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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아우테리카의 가장 깊은 곳.

심연.

시간과 공간, 물질과 개념의 기준이 흐트러져 무의미하게 부유하는 그곳은 언제나처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겠지.

파직!

그런데.

그 언제까지고 변함이 없을 것 같은 장소에서 갑작스러운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사사삭—

콰드득— 콰직!

공간이 부서지며 뭔가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어쩌면 부서지는 건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은 그런 개념조차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소리가 났다는 것조차 착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알 수 없는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침내 또 다른 이변을 그 자리에 툭 뱉어냈다.

"흐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갑자기 자리에 나타난 사내.

모든 것이 요란하게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꽝인가?"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순 없었다.

정식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편법을 이용해 침입한 만큼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원래 보안의 취약점은 관리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런 외딴곳에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사내··· 평범한 것도 같고, 위압감을 풍기면서도, 흐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

번천회의 회주가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쓸 만한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XX된 XXX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두쿵—

거센 박동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276

하회탈 리턴즈 (1)

심연의 깊은 곳.

그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생명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그것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무료함이라는 감정마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이레귤러에 흥미가 가는 건 당연한 일.

"설마, 신인가?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 신이라니. 흐음, 그렇다면···."

일단 이 공간 속에서 자기 형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합격이다.

육신은 물론 존재가 지닌 격 또한 더할 나위 없었고.

그것은 조금씩 치솟는 호기심에 살짝 장난을 쳐 보았다.

꾸우웅—

꿀렁거리는 혼돈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그 생명체,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주변 공간 자체를 뒤틀어 버린 듯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버릴 뿐.

"···여긴 그런 세상인가? 귀찮게 됐군. 그냥 방임형이 편한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번천회주는 태연하게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뭐라 하건 관심이 없는 것은 이곳을 지배하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필멸자의 인격과 자아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은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행위에도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아—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

자신의 소유물이자 노예, 그리고 장난감.

복제해서 저장해 두었던 혼 하나를 꺼내 상대의 몸속에 밀어 넣었다.

잘 돼서 저 육체 단말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 전에 실패했던 일을 다시 시도하는 게 좀 더 빨라지지 않겠는가?

'하여간 신이라는 놈들이 독선적인 건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군.'

그에 눈을 가늘게 뜬 번천회주는.

"쯧, 쓸데없는 수작을."

-끄아악—!

제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그대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한쪽의 길이만 3미터가 넘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앗—

그 즉시 사방을 뒤덮은 혼돈과 심연을 밀어내며 퍼지는 노을빛 광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신성력이었다.

꿈틀—

그에 불쾌한 듯 주변 공간이 꿈틀거렸다.

찢긴 노예의 혼이야 어차피 아직도 복제품이 많이 남아있었으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저 거슬리는 기운이었다.

감히 자신의 영역에서 신성력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분노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성력.

저것은 이곳 아우테리카가 아닌 외신(外神)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저 생명체는 그걸 누군가에게서 빌려오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품고 있다가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상대는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었으니.

그래도 자신과 마주할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는 소리였다.

-끄아— 아아··· 신이시여···.

그 와중에도 복제된 영혼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르짖다 부스러져 사라졌지만, 그것은 이미 그쪽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신이라··· 보아하니 그쪽은 그 자리에서 내쫓긴 처지인 것 같은데."

꿀렁—

역린을 건드린 모양인지 공간이 요동치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영락했다 해도 신은 신.

고작 감정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에 공간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런 격랑 속에서도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흥분하기 전에 잠깐 대화라도 하는 건 어떤가? 그렇게 나와 봐야 나는 그냥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인데."

그리고는 기묘한 빛이 서린 눈으로 이 깊은 곳에 가라앉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신이라는 족속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처박혀 있는 저 존재는···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제대로 된 신이라 할 수 없었다.

이미 신좌에서 쫓겨나 봉인된 지 오래된 것 같기도 했고.

또한 그 뜻은 곧—.

'놈도 아쉬운 게 있다는 소리지. 이거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그렇게 한다면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물론 진입한 장소가 하필이면 이 차원의 감옥이자 쓰레기통과 같은 곳이라는 게 문제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 걸릴 것 같군. 그런데···.'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방을 휩쓰는 무질서한 에너지의 격류 속에 깃든 기운이 미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흐음. 기분 탓인가.'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애초에 세계의 찌꺼기라는 게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당장은 그런 거에 신경 쏟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방을 뒤덮는 심연 속에서.

두 세계의 흑막이 조우했다.

***

빠른 속도로 회원을 늘려가던 인터넷 사이트, 새벽의 서낭당.

개설 초기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그 사이트도 요즘엔 성장세가 한풀 꺾이는 추세였다.

가입할 만한 이들은 이미 전부 가입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들의 중심이 되었던 이의 오랜 잠적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뭐, 팬 사이트니까 어쩔 수 없지.'

모두 '하회탈'이라는 다크 히어로의 활약에 감명받아 한데 뭉친 이들인데, 정작 그 당사자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췄으니 오죽할까.

덕분에 꾸준히 그의 복귀를 기원하던 이들의 사이에서도 서서히 동요가 번져가고 있었다.

-(링크) 인증이라고 피 묻은 부서진 하회탈 가면이랑 로브 같은 것도 올라옴. 이거 진짜임?

-ㄴㄴㄴ주작주작주작

-하회탈 잠수탄 지 얼마나 됐냐? 일주일은 넘은 것 같은데. 이 주 정도 되지 않았음? 설마 진짜로...

-아니, 한 달도 아니고. 그거 잠깐 쉬는 거 가지고 지랄들 하네;;

└솔직히 일본 다 정리하고 잠수 탔으면 좀 쉬려나 보다 할 텐데, 다 끝내지도 않고 도중에 멈췄다는 거에서 킹리적 갓심이 들지 않냐?

└ㅜㅜ 심지어 한국에서도 목격 정보 없음. 죽진 않았어도 진짜 어디 다친 거 아님?

└아 살아있으면 생존 신고라도 하라고ㅋㅋㅋ 쉬는 건 봐 줄 테니까 제바류ㅠㅠ

용서 없는 범죄자의 심판과 그로 인해 향상된 국내 치안, 거기에 더불어 해외에서까지 활약하며 매스컴을 탄 덕분인지 그를 응원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굳이 그 팬 사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근 슬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하인즈 2세, '팬텀'과 연관 짓는 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둘의 관계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한국이 이렇게 평화로워진 게 누구 덕분인데? 하회탈 따라 하는 그 오페라 유령 가면 쓰는 놈이 활개 친다고 귀신같이 태세 전환하는 거 보면 환멸이 남;;

지나치게 과몰입해서 아예 서로 경쟁 관계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회탈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든가 어떤 식으로든 그 수혜를 입었던 이들.

하지만 그런 반응에 호응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좀 그렇긴 하지. 걔들 이때다 싶어서 하회탈 깎아내리더라.

-아니, 근데 하회탈이 뭐 특허라도 냄? 누가 됐든 덕분에 좀 더 안전해졌으면 된 거지 별걸 가지고 다 ㅈㄹ

└ㄹㅇ 누렁소든 검은소든 일만 잘하면 된 거 아니냐?

-그간 노력해 준 건 고맙긴 한데, 솔직히 전 흑마법사는 조금 찝찝해서..ㅎㅎ;

└아, 나도. 혹시 어디서 흑마력 폭주해서 잠수탄 거 아님? 이러다 회까닥 해서 갑자기 빌런으로 튀어나올지도.

└와..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하 놈들 언플하는 거 역겹네 진짜

애초에 하회탈이 이렇게까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치안에 대한 공적 덕분이었던 데다가, 최근에 개설되어 성장하기 시작한 팬텀의 팬 사이트인 '오페라 하우스'도 그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음, 생각 이상으로 하인즈 팬덤의 성장이 빠른데. 역시 처음부터 카메라 같은 걸 신경 쓰지 않고 활동한 덕분인가.'

한스처럼 눈 깜짝할 새에 순간이동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하인즈의 활동 범위도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다.

서울 내로 한정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몇 분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가졌으니까.

거기다 그는 많은 이들이 찝찝하게 여기는 흑마력과도 연관이 없었고, 흡혈귀로 의심받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존재부정」으로 철저하게 감출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한스와는 달리 무척이나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던 것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계기는 어쩌다 찍힌 심판 직후의 사진 한 장이었는데.

거기에 담긴 그의 미모가 오페라 반가면 따위론 전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게 문제였다.

'그건 확실히··· 내가 봐도 대단했지.'

단 한 장으로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사진.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멋들어진 고급 양복에 하얀 반가면을 쓴 채, 촬영자 쪽을 돌아보는 하인즈 2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찍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따로 포즈를 잡아준 것도 아니건만, 마침 사진을 찍은 이가 업계 종사자였는지 상당한 거리에서 줌을 당겨 찍었음에도 마치 화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거기다 사진 너머로 「미혹」도 살짝 담긴 것 같고.'

아무래도 하인즈의 격이 상승하면서 강해진 효과가 자연스럽게 사진에까지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알파를 처리한 직후에 얻어놓고도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그간 잊다시피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주변에 널브러진 범죄자들이 그의 위험한 듯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음침하게 꽁꽁 둘러 싸맨 흑마법사 하회탈과는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겠군.'

아마 마성의 남자 하인즈 2세의 인기가 여성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한 것도 그게 원인이겠지.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뭐, 둘 다 나니까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참에 아예 대놓고 가면 비밀 조직을 결성해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름은 대충··· 가면무도회(Masquerade) 정도가 어떨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하인리히를 포함해 다른 아바타들까지 몽땅 끌어모아서···.

'아니,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는 딴 곳으로 새려는 생각을 다시 수습해 정리하며 앞으로 있을 일정에 집중했다.

지금은 중요한 계획이 막 코앞에 다가온 상황이었으니까.

쉬이이익—

고요함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맹렬하게 주변을 스쳤다.

달빛조차 숨을 죽인 밤.

아래쪽에서 흐릿하게 비치던 바다의 물결이 이내 화려한 번화가의 야경으로 바뀌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환상의 도시로.

'어디 보자. 위치가···.'

그렇게 바다를 건너 도착한 도시, 상하이 상공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찾았다.]

「심연의 눈」을 사용해 목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한스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놓칠 수밖에 없었을 수준의 어마어마한 보안 속.

그 안에서 익숙한 기척이 포착되었다.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장, 율령자.'

이제 와서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아마 놈들의 수준이라면 이미 자신이 상하이에 등장했다는 것쯤은 파악했을 터.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지금까지 비행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하강하는 한스의 몸.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앞을 막아서는 결계가 박살 나며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회탈 부활의 신호를 알리는 화려한 축포였다.

***

화려한 장식과 야경이 비치는 집무실.

"후우."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과의 협의를 마친 율령자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찻잔을 손에 쥐었다.

후룩—

멋진 야경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휴식 시간.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오른팔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는 뒷목부터 이어진 가느다란 금속 와이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하회탈의 정신세계에서 팔을 잃은 그를 위해 닥터가 만들어 준, 의사에 따라 강제로 몸을 움직여 주는 최첨단 마도구였다.

'하회탈···.'

그것을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까딱이던 그가 상념에 잠겼다.

일본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는 회(會)의 대적.

이쯤 되면 놈도 그때의 일로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의 일방적인 출혈은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찌푸려졌던 그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놈에 대한 대책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이번에 서기관과의 공조가 제대로 마무리되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러나.

옛말에 그런 속담이 있지 않던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고작 호랑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것이 한 세계의 마왕이라면···.

삐잉—! 삐잉—! 삐잉—!

생각만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율령자님! 큰일입니다! 지금 상하이 영공에···!

근거지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요란하게 울리고.

보안실의 부하에게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왼쪽 의안에 핏빛의 붉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쨍그랑—!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요란하게 깨졌지만,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아 벌떡 일어선 그는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었다.

콰아아앙—!

곧 이어진 건물이 뒤흔들리는 듯한 거친 충격과 함께.

[크크큭— 이거 참, 정말 오랜만이구나.]

조금 전까지 떠올리기만 하던.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공간을 얼려버렸으니까.

#277

하회탈 리턴즈 (2)

상하이에 자리한 어느 빌딩의 최상층.

쩌저적—

언제나 따스함만이 감돌던 그곳에 서늘한 한기가 퍼지며 급속도로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물의 표면에 서리가 내리고, 대기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얼어붙었으며, 요란하게 발동하는 결계들의 흐름이 정체돼 삐거덕거렸다.

[그간 잘 지냈나 보군.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이 모든 게 단 한 존재가 나타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이상 현상 속.

집무실의 주인인 율령자는 혼란스러워지는 사고를 애써 수습하며 눈앞의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곳을··· 아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하회탈이 흑마법의 대가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히 번천회도 오래전부터 그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준비해 왔고, 그와 활동 영역이 겹치는 동아시아 지부는 평소의 보안에 더해 흑마법에 특화된 은폐성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그게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건가?'

까득, 이를 악문 율령자가 이미 활성화되고 있는 온갖 결계와 설비들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예상치 못한 불시의 습격으로 은폐와 진입 저지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이곳은 동아시아 전체를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였다.

여기에 적용된 보안이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우웅—!

지잉—

이면 세계 형성, 공간 격리, 좌표 고정, 이능 제어, 흑마력 억제, 신성 제단 구축 등···.

하회탈이 진입하던 순간부터 하나둘 작동하던 설비들이 모두 발현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능의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고 효율만을 추구한 시너지.

오직 번천회만이 가능한 다중 술법의 연계였다.

[호오—? 과연 대단하군.]

그에 나직이 감탄한 한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보니 어째서 그가 진작 율령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는지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미 두 차례나 영체 상태의 그를 마주했음에도 그 종적을 쫓을 수 없어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이만한 방비 속에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나.

'아깝네. 진입과 동시에 곧바로 놈을 생포했으면 일이 더 편해졌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폼 잡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스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율령자가 있는 곳으로 곧장 들이닥쳐 놈을 포획한다는 첫 계획은 외부에서 관측한 것과 다른 공간 왜곡 때문에 실패했다.

그나마 직전에 방향을 틀어 어떻게든 집무실 내부까진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발동하기 시작한 결계들 때문에 바로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도 그리 나쁘진 않아.'

자신을 경계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율령자와 그를 지키려는 듯 빼곡하게 발동한 온갖 보안 술법들.

한스는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그 번천회 특유의 복합 술식을 「심연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참···.'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빨려든 정보는 즉시 「마도의 길」과 「금단의 지식」, 「부정한 현자」를 통해 낱낱이 해체되었고.

'진수성찬이군.'

그렇게 분석된 내용은 고스란히 「마도의 길」의 자양분이 되었다.

'애초에 이 스킬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번천회 덕분이었으니까.'

과거— 훌륭한 연구 자료와 더불어, 율령자의 눈과 다리를 희생한 헌신적인 개인 과외 끝에 개화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도 이렇게 방대한 교보재를 준비해 주다니.

[갸륵하구나. 또한 어리석다. 고작 이런 걸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하회탈로 가려진 눈가에서 시커먼 안광이 새어 나왔다.

그와 함께 몸에서 폭사되는 에너지에 결계가 뒤흔들리며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죽음이니—.]

쾅!

우르르르—

그때, 집무실 문을 박차고 다수의 각성자들이 들이닥쳤다.

전원 최소 극의급에 개중 한 명은 완연한 초월에 이른 강자였다.

그 혼자서는 하회탈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알 텐데.

아마 결계의 도움이 있으면 다른 지점에서 지원이 올 때까진 버틸 수 있겠다 여긴 것이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건, 그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

콰아앙—!

재차 폭음이 일며 공간이 들썩였다.

'결계가 몇 겹이나 중첩되어 있는데도 이만한 여파라니.'

하지만 율령자는 뒤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싸움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애초부터 그의 역할은 전투원이 아닌 관리자였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물론 그의 고유스킬인 「심상투영」은 육신의 무력과 무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지만, 이미 하회탈에겐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비싼 대가를 치러서 말이지.'

그는 슬쩍 눈을 내려 열심히 움직이는,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행동 보조 마도구가 달린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상하이 지부는 당분간 폐쇄다. 아무리 공안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지만 이미 너무 주의를 끌었어. 괜한 관심이 쏠려서 좋을 것 없지.'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많은 만큼 다수의 지부가 분포되어 있었다.

그중 어디로든 넘어간다면 업무를 처리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부장으로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야 전부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하회탈의 난동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데.'

재차 그 기괴한 가면의 습격자를 떠올린 율령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국의 천(天)급 초월자들은 대부분 대륙 곳곳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만한 강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봐야 쓸데없이 효율만 떨어지니 당연한 일.

문제는 그만큼 그들을 한데 모으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점이었다.

'하필 회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때···!'

불과 하루 전.

하회탈의 재등장을 고려한 회주가 지구에 남아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더는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막 떠나간 참이거늘.

이 어찌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렇게 몇 차례 이를 갈던 율령자는 이내 억지로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흥분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왼쪽 의안의 시야 한 편에 떠 있는 알림창을 흘깃 바라봤다.

-코드 네임 : 하회탈

-에너지 타입 : 흑마력 + 죽음(?)

-주요 능력 : 흑마법, 언데드, 공간이동, 결계 전반 등 다수

-출신 차원 : 불명

-고유스킬 : 불명

-······

하회탈을 마주한 직후에 출력되었던 내용들.

스캔이라 하지만 그 내용은 의안이 직접 분석한 것 보다 그의 뇌리에 남은 정보들을 정리한 것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최첨단 마도 공학의 산물이라지만 하회탈처럼 격이 높은 이를 파악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 하단에는 당장 참고할 만한 사항이 몇 줄 있었다.

-측정된 에너지 : 93,853,126

-위험도 : S+

-기가급 함선 원자로 이상의 에너지 반응 감지. 속히 이탈할 것을 권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측정되며 변동하고 있는 수치였다.

이 의안은 마도 공학이 극도로 발달해 우주까지 진출한 캘리카스 차원의 물건.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함선도 천체를 항해하는 초대형 우주 함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S+라고? 이 의안을 얻고 확인한 천급의 대다수가 A 선이었건만···.'

물론 에너지양과 전투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서로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며 싸우는 우주 전쟁에서라면 모를까, 극한의 효율성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달인끼리의 승부에선 일정 선만 넘는다면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정면으로 날아드는 주포를 완전히 상쇄하는 건 힘들어도, 슬쩍 방향을 틀어 흘려버리는 건 간단히 해내는 존재가 바로 초월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예 단위가 다른 수치는 보는 이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특히 율령자처럼 객관적인 자료와 계산 등을 통해 세상을 예단하는 부류에게는 더더욱.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야 한다. 천위밍도 A+의 천급이니 결계와 지(地)급들의 도움이 있다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터.'

사실 가장 빠르게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최상층에 마련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하회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침입자가 어디로 침투하건 공간 왜곡으로 최하층으로 보내지게 돼 있어, 여유롭게 그것에 대응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최상층의 전송진으로 빠져나갔을 텐데.

'젠장, 그것 때문에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도 전부 막혀 버렸고···.'

설마 그 철저한 대비가 오히려 이렇게 탈출에 방해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다른 지점에 가게 된다면 꼭 이 점을 개선해 다시 설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

물론.

탈출할 수 있다면.

콰아앙—!

갑작스럽게 최상층에서 밀려온, 지금까지 있었던 것 이상의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이건 무슨!"

그에 휘말린 율령자가 맥없이 상체를 휘청거렸지만, 다리의 보조 장치가 자동으로 자세를 제어해 준 덕에 바닥을 나뒹구는 꼴만은 면할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측정된 에너지 : 156,759,142

-위험도 : SS-

-테라급 함선 원자로에 준하는 에너지 반응 감지. 즉시 비상 탈출 시퀀스로 이행할 것.

수치가 바뀐 알림창이 다시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과 함께.

[크흐— 또 만났구나. 제법 부지런히 걸은 것 같다만.]

불과 조금 전에 대면했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쳤다.

슬쩍 위험도 수치를 확인한 율령자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곤 힘겹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천위밍은."

생각이 길어져 제법 오래 지난 것 같았으나, 실상 따져보면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빨리 뚫려 버리다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음? ···아아! 저 녀석 말이냐?]

하지만 하회탈의 뒤쪽을 본 율령자는 이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벅저벅—

스윽— 스윽—

다수가 걸어오는 소음에 섞여 들려오는, 뭔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어둠을 헤치고 십여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그것을 본 율령자가 이를 악물었다.

먹물에라도 빠진 듯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을 뚝뚝 흘리는 언데드 부대.

그는 한눈에 그들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급 언데드···! 거기다 나머지도 전부 지급? 저런 것들이 어떻게 지구에!'

그것들은 그간 모아온 각성자의 시신으로 만든 '어비스 레버넌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선된 개체만을 선별한 정예 스쿼드.

이내 그 가장 선두에 선 언데드, 살마가 한 손에 잡고 질질 끌고 오던 뭔가를 천천히 치켜들었다.

"···천위밍."

검은 손에 잡힌 머리채 아래에 보인 것은 율령자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조금 전까지 시간을 벌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뒤에 남았던 천급의 고수였으니.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미 그 얼굴에 생기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일까.

[크흐흐— 덕분에 쓸 만한 소재를 구했구나. 이 녀석도 훌륭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 이거 아주 만족스럽군.]

"······."

등 뒤에 시체의 병사들을 거느린 죽음의 마왕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앞에 선, 위압감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스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너도, 제법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있구나?]

심연이 담긴 한 쌍의 눈이 율령자의 몸을 훑었다.

그는 비전투형 정신계 각성자인 데다 경지도 초월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었으니 영 못 써먹을 몸뚱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에도 생각했지만. 저 눈, 굉장히 탐나는군.'

테두리엔 은은한 푸른빛의 원이, 그 안쪽의 홍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채워져 신비롭게 발광하는 기계 의안.

저만한 수준의 마도 공학 물품은 처음 보는지라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또 마침 드워프 아바타 하워드도 한창 마도 공학에 도전하는 중이지 않던가?

거기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저번엔 휠체어를 타고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저 오른팔도.'

아무 이상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저 팔다리를 보라!

그러면서 옷 아래로는 티도 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라니.

'말 그대로 궁극의 강화 외골격이군.'

저것도 한창 슈트 개량에 매진하고 있는 하워드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터.

아직 다른 세계의 마도구를 이용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적잖은 수확을 걷게 된 한스가 재차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율령자에게로 다가가 한 손을 뻗었다.

[어디 다시 한번 도망쳐 보려무나.]

"···하, 개 같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스의 손이 이마에 닿을 때까지,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278

하회탈 리턴즈 (3)

상하이 소재의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를 습격한 하회탈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 여세를 몰아 아예 근방의 휘하 세력들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아주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인 상하이에서 벌어진 일은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중국 국내는 물론 국경을 넘은 해외까지도.

그리고 그 소식에 가장 극렬하게 반응한 곳이 바로···.

인근의 국가이면서 하회탈의 출신지이기도 한 대한민국이었다.

중국발 기사를 그대로 가져와 보도하는 황색언론부터 시작해, 조회수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 온갖 자극적인 문구로 과장하는 사이버 렉카를 거쳐 나름대로 공신력이 있는 언론들까지.

모두가 그 소식에 흥미를 가지고 관심을 보였다.

또 일이 그쯤 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일 벌이는 클라스 무엇?ㅋㅋㅋ 야쿠자에 이어서 이젠 삼합회를 들이박네ㅎㄷㄷ

-??? : 그냥 일본 돌아다니는 게 지겨워져서 잠깐 쉬면서 중국 관광하던 것뿐입니다. 이제 다시 일 시작했으니 국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하 형 돌아왔구나! 난 형 믿고 있었어!

└너 저번에 하회탈 어디 갔냐고 징징 짜던 애 아니냐?

점차 말라가는 듯하던 하회탈의 팬 사이트 '새벽의 서낭당'은 처음 소식이 알려졌던 아침부터 시작해 쉴 새 없이 트래픽이 늘기 시작했고.

-죽었다고 한 새X들 다 대가리 박아라. 일단 나부터 박음ㅇㅇ

-빠른 자백ㅇㅈ합니다

-저도 박겠읍니다...

-와 ㅅㅂ 근데 진짜 살아있었네? 혹시 대역 아님?

└이만한 규모로 일을 벌인 데다, 증거도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는데 설마 가짜일까?

└솔직히 이렇게 완벽한 대체가 가능하면 그냥 진짜라고 쳐 줘야 됨

└ㄹㅇㅋㅋ

하회탈의 잠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이들도 귀신같이 태세를 전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저력과 이름값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다만 그 소식을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일본에 이어 중국의 항의를 받게 된 한국 측 고위 인사들이었다.

하회탈과 별다른 관계도 없는 그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지만, 국제 관계에서 이런 문제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협조를 해주든 뭘 하든 어떤 식으로든 액션을 취해서 국가 간의 유대를 원만하게 만드는 게 바로 외교 아닌가?

그리고 그 일각을 차지하는 한 축.

"그럼 긴급회의를 시작하지. 안건은 모두 알고 있겠지?"

서울 남산에 위치한 한국 귀환자 협회 총본부에서도 막 간부진의 회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이 주제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요? 일본 때도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새삼?"

"그러게. 안 그래도 바쁜데 왜 또 여기까지 불렀데?"

-뭐, 어쩔 수 없는 문제기는 하니까요.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화상으로 참여하면 안 됩니까? 왜 서울은 강제 참가야··· 불공평하게···."

협회장의 주재하에 소집된 간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었다.

서울의 각 지부장들과 화상으로 참여한 지방 도시의 지부장들까지.

국가 기관과는 달리 격의 없는 이들이 모인 탓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각성자의 능력과 지위는 비례하는 법.

이 자리에 있는 간부진들은 모두 출신 세계에서 나름대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이들이었다.

영웅, 귀족, 단체장, 명성 높은 네임드 등···.

이미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에 찬 그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은 할지언정 과하게 눈치를 보진 않았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실전으로 엄선된 능력 중심의 인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중국 측의 항의가 생각보다 더 강경하다. 정부 측 말로는 온갖 방면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는군."

물론 그런 만큼 강자에 대한 예우도 확실했다.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으니까.

협회장의 한마디에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간부진이 그의 말에 집중했다.

"예? 아니, 뭘 그렇게까지? 기껏해야 범죄자들이나 잡은 거 아닙니까? 그것도 고작 상하이 인근 조직 몇 개 털었다면서요?"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보죠? 건방지게 자국에 넘어와서 설친다고?

"글쎄, 정확한 이유야 그쪽만 알겠지. 어쩌면 하회탈이 건든 놈 중에 그쪽 고위층과 선이 닿았던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창 이야기가 오가는 회의장의 한편에서.

억지로 자리에 끌려온 서울 남부 지부장, 뇌제 윤지윤이 뚱한 표정으로 패드에 떠오른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하회탈 본인이 맞는 것 같네.'

하나같이 중국에서의 하회탈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사진은 물론 CCTV를 주축으로 한 동영상에 목격자들의 증언과 그걸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까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유능하기 그지없는 정보 수집이었다.

'뭐, 중국에서 증거랍시고 내놓은 게 대다수긴 하겠다만.'

회의는 예상대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당장 하회탈은 중국에 있다는데 이제 와서 그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꼬장 한 번 부리고 싶었던 거 아냐? 이참에 외교적 우위를 점해서 이득을 보려고.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음?'

그렇게 자료를 휙휙 넘기던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최초의 이상이 보고된 어느 빌딩에 대한 사례였다.

'대외적으로는 투자 회사.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뭔가 미심쩍은 정황이 발견됨.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 한 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주변 일대의 암흑가를 지배하던 삼합회와 그 관련 조직에 대한 무차별적인 징벌.

하회탈이 지금까지 하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회탈, 하회탈··· 그러고 보니···.'

하지만 그에 대해 되뇌다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번천회가 바로 하회탈이 날뛰기 시작한 이후에 꼬리가 드러난 조직이었지.'

얼마 전 그녀의 관할에서 테러를 일으킨 9레벨 광혈귀이자 혈맹의 전(前) 수장, 알파가 속해 있었다는 조직.

그놈들이 한국에서 몸을 감췄던 계기가 하회탈과의 충돌이었다고 들었다.

'지금까진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한국을 넘어 일본, 그리고 중국까지 향한 하회탈의 행적도 범상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왜 그는 굳이 다른 나라까지 가서 범죄자를 사냥하는가?

그리고 일본을 정리하던 도중에 있었던 잠적기와 이번 상하이 사태의 상관관계는?

혹시 놈들을 찾기 위해 일본을 뒤엎다가 발견한 단서를 쫓아서 중국으로 넘어간 건 아닐까?

'···하인즈와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겠어.'

사실 굳이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지 전부터 조금 의심하던 사항이기도 했다.

하회탈과 헤테로시스의 관계에 대해서.

'이번에 하회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도 했고 말이지. ···흠, 혹시 같은 세계 출신인가?'

그렇게 나름 예리한 추측을 내놓은 그녀는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그거야 앞으로 천천히 알아 가면 될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지지부진한 진행에 지루해진 그녀는 슬그머니 책상 밑으로 꺼낸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실행했다.

음소거까지 하고 초인적인 신체 통제력으로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게임하네.'

'게임이군.'

'아, 부럽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모두 초인이었다.

당연하지만 참석자 중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회의를 진행하던 협회장만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그쪽을 흘길 뿐—.

'아, 역시 현질을 더 해야 하나.'

지위는 고작 지부장이었지만, 능력으로는 협회장과도 맞먹는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와장창—!

온갖 첨단기기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차 조화를 이룬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만 보면 평소와도 같은 일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주체가 된 이의 마음이 확연히 달랐다.

"까으으읏—! 짜증 나는군요! 아주 속이 터집니다 그래!"

쨍그랑— 쨍강— 파삭!

손도 대지 않았건만 늘어서 있던 플라스크들이 하나둘 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그의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후우, 안 되죠 안 돼. 이러다 아까운 시약들이 전부 날아가 버리겠군요."

하지만 애써 진정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플라스크 잔해와 내용물이 시간이라도 되돌리듯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것들을 재차 확인한 후 안도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회갈색 머리의 중년 사내.

그러고는—.

"필요 없어!"

와장창—! 콰창—!

그대로 그것을 밀어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번천회가 가진 기술력의 원천이자 회주의 오른팔, 닥터가 신경질적으로 떡진 머리를 헤집었다.

오늘 온 소식도 그렇고, 요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함정이 준비된 지가 한참인데 정작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의 열쇠가 될 그 하인즈라는 흡혈귀는 유럽에 올 생각을 않고, 나름대로 쓸 만하던 율령자는 갑자기 나타난 하회탈에게 당해 버리지 않았나?

동아시아 전체를 통제하던 그를 잃은 것은 매우 큰 손실이었다.

당분간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아흐! 그게 어떤 물건인데!"

하지만, 닥터가 화내는 포인트는 거기서 조금 엇나가 있었다.

"내가 기껏 양보해 줬건만! 아아— 아까워라. 실사용 데이터를 수집하면 슬쩍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율령자 자체보다는 그에게 줬던 마도 공학 물품을 잃은 것을 더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이번에 당한 이가 나름 번천회 내에서 서열이 한 자릿수에 달하는 고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를 보조하는 장치는 다시 만들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캘리카스의 의안은 꼭 회수하고 싶은데.'

당연히 그도 이미 부하들을 시켜 동아시아 지부가 있던 곳을 샅샅이 살펴보게 한 직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하회탈의 희생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시 그 자리에선 마도구는커녕 율령자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양보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눈에다가··· 아니, 이마에다가 달아 버릴걸! 그렇게 했으면 지금쯤 눈이 세 개··· 응?"

그렇게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닥터가 갑자기 행동을 뚝 멈추곤 눈을 끔벅였다.

"눈이 세 개? 제3의 눈?"

그리고는 몇 차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호홋~! 이거이거 아주 흥미롭군요!"

언제 화냈냐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창 분노에 차 있던 그의 표정에는 이제 호기심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먼저 실험체를 골라야겠군요! 어디 보자, 일단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뇌의 송과체와 연결해야 하니··· 그럼 역시 튼튼한 각성자가 좋겠지요!"

그러곤 양손을 쓱쓱 비비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동아시아의 뒤처리는 누가 알아서 하겠지! 그 여자라던가.'

안타깝게도 이미 그에게 율령자의 변고에 대한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

지금까지 사냥했던 놈들 중 가장 고위층인 율령자를 잡은 직후.

당연히 한스는 그의 머릿속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된 양질의 정보를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확실히 정신계로 경지에 오른 놈이라 그런지 그 작업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굳이 경지를 따지자면 극의의 끝자락 정도라고 볼 수 있었음에도, 작업 난이도만 따지자면 초월급도 능가할 정도로.

'설마 그 미친놈이 자기 뇌까지 포맷할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한스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끝나버린 수작.

더불어 율령자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신까지 파괴해 버렸다.

그가 영혼을 이용하더라도 정보를 얻어낼 수 없도록.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독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정신의 구슬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전의 정신 공격 직후에 얻었던 구슬의 힘을 빌려, 포렌식 하듯 일부라도 복원하지 않았으면 진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놈을 통해 얻은 기물의 덕을 보게 되다니, 세상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놈들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정보를 얻은 직후.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어르신, 저 당분간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엉? 갑자기?"

타라크의 드워프 공방.

갑작스러운 하워드의 말에 자오닉이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하워드는 그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잠시··· 신문물을 접하고 깨달음을 좀 얻을까 해서 말입니다."

지구로의 유학을 앞둔 드워프 청년의 눈에서 욕망 어린 안광이 번들거렸다.

#279

기술 혁명 (1)

자오닉의 애장품 곡괭이 '엘린느'를 매개체로 탄생한 아바타, 하워드.

그 이종족의 육체로 제작 쪽에 매진하면서 새삼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과연. 이 정도면 다른 종족이 박탈감을 느끼지 않기도 힘들겠군.'

바로 '드워프'라는 존재의 사기성이었다.

애초에 기술이란 오랜 세대를 거쳐 수많은 장인, 기능공, 공학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경험과 이론의 총체이자, 그들의 끝없는 고뇌와 연구로 쌓아 올린 지식의 금자탑이었다.

그런 만큼 단기간에 습득하는 것도, 발전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건 당연한 노릇.

'그게 상식이지.'

하지만 그런 체계를 깡그리 무시하는 존재가 바로 드워프라는 종족이었다.

그들은 사고방식부터 감각 기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종족들과는 달랐다.

창의력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독창적인 창작 논리는 기본에, 정밀 기계를 능가하는 미세 공정을 본능적으로 행하고,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과정조차 오로지 느낌으로 이해한다.

그야말로 태생부터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에 특화된 종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다른 면에서 결함이 없었다면 드워프야말로 세상을 지배하는 종족이 되었겠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제작에 가진 불합리할 정도의 천재성과는 달리, 그 외의 여러 부문에서 절망적일 정도로 센스가 부족했다.

애초에 그런 재주라도 없었으면 진작 멸종하거나 노예로 전락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로.

"오오— 이것이··· 과연!"

그리고 그런 드워프의 압도적인 재능은 고스란히 아바타, 하워드에게까지 전해졌다.

대한민국 인천 인근에 마련한 비밀 안가.

그곳의 창고 안에서 원격 소환된 하워드의 눈이 번쩍거리며 빛났다.

보물이라도 마주한 듯 감격에 젖은 그의 앞에는 그간 하나둘 모아온 여러 세계의 마도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역시 직접 보는 건 또 다르군! 기능도 전부 제대로 살아있고!'

그간 간접적으로 느껴왔던 것과는 다른 생생함이 오감을 사정없이 자극했다.

감각 공유를 통해 전달받거나 아우테리카로 넘어와 그 개성을 상실한 이차원의 물건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허헛, 이건 또 신기하군. 대체 뭘로 만든 거지?"

그는 짐승 이빨 형상의 금속 장신구를 집어 들고는 유심히 바라보다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할짝—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혀로 날름 핥아보기까지.

"쩝쩝, 인산칼슘? 이빨보단 뼈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한데. 과연, 금속성이면서도 생물성이라. 여기에 주술을 담은 건가? 열처리는 도저히 못 봐줄 정도로 투박하지만, 재료의 특성을 살리는 쪽을 신경 쓴 건 썩 나쁘지 않아."

그동안 줄곧 이어진 체계적인 교육으로 지구의 과학 지식에도 일가견이 있는 유학파 드워프 하워드.

그가 특수 제작한 안경을 한 손으로 치켜올리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안경알과 함께 겉에 걸친 펑퍼짐한 순백의 실험실 가운이 그를 유독 이지적이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래 봬도 나는 이미 자오닉에게도 한 사람의 장인으로 인정받은 몸이란 말이지.'

그런 그에게 다른 세계에서 유래해 독특한 체계를 담고 있는 물품들은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다.

한스가 다른 세상의 술법들을 접했을 때처럼.

또 그 끝에 마침내 「마도의 길」까지 깨우쳤을 때처럼.

그리고 그런 감상은 율령자에게서 수거한 강화 외골격을 넘어 의안을 접한 시점에서 절정에 달했다.

"허!"

그것을 보는 순간,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영감이라는 용암이 자신을 가두던 틀을 깨부수고 터져 나왔다.

파격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이거···.'

보고, 듣고, 만지고, 두들기고, 냄새 맡고, 깨무는 등.

정신없이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정신을 차린 하워드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분명, 드워프가 만든 물건이다.'

그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차원의 드워프.

물론 그 종족이 하워드가 속한 아우테리카의 드워프와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종족명은 물론이고 생김새나 그 외 세부 특성이 전혀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근간이 되는 기본 틀만은 분명 동족의 그것이라고.

하워드에게 깊숙이 스며든 「드워프식 창작논리」가 그것을 맹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신기하네. 신들 사이에서 무슨 지성체 창조용 오픈 소스라도 공유되고 있나?'

이미 여러 차원 출신의 흡혈귀들을 겪으며 떠올린 적이 있던 의문이 재차 급부상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세상의 비밀 따위가 아니었다.

하워드는 콧김을 훅훅 뿜으며 미친 듯이 눈앞의 문명의 이기를 탐닉했다.

"오오— 훌륭하구나. 아주 훌륭해!"

기술이라는 것에 절대적인 이점을 가지는 종족, 드워프.

하지만 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아우테리카의 과학 수준은 그리 뛰어나지 못한 편이었다.

그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결국 하나였다.

'환경 때문이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명이라고 할 수 있겠군.'

단신으로 군대를 상대하는 괴물들이 즐비하고,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성을 날려버리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은 세계다.

실제로 불사왕이란 움직이는 재앙이 대륙의 절반을 거덜 낸 전적도 있었고.

당연히 드워프들의 궁극적인 목표도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든 베어내는 절세 신검, 움직이는 성채와도 같은 난공불락의 갑옷, 기적과도 같은 이능을 담은 마도구 등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자격을 갖춘 자의 손에 들어가 거악(巨惡)을 처단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말이다.

'토대가 되는 기초 과학의 차이도 있을 테고. 어쩌면 거기에 차원이 가진 '세계관'이 은연중에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여기, 온갖 차원의 문명이 교차하는 지구에 있는 하워드는 달랐다.

백의에 안경을 쓴 연구자 차림의 난쟁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흡족하게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그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없고, 세계조차 창작의 방향성을 제한할 수 없었다.

"푸헐헐헐! 이거 손이 근질근질하구만!"

하워드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한스가 인천 안가에 공들여 설치한 시간 가속의 결계, '시간과 공간의 방'이 발동하길 기다렸다.

시공계 마법이 워낙 난해한 데다 은밀히 펼쳐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던지라, 그것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한스조차 한 번에 하루 남짓이 고작이었지만···.

'시간 배속 열 배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아. 적어도 이세계에 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미 헤테로시스를 시켜 안가를 준비하면서 필요한 사전 준비까지 전부 마친 뒤였다.

이제 그가 할 일은 그저 전력으로 연구에 매진하는 것뿐.

더불어 지금의 그는 '성장의 비약'의 효과도 적용받는 상태이지 않던가?

[흐— 그럼 시작해 볼까.]

곧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안가 바깥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한스가 결계를 가동하자, 내부의 시간이 세상과는 다른 흐름 속에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오호라! 이 의안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만!"

"흐음, 그러고 보니 이 강화 외골격도 그 닥터라는 놈이 율령자에게 준 것이었지. 확실히 다른 것들과는 좀 다르군. 이세계산 재료를 이용한 핸드 메이드인가?"

"남이 할 수 있는데 내가 못 할 이유가 없지! 어디 한번 해 보자고!"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하워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시계의 시침이 대충 한 바퀴 가까이 돌았을 즈음.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마도 공학」을 획득합니다."

그간 꾸준히 성장의 비약을 섭취하며 수련에 매진한 결실이 싹을 틔운 것인지, 하워드는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 5일도 되지 않아 마도 공학에 대해 더 자세히 깨우칠 수 있었으며.

바깥 시간으로 고작 만 하루, 내부 시간으로 10일째가 지나 결계가 힘을 잃기 직전이 되었을 땐—.

'···그렇구나. 뭔가 알 것 같은데?'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기술 혁명」을 획득합니다."

마침내 처음 목표로 잡았던 소정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른 시일에.

-개체명 : 하워드

-종족 : 드워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괴력」, 「신경과민」, 「혜안」, 「제노글로시」

-개체 특성 : 「장인정신」, 「드워프식 창작논리」, 「불과 금속의 노래」, 「장인의 혼」, 「기술 혁명」, 「야금술」, 「정밀 세공」, 「마도 공학」

-특이 사항 : '성장의 비약'의 영향으로 모든 행위에 추가적인 성장 보정이 주어지고 있다. 꾸준한 노력으로 마도 공학을 탐구하여 그 요체를 깨달았다. 「기술 혁명」을 이용해 다른 세계의 기술로 제작된 물품에 개입하여 일부를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잠깐, 이거 잘만 이용하면···.'

어쩌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성과일지도.

***

아제리온 제국 황궁 한편에 자리한 황실 병원.

암흑기사가 된 스타브를 비롯한 복면인들의 습격 이후, 헤스페론은 이번에도 병실에 장기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 정말로 안 됩니까?"

"안 됩니다. 아직 절대 안정을 취하시며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걱정 마시지요. 신경 안정을 위한 교단의 신성진은 물론 아로마 테라피와 마사지, 황궁 바드들까지 수배해 뒀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서책은 물론 수련을 도와드릴 마법사님도 언제든 모셔 올 수 있으니 이곳에서 편히 쉬십시오."

그때의 부작용에 대한 치료가 끝나고도 시간이 제법 흘렀건만, 그가 아무리 이제 괜찮다고 항변해도 황녀의 직접적인 명령을 하달받은 의료진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잘 보여야 할 상대는 그가 아니지 않던가?

-라일리, 나 이제 진짜 괜찮은데.

-···미안해요. 이제 이쪽 일도 거의 끝났으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제가 돌아가면 금방 전부 정리할 테니까.

「맹약의 사슬」을 통해 연결된 라일리가 미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는지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병원에만 있는데도 느껴질 정도로 황궁 전체의 분위기가 굉장히 흉흉했으니.

지난 라일리 황녀 습격 사건 이후.

황실 수호대장까지 개입한 그 소란이 일단락되고서, 수도 전체의 방비가 한층 더 삼엄해진 지 아직 몇 개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다.

당연히 이번 헤스페론 납치 미수 또한 원래였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명색이 대륙 최강국인 제국이고, 누가 뭐래도 그 중심인 수도가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일이 터져 버렸단 말이지.'

아무리 치안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는 최외곽 빈민가에 함정을 파고, 마부로 위장한 이가 그쪽으로 유도했다 해도··· 그건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과는 이미 명백했으니까.

치안에 개입한 고위층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방비에 빈틈을 만들었으며, 그렇게 판이 깔린 범죄 현장에서 흉수가 사로잡혔다.

무려 사살되었다고 알려진 전(前) 황실 수호대장이 흑마력에 타락한 채로.

'황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어.'

그 작전의 목표가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 일개 식객에 불과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번 일로 입은 자존심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지금까지 한 걸음 물러선 채 황녀가 주도적으로 나서는 걸 지지하기만 하던 황제가 직접 나섰겠나.

그간 처가이기에 어느 정도 눈감아 주던 선을 넘어버렸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자충수를 둔 셈이죠. 그래도 궁지에 몰린 마당에 무슨 미친 짓을 하려 들지 모르니 지금은 거기가 가장 안전해요. 병원장은 완전한 중립이지만, 자신의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좌시하지 않거든요. 사실 근위 기사단장을 빼면 황궁 내에서 제일 강하기도 하고요.

-어, 그 정도였어?

-마탑주인 로렌스 후작의 선배라고 하더라고요. 개인사 때문에 진로를 틀었다고 들었어요.

-그랬군···.

일단 그렇게 수긍하긴 했으나 헤스페론은 내심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결론만 말하자면 지금은 위험하니 얌전히 있으라는 뜻이었으니까.

'걱정해 주는 건 고맙긴 한데.'

잠깐 짬을 내서 재빨리 지구에 다녀올 생각이었던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영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소환 해제를 이용해 언제든 슬쩍 갔다 올 순 있었지만, 진짜 그렇게 하는 순간 지금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황궁 내의 생명 반응 같은 건 실시간으로 체크되고 있을 테니.'

거기다 병원장도 마탑주 이상 가는 대마법사라 하지 않았던가.

아마 자신이 사라지는 즉시 이상을 파악해 비상사태가 발령될 테고, 그 이후에 다시 황궁 내에 나타난다면··· 아마 머쓱한 상황으로 끝나진 않겠지.

'쯧, 곧바로 해 보고 싶었는데 그냥 다음으로 미뤄야 하나.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지구까지 갔다 올 필요는 없잖아?'

잠시 고민하다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헤스페론.

그대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한 손에는 어느새 유백색 원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매끈한 장식품 같은 구슬이.

#280

기술 혁명 (2)

"면담을 청하셨다 들었습니다."

아제리온 황실 병원 병원장실.

그 방의 주인이 언제나처럼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마주 앉은 헤스페론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눈의 의안 말입니다만···."

그는 입을 열며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눈가의 안대를 쓰다듬었다.

라일리 습격 사건 당일 안구를 잃은 후, 그의 오른쪽 눈구멍에는 병원에서 임의로 심은 의안이 자리하게 되었다.

텅 빈 안와를 그냥 내버려 뒀다간 얼굴의 좌우 균형이 무너질 수 있어 취한 조치였으나, 황실 병원에서 준비한 의안인 만큼 그것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최고급품이었다.

핵으로 마정석이 사용되어 건강과 관련된 온갖 이로운 효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마도구라 할 수 있었는데—.

"이걸 교체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랬기에 병원장은 헤스페론이 내보이는 유백색의 원구를 보고 보일 듯 말 듯 작게 눈가를 찌푸렸다.

평범한 성인의 눈알 크기인 유백색의 매끄러운 구슬.

다방면에 식견이 높은 그로서도 도대체 재질이 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해 보이긴 했지만, 딱히 거기서 뭔가 특별한 힘이 느껴지진 않았다.

'마법진이 새겨진 것도 아니고 주술이 걸린 물품도 아니다. 애초에 안에 마정석 자체가 없군.'

그냥 딱 잘라 말해 장식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물건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병원장은 다시 시선을 환자에게로 돌렸다.

어쨌든 그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야할 의무가 있었으니.

"지금 인공 안구의 배양이 거의 끝나가는 참입니다. 물론 헤스페론 님의 경우 그걸로 시야가 돌아오진 않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이전과 완벽히 똑같아 보이게 할 순 있겠지요."

동공의 움직임은 물론 초점 조절 같은 것들까지.

병원장은 그렇게 되면 더는 안대를 낄 필요도 없어질 거라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의안을 교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만, 어차피 조만간 그 대신 인공 안구를 이식할 예정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헤스페론은 그 말에도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의 의사가 확고한 듯 보이자 병원장도 더는 별말 하지 않고 수긍했다.

어차피 이런 사소한 문제는 진료 결과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환자의 의사에 따라주려는 듯이.

'나중에 인공 안구 이식을 거부한다면 또 다른 반응이겠지만.'

괜한 헛수고를 하게 해서 미안하긴 했으나, 어차피 그래봐야 시력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눈이니만큼 최대한 효율적으로,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간단한 시술을 거쳐 의안을 교체한 직후.

아무렇지 않게 병원 내부의 개인실로 돌아온 헤스페론은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생각대로네. 역시 지금 상태로는 대마법사도 못 알아보는구나.'

그의 오른쪽 눈구멍에 자리한 유백색의 구체.

병원장조차 간파하지 못한 그것의 정체는 율령자에게서 빼앗은 의안, 통칭 '캘리카스의 기계안'이었다.

차원을 넘어오면서 모든 신비와 기능이 정지된 탓에 지금은 내부를 뜯어보지 않는 한 그저 특이한 재질의 구슬로 보일 뿐이었지만.

'괜히 비밀로 하겠답시고 지구로 갔다 오니 뭐니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지.'

어차피 시술 그 자체보다 중요한 건 이후 그걸 어떻게 구동하느냐였다.

지금 상태로는 단순히 지구에서밖에 쓸 수 없는 반쪽짜리가 될 뿐이었으니.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분해해서 하워드의 양분으로 삼는 게 낫지. 가장 베스트는 실사용 데이터 수집은 물론 정기적인 점검과 분석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거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것에 가장 최적인 대상이 바로 헤스페론이었다.

당장 눈 한 짝이 없는 처지이기도 했거니와···.

"후우, 그럼··· 시작해 볼까."

그에겐 그런 차원의 제한마저 우회할 수 있는 비책이 있었으니까.

깊게 심호흡한 헤스페론이 눈을 감고 오른쪽 의안에 신경을 집중했다.

"······."

한 세계의 마도구는 다른 세계에서 사용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는 또 다른 대전제가 있지 않던가?

각성자라는 존재는 그러한 차원의 법칙에서조차 예외라는 항목이.

'그렇다면.'

그 마도구와 각성자를 아예 하나로 묶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

사용자와 도구라는 관계를 넘어서 온전히 신체의 일부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불가능하겠지만.'

그에겐 그걸 가능하게 해 줄 능력이 있었다.

곧이어 그 능력, 「맹약의 사슬」이 발동하며 작동을 정지한 의안과 교감을 시작했다.

———!

눈가에서 시작돼 뇌까지 치닫는 날카로운 통증.

여태까지 있었던 것 이상의 극렬한 저항이 느껴졌다.

오른팔의 봉인구 때도 체감한 것이었지만, 역시 대상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난이도가 상승하는 것인지 초입 단계에서부터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하물며 지금 이 의안은 완전히 활동이 정지한 상태이지 않던가?

당연히 교감을 나누는 게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야 이미 예상했어.'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하워드의 「기술 혁명」이었다.

타 차원의 물품을 구성하는 체계에 개입해 그 일부를 수정할 수 있는 능력.

'각 차원의 법칙이 달라서 문제라면, 그 부분이 호환되도록 따로 손을 쓰면 되지!'

내부 구조를 재조정해 원래라면 쓸 수 없어야 할 기능을 일부나마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물론 당장은 능력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전한 재기동 같은 건 어림도 없었지만···.

아주 작은 부분, 예를 들어—.

완전히 침묵 중인 기능에 살짝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 정도는 지금도 할 수 있었다.

지이잉—

미리 설정해 둔 조건이 충족되며 눈가에서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밖으로는 조금의 소음도 새지 않는, 오직 두개골을 통해 본인에게만 느껴지는 미세한 구동음.

'됐다.'

그 찰나의 순간.

빠르게 내부로 침투한 「맹약의 사슬」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 이쪽으로 와라.'

조우, 협상, 조율, 타협, 강압, 통제···.

거기에 이어 대상을 완전히 휘어잡고 서로를 하나로 묶는 과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새카맣던 우측 시야에 수많은 녹색 기호들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위로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부에 자리한 한 문장.

"···성공이다."

그 문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헤스페론이 다시 거울을 돌아보았다.

단순한 유백색이었던 의안의 매끈한 표면에 온갖 기호의 나열이 빠르게 지나갔다.

막 부팅되기 시작한 컴퓨터처럼.

그로부터 불과 몇 초 후.

반쪽뿐이던 시야가 한순간에 탁 트이며 사방의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개체가 새로운 신체를 이식했습니다. 스킬「기계안 : 캘리카스」을 획득합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한스에게 영체가 뜯겨나가 시력을 잃은 율령자와, 눈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힘을 얻은 헤스페론은 상당히 유사한 처지였다.

단순히 외상이 문제가 아니라 좀 더 영적인 이유로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점에서.

그런 면에서 이 특별한 의안은 그것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었다.

애초에 이것의 원리는 시신경을 통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에 찍힌 화면을 직접 뇌로 투사해 머릿속으로 상을 그리는 방식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니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단순히 두 눈이 멀쩡했을 때처럼 시야 범위가 회복된 정도가 아니었다.

초점에 따른 시야각은 물론이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구동 범위까지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엇? 이거 투시도 되잖아?'

심지어 안구만 돌려 자기 머리를 뚫고 등 뒤도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셈.

때로는 현미경이 되며, 때로는 망원경이 되는 시력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타조의 시력이 25라고 하던데. 그게 이런 느낌이려나?'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린 헤스페론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작동이 정지되었을 때의 구슬 같던 매끈한 표면은 온데간데없었고, 어느새 나타난 신비로운 눈동자가 의안의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홍채 주변을 감싼 푸른빛의 테두리와 그 내부에 가득 차 발광하는 기하학적인 문양들.

"···멋지군."

사감 하나 없는 백 퍼센트 객관적인 감상이었다.

이런 멋들어진 사이보그의 눈이라니, 남자라면 참을 수 없는 로망이 아닌가!

마지막까지 이것저것 아낌없이 챙겨준 율령자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샘솟을 정도였다.

그는 이내 슬쩍 눈길을 돌려 우측 시야 한 편에 떠오른 문장을 바라보았다.

「맹약의 사슬」에는 단순히 동기화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강화하는 추가 효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들을 업데이트로 인식하는 모양.

다만, 그것 때문인지 조금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는데···.

'거 쓸데없는 짓을. 됐어, 그만해.'

원래라면 적당히 수동적이었을 의안의 보조 인격, AI 성능도 함께 올라간 것이었다.

물론 「맹약의 사슬」로 확실하게 종속되어 있었으니 별 상관없기야 하겠지만.

'오른팔에 깃든 흑염룡과 안구에 깃든 AI라니. 뭔가 복잡한 기분인데.'

그래도 AI···, 출신 차원의 이름을 딴 애칭 '캘리'는 「갈망의 오른팔」처럼 자기 마음대로 날뛰진 않을 테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한 번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새로운 능력을 가졌으면 직접 사용해 봐야 하는 게 인지상정.

헤스페론은 곧바로 개인 병실 밖으로 나가려다 잠시 멈칫하고는···.

'음, 일단은 숨기는 게 좋겠지. 괜한 관심을 끌 수 있으니.'

짧은 고민 끝에 다시 자신의 오른쪽 눈가에 검은 안대를 덧씌웠다.

물론 그리 해도 눈꺼풀과 안대 정도는 쉽게 투시가 가능했기에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 그럼 가 볼까! 일단 산책로부터 쭉 돌고 나서···."

그렇게 전보다 한층 진화한 New헤스페론이 위풍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음?"

오늘도 서류 업무에 이어 병실 순회를 마친 병원장이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에 들어온 한 사람 때문에.

잠시 그대로 있던 그의 고개가 자기도 모르게 슬슬 옆으로 기울어졌다.

라일리 황녀가 특별히 부탁한 인물.

헤스페론이라는 사내가 산책로 인근에서 뭔가 수상한 거동을 보이고 있었다.

먼 곳을 보는 듯 멍하니 있다가 화단을 내려다보며 집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리다가, 옆에 있는 화장실 벽을 보고는 기분 나쁘다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으며.

결국 하나뿐인 눈을 질끈 감았다가도 이내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음."

역시 지금까지 내보인 적 없는 독특한 행동 양식이었다.

그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병원장이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뭔지 모를 의안을 들고 와서 기존 의안과 교체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 직후에 저러는 모습을 보이니 혹시 뭔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군. 이번에 입원하게 된 이유가 과거 영구적 장애를 남겼던 가해자 때문이었으니. 그래도 그간 양호한 모습을 보여 다소 안심하고 있었건만.'

하물며 그는 저주의 영향도 계속해서 받는 상태이지 않던가.

오히려 여태까지 멀쩡해 보였던 게 신기한 거였다.

'내일은 심리 상담도 준비해야겠군. 그러고 보니 밖에 나가고 싶어 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절충할 방법을 생각··· 음?'

그렇게 병원장이 손에 든 차트에 정신없이 뭔가를 써 내려가던 중.

흘깃 헤스페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다시 멈칫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검은 안대에 덮여있는 그의 오른쪽 눈가였다.

"···이상하군."

그리곤 저도 모르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딱히 이상한 부분이랄 게 없었다.

그래서 그게 더 이상했다.

'마력의 흐름도 잠잠하고···.'

직감은 뭔가 위화감을 품고 있는데, 이성으로는 딱히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 고민은 한창 기행을 벌이던 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살짝 인상을 찌푸린 병원장은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애매한 문제로 계속 시간을 허비하기엔 그는 너무나도 바빴으니.

한편, 그 고민의 당사자인 헤스페론은.

의안의 성능 테스트를 겸한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개인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AI 캘리에게 첫 번째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흠흠."

누가 뭐래도 그는 어엿한 신사였으니까.

#281

기술 혁명 (3)

왠지 모르게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커다란 실내.

그 넓은 벽면 곳곳에 웅장한 그림이 여럿 걸려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경배하는 피조물들과 하늘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존재.

폭풍과 해일을 피해 도망치는 이들과 거대한 파도 위에서 그것을 보며 대소를 터트리는 거인.

빛에 휩싸인 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병자를 끌어안는 여인 등···.

기법도 양식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그림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같이 동일했다.

바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작품이라는 것.

딸깍—

그런 경건함마저 풍기는 공간 속에서,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마우스 클릭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흑마법사 하회탈."

이내 나직한 여성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전시된 그림들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집무실 한편, 그곳에 마련된 컴퓨터 모니터에 온갖 자료 사진들이 떠올랐다.

CCTV를 캡처한 것들부터 시작해 일본에서 찍힌 거대한 본 드래곤, 마지막으로 어느 상하이 빌딩의 난장판이 된 실내까지.

"뱀파이어 하인즈."

다시 한번 딸깍이는 마우스 소리가 울리고 화면에는 또 다른 이의 행적이 주르륵 튀어나왔다.

혈맹과의 마찰부터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치안 활동에 이르는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체불명의 성기사."

다음으로 떠오른 자료들은 앞선 이들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내용은 전부 오직 한 사건에 관한 것뿐.

대형 병원 테러에서 있었던 기적과도 같은 일에 대해서가 전부였다.

"고작 반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한 나라에서 새로 등장한 특급 경계 대상자가 셋. 심지어 그들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도 모두 실패했다고···."

나른하게 말을 잇는 여성의 목소리에 어우러진 마우스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떠오르는 자료들이 빠르게 넘어갔다.

한국 귀환자 협회장, 서울 남부 지부장 윤지윤, 이능관리국의 비밀 요원 등···.

그간 파악된 한국 국적 경계 대상의 목록을 모두 확인한 그녀가 마침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죽어도 싸군."

한 치의 동정조차 깃들지 않은 냉담한 어투였다.

역시 아무리 확인해 봐도 결론은 무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일단, 하려고 했던 건 마무리해야겠지. 이쪽과 관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

모니터 화면에 한 번 지나쳤던 자료가 다시 출력되었다.

목격자가 직접 그린 것은 물론 그 외 다수의 목격자들이 동조했다는 갑옷 몽타주.

잠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같은 뜻을 품은 동지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지. 그 존재가 유능하다면 더더욱.'

잿빛 머리칼을 지닌 여인, 서기관의 입에 기묘한 미소가 어렸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같은 시각.

미국에서 파견된 판테온 총본부의 조사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

"이걸··· 이렇게 하면···!"

아우테리카 시간으로 약 10일간 지구 유학을 다녀온 하워드.

그는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곧바로 「기술 혁명」으로 얻은 새로운 지식을 이 세계에 접목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필요한 기술의 원리는 이미 전부 파악했다.

어찌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 결론에 다다르기 위한 중간 과정뿐.

물론 지금으로선 「기계안 : 캘리카스」 수준의 기술까지 재현할 순 없었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드워프라 해도 그 정도 수준의 첨단 기술을 그저 며칠 만에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으니.

'사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직접 사용해 보는 걸 테지만···.'

그러나 겨우 시간 조금 줄이자고 멀쩡한 눈을 뽑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객관적인 스펙 자체는 떨어질지 몰라도 제작과 관련한 면에서는 드워프의 눈이 훨씬 더 뛰어나기도 했고.

사실 그것 때문에 의안을 곧바로 헤스페론에게 넘긴 것이기도 했다.

'대충 개념 정도는 파악했으니 나머진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실사용 데이터까지 추가된다면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태생적으로 가진 천부적인 자질과 온갖 성장 보정, 거기에 귀하디귀한 '성장의 비약'의 효과를 항상 달고 사는 하워드였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천재라 불러도 부족할 수준의 불합리함 그 자체.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세계의 변혁을 이끄는 것은 항상 극소수 천재의 몫이었다.

"···됐다."

공방에 칩거하다시피 하며 작업에 매진한 지 며칠.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금속 건틀릿 하나를 보며 감격에 젖었다.

은빛의 매끈한 표면과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근미래적 외관이 화로의 불빛을 받고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후우, 그럼 어디."

잠시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던 하워드는 이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자신의 왼손에 착용했다.

시험 삼아 처음부터 자기 팔에 딱 맞는 사이즈로 제작했기에 건틀릿은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빈틈없이 조여들었다.

'착용감도 나쁘지 않고.'

하워드는 그 상태로 공방 구석의 실험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제품의 성능 테스트를 위해 만들어 놓은 다양한 재질의 금속판들이 단단히 고정된 채 늘어서 있었다.

'일단 처음이니까 가볍게 가 볼까.'

재질은 강철, 두께는 한 뼘 정도로···.

테스트 준비를 마친 그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왼손을 움켜쥐었다.

끼긱

치이이익—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분사구를 통해 사출되는 압축 에너지.

그와 동시에 손목 안쪽에 부착된 마정석이 발광하며 거기에서 뻗어간 빛의 실선이 기판의 회로처럼 건틀릿 전체를 뒤덮었다.

'바로 간다!'

하워드는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순도 백 퍼센트 장인이었지만, 모두의 경험을 공유하는 아바타에게 그런 사소한 것 따윈 문제도 아니었다.

작고 옹골찬 난쟁이의 육체가 완벽한 자세로 진각을 밟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탄력 있는 허리와 어깨의 회전을 거쳐 주먹으로 전달되었다.

"으랏차차!"

푸화악—!

주먹이 내뻗어지는 순간, 마치 로켓처럼 팔꿈치 쪽에서 분사되는 에너지의 격류—.

그 직후.

꽈아아앙—!

공방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거센 돌풍이 작업실 내부를 휩쓸었다.

"쿨럭! 쿨럭!"

흩날리는 먼지에 기침을 터트린 하워드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어, 이거 좀 과한 것 같기도···?'

두말하면 잔소리.

한껏 들떠서 신나게 급발진하던 그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미 늦었지만.

쾅!

"뭐야? 누구냐! 습격이냐? 하워드! 괜찮냐? 하워드!"

후다닥 달려오는 소리에 이어 공방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자오닉이 큼직한 망치를 들고 사방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런 그의 경계는 사방에 흩날리는 먼지의 저편에서 하워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

"···음, 이거 참. 허허헛!"

두 발로 단단히 지면을 지탱하고 한 팔을 앞으로 뻗은, 교범에 나올 법한 완벽한 자세로 주먹을 내지른 하워드가 민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한 뼘 두께의 강철판을 완전히 관통해 틀어박힌 왼팔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용쓰면서.

'···안 빠지네. 실전에서도 이러면 큰일인데, 이거 문제구만. 역방향 사출도 필요하겠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하는 공방 경비들의 분주한 발소리 속.

하워드는 애써 딴생각을 이어가며 서서히 표정을 찡그리는 자오닉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순조로운 개발 현장이었다.

***

***

아우테리카의 가장 깊은 곳.

심연.

시간과 공간, 물질과 개념의 기준이 흐트러져 무의미하게 부유하는 그곳은 언제나처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줄곧 그러겠지.

파직!

그런데.

그 언제까지고 변함이 없을 것 같은 장소에서 갑작스러운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사사삭—

콰드득— 콰직!

공간이 부서지며 뭔가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어쩌면 부서지는 건 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은 그런 개념조차 온전히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소리가 났다는 것조차 착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건 알 수 없는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은 마침내 또 다른 이변을 그 자리에 툭 뱉어냈다.

"흐음."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갑자기 자리에 나타난 사내.

모든 것이 요란하게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는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꽝인가?"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순 없었다.

정식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편법을 이용해 침입한 만큼 이전에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원래 보안의 취약점은 관리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이런 외딴곳에 있는 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사내··· 평범한 것도 같고, 위압감을 풍기면서도, 흐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존재—.

번천회의 회주가 입꼬리를 비틀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좀 쓸 만한 수확이 있었으면 좋겠···."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XX된 XXX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두쿵—

거센 박동과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276

하회탈 리턴즈 (1)

심연의 깊은 곳.

그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생명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그것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하다고 해도 무료함이라는 감정마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등장한 이레귤러에 흥미가 가는 건 당연한 일.

"설마, 신인가? 이런 곳에 처박혀 있는 신이라니. 흐음, 그렇다면···."

일단 이 공간 속에서 자기 형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합격이다.

육신은 물론 존재가 지닌 격 또한 더할 나위 없었고.

그것은 조금씩 치솟는 호기심에 살짝 장난을 쳐 보았다.

꾸우웅—

꿀렁거리는 혼돈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그 생명체,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주변 공간 자체를 뒤틀어 버린 듯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버릴 뿐.

"···여긴 그런 세상인가? 귀찮게 됐군. 그냥 방임형이 편한데 말이지."

그 와중에도 번천회주는 태연하게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뭐라 하건 관심이 없는 것은 이곳을 지배하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필멸자의 인격과 자아 따위에 신경 쓰지 않은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으니까.

그래서 이어지는 다음 행위에도 망설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아— 나의 주! 나의 신이시여—

자신의 소유물이자 노예, 그리고 장난감.

복제해서 저장해 두었던 혼 하나를 꺼내 상대의 몸속에 밀어 넣었다.

잘 돼서 저 육체 단말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 전에 실패했던 일을 다시 시도하는 게 좀 더 빨라지지 않겠는가?

'하여간 신이라는 놈들이 독선적인 건 어느 세상이나 마찬가지군.'

그에 눈을 가늘게 뜬 번천회주는.

"쯧, 쓸데없는 수작을."

-끄아악—!

제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그대로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한쪽의 길이만 3미터가 넘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아앗—

그 즉시 사방을 뒤덮은 혼돈과 심연을 밀어내며 퍼지는 노을빛 광채.

이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신성력이었다.

꿈틀—

그에 불쾌한 듯 주변 공간이 꿈틀거렸다.

찢긴 노예의 혼이야 어차피 아직도 복제품이 많이 남아있었으니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저 거슬리는 기운이었다.

감히 자신의 영역에서 신성력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분노함과 동시에 한편으론 호기심을 느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신성력.

저것은 이곳 아우테리카가 아닌 외신(外神)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저 생명체는 그걸 누군가에게서 빌려오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품고 있다가 뿜어내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상대는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었으니.

그래도 자신과 마주할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는 소리였다.

-끄아— 아아··· 신이시여···.

그 와중에도 복제된 영혼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부르짖다 부스러져 사라졌지만, 그것은 이미 그쪽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신이라··· 보아하니 그쪽은 그 자리에서 내쫓긴 처지인 것 같은데."

꿀렁—

역린을 건드린 모양인지 공간이 요동치며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무리 영락했다 해도 신은 신.

고작 감정을 표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위압감에 공간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런 격랑 속에서도 번천회주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흥분하기 전에 잠깐 대화라도 하는 건 어떤가? 그렇게 나와 봐야 나는 그냥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인데."

그리고는 기묘한 빛이 서린 눈으로 이 깊은 곳에 가라앉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신이라는 족속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곳에 처박혀 있는 저 존재는··· 과거라면 모를까 지금은 제대로 된 신이라 할 수 없었다.

이미 신좌에서 쫓겨나 봉인된 지 오래된 것 같기도 했고.

또한 그 뜻은 곧—.

'놈도 아쉬운 게 있다는 소리지. 이거 이용해 먹을 수 있겠어.'

그렇게 한다면 이곳에서 일을 마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물론 진입한 장소가 하필이면 이 차원의 감옥이자 쓰레기통과 같은 곳이라는 게 문제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오래 걸릴 것 같군. 그런데···.'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방을 휩쓰는 무질서한 에너지의 격류 속에 깃든 기운이 미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흐음. 기분 탓인가.'

하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애초에 세계의 찌꺼기라는 게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기도 했고, 당장은 그런 거에 신경 쏟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사방을 뒤덮는 심연 속에서.

두 세계의 흑막이 조우했다.

***

빠른 속도로 회원을 늘려가던 인터넷 사이트, 새벽의 서낭당.

개설 초기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그 사이트도 요즘엔 성장세가 한풀 꺾이는 추세였다.

가입할 만한 이들은 이미 전부 가입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들의 중심이 되었던 이의 오랜 잠적도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뭐, 팬 사이트니까 어쩔 수 없지.'

모두 '하회탈'이라는 다크 히어로의 활약에 감명받아 한데 뭉친 이들인데, 정작 그 당사자가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췄으니 오죽할까.

덕분에 꾸준히 그의 복귀를 기원하던 이들의 사이에서도 서서히 동요가 번져가고 있었다.

-(링크) 인증이라고 피 묻은 부서진 하회탈 가면이랑 로브 같은 것도 올라옴. 이거 진짜임?

-ㄴㄴㄴ주작주작주작

-하회탈 잠수탄 지 얼마나 됐냐? 일주일은 넘은 것 같은데. 이 주 정도 되지 않았음? 설마 진짜로...

-아니, 한 달도 아니고. 그거 잠깐 쉬는 거 가지고 지랄들 하네;;

└솔직히 일본 다 정리하고 잠수 탔으면 좀 쉬려나 보다 할 텐데, 다 끝내지도 않고 도중에 멈췄다는 거에서 킹리적 갓심이 들지 않냐?

└ㅜㅜ 심지어 한국에서도 목격 정보 없음. 죽진 않았어도 진짜 어디 다친 거 아님?

└아 살아있으면 생존 신고라도 하라고ㅋㅋㅋ 쉬는 건 봐 줄 테니까 제바류ㅠㅠ

용서 없는 범죄자의 심판과 그로 인해 향상된 국내 치안, 거기에 더불어 해외에서까지 활약하며 매스컴을 탄 덕분인지 그를 응원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굳이 그 팬 사이트뿐만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최근 슬슬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하인즈 2세, '팬텀'과 연관 짓는 이들도 늘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히 둘의 관계성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한국이 이렇게 평화로워진 게 누구 덕분인데? 하회탈 따라 하는 그 오페라 유령 가면 쓰는 놈이 활개 친다고 귀신같이 태세 전환하는 거 보면 환멸이 남;;

지나치게 과몰입해서 아예 서로 경쟁 관계인 것처럼 인식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하회탈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았든가 어떤 식으로든 그 수혜를 입었던 이들.

하지만 그런 반응에 호응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좀 그렇긴 하지. 걔들 이때다 싶어서 하회탈 깎아내리더라.

-아니, 근데 하회탈이 뭐 특허라도 냄? 누가 됐든 덕분에 좀 더 안전해졌으면 된 거지 별걸 가지고 다 ㅈㄹ

└ㄹㅇ 누렁소든 검은소든 일만 잘하면 된 거 아니냐?

-그간 노력해 준 건 고맙긴 한데, 솔직히 전 흑마법사는 조금 찝찝해서..ㅎㅎ;

└아, 나도. 혹시 어디서 흑마력 폭주해서 잠수탄 거 아님? 이러다 회까닥 해서 갑자기 빌런으로 튀어나올지도.

└와..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다;

└오하 놈들 언플하는 거 역겹네 진짜

애초에 하회탈이 이렇게까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치안에 대한 공적 덕분이었던 데다가, 최근에 개설되어 성장하기 시작한 팬텀의 팬 사이트인 '오페라 하우스'도 그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음, 생각 이상으로 하인즈 팬덤의 성장이 빠른데. 역시 처음부터 카메라 같은 걸 신경 쓰지 않고 활동한 덕분인가.'

한스처럼 눈 깜짝할 새에 순간이동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하인즈의 활동 범위도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다.

서울 내로 한정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몇 분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가졌으니까.

거기다 그는 많은 이들이 찝찝하게 여기는 흑마력과도 연관이 없었고, 흡혈귀로 의심받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존재부정」으로 철저하게 감출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도···.

한스와는 달리 무척이나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던 것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계기는 어쩌다 찍힌 심판 직후의 사진 한 장이었는데.

거기에 담긴 그의 미모가 오페라 반가면 따위론 전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게 문제였다.

'그건 확실히··· 내가 봐도 대단했지.'

단 한 장으로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사진.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멋들어진 고급 양복에 하얀 반가면을 쓴 채, 촬영자 쪽을 돌아보는 하인즈 2세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찍는 것을 막지 않았다고 해도 따로 포즈를 잡아준 것도 아니건만, 마침 사진을 찍은 이가 업계 종사자였는지 상당한 거리에서 줌을 당겨 찍었음에도 마치 화보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거기다 사진 너머로 「미혹」도 살짝 담긴 것 같고.'

아무래도 하인즈의 격이 상승하면서 강해진 효과가 자연스럽게 사진에까지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알파를 처리한 직후에 얻어놓고도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그간 잊다시피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주변에 널브러진 범죄자들이 그의 위험한 듯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소품의 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음침하게 꽁꽁 둘러 싸맨 흑마법사 하회탈과는 여러모로 비교될 수밖에 없겠군.'

아마 마성의 남자 하인즈 2세의 인기가 여성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한 것도 그게 원인이겠지.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태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뭐, 둘 다 나니까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이참에 아예 대놓고 가면 비밀 조직을 결성해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이름은 대충··· 가면무도회(Masquerade) 정도가 어떨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하인리히를 포함해 다른 아바타들까지 몽땅 끌어모아서···.

'아니,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그는 딴 곳으로 새려는 생각을 다시 수습해 정리하며 앞으로 있을 일정에 집중했다.

지금은 중요한 계획이 막 코앞에 다가온 상황이었으니까.

쉬이이익—

고요함 속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맹렬하게 주변을 스쳤다.

달빛조차 숨을 죽인 밤.

아래쪽에서 흐릿하게 비치던 바다의 물결이 이내 화려한 번화가의 야경으로 바뀌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환상의 도시로.

'어디 보자. 위치가···.'

그렇게 바다를 건너 도착한 도시, 상하이 상공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찾았다.]

「심연의 눈」을 사용해 목표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한스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놓칠 수밖에 없었을 수준의 어마어마한 보안 속.

그 안에서 익숙한 기척이 포착되었다.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장, 율령자.'

이제 와서 더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아마 놈들의 수준이라면 이미 자신이 상하이에 등장했다는 것쯤은 파악했을 터.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었다.

지금까지 비행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하강하는 한스의 몸.

그리고 마침내.

콰아아앙—!

앞을 막아서는 결계가 박살 나며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회탈 부활의 신호를 알리는 화려한 축포였다.

***

화려한 장식과 야경이 비치는 집무실.

"후우."

북아메리카 지부장 서기관과의 협의를 마친 율령자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창가 쪽으로 돌리고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어 찻잔을 손에 쥐었다.

후룩—

멋진 야경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휴식 시간.

그렇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문득 자신의 오른팔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의 다섯 손가락 끝에는 뒷목부터 이어진 가느다란 금속 와이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길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하회탈의 정신세계에서 팔을 잃은 그를 위해 닥터가 만들어 준, 의사에 따라 강제로 몸을 움직여 주는 최첨단 마도구였다.

'하회탈···.'

그것을 보며 천천히 손가락을 까딱이던 그가 상념에 잠겼다.

일본에서 모습을 감춘 이후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등장하지 않는 회(會)의 대적.

이쯤 되면 놈도 그때의 일로 어딘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의 일방적인 출혈은 아니었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찌푸려졌던 그의 인상이 살짝 펴졌다.

'놈에 대한 대책도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이번에 서기관과의 공조가 제대로 마무리되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러나.

옛말에 그런 속담이 있지 않던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고작 호랑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그것이 한 세계의 마왕이라면···.

삐잉—! 삐잉—! 삐잉—!

생각만으로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율령자님! 큰일입니다! 지금 상하이 영공에···!

근거지에 설치된 경보 장치가 요란하게 울리고.

보안실의 부하에게서 긴급 통신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왼쪽 의안에 핏빛의 붉은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쨍그랑—!

손에서 떨어진 찻잔이 요란하게 깨졌지만, 보조 장치의 도움을 받아 벌떡 일어선 그는 그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었다.

콰아아앙—!

곧 이어진 건물이 뒤흔들리는 듯한 거친 충격과 함께.

[크크큭— 이거 참, 정말 오랜만이구나.]

조금 전까지 떠올리기만 하던.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공간을 얼려버렸으니까.

#277

하회탈 리턴즈 (2)

상하이에 자리한 어느 빌딩의 최상층.

쩌저적—

언제나 따스함만이 감돌던 그곳에 서늘한 한기가 퍼지며 급속도로 사방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사물의 표면에 서리가 내리고, 대기는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얼어붙었으며, 요란하게 발동하는 결계들의 흐름이 정체돼 삐거덕거렸다.

[그간 잘 지냈나 보군. 신수가 아주 훤해졌어.]

이 모든 게 단 한 존재가 나타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이상 현상 속.

집무실의 주인인 율령자는 혼란스러워지는 사고를 애써 수습하며 눈앞의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이곳을··· 아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하회탈이 흑마법의 대가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히 번천회도 오래전부터 그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준비해 왔고, 그와 활동 영역이 겹치는 동아시아 지부는 평소의 보안에 더해 흑마법에 특화된 은폐성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그게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대의 역량을 과소평가한 건가?'

까득, 이를 악문 율령자가 이미 활성화되고 있는 온갖 결계와 설비들을 곁눈질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예상치 못한 불시의 습격으로 은폐와 진입 저지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긴 했으나, 이곳은 동아시아 전체를 책임지는 컨트롤 타워였다.

여기에 적용된 보안이 고작 그것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우우웅—!

지잉—

이면 세계 형성, 공간 격리, 좌표 고정, 이능 제어, 흑마력 억제, 신성 제단 구축 등···.

하회탈이 진입하던 순간부터 하나둘 작동하던 설비들이 모두 발현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능의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고 효율만을 추구한 시너지.

오직 번천회만이 가능한 다중 술법의 연계였다.

[호오—? 과연 대단하군.]

그에 나직이 감탄한 한스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걸 보니 어째서 그가 진작 율령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는지도 납득할 수 있었다.

이미 두 차례나 영체 상태의 그를 마주했음에도 그 종적을 쫓을 수 없어 의아하던 참이었는데, 이만한 방비 속에 있었다면 그럴 만도 하지 않겠나.

'아깝네. 진입과 동시에 곧바로 놈을 생포했으면 일이 더 편해졌을 텐데.'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리며 폼 잡는 겉모습과는 달리, 한스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율령자가 있는 곳으로 곧장 들이닥쳐 놈을 포획한다는 첫 계획은 외부에서 관측한 것과 다른 공간 왜곡 때문에 실패했다.

그나마 직전에 방향을 틀어 어떻게든 집무실 내부까진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발동하기 시작한 결계들 때문에 바로 행동에 나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도 그리 나쁘진 않아.'

자신을 경계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율령자와 그를 지키려는 듯 빼곡하게 발동한 온갖 보안 술법들.

한스는 이미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그 번천회 특유의 복합 술식을 「심연의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참···.'

그리고 그것을 통해 빨려든 정보는 즉시 「마도의 길」과 「금단의 지식」, 「부정한 현자」를 통해 낱낱이 해체되었고.

'진수성찬이군.'

그렇게 분석된 내용은 고스란히 「마도의 길」의 자양분이 되었다.

'애초에 이 스킬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번천회 덕분이었으니까.'

과거— 훌륭한 연구 자료와 더불어, 율령자의 눈과 다리를 희생한 헌신적인 개인 과외 끝에 개화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에도 이렇게 방대한 교보재를 준비해 주다니.

[갸륵하구나. 또한 어리석다. 고작 이런 걸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하회탈로 가려진 눈가에서 시커먼 안광이 새어 나왔다.

그와 함께 몸에서 폭사되는 에너지에 결계가 뒤흔들리며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죽음이니—.]

쾅!

우르르르—

그때, 집무실 문을 박차고 다수의 각성자들이 들이닥쳤다.

전원 최소 극의급에 개중 한 명은 완연한 초월에 이른 강자였다.

그 혼자서는 하회탈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알 텐데.

아마 결계의 도움이 있으면 다른 지점에서 지원이 올 때까진 버틸 수 있겠다 여긴 것이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리라.]

그건, 그들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

콰아앙—!

재차 폭음이 일며 공간이 들썩였다.

'결계가 몇 겹이나 중첩되어 있는데도 이만한 여파라니.'

하지만 율령자는 뒤에서 전해지는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싸움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애초부터 그의 역할은 전투원이 아닌 관리자였으니 당연한 판단이었다.

물론 그의 고유스킬인 「심상투영」은 육신의 무력과 무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는 훌륭한 능력이었지만, 이미 하회탈에겐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던가?

'비싼 대가를 치러서 말이지.'

그는 슬쩍 눈을 내려 열심히 움직이는, 오른팔과 마찬가지로 행동 보조 마도구가 달린 두 다리를 바라보았다.

'상하이 지부는 당분간 폐쇄다. 아무리 공안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지만 이미 너무 주의를 끌었어. 괜한 관심이 쏠려서 좋을 것 없지.'

중국은 땅도 넓고 인구도 많은 만큼 다수의 지부가 분포되어 있었다.

그중 어디로든 넘어간다면 업무를 처리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지부장으로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야 전부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문제는··· 하회탈의 난동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데.'

재차 그 기괴한 가면의 습격자를 떠올린 율령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국의 천(天)급 초월자들은 대부분 대륙 곳곳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그만한 강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봐야 쓸데없이 효율만 떨어지니 당연한 일.

문제는 그만큼 그들을 한데 모으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점이었다.

'하필 회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때···!'

불과 하루 전.

하회탈의 재등장을 고려한 회주가 지구에 남아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다 더는 이대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막 떠나간 참이거늘.

이 어찌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그렇게 몇 차례 이를 갈던 율령자는 이내 억지로 심호흡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흥분해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왼쪽 의안의 시야 한 편에 떠 있는 알림창을 흘깃 바라봤다.

-코드 네임 : 하회탈

-에너지 타입 : 흑마력 + 죽음(?)

-주요 능력 : 흑마법, 언데드, 공간이동, 결계 전반 등 다수

-출신 차원 : 불명

-고유스킬 : 불명

-······

하회탈을 마주한 직후에 출력되었던 내용들.

스캔이라 하지만 그 내용은 의안이 직접 분석한 것 보다 그의 뇌리에 남은 정보들을 정리한 것이 대다수였다.

아무리 최첨단 마도 공학의 산물이라지만 하회탈처럼 격이 높은 이를 파악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으니.

그러나 그 하단에는 당장 참고할 만한 사항이 몇 줄 있었다.

-측정된 에너지 : 93,853,126

-위험도 : S+

-기가급 함선 원자로 이상의 에너지 반응 감지. 속히 이탈할 것을 권고.

지금도 실시간으로 측정되며 변동하고 있는 수치였다.

이 의안은 마도 공학이 극도로 발달해 우주까지 진출한 캘리카스 차원의 물건.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함선도 천체를 항해하는 초대형 우주 함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S+라고? 이 의안을 얻고 확인한 천급의 대다수가 A 선이었건만···.'

물론 에너지양과 전투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서로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어 가며 싸우는 우주 전쟁에서라면 모를까, 극한의 효율성으로 그것을 통제하는 달인끼리의 승부에선 일정 선만 넘는다면 그리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

정면으로 날아드는 주포를 완전히 상쇄하는 건 힘들어도, 슬쩍 방향을 틀어 흘려버리는 건 간단히 해내는 존재가 바로 초월자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아예 단위가 다른 수치는 보는 이에게 커다란 압박감을 주었다.

특히 율령자처럼 객관적인 자료와 계산 등을 통해 세상을 예단하는 부류에게는 더더욱.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야 한다. 천위밍도 A+의 천급이니 결계와 지(地)급들의 도움이 있다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터.'

사실 가장 빠르게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최상층에 마련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하회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침입자가 어디로 침투하건 공간 왜곡으로 최하층으로 보내지게 돼 있어, 여유롭게 그것에 대응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최상층의 전송진으로 빠져나갔을 텐데.

'젠장, 그것 때문에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도 전부 막혀 버렸고···.'

설마 그 철저한 대비가 오히려 이렇게 탈출에 방해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는 다른 지점에 가게 된다면 꼭 이 점을 개선해 다시 설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

물론.

탈출할 수 있다면.

콰아앙—!

갑작스럽게 최상층에서 밀려온, 지금까지 있었던 것 이상의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크윽! 이건 무슨!"

그에 휘말린 율령자가 맥없이 상체를 휘청거렸지만, 다리의 보조 장치가 자동으로 자세를 제어해 준 덕에 바닥을 나뒹구는 꼴만은 면할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측정된 에너지 : 156,759,142

-위험도 : SS-

-테라급 함선 원자로에 준하는 에너지 반응 감지. 즉시 비상 탈출 시퀀스로 이행할 것.

수치가 바뀐 알림창이 다시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과 함께.

[크흐— 또 만났구나. 제법 부지런히 걸은 것 같다만.]

불과 조금 전에 대면했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쳤다.

슬쩍 위험도 수치를 확인한 율령자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곤 힘겹게 다시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천위밍은."

생각이 길어져 제법 오래 지난 것 같았으나, 실상 따져보면 몇 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빨리 뚫려 버리다니,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음? ···아아! 저 녀석 말이냐?]

하지만 하회탈의 뒤쪽을 본 율령자는 이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벅저벅—

스윽— 스윽—

다수가 걸어오는 소음에 섞여 들려오는, 뭔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어둠을 헤치고 십여 개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그것을 본 율령자가 이를 악물었다.

먹물에라도 빠진 듯 전신에서 시커먼 기운을 뚝뚝 흘리는 언데드 부대.

그는 한눈에 그들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천급 언데드···! 거기다 나머지도 전부 지급? 저런 것들이 어떻게 지구에!'

그것들은 그간 모아온 각성자의 시신으로 만든 '어비스 레버넌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선된 개체만을 선별한 정예 스쿼드.

이내 그 가장 선두에 선 언데드, 살마가 한 손에 잡고 질질 끌고 오던 뭔가를 천천히 치켜들었다.

"···천위밍."

검은 손에 잡힌 머리채 아래에 보인 것은 율령자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조금 전까지 시간을 벌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뒤에 남았던 천급의 고수였으니.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미 그 얼굴에 생기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일까.

[크흐흐— 덕분에 쓸 만한 소재를 구했구나. 이 녀석도 훌륭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 이거 아주 만족스럽군.]

"······."

등 뒤에 시체의 병사들을 거느린 죽음의 마왕이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 앞에 선, 위압감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지만 당연하게도, 한스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너도, 제법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있구나?]

심연이 담긴 한 쌍의 눈이 율령자의 몸을 훑었다.

그는 비전투형 정신계 각성자인 데다 경지도 초월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희소성이 있었으니 영 못 써먹을 몸뚱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에도 생각했지만. 저 눈, 굉장히 탐나는군.'

테두리엔 은은한 푸른빛의 원이, 그 안쪽의 홍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채워져 신비롭게 발광하는 기계 의안.

저만한 수준의 마도 공학 물품은 처음 보는지라 저도 모르게 눈이 갔다.

또 마침 드워프 아바타 하워드도 한창 마도 공학에 도전하는 중이지 않던가?

거기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저번엔 휠체어를 타고 있었던 거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저 오른팔도.'

아무 이상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저 팔다리를 보라!

그러면서 옷 아래로는 티도 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라니.

'말 그대로 궁극의 강화 외골격이군.'

저것도 한창 슈트 개량에 매진하고 있는 하워드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터.

아직 다른 세계의 마도구를 이용하는 것에 제한이 있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나, 그거야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적잖은 수확을 걷게 된 한스가 재차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율령자에게로 다가가 한 손을 뻗었다.

[어디 다시 한번 도망쳐 보려무나.]

"···하, 개 같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스의 손이 이마에 닿을 때까지,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278

하회탈 리턴즈 (3)

상하이 소재의 번천회 동아시아 지부를 습격한 하회탈의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그 여세를 몰아 아예 근방의 휘하 세력들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아주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인 상하이에서 벌어진 일은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중국 국내는 물론 국경을 넘은 해외까지도.

그리고 그 소식에 가장 극렬하게 반응한 곳이 바로···.

인근의 국가이면서 하회탈의 출신지이기도 한 대한민국이었다.

중국발 기사를 그대로 가져와 보도하는 황색언론부터 시작해, 조회수의 냄새를 맡고 달려들어 온갖 자극적인 문구로 과장하는 사이버 렉카를 거쳐 나름대로 공신력이 있는 언론들까지.

모두가 그 소식에 흥미를 가지고 관심을 보였다.

또 일이 그쯤 되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일 벌이는 클라스 무엇?ㅋㅋㅋ 야쿠자에 이어서 이젠 삼합회를 들이박네ㅎㄷㄷ

-??? : 그냥 일본 돌아다니는 게 지겨워져서 잠깐 쉬면서 중국 관광하던 것뿐입니다. 이제 다시 일 시작했으니 국민 여러분들은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하 형 돌아왔구나! 난 형 믿고 있었어!

└너 저번에 하회탈 어디 갔냐고 징징 짜던 애 아니냐?

점차 말라가는 듯하던 하회탈의 팬 사이트 '새벽의 서낭당'은 처음 소식이 알려졌던 아침부터 시작해 쉴 새 없이 트래픽이 늘기 시작했고.

-죽었다고 한 새X들 다 대가리 박아라. 일단 나부터 박음ㅇㅇ

-빠른 자백ㅇㅈ합니다

-저도 박겠읍니다...

-와 ㅅㅂ 근데 진짜 살아있었네? 혹시 대역 아님?

└이만한 규모로 일을 벌인 데다, 증거도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는데 설마 가짜일까?

└솔직히 이렇게 완벽한 대체가 가능하면 그냥 진짜라고 쳐 줘야 됨

└ㄹㅇㅋㅋ

하회탈의 잠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이들도 귀신같이 태세를 전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저력과 이름값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다만 그 소식을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일본에 이어 중국의 항의를 받게 된 한국 측 고위 인사들이었다.

하회탈과 별다른 관계도 없는 그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지만, 국제 관계에서 이런 문제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협조를 해주든 뭘 하든 어떤 식으로든 액션을 취해서 국가 간의 유대를 원만하게 만드는 게 바로 외교 아닌가?

그리고 그 일각을 차지하는 한 축.

"그럼 긴급회의를 시작하지. 안건은 모두 알고 있겠지?"

서울 남산에 위치한 한국 귀환자 협회 총본부에서도 막 간부진의 회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이 주제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요? 일본 때도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새삼?"

"그러게. 안 그래도 바쁜데 왜 또 여기까지 불렀데?"

-뭐, 어쩔 수 없는 문제기는 하니까요.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화상으로 참여하면 안 됩니까? 왜 서울은 강제 참가야··· 불공평하게···."

협회장의 주재하에 소집된 간부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었다.

서울의 각 지부장들과 화상으로 참여한 지방 도시의 지부장들까지.

국가 기관과는 달리 격의 없는 이들이 모인 탓에 회의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각성자의 능력과 지위는 비례하는 법.

이 자리에 있는 간부진들은 모두 출신 세계에서 나름대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이들이었다.

영웅, 귀족, 단체장, 명성 높은 네임드 등···.

이미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에 찬 그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은 할지언정 과하게 눈치를 보진 않았다.

그야말로 철저하게 실전으로 엄선된 능력 중심의 인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중국 측의 항의가 생각보다 더 강경하다. 정부 측 말로는 온갖 방면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는군."

물론 그런 만큼 강자에 대한 예우도 확실했다.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역경을 헤치고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으니까.

협회장의 한마디에 한창 시끄럽게 떠들던 간부진이 그의 말에 집중했다.

"예? 아니, 뭘 그렇게까지? 기껏해야 범죄자들이나 잡은 거 아닙니까? 그것도 고작 상하이 인근 조직 몇 개 털었다면서요?"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보죠? 건방지게 자국에 넘어와서 설친다고?

"글쎄, 정확한 이유야 그쪽만 알겠지. 어쩌면 하회탈이 건든 놈 중에 그쪽 고위층과 선이 닿았던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한창 이야기가 오가는 회의장의 한편에서.

억지로 자리에 끌려온 서울 남부 지부장, 뇌제 윤지윤이 뚱한 표정으로 패드에 떠오른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하회탈 본인이 맞는 것 같네.'

하나같이 중국에서의 하회탈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사진은 물론 CCTV를 주축으로 한 동영상에 목격자들의 증언과 그걸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까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유능하기 그지없는 정보 수집이었다.

'뭐, 중국에서 증거랍시고 내놓은 게 대다수긴 하겠다만.'

회의는 예상대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당장 하회탈은 중국에 있다는데 이제 와서 그들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꼬장 한 번 부리고 싶었던 거 아냐? 이참에 외교적 우위를 점해서 이득을 보려고. 그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음?'

그렇게 자료를 휙휙 넘기던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었다.

최초의 이상이 보고된 어느 빌딩에 대한 사례였다.

'대외적으로는 투자 회사.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뭔가 미심쩍은 정황이 발견됨.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그 한 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비슷비슷했다.

주변 일대의 암흑가를 지배하던 삼합회와 그 관련 조직에 대한 무차별적인 징벌.

하회탈이 지금까지 하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회탈, 하회탈··· 그러고 보니···.'

하지만 그에 대해 되뇌다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번천회가 바로 하회탈이 날뛰기 시작한 이후에 꼬리가 드러난 조직이었지.'

얼마 전 그녀의 관할에서 테러를 일으킨 9레벨 광혈귀이자 혈맹의 전(前) 수장, 알파가 속해 있었다는 조직.

그놈들이 한국에서 몸을 감췄던 계기가 하회탈과의 충돌이었다고 들었다.

'지금까진 그냥 그러려니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한국을 넘어 일본, 그리고 중국까지 향한 하회탈의 행적도 범상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왜 그는 굳이 다른 나라까지 가서 범죄자를 사냥하는가?

그리고 일본을 정리하던 도중에 있었던 잠적기와 이번 상하이 사태의 상관관계는?

혹시 놈들을 찾기 위해 일본을 뒤엎다가 발견한 단서를 쫓아서 중국으로 넘어간 건 아닐까?

'···하인즈와 이야기 해 볼 필요가 있겠어.'

사실 굳이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지 전부터 조금 의심하던 사항이기도 했다.

하회탈과 헤테로시스의 관계에 대해서.

'이번에 하회탈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팬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도 했고 말이지. ···흠, 혹시 같은 세계 출신인가?'

그렇게 나름 예리한 추측을 내놓은 그녀는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그거야 앞으로 천천히 알아 가면 될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여전히 지지부진한 진행에 지루해진 그녀는 슬그머니 책상 밑으로 꺼낸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실행했다.

음소거까지 하고 초인적인 신체 통제력으로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노력하며.

'게임하네.'

'게임이군.'

'아, 부럽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도 모두 초인이었다.

당연하지만 참석자 중 그녀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회의를 진행하던 협회장만이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그쪽을 흘길 뿐—.

'아, 역시 현질을 더 해야 하나.'

지위는 고작 지부장이었지만, 능력으로는 협회장과도 맞먹는 그녀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와장창—!

온갖 첨단기기와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차 조화를 이룬 곳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까지만 보면 평소와도 같은 일상이라 할 수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주체가 된 이의 마음이 확연히 달랐다.

"까으으읏—! 짜증 나는군요! 아주 속이 터집니다 그래!"

쨍그랑— 쨍강— 파삭!

손도 대지 않았건만 늘어서 있던 플라스크들이 하나둘 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그의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후우, 안 되죠 안 돼. 이러다 아까운 시약들이 전부 날아가 버리겠군요."

하지만 애써 진정한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플라스크 잔해와 내용물이 시간이라도 되돌리듯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것들을 재차 확인한 후 안도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회갈색 머리의 중년 사내.

그러고는—.

"필요 없어!"

와장창—! 콰창—!

그대로 그것을 밀어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번천회가 가진 기술력의 원천이자 회주의 오른팔, 닥터가 신경질적으로 떡진 머리를 헤집었다.

오늘 온 소식도 그렇고, 요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함정이 준비된 지가 한참인데 정작 '완전 진화 생물 프로젝트'의 열쇠가 될 그 하인즈라는 흡혈귀는 유럽에 올 생각을 않고, 나름대로 쓸 만하던 율령자는 갑자기 나타난 하회탈에게 당해 버리지 않았나?

동아시아 전체를 통제하던 그를 잃은 것은 매우 큰 손실이었다.

당분간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아흐! 그게 어떤 물건인데!"

하지만, 닥터가 화내는 포인트는 거기서 조금 엇나가 있었다.

"내가 기껏 양보해 줬건만! 아아— 아까워라. 실사용 데이터를 수집하면 슬쩍 빼앗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율령자 자체보다는 그에게 줬던 마도 공학 물품을 잃은 것을 더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이번에 당한 이가 나름 번천회 내에서 서열이 한 자릿수에 달하는 고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를 보조하는 장치는 다시 만들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캘리카스의 의안은 꼭 회수하고 싶은데.'

당연히 그도 이미 부하들을 시켜 동아시아 지부가 있던 곳을 샅샅이 살펴보게 한 직후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하회탈의 희생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시 그 자리에선 마도구는커녕 율령자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양보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눈에다가··· 아니, 이마에다가 달아 버릴걸! 그렇게 했으면 지금쯤 눈이 세 개··· 응?"

그렇게 정신없이 중얼거리던 닥터가 갑자기 행동을 뚝 멈추곤 눈을 끔벅였다.

"눈이 세 개? 제3의 눈?"

그리고는 몇 차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호홋~! 이거이거 아주 흥미롭군요!"

언제 화냈냐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창 분노에 차 있던 그의 표정에는 이제 호기심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먼저 실험체를 골라야겠군요! 어디 보자, 일단 두개골에 구멍을 내고 뇌의 송과체와 연결해야 하니··· 그럼 역시 튼튼한 각성자가 좋겠지요!"

그러곤 양손을 쓱쓱 비비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동아시아의 뒤처리는 누가 알아서 하겠지! 그 여자라던가.'

안타깝게도 이미 그에게 율령자의 변고에 대한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

지금까지 사냥했던 놈들 중 가장 고위층인 율령자를 잡은 직후.

당연히 한스는 그의 머릿속도 들여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된 양질의 정보를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확실히 정신계로 경지에 오른 놈이라 그런지 그 작업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굳이 경지를 따지자면 극의의 끝자락 정도라고 볼 수 있었음에도, 작업 난이도만 따지자면 초월급도 능가할 정도로.

'설마 그 미친놈이 자기 뇌까지 포맷할 수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한스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끝나버린 수작.

더불어 율령자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신까지 파괴해 버렸다.

그가 영혼을 이용하더라도 정보를 얻어낼 수 없도록.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독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정신의 구슬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이전의 정신 공격 직후에 얻었던 구슬의 힘을 빌려, 포렌식 하듯 일부라도 복원하지 않았으면 진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놈을 통해 얻은 기물의 덕을 보게 되다니, 세상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놈들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정보를 얻은 직후.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어르신, 저 당분간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엉? 갑자기?"

타라크의 드워프 공방.

갑작스러운 하워드의 말에 자오닉이 눈을 끔벅였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도 하워드는 그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잠시··· 신문물을 접하고 깨달음을 좀 얻을까 해서 말입니다."

지구로의 유학을 앞둔 드워프 청년의 눈에서 욕망 어린 안광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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