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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영웅의 길 > 끝

Red-17 게이트.

웨이브가 끝난 뒤 모두가 한숨을 돌리며 나자빠져 있을 때, 나는 곧장 이모샤 중위를 찾았다.

이모샤 중위는 쉴틈도 없이 전선을 정비하고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기 위해서 지휘를 내리고 있었다.

"바쁜가?"

"칼, 당신이군요."

이모샤 중위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번에는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칼 당신이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정말인지··· 아, 그리고 원래였다면 군인으로서의 성과급이 지급되어야 했겠지만··· 당신은 군인이 아니니 아마 조만간 포상금 혹은 현상금 형태로 칼 당신의 신원 ID에 크레딧이 입금될 겁니다."

크레딧은 아크의 화폐를 말한다.

예전에 아크 내 신분이 없을 때야 나에게 있어서 크레딧은 휴짓조각에 불과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다.

공적치와는 별개로 나는 아크에서 들어오는 수입 역시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 활약을 생각한다면··· 최소 일만 크레딧 정도는 들어오겠지.'

아무런 업그레이드나 커스터 마이징이 되어 있지 않은 순정 상태의 Ark-15 자동변환 소총 한 자루의 가격이 500크레딧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물론 Ark-15 자동변환 소총 자체가 아크의 기본 장비로서 양산화가 워낙 잘되어 있기에 성능에 비해서 가격이 싼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가, 신경 써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를 찾으신 이유가 혹시 따로 있으십니까?"

"아크를 떠날 생각이다."

현재 내 신분은 아크의 군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굳이 게이트 담당관에게 보고 같은 건 따로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알려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크를 나서기 전에 나는 이모샤 중위를 찾았다.

어차피 Red-17 게이트를 통과하려면 게이트 담당자의 허락이 있어야 했기 때문도 있었고 말이다.

"···아크를 떠나신다고요?"

아크를 떠난다는 말에 이모샤 중위는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기에, 나는 오류를 정정했다.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라, 잠시 외출하는 거다."

물론 외출치고는 조금 길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해두는 게 여러 모로 좋았다.

나로서는 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부랴부랴 움직이는 거지만 다른 이의 시선에서는 도망치는 거로 보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면 언제쯤 오십니까?"

"글쎄. 그건 확답 못하겠는데."

아무래도 일정이 일정이다 보니 상황에 따라서는 다음 웨이브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웬만하면 다음 웨이브 때는 아크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림자단 건도 있고, 이미 눈에 띄는 짓을 너무 많이 했어.'

더군다나 또다시 나에게 구역 몇 개를 통째로 맡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출입증을 발급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모샤 중위와의 짤막한 인사를 마친 나는 레드 라인의 게이트를 나섰다.

아크를 나서기 전에 잠깐 병참 장교 게드윈에게 들릴까도 생각해봤지만, 나중에 공적치를 더 모아서 한 번에 사용하기로 했다.

15만 공적치가 적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 장비를 바꿀 거라면 좋은 거로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다음 웨이브까지 치른다면 대충 쓸만한 장비를 살 수 있겠지.'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이제 나는 아크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당연히 이전에 비해 공적치로 구매할 수 있는 품목들 역시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을 터.

두 번째 업그레이드를 거친 Ark-15 자동변환 소총은 분명히 매우 좋은 개인 화기지만, 그림자단 같은 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손색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웨이브가 끝나기 무섭게 아크를 나서려는 이유 역시도 그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림자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예정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

물론 그 원인에는 에스더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클 것이다.

요컨대, 나 때문이다.

'다음에도 이렇게 휘둘릴 수는 없어.'

이번에 그림자단과의 조우는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에스더가 사라짐으로 인해서 생길 변화를 예측했어야 했는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것이다.

'변수를 용납하는 건 여기까지야.'

물론 이제는 구사일생 중첩이 생기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구사일생 중첩은 만약의 만약을 대비한 최후의 수에 가깝지, 그림자단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나에게는 그림자단에게 대항할 수 있는 또 다른 수가 필요했다.

'그림자단이 이번에 순순히 물러난 건 에스더와 함께 있는 나를 회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다음에도 거절하게 된다면 이번처럼 끝날 거라는 보장은 없어.'

그때가 된다면 처음에 단장이 말했듯이 내 팔다리 몇 개 정도는 잘라 놓고 에스더를 풀어줄 때까지 고문할지도 모른다.

핵심은 내가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으니 말이다.

곧, 지금 나에게 남겨진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정도였다.

그림자단에 가입하거나,

혹은 그림자단으로부터 나를 지킬 무기를 손에 쥐거나.

분명히, 전자의 선택은 나쁘지 않다.

진지하게 그림자단 루트에 협조하게 되면 훗날 아크에 악영향이 갈 테지만, 적당히 그림자단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그림자단을 이용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꼬리가 길면 언젠가 밟히듯이 그 방법은 오래 사용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그림자단을 이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내 쓸모에 대해서 의구심을 느낀 그림자단에 의해서 제거당할 테니까.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그림자단으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무기의 존재였다.

단순히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병기뿐만이 아니라, 그림자단의 약점을 포함한 것 말이다.

'지금이라면··· 아직 그림자단도 그걸 손에 넣지는 못했을 터.'

그림자단이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물밑 작업들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아크를 나가는 건, 그중 하나를 선수 치기 위해서였다.

'헤스본, 그곳으로 간다.'

헤스본은 훗날 크로노스 연합에 합류하게 되는, 아크를 기준으로 동쪽에 있었던 군소 도시 중 하나였다.

많고 많은 크로노스의 위성 도시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얼마 전에 있었던 대규모 웨이브와 함께 아크를 제외한 인류의 도시가 모두 멸망했을 때, 헤스본 역시도 함께 멸망했다.

지금 내가 하필이면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헤스본에 그림자단의 약점 중 하나가 있다.'

정확히는, 약점이라기보다는 그림자단이 찾고 있는 물건 중 하나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건, 그 물건을 손에 넣음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르는 그림자단으로부터의 위협을 한 차례 정도는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점이다.

일종의 인질이라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그 물건을 내가 지니고 있으면 그림자단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어.'

곧, 그림자단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최강의 방패이자 창이 될 수 있는 물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마침내 아크를 나선 나는 시선을 돌렸다.

우선, 은신처가 있는 영산 노아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은신처로 가서 정리해둘 일도 있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호루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호루스는 이미 나에게 종속되었으니 아크 앞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미친 짓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아무리 호루스가 거의 1급 마물에 비할 정도로 강해졌다지만, 괜히 아크의 상공에서 얼쩡대면 절대로 무사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런 호루스를 내가 타는 모습을 아크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굳이 그런 위험부담을 질 필요는 없으니까.'

거리가 조금 되더라도 차라리 걷는 게 백만 배 정도는 낫다는 소리였다.

곧이어서 제법 지루한 여정이 이어졌다.

의외로 거리는 꽤 길었다.

본래였다면 서쪽 전선으로 나가서 가는 게 거리상으로는 조금 더 빨랐겠지만, 그쪽에는 아는 안면도 없었으니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나는 이모샤 중위가 있는 Red-17 게이트를 선택했다.

모르긴 몰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이게 옳은 선택일 터였다.

괜히 서쪽 전선의 낯선 게이트 담당관과 대화를 나눠봤자, 말이 통할 확률보다는 안 통할 확률이 훨씬 더 높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영산 노아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에스더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주인님.]

"왜."

[뭐 안 물어봐요? 아까 우리 단장이 주인님 죽이려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면 뭐가 좀 궁금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미 다 알고 있었기에 굳이 묻지 않았던 건데, 그게 에스더에게는 또 매우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까 했던 말···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한 말이 대체 뭐예요? ···그거, 진심이었죠?]

이미 나에게 종속된 에스더였기에, 에스더는 내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단번에 파악했다.

"내가 대답을 해야 하나?"

[물론 안 해도 되죠. 안 해도 되는데! 그래도··· 조금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이제 운명 공동체잖아요. 제가 단장을 말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에스더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나게 하는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에스더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잘 가지고 노는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너를 믿을 수 없다고 하면 에스더가 아주 단단히 삐칠게 분명했기에,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나중? 나중 언제요?]

"우리가 더 가까워지면."

[이미 충분히 가깝지 않나요? 이미 몸과 마음을 전부 다 빼앗겼는데요 전?]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알텐데."

[농담도 몰라요? 뭐··· 그러면 약속한 거에요? 나중에는 꼭 말해줘야 해요?]

"알았다."

그렇게 에스더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어느덧 은신처에 다다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키깃!]

그와 함께 나를 마중 나온 호루스가 얼굴을 나에게 비볐다.

솔직히 말해서 전신에 돋아난 비늘과 뼈에 찔리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깃!]

야누스와 호루스가 재회하며 서로를 향해서 뼈 촉수를 뻗었다.

뭔가 기묘하고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나는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직 애들인데 상처라도 받으면 어떻게 해.

"오랜만이다."

[우리 뼈순이, 잘 있었어?]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의견에 동조하듯이 호루스가 에스더를 향해서 울부짖었다.

[키에엑!]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에스더가 이에 질세라 빼액 소리를 질렀다.

1급 마물끼리의 숨 막히는 괴성 대전이 펼쳐지려던 찰나, 내가 말했다.

"장난은 나중에 치고. 바로 가야한다."

[어딜요?]

"헤스본."

[···거기는 왜요?]

에스더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헤스본은 그림자단이 찾는 물건 중 하나가 있는 유력 후보지 중 하나였지만, 어디 있는지를 몰라서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단 루트로 진행할 때 플레이어한테 임무를 맡기지.'

그래서 나는 그 물건이 어디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직접 수십 번은 더 찾아봤었으니까.

"찾을 게 있다."

[그러니까 뭘 찾으려는─]

나는 에스더의 질문을 뒤로한 채로 곧장 호루스의 몸에 올랐다.

만약 예전 같았다면 헤스본에 갈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호루스가 있다면 아무리 먼 거리라고 해도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다.

'역시 탈 것은 날탈이지.'

내가 호루스의 등을 툭툭 두드리자, 호루스의 등 뒤에 있는 뼈 촉수들이 마치 손잡이처럼 일어났다.

"가자."

[키이익!]

호루스의 거친 포효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 끝

시원하다 못해 날카로운 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단번에 지상의 것들이 작게 느껴질 정도로 호루스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꺄악!]

"···뭐 하는 거지?"

[아니, 원래 이쯤에서 소리를 질러줘야 할 것 같아서요.]

유령종 특성상 호루스가 아무리 빨리 날아도 별로 영향도 받지 않는 주제에, 에스더는 마치 애처럼 한껏 신이 난 듯했다.

이럴 때 보면 또 생긴 대로 논다.

[그런데 아크에서 헤스본까지 거리가 좀 되지 않아요?]

그 말마따나 헤스본은 크로노스 인근의 군소 도시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도시다.

거기다가 지형 자체도 접근하기 쉽지 않은 장소였다 보니, 자연스럽게 헤스본은 거의 타의 반, 자의 반에 의해서 고립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헤스본이 대놓고 쇄국 정책을 펼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환경적인 요인으로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내가 헤스본을 찾아가고 있는 이유 역시도 헤스본과 아크 사이에 있었던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서둘렀잖나."

[그런 거예요?]

"그런 거다."

[키이잇!]

호루스가 속도를 올렸다.

덕분에 나도 잠시 나누던 잡담을 접고서 호루스의 몸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야가 휙휙 바뀐다.

우리가 아크의 대공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쪽으로."

[키잇!]

내가 가리킨 방향은 동쪽.

헤스본 자체가 크로노스와 거리상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뼈순아, 우리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냈어?]

[키에엣!]

에스더는 호루스와 무언가 교감이라도 나누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 모습이 뭔가 묘하게 느껴졌지만, 딱히 내가 신경을 쓸 건 아니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마수들 잡아 먹으면서 기다렸다네요.]

"···딱히 안 물어 봤는데."

[그냥 말하고 싶어서요.]

어쩐지 안 본 사이에 조금 더 몸집이 커진 것 같더라니······.

뭐, 나로서는 좋은 게 좋은 거였다.

호루스가 강해질수록 내 전력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었고, 끼니도 알아서 챙겨 먹고 다니면 나도 많이 편했으니까.

'확실히 야누스보다는 편하긴 하지.'

안 그래도 이번에 너무 바쁘게 움직인 탓에 야누스에게 마수 시체를 먹일 시간이 없었던 게 아쉬웠던 차다.

그나마 호루스라도 안 굶고 다녔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깃!]

야누스가 마치 조금만 더 신경을 써달라는 듯이 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빠르게 바뀌어 가는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며 도착 시간을 가늠했다.

'이 속도라면··· 대충 오늘 안에는 도착하겠어.'

예전에 이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를 갈 때 일주일 이상의 일정을 잡았던 걸 생각한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무려 헤스본을 다녀오는 일정을 고작 이틀 안에 끝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순수하게 이동만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곳은 아크 바깥이다.

제아무리 하늘 위라고 한들, 안전한 장소 따위는 없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스더가 외쳤다.

[주인님! 저쪽!]

나는 에스더의 외침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저편에서 날아드는 검은 점 무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행종 무리였다.

'그러면 그렇지.'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그저, 올 게 왔다는 생각뿐.

아크에서 괜히 전투기 등의 공중 전력을 운용하지 않는 게 아니다.

아크 주변에야 아크가 대공망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기에 별 일 일어나지 않아도, 아크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아크 바깥은 야생이다.

차라리 숨을 곳이 있는 지상이었다면 모를까, 공중에서는 그럴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다.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엥켈렌스의 영역 역시도 발동할 수 없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엥켈렌스의 송곳니를 지상과 접촉할 것'인데, 지금은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비행종들을 떨쳐내기 위해서 더 위험한 지상으로 제발로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할 수 없나.'

가급적이면 호루스에 올라탄 채로 공중전 따위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으나, 상황이 이렇다면 무조건 선공이 유리했다.

특히나 상대가 지금처럼 머리를 들이민 채로 멍청하게 날아오고 있다면 더욱더 말이다.

철컥-

부득이하게 양손은 사용할 수 없었기에, 야누스와 호루스에서 뻗어 나온 뼈 촉수들이 내 몸을 마치 안전벨트처럼 고정했다.

그 덕분에 나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총구를 조준할 수 있었다.

"잘했어."

[기깃!]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까마득한 점들을 조준했다.

바람 탓에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어서인지 고글이라도 챙겨왔어야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대략적인 수준은··· 대충 6급 정도인가.'

이게 아크 바깥의 무서운 점이었다.

6급 비행종 정도면 설사 아크의 전투기가 나선다 한들 자유자재로 회피 기동을 하는 마수를 당해낼 수 없다.

하물며 지금 눈앞에 있는 그러한 6급 비행종 무리가 약 열 마리가량이었다.

'안 그래도 물자에 여유가 없는데, 전투기까지 운용할 예산이 안 나오는 이유지.'

그 비싼 돈을 들여서 전투기 한 대를 만들어봤자, 아크 바깥에 널려 있는 6급 비행종 하나 제대로 당해낼 수 없다.

그렇기에 아크에서는 공군 전력을 철저하게 소수 정예화시켰다.

꼭 필요한 일에만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뭐, 그건 그거고······.'

나는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비행종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

비행종을 상대로 아주 유효한 총알 중 하나였다.

쐐애애애애액─!

총성과 함께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총알이 단번에 비행종의 날개에 적중했다.

아무리 잘 보이지 않아도 날개처럼 착탄 지점이 넓은 곳을 못 맞출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콰앙─!

순식간에 날개를 잃은 비행종이 힘없이 추락했다.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어처구니 없이 동료를 잃은 다른 비행종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날뛰었다.

[까아아아아악───!!!]

마치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찌푸려졌다.

'시끄러워.'

저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는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두 발.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전사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세 발······.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약탈꾼를 처치하였습니다.]

[6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약탈꾼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무섭게 내가 초탄에 제거한 비행종은 네 마리.

하지만 아직도 반 이상의 비행종이 남아 있었다.

여섯 마리의 비행종들이 이쪽을 향해서 쇄도했다.

하지만 놈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면, 이쪽의 전력은 단순히 나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키에에에에───!]

호루스가 괴성을 토해냈다.

쐐색! 쐐새색!

호루스의 몸에서 뻗어 나간 뼈 촉수들이 단번에 도망가는 비행종들의 몸을 꿰뚫었다.

단순히 꿰뚫은 것뿐만 아니라, 이내 그것들을 흡수까지하기 시작했다.

쪼옥, 쪽─

[깍, 까악!]

[까악! 까악!]

그제야 비행종 무리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지만, 내가 그걸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어딜 가려고.'

보통, 도망가는 비행종을 잡는 건 무척이나 까다롭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행종들의 행동 패턴을 몰랐을 때의 이야기고, 나에게 있어서 저러한 도망 패턴은 너무나도 눈에 익숙했다.

'지금.'

거침없이 방아쇠가 당겨지고,

다시금 총구가 불을 뿜었다.

쾅!

콰카카캉─!!

연신 일어난 폭발과 함께, 도망을 가던 세 마리의 비행종들이 형편없이 추락했다.

비행종의 가장 큰 강점은 특유의 기동성이지만, 반면 가장 큰 약점은 날개다.

그렇기에 맞출 수만 있다면 상대적으로 강한 비행종도 잡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5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돌격대장을 처치하였습니다.]

[5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돌격대장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마침내 모든 비행종이 정리된 후,

호루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뼈 촉수에 매달려 있던 비행종들의 찌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상에 내던졌다.

이미 알맹이는 다 먹었으니 굳이 들고 있을 필요가 없긴 했다.

한 번의 격렬했던 전투가 끝난 뒤, 여정이 계속됐다.

처음에는 신나서 방방 뛰던 에스더도, 계속해서 비슷한 풍경이 계속 반복되자 지루해졌는지 어느새 드러누워서 늘어지게 하품했다.

[어디서 귀염둥이들 안 오나······ 심심해 죽겠네.]

"일부러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라."

[누가 그런데요? 그런데 그거 꽤 괜찮은 생각 같네요.]

에스더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굉장히 당황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주기에는 지금 내가 너무 귀찮았다.

[재미없어.]

에스더가 혀를 비쭉 내밀었다.

메롱이었다.

나는 굳이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가볍게 무시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칼날 같은 바람을 맞으면서 나아갔을까.

참다못한 에스더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에요? 나 진짜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데.]

"거의 도착했다."

[그놈의 거의, 지금 두 시간 전부터 하고 있는 거 알아요? 이러다가 아주 일주일 뒤에 도착하겠네. 그때가 되면 볼만하겠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길 봐라."

내가 손가락 끝으로 구름 사이에 있는 어느 산 하나를 가리키자, 그제야 에스더의 표정이 서서히 환희로 물들었다.

[저건······ 진짜에요?]

"보다시피."

헤스본.

마침내 멸망한 구름의 도시가 자욱하게 일어난 구름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그 이름처럼 헤스본은 구름이 눈앞에 보이는 산 정상에 있는 도시다.

고산 지대의 도시는 여러 가지 장점과 단점이 있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역시나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수월하다는 점이고, 단점은 보급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나마 구름의 도시 헤스본은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되는 도시였기에,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 규모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마지막까지 버틴 도시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무너졌지만, 어차피 아크를 제외한 인류의 도시는 모두 멸망했다는 걸 생각했을 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한 헤스본의 풍경은 여느 멸망한 도시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헤스본 자체가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병사를 비롯한 군인들의 시체는 마수들의 시체에 비해서 매우 그 숫자가 적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딱히 없나.'

혹시나 나도 모르고 있는 변수가 있을까 싶어서 헤스본 위를 호루스로 한 바퀴 돌아본 나는 그대로 착륙했다.

이미 변수로 인해서 한번 호되게 당할 뻔한 적이 있었으니, 미리미리 조심하는 것이었다.

"고생했어."

[끼잇!]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끼이잇!]

나는 호루스를 대기시켜놓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헤스본이야 뺀질나게 드나들었던 터라 구조는 이미 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왔던 시기가 다른 만큼 다른 부분도 꽤 있었다.

'대충 이쯤이었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움직였다.

그때, 에스더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뭘 찾는 거예요? 이제 슬슬 말해줄 때도 됐잖아요? 어차피 찾으면 알게될 텐데.]

흐음.

그것도 그런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라인 출신 의원,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 그게 이곳에 있다."

[······네?]

에스더의 표정이 잠시 벙쪘다.

그게 어쨌냐는 듯이.

그렇기에 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희가 찾고 있는 물건."

< 구름의 도시 헤스본 (2) > 끝

로즈 라인 출신 의원, 가네샤 트리파티.

그는 아크 의회 소속의 인물로서, 그야말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크의 최전방인 로즈 라인이라는 지역구와 바이올렛 라인부터 로즈 라인까지 골고루 영향을 끼치고 있는 트리파티 가문의 힘은 그에게 일개 의원 수준 이상의 초월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그렇기에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이용한다면 일시적으로 로즈 라인과 다른 라인을 봉쇄하거나, 혹은 로즈 라인의 게이트를 강제로 개방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이는 엄밀히 따지면 일개 의원의 권한을 넘어선 비공식적인 권한이었으나, 중요한 건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가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크의 지배를 위해서 아크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그림자단으로서는 탐내지 않을 수가 없는 물건인 셈이었다.

'실제로 그림자단 루트를 진행할 때,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이용해서 고의적으로 로즈 라인과 다른 라인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었지.'

거기다가 사용된 ID 카드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이름이니, 그림자단이 일을 벌려도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현재 아크에서 실종 내지 사망으로 처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현재 실종 및 사망 상태인 가네샤 트리파티의 ID가 비활성화되지 않는 건 아크의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아크의 신분증인 ID 카드는 기본적으로 위조 및 변조가 불가능하다.

아크에서 ID 카드는 곧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당연히 초월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권한에는 아무리 아크라 할지라도 시스템을 초기화하지 않는 이상은 접근하지 못한다.

현재 아크가 심각한 보안 공백을 알면서 방치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니, 애초에 그 ID 카드가 그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가네샤 트리파티는 헤스본에서 마수 군단에 의해서 희생됐다.

당연히 마수와 마물들이 아크 의원의 ID 카드를 사용해서 어떤 흉계를 꾸밀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아크에서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바로 그러한 거물이 헤스본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헤스본이 멸망하기 직전에 아크에서 파견된 일종의 외교 사절단의 대표였다.

헤스본이 지닌 생명 공학 기술에 대한 협상을 위해서였다.

구름의 도시 헤스본은 지리상 모든 자원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도시다.

그렇기에 헤스본이 활용할 수 있는 건 오직 인력, 즉 사람뿐이었고 그들은 몇 없는 모든 자원과 기술을 사람 자체에 투자했다.

의료, 바이오, 유전자 조작······.

헤스본의 목적은 한 가지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을 만드는 것.

곧, 결과적으로 헤스본은 적어도 강화 병사에 대한 부분만큼은 아크를 한발 앞서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헤스본의 상징과도 같은 강화 병사였다.

아크에서는 온갖 생명 윤리 단체들로 인해서 함부로 진행하기 어려운 실험을, 헤스본에서는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에 거리낌 없이 진행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일이 꼬였지.'

가네샤 트리파티가 강화 병사 기술에 대한 협상을 하기도 채 전에, 아크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도시를 멸망시켰던 거대 웨이브가 발생했다.

그렇게 가네샤 트리파티는 헤스본에 고립되었고, 곧 그가 지닌 ID 카드 역시도 함께 헤스본 어딘가에 남겨졌다.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면서.

나는 그림자단보다 한 발 더 빠르게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손에 넣은 뒤, 그것을 무기로 그림자단에게 맞설 것이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약발이 먹힐 때까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의 행방을 인질로 잡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헤스본으로 향한 이유는 비단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 그림자단과 마주한 뒤로 많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생각은 역시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대한 것이었다.

'힘이 부족해.'

지금까지 내 성장은 대부분 좋은 장비를 구하거나, 혹은 야누스를 성장시키는 데 주력해왔다.

하지만 야누스는 상황에 따라서 사용이 제한될 수 있었고, 장비는 당장 휴대하지 않을 경우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본질적인 걸 놓치고 있었어.'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강해지는 데는 참으로 많은 방법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효과가 빠르고 직관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움직여왔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진짜 강자를 만났을 때 당해낼 수 없다.

이번에 단장과 변절자 룩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 자신이 강해져야 해.'

더 좋은 장비도,

야누스도,

수하들도,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말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지금 내 성장세는 매우 빠르다.

평범하게 아크 내에서 시작했을 때와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특히 에테르 감응력 같은 경우는 시간만 주어진다면 단장 수준까지 다다르는 것도 가능할 정도의 재능까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시간이었다.

'그림자단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어.'

그리고 그건 내가 아크 내에서 필요 이상으로 눈에 띄었기 때문도 있었다.

물론 후회는 없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지.

'헤스본의 강화 혈청.'

구름의 도시 헤스본은 멸망했다.

그렇기에 헤스본이 만들어낸 강화 혈청 역시도 마수와 마물들에 의해서 파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모든 강화 혈청이 그런 건 아니었다.

헤스본의 지하 깊숙한 곳 중 하나에는 여전히 강화 혈청이 남아 있다.

'헤스본의 강화 혈청은 스테이지의 중반부까지도 멀쩡히 남아 있는 물건이야. 지금이라면 당연히 있겠지.'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와 헤스본의 강화 혈청.

내가 헤스본에서 찾아야 할 것들이었다.

'우선순위는··· 역시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부터 찾아야겠지.'

나는 헤스본의 풍경을 살폈다.

마수와 인간들의 시체가 한데 뒤섞여 있는 풍경은 이곳에서 있었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말해주었다.

'내가 알고 있던 풍경과는 확실히 달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플레이어가 헤스본을 방문할 때는 이미 스테이지가 중반 정도 흘렀을 때다.

반면, 지금의 헤스본은 아직 멸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이 남아 있는 시체들은 한창 썩고 있는 걸 증명하듯이 온갖 날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으······ 꼭 여기서 찾아야 해요?]

에스더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이 풍경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가야지."

[에휴······ 그럴 줄 알았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헤스본에서 일어난 참상을 천천히 살폈다.

주된 관심사는 역시나 헤스본의 군인들이 사용하던 물자들이었다.

대부분의 무기나 물자들은 파손된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쩡한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돌아갈 때 챙겨야겠어.'

만약 내가 이곳을 도보로 이동했다면 별로 챙겨가지 못할 테지만, 지금 나에게는 호루스가 있었다.

아무리 많은 물자라도 나르는 게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내가 호루스에게 말했다.

"너는 근처에서 기다려. 혹시 뭐가 오면 날아서 도망쳤다가, 내가 나오면 다시 오고."

[키이잇!]

그렇게 호루스를 대기시켜 놓은 뒤, 나는 기억 속에 있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헤스본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지하 벙커.

실제로 아크의 귀빈이었던 가네샤 트리파티의 시체가 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이동하기에 앞서, 나는 검은 판초와 쿠프의 뼈 가면을 뒤집어썼다.

'혹시 모르니까.'

헤스본에 생존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내가 헤스본을 찾아온 시기가 앞당겨지기도 했고.'

준비를 마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벙커는 헤스본 군 사령부 지하를 통해서 갈 수 있다.

본래였다면 허가된 자만이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갈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엘리베이터가 작동할 리가 없었으니 나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서 내려갈 생각이었다.

분명히 그럴 계획이었는데······.

[B42]

군 사령부 내에 들어서는 것까지는 어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서 숨겨진 엘리베이터를 확인해 보니, 엘리베이터 위에 전광판이 떠 있었다.

아직 헤스본 사령부 내에 에너지 공급이 끊기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으음.'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물론 에너지 공급이고 뭐고 그냥 엘리베이터 바닥을 뜯어내고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억지로 엘리베이터 문을 열 경우 경보가 울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물론 위치가 위치인 만큼 경보가 울린다고 해서 마수 무리가 몰려들 거나 할 확률은 적지만······.'

나는 그보다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헤스본 지하 벙커 내에, 아직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

'일단 가보면 알겠지.'

생각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시간이 썩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야누스.'

내 부름에 야누스가 뼈 촉수를 뻗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끼긱, 끼기긱······.

그렇게 내가 엘리베이터 문을 억지로 열자, 꺼져 있던 전등이 붉은빛으로 켜지더니 번쩍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예상했던 대로 소리는 없었다.

애초에 아크를 비롯한 도시에서는 웬만하면 경보를 울릴 때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다.

사이렌 같은 시끄러운 소리는 웨이브의 또 다른 기폭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하 벙커에 생존자가 있다면, 내 존재에 대해서도 알아 차렸겠지.'

그에 대해서는 일단 움직인 뒤에 결정할 생각이었다.

만약 생존자가 없다면 괜히 고민한 시간만 아까워지니까.

끼이이익······.

마침내 엘리베이터 문을 완전히 열어재낀 나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흠.'

까마득한 어둠이 지하까지 이어졌지만, 나는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야누스!'

내 부름과 함께 야누스에서 뻗어 나온 뼈 촉수들이 마치 브레이크처럼 벽면으로 뻗어 나가며 내가 떨어지는 속도를 조절했다.

콰카카카카카───!!!

엘리베이터 통로 벽이 사정없이 긁히며, 내 몸이 빠르게 하강했다.

이 속도라면 머지않아서 지하 벙커가 있는 지하 42층에 도착할 터.

지하 10층.

지하 15층.

지하 20층······.

그렇게 내가 목적지를 향해서 빠르게 하강하고 있을 때,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덜컹-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것 봐라.'

지하 42층에서 가만히 멈춰서 있었어야 할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엘리베이터에 치이는 추한 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곧장 손을 뻗었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20분 17초.]

아무리 엘리베이터가 든든하게 만들어 졌다고 한들, 플라즈마 소드조차도 이겨내는 엥켈렌스의 창 앞에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스겅──

단번에 엘리베이터의 천장을 베어 가른 뒤, 엘리베이터 안으로 진입한 나는 바닥 역시도 엥켈렌스의 창으로 잘라버렸다.

[무식한······.]

에스더는 조금 경악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곧장 지하 42층을 향해서 앞서 했던 것과 똑같이 뼈 촉수들을 이용해서 하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42층에 도착한 나에게 날아온 건 총알이었다.

인사치고는 제법 과격했다.

깡─!

설마하니 내려오기 무섭게 총을 맞을 줄은 몰랐지만, 야누스에 의해서 전신을 보호받고 있는 나에게 일반 탄환이 먹힐 리가 만무했다.

재차 총알들이 날아오자, 나는 하는 수 없이 말했다.

"멈춰라."

"······사람?"

그와 함께 붉은빛의 점등 속에서 인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

'이건 변수인데.'

가네샤 트리파티.

그가 살아 있었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3) > 끝

헤스본으로 향할 때만 해도, 내 계획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헤스본의 지하 벙커로 들어가서 가네샤 트리파티의 시체에서 그의 ID 카드를 챙기고, 겸사겸사 헤스본에 있는 강화 혈청도 챙겨서 헤스본을 유유히 떠나는 것.

하지만 가네샤 트리파티가 아직도 생존해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확실히··· 내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시체를 본 건 중반부 스테이지 이후였지.'

즉, 이제 막 네 번째 스테이지가 끝난 지금이라면 가네샤 트리파티가 살아있다고 해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헤스본의 지하 벙커 내 물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이 정도 시간이라면 살아있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사람? 정말로 사람 맞습니까?"

가네샤 트리파티가 여전히 떨리는 총구를 겨눈 채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에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움찔했다.

'흐음······.'

사실, 지금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차림으로 왔었다면 적당히 구출팀으로 위장해도 되겠지만, 문제는 지금 내 차림새가 영락없는 변절자 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만약 가네샤 트리파티를 살려두게 되면, 내 정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갈 가능성이 크다.'

변수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를 그냥 죽이고서, 예정대로 그의 ID 카드를 챙겨가면 된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아크의 고위 인물이기는 해도, 전투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그는 의원이지 군인이 아니다.

즉, 내가 죽이고자 한다면 이곳에서 가네샤 트리파티의 목숨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내가 고민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아크 내의 막강한 힘과 권력.

만약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의 일이 굉장히 수월해질 터였다.

'거기다가 이런 상황에서 생명을 구해준다면, 적지 않은 인연이 되겠지.'

본래였다면 가네샤 트리파티는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다.

당연히 내가 이곳에서 그를 구해준다면 사람인 이상 고마움을 느낄 터.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현재 내 차림새다. 그가 아크로 돌아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변절자 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거다.'

사실은 내가 스컬 턴코트가 아니라고 정체를 밝혀봤자,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변절자 폰이라는 마물이 뼈 갑옷을 장착한 무법자로 바뀌었을 뿐, 아크의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때는 칼 마커스의 신분까지도 위험해지니, 최악의 경우 아크에서 수배령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아크와의 모든 교류를 끊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어쩔까······.'

고민이 깊어졌다.

머리로는 그냥 깔끔하게 가네샤 트리파티를 죽이고 계획대로 진행하고 싶었으나, 어느 한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냥 버리기는 영 아까운데.'

죽은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만으로도 라인의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가네샤 트리파티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아무리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패가 아니다고 하더라도, 고민도 없이 버리기에는 아쉬운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단, 안에 좀 둘러볼까.'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뒤로한 채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살아있다면, 또다른 생존자 역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멈춰! 더 이상 다가오면 쏘겠다!"

이미 몇 발 쏴놓고는 잘도 떠들어대기는.

가네샤 트리파티는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위협했지만, 그 손에 들린 총은 나에게 전혀 위협지 되지 못했다.

'HS-714 자동권총.'

헤스본제 보급 기본 권총이다.

당연히 아크제 보급 기본 권총인 HE2050보다 약 네 단계 정도 떨어지는 성능을 지니고 있는 물건인 만큼, 야누스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는 나에게는 전혀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실제로 조금 전에 HS-714 자동권총에 맞았을 때, 뼈 가면에 작은 실금조차 나지 않은 건 물론이고 충격 역시도 거의 없었다.

야누스에 의해서 피해가 완전히 흡수될 정도로 위력 면에서 나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잠깐 둘러볼까.'

아무래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처분에 대해서 결정하기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나는 잠시 이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지상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내가 들어온 엘리베이터 통로뿐.

즉, 이곳을 나가려면 지하 42층을 엘리베이터 줄 하나를 잡고서 기어올라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가네샤 트리파티가 탈출할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이곳에서 시체로 발견되지도 않았겠지.'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면, 지금 헤스본이 전력이 공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가네샤 트리파티가 이곳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탈출 타이밍을 채 잡지 못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이 안을 살펴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더 이상 다가오면 발포하겠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경고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서 벙커 안으로 향했다.

"지금 어디를······."

가네샤 트리파티는 잠시 얼이 빠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나에게 적의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네샤 트리파티는 내가 벙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음에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는 못했다.

그저, 제 자리에 선 채로 내가 벙커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만 보고 있을 뿐.

나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벙커는 꽤 넓었다.

하긴, 늘 마수와 마물들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지하 벙커란 만약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사용해야 하는 건축물이다.

당연히 규모 면에서도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게 바로 지금과 같은 결과물이었다.

'가네샤 트리파티 말고 다른 인물은 없는 건가?'

그렇게 내가 방문 중 하나의 문을 연 순간.

풀썩─

열리는 문과 함께 시체 하나가 내 앞에 쓰러졌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썩어가는 사람의 시체를 보는 건 썩 달가운 경험이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표정이 찌푸려졌다.

[꺅!]

귀신이 시체를 보고 비명을 내지르는 진귀한 광경 속에서, 나는 빠르게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마수나 마물에게 당한 게 아니다.'

이마에 나 있는 가지런한 구멍.

이건, 총상이었다.

'···내분이라도 일어났나?'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확인할 수 없는 가설이었기에 나는 벙커 안을 계속해서 살폈다.

시체는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헤스본의 지하 벙커는 작정하고 만들었는지 외부 건물의 크기보다도 넓었고, 그만큼 시체들의 숫자 역시도 비례해서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총상이었다.

'원래 여기에 이렇게 시체가 많았었나?'

아무리 내가 헤스본을 방문하는 게 스테이지 중반부 이후라고 하더라도, 그때와 지금의 풍경은 사뭇 다른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당장 에너지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가네샤 트리파티가 이곳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건가?'

답은 알 수 없었다.

예정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온 헤스본의 지하 벙커는, 내가 알고 있던 장소와는 너무나도 많은 게 달랐다.

마치 곧 이곳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벙커 내부는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생활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보안 구역으로 추정되는 장소 앞에 도착한 나는 야누스를 이용해서 보안 시스템을 그냥 뜯어 버렸다.

치직, 칙-!

어차피 이미 붉은빛이 점등되며 경고가 울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내가 보안 시스템을 부숴버린다고 해서 딱히 변하는 게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안전문 안으로 들어서자, 웬 안전 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온도 조절 시스템이 있는 박스였다.

박스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도록 되어 있었지만, 새삼스레 내가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쓸 리가 만무했다.

뚜득-

뚜드득─

뼈 촉수를 안전 박스 입구 사이에 넣은 뒤에 이내 그걸 완전히 뜯어 버린 나는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보고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헤스본의 강화 혈청.

본래였다면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이곳에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색깔이 무언가 다른 것 같은데······ 뭐지?'

헤스본제 강화 혈청은 본래 푸른 빛을 띄고 있어야 했건만, 지금 눈앞에 있는 강화 혈청의 색은 보라빛이었다.

나는 강화 혈청을 살폈다.

──────────────

[HSB-A001 강화 혈청] [★★★★★★★★★(9성)]

헤스본제 강화 혈청.

알파 타입.

우연의 일치로 제작된 강화 혈청.

헤스본에서 제작되는 모든 강화 혈청의 베이스가 된 혈청이다.

다른 타입의 혈청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

"상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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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 타입이라고?'

본래 내가 알고 있던 헤스본제 강화 혈청은 모두 오메가 타입이다.

등급 역시도 5성을 넘지 않았건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알파 타입의 등급은 무려 9성이었다.

보통 8성 이상의 장비나 물건들은 대부분 오리지널리티를 지닌다는 걸 생각했을 때, 이 강화 혈청 역시도 유일한 물건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다른 타입의 혈청을 흡수할 수 있다니?'

나로서도 전혀 처음 보는 강화 혈청.

하지만 이 문구가 진짜라면 정말로 엄청난 물건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망설일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곧장 혈청을 들었다.

이런 물건을 들고서 이동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동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보관함이었던 강철 박스는 조금 전에 내가 통째로 뜯어버렸으므로, 다시 활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온도 조절 장치는 내가 파괴했어. 이대로 고민하면서 내버려 두면 못 쓰게 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강화 혈청의 뚜껑을 열고, 주사기 부분을 내 팔에 가져다 댔다.

푹-!

강화 혈청의 약물이 빠르게 내 체내에 흡수되어갔다.

[HSB-A001 강화 혈청을 주사하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이 효과는 능력치가 상승할 때마다 영구적으로 적용됩니다.]

[알파 타입의 혈청을 주사하였습니다. 다른 타입의 혈청을 흡수할 때마다 그 힘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각 혈청은 각기 다른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흡수한 혈청의 종류 : ─]

'이건······.'

대박이다.

보통 내가 알고 있는 오메가 타입의 혈청은 기껏해야 모든 능력치가 5 정도 영구적으로 오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강화 혈청은 능력치가 무려 현재 내 능력치에 비례해서, 그것도 앞으로의 성장과 비례해서 상승한다.

'더군다나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을 흡수할 수 있다는 말. 이건 조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을 찾아서 맞으면 된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이미 헤스본은 멸망해서 찾는 건 불가능할 텐데······.'

내가 이런저런 생각 속에 잠겨 있던 순간.

쾅───!!!

멀찍이서 울려 퍼지는 굉음.

엘리베이터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4) > 끝

'누군가 침입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나는 곧장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화 혈청을 주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확인해봤나?'

내 물음에 에스더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너라면 그럴 테니까.'

[진짜 독심술 같은 거 할 줄 아나··· 어쨌거나 마수나 마물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거군.'

에스더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긴 한데··· 그냥 인간이라고 보기에도 뭔가 조금 이상해요.]

'뭐가?'

[글쎄요··· 저런 걸 어디서 보긴 했는데, 정확히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림자단의 척후이자 정보원으로서 활동해온 에스더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로 상식 밖의 무언가라는 뜻.

'지금 침입한 자가 가네샤 트리파티를 제거하고 HSB-A001 강화 혈청을 챙겨간 건가?'

내가 알고 있기에, 스테이지 중반부쯤에 헤스본의 지하 벙커를 방문하게 되면 찾을 수 있는 건 가네샤 트리파티의 시체와 그의 ID 카드 정도다.

지금처럼 HSB-A001 강화 혈청은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

물론 단순히 벙커 내 에너지 공급이 끊어져서 HSB-A001 강화 혈청 역시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걸 수도 있겠으나, 내 기억에 의하면 애초에 HSB-A001 강화 혈청이 들어 있었던 강철 박스 자체가 없었다.

즉, 지금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다면 이곳에서 생길 일 역시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늦지는 않겠지.'

내 입장에서 볼 때 가네샤 트리파티가 죽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그럼에도 타의에 의해서 내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네샤 트리파티를 죽일 상황이 생기더라도, 내가 죽인다는 소리다.

그 순간.

탕! 타탕─!

저편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내가 알고 있는 총성이었다.

총성을 따라서 마침내 내가 지하 42층의 엘리베이터 쪽에 도착하자, 그곳에서 가네샤 트리파티가 누군가에게 목을 붙잡힌 채로 허공에 붙들려 있었다.

"끅! 끄으윽······!"

가네샤 트리파티가 손에 쥐어진 총을 쏘기도 하고, 그걸로 때리기도 하면서 발버둥을 쳤으나 그의 목을 붙잡은 굵직한 팔은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정체 불명의 괴한을 보았다.

헤스본제 군복으로 보이는 차림새.

거의 2m는 될 법한 거구.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방독면까지.

차림새를 볼 때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으나, 에스더의 말마따나 풍기는 분위기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다.

실제로 가네샤 트리파티가 쏜 총알의 흔적이 군복 곳곳에서 보였음에도 총알이 피부 언저리에 박혀있었을 뿐, 파고든 흔적은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화 병사.'

아크에 에테르 병사와 기계 병사 그리고 스컬 나이트가 있다면, 헤스본에는 강화 병사가 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아크에도 강화 병사는 있었지만, 순수한 강화 능력만 본다면 헤스본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금 눈앞에 있는 괴한은 헤스본의 강화 병사로 보였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던 강화 혈청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알고 있는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은 모든 능력치를 +5 정도 해주는 효과만을 지니고 있을 뿐, 저렇게 총알을 막아주는 능력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달라.'

애초에 평범한 강화 병사였다면 에스더가 진작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입고 있는 군복이 아크제 보호복 같은 특별한 물건이냐 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헤스본의 기술은 생명 공학은 뛰어나도 다른 방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내, 놔······."

괴한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당장 가네샤 트리파티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있었으니,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뭘 찾지?"

내가 괴한을 부르자, 괴한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어딘가 맛이 가 있는 시선이었다.

"넌··· 뭐··· 야······."

"네가 찾고 있는 게 이건가?"

내가 괴한의 앞에 빈 혈청 병을 보이자, 괴한의 눈이 희번뜩했다.

"그─ 건─ 내─ 것─ 이─ 다─!"

마치 천둥 같은 포효라는 게 이런 걸까.

쩌렁쩌렁 울려 퍼진 괴성과 함께 괴한이 가네샤 트리파티를 내던지고는 그대로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커헉!"

바닥에 내팽개쳐진 가네샤 트리파티가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볼 때, 저대로 내버려 두면 예후가 좋지 않을 듯했다.

물론 나는 곧 가네샤 트리파티에게서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뛰쳐오고 있는 거구의 존재 때문이었다.

쿵! 쿵!

무려 2m에 달하는 거구가 나에게 달려들자, 지하 벙커 바닥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쏠까?'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상대는 인간이다.

철갑탄과 폭발탄 조합이라면 아무리 튼튼한 가죽을 지녔다고 해도 통째로 폭사시킬 수 있을 터.

하지만······.

'바로 죽이기에는 알아내야 할 게 있어.'

강화 병사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총구를 내린 채로 허리춤에 있던 스멜 공방제 7번 마테체를 뽑아 들었다.

야누스를 얻은 뒤로 거의 무기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이지만, 지금 상황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와라."

"크오오!"

괴한의 주먹이 쇄도했다.

나는 굳이 피할 필요도 없이 마테체의 날을 세워서 통째로 주먹을 가르려 했다.

스걱─

'안 잘려?'

본래였다면 그대로 주먹을 반으로 갈랐어야 할 마테체가, 고작 상대의 피부 가죽을 훑은 정도로 그쳤다.

군복 곳곳에 나 있던 총알 자국들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아파아아──!!"

하지만 가죽을 베어도 아픈 건 아픈 것이었기에 괴한이 더욱더 미쳐 날뛰었다.

오히려 고통을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뼈와 근육을 자르는 데는 실패했기에 그러했다.

부웅─

붕!

거대한 주먹이 내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지나갔다.

만약 제대로 맞았다가는 아무리 야누스의 보호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법 충격을 받을 터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맞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괴한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나는 배를 향해서 마테체를 휘둘렀다.

본래였다면 내장이 쏟아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참격이었지만, 군복과 가죽을 훑는 정도로 그쳤다.

"카아악!"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를 상대로도 근접 전투에서 밀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본래 내 능력치가 평균 이상인 것도 있었고, 강체 능력과 더불어서 야누스의 신체 보조 능력. 그리고 조금 전에 주사한 강화 혈청 덕분이었다.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제압하겠어.'

괴한은 분명히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질긴 방어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만약 총이라도 쏴댔으면 귀찮아졌겠지만, 딱히 별다른 무장은 보이지 않아.'

괴한의 발버둥 속에서 내 손에 쥐어진 7번 마테체가 마치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스걱, 스걱─

마치 짐승을 도축하듯이 움직인 마테체에 괴한의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내가 다리 쪽을 집중적으로 노린 덕분이었다.

'야누스.'

[기잇!]

야누스가 내 의지에 맞춰서 보호복 안쪽에 있는 오른쪽 무릎 부분에 뼈 촉수를 둘렀다.

그리고 나는 거침없이 그것으로 넘어져 있는 괴한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쉬익, 쉬이익······."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원래 맷집이 뛰어난 건지는 몰라도 본래였다면 안면이 그대로 함몰 되었어야 할 상황임에도 괴한은 버텼다.

물론, 한 방이 안 된다면 계속해서 먹여주면 그만이었다.

빠악-!

빡!

나는 괴한의 머리를 붙잡은 채로 몇 번이나 오른쪽 무릅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그렇게 후려친 횟수가 두 자리가 되려던 순간, 마침내 터프하기 짝이 없었던 괴한의 몸이 허물어졌다.

쿠웅!

'대충됐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을 상태지만, 나는 놈이 보여주었던 끈질한 생명력을 믿었다.

실제로 괴한은 부서진 방독면 사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내가 물었으나, 괴한은 대답하지 않고서 천천히 손을 뻗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날카로움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허우적거림에 내가 당해줄 리가 만무했다.

"어딜."

나는 뻗어오는 손을 그대로 발로 짓밟았다.

"카아악!"

괴한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나는 오히려 군홧발로 손을 다시금 짓밟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지? HSB-A001 강화 혈청을 찾으러 온 건가?"

내가 빈 혈청 병을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자, 그제야 괴한이 반응했다.

"그, 그건··· 내 것, 이다······ 나, 는··· 완전해··· 질 것··· 이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 두들겨 팬 내가 할 소리는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대답할 생각 없나?"

"내놓, 아라······."

"에휴."

그렇게 내가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에 있는 천으로 마테체에 묻어 있는 피를 대충 닦으려던 순간.

꿈틀─

저도 모르게 내 시선이 마테체에 묻어 있는 괴한의 피에게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뭐지?'

기묘한 감각이었다.

내 몸 안에서 흐르는 피가, 마치 저 자의 피를 원하는 것 같은 기분.

'이게 무슨······.'

그 순간.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을 발견하였습니다.]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을 흡수하십시오.]

이윽고 떠오른 메시지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시그마 타입의 강화 혈청이라 하면, 아무래도 괴한의 피에 담겨 있는 혈청의 힘을 말하는 듯했다.

'그냥 피를 먹으면 된다는 건가?'

강화 혈청을 맞은 타인의 피에서 혈청의 능력을 흡수한다니······.

내가 알고 있던 강화 혈청에는 없었던 기괴한 효과였다.

'안 그래도 헤스본이 멸망한 마당에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을 어디서 구하나 했는데··· 이런 식이면 못 구할 것도 없지.'

비록 헤스본은 멸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존자가 없는 건 아니다.

특히 강화 병사들 같은 경우는 특출난 강함과 능력을 지닌 만큼 살아 남은 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헤스본의 강화 병사들은 대부분 크로노스 연합에 속해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크로노스 연합에 속해 있는 몇몇 특수부대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단순히 오메가 타입의 혈청을 맞은 강화 병사들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그마 타입 혈청의 효과는, 저 괴한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방어력과 생명력과 관련된 내용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비위에 대한 문제였다.

'별로 안 내키는데.'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전에 보았던 모습으로 볼 때 이 괴한의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이성은 있는 듯했지만, 말하는 것도 어눌했던 데다가 판단에 있어서 본능을 앞세우는 부분이 보였던 것이다.

'가능성은 적지만··· 강화 혈청의 부작용일 수도 있어.'

물론 지금 나는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을 맞고도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시그마 타입도 같을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시그마 타입의 힘을 얻겠답시고 저 피를 먹었다가 나도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따로 피를 챙겨 놓기도 애매한데······.'

따로 피를 챙겨놓는다고 해도, 피에 깃들어 있는 강화 혈청의 능력이 그대로 유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강화 혈청 같은 경우는 딱 알맞는 온도에 보관해야 할 정도로 온도에 예민한 물건이었고 말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모든 의약품을 만들 때, 가장 필수적인 과정은 다름 아닌 임상 테스트다.

물론 이곳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그런 거창한 짓거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옮겨서 쓰러져 있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바라보았다.

머리에서 흐르는 출혈량으로 볼 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숨이 끊어질 터.

하물며 현재 이곳에 있는 의료품들로 가네샤 트리파티를 살릴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겸사겸사 한 가지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강화 병사가 아닌 일반인이 저 피를 마신다고 해서 강화 병사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부작용의 유무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지.'

리턴은 몰라도, 리스크 만큼은 확실하게 파악을 하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가네샤 트리파티가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더욱더 좋았고 말이다.

'손해볼 건 없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괴한의 피를 닦은 천을 들고서 쓰러진 가네샤 트리파티에게로 향했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5) > 끝

독성이 있는 음식물을 섭취할 때, 거쳐야 하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혈액에 직접적으로 투여하는 건 그만큼 효과가 빠른 만큼 당연히 위험하기에, 나는 가장 먼저 가네샤 트리파티의 피부에 시그마 타입 혈청을 품고 있는 괴한의 피를 묻혀 보았다.

'별 다른 이상 반응은 없다.'

물론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그런 걸 수도 있었으나, 마냥 기다리기에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단계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소량을 경구 투여.'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입을 벌리고 손수건에 묻은 피를 조금 쥐어짰다.

뚝, 뚝-

내가 괴한의 피 몇 방울을 가네샤 트리파티의 입에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적어도 상태가 더 나빠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괴한이 보였던 가장 큰 문제점은 인지 능력이나 이성과 관련된 부분이었어. 이 부분은 가네샤 트리파티가 정신을 차려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잠시 1분 정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예후를 지켜 보았다.

역시나 큰 변화는 없었기에 나는 경구 투여량을 늘리는 선택을 했다.

뚝, 뚝─

그렇게 몇 방울의 피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입에 더 들어갔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네샤 트리파티가 정신을 차렸는지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으, 으으······."

"정신이 드나?"

"누, 누구······?"

이제 막 간신히 정신을 차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혈청의 부작용인지는 몰라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목소리가 떨렸다.

확인을 위해서 내가 물었다.

"네 이름이 뭐지?"

"가네샤··· 트리파티······."

"어디에서 왔지?"

"아크··· 로즈 라인에서 왔습니다.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신다면··· 사례는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본적인 지능이나 인지 능력에는 큰 이상이 없는 듯했다.

더군다나, 살짝 가네샤 트리파티의 상처 부분을 보니 어느덧 출혈이 거의 멎어가고 있었다.

'흐음······.'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려했던 수준의 부작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괴한을 향해서 한번 시선을 흘겨보았다.

'그냥 원래부터 상태가 안 좋았던 병사였나?'

하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었으니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지? 몸은 괜찮나?"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제야 주위를 살며시 둘러보고는 말했다.

"저자는··· 아,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 거로군요. 감사드립니다. 몸은···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흐으음······.

가설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간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아직까지는 큰 이상이 없어 보였다.

즉, 저 강화 병사의 피를 먹는다고 해서 무언가 부작용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 보겠나?"

"···저희가 따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 혹시 아크에서 오신 겁니까?"

"그렇긴 하지."

"역시!"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무래도 대화의 맥락상 자연스럽게 나를 아크에서 보낸 수색 요원 정도로 여긴 듯했다.

'이 정도면··· 대충 검증은 끝났나.'

비록 피를 조금 흘리긴 했어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그가 강화 혈청을 얻었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염려했던 부작용 증상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좋아.'

마침내 결심을 마친 나는 쓰러져 있는 강화 병사에게로 다가갔다.

본래 혈청이 담겨 있던 주사기는 재활용하기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었기에, 부득이하게 나는 직접 강화 병사의 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없지.'

마체테로 강화 병사의 살을 가르기 무섭게 피가 분수 쳤다.

나는 본래 혈청이 담겨 있던 주사기 윗부분을 마체테로 자른 뒤, 그곳에 피를 담았다.

끌렁, 끌렁─

주사기 안에 피를 담고 있는 내 모습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물론이고 에스더까지도 기겁했다.

"무, 무슨······!"

[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흡혈귀였어요?]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와 에스더의 반응을 뒤로한 채로 주사기에 모인 강화 병사의 피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을······!"

[우웩.]

비릿한 쇠맛과 함께 강화 병사의 피가 조금씩 목구멍을 타고서 넘어갔다.

마치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에 피를 뱉을까 고민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주사기 한 개 분량의 피를 모조리 마셨을 때,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을 흡수했습니다.]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을 획득합니다.]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 능력, '질긴 피부'를 습득하였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단, 명예 능력치는 제외됩니다.]

'이건······.'

느껴진다.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졌다는 게.

무려 모든 능력치 5 상승.

현재 특성이나 강화 혈청으로 인한 추가 효과를 제외하고, 내가 지닌 순수한 능력치의 수치는 근력이 16에 체력이 19 정도다.

그런데 한꺼번에 5라는 엄청난 수치가 올랐으니, 변화가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소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질긴 피부라······.'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볼 수 있는 질긴 피부의 효과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나와 싸웠던 강화 병사가 지니고 있던 능력이 바로 그거일 테니까.

'아무리 구경이 낮은 권총이라고 해도, 총알조차도 뚫지 못했었지.'

물론 항상 야누스의 막강한 방어력과 함께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좋은 게 좋은 법이었다.

아니, 애초에 앞으로 상대할 적 중에는 야누스의 방어력을 뚫어낼 수 있는 적들 역시도 무수히 존재했기에 엄청난 소득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나는 오랜만에 내 정보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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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칼 마커스(Carl Marcus)

계급 : ─

보직 : ─

근력 : 16(+6)(+20%)

체력 : 19(+6)(+20%)

재주 : 14(+6)(+20%)

행운 : 10(+6)(+20%)

투지 : 7(+6)(+20%)

통솔 : 2(+6)(+20%)

에테르 감응력 : 25(+6)(+20%)

명예 : 1

보유 특성 : [강인한 체력], [불면증], [날렵한 몸놀림], [초인적인 정신력], [수전증], [난시], [돌발성 난청], [일격필살], [화력 전문가], [무거운 탄환], [접신], [저격수의 시간], [괴수 사냥꾼], [불살주의], [초심자의 행운], [칼날 탄환], [공포탄], [영웅의 길]······.

보유 능력 : [강체(强體)(Lv.3)], [방출(放出)(Lv.1)]

*강화 혈청이 적용된 상태입니다.

*현재 적용된 강화 혈청 타입 : 알파, 시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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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길 특성과 더불어서 알파와 시그마, 이 두 가지 강화 혈청의 능력 덕분에 내 기존 능력치가 거의 1.5배가 넘게 상승했다.

즉, 나는 아주 직관적으로 1.5배 이상 강해진 셈이었다.

'알파 타입 강화 혈청에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이야······.'

이로서 확실해졌다.

헤스본제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에는,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의 능력을 흡수하는 힘이 있다.

그야말로 다른 강화 혈청들을 지배하는 마스터 피스와도 같은 혈청이었다.

'앞으로 다른 타입의 강화 혈청들도 찾아봐야겠어.'

물론 그중 한 가지 강화 혈청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바로 이곳, 헤스본에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 하나가 남아 있을 터였다.

'그건 나중에 이곳에서 나갈 때 한꺼번에 챙기기로 하고··· 일단은 이곳의 뒷정리부터 해야겠지.'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피를 흘리고 있는 강화 병사를 바라보았다.

과연 강화 병사라는 건지, 마체테에 수없이 베이고 피까지 흘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숨이 붙어 있었다.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겠지.'

강화 혈청의 존재를 아는 자는 당연히 많은 것보다는 적은 게 좋다.

하물며 이 강화 병사 같은 경우는 이곳에 있는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을 정확히 노리고서 찾아왔다.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이 자가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을 챙겨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내가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을 제외한 다른 강화 혈청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인지 능력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이런 머저리의 손에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이 들어갔다면, 괜히 힘자랑이나 하고 다니다가 얼마 가지 못해서 길가에서 죽었을 테니 말이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물론 그건 그거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기에 나는 마테체를 다잡은 채로 강화 병사의 목을 베었다.

스걱!

조금 전 같았다면 깊게 베이지 않았을 테지만, 무려 5의 능력치가 오른 근력 덕분인지 단번에 마체테가 강화 병사의 목을 베어갈랐다.

푸슉!

"끄꺽, 꺽!"

쓰러져 있던 강화 병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그대로 피 분수와 함께 절명했다.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마무리되자, 나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서 구석에서 있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바라보았다.

움찔-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가네샤 트리파티가 나를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가네샤 트리파티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나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왔다.

괜히 나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그러면······.'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이제,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

"이만 가지."

"···어디로, 말이죠?"

"뭘 묻고 있나. 당연히 아크지."

내 선택은 일단 전자였다.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은 이곳에서 죽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단,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칼 마커스의 신원은 밝히지 않는다.'

물론 칼 마커스의 신원을 밝힌다면 가네샤 트리파티로부터 많은 걸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변절자 폰으로서의 모습을 노출한 이상, 나는 리턴보다는 리스크를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차피 가네샤 트리파티가 나에게 빚을 지니고 있는 이상, 무언가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이 모습으로 그를 찾아가면 될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가네샤 트리파티가 신의라는 걸 지니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가네샤 트리파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타티아나 벨로프와 마찬가지로 본래였다면 죽었어야 할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가 생명의 은인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인물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다.

만약 전자라면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포기한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일단, 내가 먼저 올라가서 끌어 올려 주겠다. 잠깐 기다려라."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서 그대로 올라갔다.

비록 지하 42층이라는 까마득한 깊이이긴 했어도, 야누스가 있는 이상 어려울 것도 없었다.

마침내 지상으로 나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호루스를 찾는 일이었다.

"너는 먼저 돌아가 있어."

[키이잇!]

나는 호루스를 먼저 은신처로 돌려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가네샤 트리파티와의 동행을 결심한 이상, 호루스를 타고 돌아가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루스의 존재는 가급적이면 아크에도 끝까지 감춰두고 싶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걸어가는 쪽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가네샤 트리파티를 곁에서 살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이 내 예상과 다르다면, 그때 제거한다.'

헤스본에서 아크까지의 여정은 절대로 짧지 않고, 무척이나 고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은 인간의 본성을 이끌어내기에 더없이 충분할 터.

"아, 잠깐."

나는 호루스가 돌아가기 전에 헤스본에 널려 있는 물자들을 대강 챙겨서 호루스의 등 위에 올렸다.

비록 아크에 처분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일단 가지고 있으면 다른 곳에 팔아 치워도 되는 물건들이었다.

아니면 내가 써도 되고.

"자, 됐다."

그렇게 호루스의 등 위에 짐 보따리를 한 아름 실은 뒤, 내가 호루스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내려서자 호루스가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먼저 가서 기다려."

[키이잇!]

호루스가 헤스본을 떠난 뒤,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렸다.

'가네샤 트리파티를 꺼내기 전에··· 일단 이곳에 있는 강화 혈청부터 챙겨야겠지.'

괜히 가네샤 트리파티 앞에서 강화 혈청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질리도록 와봤던 헤스본이다.

헤스본의 생명 공학 연구소 내부는 나에게 있어서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대로 있다.'

하긴, 애초에 스테이지 중반부까지도 남아 있는 게 바로 이곳에 있는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이다.

그때보다도 훨씬 더 일찍왔는데 없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너무나도 쉽게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을 손에 넣은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주사했다.

이미 안정성이 검증된 물건이었다 보니, 아까처럼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을 흡수했습니다.]

[오메가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을 획득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단, 명예 능력치는 제외됩니다.]

뽈록, 뽈록─

느껴진다.

전신의 근육이 꿈틀 거리는 게.

"후우······."

이로써 나는 헤스본에 방문한 뒤로 무려 3가지 강화 혈청을 손에 넣었다.

물론 강화 혈청이 본래 헤스본의 물건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당연한 소득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강화 혈청 3가지는커녕, 오메가 타입 한 가지만 간신히 건졌을 거라는 걸.

'여러모로 운이 좋았지.'

나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림자단과 마주쳤을 때, 그 순간을.

'이 정도라면··· 다음에 그림자단과 또다시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때처럼 쉽게 당하지는 않아.'

물론 여전히 단장을 상대로는 어려울 테지만, 변절자 룩 정도라면 어느 정도 상대해볼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로 강화 혈청을 맞기 전과 맞은 후의 내 능력치 차이는 극심했다.

'자, 그러면······.'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네샤 트리파티를 지하에서 꺼낼 때가 됐다.

< 구름의 도시 헤스본 (6) > 끝

마침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친 나는 헤스본에서의 마지막 볼 일을 위해서 길거리에 널려 있는 전선 하나를 가져와서 사령부 내에 있는 기둥 중 하나에 묶었다.

끝을 잘라서 전력이 통하지 않게 했으니, 설령 아직 헤스본에 에너지원이 남아 있다고 한들 감전될 가능성은 없었다.

일종의 가네샤 트리파티 전용 운반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슬슬 가볼까.'

나는 전선을 한 손에 잡고서 다시 헤스본 사령부 건물의 지하 42층으로 향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지하 42층 정도야, 질리도록 왕복했던 길이었으니까.

덜컹-

그렇게 까마득한 어둠으로 물든 엘리베이터 통로를 지나서 마침내 지하 42층으로 내려가자, 초조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 있는 가네샤 트리파티와 마주쳤다.

"······아, 오셨습니까."

"오래 기다렸나? 이걸 찾느라 늦었다."

내가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지상에 묶어 놓은 전선을 보였다.

특별히 긴 녀석으로 골라왔으니, 지하 42층까지 길이는 충분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바로 가지. 몸은 괜찮나?"

내 말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그 말마따나 내가 슬쩍 가네샤 트리파티의 상처를 살폈으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상처가 전부 아문 건 아니지만··· 출혈은 확실히 멎었다. 강화 혈청 탓인가?'

그렇다면 가네샤 트리파티가 강화 혈청의 능력을 얻은 건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실험을 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뭐, 기회가 오겠지.'

어차피 이제부터 나와 가네샤 트리파티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야 한다.

아크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말이다.

"그러면 가지."

내가 지상에 있는 기둥과 연결된 전선을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내밀었다.

"이걸 왜······."

"설마 이걸 잡고 42층을 기어서 올라갈 셈이었나? 몸에 묶어라."

"아······."

그제야 가네샤 트리파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통 사람이, 그것도 부상까지 입은 일반인이 지하 42층을 맨몸으로 오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상태가 호전되었다고는 해도, 당연히 내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이젠 못 쓴다."

내가 이곳으로 내려오는 과정 중에 엘리베이터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엥켈렌스의 창에 의해서 찢어 발겨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애초에 엘리베이터로 침입자를 막으려고 했던 게 너 아닌가?"

"그건···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자고 한 말은 아니다. 단지 네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뿐이지."

"책임이라 하시면······."

"묶어라."

결론은 같았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전선을 두르기 시작했다.

"그냥 감지 말고 천 같은 걸로 몸을 덧대고 묶어라. 내장이 파열될 수도 있다."

"으음······."

가네샤 트리파티는 못 믿겠다는 듯한 어조였지만, 실제로 내가 그런 식으로 죽어본 적이 있었다.

뭐어··· 물론 나야 밧줄을 배에만 묶은 채로 수백 미터 위에서 번지 점프를 뛰다가 그렇게 된 거지만 말이다.

[무슨 겁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줘요? 저거 좀 묶었다고 배가 터져서 죽기라도 하나?]

'그렇게 죽은 놈을 본 적이 있거든.'

[어지간히도 머저리였나 보네요.]

'······.'

그렇게 내가 에스더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내장 파열이라는 말이 어지간히도 두려웠는지 가네샤 트리파티는 지하 벙커 내에 있는 옷가지 등을 모아와서 꼼꼼히 덧댄 후에 전선을 몸에 x자로 둘렀다.

내가 보기에도 저 정도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면 가지. 내가 먼저 올라가서 전선을 당겨 줄 테니 기다려라."

"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다시금 엘리베이터 통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가네샤 트리파티를 업고 올라가는 게 편하겠지만, 그래서야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야누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들키겠지만, 굳이 먼저 보여줄 필요는 없지.'

전선을 들고서 마침내 지상에 도착한 나는 전선의 매듭을 풀고는 기둥을 일종의 도르래 중심으로 삼아서 그대로 당겼다.

무려 사람 한 명을 지하 42층 높이에서 당기는 일이었으나, 강화 혈청으로 인해서 인간 이상의 근력과 체력을 손에 넣은 나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찌익, 찌이익······.

기둥에 전선의 고무가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전선이 빠르게 당겨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선이 모두 당겨지고, 그곳에 매달린 가네샤 트리파티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엘리베이터 통로를 기어 올라왔다.

"우욱······."

나름대로 한다고 했을 테지만, 무려 42층에 달하는 높이를 전선에 매달린 채로 올라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바로 가지. 시간이 얼마 없다."

"시간이 얼마 없다니··· 설마 아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이야 항상 있지.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는 시간은 그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시간이라하면, 당연히 다음 웨이브까지의 시간이었다.

물론 본래의 계획대로 호루스를 타고서 이동했다면 여유 시간 역시도 많이 남았겠지만,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짐 덩어리가 생긴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다."

"아······."

그제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담력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담력이 좋은 인물이었다면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상황에서 굳이 지하 벙커에 숨어 있지는 않았겠지.'

결과적으로 그 탓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는 지하 벙커 안에 꼭꼭 숨어 있다고 해서 절대 안전한 게 아니라는 아주 좋은 방증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아크로 귀환하는 첫 번째 관문은 헤스본이 있는 헤스 산맥을 내려가는 일이었다.

헤스 산맥은 영산 노아와는 다르게 마수와 마물들이 적지 않게 서식하고 있다.

호루스를 타고 올 때야 큰 상관이 없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 마수와 마물들을 뚫고서 이곳을 내려가야 했다.

"이쪽이다."

"아, 예."

염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가네샤 트리파티는 제법 나를 잘 따라왔다.

혹시 강화 혈청 덕분인가 싶어서 슬쩍 험한 길로 발걸음을 옮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네샤 트리파티가 나자빠졌다.

"악!"

"괜찮나?"

"조금 긁힌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몸을 일으켜 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살폈다.

가네샤 트리파티의 말마따나 조금 전에 생긴 생채기가 보였다.

'시그마 타입 강화 혈청의 능력을 손에 넣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역시나, 알파 타입의 강화 혈청을 주사하지 않은 상태로는 강화 혈청을 품고 있는 피를 먹어도 강화 혈청의 능력을 흡수할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상처 재생에 도움을 준 건 확실한 것 같군.'

지금부터 가네샤 트리파티와 함께 아크로 돌아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괜히 여정을 이어가다가 자잘한 생채기들 때문에 앓아 눕기라도 하면 매우 귀찮아지니 말이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가네샤 트리파티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때의 이야기겠지만.'

비록 지금 당장은 가네샤 트리파티를 살려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여정이 계속된다면 그 생각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즉, 이 여정 자체가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을 살려두는 게 나에게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가늠을 하는 자리인 셈이었다.

그 순간.

[이봐요, 주인님.]

'알고 있다.'

공기를 타고서 올라오는 악취.

마수 무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이곳은 아크 바깥.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멸망한 헤스본의 근처다.

지옥과도 같은 이 세상의 한 가운데 서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장소다 보니, 근처에 마수와 마물들이 들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공기의 방향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터라 저쪽에 있는 마수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점이었다.

"지금부터 조용히 이동한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눈치는 있는 녀석이었다.

[컹! 컹컹!]

[그르릉······.]

마수 무리가 우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을 스쳐 지나갔다.

방향 상, 머지 않아서 우리에 대한 냄새를 맡을 터.

"지금부터는 서두른다."

험한 지형의 내리막길이었던 터라 아직 상태가 좋지 않은 가네샤 트리파티가 뛰어 내려가기에는 조금 어려웠으나, 마수들은 우리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으윽!"

지형 자체가 워낙 험준했던 탓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반쯤 구르다시피 길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마수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점차 가까워져 갔다.

[피를 탐하는 짐승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다, 죽이자······.]

에테르들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마수 무리가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알아차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면, 마수들을 따돌리기에는 가네샤 트리파트의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설령 내가 가네샤 트리파트를 업고서 간다고 한들, 이미 위치가 탄로난 이상 머지않아서 마수 무리에게 잡힐 게 뻔했다.

'···별수 없나.'

만약 이 상태로 가네샤 트리파티를 지키면서 마수 무리와 싸우려고 한다면, 필시 야누스의 힘을 끌어낼 수밖에 없을 터.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변절자 폰의 정체를 감추고 싶은 나로서는 그다지 원치 않은 형태였기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이 근처에서 숨어 있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가네샤 트리파티를 내버려 두고는 몸을 돌렸다.

"···예? 지금 무슨─"

"곧 따라잡힌다. 마수들을 제거하고 오겠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무어라 답하기도 채 전에, 나는 마수 무리의 기척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곧 있으면 마수 무리와 마주칠 수밖에 없을 테니, 차라리 이쪽에서 먼저 치겠다는 계산이었다.

'차라리 이게 더 안전해.'

야누스의 힘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괜히 어설프게 가네샤 트리파티를 지키면서 싸우다가는 둘 다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저긴가.'

나는 마수 무리를 바라보며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았다.

사냥에 나설 때다.

*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를 처치하였습니다.]

[8급 야수종, 굶주린 검치호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약 5분.

내가 마수 무리를 모조리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것도, 야누스의 힘은 전혀 빌리지 않고서 순수히 Ark-15 자동변환 소총과 마체테만으로 이루어낸 일이었다.

이제 내 신체 및 전투 능력은 굳이 야누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8급 마수 무리 정도는 근접 전투를 벌여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서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흐음.'

늘어선 마수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나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야누스에게 저것들의 시체를 다 먹이고 싶었지만, 이번에 정리한 마수 무리에서 무리를 이끌만한 네임드 마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다른 무리가 있다는 뜻.'

내 추측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이 되었다.

[캬오오오오───!]

멀찍이서 들려오는 괴성.

마수 무리가 가네샤 트리파티를 사냥하기 위해서 모여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일부러 나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양동 작전을 벌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던 건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 나는 유인을 당한 셈이 됐다.

그리고, 그 탓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위험에 처하게 됐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이딴 장난을 친다라······.'

아무래도 대가를 치르게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 겁 없는 마수 놈에게 말이다.

< 가네샤 트리파티 > 끝

가면을 쓴 남자가 따라오는 마수 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리 떠나가자, 가네샤 트리파티는 얼떨결에 홀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가 버리면······."

가네샤 트리파티가 무어라 항변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가면을 쓴 남자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젠장, 젠장······."

가면을 쓴 남자가 찾아온 뒤부터 모든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네샤 트리파티가 헤스본에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게 어그러졌다.

'헤스본 따위, 오는 게 아니었어.'

처음에 헤스본에 올 때만 해도 가네샤 트리파티에게는 거대한 야망이 있었다.

헤스본과 기술 협정을 맺고, 그걸 중심으로 가문은 물론이고 아크 내의 영향력을 늘린다는 야망.

가네샤 트리파티는 로즈 라인의 의원이자 트리파티 가문의 일원으로서 겉보기에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실은 항상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가문 내에서 호시탐탐 가네샤의 자리를 노리는 무수한 혈육들.

로즈 라인의 무수한 정적들.

화이트 라인과 레드 라인의 견제.

그렇기에 이번 줄타기는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수이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였다.

실제로 모든 게 수월했다.

헤스본은 가네샤 트리파티의 기술 협정 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남은 건 세부 조정 사항뿐이었다.

하지만 가네샤 트리파티의 계획은 젊은 날의 치기에 불과했던 건지, 기술 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되기 직전에 일어난 대형 웨이브에 모든 게 무너졌다.

'···일반적인 웨이브가 아니었어.'

만약 그랬다면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는 헤스본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헤스본이 어디인가?

비록 아크에 비교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괜찮은 기술 체계를 지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헤스본에는 강화 병사들이 있다.

이렇게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웨이브의 업화는 단번에 가네샤 트리파티의 호위관들까지도 집어 삼켰다.

하나하나가 블랙 라인의 전선에서도 활약했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

그러나 가네샤 트리파티가 간신히 헤스본의 지하 벙커로 대피했을 때, 그 숫자는 절반 이하가 되어 있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헤스본의 지하 벙커에 고립되고 말았다.

"다들 조심만 버텨라. 사태가 파악된다면 곧 아크에서 지원이 올 거다."

처음에는 조금만 버티면 아크에서 지원팀을 보내올 거라고 여겼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누구인가?

로즈 라인의 의원이자, 트리파티 가문의 일원이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크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크도, 로즈 라인도, 가문도.

그 누구도 가네샤 트리파티를 찾지 않았다.

"······."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그동안 지하 벙커 내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나갈 거면 너 혼자 나가. 왜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끌고 가서 죽으려고 해?"

"현재 엘리베이터를 가동할 만한 에너지 여력이 거의 없습니다. 남은 에너지로는 기껏해야 1번 정도. 엘리베이터가 한번 가동하고 나면 남은 분들은 이곳에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뭐?"

무리하게 바깥으로 나가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잠자코 기다리느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아무리 대기 전력 상태라도 엘리베이터를 가동시킬 에너지가 남지 않습니다."

투표가 진행됐다.

하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나날들이 지났을 때, 어느덧 지하 벙커 내에서 살아남은 건 가네샤 트리파티 혼자뿐이었다.

헤스본의 참모부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호위관들도,

모두가 죽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절망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그렇게 여기면서 삶의 마지막을 돌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하 벙커를 빠져나가서 지상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사령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마수들에 의해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하염없이 지났다.

지하 벙커 내에 있는 비축 식량은 혼자서 사용하기에는 제법 풍족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무엇보다도, 지하 벙커라고 해서 꼭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쾅!

쾅쾅─!

지하 벙커를 둘러싸고 있는 콘크리트 벽은 두꺼웠지만, 지하를 돌아다니는 마수들의 움직임이 진동으로 느껴질 때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

하지만, 나가도 죽는다.

그 절망적인 사실이 가네샤 트리파티를 점차 궁지에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나날, 지하 벙커에 있는 사이렌이 어지럽게 울렸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아도 위험과 경고를 의미하는 붉은 빛이 사방으로 점등하자,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대로 패닉에 빠졌다.

쿵!

쿵! 쿵!

그리고 이내 엘리베이터 통로 너머로 전해지는 진동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언가,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서 이곳으로 오려고 하고 있다는 걸.

'누구지? 어떻게 하지?'

패닉에 빠진 가네샤 트리파티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서 오고 있는 게 누구일지라는 추측에 앞서,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내는 선택을 했다.

무언가 통로를 통해서 내려오고 있다면,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치어서 죽어버리길 바라면서.

하지만······.

치이이익────!!!

그 끔찍한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가네샤 트리파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끼이이이익───!

굳게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곳에서 나온 게 무엇인지 채 확인도 하기 전에 방아쇠부터 당겼다.

깡──!

그러나 쏘아진 총알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튕겨 나왔다.

가네샤 트리파티가 절망하면서 다시금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멈춰라."

들려온 건 사람의 목소리였다.

"······사람?"

가네샤 트리파티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니 경계했다.

"···멈춰! 더 이상 다가오면 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면의 사내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한번 흘겨 보고는 지하 벙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가네샤 트리파티가 멍하니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불쑥 엘리베이터 통로에서 손 하나가 튀어 나왔다.

"컥! 컥!"

가네샤 트리파티는 손에 들린 권총으로 응사했지만, 정체 불명의 괴한은 총에 맞았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 이후에는 기억이 거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신했다.

저 가면의 사내가, 자신을 구했다는 것을.

"네 이름이 뭐지?"

"가네샤··· 트리파티······."

"어디에서 왔지?"

"아크··· 로즈 라인에서 왔습니다.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 주신다면··· 사례는 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파악하고 있지? 몸은 괜찮나?"

"저자는··· 아,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 거로군요. 감사드립니다. 몸은··· 머리가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렇기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최대한 가면의 사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태연한 척 하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나?"

"···저희가 따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 혹시 아크에서 오신 겁니까?"

"그렇긴 하지."

"역시!"

가네샤 트리파티는 여전히 눈앞에 있는 가면을 쓴 남자를 믿을 수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가면을 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총알조차 통하지 않던 저 괴물 같은 괴한조차도 단번에 제압한 실력자다.

어설프게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 지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래, 가면을 쓴 사내가 괴한의 피를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지금 무슨 짓을······!"

가네샤 트리파티는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저 피를 왜 마신단 말인가?

'분명히··· 피를 마셨어.'

물론 괴한의 피를 마신 건 가네샤 트리파티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그는 기절해 있던 상태였기에 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정말로 아크에서 보낸 자가 맞나? 하지만 얼굴은 대체 왜 가리고 있는 거지? 그리고 아까 그 괴한은 뭐고?'

가면을 쓴 남자가 찾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온 괴한.

그리고 괴한에 의해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죽을 뻔했으나, 가면을 쓴 남자 덕분에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건 같았지만, 어쨌거나 지금 가네샤 트리파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만 가지."

"···어디로, 말이죠?"

"뭘 묻고 있나. 당연히 아크지."

가면을 쓴 남자는 수상하기는 했어도, 적어도 당장 가네샤 트리파티를 어쩔 생각은 없는 듯했다.

만약 죽일 거라면 진작 죽였을 테니까.

의문 속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마침내 지하 벙커를 벗어나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후아······."

해방감도 잠시, 가네샤 트리파티는 이내 한 가지 절망적인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바로, 아크로 돌아가는 길을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이곳에 올 때는 호위관들과 편대를 이뤄서 무소음 호버링 바이크를 이용했다.

공중 이동 수단의 위험성을 생각했을 때, 아크 내 이동 수단 중에서 그만큼 빠르고 안전한 이동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본격적으로 헤스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마수 무리가 다가왔다.

물론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가면을 쓴 사내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조용히 이동한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더는 안 되겠다고 느낀 건지, 가면을 쓴 사내가 발걸음을 돌렸다.

"이 근처에서 숨어 있어라."

"···예? 지금 무슨─"

"곧 따라잡힌다. 마수들을 제거하고 오겠다."

가면을 쓴 사내는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 말대로 근처에 숨으려 했지만, 그럴듯한 경험도 없는 일반인이 마수 무리를 피해서 숨는 게 쉬울 리가 만무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군인이 아니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위정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면을 쓴 남자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마수 무리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도망쳤다.

"허억··· 헉······!"

마수 무리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뒤를 쫓았다.

그는 주마등을 느꼈다.

[컹! 컹컹!]

딱! 딱딱!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가네샤 트리파티의 몸이 그대로 내리막길로 굴렀다.

"악!"

하지만 마수들은 가네샤 트리파티가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졌다고 해서 봐준다거나 추적을 멈춘다거나 하지 않았다.

가네샤 트리파티의 눈동자에 마수 무리의 모습이 비친 순간.

탕───!

총성과 함께 가면을 쓴 남자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하마터면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오늘만 해도 벌써 가면을 쓴 남자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생명을 세 번은 구한 것이다.

"몸은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빠져 있어라."

전투가 시작됐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이내 마수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7급 네임드 야수종!'

비록 가네샤 트리파티는 위정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수들의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특히, 지금처럼 아크 바깥에서 마수들을 마주했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아크의 기본 교전 수칙은 아크의 두꺼운 성벽을 기초로, 막대한 화력을 통한 수비를 중점으로 한다.

이렇게 아크 바깥에서는 평소에 찢어발기던 하급 마수나 마물이라도 무시무시한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라도 가세해야─'

가네샤 트리파티가 품에 있는 권총을 다잡은 순간.

[키에엑!]

마수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저건······.'

가네샤 트리파티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가면을 쓴 남자가 마수 무리를 너무나도 쉽게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네샤 트리파티와 동행했던 로즈 라인의 호위관들 역시도 이 정도 마수 무리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무언가 달랐다.

'움직임이 정교해.'

단순히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호위관들 역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가면을 쓴 남자는 무언가 달랐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군더더기 따위가 느껴지지 않고, 마수들을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고 있는 듯했다.

탕!

마지막 총성이 울리며 최후의 마수가 쓰러졌을 때, 가면을 쓴 남자는 딱 봐도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은 듯했다.

그 정도로 가볍고 산뜻했다.

"계속 가지."

"······아, 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평한 목소리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마치 홀리듯이 남자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여정이 이어졌다.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헤스본의 높은 산맥도 반 정도 내려가게 되었으나, 어느덧 지천에 어둠이 깔렸다.

'제법 잘 따라오는군.'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가네샤 트리파티는 골골 대면서도 제법 내 뒤를 잘 따라오고 있었다.

물론, 내가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을 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단련이 전혀 되지 않은 건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슬슬 멈춰야 하나.'

이런 밤에 이동하는 건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기에 나는 야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만 야영한다."

이번 여정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먹는 것과 자는 것이었다.

우선, 먹는 것 같은 경우는 그나마 챙겨온 멀티 칼로리 바가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멀티 칼로리 바로군요. 본 적이 있습니다. 확실히 이런 상황이라면 이만한 음식이 없겠죠."

내 입장에서는 마수 고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산해진미나 다름없는 음식을, 비상시에 먹는 불량 식품 정도로 여기고 있으니 살짝 기분이 나빴다.

동시에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기분도 들었다.

'악인까지는 아니지만, 철부지 도련님 같은 느낌이 조금 드는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로즈 라인의 의원 자리에까지 올랐다지만, 거기에는 트리파티 가문이라는 배경이 지대한 공헌을 했을 것이다.

배경과 지닌 신분은 굉장해도, 가네샤 트리파티라는 인물은 아직 도련님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이지.'

만약 가네샤 트리파티가 음흉한 인물이었다면 다루기 까다로웠겠지만, 저렇게 속내가 드러나는 인물이라면 다루기가 무척이나 쉬워진다.

물론, 이 모든 게 연기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깔린 의도 역시도 적나라 했다.

'내 신분을 밝히라는 거군.'

물론 진짜 신분을 밝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내가 가볍게 말했다.

"폰이라고 불러라."

"폰 말입니까? 조금 특이한 이름─"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가네샤 트리파티와 나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아, 참고로 지금 나는 아크에 변절자로 수배 중인 상태다. 참고 하도록."

"······예?"

가네샤 트리파티의 손에 들린 멀티 칼로리 바가 툭- 떨어졌다.

< 가네샤 트리파티 (2) > 끝

변절자.

그 이름을 들은 가네샤 트리파티는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듯한 감각 속에서 가네샤 트리 파티는 눈앞의 사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가정 먼저 보인 건 역시나 얼굴 전체를 가린 뼈 가면이었다.

뼈 가면, 뼈 촉수, 뼈 기생체, 뼈, 뼈, 뼈······.

마치 정교한 퍼즐처럼 맞아가는 추론 속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한 가지 단어를 입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스컬 턴코트······."

로즈 라인의 의원인 가네샤 트리파티는 스컬 턴코트라는 마물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스컬 나이트를 가장 적극적으로 기용하고 있는 게 로즈 라인이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스컬 나이트들은 모두 괴물 같은 자들뿐이지만, 스컬 턴코트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들은 진짜 괴물이에요."」

언젠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비서가 그런 말을 했다.

그 말마따나 스컬 턴코트는 스컬 나이트와 무척이나 유사한 존재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중에서도 아크에서 인정한 극소수의 네임드 스컬 턴코트에게만 변절자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위험성은 최소 2급 이상.

더군다나 폰이라면, 지금까지 공석이었던 자리가 마침내 채워졌다는 뜻이 아닌가?

어쨌거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내가 인간이 아닌 마물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가네샤 트리파티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마물··· 이라는 겁니까?"

짜내고 짜낸 가네샤 트리파티의 물음에 가면의 남자가 웃었다.

정확히는,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마물로 보이나?"

"그건······."

예 그렇습니다. 아까 피 마시는 거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갈증이 많이 나셨나 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를 마시는 건 좀 너무했습니다. 벙커 안에 다른 음료도 많았는데.

가네샤 트리파티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입을 채 열 수 없었다.

여기서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 차마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마물인가?'

그런 광경을 직접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남자를 마냥 마물로 단정 짓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거야 고위 마물 중에는 그런 개체가 있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풍기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전체적인 느낌이 마물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뭡니까?"

그러나 이내 들려온 대답에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대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다."

"······."

"내가 마물로 보이나 보지?"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가네샤 트리파티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긴 해도, 확신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 나는 마물이 아니다. 하물며 스컬 나이트조차도 아니지."

그 말에 가네샤 트리파티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스컬 턴코트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결론은 스컬 나이트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 그대로다. 이만 자라. 밤이 늦었다. 세 시간 후에 출발한다."

"세, 세 시간······."

물론 로즈 라인의 의원직을 수행하다 보면 잠을 설치는 것 정도는 일상다반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크 내에서 활동할 때의 이야기고, 오늘 가네샤 트리파티의 하루는 유독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힘들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피로가 머리 끝까지 쌓여 있었건만, 고작 세 시간 휴식 후 다시 그 강행군이라니?

결국, 가네샤 트리파티는 억지로 몸을 뉘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묻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주어진 휴식 시간이 너무나도 적었기에 실리를 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궁금한 건 내일 물어보면 되니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가네샤 트리파티의 의식이 서서히 어둠 너머로 저물었다.

* * *

가네샤 트리파티가 잠이든 걸 확인한 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쩔까······.'

내 고민은 당연히 가네샤 트리파티를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일단, 가네샤 트리파티의 반응 자체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놀랐고, 당황했고, 또 놀랐다.

그 덕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에게 보였던 말과 행동이 연기는 아니라는 점.

'일단은 더 지켜볼까.'

나는 자리에 누웠다.

에스더와 야누스가 있었으니 굳이 나까지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불침번을 설 필요는 없어서였다.

'잘들 보고 있어.'

[···진짜 악덕 주인이네. 지금 잠이 와요?]

'덕분에.'

[···진짜 못 됐어.]

[기깃!]

마치 따지듯이 짖는 야누스의 작은 외침을 뒤로한 채로,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웠다.

에테르 감응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선 덕분인지, 항상 잠결에 들려오던 에테르의 속삭임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다.

[잔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감내하면서 잠들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주인님!]

도대체 얼마나 잔 걸까.

나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에스더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에스더가 나를 갑작스럽게 깨운 이유야 뻔했다.

'숫자는?'

[최소 삼백, 아니 오백······.]

'수준은?'

[9급에서 10급 사이의 야수종 무리에요.]

애석하게도 마수들은 우리가 잘 시간이라고 해서 따로 기다려주지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곳은 아크 바깥의 야생.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장소였다.

'흐음.'

이럴 줄 알았다면 자리를 좀 더 야영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삼을까 하는 후회도 생겼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수 무리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점인가.'

만약 저것보다 조금 더 수준 높은 마수 무리가 찾아왔다면,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엥켈렌스의 영역을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곧 가네샤 트리파티에게도 탄로가 났을 터.

'내가 가진 건 가급적이면 아크에 노출하지 않는 게 좋아.'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는 야누스가 모트교의 성물인 송곳 토템을 먹어치우고서 생긴 특수 능력이다.

당연히 아크의 입장에서는 이상 현상에 가까울 테니, 괜히 쓸데없는 정보를 줄 필요는 없었다.

'잠도 대충은 잘만큼 잔 것 같고.'

비록 잠든 시간이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한 시간 정도 푹 잤으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늦잠을 자다가 마수 무리에게 목을 물어 뜯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어나라."

"으힉!"

내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몸을 흔들자, 가네샤 트리파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이제 막 자대에 전입한 이등병이 첫 번째 불침번을 설 때의 반응 같았달까?

"버, 벌써 세 시간이 됐습니까?"

"아니. 그보다 마수들이다."

"···예?"

나는 자세한 설명 대신에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가네샤 트리파티 역시도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는지, 권총을 잡았다.

"적극적인 교전은 하지 말고, 스스로만 지켜라."

"···알겠습니다."

아크 바깥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목숨과 안전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소리다.

"온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던 마수들이 천천히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고서 포위부터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법 유능한 대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지만.'

놈들의 대장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선공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내가 우리를 포위하는 마수 무리를 뻔히 보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철컥-

샷건 모드로 변한 Ark-15 샷건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을 토해냈다.

쐐액!

장전된 탄환은 A-985 폭발탄을 샷건 셀에 맞춰서 미리 개조해둔 총알이었다.

감히 겁도 없이 나에게 달려든 마수들을 날려버리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물건이었다.

콰앙──!!!

[캬아악!]

[끼엑!]

마수들이 온갖 괴성을 내지르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을 알렸다.

평소에 나는 Ark-15를 샷건 모드가 아닌 다른 두 모드를 주로 사용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나 거리에 대한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초장거리 저격을 할 때 사용하는 대물 저격총 모드나, 일반적인 교전에서 전천후로 좋은 자동소총 모드와는 다르게 샷건 모드는 근접전에서만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한된 사용 조건이 꼭 성능이 나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용 조건이 제한되어 있기에, 상황만 맞는다면 그 어느 모드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바로 지금처럼.

콰카카앙────!!!

개조된 셀에서 뿜어진 폭발탄의 고폭탄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어둠 속에 수십 갈래의 길을 만들었다.

그 빛에 맞은 마수들은 그대로 화염에 휩싸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엑!]

[캬오, 캬오!]

그러는 와중에도 놈들의 대장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는지, 여전히 내 시야에 포착되지 않았다.

'그래봤자지만.'

마수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오백 정도.

만약 그 수준이 조금 더 높았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9급에서 10급 사이의 마수 무리가 나를 상대로 무얼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물론 변수는 있었다.

"으아악!"

가네샤 트리파티가 비명을 내지르며 마수들에게 쫓겼다.

비록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키라고 말은 했지만, 가네샤 트리파티가 정말로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 리가 만무했다.

'별수 없나.'

나는 총구를 돌렸다.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가네샤 트리파티가 마수들에게 물려죽을 판이었으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콰캉!

"힉!"

폭발과 함께 가네샤 트리파티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러는 사이, 마수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절대로 마수들에게 빈틈을 내어주지 않았을 테지만, 내가 가네샤 트리파티 쪽을 향해서 총구를 돌리기 무섭게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든 것이다.

"······아."

가네샤 트리파티는 내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멍한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그리고는 외쳤다.

"뒤!"

그 말마따나 사방에서 마수들이 나를 향해서 달려 들었다.

본래였다면 위기였어야 할 상황.

그러나 굳이 야누스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이, 나는 그 마수를 그대로 주먹으로 후려쳤다.

뻐억!

한 마리.

[카악!]

두 마리.

빠각!

세 마리······.

내가 지닌 강체 능력도 강체 능력이지만, 무엇보다도 이번에 알파, 시그마, 오메가 강화 혈청의 능력을 얻고서 능력치는 물론이고 피부의 강도 역시도 일반적인 인간의 피부를 넘어선 덕분이었다.

"무, 무슨······."

내가 맨손으로 마수들을 후려치자, 가네샤 트리파티는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신 차려라."

"아."

그제야 가네샤 트리파티는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는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일일이 놀라고 감탄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카아아악!]

전투가 계속됐다.

* * *

한밤중의 사투 속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자신을 변절자 폰이라 밝힌 가면의 사내에게 몇십 번을 구해졌다.

그때마다 역으로 폰이 위험에 처했으나, 그는 그마저도 우습다는 듯이 맨손으로 위기를 타개했다.

'···이러고도 나보고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물론 로즈 라인의 의원인 가네샤 트리파티는 인간임에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괴물들을 얼마든지 보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아크의 최전방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사투를 몇십, 몇백 번을 거쳐오며 살아남은 자들이다.

일종의 논외인 셈.

그러나, 지금 가네샤 트리파티는 눈앞의 낯선 사내에게서 마치 그런 로즈 라인의 괴물들과 같은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네샤 트리파티는 이번 전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씩 파악했다.

'마수들이 저 자를 공격했다.'

마수와 마물들은 서로 웬만해서는 공격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웨이브 때의 기준이고, 평소에는 영역 다툼을 비롯한 먹이 사슬 체계가 발동한다는 건 아크에서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더군다나 스컬 턴코트 자체가 애초에 일반적인 마물이 아니었기에 마수들에게 공격당한다고 해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네샤 트리파티가 주목한 것은 변절자 폰이 마수들과의 싸움에 무척이나 익숙해보였다는 점이다.

'단순히 강하기 때문에 마수들을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상대법 자체를 완전히 꿰고 있어.'

비록 가네샤 트리파티는 군인이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정도는 대충 알 수 있다.

그만큼 로즈 라인의 강자들을 무수히 많이 보아왔기에 생긴 안목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변절자 폰의 전투는 철저하게 인간의 방식으로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 가네샤 트리파티 (3) > 끝

가네샤 트리파티는 변절자 폰의 전투를 계속해서 지켜 보았다.

그가 변절자 폰의 전투 방식을 인간의 방식이라 여긴 이유는 간단했다.

TITAN-17 대마수 로켓으로 다섯 마리의 마수 무리를 한번에 날려버리는 건 생각보다 쉽다.

하지만 평범한 총알 한 발로 다섯 마리의 마수 무리를 한번에 사냥하는 건 어떠한가?

놀랍게도 변절자 폰은 후자의 전투를 거의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었다.

단순히 압도적인 화력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적재 적소에 쏟아 넣고 있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저와 같은 방식을 알고 있었다.

로즈 라인에는 무수히 많은 강자들이 있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할 마수와 마물들은 그들보다도 더 강하고, 심지어 많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히 인간의 싸움 방식을 취해야만 했다.

약자의 방식 말이다.

동시에 그건 압도적인 강함을 타고난 마물이 행하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다.

물론 스컬 턴코트라는 특수한 마물의 특징상, 숙주에 따라서 인간이 지닌 특성을 얼마든지 의태 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가네샤 트리파티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마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변절자 폰이 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건가?

스컬 턴코트는커녕, 스컬 나이트조차도 아니라는 말.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가네샤 트리파티는 뼈 기생체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뼈 장비에 대해서 알고 있다.

물론 뼈 장비는 살아있는 뼈 기생체를 생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살아있는 마수의 심장을 구하는 것까지 무척이나 만들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일단 만들기만 한다면 매우 뛰어난 장비다.

'고작 뼈 장비 하나만으로 낼 수 있는 힘은 아니지만······.'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직접 물어보면 알게 되겠지.

타앙──!!

[케헹!]

복잡한 생각 속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는 이 마수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7급 네임드 야수종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걸 보았다.

그와 함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수 무리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지만, 변절자 폰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Ark-15 자동변환 소총.'

아크의 기본적인 보급 장비로서, 풀린 물량이 물량이다 보니 저걸로 변절자 폰의 신원을 알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키에에에엑!]

마수들의 비명 속에서 전투가 계속됐다.

아니, 이제부터는 거의 일방적인 추격과 학살에 불과했다.

'움직임 하나 하나가 마수들의 움직임을 완전히 꿰고 있어.'

그건 동체 시력이나 감각보다는, 경험에서 나오는 통찰력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게, 애초에 변절자 폰은 마수가 움직이기 전부터 미리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헹!]

[끄기긱······.]

마침내 한밤 중에 일어난 전투가 끝이 났다.

전신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와 자신의 땀으로 얼룩진 가네샤 트리파티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 시체, 시체.

변절자 폰은 정말로 홀로 가네샤 트리파티를 지키면서, 무려 수백의 마수 무리를 몰살시킨 것이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마수의 시체라고 할지라도, 시체 더미를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몸은 괜찮나?"

반면, 어느새 다가온 변절자 폰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치열한 전투를 치러놓고도 몸에 튄 핏자국만 빼면, 땀조차 흘리지 않은 듯했다.

도망 다니고 숨어 있기만 했음에도 전신이 땀으로 절어버린 가네샤 트리파티와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미안하지만, 쉬고 있을 틈이 없다. 꽤 소란스러웠던 탓에 곧 다른 마수들이 몰려올 거다."

그 격렬한 전투가 끝났는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한다라······.

마치 아크 바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인간으로서 살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변절자 폰을 바라보며, 가네샤 트리파티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폰, 당신을 믿겠습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가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일으킨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그러니 들려주십시오.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왜 지금 변절자가 되었는지."

* * *

갑작스러운 가네샤 트리파티의 심경 변화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한 번의 사선을 넘은 전우끼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유대감이 생긴다지만, 그 심경의 변화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봤나?'

만약 정말로 가네샤 트리파티가 나에게서 무언가를 보았다면,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에 대한 평가를 일정 부분 수정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냥 도련님이 아닌, 미래가 기대되는 로즈 라인의 젊은 의원으로.

"못 믿겠다고 하지 않았나?"

"생각을 좀 많이 했거든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가네샤 트리파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볍게 웃었다.

저 담이 약한 자가 연기로라도 그럴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정말로 나를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흐음······.'

거짓말이 아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비록 나한테 독심술 같은 특성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저런 눈을 한 사람을 몇 번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뭐, 손해볼 건 없겠지.'

가네샤 트리파티의 말대로 일단 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그 이후에 반응을 지켜보면 될뿐이다.

"말해주지."

그리고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내가 칼 마커스라는 사실을 제외한 몇 가지 사실을 말했다.

특히, 내가 어째서 아크로부터 변절자로 수배되게 되었는지.

"그런··· 그렇다면 대체 왜 실험탄 GHOST-157을 훔친 겁니까? 아크에서 수배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겁니까?"

"훔쳤다는 표현은 조금 거북하군. 어차피 아크가 빼앗긴 물건을 주웠다고 해두지."

"···어쨌든 말입니다."

"이유가 알고 싶다는 건가?"

"예."

"아크에서는 그걸 양산화할 수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죠?"

"그 말 그대로다. 아크에서는 실험탄 GHOST-157을 양산화할 능력이 없다. 그건 우연의 산물에 불과해. 기술로 만들어낸 게 아니지."

"···설령 그렇다고 한들, 당신이 실험탄 GHOST-157를 가져갈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그건 아크의 재산입니다."

가네샤 트리파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만약 적당히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상대했다면, 애초에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실험탄 GHOST-157는 특별한 탄환이다. 소형화된 장비 중에서는 유령종을 비롯한 에테르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물건이지."

실험탄 GHOST-157는 특별한 물건이지만, 아크의 발명품 중에서 에테르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아니다.

아크의 전선에 설치된 대형 장비 중에는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건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아크에서 진행된 프로젝트 고스트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유령종을 비롯한 에테르의 특성상 그런 대형 장비로 그것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

기껏해야 주요 장소 몇 군데를 간신히 수비하는 정도.

그렇기에 실험탄 GHOST-157는 프로젝트 고스트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는 분이, 그걸 홀랑 가져가겠다는 겁니까?"

"내가 말했을 텐데. 아크에서는 실험탄 GHOST-157를 양산화할 기술과 능력이 없다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가네샤 트리파티는 그제야 무언가 알아들었는지 말을 하다가 멈췄다.

"···설마."

그리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다는 겁니까?"

"그래."

"···분명히 아까는 별다른 소속이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저를 속인 겁니까?"

"속인 적 없다."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이 잠시 얼이 빠졌다.

그만큼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뜻이었고, 실제로도 그럴만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걸 혼자서 해냈다는 겁니까? 아크에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

나는 더 이상 말하는 것 대신에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바꿨다.

"봐라."

나는 그대로 허리춤에 있던 HE2050 권총을 꺼내서, 탄창을 갈아끼고는 그대로 그것을 내 관자놀이에 겨눴다.

철컥-

"무, 무슨!"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타앙!

총성이 울려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관자놀이에는 그 어떤 구멍조차 나지 않았다.

"실험탄 GHOST-157는 에테르를 제외한 것들에는 거의 물리적인 타격을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고무탄 수준이지."

물론, 현재 내 몸에서 기거하고 있는 동거인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했지만 말이다.

[꺄악! 맞을 뻔했잖아요!]

나는 에스더의 항변을 뒤로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공포탄 아닙니까?"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으나, 가네샤 트리파티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공포탄도 근접 사격시에는 적잖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마침 공포탄도 있으니 한번 직접 맞아 보겠나?"

"그런······."

내가 HE2050 권총의 탄창을 갈아낀 뒤에 가네샤 트리파티에게 겨누자, 가네샤 트리파티의 얼굴이 단번에 잿빛으로 변했다.

실제로 공포탄은 근접 거리에서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파괴력이 있다.

특히, 아크에서 만들어낸 공포탄 같은 경우는 애초에 마수와 마물을 상대하는 걸 전제로 둔 경우가 많았기에 그 파괴력이 일반적인 공포탄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 그만!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납득한 표정이 아닌데."

"믿는다고요!"

잠자코 이를 지켜보고 있던 에스더가 이죽거렸다.

[그렇게 대놓고 협박하면 잘도 믿겠네요.]

아무래도 조금 전에 실험탄 GHOST-157에 맞을 뻔했다는 사실에 원한을 품은 듯했다.

'그럴 거다.'

[네? 진심이에요?]

'그래.'

내가 자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모양새 자체는 반협박처럼 되어버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네샤 트리파티가 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기술이 있다면 그냥 아크와 협정을 맺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되겠냐.

애초에 진짜로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사정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적당히 말로 퉁쳤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가네샤 트리파티도 개인적인 사정이라면 어디 가서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물론 여전히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슬슬 가지."

여정이 이어졌다.

*

아크로 향하는 여정은 험난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아크 바깥은 말 그대로 야생이었고, 아크와 헤스본 사이의 거리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몰라도, 그동안 가네샤 트리파티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과연······."

특별히 정해진 주제는 없었다.

대부분 가네샤 트리파티가 먼저 묻거나 말을 걸어왔으나, 내가 먼저 말을 건 적도 있었다.

"하하. 재미있네요. 아, 당신이 우스웠다는 건 아닙니다."

"상관없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가네샤 트리파티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점차 편해졌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폰, 만약 제가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하."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이 여정도 어느덧 끝을 고했다.

"아크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성벽과 도시의 풍경.

아크였다.

"여기부터는 혼자 갈 수 있겠지?"

"아··· 예. 물론입니다."

이 모습으로 아크의 시선에 노출될 수 없다는 건 가네샤 트리파티 역시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납득했다.

어차피 이곳부터 아크까지 이어진 길에는 마수가 없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폰."

내가 가네샤 트리파티의 부름에 시선을 돌리자, 그가 어떤 펜던트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짐짓 모르는 척 물었으나, 나는 사실 이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하나의 삼각형과 각 꼭지점 마다 별이 그려진 문양.

트리파티 가문의 문양이었다.

"트리파티 가문의 상징입니다. 혹시나 곤란한 일이 있으실 때, 이 상징을 들고 저희 가문을 찾으십시오."

가네샤 트리파티가 조용히 덧붙였다.

"나의 친우여."

< 가네샤 트리파티 (4) > 끝

가네샤 트리파티가 아크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남기고 간 트리파티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삼각형과 세 개의 별.

트리파티 가문의 상징.

'진품이군.'

비록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는 손에 넣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림자단의 음모 하나를 막은 데다가 소득까지 있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아무리 그림자단이라고 할지라도 아크 안에 있는 가네샤 트리파티를 어쩌지는 못할 테니까.'

비록 헤스본에 있었을 때는 호위관들이 전부 죽었는지 홀로 있었지만, 아크 내에서 가네샤 트리파티를 대놓고 어쩔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설령 어쩔 수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뒷감당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없다.

'암살이라도 하면 모르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에 대한 경계가 심해지겠지.'

아크 바깥에서 실종된 이의 ID 카드와 아크 내에서 살해된 이의 ID 카드는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 말이다.

여러모로 그림자단의 노림수는 막힌 셈이었다.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있다면··· 나를 지킬 무기가 없다는 점 정도인가.'

본래였다면 나는 그림자단을 상대 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로 가네샤 트리파티의 ID 카드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그건 물 건너갔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물론 예전과 같지는 않을 테지만.'

처음 단장과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무려 세 가지 강화 혈청의 힘을 얻었다.

여전히 그림자단을 상대로 이기거나 할 수는 없더라도, 이전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곧인가.'

본래였다면 호루스를 이용해서 단기간에 끝났어야 할 헤스본 방문이 엄청나게 지체되었다.

즉, 곧 다섯 번째 웨이브가 일어날 시기가 됐다는 소리다.

'그나마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봐야 하나.'

예상했던 것보다 웨이브 시기가 조금 늦은 게 마음에 살짝 걸리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려니 하고 넘겼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번 웨이브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역시, 아크 바깥에서 맞이하는 게 맞겠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아크의 눈과 그림자단 때문이었다.

'이미 너무 눈에 많이 띄었어.'

아크에서 활약하는 건 나에게 있어서 양날의 검과도 같다.

주목을 받는 동시에, 주목을 받으면 안 되는 이들의 시선까지도 함께 받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림자단과 엮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돌아갈까.'

나는 가네샤 트리파티가 레드 라인의 게이트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확인한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

본래였다면 가네샤 트리파티는 자신의 지역구이자 터전인 로즈 라인 게이트로 돌아가야 했겠지만, 아무래도 최전방 로즈 라인의 근처에는 지금도 마수 무리가 드글대고 있었으니 부득이하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레드 라인의 게이트로 향한 것이었다.

'굳이 아크로 들어갈 때 위험한 곳으로 향할 필요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가네샤 트리파티의 귀환도 무사히 마무리 되었겠다,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은신처로 돌아갈 때가 됐다.

*

[키엣!]

마침내 은신처로 돌아온 나를 맞이한 건 역시나 호루스였다.

호루스는 헤스본에서 내가 실어놓은 물자들을 한곳에 차곡차곡 모아둔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했어."

나는 쌓여 있는 헤스본의 물자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급하게 챙긴 물자이긴 했어도, 그 숫자는 절대로 적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크는 힘들어도, 모래바람 상단 같은 곳에는 꽤 괜찮게 팔아먹을 수 있겠어.'

무기나 장구류 같은 물건은 당연히 아크제가 가장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등급의 장비일 경우지 등급 자체가 차이가 난다면 다른 곳에서 생산된 장비들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아크제 장비들 역시도 적지 않았으니, 이것들까지 합친다면 꽤 괜찮은 교역 품목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슬슬 모래바람 상단과도 접촉할 때가 됐지.'

자연스럽게 이번 웨이브가 끝난 뒤에 할 일이 정해진 것이다.

'일단 그건 그거고······.'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기에 나는 곧장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이 들어온 헤스본의 장비를 비롯한 물자들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은신처를 비울 일이 은근히 있었기에 만약을 대비한 일이었다.

[···와, 무슨 무기상이라도 하려고요? 이것들은 다 어디서 났어요?]

에스더가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이번에 내가 챙긴 헤스본제 장비들과 더불어서 기존에 지니고 있었던 물자들까지 합쳐지자, 그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리를 하려는 거다."

[힘내요.]

"어딜 가나. 같이 해야지."

[네?]

나는 야누스는 물론이고 에스더와 에테르까지 동원해서 물자들을 정리했다.

깊게 땅을 파고, 방수포를 깐 뒤에 물자들을 옮겨 놓은 후 방수포로 덮는 간단한 과정이었다.

[···이 악덕 주인 같으니라고.]

"적절한 인력 배분이라고 해두지."

[어떻게 이렇게 부려먹고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가 없어요?]

"고생했다."

[아악!]

그렇게 물자들의 정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곧 웨이브가 일어난다는 걸 생각했을 때,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해요?]

"농사짓는다만."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여기서 지어요? 그것도 엄청 뜬금없이?]

"신선 식품은 아크 내에서도 매우 고가다. 당연히 사 먹는 건 사치지. 그리고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다."

[무슨 실험이요?]

"대산림의 흙을 이용한다면, 영산 노아 내에서도 농사가 가능한 지에 대한 실험."

물론 이에 대한 부분은 이미 모 유저에 의해서 검증이 된 부분이었지만, 실제로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정확히는, 내가 지닌 농사 지식으로 할 수 있을지부터가 그렇다.

'만약 성공한다면, 일반적인 농사뿐만 아니라 다른 걸 심을 수도 있을 터.'

애초에 모래바람 상단과의 거래에서 최우선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 그것의 씨앗이었다.

만약 일반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된다면, 그것도 얼마든지 키울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작업을 이어나갔다.

대산림에서 가져온 흙들로 대충 밭의 형태를 만들고, 아크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심었다.

물은 온천수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대충 다 됐나.'

조금 어설프기는 했어도, 모양새만큼은 꽤 그럴듯했다.

물론 여기에서 작물들이 정말로 잘 자랄 지에 대한 여부는 또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막상 해놓고 보니까 살짝 뿌듯하기도 하네요.]

"네가 뭘 했다고."

[허, 설마 그거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진짜 어이가 없네. 이렇게 된 이상 내 노동력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농담이다."

잠깐의 실랑이가 끝난 후, 나는 조용히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크 바깥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무서울 정도의 적막함이 마치 곧 몰려들 태풍의 전야처럼 느껴졌다.

*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처음 이틀까지는 웨이브가 조금 늦어지나 보다 하고 넘겼지만, 사흘째가 되는 날 나는 무언가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요하다.

이상할 정도로.

'뭐지?'

지평선이 잠잠하다.

지상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마수 군단이 밀려 들어와서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야 할 시간이, 너무나도 평온했다.

그제야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왜 그래요? 멍하니.]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뭐가요?]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게 왜요? 좋은 거 아닌가?]

이 모든 고요함에 대해서 에스더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으나, 이건 에스더의 생각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사실, 다섯 번째 웨이브가 올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다.

내 예상대로라면 나와 가네샤 트리파티가 귀환하는 도중에 아슬아슬하게 웨이브가 발생했어야 했건만, 웨이브가 일어나기는커녕 은신처로 돌아온 뒤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웨이브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게 늦든 빠르든, 그건 이 세계의 절대적인 법칙 중 하나다.

그렇기에 우연히라도 웨이브가 멈췄다는 망상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니까.

만약 웨이브가 오히려 빨리 일어났다면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 일어나고 있다면,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다중 웨이브.'

다중 웨이브는 말 그대로 스테이지 두 개분 이상의 웨이브가 한꺼번에 발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현상을 말한다.

여러 개의 웨이브가 한 번에 몰려오는 것이다.

그간 유저들 사이에서는 다중 웨이브가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추측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설 중 하나가 바로 아크의 피해 누적도에 따른 다중 웨이브 발생이다.

즉, 한 웨이브에서 보통 아크가 입어야 할 피해 정도가 일정 수준 이하가 되면, 자연스럽게 난이도를 올리는 트리거가 작동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있을 수 없어.'

보통 다중 웨이브가 발생하는 건 스테이지가 중반에 다다랐을 때, 아주 소수의 경우에만 발생한다.

무려 488번을 트라이했던 나조차도 다중 웨이브를 본 게 몇 번이 채 되지 않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웨이브가 일어나지 않는 것에는 그것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다.

'바로 준비한다.'

다중 웨이브가 일어난다는 걸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이상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호루스."

[키엣!]

나는 TITAN-17 대마수 로켓을 챙긴 뒤 호루스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능하다면 NOA-8 중기관포도 같이 챙기는 게 좋았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호루스의 기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내가 지닌 중화기 중 하나만 챙긴 것이다.

[뭐, 뭐예요? 갑자기 어디를 가려고요?!]

내 행동이 갑작스럽다고 여긴 건지 에스더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갈 곳이 있다."

[그러니까 어딜요?!]

"보면 안다."

[아, 진짜!]

나는 호루스의 등 위에 난 뼈 촉수들을 마치 고삐처럼 쥐고는 호루스를 재촉했다.

"가자."

[키에엣!]

호루스가 단번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칼바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속도였음에도 나는 오히려 호루스를 더욱더 재촉했다.

"더 빨리."

스쳐 가는 바람 속에서, 나는 부디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랐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번에 아크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기 시작한 지평선 너머의 풍경 속에서,

나는 보았다.

[키잇, 키이잇······.]

[카악! 카아악!]

[캬오오오오오───!!!]

아크의 감시망을 한참 벗어난 지평선 너머에서, 어느덧 아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엄청난 수의 마수 군단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었다.

아크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낼 마수 군단의 수는 저게 끝이 아니라는 걸.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마수 군단의 수는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일정 숫자가 차면, 비로소 아크를 공격하겠다는 듯이.

[저게 대체······.]

에스더조차도 다중 웨이브가 발생하는 건 처음 보았는지, 경악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별 수 없나.'

나는 마수 군단을 바라보았다.

지금 모여든 숫자만 해도 웨이브 한 개분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즉, 얼마 안 있어서 최소 웨이브 두 개분의 다중 웨이브가 아크를 덮친다는 이야기였다.

"가자."

[잘 생각했어요. 빨리 돌아가요. 여기 있으면 우리도 위험해요.]

"그쪽이 아니다."

[···네?]

그와 함께 내 말을 알아들은 호루스의 머리가 마수 군단을 향했다.

[미, 미친!]

에스더의 비명이 귓가에서 울려 퍼졌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호루스의 고삐를 쥐었다.

선수필승(先手必勝).

공격은 곧, 최선의 방어다.

< 다중 웨이브 > 끝

다중 웨이브 현상은 주로 더 디펜스에 무척이나 익숙한 숙련된 플레이어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극한의 효율을 뽑아내며 아크의 방어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그에 대한 난이도 조절 트리거로 다중 웨이브가 발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중 웨이브는 일단 발동한다면 아크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게 된다.

애초에 아크에 누적된 피해가 적었기에 생기는 현상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서는 공략법이 있듯이, 다중 웨이브 역시도 파훼법 아닌 파훼법이 존재는 했다.

다중 웨이브는 이름 그대로 몇 중의 웨이브가 일어나게 되는 만큼, 그만큼의 마수 군단 규모가 갖춰지기 전에는 웨이브가 발생하지 않는다.

즉, 플레이어 측에서 먼저 모여드는 마수 군단을 먼저 공격할 수만 있다면 다중 웨이브의 끔찍함을 어느 정도 막아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도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시간은 촉박하다.

저 정도 숫자라면, 아마 며칠 내로 최소 두 개분 이상의 웨이브가 아크를 향해 덮칠 것이다.

물론 설사 두 개분 이상의 웨이브가 들이닥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당장 아크가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멸망을 유예한 것에 불과한 것도 사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분명히 아크는 심대한 타격을 입을 테고, 다음 웨이브를 막아낼 여력을 잃게 된다.

당장 며칠 후에 아크가 멸망하는 것과 몇 주 후에 멸망하는 것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덜컹─

TITAN-17 대마수 로켓의 묵직함이 어깨 위로 전해졌다.

본래였다면 이렇게 개인 화기로 쓰기에는 과할 정도로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이동식 병기와 별 다를 바 없었다.

[아, 진짜······ 내가 못 살아.]

에스더는 유령종답게 유독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그렇기에 자신과 운명공동체라고 볼 수 있는 내가 사지로 들어가는 게 영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부탁한다."

[하······ 그런 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해라."

[에이 씨.]

잠깐의 실랑이가 지나가고, 나는 TITAN-17 대마수 로켓으로 마수 군단이 몰려있는 곳을 조준했다.

거의 음속에 가깝게 날고 있는 호루스의 위에서 정밀한 조준 따위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나, 애초에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쏘면 누구든지 맞을 테니까.

피우우웅────!!!

TITAN-17 대마수 로켓의 후방 배출구에서 연소 가스가 거칠게 배출됐다.

그와 함께 발사된 추진체가 단번에 마수 군단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서 쇄도했다.

나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마치 지상에 폭격을 퍼붓듯이.

콰아아아앙─!

콰캉──!

콰카카캉───!!!

이미 음속에 가깝게 날고 있는 탓인지, 내가 폭음을 들은 건 한참 뒤였다.

그리고 들려온 건 비단 폭음뿐만이 아니었다.

[그우우우우우───!]

[카악, 카아아악!]

[인, 간··· 죽, 인, 다······!!!]

들린다.

마수과 마물들이 나를 향해서 쏟아내는 분노에 가득찬 괴성이.

보인다.

참을성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이 당장 호루스를 향해서 날아들기 시작한 무수히 많은 비행종들이.

'이제부터가 진짜로군.'

만약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화력을 퍼부어서 저 마수 군단을 제지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수 군단을 상대하는 일은 절대로 녹록치 않다.

이제부터, 나는 혼자서 웨이브에 맞서야만 했다.

'해보자고.'

곧이어서 나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한 무수한 점들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정도로 인간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으으··· 난 몰라.]

에스더가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껏 에테르를 끌어 올렸다.

[막아?]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자.]

[막아······.]

자칫 잘못하다가는 정말로 이곳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었으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쾅!

콰캉!!

나는 재차 TITAN-17 대마수 로켓의 방아쇠를 당겼다.

워낙 어마어마한 수의 마수와 마물들이 밀집해 있는 터라, 대충 쏴도 한 번에 스무 마리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이 폭발에 휩쓸렸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를 처치하였습니다.]

[10급 야수종, 헬하운드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9급 괴수종, 독 발톱 랩터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괴수종, 독 발톱 랩터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을 처치하였습니다.]

[8급 괴수종, 변이된 비늘 뱀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

.

.

[9급 거충종, 멜리아이를 처치하였습니다.]

[9급 거충종, 멜리아이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어느덧 나를 향해 다가오던 검은 점들이 형태를 갖출 정도로 커졌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무수히 많은 비행종과 거충종, 그리고 괴암종.

하늘을 날 수 있는 마수와 마물들이라면 가리지 않고서 모두 나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우우우웅───!

위이이이잉!!

아무리 호루스의 속도가 빨라도, 이제부터는 단순히 나는 것만으로는 비행종들을 떨쳐낼 수 없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놈들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저것들과 직접 맞서야만 했다.

[카악! 카악!]

[끼에에에에!]

놈들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덧 음속을 뛰어넘은 속도로 날고 있는 호루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빠른 마수들은 거의 없었으나, 문제는 사방에서 놈들이 덮쳐오고 있는 터라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철컥-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다잡았다.

평소였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자동소총 모드를 사용했겠지만, 나를 향해 달려드는 비행종과 거충종의 밀집이 너무나도 엄청났기에 나는 샷건 모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나 처먹어."

Ark-15 샷건이 불을 토했다.

장전된 총알은 A-985 폭발탄을 샷건용으로 개조한 셀.

광역으로 비산한 폭발탄의 폭발이 비행종들을 휩쓸었다.

콰카카카카───!!

한발로 끝이 아니었다.

연신 방아쇠가 당겨지며, 폭발탄 셀이 광역으로 비행종들을 향해서 쇄도했다.

콰카카카카───!!!

콰카캉!

하지만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결국 우리는 포위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달려드는 마수 떼의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에스더."

[하······.]

에스더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미리 준비해두었던 에테르를 한번에 폭발시켰다.

[───────────────────────────!!!!]

비록 전성기 때처럼 마수들을 산 채로 쥐어짜서 터트릴 만한 물리력까지는 아니었지만, 마수들의 전진을 막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철컥-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다시금 총구를 조준했다.

콰카캉!

다시금 몇 번의 폭발이 일어난 후, 에스더가 비명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더, 더는 안 돼요!]

다름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에스더가 한때 1급 유령종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지만, 지금은 힘을 많이 잃은 상태다.

아무리 내 에테르를 함께 끌어다 쓰고 있다고 해도, 전성기 때에 비하면 모자란 게 사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약 상대가 그저 그런 마수들만 있었다면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능히 견뎌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쪽이 앞서는 건 단순히 숫자뿐만이 아니었다.

[크오오오오오───!]

3급 이상의 고위 마수 및 마물들.

그것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에스더가 쳐 놓은 에테르 장막이 완전히 깨져나갔다.

'이 이상 접근을 막을 수는 없다.'

원거리 전은 여기까지가 한계.

하지만 겁낼 필요는 없었다.

마수와 마물들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자."

그와 함께 호루스와 야누스가 차례로 흉성을 토해냈다.

[케에에에에───!!!]

[끼깃, 끼기기깃!]

마수들과 호루스가 격돌하기 직전.

호루스의 전신에서 칠흑의 뼈 촉수들이 돋아났다.

우로보로스의 역린에서 얻어낸 힘이, 우리를 향해 찾아온 무뢰배들을 향해서 사정없이 뻗어나갔다.

쐐새새새색───!!!

마치 하늘을 나는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뻗아나간 뼈 촉수들이 3급 비행종 하늘 백상아리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케에에에에!]

3급 비행종 하늘 백상아리는 분명히 강력한 마수지만, 이미 1급 마물 수준에 다다른 호루스를 상대로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숫자라는 걸 증명하듯이 곧이어서 다른 마수들이 우리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카카칵!]

[그우우우우우우!]

"피해!"

호루스가 회피 기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내 손에 들린 Ark-15 샷건이 불꽃을 토해냈다.

그 덕에 잠시 생긴 여유.

쪼옥, 쪽─

호루스는 비행종들의 공격에 회피 기동을 함과 동시에 촉수를 꽂아 넣은 3급 비행종 하늘 백상아리의 체액을 빨아먹었다.

상대의 접근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우리를 끝내지 못한다면 곧 우리의 힘이 된다.

[키에에에에!]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어느덧 3급 비행종 하늘 백상아리를 모조리 빨아먹은 호루스가 빈껍데기를 내뱉으며 다시금 흉성을 토해냈다.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을 하느라 호루스의 체력도 조금 빠졌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회복됐다.

무려 3급 마수를 거의 에너지 드링크처럼 들이킨 덕분이었다.

그우우우우우우──!!

끼깃, 끼기기긱!

곧이어서 호루스가 하늘을 종횡무진하며 움직였다.

가까이 오는 마수들은 일차적으로 에스더와 에테르가 막고, 그다음은 호루스가 상대했다.

그것마저도 제치고 들어온 마수들은 최후의 보루로서 야누스가 막아냈다.

[주인님! 뒤!]

"나도 알아!"

물론 그럼에도 포위가 된다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사정없이 TITAN-17 대마수 로켓와 NO-13 유탄 발사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아아앙───!!!

비록 그럴 때면 나와 호루스 역시도 폭발에 어느 정도 휘말릴 수밖에 없었지만, 마수들에게 둘러 쌓여서 산 채로 뜯어먹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다.

[키에에에에!]

자욱하게 일어난 폭연 속에서 호루스가 거칠게 날개짓을 이어갔다.

다시금 우리의 뒤로 무수히 많은 마수들이 뒤를 따르고, 나는 그곳을 향해서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5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돌격대장을 처치하였습니다.]

[5급 비행종, 녹색 깃털 일족 하피 돌격대장에 대한 피해량이 0.05% 증가합니다.]

그런 말이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결국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지금 우리의 상황에 딱 맞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호루스의 체력은 상대 마수로부터 흡수한 것으로 채우고,

야누스의 힘 역시도 상대 마수로부터 흡수하며 끌어내고,

끊임없이 발사되는 총알에는 애초에 끝이라는 게 없었다.

마치 무한 동력처럼 굴러가는 전투 시스템에 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 개인이 웨이브라는 거대한 현상에 대항할 수는 없다는 걸.

'고작 이 정도일 리가 없지.'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우리가 연신 공중전을 벌이는 와중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른 비행종들과 거충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저것들을 알고 있었다.

'2급 비행종, 붉은 날개 와이번. 2급 괴암종, 악마상 가고일. 그리고 1급 거충종, 여왕벌까지······.'

2급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

제아무리 큰 몸집만큼이나 상대적으로 지성이 낮은 개체들이라고 해도, 그 강함만큼은 오롯이 진짜였다.

아니, 오히려 지성이 낮은 만큼 다른 의미로는 더욱더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삐이, 삐이이이익───]

1급 거충종, 여왕벌의 날카로운 신호와 함께 주변에 있던 온갖 종류의 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1급 마수 및 마물들이 그렇듯이, 마찬가지로 여왕벌은 한 종을 통솔하는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지휘관을 손에 넣은 마수와 마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해진다.

바로 지금처럼.

위잉, 위이이잉······.

거충종 중에서도 벌에 해당하는 개체들이 여왕벌의 명령에 따라서 별도의 움직임을 취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호루스의 기동력을 살려서 일방적인 몰이 사냥을 해오곤 있던 나로서는 최악의 소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라면 사냥을 하는 쪽이 나에서 여왕벌 쪽으로 바뀐다.

즉, 이 상황 자체를 바꿔야만 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어쩌긴."

어차피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철컥-

호루스가 거의 최고 속도로 날면서 회피 기동을 하고 있는 상태였음에도, 나는 Ark-15 샷건을 대물 저격총 모드로 바꾸고는 그대로 1급 거충종 여왕벌을 향해서 발사했다.

여왕벌의 크기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 정밀한 사격은 필요 없었다.

타아앙───!!!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기습은 이내 몰려든 다른 벌들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일종의 벌 방패였다.

"아깝군."

그럼에도 자신을 노렸다는 사실에 분노했는지, 아니면 자식들을 잃어서 인지는 몰라도 여왕벌에게서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끔찍한 괴성이 토해졌다.

[삐이이이이이익───!!!]

그 모습을 본 에스더가 기겁했다.

[지금 상황에 저년 화를 더 돋워서 어쩌려고요?!]

"화를 안 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나?"

[그건··· 딱히 아니지만.]

"어차피 해야 할 건 정해져 있다."

[···그게 뭔데요?]

나는 호루스의 고삐를 겸하고 있는 뼈 촉수를 다잡으면서 말했다.

"강행 돌파."

그와 함께 호루스의 몸이 여왕벌이 있는 곳을 향해서 쇄도했다.

< 다중 웨이브 (2) > 끝

[끼에에에에에!]

[크릉, 크르릉!]

뒤에서 우리의 뒤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비행종과 거충종, 그리고 괴암종들.

지상에서 나와 호루스가 추락하기만을 기다리며 호시탐탐 입맛을 다시고 있는 마수 군단들.

마지막으로 서서히 우리를 에워싸는 진형을 짜고 있는 여왕벌이 이끄는 벌들까지.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다중 웨이브가 일어난 시점부터, 이미 아크의 운명은 최악 그 자체였으니까.

[감히 어딜!]

에스더의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에테르들 역시도 호응했다.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죽이자.]

[건방진······ 것들···.]

[다, 죽여, 버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벌이 직접 지휘하는 벌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나에게 야누스가 있다고 해도, 5급씩이나 되는 거충종의 독침에 제대로 쏘이면 목숨이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망칠 장소를 서서히 조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저, 자리를 지킬 뿐.

이미 알고 있던 대로 1급 거충종 여왕벌은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지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도··· 이미 그 본능은 지혜의 영역에 다다랐다고 보는 게 맞겠지.'

실제로 1급 거충종 여왕벌에 대해서는 유저 커뮤니티에서도 여러 악명이 자자했다.

네임드 마수도 아닌 주제에 지휘관의 성격을 띠며 같은 종의 마수들을 부리며 플레이어를 비롯한 아크를 압박해온다.

하물며 몸은 또 어찌나 사리는지, 그런 까다로운 전술을 구사하는 주제에 조금만 불리해지면 저 멀리 하늘로 도망치기 일쑤다.

그렇다고 해서 간신히 따라잡으면 또 본체의 힘이 약한 마수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1급 거충종.

여왕벌은 그 이름에 걸맞은 힘을 지닌 마수였다.

'그나마 여왕 피켈라가 아닌 게 다행이겠지.'

여왕 피켈라.

이름 그대로 1급 거충종 여왕벌의 네임드 개체로서, 안 그래도 까다로운 여왕벌의 특성이 거의 다섯 배쯤은 강화된 녀석이다.

물론 스테이지 초반부에 해당하는 현재로서는 절대로 나타날 리가 없는 녀석이지만, 분명한 건 언젠가 마주쳐야 할 적이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미리 경험해보는 게 낫겠지.'

1급 거충종, 여왕벌의 까다로움을.

위잉-

위이이이잉─

계속해서 회피 기동을 하던 호루스의 앞을 거대 벌들이 막아섰다.

이제껏 자리만 지키던 것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호루스의 발목을 붙잡겠다는 뜻이었다.

'어딜.'

나는 Ark-15 자동변환 소총을 자동 소총 모드로 변경한 뒤에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거대 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인님! 더 빨리!]

"나도 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지체된 시간만큼 바로 뒤에서 호루스를 쫓던 비행종들과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여왕벌의 노림수대로였다.

'···여전하군.'

이런 수작에 몇 번 정도만 당하면, 그대로 사방으로 포위된 채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타개책을 내야만 했다.

그 순간.

쐐애애애액───!

아슬아슬하게 내 머리 위로 2급 비행종 와이번이 뿜어낸 독액이 스쳐 지나갔다.

치이이익······.

다행히 5레벨 보호복을 베이스로 삼고 있는 야누스 덕분에 머리가 통째로 부식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독액에 휩쓸려서 그대로 타들어 갔다.

만약 후드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발생 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키에에엣!]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슬슬 추격하는 비행종들의 원거리 공격을 회피 기동으로 피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역시, 별로 안 좋아.'

여왕벌 한 마리의 존재로 인해서 공중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홀로 전황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힘.

이게 바로 1급 마수가 지닌 힘이었다.

'최악의 경우, 후퇴하는 것까지도 생각해야겠어.'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그조차도 쉽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일단은··· 저것부터 잡아야겠지.'

1급 거충종, 여왕벌.

벌써 몇 번이나 녀석을 노리고서 방아쇠를 당겼지만, 그럴 때마다 빈번히 주위에 있는 대형 벌들이 호위에 나선 탓에 내 노림수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돼.'

단순히 총으로 쏜다거나 하는 건 이미 여왕벌이 예상하는 범주 안에 들어간 행동들이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1급 거충종 여왕벌을 잡기 위해서는, 여왕벌의 인지 자체를 뛰어넘을 필요가 있었다.

'역시, 그것뿐이겠지.'

나는 호루스의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지상을 향했다.

[꺄악! 지금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거예요?!]

에스더가 경악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하늘에서도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지상으로 내려가기까지 한다면 마수 군단에게 포위당할 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이익───!

지상까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비행종들과 대형 벌들도 지상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지는 않았던 덕분이었다.

[아니, 죽을 거면 혼자 죽어요!]

에스더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때, 마침내 지상에 있는 무수한 마수 군단이 호루스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에!]

[크르르르르!!!]

[캬오오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딜.'

나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내 의지에 감응한 야누스에게서 칠흑의 창이 뻗어 나왔다.

['엥켈렌스의 창'을 소환합니다!]

['엥켈렌스의 창' 소환 가능 시간 : 30분 11초.]

이제 야누스가 엥켈렌스의 창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30분을 훌쩍 넘어섰다.

그만큼 야누스가 강해진 덕분이었다.

지상과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300m, 150m, 50m······.

그렇게 지상을 향해서 내리꽂히기 직전, 나는 그대로 호루스의 몸 위에서 튀어 나갔다.

"피해 있어."

[키엣!]

그와 함께 호루스는 급선회로 날아오르고, 나는 순식간에 마수 군단 한복판에 버려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에스더!"

[아, 진짜!]

에스더의 비명과 함께 나를 향해서 덮치려던 마수 군단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쿠우우우웅!!!

엥켈렌스의 창을 쥔 채로 지상에 내려온 나를 향해서 사방에서 마수와 마물들이 달려들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지하까지 도망칠 곳따위는 없었음에도 나는 그대로 엥켈렌스의 창을 한 바퀴 휘둘렀다.

촤아아악──!!!

플라즈마 소드조차도 막아내는 강도와 우로보로스의 비늘조차도 뚫어낼 수 있는 날카로움을 지닌 창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마수와 마물따위는 스치는 순간 그대로 절단이었다.

'지금.'

그렇게 내 주위로 작은 원의 공간이 생겨났다.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다.

나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서 곧장 손을 뻗어서 야누스의 뼈 촉수 하나를 뽑아 들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34분 31초.]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하기 위한 조건은 지상에 엥켈렌스의 힘이 담긴 뼈 촉수를 내리꽂을 것.

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지상으로 내려온 이유였다.

멈칫-

그와 함께 나를 향해서 달려들고 있던 무수한 마수 군단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우우우······.]

[그웃?]

비단 지상에 있는 마수들뿐만이 아니라, 지하와 하늘에 있는 모든 마수가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 멎음은 찰나일 뿐, 곧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엥켈렌스의 영역은 마수와 마물로부터 절대적인 안전지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니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마수와 마물들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삐이이이이───!]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왕벌이 나를 향해 다시금 흉성을 토해냈다. 과연 1급 거충종다웠다.

[키이이이익!]

[가각, 가가각······!!]

곧이어서 2급 비행종 붉은 날개 와이번과 2급 괴암종 악마상 가고일 역시도 정신을 차리고서 나를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저 정도 수준의 마수와 마물들에게는 엥켈렌스의 영역 선포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나와 여왕벌 사이에 존재하는 건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지겨울 정도로 여왕벌의 앞을 막아섰던 대형 벌들은 엥켈렌스의 영향으로 인해서 진형이 무너진 뒤였다.

지금이라면, 여왕벌을 지켜줄 호위 벌들을 뚫고서 녀석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엥켈렌스의 영역이 유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왕벌의 울음과 함께 서서히 대형 벌들 역시도 다시금 진형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짧아. 일반적인 화력으로는 여왕벌을 사냥할 수 없어.'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화력을 사용하면 될 뿐.

뿌득, 뿌드득──!

나는 엥켈렌스의 창을 쥔 오른손을 크게 뒤로 젖혔다.

강체 능력과 더불어서 야누스의 신체 보조 능력,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얻게 된 강화 혈청의 능력으로 내 근육은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꿈틀대고 있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에스더."

[하고 있어요.]

내 부름과 함께 에스더가 다시금 에테르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에테르가 밀집되는 곳은 당연히 내 손에 쥐어진 엥켈렌스의 창이었다.

[던질, 거야······.]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쏴버려.]

[던져─────!]

내 오른손에 잡힌 엥켈렌스의 창을 중심으로 에테르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지금.'

['뼈 투창'이 발동합니다.]

엥켈렌스의 창이 공기를 찢는 소닉붐을 일으키며 그대로 여왕벌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리고 나 역시도 곧장 지상에 꽂혀 있는 뼈 촉수를 뽑으며 엥켈렌스의 영역을 해제했다.

['엥켈렌스의 영역'이 해제됩니다.]

[현재 지속 가능한 시간 : 33분 5초.]

그와 함께 지상을 비롯한 하늘에 있는 마수와 마물들의 시선이 다시금 나에게로 쏠렸다.

내가 노린 바였다.

[삐이이이이이이───!!!]

여왕벌이 다급하게 자신의 호위를 불러 세웠으나, 애석하게도 그 호위벌들은 나에게로 잠시 시선이 팔린 뒤였다.

[삐이익────!]

여왕벌은 뒤늦게 엥켈렌스의 창을 피하려고 움직였다.

물론 그마저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미 계산된 행동 반경 안이었다.

콰카카카카카!!!

단순한 투창이 아니다.

내가 지닌 거의 모든 에테르와 에스더까지도 전력을 다한 공격이다.

당연히 제아무리 1급 거충종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무방비로 이 공격에 노출되고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삑───]

하늘 위에서 고고하게 군림하던 여왕벌이 힘없이 추락했다.

즉사까지는 아니었어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왕벌을 마무리하러 갈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나를 덮쳐오는 마수 군단 때문이었다.

'···역시, 힘들겠군.'

온몸의 힘이 빠진다.

거의 전력을 다한 투창 덕분인지 주위에서 몰려드는 마수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엥켈렌스의 영역을 선포한다면 잠깐의 시간을 벌 수야 있겠으나, 단지 그뿐.

아직 2급 비행종 붉은 날개 와이번이나, 2급 괴암종 악마상 가고일 같은 난적들이 남아 있었다.

'조금 무리를 할 수밖에 없나.'

내가 Ark-15 자동소총을 다잡으며 결사항전을 준비한 그 순간.

[키에에에에에───!]

어느 순간 드리우기 시작한 거대한 그림자와 함께 나를 향해서 달려들던 마수들이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어느덧 나를 구하러 온 호루스가, 하늘 위에서 자랑스럽게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것을.

[키에엑!]

"······똘똘하긴."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곧장 호루스가 뻗어온 뼈 촉수를 붙잡았다.

"가자."

그와 함께 잠시 멈칫하던 마수들이 호루스를 향해서 달려들었으나, 호루스의 전신에서 뿜어진 뼈 촉수들이 그것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벌들 역시도 여왕의 지휘가 끝나자, 조금 전처럼 날카로운 진형은커녕 다시금 우왕좌왕했다.

[···진짜 십년 감수했네. 이제 아크로 돌아가요. 할 만큼 했어요. 네?]

그 말대로였다.

나나 호루스나, 이미 한계를 넘어선 전투와 비행으로 인해서 피로가 거의 한계에 달했다.

억지로 싸운다고 해도 이 이상 싸운다면 큰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니.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또 무슨 할 일요!]

내 시선의 끝이 자연스럽게 여왕벌이 추락한 곳을 향했다.

"챙길 건 챙겨야지."

[······네?]

뒤늦게 내 시선 끝이 향한 곳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에스더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