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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대륙 중앙의 아제리온 제국과 동부의 제피아 공화국, 그리고 남부 사막 지역이 맞물리는 접경지역.

그곳엔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는 여건과 다르게 상당히 번성한 대도시 하나가 세를 떨치고 있었다.

자유 도시 드라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도시 국가나 다름없는 드라칼은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지이자 무역의 중개지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대륙 전체에 지점을 둔 용병 길드의 본거지가 위치한 곳이었다.

사실상 시장이 되기 위해선 도시의 터줏대감인 길드의 선택을 받아야만 했으니, 그야말로 용병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그리고 그 나라에서 재상이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는··· 아니, 잠깐이나마 '있었던' 인물이 바로 현 사무총장인 패트릭이었다.

'골치 아프군.'

오일을 발라 뒤로 넘긴 갈색 머리에 단정한 복장을 갖춘 서른 후반의 사내, 패트릭이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용병이라기보단 공무원 같은 인상의 그가 스트레스에 잘게 떨리는 입꼬리를 손으로 살짝 눌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지구인이었다.

그것도 유독 늦은 나이에 전송되어 엘리트로서 한창 바쁜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이세계로 불려 와 버린.

이 땅에 떨어진 직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필이면 여기가 신규 차원이어서 전송 전에 열심히 조사한 자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고, 가진 능력도 전투에 적합하지 못한 보조 계열이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지구로 돌아가 봤자 평범한 삶을 살 순 없어. 그렇다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이 얻고 가야지.'

그가 용병 길드에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아득바득 기어오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그 노력의 결실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이렇게 허무하게 물러나야 한다고?

'그럴 순 없지. 암! 그럴 순 없어.'

그는 자신의 새로운 동아줄인 덩치 큰 전사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지금의 자리로 올려준 전 용병왕 칸블이라는 끈이 떨어진 후에 간신히 찾아낸 뒷배.

바로 용사의 동료로서 결사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할리였다.

그와 연을 맺었던 덕분에 상당한 시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사히 사무총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데···.

"듣고 있는가? 사무총장."

아무래도 다른 파벌의 경쟁자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예, 물론이지요. 클레이븐 경."

패트릭은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중년 사내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작당이라도 한 듯 한창 업무를 보는 자신의 집무실에 갑자기 들이닥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다시 눈에 담으며.

'아예 작정하고 몰려왔군. 오늘 아예 확정 지으려는 건가?'

길드의 간부부터 시작해서 대형 길드의 수장까지.

그 십여 명의 사람들 속에서 유독 존재감이 남다른 존재가 넷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극의의 강자가 넷···. 미쳤군. 대체 어떻게 이만한 수를 포섭한 거지?'

그들에게서 은연중에 풍기는 기세에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절해 버렸을지도 몰랐지만, 카르마 포인트와 고유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그도 맹탕은 아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고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할리 님께선 결사대의 일원으로써 성자님과 함께하느라 바쁘십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일을 그렇게 급하게 진행할 수는···."

아무리 그가 길드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이라고 하지만, 그런 권위도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뒤를 봐줄 수 있는 용병왕이 건재할 때나 성립하는 법이었다.

지금은 길드의 무력 그 자체이자 얼굴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상급자나 다름없었으니 항상 행동에 주의해야 했다.

"후, 자네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예?"

하지만 그런 그의 조심스러운 변명도 얼마 가지 못하고 틀어 막히고 말았다.

그가 잠시 당황하는 듯하자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중년 여성, 용병 마법사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파벌의 대표인 대마법사가 대수롭잖은 듯 입을 열었다.

"그가 따로 떨어져서 남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지도 제법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죠. 뭐라더라, 칼코스의 투왕이라던가?"

"···하지만 부족 연맹인 칼코스에서 그건 일종의 명예직 같은···."

그 말에 패트릭이 황급하게 답했다.

애초에 철저한 중립을 지켜야 하는 용병 길드가 용병왕이 아닌, 다른 나라의 '왕'을 자칭하는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다른 국가의 지배자가 된 시점에서 용병이라 부를 수도 없으니, 당연히 용병왕의 자격도 박탈되는 게 마땅하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거 그만 질질 끌고 슬슬 마무리하자고. 이제 좀 귀찮아지기 시작하는데 말이야. 그냥 확 모가지를 따 버릴···."

"탈룸."

"···쯧, 도와준대도 참. 그럼 알아서 하라고."

과격하게 위협하던 텁수룩한 산적 수염과 커다란 덩치의 근육질 전사가 가장 앞에 선 중년 사내의 제지에 혀를 찼다.

그 또한 극의에 이른 강자일 텐데, 지금은 상대의 뜻에 따르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다.

'클레이븐···.'

그에 패트릭의 시선이 다시 정면의 중년 사내에게로 향했다.

방랑 기사 출신으로서 용병계에 흘러들어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난 마스터급의 기사이자, 기어코 다른 파벌의 대표들까지 규합해서 차기 용병왕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에게로.

"사무총장,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이렇게 시간을 끌어 봤자 자네에게도 좋을 게 없어. 내가 정말 마음먹었으면 이런 귀찮은 절차도 필요 없었을 테니."

그 말대로.

그는 무력도 무력이지만 탁월한 정치력까지 겸비해 전 용병왕 칸블의 파벌과 비등하게 겨루었던 유력한 후보자였다.

그때는 순수한 용병 출신으로써 이름을 떨친 칸블에게 정통성에서 밀리는 바람에 낙마하고 말았지만.

'이건 곤란한데.'

사실 이런 압박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할리의 이름을 방패로 삼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는데, 저쪽이 명분까지 가지게 되니 슬슬 그것도 버거워지고 있었다.

클레이븐도 천정부지로 치솟은 그의 이름값 때문에 이렇게 절차를 지키려 하는 모양이었지만, 본인도 없는데 대리인이 그 이름을 팔며 버티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자네 설마 이 드라칼을 남부 야만인들에게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그럼 설마 아직도 그 투왕이라는 자를 믿고 있는 건가?"

패트릭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클레이븐이 강한 어조로 밀어붙였다.

그는 용병 길드 전체로 따져도 한 손으로 꼽을 만한 강자였던 만큼 그만한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기에, 대놓고 말하진 않았으나 말투에서는 은연중에 상대를 얕보는 감정이 묻어 나왔다.

물론 할리라는 이름 높은 대전사에 대해선 익히 들어본 데다 그 명성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뭐? 전설의 용인? 키가 10미터를 넘는 거인이라고?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소문이 과장되는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닌 만큼 그는 그것들이 전부 낭설이라고 생각했다.

대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누가 믿는다는 건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

아마 패트릭이 그를 방패막이로 사용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과정에서 그런 과한 공작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차라리 내가 결사대에 들어갈 것을. 그랬다면 이렇게 돌아갈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의 머릿속에서 전 용병왕이었던 칸블이 사망한 직후에 자기가 대신 불려 갈까 봐 숨죽였었던 기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막상 그 결사대가 순항하고 있다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던 것이다.

자신이 갔더라도 그 정도 활약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가 최근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길드 내에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또 허무하게 용병왕 자리를 빼앗길 게 뻔했으니까.

그에 할리를 지지하는 사무총장 패트릭과 갈등이 생긴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무총장님, 드릴 말씀이···."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일은 클레이븐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조금 갑작스럽게.

"지금··· 1층 로비에···."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에 들어온 비서가 잔뜩 늘어선 고위층들의 위압감에 짓눌려 힘겹게 침을 삼키며 겨우 쥐어짜 내듯 말을 이었다.

"···할리 님께서 오셨다고 합니다."

***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

용병왕 후보, 클레이븐이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사무총장 패트릭은 물론 집무실에 쳐들어갔던 길드 고위층들과 함께 로비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말로만 듣던 할리를 직접 대면하기 위해.

'물론 아무리 소문이 과장되었다 해도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겠지.'

어쩌면 단순히 무력으로만 따지자면 자신이 조금 부족할지도 모른다.

용사와 함께 활약한 결사대의 일원이라는 이름값이 완전히 허명일 리는 없을 테니.

'하지만 용병왕은 단순히 무력만 강하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에서야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할리와는 달리 그는 20년이 넘게 용병 생활을 했고, 그중 10여 년을 용병 길드를 대표하는 강자로써 활동해 왔다.

그 무형의 자산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다 그는 지금 혼자도 아니지 않은가?

'다른 놈들에게 양보한 이권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일단 용병왕의 자리만 손에 넣으면···.'

그렇게 자신을 지지하기로 약속한 강자들과 함께 자신만만하게 로비로 향한 그는.

그곳에 도착한 순간, 공간 전체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음?"

사실상 이곳 드라칼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용병 길드의 본부인만큼 로비의 넓이는 어마어마했다.

수많은 창구와 데스크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편의 시설들까지.

로비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

"···큼."

지금 그 공간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리고 막 로비에 도착한 이들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기둥 옆쪽에 비치된 소파에 거의 눕듯이 몸을 파묻은 채 두 손을 등받이 위로 올린 남자.

그때, 배부른 사자처럼 느긋하게 늘어져 있던 그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고—.

'아.'

···단지 그것만으로, 당당하게 이곳까지 내려온 이들이 이 자리의 다른 이들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오! 이거 오랜만이구만, 패트릭! 그간 잘 있었나? 으하하핫!"

하지만 그들의 반응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그 당사자는 무리의 사이에 끼어있는 패트릭을 발견하고 시원하게 웃으며 소파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끼이이익—

그 행동에 이미 푹 꺼져 있던 소파에서 최후의 단말마가 새어 나왔다.

기운을 움직여 톤 단위의 몸무게를 최대한 줄이긴 했으나, 겨우 그 정도로는 정상적인 인간의 체중을 상정해 만들어진 물건이 버텨낼 수 없었다.

"어, 이거 미안하구만! 소파가 망가져 버린 것 같은데."

"···아, 불량품이었나 보군요. 괜찮습니다, 할리님. 어차피 조만간 교체할 예정이었던지라."

"쯧쯧쯧, 거 명색이 길드 본부인데 좋은 물건 좀 갖다 놓지 말야."

"하하하, 죄송합니다. 앞으로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혀를 차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근육질 거한과 어느새 앞쪽으로 나서서 굽실거리며 그를 응대하는 패트릭.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클레이븐을 비롯한 고위층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크다.'

그것이 모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들 중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산적 수염도 2미터가 넘는 거구였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저 사내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그저 단순히 크기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존재로서의 밀도가.

생명체로서의 격이 다르다.

침대 위에 놓인 바위처럼 주변 공간마저 그에게 짓눌린다는 착각까지 느껴질 정도.

'젠장, 저게 대체 뭐야!'

그에 클레이븐이 간신히 침을 삼켰다.

딱히 뭘 한 것도 아니었는데 서서히 숨이 가빠진다.

배부른 맹수처럼 느긋하게 다가오는 저 존재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육체가 제멋대로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극의에 이르고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알아채는 게 조금 늦었으나, 그는 곧 이 반응이 무얼 뜻하는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이 정도였다고?'

그것은 본능이 보내는 경고.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인지한 육체가 내지르는 처절한 절규였다.

정작 그 상대는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고 패트릭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오! 이 친구들은 누구지? 수준이 제법인데?"

때마침 그 존재가 시선을 돌려 그들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무엇과 눈이 마주친 클레이븐은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죽는다.'

대적 따윈 불가능하다.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패트릭이 조작한 유언비어라고? 저자에겐 용병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 그대로 개소리였다.

저 괴물 앞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준비한 얕은 수작 따위도 전부 무의미했다.

여론을 집중시키든, 파벌을 규합하든, 다수의 강자를 한데 모으든.

지금 당장이라도 혼자서 그 모두를 찢어발길 수 있는 존재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 저희 길드의 간부나 다름없는 이들입니다. 마침 길드의 방향성에 대해 회의하기 위해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렇구만! 그런데 이 친구들 왜 이렇게 굳었어? 안 잡아먹으니까 어깨에 힘 좀 풀라고! 카하하핫!"

패트릭의 대답에 다시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는 할리.

그제서야 주변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던 클레이븐은 이상 반응을 보인 것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묘하게 조용하더라니.

극의건 뭐건 상관없이 함께 온 이들 모두가 한껏 긴장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빠르게 처세를 결정했다.

"···이거 실례를 범했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할리 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골든 크로우 용병단의 단장, 클레이븐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인사말과 함께 천천히 숙여지는 허리.

확연한 굴복의 표현이었다.

"오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그러자 언제 옆으로 다가왔는지 호탕하게 웃은 할리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들겼다.

···분명 가벼운 손길이 틀림없었는데, 클레이븐은 연신 휘청거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직 생존 본능에 따른 비굴한 웃음을.

"다행히 댁이랑은 앞으로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구만! 으하하핫!"

"하,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그리고 그것은 더없이 옳은 판단이었다.

진심이 담긴 상냥한 미소와 부드러운 토닥거림으로 훈훈한 분위기를 조성한 할리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와 보길 잘했군. 그나저나 이 양반도 처세가 제법이야.'

그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무리 할리가 외부와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남부를 전전했다고 해도, 그의 눈과 귀는 이미 대륙 곳곳에 깔려있었으니까.

당연히 용병 길드의 상황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마침 남부도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황이고 말이지.'

그 덕분에 할리는 더 늦지 않게 방문 일정을 잡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길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큰 혼란을 안겨주었을 풍파를 비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윈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 암.'

저쪽은 파괴와 유혈이 낭자했을 불상사를 피한 데다 그 또한 괜한 귀찮음을 덜 수 있었으니.

그림으로 그린 듯한 해피 엔딩의 완성이었다.

'물론 뒤에서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들지 모르니 앞으로도 꾸준히 체크할 필요는 있겠지만.'

뭐든 일이 터지고 난 후에 수습하는 것보단 미리 예방하는 것이 최선인 법.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확실한 우위를 각인시켜 두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되리라.

"파하하핫—! 역시 이런 날에는 고기를 뜯어 줘야지! 오늘은 내가 쏠 테니 다 같이 식사나 하러 가자고! 여기 고기 맛집은 어디이려나?"

그에 할리가 친목을 위해 회식을 제안하는 부장님처럼 시원하게 외쳤다.

인간관계를 다지는 데는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최고 아니겠나!

"크흐흠."

"으음, 그것이···."

"아직 오늘 훈련이···."

"···전 다이어트 중인데."

하지만 역시라고 해야 할지, 그에 대한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패트릭을 제외한 길드의 고위층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냥 일찍 퇴근하고 싶어 하는 사원들처럼.

그것은 누가 봐도 거부의 표현이었으나,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할리는 천천히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엉? 설마, 고기가 싫다는 건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그 팔의 근육이 별개의 생물인 것 마냥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런 이는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는 듯.

설령 있어도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드라칼에서 고기가 가장 맛있는 집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질 좋고 양 많은 곳이 생각났으니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허허헛, 저도 부하들을 빼놓고 먹기 미안해서 말입니다. 녀석들에겐 따로 돼지라도 몇 마리 잡아서 보내주면 되겠지요."

"커험, 고기를 싫어하면 전사가 아니지. 잘 먹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니까···."

"호호호! 건강한 다이어트를 위해선 육류도 가끔 섭취해 줘야지요."

분위기 메이커 할리의 맹활약에 힘입어 다시 주변 공기가 화기애애하게 달아올랐다.

그에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그는 이내 앞장서서 당당하게 길드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바로 그 옆에 달라붙어 연신 굽실거리는 패트릭의 뒤를 따라, 길드의 고위층들이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피며 미적미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륙 최상위권의 강자라는 이들이 고작 대면한 것 정도로 너무 쉽게 굴복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도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최대한 숙인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어. 초월의 경지에 올랐던 초대 용병왕도 불사왕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전사했으니까. 저자도 그렇게 된다면···.'

'이건 글렀군. 클레이븐은 이미 완전히 먹혔다.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가.'

'X발, 저게 대체 뭐야? 인간 맞아? 아니, 용인이라고 했던가? 무슨 초대형 몬스터라도 마주한 것 같은데!'

'칫, 괜히 왔네. 그냥 적당히 밑에 애들이나 보낼걸. ···그런데 저런 용인에다 드래곤까지 멸종시켰을 정도라니. 대체 불사왕은 어떤 괴물이라는 건지.'

할리는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는 혁명가에게서 「광기의 씨앗」을 탈취한 이후로 세상에 퍼진 광기를 꾸준히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그것은 불사왕 한스의 근원인 「불사의 심장」과 같이 심연에서 올라온 부정한 힘의 정수.

아무리 광기가 죽음에 비해 격이 낮다 한들 그 또한 생명체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힘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기감이 발달한 강자들이 과민 반응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친구! 좋은 데로 안내해 준다며? 앞장서야지!"

"아아—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쉽게 말해서, 험한 용병계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아 경지에 오른 이들답게 호승심이나 자존심보단 생존 본능이 더 강했다는 뜻이었다.

"엇! 그러고 보니 내가 돈을 챙겨 온다는 걸 깜박했군! 이거 어떻게 한다···."

"···오늘은 제가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용병들을 대표하는 영웅이신 할리 님을 만난 것도 큰 영광이니 말이지요."

"오오! 이 친구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을 지녔구만!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크하하핫!"

"하, 하하하···."

불과 조금 전까지 야만인이라 무시하던 이에게 항변하지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만 흘릴 만큼.

그날, 드라칼의 육류 전문점 '오우거의 식탁'은 역대 최고의 매상을 올리고 모든 고기가 매진되어 버렸으며.

용병왕을 꿈꾸었던 클레이븐은 한 끼 식사로 나와서는 안 되는 금액의 전표를 쥐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라고 애써 합리화하면서.

***

맑은 공기가 가득한 공간.

주변에 가득한 청량한 기운이 거칠게 휘몰아쳤다.

휘오오오—

하지만 폭풍의 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중심에 있는 이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지그시 눈을 반개한 채 뭔가에 집중할 뿐이었다.

거칠게 요동치는 바깥과는 달리 미풍에 흔들리듯 살랑살랑 나부끼는 금발, 긴 속눈썹에 살짝 덮인 에메랄드빛 홍채와 금빛 동공, 백옥처럼 매끄럽고 윤기 나는 피부까지.

그런 여러 요소들이 장인이 한 땀 한 땀 빚은 듯한 조화로운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그 존재의 신비로움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주변을 감싸고 휘몰아치던 폭풍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그의 기다란 귀가 몇 차례 쫑긋거렸다.

이윽고 서서히 눈꺼풀이 크게 열리며 그에 가려졌던 별 모양의 동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됐다."

속삭임과도 같은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그— 엘븐 킹덤의 하이엘프 해리스 그랜우드가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의 앞쪽 공간에 떠오른 존재를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촤르르— 촤악—

그 푸른빛을 내는 부정형의 존재가 몸을 뒤틀 때마다 맑은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리스는 잠시 그것을 감상하다가 이내 그쪽으로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어진 접촉과 교감 끝에···.

"···오늘부터 너는 '리터'야."

그는 자신의 팔을 타고서 뱀처럼 전신을 휘도는 물줄기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로써 강환계에 다녀온 후로 세 번째, 기존에 있던 정령까지 포함하면 일곱 번째로 추가 계약을 맺었으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효과 한번 확실하단 말이야.'

어쩌다 보니 얻은 수확인 「무유팔괘비공(改)」과 「자연지체」는 그의 자연 친화력을 큰 폭으로 넓혀주었다.

아무리 하이 엘프라 한들 개인마다 적합한 속성은 따로 있기 마련이었는데, 만물의 조화를 추구하는 무유팔괘비공은 그런 제약까지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강환계의 부작용이었던 과격한 성향도 아우테리카로 돌아오니 깨끗이 사라졌고. ···대신 전보다 더 귀찮아진 것 같긴 하지만.'

그거야 자연과의 동화 수준이 더 높아졌으니 감수해야 하는 문제였다.

어쨌든 덕분에 그는 번개의 정령 와트, 불의 정령 칼리, 바람의 정령 파스칼, 소리의 정령 데시벨에 이어서—.

대지의 정령 헥타르, 빛의 정령 루멘, 물의 정령 리터까지 다룰 수 있는 전천후 정령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신규 정령들의 성장도 빠르고 말이지. 계약과 동시에 하급으로 진화한 건 물론이고 가장 먼저 계약한 헥타르는 벌써 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을 정도니.'

원래라면 정령과 정령사는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그런 상식도 지금처럼 예외 사항으로 점철된 상황에서는 해당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존재 자체가 이레귤러였으니 새삼스럽긴 하다마는.

"···진짜 이번에도 성공하셨네요. 대체 어디서 뭘 하셨기에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렇게 해리스가 묘한 감회에 젖어있을 때, 저 뒤편에서 감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푸른 눈동자와 푸른 머리를 가진 엘프 소녀, 샤피론이 나무줄기로 짠 간식 바구니를 품 안에 끌어안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음,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저도 어쩌다 보니 할 수 있게 된 거라."

"···역시 세상은 불공평해···."

그 애매한 대답에 입술을 삐죽인 그녀가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해리스가 처음 엘븐 킹덤에 왔을 때, 그는 고작 최하급 번개의 정령 하나를 다루는 입문 단계의 정령사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때 이미 중급 정령까지 다룰 수 있었던 우등생이었고.

'그랬었는데···.'

그의 정령들은 뭔가 좋은 거라도 먹은 듯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해리스 본인은 추가로 불과 바람, 그리고 소리의 정령과도 연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부친인 라포리조차 보통의 하이 엘프들처럼 세 가지 속성의 정령을 다루는 게 전부였는데!

'그런데 이제는 무려 일곱이라니.'

다섯 속성을 다루는 현 여왕도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라고 들었건만, 일곱은 아예 전무후무하다고 봐도 될 수준이었다.

거기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여기서 그칠 것 같지도 않지 않나!

'난 아직도 상급 정령 하나인데···.'

사실 그녀의 나이에 상급 정령사라는 것만 해도 이미 천재라 불리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극의인 숲지기들이 바로 위 단계인 최상급이었으니까.

물론 아직 다룰 수 있는 속성이 하나라는 것이 약점이긴 해도, 그녀는 당장 졸업해도 정예로 취급받을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러면 뭐 해.'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그녀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제는 어떠한 기준이 되어버린 비교 대상이 워낙 압도적이었던지라 그것조차 한참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때 그를 라이벌이라고까지 생각했었으니 더더욱.

'내가 정말 하이 엘프가 될 수 있긴 한 걸까.'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

그렇게 샤피론이 한창 궁상떨며 혼자 쭈그러들고 있을 때···.

툭—

그녀의 정수리 위로 다른 이의 손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번뜩 치켜든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해리스를 보고 몇 차례 눈을 깜박였다.

설마 어지간해선 남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일 줄은 예상치 못했으니.

하지만 지금 상황이 난감한 건 정작 그 당사자인 해리스가 더했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지?'

규격 외의 케이스인 자신과 비교하며 의기소침한 게 안쓰러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긴 했는데, 그간 남을 위로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만큼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에서 그가 격려한다고 나서 봤자 기만이 될 뿐이지 않은가?

'가만, 여자는 머리 만지면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굳어있길 잠시.

또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떠올린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어색하게 들어 올린 손과 갈 곳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눈동자,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듯 입가에 걸린 어색한 미소까지.

그것은 어딜 어떻게 봐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의 모습이 아닌, 그저 대인관계에 서툰 어린 청년 그 자체였다.

"풋!"

그 어설픈 모습에 쪼그려 앉은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샤피론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바보 같아졌어.'

어쩐지 이렇게 계속 궁상을 떠는 것도 부질없다 느껴졌기에.

이걸로 품고 있던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에 그녀는 꿈지럭거리면서 품에 껴안고 있던 바구니를 옆에 내려놓고 다시 해리스를 쳐다보았다.

"···간식 싸 왔는데, 좀 드실래요?"

"···좋죠."

사실, 대인관계에 서툰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

인적 없는 어느 산지.

파삭—

그곳 어딘가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 발원지는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에 생긴 가느다란 균열이었다.

그것은 작은 파열음과 함께 조금씩 영역을 넓히더니—.

빠지직!

이내 일부분이 깨져 나가며 허공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을 시작으로 균열이 급격하게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빠자자작—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확장을 거듭하던 균열은 잠깐 멈칫하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고.

우웅—

곧 외부에서 가해지는 모종의 힘에 의해 다시 서서히 영역이 줄어들었다.

마치 실시간으로 버그를 수정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복원되기 시작한 공간.

실금처럼 퍼진 가느다란 선들이 사라지고, 흐릿해지던 굵은 선들도 곧 모습을 감췄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중심에 동전 크기로 난 구멍 하나뿐.

그것조차 사방에서부터 메워지며 서서히 크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

"···아쉽군. 조금 부족했나."

그 공간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릿한 듯 선명하고, 강인하면서도 유약한 것 같은 종잡을 수 없는 사내의 목소리.

"그래도···."

그것은 마침내 바늘귀 크기까지 쪼그라든 구멍 너머에서 들려오다가.

"이걸로 마지막이다."

딱 한 마디만을 남기고, 균열이 완전히 사라지며 적막에 잠겼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진 야산.

—폭풍전야가 끝나가고 있었다.

솜씨 좋은 정원사가 관리한 듯 깔끔하게 정리된 화단.

그 안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작은 생명체들이 꼬물거리며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였다.

개미부터 시작해서 나비와 무당벌레, 지렁이 등의 생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자연의 생태계—.

어찌 보면 그저 하잘것없는 미물들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그 작은 세계의 구성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어떤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귀여워."

그리고 그런 광경에 유독 강렬한 감명을 받아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쪼그려 앉은 채 물끄러미 화단을 내려다보던 은발의 여인, 주신교단의 성녀 리에스타 세인트 하티아누스였다.

"흐음~ 흠~♪"

그녀는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것들 하나하나에 축복을 걸어주었다.

벌써 이러고 있었던 지도 몇 시간이 지났으나 그녀의 모습에선 지루한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흥미로운 놀잇거리를 관찰하는 것처럼 한 쌍의 금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정원의 생명체들을 내려다볼 뿐.

'기특하기도 해라.'

이 얼마나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들이란 말인가?

간만에 생긴 여유 시간을 모조리 자신의 취미 생활에 투자한 리에스타가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요즘 여러모로 바빴는데···.'

주신교단은 전 교황 하티아누스 2세의 서거 이후로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지금까지처럼 계속해서 대륙의 안정화에 앞장서야 했고, 내부적으로는 이젠 공석이 되어버린 교황의 자리를 채우는 것에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조만간 확실하게 결정 나겠죠.'

지금 로셀리아 대신전에서는 교단 전체로 따져도 고작 여섯밖에 되지 않는 추기경들이 한데 모여, 차기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심층 회의인 콘클라베(Conclave)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성자와 성녀가 신이 직접 선택한 대리인이라면, 교황은 신을 따르는 신도들 사이에서 선출된 대표에 가까웠기에 이는 꼭 필요한 절차였다.

'그게 누가 되든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요. 안 그래도 지금 정세에 추기경분들까지 자리를 오래 비워두면, 어떤 사고가 터졌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리에스타가 자신의 작은 쉼터에서 차분하게 흐르는 공기를 만끽하던 도중.

그녀는 돌연 어떤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고.

곧 이성과는 상관없이 본능과 직감을 자극하는 정체불명의 불길함이 사고 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윽, 이건, 설마···?'

이미 경험이 있었던 만큼 그녀는 곧바로 그 원인이 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주신으로부터 내려온 계시.

그것은 불시에 찾아온 어떤 깨달음이나 자각(自覺)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그에 그녀가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고 있을 때, 마침 정원 안으로 외부에서 불청객 하나가 날아들었다.

푸드득—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화단 이곳저곳을 오가며 기웃거리는 검은 깃털의 까마귀 한 마리.

녀석은 주변을 잠시 탐색하는가 싶더니, 이내 성녀의 축복까지 받은 덕분에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벌레들을 찾아 하나둘 빠르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진미라도 맛보는 것처럼 연신 새소리로 감탄사를 토해내면서.

"후우···."

그에 막 계시를 수습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리에스타가 까마귀를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다시 표정을 풀었다.

사실 저렇게 외부의 조류나 곤충 등이 찾아오는 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관리의 용이성과 미관을 위해서라면 정원을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키는 게 좋겠지만, 그래서야 그저 조금 규모가 큰 모형 정원이 될 뿐이었으니까.

약육강식 또한 주신께서 안배하신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이내 깊게 심호흡하며 제 컨디션을 되찾은 그녀가 천천히 그 작은 침입자에게로 다가갔다.

까악— 깍!

푸드드득—

인간이 자기에게 접근하자 움찔하고는 연신 날개를 퍼덕여 달아나려는 까마귀.

하지만 녀석은 그저 몇 차례 날갯짓만 반복할 뿐, 끝내 그녀가 바로 옆에 닿을 때까지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자, 착하지."

그에 그녀는 곧 얌전해진 까마귀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리에스타가 비전투계라 한들 그 격을 한낱 미물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의지만으로 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위인이었으니.

'바깥이라···.'

까마귀를 몇 차례 쓰다듬다가 멈칫한 그녀가 다시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 녀석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잡은 것도 그저 머릿속이 복잡해졌기에 벌인 변덕일 뿐.

'외부 차원에서의 침략자···.'

조금 전, 무려 주신께서 직접 경고까지 하신 존재는 이 새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주신은 지금까지 이세계인이 여기 몇이나 왔다 갔어도 따로 언질 하나 주지 않으셨던 분이지 않나.

'···설마 이번에도 불사왕과 관련이 있는 걸까?'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나 역시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그 계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깍— 까악!

푸드득—

리에스타는 자신의 두 손 위에서 퍼덕이는 새를 다시 하늘 높이 날려주고는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일단 지금의 계시에 대해 바로 상담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내.

성자 하인리히와 먼저 대화를 나눠보기 위해서.

***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꾸준히.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갔다.

여러 개의 몸을 동시에 운용했기 때문인지 체감 시간이 남들보다 더 길었던 그 기간 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있었다.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 황태녀 전하 만세!"

"허허허! 축하드립니다, 전하. 이제 제대로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군요."

"어머, 어쩜!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시옵니다, 전하. 내로라하는 제국의 꽃들조차 전하 앞에서는 생기를 잃어버리는군요."

가장 먼저,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에서 드디어 라일리가 정식으로 황태녀의 직위에 올랐다.

이젠 거의 잊히다시피 한 사이먼 황태자를 확실하게 끌어내리고 정식으로 제국의 후계자로 공인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현 황제의 건강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으니, 아마 몇 년 내로 양위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5황녀로서 커다란 파벌을 이끌던 때와 황태녀가 된 지금, 라일리가 가지게 된 권한의 크기는 그 차원이 달라졌다.

명실상부 현 이인자이자 차기 일인자로서 좀 더 직접적으로 제국과 황실을 움직여 그 힘을 동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 이세아를 만난 후부터 시작된 그녀의 기나긴 대장정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또한 그런 대륙 정세의 변화는 제국 내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륙의 동남쪽에 위치한 용병들의 땅, 자유도시 드라칼에서는···.

콰앙—!

"여기 할리라는 양반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 피안개의 스탈론, 한 수 배우러 왔수다! 어디 제대로 한 번 겨뤄 보···."

"어엉? 뭐야, 또냐?"

"···어?"

"킁! 거, 피안개인지 피조개인지는 모르겠고. 덤빌 거면 빨리 덤벼 보든가."

이 도시에 단 1초라도 자신이 상남자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 전염병이라도 퍼진 건지, 할리의 명성에 처음부터 기기는커녕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며 찾아오는 이들이 끊이질 않았다.

아무리 용병이란 이들이 기본적으로 과격한 데다 강함을 어필하지 못하면 무시당하는 게 일상이라고 해도 이건 조금 심하다고 느껴질 지경.

'물론 이 몸과 직접 대면해서까지 그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놈은 아직 본 적이 없지만.'

용병 길드의 최고위층이자 극의의 강자들마저 마주하는 순간 꼬리를 내렸던 게 지금 보이는 할리의 패기였다.

그런데 경지에 오르지도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자신만만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온 덩치의 눈이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자, 어슬렁어슬렁 다가간 할리가 그 옆에 서서 어깨 위에 척하니 팔뚝을 올렸다.

상대도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그와 나란히 서자 무서운 형에게 삥 뜯기는 중학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잘 다진 고기가 될 때까지 처맞을래, 아니면 네가 잘 다진 고기를 살래?"

"···제, 제가 사겠습니다."

"좋은 선택이군! 그럼 네가 생각하는 가장 괜찮은 가게로 안내해라!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리를 접어버릴 테니 잘 골라야 할 거야? 으하핫!"

사실 진짜 삥 뜯기는 게 맞긴 했지만.

할리는 사내의 등을 퍽퍽 두들기며 그를 앞장세웠다.

물론 개중엔 공포에 돌아버렸는지 눈이 회까닥해서 무작정 덤벼드는 놈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놈들은 사랑을 담은 약간의 물리 치료를 받고 곧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문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물론 마음씨 착하고 너그러운 할리는 그런 녀석들까지 살뜰히 챙겨서 같이 식사하며 서로 가진 오해를 푸는 자리도 만들어 주었다.

"음! 역시 이 동네 고기도 육질이 썩 훌륭한데! 이거 상당히 의외야?"

"드, 드라칼이 척박한 땅이라 농사를 짓기에 힘들긴 해도 다른 면에선 나쁘지 않습니다. 일단 무역의 중심지라는 게 큰 데다, 이 지역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절벽 염소의 육질이 또 일품이지요. ···가격이 조금 쎄긴 합니다만."

"그 말대로입니다, 형님! ···그런데 또 고기가 떨어졌군요? 이, 일단 그럼 10인분을 추가로··· 아니, 20··· 죄송합니다, 30인분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하, 하하···."

"쯧, 거 흐름 끊기게. 고기가 떨어진다 싶으면 알아서 재깍재깍 시킬 것이지. 눈치가 영 없구만, 저 친구."

방문과 동시에 도시 전체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

거기에 그 말로만 듣던 유명인 할리의 목격담과 소문 등이 드라칼 사회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가며, 그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용병은 무력을 파는 이들. 복잡한 정치보단 압도적인 힘이 최우선이지. 이런 면에선 또 남부랑 비슷하군.'

결국 이곳 드라칼도 존재 자체가 폭력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할리에게 딱 맞는 곳이라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곳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흘러가는 정세도 처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이쪽에 굉장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남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바이포 출신을 주축으로 한 동부 거점 확장도 순조로워. 또 서부의 탈리아 왕국은 주변 왕국들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고 영향력을 넓히는 단계에 들어갔으니···.'

서부에서 시작된 영향력 확대 작업에, 툴크 왕국을 넘어 서부 전체를 잠식하기 시작한 휴버트 상회가 깊이 개입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 휴버트 상회의 시장 잠식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게 바로 북부에서 무한정 전해지는 희귀 금속이었는데, 각국은 불사의 군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소재들을 경쟁적으로 사들이는 우수 고객이었다.

'사실 그 물건들을 공급하는 주체가 바로 불사의 군대인데 말이야.'

적아를 가리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위해 양 진영 간에 군수품을 거래하는 상황.

이런 걸 소위 '어둠의 상인'이라고 하던가.

어쩌다 보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렇게 모든 게 순조로운 상황에서 초 치는 소식이 하나 들려왔으니.

'주신이 경고할 정도의 이차원 침입자?'

바로 성녀 리에스타에게 전해 들은 주신의 계시였다.

'···역시, 생각나는 건 한 놈밖에 없는데.'

여러 차원을 넘나들며 세계의 근원을 먹어 치우는 괴물.

번천회주.

'기어코 여기에도 온 건가.'

아마 리에스타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정보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대비할 시간은커녕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다가 무너져 버렸을지도.

그나마 성녀 정도 되니 계시를 이렇게까지 해석할 수 있었겠지.

놈이 차원을 넘는 메커니즘을 알 수 없으니 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처럼 출신지 대상의 기억을 읽고 「이계전송진 소환」으로 넘어가는 방식은 아닐 터.

일본에서 부딪쳤을 때 놈의 능력을 생각해 보자면, 공간을 다루는 고유스킬을 극한까지 갈고 닦아 방법을 찾아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래, 지금 와서 '어떻게'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당장 중요한 것은, 그 괴물이 목표로 삼고 난입하려는 곳이 하필 내가 공들여 세팅해 놓은 무대라는 것이었다.

'이 땅··· 아우테리카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역시,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깥에는 불사왕의 군대와 인류가 서로 전쟁 중이라 알려졌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 양측 모두 내 수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남들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내게 이 세상의 흐름을 조종하는 건 누구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 아우테리카를 지배하는 이들 대부분에게 내 입김이 들어가 있으니까.

불사왕과 그 휘하의 불사의 군대, 흡혈왕을 위시한 뱀파이어 연합, 하인리히를 성자로 신봉하는 주신교단, 투왕이자 용병왕인 할리와 수많은 전사들, 하이 엘프 해리스와 엘븐 킹덤, 라일리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제국의 정예병, 휴버트를 대표로 하는 상인 카르텔 등···.

이미 이 세상 대부분이 내 손아귀에 있었다.

'아우테리카는—.'

이곳은.

나의 땅이다.

나의 영지다.

'내 것이다.'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세상이며, 내 꿈을 마음껏 펼칠 무대이며, 소중한 것들을 모아놓은 보물 상자였다.

그럼에도 기어코 이곳에 기어들어 오려 한다면.

'너는, 이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할 것이다.'

전쟁을 준비할 차례였다.

자고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

그에 아우테리카 전역의 정보 조직들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작은 단서라도 얻기 위해서.

물론 그 현상이 오직 한 사람의 의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문제로군.'

번천회주가 지구에서 자리를 비운 지도 제법 되었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우테리카에 오기 전에 어디 다른 곳에 먼저 들렀다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진입하는 데 뭔가 애를 먹고 있다는 뜻이겠지.'

계시까지 내려온 정황을 보자면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하긴, 하나의 세상을 침략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놈은 그걸 이미 몇 차례나 성공시킨 전적이 있는 만큼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당장 강환계도 놈이 다녀간 이후로 한창 홍역을 앓는 중이지 않던가!

'상대의 목표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봐야 해. 놈이 기어코 아우테리카로 넘어온 직후, 무엇을 가장 먼저 노릴지.'

강환계에서 번천회주는 세상에 기(氣)를 공급하는 통로인 용맥, 그 중심이 되는 용심(龍心)을 강탈해 갔다.

각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이 다르고 기운의 구조도 천차만별이기에 아우테리카와 딱 들어맞지는 않았으나, 거기에도 분명 참고할 만한 점은 있었다.

'아우테리카엔 용맥도 용심도 없어. 그래도 굳이 놈이 관심을 보일만한 것을 꼽자면···.'

당장 생각나는 곳은 두 군데였다.

첫 번째는 이온 대륙의 중앙에 있는 성지.

이곳은 용심처럼 실질적인 기능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중심이라는 상징성과 신의 발길이 닿은 곳이라는 신학적인 면 때문에 중시되는 장소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철저히 준비해 두는 게 좋겠지.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고 보니,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용맥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는데.'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이자 그 상징.

하나의 대륙을 지탱하는 기적의 증명.

신성의 조각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존재.

세계수.

'···그쪽은 해리스를 중심으로 대비해 둬야겠군.'

아무래도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도 아직 쉴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

이쪽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아우테리카 방비에 집중하길 한창.

그러나 지구 쪽도 소홀히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이미 번천회의 세력이 자리 잡은 지구는 적의 본거지나 다름없지 않던가?

장기적인 관점으로 볼 때, 놈들을 흔들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방어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또 하인즈의 전력을 결전 전까지 최대한 끌어올리는 효과도 있겠지.'

그 공격의 일각을 맡은 하인즈 2세의 유럽행은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현지에 잠복해 있던 테르미도르의 하수인과 접선했다.

첫 방문지였던 프랑스에서야 그가 시작부터 끝까지 다 개입해야 했지만,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수족을 손에 넣은 이상 번거로운 과정은 모조리 건너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침 인접 국가의 경쟁 세력인 만큼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뱀파이어 클랜 '고모라'에 대한 대비가 썩 훌륭하기도 했고.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그동안은 조금 느긋하게 움직인 면이 있었는데 이젠 정말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하루에 두 번 이용할 수 있는 「이계전송진 소환」으로 틈틈이 이세계를 왕복하고, 세력을 관리할 수 있는 「군주의 권세」까지 적극 활용하며 능률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 결과.

콰앙! 쿠르릉—!

"쳐라!"

"큭! 테르미도르가 미친 건가? 여기가 어디라고!"

"길을 열어라! 피자를 찢어버려!"

"바게트 놈들이 개소리를! 모조리 죽여라!"

고작 이틀도 되지 않아 하인즈는 고모라의 수장이 있는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 나폴리 외곽 산지에 자리한 저택으로 들이닥칠 수 있었다.

어지간한 건 전부 밑에서 알아서 해 주니 프랑스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빠르고 쾌적한 전개였다.

하인즈는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 저택 안쪽으로 향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휘하로 받아들이길 잘했어. 여러모로 쓸모가 많군.'

자연스럽게 고모라의 수장도 폭군처럼 강제로 종속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물씬 피어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유럽을 번천회의 영향력에서 빼내는 데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한 그는 곧 이 저택의 주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숙녀의 집에 제멋대로 찾아오다니. 매너가 영 꽝이구나."

그 규모에 걸맞게 화려하면서도 널찍한 실내.

척 보기에도 여장부 같은 강한 인상의 키 큰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맞이했다.

"그 폭군이 웬 동양의 뱀파이어에게 패하고 항복했다기에 소식을 가져온 놈 입을 찢어 버렸었는데···. 설마 그게 진짜였나? 이거 미안하게 됐네."

숏컷으로 자른 짧은 흑발에 칠흑 같은 눈동자, 눈가의 스모키 화장에다 검은 립스틱과 매니큐어,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문신들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으로 치장한 여전사가 커다란 신장에 빼곡히 들어찬 근육을 이리저리 비틀며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확실히, 폭군과는 다른 케이스로군.'

흡혈귀로서의 권능보다는 고유스킬이 주였던 그와는 달리,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선 흡혈인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파동이 거칠게 진동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서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게다가 그 기운의 양도 아우테리카에서 겪은 성혈들과 비교해서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나 같은 경우가 아니면 흡혈인자만으로 벽을 넘어서긴 힘들 줄 알았는데···.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도 고정관념이었나.'

애초에 차원마다 가진 특성도 구조도 전부 다른데 그걸 가능하게 할 수단이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하물며 그 당사자도 세계의 법칙을 무시하는 각성자이지 않던가!

다만 아쉬운 점은, 이렇게 되면 상대의 굴복 없인 온전히 종속시키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있었다.

'솔직히 폭군도 조금 아슬아슬했단 말이지. ···저만한 양의 흡혈인자를 전부 통제할 자신은 없는데.'

정말 실패라도 해버린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모조리 흡혈해 버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터.

조금 아쉽긴 하지만 괜한 위험을 감수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여기엔 적당한 이인자를 잡아다가 폭군을 뒷배로 세우면 되겠지.'

프랑스와 인접국인 데다 그림자 능력을 사용하면 기동성도 나쁘지 않으니 나름 괜찮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걸 위해선 저 이탈리아의 흡혈귀 수장, 베스티아(Bestia ;야수)를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밖에서 더 큰 희생이 나기 전에 그 후보자를 제대로 고를 수 있을 테니.

하인즈가 양복의 옷깃을 가다듬으며 묵직하게 한마디 툭 뱉었다.

"금방 끝내도록 하지. 이쪽은 아직도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으니까."

"카하핫! 자신만만하구나! 그래, 이 살이 떨리는 감각도 오랜만이군! 설마 루마니아의 공작 같은 놈이 또 있었을 줄이야!"

콰아앙—!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저택의 상층부가 그대로 소멸했다.

여느 때처럼 결계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으리라.

쿠르르릉—!

"카핫! 강해! 강하구나!"

"으음."

어느새 자신의 이명처럼 반쯤 짐승 같은 형상이 되어 거칠게 쇄도하는 베스티아.

그 모습은 뱀파이어라기보단 늑대 인간에 가까운 외형이었으나, 흡혈인자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을 무는 짐승을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지."

그에 하인즈 2세는 자신이 가진 전력을 다해 그녀와 충돌했다.

막대한 물리력을 품고 부딪치는 육체, 사납게 폭주하는 혈마력, 인식을 가르는 핏줄기와 찢겨 나가는 공간.

그 경천동지할 싸움은 주변에서 싸우던 흡혈귀들이 모두 멀찍이 퇴각한 건 물론, 저택이 있던 장소가 깨끗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고···.

"크허헉! 과연··· 그 폭군이 꼬리를 내릴 만도 하네. 이 정도라면 정말 그놈을 이길 수 있을지도···."

"슬슬 끝내도록 하지."

"엇, 잠깐···! 그 프랑스 놈은 부하로 들였으면서 왜 나한텐 말도 꺼내지 않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프크큭— 형씨, 혹시 잘 무는 사냥개 하나 필요 없어?"

어째선지 고분고분해진 들짐승 한 마리를 주울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는 폭군보다 더 많은 힘을 빼앗겨야 했지만, 그만큼 「정제혈정」으로 강화된 힘도 컸던지라 그리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새로운 흡혈인자를 수집합니다. 특수스킬「혼혈진화」의 영향으로 개체의 존재가 한층 뚜렷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전부 끝났을 때.

'음? 이건 설마···.'

하인즈 2세는··· 아니, 한성현은.

『고유스킬 강화』로 「아바타」를 한 번 더 진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

루마니아의 남부에 위치한 수도, 부쿠레슈티.

"어찌 여까지 오셨소, 닥터?"

그곳에서 번천회 유럽 지부장인 '공작'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우햐햣! 마침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급해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요!"

고풍스러운 저택 내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한 실험 가운에 입을 열 때마다 침을 튀기는 경박한 몸가짐.

하지만 고급스러운 귀족 정장을 걸친 공작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턱수염만 쓰다듬을 뿐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가 번천회 내에서도 최상위권의 무력을 지닌 회주 직속 친위대의 일원이라고 하나, 일단 이 자리는 유럽 관할의 지부장으로서 만난 자리였으니까.

일단 지부장이란 자리는 닥터의 아랫줄이었으니 예우 차원에서 상대를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게 아무리 천박한 이가 상대더라도 말이지.'

이것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귀한 자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품위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가 한참 자아도취에 빠져있을 때도 닥터의 말은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팬텀이 이탈리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이제 곧 여기도 가시권에 들어올 것 같은데, 대비한 걸 미리 한 번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뭐든 직접 살펴보는 게 마음이 편해서 말이지요!"

팬텀.

그 단어에 공작의 표정이 다시 살짝 일그러졌다.

'쯧, 그자가 대체 뭐라고···.'

사실 닥터의 의사가 워낙 강경해 억지로 맞춰주고 있을 뿐, 그는 그것과 관련된 모든 상황이 내심 불만이었다.

친위대의 일좌인 자신과 휘하의 클랜 '드라쿨'이 고작 동양의 흡혈귀 하나를 잡기 위해 함정까지 파야 한다니!

그나마 그 팬텀이라는 자가 프랑스에서 보인 활약에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는 여전히 성에 안 차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테르미도르건 고모라건,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진즉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드라쿨의 덩치가 커지면서 함부로 나서지 못했을 뿐이지.'

고작 자국 하나만을 영역으로 삼는 다른 9레벨 흡혈귀들과는 달리 그는 10여 개가 넘는 동유럽의 암흑가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각국의 정보기관에서도 '유럽 최강'이라는 말이 정설로 나도는 존재.

그게 바로 드라쿨 클랜의 지배자이자 동유럽 암중의 군주인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일부턴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공작도 이런저런 일로 바쁠 테니 일이 시작되기 전까진 굳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깔끔하게 쫙— 준비해놓지요!"

마침내 인사를 빙자한 닥터의 수다가 전부 끝났다.

그 마지막 말에 반쯤은 흘려듣고 있던 공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일까진 저 경박한 이를 다시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보다 더한 낭보가 어디 있겠나 싶어서.

"···흐음, 그럼 시간도 늦었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오. 그래도 먼 곳을 온 손님인데 홀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오오?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한결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식사를 권했다.

그 또한 고귀한 자로서 지켜야 할 품위이지 않겠는가.

어차피 자신은 뱀파이어라는 핑계로 피나 몇 모금 마시면 되니 크게 비위가 상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조용히 문이 열리며 유령 같은 발걸음으로 들어온 이들이 순식간에 정찬을 차리기 시작했다.

"우옷! 과연 진수성찬이로군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저건?"

그에 신나게 박수를 치며 반기던 닥터의 시선이 이내 한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한껏 눈길을 사로잡는 음식을 마주한 그가 저도 모르게 이 저택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훗, 그대가 피자를 좋아한다고 하여 따로 준비하라고 일렀소."

손님의 취향까지 생각하는 메뉴 선정이라니.

스스로의 세심함에 심취한 공작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닥터의 시선이 다시 그 음식으로 향했다.

둥근 도우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치즈향과 온갖 토핑이 올라간 먹음직스러운 피자.

확실히 그가 자주 먹는 음식이 맞았다.

다만 문제라면···.

"···파인애플?"

그 피자가 파인애플이 토핑으로 올라간 하와이안 피자라는 것이겠지.

잠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닥터의 표정이 본능적인 혐오감에 슬쩍 일그러졌다.

그리곤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가며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공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작, 당신 설마 이런 거 먹습니까?"

그에게선 흔히 볼 수 없는 정색한 얼굴에서는 지인이 괴식가였다는 현실을 마주한 이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꺼림칙함마저 담겨있을 정도.

"···닥터는 그런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오."

그에 공작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짧게 항변했다.

당연히 광인에게 광인 취급을 받게 된 그의 표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기껏 상대의 취향에 맞춰 음식을 준비했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닥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냉담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쯧, 공작. 세상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파인애플 피자는 명백히 후자라고 볼 수 있지요. 세상에, 여기서 저런 괴식을 보게 될 줄이야!"

그리곤 호들갑을 떨며 하와이안 피자의 끔찍한 점에 대해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침이 사방으로 튀며 말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지그시 눈을 감은 공작이 얼른 그 말을 끊었다.

속으로 괜히 식사를 권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렇군, 내 참고하도록 하겠소. 후식은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그것도 취소해야겠군. 내 괜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

"우호옷—! 민트 초코 좋지요! 그 달콤함 뒤에 찾아오는 상큼함이라니, 그야말로 최고의 디저트 아니겠습니까! 역시 공작은 뭘 좀 아시는 분이군요!"

"······."

"민트 초코는 말입니다, 끈적끈적한 뒷맛의 다른 초콜릿과는 달리 끝맛이 아주 예술입니다! 마시고서 이를 닦지 않아도 될 정도지요! 거기다가 그건···."

결국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 수다.

공작은 곧 상대를 재단하는 것을 포기했다.

처음부터 저 미친놈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지도.

고유스킬 「아바타」.

자신과 동일한 분신체를 생성하고 운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능.

그것은 지금의 나를 만든, 한성현의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없는 능력이었다.

'만약 내 고유스킬이 다른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 봐도 아찔하네.'

그랬다면 당연히 초반의 폭발적인 카르마 포인트 획득도 없었을 테고, 트라우마에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무방비하게 이세계로 내동댕이쳐졌을 것이다.

아마 흑마법사들의 소굴이었던 마을에 도착하기는커녕 숲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혼자 벌벌 떨다가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그랬던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그리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 바깥을 두려워하던 겁쟁이가 이제는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게 된 건 물론, 아예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폭풍의 핵이 되다니.

아니, 생각해 보니 그것조차 겸손한 표현이었다.

다른 차원인 아우테리카에서는 아예 그 세상을 내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엄청난 거물이 되지 않았던가?

'그것도 나는 안전한 곳에 틀어박힌 채로 말이지.'

나는 냉장고에서 막 꺼낸 음료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큰 핵심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슨 일을 벌였든, 앞으로 어떤 사고를 치든 한성현이란 본체만큼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리라는 확신.

그것이야말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내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마주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데에도 적잖은 도움이 됐고.'

그런 메리트가 있었기에 난 어떤 난관 속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들이박아 원하는 결과를 쟁취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언제나 최후의 보루가 남아있으니 무언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후우, 괜히 감상적이 됐네."

그런 스킬이 지금 또다시 한 단계 성장을 앞두게 된 것이다.

그동안 과도한 성장을 거치며 한동안 강화가 막혀 버렸었는데, 하인즈 2세라는 개체의 성장이 어떤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어쨌든 곧 큰 싸움을 앞두고 있던 내게는 적절한 순간에 찾아온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디보자, 그럼···."

그렇게 가볍게 마음을 다잡은 나는 여느 때의 루틴처럼 안마의자에 앉아 몸을 맡긴 채 시스템창을 열었다.

그러자 이젠 매일같이 보면서 익숙해진 항목들이 다시 눈앞에 촤르륵 펼쳐졌다.

『카르마 상점 Ver.2』

『고유스킬 강화 (1,500,000)』

『기타 스킬 강화 –상세 보기』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물품 구매 –상세 보기』

『VIP 마켓 –상세 보기』

『차원 장벽 완화 (6,000,000)』

『보유 카르마 - 4,691,326』

그 많은 문구 중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역시 '보유 카르마'였다.

어느새 벌써 400만을 훌쩍 넘어 500만에 가까워지는 막대한 수치.

마음을 풍족하게 채워주는 그 넉넉한 잔고에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온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지 않은 양이 주기적으로 계속 빠져나가는 중인데도 벌써 이 정도라니.'

VIP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는 『성장의 비약(7일) (200,000)』의 효과를 확인한 이후, 그것을 구매하기 위한 비용은 이미 고정 지출이 된 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제는 헤스페론과 하워드, 호루스 등의 후발주자뿐만이 아니라 하인즈 2세와 하인리히를 비롯한 검증된 강자들도 종종 이용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거기다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소재들을 입수하는 것도 소소하게나마 지출에 한몫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아우테리카 전역에 열심히 빨대를 꽂아둔 보람이 있는지, 쉴 새 없이 빨려 들어오는 카르마는 보유 잔고를 꾸준히 늘려나가고 있었다.

타라크에서 혁명가 거인을 잡았을 땐 200만에 가까운 포인트가 한꺼번에 들어오기도 했고.

말 그대로 든든한 텃밭 그 자체였다.

'···그래, 이런 노다지를 번천회주 그놈이 함부로 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지.'

그 수치를 마주하자 다시 의욕이 들불처럼 솟구쳤다.

놈에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아우테리카의 힘을 총동원한다 해도 최후의 최후에는 이쪽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만큼, 자신을 강화할 수 있는 카르마 포인트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군자금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망설일 것도 없지. 우선 기다리던 고유스킬 강화부터.'

거기에 필요한 포인트는 150만.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사소할 뿐이었다.

찌잉—

주저 없이 항목을 선택하자, 익숙한 두통과 함께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서며 인지의 영역이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으음."

그렇게 「마인드 허브」로도 거를 수 없는 고통이 한차례 지나간 후.

나는 심호흡과 함께 전과는 또 달라진 감각을 추스르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고유스킬에서 파생된 능력의 효과가 더욱 증가하며, 아바타를 소환할 수 있는 영역이 확장됩니다."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개체 집결」을 획득합니다."

첫 번째는 기존 능력들의 강화였다.

「마인드 허브」부터 시작해서 「영혼 방화벽」까지, 그간 고유스킬을 강화하며 얻었던 모든 부가 스킬들의 효율이 개선되며 성능이 상승했다.

거기다 얼마 전에 얻었던 원격 소환의 범위는 약 반경 30킬로미터에서 60킬로미터 정도로 두 배가량 증가하기까지.

'···나쁘지 않아. 이제 서울 한복판에서도 인천 국제공항까지는 물론 경기도 대부분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겠는데.'

하지만 그 정도는 소소한 시작에 불과했다.

진짜는 강화와 함께 새로 생겨난 스킬인 「개체 집결」이었으니.

역시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것답게, 그것은 내심 품었던 기대를 훌륭하게 충족시킬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어셈블(Assemble)이라니!'

특정 개체를 중심으로 다른 분신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스킬.

내게 있어 그것은 단순하지만 더없이 효율적인 능력이었다.

이 스킬이 있다면 이제 번거롭게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며 아바타들을 이동시킨다고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단 한 개체만 현장에 있어도 1대1이었던 상황이 눈 깜짝할 새에 1대 다수가 되는 마법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군. 이걸로 아바타를 더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됐어. 아직 쿨타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거야 숙련도만 쌓인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시간을 아끼고 싶다면야 다른 방법도 있었고.

이내 「개체 집결」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내 시선이 슬쩍 『기타 스킬 강화』 쪽으로 향했다.

'저걸로 다른 스킬들도 강화할 수 있으니까.'

「마인드 허브」부터 시작해 방금 얻은 「개체 집결」까지의 아바타 계열 파생 스킬을 비롯해, 「초회복」과 「제노글로시」 등 일반 스킬들도 강화할 수 있었다.

'개체들 각자가 가진 스킬들은 해당되지 않아서 지금까진 조금씩 맛만 보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카르마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승산을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서라면 쓸 수 있는 건 모조리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

아직 포인트는 320만이나 남았으니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터였다.

'스테이터스 쪽을 더 강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응?'

하지만 그렇게 시스템창을 쭉 훑어보던 도중.

순간적으로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변화를 마주한 눈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고유스킬 강화 (2,000,000)』

그동안 꾸준히 10만 단위로 올라가던 그 항목의 수치가 갑자기 50만이나 인상해 있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150만이었던 게 한 번에 200만으로 뛰어오른다고?

'잘 팔린다고 배짱 장사 하는 건가?'

갑자기 이런 인플레이션이라니, 이 무슨 폭거란 말인가!

어차피 또 강화 제한이 걸리는 바람에 당장 사용할 수도 없었으나, 저렇게 가격이 급격히 뛴 모습을 보니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쯧,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잠깐 그것을 노려보던 나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잔여 포인트를 사용할 수단으론 아직도 여러 가지가 남아 있었다.

스테이터스 강화, 기타 스킬 강화, 초고가 물품 구매, 그것도 아니면···.

『무작위 기타 스킬 습득 (500,000)』

자신의 행운을 시험해 보는 방법도 있겠지.

"···쓰읍, 이번에도 한 번 해볼까."

저것을 통해 얻은 「제노글로시」는 입수 직후에 후회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능력이었다.

그 스킬이 없었으면 활동하면서 여러모로 적지 않은 제약과 마주했을 터.

역시 그날 저 뽑기를 했던 것은 선견지명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그에 나는 믿음과 신뢰를 담아 망설임 없이 항목을 선택했고—.

"무작위의 가능성을 강제로 개화합니다. 스킬「튼튼함」을 획득합니다."

곧이어 떠오르는 창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침몰했다.

'그러고 보니···.'

카르마 상점이 Ver.2로 업그레이드된 이후.

저 무작위 뽑기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전에 떠올린 게 있었다.

여러 아바타가 스킬을 공유하는 만큼 그 실질적인 가격은 5만 이하이며, 만약 「튼튼함」 같은 스킬이 나오더라도 가지고만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 괜찮을 거라고.

그리고 그 직후에 「제노글로시」를 뽑은 후에 다시는 도박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지.

'···이건 복선 회수인가.'

나는 「튼튼함」을 공유받은 몇몇 아바타들이 그것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떴다.

이미 육체의 내구성을 증가시키는 상위 능력이 있는 아바타들에게도 양분이 되어준 것이니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미묘한 기분이네.'

남은 포인트는 약 270만.

역시 이건 스테이터스와 기타 스킬 강화에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뭔가 날이 안 맞는 것 같군. 이건 다음에 다시 시도해 보자. 다음에···.'

슬프지만, 차마 빈말로도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할 수 없었다.

일단 시작한 이상 본전은 회수해야 하니까.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원래는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고작 며칠 만에 온갖 잡동사니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한 개인실.

"흐음흐음~ 역시 이번에도 그 짐승을 죽이지 않고 고모라를 흡수했나 보군요. 전의 폭군 때와 마찬가지로. 이거 굉장히 흥미롭네요!"

그곳에서 막 보고서를 끝까지 읽어 내린 닥터가 자신의 지저분한 수염을 쓱쓱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은 상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나, 연구자로서 사소한 변수에도 민감한 그는 팬텀이 유럽에서 모습을 보인 후부터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아보며 분석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참, 예상을 벗어나는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기껏 유럽까지 건너와선 차린 만찬을 즐기지도 않고 세력 놀이나 하고 있다니, 거기다 그 둘은 무슨 생각으로 팬텀을 따르는 건지 모르겠군요."

원래라면 지금쯤 실컷 포식을 즐기며 이곳까지 제 발로 들어와야 했을 텐데.

하인즈 2세의 「정제혈정」과 「혼혈진화」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로선 그가 보인 행동들과 그 결과를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으잉? 아하! 하긴, 애초에 실험 대상으로 낙점한 것도 그자의 특별함 때문이었죠! 오히려 생각대로만 됐으면 실험할 가치가 없었겠네요! 나도 참, 우햐햣—!"

그렇게 저 혼자 중얼거리다 이내 이마를 탁 치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닥터.

그의 말대로 이건 팬텀··· 아니, 하인즈라는 흡혈귀가 동족 포식을 하고도 멀쩡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직후에 계획된 작전이었다.

변수를 최소화하고자 사사건건 방해가 되었던 하회탈의 손이 닿지 않는 유럽으로 목표물을 유인하는 수고까지 들이면서.

"그래도 그때 공작에게 피를 더 얻어냈으면 보다 확실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에잉, 쫌생이 같으니라고."

그때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닥터가 이번엔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피가 힘 그 자체인 공작이 조금이나마 양보해 준 덕분에 이렇게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욕심이 그득한 이기주의의 화신인 그에게 그런 사정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아~ 빨리 왔으면 좋겠다! 깜짝 놀랄 선물들을 잔뜩 준비해 놨는데! 언제 오려나~ 얼른 와라~!"

이제는 숫제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기 시작한 회갈색 머리의 중년인.

놀랍게도 이 지저분하고 정신 나간 사내가 지구 최대의 비밀 조직인 번천회의 최고 지휘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염원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때마침 루마니아의 영공에 막 들어선 비행기 내부.

그 안에 누구도 모르게 밀항하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이탈리아의 뱀파이어 클랜인 고모라를 접수한 바로 다음 날.

하인즈 2세— 팬텀이 루마니아에 입국했다.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와 인접한 도시인 오토페니의 헨리 코안더 국제공항.

'드디어 도착했군.'

이제는 습관처럼 「존재부정」으로 기척을 감춘 하인즈 2세가 천천히 공항 밖으로 나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지금까진 특별히 주의할 점은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어찌 보면 이곳이야말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이래 봬도 유럽 최대 규모의 암흑 조직인 드라쿨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니까.'

이 나라에 거점을 두고 동유럽 전체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드라쿨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방면으로 정보를 접한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영웅이자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었던 블라드 3세와 본인을 동일시하기라도 한 것인지, 공작이라는 이명을 사용하는 흡혈귀 수장이 실질적인 유럽 최강이라고 불린다는 사실과···.

'그 정체가 번천회의 유럽 지부장이라는 것까지.'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하는 「혈통의 갈망」의 신호를 느낀 하인즈가 가늘게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제 본능을 자극하는 감각을 무시하고 다시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며 정찰을 우선했다.

'그놈들이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지.'

이곳은 테르미도르와 고모라 양쪽 모두 어떻게 힘을 쓸 수 있는 지역이 아닌지라 가지고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어떤 위기 상황이 불시에 닥쳐오더라도 제 몸 하나 건사할 자신은 있었지만, 번천회주와의 싸움에 앞서 최대한 빨리 일을 끝마쳐야 하는 상황에 별다른 소득도 없이 꽁무니를 뺄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 유럽 최강이라고까지 불릴 정도의 상대다. 지금까지 마주한 이들과는 다르겠지. 만약을 대비해서 아무리 만전을 기해도 부족하지 않아.'

사실 생각해 보면 지구에서 이 정도로 이름을 떨친 강자와는 아직 제대로 붙어본 적이 없었다.

그간 하회탈로 활동하며 충돌한 상대도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들은 한스 혼자서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아, 물론 논외나 다름없는 번천회주를 제외한다면 말이지만.'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장이었던 율령자도 무력보다는 다른 쪽을 인정받아 고위층에 오른 케이스였지, 실질적인 전투력 자체는 그리 대단치 못했다.

이제부터 상대하게 될 공작과는 다르게.

'곧 그 실력을 볼 수 있겠지.'

그렇게 그는 앞으로 마주할 상대에 대한 기대감과 호승심으로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오토페니를 벗어나 부쿠레슈티로 향했다.

멈칫—

···아니, 아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역시 자신의 이 반응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신호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이 기본으로 깔린 하인즈 2세가 고작 그런 사소한 감정 때문에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부쿠레슈티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혈통의 갈망」의 울림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앞선 두 나라에서 느꼈던 것과는 뭔가 달랐다.

저곳에 있는 뭔가가 자신을 끝없이 유혹하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역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그에 좀 더 확실한 조사를 위해 도시로 접근하다가—.

어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선 순간.

그는 자신의 신체가 보였던 반응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찌이이잉—!

머리를 찌르는 두통과 사방에서 풍겨오는 짙은 피 냄새.

흡혈귀로서의 능력 전반을 보조하는 「피의 종주」와 혈액을 이용한 이능에 관여하는 「피의 신비」, 그리고 숨겨진 것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하며 상황을 분석했다.

'광범위 혈마법 결계?'

하인즈도 그쪽 분야에 제법 일가견이 있었던 만큼 해석 결과는 금방 나왔다.

추정 직경은 최소 10킬로미터.

그 주축이 된 구조식은 분명 혈마법이 기반이었지만, 역시 번천회답게 단순히 그것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자신조차 내부로 들어서기 전까진 존재를 확신하지 못할 만큼 뛰어난 은폐성을 갖추고 있었고, 그 규모에 걸맞게 내재한 에너지양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존재부정」까지 단번에 벗겨버릴 정도로.

"···하!"

상황을 파악한 하인즈는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놈들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으니까.

'이곳이 드라쿨의 본거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엿한 독립 국가의 수도이기도 했다.

부쿠레슈티의 거주 인구는 약 200만.

아무리 국가 간의 관계와 소통이 환란 이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주변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함부로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늘.

'아무리 은밀성이 좋아도 이만한 수준의 결계를 이 정도 범위로 펼쳤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루마니아의 각성자들이 전부 수준 이하일 리 없으니···.'

답은 한 가지.

이미 그들은 물론 정부까지 뭘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주도권이 드라쿨이라는 집단에게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외부로도 알리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루마니아가 그렇게 못 사는 나라도 아닐 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하지만 그 의문은 떠오른 것과 동시에 사그라졌다.

생각해 보니 번천회는 중국이라는 커다란 나라조차 집어삼킨 놈들이지 않던가?

드라쿨의 뒤에도 번천회가 있으니 루마니아가 넘어갔다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걸 알 방법조차 없을 테고.'

또 하인즈 정도나 되니까 들어서자마자 눈치챈 거지,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쉽게 알아채기 힘들 테니 일정 수준 이상의 고위 각성자만 관리하면 될 터였다.

'일이 더 귀찮아졌군.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래, 그런 것들은 전부 나중 문제였다.

일단 지금은.

스스슥—

결계에 노출되며 위치가 드러나 버렸으니 우선 몸부터 피하는 게 먼저였다.

결계 밖에 있을 때는 잘 감지되지도 않았건만, 당장 그가 있는 자리로 밀려드는 기척만 백 이상이었으니.

'쯧, 그거참 떼거리로 몰려오네.'

상황을 파악한 즉시 재차 몸을 은신하며 빠르게 현장을 벗어난 하인즈가 외곽 지역으로 몸을 날리며 혀를 찼다.

당연히 처음부터 저들과 푸닥거리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이만한 조직과 정면으로 부딪치다가 정작 목표인 공작을 잡지 못하면 전부 헛수고이지 않나?

일단 좀 더 상황을 살펴보고 타깃의 위치를 제대로 특정했을 때 몰아쳐서···.

그 순간, 「급가속」이 발동하고.

찌지지직——!

앞쪽의 경로를 따라 공간이 길게 찢어졌다.

뭔가 따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인과를 비틀어 관성을 무시하고 몸을 뒤로 당긴 하인즈가 그 광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고개를 휙 돌렸다.

'저격?'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부터 쭉 이어져 연결된 파괴의 선.

그 상흔은 1초 남짓 허공에 남아있더니 곧 순식간에 수복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만한 수준의 공격. 보통 수준이 아닌데? 대처가 생각 이상으로 빨라.'

그가 결계에 감지되었던 건 몇 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직후 곧바로 다시 은신하고 몸을 피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노려서 저격이 날아오다니.

'그만큼 단단히 준비했다는 건가. 일단 후퇴해서 태세를 재정비한 후에···.'

그렇게 후속타를 대비해 한껏 감각을 곤두세우고 몸을 움직이려던 그의 시야로 재차 「통찰」이 발동하며.

이내 인식을 벗어나 있던 어떤 이질적인 것이 선명하게 감지되었다.

끔벅끔벅—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바위와 동화되어 눈을 깜박거리는 동전만 한 눈알 하나.

그것은 천연덕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존재부정」은 제대로 발동된 상태였는데.

스칵— 촥!

판단과 행동은 동시였다.

특별한 방어 능력은 없는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터져 나가는 눈알.

그러나 그것을 뒤로하고 다시 몸을 날린 그의 앞에는—.

끔벅끔벅— 깜박깜박—

이미 벽과 돌, 나무, 땅 가릴 것 없이 사방에서 돋아난 수십 개의 눈알들이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징그럽네.'

그 눈이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미약하게 몸이 무거워진다.

은신 간파는 물론 디버프 능력까지 담긴 마안인 듯했지만···.

일단 그의 인지하에 들어온 이상 그 수가 얼마나 되든 상관없었다.

스카칵—! 촤자작— 푸화악!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안구들.

문제는 아무리 없애고 또 없애도 그것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이젠 제법 먼 거리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해, 어느새 수백 개로 불어난 눈동자들이 사방을 잠식한 모습은 징그러움을 넘어 섬뜩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쫘자자작—!

그 마안 때문에 몸이 약간 둔화된 찰나, 또 한 줄기의 저격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아니, 그 공격에 날아들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발동과 동시에 이미 경로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으니까.

공간은 물론 그와 엮인 무형의 개념들까지도.

'저건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군.'

물론 불시의 상황에서도 한 번 회피한 공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던 상황에서 맞을 리가 없었다.

저격수도 여간내기가 아닌지 그가 피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노리고 이리저리 공격 궤도를 비틀었으나, 인과의 흐름을 타며 그것까지 간파해 가며 이동하는 그를 어찌하지는 못했다.

···거기까지였다면 어떻게든 물러나서 다시 기회를 노릴 수 있었을 텐데.

하인즈는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마법진과 사방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의 유동,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해 오는 다수의 기척에 결국 더 이상의 도주를 포기하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허, 대체 얼마나 준비한 건지."

이미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온 만큼 이곳도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올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을 텐데, 설마 수도 전체에 결계를 깔아둔 건 물론이고 저만한 이들을 24시간 상주시켜 뒀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슬쩍 간만 보면서 그 대처 상태부터 파악하려 했는데, 오히려 상대의 과한 조치에 단번에 덜미가 잡힌 셈이었다.

'이 정도면 어딜 어떻게 봐도 과잉 대응인데.'

지금 그가 있는 곳은 국제공항이 있는 오토페니와 수도 부쿠레슈티 사이에 있는 자연보호구역.

여기에도 만약을 위한 준비를 미리 해뒀던 건지, 순식간에 발동한 결계가 좁지 않은 영역을 단번에 휘감으며 공간을 봉쇄했다.

그가 다른 방향으로 도주했다면 이곳에 한 준비는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을 터인데.

'설마 다른 곳에도 전부 이 정도 수준의 덫이 깔려 있었나?'

어쩐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 지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향후 대책을 강구하는 동안 번천회는 그간 준비한 것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푸후— 이제야 왔군. 정말 오래 기다렸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여긴 화끈하게 놀 수 있는 데가 별로 없단 말이야. 닥터만 아니었으면 이런 덴 오지도 않았을 텐데."

"아하하하! 나도, 나도! 어지간한 인간이었으면 그냥 쌩깠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뭐!"

저쪽엔 결계를 무시할 수 있는 별도의 이동 수단이라도 있는지, 두런거리는 대화 소리와 함께 인근에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강자들.

데자뷔가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구도였다.

'한스가 일본에서 번천회와 부딪쳤을 때가 생각나네.'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장소와 인물들은 모조리 바뀌었지만.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낙관적으로 볼 순 없었다.

상황이 그때와 비슷한 건 맞으나, 그 수준 자체는 당시와 천지 차이였으니까.

"···과연, 직접 보니 닥터가 왜 그리 과민하게 대처했는지 알겠군. 설마 이 정도였다니. 작정하고 도망치려 했다면 정말 놓쳤을지도 모르겠어."

갑자기 울려 퍼진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일대의 공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주변의 시선을 강제하는 존재감이 사위를 휘감자, 자리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돌아갔다.

저벅저벅—

공간을 진동하는 무거운 발소리.

실제로 발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존재감이 담긴 일보 일보는 사정없이 대기를 뒤흔들며 이곳에 있는 이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흐음, 역시 잡종인가. 확실히 직접 보니 신기하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중년 사내.

귀족 같은 예복을 입고 정갈하게 수염을 기른 신사의 오만한 눈길이 장내를 훑다가 이내 한 곳으로 고정되었다.

이 자리의 유일한 이방인에게로.

그에 질세라 하인즈도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와 함께 등장한 흡혈귀들이 주변을 에워싸든 말든, 그 존재가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도저히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물론 상대가 그만큼 강적이라고 느낀 것도 원인 중 하나였지만···.

꿀꺽—

저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갔다.

그간 계속해서 완성에 대한 갈증을 호소하던 「혈통의 갈망」이 맹렬하게 부르짖었다.

'저거다.'

저것, 드라쿨의 군주이자 동유럽의 막후 지배자이며 번천회의 수뇌부 중 하나인 '공작'이야말로.

자신의 완성에 가장 필요한 마지막 퍼즐이라고.

우당탕—! 와르르—

분주하게 움직이며 뭔가를 이리저리 준비하는 회갈색 머리의 중년인.

그에 이런저런 쓰레기들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로 난장판이 된 공간에서 연달아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앗! 이런, 벌써 시작됐군요!"

하지만 그런 그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중년인, 닥터는 한쪽 벽면에 홀로그램처럼 투사된 어느 숲의 정경을 보고 손에 들려 있던 것들을 내동댕이치며 후다닥 달려왔다.

"우호홋!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지요. 직접 실험하는 것만은 못하지만 실전 데이터도 중요한 법이니! 이거 참, 벌써부터 두근거리는군요!"

그리고 그는 홀로그램 앞에 준비된 소파에 철푸덕 주저앉아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눈을 빛냈다.

묘한 기대감에 번들거리는 안광과 한껏 치켜 올라간 입꼬리에서 그의 광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만약을 대비해 다른 방법들도 잔뜩 준비해 뒀는데 말이죠! 이거 참, 조금 아쉽기도 하고 쉽게 끝나서 다행이기도 하고···."

그간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목표의 침입이 감지된 직후.

그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풀어 기어코 상대를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처음부터 성공할 수밖에 없는 함정이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팬텀은 반드시 부쿠레슈티에 오게 되었을 테니까.

애초에 대상의 목적을 알고 있던 시점에서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목표물이 도시 안으로 깊게 들어오는 것이었으나, 지금까지 상대의 행적으로 보건대 그건 너무 낙관적인 기대일 터.

"크흐! 그래도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결국 제대로 써먹었으니까!"

그래서 아예 주변 일대 전체에 그물을 쳐 두었다.

상대가 어디로 빠져나가려 들든 절대 놓치지 않도록 빼곡하게.

당연히 그 과정에서 물질적으로나 무형적으로나 적지 않은 손실이 있었지만, 이번 일의 중요성에 비하면 그런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제 즐겁게 감상해 보도록 할까요? 실험체의 신선도도 확인할 겸!"

그간 제법 오랫동안 기다렸던 만큼, 목표물이 이곳까지 배송되어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실험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방금은 괜히 들뜨는 바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쓸데없이 한 번 더 들쑤신 것뿐.

이제 와서 그가 뭔가를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자자— 어디 한번 보여주십시오, 팬텀! 당신이 품은 무한한 가능성을! 진화의 끝에 다다를 수 있는 단서를! 세상이 숨겨놓은 진리의 열쇠를 어서 내게!"

와작와작—

팝콘을 한 움큼 쥔 닥터가 그것을 입에 쑤셔 넣으며 반대쪽 손에 콜라 잔을 쥐었다.

준비성이 투철한 그는 이미 감상 준비도 철저하게 끝내둔 상태였다.

소파 앞의 테이블 위에 놓인 팝콘과 나초, 치즈와 콜라 등의 먹거리들.

무엇보다 닥터 특제 마도구,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 통'에 한가득 담긴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이 화룡점정의 자태를 뽐냈다.

"오옷? 시작하나? 이제 시작하나? 가자아아—!"

그렇게 만사태평한 한 명의 관전자가 더해진 상황 속에서.

숲속의 현장은 한창 일촉즉발로 흘러가고 있었다.

***

한동안 공작과 눈싸움을 하던 하인즈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과연.'

유럽 최강이라는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는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그동안 접했던 다른 이들과 차원이 다른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강해진 하인즈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것 같다 느껴질 정도로.

'하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게 세상에 나 혼자만은 아니니까. 저쪽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강해진 거겠지.'

거기다 저쪽은 자신과 다르게 초창기 때부터 활동해 온 괴물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 힘들기는 하더라도 결국 승리하는 건 자신이 되리라.

···눈치를 보아하니 저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문제는 다른 조건이 너무 일방적이라는 건데.'

하인즈는 곤두세운 감각으로 계속해서 공작을 경계하며 주변을 살피다가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과하지 않은가?

주변을 둘러싼 결계는 한눈에 그 기능을 전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여러 체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고, 그를 보조하는 것처럼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마도구들도 곳곳에 배치되었다.

'거기다 저놈들도.'

번천회 유럽 지부에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초월급 강자들.

일단 당장 모습을 드러낸 이는 셋뿐이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전열에서 싸우는 계통이기에 먼저 앞으로 나섰을 뿐이라는 걸.

'그 저격수와 눈깔 괴물도 있고 말이지. 마력의 유동을 보니 마법 계통이 최소 하나 이상··· 근처에 숨어있는 놈도 있군. 암살자인가?'

거기다 공작과 함께 온 흡혈귀들도 범상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하나가 진혈급 기운을 풍기는 놈들이 약 스물.

물론 그 대부분이 말만 흡혈귀지 프랑스의 폭군처럼 별개의 방법으로 경지에 오른 것 같긴 했으나, 아우테리카에서 대부분의 뱀파이어를 흡수한 '하이브리드' 소속 진혈도 열댓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전력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는 뱀파이어도 라이칸스로프처럼 숨어 지내는 영세한 종족이었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하인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은 아바타였으니 소환 해제를 한다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군.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그때, 기세 싸움을 통해 서로를 가늠하던 공작이 먼저 비아냥거리듯 툭 내뱉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하인즈가 만만치 않자 한껏 심기가 뒤틀린 기색으로.

"그럼 이 몸께서 좀 더 편해지게 도와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쉬이익— 쩌어엉—!

한순간에 다가붙은 둘 사이에서 거센 폭발이 터져 나왔다.

어느덧 생겨난 3미터가 넘는 피의 장창을 휘두르며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공작과 그에 맞서면서 천천히 물러서는 하인즈.

찰나 만에 일어난 수십 차례의 충돌에 대기가 뒤틀리고 후폭풍이 휘몰아쳤다.

'역시 강해.'

그에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공격에 하나하나 대응하던 하인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지금 뒤로 물러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물론 상대와 달리 다른 곳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페널티는 있다지만.

'일격 일격이 무겁다. 과할 정도로.'

단순히 경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매 순간마다 전력을 다한 공격만 할 순 없듯이, 원래 힘을 투사하는 데에는 효율적인 흐름과 리듬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공작은 그 모든 걸 무시하고 온 힘을 쏟은 스트레이트를 잽 날리듯이 연달아서 꽂아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리하거나 지친 것 같지도 않고. ···이세아랑 비슷한 계통의 능력인가?'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바탕으로 고위 마법을 펑펑 터트리는 그녀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압도적인 에너지를 쏟아부은 비효율적이기까지 한 연격.

'좀 더 확인해 볼까.'

하인즈는 상대가 공격하는 틈을 노려 반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뭔가를 느낀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거칠게 뒤로 튕겨 나갔다.

촤아악—

바닥에 두 줄의 긴 발자국을 남기며 간신히 멈춰 선 하인즈.

하지만 제자리에 우뚝 선 공작은 더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그 단면이 훤하게 드러난 옆구리를.

"···단순히 빠른 정도가 아니군. 중간 과정을 무시하는 공격이라니. 잠깐 방심했다가 하마터면 심장이 뚫릴 뻔했어."

말의 내용과는 달리 정작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또한 그 태도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옆구리의 구멍이 스멀스멀 아물기 시작하더니 곧 깨끗하게 수복되었다.

하인즈의 격이 담긴 상처였던 만큼 수복하는 데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되었을 텐데,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흐음, 팬텀이라고 했나. 어느 차원 출신이지? ···아니, 굳이 지금 들을 필요는 없겠군. 어차피 앞으로 시간은 많을 테니."

그렇게 순식간에 신색을 회복한 그는 바로 공격을 재개하지 않고 피의 창을 바닥에 세우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에게 이 정도 공격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흐음."

그것을 보는 하인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애석하게도 상대의 의도와는 달리 그는 이번 공방으로 어떠한 확신을 얻은 상태였다.

'대충 감이 오는군.'

확실히 공작은 번천회주를 제외하면 여태 지구에서 대면한 적들 중 가장 강했다.

저 정도 수준이면 한스를 상대로도 제법 좋은 승부를 펼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좋아. 이만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겠어.'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갈증에 그의 입에서 슬쩍 빠져나온 혀가 가볍게 입술을 핥았다.

하인즈 2세가 「혼혈진화」를 얻은 초기, 혈맹의 강경파를 모조리 포식했을 때 부가적으로 생긴 효과가 하나 있었다.

바로 포식자로서 다른 흡혈귀들의 적대적 능력을 일부 무시하고 본능적인 위압을 가한다는 것.

그것은 동족 포식을 주 성장 수단으로 삼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유용한 능력이었으며, 이후 이어진 싸움에서도 항상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해 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상황에서도 예외가 아니지.'

이룬 경지 자체는 어느 정도 비슷할지 모르나, 그 격을 쌓은 방식에 있어서 하인즈는 공작의 철저한 상극이었다.

그것이 바로 업(業).

굳이 공작뿐만 아니라,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흡혈귀의 천적이었다.

하인즈는 같은 흡혈귀를 잡아먹으며 끊임없이 성장하는— '동족 포식자'였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그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공작 각하, 저희도 슬슬 합류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공작께서 이기시리라는 건 알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것도 조금 그러니까요."

"하하하! 빨리 끝내고 놈을 심문해 보죠! 닥터도 지금 똥줄 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먼저 나섰던 공작이 상처를 입자, 잠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합류할 낌새를 비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보통 수준은 아니었던 만큼 이젠 진짜 개입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쯧, 그래. 놈을 온전히 생포하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공작 본인도 마지막 수를 주고받으며 뭔가 찝찝함을 느꼈던 건지, 결국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제부턴 진짜로 혼자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상대하게 된 것이다.

'아깝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약간만이라도 틈이 주어진다면 확실하게 끝낼 수 있을 텐데.'

사방에서 조여 오는 적들의 기세를 느끼며 하인즈가 입맛을 다셨다.

결국 이대로 그냥 물러나야 하나?

언제라도 손에 닿을 것만 같은 저 성찬을 코앞에 두고?

'···그럴 순 없지.'

역시 이대로 물러나기엔 너무 아쉬웠다.

언제 이만한 기회가 다시 올지도 모르고, 훗날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더 강한 힘이 필요하기도 했다.

'여유가 없다면 만들면 그만.'

전력이 부족하면 추가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지 않나?

그는 일시에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순식간에 후보군을 추렸다.

'일단 한스와 하인리히는 제외하고.'

한창 한국에서 활약했던 개체들을 이 자리에까지 부르는 건 조금 꺼려졌다.

하인즈도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활동했던 만큼, 서로 간의 연관성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건 지양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궁극의 진화 생명체 할리와 하이 엘프 정령 궁사 해리스.

그 둘 중 누구를 불러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쫘자자자작—!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

공간을 찢어발기는 저격이 날아들었다.

끔벅끔벅— 깜박깜박—

동시에 사방에서 돋아난 눈동자들이 그를 바라보며 역겨운 윙크를 날려댔다.

우우웅—!

하늘에서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빛줄기들이 그를 쫓아오며 연신 폭격을 가했고.

사악—

불시에 등장한 암살자의 기습과 동시에 사방에서 검, 망치, 주먹이 연쇄적으로 쏟아졌다.

미지의 기운이 사지에 들러붙으며 몸이 무거워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푸후— 마음에 들지 않는군.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순 있다만, 닥터의 부탁이 있으니 어쩔 수 없구나. 그냥 빨리 끝내도록 하지."

거기에 이어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인 공작과 그 휘하의 흡혈귀들까지 가세하니···.

'아, 이거 안 되겠다.'

그 정신없는 난장판 속에서 힘겹게 버티던 하인즈가 결국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음?"

"잠깐, 이건 뭐지?"

다들 경지에 이른 이들답게 작은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공간이 흔들리고.

기운이 일렁이며.

전황이 변화했다.

"침입자다!"

"어떻게 이 안까지 몰래···!"

———!

놀란 그들의 외침을 끊어내듯 어딘가에서 쏘아져 소리 없이 대기를 가로지르는 수십 줄기의 섬광.

다만 그것들은 한창 소란이 이는 현장의 중심이 아닌, 이곳과는 한참 동떨어진 숲의 외곽부로 향했다.

쿠구구궁—!

저 멀리서 충격파가 전해져 왔다.

그와 동시에, 빈틈을 노리고 이어지던 저격이 끊기고.

사방에 돋아났던 수많은 눈알이 일거에 사라졌으며.

하늘에 떠올라 있던 거대한 마법진이 흩어졌다.

"어떤 놈이 감히···!"

"진정해! 일단 놈을 찾는 게 먼저다!"

"팬텀은 이 몸이 상대하도록 하겠다! 드라쿨은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해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번천회 일당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답게 순식간에 태세를 정비하고 대응을 시작했다.

하지만.

변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콰지직—!

나무 위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갑작스레 툭 떨어져 내렸다.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가 뜯겨나간 처참한 모습으로.

검은 야행복을 입은 채 신음 하나 없이 꿈틀거리던 그 암살자는 곧 움직임을 멈췄고.

쿠우웅—!

그가 연기가 되어 사라짐과 동시에, 그 위를 내려찍듯 양손에 뭔가를 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거칠게 내려섰다.

"크흐하핫!"

꽈드득!

그 사내는 사나운 광소와 함께 양손에 쥐고 있던 드라쿨의 흡혈귀 둘의 머리통을 그대로 으깨버렸다.

무른 과일이라도 쥔 것처럼 두개골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핏물이 비산했다.

"···뭐냐, 저건 또."

"한 놈이 아니었나?!"

그 파격적인 등장에 장내의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2미터를 아득히 넘어서는 거대한 육신 곳곳에 들어찬 초월적인 근육과 야성적인 문신.

그 존재는 폭력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만 같은, 그야말로 폭력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래,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그리고 그 혼란 속.

드디어 바라던 여유를 갖게 된 하인즈가 다시 입맛을 다셨다.

두 가지 선택지에서 그가 고른 것은.

'둘 다 부른다' ···였다.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인 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터질 듯한 존재감.

"크후흐흐—."

그 기세는 고요하고 차갑게 스며드는 하인즈나 묵직하게 사위를 짓누르는 공작의 것과는 달리, 현장에 있는 이들의 본능적인 위기감을 맹렬히 자극하며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의, 언제 어떻게 어떤 규모로 터져 나올지 가늠할 수 없는 활화산처럼.

"경계! 함부로 달려들지 마."

"다른 쪽은 외곽 조에 맡겨! 전력이 분산되면 위험하다!"

"저건··· 정말 인간인가? 아니, 역시 마인?"

생명체의 피를 양식으로 삼는 흡혈귀들은 물론, 경지를 넘어서며 한계를 초월한 강자들은 저 사내를 대면하는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저건 결코 인간이 아니라고.

꿀꺽—

'저 괴물은 도대체···.'

괴물.

그것이 이곳에 자리한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이었다.

심지어 탈처럼 머리에 푹 눌러써 얼굴을 뒤덮은 처음 보는 야수의 머리 가죽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감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몰골은 반인반수의 마인 그 자체였으니.

"···넌 뭐 하는 놈이냐? 어떻게 이 안에 들어왔지? ···아니,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나?"

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기 속.

천천히 앞으로 나선 공작이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저 야만적인 불청객은 등장과 동시에 번천회의 초월자 하나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드라쿨의 흡혈귀 둘을 살해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적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으나, 상대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만큼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약간이라도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공격한 이유가 뭐지? 역시 팬텀과 관련 있는 놈인가? 그렇다면 지금 외곽 조와 싸우고 있는 놈도? 이곳에 난입한 수단은··· 그런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 치고. 문제는 저런 놈들이 난데없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럽게 정체불명의 상대를 마주한 공작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비밀 조직인 번천회의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난입한 자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으니까.

당연히 팬텀··· 하인즈에 대해서도 사전에 할 수 있는 조사는 모두 마친 상태였을 텐데!

그러나.

당연하지만 그 미지의 불청객, 할리는 그런 공작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어엉? 뭐라는 거야? 난 니들 말 몰라. 영어로 해 임마!"

그는 상대의 루마니아어에 천연덕스럽게 영어로 대꾸했다.

「제노글로시」가 있는 그에게 언어의 장벽 따위는 의미 없었으나, 이번 기회에 자신의 출신 국가도 속일 겸해서 벌인 소소한 장난질이었다.

그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공작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 세상엔 육체의 대화라는 좋은 수단이 있으니 말이야! 크하하핫—!"

더는 주절주절 떠들 생각이 없던 할리의 광소와 함께 그의 근육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기긱! 끼기깅—!

그러자 그의 육체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금속성.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뚱이에서 날 리가 없는, 대형 중장비에서나 날 법한 살벌한 소음이었다.

치이이익—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주변으로 후끈한 증기가 분사되자, 공기가 뜨겁게 끓어오르며 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뿌득— 뿌드득!

그렇지 않아도 비대했던 근육이 한껏 팽창하며 팔다리가 부풀어 오르고, 손끝에서는 갈고리 같은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났다.

전신을 빼곡히 뒤덮은 비늘 아래로 '광기'가 흐르며 검붉은 아지랑이와 같은 「생체 오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은 생물의 정점이자 끝도 없이 성장을 추구한 끝에 한계를 초월한 어느 실험체의 이상향.

그야말로 「궁극의 진화 생명체」 그 자체였다.

"···뭐야 저건?"

"변이계 마인? 아니, 저건 단순히 그 정도 수준이···."

"지독한 기운이군. 모두 정신을 단단히 잡아라! 저것에 오염되었다간 대번에 매드 뱀프가 되어버릴 거다!"

번천회 일당들은 한순간에 벌어진 상대의 변화에 저도 모르게 살짝 뒤로 물러섰다.

마치 생태계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포식자를 마주한 피식자처럼.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보인 본능적인 반응을 뒤늦게 자각한 이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존심이 강한 그들에게 있어선 그런 추태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굴욕이었으니.

"후욱—."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덧 3미터 남짓으로 덩치가 커진 할리는 막대한 에너지의 연소로 발생한 증기를 내뱉으며 놈들을 사납게 바라볼 뿐이었다.

"크흣, 자아— 그럼 이제···."

그의 얼굴을 뒤덮은 야수 머리 아래로 상어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돋아난 아래턱이 드러났다.

그리고 도저히 인간의 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그것이 비틀리며 호선을 그리더니—.

"···사냥을 시작해 보자꾸나! 크흐하하핫!"

이내 광기 어린 흉포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 거체가 빠르게 앞으로 쇄도했다.

***

한 검은 인영이 숲 중심부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빠져나와 외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방심했다.'

그 장본인, 닥터의 명령으로 번천회 그리스 지부에서 파견 나온 암살자가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다행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목숨만큼은 건질 순 있었으나,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잃은 건 치명적이다. 일단 지금은 나름의 응급조치를 취했다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의 우반신으로 향했다.

뜯겨나간 사지의 단면을 지혈하며 그 자리에 대신 자리 잡은 새카만 팔다리.

당장의 운신을 위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암흑의 차크라를 직조하여 만들어 낸 인공 신체였다.

'···그 괴물 놈이 그 정도 수준이었을 줄이야.'

갑자기 등장한 침입자의 역량을 가늠한다고 괜히 근처에 얼쩡거렸던 게 패착이었다.

설마 놈이 이쪽의 은신을 꿰뚫어 보는 건 물론, 단순히 손을 뻗어 움켜쥐는 것만으로 자신의 팔다리를 끊어버릴 수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마음 같아선 이대로 빠져나가고 싶지만.'

그러나 지금 같은 혼란 상황에선 치명상을 입었다고 자기 혼자 그냥 물러날 수도 없었다.

거기다 흡혈귀처럼 잘린 팔다리를 쑥쑥 재생할 수 있는 괴물들과는 달리, 순수 인간인 그가 추후 닥터에게 제대로 된 처방이라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라도 공을 쌓아 둘 필요도 있었고.

'어쩔 수 없지. 그 괴물 놈은 상성상 너무 불리하니, 우선은 외곽부터 지원해서 다른 쪽의 침입자 먼저 정리해야겠···.'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

부상으로 흐트러진 기감을 꿰뚫고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코앞에 날아든 섬광 한 줄기.

"······!"

기다렸다는 듯, 그가 상대를 추적하기도 전에 먼저 날아든 선공이었다.

'젠장···! 이쪽도 괴물···!'

콰아아앙—!

그리고 그 공격을 날린 이.

할리와 함께 지구로 불려 온 하이 엘프 해리스가 「자연지체」와 「자연 동화」 등의 스킬들로 완전히 숲과 동화된 채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순간에 피한 건가? 몸도 성치 않은데 제법이군.'

한 손에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활 테미스를 들고 반대편 손엔 화살을 쥔 채로 눈을 반개하면서.

"그렇지만 그냥 놓아줄 순 없지."

그의 반쯤 감긴 눈에서 에메랄드빛 눈동자 안의 금색 별이 반짝이자, 재차 「은하수의 관찰자」가 발동하며 숲 전체의 전경이 최첨단 위성으로 관측하는 것 이상으로 한눈에 들어왔다.

어떤 생명체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들이 가진 기운과 경지는 어떻게 되는지 등.

모든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뇌리에 박아 넣은 그는 다시 어느 곳을 향해 활을 겨누며 조용히 시위를 당겼다.

'이곳에 있는 놈들은 죄다 번천회의 수족. 한 놈도 이 밖으로 살려 보내지 않겠다.'

이번에 해리스가 맡은 임무는 외곽에 있는 저격수와 대마법사를 비롯한 번천회 일당이 중심부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제거하는 것.

그러면서도 일단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기는 게 목표였는데, 「무유팔괘비공(改)」까지 이용해서 대자연과 동화할 수 있게 된 그에게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징그러운 눈알을 사방에 만들었던 지원계 능력자는 물론이고, 그다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가능성이 높았던 초월급 암살자마저 지금 막···.

콰아아아앙—!

그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이걸로 한시름 놓았군. 할리가 놈에게 미리 흔적을 새겨둔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어.'

원래 은밀하고 기동성이 좋은 암살자는 이렇게 쉽게 해치울 수 없었을 텐데.

그렇게 소기의 성과를 거둔 해리스는 곧바로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 직후.

쫘자자작—!

쿠구궁!

그가 직전까지 있었던 곳으로 공간을 찢어발기는 저격과 함께 대마법에 의한 융단 폭격이 쏟아졌다.

암살자에게 신경을 쏟기 전부터 수차례나 계속된 공방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끈질기게 항전하고 있는 번천회 외곽 조의 공격이었다.

'자연을 이렇게까지 파괴하다니. 역시 천벌 받을 놈들이로구나.'

해리스는 놈들의 공격으로 초토화가 된 일대를 일별하곤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숲의 수호자로서 이런 행태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까?

그에 번천회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진 해리스가 다시 정령들을 부르며 활시위를 당겼다.

···사실 삼림 훼손에 대한 죄를 묻자면 지금 가장 먼저 잡아들여야 할 이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는 애써 그곳을 돌아보지 않고 외면했다.

숲 중앙의 전투 현장.

콰아아앙!

검붉은 기운에 휩싸인 손과 빛나는 망치 머리에 담긴 오러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크흐하하핫—! 아, 좋구나! 좋아!"

"흐아압!"

막대한 힘과 힘의 충돌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거센 충격파와, 그 안에 함께 섞여 들려오는 광기 어린 웃음.

그 교전의 결과는 극명했다.

"크헉! 이 괴물 놈이!"

나름대로 힘에 자신이 있었는지, 형편없이 뒤로 튕겨 나가는 거구의 망치 전사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위기는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었으니.

중심을 잃은 그는 자신의 안면을 덮쳐오는 거대한 손아귀를 보며 이를 악물고 사력을 다해 그것을 쳐냈다.

쩌어엉—!

그에 망치와 손과 부딪쳤을 때 나선 안 되는 금속성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잠깐의 틈을 타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달려들어 그를 간신히 위기에서 구출해 냈다.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 차륜전으로 놈의 힘부터 빼서···!"

"저런 거한테 그딴 방법이 통할 것 같아?!"

"지금은 이 방법이 최선이다! 일단 버티는 쪽으로 가서···."

마치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 하는 것 같은 현장.

문제는 그 보스가 지능을 갖춘 건 물론 달인급의 무술까지 익혔다는 점에 있었다.

"카하핫! 사양하지 말고 좀 더 놀자고, 친구들!"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기술을 가진 괴물이 날뛰기 시작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억제하고자 매달리는 이들의 비명 섞인 고함이 끊이질 않았다.

"후— 이제야 좀 편해졌군. 공작, 우리도 아까 못다 한 일이 있지 않나? 이번에 마저 끝내야지?"

"···팬텀!"

그 난장판 속에서 하인즈가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마주한 상대를 평가하듯 여유롭게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것은 식자재의 등급을 매기는 감정사의 눈빛이었다.

***

부쿠레슈티 시내의 어느 건물 안.

와장창—! 쨍그랑!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선 닥터가 정신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에 테이블 위에 차려진 간식들이 널브러지며 주변이 난장판이 되었으나,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이미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지금의 그에겐 다른 곳에 신경을 기울일 조금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뭔, 저게··· 대체···?"

홀린 듯 홀로그램 영상 앞으로 다가선 그가 화면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은 의문을 표하고 있었지만 그는 저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

약 십 년 전, 수많은 용종과 용 사냥꾼들이 살아가는 라우베다 차원에서 넘어온 '포식룡의 피'를 접한 그가 구상하고 초안을 세웠던 과제였다.

사실 이번에 하인즈를 생포하고자 했던 것도 그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아아아—! 저건 확실히···!"

단순히 이종의 육체를 억지로 덧붙여서 사용하는 키메라 수준이 아닌, 우월한 유전자를 끊임없이 수급하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궁극의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였는데···.

"그런데··· 그게."

그런데 아무리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려 해 봐도, 「진리의 눈」을 가진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게! 왜 저기에 있습니끄아아—!!"

'저것'은 분명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