"나 혼자 처리했어도 될 녀석들이었지. 그런데도 네게 제안한 건 공로를 나눠주기 위해서였어."

"우습군, 네까짓 놈의 호의 하나로 노드테크가 휘청거릴 것 같나."

잠시나마 뜻이 많아 협력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명확했다.

일개 해결사와 메가콥의 팀장.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착각하지 마라. 실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뿐이다. 너를 대체할 수 있는 해결사는 차고 넘치니까."

설익은 협박이라 재단한 막시무스가 으르렁거렸다.

익히 예상한 바였기에, 가온은 태연하게 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소스 코드를 유출하든, 디바이스를 박살 내든 노드테크의 위상은 떨어지지 않을 거다. 시드 콜로니를 운영하는 이사회에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박살 나겠지."

가온의 눈이 한없이 차가워졌다.

"커리어에 오점이 남는 건 물론이고 앞날이 정말 불편해질 거야. 요주의 대상의 행방을 3주나 놓친 건 실책 중의 실책이잖아. 안 그래?"

정확한 지적에 막시무스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렸다.

그건 그가 애써 외면했던 현실.

따지고 보면 프레스턴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 않던가.

"하지만 과는 공으로 갈음할 수 있어. 이번처럼 말이야. 에덴이 개발된 곳을 찾았잖아? 그것도 사태가 커지기 전에."

"너...."

"루케시아 패밀리가 적당한 먹잇감이 되어줄 거야."

구태여 막시무스를 끌고 온 건 그 사실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건 솔직하지 못한 오웬에게 보내는 자그마한 선물이자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쥔 패는 보여줬어. 이제 네 차례야, 미스터 스파이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가온의 언변에 막시무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억지를 부린다면 빠져나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괜한 말싸움은 피하고 싶었다.

가온처럼 냉정한 상대로는 더더욱.

"나도 그놈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녀석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떠오르더군. 8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걸."

"8년 전이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개척력 기준이다."

"그러면 16년 전이라 말하라고, 헷갈리게 하지 말고."

화성 기준으로 8년 전이라는 건 지구 시간으로는 16년 전이라는 소리.

이는, 당연한 이치였다.

화성의 공전 주기는 지구의 2배였으니까.

화성의 1년은 지구의 2년이라고 보면 되었다.

하루를 솔(Sol)이라 부르는 것처럼 대신하는 명칭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의미가 없는 구분이었다.

화성을 기준으로 잡으면 20대도 10살로 표기해야 하는 거다. 때로는 36살이 18살과 동갑이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2년 단위로 연도를 갱신하는 건 인간이란 동물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셈법이었다. 기간이 너무 길기에 사건과 시기를 나열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거다.

지구에서 생겨난 종이 화성으로 이주해 오면서 생긴 사소한 오차.

개척력이 있는데도 서기를 차용하는 건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지금처럼 적절하게 혼용하는 게 차선.

혼란스럽다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시차 표기는 디바이스에 내장된 기능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

"아무튼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속 시원하게 밝히지 그래?"

"함부로 거론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게 너여도?"

은근히 신경을 건드렸지만 막시무스는 무심하게 등을 돌려 지하로 사라졌다.

건진 게 없는 건 아닌지라 가온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고, 프로브를 두드렸다.

"다 들었지?"

[16년 전 사건을 뒤져보라는 거지?]

"아마 이번 사건처럼 철저하게 감춰져 있을 거야."

프레스턴의 죽음이 단순 비행 사고로, 히로의 죽음이 조직 간의 항쟁으로 바뀌었듯이.

[조금 시간이 걸리겠는걸]

"찾기만 해. 그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 *

히로가 에덴의 개발에 참여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유통까지 전담한 건 아니었다. 오웬이 설명했듯 히로를 지원한 세력이 있을 터.

아마 생산 또한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공산이 컸다. 그랜트가 돌발 행동을 일으켜 단서가 뚝 끊겼지만, 에덴을 관리하는 곳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중 하나를 골라잡으면 될 터.

레이에게서 연락이 온 건 바로 그때였다.

"마음은 다 추슬렀나 보지?"

[덕분에요]

"그것참, 다행이네."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

엑스가 누구냐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사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인과 관계가 밝혀졌으니까.

프레스턴은 존경받아 마땅한 지식인이지만, 그와 동시에 무력한 가장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병간호.

그런데도 악화되는 아내.

그리고 쌓여만 가는 빚.

정도를 넘어선 압박에 프레스턴은 결국 제가 지닌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팔아넘겼다.

그것도 학회가 아닌 암부에.

어찌 보면 그의 마지막은 자업자득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인정 없는 사람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혀를 찰 터.

하지만 이 세상에서 한 사람만큼은 이해하고 보듬어 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최대한 담백하게, 확정된 것만 골라서.

[그렇게 된 거군요]

레이가 얼마나 낙심한 건지 소리만 듣고도 알 것 같았다. 흐느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

[모두 내 잘못이에요. 아버지가 거금을 들고 왔을 때 어디서 구한 거냐고 다그쳐야 했어요. 조금 더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했어요]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었다. 레이는 뜻하지 않게 얻은 교훈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말하기 힘들면 다음에 다시 연락하지."

[아니요. 한 가지 꼭 말해야 하는 게 있어요]

"뭔데."

[에덴이라는 전자 마약이 정말, 정말 아버지께서 개발한 게 맞다면 그 안에 이스터 에그를 숨겨 두셨을 거예요]

"이스터 에그?"

[네. 아버지는 자기가 제작한 프로그램마다 흔적을 남겨 두셨거든요]

"일종의 시그니처라는 거지."

[말씀처럼 일종의 표식 같은 거죠.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렇게 활용하셨을 것 같지 않지만요]

마침 클럽 999에서 구해온 에덴이 있었다. 시험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조건이었다.

새로운 단서를 얻은 가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도움이 되었어. 감사를 표하지, 레이 교수."

[나야말로 진실을 감추지 않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 * *

39구역에 위치한 무허가 시술소.

들이닥친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 좋은데 말이야, 자네만 없으면 좋겠군."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미스터 샤룩 칸."

"그래서 오늘은 어떤 사건을 몰고 왔나?"

품속에서 자그마한 코인, 패키지를 꺼낸 가온이 노인에게 내밀었다.

"이건...?"

"시중에 돌기 시작한 신종 전자 마약."

"호오, 이게 에덴인가."

"이름은 들어봤나 봐?"

"그래. 내가 마약상인지, 리퍼닥인지 구분할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자주 찾더군."

한 박자 늦게 가온의 요구가 무엇인지 깨달은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까지 혼동하는 건가? 난 리퍼닥이지, 다이버나 튜너가 아니라네. 프로그램을 파헤치는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피식 웃은 가온이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그래서 한 명 데려왔어."

그제야 가온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 노아 리.

노인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 * *

노아가 합류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가온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던 거다. 사실, 처음에 나서겠다고 한 건 레이였다. 하지만 곁에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노아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스스로 결자해지하라는 건 너무나 참혹한 처사였으니까.

그래서 먼저 자청했다.

자리에 앉은 노아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설정을 맞춰가자, 가온은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뇌신경학 전공 아니었어?"

"그것도 취득하긴 했지만, 다른 것도 몇 개 있어요."

박사 학위를 운전면허처럼 말하는 듯한 노아의 어투에는 가온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게, 미스 피톤치트."

"그 별명만 안 꺼냈으면 감동받을 뻔했는데 말이죠."

노아는 투덜거리면서 제 디바이스에 마그네틱 케이블을 연결했다.

이내, 포트에 패키지를 꽂아 넣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모니터 위로 방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내린 건 그때.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운 노아는 손짓만으로 그 모든 데이터를 선별하고, 분해했다.

"역시나 암호화된 알고리즘투성이네요. 프레스턴 교수님 외에도 여러 사람의 손길을 거친 게 보여요. 난수 처리도 완벽에 가깝고요."

모든 디지털 정보가 그렇듯이 복사와 저장이 간편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전자 마약 또한 마찬가지.

에덴이 제값을 받으려면 누구에게도 복제되지 않아야 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방비가 철저한 건 놀랄 것도 아니었다.

"양자 컴퓨터가 있다면 어떻게든 뚫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아쉽네요. 역시 업소용 컴퓨터로는 한계가 있나 봐요."

터무니없는 불만에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미안하군, 가게 안에 대규모 센터를 차리지 못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