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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흡혈귀 (1)

사실 흡혈귀 자체는 한스로 몇 번 접해본 적이 있었다.

바로 조금 전, 공장을 습격했을 때도 한 명 있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는 하인즈가 거래 중이었고, 그놈도 서번트 급에 불과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는 기억을 읽으면 되니까 번거롭게 살려서 마주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갑자기 마주한 다른 차원의 흡혈귀에 당황했다.

그것도 아마 하인즈보다 강한 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뭐, 내 소개를 먼저 하지. 나는 '녹터니아' 출신이다. 지구로 돌아온 지는 5년 정도 됐군. 이름은··· 일단 '감마'라고 불러."

준수한 외모와 친근한 미소, 사교적인 말투.

그는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인즈. 그쪽 예상대로 이제 막 지구로 돌아왔고, 출신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더는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편하게 대답하던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급성장한 정신력이 순간적으로 폭증해 사고가 가속한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간이 늘어지며 공간이 서서히 정지했다.

'나는 왜 순순히 대답하고 있지? 만난 지 5분도 되지 않은 처음 보는 자에게? 먼저 소개를 했으니까? 저자가 말한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이 있나?'

의심이 인 순간, 「마인드 허브」에 이질감이 감지되었다.

정신을 파고드는 이능의 힘.

자연스러운 감정에 스며들어 곧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호감이 가는 외모와 언동, 자연스럽게 대답할 상황을 유도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명경지수」마저 온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위화감을 감지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니,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대놓고 사용하지 않은 건, 그것이 능력의 한계인지 은밀한 발동을 위해 신중을 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조작계 이능. 저자의 고유스킬인가? 아니면 흡혈귀로서의 능력?'

마음속으로 그에 대한 경계도를 높였다.

중요한 것은 내가 대답하던 도중이었다는 것.

이름이야 어차피 개체명일 뿐이니 상관없고, 갓 돌아왔다는 것은 설정에 불과하다.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내비치지 않고, 일단 출신 차원은 숨긴다.

"···'도트미어' 차원에서 왔다. 내가 처음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선 정보를 찾을 수 없더군."

"흐음, 역시 그랬나."

정상적으로 돌아온 시간 속에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감마는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빛나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그동안 제법 많은 흡혈귀를 만나 봤지만, 너 같은 피 냄새는 처음이거든. 신기하지 않아? 수많은 차원이 있고 그중엔 흡혈귀가 있는 차원도 많은데, 그들의 피의 특성이 모두 달라."

뭐, 그건 다른 종족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을 이은 그는 나를 관찰하듯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도트미어의 흡혈귀라, 그러고 보니 너는 거기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지? 이게 차원마다 수준이 다르거든. 너 정도면 제법 괜찮은 대접을 받았을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다시 정신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 저항하지 않으며 적당히 어울려 주었다.

"뭐, 중간 간부 정도는 됐지."

"호오, 제법 수준이 높은 차원이었나 보네. 그런데 그 정도까지 힘을 키우려면 제법 흡혈도 많이 했을 텐데, 고생이 심했겠어."

"필요한 경우에는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그는 원래 말이 많았는지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호기심이 많아서 말이야. 그쪽 흡혈귀한텐 뭔가 특징적인 능력이 있나? 듣기로 어디 흡혈귀는 불사에 가까운 재생능력을 가졌다고 하더군. 정말 부럽기 그지없어."

저쪽도 많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 정보를 교환하자는 식으로 나오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나는 의심받지 않을 핑계를 대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피했다.

"그건 잘 모르겠군. 내가 다른 흡혈귀들을 본 적이 없으니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거든."

"아··· 그건 그렇군.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었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감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번엔 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감마. 아까 많은 흡혈귀를 만났다고 했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 설마 방금처럼 일일이 찾아다닌 건가? 우리 흡혈귀들은 마인 취급이라 항상 숨어 다녀야 할 텐데?"

"흐음···."

내 질문에 그는 묘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우리가 죄인도 아니고 언제까지 숨어서 지낼 수만은 없잖아?"

그는 처음부터 원해서 흡혈귀가 된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은 너무하지 않냐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끼리 뭉쳐야지. 나는 흡혈귀들이 모인 조직, 혈맹 소속이다. 6레벨이지."

"혈맹? 6레벨?"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자리가 좋지 못하군. 따라와."

그는 어느 정도 이쪽에 대한 파악이 끝났는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어쩌면 나 정도는 언제든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걸지도.

그렇게 이동한 곳은 도로 한편에 정차된 스포츠카였다.

그는 운전석에 오르며 조수석 쪽을 턱짓했다.

부르릉—

차에 오르자 부드럽게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감마.

"어디로 가는 거지?"

"말로만 듣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낫지 않겠나?"

"···혈맹 본부로 가는 건가? 날 어떻게 믿고?"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본부는 아니야. 일종의 지부라고 해야 할까···. 사실 딱히 본부랄 게 없거든. 점조직에 가까운 형태라."

그렇다고 또 완벽한 점조직은 아니지만.

그렇게 덧붙인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냥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각 지역에서 서로 협력한다고 보면 돼. 점조직보다는 중계소에 가까울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모인 무리를 '크루(Crew)'라고 부르지."

하긴, 집단을 이뤘다고 해도 평소엔 숨어 다녀야 하는 마인들이다 보니 대놓고 뭉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믿냐니, 우리는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닌가. 힘들 때 서로 도와야지."

훈훈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감마.

퍽 감동을 주는 말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하인즈의 정신을 파고드는 이능의 힘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같은 말을 했던 녀석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든든한 동료가 된 말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 역시 좋은 말이었다.

"그리고 또 알아둘 게 하나 있군. 내가 6레벨이라고 했었지? 지구에서는 '레벨'이 흡혈귀의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기준으로 부르다 보니, 정작 모두가 모인 지구에서는 서로 뜻이 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귀족의 오등작으로 나눈 곳도 있고, 진조니 사도니 하는 데도 있었지. 참고로 녹터니아는 체스의 말로 구분했어. 난 비숍이었지."

그래서 당시 각지를 대표하는 흡혈귀 강자들이 모여 합의한 것이 '레벨' 체계였다.

"정확히는 유럽 쪽이었지만. 그때는 유독 거기에 강한 흡혈귀들이 많았거든. 그쪽에서 정립된 체계가 자연스럽게 수입되어 우리도 적용하게 된 거지."

각자의 차원에서 그 땅의 특성에 맞게 뿌리가 갈라졌지만, 모든 흡혈귀가 공유하는 특성이 하나 있었다.

모든 차원을 통틀어 흡혈귀의 힘의 근간이 되는, 핏속에 담긴 '흡혈인자'가 그것이었다.

그 흡혈인자의 농도를 측정하여 세부적으로 나누는 것이 레벨 체계.

"다 왔다. 각자 집에서 따로 생활하고 가끔 모일 때 쓰는 데라 좀 작아."

스포츠카가 멋진 3층 주택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이놈의 금전 감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들어가자. 안에 흡혈인자를 측정할 수 있는 기기가 있어."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보고 실실 웃는 감마.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머릿속에 파고든 이능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깨달은 건데,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이 놈이 정신조작을 강화하는 조건이었던 것 같다.

'어쩐지 말이 많더라니. 덕분에 좋은 정보들을 많이 얻긴 했지만.'

"뭐해? 빨리 움직여."

여기까지 왔으면 상황이 다 끝났다는 것일까?

나는 행동을 강제하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려 그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혈마법」이 있는데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결계가 느껴지다니. 은폐의 수준이 장난 아닌데?'

태연하게 감상하며 감마를 따르던 도중, 앞서가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인상을 찌푸린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안쪽에 여섯 명과 세 명이 서로 대치하고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흡혈귀 특유의 피 냄새.

하지만 그 중 한 명에게선 감마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의 등장에 여섯 명 측이 반색했다.

동시에 맞은편에 있던 셋 중에 가운데 서 있던 이, 피 냄새가 나지 않는 여성이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이제야 오셨네, 도한수 씨. 오래 기다렸다고?"

"후우, '감마 도'라고 불러라."

"그래, 그래. 감마도 씨, 내가 왜 왔는지는 알지?"

그녀는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감마의 앞으로 걸어왔다.

덕분에 정면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흡혈귀인 걸 감안해도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보는데. 아니, 아닌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굉장한 미인이다.

저 정도 매력을 지닌 여성을 쉽게 잊을 리가 없는데.

묘한 기시감에 고민을 거듭할 때였다.

"그래, 진소란 씨.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하! 갑자기? 예의? 그쪽이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았으면, 그 역겨운 얼굴 보러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언쟁을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떠오를 듯 말 듯 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 얼굴에 저 목소리. 어디 밖에서 본 건 아니고, 그렇다면 인터넷인데···?

'맞아! 오키드. 인터넷 방송인이었지. 예쁘다고 커뮤니티에 캡처 사진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때 몇 번 봤었어.'

그때는 화장으로 인상을 바꾼 건지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어코 기억해 내자 답답함이 사라지고 정신적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내심 흐뭇해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쪽은 처음 뵙는 분이신데, 누구시죠?"

이쪽의 정체를 묻는 질문.

하지만 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감마의 이능에 육체의 통제권을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거부하려면 할 수 있지만···,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볼까.'

"내 손님이다. 그쪽하곤 상관없으니 신경 끄시지?"

슬그머니 내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에게 쏘아붙이는 감마.

하지만 그녀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을 텐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설명 좀 해 주겠나?"

"끝까지 그렇게 나오시겠다?"

진소란이 감마를 보며 이를 갈았다.

"그쪽이 흡혈귀들을 납치해서 뭔가 하고 있잖아! 이번엔 우리 쪽 보호를 받던 크루원을 데려갔다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과연, 처음부터 작정하고 흡혈귀들을 잡아들이던 놈이었군.'

진소란과 두 명의 일행은 기세를 돋워가며 그를 압박했다.

그에 감마의 동료로 보이는 이들도 이쪽으로 합류해 다시 대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참고로 우리가 여기 온다고 크루에 알리고 왔으니까, 우리가 돌아가지 못하면 곧바로 상부에 알려질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녀와 일행은 수는 적지만 기세는 감마 패거리에 밀리지 않았다.

아무렴 셋 다 감마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으니까.

오히려 진소란은 감마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작정하고 정예들만 데리고 불시에 들이닥친 거겠지.

"그쪽에 있는 사람도 이번에 납치해 온 거겠지? 대체 무슨 속셈이야?!"

"후우···."

감마가 눈가를 찌그러뜨리며 그녀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에게 명령을 내려서 부정하게 해 봤자,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모습만 연출되겠지.

그에게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리는 능력은 없었다.

"쯧, 시건방진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아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겠다?"

진소란이 싸울 태세를 갖추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동료들도 각기 전투를 준비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저년 잡아. 재료로 쓴다."

"하! 쉽게 당할 줄 알···, 크흡!"

콰지직— 콰앙!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녀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등을 지키던 동료가··· 아니, 동료였던 근육질의 사내가 서서히 주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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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흡혈귀 (2)

'어, 이거 흥미진진한데?'

설마 했던 배신이라니.

혹시 저놈도 감마의 정신지배를 받는 건가 싶었는데, 딱히 그런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크흑, 민영! 네가 왜···? 어째서!"

척추가 박살 난 채 바닥을 나뒹구는 진소란.

시간만 충분하다면 흡혈귀의 재생력으로 회복이 가능하겠지만, 당장은 무리였다.

그사이 감마의 부하들이 기다란 꼬챙이를 들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저리 꺼져!]"

콰아앙—!

그녀의 외침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

달려들던 흡혈귀들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반항도 오래가지 못했다.

"크으으— 네, 네놈들···."

전신이 꼬챙이에 꿰뚫리고 상처가 얼어붙었으며, 칠흑 같은 검은 쇠사슬이 그녀의 이능을 봉인했다.

아무리 그녀가 강하다지만 기습까지 받은 상태에서 이 자리의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후우,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고 하는 거다."

감마가 이죽거리며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처음 기습한 민영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고, 또 다른 동료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동료들을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감마를 노려보았다.

"평화? 좋지. 하지만 그것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는 거다."

그는 제압당해 쓰려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설교하듯 말했다.

"우린 강하다. 널리고 널린 가축 같은 인간들보다 훨씬 강하지. 하지만 우리는 열등한 놈들의 눈치를 보며 숨어 살아야 한다. 그 역겨운 위선자들 때문에."

"단단히 미쳤군. 스스로 인간이었던 시절을 부정하는 건가? 이제 흡혈귀가 됐다고?"

"뭐···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

감마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뭐라 항변하든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받았다. 목숨을 건 전장과 수많은 수라장을 이겨내 지금 이 자리에 섰지.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그는 연설하듯 외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동료들은 물론 진소란과 같이 온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 우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지? 언제까지? 어디 당당하게 나설 수도 없고, 이름을 떨칠 수도 없다. 그저 숨어서 연명만 하는 삶, 그런 삶에 의미가 있나?"

"개소리! 애초에 강경파에서 매번 사고를 쳐 대니까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거잖아! 처음부터 서로 양보하며 대화를 나눴으면, 충분히 공존할 수 있었어!"

"글쎄, 그건 네 생각일 뿐이겠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예상외로 그녀의 항변에도 감마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온건파에서 함께해 왔던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의 시선을 따라 진소란이 자신의 동료였던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외면하는 이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는 민영.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던 민영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온건파의 방침에 따라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그러니 회의감이 들더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평생? 기껏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지난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 있던 일행도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들의 반응에 진소란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녀의 반응을 즐기던 감마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애초에 우리는 포식자다. 그런데 왜 우리가 숙여야 하지? 그래, 일단 수가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겠지. 머릿수야말로 영향력의 척도니까."

고개를 숙인 진소란과 스스로에게 도취해 떠드는 감마.

나는 이 촌극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정보를 정리했다.

범죄 동기도 훌륭한 정보였으니까.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압도적인 힘이!"

하지만 여기는 이세계가 아니다.

이세계에서는 성장에 보정을 받아 빠르게 강해졌지만, 지구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제 우리는 카르마를 쌓을 수도 없고, 이전처럼 빠르게 강해질 수도 없다! 원 세계의 흡혈귀들처럼 꾸준히 흡혈해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어. 그런데 그것마저 제한한다고? 하! 혈액팩?"

직접 피를 흡혈하는 행위 자체에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다.

단순히 혈액을 마셔서 힘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생명력을 갈취하는 데에서 업을 쌓고 힘을 획득하는 의식에 가까웠다.

아무런 염(念)이 담기지 않은 혈액팩으로는 허기를 달랠 수 있을지언정 힘은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이어트 식단 같은 건가?'

혈액팩 만으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겨우 연명하듯 생을 이어가는 것에 가깝고, 그마저도 장복하면 가진 힘마저 서서히 감소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빠르게 강해질 방법을 찾아 헤맸고, 기어코 그 방법을 찾아냈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그것은 진소란도 마찬가지였다.

"너··· 이 자식 설마? 금기에 손을 댄 거냐?"

지금까지 납치되었다던 흡혈귀들이 전부 어디로 갔겠는가?

동족 포식.

흡혈귀가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

하지만 그 효과 이상으로 부작용이 극심하다.

그것은 아우테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구에서의 악명은 차원이 달랐다.

"금기가 괜히 금기가 아니야! 너희는 또다시 그때의 비극을 되풀이할 셈이냐?!"

귀환자 사태 초창기.

전 세계적으로 많은 혼란이 있었고, 그중에는 흡혈귀들이 일으킨 사건도 많았다.

어느 차원이나 동족 포식은 불문율이었지만, 개중에는 그것을 이겨내고 강해진 후에 지구로 귀환한 흡혈귀들도 있었다.

이미 살짝 맛이 간 상태였던 그들은 지구로 돌아와서도 강해지기 위해 같은 흡혈귀들을 습격했고, 그 결과···.

"다시 광혈귀(狂血鬼)를 만들어 낼 셈이야?!"

타 차원 흡혈귀의 피를 받아들이면, 서로 다른 흡혈인자가 결합해 진화한다.

열성인자는 도태되고 우성인자만 발현되면서 압도적으로 강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으로 극심한 정신 오염이 일어난다는 거군.'

유전자 단위의 진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니, 그 대가로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 결과 피에 미친 광혈귀들이 날뛰면서, 세계적으로 흡혈귀에 대한 위험성이 제기된 것이다.

사실 흡혈귀들이 이렇게까지 박해받는 데에는 그때의 사건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상부에서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어떤 끈을 쥐고 있건 간에, 통째로 날아가 버릴 거라고!"

이후 지구에서 동족 포식은 금기가 되고, 광혈귀는 같은 흡혈귀에게도 척살대상이 되었다.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겠다니···.

"말은 끝까지 들어. 물론 동족 포식을 이용한 것은 맞지."

이어서 감마는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수한 연구와 협력 끝에, 핏속에 담긴 사념을 최대한 제거하고 안전하게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만큼 효과도 줄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혈마법과 흑마법은 물론 주술, 저주, 연금술 등 각 차원의 지식을 모아 이뤄낸 업적.

그 과정에서 외부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 자식, 왜 저렇게 설명충마냥 떠들고 있나 했더니. 또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잖아?'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니 그의 언동에 영향을 받는 무리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약한 이들은 그에게 좀 더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강한 이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지 진소란을 배신한 자들에게 남아있던 미약한 죄책감도 사라졌다.

"이 정도면 궁금증은 다 풀렸지? 그리고 남은 이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같은 혈맹끼리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이제 끝을 내려는지 감마는 그녀에게 다가가 앉으며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저 두 사람이 협력해 주기로 했으니까, 알리바이는 걱정하지 마. 너는 적당히 돌아가는 길에 가디언에게 죽은 걸로 해 두지."

"약속은 지켜라. 그녀가 여기로 온다고 했을 때, 우리도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온 거니까."

"물론이지.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재료도 생겼으니, 당신들을 우선으로 약을 지급하도록 하지."

시원하게 대답한 그는 비참한 모습의 진소란을 내려다보았다.

녹터니아에 있을 때부터 가치관이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쳤던 여자다.

이걸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시원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뭐, 마지막 가는 길이니 편하게 보내주지. 잠시 자고 있으면 금방 끝날 거야."

"너···!"

뭐라고 외치려던 그녀는 감마가 쏟아부은 혈마력에 곧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를 안쪽 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예기치 못한 일로 오래 기다리게 했군. 뭐,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겠지? 이거 미안하게 됐어?"

실실 웃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감마.

드디어 이쪽을 봐 주는군.

"아니, 제법 재밌었으니까.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며 느긋하게 대답하자,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부하에게 눈짓했다.

"···5레벨입니다. 재생력이 좀 강한 편이긴 한데, 특이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감마는 다시 태연한 얼굴이 되어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옆에 있던 부하한테 수준을 측정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아우테리카의 순혈이 대충 5~6레벨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허세인가? 어떻게 내 제압을 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5레벨 혼자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확실히 그렇다.

정확한 레벨은 잘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순혈 급만 넷이고 나머지도 잔혈 이상이다.

빠져나갈 거였으면 진소란이 한창 반항할 때 움직이는 게 나았으리라.

'이제는 딱히 그럴 필요 없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한번 직접 써먹어 봐야지 않겠는가.

"어디 보자··· 아홉인가?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다니, 아홉 명분이나 먹으면 얼마나 강해질지 기대되는군."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여전히 태연한 내 모습에 감마는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설명해 주지 않았나? 광혈귀 사태가 그런 이유로 벌어진 것이었다니. 이런 비사도 알게 되고, 오늘은 여러모로 유익한 날인 것 같아."

"그냥 미친놈이었군···."

그는 더는 말 섞기도 싫다는 듯 부하들에게 턱짓했다.

감마의 신호에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놈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아아아—

갑작스레 퍼지는 한기.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고, 일순간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했지만···.

어느새 건물 내벽 전체를 어둠이 뒤덮고 있었다.

[은폐 능력은 제법이었다만, 보안은 영 부실하구나.]

어둠 속에서 한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를 파악할 때 내부에 있는 하인즈의 도움을 살짝 받기는 했지만, 이제와선 딱히 상관없는 문제겠지.

"···하회탈? 어떻게 여기에?!"

감마는 대경해 소리쳤다.

은폐 능력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설치한 결계가 발각당한 것이다.

당황해 상황을 살피는 그의 시선에 아까부터 유독 태연하던 하인즈가 들어왔다.

"너, 너···! 네놈이 끌어들였구나···!"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뭔가를 한 것이리라.

그게 아니라면 저 태도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렇게 확신해 이를 갈던 감마 못지않게 당황한 이가 있었으니···.

"저, 가··· 감마님···!"

하인즈의 레벨을 말해 주었던 간파 능력자였다.

하회탈이 당장 움직일 낌새를 보이지 않자, 감마는 눈만 힐끔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

"저, 이 정도 기운은 저도 처음 보는지라 확실하지 않은데···!"

"답답하게 뭐 하는 거야!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횡설수설하던 그는 감마의 호통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8레벨···! 최소 8레벨입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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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흡혈귀 (3)

한스의 마력을 읽은 이의 '간파'는 완벽하지 않았다.

흡혈귀로서의 혈계 능력인 그것은 상대가 약할수록 효과적이지만, 강한 상대에게는 거의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그저 거대한 무언가를 어림짐작해 판단을 내릴 뿐.

거기에 한스는 흡혈귀도 아니니, 그들의 레벨 체계에 맞춘다고 해도 오차가 있을 것이다.

원래라면 흡혈인자를 측정해 레벨을 나누는 것이 정석이니까.

하지만 그 모든 사항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코앞에서 압도적인 강자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으니.

[호오···. 너, 흑마법을 익혔구나.]

한스는 감마를 보며 감탄했다.

하인즈로 대면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은폐했는지 흐릿하게 느껴질 뿐이었지만, 이미 흑마법에 있어서 대가의 반열에 오른 한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

"크윽, 어떻게 내 은폐를 꿰뚫고···!"

이를 알 수 없는 감마는 그저 이를 갈 뿐이었다.

비장의 수단이었던 혈계 능력 '은폐'와 그것으로 감추던 흑마법이 동시에 읽혀 버렸으니···.

[흥미롭구나. 새로운 체계의 흑마법이라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군.]

그동안 치안 유지 활동을 하며 간간히 흑마법 사용자를 만날 수 있었다.

흑마력의 영향으로 그들 중 대부분이 맛이 간 미친놈들이었고, 한스는 기쁘게 그들의 지식을 빨아들였다.

'덕분에 제법 성취도 얻었지. 그런데 여기서 또 새로운 체계를 발견하다니.'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순간 멈칫했다.

이 흡혈귀들은 전부 하인즈의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쓸 예정이지 않았나.

'머릿속을 뒤지는 과정에서 흑마력에 노출되면 피가 상할 텐데···. 흡혈 당해 죽은 상태에선 기억을 읽지 못하고, 강령술에는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하지?'

갑자기 찾아온 딜레마에 한스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감마와 일당들이 일제히 산개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불쌍하게도.

[쓸데없는 발악을 하는구나. 이곳은 이미 나의 영역. 내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쿠웅—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찍은 한스를 중심으로 흑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키히히힛]

"으헉! 뭐야 이것들은!"

어둠에 뒤덮인 벽면과 천장, 바닥에서 새까맣게 물든 언데드들의 신체 일부가 튀어나와 도망치는 이들을 공격했다.

하인즈가 놈들을 구경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한스도 결계 내부에 숨어만 있던 게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 은밀하게 이뤄진, 결계 내부에 자신의 영역을 덧씌우는 작업.

한스의 흑마법이 날이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크윽···."

"뭉쳐! 퍼지면 각개격파 당한다!"

아까 진소란과 싸울 때도 봤지만, 그들도 귀환자인 만큼 다양한 능력들이 나왔다.

불, 얼음 같은 자연계 능력을 비롯해 염력과 순간 가속, 그리고···.

"흐읍!"

쿠웅—!

지금 한스의 눈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육체 강화 능력까지.

'진소란의 동료였던 자로군. 민영이라고 했었나?'

전투태세에 들어간 그는 인간의 형상을 벗어나 있었다.

폭력적으로 부풀어 오른 전신의 근육과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 입에는 상어 같은 이빨이 빼곡히 돋아났다.

"크아아아!"

쾅! 쾅! 콰앙—!

폭발적인 속도로 두들기는 주먹에 한스의 방어막이 연신 출렁거렸다.

특유의 빠른 스피드로 언데드들을 피하고, 바닥에서 솟아 나오는 손아귀를 밟아 부수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흐음, 저게 저쪽 흡혈귀의 특성인가. 육체 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진화했나 보군···. 흥미로운데."

같은 흡혈귀인 하인즈는 저것이 이능의 힘으로 변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우테리카의 '슬레이브'와 비슷한 저 형상은 저쪽 차원 흡혈귀들의 공통된 특징이리라.

거기에 고유스킬로 보이는 육체 강화 이능까지 더해지니, 그 시너지가 상당했다.

푸푹—!

"크허억!"

물론 그것도 한계는 있었지만.

사방에서 뻗어 나온 검은 가시가 그의 전신을 꿰뚫었다.

흡혈귀들을 최대한 온전하게 잡을 생각이었는데, 이놈은 너무 팔팔한지라 약간의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적당히 상대하려니 만만치가 않군.]

숨만 붙여놓을 생각이었다면 벌써 끝났겠지만, 이들 하나하나가 하인즈에게 먹일 성장제다 보니 상대하는 데 제약이 따랐다.

유기농 재배의 어려움이랄까.

그 순간, 하인즈가 「가속」을 사용해 바닥을 굴렀다.

쉬익—!

하인즈의 목이 있던 위치를 가르고 지나가는 붉은 칼날.

진소란과 함께 왔던 나머지 한 명이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데?'

한스가 펼쳐놓은 심연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기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목이 베일 뻔했다.

이 공간을 통제하는 한스가 놈의 은신을 파악했고, 그와 사고를 공유하는 하인즈는 덕분에 타이밍을 맞춰 피할 수 있었다.

"쯧."

기습이 무위로 돌아가자 혀를 차며 곧바로 사라지는 암살자.

여전히 하인즈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틈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나.'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으니, 같은 편으로 보이는 하인즈를 공격해 한스를 흔들 속셈이었겠지.

어쩌면 무력화시켜 인질로 잡을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고.

'목이 베인다고 바로 죽지는 않으니까.'

하긴, 놈들도 나름 온갖 전장을 헤쳐 나온 전투의 베테랑인데 너무 날로 먹으려고 했나 보다.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먹기 좋게 손질할 필요가 있겠군.]

한스에게서 유형화된 흑마력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사방으로 한기가 퍼지고, 공포의 오라가 공간을 잠식했다.

"크헉!"

"이놈들 갑자기 강해졌···. 흡!"

나름 선전하며 탈출구를 찾던 흡혈귀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6레벨이라던 놈들도 사방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흑마법에 대응하느라 쩔쩔매고 있었다.

숨어서 하인즈를 기습했던 암살자도 마찬가지.

피를 오염시킬 수 있는 저주 같은 건 지양했지만, 육체를 파괴하는 흑마법은 아낌없이 사용했다.

어지간해선 죽지도 않는 놈들이니, 진작 이렇게 했으면 편했을 텐데···.

"앞으로도 먹을 수 있는 놈들은 많으니까. 그럼 여유도 생겼겠다, 우선 한 놈 해치워 볼까?"

하인즈는 전신이 가시에 꿰뚫려 구속된 상태에서도 거칠게 저항하는 민영에게로 다가갔다.

"크아아악! 이딴 것으로!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맹수처럼 울부짖는 그의 몸부림에 검은 가시가 하나둘 깨져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자력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으리라.

촤르르륵—

물론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는 한스가 검은 사슬로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끄으으윽!"

사방에서 조여 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쓰는 그의 흉측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인즈는 그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잡고 몸에 올라탔다.

'덩치가 너무 크니까 흡혈할 각도가 잘 안 나오네.'

2.5미터에 달하는 근육질 거구.

그의 목덜미에 입을 가져가며 송곳니를 날카롭게 뽑았다.

콰악—

질긴 피부와 강철 같은 근육이 송곳니를 가로막았다.

하지만 하인즈는 턱과 송곳니에 혈마력을 쏟아부으며 기어코 목덜미를 꿰뚫는 데 성공했다.

"크악! 이 미친놈이! 직접 동족 포식을 하려 하다니, 제정신이냐?!"

무시하고 그의 피를 빨아들였다.

그의 생명력과 함께 힘의 근원인 흡혈인자들을 갈취했다.

[정제 과정도 없이 동족 포식이라니 미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를 배신···는데. 그녀를 배신하고힘을힘···더욱강한힘······.]

그리고 피와 함께 딸려온 그의 사념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정신을 오염시켰다.

원망과 증오, 고통과 절망.

그 외의 온갖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확실히 아우테리카에서 동족 포식을 했을 때보다 훨씬 심하네. 이 정도면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하겠어.'

나야 「마인드 허브」로 깔끔하게 거를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마침내 흡혈이 끝났다.

모든 혈액을 갈취당한 민영은 바짝 마른 채 서서히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후우—."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한다. 혈류가 가속하고 전신이 불에 타는 듯하다.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핏속에 담긴 서로 다른 흡혈인자가 결합해 변이··· 아니, 진화하는 것이 느껴진다.

"하아아···."

입을 통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자세히 보니 전신의 모공에서도 열기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드드득!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핏줄이 터졌는지 멍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개체가 보유한 흡혈인자가 진화하며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를 획득합니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육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하인즈의 몸이 가벼워졌다.

골격이 성장해 키와 덩치가 커졌고, 근육의 질과 밀도의 상승으로 주먹에서 이전과는 다른 힘이 느껴졌다.

"···좋은데?"

이번에 얻은 「혼혈진화」는 다른 흡혈인자를 획득할 때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스킬이었다.

이렇게 보니 왜 광혈귀가 문제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힘을 가진 이들이 피에 미쳐 날뛰었다면···.

"그 힘이 이제 내 것이란 말이군. 거기다 아직도 여덟이나 남았고."

[이렇게 효과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흑마법이야 앞으로 얼마든 기회가 있으니. 지금도 제법 소득이 있고 말이지. 큭큭큭···.]

부하들이 모두 쓰러지고, 암살자와 단둘이 남은 감마는 숨겨왔던 흑마법을 아낌없이 써가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한스는 놈을 적당히 압박하면서 「사악한 지혜」로 그 밑천을 털어먹는 중이었다.

"일단은 이곳에 남은 여덟. 그러고 나면···."

결정했다.

혈맹을 내가 먹어야겠다.

안 그래도 부릴 수 있는 쓸만한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다.

혼란을 부추기려는 강경파를 쳐내고, 온건파만 남겨서 거둘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놈들은 내 양분이 되는 거지.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하인즈는 제압된 흡혈귀들에게 다가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간파」를 획득합니다."

매 순간 성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흡혈을 한번 끝낼 때마다 전신의 세포가 진화하며 더욱 강해진다.

중복된 차원 출신이 있었는지 새로운 흡혈인자를 얻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동족 포식의 강화 효과는 충분히 대단했다.

그리고 낮은 확률로 상대가 가지고 있던 '혈계 능력'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파」라···, 쓸 만한 능력이군. 각성하면서 얻은 고유스킬이 아니라 혈계 능력이었나?'

일부 차원의 흡혈귀들은 그들의 혈통에 따라 특수한 이능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혈계 능력.

하인즈는 「혼혈진화」를 이용해 그들의 능력마저 강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흡혈인자의 농도가 높은 강자일수록 확률이 올라가긴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좋았군.'

자신들의 레벨을 측정했던 「간파」능력자는 그렇게 강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많이 쳐줘 봐야 5레벨 정도?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테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많던 놈들이 이제 둘밖에 남지 않았군.'

아니, 이제 하나인가.

하인즈를 습격했던 암살자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아쉽게도 새로 얻은 스킬은 없었지만, 은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혈마력 운용 기술을 터득했다.

물론 육체 강화와 혈마력의 증가는 기본 옵션이었다.

"너, 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어떻게 동족 포식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지?! 어떻게!"

제압당한 채 그의 앞에 곱게 포장된 감마.

그는 부릅뜬 눈으로 하인즈를 노려보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추구했던 목표를, 다른 이가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돌아간 듯했다.

'그래도 나한테 많은 것을 알려준 상대인데, 마지막 가는 길에 호기심 정도는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본의든 아니었든, 그가 실컷 떠든 덕에 얻은 것도 많지 않았나.

당장 하인즈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 그의 지분도 조금이나마 있을 터.

"그래. 알려주마."

마음 약한 나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돌아가 목덜미에 송곳니를 가져다 댈 때까지, 감마는 자포자기한 채 얌전히 내 대답만을 기다렸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흡혈할 때 밀려드는 사념을 차단해서 정신 오염을 막으면 된다."

"···? 뭣?! 그게 무슨 개소···."

푹—!

거짓말 아니다.

난 진짜 제대로 알려줬어.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은폐」를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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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란 (1)

흡혈하면서 감마의 억울함과 분노, 답답함 등의 사념이 밀려들었지만···.

뭐, 이제 와선 상관없겠지.

'그보다 은폐가 혈계 능력이었군. 그러면 정신조작은 고유스킬인가?'

감마의 기척을 알아낼 수 없었던 이유, 결계의 은밀성이 뛰어났던 이유가 이 「은폐」 덕분이었으리라.

'좋은데? 지금 상황에선 베스트로군.'

일단 자신의 기운을 좀 더 잘 숨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흡혈귀임을 더 확실히 감출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보다 강한 이라고 해도 그 정체를 쉬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은신에도 도움이 될 테니 암살자 포지션에도 유용할 것이고.

'무엇보다, 동족 포식의 흔적을 감출 수 있게 된 게 크지.'

흡혈귀들은 피에 민감하다.

당장 감마도 하인즈의 피 냄새를 맡고 접근하지 않았나.

그런데 동족 포식을 통해 여러 흡혈귀의 흔적이 남은 상태라면?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공격부터 받으리라.

-개체명 : 하인즈 2세

-종족 : 뱀파이어 (순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피의 일족 (순혈純血)」, 「혼혈진화」, 「가속」, 「재생」, 「혈마법」, 「간파」, 「은폐」

-특이 사항 : 타차원의 흡혈귀의 피를 통해 체내의 흡혈인자가 진화를 거듭했다. 모든 육체 능력, 마력 운용 기술이 큰 폭으로 성장했다. 「마인드 허브」의 영향으로 정신 오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게도 바로 진혈이 되지는 못했다.

아마 질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절대적인 흡혈인자의 양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당장의 전투력은 진혈과 싸우더라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인즈가 얻은 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한스는 흡혈귀들이 사망한 곳에서 강령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는 흑마법.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흐으으···, 그게 무슨, 개소리···. 동족 포식을···. 힘을, 나의 비원이···.]

[이렇게 죽고, 싶지 않···. 언제까지, 숨어 살···. 힘.]

한스가 그동안 강령술을 애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망령들은 강렬한 기억이나 마지막 원념 같은 단편적인 사고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남은 사고에 부정적인 감정이 클수록, 영혼의 집착이 그 크기를 부풀려 악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망령들에게 정보를 얻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직접 뇌를 뒤져 기억을 읽는 게 더 쉽고 확실한 방법.

[그극, 켁! 히···힘을 얻기 위해. 연구, 연구를!]

물론 힘들다 뿐이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한스는 흑마법으로 감마의 망령에게 적절한 고통을 주며 원하는 정보가 나오도록 사고의 방향을 유도했다.

[키헥···. 연구, 협력. 지원···. 번천회의 기술! 약속···. 베타···.]

불러낸 모든 망령을 심문했지만, 이번 일은 감마가 주도했는지 나머지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힘을 미끼로 그의 뜻에 따랐을 뿐.

거기에는 은연중에 사용한 정신조작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그보다 또 번천회인가. 혈맹의 강경파에 기술을 지원하고 무엇을 얻을 속셈이지?]

감마를 더 심문해 봤지만,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지원의 대가로 협력을 약속했을 뿐, 아직 자세한 대화가 오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베타'라는 건···, 이놈의 상급자인가? 거기까지 선이 닿아있나 보군. 하긴, 이 정도 수준의 녀석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기엔 규모가 크긴 했지.]

혈맹 강경파의 수뇌부 중 하나일 것이다.

합리적인 추론으로 '알파'가 있다면, 그놈까지 연관이 있을지도.

'그건 이제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하인즈는 기절한 진소란이 옮겨진 구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감마에게 당한 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이 방은···."

하인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 오컬트 요소가 난잡하게 섞인 방이었다.

방 전체에 피로 그려진 마법진, 금박으로 문양이 새겨진 해골, 온갖 알록달록한 장신구들까지.

하인즈로썬 거기에 혈마법의 일부가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한계였다.

[오호라, 이건 또 새로운 발견이로군.]

물론 한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한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곳곳에 사용된 흑마법의 잔재가 「사악한 지혜」를 통해 낱낱이 해부되고, 「금단의 지식」으로 분석되었다.

그런데 이곳에 흑마법과 연관된 다른 술법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술과 저주, 이건 카발라의 '아인 소프 오르'인가? 거기에 기문진(奇門陣)까지 사용되었군. 내가 모르는 체계도 제법 있고. 이렇게 많은 술법들을 한데 엮어 내다니···.]

한스가 흑마법 전문이기는 하지만 한 분야의 극에 이른 만큼 마법 자체에 대한 보는 눈이 달랐다.

그간 자경단 활동을 통해 여러 세계의 술법을 접한 한스는,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알아볼 정도의 충분한 안목이 있었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 지구에는 수많은 세계에서 온갖 기술과 신비를 습득하고 돌아온 이들이 가득했다.

보다 발달한 문명에서 기술을 배우고 온 사람도 있고, 마도 공학을 깊이 파고든 이도 있었다.

그런 귀환자들이 등장한 지 약 20년.

하지만 여전히 마도구는 희귀하고, 기술 발전도 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각각의 차원마다 적용되는 법칙이 다르기 때문이지.'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부터, 미시 세계에서 이뤄지는 물리법칙까지.

모든 것이 각자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그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바로 이능이지.'

그나마 물리법칙은 어느 정도 외형상의 유사점이라도 있지, 이능의 법칙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또 애초에 다른 세상의 에너지이다 보니 타인에게 전수하는 것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구에는 존재하지도 않고, 사용할 수도 없는 힘인 것이다.

'이계의 법칙이 안정적인 상태로 고착된 마도구를 제외하면, 예외는 오직 한 가지. 귀환자가 직접 이능을 사용하는 경우.'

귀환자 본인이 바로 세상의 법칙에서 유리된 매개체 그 자체였으니까.

그것이 한스가 지구에서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설치한 결계를 발동할 때도 중심에서 매개체가 되어줄 귀환자가 꼭 필요했으니. 마도 공학이 발전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이세계에서 장인이었더라도 자신과 별개로 가동하는 마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출신 세계의 법칙에 속한 재료가 필요했다.

지금 지구에 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이세계에서 귀환자가 직접 가지고 온 것들이었으니, 마도구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방의 풍경은, 각자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들을 하나의 체계에 맞게 뿌리부터 하나하나 뜯어고쳐 결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지구의 환경에 맞춰서.

[이 정도면 확실히 자신만만할 만하군.]

한스는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미완성인지 발동시키기 위해선 결계와 마찬가지로 귀환자가 필요하다는 한계가 남아있긴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한스조차 「사악한 지혜」와 「금단의 지식」의 도움을 받아야만 겨우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오직 '흑마법'이라는 카테고리에 한해서만.

[흠···, 그런데 뭔가 부족해 보이는데. 설마 이게 끝인가?]

확실히 대단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짜임새 있어 보이지만 술식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렇게 허술한 상태로는 흡혈인자의 사념을 안전하게 제거할 수 없었다.

[여기서 추가로 공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그걸 감안해도 이곳의 술식 자체가 너무 불안정하군.]

직접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흑마법의 정점에 오른 한스의 「사악한 지혜」에는 그 허점이 훤히 들여다보였으니까.

당장에는 효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이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이 정도면 약간의 트리거만으로 폭주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설마?'

이 연구를 지원한 것이 번천회라고 했다.

여러 차원의 술식을 모아 하나로 엮는 데에도 그들이 상당 부분 기여했을 터.

그들의 손에 시한폭탄의 격발 버튼이 쥐어진 셈이다.

[허! 그놈들, 상당히 여러 곳에서 거슬리게 하는구나.]

거기에 역량도 상상 이상인 듯했다.

필요한 술법을 모으고 개량해서 한데 섞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좀 더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다른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곧바로 언데드들을 부려 건물 전체를 수색했다.

덤으로 놈들의 연구 성과도 좀 챙기고.

더불어 사는 세상, 좋은 건 같이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스가 건물 내부를 살피고, 쓸 만한 것들을 챙기며 정보수집에 몰두하는 동안···.

하인즈는 방 중간에 널브러져 있는 진소란에게 다가갔다.

흡혈귀들과 격전을 벌이느라 생긴 전신의 상처는 이미 아물어 있었고,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혈액을 회수해 자가수복에 들어간 건가?'

아군에게 기습당해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강한 흡혈귀인 듯했다.

하인즈는 곧바로 새로 얻은 「간파」를 그녀에게 사용했다.

"으음, 이건···.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군."

상태창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정보를 기대했건만.

느껴지는 것은 추상적인 기운의 분포에 가까웠다.

그녀의 체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핏빛 기운과···.

'그런데 묘하게 흐릿한데. 뭔가 불투명하게 가린 것처럼···. 아! 이거 「은폐」잖아?'

지금은 정신을 잃어서 그런지 약해지긴 했지만, 그것은 감마에게 강탈했던 「은폐」의 기운이었다.

전신을 뒤덮은 불투명한 기운은 스스로는 물론, 핏빛 기운마저 가려 흐릿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이 여자도 감마랑 같은 혈계 능력을 가진 건가? 같은 차원 출신?'

어쩐지 묘하게 격의 없어 보이더라니.

물론 그 감정의 대부분은 적대감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이 여자는 혈맹에 접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제법 끗발이 있어 보이기도 하니, 이쪽의 뜻대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

와장창!

달그락— 달그락

방 바깥에서 한스의 명을 따르는 언데드들이 소란스럽게 내부를 뒤엎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여기서 깨우는 건 곤란하겠지?'

하인즈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포니테일로 묶여 바닥에 흩뿌려진 길고 검은 생머리, 창백하고 투명한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과 긴 속눈썹, 조화로운 이목구비.

모든 요소가 흡혈귀의 비인간적인 매력과 어우러져 압도적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래, 잠이 든 공주님을 구출한 기사 컨셉으로 가자.'

하인즈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성인 여성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가벼운 건지 무거운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압도적인 근력에는 한없이 가볍게 느껴질 뿐이다.

"그보다 무대는 어디가 좋을까···."

물론 지금은 시나리오를 먼저 짜는 게 급선무였지만.

***

"···흐냑!"

묘한 기성과 함께 진소란이 눈을 번쩍 떴다.

「간파」를 통해 슬슬 깨어날 때라는 걸 알고 있던 하인즈는 마스크를 낀 채 태연하게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군."

부우웅—

부드럽게 도로를 질주하는 스포츠카.

감마에게 흔쾌히 기증받은 하인즈의 새로운 애마였다.

"어··· 어? 저기, 이게 어떻게 된···."

진소란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석에서 운전하는 하인즈와 차량 내부를 둘러보더니,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전투 과정에서 옷가지의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리고 기력이 약간 상한 것 외에는 멀쩡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저기, 아까 그 자리에 있던 분 맞죠?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감마에게 대하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예의 바른 태도.

뭐, 이게 교양 있는 상식인의 대화겠지.

"운이 좋았지. 기회가 생겨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상황을 보니 그쪽도 피해자인 것 같아 챙겨서 나왔지."

"운이요···? 그 상황에? ···혹시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묻는 진소란.

하긴, 그 상황을 직접 겪은 당사자이니 이런 설명으로는 그녀를 납득시킬 수 없으리라.

"하회탈이라고 아나?"

"하회탈이라···. 들어는 봤죠. 범죄자들을 비롯해 그 조직들까지 공격하는 이라고 하던데. 설마···?"

"그래, 거기에 하회탈이 나타났다."

하인즈는 이어서 날조된 사실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갑자기 습격해 온 하회탈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본거지.

격렬히 부딪치는 그들의 틈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기절한 진소란을 확보하고 그대로 탈출.

그 과정에서 운 좋게 탈취한 감마의 차키를 이용해 절찬리에 도주 중.

"그으, 정말 굉장히 운이 좋았네요?"

그녀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기색에도 불구하고, 하인즈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저, 그런데 그쪽 분은 누구신지···. 아니! 이게 아니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난리 통에 혼자 빠져나오기도 힘드셨을 텐데, 굳이 저까지 구해주시고."

깨어난 직후의 혼란스럽던 정신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해왔다.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제 소개가 아직이었네요. 저는 혈맹 소속의 진소란이라고 합니다. 녹터니아 출신의 6레벨이고, 그 자리에는 도한수의 무리가 저희 크루원을 납치했다는 정황을 발견해서···."

열심히 설명하던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도와준다고 해서 같이 따지러 간 건데···. 크루는 다르지만 같은 온건파에 속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예···, 뭐. 그렇게 됐네요."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을 마치며 고개를 푹 숙이는 진소란.

동료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한 것이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뭐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조용히 전방을 주시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잘 빠져나와서 다행이네요! 배신자도 밝혀졌고 그놈의 수작도 알아냈으니,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죠?"

그녀는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상부에 보고하면 그놈과 연결된 놈들까지 끝장이라느니, 이걸로 이제 맘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느니 희망 가득한 견해를 늘어놓았다.

'글쎄···,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까?'

일의 규모로 봐서는 이미 강경파의 상층부까지 동조하는 것 같은데.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도 내전이 벌어질 뿐, 평화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지만.'

어차피 내가 먹을 조직, 최대한 온전한 상태인 게 좋다.

'강경파의 수뇌부를 깡그리 해치우고 온건파가 주도하는 혈맹을 손에 넣는다.'

그 해피엔딩으로 가는 첫걸음이 바로 진소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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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란 (2)

"아! 그래서 은인 분은 어떻게 그 자리에 가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한참을 떠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소란이 다시 이쪽에 시선을 주었다.

"하인즈라고 불러라. 감마란 놈이 살살 꼬드기기에 한번 따라가 봤지.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몸 하나 빼낼 자신은 있었으니까."

"음, 그··· 대단하시네요. 예···."

그녀는 뭔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경솔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실제로 자신까지 구출해서 빠져나왔으니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동료의 배신을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해도, 정작 사로잡힌 것은 자신이었으니.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갑자기 진소란이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하려고 했나 본데, 아쉽게도 그 스마트폰은 그녀처럼 자가수복 기능이 없었다.

"아~ 아앗! 아직 할부 많이 남았는데···."

완전히 박살 난 액정.

당연히 전원도 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울상을 지으며 굳어있던 것도 잠시,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폰 빌려줄까?"

"앗! 네! 감사합니다!"

말 꺼내기 무섭게 넙죽 받아들이는 그녀.

그리고는 하인즈가 건넨 대포폰을 받아 또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후우, 됐다. 아! 혹시 발신내역은 지워도 될까요?"

"상관없어. 그런데 외부인의 폰으로 막 연락해도 되는 거야?"

"괜찮아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비상 연락망이니까."

그녀는 연락을 보내자 한결 편해졌는지 좌석에 몸을 기대며 축 늘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할 말 있나?"

"네! 하인즈 씨는 상당히 강해 보이는데, 어디 소속된 곳 있으신가요?"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

역시 기회가 오면 사양하지 않는 여자였다.

"아니, 사실 지구로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됐어. 감마를 따라간 이유도 놈이 말하는 혈맹에 관심이 있어서였지.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흡혈귀들이 모인 조직이라지?"

딱 좋은 타이밍이다.

하지만 하인즈는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꺼냈다.

"아마 다른 조직에 속한 이들도 있긴 할 거예요. 그래도 70퍼센트 정도는 혈맹 소속일걸요? 이능관리국에 잡혀가거나 숨어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니 확실하진 않겠지만."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흡혈귀가 이능관리국에 잡혀가면 어떻게 되지? 무작정 죽이진 않을 텐데."

대화하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했다.

이런 내용은 인터넷에도 안 나온단 말이지.

"하아···, 죽이지는 않죠. 그런데 그렇게 좋은 대우도 못 받아요. 사실상 감옥이나 다름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잡혔다가 도망쳐 나왔다는 사람에게 들었다고 덧붙였다.

"사실 광혈귀 사태 이후에도 흡혈귀 중에 온건한 성향의 이들은 포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풀리진 않았지만. 이후엔 거의 예비 범죄자 취급이죠."

"흠, 역시 돌아오고 나서 자발적으로 신고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군."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요···."

그녀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혹시 소속될 곳을 찾으신다면, 혈맹은 어떠세요?"

그리고 자신이 속한 크루를 열심히 어필하기 시작했다.

혈맹 내에서도 평화를 추구하는 온건파에 소속되어, 혈액센터와 연계해 혈액팩 공급도 안정적이며 가끔 임상 시험자를 상대로 흡혈도 할 수 있다고.

"돈을 주고 흡혈할 사람을 사는 거예요. 재운 다음에 건강에 이상이 없을 만큼만 피를 빨고, 이빨 자국 치료하고 내보내는 거죠."

신나게 설명하던 그녀가 말을 멈추고 다시 이쪽의 눈치를 보았다.

"그으~렇게 해서, 힘을 기르길 원하신다면 저희 크루는 맞지 않으실 거예요. 만약 그쪽을 원하신다면 다른 데를 소개해 드릴게요. 사고 덜 치는 쪽으로···."

"아니, 그걸로 괜찮아. 딱히 인간들의 피를 빨아서 강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래, 나는 흡혈귀들의 피를 빨아서 강해질 생각이니까.

이런 내 생각을 모르는 진소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정말 딱이네요! 이야~ 이렇게 만난 게 운명일지도?"

그렇게 희희낙락하던 그녀가 문득 멈칫했다.

그리고 눈을 끔벅이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그걸 이제 물어보는 건가···."

그녀가 깼을 때부터 나는 계속 운전 중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제야 물어보다니, 말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기는 했지만.

"딱히 목적지는 없다. 애초에 도주가 목적이었으니까. 그 장소에서 멀어진 후부터는 근처의 도로를 빙빙 돌고 있을 뿐. 그러니 가려는 장소가 있으면 말해라. 태워다 주지."

이렇게 대화가 길어질 줄 알았으면 적당한 곳에 세울 걸 그랬다.

자연스럽게 진소란을 크루 본부에 데려다주며 슬쩍 관심을 보일 생각이었는데···.

"앗! 그럼 사양하지 않고! 이참에 하인즈 씨도 같이 가 보실래요?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쉴 장소도 마련해 드릴게요."

많은 일이 있었던 새벽이 끝나고.

슬슬 동이 터오고 있었다.

***

"소란 언니이~! 얘기는 들었어! 괜찮아?!"

빌라촌에 위치한 한 건물의 로비로 들어서자,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뛰쳐나와 진소란의 품에 몸을 던졌다.

상당한 위력의 바디 태클이었는데, 그녀는 부드럽게 충격을 흘리며 소녀를 안아주었다.

'제법 능숙해 보이는군.'

그나저나 저렇게 어린아이가 흡혈귀라니, 몇 살에 이세계로 갔다는 거지?

혹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건가.

"···이 아저씨는 누구?"

진소란의 품에서 눈만 빼꼼히 내밀고 이쪽을 경계하는 소녀.

"이번에 우리 크루에 들어오기로 한 하인즈 씨야. 이번에 날 도와주시기도 했고. 인사해 나희야."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소녀는 등을 토닥거리며 나직이 말하는 진소란의 말에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건넸다.

진소란을 도왔다는 말에 조금은 경계심이 풀린 듯했다.

여전히 그녀의 품에 안긴 채였긴 하지만.

"그~ 나희야? 언니가 잠깐 할 일이 있는데···, 놔주면 안 될까?"

도리도리···

다시 그녀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고개를 젓는 소녀.

"볼일 끝나고 언니가 나희 방에 갈게. 조금 있다가 같이 자자. 지금은 잠깐만 놔줄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타이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소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품에서 떨어졌다.

"빨리 와야 해?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그래. 언니가 금방 갈게."

하지만 그녀는 소녀를 토닥거려 겨우 보낸 후, 다른 이들도 연달아 상대해야 했다.

다들 귀가 좋다 보니 진소란이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나온 것 같았다.

'인망이 좋은데?'

"후우, 일단 쉴 곳을 알려 드릴게요."

안부 인사와 소개가 끝나고 겨우 풀려난 진소란이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며 하인즈를 이끌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마스크는 언제까지 쓰고 계실 건가요?"

"내가 낯가림이 조금 심해서. 좀 더 친해지면 벗도록 하지."

"아··· 예. 편하실 대로 하세요···."

뻔뻔한 대답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써 수긍한 그녀는 이후 별다른 말 없이 빈방으로 안내했다.

가재도구는 많지 않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방.

잠시 머무르기엔 충분해 보였다.

"아까 크루에 굉장히 어려 보이는 아이가 있던데?"

"아··· 나희요?"

"그렇게 어린 귀환자는 처음 보는지라. 혹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건가 싶어서."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최연소 기록이 고등학생이었다.

그나마도 극히 드문 일이고 보통은 스무 살 이상의 성인이 보내지는 편.

그런데 아무리 봐도 초등학교 고학년, 많아야 중학생이라니···.

"그 아이는 귀환자가 아니에요. 아버지가 귀환자였는데, 불치병에 걸린 나희를 살리겠다고 흡혈귀로 만든 거거든요."

그제야 내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모든 흡혈귀가 귀환자가 아니었음을.

애초에 지구로 귀환한 흡혈귀도 이세계에서 누군가에 의해 감염된 이, 그들이 지구에서 다른 이를 흡혈귀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정부 측에서 흡혈귀들을 통제하려는지 알겠군. 어찌 보면 외부에서 유입된 전염병이나 다름없으니.'

어쩐지 범죄 조직을 소탕할 때 서번트 급의 저급한 흡혈귀들이 간혹 보이더라니.

병졸로 써먹기엔 그만한 전력이 없었다.

그런데 또 그런 면에서 보면 생각보다 수가 적은 것 같은데···.

"아, 그렇다고 흡혈귀들이 무한정 수를 불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는데, 지구에서는 감염시키는데 열 배 이상의 힘이 소모된다고 하더라고요."

과연, 그런 문제가 있다면 납득이 간다.

그것도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일 터.

타인을 흡혈귀로 만들수록 본인의 힘이 깎여나간다면, 무작정 규모를 키우는 데 한계가 있겠지.

"그런데 그 나희라는 아이는 생각보다 강해 보이던데?"

감염 대상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 「간파」로 확인한 그 아이는 잔혈 중에서도 중간 수준은 되어 보였다.

"나희가 태양 아래서 당당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아버님이 좀 무리하셨거든요."

1레벨은 태양 빛 아래에서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2레벨도 지속적인 화상을 입는다.

3레벨부터 컨디션에 난조는 있을지언정 피해를 입지 않는다.

나희라는 아이가 3레벨 후반은 되어 보였으니, 그 아버지의 힘에도 상당한 손실이 있었을 터.

"그 아버지는?"

진소란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저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제 쉬셔야죠. 오늘 여러모로 일이 많기도 했고. 저녁에 다시 이야기 나눠요."

그녀는 애써 밝게 말하더니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사라졌다.

흡혈귀라곤 해도 사람이니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겠지.

암막 커튼이 쳐진 방.

하인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

아침은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

추가로 스크램블 에그와 제육 덮밥을 먹고, 후식으로 핫도그와 아이스크림 한 통을 해치웠다.

"음··· 좀 부족한가?"

아니, 아침은 이 정도가 딱 좋다.

본체는 아바타처럼 칼로리를 극한으로 쥐어짜지는 않으니까.

나는 닭가슴살과 삶은 달걀을 비롯한 건강식을 전투적으로 퍼먹고, 고칼로리 단백질 바를 씹는 아바타를 바라보았다.

-개체명 : 할리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적응」

-특이 사항 : 한성현의 다섯 번째 아바타. 극한의 상황에서도 빠르고 효율적으로 변화에 적응한다.

아잔투에서 하인즈가 장렬하게 산화한 이후, 지구의 시간으로 약 일주일이 되었을 때.

하인리히가 교단에 들어갈 즈음에 재소환 할 수 있게 된 녀석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있지. 이번엔 일주일이었지만, 다음에 사망한 아바타를 재생성하기 위해선 보름 정도 걸릴 것이라는 걸.'

또 그것이 반복될수록 필요한 기간이 계속 늘어나리란 것도.

'뭐, 위험하면 소환 해제를 하면 되니 어지간하면 죽을 일은 없겠지. 그때는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공교롭게도 한스와 하인즈 2세, 하인리히 모두 바퀴벌레 이상의 생존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새로 탄생할 아바타들만 조심하면 된다.

'그런데 초기 스킬부터 보아하니 이놈도 만만찮게 명줄이 질길 것 같은데.'

이번에 새로 탄생한 '할리'의 초기 스킬은 「적응」.

극한의 환경에서도 적응해 살아남도록 하는, 진짜로 바퀴벌레 같은 능력이었다.

그뿐 아니라 훈련하면서 육체에 가해지는 부하도 극한의 상황이라 인식하는지, 「초회복」과 함께하니 그 효율이 굉장히 뛰어났다.

'뭐, 언제 어디에 투입될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할 때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거지.'

이어서 카르마 상점을 확인했다.

아잔투를 떠나며 대부분을 사용한 이후, 별다른 사건이 없었기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331,087』

생각 이상의 카르마가 쌓여있었다.

경악할 만큼 많지는 않지만, 정말 한 게 없는 내 입장에서는 불로소득이라고 느껴질 정도.

'내가 뭐 했지? 마지막으로 「페르소나」를 얻고 난 후면···. 한스가 마법을 연구하다 교단 측이랑 한 번 충돌했고, 남매를 라펠라 시에 데려다 줬고.'

탈라리아에서 진혈의 뱀파이어랑 마주쳤다가, 하인리히가 주신교단에 투신했다.

이후의 큰 사건은 대부분 지구에서 있었으나, 지구에선 카르마가 수급되지 않으니 논외로 치면···.

'···진짜로 별로 한 게 없는데?'

한스가 주신교단과 충돌한 건 아주 잠깐이었고, 하인리히는 아직 성기사 후보에 불과했다.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

'어, 잠깐. 그러고 보니···.'

하인리히가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이동하던 도중, 도시 가이드를 해 주었던 성기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정작 불사왕의 후예보다는 뱀파이어와 흑마법사들과 더 많이 싸웠다고 했지. 그 과정에서 흑마법사 세력은 탈리아 왕국에서 기반을 잃고 숨어드는 신세가 됐다고···.'

흠, 그렇군.

그러니까 그 말은···.

"···내 탓인가?"

이간질을 좀 빡세게 하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에이~ 뭐 어때. 좋은 일이지. 권선징악, 권선징악! 역시 착하게 살면 복이 되어 돌아온다니까?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어."

듣는 이도 없건만, 괜스레 혼자 너스레를 떨고는 다시 카르마 상점에 집중했다.

일단 고유스킬을 올리기에는 상당히 많이 부족하다.

그럼 스테이터스를 올리거나 킵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미 스테이터스 강화는 어느 정도 하긴 했는데.'

하인즈가 뱀파이어와 싸우다 사망하고, 하인즈 2세가 투입되기 직전.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있을까 봐 근력이나 민첩 등의 여러 스테이터스를 몇 번씩 강화시켰었다.

'관련 스킬을 얻을 만큼 투자하기는 엄두가 안 나서 골고루 올리는 정도에 그쳤지만.'

사실 스테이터스를 강화해 관련 스킬을 얻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초회복」을 얻었을 때가 '육체 – 체력 – 회복력 강화'에 총 31만 포인트를 투자했을 때였으니까.

처음에야 장애의 회복이 간절했으니 여러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회복력에 쏟아 부었지만.

'이제 육체 능력은 이 정도면 충분해. 「초회복」이 있으니 단련으로도 충분히 강화할 수 있고. 이 이상은 과욕이다.'

그렇다고 스테이터스로 정신력을 강화하는 것도 효율이 떨어졌다.

고유스킬인 「아바타」를 강화하면 정신력 증가가 자연히 딸려왔으니까.

그것도 훨씬 가성비 좋게.

'그럼 결정 났군. 다음 고유스킬 강화까지 킵이다.'

고민을 일단락한 나는 이어서 정보 수집을 위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어디 보자, 녹터니아··· 찾았다. 제법 알려진 차원이군.'

흡혈귀와 인간이 주축이 되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세계.

알려진 기술력은 지구의 20세기 초반 정도지만, 대(對) 흡혈귀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곳이었다.

흡혈귀는 혈통에 따라 혈계 능력을 부여받고, 이를 사냥하는 슬레이어는 그 피를 정제해 만든 약으로 일시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이라, 안전한 후방 지원 업무만으로도 10년 정도면 충분한 카르마를 모아 돌아올 수 있다고.

흡혈귀 탐지 기술이 발달한 만큼 어지간해선 위험할 일이 없다고 한다.

물론 살아남을 자신만 있다면 전방에 나가 그 기간을 단축하는 것도 가능했다.

'10년이라고 해도 지구 시간으로는 1년 남짓이지. 귀환자가 많은 만큼 알려진 정보도 많구나.'

이런 정보들이 모여 후발 주자들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다.

덕분에 최근 귀환율이 20퍼센트를 넘어섰다지.

'초기에는 10퍼센트도 안 됐다고 하니까.'

이어서 진소란을 검색했다.

본명으로는 나오는 게 없어서 활동명으로 검색하니···.

"오키드··· 여깄군. 오~ 제법 유명 인사였잖아?"

팔로워 30만이면 충분히 잘나가는 방송인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화장 때문인지 얼굴이 미묘하게 달랐다.

실제보다 미모 자체는 줄었지만, 더 생기 있고 친근해 보인다.

'하긴 흡혈귀가 얼굴이 예쁘긴 한데, 미묘하게 비인간적이란 말이지. 인형 같은 느낌도 들고.'

지난 방송 다시 보기를 누르자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 보다가 넘긴 화면 한쪽에 보이는 휴방 공지.

'하인즈가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저 공지 이후로 다시 방송이 켜질 일은 없었겠지.'

나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현재 하인즈는 순혈의 끝자락, 지구 기준으로는 6레벨과 7레벨 사이다.

'일단 하인즈를 진혈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사냥감이 더 많이 필요했고···.

그들의 서식지 정보와 사냥 도구는 모두 내 손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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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란 (3)

해가 어스름하게 져 갈 무렵.

이곳의 클랜원들과 다시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진소란을 찾던 도중,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그럼,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다는 거군요?"

"예.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상부에서도 조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하아···,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대화 상대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진소란은 땅만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에 빠졌다.

하인즈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

"아! 하인즈 씨. 오셨어요?"

"그래, 무슨 일 있나? 얼굴이 영 말이 아니군."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열었다.

"딱히 기밀도 아니고, 하인즈 씨도 당사자니까 아셔야겠죠. 그, 제 윗선에 보고했던 거 있잖아요?"

"감마 일당이 동족 포식을 했다는 거 말인가?"

"네, 그거요. 그걸로 조사단이 파견됐는데, 하회탈이 습격 후에 전부 불태워 버렸는지 증거를 찾을 수 없었대요. 아무래도 민감한 문제다 보니 증거도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다고···."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

그 고생을 했는데 진전되는 게 없으니 속상한 모양이었다.

'하인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좀 과하게 손을 쓰긴 했지.'

온갖 세상의 술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보니, 하인즈의 동족 포식을 숨기기 위해 철저하게 대응했다.

한스의 흑마력이 가득 담긴 지옥 불꽃으로 건물 내부를 통째로 지져버린 것이다.

'사실상 외부만 멀쩡하고 내부는 깡그리 녹아버렸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기다 흑마력의 영향으로 어떤 탐색도 불가능하니.'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차피 그녀의 뜻대로 잘 풀릴 가능성은 별로 없었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그보다 지금은 다른 정보가 더 중요했다.

"네? 강경파의 근거지가 어디냐고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진소란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 혹시 왜 물어보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혹시 그새 마음이 변했나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온건파의 특성상 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어제는 강자 둘이 배신하고 이탈하지 않았나.

그 때문에 하인즈의 합류를 누구보다 반겼던 그녀였다.

"어제 일을 겪어보니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들 같아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위치라도 알아야 피해 다니지 않겠어?"

"앗! 그렇군요! 전부 확실하게 해결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하니까요. 저희 크루원들에게도 다시 주의를 줘야겠네요."

대충 주워섬긴 변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진소란.

그녀는 흔쾌히 자신이 알고 있는 강경파의 근거지를 모두 알려주었다.

"아··· 제 폰이 박살 나 버리는 바람에. 지도 앱 좀 켜주세요. 제가 아는 만큼 찍어 드릴게요."

좀 과할 정도로 열심히.

혈맹은 여러 파벌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만큼 서로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주기적인 교류를 통해 근방에 위치한 이들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됐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데는 이 정도예요. 또 필요하신 건 있나요?"

"아니, 괜찮다. 신경 써줘서 고맙군."

나머지는 그쪽 놈들의 뇌를 뒤져 알아보면 되겠지.

이미 획득한 흡혈인자를 가진 놈들만 대충 선별해서 한스에게 넘기면 될 터였다.

그러던 중,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진소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아침에 알아봤던 정보가 떠올랐다.

"지금부터 방송할 예정인가?"

"···녜헵?!"

당황해서 혀를 씹었는지 기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 그, 알고 계셨나요···?"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귀 끝이 서서히 빨개졌지만, 여기선 모르는 척해주는 게 신사의 도리겠지.

"처음부터 알았지. 오키드, 맞지?"

"으우우···. 방송할 때랑은 인상이 많이 달랐을 텐데, 용케도 알아보셨네요. 갑자기 면전에서 듣는 건 처음이라 부끄럽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빙빙 감으면서 애써 평정을 찾으려는 진소란.

귀 끝을 넘어 목덜미까지 빨개졌지만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호···혹시 제 방송 보셨나요? 설마 팔로워? 구독까지 하신 건 아니죠?!"

부끄러워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끝에 가선 흥분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갑작스레 시청자를 만나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아니, 인터넷에서 봤던 게 생각나서 잠깐 찾아본 게 전부다."

"그, 그런가요오~ 다행이네요."

다행인 듯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하군.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활동을 할 수 있으니.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거지?"

"음···, 제가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었거든요. 이세계로 가기 전에는.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만뒀는데, 막상 힘들게 귀환하고 보니 너무 아쉬운 거예요."

그래서 대중의 관심을 좇아 방송을 시작했다고.

또 방송 때는 흡혈귀가 되기 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화장한 거라고 덧붙였다.

"돌아오고 나서 이능관리국에 들키지 않았나? 족히 몇 개월은 공백이었을 텐데."

"제가 각성했을 때는 그런 제도가 없었거든요. 제가 돌아오고 얼마 안 돼서 생겼던 것 같은데···."

그녀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연습생을 그만뒀을 때 이세계로 간 거면···, 지금은 몇 살이지?"

"아, 전 18살에 각성했어요. 아이돌이 되겠다고 학교도 그만둔 지라 주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요. 지금은 22살이고요."

연상이었군.

나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와서 연상 대접하는 것도 모양 빠지니까.

"아니 잠깐, 이세계에서 족히 몇 년은 보내고 오지 않았나?"

"그렇죠?"

"그럼 그 기간까지 포함해야 진짜 나이···."

"22살이에요."

그녀가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내 말을 끊었다.

"음···."

"22살이에요. 신분증 깔까요?"

"아니, 됐다. 원래 나이란 출생 연도를 따져서 세는 법이지."

번쩍이는 눈빛으로 미소 짓는 얼굴을 들이대는 그녀를 밀어내며 애써 수긍했다.

그래, 나이는 중요한 문제겠지. 내가 너무 무신경했다.

"그럼 수고하고. 나는 이만 가 보지.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크루원이라고 모두 한곳에 모여 살지는 않는다.

물론 안전을 위해 권장되기는 하지만, 따로 집이 있는 이들은 필요할 때 모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럼 어디 먼저 방문할까.'

나는 지도 어플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맛을 다셨다.

뷔페에서 무엇부터 골라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기분이었다.

***

야심한 시각.

"끄··· 끄윽, 네놈···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

콰직—!

고급 아파트의 한 가정집에서 상당한 소란이 일었으나,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은폐」가 여러모로 유용하게 쓰이는군.'

방심한 흡혈귀를 기습해 치명적인 피해를 주고, 주변에 은폐장을 구축하여 전투의 기척을 없앤다.

하인즈가 단독으로 흡혈귀 사냥을 다닐 수 있게 한 주력 스킬이었다.

'감마에겐 고마울 따름이야. 이렇게까지 아낌없이 챙겨주다니.'

「은폐」뿐 아니라 하인즈의 새로운 애마인 스포츠카, 거기에 돈 될 만한 것은 물론 온갖 주술 도구와 연구 설비까지 한스의 아공간에 챙겼으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편하게 작업을 할 수도 있었고.'

하인즈가 제압된 흡혈귀의 피를 빨며 다음에 습격할 곳을 정리했다.

진소란에게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스와 하인즈는 강경파 크루의 집결지를 습격했다.

내부 인원의 제압은 순식간에 끝났고, 한스는 몇몇 똘똘해 보이는 놈들의 머릿속을 뒤졌다.

그렇게 새로 얻은 정보들.

'크루 소속이지만 그 근거지에서 생활하지 않는 놈들. 습격 정보가 전해지지 않은 만큼, 방심하고 있는 놈들을 각개격파 할 좋은 기회다.'

그렇게 흩어진 둘은 각자 목표를 정해서 놈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혈액 통제력이 향상됩니다."

한스와 비교하면 아쉬워서 그렇지, 이젠 하인즈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직 흡혈인자의 양이 부족해 순혈로 남아있지만, 진화된 인자의 힘을 생각하면 전투력만은 진혈과 맞먹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 아마 다음이 마지막일 것 같은데.'

전신의 세포가 한층 더 진화하는 것을 느끼며 내부를 관조했다.

어느 한계에 다다른 듯한 흡혈인자와 들끓는 내면의 힘이 느껴졌다.

"일단 여기를 정리하고 이동해야겠군."

하인즈가 새롭게 얻은 힘을 끌어올렸다.

양 손바닥이 찢어지며 상처가 생기고, 그곳을 통해 피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푸화악!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혈액.

그리고.

피가 묻은 장소에서 아름다운 붉은 꽃들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이글이글 타오르며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핏빛의 꽃밭.

이곳에 오기 전에 강경파의 근거지를 치고 얻은 스킬, 「혈화」였다.

타오르는 피의 꽃은 연기는 물론 열기조차 내뿜지 않고, 집 내부만 태우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시전자가 원하지 않으면 꺼지지 않으며 오로지 목표만을 불사르는 파괴적인 불꽃이었다.

'뭐 그것도 힘의 격차가 크면 소용없긴 하지만.'

전 사용자의 「혈화」는 한스의 압도적인 흑마력에 촛불처럼 꺼져 버렸으니까.

'물리적인 흔적은 「혈화」로 태워버렸고, 마력적인 흔적은 「은폐」로 감췄으니 이걸로 충분해.'

아직 밤은 길고, 사냥감은 많았다.

***

'드디어 목표를 이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드디어 원하던 바에 도달했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혈류증폭」을 획득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피의 일족 (순혈純血)」이 「피의 일족 (진혈眞血)」로 진화합니다."

"개체의 회복력이 한계를 초월했습니다. 스킬「재생」이 스킬「초재생」으로 진화합니다."

모든 감각이 확장을 거듭한다.

세계가 또렷하게 인식되고 인지 범위 밖이었던 것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열기를 볼 수 있게 되고 소리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피부로 냄새를 느끼며 주변의 파동이 들려온다.

"후우···."

공감각(共感覺)이 개화되었다.

진화 직후 어지럽게 느껴졌던 감각이 빠르게 안정되었다.

'「아바타」를 통해 여러 감각을 느끼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면 한동안 고생 좀 했겠군.'

지금도 약간 혼란스러울 정도니 말 다했다.

너무 급격한 성장에 따른 부작용이리라.

보통의 진혈은 오랜 기간을 거치며 힘에 적응해 천천히 성장했을 테니까.

"쓰읍~ 하아···."

심호흡을 하며 새로운 감각에 적응하던 순간, 방 안 거울에 비친 하인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내 원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겠는데.'

창백한 피부와 날카로운 눈을 가진 차가운 인상의 조각 미남.

은연중에 맴도는 치명적인 분위기까지, 매혹적이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에 「혼혈진화」를 통해 습득한 기술로 이목구비를 손본 영향도 있어, 이제는 본체와 나란히 선다 해도 연관성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잠시 거울 속의 꽃미남을 감상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감각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능력을 확인했다.

이번 사냥감을 통해 습득한 「혈류증폭」은 육체 능력과 회복 능력을 강화하는 버프 스킬이었다.

안 그래도 진화를 거듭하며 피지컬이 급상승했는데, 이 능력까지 쓰면 어지간한 상대는 맨손으로 찢어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재생」 스킬이 또 진화했군. 이 정도면 가만히 맞아주기만 해도 죽기 힘들겠는데?'

하인즈는 가만히 오른손 검지를 세웠다.

손톱 주변에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더니, 길게 늘어난 채로 굳어 날카롭고 단단한 손톱이 되었다.

'혈액 통제력이 상승했군. 혈마력도 더 잘 받아들이고.'

그 예리한 손톱으로 왼팔을 길게 그었다.

푸확—!

순간 뿜어져 나오는 핏물.

붉은 액체가 공중을 수놓은 것도 잠시.

흩뿌려진 핏물이 공중에 멈추더니, 시간을 역행하듯 팔뚝의 상처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문 왼팔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진혈의 혈액 제어와 「초재생」이 합쳐지니 시너지가 무시무시한데?'

재생 과정에서 약간의 힘이 소모되었지만 효과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다.

'거기에 전투 도중 주변의 피를 빨아들여 회복한다면?'

전장에 널린 혈액은 물론, 상대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의 몸속에 있는 피는 당사자의 마나와 염(念)이 깃들어 있어 제어할 수 없지만···.

'아니, 성혈(聖血)이 된다면 어쩌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성혈은 아우테리카 뱀파이어들의 신앙과도 같은 존재.

쉽게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는 쉬웠나.'

물론, 어렵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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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1)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진 습격, 사흘째.

강경파의 근거지를 일곱 개째 박살 냈더니 놈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놈들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대응했지만,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앞에서는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숨고 도망쳐 봐야, 기억을 읽는 한스의 마수를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오호, 과연 창의적이구나. 마법에 고유스킬을 접목한 건가? 어떻게 잘만 비틀면 다른 방식으로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스에게 머리를 붙잡힌 흡혈귀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습격을 피하기 위해 외진 곳의 원룸에 숨어들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행적을 아는 동료가 있었다.

하인즈가 새로운 흡혈인자를 가지고 있을 만한 놈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면···.

한스는 아는 정보가 많거나 새로운 술식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놈들을 주로 노렸다.

[그나저나, 슬슬 놈들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셈인가 보군.]

놈의 기억을 읽어 들인 한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살짝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이해가 가기도 했다.

지난 사태 파악과 당장 벌어진 일의 수습, 혈맹 내부의 의견을 모아 앞으로의 대응 방안까지 모색해야 했을 테니까.

'거기에 강경파의 근거지에서 찾은 동족 포식의 증거들을 온건파 측에 보냈으니까. 힘을 합치기에는 힘들겠지.'

연구용 자재들은 지난번에 챙겼으니, 새로 얻은 것들은 자료 사진까지 첨부해서 진소란에게로 보냈다.

빌라 내부의 로비에 가져다 놨는데, 어떻게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당장 내려온 지령은 없군.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니 당분간 숨어 지내란 것이 전부니.'

그렇다면야.

무슨 대응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최대한 털어먹어 주마.'

***

진소란은 바보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하회탈의 혈맹 강경파 습격 사건, 자신에게 전해진 그들이 부정을 저지른 증거.

그 사건들에 하인즈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그들의 근거지를 알려준 직후에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또 감마 일당에 대한 증거가 소실됐다고 의기소침했던 다음날, 보란 듯이 크루의 근거지에 물건이 보내졌다.

이쯤 되면 아예 숨길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하리라.

사실 자신도 그를 추궁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사실 나도 마음은 같으니까.'

자신들은 같은 사건을 겪고 인연을 맺지 않았는가.

차이점이라면 그는 위기를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있을 만큼 강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로 움직일 추진력이 있었다는 것뿐.

'이미 강경파와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졌어. 그대로 계속 갔다간 그들에게 무력으로 흡수당했을 거야.'

그렇게 되면 힘이 약한 온건파의 약자들부터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같은 이름만 달고 있을 뿐, 다른 깃발 아래에서 서로를 노리는 적이나 다름없었다.

'증거를 제시했는데도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그것을 이번 사태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상층부를 통해 전달한 항의는 강경파의 수뇌부들에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긍정도 부정도 없는 무시.

그나마도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정신이 없었기에 그 정도로 끝난 거지, 아니었으면 이미 무력을 동원해 이쪽을 집어삼키려 들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진소란도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두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크루를 이끄는 그녀도 온건파의 간부진 중 하나였으니까.

'전투원들을 모으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겠지.'

이계전송 사태가 시작된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났다.

혈맹은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둠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집단이었는데···.

'내분이라···, 희생이 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강경파에 일어난 일은 그들에게 큰 호재였다.

일단 무력을 모으고 대비할 시간은 벌 수 있었으니까.

'그대로 강경파가 무너졌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그들은 누가 뭐래도 혈맹의 무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벌이었다.

온건파에 비하면 몇 배나 차이가 나는 게 사실.

균형을 지키려는 중립파의 존재로 인해 지금까지나마 버텨온 것이다.

그나마도 강경파가 손실을 감수하고 본격적으로 나서면, 둘 다 함께 무너질 테지만.

그런 이유로 진소란은 하인즈가 먼저 밝히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지금까진 이쪽에 도움이 되고 있었고, 만약 그가 도중에 배신하더라도 딱히 잃을 게 없었으니까.

'그 악명이 자자한 흑마력 사용자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범죄자들을 사냥하는 하회탈.

그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지, 단순히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때가 되면 그가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지금 자신이 할 일도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오하~ 트하~ 반갑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렇게 제 방송을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소란··· 아니, 인터넷 방송인 오키드는 밝게 웃으며 자신을 비추는 캠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취미도 만족시키고 돈도 벌 수 있는 직업.

온건파는 사회 시스템에 편승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만큼, 돈은 아무리 있어도 부족했다.

혈액팩을 구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으니까.

복잡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둔 그녀는 활기차게 방송을 이어갔다.

취미가 일이 되면 즐거움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대중의 관심이 고팠던 그녀에게는 딴 얘기일 뿐이었다.

***

진소란에게 슬쩍 단서를 흘린 것은 의도한 행동이었다.

숨긴다고 딱히 얻을 수 있는 것도 없고, 직접 당한 게 있는 그녀는 강경파에게 적대적이었으니까.

'무엇보다 혈맹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밝혀야 할 사실이지.'

실컷 먹기 좋게 손질해 놨는데 남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랫사람이 따르게 하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경파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들을 처단하는 건 훌륭한 업적이 되지.'

물론 일이 끝나면 대놓고 밝힐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 힌트를 준 것으로 충분했다.

이쪽도 진소란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나의 조직을 집어삼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자기 사람부터 만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는 가장 유력한 오른팔 후보이니만큼, 지금부터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는 상당히 철저하게 준비한 것 같군.'

하인즈는 지금 「은폐」를 이용해 어둠 속에 숨은 채, 산속에 위치한 고급 별장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의 두 눈에 깃든 「간파」의 힘으로 별장의 방비 상태가 까발려졌다.

'결계도 그렇고 경계 레벨도 상당한데···, 내부에 있는 이들의 수준이 장난 아니군.'

물론 못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크흐흣, 은밀하고 빠르게 잠입해서 수뇌부부터 해치우면 되겠지.]

한스와 하인즈가 함께 이 별장에 온 이유.

바로 얼마 전에 우연히 얻은 정보 때문이었다.

그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강경파의 수뇌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가진다는 내용.

그 정보의 출처가 상당한 발언권이 있던 놈이었고, 정보 자체가 굉장히 은밀하게 암호화 되어있어서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좋은 기회였으니까.

'수뇌부들을 일망타진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일이 더 수월해지겠지.'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로 봤을 때, 강경파의 수뇌부 정도는 그들 둘만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한스는 원래부터 강했고, 이제는 하인즈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약의 사태라는 것이 있는 법.

그래서 일단 상황을 직접 살펴보고 공격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수준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걱정이 과했던 것 같다.

물론 전부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겠지.

한스는 먼저 별장 주변을 넓게 돌며 내부를 감싸는 결계를 설치했다.

감지용 사역 마법을 연구하며 은밀성에는 도가 튼 한스의 마법에 하인즈의 「은폐」를 더하니, 그야말로 감쪽같은 결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발동되기 전까지는 절대 발각될 일 없겠군.'

모든 작업을 마친 직후, 한스가 어둠에 휩싸인 채 하인즈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하인즈는 자신에게 「은폐」를 걸고 은신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스킬이 아닌 「혼혈진화」를 통해 배운 혈마력 운용 테크닉.

하지만 거기에 「은폐」의 힘까지 곁들어지니 어지간한 투명화 못지않은 효과가 있었고, 덕분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별장에 다가설 수 있었다.

'방범 장치들도 잔뜩 설치되어 있군. 진혈이 되기 전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무력화하긴 힘들었겠지.'

적외선이건 뭐건 한계를 초월한 하인즈의 감각에 모조리 감지되었으니까.

방범 카메라의 감시 범위는 물론 숨겨져 있는 전자장비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전자파까지 느낄 수 있었으니, 이제 현대의 과학 기술로는 하인즈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곳곳에서 보초를 서는 흡혈귀들과 방범 장치를 피해 별장에 다가선 하인즈는···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외관을 한 커다랗고 멋들어진 건물.

···아무리 찾아봐도 열린 문은 보이지 않았다.

'아··· 원래 이쯤에서 문이 열린 다음, 누가 드나들 때 같이 숨어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약속이건만.

역시 현실과는 다른 법이었다.

한참 건물 주변을 돌아다녀 봤지만, 어찌나 문단속을 잘했는지 열린 창문 하나 없었다.

여전히 누군가가 별장을 드나들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후우, 어쩔 수 없지.'

하인즈는 구석진 창가로 향해 주변에 「은폐」를 최대한 강하게 발동했다.

'됐다. 이 상태로···.'

한스가 숨어있는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러다 한쪽 귀퉁이가 길게 늘어지며 창틀 사이로 스며들었다.

창문에도 경보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형체가 없는 그림자에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렇게 창문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이 그림자로 연결되었다.

스스슥—

바깥에 서 있던 하인즈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빨려들어 가고···.

건너편까지 뻗은 그림자 위에서 조용히 솟구쳤다.

'경보 장치 반응 없음. 이쪽을 찍는 카메라도 없고. 완벽하군.'

은밀한 마법 발현에 일가견이 있는 한스와 「은폐」의 힘이 더해지니, 흑마력의 누출 없이 자연스럽게 침입할 수 있었다.

'놈들이 모인 곳은, 1층 로비와 연결된 방인가.'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흡혈귀들의 기척이 모인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일단 수뇌부가 있는 곳까지 이동한 후, 결계를 발동해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머리부터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로비의 안까지 도달했을 때···.

'응?'

하인즈의 감각에 이질적인 기척이 감지되었다.

공감각을 얻고 익숙해진 초월적인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그림자에 숨은 한스는 그 정보를 가지고서야 한발 늦게 이상을 감지했다.

대응은 즉각.

혈마력을 끌어올리고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춰 주변을 경계하는 순간.

지이잉—

그와 동시에 하인즈가 들어선 로비를 둘러싸고 정체불명의 결계가 발동했다.

'아니, 로비뿐만이 아니라···, 건물 전체를 사용해 구축된 결계다.'

한스가 작동을 시작한 결계를 빠르게 진단했다.

···그래, 그 한스가. 결계가 발동하기 전에 먼저 눈치채지 못했다.

'···나름 한스의 마법 수준에 자신 있었는데. 이거 자존심 상하네···?'

솟구치는 짜증에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불평할 여유는 없는 듯했다.

결계의 발동과 동시에 하인즈를 감싼 「은폐」의 힘이 약해지더니, 기어코 그의 모습이 노출되어 버렸으니까.

"이거 원~ 하회탈을 잡으려고 했는데 웬 흡혈귀가 나타났네?"

로비에 위치한 거대한 계단 꼭대기.

난간에 기댄 한 남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덜컹!

스스슥—

그와 동시에 하인즈가 목표로 한 방문이 벌컥 열리며 흡혈귀 무리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했다.

하인즈가 「간파」로 미리 감지했던 인원들.

'이거··· 제대로 당한 것 같은데?'

어느새 나타난 검은 복면인들이 2층 난간을 둘러싸고 그가 서 있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들은 그가 미리 감지하지 못했던 놈들이었다.

"그래서··· 너는 누구니? 하회탈과는 무슨 관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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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격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