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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인 - 4 >

"간단하지 않습니까? 서로 불편하잖아요? 그러니까 찢어지라는 거죠. 마침 경훈씨하고 보라씨도 다른 세력하고 조인트 된 모양이던데. 얼마 전에 사람들 왔었죠?"

나는 미경이 내게 그 말을 해줬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엄한 불똥이 튀면 곤란하니.

형준 형이 눈썹을 찡그렸다.

"외부인이 싫다더니."

"능력 있고 마음 잘 맞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성호도 능력 있고 우리하고 마음 잘 맞는 사람이지."

'우리'에 경훈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오빠. 저희가 좀 다른 사람들하고 조인트 좀 했어요. 근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빨리 레벨 올려서 경매장 열어야 한다구요."

"그거 빨리 열어서 뭐하게? 초반에는 사람도 없다면서."

경훈이 답답했는지 가슴을 쳤다.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지금쯤은 고인물들 들어와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 사람들하고 친분을 만들면 어중간하게 파밍하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계속 언급했던 건데."

"고인물들이 왜 우리한테 관심을 주겠어? 자기들끼리 친하게 지내지."

"아 진짜···환장하겠네."

평행선이군.

형준 형과 경훈은 이런 식으로 언쟁을 반복해왔을 것이다.

그걸 빨리 끊어줘야겠군.

"서로 안 맞는 것 같은데, 찢어집시다. 그쪽도 다른 세력이 편한 것 같고,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2인분 물자를 모두 가져가도록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이사를 도와준다고요?"

솔깃한 모양이군.

"대단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미경씨가 좀비 유인하고 우리가 중간지점까지 짐을 날라드리죠. 그러면 깔끔한 거 아닙니까?"

"···"

형준 형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내 의견에 불만은 없는 모양.

남은 건 경훈과 보라의 결정이다.

빨리 결론을 내려.

여기가 불편하다며? 그럼 편한 곳으로 가야지. 이사까지 도와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경훈은 귓속말로 보라와 대화한 다음 나를 쳐다봤다.

"만약에 안 나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세 명이 나올 겁니다, 아마."

이러나저러나 분리는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경훈이 그 이상의 트롤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죽일 것이다.

그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갈 때까지 간 것 같으니까. 이대로 찢어집시다. 근데 관장님, 그렇게 하다간 도태됩니다. 다른 생존자들한테 밀린다고요."

"나도 하나만 말하지. 너 계속 그렇게 말하다간 언제 한번 크게 혼날 거다."

"내가 어떻게 말했는데요?"

형준 형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보고 도태 운운해? 니가 그렇게 잘났냐?"

"아니 무슨 사실을 말해도···"

그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보라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야, 왜."

"그만 좀 해. 그냥 나가면 되잖아."

그의 연인은 그보다는 이성적인 모양이다.

잘했어.

조금만 더 지랄했으면 내가 죽여 버릴 것 같았거든.

사람 하나까지는 살인자에 등록되지 않으니까···안 그래?

내가 조용히 쳐다보자 경훈은 고개를 돌렸다.

"나갈 테니까 분류만 좀 부탁합니다. 우리끼리 알아서 이사할 테니까."

"그러지."

이로서 분리가 결정되었다.

둘은 바람을 쐰다며 밖으로 나갔고 형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진짜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성호 너는 모를 거다."

"잊어버리세요. 열 내봐야 형만 손햅니다."

"수연씨가 근처에 온다는 건 들었는데, 성호 너도 들어온다고?"

형은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이거 미안한데.

"저놈 내보내려고 그냥 해본 말입니다."

"아니 왜? 다섯 명까진 괜찮다며? 경훈이하고 보라가 나가니까 너하고 수연씨가 들어오면 딱인데."

"밖에서 좀 돌아다녀야 하거든요. 제가 좋은 거 하나 알려드리죠."

미곡센터의 위치를 알려주자 형이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야···이런 곳이 있었어? 근데 이거 알려줘도 되냐? 우리가 얼마 빼갈지도 모르는데?"

나는 웃었다.

"거기 가면 알게 될 겁니다. 부산 인근의 생존자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다 못 빼가요."

창고 하나에 수백 포대가 있는데 그런 창고가 몇 개나 있다.

근처가 시골이라서 아직 좀비의 습격을 받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러냐···그래도 니가 합류하면 내가 마음이 좀 든든할 것 같은데."

형은 한숨과 함께 아쉬움을 토해냈다.

나는 그를 위로했다.

"같이 생활하지는 않아도, 자주 와서 이야기 나누고 하면 되잖습니까? 생수 총판이나 낚시터 뭐 이런 거 확인하러 돌아다녀야 해서 그렇습니다."

"생수 총판은 그렇다치고 낚시터는 왜?"

"언제까지 전투식량만 먹을 건 아니잖습니까? 슬슬 다른 식량도 구해봐야죠. 바다에 좀비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 바다엔 좀비가 없어?"

"먹을 건 도시에 많죠. 요 앞에 낚시용품점 있잖습니까? 통발 같은 거 찾아서 던져도 쏠쏠할 겁니다."

"그런 걸 같이 하면···흠, 됐다. 따로 할 일이 있다니 이해해야지. 하여튼 이거 갑자기 희망이 샘솟는데."

"저는 그런 거 확인해서 형님한테 귀띔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죠?"

"니가 편한 대로 해라."

내가 특성을 밝히고 합류하면 모두가 불편해진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말 안했어요?

왜 우리 가족 안 구해줬어요?

레벨 올리면 특성에 추가효과 붙잖아요? 그럼 우리도 들어갈 수 있겠네요?

나한테 좀 더 해줄 수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안 하지?

등등···

해명해야 하는 것만도 한 가득이고 알아들을지도 의문이다.

물질적으로는 편해지겠지만, 마음이 불편해진다.

···역시 모르는 게 최선이다.

수연은 나에 대해 약간 의심을 품는 것 같지만 현명한 사람이니 잘 처신할 것이다.

그런데 형은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한 것 같았다.

"없는 사람 치긴 했는데, 그래도 걔가 가니 조금 아쉽네. 레벨도 중요한 건 맞는데."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겁니다."

"무슨 기회?"

"김밥조아가 영상 끝에 마지막으로 말했거든요. 고블린이 나타나면서 폭렙할 기회가 있다고. 무슨 굴인가 던전인가 말한 것 같은데 거기까진 기억이 안 나네요."

"음···그래? 폭렙할 기회라···그걸 우리가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인데."

100% 될 겁니다.

내가 키워드릴 테니까.

수연은 다친 나를 치료해 줄 거고, 미경은 나를 옮겨줄 것이다.

유현은 내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이며 형은 그들의 리더다.

이들의 성장은 내게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앞으로 괜찮은 사람도 이 파티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인연이야 만들면 되니까.

"끝까지 정체를 숨겨야 하는 게 좀 고역이겠네."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끼공듀 같은 사람이 난입하는 것만 어떻게 막으면···

젠장, 갑자기 소름이 끼치네.

.

.

.

수연은 내 제의를 받아들여 헬스장 멤버가 되었다.

사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처럼 혼자서도 잘 지내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사람들은 내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유니크한 특성을 갖고 있어서 영원히 외부자로 떠돌 운명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수연의 이사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두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어 떨떠름해 했다.

멤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줘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한편 경훈과 보라는 짐을 챙겨서 떠났다.

나는 몰래 그들의 뒤를 밟아 정확히 어디 사는지, 몇 명이 있는지 확인해 두었다.

사냥에 치중하는 이들의 특성상 언젠가는 부딪칠 것 같아서였다.

다시 생각한 거지만 아포칼립스에서 어중간한 이웃이란 없다.

동료, 아니면 적이다.

"제발 내 판단이 틀렸기를 빈다."

나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의 반응을 체크했다.

헬스장 멤버들이 워낙 부산을 떨고 좀비들이 몰려다녔던 터라 그걸 주시한 생존자들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의외로 사람들이 좀 있는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드문드문 생존자들의 흔적이 보였고 드물게 인기척도 느껴졌다.

이 동네에 온 이유는 무너지지 않은 건물이 많아서이리라.

주택과 낮은 건물이 많아 다른 동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파밍할 곳도 아직은 많고···"

그나저나 생존자 수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버티는 사람이 얼마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난이도가 대폭 낮아져서 그런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길 꺼려하게 만들어줬던 강화 좀비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열흘 넘게 지냈는데도 못 본 거면 앞으로도 없다고 봐야지.

제작진이 난이도를 수정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올 고블린 이벤트에서도 뭔가 수정이 있다는 건데···

나는 좀비 한 마리를 두들겨 패고 구석진 곳에서 차원문에 들어갔다.

그리고 고블린 이벤트를 확인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구만."

좀비에 이어 고블린이 세상에 나타나는 이벤트다.

이 고블린이란 놈들은 좀비와는 태생부터 다르다.

적극적으로 인간을 찾아 사냥하려 하며.

좋아 보이는 물건이 있으면 약탈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의 세가 약하면 도망갔다가 무리를 불려서 우르르 공격하기도 한다.

대신 육체가 약하지만 마비독침이 이를 커버한다.

좀비와 고블린 중 강한 것은 좀비지만 상대하기 꺼려지는 것은 단연코 고블린이다.

"초반에 고블린 소굴이 나오네."

런칭 때는 몰랐다가 계속 죽으면서 알게 된 이벤트다.

고블린이 나타나면서 일종의 차원문이 열리는데, 거기가 고블린 소굴이다.

지하에 만들어진 고블린의 둥지라는 설정으로, 끝까지 깨면 다양한 보상을 준다.

굴의 규모가 크면 던전, 미궁 등으로 바꿔 부른다.

그런데 이 차원문 이거···

"내 차원문하고 많이 닮았네."

어쩌면 고블린이 나오는 차원은 내 숲과 같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차원문을 열었을 때 짐작한 거지만.

하여튼 고블린 이 녀석들에게 대항하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노트를 뒤져 종말 당일에 뿌려진 공략본을 확인했다.

이걸 기초로 적당한 방어책을 만들어 헬스장 멤버들에게 숙지시킬 생각이었다.

"처음엔 고블린들도 어리버리 하니까···"

내가 겪고 문제점이 뭔지 알았다는 식으로 유현에게 알려주면 된다.

우선은 건물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만드는 게 중요하겠군.

"절대 접근해선 안 된다는 거 알려주고···"

해야 할 게 꽤 많구만.

고블린이 나타나는 시기는 특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충분히 영양분을 섭취한 좀비들이 구울로 진화하는 때다.

길거리를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는 좀비들을 보면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앞으로 생존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끝까지 버텨봐야지."

.

.

.

경매장에 사람들이 꽤 많이 들어왔다.

전부 익명이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대략 10여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들은 경매품을 올렸다 내렸다 장난을 치면서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나 15레벨을 달성한 사람치고 자신의 정보를 노출하는 얼간이는 없었다.

애초에 노출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토끼공듀나 오리궁뎅이를 빼면 말이다.

둘은 당당하게 자기 아이디를 깠다.

그래봐야 누가 흉내 내는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놔 여긴 또 어디야. 미쳐버리겠네.

―흐흐 님 춘천에 갔다는 거 진짜예요? 거긴 대체 왜 간거?

―내가 가고 싶어서 갔나요. 가다 보니까 춘천이었던 거지.

―섹스를 외치는 좀비라고 해서 뭔가 했는데 토공님이었네.

―지금은 북한인 거 같음.

―뭐라고요? 거긴 대체 왜 갔는데요?

―아니 가다 보니까 북한이었다니깐요.

―이해가 안 되네.

―날 이해하려 하지 마 베이베.

―토공님 맞으시네.

아주 난리가 났구만.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토공의 팬티 경매에 들어와 코멘을 남겼다.

모두가 익명인 특성상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덕분에 토공은 짜증을 내었다.

―아니 좀 꺼지라고. 뭐 구경거리 났음?

―흐흐 토공님 어떠세요. 저희하고 합류하시는 게. 섹스 마음껏 하게 해드림.

―필요없는데.

―토공님 섹무새잖아요. 쎅쓰!

―섹무새는 맞는데 니들은 필요없음.

―너무 도도하시네. 그러다가 다굴 맞아서 죽는 수가 있는데.

―아무도 나를 막을 순 없으셈.

―근데 웃기네. 애초에 익명인데 어떻게 만나려고 그럼? 어디로 오라고 하면 겐세이가 넘칠 텐데.

―까놓고 여기 있는 10명이 전부 경쟁자임.

―토공님도 봤는데, 김밥조아님은 안오나?

순간 코멘트란이 잠시 정지되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증오의 코멘을 갈겼다.

―그 새끼.

―뒤진다 씹쌔야, 누가 누굴 보고 새끼임?

―내맘이지. 정보도 안 푸는 새끼한테 뭐 좋게 대해야 하나?

―정보를 안 푸는 건 김밥조아 마음이지.

―지랄하네. 좆같은 새끼 걸리면 확 죽여버린다.

―존낰ㅋㅋ웃긴겤ㅋㅋㅋ무슨 수로 걔를 죽이겤ㅋㅋ특성 엄청날 건뎈ㅋㅋㅋ

―병신들아 내 특성이 무한부활인데 김밥조아님은 존나 쩐다고.

―무한부활?

―실화냐 특성이 부활이라고?

―와 존나 불공평하네.

―개구라지. 자기 특성 알리는 놈이 어딨어. 저새끼 토공 아닐거임.

―오리궁뎅이님은 특성 뭐임?

―안알랴줌.

이로서 고인물 4인방 중 셋을 확인했다.

하지만 생존자1은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몰래 지켜보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경매장에 들어오지 않은 걸까.

추측컨대 부산에 나타났던 그는 생존자1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들의 코멘을 보면 마지막에 공략을 알린 사람도 생존자1인 것 같았다.

다른 준고인물일 확률도 있지만.

"그럼 생존자1이 정부하고 같이 있다고 봐야 하나."

당장은 정보가 적어서 확신할 순 없었다.

이제 코멘트란은 토끼공듀를 따라서 꿀 사냥터인 북한으로 올라가자는 선동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들이 올라갔을 땐 토공은 거기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오리궁뎅이인 듯한 사람이 코멘을 남겼다.

―토공님, 우리 분식집 가볼까요?

―그럴까요?

여기로 오겠다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이 사람들 끔찍한 말을 하네.

< 외부인 - 4 > 끝

< 최후의 만찬 >

아포칼립스에서 장거리 이동을 하는 건 매우 힘들다.

이런 여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토끼공듀와 오리궁뎅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만약 그들을 만난다면···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는 경매장을 끄고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둘은 나보다 전투력이 훨씬 높다.

포인트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45포인트를 얼음 사는데 쓰는 오리궁뎅이. 특성 때문에 포인트를 쌓아놔야 하는 토공.

전투력이 높고 포인트도 많다는 건 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나와 얽힌 게 없고···"

게임에선 같이 웃고 떠들고 즐기기만 했지 현실에서 얽힌 게 없다.

내가 정체를 숨길 이유가 하나 사라진 셈이다.

걸리는 게 있다면 둘이라고 해서 내 차원문 특성을 탐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

아포칼립스에서 풍요롭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인간 아닌가.

"그래도 둘이라면 또 모를 것 같긴 해."

워낙 이상한 사람들이라서 사고방식이 다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들이 진짜 부산에 찾아온다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은 이렇게 해도 정작 그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환영할 것 같아서였다.

랜선 인맥이지만 어쨌거나 친구 아닌가.

미궁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모닥불 피워놓고 온갖 잡담을 나눴던 추억이 떠올랐다.

아포칼립스에서 그런 추억을 공유한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부산에 올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오리궁뎅이는 몰라도 토끼공듀는 절대 못 올 것 같았다.

둘이 합류하는 그림이 안 그려졌다.

당분간은 고민할 필요가 없겠군.

그나저나 내가 뭘 하려고 했었지?

동굴 안에 펼쳐놓은 책을 보니 텃밭을 만들려 했었나보다.

겨울에 단단한 땅을 파헤치는 건 어렵지만 내게는 미니 포크레인이 있다 이 말이야.

"재배할 채소는 감자부터 시작하자."

생존 영화를 하도 봐서 생존식량은 감자지 하는 선입견이 박혔다.

막상 감자는 동굴에 상당히 비축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태양사과와 황소고추를 빠르게 키워낸 숲이니 감자도 그렇게 해줄 것이다.

내 희망이긴 하지만.

"일단 비료를 뿌리고 포크레인으로 부지를 엎고···"

쇠스랑과 삽으로 고른 후 고랑을 만들고 비닐을 씌운다···흠흠.

영상으론 쉬워 보이는데 실제론 땅이 얼어서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추워 떨고 있느니 뭐라도 해서 열기를 내야지.

도구를 챙기는데 배를 드러내고 자고 있던 딩고가 벌떡 일어나 으르렁거렸다.

"왜? 밖에 뭐 있어?"

그때 내게도 소리가 들렸다.

뀌이이익!

헛.

설마 포획틀에 뭔가가 잡혔나?

나는 장비를 챙기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뀌이익! 뀌귁!

밖에 가보니 혹멧돼지 새끼 한 마리가 포획틀에 갇혀 있었다.

나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재빨리 포획틀을 열고 녀석을 잡았다.

딩고가 숲이 떠나가라 짖어댔다.

"빨리 튀자."

나는 새끼를 붙잡고 쉘터로 후퇴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성체 혹멧돼지들이 분명히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포획틀에 놀라 도망갔을지라도 새끼를 찾으러 오게 되어 있다.

그럼 1+1이 아닌가 싶지만 녀석들의 덩치를 생각하면 악전고투가 예상되었다.

화살 한두 방 맞아서는 죽지도 않을 거고, 창으로 지근거리에서 싸워야 하는데 그게 몇 마리나 되면···

"총알은 아껴야 잘 살지."

짜증난다고 고블린에게 한 방 쏴버린 덕분에 170발로 줄었다.

반성, 또 반성.

나는 버둥거리는 새끼를 동굴로 데려와 단칼에 죽였다.

이미 수많은 생명을 살상한 내게 있어 새끼의 귀여움은 별 의미가 없었다.

혹멧돼지는 곧 식량이다. 고기고 내게 살아갈 힘을 준다.

"또 도축을 해야 하는군···"

축 늘어져 있는 혹멧돼지 새끼를 보고 있자니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새끼니까 고기도 정말 야들야들할 거야!

힘을 내어 피를 빼고 돼지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아오 진짜."

나는 악전고투 끝에 머리를 떼어낸 고깃덩어리를 천장에 매달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정육점 창고가 생각났다.

딩고는 아까부터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면서 날아오를 기세였다.

요즘 고기 맛 못 봤지?

실컷···먹여주기엔 양이 좀 적군.

어차피 나는 수육만 해먹으면 되니까.

육식동물인 딩고가 아무래도 고기가 더 필요할 것이다.

"일단 이거부터 먹고 있어."

나는 간과 창자를 떼어 딩고에게 먹였다.

그리고 수육을 할 부분을 도려내었다.

새끼라 덩치가 작아서 사실 구분도 잘 되지 않았다.

적당히 허벅지를 기준으로 잘라내고 냄비에 갖은 재료를 때려 넣고 부글부글 끓였다.

"이건 수육이냐 뭐냐."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삶아지면 장땡이다.

나머지는 갓 담근 김치님이 해결해주실 거야.

딩고는 순식간에 내장을 먹어치우곤 입맛을 다셨다.

위장과 심장까지 먹였음에도 그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머지는 나하고 같이 먹자."

녀석은 피 냄새를 킁킁 맡더니 얌전히 앉아서 기다렸다.

음···

고기가 워낙 연하니까 삶는 시간을 조금 줄여도 되겠지?

슬쩍 뚜껑을 열어보니 황색의 육수가 부글부글 끓는 가운데 연한 색의 고깃덩이가 떠올라 있었다.

"흐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운 좋게 이런 특성을 얻은 덕분에 호사도 누려보는구나.

나는 김치를 한 포기 꺼내와 꼭지만 잘라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고기를 꺼내 뜨거움을 참으면서 적당하게 썰어냈다.

긴 김치에 고기를 넣고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으흠. 흠."

부드러운 고기와 매콤한 김치의 조합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이건 참을 수가 없네.

나는 소주팩을 가져와 잔에 콜롱콜롱 따랐다.

아포칼립스에선 취하고 싶진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눈 딱 감고 세 잔만 마시자."

딩고는 자기 몫의 고기보다 야들야들하게 삶아진 내 수육에 탐을 냈다.

"야, 솔직히 니 고기가 더 많은데, 안 그러냐?"

왕왕!

"알았다, 알았어."

나는 내 몫의 반을 딩고에게 떼어주었다.

뜨거울까봐 살살 식히고 썰어주기까지 하니 이만하면 착한 주인 아니냐?

녀석은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곤 나를 바라봤다.

이건 안 된다 이놈아.

나는 접시를 간이테이블에 놓고 천천히 만찬을 즐겼다.

크···이 맛이야.

.

.

.

고블린이 나타나기 전, 랜덤으로 나타나는 이벤트가 있다.

동물 습격 이벤트.

습격···이라긴 뭐하고 유저들이 고기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다.

아포칼립스에서 그런 거 있잖아.

황폐화된 도시에서 동물들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는 거.

육식동물은 사람을 위협하고 초식동물은 사냥감이 되어주는 클리셰.

서바이벌 라이프에도 그게 있지만 날짜가 언제인지는 나도 몰랐다.

다만 그물과 투척용 창 등 준비는 철저히 해뒀다.

그리고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텃밭을 고르다가도 틈만 나면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다.

덕분에 여름의 기세가 살짝 꺾였을 때에는 재주 1이 더 올라 총 14가 되었다.

투척기를 통해 창을 던지면 큰 짐승은 적당히 맞출 수 있을 정도다.

창의 무게가 있기 때문에 화살보다는 위력이 훨씬 높다.

또한 나는 독개구리를 통해 모아 놓은 마비독으로 내성 기르기를 시도했다.

능력이 스킬로 표현되는 세상이니 마비독내성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다.

"슬슬 고블린이 나타날 때가 됐지."

바늘에 마비독을 아주 살짝 묻히고 허벅지를 찌르니 다리 감각이 사라졌다.

"···"

몇 분을 기다리자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본격적으로 내성 기르기에 들어갔다.

방법은 마비독의 생활화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일 하다가 한 번, 점심 때 밥 먹으면서 한 번. 이런 식이다.

다리가 왠지 뻐근한 것 같으면 그날은 더 시도하지 않았고 푹 쉬었다.

조심스러운 접근 덕분일까.

10일째에 드디어 그게 나타났다.

「스킬 : 마비독저항을 획득했습니다」

"이게 되네."

9일째까진 이걸 계속 해야 되나 회의적이었는데 마침내 생겼다.

정확한 효과는 모르지만 최소 한 방 맞고 뻗어버리는 사태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방검복 입으니까 대부분은 막을 테고."

운 없이 관절로 날아드는 마비독침 한 방만 막을 수 있으면 된다.

그나저나 내성이 아니라 저항인 게 신경 쓰이네.

혹시 해서 고블린처럼 바늘 전체에 마비독을 묻히고 찌르니 몸 전체가 움찔움찔했다.

"흑!"

이래서 내성이 아니라 저항이구나.

움직일 순 있는데 아주 힘들다.

겨울에 땀을 삐질삐질 흘릴 정도로 노력해야 몇 발자국 걷는 정도였다.

"하···"

간신히 독에서 벗어나니 온 몸이 땀으로 푹 젖었다.

차원문 안으로 도망갈 정도는 되니 괜찮다고 여겨야 하는 걸까.

"계속 저항을 길러보자."

혹시 아는가.

저항이 계속 중첩되다 내성이 뜰지.

오랜만에 현실로 나가보니 폭염이 한풀 꺾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후덥지근하지만 며칠 전의 그 초열지옥에 비하면 훨씬 지낼 만 했다.

"있는지도 모르는 가을이 지나가면 곧 겨울이네."

통상 여름이 더우면 겨울이 춥다는 속설이 있던데···이번 해에는 아니길 빌었다.

"숲은 또 엄청 더워지는 거 아니야?"

나는 투덜투덜하며 2층집에서 망원경을 통해 밖을 관찰했다.

요 며칠간 좀비를 사냥하는 사람이 꽤 늘었다.

처음엔 집에 콕 틀어박혀 있더니 슬슬 적응한 것이다.

패치로 강화 좀비가 안 나타나니 사냥할 만도 하지.

좀비도 강화되긴 했지만 인간 정도로 민첩하게 뛰어다니진 못한다.

"구울이 되기 전까지는 괜찮을 거야."

사실 좀비와 강화 좀비, 구울이 명확하게 분류되어 있는 건 아니다.

좀 더 괴물스럽게 변하고 뛰어다니면 구울이라고 불렀을 뿐.

좀비들이 구울로 변하는 시기는 고블린에 이어 코볼트까지 나타난 다음이다.

그 때가 되면 비로소 아포칼립스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맛보기고."

먼지가 쌓인 2층집을 청소하고 있으려니 종이비행기가 날아들었다.

뭔가 해서 보니 유현이의 속보였다.

―형형! 호랑이 나타났어요, 호랑이!

"드디어 왔구만."

나는 배낭을 메고 나오기 싫어하는 딩고를 끌어냈다.

고기 먹었으니까 밥값은 해야지?

.

.

.

거리에 호랑이가 돌아다닌다.

녀석은 좀비들의 공격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떠나지는 않고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가 지도를 봤더니 삼전더파크에서 온 것 같았다.

"하긴 우리가 전부 부서졌을 테니."

좀비 포자는 인간에게만 반응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멀쩡하게 풀려났을 것이다.

일부는 좀비에게 공격당해 죽고, 또 일부는 길거리를 헤매고 하겠지.

건너편의 헬스장 사람들이 구멍을 뚫어놓은 창을 통해 호랑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화살이 날아갔다.

느긋하게 걷던 호랑이는 꼬리를 스친 화살에 깜짝 놀라 옆으로 피했다.

그리곤 화가 났는지 으르렁거렸다.

"어디 보자···다른 놈은 없나···"

나는 옥상에서 딩고와 함께 사방을 살핀 끝에 한 무리의 양을 발견했다.

털을 깎아줄 사육사가 없어서 그런지 무성하게 자란 상태였다.

성체 양이라 노린내가 있겠지만 그래도 저 덩치면···

헥헥헥.

딩고가 녀석들을 보며 침을 흘려댔다.

호랑이만 아니었어도 잡으러 갈 텐데.

그런 나의 고민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사거리의 사무실 옥상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호랑이에게 맞추기는 어려워 보였다.

녀석은 화살세례를 피해 달아났고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옥상에서 내려가는 게 보였다.

"경훈이도 있네."

호랑이 잡아서 자랑하겠다 이거지.

뭐 마음대로 하셔.

나는 양 잡아서 내 식구들 먹여야지.

숲에서 잡은 건 모두 내 것이지만 여기서야 그럴 필요까진 있나.

유현이가 내게 정보를 알려줬고 미경의 도움도 필요하다.

혹시 상처를 입으면 수연이 치료해 줄 거고 형은 같이 양을 제압할 것이다.

나는 종이비행기에 양을 사냥하자는 내용을 쓴 후 하늘에 날렸다.

유현이가 회수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게 보였다.

"딩고, 가자."

양몰이의 첫 타자는 딩고다.

녀석이 양들을 못 가게 가로막고 짖어줘야 한다.

과연 녀석은 1층에 내려가자마자 거리로 뛰쳐나가 양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컹컹! 컹컹!

왕왕 짖을 때와는 기세가 다르다.

세 마리의 양들은 움찔해서는 딩고를 노려보며 고개를 내렸다.

저건 굴복이 아니다.

튀어나가 머리로 받으려는 것이다.

딩고는 위기의 순간을 아주 잘 피해냈다.

양들은 눈앞의 시끄럽고 자그마한 생명체에 당황한 모양인지 뒤로 물러났다.

컹컹!

순간 건너편 2층에서 후미에 쳐진 양에게 화살 몇 발이 날아들었다.

미리 목표를 정해둔 것이 주효했다.

세 발은 빗나갔지만 한 발이 양의 옆구리에 꽂혔다.

형님 나이스!

양들은 깜짝 놀라 딩고 반대편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골목에서 양들이 지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장전된 석궁을 날렸다.

한 발은 빗나가고 한 발이 어깨에 꽂혔다.

그래도 양의 생명력은 놀라워서 속도가 줄지 않았다.

나는 좀비들 사이를 달리며 녀석을 추적했다.

지형감지와 생명체추적이 발동되었다.

덕분에 상처 입은 양을 무리 없이 쫓을 수 있었다.

으어어어―

골목에 있던 좀비 두 놈이 달려들었다.

나는 롱나이프를 뽑으며 한 놈의 목을 날려버렸다.

돌아볼 시간도 없이 달린다.

생명력 강한 동물이라 한들 화살을 두 대나 맞으면 도리가 없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점점 많아지는 게 보였다.

마침내 한 골목에 들어서니 양이 완전히 지쳐서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헉, 헉···"

나는 숨을 고르며 장전된 석궁을 꺼내 양에게 발사했다.

녀석은 엉덩이에 볼트를 맞곤 펄쩍 뛰어올랐으나 그것뿐이었다.

흔들흔들하다가 양이 바닥에 쓰러졌다.

피가 점점이 번져갔다.

생명반응을 감지한 좀비들이 주위에서 몰려들었다.

형준 형이 좀비 몇 마리를 몸으로 밀어버리고 뛰어왔다.

"성호야!"

"쉿. 형님, 이거 메고 갑시다."

"내가 멜 테니까 넌 따라오기만 해라. 미경이 온다."

"옙."

형이 피로 범벅된 양을 메고 앞장섰다.

특성이 육체강화라서 성체 양도 부담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좀비들이 골목을 꽉 막고 진입하려는 찰나, 미경이 블링크로 이동해왔다.

"미경씨 부탁합니다."

"맡겨주세요!"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풍경이 뒤로 확 멀어진다 싶더니 2층의 학원이었다.

수연과 유현이가 나를 반겼고 곧이어 형준 형과 양도 안에 들어왔다.

미경은 블링크를 여섯 번이나 써서 무척이나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아이고 머리야아."

"미경아 어지러우면 좀 앉아."

수연이 그녀를 앉혔고 다들 양을 구경했다.

"···성호 덕분에 사냥하는 것 자체는 성공했는데, 이제 어쩐다냐···"

나는 창가에서 딩고를 불렀다.

녀석이 학원으로 들어오고 내가 물었다.

"도축하는 법 아시는 분?"

모두 고개를 움츠렸다.

하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니 해본 적이 있을 리가.

나도 얼마 전까지는 닭도 못 잡아봤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여기서는 내가 다 해야겠군.

"물을 좀 많이 써야 될 건데, 괜찮겠습니까?"

다들 반색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면 그깟 물쯤이야 얼마든지 써도 된다는 반응이었다.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성호가 참 대단하긴 대단해, 그지? 양을 보고 그걸 사냥할 생각을 다 하냐."

되게 낯간지럽네.

내가 목을 벅벅 긁자 미경이 거들었다.

"관장님 못 보셨죠. 아저씨 막 좀비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무슨 첩보영화 보는 줄 알았어요."

"성호씨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아, 예, 없습니다."

빨리 도망가야겠군.

나는 형의 도움을 받아 양을 아래층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양을 보며 솔직히 털어놨다.

"손질 별로 자신 없습니다. 노린내가 많이 날 거고, 버리는 부위도 많을 겁니다."

"이런 세상에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냐? 물 떠다줄 테니까 같이 하자."

"옙."

그나마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좀 낫군.

형은 양의 목을 따는 내 손길을 끔찍해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와···피 냄새 장난이 아니네. 성호 넌 이거 어떻게 버티냐?"

숲에서 몇 번 해봤거든요.

작은 동물 두 번 해체한 게 경험의 전부지만 그래도 제법 도움은 되었다.

내가 양을 해체하는 동안 사람들이 물을 떠왔고 손질된 부위를 날랐다.

두어 시간이 지난 후 1층 화장실은 피와 지방, 점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유현이와 미경이 청소하는 동안 우리는 2층에서 식사 준비를 했다.

"날씨가 워낙 더워서 몇 시간도 못 버틸 겁니다. 이거 다 먹어야 돼요."

형과 수연은 질린 눈으로 트레이 가득 담긴 고기를 바라봤다.

"이거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못 먹으면 딩고가 다 먹을 겁니다. 남으면 뭐 염장이나 하죠."

내 몫은 숲에 가져가서 훈제하고.

잠시 후 고기 구울 준비가 끝났다.

고깃덩이의 손질은 엉성하고 준비된 것도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기름장과 쌈장, 그리고 건조된 채소를 물에 불려 무친 정도였다.

하지만 고기가 있는데 뭐가 문제인가.

종이비행기로 밖을 구경하던 유현이 놀란 눈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호랑이 쫓아가던 사람들 완전 실패했나본데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난리에요."

"양이나 쫓았으면 성공했을 텐데."

"근데 호랑이 고기 맛있어요?"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돌판에 자글자글 고기가 구워지기 시작했다.

좀비는 후각을 거의 상실했기에 이 냄새를 못 맡는다.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고기를 흡입했다.

"맛있어, 이거 진짜 맛있어."

"형 손질 못한다고 하더니 엄청난데요? 노린내는 좀 나지만 그게 더 구수하네."

"오랜만에 고기 먹어서 그래."

수연이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먹었는데도 아직 고기가 한참 남았다는 게 너무 행복하네요. 성호씨하고 다들 수고하셨어요."

형은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술이 땡기나 보다.

나는 먹다 남은 소주팩을 배낭에서 꺼냈다.

"딱 이거만 마시는 겁니다."

"그래, 그래."

"저도 한잔 주세요."

"저도요."

유현이만 빼고 다들 소주를 원했다.

이런 술꾼들을 봤나.

한 잔씩 돌리니 딱 술이 떨어졌다.

우리는 고기와 술을 즐겼다.

시간이 지나 여름이 깊어갔다.

마침내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을 때, 녹색 피부를 가진 추한 괴물들이 나타났다.

고블린이었다.

< 최후의 만찬 > 끝

< 고블린 - 1 >

풍뎅이들이 약속한 선물 10개를 가져왔다.

흑요석 비슷한 에메라스 2덩이.

발광석2, 점화석2, 흑탄3, 미스릴 원광1.

흑탄은 석탄 비슷한 것인데 불이 잘 붙고 오래가는 성질을 갖고 있다.

하나만 있으면 추운 겨울밤을 날 수 있다.

요컨대 땔감을 대신하는 용도다.

미스릴 원광은 미스릴이 포함된 광석이다.

제법 많이 포함된 모양인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나머지는 다 좋은데 미스릴 원광 이걸 어떻게 써야 하나···

녀석들은 내 발치에 물건들을 쪼르륵 늘어놓았다.

이거면 됐지? 하고 묻는 듯했다.

"어, 됐어. 충분해."

그나저나 이 녀석들 힘 엄청 세네.

점화석은 내가 들어도 꽤나 묵직한데 이걸 둘이서 들고 오다니.

지능이 있는 풍뎅이니까 힘도 센 거겠지.

나는 간단하게 납득하고 고구마 맛 젤리 2개를 주었다.

"이건 그냥 선물이니까 가져가."

이예이!

녀석들은 앞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곤 젤리를 가져갔다.

대장이 미스릴 원광을 짚곤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풍뎅이가 망치를 들고 원광을 땅땅 때리는 그림···

"니들이 이걸로 뭘 만들어 주겠다고?"

끄덕끄덕.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고.

나는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을 그려서 보여주었다.

등반용 갈고리다.

철사병 때문에 쓸 일이 있겠나 여겼는데.

미스릴은 철사병에 영향을 받지 않고 풍뎅이들은 미스릴을 가공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대장 풍뎅이는 애매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좀 모자라나?

나는 고블린에게서 루팅한 미스릴 나이프를 꺼냈다.

"이거까지 더하면?"

대장 풍뎅이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미스릴 나이프는 어차피 세라믹 나이프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없다.

포인트로 구입한 것도 아니고 루팅한 거니까 아깝지 않았다.

나는 즉석에서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좀 괴발개발 같지만 대충 이해는 가지?

대장 풍뎅이가 발톱을 펴 보였다.

갈고리 총 6개? 끄덕끄덕.

길이는 딱 이 정도? 끄덕끄덕.

"미스릴도 상당히 튼튼하지? 이런 것보단."

튼튼하단다.

하여튼 녀석들은 갈고리 제작을 시작했다.

추울 것 같아 동굴 안에 들어오라고 하자 잽싸게 들어와 화로 주위에 자리 잡았다.

"풍뎅이도 추위를 타?"

녀석들 중 하나가 몸을 비틀비틀했다.

몸이 잘 안 움직여진다는 거군.

하긴 이렇게 추우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풍뎅이들은 화로 주위에서 몸을 녹였다.

나는 고민했다.

얘들이면 같이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처음엔 지능이 높아서 무서웠지만.

무해하면서도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금속가공 부분에서 초월적이었다.

규모는 작아도 원광에서 광물을 추출하고 금속을 만드는 모든 과정을 알아서 해낸다.

이 정도면 거의 치트키나 다름없다.

물론 풍뎅이들도 한계는 있다.

날지는 못하고 고블린도 물리치지 못할 정도로 약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보완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다는 것.

나는 풍뎅이들 옆에 앉아 물었다.

"여기 들어와서 지낼 생각 있어?"

녀석들이 깜짝 놀랐다.

뭔가 설명이 더 필요한 듯하다.

"내가 고블린 둥지를 없앴긴 했는데 아직 이 숲에는 위험이 많지? 언제 또 고블린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 말이야. 여기 들어와서 지내면 니들은 안전해져. 그리고 내 입장에서도 괜찮지. 이런 걸 만들 수 있으니까."

미스릴 나이프를 들어보이자 녀석들은 한곳에 모여 뭔가 회의를 하는 듯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대장이 내 볼펜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젤리 그림···식량 제공이 가능하냐고 묻는 듯하다.

"젤리 말고 다른 건 못 먹어?"

나는 대장을 손에 얹고 식량 창고를 보여주었다.

녀석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집어냈다.

뭐야, 생각보다 다양하잖아?

고구마 맛 젤리만 훔쳐간 건 그게 제일 맛있어서 그랬나보다.

하여튼 풍뎅이들은 최종적으로 내 쉘터에 눌러앉기로 결정을 내렸다.

짐은 따로 없었고 샌드위치 패널로 집을 짜고 흙을 넣자 새로운 집이 되었다.

풍뎅이들은 흙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 마리씩 방을 만들어 지냈다.

귀여운 녀석들이군.

이로서 나와 딩고, 풍뎅이 네 마리가 쉘터를 공유하게 되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

.

.

고블린이 나타난 건 내가 쉘터에 텃밭을 완성하고 감자 모종을 심었을 때였다.

한파를 입지 않도록 어설픈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주고 밖에 나와 보니 고블린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녀석들은 좀비를 보곤 마비독침을 발사했지만 수가 많다는 걸 깨닫고 일시 후퇴했다.

거리에도, 빌딩에도, 주택에도 고블린들이 있었다.

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제부터 홉고블린 위주로 뭉쳐서 둥지를 만들겠지."

또한 둥지에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것이다.

보통 좀비는 생명체외엔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고블린들은 다르다.

자기 딴에 쓸모가 있어 보이면 약탈하고 훔쳐간다.

인간의 쉘터도 예외가 아니라서 서바이벌 라이프 초창기에는 항상 전쟁이었다.

"헬스장 쪽에는 미리 경고를 해놔서 괜찮겠지만···"

나는 정부에서 뿌린 공략본을 들여다봤다.

종이 한 장에 인쇄되어 있는 만큼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써도 이보다 더 잘 쓸 순 없겠다 싶을 정도로 잘 요약해 놨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대처할 순 있어."

지금부터는 초반에 등장하는 고블린 소굴 이벤트를 찾아야 한다.

찾는데 성공한다면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원래는 경험치도 많이 얻지만 15렙부터는 헬렙구간이라 큰 진전을 보기는 힘들다.

헬렙구간이란 이전보다 많은 경험치를 요구하는 구간을 의미한다.

14에서 15까지 10의 경험치를 요구한다면 15에서 16까지는 20을 요구하는 식.

한 유저가 제작진에게 버그 아니냐고 하자 의도된 사항이라 발표해 벙찐 적이 있었지.

"레벨보다는 보상이 중요해."

상점에서도 볼 수 없는 유니크한 아이템이 반드시 하나는 나온다.

나는 화로에 물을 얹고 커피를 탔다.

이걸 즐길 수 있는 날도 길어야 2년이다.

원두를 진공포장해서 보관하고는 있지만 2년 후에도 괜찮을지는 미지수였다.

진하게 탄 커피를 호로록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들고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딩고, 가자."

나는 딩고와 함께 차원문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밤이 깊어지면 키퍼와 본 크리퍼를 맞닥뜨리게 되니 빨리 고블린 소굴을 찾아야 한다.

"차원문아 어디 있냐···"

어? 여긴가?

너무 쉽게 찾아서 잠깐 당황했다.

차원문은 한 원룸건물의 주차장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내 차원문보다는 크기가 작다.

여기가 고블린 소굴로 이어진단 말이지.

"안에서 열면 어디 차원문이 열리는 거야?"

현실? 아니면 숲?

이거야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차원문 너머로 몽둥이를 들이민 후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들어갔다.

딩고가 나를 따라 들어왔다.

좁고 어두운 굴이 우리를 반겼다.

"···"

키키킥!

가까운 곳에서 고블린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최소 대여섯 마리는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차원문을 열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숲이었다.

못을 가져와 굴에 놓았지만 바스러지지 않았다.

숲과 같은 차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철사병은 없음이 확인되었다.

야시경은···이런, 안 보이네.

빛이 거의 없어서 내가 가진 민간용 야시경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럼 플래시를 켜야지.

굴이 워낙 좁고 구불구불해서 활의 장점은 살리기가 힘들었다.

뭣도 모르고 코너를 지나가다간 고블린과 뽀뽀를 할 판이다.

딩고가 있고 인지가 높아서 선공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만.

"방패가 필요해."

이런 곳에선 오히려 창과 방패가 도움이 된다.

뭐가 날아오면 방패 뒤로 숨으면 되니까.

마비독침은 두세 발이면 바닥나니 방패로 막고 돌격하면 OK.

공간이 좀 뚫렸다 싶으면 창 대신 석궁을 운용하면 되고.

양아치들에게서 루팅한 걸 이제 써보는군.

나는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슬롯에 놨다.

그물총도 이런 좁은 곳에선 전방을 커버하기에 아주 좋다.

홉고블린이 나타나도 뭐 어쩔 거야?

그냥 쏴버리고 창으로 쑤시면 끝난다.

"옆이나 뒤에서 오는 놈들은 딩고가 발견해줄 거야."

시계를 차니 인지가 14로 올랐다.

좋아.

야시경은 못 쓰니까 헬멧을 써야지.

플래시를 헬멧 옆에 테이프로 고정시키고.

이러면 내 위치를 들키게 되지만 어차피 소란이 일어날 것이므로 상관없다.

나는 슬롯에서 방패와 석궁을 꺼내 하나씩 들었다.

여기까지 끝내고 헬멧에 고정시킨 플래시를 켜니 앞이 아주 잘 보였다.

키륵!

고블린들이 빛을 눈치 채고 아우성을 치는 게 들렸다.

빨리 와라, 다 죽여줄 테니까.

나는 방패를 내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의 코너에 빛이 닿자마자 고블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녀석은 어두운 굴에 있다가 플래시의 강렬한 빛에 놀란 상태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석궁을 발사하고 창을 꺼냈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고블린의 옆구리에 볼트가 박혔다.

키에엑!

"하나."

부산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블린 두 마리가 코너에서 튀어나왔다.

한 마리가 내 창대에 복부가 꿰뚫려 그대로 절명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몽둥이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1번 슬롯."

나는 방패로 고블린을 밀어버리고 슬롯에서 롱나이프를 꺼내 녀석을 푹 찔렀다.

끼에에···

고블린은 힘없이 죽어갔다.

"셋."

그 후로 몇 차례 전투가 이어졌지만 나는 별 타격을 입지 않고 고블린들을 도살했다.

갈림길이 있으면 샅샅이 뒤지고 라커로 위치를 표시했다.

덕분에 나는 고블린 소굴에서 한 번도 뒤치기를 당하지 않았다.

이벤트 소굴이라 규모가 작아서 어렵지 않았다.

"던전이나 미궁 쯤 되면 함정이 워낙 많아서···"

그물을 던지는 놈, 위에서 덮치는 놈 등 전법도 각양각색이라 수월하게 전진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다.

십여 마리의 고블린을 족치면서 나아가다 보니 공간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홉고블린의 둥지다.

싸움이 일어났는데 녀석이 나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조용히 걷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주위에 뭔가 있다.

딩고가 자세를 낮추곤 으르렁거렸다.

벽에 뭔가가 숨어 있다.

이런 작은 소굴에선 고블린들도 지나다니기 힘들기 때문에 함정을 설치하진 않는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무너진 벽을 보수해 함정으로 쓰는 경우는 종종 존재한다.

유저가 지나가면, 뒤에서 벽과 함께 튀어나와 덮치는 것이다.

인지가 낮았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터였다.

"어디냐···"

나는 플래쉬를 벽에 비추다가 웃었다.

구멍에서 무언가의 눈이 보였다.

섬뜩한 모습이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선 두려울 게 전혀 없다.

나는 롱나이프로 벽을 쿡쿡 찔렀다.

"뭐해? 안 나오고."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홉고블린이 튀어나왔다.

크어억!

하지만 나는 이미 슬롯에서 그물총을 꺼낸 상태였다.

버튼을 누르자 압축질소 캡슐이 터지며 그물을 밀어냈다.

홉고블린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물에 휘감기고 말았다.

마구 발광하며 그물을 찢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롱나이프를 놓고 창을 꺼내 녀석을 힘 있게 찔렀다.

한 방, 두 방, 세 방.

사정없이 그물코를 찌르자 녀석은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마지막으로 목을 찌르자 홉고블린은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포인트를 32 획득했습니다」

레벨은?

"헬렙이 징글맞긴 하군."

나는 무덤덤하게 볼트와 무기 등을 회수해서 넣었다.

이젠 홉고블린과 레벨 차도 안 나는지라 스킬도 얻지 못한다.

더 강한 몬스터를 족쳐야 하는데 그러면 나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이지.

"아이러니해."

나는 둥지 안으로 들어갔다.

썩은 고기와 부스러진 식량, 나무로 만든 조잡한 무기 등이 나를 반겼다.

조금 기다리니 화살집 하나가 나타났다.

「아다만트 화살 : 관통력향상」

"오···이거 좋은데."

관통력향상 옵션이 붙으면 어지간한 방어구는 숭숭 뚫어버린다.

어지간한 화살은 튕겨내는 아울베어도 뚫어버릴 정도다.

수량은 10발로 조금 아쉬웠다.

"이거면 늑대인간도 맥을 못 추지."

일단 맞출 수 있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유저는 조준하다가 녀석에게 털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소굴을 훑고 차원문을 통해 나왔다.

역시, 차원문은 살아 있다.

"이거 꽤 오랫동안 유지되는 걸 텐데."

언제 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경 끄고 있다가 어느 날 가보면 없어져 있는 식이다.

어차피 클리어 했으니 별 쓸모는 없지만.

나는 아다만트 화살집을 슬롯에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흠···

이거 초반 이벤트라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텐데.

잠시만 기다려보자.

.

.

.

성호가 차원문에서 떠난 지 30분 후.

등산복을 입은 몇몇이 차원문을 발견했다.

이들은 경훈과 보라가 가입한 사무실의 멤버였다.

남자 셋과 여자 둘의 조합.

리더는 김철중으로 서바이벌 라이프를 꽤 오랫동안 즐긴 30대 유저였다.

"여기 보라고. 내 말이 맞잖아."

"진짜네. 이거 안에 들어가면 고블린 굴이 나오는 거예요?"

한 여자가 겁도 없이 들어가려 하자 리더 철중이 그녀를 잡아챘다.

"어허, 함부로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려."

"그럼 오빠가 먼저 들어가 봐요."

"야이···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자고로 이런 덴 말이야, 작대기를 먼저 넣어 보는 거야. 이렇게 말이지."

남자가 작대기를 차원문에 넣고 휘젓자 사람들이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매우 음충하게 보여서였다.

처음 들어가려 했던 오연화도 그걸 깨닫곤 리더의 등을 팡 때렸다.

"증말 더러워."

철중은 낄낄 웃으며 작대기를 빼내곤 안에 쑥 들어갔다.

경훈과 보라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마주쳤다.

사냥 중심으로 활동하려고 이 팀에 들어오긴 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팀의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았다.

리더인 철중은 연화라는 애인이 있음에도 보라를 탐냈고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경훈과 보라의 관계가 어떻다라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끈적한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칭 베테랑이라는 철중의 경험은 경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말만 하면 200시간을 앞세워서 말문을 틀어막는데, 연화와 다른 남자는 언제나 철중의 편을 들었다.

불협화음이 짙어졌지만 이젠 어디로 가지도 못한다.

모든 짐을 옮긴 뒤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헬스장 사람들처럼 이사를 허락해 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렇다고 짐을 포기하고 야반도주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해서 경훈과 보라는 오늘도 인내심을 발휘하며 팀과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 본 크리퍼 나온다고."

"밀지 말라고."

셋이 차원문에 들어갔고 경훈은 나직하게 말했다.

"이 차원문을 클리어하면 아이템이 나올 거야···"

"철중씨가 그걸 줄까?"

보라가 염려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그렇긴 한데···"

철중이 또 이상한 조건을 붙이는 억지를 부릴지 모른다.

그가 명백하게 경훈보다 강했기에 둘은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조금 더 알아보고 들어왔어야 할 것을···

형준의 신중한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여기 들어오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경훈이 막 들어가려 했지만 철중이 그를 밀치며 나왔다.

"씨발, 좆같네. 여기 누가 쓸고 갔어."

경훈은 화를 꾹 눌러 참았다.

"누가요?"

"낸들 아냐. 혹시 경훈이 너 전에 있던 헬스장 사람들 아니야?"

"그 사람들이 밤에 밖으로 나온다고요? 겁쟁이라 사냥도 안하던데."

"그럼 아닌가? 아 진짜, 누구야."

나머지 둘도 나와선 누구인지 찾아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철중이 주변으로 눈을 부라렸다.

"고블린 이벤트를 안다 이거지? 그럼 또 다른 차원문을 찾고 있을 거야···이 새끼 찾아서 조진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 되는데요."

"하나까진 괜찮아. 넌 그것도 모르냐?"

"경쟁자는 제거해야지."

경훈은 바로 반박 당하곤 입을 다물었다.

사람을 추적하는 것보단 고블린 소굴을 찾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흉흉했다.

보라가 그를 위로했다.

"찾다 보면 차원문도 나올 거잖아. 그때 철중 오빠 설득하면 돼. 여기 들어가자고."

"···알았어."

둘은 멀어져가는 셋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졌을 때, 맞은편 원룸의 필로티 기둥에 숨어 있던 성호가 몸을 일으켰다.

"별로 질이 좋은 놈들은 아니로군."

캠핑용품점에서 만난 사람들이 확실했다.

―저 사람 그냥 놔둘 거야?

―그럼 어쩌자고? 죽일까?

그 때는 싸우는 것보단 루팅하는 게 더 중요해서 놔뒀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들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약탈자로 변해 자신과 헬스장 사람들을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지."

마침 성호는 살인자가 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고블린 - 1 > 끝

< 고블린 - 2 >

고블린이 나타났다 해서 좀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덕분에 생존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조심조심 다니면 괜찮았던 거리가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접근하지만 않으면 그나마 안전했던 좀비에 비해, 고블린들은 마비독침을 쏴댔다.

한 대라도 맞으면 그 자리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한다.

동료가 없다면 바로 죽은 목숨이었다.

물론 동료가 있다손 치더라도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다.

"으악!"

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블린은 인간의 고통 따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쓰러져 있는 남자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쳐 코를 함몰시키고, 눈에 나무창을 내리꽂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자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비명과 숨이 섞인 소리만 내뱉다 서서히 죽어갔다.

그의 동료들은 이미 달아난 뒤였다.

"씨발, 좆같네."

철중과 경훈 일행은 골목에 숨어서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다.

빨리 고블린 소굴 털러 가자던 연화는 완전히 긴장해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고블린이 저렇게까지 잔인한 놈들인 줄은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경훈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만만해 보인다고 절대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저놈들 독침에 걸리면 약도 없어요."

"그래도 무한정은 아니지."

아무래도 철중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웃파이팅으로 치고 빠지면 돼. 화살보다 멀리 나가지는 않을 거 아냐?"

"그렇게 쏘다가 뒤통수 맞습니다. 저 새끼들 대가리 엄청 잘 굴려요. 뒤에서···"

철중이 파하, 웃었다.

"너 그거 누구한테 배웠냐?"

경훈은 차마 성호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는 유현을 통해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줬는데 공략본에 없는 내용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고블린의 성향이다.

약삭빠르고, 함정을 팔 줄 안다.

그러나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넘어가는 바보 같은 면도 있다.

겁이 상당히 많지만 자신들이 우세하면 잔인하게 돌변한다 등···

그 때는 왠지 모를 경쟁심에 반박만 했는데 고블린이 등장하고 보니 맞아떨어졌다.

방금 남자의 비극도 원래는 고블린 두 마리가 도망가다가 어떤 무리와 합류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순식간에 세를 불린 고블린들이 남자를 독침으로 쓰러트리고 화풀이를 한 것이다.

"그럼 어쩌자고? 이렇게 쫄보처럼 숨어만 있게?"

다른 남자가 이죽거리자 경훈은 입을 다물었다.

헬스장 사람들처럼 너무 신중한 것도 문제지만 이들처럼 나대는 것도 큰일이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어쨌거나 사무실 팀의 리더는 철중.

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알지? 위험하면 그만큼 결과가 따라온다고. 고블린들 사냥하면서 그놈하고 차원문도 찾는다."

무모하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는 것도 목숨이 보전된 상태에서의 얘기다.

목숨을 갖고 도박하는 놈은 바보다.

하지만 경훈과 보라는 그 바보를 따라야 하는 처지였다.

철중이 지시했다.

"전부 활 들어. 저놈들 한눈팔고 있을 때 조진다."

"어두워서 안 보여요···"

"대충 덩어리에 쏘면 돼."

모두가 철중의 지시에 따라 시위에 화살을 메겼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돌아본 연화가 다급히 속삭였다.

"오빠 저기 봐요."

"뭔데?"

"저기 홉고블린, 홉고블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본 남자 둘은 군침을 삼켰다.

정말로 절뚝이는 홉고블린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홉고블린을 잡으면 10포인트를 받고 아이템에다 스킬까지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지금까지 스킬이라곤 구경도 못 해봤던 철중의 눈에 불이 켜졌다.

홉고블린은 잠깐 동안 골목으로 사라졌고 그가 일어섰다.

"계획변경이다. 저 새끼 잡으러 가자."

경훈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밤이 깊어져서 정말 칠흑같이 어두운데 저 홉고블린은 왜 저렇게 잘 보였던 걸까?

부하 고블린도 없이 혼자 절뚝거리고 있는 이유는 또 뭐고?

하지만 수상하다는 이유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경멸 섞인 시선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

철중이 물었다.

"또 반대할거냐?"

"···갑시다."

"흐, 그래야지. 야, 쟤들 건드리지 말고 저기로 가자."

일행은 조심조심 홉고블린이 사라진 골목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발광석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좀비나 고블린을 불러 모으게 된다.

덕분에 일행은 앞을 더듬다시피 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경훈은 유현이 말한 성호를 떠올렸다.

―성호 형은 진짜 신기하다니깐요? 밤에도 막 주위가 다 보이는 것처럼 움직여요.

밤에 파밍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진 기억은 다들 몇 번씩 있었다.

그만큼 밤이 어둡고 거리엔 장애물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성호는 낮처럼 움직인다고 한다.

그게 지금 떠오른 것은 왜일까.

경훈은 잡념을 떨쳐버리며 홉고블린 추적에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블린이 한 고급주택의 정원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철중이 답답해하며 달려갔다.

"죽으면 안 되는데."

"근데 오빠, 고블린 왠지 빛나는 것 같지 않아요?"

"아 씨발 이거 죽었어."

철중은 짜증을 내며 홉고블린의 머리에 있던 걸레 같은 주머니를 확 벗겼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일행의 동작이 정지되었다.

밤중에 이런 빛이 퍼지면···!

"빨리 그거 덮어요!"

연화의 짧은 비명은 명백한 실수였다.

덕분에 주변 좀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은 기겁해선 도망갈 곳을 찾았다.

철중은 좀비들이 높은 담장으로는 못 올라온다는 것을 떠올렸다.

"담장, 담장 위로 올라가!"

확실히 그랬다.

녀석들은 밑에서 괴성을 지르며 아우성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행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지금 거리엔 좀비뿐만이 아니라 고블린까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담장 위로 올라간 사람들은 고블린이 쏘는 마비독침의 좋은 표적이라는 것.

선두에 선 남자가 갑자기 꼿꼿해지더니 담장 아래로 추락했다.

좀비들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흡!"

보라가 입을 틀어막았고 제일 늦게 담장에 올라간 경훈은 바로 뛰어내렸다.

"보라야, 내려와!"

"오빠!"

"거기 있으면 죽어! 독침 맞는다고!"

사람들은 제각기 담장에서 뛰어내려 좀비들의 추격을 피해 줄행랑을 쳤다.

네 명이 뿔뿔이 흩어졌다.

.

.

.

"···생각보다 더 잘 됐는데."

나는 차원문에 숨은 채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고블린 소굴에 있던 홉고블린 사체를 끌고 온 게 주효했다.

무거워서 질질 끌다시피 했는데 그게 저놈들에겐 절뚝거리는 걸로 보인 모양이다.

정작 뒤에 있던 나는 방검복과 헬멧까지 차고 있어서 안 보였을 것이다.

밤에 헬멧을 쓰면 나도 앞을 보기가 곤란하지만 지형감지 스킬이 있거든.

"그나저나 담장 위로 올라갈 생각을 했네."

고블린이 있는데도 올라갔다는 건···

자신들을 포위하는 좀비에게 놀라서 잠시 잊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나는 차원문에서 나와 철중의 뒤를 쫓았다.

공격성을 크게 드러낸 놈만 죽이면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녀석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용케 좀비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그래서 니놈 특성은 뭐냐.

뒤에서 보고 있으려니 비로소 철중의 특성이 드러났다.

달리면서 손을 쳐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좀비 둘이 빛에 휩싸여 움직이질 못했다.

구속 능력인가?

1:1에선 무적이 아닌가 싶었지만 유지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3,4초 남짓이고 중간에 벽 같은 장애물이 있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철중은 좀비를 묶어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됐어."

나머지는 볼 필요도 없다.

추가효과는 특성의 본질까지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다수 개체에게 적용되거나, 더 먼 거리에서 쓸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나는 녀석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러면서도 좀비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철중은 뒤의 나를 눈치 챘는지 악을 질러댔다.

"너지! 이 씹새꺄!"

"그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녀석은 화가 났는지 그 자리에 멈추곤 뒤로 돌았다.

나는 차원문을 앞에 열었다.

녀석이 손을 쳐냈음에도 나는 멀쩡했다.

역시. 구속을 발생시키는 힘은 차원문을 뚫지 못한다.

나는 여유롭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잘 안 되나?"

"이게, 이게!"

녀석은 내게 다가오며 손을 쳐냈다.

나는 일부러 동작을 멈추었다.

철중의 표정에 희열이 번졌다.

"개새끼 죽어봐라."

그는 나이프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가 차원문에 얼굴을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끄억!"

벽에 돌진한 기분은 어때?

좀비들이 허우적거리며 다가왔고 나는 차원문에 몸을 숨겼다.

"차원문 닫아."

동굴 안은 아늑했다.

딩고는 자고 있었고 대장 풍뎅이가 장작을 화로에 밀어 넣고 있었다.

언제든 내가 들어와도 몸을 녹일 수 있게 신경을 써주는 건가 보다.

"고맙긴 한데···"

불이나 안 냈으면 좋으련만.

나는 커피를 타서 마시며 잠시 기다렸다.

밖에선 매우 급박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데 쉘터는 이렇게 평화롭다니.

후루룩.

뱃속에 따뜻한 커피가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다.

"후우···"

적당히 쉬었으니 가자.

차원문을 여니 철중의 처참한 시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비들은 어디선가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찾아 이동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간 후 철중이 메고 있던 배낭을 차원문에 넣었다.

슬슬 위험한데.

키퍼와 본 크리퍼가 튀어나올 시간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셋을 추적하느냐 안전을 우선시하느냐···

나는 고민하다가 픽 웃었다.

"이걸 왜 고민하고 있어."

당연히 생존이 먼저다.

철중과 남자가 죽었으니 사무실 팀도 거의 끝장난 거나 다름없다.

남은 세 명은 대화내용으로 미뤄봤을 땐 공격성이 약했다.

특히 경훈과 보라는 이번 사태의 피해자나 다름없었다.

"싸가지 없는 그 주둥이 좀 조심해라."

둘이 좀비들과 싸우며 도망갔다.

모진 놈 옆에 갔다가 괜히 돌 맞아서 고생하는군.

돌을 던진 건 나지만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다간 내가 돌을 맞았을 테니까.

나는 차원문을 적당한 위치에 고정시키기 위해 골목을 벗어났다.

사거리에 다다르니 헬스장 멤버가 바리케이드를 쌓아 놓고 공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은 당연히 고블린이다.

나는 아다만트 화살을 하나 뽑아 시위에 메기고 쏘았다.

가구와 집기로 쌓아올린 바리게이트를 넘던 고블린의 몸이 꿰뚫렸다.

놈은 그대로 가구에 고정되었다.

엄청난 관통력이군.

2층에서 화살을 쏴대던 미경이 나를 보고 환호했다.

"아저씨!"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보면 부끄러운데요.

.

.

.

토끼공듀 황석현은 서울에 도착했다.

사실은 헤매다가 발을 디딘 곳이 서울이었지만 어쨌거나 왔다는 게 중요했다.

그는 다 무너진 아파트와 방음벽을 배경삼아 정처 없이 걸었다.

북한에는 정말 먹을 것이 없었다.

건물이 죄다 부실공사였는지 멀쩡한 게 없어 허허벌판을 걸어 다녀야 했다.

가끔 보이는 좀비들도 못 먹어서 그런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배고파···"

어딜 들어가서 식량을 찾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다간 또 길을 잃을 것이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북한으로 또 가버리면 곤란했다.

그 때 다른 도로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말쑥한 셔츠와 정장바지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석현을 보더니 정중히 인사했다.

"토끼공주님 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석현은 어떻게 난줄 알았지? 따위의 의문은 품지 않았다.

팬티만 입고 떠돌아다니는 남자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경매장에 하도 팬티를 올려 대서 사람들도 이젠 자신의 것이라고 알아차린 지 오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석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대통령 양반의 곁에서 자주 얼쩡거렸던 사람이라는 게 기억났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대통령님···아니 지금은 대통령이라는 직위 자체가 없어졌군요. 하여튼 장원택님을 모시는 이범석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 티비에 나왔던 사람이 접니다."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한 사람인가 보다.

"올. 좋은 일 하셨네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다름이 아니라 토공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나를? 힘들 텐데요."

석현의 눈이 가늘어지자 범석은 황급히 무마했다.

"강제로 데려가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럴 능력도 없고요. 단지 모시고 싶은 겁니다. 혹시 생존자1님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아."

생존자1이 같이 있었나.

그러면 정부에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그라는 말이 된다.

범석은 멀리에서 달려오는 좀비 몇 마리를 돌무더기를 들어 올려 순식간에 해치웠다.

상당한 수준의 염동력이다.

석현은 길바닥에 앉아 그도 앉길 권했다.

"일단 얘기는 들어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좋습니다."

범석은 대략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통령과 자신, 그리고 몇 명의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것.

생존자1을 비롯한 서바이벌 라이프의 유저 몇 명도 포섭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까지.

"저희가 원하는 것은 좀비를 포함한 몬스터의 위협에서 안전한 쉘터입니다. 사람 몇 명이 드나들 수 있는 그런 작은 것이 아닙니다. 보다 대규모죠."

석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섯 명 넘으면 레이드 오는데요."

그는 슬쩍 미소 지었다.

"언제까지 소규모로 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해도 충분히 퇴치할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토끼공주님."

"토끼공듀."

"아, 발음이 안 나와서."

범석은 듀를 몇 번 발음하더니 혀가 꼬였는지 입술을 나불나불 털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어떻습니까. 토공님이 합류하신다면 저희의 전력은 정말 크게 상승할 겁니다. 저희 측엔 발표하지 않은 지하쉘터가 있습니다. 거기엔 엄청난 물자가 비축되어 있죠."

"와, 솔깃하네요."

"물론 토공님에게 흥미가 있는 여성분도 꽤 있죠.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진 않습니다만···좋은 기회라는 건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그가 섹무새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매력적인 유혹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석현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안 사요."

그는 일어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범석이 당황했다.

"아니 이런 조건을 마다하시다니요."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게 누굽니까?"

"친구."

현실의 친구란 얘기는 아니겠고, 역시 서바이벌 라이프의···

범석은 석현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혹시 김밥조아님이나 오리궁뎅이님을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아 좀. 난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요."

"그쪽으로 가시면 의정부입니다만···"

석현은 민망함에 걸음을 멈췄다.

범석이 다시 제안했다.

"어떻습니까. 잠시 저희 쉘터에 오셔서 생존자1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건. 그 후에 저희가 길잡이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진짜요?"

"절대 거짓말은 안 합니다. 또 토공님을 강제로 붙들려는 수작도 아닙니다. 단지 두 분이 만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후엔 내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죠?"

"길잡이까지 붙여드리겠습니다."

이렇게까지 권하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석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범석은 앞장서서 그를 안내했다.

다 좋은데 옷부터 좀 입혀야겠군.

반쯤 찢어진 망토까진 괜찮은데 구멍 난 팬티는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거기다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벅벅 긁고 있었다!

아이구야.

범석은 눈을 감고 말았다.

< 고블린 - 2 > 끝

< 고블린 - 3 >

이건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고블린들은 바리케이드를 넘으려 하고, 인간들은 그걸 저지하려 한다.

형준과 미경은 1층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고블린을 저지했고.

수연과 유현은 2층에서 화살을 쏴댔다.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고블린 특유의 단말마와 사람들의 기합성이 교차되었다.

치열한 공성전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외부의 개입이었다.

어느새 달려온 덩치 큰 남자가 활로 지원을 시작한 것이다.

키에엑!

끼이익!

고블린들의 관심은 바리케이드 안쪽이 아니라 외부에서 설치는 성호에게 쏠렸다.

저놈부터 죽이자!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몇몇 고블린들이 나섰다.

주머니에서 대롱과 마비독침을 꺼내는 순간 성호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가 뒤로 후퇴한 것이다.

끼익?

고블린들은 거리를 좁히려 애썼으나 바리케이드에서 멀어진다는 걸 깨닫고 돌아왔다.

다시 화살이 날아와 한 놈을 절명시켰다.

이게 반복되니 고블린들이 화가 났다.

두 마리가 나무창을 들고 뛰어갔지만 성호는 근처의 건물 2층으로 올라간 상태였다.

유현은 잠시 활쏘기를 멈추고 수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누나누나, 저거 보이세요?"

"응? 어떤 거?"

"고블린들 계단 올라간 지 2초 만에 내려왔어요. 죽어서."

"진짜? 와, 장난 아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고블린 두 마리를 2초 만에 죽일 수 있을까?

계단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성호는 고블린들을 처치한 후 아무렇지도 않게 건물을 나와 또 활을 튕기기 시작했다.

고블린이 튀어나오면 물러나고.

바리케이드를 방패막 삼고 있으면 전진해서 귀신같이 하나씩 쏴 죽였다.

독침 사정거리 10m를 눈으로 재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이 안 되지만, 실제로 그는 그렇게 하고 있었다.

쏴대는 화살의 위력도 정말 굉장해서 한 방에 고블린이 바리케이드에 고정되었다.

수연은 잠시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긴, 살인자 이벤트를 혼자 깨다시피 한 사람이니.'

헬스장 멤버가 되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달았다.

경훈이 멤버로 있을 무렵 살인자 이벤트를 엄청나게 강조한 적이 있단다.

심장소리가 들리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즉시 그 구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유현의 말에 의하면 평소 허세를 부리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했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겠지···

'성호씨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

몰랐다고, 처음 겪는 거라고 보기엔 알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마치 모든 상황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었지.

마지막 부하들의 빠른 증원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듯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를 바로 보낸 게 아쉬웠다.

조금 더 고마움을 표시했어야 했는데.

'과감하게 해볼걸 그랬어.'

분명 그녀와 성호는 서슴없이 애정을 표시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포칼립스에선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친밀함도 있는 것 아닌가.

그녀는 남자를 모르지 않았고, 자신의 외모가 매력적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 한번 시도해볼까?

성호란 남자도 여자를 아예 모르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다만 미경이 마음에 걸렸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은근히 티를 내곤 했다.

형준과 유현이는 잘 모르는 것 같았고.

스물 두 살짜리와 경쟁이라도 해야 하나?

수연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내가 뭘 생각하는 거야, 이 상황에."

"네? 무슨 상황요?"

유현이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빨리 화살이나 쏘자."

하여튼 성호가 와준 덕분에 고블린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가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항전하던 형준과 미경도 숨이 확 트이는 걸 느꼈다.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투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거창한 소란에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으어어어―

고블린처럼 바리케이드를 넘지는 못하지만 대신 수가 많았다.

집기와 무거운 가구로 구성된 바리케이드가 조금씩 밀려났다.

2층에서 좀비들을 향해 화살을 쏘며 동시에 종이비행기를 조종하던 유현이 외쳤다.

"누나 저기 사람이 뛰어오고 있어요!"

"우리 쪽으로?"

"네!"

사람이 온다는 건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그가 좀비들을 끌고 올지 누가 아는가?

수연이 어떡하지, 라고 생각한 순간 성호가 움직였다.

그는 어둠 속으로 화살을 날렸고 유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이 뒤의 좀비들 쏘고 있어요! 우와! 어떻게 저렇게 쏘지?"

한편 1층에서 좀비들을 나무창으로 찌르고 있던 형준과 미경은 혼란스러웠다.

이 발걸음 소리는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으려 하면 어떻게 하지?

그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 도와주십시오!"

형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도와달라는 사람을 외면하는 건 그의 성향이 아니었다.

그는 미경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좀 도와줘야 될 것 같다."

"제가 가볼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곧바로 블링크로 사라졌다.

그리곤 매우 지친 기색의 남자를 바리케이드 안으로 데려왔다.

"아이고."

머리가 어지러운지 바닥에 주저앉은 미경.

2층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 지원사격을 해댔고 좀비의 숫자는 차츰 줄어가고 있었다.

그 때 성호의 고함소리가 크게 들렸다.

"본 크리퍼! 튀어요!"

본 크리퍼라고?

사람들이 경악해선 숨을 곳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해골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딱딱거리며 바리케이드에 부딪쳐 그대로 폭발했다.

좀비 수 마리가 폭압에 휘말려 날아갔고 바리케이드 한쪽이 와르르 무너졌다.

정말이지 엄청난 위력이었다.

다행히도 1층에 있던 사람들은 성호의 고함소리를 듣곤 건물로 피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본 크리퍼의 폭발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 둘을 몸으로 막으면서 가장 늦게 들어간 형준의 등에 뼈가 두어 개 박혔다.

"큭!"

그는 답답한 신음을 내며 버텼고 미경이 발을 동동 굴렀다.

"포션, 포셔언!"

미경이 구한 남자가 형준을 살폈다.

"뼈를 뽑아야겠는데, 참을 수 있겠습니까?"

묵직한 목소리였다.

형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 몸 튼튼하니까 단숨에 부탁합니다."

"이 꽉 무십쇼."

"윽."

뼈가 뽑혔고 형준은 축 늘어졌다.

그나마 특성이 육체강화라 버틸 수 있었던 모양이다.

유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수연이 부랴부랴 1층으로 내려와 형준을 치료했다.

사람들이 잠시 공격을 멈춘 사이, 좀비들은 바리케이드를 완전히 무너뜨릴 기세였다.

이제 고블린은 사라지고 좀비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건 위험하군.

성호는 오리칼콘 롱나이프를 뽑아 들고 접근전에 들어갔다.

좀비들이 어으으하며 달려들자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갔다.

유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공격예지란 거 정말 대단하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공격을 예지하고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았다.

좀비가 움직이면 그에 반응하는 느낌?

뭐, 종이비행기를 통해 보는 것은 아주 정확하다곤 할 수 없었다.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는데 오차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유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화살을 쐈다.

모두의 분투에 힘입어 바리케이드 주위의 좀비들이 하나씩 쓰러져가고 있었다.

성호는 주변을 살피곤 바리케이드를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안으로 들어가요, 들어가."

사람들은 순식간에 건물로 숨었다.

몇 안 되는 좀비들은 바리케이드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기물 반응도 사라졌는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은가?

전장을 방불케 했던 건물이 조용해졌다.

.

.

.

나는 부축했던 형을 바닥에 모로 뉘였다.

"형님, 괜찮습니까?"

"간신히 죽진 않을 것 같다."

그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뼈가 하필 등에 박혀서 눕지도 못하게 생겼다.

그나저나 여기엔 나까지 여섯 명이로군.

좀비 레이드를 피하려면 빨리 사라지는 게 좋다.

내가 일어서자 미경이 손을 저었다.

"저하고 유현이는 다른 곳에 가 있을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나는 왜?"

유현이 항의했지만 미경은 그를 끌고 블링크로 이동해버렸다.

뭔가 진지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판단하곤 도망간 것이다.

남자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민폐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더군요. 아직은 살고 싶나봅니다."

흐음···

남자는 30대 정도로 보이는 군인이었다.

화강암 패턴의 군복에 중위 견장이 달려 있었다.

이 얼굴에 중위라, 안 어울리는데.

하긴 짬 찬 중위일 수도 있으니까.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현우 대위라고 합니다."

"대위요? 중위···처럼 보이시는데요."

수연이 묻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위 진입니다."

진급 확정됐는데 그 사단이 난거군.

수연은 영문을 몰라 하다가 내 설명을 듣곤 알아들었다.

여기선 내가 대화를 주도해야겠군.

형은 정신이 없을 거고, 수연은 군에 대해서 잘 모를 테니까.

"어디 소속이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묻자 그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5X사단 보병대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 근무지는 고리 원전이었죠."

"기장 발전소 말씀하시는 거죠?"

"예. 저는 디데이까지 고리 원전에 있었던 근무자들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사태 이후에는 주변에서 고리 원전을 지켜봤고요. 그리고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무슨 큰일이요?"

수연이 물었고 그는 목이 마른지 격한 기침을 해댔다.

내가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주자 순식간에 한통을 다 비웠다.

"푸하···감사합니다.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하자면···제가 고리 원전의 근무자분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원전이 긴급냉각절차에 들어가긴 했는데, 완전하진 않다고 말입니다."

"그건 저희도 들었습니다."

티비에서 대통령이 직접 발언한 거니까.

그 이야기가 지금 나왔다는 건···

현우 대위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지막에 근무자 중 한 분이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원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으면 무조건 대피하라고."

"설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제가 방금 원전 주변에 머물면서 지켜봤다고 말씀드렸지요? 불과 며칠 전에···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설마 노심용융인가요?

수연이 급히 물었지만 그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저는 군인이라서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심상치 않은 문제가 일어났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죠. 그래서 급히 대피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해안로를 통해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다 여러분들을 만났죠."

이제부터가 본론이군.

겨우 정신을 차린 형준 형이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우 대위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군사용 지도인지 대단히 정교했다.

고리 원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부산 일대까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즉시 대피해야 합니다."

"···김해공항까지잖습니까."

"맞습니다."

"이 안의 사람들 전부요?"

"맞습니다. 빨리 대피해야 합니다. 늦장부리다간 피폭될 수도 있습니다."

방사능 피폭.

몬스터에게 당해 죽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형과 수연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티비에서나 듣던 방사능 피폭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현우 대위의 말대로 빨리 대피해야 하는가?

혹시 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그때 유현이의 종이비행기가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듣고 싶다는 거지.

나는 종이비행기를 옆에 두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기장 발전소에 문제가 생겼고, 그게 심각하다 이거지요? 최소 서부산으로 도망가야 안전하다는 거고."

"예, 그게 제 판단입니다. 여러분의 판단이 다르다면 어쩔 수 없지만."

수연이 급한 어조로 물었다.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여기까지 오셨나요?"

그가 씁쓸하게 말했다.

"예···사람들이 여러분들처럼 잘 대해주지는 않더군요.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이구나.

군인이라 해도 지금은 정부도 군도 없는데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다니.

현우 대위는 피곤에 절은 눈매를 훔쳤다.

"여러분들이 못 믿으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갈 겁니다."

형준 형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이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믿고 싶었지만 하나가 걸렸다.

나중에 갈 때 확인해야겠군.

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여기 우리가 비축한 물자는 다 포기하고 가야되는 겁니까?"

"그래야겠죠. 전부 짊어지고 갈 수는 없으니까···"

"아···"

형과 수연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종이비행기를 통해 듣고 있을 유현이와 미경도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엔 상당한 양의 물자가 비축되어 있다.

헬스장 멤버가 최소 1년 이상 버틸 수 있는 양이다.

배낭 하나로 옮기는 건 불가능했다.

미경이 있으므로 다소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물.

물은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옮기는데 한계가 있다.

나야 몽땅 차원문에 집어넣으면 그만이지만 이 사람들에는 재앙이었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사람들이 침묵하곤 내 눈치만 봤다.

나는 종이비행기에 묻고 싶은 걸 써서 밖으로 날렸다.

잠시 후 종이비행기가 되돌아와 펼쳐보니 8레벨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경이 2레벨만 더 올리면 새로운 추가효과를 얻는다는 뜻이다.

블링크에 관련된 것일 테니 이 상황에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연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며칠 전에 먹은 그게 최후의 만찬이었네."

양고기 맛있었지···

여기선 방법이 하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렇게 합시다."

< 고블린 - 3 > 끝

< 부산은 위험해 - 1 >

서바이벌 라이프의 시작은 좀비가 창궐하고 세상이 망한 뒤다.

유저가 튜토리얼에 진입해봐야 높은 건물이 무너져있고 좀비가 우글거리며 주위가 컴컴하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 물론 5분만 지나면 게임이 지랄같이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긴 하지.

하여튼 게임이 무척 불친절해서 그 흔한 설명도 도움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고 싶으면 직접 헤딩하며 알아내라는 식이다.

그런고로 원전이니 공장이니 하는 위험시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관련 이벤트도 존재하지 않았고 유저들도 살아남기에 바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설정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신경 끄고 있다간 내가 피폭되게 생겼다.

일단 여기서는 김현우 대위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가정을 깔고 가는 게 좋다.

나중에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나는 지도에 손가락을 짚었다.

"원전이 위험하다는 전제 하에, 여기로 도망갑시다."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김해와 가까운 강서구의 한적한 원룸촌이었다.

형준 형이 눈썹을 찡그렸다.

"너무 멀지 않냐? 10킬로는 훌쩍 넘어 보이는데."

"김해공항 서쪽에 자리 잡으려면 여기가 제일 좋습니다. 주위에 미곡센터가 많고요, 전부 공단이라서 좀비가 적을 겁니다. 고블린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요."

"···물은 낙동강 퍼먹고?"

"정제하면 그럭저럭 마실 만 할 겁니다."

"그 똥물을 먹어야 되나."

사실 강물을 마실 필요는 없다.

가까이에 용정CC가 있거든.

벙커의 주인인 권씨가 격렬히 저항하겠지만 깨부수면 된다.

벙커 3개의 비축물자는 헬스장 멤버가 비축한 것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이들이 출발한 뒤에 남아서 혹시 모를 도둑이 있나 감시할 생각이었다.

원전이 위험하다고 하니 그리 오래는 못 하겠지만···

현우 대위가 내 말에 공감하듯 김해 방향을 짚었다.

"이 위에 김해대대라고, 군부대가 있습니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고 말은 해놨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거기도 1종 창고가 있을 텐데."

"부하가 있어요?"

수연이 묻자 그는 손을 저었다.

"이젠 부하가 아니고 동료죠. 하나는 일병이고 하나는 병장 말호봉입니다. 전역 직전에 좀비 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세상에."

"아이고야."

형준 형과 나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운도 참 지지리도 없지.

어쩌면 부하가 있다는 것 자체도 거짓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청산유수였다.

이쯤해서 경매장에서 뭔가 소식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님들 고리 원전에서 수증기 피어오르고 있음ㅋㅋㅋ 뭐 이런 거?

조용히 있던 수연이 뜬금없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거 잘못하면 한반도 절반이 오염될 수도 있겠는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중국요. 중국 해안가에 원자력 발전소 깔렸거든요. 걔네들이 우리처럼 원전 셧다운을 했으리라곤 생각 못하겠네요. 일본은 바람 방향이 그러니까 뭐 그렇다 쳐도."

"아···그게 그렇게 되나."

형준 형이 머리를 긁적였다.

중국은 좀 그렇긴 하지.

우리도 제대로 노심을 냉각시키지 못해 문제가 생긴 판국인데 하물며 중국이라면.

바람의 방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피해가 없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미리 알려줬더라면···

아니지.

유력한 증거 없이 원전을 셧다운 시키는 미친 정부는 없다.

한국 정부도 고블린과 좀비를 확인하고서야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내가 사실을 밝혔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노심이란 게 최소 1,2년은 잔열을 방출한다고 하던데.

"···하여튼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현우 대위님의 말이 사실일 경우, 우리는 최소 김해공항 서쪽으로 도망가야 합니다. 당장 지금이라도 짐을 챙기는 게 좋겠죠."

"여기에 있는 물자는 전부···놔두고 말이죠?"

수연이 착잡한 얼굴로 물자를 둘러봤다.

어떻게 모은 건데 포기한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차원문에 잘 모셔놓고 거기 가서 파밍할 곳을 찾았다며 나눠줄 테니까요.

다른 생존자들의 것을 쓸 테니까 들킬 위험은 없다.

문제라면 현우 대위의 말이 과연 진실일까 하는 점.

그건 멤버들이 떠난 뒤에 보면 되겠지.

형준 형이 내게 물었다.

"성호야, 유현이 비행기로 받은 숫자는 뭐냐?"

"미경씨 레벨입니다. 2레벨만 더 올리면 특성에 추가효과가 붙겠죠?"

"그렇겠지?"

"블링크에 관련된 것일 테니 도움이 되겠죠. 장거리 블링크면 참 좋겠는데."

"미경이가 중간에 물건을 옮겨주는 역할이네요?"

"그렇죠. 택배기사라고 해야 되나."

"지금 2레벨을 어디서 올리냐···"

"제가 조금 전에 고블린 굴을 클리어하고 오는 길입니다. 하나 더 찾았으니까 미경씨 데리고 가서 레벨 업 시키죠."

"성호 니가 레벨 업을 시킨다고?"

"고블린 소굴요?"

다들 모르는 얼굴이었다.

나는 짧게 설명했다.

당연히 경훈과 사무실 놈들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안에 고블린하고 홉고블린이 있더군요. 일직선이고 미리 준비하고 있어서 깨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성호 너 간이 장난이 아니다···"

"보통은 조심하는데 이왕 발견했으니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좁은 동굴이라서 마비독침을 막기는 어렵지 않고요."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네. 유현아, 듣고 있지? 미경이한테 좀 물어봐라."

잠시 후 종이비행기가 뜨더니 위아래로 움직였다.

승낙의 뜻.

현우 대위는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경도 승낙했으니 여기선 정신없이 몰아쳐야겠군.

나는 빠르게 말했다.

"할 일이 많습니다. 형님하고 수연씨는 사람들이 메고 갈 배낭 준비해주시고요, 유현이는 김현우 대위님하고 주변 생존자들에게 이 소식 알리는 역할을 맡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현우 대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으로부터 종이비행기가 연락책 역할을 한다는 걸 들은 모양.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돌아다니는 것보단 종이비행기로 연락하는 게 편할 것이다.

같이 다니도록 해서 딴 마음 먹지 못하게끔 했는데도 현우 대위는 얌전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다.

나는 비행기를 들었다.

"미경씨하고 저는 고블린 소굴에 들어가서 사냥하도록 하죠. 모자라면 좀비들 좀 때려잡고."

수연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호씨도 집에 짐이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해요?"

"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사람들 다 모이면 바로 출발하시고요, 저는 따라가죠. 집합지점은 여기."

다들 집합지점을 눈여겨 봐두었다.

형준 형은 뭔가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돌파구가 생각나질 않네. 일단 성호 말대로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다시 의논하자. 미경이가 추가효과 얻으면 움직이는 거지?"

"예. 밤에 좀비들 없는 곳으로 움직이고, 낮에는 미경씨가 옮겨주는 걸로 하죠."

"애만 고생시키네."

종이비행기가 마치 괜찮아요, 하는 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사실 미경이 추가효과를 꼭 얻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물자가 좀 있다는 안정감을 주고 싶었다.

추가효과가 좋은 게 나와야 할 텐데.

나는 둘을 불렀다.

그리고 미리 봐둔 고블린 소굴 사냥을 통해 미경을 2레벨 올리는데 성공했다.

겁을 먹고 못하겠다고 할까봐 걱정했지만 그녀는 용감하게 나섰다.

마침 홉고블린 없는 소굴이 열린 행운도 있었고.

"우와, 저 상점 열렸어요! 이런 거였구나."

상점창을 보며 기뻐하는 그녀.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아요?"

미경은 정신을 차리곤 눈알을 굴렸다.

"장거리 블링크네요."

실험하니 거의 1km가량 이동이 가능했다.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장거리였다.

이거면 됐어.

나는 미경의 도움을 받아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딩고를 찾았다.

"미경씨 서두르셔야 될 텐데···"

"네에. 먼저 갈게요. 딩고 꼭 데려오셔야 돼요."

풀이 죽은 그녀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차원문을 열자 딩고가 튀어나와 꼬리를 흔들어댔다.

짐이나 넣자.

.

.

.

네 명이 친구라고 해도 친한 친구 별로 안 친한 친구가 있다.

토끼공듀에겐 생존자1이 그런 존재였다.

다 같이 모이면 그럭저럭 개소리도 해가면서 재밌게 놀지만.

둘만 있으면 귀신같이 어색해지는 것이다.

하도 쉘터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토공에게 있어 오리궁뎅이는 같이 뻘짓하며 놀 수 있는 친구이고.

김밥조아는 브레이크를 잡아주고 때로는 같이 폭주하는 친구.

생존자1은···데면데면한 친구였다.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요."

"아···그렇습니까?"

범석은 토공이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생존자1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래도 친한 척 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별로 안 친한 친구도 어깨 쳐주면서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회생활에선 그런 게 필요한 법인데···

범석은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픽 웃었다.

그 사회가 지금 없는데 뭐 어때.

토공은 부활 특성을 가진 각성자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다른 사람이 맞춰줘야지.

그래서 장원택이고 생존자1이고 그를 만나지 못해 안달하는 게 아닌가?

'그나저나 이렇게 따라오는 게 신기하군.'

분명 세뇌 특성이 있다는 건 토공도 알고 있을 것이다.

손만 대도 상대방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에 각성자들 사이에선 믿을만한 사이가 아니면 접촉하는 건 금기시되어 있었다.

자신이 있는 건가, 모르는 건가.

범석은 옆에서 걸으며 조용히 물었다.

"혹시 세뇌 특성을 가진 각성자가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경고도 들었고 만나기도 했죠."

"만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은 없네요."

"설마 죽였다는···"

토공이 멈춰선 싱긋 웃었다.

누런 이가 드러나자 범석은 모른 체하곤 그를 지정된 위치로 안내했다.

누군가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석이 귀띔했다.

"블링크 능력자입니다. 석현씨와 저를 쉘터로 데려다 줄 겁니다."

쉘터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사실 걸어서 가기엔 너무 멀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 가겠습니다."

토공은 순식간에 사방이 콘크리트인 삭막한 공간에 와 있었다.

범석이 블링크로 이동해 와선 그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낡은 책상과 의자 몇 개, 그리고 지도와 두 사람이 석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대통령이고 한 명은···

쾌활해 보이는 남자가 일어섰다.

"토공님이시죠? 반가워요. 생존자1 검인입니다."

이름이 검인이라, 특이하군.

석현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우리 별로 안 친했었죠?"

그는 빙그레 웃었다.

"또 그러신다. 넷이서 재미있게 놀았잖아요."

"넷이서만요."

"아 참, 이러려고 모신 게 아닌데."

석현은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왜 생존자1과는 친하지 못했을까?

그건 그의 성격이 꾸며낸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다른 사람은 플레이 성향이 꽤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생존자1은 상황에 따라 성격이 확확 바뀌었다.

오리궁뎅이나 김밥조아는 그걸 맞춰준다고 여겼겠지만 석현은 위화감을 느꼈다.

뭐랄까, 사람이 아니라 가면과 대화하는 듯했다.

둘이 어색한 분위기로 들어가자 장원택이 중재에 나섰다.

"하하, 오랜만에 만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군요. 혹시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석현입니다. 특성은 무한부활이고요."

"부활···정말 대단한 능력입니다.

장원택은 혀를 내둘렀다.

특성은 서바이벌 라이프의 플레이타임과 어느 정도 연동되는 면이 있었다.

고인물일수록 더 좋은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지만, 대개의 경우 통용되었다.

그래서 유명한 고인물 4인방은 제각기 엄청난 특성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석현씨는 부활이시고, 여기 계신 우리 검인씨는 쉘터 관련 능력이시고, 나머지 두 분도 굉장한 특성을 갖고 계실 텐데···어떻습니까. 한번 모이는 게."

장원택의 제안에 석현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저보고 사람들 모아오라는 건가요?"

"하하,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희가 사람을 붙여드리죠. 편하게 여행하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뭔가요?"

"살아남기 위함입니다. 석현씨가 더 잘 아시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가혹할 겁니다. 좀비와 고블린까지야 그럭저럭 적응한다고 해도 늑대인간부터는 확실히 문제가 되죠."

석현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보면 좆밥이에요."

"···예, 뭐 석현씨에겐 그렇다는 이야기겠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도 석현씨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죠."

"그래서 사람을 모아서 두 분이 왕 노릇을 하려는 건가요?"

무례한 질문이었지만 장원택은 허허 웃어넘겼다.

"이런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해봐야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살만큼 산 노인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대한민국의 명맥을 잇는 것입니다."

"흠."

석현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눈앞의 사람은 디데이 당일까지 대통령직에 충실했다.

함부로 남을 이용하고 기만하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인이라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왠지 빛이 바래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 석현의 심기를 건드렸다.

뭔가 마음에 안 들어.

"그만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검인이 물었다.

"남쪽으로 가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제가 가는 방향을 몰라요."

"아하···부산이나 울산은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거기 위험하다는 소문이 있거든요."

"어떻게 위험한데요?"

"들어오시면 가르쳐드리죠."

"···"

석현은 입을 닫곤 일어섰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불쾌감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오리궁뎅이와 욕배틀을 하거나 김밥조아와 힐링을 해야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리 나가야겠군.

장원택이 나직이 말했다.

"이거 아쉽군요. 하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사람을 한 명 붙여드리죠. 적당한 곳에서 헤어지면 됩니다. 참, 검인씨가 말씀하셨듯이 부산이나 울산은 안 가시는 게 좋습니다."

"그럼 삼만."

범석이 들어와 석현을 밖으로 안내했다.

작은 공간에 비로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안 믿는 모양이네요."

"···사이가 그렇게 좋진 않았나 봅니다?"

"왜 저를 과하게 경계하는지 모르겠네요. 오리님이나 김밥조아님과는 잘 지냈는데."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겝니다."

장원택은 일어서서 사무실로 향했다.

요즘 그를 골치 아프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긴급냉각에 들어갔던 각 원전의 노심이 지금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특히 고리 원전에선 몇몇 사람들이 증기를 목격했다고 한다.

조만간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직원들이 경매장의 정보와 각 지역에서 올라온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정보가 워낙 중구난방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인지는 높은 사람이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원택은 요약된 메모를 집어 들었다.

―고리 원전이 증기폭발 시퀀스에 들어가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함. 복수의 증언 확인됨.

―남해안 일대에 해일 흔적이 전혀 없었음. 은잠비 운석군의 규모로 생각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임.

―근해와 해안의 바람이 이상하게 분다고 함. 확인요망.

―경기, 호서, 호남 지역에 이상 징후 포착되지 않음. 우려했던 방사능 오염은 없는 것으로 보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중국 원전이 그렇게나 많은데 깔끔하게 셧다운에 성공했다곤 믿기 어려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노심은 엄청난 열을 발산하고 있을 텐데.

"후우···"

원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먼 땅의 원전을 걱정해봐야 소용없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부산 일대의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범석에게 말했다.

"경매장에 정보 올리게."

"사람들이 우리 존재를 눈치 채게 됩니다만···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사람아, 그게 우리 일 아닌가."

딴은 그렇다.

서울 쉘터는 다수의 생존자들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범석은 사람을 가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존경하는 대통령 앞에서야 그런 얘기는 금물이지만.

그는 고개를 숙이곤 경매장을 불러냈다.

.

.

.

나는 학원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생존자들이 동네를 떠났고 길거리는 좀비와 고블린으로 가득했다.

슬슬 루팅을 시작할 때가 됐는데.

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도둑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군."

현우 대위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며 원전이 진짜 위험하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렇다면 더 기다릴 필요는 없지.

나는 헬스장 멤버들이 비축한 물자를 주섬주섬 차원문에 넣었다.

그러면서도 경매장 반응을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응? 이건 또 뭐야."

똑같은 경매품이 와르르 올라왔다.

가격이 터무니없는 걸로 봐서 사지 말라는 것 같았다.

코멘트란을 보니 정보가 쓰여 있었다.

―정부에서 알려드립니다. 부산, 울산 일대의 생존자들께선 즉시 대피하십시오. 고리 원전이 증기폭발 시퀀스에 들어가 있습니다. 피해예측범위는 김해국제공항과 울산공항까지입니다.

사실상 부산과 울산 전역이나 다름없다.

몇몇 사람들이 개소리 말라며 비웃었다.

―이거 다 쫓아내고 타임쉘터 열려는 수작이네.

―진짜면 어쩔건데요? 증기폭발 일어나면 체르노빌처럼 되는 거 아닌가?

―그럼 우린 돌연변이 되겠네.

―내 좆도 커짐?

―2배로 커져서 3센티.

―ㅋㅋㅋ엌ㅋㅋㅋ

정신없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자기 일 아니라고 생각하니 웃을 수 있는 거지.

뭐 나도 이들을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아포칼립스에선 각자도생이 기본이니까.

나는 물자를 집어던지다시피 했다.

디데이 때도 이랬는데 지금도 이러고 있다니.

차원문을 가진 자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나는 생존자들의 아지트를 두루 돌아다니며 짐을 챙기고 딩고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아침부터 좀비들이 우리를 반겼다.

"별로 안 반가우니까 꺼져."

우리는 좀비 무리를 피하며 달렸다.

< 부산은 위험해 - 1 > 끝

< 부산은 위험해 - 2 >

참 희한한 일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생존자들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30분 동안 도심을 주파하면서 본 생존자만 벌써 20명을 넘는다.

곳곳에 좀비와 고블린의 위협이 도사린다.

하지만 그들은 아포칼립스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은 듯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한 명이 시선을 끄는 방법은 기본.

좀비와 고블린이 못 올라가는 지형지물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특성을 사용해 사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적당히 짬밥 먹었다 이거지.

나는 좀비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열심히 뛰었다.

건너편 도로에선 한 팀으로 보이는 세 명이 뛰고 있었다.

부산의 엿 같은 도로사정은 우리의 거리를 차츰 가깝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쓰러지면 좀비의 추격은 일시적으로 멈출 것이다.

그들도 그걸 생각했는지 나를 흘깃 쳐다봤다.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는 초원을 달리는 가젤이고 좀비는 치타다.

조금이라도 느리고 약한 놈이 치타에게 먹힌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느린 쪽은 아니었다.

여름동안 살이 하도 빠져서 방검복이 헐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체력은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훨씬 높다.

속도를 높이자 옆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뒤로 쳐지는 게 보였다.

괜히 여기서 저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할 필요는 없지.

나는 딩고와 함께 좀비들을 이끌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가까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다음 잠시 땀을 식혔다.

크워억!

마침내 옥상으로 올라온 좀비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예전에 비해선 동작이 훨씬 민첩해졌다.

이제 구울로 진화하면 이게 느림보로 느껴질 정도로 빨라진다.

그 때가 되기 전 부지런히 성장하고 스킬을 먹어놔야 한다.

"딩고, 건너가."

녀석이 뛴 후 나를 향해 왕왕 짖었다.

나는 좀비들을 따돌리며 돌다가 건너편 건물로 훌쩍 뛰었다.

몸이 확실히 가벼웠다.

좀비들은 난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하나둘씩 밑으로 떨어졌다.

퍼퍽 하며 머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건 또 내가 죽인 걸로 판정이 안 된단 말이지."

포인트를 벌기 위해선 행동의 결과와 명확한 의지가 결합되어야 한다.

고블린 소굴에 함께 들어간 미경을 예로 들어보면.

그녀는 포인트를 벌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고 내가 반쯤 죽인 고블린을 끝장냈다.

그러므로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옥상에서 밑을 보니 내 옆에서 달리던 사람들이 골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골목에 고블린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두의 남자가 달리던 자세 그대로 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뒤의 둘은 기겁하며 아무 집이나 들어갔지만 거기가 종막이었다.

좀비들이 들이닥쳤고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운이 없었군."

잠깐 판단을 실수한 것만으로도 목숨이 날아간다.

특성이나마 좋았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꽉 막고 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들은 대체 누구에게서 소식을 들었을까.

15렙이 경매장에서 정보를 얻어 퍼트린 건가, 아니면 유현이가?

미경이 블링크를 해대며 방사능이라고 외치면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도로로 내려와 달리면서 옆을 흘깃 바라봤다.

저 사람들의 1차 종착역은 낙동강 너머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김해, 창원 등일 테고 어쩌면 눌러앉을 수도 있다.

"지금 도시로 들어가는 건 위험해."

어디건 미리 자리를 잡은 생존자들이 있다.

그들은 굴러오는 돌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생존자들이 왔지만 그건 헬스장 사람들이 순해서 그런 거고.

내가 해체시키다시피 한 사무실 팀은 그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결국 경쟁자니까."

산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경우엔 여우라고 봐야겠지만.

열심히 뛰다 보니 마침내 강변에 도착했다.

몇몇 사람들이 무너진 다리를 보고 허망해 하는 게 보였다.

헬스장 팀은 미경이 있으니까 차근차근 블링크로 이동하면 될 테지만.

그런 수단도 없으면 헤엄쳐 건널 수밖에 없다.

"물살은 그렇다 치고 강폭이 장난이 아니네."

수영을 잘 해도 지쳐서 익사하기 쉽다.

"위로 올라갑시다! 여긴 너무 멀어요!"

"계류장에 보트 있을 겁니다!"

어지간한 보트는 다 물에 빠졌을 텐데 FRP보트가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다들 홀린 듯이 우르르 따라갔다.

너무 뭉쳐 있다고 생각이 안 듭니까?

한 명이 좀 떨어지자고 외치자 견제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와중에 유기물을 감지한 좀비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이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떼죽음을 당하게 생겼다.

나는 강변의 갈대밭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고무보트를 꺼내 띄우고 노를 저었다.

딩고가 막 멀어지려는 보트에 올라탔다.

"저 사람 혼자서 보트 탄다!"

"좀 태워주세요!"

혼자는 아니고 딩고도 있는데요.

뒤늦게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소리쳤다.

돌아가면 저 사람들이 죽는다.

보트를 빼앗으려 할 테고, 그럼 싸움이 벌어지니까.

나는 저들이 욕을 하건 말건 열심히 노를 저었다.

물살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보트 추진력은 더 약해 계속 밑으로 떠내려갔다.

마침내 육지에 다다랐다.

"아무도 없고."

아파트단지가 죄다 무너져서 이 부근은 허허벌판이었다.

유기물을 찾아 서성거리던 좀비들이 우리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푹 쉬었지? 뛰어!"

내가 노를 젓는 동안 딩고는 푹 쉬어서 기운이 넘쳤다.

우리는 마침내 위험지대를 벗어났다.

.

.

.

약속장소인 원룸촌은 조용했다.

나는 인근 건물에 올라가 플라스틱 망원경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논밭이네.

잠시 지내기는 괜찮지만 파밍하려면 김해로 올라가든가 창원으로 가든가 해야 한다.

원체 인구가 적은 곳이라 좀비가 많지 않은 점만은 다행이었다.

"그 대신 고블린들이 많구만."

창고에서 쌀포대를 끌어내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창이 다 깨진 건물 1층을 둥지삼아 모닥불을 피워놓은 놈들도 있었다.

좀비가 없으니 자기들 세상이라 이거지.

나는 녀석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주변을 정찰했다.

"편의점은 다 털렸고···"

얼마 없는 동네 슈퍼도 텅텅 비어 있었다.

이거 헬스장 사람들이 실망하겠는데?

"일단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서."

동네에서 루팅한 물자를 쏟아놔야 한다.

나는 적당한 원룸 건물에 들어가 꼭대기 주인세대에 차원문을 열었다.

집어던졌던 물자를 차곡차곡 쌓고 보니 종이비행기가 날아 들어왔다.

헬스장 팀은 이미 와있었구나.

나는 종이비행기를 붙들고 말했다.

"유현아 별 일 없지?"

끄덕끄덕.

"형님하고 미경씨 잠깐 보내줄래? 여기 좋은 게 있거든."

잠시 후 형준 형과 미경이 블링크로 이동해 왔다.

시무룩해 있던 그들은 내가 쌓아놓은 물자를 보곤 반색했다.

"이야! 이게 웬 떡이냐."

"아저씨가 이거 발견하신 거죠?"

"혹시나 해서 주인세대 올라왔더니 이게 있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헬스장 팀도 여기 온지 얼마 안 됐을 것이므로 둘러볼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형이 물자를 살피다가 말했다.

"우리가 가져온 게 얼마 안 되거든. 이제 어쩌나 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이걸로 네 명이서 버티겠어."

네 명?

대위까지 다섯 명 아니었나.

물어보니 김해대대에 동료들 찾으러 갔다고 한다.

잘하면 1종 창고를 획득할지도 모른다고.

"그 창고에 식료품이 가득 있을지도 모른대요."

미경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게 우리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김대위는 몰라도 병사들이 그걸 나누려 할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배낭에 적당히 물자를 챙겼다.

그걸 쳐다보고 있던 형이 넌지시 권했다.

"성호 너도 이참에 우리 파티에 들어오는 게 안 낫겠냐?"

"형님 보세요. 제가 혼자 돌아다니니까 이런 거 찾아내죠."

"아, 그런가?"

"혹시 압니까. 누구하고 같이 다니면 운이 뚝 떨어질지."

"그러면 좀 곤란하지.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아저씨 정말 감사해요. 근데···당분간은 여기 계실 거죠?"

미경이 내 앞에 와선 눈을 빛냈다.

엎드려 있는 딩고하고 놀고 싶나보다.

"예 뭐. 딩고하고 노세요. 나중에 데려갈 테니까."

"우리 딩고오~"

그녀가 딩고를 껴안았다.

정작 녀석은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이군.

나는 옥상에 올라가 골프장을 살폈다.

형이 와선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쪽에 사람들 있다고 들었는데, 별로 질이 안 좋은."

"수연씨가 아마 알 겁니다."

"들었다. 에덴빌도 저기 반대쪽에 있다며? 한번 들러서 짐을 옮겨야 되는데."

수연이 헬스장 멤버와 합류하긴 했지만 모든 물자를 옮긴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물자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형은 원룸촌에 스며드는 몇 명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미경이가 진짜 고생했다. 유현이하고 막 돌아다니면서 사람들한테 알리더라. 난 적당히 하고 가자고 했는데."

"좋은 일 했네요."

"분명 좋은 일이지, 일인데···휴···사실 중간에 위험했거든. 정신 나간 놈들이 있어서 미경이한테 활을 쏘더란다."

"그런 놈들은 죽도록 놔둬야 되는데."

"일일이 가려낼 수가 없잖냐. 그래서 알아서 하라고 했지."

도움을 받은 사람 중에는 경쟁자와 약탈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방관하고 무시하는 쪽을 택했지만 헬스장 사람들, 특히 미경은 달랐다.

"미경씨가 정이 많네요."

"사람들한테 실망만 안 하면 좋겠는데···나중에 물자 부족하면 가지러 와라. 같이 밥이나 먹자."

"옙."

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려갔다.

망원경을 꺼내 골프장을 살피니 몇 명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카트엔 짐이 가득했다.

"무슨 짐을 저렇게 많이 옮기는 거야."

기어코 타임쉘터를 연 거 아냐?

위험지대 안이라서 가보기도 좀 그랬다.

뭐, 상관없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볼 테니까.

권씨와 부하들은 내게 상납하기 위해 물자를 쌓아두는 것이다.

탈탈 털어줄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나는 적당한 투룸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이 되자 여기저기 창문에 발광석 특유의 불빛이 보였다.

급하게 피난하느라 암막커튼도 뭣도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고블린들이 아주 좋아하겠군."

헬스장 멤버들은 내게 이야기를 들었기에 작정하고 창문을 다 막은 상태였다.

차원문에 들어가니 대장 풍뎅이가 완성된 갈고리와 쇳가루로 코팅된 장갑을 내밀었다.

"오, 고마워."

갈고리는 이동할 때 쓰면 되고, 쇠장갑은 에메라스 가공할 때 쓰면 좋겠네.

창날로 만들어서 경매장에 올리면 아주 잘 팔릴 것이다.

나는 희희낙락하며 장갑을 손에 꼈다.

.

.

.

고블린의 등장으로 생존자들이 힘겨운 여름을 나고 있을 때.

오리궁뎅이 최다정은 부하들에게 보호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부하란 다름 아닌 좀비다.

그것도 보통 좀비가 아니라 상당한 진화를 이룬 구울에 가까운 존재였다.

녀석들은 주변 좀비와 고블린을 학살하여 막대한 포인트를 그녀에게 바쳤다.

식량 조달은 기본이고 활도 쏠 줄 알았다.

어설프게 덤비는 생존자들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죽이면 주인이 살인자가 되기 때문에 적당히 두들겨 패고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당한 사람이 하도 많아 다정은 좀비년, 개년 등으로 불리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1년 뒤면 다 죽을 놈들인데 뭐 어때."

최근 그녀는 혼잣말이 늘었다.

좀비들은 충실하게 명령을 따랐지만 말동무까지는 해주지 못했다.

수성구의 생존자들은 그녀를 경원시했고, 자연히 혼자가 되었다.

경매장에서 사람들의 개소리를 구경하는 것도 지쳤다.

토공을 사칭하는 놈들이 워낙 많았다.

특유의 나사 빠진 화법은 보면 바로 알지만 최근에는 경매장을 안 하는 모양이었다.

"하아···심심해."

김밥조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토공의 말에 의하면 특성이 조금 특이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훈제 생선을 선물로 받았단다.

다정은 김밥조아의 특성이 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창조 계열인가?

"나한테는 얼음을 5포에 팔아놓고 딴청을 부렸다 이거지···"

포인트가 아쉬운 게 아니라 모른 척 했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래놓고 나중에 놀라지 말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짜."

그녀는 김밥조아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고 있었다.

부산의 분식집이다.

하지만 부산이 시골도 아니고 좀비들을 풀어 찾으려 해도 한 세월이다.

고민하던 그녀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부산, 울산이 위험지대로 지정되었다는 것.

"방사능이 퍼지면 다 망하는데?"

경매장을 살피니 그것 때문에 난리였다.

꼴좋다고 비웃다가 너 어디에 사냐고 현피를 뜨고···완전 무법지대로군.

하여튼 다정에겐 좋은 정보였다.

부산에서 달아나려면 두 곳밖에 없지 않은가?

"창원, 아니면 김해."

양산도 있지만 위험지대에서 꽤 가깝다.

그럼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데···

다정은 지도를 훑다가 손가락으로 쳤다.

"생각하면 뭐해, 움직여야지. 얘들아, 외출 준비해."

좀비들이 움직여 옷을 벗겨냈다.

외출복으로는 이브닝 파티에나 어울릴 것 같은 붉은 드레스가 선택되었다.

구두는 하이힐.

그녀가 땅을 디딜 일은 없으므로 불편해도 상관없다.

다정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자 덩치가 큰 좀비 넷이 의자를 들어올렸다.

꽃가마는 아닐지라도 이 정도면 승차감은 훌륭한 편.

"출바알."

그녀가 명령하자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무려 30이나 되어 고블린들도 감히 덤빌 수가 없었다.

좀비들은 왠지 자신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고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다정의 좀비들은 보통 좀비가 아니었다.

그아아악!

퀘에액!

좀비 수십 마리가 다정의 좀비들에게 학살당했다.

그녀는 단지 책을 보고 있을 뿐인데 실시간으로 포인트가 쌓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응?"

친위대 좀비가 팔로 화살을 막았다.

다정은 미간을 찌푸리곤 화살을 살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이걸 쐈다 이거지.

어디쯤일까···저기네.

다정은 싱긋 웃음을 짓고는 발 받침대를 밟고 일어섰다.

"이제 소년시대가 등장할 시간! 슈가성훈!"

그녀의 손짓에 따라 늘씬한 몸을 가진 좀비가 튀어나왔다.

"최강지오!"

이번에는 근육질 좀비가 앞으로 나섰다.

"샤인예성! 승리찬종! 정열제이!"

총 다섯 좀비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아이돌을 연상케 하는 포즈를 취했다.

빌딩 3층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생존자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완전 미친년이네."

"좀비박이가 그렇지 뭐."

"더 쏘고 빨리 도망가자."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다섯 좀비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빌딩을 향해 뛰어왔기 때문이다.

일행은 심장이 튀어나올 듯 놀라 자빠졌다.

빌딩 아래에 도착한 좀비 둘이 다른 좀비를 밀어 올렸다.

세 마리 좀비는 엄청난 점프력과 악력으로 순식간에 3층에 도달했다.

"으아아악!"

생존자들은 달아나려 했으나 좀비가 훨씬 더 빨랐다.

불쌍한 두 명이 3층에서 떨어져 좀비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다정은 반쯤 정신이 나간 남자 둘의 사타구니를 하이힐로 꾹 눌렀다.

"죄를."

"흐아악!"

"지었으니."

"끄억!"

"벌을, 받아야지."

그녀의 발재간에 두 남자는 극심한 고통을 겪곤 기절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다정은 놀라운 힘으로 한 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하이힐을 벗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장난해? 응? 이거 화살 어쩔 거야 이거. 눈알에 확 꽂아버릴까?"

"사, 살려 주세요···"

"니들 나를 죽이려 했잖아? 그럼 대가를 받아야지, 안 그래?"

"죄송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쓰러져 있던 남자가 외치자 다정은 하이힐에 힘을 더했다.

"끄아악!"

"다시는 뭐? 웅얼거리는 거 싫으니 똑바로 말해."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악!"

"···봐준다."

다정은 멱살을 쥐고 있던 남자를 쓰러진 남자 위에 던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 좀비들이 허리춤을 풀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눈이 커졌다.

"서, 설마···"

다정이 팔짱을 끼고 선언했다.

"한번만 더 해봐. 좋아하는 거 실컷 하게 해줄 테니까. 물론 니들이 당하는 쪽이야. 알아들어?"

둘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생애에 이렇게 간절하게 무언가를 바란 적은 없었을 것이다.

"빨리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옛! 으윽!"

남자 둘은 사타구니를 붙잡고 주춤거리며 기어갔다.

다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한심한 놈들뿐이네."

김밥조아는 좀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출바알."

여왕을 태운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부산은 위험해 -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