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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서장

2 잠자던 능력 깨어나다

3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지?

4 주먹 한 방에 대기권 밖을 영원히 떠돌아?

5 폭발! 질풍삼연격

6 핀셋이 필요할 것이오!

7 빈둥빈둥 놀면서 시급은 딥따 센 알바자리?

8 날개도 없는 놈들이 공중전이라닛!

9 서명하는 곳이 어디죠?

서장

만약 타인의 뛰어난 능력을 그대로 복제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무엇을 할까? 머리가 좋은 친구의 두뇌를 복제하고, 힘센 친구의 근육을 카피할까?

아니, 아예 신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신과 몬스터의 신기한 능력을 그대로 복제해 낸다면 어떨까.

오우거의 괴력에 제우스의 뇌전을 얹고, 프레이의 귀품과 메두사의 눈빛, 드래곤의 비늘, 히드라의 불사의 속성을 가질 수 있다면.

이 글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한 소년의 이야기다.

잠자던 능력 깨어나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난 절망으로 일그러진 세상을 보았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먹구름, 그 사이를 명멸하는 뇌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홯폐한 땅, 삭막한 바람, 그리고 이따금씩 내리는 붉은 비.

폭우라도 쏟아지면 핏물로 온 세상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비명이 들린다.

지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처참한 비명성에 대지는 신음을 터트리고, 창공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다.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세상.

그곳에 홀로 우뚝 선 높은 탑이 있었다.

마치 신의 이름으로 이 땅의 모든 절망을 한눈에 담아내는 듯, 한 폭의 지옥도 위에 삐죽 솟은 절망의 탑.

그 탑의 최고층에서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일남일녀.

그림자로 보아 사람인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이유에선지 정확한 모습은 볼 수는 없었다.

두 사람 중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늘게 떨리는 음성은 옅은 습기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정말 가실 겁니까?"

금방 눈물이라도 떨굴 것 같은 애처로운 목소리.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사내는 얼음보다 차가운 심장을 품은 자였다.

처연한 그녀의 부름에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단지 우렛소리가 끊이질 않는 창밖을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고풍스런 술잔. 그곳에서 역한 비린내가 풍긴다. 잔 속에 찰랑이는 붉은 액체의 비릿한 끈적임이란.

피!

놀랍게도 사내가 마시고 있는 것은 붉은 피였다.

"궁금하지 않니?"

돌연 사내가 물었다.

"...?"

"조용한 이곳이 활활 불타는 모습을 말이다."

사내의 입술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진다.

"헉헉."

잠에서 깬 병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위에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무서운 꿈이다. 아니 찝찝한 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온몸에 싸늘한 기운이 흐르고, 두통으로 머리마저 욱신거릴 지경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경찰 측의 발표는...."

잠들기 전 켜 놓은 텔레비전에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살인마에 대한 내용을 특집으로 방송하고 있었다. 진행자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가는 살인마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에 대해 재삼 강조하며 설명하고 있었다.

"저러니 뉴스가 무섭다는 소리들을 하지."

아프리카 지방에서 처음 시작된 이 잔혹한 살인은 인도와 일본을 거쳐 최근 우리나라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이상한 꿈은 저 뉴스보도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병규는 작은 창가에 팔을 괘고 섰다.

흐릿한 세상.

더듬더듬 책상 위에서 알이 두꺼운 안경을 찾아 코에 걸친다.

향기로운 봄바람이 귓가를 간질인다. 창밖의 풍경은 지옥 같은 꿈속의 풍경과 달리 지극히 평화로웠다. 한가롭게 떠가는 구름들, 깔깔거리며 골목길을 뛰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까지.

"산책이라도 해 볼까?"

그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점퍼를 꺼내들고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등 뒤로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를 발칸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용의자의 인상착의는 대머리에 옷도 거의 걸치지 않았으며 마른 몸을 한 60세가량의 노인으로 알려...."

"쓰벌."

골목 어귀에 나서자마자 병규는 입에 욕부터 담았다.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패거리를 그곳에서 맞닥뜨리게 됐기 때문이다.

"여~ 이게 누구야."

황급히 방향을 틀어 뒤돌아가려 했지만, 저쪽에서 먼저 손을 흔들며 속이 배배꼬이는 목소리로 병규를 불렀다.

"하하, 안녕?"병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불량한 태도의 세 녀석.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양아치 녀석들이다. 세 명 중 뻐드렁니의 이도재와 돼지같이 살찐 이상철이란 녀석은 원래 중학교 때부터 설치고 다니던 녀석들이고, 뒤쪽에서 둥그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녀석은 최근에 이사 온 안세준이란 놈이다.

터덜터덜 걸어온 이도재가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끈적끈적하게 웃음을 흘린다.

"얼굴 좋아 보이는걸? 데이트라도 있는 거냐?"

'데이트는 개뿔. 악몽을 꾼 사람에게.'

병규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매는데 뚱뚱하게 살찐 이상철이 느릿느릿 다가와서 병규를 한 번 쳐다보고 얼굴을 찡그린다.

"이 새끼 봐라. 형님들을 보고 아주 똥 먹은 개새끼 같은 얼굴이 돼 버리네."

"넌 왜 얘만 보면 그러냐?"

"얼굴이 맘에 안 들어. 괜히 한 대 때려주고 싶거든."

이상철은 병규의 뺨을 철썩철썩 때린다. 장난 같지 않게 힘이 실려 있다. 병규릐 뺨이 금세 붉어지더니 부풀어 오른다.

"괴롭혀주고 싶다고? 변태 같은 자식. 야야. 저리 가 있어봐. 영업하는 데 방해되니까."

병규와 어깨동무를 한 이도재가 이상철을 밀어낸다.

물론 병규가 예뻐서 이도재가 그를 변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노는 것뿐이다.

결국 녀석들에게 병규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주먹을 꽉 움켜쥔 병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녀석들과는 중학교 때부터의 악연이다. 왜 그런지 녀석들은 항상 그를 괴롭혀왔다. 괴롭히는 이유라는 것이 딱 지들 수준에 맞다.

얼굴이 지들 마음에 안 들어서니, 표정이 뭐 같다느니,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느니....

병규를 괴롭히는 데에는 항상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곤 했던 것이다.

병규는 녀석들이 죽도록 싫었다. 아니, 증오했다.

중학교 때엔 갑자기 전 항상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놈들에 대한 저주의 주문을 수십 번 외우다가 잠들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속에선 항상 그가 녀석들을 짓뭉개주고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는데, 현실과 꿈은 매번 이렇게 다르다.

"야. 이 새끼. 얼굴 표정 정말 환상인데? 한 대 치면 울기라도 하겠다."

이상철이 손으로 병규의 턱을 치켜올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려 보인다. 살이 더덕더덕 붙어 출렁거리는 녀석의 징그러운 얼굴.

병규는 그런 이상철의 얼굴을 한 대 쳐 올리고 싶다. 하지만 힘이 없다. 아니 어떻게 이 녀석을 처리한다고 해도, 곧 녀석들의 패거리에게 밟히고, 그 다음엔 전보다 훨씬 더한 곤혹스러운 일들이 연속될 것이다.

불의에 항거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야. 너 이거 할 줄 아냐?"

이도재가 디스 담배를 쓱 꺼내 보인다.

병규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어이구. 고2나 되는 자식이 아직도 이걸 못해? 보물이구만. 국보급 보물이야."

이상철이 병규의 뒤통수를 툭툭 치며 놀린다. 대체 담배 못 피우는 것과 학년이 올라가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야. 새꺄. 애 언다. 괜히 왜 구박을 하고 그러냐?"

이상철을 말리는 척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본 이도재는 은근한 목소리로 병규에게 속삭였다.

"히히. 너 아직 이거 안 해 봤다고? 잘됐네. 이 기회에 너도 어른이 돼 보는 거야. 어떠냐?"

"...?"

병규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이도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담배와 녀석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퍽.

갑자기 이도재가 병규의 머리를 툭 하고 내리친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삘이 안 와? 사라고오!"

이젠 노골적이다. 화들짝 놀란 병규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나오자 녀석이 낚아채듯 가져가 버린다.

"하하. 짜식,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네. 옜다. 라이터는 서비스다. 흐흐, 잘 피워라. 그 물건, 자라나는 청소년은 정말로 구하기 어려운 거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졸라 싸게 먹힌 거야."

"그럼. 얼라들은 구할 수도 없는 물건이지. 어른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 만 원이라니. 캬~. 터무니없는 헐값이네. 아마 너무 좋아서 감상문이라도 한 장 써 오게 될걸. 크큭."

키득거리며 손을 흔드는 녀석들. 병규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하지만 녀석들보다 뒤에서 한가롭게 손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안세준 자식이 더 고까운 것은 왜 일까.

안세준.

호리호리한 키에 창백한 얼굴을 한 멀끔하게 생겨먹은 녀석. 이 녀석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짜증나는 녀석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도재와 이상철을 얼라들 삥이나 뜯고 다니던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안세준이란 놈이 녀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안세준은 무슨 기업의 사장 아들이란다. 그래서인지 돈이 좀 많은 편이다. 아니 좀 많은 정도가 아니라 펑펑 뿌려댄다. 썩은 똥물에 똥파리가 꼬이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게 녀석에겐 이도재와 이상철이라는 똥파리가 엉기게 되었다.

두 녀석이 알랑거리는 게 돈 때문인 줄도 모르고 두목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안세준을 보며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난갑하거나 짜증날 때 보이는 그의 버릇이다.

"기분 더러워졌네."

뭐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시비라도 불었다간 골피 아파질 테니까.

즐거운 학창생활?

이런 날들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는지, 가끔씩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을 볼 때면 한 달만 몸을 바꿔보자고 말을 건네고 싶다.

'내 고통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

병규는 혼잣말을 뇌까리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나 하자며 나선 길이었는데 정작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몇 군데 친한 녀석들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다들 바쁘다는 말만 해댔다. 노래방이고, 피씨방이고 혼자 갈 만한 곳은 못된다.

정작 필요할 때 같이 놀 사람도 없다니, 세상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거닐던 병규는 학교 뒷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은 일개 고등학교 뒷산 정도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울창했다. 약수터까지 이어진 작은 산길만 아니라면 감히 숲으로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보다는 괜찮은걸."

숲 속을 걷고 있는 병규는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 한껏 기지개를 켰다.

언뜻 울창한 것처럼 보이던 숲이었는데 약수터까지의 산길을 의외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훤하기만 하구만. 왜들 이 숲을 나쁘게 말하는지 모르겠네."

산을 끼고 있는 학교들이 매양 그렇듯 그가 다니는 고등학교도 공동묘지를 밀고 학교를 건립했다느니, 한밤중이면 비명소리가 들린다는 식의 여고 수준 괴담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유독 뒷산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무성했는데, 호랑이를 보았다는 사람부터, 약수를 뜨러갔던 여 선생이 일주일 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해괴한 괴담이 횡행했다.

"이렇게 야트막한 산에 호랑이가 살아? 허무맹랑한 소리지."

병규는 마치 자신이 오해를 받은 것처럼 혀를 쯧쯧 찼다. 그는 유독 산을 좋아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이곳을 찾곤 했다.

전나무와 소나무 사이의 그늘을 따라 얼마쯤 걷자 작은 약수터가 나왔다.

바위에 놓여진 바가지에 답답할 정도로 쨀쨀 흐르는 약수를 받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몸서리처질 정도의 냉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을 휘젓는다.

"캬. 시원하다."

병규는 늙은이처럼 호탕하게 한 번 소리치고 약수터 한쪽에 가 앉았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그의 머리칼을 날리고, 오후의 화사란 햇살은 아늑하기만 했다.

펑퍼짐한 돌 위에 앉아 주위 경관을 둘러보니 장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늑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으, 혼자보긴 그래도 아깝군."

이럴 때 때깔 좋은 여자친구라도 하나 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괜스레 든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병규는 꼭 여자친구를 만들어 핑크빛 외설(?)을 저지르고 말겠다는 기특한 야심에 사로잡혔었다. 입학식 날 반반한 선배들과 얌전해 보이는 동기들을 남몰래 점찍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심에 불과했고, 결국 봄방학이 끝나면 곧장 2학년이 되는 지금 시점까지도 여자친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호감을 보이는 여자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이도재와 이상철이라는 땅거지 같은 자식들에게 당하는 그를 보게 되면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다.

"어? 빈 통이...?"

물을 담는 커다란 통 두 개가 약수터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깨끗한 걸 보니 가져다 놓은 지 얼마 안 된 물건인 모양이다.

"신첵이라도 갔나? 누가 들고 가면 어쩌려고."

운동도 할 겸 약수터를 찾는 게 드문 일은 아닐 테지만, 이렇게 아예 자리에서 뜨는 경우는 드물다. 하기야 물통 하나에 얼마나 한다고, 들고 다니며 운동을 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때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찌걱 쩝. 찍찍. 짜각. 아득.

날고기를 뜯어먹는 듯한 비릿한 소음.

'들개가 산토끼라도 잡은 걸까?'

문득 호기심이 인 병규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약수터 뒤편의 으슥한 곳으로 들어선 병규는 얼마가지 않아 소리의 근원지를 발견했다.

사람의 등이 보인다.

병규의 미간에 여러 겹의 주름이 잡혔다.

아직 초봄이라 공기가 쌀쌀한데 등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더러운 천으로 치부만 간신히 가린 채였다. 게다가 훤하게 보이는 등은 주름투성이에 검버섯까지 가득 피어 있었다. 못해도 오륙 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다.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걸까?'

병규는 노인이 조금 걱정되었다. 이렇게 찬 날씨에 옷을 거의 입고 있지 않았고, 차라리 강변에 나앉은 노숙자가 저보다 형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뭘 먹고 있는 거야.'

호기심에 잔뜩 인 병규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앉은 노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때 그의 기척을 느꼈는지 노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헉.'

병규의 입이 쩍 벌어졌다.

노인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진득한 핏물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가에 흐르는 피는 노인의 손에 쥐어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인의 손.

그 손에 쥐여진 물컹거리는 붉은 살점. 그것은 심장이었다. 그것도 아직 펄떡펄떡 힘겹게 뛰며 붉은 핏물을 게워내고 있는 뜨거운 심장.

그제서야 병규는 노인의 앞에 가로로 누워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등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 전 약수터에서 본 빈 통의 주인인 것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다. 가슴께가 길게 쭉 찢어진 채 내장을 사방에 뿌린 채 죽어있었다.

노인의 손에 들려 있는 게 죽은 사람의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가슴을 반으로 갈라놓은 채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날로 씹어 먹고 있는 충격적인 광경. 가히 공포 영화에서나 봄 직한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갑자기 꿈에서 보았던 잔인한 사내가 병규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설마 이것도 꿈? 절대로 꿈이어야 해!'

병규는 주춤주춤 물러서며 목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켰다. 가슴이 쩍 갈라진 시신. 그리고 게걸스럽게 시신의 심장을 뜯어먹는 헐벗은 대머리 노인.

집을 막 나설 때 용의자의 인상착의에 대해 주절거리던 뉴스 앵커의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장기매매에 관련된 조직의 소행 같다고? 망할 놈들. 감식관들은 눈이 삐었나? 장기를 파는 놈이 심장을 왜 먹는단 말야.'

병규는 속으로 뉴스 앵커에게 욕을 해대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살인마가, 발칸이라고 불린 살인마가 그를 쳐다보고 있다. 퍼렇게 빛나는 눈동자가 심장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빠득.

병규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떨구고 발아래를 살폈다.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망할.'

속으로 욕을 하며 조심스럽게 살인마가 있던 곳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없다.

놀랍게도 잠깐 사이, 노인이 사라졌다.

신원 불명의 시신 한 구만이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갈비뼈를 을씨년스럽게 드러내 놓고 있을 뿐이다.

'어디로 갔지?'

병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시선 닿는 어디에도 좀 전의 노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규는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무심코 뒤로 돌았다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충격에 휩싸였다.

"크크크."

발칸이, 입가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살인마가, 누렇게 물든 눈깔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리고, 눈앞은 노랗게 변해버리는 것만 같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그냥 산책 삼아 약수터에 온 것뿐인데, 지독한 꿈에, 재수 없는 녀석들을 만나질 않나, 이제는 터무니없는 살인마와 눈싸움을 하고 있다.

"좋아. 좋은 냄새구나."

코를 벌름거리던 발칸이 입을 좌우로 쫙 찢는다. 기괴한 웃음. 뱀을 본 개구리의 심정이 이럴까. 피부에 소름이 쫙 끼친다.

"키키키키."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살인마.

쩍 벌려진 입안에 톱날 같은 누런 이빨들이 서서히 드러나 보인다.

'도망가야 해.'

생각은 간절했지만 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는지 도저히 떨어지지가 않았다. 살인마에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질식할 것만 같다.

촤르르 촤르르.

가물치의 그것처럼 생긴 녀석의 가슴이 촤르르 일며 쉑쉑 하는 기분 나쁜 숨소리를 낸다.

'괴, 괴물.'

세상의 어떤 인간도 갈비뼈 사이로 호흡을 하진 않는다.

병규는 소름이 끼쳐 미칠 것만 같았다. 녀석의 귀기 넘치는 위압감에 턱 아래로 식은땀이 물처럼 줄줄 흐른다. 이렇듯 절망스러운 하루가 자신에게 닥치다니.

게다가 이놈의 다리는 아직까지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젠장. 움직여!"

병규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두 주먹으로 허벅지를 퍽! 하고 내리쳤다. 충격을 가해져서인지 바짝 굳어있던 몸이 그제야 조금 풀린다.

병규는 그대로 죽자 살자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한참 달리며 뒤를 돌아보니 살인마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썩은 미소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역질나는 웃음. 그리고 온몸에서 묻어나오는 저 여유.

불길한 예감이 든다. 병규는 더욱 다급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급하다고 발까지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병규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살인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미 백 미터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병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휘릭.

가벼운 바람소리와 함께 퍽 하는 충격이 병규의 등허리를 찔러왔다.

"으악!"

와당탕 요란스럽게 넘어진 병규는 몸부림 칠 새도 없이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이럴 수가.'

녀석이 코앞에 있었다. 무려 백여 미터를 공간이동 한 것처럼 단박에 눈앞까지 미친 것이다.

"말도 안 돼!"

병규는 경악성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저쪽 끝에 서 있던 살인마가 어떻게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그를 후려갈길 수 있단 말인가.

순간이동? 어처구니없겠지만 정말로 그런 것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불가사이의 한 스피드다.

"키키키."

경악하는 병규를 보던 발칸은 게걸스럽게 키득거렸다.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기 좋은걸?"

발칸은 그물에 걸린 싱싱한 물고기를 보듯 병규를 쳐다봤다. 놈의 입가에 풍기는 느글느글한 악취.

왜 무섭다는 생각보다 역겨운 느낌이 먼저 드는지.

"네 심장이 보고 싶구나. 과연 얼마나 싱싱할까?"

기괴하게 웃으며 녀석이 손을 쭉 뻗어왔다. 병규는 움찔 놀라며 뒤로 물러섰지만 어느새 머리칼을 붙잡히고 말았다. 녀석은 80킬로크램 몸무게에 가까운 병규를 한 손으로 덜렁 들어올렸다.

"윽."

병규는 신음을 흘렸다. 머리가죽이 통째로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붙잡힌 채 정육점 진열장에 매달린 고깃덩어리처럼 허공에 떠 있었으니 그럴 밖에.

한 손으로 병규를 들어올리다니. 노인네 같은 겉보기와 달리 발칸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어.'

마음을 독하게 먹은 병규는 허공에서 대롱거리며 녀석의 배를 있는 힘껏 발로 퍽퍽 찼다. 그러나 축 처진 피부와 달리 발칸의 근육은 바위처럼 탄탄했다. 오히려 발끝이 아파왔다. 그러나 병규는 포기하지 않고 그네를 탄 것처럼 앞뒤 반동을 주며 녀석의 배와 가슴을 타고 얼굴을 후려쳤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머리칼을 움켜잡은 녀석의 팔에 원숭이처럼 매달렸다. 그리고는 놈의 앙상한 손목을 억세게 물어뜯었다. 얼마나 세게 물어뜯었는지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조금 새어나와 입안에 흘렀는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이놈이."

병규의 반항을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발칸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온다. 급기야 표정까지 일그러지더니 거칠게 병규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친다.

"큭."

힘없이 나동그라진 병규는 뼈마디가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도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다시 죽어라 내빼기 시작했다. 다친 곳은 나중에 치료할 수 있지만 죽으면 국물도 안 남는다.

"키킥."

도망가는 병규를 보며 발칸은 비웃음을 흘렸다.

"넌 특별히 고통스럽게 먹어주마."

드디어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규는 고개를 돌려 발칸을 주시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병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은 찢어질 듯 커져야 했다.

발칸의 발이 움직이는가 싶은 순간 녀석의 몸이 비단 천이 펼쳐지듯 쭈욱 앞으로 밀려나왔다.

'헉.'

병규는 경악성을 질렀다. 저만큼 있던 녀석이 또 한 번 어느새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너무 빠른 움직임이라 몸이 쭉 늘어난 것처럼 보인 것이다.

단순히 빠르다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스피드.

"얌전히 있거라."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발칸이 손을 뻗어왔다. 마치 닭장 속의 병아리를 꺼내듯 가벼운 손놀림. 그러나 병규는 이대로 당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땅을 구를 때 몰래 집어든 돌멩이를 발칸을 향해 힘껏 던졌다.

딱!

발칸의 이마가 깨지며 푸른 핏물이 터져 나온다.

"크윽."

발칸이 움찔하자 병규는 곧바로 뒤돌아서며 다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아야 한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뿐이다. 녀석의 피가 푸른색이든 무지개 색이든 일단 살고 난 후에 따져도 따져볼 일이 아니겠는가.

"이놈이."

신경질적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쓱 훑어낸 살인마는 누런 이빨을 한껏 드러냈다.

발칸의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사냥감이다. 이 조그만 애송이 녀석이 유달리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다. 어느새 느긋한 웃음이 입가에서 지워졌다.

그는 다시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달아나 봤자 인간의 굼벵이 같은 움직임으론 도저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휙 하는 가벼운 바람소리가 들린다. 먼 거리를 단번에 압축하는 것 같은 엄청난 빠르기. 저 멀리 뛰어가던 병규가 어느새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잡았다."

발칸은 게걸스럽게 웃으며 병규를 휘어잡으려 들었다. 그런데....

"엇?"

득의에 찬 미소를 지으며 병규를 잡아채던 살인마는 나직한 경호성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던 애송이가 순간 쭉 하며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명백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가속도.

"이놈이!"

발칸은 다시 한 번 병규의 뒤를 쫓았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른 속력. 그가 발을 놀릴 때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이래도?"

발칸은 다시 한 번 우악스럽게 병규를 채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위급한 순가. 병규의 몸이 탄력적인 고무공처럼 쭈욱 앞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이번엔 좀 전보다 더 빠르다.

"무슨 이런."

살인마는 해괴한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된 녀석이 달릴수록 빨라진단 말인가. 게다가 이 녀석의 움직임은 묘하게 그와 닮은 구석이 엿보였다.

"이 녀석이."

짜증이 잔뜩 치밀어 오른 발칸은 전력을 다해 달렸다. 휘익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어느새 병규 앞을 가로막아 섰다.

"흐흐흐. 쥐새끼 같은...."

득의의 미소를 짓던 발칸은 그러나 뒷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앞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병규가 속도를 줄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통박치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단숨에 쪼개주마."

발칸은 주먹을 들어 병규를 찍어누르려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병규의 움직임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채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몸을 동그랗게 말더니 그의 옆구리 아래로 구르듯 쏜살같이 지나쳐 갔다.

"엇?"

어처구니없이 병규를 놓쳐버린 발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렇게 어이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끼놈."

발칸은 괴성을 토하며 튕기듯 발을 놀렸다. 파팡 하는 파공성과 함께 다시 병규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병규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지긴 했지만, 아직 그의 속도엔 미치지 못했다.

"어디 다시 한 번 빠져나가 봐라!"

추악한 얼굴 가득 분노를 띠고 발칸의 갈퀴 같은 손이 병규의 머리를 찍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손톱은 허공을 가로질러야 했다. 혹시나 또 옆구리 쪽으로 빠져나갈까 봐 상체를 잔뜩 숙이고 기다렸건만, 이 날다람쥐 같은 녀석은 오히려 그의 무릎과 가슴을 계단 밟듯이 밟고 등을 타고 넘어간 것이다.

황당할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발칸의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진다. 지금까지 별의별 인간을 다 만나 봤지만 이렇게 임기응변이 좋은 녀석은 처음이다. 게다가 갈수록 빨라지는 놈의 움직임은 또 뭐란 말인가.

일시 당황하던 살인마 발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놈.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헉헉."

병규는 죽어라 달렸다. 지금 그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주위 풍경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나가고, 휘리릭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는 두려울 정도였다.

얼마나 빠른지 눈이 미처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몇 번이나 나무에 부딪힐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살인마는 허깨비처럼 그를 수월하게 쫓아왔다. 거리가 좀 벌어졌다 싶으면 귀신처럼 다시 그의 눈앞에 나타나곤 했다.

촤악.

다시 한 번 녀석의 손이 머리털을 스치고 지나간다.

피부 끝이 쩌릿쩌릿하다.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던 오솔길이 조금 밝아진다. 숲이 끝나가는 것이다. 저 멀리 석양으로 붉게 물든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다 왔다. 이제 조금만 가면 된다."

어떻게든 마을에 도착하면 녀석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까지 날뛰지는 않겠지.

그러나 환희의 웃음을 그리던 병규는 마을을 불과 몇 미터 앞두고 몸서리쳐지는 소음과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환희의 웃음을 그리던 병규는 마을을 불과 몇 미터 앞두고 몸서리쳐지는 소음과 직면해야 했다.

푸욱.

등과 배가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가 등을 타고 뒷머리를 강타하더니 과격한 고통의 파도가 전신을 누빈다.

"커, 컥."

병규는 턱을 덜덜 떨며 고개를 떨구고 제 몸을 쳐다봤다.

그의 옷이 붉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배.

벌건 손이 그의 배를 뚫고 삐죽 튀어나와 있다. 피와 주름으로 징그럽게 번들어기는 그 손은 그가 보는 앞에서 뱃속의 내장을 하나씩 끄집어내 찢어발기고, 뭉갠다. 잔인하게, 그리고 처참하게.

"커헉."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몸에서 힘이 급격하게 빠져나가며 병규는 쌀자루가 무너지듯 허물어져 내렸다.

"좋아. 이제야 기분이 좋아지는군.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네 녀석의 모습이 정말 꼴좋구나. 크크크크."

그를 내려다보며 추악한 미소를 흘리는 발칸. 침이라도 뱉고 싶지만 의식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안 돼. 아직 의식을 잃으면 안 되지. 이 몸을 그렇게 고생시켰으니 지금부터 벌어질 화려한 쇼를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할 의무가 너에게 있거든. 자 어떻게 죽여줄까? 그래. 넌 특별히 온몸을 터뜨려주마. 풍선처럼 말야. 빵 하고 터지는 소리가 아주 기분이 좋을 거야. 킥킥킥. 온몸이 터져나간 네 꼴을 과연 어떨까?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킥킥킥킥."

'망할 자식.'

저런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 죽어야 하다니, 돌아보면 병규 자신의 인생은 정말로 별 재미도, 의미도 없었다.

항상 당하고 산데다가 언제나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어쩌다 자신의 인생이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나 싶은 심정이다.

이도재와 이상철이라는 몹쓸 녀석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아니면 가족의 외면을 참지 못하고 시골의 다 쓰러져가는 이층 목조건물로 유배 오게 된 후부터?

모를 일이다.

'힘만 있었다면. 내게 힘이 있다면 이런 참담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짧은 생을 살고 죽는 순간까지 후회와 참담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인 것 같다.

그때, 희미해져 가는 청각으로 작은 소란이 들려왔다.

"이놈이 감히 사람을 해치다니!"

산천초목이 몸을 떨 만큼 우렁찬 음성. 병규는 가물거리는 눈에 힘을 줬다. 우렛소리를 동반하고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집 채만한 호랑이. 그것도 잡 털 하나 섞이지 않은 거대한 백호의 모습이었다.

'이젠 환각까지....'

피를 게워내며 병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지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지?

"이봐. 일어나."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병규는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아직 무겁고, 희미한 시야는 손으로 비벼 봐도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힘들게 상체를 일으킨 병규는 저혈압 환자처럼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붕 뜬 것 같던 정신이 차츰 돌아오고, 부옇던 시야가 정상으로 회복되자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띠꺼운(?) 표정의 집채만큼 거대한 호랑이, 그것도 눈처럼 하얀 백호였다.

"헙."

호랑이의 웅장한 자태를 본 병규는 금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폐마저 잔뜩 오그라들어 비명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이 호랑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간신히 잠들기 전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온다.

'그래. 바람이나 쐴 겸 약수터에 갔다가... 살인마와 마주쳤지. 그래서 난....'

끊어진 필름들이 한꺼번에 와르륵 정보를 쏟아내며 조각난 기억들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뱃속을 파고들던 그 고통, 자신을 내려다보며 기괴하게 웃던 괴인의 추악한 얼굴.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현기증과 통증. 그리고 의식이 무너지던 희미한 순간에 본 집채만한 백호.

'맙소사.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야?'

꿈이길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백호는 그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그, 그놈은?'

병규는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살폈지만 발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그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거대한 백호뿐.

'흐미~.'

커다란 맹수가 그를 노려보며 식욕을 과시하고 있으니, 이건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꼬. 병규는 정말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데, 그를 향해 두 눈을 부라리고 있던 백호가 '파하'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놀랍게도 짐승에 불과한 호랑이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뜨헐. 진지한 표정으로 있으려니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것 같구만."

"...?"

"야야. 긴장하지 말고, 담배 없냐?"

"...??"

병규는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호랭이가 말을 한다?'

이게 무슨 아주 공갈 염소 똥 같은 일이란 말인가.

병규가 선뜻 대답을 않자 백호가 인상을 찌그리며 독촉했다.

"담배 말야. 담배."

"...!"

호랑이가 태연히 말을 하더니, 이젠 담배까지 달라고 협박한다.

"하, 하하. 그래. 그랬던 거구나."

땡땡 얼어붙었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헤 벌린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학교 뒷산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온다는 소문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러고 보니 발칸에게 당했던 상처들도 말끔하게 나았고, 흉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역시. 꿈이었던 거야. 하하하. 다행이다. 꿈이어서."

병규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과 더불어 대소를 터트렸다. 꿈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 긴장이 탁 풀려 전신이 흐물흐물 해진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때. 병규는 지금 자신이 그런 경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눈앞에 있는 것이 호랑이가 아니라 뿔이 삼천 개쯤 달린 흉악한 사탄이라도 해도 이제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이마를 찡하게 울리는 통증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짜식이. 담배 달라니까 무슨 헛소리가 그리 많아?"

병규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은 백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마를 짜릿하게 자극하는 통증에 병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절대 아파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그의 머리통을 쪼갤 듯 관통한 감각은 분명 통증이다.

그렇다면 웅장한 자태로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거대한 백호도 현실이란 말인가. 그리고 놈이 으르렁거리며 말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담배를 요구하고 있는 것도 생생한 라이브라는 말이 되는데....

"아직 정신 못 차렸냐? 담배!"

호랑이의 고함에 흠칫 놀란 병규는 반사적으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다행이 이도재 녀석에게 비싸게 주고 산 담배가 있었다.

"넌 젊은 놈이 군바리처럼 무슨 디스냐? 요즘 좋은 담배 많이 나왔잖아. 불!"

이놈의 호랑이. 남의 담배를 얻어 피우는 주제에 잔말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호랑이의 앞발 휘두르기 한 방이면 저 하늘의 별이 될 신세인데. 병규는 조심스레 불을 당긴 라이터를 백호의 입가로 가져갔다.

"조심해. 수염 태우지 말고."

괘씸한 호랑이는 잔소리에 이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협박까지 한다.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외줄타기를 하는 심정으로 호랑이 입에 물려진 작은 담배게 불을 붙였다.

"후~ 좋군."

말년 병장 같은 방만한 자세로 호랑이는 들숨과 함께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천연덕스럽게 연기로 동그라미까지 만들어대는 모습에 병규는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고 있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믿자니 황당하고, 안 믿자니 욱신거리는 두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좀 전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처럼 미쳐 날뛰더니. 지금은 또 양가댁 규수인 양 얌전을 떠는군. 아직도 분위기 파악이 안 되냐?"

담배를 뻐끔거리던 백호가 넌지시 묻는다. 좌우로 쭉 찢어진 백호의 입 모양이 어쩐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솔솔 풍긴다.

"저, 저기. 호랑이님."

병규는 주저주저하며 간신히 말문을 연다.

"호랭이라고 불러."

"네. 호랭이님."

"그냥 호랭이."

"네, 호랭이. 그런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된 거라...."

호랭이라는 이름의 백호가 고개를 쳐들며 깊은 숨을 내뱉는다. 삐죽삐죽 솟은 송곳니 사이로 매캐한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인다.

"후~ 젠장 담배 맛 죽이는군."

호랭이가 대답은 않고 공연히 분위기만 잡자 병규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런 병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랭이가 입꼬리를 좌우로 쭉 넓히며 웃어 보였다.

"뭐, 그렇게 불안해할 건 없어. 별일 아니었으니까."

"벼, 별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병규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별일 아니었지. 닥치는 대로 살인을 하는 마귀 같은 인간이 나타났단 소리에 어렵게 인간계로 걸음을 했더니 웬 애송이 녀석이 피바다 속에 누워있지 않겠냐? 아! 배에 이만한 구멍이 났더구만."

호랭이는 그 큰 앞발로 그의 머리통만 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인다.

"따, 딸꾹."

"내장이란 내장은 죄다 뱃속에서 쏟아져 나와있더구먼. 황소 응아처럼 뭉개진 간은 이쪽에, 찢어진 걸레 꼴이 된 대장은 저쪽에, 접시꽃 당신처럼 생긴 췌장은 저쪽에, 허파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꽉꽉거리며 굴러다니지, 캬~. 정말 사진이라도 찍어서 엽기 사이트에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니깐."

"딸꾹 딸꾹 딸꾹."

호랭이의 현실감 넘치는 설명이 이어질수록 병규는 경련을 일으키듯 요란하게 딸꾹질을 해댔다. 들으나마나 호랭이가 말하는 애송이는 바로 그 자신일 게 뻔했으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어?"

병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호랭이의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에 겪은 일장의 활극이 모두 현실이었던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의 몸에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네가 알고 싶은 게 바로 저거냐?"

그의 궁금증을 눈치 챈 호랭이가 앞발로 한쪽을 가리켰다.

"등 뒤에 뭐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본 병규는 눈앞에 펼쳐진 생각지도 못한 장면에 아연실색해야 했다.

그의 등 뒤, 난장판이 되어버린 숲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 추악한 면상의 살인마도, 배 밖으로 내장이 툭툭 떨어지던 믿지 못할 장면들도 모두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는 것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숲의 전경도, 그 폐허 속을 뒹굴고 있는 잔해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반쯤 뭉개진 숲 속엔 또 하나의 그가 있었다. 또 다른 병규가 검붉은 핏물을 뒤집어쓴 채 그곳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왜 내가 또 있는 거야!"

병규는 벌러덩 자빠지며 경악성을 질렀다. 허둥지둥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 높은 코, 짙은 눈썹에 입술 아래의 점까지. 영락없는 그의 얼굴이다.

핏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가 얼굴을 만져보려 손을 내밀었지만 허무하게 쓱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몇 번을 해봐도 그는 자신의 몸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소용없다. 이쪽과 그쪽은 전혀 다른 세계야. 아무리 그래 봐야 네 몸뚱이를 만질 수는 없다."

"저, 전. 죽은 건가요?"

병규가 울먹이며 묻자 호랭이는 담배를 빙글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젠장."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병규는 한 섞인 욕지기를 터트렸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형편이라 괜한 머리털만 쥐어뜯었다.

"저승사자님. 저승사자님. 저 어떻게 살아날 수 없을까요?"

병규는 무섭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호랭이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고 싶었다. 불가능한 건 알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저승으로 가기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억울했다.

"놈. 내가 어딜 봐서 음침한 저승사자같이 생겼냐?"

담배를 뻐끔거리던 호랭이가 버럭 화를 낸다.

"그, 그럼. 저승사자가 아니신가요?"

"당연하지. 그런 구닥다리 몰개성한 놈들과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이 호랭이님의 위신을 깎는 일이다."

"그럼. 호랭이는 대체 뭐 하는 분이죠?"

"나? 나야 당연히 신선이지."

"시, 신선요?"

병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두 눈만 깜빡거렸다.

'이 호랑이가 지금 나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거야?'

그런 생각도 당연한 것이, 불량배인 양 학생의 담배나 삥 뜯고 있는 호랑이를 누가 신선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놈 혹시 사람을 홀리는 여우가 둔갑한 것은 아닐까?'

병규는 정말로 진지하게 호랭이를 의심했다.

"놈. 못 믿겠다는 표정이구나. 왜? 내가 신선이라는 말이 그렇게 믿기 힘드냐?"

병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믿기 힘든 게 사실이네요."

"크흐. 그 놈의 선입관이 문제야. 신선이 꼭 가지런하게 뒤로 넘긴 백발에 수염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중후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여야 한다고 법률로 정해놓기라도 했냐? 하여간 미디어가 문제라니깐.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쓸데없는 편견이나 심어주고 말이야. 에잉."

호랭이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한 개비 더 줘봐."

"네네."

병규는 윗주머니의 담배를 꺼내 호랑이 입에 물리면서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영혼뿐인 제가 어떻게 담배를 가지고 있는 거죠? 담배는 분명 저쪽의 제게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물음에 호랭이는 귀찮은 티가 역력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원래 사람이 죽을 때 몸에 걸치고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오게 돼 있어. 묻어온다고 해야 하나? 뭐 가지고 온다고 해봐야 그 물건의 실체가 아닌 영기 같은 것이긴 하지만. 넌 지금 영혼인데도 뻔뻔하게 옷을 입고 있잖아. 옛 왕들의 무덤에서 온갖 보물들이 출토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지."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종교들에서는 모두들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간다고 하던데요."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인간세상에서 귀중한 돈과 금은 저승에선 길가의 돌멩이보다 가치가 없으니까. 잔뜩 싸 짊어지고 가 봐야 힘만 들 뿐이다."

호랭이의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전 어떻게 되는 거죠?"

지금 병규에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혼이 육신을 떠나온 것으로 보아 자신은 죽은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의 앞에 턱하니 앉아 담배나 뻐끔거리고 있는 호랭이는 사신이 아니란다. 그러면 대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절 데려갈 저승사자는 언제 오는 건가요?"

"음. 저승사자? 아아. 저승사자 말이지."

그의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하던 호랭이는 커다란 두 눈을 게슴츠레 치켜뜨며 말했다.

"글쎄다. 아마 네가 사고로 뒈지거나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는다면 안 호, 육십 년 정도 후에는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병규는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네? 오, 육십 년 후에요? 그, 그럼 전 그동안 어떻게 되는 거죠?"

"뭘 어떻게 돼. 그냥 육신으로 다시 들어가면 되는 거지."

호랭이의 핀잔에 울상이 된 병규는 자신의 육체는 손으로 휘휘 저어 보였다. 영혼인 그의 손은 자신의 육신을 휙휙 통과해 버렸다.

"보다시피 그게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러는 거죠."

병규의 말에 호랭이가 피식 웃었다.

"그거야 당연하지. 인간계과 선계는 한쪽으로만 보이는 유리와 같아서 볼 수는 있어도 간섭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나 정도나 되는 신선의 도력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

"아아. 그렇군요. 전 선계에 있는 것이라 인간계에 있는 육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군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병규는 문득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랭이의 말을 듣자니 그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왜 선계에 와 있는 것일까.

"설마. 절 데려온 분이 바로 호랭이... 당신이십니까?"

병규의 서늘한 시선에 뜨끔한 호랭이는 고개를 슬쩍 서산마루로 돌리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신선들은 인간들의 일에 참견 못하게 되어 있거든. 하지만 너의 경우는 본의 아니게 휩쓸리게 된 상황이라서 말이야. 그 인간같지도 않은 놈을 발견하고 쫓으려고 했는데 그만 죽어가는 네 녀석이 눈에 띈 거야. 어쩔 수 없이 놈을 포기하고 도술로 널 치료했지. 그렇게 멋지게 사라지려고 했는데, 마침 너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더란 말씀이야."

"담배... 말인가요?"

"흠흠. 그래. 연초. 그래서 치료해 주느라 고생도 했으니 담배 한 개비 정도는 얻어 피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널 살짝 선계로 데려온 거지."

"그럼 그냥 제 주머니에서 꺼내 가시지 뭐 하러 힘들게 영혼을 끌고 오신 건가요?"

"저런. 신선씩이나 되는 존재가 남의 물건을 슬쩍해서야... 체면문제지. 인간에게 공양 받은 것이라면 상관없기는 하지만 말이야."

병규의 두 눈이 가늘게 여며진다.

"공양? 협박 아닌가요?"

"허허. 그 무슨 말씀. 내가 생긴 게 좀 험악해서 가끔 오해를 받긴 하지만 절대로 강제로 물건을 갈취한 적은 없다. 허허허."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무안한지 호랭이는 연신 목덜미를 벅벅 털어댔다.

"에효."

병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니. 신선씩이나 되는 호랭이께서 대체 뭐가 부족해 가난한 고등학생을 삥 뜯으십니까?"

병규의 지적에 호랭이는 미안하기는 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말야.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말야. 요즘 삼신 할마탱이가 잠잘 시간도 모자를 정도로 일감을 주면서 정작 월급을 쥐꼬리만큼밖에 안 주잖아. 그래서 뭐, 어쩔 수 없이."

다시 한 번 병규의 입이 뜨억 하고 벌어졌다. 담배 피는 호랭이에 이어 이제는 삼신할매의 등장이다.

"대체 삼신할머니께서 무슨 일을 시키는데 그래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의 인상이 대번에 콱 찌그러졌다. 삼신할매를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그 놈의 삼신할마탱이. 가뜩이나 이러저러한 일로 바빠 죽겠는데, 수입이 시원찮다고 나보고 부업까지 뛰라잖아."

"대체 무슨 부업을?"

"뭐 별건 아니야. 무당 삥 뜯기랑 부적 그리기, 에... 그리고 요즘은 구슬 꿰기랑, 봉투 붙이기 같은 것도 시키더구만."

"...."

구슬 꽤는 호랑이.

작은 구슬들을 실에 꿰느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을 떠올리니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부적 그리기와 봉투 붙이기는 더더욱 가관이라 감히 상상도 못할 지경이다. 병규는 헛기침과 심호흡으로 웃음을 간신히 참아 넘김 뒤 조용히 물었다.

"흠흠. 삼신할머니면 분명 아이를 점지해 주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그런 일을 시키는 거죠?"

호랭이는 긴 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토해 내며 세상 다 산 노인네 같은 표정이 되었다.

"후. 그것도 다 호랑이 담배 필 시절의 얘기지. 요즘 같은 세상에 애가 안 생기면 병원을 찾지 누가 삼신할마따구를 찾냐?"

호랑이 담배필 적 얘기를 담배 피는 호랑이에게 듣자니 참 묘하게 현실감이 넘친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뭐, 한동안 의사 노릇하다가 안 되니 다시 커플 매니전지 카풀 매니저인지 하는 걸 해보겠다고 부산을 떨더구만. 될 리가 있나? 요즘 세상은 그저 인터넷이 최고야. 하여간 그것도 실패하니까 괜히 엉뚱한 날 갈구는 거지 뭐. 나 원 참 더러워서. 개인사업을 차리던가 해야지."

호랭이의 맥 빠진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의 푸념에 불과하지만 요즘 같은 불황기엔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까 정리해서 설명하면 그 인간의 심장에 미친 살인마를 뒤쫓던 중 다 죽어가는 저를 발견하고 치료해 주셨다. 치료를 마친 후 그냥 선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제 품에서 담배 냄새가 솔솔 풍기더라. 그래서 담배나 좀 얻어 피우잡시고자 제 영혼을 잠깐 선계로 불러들였다, 이 말씀이시네요?"

"뭐. 짧게 정리하면 그런 거지. 널 치료했을 때엔 이미 그 악독한 놈은 멀리 도망가서 쫓기엔 무리였거든."

호랭이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다.

"휴."

병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담배 한 개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을 선계까지 끌고 왔다는 호랭이의 말은 황당하지만 어쨌거나 호랭이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것도 생명을 구해준 구명지은.

"구해주신 은혜, 정말로 잠사합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 백골이 되어, 사해 바다를 표류하다 멸치 똥이 되는 한이 있어도 결코! 절대로! Never! 잊지 않겠습니다."

병규는 호랭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조아렸다.

"그, 그래? 잊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 커험."

호랭이는 불편한 자세로 병규의 인사를 받았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시 이제 은혜에 대해 인사도 드렸고 해서 말입니다만."

병규가 눈을 빛내며 호랭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볼일이 끝났으면 그만 절 다시 몸으로 보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응? 응? 아. 몸? 그래. 보내줘야지. 알았다. 기억만 지우고 나서 바로 돌려보내 줄게."

"넷?"

조신한 자세로 부탁하던 병규는 기억을 지운다는 호랭이의 말에 팔짝 뛰었다.

"기억을 지워요? 왜요?"

"당연히 선계가 있다는 걸 평범한 인간이 알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지."

'그런 줄 알면 아예 날 이리로 안 데려왔으면 됐을 거 아뇨!'

병규는 불만이 뭉클 일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혹시나 이 자칭 호랭이 신선이 앙심을 품고 자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만 손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제 기억을 지우실 생각이죠?"

"흠흠. 잠깐만 기다려."

그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않고 호랭이는 담배를 입에 꼬나문채 고개를 휘휘 돌렸다.

"가만있자. 어느 놈이 적당한가."

수풀을 뒤적이던 호랭이는 주먹만한 돌멩이 하나를 앞발에 들었다. 공중으로 휘휘 던져보더니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좋아. 이게 적당할 것 같군."

순간 병규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그걸로 제 뒤통수를?"

병규가 호랭이 앞발에 쥐어진 짱돌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자, 호랭이는 입가를 좌우로 쭉 늘리며 찐하게 웃는다.

"역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지."

"히익!"

병규는 비명을 질렀다.

"그, 그걸로 뒤통수를 잘못 맞으면 한 방에 저승구경 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걸로 해주리?"

호랭이는 발톱을 잔뜩 세운 앞발을 들어 보였다.

"히, 히끅."

"괜찮아. 한두 번 하는 장사도 아니고. 깔끔하게 기억만 지워줄게."

"만약 잘못돼서 제가 죽으면요?"

"뭐. 그것도 나름대로 깔끔한 처리 아니겠어?"

깔끔한 처리라는 것은 옳은 말이다. 저걸로 맞았다간 적어도 뒤통수만큼은 깔끔하게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 피는 호랭이가 음침한 미소를 풍기며 어기적거리며 다가서자 병규는 좁혀진 거리만큼 슬금슬금 물러섰다.

"걱정 마라. 고통은 순간에 불과하니까 말야."

돌멩이를 쥔 앞발을 스윙하듯 휙휙 돌리던 호랭이가 돌연 병규에게 달려든다.

"으헥."

짱돌을 손에 들고 달려드는 호랭이의 박력에 병규는 자지러지게 놀랐다. 머릿속으로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자연 다큐멘터리가 떠오른다.

'호랑이의 앞발 후려치기가 몇 kg의 충격이더라?'

정확한 수치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한 방에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두려운 마음이 왈칵 솟자마자 그는 호랭이의 서슬 퍼런 공격을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달아났다.

"이놈아 도망가지 말고 그냥 얌전히 맞아."

"싫어요. 그걸로 한 방 맞으면 죽는다고요."

"그건 장난이고. 안 아프게 해줄게. 나도 명색이 산신령인데 설마 그렇게 무식하게 하겠느냐?"

"그걸 어떻게 믿어요?"

호랭이가 펄쩍펄쩍 뛰며 뒤를 쫓았지만 병규는 그때마다 요리조리 잽싸게 몸을 피해버렸다.

인간의 몸놀림이 감히 야성을 떨칠 수 있을까만은 이상하게도 잡을 만하면 쭉 하고 병규의 몸이 빨라지고, 다시 잡을 만하면 또 쭉 하고 빨라지는 통에 도무지 짱돌로 찍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은 달릴수록 점점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엔 그래도 사람 같더니, 나중엔 지가 제트비행기인 줄 착각하는 것처럼 맹렬히 달려댄다.

"하이그. 이놈아. 그만 좀 달리고 얌전하게 한 대만 맞아라. 제바알."

호랭이는 안달이 난 목소리로 애걸했지만 병규는 오히려 혀를 내밀어가며 죽어라고 내뺐다.

"헹. 싫네요. 뒤통수에 짱돌을 꽂고 사느니 차라리 죽을 때까지 도망 다니겠습니다."

"이놈아. 이게 그냥 짱돌인 줄 알아?"

호랭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나 같은 산신령이 쓰면 하잘것없는 작대기도 신물이 되는 법인데, 이 짱돌이라고 평범하겠느냐? 외상없이 기억만 날름 지워줄테니 제발 말 좀 들어라."

"싫네요."

"이놈. 당장 거기 안 서면 확 잡아먹을 테다."

"어차피 돌 맞아 물려 죽으나 마찬가지랍니다."

달래도 보고, 애걸도 해 보고, 협박도 해 봤지만 병규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젠장. 괜히 장난을 쳐 가지고'

뒤늦게 후회하는 호랭이였지만 아무리 달래고 윽박질러도 영악한 병규는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쫓아다니던 호랭이 신선임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헉헉헉. 너 무슨 놈의 발이 그리 빨라. 능력자였냐?"

"에? 능력자요?"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능력자 아냐? 그것 참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호랭이는 콧수염을 당기며 생각에 잠긴다.

"능력자란 게 뭐죠?"

"뭐, 말 그래도 특이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특이한 인간을 말하는 거지. 불을 마음대로 부린다던가, 신통력이 생긴다던가 하는 거 말야.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야. 그나저나 너 다리가 빨라진 게 언제부터냐?"

"그게 조금 전부터인데요."

"허허. 그거 이상하네. 보통은 어릴 적부터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마련인데."

호랑이는 혀를 끌끌 찼다. 병규는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은 채 괜한 뒤통수만 긁적였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놈아. 이리 가까이 와봐. 할 말이 있다."

"에이. 짱돌로 찍으려고 그러는 거죠?"

"안 해. 이놈아. 네 녀석 따라다니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엥. 그렇게 안심시킨 다음 몰래 후려치려는 속셈 다 알아요."

"어허~! 설마 신선인 내가 체통도 없이 한입으로 두말하겠냐? 정말로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이리 가까이 와봐."

못 미더운 표정으로 호랭이를 쳐다보던 병규는 우물쭈물 가까이 다가갔다.

"쯧쯧. 어찌 그리 신선 말을 못 믿어. 일단 담배나 하나 줘봐라."

병규가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주자 호랭이는 시골 영감처럼 뻐끔뻐금 연기를 피워댄다.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 양반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병규는 불안한 표정으로 호랭이의 눈치만 봤다.

"할 말이 뭐고 하니."

분위기만 잡고 있던 호랭이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나랑 계약 좀 하자."

"계약요?"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무슨 계약인데요?"

"사실 이 몸은 곧 힘을 잃는다."

"네? 왜요?"

"너무 큰 힘을 썼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널 살리느라 너무 큰 힘을 썼다는 소리다. 배때기에 이만한 구멍이 뚫린 놈을 살려야 했으니 좀 큰 힘을 썼겠냐? 덕분에 몇 백년분의 도력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그런."

병규는 당황했다.

불량스런 양아치처럼 담배 삥을 뜯고, 기억을 지워주겠다며 짱돌을 휘두를 때만 해도 그렇게 밉살스럽게 보일 수 없더니, 이제는 고마움을 넘어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 세상에 공짜란 없다. 이런 말 잘 알지?"

"네."

"그래. 안다니 다행이구나. 그런 의미로 두 가지만 내게 약속해다오."

"두, 두 가지요? 어떤 건데요?"

"그것이 뭔고 하면...."

호랭이가 병규에게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호랭이가 힘을 찾게 될 때까지 숙식을 제공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병규 때문에 놓친 살인마, 발칸을 잡을 수 있도록 협조할 것. 병규로서는 두 가지 다 들어주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큰 호랑이를 부양하라니. 아마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주민들의 신고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나 호랭이는 이 문제게 대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난 도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조금 후엔 몸을 작은 강아지만 하게 변화시킬 게야. 왜 굳이 그런 일을 하는고 하면 그 편이 도력을 모으는 데 훨씬 능률적이기 때문이지. 하여간 그렇게 한 번 몸을 작게 변화시키면 다시 도력이 회복될 때까지 지금의 모습으로 못 돌아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그 모습이 되면 내 힘을 모조리 잃게 된다는 것이야. 도력은 물론이고, 태산을 허물어 버릴 힘조차 사라져 버리게 되지. 정말로 강아지만한 기운밖엔 남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니 원래의 도력을 되찾을 때까지만 날 돌봐달라고 하는 게야. 네 생명을 구하다 이렇게 된 일이니 당연히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생각보다 논리적인 호랭이의 반격에 병규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들어줄 수는 없다. 첫 번째 요구는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어도, 두 번째 요구만큼은 절대로 불가다. 발칸을 같이 잡자니. 놈에게 당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한 병규에겐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쯧쯧. 걱정도 팔자다. 누가 너보고 그 인간 같지도 않은 놈과 싸우래? 넌 그냥 녀석 근처까지만 날 데려다 주기만 하면 돼. 그렇게 하면 내 도력으로 놈을 잡을 수 있게 될게다. 괜히 내가 널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야. 네 다리가 무척 빨라서 도움이 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지."

"차라리 경찰에 맡기는 건 어때요? 안 그래도 요즘 발칸 때문에 군경에 비상이 떨어진 모양이던데요."

"그 녀석의 움직임 못 봤냐? 경찰은 녀석의 그림자도 못 잡을걸?"

"하지만 경찰은 총도 있고, 인원도 많으니."

"소용없다. 그렇게 잡힐 녀석이었으면 벌써 잡혔겠지. 녀석이 한반도에 오기 전에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 그리고 일본을 들쑤셨다는 얘기도 못 들었냐.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호랭이의 설명을 듣던 병규는 문득 궁금해졌다.

"발칸은 도대체 뭐죠? 아까 말했던 능혁자인가 뭔가 하는 건가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놈은 달라. 사실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는 나도 알지 못 한다. 왜냐하면 녀석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네?"

"이계. 다른 세상에서 온 녀석이야. 발칸은."

병규는 아연실색했다. 이계라니.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니. 사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발칸의 가슴은 갈비뼈의 모양대로 피부가 얇게 주름이 져 있었는데, 이것이 마치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호흡을 할 때마다 촤르르 일어나곤 했다. 아무리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해도 그런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떠냐?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줄 만하지 않냐?"

호랭이가 은근한 음성으로 물어온다.

'근처까지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된다라.'

병규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지그시 눈을 감자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다.

푸욱 하고 등을 뚫고 뱃속을 파고들던 녀석의 주름 가득한 손. 쏟아지던 내장. 붉게 변해버린 시야. 미칠 것 같은 고통. 병규의 입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불끈불끈 솟는 복수심.

"정말 발칸 앞에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병규는 재차 확인했다.

"물론.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화통한 호랭이의 약속에 병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잘 부탁해요."

"그럼 알았다."

흐믓하게 웃은 호랭이는 곧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얼핏 듣기엔 먹이를 위협하는 범의 목 울림과 비슷한 소리였지만, 묘한 가락이 느껴졌다. 이것이 짐승인 그가 주문을 읊는 방법이었다. 이미 깨달음을 얻은 그로서는 굳이 복잡한 주문으로 주술을 발동시킬 필요가 없었다. 신기의 구현은 의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곧 펑 하는 연기와 함께 호랭이의 몸뚱이가 작아졌다. 강아지만 해질거라 하더니 정말로 그의 주먹만해졌다.

그것도 몰라볼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다.

큰 머리. 역시나 덩치에 비해 큼직한 발바닥. 동그란 두 눈. 앙증맞은 코에 복슬복슬한 하얀 털까지.

정말로 인형 같은 깜찍한 모습이 아닌다.

본신이 능글맞은 호랑이 신선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당장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비벼댔을지도 모른다.

"휴휴."

가슴을 쓸어내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은 병규. 이번엔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호랭이를 내려다본다.

"정말로 원해래도 못 돌아가는 거죠?"

"그래."

"정말이죠?"

"신선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마."

씩 웃는 병규.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주섬주섬 찾는다.

"뭘 찾는 게야?"

불길한 예감이 들은 호랭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병규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정답게 대답했다.

"정말로 고전적인 방법이 최고인지 한 번 실험해 보려고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는 그의 손엔 큼직한 돌멩이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따, 딸꾹."

호랭이 신선님의 얼굴이 참으로 박진감 넘치게 변해버렸다.

병규가 눈을 뜨고 제일 처음 본 것은 하늘이었다. 물통에 푸른색 물감을 딱 한 방울만 풀어놓은 것 같은 밋밋한 색감. 그 아래를 흐르는 구름 역시 뭉기적거리듯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왜 이리 세상이 흐려 보일까.'

병규는 눈에 뭐가 들어갔나 싶어 손으로 비벼봤다. 안경이 잡혔다.

'안경이 더러워진 걸까?'

찌그러진 안경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안경을 눈에서 떼니 세상이 한층 밝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너무도 맑고 투명한 세상. 안경을 쓴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가볍고 밝은 세상이다.

어찌된 일인지 시력이 좋아진 것이다.

병규는 굳이 이유를 따지려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죽었다 새로 태어난 목숨. 복잡한 생각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병규는 안경을 휙 집어던졌다. 코를 내리누르고 있던 안경을 벗어버리니 등에 지고 있던 멍에마저 훤하게 날아간 기분이다.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윽."

아랫배가 욱씬 쑤셔온다.

괴롭지만 그 통증이 반갑기도 하다. 이제야 육신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움직이기 불편할 게다. 도술로 대충 치료하긴 했지만 충격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불현듯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하얀 털 뭉치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랭이다.

백곰인 양 크고 위압적이던 거대한 백호의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하얀 털의 강아지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잘 만든 인형처럼 귀엽게만 보였다. 안아보려고 무심결에 손을 내밀던 병규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저게 겉보기엔 순진무구(?)한 강아지인데, 속은 최소 몇 백 년은 묵은 능구렁이다. 그것도 담배 냄새에 환장하는 연초 마니아.

문득, 씨가를 물고 있는 호랭이 새끼를 떠올렸다.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머금으며 그 귀여운 면상으로 타락한 마피아처럼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아기 호랑이.

'미치겠군.'

한동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무진장 애써야 했다. 덕분에 등의 통증이 도져서 눈물을 찔끔거려야 했다.

간신히 담배 피는 아기 호랭이의 마수에서 회복한 병규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불과 몇 시간 만인데 기름칠 안한 톱니바퀴인 양 전신이 삐거덕거린다.

충격이 남아있다는 호랭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부위에 약한 통증이 왔다.

배 부위를 내려다보니 길게 찢어진 상의 안쪽으로 달 표면의 크레이터처럼 움푹 파인 흉터가 보였다.

놈의, 발칸의 손이 튀어나왔던 자리다. 드릴로 파헤치듯 살점을 파고들던 그 섬뜩한 감각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새삼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든다.

'젠장 침이라도 뱉어줬어야 하는 건데.'

"뭘 그리 궁시렁거려."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 펄쩍 뛰어오르며 핀잔을 준다. 어느 틈에 그의 주머니에서 빼냈는지 담배를 물고 있었다.

"불 좀 붙여줘."

입에 문 담배로 그의 뺨을 쿡쿡 찌르며 졸랐지만 병규는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싫어요."

"뭐샤! 작아졌다고 날 우습게 볼 생각이냐?"

호랭이가 갈기를 치켜세우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병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천만에요."

"그럼 뭐가 문제야?"

"안 어울려서 말이죠."

"뭐? 뭐가 안 어울려!"

"자라나는 새싹에게 흡연은 심각한 피해를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 귀여운 얼굴에 담배라니요. 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이, 이놈이. 감히 누구에게!"

호랭이가 그의 어깨를 물며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 작은 이빨로 아무리 아등바등 힘을 써봤자 따끔거리기만 할 뿐이다.

병규는 놀리듯 비실비실 웃어대며 충격적인 일격을 날렸다.

"어디서 들었는데요. 애완동물에게 너무 잘해주면 나중에 버릇이 나빠진데요."

"크아아악."

급기야 호랭이가 폭주해 버렸다. 병규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발톱을 세워서는 땅을 파듯 그의 머리를 마구 긁어댄다.

"야야야. 그건 좀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짓이얏!"

"진짜 아프다니깐요. 그러다 제 머리 다 빠지겠어요."

"시끄러. 이 배은망덕한 놈아. 기껏 힘들게 살려놨더니 뭐라고? 애완동물? 죽어라 죽어!"

"야야야야."

병규와 호랭이는 그렇게 툭탁거리며 좁을 산길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이. 이게 누구야.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신 병규 어르신 아니신가."

좁은 산길을 내려가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또 그 녀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쭈굴. 이 녀석 봐라. 어른이 되라고 했더니 불장난이라도 했나. 아주 거지꼴이 됐구만."

발칸에게 쫓기느라 엉망이 된 병규의 옷을 보고 녀석들은 캘캘거리며 비웃음을 날린다.

"뭐냐? 이 녀석들은?"

호랭이가 코웃음을 치며 묻는다. 병규는 깜짝 놀랐다. 호랭이가 말하는 걸 저 녀석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호랭이는 태연자약했다.

"걱정 말아라. 지금 내가 하는 말은 너만 들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저 녀석들은 뭐냐니깐?"

"뭐, 흔한 불량배들이죠."

"불량배?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널 잘 아는 모양인데. 설마 너 이런 녀석들에게 당하고 산 거냐?"

병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호랭이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좀 비참하게 느껴진다.

한편 시빗거리를 찾던 이상철은 일그러지는 병규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쭈. 이놈 봐라. 표정 죽이는데? 허이구야. 이건 또 왠 개새끼냐? 설마 비상식량하려고 주워온 거냐?"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병규의 뺨을 툭툭 쳐온다.

아마 전 같았으면 이 돼지같이 생긴 녀석의 못된 짓거리에 어깨를 움츠리며 눈물을 글썽였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발칸과 집채만한 호랑이를 상대하고 난 뒤라 녀석의 짓궂은 행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진다.

오히려 귀엽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웃어? 씨벨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이상철은 보기 흉하게 인상을 쓰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치켜들었다.

'죽어?'

병규는 화가 콱 치밀었다.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부웅 하고 떨어지는 이상철의 큼직한 주먹. 그러나 병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피한답시고 가볍게 발을 움직였는데 무려 오, 육 미터 밖을 미끄러지듯 물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엇?"

졸지에 허공에 주먹질을 한 이상철의 하얗게 놀라는 얼굴. 그러나 놀라기는 병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칸이나 호랭이 때도 그렇지만 갑자기 빨라진 다리에 영 적응이 안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움직이는 것일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가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데 호랭이가 장난스레 말을 건넨다.

"저렇게 느린 녀석들이 과연 널 때릴 수 있을까?"

"...?"

"예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넌 충분히 강해. 적어도 저 녀석들보다는 100배 정도 말이지."

"...."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빨라진 다리에 밝아진 눈.

갑작스런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발칸에게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외친 외침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걸 바랐지.'

옛날부터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바로 이런 힘이었다.

"어쭈, 피해?"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던 이상철이 뱃살을 출렁거리며 다시 달려든다. 좀 전의 헛손질이 쪽팔렸는지 이번엔 고함까지 지르며 혼신의 힘을 쏟는다.

"...."

예전엔 그렇게 무섭게만 보이던 녀석의 솥뚜껑만한 주먹이 지금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리게만 느껴진다.

주먹이 가까워질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 병규는 마지막 순간, 한줄기 바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휘릭.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그는 어느새 이상철의 등 뒤에 서게 되었다. 이번에도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게 된 이상철. 녀석이 발을 꼬며 휘청거리자 넘쳐나는 살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그 모습을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던 병규는 녀석의 엉덩이를 가볍게 발바닥으로 밀어주었다.

"어이쿠."

묵직한 소음과 함께 녀석이 엎어진다. 미련한 몸이라 넘어지는 것도 요란하다.

"이런 젖 같은 가식이!"

지켜보고 있던 이도재가 갑자기 덤벼들었다. 온갖 폼을 다 잡는 녀석답게 부웅 하고 발을 날려왔다. 병규는 피하긴커녕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녀석의 사타구니를 가볍게 걷어차 주었다.

"꺽!"

이도재의 눈이 하얗게 돌아가더니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잡고 주저앉는다.

"이런 엿 같은!"

자빠지면서도 욕을 쏟아내는 녀석. 그래 바로 이 입이었지. 항상 시궁창 같은 욕을 쏟아내던 저질적인 주둥이가.

퍽!

병규는 가차 없이 녀석의 입을 걷어차 버렸다.

"켁."

강냉이처럼 부서진 이빨을 우수수 토해 내며 너석이 나동그라진다.

"크악. 아아아아악."

꽤나 고통스러운지 두 손으로 턱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친다. 고작 이 정도도 못 참아서 울부짖는 녀석이 그렇게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다니. 짜증이 확 인다.

"개, 개자식. 죽여, 죽여버릴 거야."

피를 꾸역꾸역 게워내면서도 쌍욕을 입에 담는 이도재의 밉살 맞은 얼굴. 죽인다는 말을 너무 쉽게 쏟아낸다. 이미 한 번 죽었던 병규는 유난히 죽음이라는 말에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래 죽여봐.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두 번 못 죽을 것 같아? 죽여봐. 죽여보란 말이다. 이 자식아!!"

그는 해일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이도재의 면상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버렸다.

"훠이. 너도 한 성질 하는걸?"

호랭이가 휘파람을 분다. 이놈의 털북숭이 신선.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기름을 붓고 있다.

철컥.

차가운 쉿소리.

"너 이자식 후회할 짓을 한 거야. 알아?"

이상철이 칼을 빼들었다. 잭나이프를 손에든 녀석의 얼굴에 광기가 흐른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호 차분하다. 아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마저 배어든다.

"웃어? 미친 새끼."

이상철을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다. 휙휙 하고 휘두르는 어설픈 칼질이 제법 예리하다. 정말로 사람을 베기로 작정한 것이다.

"골수까지 썩은 녀석이군. 이런 녀석은 사정 봐줄 필요 없다. 통쾌하게 날려버려."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호랭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럴 작정이었다.

칼을 휘두르는 놈의 사각으로 스며들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턱을 올려쳤다.

카각.

듣기 괴로운 소음이 일며 녀석이 뒤로 넘어간다. 쓰러지는 장면조차 어찌 저리 둔하게 보이는지.

"크윽!"

신음을 흘리는 녀석의 보기 싫은 얼굴. 지끈지끈 심해지는 짜증.

"칼에 찔리면..."

병규는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훨씬 더 아프단 말이다. 이 자식이다!"

활화산 같은 외침. 병규는 빙글 몸을 휘돌며 쓰러지는 녀석의 면상에 화끈한 발길질을 찍어냈다.

쩍!

"크에엑."

발정난 돼지새끼처럼 꾸물대는 녀석. 아직도 짜증이 풀리지 않은 병규는 가차 없이 녀석을 밟아댔다. 몸을 둥글게 말며 끙끙거리던 녀석은 소나기처럼 퍼붓는 구타에 끝내 그의 발을 잡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냉정한 병규의 입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한마디.

"넌 내가 그렇게 말할 때 용서해 준 적이 있어?"

녀석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한다. 병규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없지? 단 한 번도. 가증스런 자식!"

퍽퍽퍽퍽.

다시금 병규의 구타가 계속되었다. 호랭이가 중간에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헐떡이던 병규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으힉!"

희멀건 얼굴의 안세준이 놀라며 뒤로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 네가 있었구나."

병규는 느긋한 걸음으로 안세준에게 다가갔다.

"너, 너.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아는 거야? 사람을 팼다고. 소년원. 아니 감방이다. 알아? 아는 거냐고."

안세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두서없이 소릴 지른다.

패닉상태. 지금 그에게 병규는 죽음의 낫을 들고 다가오는 사신이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냐?"

근업하신 호랭이 신선님마저 짜증을 낸다.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도 이 녀석은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비겁한 소리만 쏟아낸다.

병규는 게거품을 물며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묵묵히 지켜봤다.

불쌍하다.

녀석의 울부짖는 모습에서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휴."

한숨을 쉬며 병규는 발길을 돌렸다.

"어? 저 녀석은 안 패는 거냐?"

"그럴 가치도 없는 녀석이에요."

"그래?"

곰곰 생각하던 호랭이. 모슨 이유에선지 그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다. 왜 그러는 걸까 고개를 돌려봤더니 호랭이는 아직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안세준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발톱으로 쫙쫙 그어버린다.

"끄아아악. 내 얼굴."

안세준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꽤나 신경을 쓰는 녀석이니 호랭이의 일격이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것보다 치명적이었을 테지.

"너무하신 거 아녜요? 신선님?"

"괜찮아. 살짝 그어서 흉터도 안 남을 거야."

호랭이는 개운한 표정으로 웃었다. 병규도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모처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병규와 호랭이가 사라진 후,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안세준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여유 있는 동작으로 목과 손목을 돌리며 관절을 푼 그는 손수건을 꺼내 옷에 묻은 먼지를 꼼꼼하게 털어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먼지를 대충 털어낸 그는 값비싸 보이는 손수건을 휴지처럼 던져버린다. 그의 입가에 맺힌 비릿한 웃음. 그 모습은 과연 조금 전에 병규 앞에서 불쌍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 그가 맞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아참. 잊을 뻔했군."

뒤늦게 호랭이에게 당한 얼굴의 상처를 깨달은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 문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호랭이가 그려놓은 열 줄기의 손톱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좋아."

비로소 만족스런 웃음을 그려낸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끙끙거리고 있는 이도재와 이상철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본다.

'쓸모없는 녀석들.'

경명 어린 시선을 던져준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 불독 씨인가요? 전 안세준이라는 사람입니다. 아아. 다른게 아니고, 당신에 아이들이 누구에게 처참하게 당한 사실을 알려 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만."

주먹 한 방에 대기권 밖을 영원히 떠돌아?

깊은 밤의 정적이 세상을 차갑게 뒤덮은 시각.

휘어진 고목 위에 걸터앉은 채, 네온사인으로 환하게 빛나는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 사람은 행인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에도 찢어진 천으로 간신히 치부만을 가리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괜히 추위를 느낄 정도다.

게다가 그는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대머리에 피부마저 축 늘어진 노인. 자연 측은한 마음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그의 축 늘어진 피부는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벗겨진 머리 역시 대머리와는 무관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름진 피부 아래의 근육은 젊은 생기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괴인.

발칸.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한창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심장 약탈자.

대대적인 군경의 수색을 비웃기라도 하듯 끊임없이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자행하던 그. 그러나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피로가 엿보인다. 몸 이곳저곳에 붉은 혈흔마저 비친다.

으드득.

이 가는 소리.

발칸은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 이를 으드득 갈아댔다. 그는 지금 어제 오후에 마주쳤던 강력한 몬스터를 떠올리고 있었다. 잡스런 색이 섞이지 않은 하얀 털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검은 줄무늬. 발칸에게 좌절을 맛보게 한 것은 집채만한 백호였다.

"그 놈."

발칸의 눈자위 심하게 실룩인다.

"이계의 몬스터 중에도 그런 존재가 있었다니."

처음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놈이 배에 구멍 난 애송이에게 정신을 팔지만 않았어도 그는 도망은커녕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아직 부족하다."

발칸의 두 눈으로 스산한 한기가 비친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을 해치우며 힘을 모았다. 그러나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이계의 몬스터에게 당할 정도라면 마계의 사악한 군주에겐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리라.

그는 울부짖었다.

"힘이 필요해. 더 큰 힘이. 더 큰 에너지가.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단 말이다."

발칸은 갈증을 느꼈다.

사악한 마계의 마인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월등한 힘이 필요하다. 그에 필요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선 인간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타락한 도시여. 너의 추악한 욕망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밤을 환하게 불태우는가."

현란한 네온사인들.

그가 살던 세상, 이드라센에 비하면 이곳의 도시는 너무도 추악하다. 아름답게 밝혀진 밤의 거리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타락한 세상.

그래서 그는 도시의 야경을 싫어한다.

환하게 밝혀진 도시의 모습은 화염으로 불타오르던 마을과 왕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였다.

바아아앙. 바라바라방~

요란한 소음과 함께 30여 대의 바이크가 도로를 질주했다. 그 오만 방자한 소란이 추억을 되새기는 그의 심기를 건들었다.

크르르르르.

발칸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목 울림이 새어나온다.

"사냥의 시간이 왔노라."

발칸은 줄을 지어 달리는 바이크의 뒤를 느긋하게 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병규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정신없이 골아떨어졌다. 너무 피곤했다. 희대의 살인마와 조우하고 거기에 죽음까지 경험했으니, 몸은 몰라도 정신은 어지간히 피곤했을 것이다.

그렇게 잠이 든 병규는 다음 날 오후 늦은 시간에야 깨어났다. 하루 온 종일 잠만 잔 것이다.

"아주 시체처럼 자더구나. 난 기껏 힘들게 살려놓은 녀석이 다시 황천으로 간 줄 알았다."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며 호랭이가 구시렁거린다.

"윽. 담배 냄새."

코를 쥐고 일어난 병규는 창문부터 열어젖혔다. 방 안에 꽉 찬 고약한 냄새에 머리까지 욱신거릴 정도다.

"엥? 넌 담배 안 피우냐. 그런 놈이 왜 담배를 가지고 다녀?"

호랭이가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병규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엉뚱한 녀석. 하여간 일어났으면 준비 좀 해라. 어젯밤에도 사람이 몇 죽은 모양이더라."

발칸에 대한 얘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대충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장롱 서랍에서 큰 여행가방을 꺼냈다.

세면도구와 두터운 옷들을 가방 속에 챙기는데 호랭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뭐 하는 거냐?"

"발칸을 잡으러 간다면서요?"

병규의 태연한 대답에 호랭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피난 가는 줄 알겠다. 아서라. 놈이 해외로 도피한 것도 아닌데 굳이 짐까지 쌀 필요가 있겠냐?"

"네?"

병규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자 호랭이는 자신의 코를 톡톡 건드려 보였다.

"녀석이 그리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고약한 악취가 솔솔 풍기거든."

"발칸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어요? 그러면 굳이 제가 없어도 호랭이가 잡을 수 있잖아요?"

병규가 따져 묻자 호랭이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녀석아. 그 괘씸한 놈이 좀 빨라야 말이지. 이 작은 몸으론 일 년 내내 뛰어다녀도 녀석의 코빼기도 못 볼 것 아니냐."

병규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의 아장거리는 걸음으로는 일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을 뛰어도 못 잡을 테지.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든 병규는 쪼그리고 앉은 호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 지엄하신 호랭이님의 자존심을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다.

"너 이놈. 지금 뭐하는 짓이야?"

"헛!"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병규는 경악했다.

'이런 젠장. 또 겉모습에 속아서 그만.'

모든 것은 조그맣게 변한 호랭이가 너무 귀엽게 생겼다는 데 있었다. 아기 호랑이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당장 가서 안아주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부라린답시고 치켜뜬 눈은 또 왜 이렇게 큰지. 쿡 하고 찔러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우선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저... 그게. 호랭이 등에 보푸라기가 묻어서 턴 거에요."

"정말?"

호랭이가 의심스런 눈빛을 던진다. 찔끔한 병규지만 침을 삼키며 시치미를 뗀다.

"네."

"흐음. 믿어주지."

순진하게도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호랭이는 날렵한 동작으로 병규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오늘밤에도 사람이 죽어나갈 거다. 우리가 발칸을 빨리 찾을수록 희생자가 줄어든다."

"좋아요. 가죠."

병규는 활기차게 외쳤다.

기왕이면 즐겁게. 그가 이도재와 이상철에게 모진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긍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신난 것 같은데? 자신이라도 있는 거냐?"

호랭이가 묻자 병규는 코밑을 훑으며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녀석을 잡으면 턱이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어요."

이미 한 번 죽은 몸, 더 이상 소심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병규는 호랭이를 어깨에 얹은 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채 현관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는 굳어버려야 했다.

30여 대의 오토바이와 50여 명의 인원이 문 밖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죽점퍼에 그려진 붉은 태양.

'레드서클.'

병규는 크게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레드서클은 한마디로 이 지역의 유명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몇몇 애들이 장난 삼아 만든 엉성한 조직이 아니야, 2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유명한 폭력조직이다.

보통 불량 조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레드서클은 젊은이들 중심의 폭주족 모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구성원의 대부분이 10대에서 20대 후반이었다. 그러나 폭주족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들의 위세는 근방의 여느 폭력조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특히 배신자와 조직에 반항하는 자에 대한 잔인한 징벌이 유명했는데, 그 때문인지 레드서클이 이 고장에 생긴 이후로 다른 조직들은 지리멸렬돼 자취를 감췄다.

레드서클에 비하면 일진 같은 것은 얼라들 소꿉장난 정도에 불과했다.

'뭐야, 어쩌자는 거야? 왜?'

병규는 곧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도재와 이상철.

두 녀석이 겁에 질린 채 거대한 오토바이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그들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육중한 오토바이 위. 살집이 넉넉한 20대 중반의 붉은 머리 사내가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네가 병규란 애냐?"

레드서클의 리더, 불곰이 냉막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잠시 주저하던 병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불곰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이런 바보 같은 자식들."

불곰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도재와 이상철을 면상을 거칠게 걷어찼다.

"어디서 쥐어터지고 왔나 싶었더니 저런 비실이였냐?"

바이크에서 방망이를 꺼내든 불곰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두 녀석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보고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잔인하다.

"별 쓰레기 같은 자식들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군."

퉤 하고 가래침을 뱉는 백곰. 그 모습을 키득거리며 바라보는 레드서클의 나머지 녀석들.

병규는 이도재와 이상철이 한심하다 못해 불쌍해 보였다.

저런 일을 당하며 굳이 조직이란 곳에 들어가고 싶었을까? 저것이 저들이 말하는 의리란 말인가.

"누가 이 자식들 좀 끌어내."

불곰이 거만하게 외치자 두 녀석이 나와서 질펀하게 뻗어버린 이도재와 이상철을 끌어낸다.

"우리 애들이 신세 좀 진 것 같은데, 잠시 면담 좀 해야겠다. 너."

불곰이 거만한 목소리로 위협하자 50명 가까이 되는 녀석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규의 얼굴로 꽂힌다.

"허이그. 시끄러운 녀석들일세."

병규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던 호랭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수십 명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도 호랭이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있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얼굴엔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상한 것은 병규도 별 다른 긴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요한 호수처럼 마음이 차분하다.

"이런 녀석들과 놀아주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일단 여길 빠져 나간 뒤에 발칸이나 잡으러 가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레드서클을 무시하다니. 죽다가 다시 살아난 뒤론 간이 상당히 부어버린 모양이다.

병규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다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 새끼가."

"튄다. 잡아!"

거친 욕설과 함께 녀석들이 범람하는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재빨리 현관문을 잠근 병규는 뒷문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역시나 이쪽에도 지키는 녀석들이 있었다.

모두 세 놈.

불량스럽게 담배를 태우고 있던 녀석들은 병규가 뛰어나오자 오히려 쌍수를 들며 반긴다.

"어이구. 귀여운 아가. 잘 왔다."

"콩알만한 녀석이 형님들과 놀고 싶었나 보지?"

키득거리며 다가서는 녀석들.

병규가 주춤하는데 등 뒤에서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와 욕설이 함께 들린다. 현관문이 박살난 것이다. 여기서 멍청하게 서 있다간 앞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될 판이다.

병규는 즉각 뒷문을 향해 치달렸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세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과 발을 날려온다.

"얌전하게 맞고 끝내자."

확실히 전문적인 싸움꾼이 아니라서 그런지 동작이 크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로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병규는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린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확실히 발칸을 만난 후부터 무언가 변해버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는 레드서클 녀석들의 움직임이 병규에겐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보인다는 것이었고, 반대로 그의 몸은 눈이 못 좇을 정도로 빠르다는 점이다.

부웅 하고 날아오는 주먹에 난 잔털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고개를 슬쩍 틀어 안면으로 날아든 주먹을 피한 병규는 슬쩍 한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그저 상대를 가볍게 밀쳐내기 위한 행동. 그러나 병규는 아직 자신의 몸이 얼마나 빠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딛는다고 앞으로 걸어간 것이 그만 힘이 너무 들어갔다. 휘릭 하는 바람소리가 나더니 그의 몸은 어느새 쏘아진 포탄처럼 앞으로 튕겨나간 것이다.

쩌걱.

"꾸엑."

엉성한 주먹을 날린 닭 벼슬처럼 머리를 세운 녀석은 엉겁결에 병규의 몸통박치기(?)를 당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나동그라졌다.

"엇?"

거들먹거리며 병규에게 다가서던 녀석들이 일제히 굳어버린다. 굳어버리긴 병규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슬쩍 밀면서 밖으로 나갈 공간이나 확보할 생각이었는데, 생각 외로 문제가 커져버린 것이다. 닭 벼슬 머리는 입에서 제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레드서클과는 곱게 끝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쌍놈의 자식이."

현관문을 박살내고 온 녀석들이 어느새 등 뒤에까지 접근해왔다. 부웅 하고 거친 파공성이 울린다. 무식한 녀석들이 대뜸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뒤통수를 쩌릿하게 만드는 살기에 크게 당황한 병규는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촤아아악!

뒷문을 지키고 서 있던 녀석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애송이 녀석이 갑자기 무식한 속력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우엑."

"왁!"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병규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뻐엉 하는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녀석은 폭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다.

"꾸에에에엑."

이번엔 63빌딩에서 번지 점프하는 멧돼지 우는 소리가 터졌다.

"아그그그."

병규는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다.

자신이 무슨 뿔난 황소도 아니고, 머리로 두 사람이나 받아버렸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에고. 이 녀석아. 좀 살살 뛰어다녀라.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날아다니냐?"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호랭이가 쉿소리를 낸다. 호랭이의 복실한 털은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그게 어쩌다 보니."

병규는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가 그렇게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지 않은가. 그저 슬쩍 뛴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게 번개같이 움직인 것이다.

한편 병규를 향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뭐가 저따위로 빨라?"

순간적으로 병규가 보인 움직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빨랐다.

뭐가 휙 하더니 건너편의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영영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처럼 날아가 버린다.

당연히 몸이 굳을 수밖에.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불곰의 호통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왜 멍청히 서 있는 거야. 빨리 놈을 잡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녀석들은 고함을 지르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병규는 일시 당황했다. 또다시 슬쩍(?) 움직여줘야 하는 걸까? 그러다 정말로 큰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 내심 걱정스럽기도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데 보다 못한 호랭이가 벼락치듯 말한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일단 왼발을 게걸음으로 내딛으며 두 주먹을 허리춤에, 다음 오른발을 엇갈리며 두 주먹을 가슴에, 마지막으로 튕기듯 왼발을 크게 뻗어내고 상체를 좌측으로 크게 뻗치며 두 주먹을 쏘아내라."

병규는 즉각 호랭이의 말에 따랐다.

"처음엔 왼발을 게걸음으로 내딛으며 두 주먹을 허리에."

휘익 하며 발그림자가 번개처럼 움직인다.

와 하고 달려들던 레드서클 녀석들은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 이 녀석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두 번째는 오른발을 엇갈리며 두 주먹을 가슴에."

두 다리를 엇갈리고 자세를 낮추자 마치 잔뜩 움츠린 용수철 같다.

와 하고 소리치던 녀석들의 고함이 으아아!로 서서히 바뀐다. 처음 맞은 녀석은 아침에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고, 두 번째로 부딪힌 녀석들은 십여 미터를 날아갔다. 그럼 세 번째는? 설마 대기권 밖을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쏴아아아.

녀석들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병규의 마지막 세 번째 동작이 이어졌다.

"마지막엔 왼발을 크게 튕기고...."

움츠려있던 그가 발을 쭉 뻗어내자 십여 미터의 거리가 한순간에 압축되며 폭풍같이 기세가 칼날처럼 치민다.

"으아악."

"말도 안 돼!!"

돌풍과 함께 병규가 몰아닥치자 레드서클 녀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이미 무시무시하게 달려들던 기세는 완전히 꺾여 버렸고, 지금은 맹렬히 달려들던 그 기세 그대로 집안으로 미친 듯이 도망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아나는 그들의 등을 향해 병규의 두 주먹이 쏘아졌다.

"상체를 뽑아내며 두 주먹을 쏘아낸다."

빠아앙.

대형 교통사고 때에나 들을 수 있는 폭음이 터진다. 가히 충격의 파도. 아우성을 지르며 집안으로 도망치던 녀석들은 해일처럼 몰려오는 충격의 파도에 몸을 실은 채 도미노처럼 연쇄충돌을 일으켰다.

뒷문 밖에서 병규의 두 주먹을 직격으로 받아낸 녀석이 밥상을 껴안고 현관문 밖까지 튕겨져 날아갔을 정도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병규 역시 무사하지는 않았다.

"아그그그그. 주먹아."

이번엔 주먹이 깨질 듯이 아프다. 그럴 수밖에. 지금까지 한 일이라고는 펜대 굴리는 것밖에 못하던 손이었으니, 갑작스런 주인의 폭력에 주먹은 또 얼마나 놀랐을까.

"쯧쯧. 한심한 녀석아. 고작 그거 했다고 주먹이 아프냐? 평소에 얼마나 비실거렸으면."

호랭이가 혀를 쯧쯧 찬다. 하지만 호랭이의 상태도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털이 엉망이 된 것은 물론이고, 두 눈마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사실 말을 안 한다뿐이지 심장이 벌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자칫 했으면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질 뻔했다. 안 떨어지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지 턱이 다 아플 정도다.

'무서운 녀석.'

이 녀석이 빠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게다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엉성한 자세에서 쏘아낸 일격이 이 정도라니. 몇 백년 동안 고생하며 도술을 익힌 것이 한스러울 정도다.

'언놈은 가르쳐 주자마자 장풍을 날려대는데.'

솔직히 말하면 장풍이라도 볼 수는 없다. 두 주먹으로 쳐냈으까. 하지만 그 효과는 충분히 장풍에 비견될 만했다.

"이 자식들이. 뭐야! 왜 전부 이쪽으로 튀어온 거야. 빨리 그 녀석을 잡아오지 못해!"

집의 정문 부근에서 불독의 사나운 외침이 들린다. 열이 있는대로 났을 것이다. 5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고작 애송이 한 명을 못 잡고 풍비박산이 되어 여기저기 날고 있는 꼴이니.

그의 고함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병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뒷문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의 것으로 보이는 오토바이 몇 대가 눈에 들어왔다.

후다닥 달려간 병규는 꽂혀 있는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너 이거 운전할 줄은 아냐?"

"스쿠터 정도는. 이 녀석도 그냥 당기면 가겠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놈의 오토바이가 이렇게 커?'

만약 넘어지면 혼자 일으켜 세우기도 힘들 것 같다. 또 무슨 치장은 이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지. 두 개나 붙어 있는 배기통도 은근히 신경 쓰인다.

"에이. 몰라. 그냥 고고(gogo)!"

말과 함께 병규는 스로틀(throttle)을 힘껏 당겼다.

바아아앙.

거친 배기음과 함께 바이크의 앞바퀴가 덜렁 들렸다.

"우악."

병규는 비명을 지르며 일시 당황했지만 용케 균형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엇? 저 새끼 잡아."

"도망간다."

등 뒤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스쿠터 이외의 바이크 운전을 처음인 병규는 그저 운전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바이크의 출력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잘못해도 앞바퀴가 들려버린다.

"이커 알피엠(rpm)이 끝까지 올라갔는데도 기아가 왜 안 바뀌지?"

그는 자동으로 변속되는 스쿠터만 타봤기 때문에 gsx-r600처럼 수동변속기가 달린 바이크에 대해선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1단으로 100킬로 이상 달리는 오토바이인가?"

고개를 갸웃거린 병규는 무작정 스로틀을 끝까지 당겼다.

꾸아아아앙.

gsx-r600이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태어난 후 처음, gsx-r600은 1단 기어로 시속 60킬로를 달려야 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불곰은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휘둘러 사내들을 후려갈겼다. 그 녀석이 겁나게 빨라서 잡을 수 없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다. 뒷문을 지키던 녀석들이 거품을 물고 기절한 것도 봤다.

생각보다 애송이의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50명이 넘게 출동했는데 그런 어벙하게 생긴 녀석 하나를 못 잡다니.

이 얘기가 다른 곳으로 퍼졌다간 다른 조직들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들고 다니게 될 형편이다.

"씨발 자식들. 뭘 멍하니 서 있어. 빨리 녀석을 쫓아. 찾으면 아주 아작을 내 버려. 아니 아예 죽여버려!!"

불곰은 독기를 줄줄 흘리며 그렇게 외쳤다.

수하들이 줄줄이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자 천둥 같은 소음이 터진다. 그 모습을 불만스테 지켜보고 있던 불곰은 가래침을 탁 뱉으며 자신도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직접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오늘 시체 하나 치운다.'

카본 글러브를 착용하며 불곰은 이를 갈았다.

"가자!"

그가 손을 치켜들자 30여 대의 바이크가 일제히 경적을 울려댄다. 개조된 혼에서 우렇차게 울리는 소음은 천둥소리에 비견될 만했다. 그러나 기세 좋은 외침과 달리 그들은 출발을 할 수가 없었다. 선두에 선 녀석들이 출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오늘따라 왜 자꾸 버벅거리는 거야?"

불곰은 짜증이 팍 일었다. 그가 조직을 이끌게 된 이후로 오늘이 가장 짜증나는 날이다. 고작 그 애송이 때문에.

선두에서 한 녀석이 뛰어왔다.

"형님. 웬 미친 노인네가 길을 막고 비켜서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불곰은 바이크에서 내려 성큼거리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과연 녀석의 말대로 추레한 노인네 하나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노인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저 양반이 돌았나. 치매 아냐? 때가 어느 땐데 홀랑 벗고 다녀?"

불곰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요상한 날이다. 감히 겁도 없이 레드서클에 단독으로 덤벼드는 애송이가 나타나더니 이번엔 미친 노인네까지 그의 심기를 거슬린다.

"노출증 환자인가 봅니다."

"설마 우리에게 그 처량한 딸랑이라도 보이고 싶은 거야?"

"어이. 할아방. 그런 거라면 여고를 찾아가야지? 그리고 허름한 거라도 코트 하나 장만해."

"푸하하하하."

쏟아지는 비웃음들. 그러나 노인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느긋함. 그리고 귀기 서린 푸르스름한 눈빛.

불곰은 먹던 음식이 목에 걸린 것처럼 불괘해졌다. 그는 몰려든 부하들을 헤치며 자신의 바이크에 올라탔다.

"이봐. 이래도 비키지 않을 테야?"

바아아앙.

거칠게 울어대는 바이크의 육중한 위협음. 그러나 노인은 관심도 없다는 듯 귀까지 후빈다.

"뭐야? 보험이라도 타먹어 보겠다는 심산이냐? 그런 생각이라면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불독은 스로틀을 힘껏 잡아당기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부하들이 우르르 비켜선다. 저렇게 목소시를 깔 때의 불독은 정말로 위험하다. 가뜩이나 오늘은 애송이 녀석 때문에 화가 날 대로 난 상태. 노인은 날을 잘못 고른 것이다.

"뭉개주마."

부아아앙.

바이크가 요란한 괴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달려 나간다.

이젠 노인이 피하려 해도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대로 갈아붙여주마. 그러나 마지막 순간 불독은 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새어나온 빨간 혓바닥이 입술을 축이는 모습을.

노인은 그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팔팔한 먹이로군."

부르르.

불독의 몸이 떨려왔다. 추워서가 아니다. 공포심이었다. 포식자를 앞에 둔 초식동물의 그것과 같은.

"바보 같은 소리!"

그는 스멀스멀 깃드는 공포심을 부정이라도 하듯 극한까지 스로틀을 당겼다. 아예 묵사발을 내주리라.

그때, 노인의 몸이 흐릿하며 사라졌다.

그것은 병규가 순간적으로 보인 것과 유사한 움직임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불독은 그런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장은 이미 그의 몸과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다.

콰다당.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간 바이크는 이미 죽어버린 주인과 함께 땅바닥을 요란스럽게 굴러갔다. 타이어에 말려든 불독의 시신이 사방으로 피와 살점을 뿌려댄다.

"좋군."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는 심장을 한 입 베어 물며 발칸은 희열의 괴소를 흘렸다. 역시 젊은 녀석의 심장은 최고다. 차원을 넘으며 무너진 그의 육신에 한 가닥 활기가 생긴다.

심장의 질긴 근육을 껌 씹듯 찌걱찌걱 씹으며 그는 시신을 나머지 녀석들에게로 돌렸다.

"으헉."

멍청하게 서 있던 레드서클의 녀석들이 뒤늦게 반응한다. 몇몇은 비명을 지르고, 몇몇은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 막나가는 그들이지만 사람의 심장을 뜯어먹는 살인마와는 비교자체가 안 된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발칸이 성큼 발을 앞으로 내딛자 녀석들은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튀며 달아났다.

"이제야 사냥하는 맛이 나겠군."

발칸은 사과를 먹듯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심장을 우직 베러 물었다.

난생 처음 600cc 오토바이를 몰고 정신없이 도로로 달려나간 병규. 그러나 역시나 변속도 않고 1단으로 계속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얼마 못 가 엔진이 눌어붙고 말았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도로변에서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는 이 녀석 덕분에 수월하게 도망쳤는데, 이제 꼼짝없이 레드서클과 한판 떠야 할 상황이다.

아무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재주가 생겼다지만 그 많은 인원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러나 호랭이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녀석들을 모두 박살내고 또 다른 바이크를 얻어 타고 가자고."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무슨 유치원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말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왔다. 마치 호랭이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병규 역시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호랭이. 신선이 바이크라는 말을 해도 되는 거예요?"

"안 될 건 또 뭐야?"

"안 될 거야 없지만,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신선이라 그러면 좀 고풍스럽게 말해야 멋이 나잖아요. 가령 자동차를 무쇠마차라고 부른다던지."

"어허. 내가 말했잖아. 다 그 놈의 미디어가 심어놓은 쓸데없는 고정관념이라니까.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대사를 읊겠냐?"

"하긴 그러네요."

마음이 가볍다. 정말로 자신이 폭력조직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 맞긴 한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설마 그 녀석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생각을 아니겠지?"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뭐, 기다렸다가 먼저 오는 녀석을 날려버리고 그 오토바이로 바꿔 타기로 하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 시간이 넘도록 병규를 뒤쫓아오는 바이크는 단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병규는 도로변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허비한 채 터덜터덜 한 시간이나 걸어 집에 도착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병규가 집에 도착 했을 때 자신의 집을 사방으로 포위한 경찰로부터 50여 명에 이르는 폭주족들이 발칸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다.

폭발! 질풍 삼연격

다음날 세상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무려 45명이 심장이 뜯긴 채 사망했고, 5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2명은 심각한 정신적 착란증세에 빠져 버렸다.

가히 테러에 준하는 엄청난 학살극.

'잔혹한 살인마, 폭주족 50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다.'

방송사들은 일제히 피로 물든 병규의 집 주변을 끊임없이 스크린에 담으며 발칸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범죄들을 일일이 나열했고, 뉴스 채널들은 잡히지 않는 살인마와 무능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특집방송을 편성했다. 신문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모든 주간지의 일면을 발칸의 몽타주가 차지해 버렸다.

일부 언론에선 발칸에게 살인을 사주한 인물이 있다느니, 발칸의 정체는 사실 정의를 수호하려는 과격분자라느니 하는 식의 허무맹랑한 소리들을 지껄여댔다.

이런 소란 중에 당연히 병규도 이래저래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그의 집 앞마당이었다는 것에 경찰과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은 엉망으로 박살나 버렸고, 자갈이 깔린 앞마당엔 심장이 뜯겨나간 시신이 피를 쏟으며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불독의 시신은 휴지조각처럼 사방으로 뿌려져서 역겨운 냄새가 주변에 진동하고 있었다.

경찰은 병규에게 레드서클과 무슨 관계인지 지겹도록 추궁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왜 하필 발칸이 그의 집 앞에서 그런 대학살극을 벌였는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며, 레드서클과 한바탕 분규가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혼자 레드서클과 분탕질을 했다는 걸 말해봤자 경찰에서 믿어 줄 리도 없다. 사실 경찰도 뭔가를 기대하고 병규를 조사하는 것은 아닌 눈치다. 그저 하도 시끄러운 사건이라 형식적으로 그를 귀찮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찰서엔 그 말고도 이도재와 이상철 두 사람도 있었는데, 현장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은 그 두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들도 정상은 아니어서 계속되는 경찰의 취조에도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울기만 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기에. 병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역시 한 번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경우는 자신의 내장이 배 밖으로 외출을 나온 경우였다.

하여간 그렇게 일 주일이 넘게 경찰의 조사에 불려 다니느라 발칸의 뒤를 추적하는 것은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끝도 없을 것 같은 시달림은 묘하게도 발칸의 다른 사건으로 인해 끝나게 되었다. 50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은 지 채 열흘도 안 되어 발칸은 또 다른 대형 사건을 터트렸는데, 이번 대상은 유명한 조직폭력배였다.

세간의 관심은 당연히 그쪽으로 옮겨갔고, 그때서야 병규는 경찰의 조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어이. 집에 가냐?"

터덜터덜 경찰서를 나서는데 담배를 꼬나문 중년 사내가 아는 척을 해온다.

전영택 형사.

가볍게 전 형사라 불리는 그는 병규의 담당 형사였다.

"태워다 주마."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 병규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 슈퍼스타. 어러 와."

썩어가는 아반떼 승용차 뒤 자석에 탑승하니 조수석에 앉은 조영기, 조 형사가 아는 척을 한다.

신문과 방송에 실렸던 것을 두고 이렇게 놀리는 것이다. 병규는 그냥 피식 웃었다. 일 주일간 매일 같이 보았더니 이젠 제법 친해졌다. 솔직히 이 양반들이 자신의 담당형사라 다행이라 생각하는 병규였다.

이웃집 형들 같은 느낌이랄까.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모라 병규의 편의를 봐주어 그나마 조금은 편할 수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소감은 어때?"

조 형사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묻는다. 경찰 조사가 끝난 것을 일컫는 것이다.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요."

며칠 전 개학을 했는데, 아직 학교에 가보지 못했다.

"휘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학생을 오랜만인걸. 설마 공부가 좋다고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있나?"

전 형사가 담배를 빙글 돌려 물며 묻는다.

"아직 없습니다."

병규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긴 없게 생겼다."

"윽!"

"하하. 선배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뭘 너무해. 남자끼리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지."

"하하하. 애 표정 좀 보십시오. 완전 똥색인데요?"

"어? 정말이네. 설마 그 정도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니겠지?"

"충격... 받았는데요."

"저런. 그렇게 소심해서야. 걱정 마, 짚신도 짝이 있다잖냐. 언젠가 아리따운 네 님도 나타날 게다."

"오. 선배님 그거 확실한 겁니까?"

"물론 접대용 거짓말이지."

"푸하하하."

"큭!"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고물 차 안은 그렇게 왁자지껄했다.

'어째. 호랭이가 조용하네.'

자나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어깨에 매달린 호랭이는 전 형사가 피우는 담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솔솔 풍기는 냄새에 담배는 당기는데 남의 시선이 있어 차마 피우지는 못하겠으니 아마 죽을 맛일 게다.

그렇게 한참 시내를 달리는데 운전을 하던 전 형사가 갑자기 눈을 치켜뜬다.

"저 자식이!"

차를 도로변에 급하게 세운 그는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 형사와 병규도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따라 차 밖으로 나왔다.

도로변.

말끔하게 생긴 녀석 하나가 구두닦이로 보이는 소녀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었다. 싫다는 데도 강제로 팔을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소녀의 옷이 헝클어졌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흘끔흘끔 눈길을 주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야, 이 자식. 너 뭐하는 짓이야?"

꽤나 열혈적인 성격인 듯 전 형사는 대뜸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엇?"

갑작스런 난입자에 무심코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은 병규의 얼굴을 보더니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후다닥 도망간다.

전형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병규를 쳐다본다.

"너, 저 녀석에게 돈 꿔준 거라도 있냐?"

"뭐, 그냥 좀 아는 사이죠."

병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목을 긁는다.

'저 녀석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이는군.'

구두닦이 소녀에게 치근덕거리던 녀석은 그가 잘 아는 인물이었다.

안세준.

돈만 믿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방탕아. 저번에 한 번 크게 당하고 난 후, 의도적으로 그를 피해 다니고 있는 것같더니 이런 곳에서 또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 영 인간이 못 되려나 보다."

호랭이가 혀를 쯧쯧 찬다.

"어디 다친 데는 없냐?"

조 형사가 쓰러진 소녀를 일으키며 묻는다.

"괘, 괜찮아요."

형사를 향해 고개를 깊게 숙여 보인 소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구두통을 보고는 신음성을 흘렸다.

"아!"

그녀는 보석을 줍듯 땅바닥에 떨어진 구두솔들을 정성스럽게 챙겼다. 병규가 보기엔 못 쓸 정도로 오래된 도구들이었는데 그녀에겐 소중했던가 보다.

"몇 살이야?"

측은한 마음이 든 전 형사가 넌지시 묻는다.

"열일곱요."

"엇."

병규는 헛바람을 터트렸다.

열일곱이면 고1. 그보다 한 살 아래가 아닌가. 한창 드라마에 열광하고 부모님께 핸드폰 사 달라고 철없이 떼나 쓰고 있을 나이에, 찬바람을 맞으며 이렇게 힘든 일을 하다니.

놀란 마음에 자세히 보니 검댕이가 묻은 소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깜찍했다. 과연 깐깐한 안세준 녀석이 치근덕거릴 만도 하다.

"요즘 흔하지 않은 아이네."

전 형사는 수수하게 웃었다. 구두닦이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가정 형편이 어떨 거라는 건 뻔히 보이지만, 보통 이 정도로 반반하면 좀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기 마련인데, 이 아이는 얼굴에 검댕이를 묻혀가며 험한 일을 하고 있다.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 아저씨 혹시 구두 안 닦으세요?"

구두통을 챙긴 소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한밤중에 웬 구두니."

"헤헤.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돈을 벌죠. 아무도 야간에 구두 닦는 일을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 야간근무자들이 꽤 많아졌으니까 그 분들을 상대로 구두를 닦으면 잘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소녀는 코밑을 훑으며 귀엽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보다 못한 조형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건넨다.

"저기... 그런데 말야. 야간에 일하는 사람이 과연 구두를 닦으려 할까? 어두컴컴해서 봐줄 사람도 없는데."

돌연 소녀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아아. 그럴 수가."

그녀는 그 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아 꺼이꺼이 서럽게 운다.

"좋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일 주일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니.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흑흑흑."

하도 그녀가 서럽게 울자 괜히 미안해진 두 형사.

"우리들 구두라도 좀 닦아주겠니?"

"정말요?"

언제 울었냐는 듯 소녀는 눈을 반짝였다.

얼떨결에 구두를 맡기게 된 두 형사.

"병규야. 조금 기다려도 되겠냐?"

"상관없어요."

손을 흔들어 보인 병규는 차분히 소녀를 지켜보았다.

"헤헤헤. 일이다. 일."

소녀는 간만에 생긴 일감에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열심히 구두질을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전 형사가 물었다.

"이름이 뭐야?"

"김경애라고 해요."

구두에 침을 퉤퉤퉤 뱉으며 소녀가 대답한다.

병규는 피식 웃었다. 퉤퉤퉤라니. 요즘 같은 세상에 구두 닦으면서 침 뱉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하긴 하는데 닦는 건 영 엉성하다. 초보인 병규가 봐도 못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떻게 된 게 닦으면 닦을수록 구두의 광택이 죽을까.

"장사가 안 될 만도 하구만."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쉰다.

하지만 정작 구두를 맡긴 두 형사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소녀가 구두를 닦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운가 보다.

그때였다.

거리가 소란스러워지더니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떼의 무리가 우르르 지나갔다.

형사들의 표정이 가볍게 변한다. 검은 양복에 하나같이 짧은 머리. 상의 사이로 힐끗 보이는 신문지로 둘둘 만 길쭉한 물건.

보나마나 조직폭력배들. 게다가 저렇게 연장을 챙겨들고 바삐 뛰어가는 것이라면.

시선을 마주친 두 형사는 소녀에게 만 원짜리 두 장을 쥐여 주며 급하게 신발을 신고 그들을 따라갔다. 열심히 뛰어가던 전형사가 문득 생각난 듯 우두커니 선 병규에게 소리친다.

"병규야.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겼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버스 타고 들어가라."

"네."

병규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역시나 바쁜 양반들이다.

이때만 해도 병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집에 돌아가서 씻고 잘 생각뿐이었다.

"놈의 냄새가 난다."

호랭이의 한마디. 그 한마디로 병규의 느긋한 표정이 변해버렸다.

"어떻게 할 거냐?"

호랭이가 조심스레 묻는다.

불과 며칠 동안 병규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죽기도 하고,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싸움질도 했으며, 언론과 경찰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호랭이는 병규의 상태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혹시나 이제와 못하겠다고 손을 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염려와 달리 병규는 씩 하고 가벼운 웃음을 보여주었다.

"놈을 잡아야죠."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이번 사건으로 경찰이 발칸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결국 호랭이의 말대로 그와 호랭이가 나서야 한다.

물론 갑자기 정의감이 솟았다거나 괜한 영웅심의 발로로 이러는 것은 아니다.

하필 그의 집에서 일어난 발칸의 대규모 살인. 병규는 이점에 주목했다. 어쩌면 발칸은 그를 찾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레드서클은 그 대신 희생양이 된 것인지도.

'놈과 나 사이에 뭔가 운명적으로 꼬인 것이 있다면 차라리 화끈하게 풀어보는 것이 좋겠지.'

물론 발칸이 일부로 병규를 찾아왔던 것은 아니다. 다만 폭주족들의 시끄러운 소음을 쫓아오다 보니 어떻게 우연찮게 병규의 집에서 일을 벌이게 된 것뿐이다. 사실 발칸은 병규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병규는 발칸과의 악연을 끝내기 위해 천천히 형사들의 뒤를 쫓았다. 스르르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 그동안 그는 갑자기 빨라진 자신의 스피드에 놀라울 정도로 적응이 되어 있었다.

한편 검댕이를 얼굴이 잔뜩 묻히고 있는 구두닦이 소녀는 조폭들이 뛰어간 방향을 보며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은 조폭들이 신고 있던 검은 구두로 가득 차 버렸다.

"돈들이 뛰어갔어."

일거리가 없어 의기소침하던 그녀에게 우르르 뛰어가는 조폭 무리는 이른바 대박이었다. 물론 지금 뛰어간 조폭들이 좋지 않은 일을 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때문에 구두가 지지 않을까?

'화끈하게 몸을 풀게 되면 구두가 더럽혀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구두를 닦아야 할 테지? 조폭만큼 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드무니까.'

짤랑.

그녀의 머릿속에서 굶주린 돼지저금통이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한다.

"인생은 한 방!"

경애는 구두통을 어깨에 메고 병규의 뒤를 쫓았다.

은은하게 진동하는 차향. 정갈하면서도 세련된 실내장식들. 그리고 형광등 대신 실내를 밝힌 것은 작은 촛불들.

주인의 품성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단아한 실내였다.

'의외로군.'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오로치는 내심 당황을 금치 못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던 그에게 이곳의 고아한 분위기와 주인의 독특한 느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독특한 취향이시군요."

오로치는 향긋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능숙한 한국말로 입을 열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한영은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오로치는 가벼운 경탄성을 흘렸다.

일렁이는 촛불 속에 투영되는 그녀의 미모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과연 밤에 피는 백합이란 명성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어떻게 이런 보석이 암흑가에서 썩고 있었단 말인가.'

신풍(神風)이라는 일본의 능력자 조직에서 상당한 지위에 이른 그가 이제 갓 스물이 된 젊은 여자와의 대면에서 거듭 놀라고 있었다.

오로치.

사실 그는 일본의 양대 능력자 단체 중의 하나인 신풍의 총사였다. 원래는 일본 내의 조직운영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이지만 최근 모종의 이유로 한국 내에 기반을 닦아야 할 일이 생겼다. 그래서 다각도로 신풍에 협조할 지지자들을 수색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한국의 암흑가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현재 한국에는 일본의 야쿠자처럼 수많은 조직들이 전국에 산개해 있었가. 그들 중 몇몇은 한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방대한 곳도 있다. 좁은 나라에 덩치가 큰 조직들이 몰려있으니 자연 알력이 없을 수 없다. 때문에 몇 년 전만 해도 작은 구역을 놓고 조직간에 피를 뿌리는 일은 흔하지는 않아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런 양상이 갑자기 변해버렸다.

어느 날, 전국의 모든 조직들이 일제히 항쟁을 멈춘 것이다. 놀랍게도 그 것은 단 한 명의 여자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가 활동한 것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가 이룬 것은 가히 신화에 가까운 기록들이었다.

불과 일년.

그녀가 일 년간의 유희를 마쳤을 때, 한국의 모든 조직은 그녀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대체 이 가녀린 여자에게 어떤 카리스마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오로치였다.

사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의 능력에 대해 별 다른 기대를 안 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가의 성녀라고 칭해지고 있다지만 기껏해야 조그만 반도의 여자. 그런 여자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러나 막상 그녀를 본 오로치는 자신의 생각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단 그녀는 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녀의 능력은 그녀의 황홀한 미모보다 훨씬 더 탐나는 재능이다. 그는 적지 않은 수의 능력자들을 알고 있지만 그중에서 그녀와 비견되는 능력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아직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 이 정도의 가치니 만약 제대로 된 훈련만 거친다면....

오로치의 입술이 사르르 말려 올라가며 얇은 미소를 보인다.

"제가 제시한 조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이번에도 이한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로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목이 바싹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원하신다면 더 좋은 조건도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를 아는 사람이 이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매사에 꼼꼼하고 완고한 오로치가 이런 느슨한 말을 하다니.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다. 그만큼 그녀가 뛰어나다는 뜻일까.

"음."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던 이한영이 가볍게 운을 뗀다.

탁.

그녀가 여태 들고 잇던 찻잔을 가볍게 탁자 위에 올리자, 한순간 모두의 시선이 찻잔에 묻은 그녀의 입술자국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먼저 거부의 뜻을 밝혔다.

"형제들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요."

"어허."

오로치는 가볍게 경탄성을 흘렸다.

"이해할 수 없군요. 이런 야쿠자 놀이가 뭐가 좋으신지."

그의 도발적인 언사에 뒤를 지키고 선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가볍게 동요한다. 이한영은 손을 쓱 내저으며 그들을 제지했다.

"동생들의 모욕은 곧 저의 모욕이에요."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순간 등골 서늘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오로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부채로 얼굴을 부쳤다.

"으흠. 심기를 거스르게 되었다면 사죄하지요."

이한영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일그러진다.

사내라면 모름지기 대나무처럼 꼿꼿한 맛이 있어야지. 생긴 것만큼이나 마음에 안 드는 자다. 일본에서 어렵게 왔다기에 평소 안 부리던 얌전까지 떨면서 상대해 주고 있는데, 이건 대화를 하면 할수록 짜증만 난다. 어디서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 나타난 것인지.

자연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음성도 쌀쌀해졌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전 형제들을 버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이점 유념해주시길."

그녀는 더 이상 이 답답한 군상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사내가 들어왔다. 미리 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말해두었는데도 들어온 걸 보면 꽤 급한 용무인 모양이다.

"누님."

이한영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인 가물치는 조용조용 그녀의 귓가에 말을 전했다 이한영의 반듯한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급한 볼일이 있어 이만 자리를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부하들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쯧."

그녀와 조폭들이 사라지자 오로치는 나직이 혀를 찼다.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다.

"원래 가치 있는 물건일수록 어렵게 얻게 되는 법이지."

차가운 미소를 지은 그는 먼저 간 이한영의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발칸이 나타났다고?"

달리며 이한영이 물었다. 가물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네. 성동파 애들이 발견한 모양입니다."

발칸. 최근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마. 그런 살인마를 발견했다면 응당 경찰에 신고해야겠지만 며친 전 이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왕건이 파가 놈에게 당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주먹으로 먹고사는 갱이 야쿠자나 마피아도 아닌 살인마 따위에게 단체로 죽다니. 이래서야 국제적인 망신이다.

그래서 근방 조직들의 요청에 그녀까지 출동하게 된 것이다.

조폭들에게 있어 그녀는 다만 상징적인 존재만은 결코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실력자인 것이다.

"어떻게 됐지?"

현장에 도착한 이한영은 우선 정황부터 살폈다.

"성동파와 남방이네 애들이 녀석을 골목으로 몰아넣은 모양입니다."

"좋아."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좋은 상황이다. 구석까지 몰아넣었으니 이제 잡기만 하면 될 터. 막 그녀가 수하들을 이끌고 좁은 골목으로 걸어가려 할 때였다.

"어허. 이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명한 사람을 보게 되네."

조폭들을 미행하고 있던 전형사가 그녀를 발견하고 아는 척을 해온다. 전 형사를 본 이한영의 표정이 가볍게 변한다. 그녀 역시 전 형사가 초면은 아니다.

"전 형사님이시군요."

"하하. 보잘것없는 사람을 기억해 줘서 고마운 걸. 그런데 서울에 계신 아가씨가 이런 시골엔 무슨 볼일이신가?"

"그저 잠깐 볼일이 생겨서...."

이한영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눈치 빠른 전 형사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저런. 궁지에 몰린 녀석들이 백합을 호출하셨군. 그런데 대체 백합꽃이 출동할 정도의 사건이 뭐가 있을까."

"...."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가물치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누님. 귀찮은데 대충 밀어 놓을까요?'

이한영은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능글맞게 웃고 있는 전 형사, 그는 이 바닥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다. 20년 경력의 강력계 형사. 그녀가 암흑가의 상징적인 존재라면 그는 우리 나라 경찰의 신화 같은 존재다. 아마 실적으로만 따졌다면 옛날에 경찰청장에 올랐을 것이다. 겉보기엔 부스스한 옆집 아저씨 같이 생겼지만 적으로 두면 상당히 귀찮은 존재다.

"선배님. 저는 볼일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한영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수하들에 둘러싸인 채 좁은 골목으로 뛰어갔다.

"이런 역시나 비밀인가?

전 형사는 며칠 째 못 감은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때 놀란 표정으로 서 있던 조 형사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저기 선배님. 백합이라고 불리는 여자라면...."

"그래. 그녀가 바로 밤에 피는 백합. 암흑가의 성녀라고 불리는 이한영이지."

"하."

조 형사는 감탄한 듯 탄식을 발했다.

그녀는 경찰 쪽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20살. 약관의 나이로 암흑가를 평정한 여걸.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도 전국의 조폭이 구름처럼 몰려든다는 암흑가의 신성.

그 누구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렇게 대단한 전설을 세우지 못했다. 하물며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녀가 그러한 명성을 쌓는 동안 불법적인 일에는 단 한 건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듣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네요."

"그렇지. 왜 반했냐?"

"에이. 어디 좀 예뻐야 말이죠. 깨끗이 포기할 랍니다."

"하하. 잘 생각했다. 내가 봐도 넌 무리인 것 같으니까."

얼굴이 일그러지는 조 형사의 등을 팡팡 소리 나게 두드려 준 전 형사. 사실 그는 딴 생각에 몰두했다. 암흑가의 성녀까지 출동했다면 이것은 절대 보통일이 아니다. 틀림없이 큰일이 터졌다는 얘기가 되는데.

문제는 지금 즉시 본부에 협조 요청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잠시 사태를 관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쩝. 좀 기다려보지 뭐. 무슨 일인지 몰라도 그녀의 이름값만으로도 조용히 끝날 수도 있으니까."

전 형사는 관망을 택했다.

"어이. 후배. 우리도 슬슬 들어가 보자고."

"네."

두 사람이 골목길로 진입하려는데, 한쪽에 시립해 있던 떡대들이 우르르르 몰려오더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조 형사가 경찰 배지를 보였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 형사가 권총을 꺼내어 빙빙 돌리자 순순히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애들 상대할 때는 이 장난감이 최고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