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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온통 붉은색과 금빛의 화려한 장식품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객실 안.

"큽··· 크허억— 쿨럭!"

쿠당탕—!

의자에 앉아있던 한 삼십 대의 남성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크흡··· 젠장···!"

"율령자(律令者)님!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이상 상황에 숨어있던 호위가 나타나 주변을 경계했으나, 애초에 외부의 공격이 아니었으니 쓸데없는 짓일 뿐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졌다고? 내가? 정신세계에서의 싸움에서?'

정신세계에서 이뤄진 하회탈과의 싸움.

익숙한 전장이었고, 익숙한 전투였다.

생소한 상대라는 점만 빼면.

"우웨엑—!"

각혈한 피에서 내장 조각이 섞여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왼쪽 눈에서도 피와 함께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콰앙!

"율령자님!"

"서둘러! 빨리 치료를 준비해라!"

객실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부하들과 치료 능력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큭, 그래 봐야 소용없겠지.'

이것은 육신에 입은 피해가 아니었으니까.

영체가 손상된 영향으로 인한 반동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그는 순순히 부하들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역류했으나, 치료 이능 덕분인지 더 이상 악화하지는 않았다.

[크카카캇—! 잡 았 다—!]

눈을 감자 정신세계에서의 마지막 장면이 뇌리를 맴돌았다.

심연을 뭉쳐놓은 듯한 검은 형체가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에게 손을 뻗는 그 순간.

"크윽···."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고유스킬인 「심상투영」이 아니었다면 겨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그걸 사용하고도 전투에 패배한 순간, 신뢰도는 바닥을 쳤지만.

'왜 졌지? 단순히 정신력의 차이는 아니다. 스킬의 차이? 내가 가진 정신계 스킬이 부족할 리가.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이···.'

처음에는 어느 정도 대등한 싸움이 이어졌다.

자신의 정신에 날을 세워 상대를 베어내고, 서로의 공격은 방벽을 세워 막아내는 일련의 과정.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상대의 대응이 바뀌었다.

이쪽의 공격은 안개를 베는 듯 상대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고, 저쪽의 공격은 세상의 모든 광기와 악의를 휘두르는 것처럼 치명적이었다.

철옹성이라고 자부했던 자신의 단단한 정신 방벽이 박살 날만큼.

그때 상대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공포, 절망, 비탄, 고통, 분노, 죽음 등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집결체.

인간이 아니라 괴물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대화할 때는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평소에 그런 광기를 숨길 수 있었지? 아니, 애초에···.'

인간이 그런 악의를 품는 게 가능한가?

하회탈은 정말 인간인가?

'그 모습은 차라리 고위 언데드 같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세계로 전송된 각성자는 언데드가 된 순간 사망 판정을 받아, 카르마 상점을 통해 지구로 귀환할 수 없었다.

설령 자의식이 있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일 적의 망념이 밀집하고 변질된 존재일 뿐이었으니까.

이계의 언데드라면 지구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지구에서 그 정도 수준의 언데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걸 다 떠나서, 영체 상태로 처음 마주쳤을 땐 분명 인간이었다. 품고 있던 흑마력의 양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건 틀림없어.'

물론 전투가 벌어지고 나서는 급격하게 변질되긴 했지만.

그나마도 인간의 요소가 조금은 남아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인과 비슷했달까.

그 광기와 수준 차이가 훨씬 심하긴 했지만 말이다.

'···내면에 악마라도 봉인하고 있었나?'

그러다 위기가 닥치자 봉인을 해제한 것이라면···.

'지금으로선 그 가설이 가장 신빙성이 높군. 그렇다면 놈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그 정도 존재를 재봉인하기 위해서는 큰 대가가 필요할 테니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쪽 눈을 떴다.

"율령자님! 괜찮으십니까?!"

처음 그의 이상을 알아챈 호위가 다급히 물었다.

다른 부하들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치료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여전히 몸 내부는 걸레짝이고 왼쪽 눈은 영구 손실을 입었으며, 두 다리에선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영혼의 일부가 뜯겨 나가고 마력 회로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지금 상태는 그야말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 서둘러야 했다.

"서울 지부에 특급 지령. 즉시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정보를 폐기한 후 잠적하라. 혈맹에서는 알파만 회수, 그 외에는 사소한 연결까지 전부 차단하고 꼬리를 자르도록."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숨을 고르고, 마저 말을 이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지부에 일급 지령. 현재 머물고 있는 거점을 폐쇄하고 모든 흔적을 지우도록. 새로운 거점은 자의적으로 판단 후 추후 보고. 별도의 지시사항이 있을 때까지 활동을 중단··· 쿨럭!"

말을 많이 한 탓인지, 그의 입에서 다시 피가 뿜어졌다.

"율령자님!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치료하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그리고 회주에게 전해라. 한국에 괴물이 있다고. ···나는 최소 몇 년은 정양해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끝으로, 그는 억지로 버티던 정신줄을 놓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의 명령을 받은 호위가 다급히 몸을 날리고, 남은 이들은 응급처치를 마친 그를 더욱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한국의 일을 총괄하던 율령자가 쓰러지면서, 번천회의 작전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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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천회 (3)

정신세계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한스는 다시 번천회 간부의 뇌를 뒤져 정보를 뽑아냈다.

전투의 여파로 정신세계는 초토화되었지만, 물리적인 뇌는 그리 손상되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아 상당한 결손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흠, 그래도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어.'

정신세계에서 벌어진 번천회 수뇌부와의 싸움.

처음에는 「마인드 허브」만으로도 쉽게 이길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그쪽도 관련된 고유스킬이 있었는지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긴 그러니 다른 이들의 정신세계에 금제를 심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을 터.

놈의 정신력은 굉장한 수준이었지만, 아바타들의 리소스를 집중한 한스도 그에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어떤 고유스킬을 가졌는지, 놈의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명경지수」가 흔들리고 「마인드 허브」에 가해지는 정보량이 폭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스는 '불사왕의 파편'으로부터 전해지는 지속적인 정신 오염에 대항하기 위해 「마인드 허브」를 상시 가동 중인 상태.

그 상황에 적의 공격이 계속 누적되며, 차단되는 정보가 역류해 위험해질 상황까지 처한 것이다.

'그래서 그냥 놔 버렸지.'

전쟁 도중에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반란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적습.

굳이 그사이에 껴서 고통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적이 침공해 오는 진격로를 활짝 열어 반란군 쪽으로 인도하고, 대신 반대편에 병력을 집중해 본토 방면을 철저히 차단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군은 관성적으로 반란군에게 달려들었고···.

결과는 보기 좋게 반란군의 승리였다.

교단조차 '어떤 존재도 이겨낼 수 없는 정신 오염'이라고 칭했을 정도니까.

악의의 집결체인 파편에게 놈의 공격이 통할 리도 없었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전장이 된 정신세계는 황폐화되어 너덜너덜해졌지만, 어차피 죽을 양반이었으니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 애초에 전쟁이 벌어진 그 땅조차 적군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이번 일은 남의 정신세계인 데다가 영체 상태였기에 가능한 꼼수기도 하지.'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겠는가.

나는 느긋하게 싸움을 구경하다가···.

녹색 영체가 광기에 차서 달려드는 검둥이에게 갈가리 찢기고 간신히 도망친 후에, 상대를 잃은 파편에게 여유롭게 다시 목줄을 걸었을 뿐이니까.

'그래도 놈을 놓친 건 좀 아쉬운데.'

영체가 그 정도로 손상된 이상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테지만, 확실하게 끝장내지는 못한 점이 좀 아쉬웠다.

거기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정보 외에는 딱히 이득도 없었고, 오히려 간부의 뇌에서 얻을 수 있는 기억에 손상만 발생했으니.

하지만 그런 감상을 내뱉기엔 조금 이른 면이 있었다.

"개체가 타인의 업을 갈취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흑마법」이 특수스킬「마도의 길」로 진화합니다."

'어? 갑자기?'

물론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 한계에 다다른 듯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로 생각했는데···.

하지만 곧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오호라, 정신세계에 흩뿌려진 영체의 잔해를 흡수했구나. 이건 예상치 못한 소득인데?]

흑마력으로 간부의 기억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그 정신세계에 흩뿌려진 녹색 영체의 파편이 딸려 들어왔다.

그에 딸린 온갖 지식과 깨달음도 함께.

그리고 업을 갈취했다는 말은 이쪽이 성장한 만큼 상대의 수준이 깎여나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혹시 다시 써먹을 수단이 있나 싶었는데···.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니군.'

마침 상대가 영체 상태에서 손상을 입었으며, 그 잔해가 흩뿌려진 정신세계는 황폐화되어 기능을 잃은 무생물과 같았다는 점.

그리고 존재 자체가 결핍인 언데드가 흑마법을 통해 강제로 정신세계와 연결된 상태였다는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 또한 정신 오염이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언제나처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다른 조건은 그렇다 쳐도, 영체로 타인의 정신에 침입할 수 있는 놈이 제물로 필요한데···. 그런 능력자가 흔하진 않겠지.'

이번에 자신에게 당한 놈은 다음에 마주치게 되면 아마 곧장 꼬리를 말고 줄행랑을 칠 터.

이번이 특수한 경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벽을 넘어설 수 있었으니 지금은 자축해도 되겠지.

「마도의 길」 덕분에 이제 흑마법뿐 아니라 다른 분야로도 발을 넓힐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처리할 일들이 있지만.'

후우웅—

한순간에 흑마력이 일어, 어둠에 휩싸인 한스가 공간을 뛰어넘었다.

목표는 이번에 알게 된 장소.

번천회의 서울 지부였다.

***

하인즈가 별장에 남아 잔당들을 관리하는 동안 한스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필 간부에게서 뽑아낸 좌표에 손상이 있어 곧바로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 인근을 수색해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마도의 길」로 인한 마법의 성장이 큰 도움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

하지만 놈들의 대응은 그 이상으로 빨랐다.

'기억을 읽자마자 곧장 이쪽으로 향하고, 주변을 수색하면서 지체한 시간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는데···.'

찾아갔을 때는 놈들이 이미 거점을 정리하며 도망갈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크윽··· 어떻게 벌써!"

"아, 안 돼!"

다행히 너무 늦진 않아, 자료를 소각하느라 정신이 없는 놈들을 사로잡고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벌써 지령이 내려왔나···.]

이미 상부에서 철수 명령이 내려왔으며, 간부들은 곧바로 몸을 숨겼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지만.

지부의 말단들에게 자료 소각을 떠넘기고 잠적.

각자 개인적으로 행적을 감췄기에 남은 놈들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없었다.

'그래도 간부 하나는 잡아서 다행이군. 어느 정도 정보도 건질 수 있었고.'

"끕, 끄으윽···."

한스는 머리를 잡힌 채 버둥거리는 장년인을 내려다봤다.

번천회 서울 지부의 기술 연구소장.

다른 간부들과는 다르게 그간의 연구 자료를 하나라도 더 챙기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 도망칠 때를 놓쳐 한스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덕분에 연구 자료들은 대부분 멀쩡하게 회수할 수 있었으니 고맙게 여겨야겠지.

물론 그것과 평온한 죽음은 별개지만.

[끄윽···끽, 끼히히힉···]

한스는 언데드가 된 간부를 일별하며 나머지 자료들을 살폈다.

최신 작전 명령 같은 중요한 것들은 우선적으로 따로 처리했는지, 지난 작전 개요 같은 간단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나마도 놈들이 남은 자료들을 통째로 날려버리기 직전에 난입해 마법을 파훼한 덕에 얻을 수 있었던 성과였다.

연구소장은 연구 관련 외에는 관심도 없었는지, 이쪽으로는 아는 게 없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저나 오래전부터 활동해 왔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네.'

연도별로 정리된 서류철과 그곳에 첨부된 작은 USB들.

하지만 놈들의 머릿속을 뒤져본 정보로는 상세한 내용은 곧바로 상부에 보고한 후 폐기한다고 한다.

이곳에 보관된 자료는 말 그대로 개요서에 불과하다는 뜻.

한스는 일단 본거지에 남은 물건들을 깔끔하게 챙기고 하인즈가 기다리는 별장으로 다시 이동했다.

그곳에도 아직 정보를 뽑아낼 잔당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맨 처음 놈보다 나은 것들이 하나도 없군.]

하지만 번천회는 점조직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제일 처음 읽었던 간부 이상의 정보를 가진 놈은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각자가 익힌 기술이나 지식이 도움이 되기는 했다.

"흠, 그래도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 같군. 혈맹 강경파의 수뇌부들도 처리했고, 그들을 돕던 번천회도 꼬리를 말았으니."

[크흐흐··· 간부 놈의 기억을 읽어보니, 알파는 이전부터 반쯤은 번천회 소속이었던 것 같던데. 이번 일이 있고 나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더군.]

하인즈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강경파의 수장인 알파를 먹어 치우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으니까.

물론 함정의 수준이 상당히 빠듯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알파까지 이 자리에 함께했다면 놈들을 이겨 내지 못하고 도망쳤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또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로 과식할 수 있었으니.

물론 수준 높은 이의 피라면 저급한 피들을 몽땅 게워내는 한이 있더라도 꾸역꾸역 들이켰겠지만 말이다.

"강경파가 이렇게까지 박살 난 이상, 놈도 지금 뒤늦게 돌아와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 테지. 갈 곳이 없어졌으니 이제 완전히 그쪽으로 전향할 터."

[바로 추적해서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로다.]

"번천회 놈들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세력인듯 하고. 지금까지의 정보로 봤을 때, 단순히 한국에만 국한된 조직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놈들의 근거지에서 챙긴 자료가 있었지. 거기에 무슨 수작이 있을지 모르니,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군.]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한스와 하인즈의 모습.

물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혼잣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기엔 하인즈 말고 살아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한스가 챙겨둔 번천회 지부의 자료들을 몽땅 꺼내놓았다.

서류철이 꽂힌 캐비닛과 책장을 통째로 아공간에 담아왔기에 정리된 파일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구 일지를 위주로 살피는 한스와, 연도별로 나눠진 작전 개요서들을 파악해 나가는 하인즈.

당장 첨부된 USB까지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대략적인 내용들만 파악하던 중.

"···허?"

하인즈가 한 서류를 발견하고 몸을 멈췄다.

자료를 살피던 한스도 동력이 꺼진 로봇처럼 순간 정지했다.

하인즈의 시선이 닿은 곳.

한성현이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짜와 장소가 적힌 문서가.

그곳에 있었다.

***

"아! 하인즈 씨 오셨나요?"

동이 틀 무렵, 하인즈는 진소란을 찾아갔다.

간밤의 싸움의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네? 강경파가 어떻게 됐다고요? 또 저희 수장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니···. 아니, 잠깐만요. 그 전에 다시,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지난밤 동안, 알파를 제외한 강경파의 간부 대부분을 처리했다. 지방에 파견된 감마 몇은 놓쳤지만 그 정도로는 대세에 영향은 없을 터. 그와 관련해서 온건파의 수장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인즈는 기계적으로 했던 말을 다시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충격적인 정보를 갑작스레 접했기 때문일까, 진소란은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하인즈의 눈치를 살폈다.

"그··· 하인즈 씨. 일단 제가 보고는 올려 볼 텐데요. 그게, 사실을 확인할 시간도 필요하고··· 또 너무 갑작스···."

"진소란."

하인즈의 무심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꼬리를 끊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

하인즈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혈향이 자욱하게 퍼졌다.

지난밤, 무수한 흡혈귀들을 포식하고 급증한 흡혈인자가 일제히 혈마력을 뿜어냈다.

심장을 조이는 듯한 위압감에, 진소란이 그대로 굳은 채 숨을 삼켰다.

'하인즈 씨가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단순히 혈마력의 양으로 찍어 누른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치 포식자가 노려보는 듯한, 좀 더 내면의 본능을 자극하는 공포.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소 7레벨, 어쩌면 그 이상···. 내가 판단할 수준이 아니야.'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지금 바로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아보도록 할게요!"

온건파의 수장은 7레벨.

그 수장과 마주할 때도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으니, 하인즈는 그것보다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

강경파의 알파가 8레벨에 다다랐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인데다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논외였고.

"그래, 그럼 그때 혈맹의 무력을 증강시킬 방안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강경파 잔당에 대한 처우도."

"예, 그렇··· 예에?"

하인즈에게는 이제 최대한 빨리 세력을 키워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혈맹은 그런 면에서 적합한 세력이었다.

강경파가 썰려 나가 무력이 감소했지만, 오랜 시간 존속해 온 만큼 기본 여력이 있었다.

은밀성과 정보력, 영향력까지 뒷세계의 조직 중에서는 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마침 그들에게 목줄을 걸 수 있는 능력도 새로 생겼으니, 써먹을 수 있는 만큼은 써먹어 주리라.

아마 온건파 입장에서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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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천회 (4)

드르륵—

방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봤다.

아침이 되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아바타를 통해 바깥과 자주 접한 덕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더는 바깥에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직접 밖에 나가기에는 아직 심적인 부담감이 있었으나, 이렇게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는 것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밖을 내다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개체명 : 하인즈 2세

-종족 : 뱀파이어 (진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피의 일족 (진혈眞血)」, 「혼혈진화」, 「피의 신비」, 「정제혈정」, 「가속」, 「초재생」, 「간파」, 「은폐」, 「투명화」

-특이 사항 : 여러 차원의 흡혈인자를 수집하여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포식자로서 다른 흡혈귀들의 적대적 능력을 일부 무시하고, 본능적인 위압을 가한다. 최근 유입된 과도한 에너지가 체내에 형성된 혈정(血精)에 저장되었다.

별장에서의 전투 후, 하인즈는 한동안 과식으로 고생해야 했다.

'간부진은 물론이고 경비를 서던 흡혈귀들까지 전부 피를 빨아들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수준이 낮더라도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버리기도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어 치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물리적인 제약이 덜하다지만, 어떤 일에도 한계가 있는 법.

더 이상 체내에 담지 못하고 포화상태에 이를 지경이 되자, 강해진 혈액 통제력으로 넘쳐나는 흡혈인자들을 뭉치고 압축해 하나의 정수로 만들었다.

'그 대부분이 쓸데없이 양만 많이 차지하는 저급한 흡혈귀의 것이었지만.'

체내에 들어온 이상 「혼혈진화」의 영향을 받아 진화가 이뤄지긴 했으나, 질 자체가 너무 낮아 직접 사용하기 애매한 것들이었다.

이미 까마득하게 수준이 높아진 하인즈에겐 별로 도움이 안 되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계륵.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 새로 얻은 특수스킬인 「정제혈정」이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피에 담긴 사념이란 말이지? 그럼 해결책도 간단하지. 나한테는.'

이미 해본 적도 있지 않은가.

하인리히를 통해 세례 의식을 받을 때 말이다.

자신이 가진 스킬들과 혈액 통제력을 연계해, '하인즈 2세'의 혈정에서 사념을 비운 흡혈인자를 추출한다.

그렇게 시도한 끝에 획득한 스킬이자 결과물이 바로, 「정제혈정」이었다.

어떤 사념도 담기지 않은 흡혈귀 진화의 정수.

이렇게 만들어진 「정제혈정」이 다른 흡혈귀의 체내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의 흡혈인자를 진화시키는 촉매가 되어줄 것이다.

촉매일 뿐이니 소량만으로도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물론 많이 투여하면 투여할수록 그 변화의 폭이 더욱 크며 변이 속도도 빨라질 테지만 말이다.

'부작용이 없진 않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부작용도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피를 '하사'하고 '계승' 받는 절차가 이뤄지는 것이었으니, 하사하는 자에게 계승 받는 자가 종속되는 아주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으니까.

흡혈귀에게는 별것도 아닌 문제였다!

'흡혈귀라면 다들 익숙한 일이니까. 그 대상이 바뀔 뿐이지.'

충성을 대가로 확실한 힘을 얻는다.

간부들의 빈자리로 혼란스러워진 강경파 잔당들에게도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동족 포식까지 생각할 정도로 힘을 갈망하던 이들이 아닌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놈들은 포용하고, 기존의 체제를 주장하며 반항하는 놈들은 소비된 혈정의 재료로 만들고.

아주 이상적인 구조였다.

'···어라? 이거 강경파 놈들이 하려던 짓이랑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흠, 아니지. 나는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놈들을 제거하는 거니까.'

그 와중에 아주 살짝 이득을 보는 것뿐이다.

현상금 사냥꾼과 다를 바 없는 아주 건전한 계획.

실없이 비실비실 웃던 나는 다시 창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화면에는 한 사건에 대한 인터넷 검색 결과가 떠 있었다.

-20XX년 8월 서울역 테러 사건.

그가 가족을 잃었던 곳이었다.

맥없이 실실거리던 입가가 경직되고,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세계에서 힘을 얻고 돌아온 초인들이 한곳에 득실거리는데, 정작 그들이 힘을 쓸 만한 몬스터나 마왕 같은 건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그들과 같은 처지의 초인들뿐.

하지만 처지가 같다고 가치관 또한 같지는 않으니, 곳곳에서 분쟁이 발생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힘.

더 강한 힘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정의였고, 질서였으며, 이 세계의 전부였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수없이 따랐지만, 힘이 없는 이들은 그저 참고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사고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나 또한 그랬다.

쾅—!

이전까지는.

가볍게 내려친 주먹에 책상에 균열이 생겼다.

「아바타」를 각성하고 그간 맹목적으로 힘을 추구해왔다.

힘이 없어 당했던 무력한 순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페르소나」는 감정에 매몰되어 자신을 좀먹지 않게 도와줄 뿐, 그것을 완전히 없애는 게 아니었다.

그 감정은 줄곧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쌓인 힘을, 갈 곳 없는 분노와 원망을 '빌런'들을 심판하는 데 쏟아 부었다.

그때의 사고는 각성자의 동기를 알 수 없는 묻지마 테러였고, 그 테러범은 사건 직후에 그의 눈앞에서 폭사했으니까.

때문에 힘을 얻고 나서도 그의 분노와 복수심을 표출할 곳이 없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에 띄는 빌런들을 족치는 것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있었네? 범인이?"

경직됐던 표정이 풀리고 다시 입꼬리가 부드럽게 위로 휘었다.

다시 매가리 없는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나왔다.

'아, 그랬구나.'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망가져 있었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런 상황에 이렇게 웃음이 나올 리 없지 않은가.

"큭···크흐흐흣···. 큭끅끄으윽··· 흐으···."

계속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웃어서 침은 물론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지만,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유쾌하다.

한바탕 웃고 났더니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목표가 생기니 전에 없던 의욕이 샘솟았다.

"이야~ 이게 이렇게 되네? 역시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니까? 나쁜 놈들을 족치고 족치다 보니 이렇게 배후가 떡하니 튀어나오잖아."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놈들을 엿 먹일 수 있을까를.

이미 몇 번 해본 적도 있지 않은가.

이젠 경험도 제법 쌓였으니,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 쉽게 물러날 놈들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그 난장을 치진 않았겠지. 이번엔 숨어들었지만 반드시 다시 머리를 내밀 터.'

그때 확실히 모가지를 잡아챌 준비가 필요했다.

혹시 모를 배후의 배후까지 확실하게 뿌리 뽑을 준비가.

'거기에 놈들은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놈들인 것 같으니까. 당장 한국에서 활동을 멈추게 한 게 어느 정도 큰 타격인지도 모르겠고.'

톡, 톡, 톡.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다리를 꼬고 앉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일이 이 정도로 커지면, 확실히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쪽도 마찬가지로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속해서 놈들을 추적해 정보를 모으고, 유사시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세력이.'

그리고 그 역할은 혈맹이 어느 정도 수행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여러모로 지원해서 세력을 키우고, 다른 조직을 휘하로 복속시켜 가며 규모를 불리면 더 도움이 되겠지.

마침 자신에게는 이세계와 범죄조직에서 털어온 자금이 넘치도록 있기도 했고.

'나름 음지의 조직이니 자금 세탁 정돈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보니 그때 금괴를 거래했던 놈들을 혈맹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괜찮겠군. 직접 휘하로 들이기엔 아쉬운 놈들이지만, 하부 조직으로서는 제법 유능한 것 같으니까.'

나는 아직도 방 한편에 보관 중인 로또 용지들을 힐끔 쳐다봤다.

당장 급하지도 않으니, 저건 그 후에 사용해도 되겠지.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도 그랬듯, 결국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강자의 존재였다.

'한스와 하인즈··· 그리고 하인리히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 하지만···.'

부족하다.

이번엔 이쪽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돌해 놈들이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났지만, 다음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놈들은 이미 한스와 하인즈에 대해 인식한 상태였고,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도 번천회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었으니까.

놈들의 활동 범위를 감당하면서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좀 더 많은 강자가 필요했다.

그들이 예상할 수 없는, 예측을 벗어난 그런 존재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하지만 나는 몸이 열 개라도 될 수 있는 이가 아닌가.

몸이 부족하면 늘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카르마가 필요하다. 느긋하게 고유스킬을 성장시킬 여유가 없어. 카르마를 쌓기 위해선 이세계에 대한 영향력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이세계의 영향을 줄 만한 큰 사건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어···.

"전쟁···이라든지?"

말을 뱉고 나서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과연 그 선을 넘어도 되는가.

내 욕망에만 눈이 멀어 인간성을 버리고, 무고한 이들을 제물로 삼아 힘을 추구하고자 하는 각오가 되어있는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상한 일이라는 것은 자신도 잘 알지만, 딱히 분노와 복수심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과 기대감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흐··· 나도 제정신은 아니군.'

자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타당하고, 가진 모든 악의를 쏟아붓기에도 합당한 상대.

그러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오히려 전력을 다해 맞서야만 하는 상대가 생겼다.

···지금 심정으로는, 전쟁은 딱히 내키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보류. 무고한 이들의 희생 없이 전쟁 급으로 세계에 영향을 줄 방법.'

그런 편리한 방법이 있을 리가···.

"···있네?"

때마침, 매우 공교롭게도 딱 적절한 소재가 내 손아귀에 있었다.

"마왕과 용사."

악의 세력을 이끌고 대륙을 위협하는 사악한 마왕.

인류의 지원을 받고 그와 대적하는 정의로운 용사.

고전 중의 고전인 클리셰였다.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충 틀은 그렇게 잡는다 치고. 시나리오는 좀 고민해 봐야겠군. 자세한 정보도 필요하고, 중간에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당장 떠오른 계획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한스가 악의 조직을 거느리고 부패한 귀족을 치면, 하인리히가 놈들을 처단해 영웅이 된다.

그것의 반복.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악의 조직들을 싹 다 끌어모아 전멸시키면, 대륙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아닌가?

주의할 점이라면, 스케일이 큰 만큼 대충 일을 벌이면 민간의 희생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변수가 무수히 발생할 터.

하지만 전쟁이라는 선택지에서 많이 순화된 탓인지, 전 만큼의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쪽의 노력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기도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희생을 합리화하는 순간, 나도 놈들과 다를 바 없어지겠지. 최대한 노력해 보는 수밖에.'

방법이야 찾기 마련.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장기적인 계획인 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당장 시행할 수도 없었으니까.

아직 한스는 대륙을 상대로 일을 벌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마지막 남은 '불사왕의 파편'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겠지.

'시간은 충분해. 번천회 놈들도 이번에 큰 피해를 입은 만큼, 최소 몇 년은 잠잠할 테니까. 이세계와의 시간차는 10대 1. 차분히 진행해도 늦지 않는다.'

당장 놈들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까지 막기에는 무리다.

차라리 그동안 확실히 힘을 길러두는 것이 나을 터.

"흐···."

나도 모르게 또 한 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왠지 모르게 다시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래···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뭘 원하든. 내가 전력으로 방해해 주마."

불만 있으면 찾아내 보시든지.

당분간 아우테리카에 집중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한스는 교단의 시선을 피해 불사왕의 파편을 찾아야 했고, 하인리히는 교단에서 인정받아 높은 곳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하인즈는 대륙의 정보를 파악할 정보 조직을 구축해야 겠지.'

그리고 마침 그 조직으로 아주 적합한 놈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할리'를 키워야겠군. 최대한 빨리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적응」을 이용하면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급할 건 없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일을 진행하면 될 뿐이다.

한 편의 연극을 준비하듯이.

"무대는 아우테리카, 주연은 나. 그리고 관객은 전 대륙. 스케일이 좀 크긴 하군."

개봉일은 아직 미정이지만···.

글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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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1)

지구에서의 일을 빠르게 정리했다.

한스는 혹시 모를 번천회의 잔당을 찾아 밤마다 도는 순찰을 강화했고, 하인즈는 온건파와 접선해 협상을 벌였다.

"딱히 부조리한 명령을 내릴 생각은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번천회'와 관련된 놈들을 모조리 뿌리 뽑는 것뿐이다."

"그 두 가지 목표가 상반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그의 기준에서는 악을 처벌하는 것 또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고.

하인즈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여성, 혈맹 온건파의 수장 '아리아'는 그의 말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있을 뿐.

"좋습니다. 하인즈 씨가 강경파를 흡수할 수 있게 돕도록 하죠."

그리고 생각보다 시원하게 이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간의 강압적인 무력행사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건만, 살짝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뭐한데, 뭘 믿고 그렇게 별다른 고민도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

"충분한 심사숙고 끝내 내린 결론입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데 거부할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뭘 믿냐니···. 당연히 저 자신이지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아리아.

여전히 두 눈은 감은 채였다.

"일을 하시려면 중간에 가교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하겠죠. 소란이를 데려가도록 하세요. 제가 따로 말해 놓겠습니다. 그 외에도 저희 측에서 하인즈 씨를 따르고자 하는 이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지요."

개인 혼자서 조직 하나를 강제로 종속시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력으로 차근차근 세력을 불려 나가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되겠지.

그건 이쪽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쪽의 계획을 밝히며 살짝 협박할 생각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협조적이었다.

그것도 온건파 측의 간부였던 진소란까지 직접 설득하겠다는 성의를 보이면서.

'무슨 능력이 있는 건가? 생각을 읽어? 단순히 상대의 성향을 본다던가? 설마 미래를 읽는 건 아니겠지?'

강제로라도 종속시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나름 한 파벌의 수장인 그녀를 그렇게 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정제혈정」의 종속에는 마음까지 세뇌하는 효과가 없었으니까.

시킨 명령에는 따르겠지만 어떻게든 티가 날 것이고, 그건 혈맹을 집어삼키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와 주는데 굳이 척질 이유도 없고.

"좋아. 그럼 온건파 측에 대한 전파는 그 쪽에게 맡기지. 이제 강경파 잔당들을 흡수할 계획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그러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중립파를······."

시작은 강경파의 잔당을 흡수해 새로운 파벌의 수장이 되는 것부터.

그렇게 혈맹의 접수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

작전명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내 뜻대로 움직이는 유능한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주연인 한스와 하인리히, 서포트 역의 조연인 하인즈로는 부족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

때문에 아직 진로도 정하지 못한 '할리'를 어떻게 최대한 빨리 강화시키느냐가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호오, 이거 아주 흥미롭군.]

그리고 방금, 번천회의 연구소장이 애지중지하던 자료에서 제법 괜찮은 수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스는 내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놈들의 연구 자료들을 꺼내, 그 성과를 살펴보며 야금야금 흡수하는 중이었다.

직접 쓸 수는 없어도 그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연구소장 덕분에 '연구 도중'이었던 자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니까.

[인외종 마인의 신체 일부를 타인에게 이식시키는 실험인가. 이건 키메라 시술이나 다름없는데? 일반인은 당연히 실패했고···, 각성자에게도 부작용이 심하군.]

「마도의 길」의 영향으로 이제 다른 분야에서도 탁월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한스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의 전공은 흑마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키메라 연구'는 흑마법과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분야였다.

'어찌 보면 전화위복이지. 아우테리카에서 시간의 우위를 살려 「금단의 지식」만을 파고들었더라도, 지금 이 정도로 빨리 성장하지는 못했을 테니.'

양보다는 질.

다양한 세계의 술법을 겪고 자신의 틀을 깸으로써 한스는 더욱 빨리 강해질 기틀을 닦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거 단순한 키메라 연구가 아니었군. 부족함을 버리고 보다 우월한 요소만을 받아들인 채 끊임없이 진화를 추구한다···. 완전 진화 생물을 만드는 게 최종 목표인가.]

아직 연구 중인 과제여서인지, 단순히 자료뿐만 아니라 실험에 사용된 신체 조직들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호오, 이게 용의 피인가? 보석을 녹여놓은 것 같군.]

그 핵심 재료인 '용혈(龍血)'까지도.

작은 병에 담긴 보랏빛의 액체는 각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영롱하게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크흐··· 이 자료들과 내 스킬의 지식을 섞으면 쓸 만한 결과가 나올 것 같은데···. 외부 조직에 대한 「적응」을 통한 진화라.]

일이 이렇게 되니 당장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지구에서 얻을 것들은 충분히 얻었으니, 이제 아우테리카에서 여유를 가지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교단이 문제란 말이지···.'

정확히는 아직도 매일같이 불사왕의 후예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성녀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얻기도 했으니까.'

한스가 한 야산에 틀어박혀 '전염성 사역마법 최종본_수정_2차_FINAL(3)_진짜마지막'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삼 주.

그리고 그와 같은 기간이 교단 측에서 한스의 존재를 느끼고 탐색에 나선 시간이었다.

'한스의 존재는 곧바로 감지했지만, 온갖 은폐 결계를 두른 덕에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는 못했다. 성녀의 탐지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

거기에 한스는 그때보다 정체를 숨기는 데에 도가 텄으며, 마법에 대한 성취는 물론 「마도의 길」까지 얻었다.

'그걸로도 불안하면 하인즈의 「은폐」와 「피의 신비」까지 사용하면 되겠지.'

하인리히를 통해 실시간으로 교단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도 있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교단의 눈을 속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것도 일단 하인즈의 혈맹 접수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사전 준비는 지금부터도 할 수 있으니까.'

***

"아우테리카 차원으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전송이 완료되고, 할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대로와 인접한 골목길 안이지만, 구조상 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곳.

하인리히가 성지로 향하며 지나친 도시 중 하나, 이온 대륙 서부에 위치한 툴크 왕국의 대도시였다.

"우왓! 깜짝이야! 이 양반 언제 여기로 온 거여?"

발걸음을 옮겨 구석에서 나오자, 골목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던 허름한 사내가 펄쩍 뛰었다.

할리는 눈을 끔뻑이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쳐 대로로 나섰다.

'툴크 왕국의 북부 아오니아 백작령, 타라크. 다행히 아직 낮이군.'

해가 쨍쨍해서 다음날 움직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곳 타라크는 하인리히가 사전답사를 하며 인상 깊게 여겼던 곳이었다.

무기를 찬 채 도로 곳곳을 거니는 용병들과 간간히 보이는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

커다란 수레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싣고 이동하는 상인들까지.

이상적인 판타지 세계 그 자체였다.

'이전까지도 판타지 세계긴 했지만···. 이쪽은 더 전형적이니까.'

고정관념을 형상화한 듯한 이곳은 북부 산맥의 다종다양한 몬스터들로 인해 용병 산업이 활성화된 도시였다.

왕국의 국경 부근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신전까지 있을 정도로 번성한 대도시.

대륙의 북쪽 전체에 걸쳐있는 거대한 북부 산맥, 그 중에서도 서북쪽의 자락을 지키는 '강철의 성채'로 가기 전 마지막 정비를 할 수 있는 장소였다.

몬스터 사냥 의뢰를 받기 위한 용병 길드와 사체를 운송하는 상인 조합, 그것으로 연구를 하는 마탑 지부까지.

덕분에 도시는 온갖 군상들로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생각보다 더 거래가 활발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물건들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물론 나중에는 안전을 위해 호위를 고용하든 해야겠지만.

희귀한 소재나 마법적 가치가 있는 몬스터 부산물, 그 외에도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마도구까지.

앞으로 돈을 상당히 많이 사용하게 될 테니까.

'이제 돈이야 얼마든 벌 수 있으니 시간을 아끼는 게 우선이다. 일단 가져온 아공간에 귀금속들은 최대한 많이 챙겨오긴 했는데 충분하려나 모르겠군.'

아무래도 마탑 지부로 향해서 아공간 마도구부터 추가로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어서 옵셔~. 로카펠리 마탑 타라크 지부 마도구 상점입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마탑 지부의 옆에 딸린 상점에는 마법사라기보다는 상인 같은 인상의 사내가 접객을 하고 있었다.

"아공간 마도구를 찾으신다구요?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 로카펠리 마탑의 제품은 타 마탑 대비 공간의 효율이 무려 이십 퍼센트나 차이가 나는 명품으로···."

"과연, 그렇군요."

어차피 두고두고 쓸 생각으로 일부러 평판이 좋은 마탑을 찾아왔다.

몬스터 산업이 발달한 만큼 용병들도 사냥을 나설 때 아공간 마도구를 애용해, 온갖 사양의 제품들이 거래되고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이 제품은 내부의 물건에 방부 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좀 더 장기적인···."

"그 기능은 확실히 필요해 보이네요."

물론 가격이 살인적인 만큼, 규모가 큰 대형 용병단이나 고랭크 용병파티가 공용으로 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망가지지 않게 특수 가공 처리를 해 어떤 오지를 가더라도···."

"오오, 그건 얼마죠?"

마도구 상인의 언변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어느새 기존의 아공간에 담아왔던 귀금속들은 전부 사라지고 몇 개의 마도구만이 손에 덩그러니 들려있었다.

"좋은 거래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로카펠리 마탑 타라크 지부 마도구 상점의 찰튼을 찾아 주세요!"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며 배웅하는 상인의 말을 뒤로하고 나는 멍하니 상점을 나섰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커다란 가방형의 대용량을 비롯한 온갖 기능을 가진 아공간 마도구들.

나는 새로운 물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필요한 물건들이었으니까. 하다못해 지구에 되팔기만 해도 몇 배는 이득이고.'

어느 정도 충동 구매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 가치를 생각해 보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도시 특성상 이곳에서 사는 것이 다른 곳보다 싼 편이기도 했고.

'그것보다, 가진 자금을 거의 다 썼으니 한 번 더 지구에 갔다 와야겠는데.'

다만 빈 자금을 메꾸기 위해 다시 지구에 다녀와야 한다는 점이 번거로울 뿐이었다.

'아예 지구와의 무역으로 부를 끌어 모으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이세계에 반입할 수 있으면서 돈이 될 만한 것이 뭐가 있지? 향신료 같은 거면 되려나?'

덕분에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떠올렸으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거래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

우드득— 뚜둑!

"흐읍, 하아···."

골격이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진소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촉매에 의해 체내의 흡혈인자가 서서히 진화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더욱 질기고 유연해졌으며, 뼈가 단단해지고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혈마력의 양이 늘어나진 않았지만, 그 운용력과 최대 출력량이 증가해 안정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몸 같지 않아! 뭔가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신체의 변화가 멈추고, 진소란은 감탄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힘이 끓어오르는 게 전투력이 몇 배는 증가한 기분이었다.

"흠, 이 정도 「정제혈정」으로는 이 수준이 한계인가. 양을 좀 더 늘리면 어느 정도까지 진화할지는 앞으로 좀 더 지켜봐야겠군."

물론 그녀의 기분은 말 그대로 기분 탓이었다.

당장 그녀에게 투여한 「정제혈정」에는 그 정도 효과는 없었으니까.

「간파」로 확인한 결과, 기껏해야 30% 정도의 강화 효과가 전부였다.

'물론 6레벨인 진소란의 전력이 3할 증가했다는 건 쉽게 볼 일이 아니지만.'

진소란은 아리아의 제안을 받고 흔쾌히 하인즈의 휘하로 들어왔다.

정확히는 온건파와의 가교 역할을 위한 겸직이었지만, 「정제혈정」을 받아들여 하인즈에게 종속되었으니.

파벌 간의 마찰을 직접 겪은 입장이기도 하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중간에 조율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 같았다.

'이쪽이야 알아서 일을 조율해 줄 사람이 있으면 편하지. 적당히 제약을 걸어 놓으면 배신할 염려도 없고.'

하인즈는 진소란이 어느 정도 힘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적응됐으면 바로 이동하지. 앞으로 할 일이 많아."

"예! 알겠습니다. 로드!"

"···로드?"

"예? 예! 로드. 이제 새로운 클랜의 '킹'이나 마찬가지시니까요. 혹시 호칭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러고 보니 진소란의 출신 차원인 녹터니아는 체스의 말로 흡혈귀들의 계급을 나눈다고 했던가.

피를 통해 새로운 종속관계가 맺어졌으니, 하인즈를 혈통의 시조인 클랜 로드로 대하겠다는 의미였다.

"흠··· 아니, 상관없다."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뭔가 대우받는 기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요, 로드! 이렇게 되면 지구에 새로운 족보가 생긴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럼 그에 어울리는 새 이름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따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요?"

그녀가 발랄하게 웃으며 말했다.

로드로 대한다고 해도 이전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 듯했다.

"이름이라···."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딱히 생각해 둔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소속감이나 충성심 등을 고려하면 그럴싸한 이름 정도는 있는 게 좋겠지.

'뭔가 차별화된 특징을 따와서 지으면 될 것 같은데.'

「정제혈정」을 통한 강화는 하인즈 체내의 흡혈인자를 촉매로 다른 흡혈귀들을 변이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미 온갖 세계의 우성인자들을 받아들여 진화할 대로 진화한 '잡종'에게 영향을 받게 하는 것.

투여되는 「정제혈정」의 질과 양에 따라 변이되는 정도가 다르지만, 얼마나 변화하든 이전보다는 훨씬 진보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침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헤테로시스(Heterosis ;잡종강세)로 하지."

"헤테로시스! 뜻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어감이 좋네요!"

혈맹 내 최정예 전투 집단이 될 헤테로시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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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2)

한국 귀환자 협회 서울 남부 지부.

똑똑— 철컥!

"지부장님, 저번에 지시하신 지부 내 매점 설치 건에 대해···. ···지부장님?"

결재 서류를 들고 지부장실로 들어서던 비서가 순간 멈칫했다.

지부장인 윤지윤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아, 김 비서 왔어? 이리 가져와."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된 채였다.

"지부장님. 혹시 오늘 회의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답니까?"

오늘은 지부장급 이상의 정기 가상 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김 비서는 조금 전에 그것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온 참이었다.

"사건이라면 사건이긴 한데···, 이게 애매하네?"

"애매하다는 말은···?"

"혈맹 있잖아?"

그녀가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비서를 바라봤다.

김 비서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예, 한국의 흡혈귀들이 모인 조직이죠. 아직 큰일은 벌이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설마 기어코 강경파에서 일을 벌였답니까?"

"큰일은 큰일인데,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아마도?"

"예?"

"온건파가 이겼대. 강경파의 간부들을 정리하고 잔당을 흡수 중이라는군. 알파는 행방이 묘연하고."

김 비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전력 차가 상당히 심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무슨 이변이 있었던 건지."

귀환자 협회, 즉 가디언 측은 혈맹을 오래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치안을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

그래서 그들에 대해 생각보다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이번 이변도 빠르게 눈치챌 수 있었다.

"일단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지.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주기도 했으니."

사실 그동안 귀환자 협회 측에서는 혈액센터를 통한 혈액 공급 등으로 암암리에 온건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정부 측인 이능관리국은 그들을 통제하길 원하지만, 일선에서 치안을 지키는 입장에서는 온건한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으니까.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 마당에 잠재적인 적을 줄일 수도 있고, 과격한 강경파를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으니 지금까지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지금은 그렇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여기서 더 바빠지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그렇지 않으면 안 그래도 많은 일거리가 더 늘어날 테니까.

***

하인즈 2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숲속이 그를 반겼다.

변함이 없는 울창한 숲.

오직 그만이 그때와 달랐다.

"여긴 그때와 달라진 게 없군."

이곳은 그가 처음으로 아우테리카에 도착했던 장소.

스타팅 포인트였던 마물의 숲이었다.

'지금은 여기가 숨어서 연구하기 가장 적합한 곳이니까.'

역천의 서약 놈들은 근방에서 완전히 꼬리를 감췄고, 뱀파이어들은 이곳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아잔투를 잃으면서 숲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교단도 이미 한 번 헤집고 지나간 이후에 줄곧 방치 상태였으니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이 넓은 숲을 전부 감시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주변의 마물들이 실험체는 물론 자연스러운 울타리가 되어 줄 테니, 조용히 연구하기에 여기보다 좋은 데는 없어.'

하인즈가 몸을 날려 숲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주변의 마물들은 그의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었고, 덕분에 그는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군. 처음엔 마물 한 마리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 같은데.'

그때 싸웠던 놈이 검은 표범이었던가.

지금의 하인즈에게는 동네 강아지만도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이동하길 한참.

마침내 한 동굴 앞에 멈춰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쯤이 적당하겠군."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위치, 주변에 서식하는 마물들의 분포, 연구하기 좋도록 넓은 공간을 가진 동굴까지.

비밀 실험실을 차리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일단 먼저 자리 잡은 입주민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우선이겠지."

하인즈는 당당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풍족해진 혈액을 아낌없이 사용해 결계를 설치할 수 있었다.

「피의 신비」로 구축된 결계, 그 전체에 깃든 「은폐」의 기운.

일차적인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후욱—

피로 이루어진 기괴한 문양이 벽면을 가득 채운 동굴 내부.

그 한가운데에 일순 어둠이 드리웠다.

[후우···.]

검은 로브를 두른 채 칠흑 같은 기운을 흩뿌리는 자.

한스였다.

[흐음, 서둘러야겠군.]

전송이 되자마자 한스는 곧바로 움직였다.

이미 전신에 존재를 감추기 위한 은폐장을 둘둘 두른 상태였지만, 결계를 설치하는 것이 더 확실했으니까.

조심스럽게 흑마력을 운용해 핏빛 문양이 새겨진 벽의 바닥에 새로운 도형을 새겼다.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결계 구축 작업.

동굴 안쪽에서 기다리던 하인즈도 가세해 그곳에 「은폐」의 힘을 덧씌웠다.

흑마력 은폐, 공간 왜곡, 인지 저하, 탐지 불가 등의 온갖 결계가 동굴 내부를 빼곡하게 채웠다.

그간의 성장을 증명하듯, 「마도의 길」을 통해 전보다 훨씬 월등한 효과를 보이는 것들이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겠군.]

한스와 하인즈가 최선을 다한 합작품인 만큼 자신은 있었지만, 성녀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는 알지 못했으니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최고의 정보원이 있는 만큼 효과는 금방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결과를 알게 되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오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하인리히 경. 그··· 좀 답답한 일이 있어서요.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하인리히를 통해 확인한 성녀의 반응, 그를 통해 그녀가 한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묘하게 답답한 표정만 지을 뿐, 토벌대를 소집하려는 움직임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차단했는데도 한스의 존재 자체는 감지한 것 같으니.'

한스가 아우테리카에 있다는 것만을 느꼈을 뿐, 대략적인 위치조차 특정하지 못한 듯했지만.

여러모로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어쨌든 이걸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갈 수 있겠어. 뭔가 변동이 생기면 하인리히를 통해 알 수 있으니.'

한스는 곧바로 자료들을 꺼내서 연구에 들어갔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으니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살폈다.

처음 '할리'의 진로를 고민할 때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중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은 다른 두 아바타와 마찬가지로 마인의 길을 걷는 것.

아무래도 그쪽이 성장이 빠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당연한 선택지였다.

'최우선 고려 대상이 되었던 게 늑대인간이었지.'

직접 잡은 사냥감의 심장을 뽑아 먹는 것으로 잠재력이 성장하는 늑대인간, 이곳의 정식 명칭으로는 라이칸스로프였다.

하지만 '직접'이라도 우회할 방법은 얼마든 있었으니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훌륭한 선배님들이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잠재력이 성장할 뿐, 그 상승세가 뱀파이어만큼 극적이지 않아. 또 너무 성향이 겹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때문에 일단 보류였지.'

거기에 아우테리카에서 라이칸스로프는 수인(獸人)과 다르게 그 흉포한 성향 때문에 배척받는 소수 종족이었으니,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민이 이어지던 중 발견한 것이 바로 이번 연구 자료.

통칭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였다.

키메라 연구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긴 했지만, 이건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른 목표를 지향했다.

단순히 이종의 육체를 억지로 덧붙여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유전자만을 흡수해 육체를 계속해서 진화시켜 나가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거기에 늑대인간처럼 유사시 변신도 가능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변신은 놓치기 아까운 요소였다.

그 낭만··· 아니, 장점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라이칸스로프가 가지는 단점은 배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그것의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용혈'이지.'

한스는 보랏빛이 감도는 보석 같은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흔들었다.

라우베다 차원에 존재하는 포식룡의 피.

포식룡은 수많은 용들과 용 사냥꾼이 존재하는 차원인 라우베다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존재였다.

먹어 치운 상대의 특성을 발현하며 계속해서 진화하는 최악의 용.

살아남은 기간만큼 계속해서 진화해, 종국에는 천적이 없을 지경에 달하는 최상위 포식자가 된다.

'···고 연구 보고서에 적혀 있었지.'

번천회는 그 피를 통해 포식룡의 특성을 이용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피의 양이 좀 적기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피에 담긴 특성이니 상관없겠지.]

연구소장의 머릿속을 뒤졌을 때 다른 지부와의 경쟁에 대한 내용도 있었으니, 아마 여러 지부에 피를 나눠주고 동시에 연구를 진행한 것 같았다.

여기서 문제는, 수많은 술법에 통달한 번천회조차 이루지 못한 목표에 한스 혼자서 도달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 연구를 완성하는 것은 아무리 한스에게 온갖 스킬이 있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으니.

[크흐흣··· 물론 이 몸은 연구를 완성할 생각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문제지.]

그래, 그에게 굳이 연구를 완벽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었다.

원하는 것은 할리의 강화뿐이었으니 그냥 써먹을 수 있게만 하면 되는 것이다.

놈들의 다양한 술법을 통한 연계는 인정한다.

허나 그 과정을 거친 연구일지는 지금 이쪽에도 있으며, 한스의 「금단의 지식」에는 번천회도 알지 못하는 온갖 정보가 담겨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벅저벅—

동굴 한편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할리가 걸어왔다.

어느새 쿨타임이 지나고 다시 한번 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할리의 몸에 걸쳐진 커다란 배낭과 크로스백, 목걸이에 팔찌 등 온갖 종류의 아공간 마도구.

그 안에는 타라크에서 구한 수많은 재료들이 담겨있었다.

[이쪽엔 그야말로 완벽한 실험체가 있으니.]

설사 실험 도중 문제가 생기더라도 「적응」과 「초회복」을 통한 질긴 생명력으로 버틸 수 있고, 어떤 가혹한 실험에도 무조건 협조하며 절대로 미치지 않는다.

실험자와 피험자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피험자의 신체에 나타난 미묘한 변화까지 즉각 파악하고 실험에 반영할 수도 있으니···.

'굳이 범용적인 결과를 낼 필요는 없다. 오직 할리에게만 쓸 수 있으면 상관없어.'

놈들의 연구 결과를 날름 가로채 먼저 써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매우 유쾌한 일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그렇게 한스와 할리는 연구자와 실험체로서 공동 작업에 들어갔다.

***

태양이 내리쬐는 화창한 오후의 로셀리아 대신전.

"······들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이니, 이에 하인리히 랜드가드를 주신교단의 성기사로 임명한다."

그곳의 한 예배당에서 하인리히가 참가한 성기사 서임식이 열렸다.

그 과정에서 교단으로부터 '랜드가드'라는 성까지 내려받아, 이제 '하인리히 랜드가드 경'이 되었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부서지는 아름다운 햇빛, 엄숙한 예배당이 풍기는 자애로운 분위기.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목에 성기사를 뜻하는 성표를 걸어주는 대주교까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신성한 한 장면이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특수스킬「축복 : 도약」를 획득합니다."

뜬금없는 시스템창이 눈 앞을 가리지 전까지는.

"음? 오오—! 은총이로다! 서임식에서 축복이 내려지다니! 주신께서 굽어살피고 계심이라!"

순간적으로 하인리히의 몸에서 뿜어지는 신성력.

무릎 꿇은 그에게 성표를 걸어주었던 대주교가 그것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서임식을 참관하던 다른 인사들도 합세해, 순식간에 판이 커져 갑작스러운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나만 빼고.

'···난 언제 일어나지?'

성기사로 서임 받은 것도 좋고 새로운 축복을 받은 것도 좋은데, 식순이 틀어지다 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이니, 슬그머니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는 자세를 잡았다.

"···주신께서 지상을 살피시며 불쌍한 자들을 인도하시니···."

그리고 대주교가 주도하는 기도문을 배경 삼아 생각을 정리했다.

이번 축복에는 매우 특별한 점이 한 가지 있었으니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 주신의 의지가 느껴졌다.'

서임식에 맞춰서 주신이 직접 축복을 하사한 것도 놀라운데, 처음 세례를 받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주신과 연결된 것이다.

그때보다 훨씬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주신이 여전히 자신을 흥미롭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지? 내가 이세계에서 온 자라서? 단순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그런 인간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

사실 '흥미'라는 것도 내가 느낀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의지는 편린을 접한 것만으로 아득해질 정도였으니까.

-개체명 : 하인리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신성한 세례」, 「축복 : 강체」, 「축복 : 도약」, 「무골」, 「성전사 전투술」, 「아우테리카 성법」

-특이 사항 : 신성력이 대사제 급을 넘어 지속해서 성장 중이다. 좀 더 다양한 성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축복의 영향으로 육체가 한층 더 강건해지고,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신의 의지에 정신이 팔려 그 효과를 뒤늦게 깨달았건만, 새로 얻은 축복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 잠깐! 공간을 뛰어넘어? 공간이동 기술이잖아, 이거!'

아직 하루에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지, 거리의 제한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공간이동은 그 자체로 최상급에 속하는 능력이지 않은가!

그것도 수련을 통해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으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하인리히에게 더없이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다.

'이런 능력을 떡하니 선물로 내주다니. 역시 괜히 주신님이 아니라니까? 대륙인들이 추종하는 이유가 있었어!'

재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받은 만큼 태도로 보여야 하는 법, 하인리히는 폼으로 잡고 있던 자세를 제대로 고치고 진심으로 주신께 기도를 올렸다.

뭐라도 더 주지 않을까 하는 욕망을 가득 담아.

그리고 그 순간.

슬슬 마무리하기 위해 눈을 뜬 대주교가 하인리히의 열망이 가득 담긴 정열적인 기도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과연 신실한 젊은이로고. 능력도 출중하니 우리 교단의 기둥이 될 인재로다.'

모두가 만족한 성기사 서임식이 그렇게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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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 (3)

"말린 과일 사시오~ 달달하니 맛도 좋고 여행식으로는 아주 제격이오!"

"수도행 마차가 곧 출발합니다! 몇 자리 안 남았으니 서두르세요!"

"아유, 이거 너무 비싼데 좀만 깎아줘요."

하인즈는 도시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마물의 숲에 설치한 결계는 한스에게 통제권을 넘기고, 이제 다른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온 것이다.

번천회에서 획득한 재료와 할리가 구해 온 것들을 전부 사용하더라도 이후의 재료 수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한스는 함부로 밖으로 나설 수 없지만, 그에게는 손발이 되어 줄 무수한 언데드들이 있었으니까.

'불사왕의 파편이 직접 노출되지만 않으면 되니까. 아무리 성녀의 능력이 대단해도, 대륙 전체를 감시하면서 언데드 하나하나를 식별하는 것은 무리지.'

파편이야 워낙 그 특징이 명확해서 쉽게 숨길 수 없었지만, 휘하의 언데드들에게는 간단한 흑마력 은폐장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던 하인즈가 굳이 이곳에 들린 것은, 문득 떠오른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륙 서부에 위치한 탈리아 왕국, 라펠라 시.

아잔투에서 만났던 남매와 헤어진 도시였다.

'그때 헤어진 후로 대충 7개월이 지난 건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보니 벌써 그렇게 됐네.'

지구의 3일이 이곳의 한 달이었으니까.

물론 자신의 분신인 하인리히가 계속 아우테리카에 머물며 훈련 중이었으니, 시간이 지나는 것을 느끼기는 했다.

교단 내에서 매일 반복되는 훈련에 매진하느라 그 체감이 크지 않아서 문제지.

'확실히, 여기도 간혹 뱀파이어들이 보이는군. 아잔투만큼 활개 치진 않고 좀 사리는 느낌이지만.'

초월적인 공감각과 「간파」를 통해 도시 곳곳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인즈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자신의 「은폐」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없었으니까.

그것이 성혈이 아닌 한은 말이다.

"꺄하하하~"

"라피! 그렇게 뛰면 위험해!"

그렇게 주변을 구경하며 걷던 도중.

남매가 의탁한 식료품점이 가까워질 무렵, 길옆 모퉁이에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읙?"

진즉에 접근을 눈치채고 있던 하인즈는 자연스럽게 몸을 피했으나, 정작 깜짝 놀란 아이가 그 자리에 멈추려다 발이 꼬여 버렸다.

"으에에—?"

"라피!"

달려오는 관성에 넘어지며 크게 다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아이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톡—

자연스럽게 받아낸 하인즈가 부드럽게 바닥에 세워 내려놓았다.

"···잉?"

당사자인 아이도 눈만 끔뻑거릴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라피!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

뒤에서 서둘러 달려온 소년이 여자아이를 나무라며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걱정스레 살폈다.

그리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라피가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자, 라피. 너도 인사해야지?"

"···쿨쩍."

소년의 재촉에 네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소년의 뒤에 숨어 눈만 빼꼼히 내밀었다.

"죄송해요. 우리 애가 낯가림이 조금 심해서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재차 감사를 표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소년.

그동안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었다.

"괜찮다, 아론. 그동안 별일 없었나 보구나."

"···어, 네? 절 아세요···?"

"······."

벌써 자신을 잊은 건지 섭섭해지려던 찰나, 문득 자신의 얼굴이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혈진화」로 골격이 변하고 진혈로 성장했으며, 결정적으로 본체와의 연관성을 없애기 위해 얼굴에 손을 댔었다.

"음··· 하인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얼굴이 좀 변하긴 했지만."

오기 전에 얼굴을 다시 돌려놓을 것을.

인제 와서는 너무 늦었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저씨세요?"

"그래."

"······."

역시 믿기 힘들겠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찰나···.

와락—

"아저씨—!"

아론이 울먹이며 안겨 왔다.

'생각보다 금방 믿어 주는군.'

하인즈는 가볍게 아론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잠시의 해후가 끝나고, 아론은 숙부네 식료품점의 외동딸 라피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아저씨가 오셨다는 것을 알면 누나도 깜짝 놀랄 거예요! 그동안 아저씨를 엄청 기다렸는데, 막상 마주치고 얼굴도 못 알아볼 걸 생각하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하네요!"

"힝흥힝~♪"

신나서 이리저리 떠드는 아론과 그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드는 라피.

헤어지기 전에 아이의 육아 담당을 맡았다더니, 그동안 상당히 친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식료품점.

디아나는 매대의 물품을 정리하는 자세로 이미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나! 내가 누구를···."

"아저씨—!"

후다닥— 와락!

아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려든 디아나가 하인즈의 품에 안겨들었다.

울먹거리는 얼굴로 품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남매가 똑 닮았다.

"···아니, 누나는 어떻게 바로 알았대?"

디아나는 단번에 알아봤다는 점만 빼면.

그 와중에 가게 안에서 누가 나오려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하인즈는 재빨리 후드를 눌러썼다.

"디아나! 무슨 일··· 응?"

"안녕하십니까? 볼트 씨. 오랜만이군요. 하인즈입니다."

놀라서 밖으로 나온 볼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디아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며 슬쩍 그녀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음··· 전처럼 피 냄새는 안 나요. 그래도 아저씨의 냄새는 나서··· 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알 수 있었어요."

디아나가 하인즈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쪽의 「은폐」를 꿰뚫어 봤다는 뜻이었으니까.

'피 냄새가 안 난다는 건, 뱀파이어라는 것은 제대로 숨겨졌다는 거겠지. 확실히 그쪽을 감추는 데 집중하기도 했고.'

그래도 한층 성장한 하인즈의 「은폐」를 어느 정도 간파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능력이라는 뜻이었다.

잘만 키우면 훌륭한 인재가 될 거라는 의미.

"저희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침에 아론이랑 같이 교습소에 가서 글이랑 계산하는 법 배우고, 오후에는 가게 일을 도와요. 안 그래도 된다고 하시는데, 저도 뭐라도 돕고 싶어서요."

그래도 이삼일에 한 번씩은 자유시간으로 교습소에서 책을 읽거나 하며 보낸다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남매의 숙부가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듯했다.

"지나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는데,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헤헤, 다 아저씨 덕분이죠. 아저씨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디아나는 얼굴이 바뀐 건에 대해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하인즈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 정도 변화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이리라.

"흠··· 그래. 나쁘지 않았지."

이런저런 성과도 있었으니까.

목표가 명확해진 것도 그렇고.

이후 하루 동안 라피를 포함한 세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 주며 회포를 나누고, 남매의 숙부인 볼트에게 지원금을 건넸다.

그렇게 다시 찾아온 이별.

"아저씨 조심히 가세요—!"

"또 오세요!"

"빠빠~♪"

그래도 두 번째여서인지, 아이들은 이번엔 울지 않고 씩씩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잠깐 상황을 보러 가 볼까.'

도시를 나서고, 하인즈는 본래의 목적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하인즈는 지구에서 헤테로시스를 키우느라 매우 바쁜 상황이었지만, 이세계와의 시간차를 이용해 잠시 짬을 낼 수 있었다.

틈틈이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에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을 테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하인리히는 성기사가 되기 위해 대신전에서 수련하는 와중에도 많은 이들과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는 불사왕 토벌대에 참가한 이들도 다수 있었으며, 그들을 통해 원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흑마법사 집단과의 충돌, 뱀파이어와 그들의 사주를 받는 듯한 고위층과의 마찰.

그 정보와 하인즈가 탈라리아에 처음 도착한 날, 수도 근방에서 여성 진혈과 마주쳤을 때의 경험을 더하면···.

'탈리아 왕국 깊은 곳까지 브로코슬락 클랜의 입김이 닿아있다.'

이미 한 나라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한 세력.

하인즈 2세가 가진 힘의 시초였던 뱀파이어 집단. 브로코슬락 클랜.

'아주 써먹기 좋은 패다. 이 이상 없을 만큼.'

그래서 이곳까지 다시 직접 찾아온 것이다.

놈들을 제대로 집어삼키기 전에 먼저 정보라도 모아둘 생각으로.

브로코슬락 클랜의 본거지가 있을 것이 유력한 곳,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에 말이다.

***

"오? 잘 어울리는데?"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신기하네요. 제 체형에 딱 맞춘 갑옷이라니."

"우리 대신전에 있는 장인들의 실력은 대륙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있는 갑옷을 체형에 맞게 수정하는 것 정도야 뭐."

하인리히는 서임 직후 보급 받게 된 성기사 갑옷을 입고 있었다.

백색과 은색이 섞인 듯한 광택을 내는 매끄러운 갑옷.

안쪽 면에는 빼곡하게 방어와 내성에 관련된 기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무기는 어떻게 할 거야? 보통 성기사가 될 때쯤이면 자신에게 맞는 무기가 뭔지 알 텐데, 넌 워낙 빠르게 서임 받아서 잘 모르지?"

"예, 일단 기본으로 검과 방패를 사용하고 꾸준히 다른 무기들도 익히고 있습니다만···."

하인리히의 주력 기술인 「성전사 전투술」은 혼란스러운 전장을 대비한 실전 무예였다.

맨손 기술부터 시작해서 어떤 무기든 주워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종합 무기술까지.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으면 그때부터 관련 심화 무기술을 배우게 되지만, 하인리히는 워낙 빠르게 성장한 탓에 아직 어떤 무기를 주력으로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로셀리아 대신전에서는 은퇴한 선배 성기사들이 많은 만큼, 무술 교관으로 있는 그들에게 온갖 무기술을 배울 수 있는 환경도 갖춰져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니면 원하는 무기를 주로 쓰는 성기사단에 들어가서 선배들과 수련하며 배울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단장님한테 지도도 받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어디에 들어갈지는 정했어? 내가 있는 은빛날개 성기사단은 어때?"

탈리아 왕국의 불사왕 토벌대에 참가했던 은빛날개 성기사단.

이 선배는 탈리아 왕국에서부터 함께 돌아왔던 막내 성기사였다.

그간 간간이 조언도 해 주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었지만, 역시 정식으로 성기사단에 소속되어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저는 성기사단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대륙을 떠돌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들에게 주신의 가르침을 베풀고 싶습니다."

"흠, 자유 성기사가 되고 싶다고?"

그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주신의 뜻을 널리 알리는 것도 좋은 일이지. 힘들고 위험해서 딱히 권장되지는 않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이단들에게 노려지기 쉽거든."

"그렇겠죠.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만큼 자유 성기사도 일정 기준을 통과해서 될 수 있어. 지금 네 수준으로는 아무래도 힘들지."

막 성기사로 서임 받은 하인리히에게는 아직 시간이 걸릴 목표였다.

그의 성장 속도라면 금방 도달할 수 있을 테지만.

"돌고 돌아 다시 무기로군. 일단 주 무기를 정해야 심화 무기술을 배울 테니까. 일단 당분간은 연수 차원에서 여러 성기사단에 임시로 소속되게 될 테니, 천천히 생각해 봐."

그의 말대로, 하인리히는 한동안 여러 곳에 소속되어 업무를 배워야 했다.

로셀리아 대신전에는 많은 성기사단이 있는 만큼, 주로 맡는 임무도 가지각색이었다.

흑마법사나 악마 추종자들을 토벌하거나, 위험한 몬스터를 사냥하고, 특정 지역이나 요인을 지키는 등 다양한 임무를 맡은 성기사단이 있었다.

물론 신입인 하인리히가 가장 먼저 투입된 곳은 제일 기본적인 업무를 가진 곳이었지만.

"우리가 맡은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이곳에 머무는 강자들은 발에 챌 정도로 많지만, 그것은 경계를 소홀히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만약의 사태라도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

첫 연수처는 로셀리아 대신전의 외곽 방어를 맡은 하늘방패 성기사단이었다.

그의 안내를 맡은 선배 성기사는 쉴 새 없이 자신들이 맡은 일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곳은 교단의 심장부인 로셀리아 대신전! 당연히 이단들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교단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하지. 약간이라도 빈틈을 허용했다간 놈들은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한시도 긴장을 늦춰선 안 돼!"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인리히가 머문 기간 동안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성지 주변을 경비하는 태양늑대 성기사단에 들어갔지만, 그때도 무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대륙 최대 세력 중 하나인 주신교단의 심장부인 만큼 어지간하면 아무 일이 없는 게 정상이었다.

그렇게 업무를 배우고 수련에 매진한 지 몇 달이 되었을 무렵.

그 기간 동안 서임식 때 얻은 「축복 : 도약」에도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루에 정해진 총 한계 거리 내에서 자의적으로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훌륭한 축복.

한 번에 한계 거리만큼 이동할 수도 있고, 필요한 만큼만 나눠서 쓸 수도 있었다.

연속 사용에는 몇 분의 쿨타임이 있는 만큼 전투 중에 여러 번 사용하기에는 제한이 있지만, 비장의 수단으로 사용하기엔 이만한 기술도 없으리라.

당장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이 또한 수련을 통해 서서히 늘어나는 중이었다.

나중이 되면 대륙조차 뛰어넘을 수 있게 될지도.

그 외에 또 한 가지 소득이라면, 주 무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나에겐 「무골」도 있고 성장 가속과 보정 효과까지 있는데, 굳이 무기에 한계를 둘 필요가 있나?'

물론 하나에만 전력으로 매진하면 더 큰 효과가 있겠지.

하지만 하인리히에게 맞는 무기를 한 가지만 고르라고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게 그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무골」의 영향인지, 원래부터 그의 적성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럴 바엔 그냥 다 배우자. 일단 가장 많이 쓰이는 검과 방패를 중점적으로 삼으면 되겠지. 이렇게 배워두면 나중에 다 쓸데가 있을 테니.'

자신에게는 「초회복」이 있으니, 수면과 여가 시간을 줄이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간 하늘방패 성기사단에서 검방술을 배우고, 태양늑대 성기사단에서 창술을 배웠었다.

"허, 설마 이렇게 빨리 터득할 줄이야. 소문은 많이 들었네만 과연 명불허전이로군."

"흠···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객사하지는 않겠구나. 이제 기본은 하게 된 거니까 너무 자만하진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무술 교관들을 찾아가기도 하며, 이후에 머물게 된 곳에서도 둔기술, 대검술 등 온갖 무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종합 무기술」을 획득합니다."

잠조차 줄이고 수련에 매진한 지 몇 개월.

'이제 무기라는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성전사 전투술」과는 별개로 무기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급증했다.

이제 어떤 무기를 쥐더라도 좀 더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 발전 가능성이 높은 범용 스킬이다. 내가 강해질수록 함께 성장해 나가겠지. 그건 나중에 다른 아바타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당장은 무기를 쓰는 아바타가 하인리히밖에 없었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이 최고의 교육환경에서 배운 지식이 가벼운 기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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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 (1) -(무료 마지막)

"크르륵, 크륵···."

회색 털을 지닌 마물 한 마리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치 고릴라를 연상케 하듯 비대하게 발달한 두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한 마물.

놈은 이미 몸 곳곳에 난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로 전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크어어어—!"

마물이 분노에 찬 괴성을 터트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갑작스레 자신을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오랜 세월 이 근방에 터를 잡은 터줏대감이었다.

이 몸이 걸레짝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어둠 속의 추적자들은 그런 놈의 결의를 고려해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최대한··· 상하지 않게. 조심해라. 또 혼난다.]

숲의 그림자에서 스며 나오듯 등장한 언데드들이 마물의 주변을 포위했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한스 휘하의 데스 위저드, 말콤이었다.

[지저의 속박.]

바닥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암석 덩어리들이 뭉쳐 마물의 사지를 구속하는 동시에, 주변을 포위한 언데드들이 한꺼번에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크워어억!"

하지만 놈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비대해진 양팔에, 그것을 구속한 암석 덩어리에 균열이 일었다.

콰드득—

그렇게 팔에 달라붙은 암석을 깨부순 후.

녀석은 바닥을 내리쳐 다리를 붙든 구속마저 벗겨냈다.

그 와중에 달려든 언데드들에게 몸 이곳저곳이 찔렸지만, 마물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조심. 조심! 죽이지 않도록. 오염되지 않도록. ···역시 어렵군. 반항이 만만치 않아···. 지저의 속박.]

그것은 온전히 마스터의 주문 때문이었다.

산 채로, 오염되지 않게, 되도록 멀쩡한 상태로 포획해 올 것.

죽여서 시체만 가지고 갈 거였으면 말콤 혼자서도 진즉에 끝났다.

산 채로 포획만 하면 됐다면 흑마법과 언데드들의 연계로 쉽게 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데드.

근본부터 죽음에서 태어난 자였고, 그 에너지의 근간은 흑마력이다.

병약한 이들에게는 그저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치명적인 기운을 흩뿌리는 존재인 것이다.

숨 쉬듯 죽음과 저주를 흩뿌리는 그들에게 상대를 온전히 사로잡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말콤에게는 흑마법을 사용하는 데에 제약이 생겼으며, 다른 언데드들도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으니까.

그 목표가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기절시키기도 어려운 마물이라 더더욱 문제였다.

"크르륵···."

그렇게 갖은 노력을 다해 최대한 흑마력의 영향이 덜한 마법을 사용하고, 언데드들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은 끝에···.

말콤 일당은 간신히 놈이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사지를 구속당한 채 언데드 아래에 깔려 버둥거리는 고릴라 형 마물.

[성공···. 이제 귀환한다.]

하지만 사건은 늘 그렇게 방심한 사이에 벌어지는 법이었다.

"크엉—!"

콰드득!

[아.]

잠시 마음을 놓았던 찰나의 그 순간,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 마물이 자신을 찍어 누르는 스켈레톤 나이트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까드득! 까득! 꿀꺽—

그뿐 아니라 뜯어낸 발목을 입 안에 넣고 야무지게 씹어대다가 그대로 삼켜 버렸다.

곧바로 달려든 언데드들이 마물을 다시 한번 제압했으나, 이미 삼켜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온전하게 포획해야 하는 마당에 배를 가를 수도 없었으니까.

[음···.]

언데드가 입은 손상이야 흑마법으로 간단히 수복할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언데드의 신체 일부는 딱히 몸에 좋은 식재료가 아니었으니.

[마물은 튼튼하니까 저 정도는 괜찮을지도···.]

평소 아무거나 주워 먹는 것이 마물의 식성이었으니, 언데드 정도는 별것도 아닐 것이다.

말콤은 그렇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곱게 포장된 마물을 한스의 실험실로 옮겼으나···.

퍽!

물론 괜찮지 않았으므로, 거듭된 실험으로 예민해진 한스에게 대판 깨진 말콤은 다시 사냥을 위해 밖으로 나서야 했다.

너무 맞아서 살짝 닳아버린 뒤통수를 흑마력으로 수복하면서.

***

한스는 두 눈을 감고 명상하고 있었다.

물론 눈꺼풀이 없으므로 진짜로 감을 순 없었지만, 내면의 세계에 깊게 침잠하며 바깥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동일했으니까.

「금단의 지식」에 담긴 무궁무진한 지식을 살피고, 그것을 응용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담긴 키메라 등 생체 연구 자료들과 번천회의 실험 정보를 합치고, 직접 확인한 결과들을 대입해 결과를 도출한다.

이윽고 정신을 되돌린 한스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할리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흠, 용혈은 제대로 몸에 정착한 것 같은데.]

실험이 이어진 지 3개월이 가까워진 지금, 동굴의 풍경은 전과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이 담긴 플라스크, 보존 마법으로 싱싱하게 보관된 생체 조직, 온갖 기괴한 모양의 실험 도구까지.

그뿐 아니라 곳곳에 위치한 기괴한 마법진과 마도구들이 서늘한 빛을 명멸하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광기에 빠져 인간성을 상실한 과학자의 실험실 그 자체.

오컬트까지 섞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약간 뻐근한데? 아직 적응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죽을 정도는 아니야."

[일단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지. 생각보다 반응이 빨라. 이제 결과가 나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하군. 역시 이 몸이야. 크흐흐···.]

실험은 순조로웠다.

그로부터 하루.

"큭,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

[흐음, 부작용인가? 「적응」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조금 강도를 줄이는 게 좋겠군.]

다시 사흘 뒤.

"크헉— 쿨럭! 컥!"

[음··· 「초회복」의 한계를 넘어섰나. 아쉽도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갈 수 있었으면 곧바로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조절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

[···의식이 연결되지 않는군. 이제 와서 할리를 잃을 수는 없는데···. 으음, 도박을 한 번 해봐야 하나? 남은 용혈을 전부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한스와 할리의 공동 연구가 시작된 지 세 달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음?"

[드디어 정신이 연결되었군! 도박이 성공해서 다행이야. 용혈을 전부 사용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할리의 몸속에 남아있는 상태니 연구는 계속할 수 있겠지. 큭큭큭···.]

"···그런데 몸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

그 순간.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적응」이 특수스킬「돌연변이」로 진화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육체변이」를 획득합니다."

"개체의 회복력이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스킬「초회복」이 스킬「재생」으로 진화합니다."

"오?"

[오?]

연달아 떠오르는 메시지에 둘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실험 성공이군.]

아우테리카의 시간으로 약 백 일, 지구의 시간으로는 열흘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물론 놈들이 원하던 결과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기인 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쪽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돌연변이」는 외부의 유전자를 통해 자신을 진화시켜 나가는 특성이니,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다르지 않기도 했고.

'그 와중에 「재생」을 얻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소득이군.'

아마 실험을 위해 재생력이 뛰어난 마물들의 피를 수혈한 게 원인이 되었겠지.

「돌연변이」를 획득하자마자 얻은 첫 번째 성과였다.

그런데 기뻐할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보유할 수 있는 아바타의 개체수가 증가합니다."

아바타를 하나 더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음···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는데.'

지금까지 아바타의 개체 수 증가는 카르마 상점의 강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졌으니까.

자연 성장을 통해 아바타가 늘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소소한 성장은 몇 번 있었지만. 이번에 성장하게 되면서 어떤 임계점을 넘은 건가.'

하긴, 슬슬 성장치가 쌓여 뭔가 성과가 나타날 시기이긴 했다.

카르마 상점을 통해서 급격한 강화가 가능하다는 말은, 자연적인 성장을 통해서도 언젠가는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다섯 번째 아바타인가···. 이제 막 할리를 쓸 만하게 만든 참인데.'

새로운 아바타의 활용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물론, 이전과는 달리 즐거운 고민이었다.

***

하인리히가 성기사가 된 지 4개월째가 되던 날.

그의 이번 근무지는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를 지키는 광휘수호 성기사단이었다.

이곳은 성기사 중에서도 신성력이 높아 신앙이 증명된 이들만이 입단할 수 있었는데,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본 상부 덕분인지 연수 차원에서 들어올 수 있었다.

그간 꾸준히 성장한 하인리히의 신성력은 이제 대사제급에서도 상위권이었으니까.

그런 그의 안내를 담당한 것은 광휘수호의 일원인 푸른 머리의 여성 성기사, 라이린 경이었다.

"내부 경비라고 해도 별다를 건 없습니다. 이미 다른 데서 해 봐서 아시겠지만, 바깥에서부터 몇 겹이나 방비가 이어지니까요. 거기다 여긴 기사단장님들이나 대주교님들도 머무시는 곳이라···."

거기에 더 안쪽에는 성녀와 추기경, 교황까지 있다.

물론 어지간하면 그들이 직접 나설 일은 없겠지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성녀는 둘째 치고.'

"그래도 경비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중요 거점으로 향하는 길목은 실수로라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있죠."

"중요 거점이라면··· 어떤 곳이 있나요?"

높으신 분들의 거처나 비밀 금고 같은 곳이겠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인솔을 맡은 라이린에게 물었다.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

하지만 그녀는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흠··· 이 정도 신성력이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대신전의 구석진 곳으로 안내하는 그녀를 따라, 하인리히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간 경비를 하면서도 와본 적이 없는 인적이 드문 곳.

정확히는 경비를 할 필요가 없던 곳이었다.

똑똑—

"광휘수호에서 왔습니다. 신입이 왔는데 서약이 필요합니다."

가볍게 두드린 노크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쪽에서 한 사내가 나와 조용히 그들을 내부로 인도했다.

'이단심문관.'

검은 사제복과 눌러쓴 후드, 입가를 가린 마스크까지.

이곳은 주신교단의 이단심문관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말이 없는 사내의 뒤를 따라, 왠지 모르게 어두운 듯한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 창문이 없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저분 앞에 앉아서 앞에 놓인 문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안내받은 곳에는 테이블 위에 문서 한 장이 있었고, 맞은편 의자에는 한 이단심문관이 앉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상단에 '광휘수호'라고 적힌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니, 딱히 특별한 것 없는 보안 서약이었다.

업무를 하며 알게 된 내용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을 맹세하는 각서.

그것을 읽으려고 한 순간.

스윽—

앞에 앉아 있던 이가 한 손을 올려 하인리히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움찔했지만, 애써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문서의 내용을 읊었다.

"······그에 따라,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묵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문서의 낭독이 끝나고.

이마 위에 올려진 손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

"······?"

그리고 눈앞의 이단심문관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끝났습니다. 나가죠."

이후 라이린의 인도를 받고 다시 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들 외의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저기는 원래 저렇게 한마디도 없이 조용합니까?"

"음, 앞으로도 들을 일이 없는 게 좋습니다. 목소리를 냈다는 건 그만큼 안 좋은 상황이라는 뜻일 테니까요."

굳이 그 안 좋은 상황이 뭔지는 물을 필요 없겠지.

"그래서 뭐 한 겁니까?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금제?"

"하하··· 금제라니요. 축복입니다. 침묵의 축복. 효과는 자의든 타의든 특정한 정보를 누설할 수 없게 하는 것. 대단하죠?"

금제잖아!

신성력이 기반이 된다는 것만 빼면 다른 금제랑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축복인 만큼, 당사자의 머리를 터트린다든가 하는 일은 없겠지?'

"하아···, 그래서 그 중요 거점이 뭐기에 이렇게 '침묵의 축복'까지 받을 필요가 있는 겁니까?"

"흠, 조금만 기다려 보시죠. 저도 침묵이 걸려 있어서 절차를 따라야 발설할 수 있으니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렇게 기다린 시간은 절대 잠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복잡한 절차를 거쳐 알게 된 정보는, 그들이 왜 그렇게 보안을 중시 여겼는지 충분히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다.

"······행해지는 중요한 의식이 방해받으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성녀님의 숙소는······."

중요 인사들의 거처나 비밀 금고 따위는 별것도 아닌 정보였다.

"···마지막으로,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단의 심처 한 곳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곳."

'그것'이.

"불사왕의 마지막 파편이···."

이곳 로셀리아 대신전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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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할리 (2)

'그래, 생각해 보면 이상했지.'

주신교단은 명색이 대륙 최대의 세력 중 하나.

그런 곳에서 수백 년간 파편 하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물론 불사왕도 바보가 아닌 이상, 교단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까다로운 조건을 설정하고 퍼뜨렸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교단도 두 개나 놓친 것이고.

하지만 그 주신교단이 아닌가.

그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광휘수호에서 안쪽까지 경비하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막는 것은 길목일 뿐이죠.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건 좀 더 높으신 분들이 하실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굳이 그 사실을 알려주실 필요가···?"

"침묵의 축복이 있으니까요. 또 우리가 뭘 지키고 있는지는 알아야 좀 더 능동적인 방어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랜드가드 경도 아시죠? 불사왕의 후예가 등장한 이상, 마지막 파편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다마다.

그 불사왕의 후예인 한스가 마지막 파편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얼마나 고민 중인데.

'그런데 고민 할 필요가 없어졌네.'

대신 다른 고민이 생겼지만.

요 몇 달간 성지부터 시작되어 대신전에 이르기까지의 경비가 얼마나 철저한지는 하인리히가 직접 겪어봐서 잘 알고 있으니까.

거기서 또 로셀리아 대신전의 최심부에서 철통같은 보안 속에 있는 파편을 회수한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애초에 광휘수호에 들어왔다는 건 믿을 수 있는 인사라는 뜻이니까요. 윗분들이 상당히 좋게 보시나 보군요?"

"하하하···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기는 하지요."

"하긴 성장세를 보면 지원해주지 않을 수가 없긴 하죠. 흠, 그럼 이제 근무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을 마친 라이린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문으로 향했다.

하인리히도 서둘러 그녀를 따라 방 밖으로 나섰다.

"번거롭죠? 지정된 장소에서만 말할 수 있게 되어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이 있던 방은 앞서 거친 복잡한 '절차'에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아마 저곳도 평범한 방은 아닐 테지.

"시험 삼아 한번 말해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글로 남기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네요. 그······, ······!"

그녀의 말대로 혹시나 해 말을 꺼내 봤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누설할 수도 없지만, 이제부턴 평소에도 언행을 조심하도록 하세요. 부자연스럽게 말문이 막히는 것 자체가 수상하게 보이니까요. 그냥 본인만 아는 비밀이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절대 남한테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

"···네! 알겠습니다. 저만 알고 있을게요."

하인리히는 굳은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품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맹세하듯.

그래, 어차피 다른 누구한테 누설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사실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되니까.

절대 타인에게 알릴 생각 없다.

***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라··· 그냥 찾으려고 했으면 평생이 지나도 못 찾았겠군.]

마물의 숲 깊은 곳에 위치한 비밀 연구 시설.

음산함이 가득한 그곳에서 한 아크리치가 침음을 흘렸다.

그가 바로 교단이 사활을 걸고 추적에 나선 대상이자, 마지막 파편에 대한 정보가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상대.

불사왕의 후예, 한스였다.

할리의 강화 연구를 끝내고 마침내 자유 연구에 들어갔던 그가 뜻밖의 정보를 접하고서 고민에 빠진 것이다.

[골치 아프군. 이거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지금의 한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교단의 심장부에 바로 쳐들어가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내부에 어떤 방비가 더 되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사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니. 기다리다 보면 조만간 기회가 올 터. 큭큭큭···.]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이제 마지막 파편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지금은 그저 확실한 때를 기다리며 기반을 쌓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지금 하는 연구도 여러모로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이 또한 그때를 대비한 준비의 일환. 일단 성녀의 추적을 확실하게 따돌릴 수단을 찾아야겠지. 결계 안에만 있느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가 없어 답답할 노릇이니.]

이미 대략적인 가닥은 잡힌 상태였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문제였지만, 어차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았으니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으리라.

당장 우선 목표였던 할리의 강화는 한창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니 말이다.

***

한스의 비밀 연구 시설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숲속.

파사삭—

울창한 나무 위에서 검은 표범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목표는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어리석은 인간.

그는 아직도 표범의 습격을 눈치채지 못한 듯 불의의 습격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듯 보였으나···.

"카핫! 어림도 없지!"

표범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순간.

그 인간, 할리는 어느새 돌아서서 표범과 마주 보고 있었다.

끝이 뾰족하게 세워진 두 귀를 쫑긋거리는 채로.

기습이 실패했다는 것을 느낀 검은 표범이 재빨리 앞발을 뻗었지만, 그는 이빨을 보이며 포악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미 전투 준비는 끝난 상태였으니까.

뿌드득—

한순간에 그의 오른쪽 팔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며, 손가락 끝에서 다섯 개의 칼날 같은 손톱이 튀어나왔다.

"후읍!"

"크허엉—!"

교차하는 인간과 짐승의 기합성.

표범의 앞발이 할리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으나, 그는 고개를 숙여 피하며 단단하게 근육이 압축된 왼팔로 그 궤도를 흘렸다.

여러모로 잘 써먹고 있는 하인리히의 「성전사 전투술」에 포함된 체술이었다.

그리고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한쪽 손으로, 빈틈이 드러난 표범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콰득! 푸욱—!

"케헥!"

커다란 손아귀에 달린 칼날 같은 다섯 개의 손톱은 단순히 표범의 목덜미를 꿰뚫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가각—

쥐어짜듯 살점을 파헤치고 목뼈를 긁어내는 손톱.

털썩!

단 한 번의 공방으로 승패가 결정되었다.

목덜미의 살점이 모조리 뜯겨나간 채 쓰러진 검은 표범과 달리, 할리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키햐~! 짜릿하구만?"

한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가 이제는 손아귀 한 번에 찌부러지다니.

할리가 이렇게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에는 하인즈 2세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남기고 간 피가 할리의 든든한 영양제가 되어주었으니까.

물론 하인즈가 가진 힘의 근원인 혈마력이나 다양한 능력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혼혈진화」로 강화된 하인즈의 육체는 절대 평범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부풀어 올랐던 오른팔의 근육이 압축되며 부피가 줄어 날렵해졌다.

그리고 그 팔은 곧장 검은 표범의 심장 부분을 파고들었다.

푸욱— 촤악!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에 딸려 나온 검은 표범의 마석.

그것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그는, 어느새 상어처럼 빼곡하게 돋아난 이빨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결정을 씹어 먹었다.

콰직! 까드득— 까득!

'이제 검은 표범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은데?'

「돌연변이」는 다양한 종류의 유전자를 획득해 진화해 나가는 특성.

같은 종을 반복해서 먹어 치우다 보면 아무래도 효율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석을 뽑아 먹는 이유는 단순했다.

「돌연변이」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었으니까.

'드래곤 하트라도 구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마석의 끝판왕인 드래곤 하트.

당연하지만 매물은 물론 그 소재조차 파악된 곳이 없었다.

어디선가는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정보를 그가 알 수 있을 턱이 없으니.

"개체가 반복된 행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괴식」을 획득합니다."

그렇게 검은 표범의 마석을 다 먹어갈 무렵, 익숙한 알림창이 눈 앞에 떠올랐다.

"오? 나한테 딱 어울리는 스킬이잖아?"

「괴식」은 무엇이든 좀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쓸 만한 스킬이었다.

부수적으로는 소화가 빨라지게 해서 에너지 보급을 돕는 유용한 점도 있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

그보다 최근 굉장히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는데···.

"와하하핫—!"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호탕한 웃음.

딱히 웃기지도 않건만, 왠지 모르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돌연변이」를 얻고 나서 할리의 성격이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호탕하다고 해야 할지, 터프하다고 해야 할지···.

"풉··· 파하하핫!"

'그냥 툭 까놓고 말해 싸이코 같군.'

평소에는 나름 괜찮은 편인데, 전투하거나 피를 본 직후가 되면 어김없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거듭된 인체실험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스킬들이 아바타의 개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렇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업자득이라, 남 탓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흠흠··· 계속 이러고 있다 보니, 이건 이것대로 나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시원하게 웃으니까 마음이 상쾌해졌다.

···역시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개체명 : 할리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돌연변이」, 「육체변이」, 「재생」, 「괴식」

-특이 사항 : 갖은 실험을 통해 육체가 돌연변이에 적응했다. 새로운 유전자를 획득할 때마다 최적의 조합으로 진화하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육체를 변이시킨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그에 맞는 형태로 변해 주변에 적응한다.

「육체변이」는 보유한 유전자의 다양한 조합으로 신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용할 때마다 열량이 급격하게 소모된다는 점일까.

하지만 덕분에 이런 짓도 벌일 수 있었다.

뿌드득, 뚜둑—!

전신의 근육이 팽창하며 뼈대가 굵어진다.

어깨가 넓어지고 시야가 한층 높아졌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난 후.

할리는 어느새 2미터가 넘는 근육질 거구가 되어 있었다.

"역시 싸움에는 체격이 큰 게 유리하니까. 적어도 이 정도 덩치는 되어 줘야겠지!"

답답하게 끼는 상의를 찢듯이 벗으며 다시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러모로 조절하며 시험해 봤지만, 역시 할리의 능력을 온전히 쓰려면 체격을 키울수록 유리하군.'

마수를 포함한 몬스터들은 신체에 깃든 마나를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 변질시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파괴력을 발휘한다.

인간의 육체로는 사용할 수 없는 힘.

그리고 할리는 겉은 여전히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을 이루는 뼈와 근육 등은 이미 마수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직 살육을 위해 특화된 놈들의 신체는 인간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했으니까.

꼬르륵—

그 반대급부로 에너지의 소모 효율이 극악이긴 했지만, 이제는 「괴식」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런데 「육체변이」 후유증까지 동시에 겹치니 허기가 엄청난데.'

주르륵—

어느새 할리의 입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선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검은 표범에게 고정된 채였다.

'···「괴식」도 있으니 괜찮겠지?'

무엇이든 탈나지 않고 소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때마침 여기에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먹을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나.

부북—!

할리는 검은 표범의 앞다리 한쪽을 뜯어, 대충 가죽을 벗기고 입가로 가져가 허겁지겁 먹어 치웠었다.

날카롭게 변한 이빨에 뜯겨나가는 마물의 생고기.

뚝뚝 떨어지는 핏물.

할리의 입가와 가슴팍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아니, 역시 아무리 봐도 미친 것 같아.'

어지간하면 각 아바타의 개성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리만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해 보였다.

지속해서 언행에 신경 쓰다 보면 여러모로 더 피곤해지겠지만, 지금의 성향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야만인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응? 야만인?'

다양한 인종과 종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아우테리카 차원.

당연히 이곳에도 야만인들은 존재했다.

그것도 제법 큰 세력을 이룬 채로.

대륙 남부에 위치한 척박한 야만의 땅, 그곳에는 야만족들의 부족연맹 국가까지 세워져 있었다.

'야만인··· 야만 전사··· 괜찮을 것 같은데?'

커다란 체구와 곳곳에 자리한 문신.

터프한 웃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도끼로 적의 골통을 깨부수고, 사냥감의 피로 목을 축인다.

"오! 좋은데?!"

입을 오물거리던 할리가 다시 흥분해서 포효했다.

그래서 얌전히 고기나 먹도록 제어에 신경을 쓰며, 나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요즘엔 야만족들에게도 문화가 전파돼서 이 정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뭐, 어디에나 또라이는 있는 법이니까.'

거친 야생의 야만 전사 할리.

왠지 느낌이 좋았다.

학창 시절 이후 식었던 게이머의 혼이 다시 들끓었다.

'일단 마수 머리 가죽으로 투구를 만들고, 뼈 목걸이를 비롯한 장신구와 커다란 도끼를 구해야겠어.'

편견과 사심이 가득 담긴 코디였다.

교양적인 요즘 세대 남부인들은 치를 떨만한 스테레오 타입의 패션.

그들이 본다면 괜히 남부 야만인들 전체에 대한 선입견을 심는다고 난리를 치리라.

물론 나는 그들의 마음까지 헤아려줄 생각이 없었다.

'하인리히가 도끼술도 배워서 다행이군. 남들 앞에서는 도끼를 사용하고 혼자 있을 때 「육체변이」를 사용하면 되겠지.'

나만 즐거우면 된 것 아니겠는가.

"하핫! 신나는군! 그럼 계속해서 움직여 볼까?!"

다 먹은 앞다리 뼈를 내동댕이친 할리의 다리 근육이 팽창하고, 그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숲을 가로질렀다.

두 눈은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고, 코와 귀는 쉴 새 없이 움찔거리며 주변의 정보를 탐색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일단 이곳에 존재하는 마물들의 유전자를 최대한 획득해 두는 것이 먼저였으니.

그렇게 약 한 달.

언데드들의 도움까지 받은 할리가 근방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마물들을 사냥해 유전자 정보를 획득하고,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진 시간이었다.

#52

할리 (3)

새로 소환할 수 있게 된 아바타는 '휴버트'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게 이름을 짓기까지는 무수한 고뇌와 갈등이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하' 발음만으로는 작명에 제한이 생기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틀을 깨부숴 'H'로 한계를 넓히고자···.

···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쓸데없는 고민 끝에 나오게 된 이름.

사실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지게 된 스킬이었다.

휴버트의 초기 스킬은 「감정」.

물건의 정보를 볼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능력이었다.

'진짜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아직 능력의 숙련도가 낮은 탓인지, 그렇게 정확한 정보는 볼 수 없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은 그 물건의 개략적인 정보 정도.

'물론 막 능력을 얻은 참이니, 앞으로 성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지.'

미래의 거상, 휴버트의 첫 임무는 할리가 마수의 숲에서 드잡이질하는 동안 그가 사용할 물품들을 준비하는 것.

이동할 수 있는 도시를 돌며 「감정」으로 할리가 쓸 만한 무기를 고르고, 가죽 장인에게 마수 머리의 가공을 맡겼다.

-훌륭한 실력의 장인이 무겁고 단단한 흑철 합금을 두드려 만든 양손 도끼. 튼튼해서 쉽게 망가지지 않지만, 매우 무거워 어지간한 힘으론 들 수 없다.

-평범한 장인이 마수 검은 표범의 머리를 가공해 만든 투구. 모양을 만드는 데 집중한 터라, 재질 이상의 방어력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그 외에도 휴버트는 할리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개인적인 취향을 듬뿍 반영해서.

그리고 그 결과물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대륙 서부에 위치한 툴크 왕국의 북부 아오니아 백작령, 타라크의 한복판에.

웅성웅성—

"세상에, 저게 뭐야?"

"남부 야만인인가? 서부까진 무슨 일로 온 거지?"

"엄마— 저게 뭐야?"

"쉿, 보지 마! 빨리 집에 가자."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할리에게 집중되었다.

성문을 지나며 경비병들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눈길이었다.

'후, 이 몸이 좀 멋지긴 하지.'

할리에게 쏟아지는 동경 어린 시선.

그만큼 그의 모습에는 주변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으니까.

2미터가 넘는 거구에 맹수처럼 부리부리한 눈.

뒤집어쓴 검은 표범의 머리에 연결된 가죽이 망토처럼 어깨와 등을 덮었다.

목에는 짐승의 이빨이 주렁주렁 엮인 채 걸려있고, 벌거벗은 상체에는 위압적인 근육이 꿈틀거렸다.

얼굴과 몸 곳곳에 붉은 염료로 그려진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과, 등에 메인 채 양 어깨로 삐죽이 튀어나온 커다란 도끼의 손잡이 두 개.

그러면서 방어구라고는 철판을 덧댄 가죽 조각이 중요 부위 몇몇에 배치된 것이 전부였다.

요즘엔 볼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나 봤던 야만 전사가 이곳에 있었다.

"후후후."

나직하게 웃으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할리의 아름다운 근육에 압도된 이들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경로에서 비켜섰다.

사실 이렇게 요란하게 차려입은 것에는 취향 외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목적은 대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웅이 되는 것.

영웅의 조건에는 일신의 능력 말고도 유명세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강자와, 누구나 알고 있는 강자.

어느 쪽이 더 영웅에 가까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도 영웅 지망생인 할리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음, 그렇고말고. 절대 사심만으로 이런 건 아니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친 호탕한 야만 전사 할리는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대로를 가로질러 용병 길드로 향했다.

콰앙—!

길드의 문이 부서질 듯 시원하게 열렸다.

한순간에 입구로 집중된 시선.

'살짝 밀려고 했는데, 할리의 근력을 생각 못했네.'

내심 민망했지만, 상남자 할리는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법.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러 창구로 향했다.

"뭐야?"

"야만인?"

용병 산업이 발달한 도시이기 때문일까.

길드의 내부는 깔끔하면서도 나름대로 세련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은행처럼 마련된 창구와 그 앞에 줄을 선 채 기다리는 사람들.

터프하지만 예의를 모르지 않는 할리는 얌전히 가장 짧은 줄 뒤에 서서 기다렸다.

여유가 생긴 김에 잠깐 딴짓 좀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테니까.

"후욱, 후욱."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거친 숨소리에 앞에 선 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흠흠···, 그러고 보니 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는 괜스레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길드를 빠져나갔다.

왠지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 밥을 안 먹었더니 배고픈데, 일단 먹고 다시 와야지."

"내 정신 좀 봐. 약속 있던 걸 까먹었네."

그의 앞에 선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피하고, 줄은 순식간에 줄어들어 그의 차례가 다가왔다.

'쯧쯧쯧,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해서야.'

안타까운 현실에 가볍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급한 용무가 있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할리는 기다리는 동안 두 개의 도낏자루를 겹쳐 하던 바벨 스쿼트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끼가 두 개니 날을 양쪽으로 하면 무게도 잘 맞고 좋네. 양손 도끼라 손잡이가 길기도 하고.'

그래봤자 이 정도 무게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도끼를 척척 정리해 다시 등에 걸며 창구로 향했다.

"그, 이곳에는 무슨 일로···."

2미터가 넘는 근육 덩어리가 앞에 서자,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핫핫핫! 당연히 강철의 성채로 향해서 사냥을 하기 위해서지! 이곳은 그러기 위한 도시가 아닌가?"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할리가 굳이 타라크로 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강철의 성채 위쪽에 있는 산맥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몬스터들을 사냥해, 더 많은 유전자 정보를 획득하고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사실 남부의 부족연맹과 야만족들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으니, 바로 그쪽으로 향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칭을 하려면 현지인들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게 유리하지 않겠는가.

'일단 강해진 후 유명해 지면 방법은 어떻게든 생기게 되는 법이니까.'

당장 다른 아바타들도 전부 바빠진지라 더 이상 할리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상 이제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했다.

그리고 명성을 위해서는 정식 절차를 밟는 것이 좋으니, 용병으로서 의뢰를 받아 산맥에 들어가기 위해 굳이 타라크에 먼저 온 것이다.

생각해 둔 할리의 진로는 두 가지.

야만족 출신으로서 이름을 떨쳐 남부 부족연맹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거물이 되든가, 전사로서 용병계에서 명성을 쌓아 용병왕이 되든가.

'둘 다 될 수도 있지.'

사실 그게 목표였다.

"파하하핫—!"

당장은 이제 막 용병이 된 신출내기였지만···.

그렇게 야만 전사 할리는 용병이 되어 북부 산맥으로 향했다.

***

하인리히는 오늘도 한가하게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예상했듯이, 지난 근무 기간은 계속 평화 그 자체였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데, 이 대신전 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남아도는 정신력을 다른 아바타에 배분하고 있을 때였다.

"음?"

그가 지키고 선 길목 안쪽에서 뭔가 부산스러운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고위 성직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향하는 통로.

아무래도 교단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알아도 될 이야기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싶어 신경을 끄려던 찰나.

"앗! 하인리히 경,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네요!"

안쪽 통로에서 성녀가 나타났다.

덧붙여서 말하자면, 지금 날씨는 한창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이었다.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나오거든요. 꼬물꼬물 얼마나 귀여운데요!"

이 아가씨의 감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줘야겠지.

"예···. 그 길쭉하고 번들거리며 꿈틀거리는 그··· 굉장히 귀엽죠. 네."

"역시 하인리히 경은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지렁이의 귀여운 점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그 작은 생명체가 꼼지락거리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하하···. 그런데 교단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뭔가 들뜬 듯한 기색인데···."

대화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서둘러 주제를 바꿨다.

하인리히가 알면 안 되는 이야기라면 대화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

"아! 이번에 다른 세력과의 협력이 결정됐거든요."

아무래도 자신이 알아도 되는 이야기였나 보다.

아무리 성녀가 철딱서니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명색이 성녀이니 지킬 것은 철저히 지킬 테니까.

···그렇겠지?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에서 하이 엘프가 파견되기로 했어요. 어쩌면 불사왕의 후예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에나멜 대륙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온 대륙의 사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 작은 대륙이었다.

그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을 제외한 이종족들.

사실상 에나멜 대륙 전체가 이종족 연합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하이 엘프라면 엘븐 킹덤에서 상당히 고위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저희를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이곳까지 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간 한 번도 불사왕에게 침공당한 역사가 없는 에나멜 대륙인 데다, 엘프들은 아우테리카에 몇 존재하지 않는 소수 교단인 세계수를 섬기는 이들이니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도 저희 쪽에 바라는 것이 있으니 협력 작전이 성사된 거죠. 엘븐 킹덤은 인간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저희 주신교단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요!"

엘프들이 세계수를 섬긴다고 해서 주신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주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과 숭배의 대상을 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니까.

주신교단도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만큼,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주기적으로 교류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안인 것 같은데, 제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입니까?"

"어차피 곧 공표될 거예요. 엘븐 킹덤의 사절을 맞이할 준비도 해야 되니까요."

다행히 성녀도 따질 건 다 따져보고 이야기해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인리히 경 정도면 이 정도는 알아도 괜찮아요! 세례를 받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주교급 신성력에 가까워지다니! 어쩌면 나중에 성자급까지 오르실지도 모르니까요!"

···진짜 제대로 판단해서 이야기해준 게 맞겠지?

그간 겪어본 성녀는 이상할 정도로 하인리히에게 호의적인 면이 있었으니까.

신성력이 강한 이들을 친밀하게 여긴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큰 차이가 있었다.

'사실 나한테 나쁜 일이 아니긴 하지. 성녀가 직접 말해줬다고 하면 뭐라고 따질 사람도 없고.'

그래도 이 순진한 아가씨가 어떤 못된 악당에게 속아 중요한 정보를 술술 불어 버릴까 봐 심히 걱정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내가 옆에서 잘 지켜주면 되겠지.'

우리 착한 성녀님을 이용해 먹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아앗! 쉬는 시간이 끝나 버려요! 하인리히 경이랑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전 지렁이를 봐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성녀는 일방적인 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음, 그런 능력을 지렁이를 관찰하는 데 사용하다니."

일전에 비가 오는 날 성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쪽은 우산을 들고도 흥건히 젖은 채였건만, 성녀는 맨몸으로 화단에 쪼그려 앉아 지렁이를 관찰하는 와중에도 뽀송뽀송한 상태 그 자체였다.

투명한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빗방울이 그녀의 일정 범위 안으로 범접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지렁이들에게 신성력을 퍼부어서 치유와 축복까지 걸어주고 있었지.'

성녀의 축복을 받은 지렁이라니.

처음 그걸 목격했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신도라도 쉽게 받을 수 없는 호사건만.

더 이상 그녀에 대해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전환했다.

'그나저나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라···.'

그들의 존재가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딱히 접할 수 있는 정보도 없었으니까.

'설마 들키진 않겠지?'

성녀의 눈길에서는 벗어났지만,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 미지수인 하이 엘프까지 가세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결계를 좀 더 보강해 둘까.'

다른 차원의 술법을 좀 더 섞어서 공을 들여 놔야 할 것 같았다.

***

그리고 불과 며칠 후.

하인리히가 광휘수호 성기사단에서 근무할 날이 절반 정도 남은 시점에.

엘븐 킹덤의 사절단이 대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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