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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알프레드가 말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멋진 활약을 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알프레드를 기리며 잠시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알프레드. 내가 반드시 복수해주마. 그곳에서 지켜봐 줘!'

알프레드의 원수는 말콤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가슴을 찌르는 양심을 애써 무시하며 이번에 얻은 정보들을 정리했다.

'제피의 본명은 제라프다.'

음, 쓸데없는 정보였다.

'놈들이 원하는 건 옆 창고에서 숙성 중인 '불사왕의 파편'이고, 말콤이 애지중지하며 살피는 중이다. 언데드는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놈들이 '불사왕의 파편'으로 뭘 하려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해 놈들을 엿 먹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말콤만 따돌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그래, 방법이야 만들기 나름 아니겠는가.

'기다려라···. 알프레드의 원수!'

***

제라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창고 당번이었던 것도 짜증 나는데,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승에게 대판 깨졌다.

'아니, 거기서 쥐새끼가 기어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억울했다.

관리 소홀로 인한 징계로 한동안 자기 혼자 매일 창고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날 입구를 지키던 후얀은 같은 기간 동안 입구를 지키는 벌을 받았다.

'더러운 세상! 뒷배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냐고! 그리고 쥐새끼 한 마리 기어 나온 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망할 늙은이 같으니.'

제라프는 평소처럼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

여기서는 스승이 언제 갑자기 들이닥칠지 몰라 불안했으니까.

철컹! 끼익— 쾅!

뛰다시피 걸어간 제라프는 신경질적으로 창고 문을 열어젖히며 거침없이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평소처럼 대충 넘어가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거기! 삐져나왔잖아! 제대로 [줄 맞춰 서!] 이 멍청한 것들아!"

줄지어 정렬해 있는 스켈레톤들에게 괜히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뭐야? 이건 또 왜 이래! 야! [똑바로 서!]"

한쪽 발목이 잘려 나가 비스듬하게 서 있는 좀비에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비틀거리기만 하고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자, 곧바로 달려들어 걷어차기 시작했다.

"오냐, 너도 내가 우습지? 어? 제대로 안 해! [똑바로 서라고!]"

씩씩거리며 한참을 화풀이하던 제라프는 이내 발길질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의 모두가 자신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만족스러웠다.

이게 옳게 된 세상이었다.

시선을 내려 아직까지 비틀거리는 좀비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는 이내 자리를 옮겼다.

"응? 이게 누구야? 그때 그 건방진 놈 아니야?"

그러다 낯익은 형체를 발견했다.

제라프는 킬킬대며 가만히 서 있는 좀비에게 다가가 지팡이로 어깨를 쿡쿡 밀쳤다.

"야, 그때 했던 말 다시 해봐. 응?"

이십 대 초반의 사내로 보이는 좀비는 어떤 반응도 없이 건드리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왜 말이 없어? 아하! 내가 혀를 뽑았었지 참! 큭큭큭."

제라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마침 스트레스가 쌓이던 참이었는데 좋은 배출구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후우— 그때가 좋았는데. 마을 놈들을 하나하나 사냥할 때 말이야."

퍼억! 퍽!

그는 좀비를 걷어차며 광인처럼 중얼거렸다.

"특히 네놈이 유독 시끄러웠지. 건방진 소리나 지껄여 대고 말이야. 그때 뭐라고 했더라. 가족들을 건들면 가만 안 둔다고 했던가?"

까득

어딘가에서 작게 이빨 가는 소리가 났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제라프는 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상대를 조롱했다.

"킥킥킥, 너한텐 특별히 공을 들였었는데 말이야. 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기만 할 때, 그 표정이 아주 예술이었지."

그는 좀비를 향해 스트레스를 배출하며 그때의 광경을 회상했다.

언데드들에게 제압당한 채 혀가 뽑히고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던 청년의 눈동자.

그때 느꼈던 짜릿함을 떠올리며 제라프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근데 뭐 어쩔 건데?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가족들은 어디다 두고 혼자 여기 서있···."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튀었다.

어느새 기척 없이 뒤에 다가온 해골이 제라프의 한쪽 어깨와 머리를 붙잡고 목덜미를 물어뜯은 것이다.

"끄흐—! 뭐야 이건?!"

갑작스러운 공격에 상시 두르고 있던 마력 방벽이 깨져나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목덜미가 완전히 뜯겨 나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퍼엉!

제라프는 곧바로 전신으로 흑마력을 내뿜어서 등에 매달려있는 해골을 떨쳐냈다.

그리고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한 손으로 막으며 빠르게 물러서 습격자를 확인했다.

"스켈레톤? 이게 갑자기 어째서?"

하지만 당황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뒤로 나가떨어졌던 스켈레톤이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큭··· [멈춰!][멈추라고!]"

스켈레톤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제라프의 명령을 무시하고 짓쳐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기습당해 부상을 입었지만, 제라프도 명색이 흑마법사였다.

상대가 언데드인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명령어를 사용했지만, 통하지 않더라도 대응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상대가 눈앞의 스켈레톤 하나뿐이었다면.

콰악—

마법을 사용하려던 순간, 입안에 무언가가 들어오며 목에서 극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좀비가 자신의 손을 제라프의 입안에 쑤셔 넣으며 반대편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마력 방벽도 없는 상태에서 가해진 치명적인 공격에 정신이 흐트러지며 준비하던 마법이 취소되었다.

패닉에 빠진 제라프는 이내 초점 없이 죽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비웃던 좀비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가만두지 않겠다며 노려보던 눈이었다.

마력 방출은 연달아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고, 전방에는 이제 코앞까지 달려든 스켈레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제라프의 두 눈에 공포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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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왕의 파편 (1)

위험했다.

'불시에 목을 물어뜯었는데 이빨도 안 박힐 줄이야···.'

만약을 대비한 상시 보호막이었는지 강도는 그리 높지 않아서 흑마력으로 강화된 언데드의 치악력에 금세 깨져나갔지만, 그것 때문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제라프가 흑마력을 내뿜어 튕겨져 나갔을 때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이 세계의 마법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놈의 뒤에 있던 좀비를 움직여 저지할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계획을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실패할 뻔했다.

나는 시체가 된 제라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체에는 아직도 마을 청년 좀비가 매달려서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놈들은 원래부터 나쁜 놈들이었지.

저 좀비를 포함한 이곳의 모든 언데드들이 놈들에게 희생당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으나 정신적인 충격은 크지 않았다.

아니, 사실「마인드 허브」가 없었다면 위험했을 테지만, 다행히 지금은 게임에서 캐릭터를 죽인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보다 생각해 볼 문제가 생겼다.

'사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짱돌로 뒤통수를 후려치려고 했는데.'

제라프의 언행을 지켜보다가 화가 나서 그냥 지금 바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살심을 품고 공격 의도를 가지자 '한스'의 육체가 본능적으로 이빨로 목을 노려 공격했다.

이후의 대응도 육신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것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게 내 제어를 벗어났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본능적으로 움직였다고 했지만,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내버려 뒀을 뿐 충분히 제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짱돌로 뒤통수를 노리는 것보다 확실히 효과적이기도 했고.

원래 계획대로 했으면 아마 보호막도 못 깨지 않았을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이 느낌은···.'

그래, 비유하자면 몸에 새겨진 습관과도 같았다.

의식하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지만 무의식중에는 저도 모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언데드가 된 육체에 새겨진 본능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딱히 지구에 있는 본체까지 악영향을 주지도 않고, 오히려 이 점을 이용할 수도 있겠으나 일단 주의는 해 둬야겠지.

이제 슬슬 다음 계획을 진행할 때였다.

***

말콤 촌장.

아니, 대륙에서 암약하는 조직 '역천의 서약'의 장로 중 하나인 '마르코스 지오칼리'는 흐뭇하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변의 언데드들에게서 죽음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맥동하고 있는 검은 보석.

'불사왕의 심장'을 찾아다닌 지 어언 수십 년.

하지만 고생 끝에 간신히 찾아낸 것은 불완전한 상태의 파편에 불과했다.

그리고 본거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륙의 교단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어, 사람이 오지 않을 외진 산골 마을을 골라 그곳에 파편을 봉인하고 숙성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이제 곧이다. 조금만 있으면 드디어···.'

'불사왕의 파편'에 쏟아부은 자원이 적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지위마저 휘청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완성된다면 모든 게 뒤집힌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한···.'

[스승님?]

그때 갑자기 입구를 지키고 있을 제자에게 통신이 걸려 왔다.

[무슨 일이냐?]

[스승님. 그것이, 지금 밖에···.]

***

"그러니까, 제 동생이 이 안에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친구는 얼마 전에 떠났다고 하지 않소."

나는 마을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마을을 발견했을 때 처음 만났던 중년 사내였다.

"아니 그러니까 틀림없이 신호가 이쪽에서 이어지고 있다니까요! 그냥 안에 들어가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뭘 믿고 외지인을 함부로 안에 들인단 말이오?"

"아 그럼 촌장님이라도 직접 뵙고 말씀드리게 해주세요!"

이렇게 촌장을 끌어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안 나와도 정보는 얻을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는 뜻이었고, 이 마을에서 중요한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촌장일세.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이신가?"

그리고 쉽게 나를 무시하거나 해칠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미 연고가 없다고 생각하고 죽인 이를 찾아온 사람이 생겼고, 그런 일이 또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니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촌장, 말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하인즈라고 합니다. 제 쌍둥이 동생 한스가 이쪽에 있는 것 같아 실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흐음, 한스라··· 기억나는군. 그런데 그 청년은 혼자 여행하다 길을 잃었다고 했던 것 같네만?"

"아···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크게 싸우고 헤어졌었습니다. 그래도 화해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겠지.

내 얼굴이 '한스'와 똑같이 생겼을 테니까.

그리고 이젠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

'하인즈'로 마을 밖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촌장 말콤이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한스'는 곧바로 움직였다.

무시할 가능성도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다.

중요한 순간이라고 들었으니 사소한 것까지 확실히 챙기고 싶었겠지.

위험한 상황이 와도 외부에서 오지, 결계로 둘러싸인 최심부에서부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치 못한 점도 있으리라.

우웅—

덕분에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불사왕의 파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좀비 쥐인 알프레드를 통하지 않고 직접 파편을 접하자 숙성이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주변에 언데드들을 저렇게 둘러놓았는지도.

'언데드들로부터 흑마력을 흡수하는 건가? 아니, 공명인가?'

파편은 단순히 흑마력을 흡수하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 불완전한지, 흑마력을 흡수하는 동시에 결핍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동기화하며 안정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 서 있는 언데드들은 유령과 목 없는 기사를 비롯해 하나같이 위압적으로 보이는 개체들밖에 없었다.

제일 약해 보이는 게 해골기사였고, 그나마도 창고에서 보았던 개체보다 월등해 보였다.

'아니, 그럼 내가 있던 창고는 불량품 창고였던 건가? 갑자기 기분 팍 상하네.'

저 '숙성' 과정에 저급 언데드는 불순물밖에 되지 않았으리라.

자신을 죽인 것도 쓸 만한 언데드가 나오면 파편의 먹이로 던져주기 위해서였겠지.

결국 기대에 못 미쳐 불량품 창고에 처박히게 되었지만.

'오히려 다행인 일인데, 이상하게 열 받네?'

가까이 다가갈수록 압도적인 존재감과 함께 내 몸의 흑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의 위험성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섣불리 건드리는 것만으로 언데드가 되어 버릴 것이고, 몸이 약한 이는 곁에서 숨만 몇 번 쉬어도 죽음에 이르겠지.

품고 있는 힘과는 별개로 그 자체로 강대한 저주의 응집체나 다름없었다.

나는 '불사왕의 파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편식하면 못쓰지. 어디 불량식품 맛 좀 봐라.'

물론 순순히 먹혀 줄 생각은 없었다.

나름 믿고 있는 것도 있었고.

***

"그러니까, 저희가 쌍둥이라서요. 날 때부터 서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단 말이지요."

"허허허, 그것참 믿기 힘든 말이로···."

부드럽게 웃던 촌장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일그러져 흉신악살이 된 표정으로 마을 쪽을 돌아보았다.

파편에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

이런 시답잖은 녀석과 말씨름할 때가 아니었다.

"거기 그놈은 죽여 버려!"

말콤은 곧바로 흑마력을 사용해 파편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외쳤다.

그 명령에 마을 입구의 중년 사내, '역천의 서약'의 암흑기사 바우칼은 곧바로 하인즈를 죽이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언제?"

그 자리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

[죽여라.]

···공포 절망 비탄 고통 억압 광기 결핍 증오 살의 욕망 분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들었다.

[모든 산 자들을 증오하라. 이 땅을 절망으로 뒤덮어라. 세상이 죽음으로 물들수록 너의 힘이 더욱 강대해질 것이다. 생을 갈망하라. 가지지 못한 것을 빼앗아······.]

'와, 이거 진짜로 장난 아닌데?'

「마인드 허브」를 통해 걸러지는 정보량이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수준이면 이 내재된 에너지에 육체가 언데드가 되는 것은 물론, 정신이 완전히 파괴되어 파편에 잠식되어 버릴 것이다.

아니, 이걸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말콤이 어떻게 눈치를 채고 이쪽으로 향했으니, 이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쪽에도 뭔가 조치를 취해 둔 거겠지.'

이쯤 되면 강박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이 파편의 영향을 견딜 수만 있었다면 온종일 끼고 살았으리라.

'일단 해보는데, 잘 되려나. 거의 다 된 것 같기는 한데.'

흡수당하는 흑마력을 매개체로 언데드를 조종하던 감각을 살려 '불사왕의 파편'과의 동기화를 시도했다.

보통이라면 어림도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언데드이며, 파편으로부터 전해지는 폭력적인 정신 공격을 무시하고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되면 좋지만 잘 안돼서 이게 못쓰게 되더라도, 놈들을 방해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시도해 보자.'

파편은 불완전했으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주변과 공명하고 있는 무방비한 상태였다.

나는 그 결핍에 '한스'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결과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사악한 지혜」를 획득합니다."

눈앞에 나타난 문구.

하지만 그걸 보기도 전에 자신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었다.

뼈밖에 없는 몸은 그대로였으나, 존재의 격이 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각인되었다.

[오! 이제 말할 수 있잖아?]

성대에 흑마력을 공명시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건 사소한 변화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내려 몸을 내려다보았다.

갈비뼈 사이에서 맥동하는 검은 보석.

심장이 생겼다.

-개체명 : 한스

-종족 : 언데드 (데미리치)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초회복」

-개체 특성 : 「부패한 심장」, 「사악한 지혜」, 「마력 친화」

-특이 사항 : '불사왕의 파편(1/3)'의 힘으로 격이 상승했다. 파편에 잠재되어 있던 흑마력이 개체와 동화되었다. 「마인드 허브」의 영향으로 정신 오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엘리트 스켈레톤'에서 불사의 마법사인 '데미리치(Demi-Lich)'로 진화했다.

***

후얀은 오늘도 비밀통로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제 좀비 쥐가 한 마리 빠져나온 것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 벌이었다.

'아 괜히 제라프 놈 때문에 나까지 덤터기 썼잖아.'

그러고 보니 들어간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라프가 나오지 않는다.

'뻔하지 뭐, 그 성격에 화풀이나 하고 있겠지.'

후얀은 몸을 뒤로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댔다.

1년이 지났지만, 오늘도 이 촌구석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마을 입구에서 전해진 소식을 안에 있던 스승에게 전달했던 것밖에 없었다.

[후얀! 후얀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콰당!

갑자기 전해진 스승의 통신 마법에 후얀은 의자 채로 뒤로 넘어가 나뒹굴었다.

[예! 스승님! 여긴 아무 이상 없습니다!]

벌떡 일어난 후얀이 의자를 세우고 앉아 뒤통수를 문지르며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스승의 목소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 이상이 없어?! 뭔 개··· 아니, 빨리 파편부터 확인해! 빨리! 제라프에게도 연락하고!]

[예, 옙!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파편이 있는 곳을 둘러싼 결계 때문에, 창고 내부로 통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입구에 비치된 특수한 마도구를 이용해야 했다.

[야! 제라프! 그만하고 빨리 파편 확인해··· 어?]

서둘러 제라프에게 통신을 보내던 후얀은 동작을 멈추고 마도구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통신을 보냈다.

[제라프? 야, 제라프 들리냐?]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당연했다.

애초에 연결이 되지 않았으니까.

"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당황한 후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였다.

우웅—

창고로 가는 입구의 마법진이 반응하더니 이내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야! 제라프! 너 왜 갑자기···."

열린 문에 반색하며 돌아보던 후얀은 이내 그대로 굳어버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제라프가 아니었다.

"어··· 어··· 아니, 왜···?"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해골을 위시한 언데드 수백 마리가 바글거리며 통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언데드들을 통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내 몸에 있는 흑마력의 양은, 쥐꼬리만큼 있는 걸 박박 긁어서 사용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많은 수를 조종하다 보니 알프레드와 연결했을 때처럼 감각까지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휘하에 좀비와 스켈레톤은 물론, 파편 근처에 있던 상위 병종들까지 포진해 있었으니까.

'파편에 오랫동안 기를 빨려서 그런지 상태들이 별로 안 좋긴 한데···.'

이 정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이리라.

그동안 얼마나 많이 희생됐었는지 '불사왕의 파편'의 주변 바닥에는 온통 언데드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나는 언데드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통로를 가로질렀다.

이내 밖으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

'저긴 결계가 있어서 그냥 나갈 수는 없을 텐데···. 때려 부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무언가를 깨닫고 제라프가 했던 것처럼 손을 문 위로 올렸다.

그리고 「사악한 지혜」의 효과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우웅—

마법진이 반응하고 문이 열렸다.

이제 나에게 흑마법은, 더 이상 미지의 신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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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왕의 파편 (2)

입구를 지키고 있던 흑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제라프와 함께 정보수집에 큰 도움을 줬던 친구였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반가운 마음에 인사말을 건네 봤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외면이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렇게 무시하면 상처받잖아.]

차가운 반응에 괜스레 섭섭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친구들을 한번 둘러봤다.

[끄흐흐으···]

덜그럭— 덜그럭—

언데드들이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으로 칠흑같이 어두워진 통로 안에서 울려 퍼지는 귀곡성과 발광하는 수백 개의 안광.

언뜻언뜻 비치는 실루엣들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고, 그 강인해 보이는 위용은 듬직하기 그지없었다.

'음··· 얘네들이 좀 무섭게 생기긴 했네.'

하지만 내 친구들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생겼어도 그렇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외면보다는 내면이 더욱 중요한 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면에 자신이 있었다.

'암, 내 해골 정도면 충분히 잘생긴 두상이지. 뼈도 미끈하게 잘 빠졌고.'

[끄히히히힉—]

"으억—! 언제 여기까지?! 저리 꺼져!"

펑—!

도망가던 흑마법사는 건물 출입문 바닥에서 튀어나온 유령들에게 둘러싸여 더는 도망치지 못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보내줄 생각도 없었다.

이 마을에 있는 흑마법사와 하수인들은 모두 없애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휘하의 모든 언데드들에게 명령했다.

[이 마을의 모든 인간들을 죽여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혹시 무고한 사람이 붙잡혀 있을 거라는 걱정은 하지도 않았다.

데미리치로 진화한 나의 '생기 감지'는 마을 전체를 범위로 두고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의 흑마력까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이 마을에 살아있는 이들 중 무고한 자는 없다.

[키에엑—!]

달그닥, 딸깍!

내 뒤에 있던 수백의 언데드들이 입구의 흑마법사를 지나쳐 마을로 풀려나갔다.

놈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외곽부터 둘러서 안쪽으로 공격해 들어갈 것이다.

화르륵— 쾅!

"크헉, 내···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놈들에게!"

언데드들의 한복판에 갇힌 흑마법사는 온갖 마법을 동원해 가며 죽기 살기로 발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놈이 모든 능력을 꺼낼 수 있도록 적당히 조절하며 언데드들로 몰아붙였다.

딱히 배려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르륵—

[음··· 이렇게 인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군.]

나는 손 위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악한 지혜」는 흑마법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와 재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지식'을 직접 전수해 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따로 학습할 필요가 있었다.

비밀통로 입구의 결계는 직접 접촉해서 이해한 후에 파훼할 수 있었지만, 다른 흑마법들은 경우가 다른 것이다.

[끄어어어—]

촤좌좍—!

그리고 여기엔 훌륭한 교보재가 있었다.

나는 흑마법에 의해 언데드들이 토막 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 모든 실전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그리고 「사악한 지혜」는 단순히 따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발전된 개선 방향과 응용 방법, 파생 능력까지 깨닫게 해 주었다.

"크억···. 쿨럭!"

충분히 여유를 줘 가면서 압박했다고 생각했는데, 흑마법사는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하다 한계가 왔는지 피를 토하다 쓰러졌다.

'뭐, 빨아먹을 만큼 다 빨아먹은 것 같고, 이젠 상관없겠지.'

나는 달려드는 언데드들에게 파묻히는 흑마법사를 일별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기습으로 제라프를 죽인 건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구나.'

엘리트 스켈레톤으로 저 정도 수준의 상대와 대적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제라프도 저 흑마법사와 동급이었을 테니, 정말 여차하면 아무것도 못 하고 박살 났으리라.

'자, 이제 어느 정도 준비는 끝났고. 손님을··· 아니, 집을 빼앗은 강도를 맞이해 볼까?'

콰아아앙—!

건물 전체를 감싼 결계가 부서지며 무언가가 내 앞으로 날아와 산산이 조각났다.

아까 내보냈던 언데드들 중에 하나, 그중에서도 최강이었던 데스나이트였다.

"네놈··· 네놈이 감히···!"

일그러지며 부들거리는 얼굴을 한 노인, 말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 챙겼는지 검은 로브를 입고 손에는 해골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나는 말콤의 뒤쪽을 보았다.

가진 데스나이트 셋을 전부 붙여서 시간을 끌도록 했는데, 모두 당했는지 파편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결이 끊겼을 때부터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긴 했지만 데스나이트는 구하기도 힘든 최상위 언데드였으니까.

겨우 시간을 버는 것에 소모하기에는 아까운 패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을 전체를 탐지했을 때 이 노인네의 힘을 파악할 수 있었고, 내가 가진 언데드들은 시간 벌이밖에 안 된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직접 상대하기 전에 흑마법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안녕하세요. 촌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뭣?! 네놈은 누구냐?!"

[네? 저예요. 저. 저 모르시겠어요?]

섭섭하게 벌써 내 얼굴과 목소리를 잊은 건가.

나는 한 손으로 해골을 긁적이며 마력을 공명시킨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기억 못 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데···. 제가 원래 이틀만 머물며 마을 일을 돕고 떠나기로 했었지 않습니까?]

"이틀···? 넌, 한스로구나! 분명 엘리트 스켈레톤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고. 아무튼 생각 외로 오래 머물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만큼 마을 일을 좀 더 도우려고 해서 말이지요.]

"도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말콤이 이를 갈며 외쳤지만, 나는 당당했다.

[쓰레기 청소 말입니다. 분리수거도 안 되는 폐기물들이 가득한 이 마을 전체를 대청소해 드리겠습니다. 아,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핫.]

말을 하다 보니 뿌듯해져서 넉살 좋게 웃었다.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이야.

지구에서도 봉사활동을 시작해 봐야겠다. 물론 아바타로.

"···네놈, 그 '불사왕의 파편'은 대체 어떻게 한 거냐?"

'아, 여기까진가? 좀 더 도발하고 싶었는데.'

나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흑마력을 끌어올리는 말콤을 따라 마법을 준비하며 끝까지 속을 긁었다.

[이거 말입니까? 촌장님 덕분에 제가 심장이 없어졌잖습니까. 그래서 창고에 있던 걸로 새로 하나 달았습니다.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이걸로 참아야지 뭐 어쩌겠습니까?]

콰과과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서 검은 가시들이 덮쳐들었다.

나는 곧바로 반응하며 주변에 그림자 장벽을 세워 가시들을 막았다.

그리고 방금 배운 검은 불꽃들을 난사하며 반격하는 순간.

"[죽음의 손가락]"

피잉—

한순간에 뻗어온 검은 섬광.

말콤의 목소리가 들린 찰나의 순간, 그림자 장벽과 함께 몸 주변에 전개해 두었던 마력 방벽까지 단번에 꿰뚫리며 오른쪽 팔이 통째로 날아갔다.

[칫··· 노인장, 마법 쓰는데 일일이 기술명 외치면 안 쪽팔리쇼?]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군. [지옥의 부름]"

'겉멋만 든 노인네 같으니.'

내가 파악한 이곳의 마법 체계는 마력의 구축이 중요하지, 저렇게 일일이 주문을 읊을 필요가 없었다.

집중을 편하게 하기 위한 루틴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달그락, 덜그럭—

[그어어···]

말콤의 발밑에서 기어 나오는 악귀들과 내 휘하의 언데드들이 뒤엉켰다.

대충 뭉친 찰흙같은 이형의 존재들과 뼈다귀들이 서로를 파괴하기 위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우리는 공방을 이어가면서도 끊임없이 말싸움을 계속했다.

"'불사왕의 파편'을 취하고도 겨우 그 정도냐? 네놈, 그게 어떤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겨우 엘리트 스켈레톤 하나를 반쪽짜리 데미리치로 만들고 끝날 물건이 아니었다. [사령의 인도!]"

[아 뭐! 불완전했는데 어쩌라는 거요. 이거 나니까 이렇게라도 써먹었지, 당신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숙성되지도 않은 불완전한 파편을 강제로 저급한 몸뚱이에 융합시키다니,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었구나.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데···! [연쇄 뼈 폭발!]"

귀곡성이 전장을 울리고, 곳곳에서 검은 불꽃과 뼛조각이 터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언쟁.

'음··· 종결급 인챈트를 초보자용 목검에 바른 셈인가 보네. 조금 미안한데?'

거짓말이지만. 사실 하나도 안 미안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의 침식을 이겨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몸뚱이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실험체로 써 주마! [브로큰 엑토플라즘]"

터져 나오는 파괴적인 기운에 서둘러 검은 장벽을 펼쳐 공격을 막아냈다.

그런데 계속해서 폭언을 듣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사실 누가 봐도 피해자는 이쪽이 아닌가.

그리고 말끝마다 기술명 붙이는 것도 거슬렸다!

또 마지막 주문만 이름의 양식이 다른 것도 묘하게 신경 쓰이고! 일관성을 가져라!

그래도 이제 슬슬 말콤이 사용하는 고위 흑마법에도 익숙해졌다.

덕분에 첫 공격에 팔이 날아간 후로 몇 번이나 공방을 거듭했지만 추가로 입은 피해는 없었다.

말콤에게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 슬슬 끝내자.

콰아앙!

바닥에서 검은 가시가 솟구쳐 말콤에게 쇄도했다.

동시에 그에게서 뻗어 나온 검은 섬광이 방어막을 뒤흔들었지만, 이젠 눈에 익은 공격에는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번의 마법을 더 주고받은 후, 나는 짜증과 원한을 담아 말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당신을 죽이고 알프레드의 원수를 갚겠다.]

***

한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마르코스는 순간 당황했다.

'알프레드? 원수를 갚아? 이 마을에 아는 사람이 있었나?'

1년 전에 희생당한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알지도 못했다.

숙성하기 적합한 지역을 찾기 위해 처음 이 마을에 파견되어 정보를 모았던 부하라면 모를까.

'놈이 이 마을 주민과 이미 아는 사이였다면, 처음부터 눈치채고서도 안으로 잠입했다는 말인데···. 아까 마을에 왔던 하인즈라는 놈과도 연관이 있나?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생각이 많아져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푸화악— 쾅!

'놈이 점점 내가 사용하는 흑마법에 익숙해지고 있다!'

자신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은 물론, 역공에 사용되는 흑마법의 수준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젠 이쪽이 버티는 데 버거워질 지경이었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무지렁이가 어쩌다 운 좋게 힘을 얻었을 뿐인데!'

보통 사람이 흑마력만 넘치는 데미리치가 되었다고 그 잠깐 사이에 저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학습 속도다. 놈이 품고 있는 파편의 힘인가?'

「사악한 지혜」의 효과를 모르는 마르코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그것도 '불사왕의 파편' 덕분에 얻은 스킬이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다른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모든 걸 쏟아붓는다!'

"[파멸의 맹약!]"

***

말콤을 몰아붙이던 나는 곧바로 변화를 감지했다.

이곳과는 별개로 마을에서 박 터지게 벌어지던 싸움이 한쪽으로 확 기울었다.

내가 보낸 언데드들에게 저항하던 흑마법사들이 그 자리에서 모조리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을에서 저항 중인 이들은 흑마력을 사용하는 하수인들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쪽과는 반대로 흑마법사들의 영혼을 빨아들인 말콤의 흑마력이 순간적으로 크게 증폭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정한 자의 왕관], [망자의 안식처]"

말콤의 머리에 검은 왕관이 씌워지고, 발밑의 대지가 검게 물들며 언데드들이 기어 나왔다.

'아··· 2페이즈냐고. 새로운 마법을 보는 건 좋긴 한데, 이제 슬슬 끝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나는 그걸 시큰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개체가 지식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흑마법」을 획득합니다."

말콤은 아직 역전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으니까.

***

예상대로 말콤의 발악은 오래가지 못했다.

"쿨럭··· 커헉!"

나는 말콤의 흑마법을 모두 흡수했고, 내 오른팔을 날려버렸던 마법을 그대로 돌려줘 말콤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크헉··· 이렇게, 허무하게···. 내, 내게 언데드들만 남아 있었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흑마법도 수준이 높긴 했지만, 말콤의 전공은 어디까지나 언데드를 앞세운 네크로맨서였으니까.

'불사왕의 파편'을 빨리 완성하고 싶은 욕심에, 막대한 수의 상위 언데드들을 제물로 갖다 바치지 않았다면 힘든 싸움이 되었으리라.

나는 격전의 끝에 만신창이가 된 주변의 언데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말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영감, 댁 언데드 쩔더라?]

"크허헉— 크학!"

말콤은 이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얼마나 원통했는지 부릅뜬 두 눈에서 피가 나올 정도였다.

[쯧, 그야말로 인과응보로군. 심보를 좋게 가졌어야지.]

때마침 마을에서의 전투도 모두 끝나, 한순간 마을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제 이 마을에 살아있는 이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격렬한 전투로 천장이 통째로 날아가, 별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밤하늘이 훤히 보였다.

[알프레드···. 보고 있니?]

너의 복수는 내가 확실하게 끝냈으니, 이제 안심하고 편히 잠들렴.

그 순간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별똥별은 마치 알프레드가 내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같았다.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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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왕의 파편 (3)

나는 복수를 끝마치고 뒷정리를 시작했다.

우선 휘하의 언데드들부터 소집해 피해를 확인했다.

말콤에게 함께 맞섰던 언데드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마을에서 저항하는 흑마법사 일당과 전투를 벌였던 녀석들도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피해가 상당했다.

[···오백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밖에 남지 않았나?]

그 많던 언데드들 중 남은 수는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겨우 마흔이 조금 넘는 이들을 상대했는데 입은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좀비나 스켈레톤들만 있었으면 모를까, 그래도 나름 상위 언데드들도 함께 있지 않았던가.

말콤이 흑마법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으면 마을 쪽으로 갔던 언데드들은 전멸했을 것이다.

'뭐, 그 경우였으면 내가 더 빨리 말콤을 처리하고 도우러 갈 수 있었겠지만.'

피해를 대충 파악하고 말콤의 시체를 살폈다.

병력이 줄었으면 새로 채워 넣으면 그만.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의 수는 회수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전투 중 사망한 적의 시체를 역이용하여 병력을 늘리는 것이 네크로맨서의 묘미 아니겠는가.

'으음··· 잘 되려나 모르겠네.'

말콤이 언데드를 소환하는 것을 몇 번 보기는 했으나, 그것은 기껏해야 하급 언데드들을 대량으로 뽑아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긴 그동안 모아왔던 상위 언데드들은 전부 내가 빼앗았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결국 시체를 이용해 언데드를 만드는 것은 배운 적이 없는 것이다.

함부로 시도했다가 뭔가 잘못돼서 시체를 못 쓰게 되면 피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이 정도의 높은 수준의 시체를 구하는 게 쉬울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펴보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말콤의 시체에 영혼이 없었다.

데미리치가 되고서 시체를 이렇게 살펴보는 것은 처음이라, 원래 이런 건가 싶어 더 자세히 조사하다 원인을 발견했다.

말콤의 심장부에 붉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이것에 의해 인위적으로 영혼이 빠져나갔다.

'악마 계약 같은 거로 영혼을 빼앗긴 건가? 아니면 보안을 위해 배후조직에서 조처한 것일 수도 있겠군.'

영혼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되었다.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리저리 시도해 보다 보면 뭐라도 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육체는 사용할 수 있어 보이니 다행이네.'

나는 말콤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다 원하던 것을 발견했다.

처음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친절한 흑마법사.

격전 중에 여파에 떠밀렸는지 여기저기가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구석에 처박혀 있었지만, 용케 제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영혼이 뽑혀 나갔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써먹을 수 있겠는데?'

개인과외도 모자라 실습 기회 제공까지.

나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언데드 제작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까지 습득한 「흑마법」의 지식과 언데드들을 살펴봤던 경험, 그리고 '불사왕의 파편'과 공명했을 때 얻었던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 흑마력을 움직였다.

'시체와 흑마력을 연결 후 동기화, 육체에 남은 마력을 오염시키고 신체정보를 변질···. 사념의 파편을 긁어모아서···, 이렇게 하는 건가?'

이내 검은 불꽃이 시신을 감싸더니 뼈를 제외한 모든 부위를 불살랐다.

그렇게 처음엔 잘 되는 것 같더니.

뽀각—! 파스스···

남겨진 뼈들에 순간적으로 균열이 퍼지더니 파스스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미안?]

가볍게 사과의 한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덕분에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언데드를 시켜 창고에 있던 제라프의 시체를 가져오게 해서, 그 앞에 앉아 다시 한번 언데드 제작을 시도했다.

언제나 도움을 주는 '제피 찬스'를 이용한 덕분인지 이번에는 다행히 성공할 수 있었다.

해골마법사, 스켈레톤 메이지(Skeleton Mage)가 완성되었다.

성공에 자신감이 생겼지만 벌써 말콤의 시체를 쓰기엔 좀 애매했다.

몇 번 더 해봐야 확신이 생길 것 같았다.

'뭐, 재료들이야 널렸으니 충분히 연습한 후에 마지막에 시도해 보면 되겠지.'

나는 옆에 있던 녀석에게 말콤의 시체를 들게 시킨 후,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우뚱—

순간적으로 몸이 기울었다.

한쪽 팔이 없어서 균형을 잡기 불편하다.

'일단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는데?'

언데드들을 이용해 전투 중 날아갔던 내 오른팔을 찾아오게 했다.

샅샅이 뒤져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역시 그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상완 부분이 완전히 사라졌잖아? 이거 못 쓰겠군.'

어깨 부위에 팔꿈치를 붙일 수는 없으니까.

근원을 따로 추출해서 보관해 불사성을 얻은 진짜 리치였다면 뼛가루들을 모아 재생했겠지만, 어쨌든 자신은 무리였다.

그렇게 고민하다, 말콤과의 싸움 직전에 날아와서 박살이 났던 데스나이트의 잔해가 시선에 들어왔다.

완전히 파괴되어 재활용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오른팔 파츠는 멀쩡하고 체격도 나랑 비슷하다.

'이걸 대신 붙이면 되겠군!'

냉큼 데스나이트의 오른팔을 주워들어 단면을 자신의 어깨에 붙였다.

그리고 흑마력을 이용해 파편과 동기화하던 것처럼 연결하자, 검은 불꽃이 피어올라 미라 같은 팔에 붙어있던 살점을 모두 태우고 뼈만 남겼다.

곧이어 「초회복」이 발동되어 내 몸과 데스나이트의 팔이 이어졌다.

[음··· 조금 어색한데?]

나는 새로 붙인 팔을 휙휙 돌리다가, 뼈를 조종하는 흑마법을 응용해 사이즈를 세심히 조절해서 균형을 맞췄다.

[이제 괜찮네! 감쪽같구만!]

팔뼈의 색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좋은 재질의 뼈를 사용해서인지 흑마력을 움직이는 데에도 이전의 팔을 사용하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제 전리품들을 수거하러 가 보실까?]

이 마을엔 나밖에 없었고, 아직 챙길 것들은 무수히 남아있다.

나는 마을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

아쉽게도 말콤에게 당한 언데드들은 대부분 회생 불가였다.

되살릴 수 있는 만큼만 살리고 부서진 마을을 둘러봤다.

곳곳에 언데드들이 박살 나 널브러져 있고, 하수인들로 보이는 시체들도 몇 구 보였다.

언데드들의 습격 직후 일당과 합류하지 못하고 당한 이들인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복구할 수 있는 언데드는 다시 회수하고, 하수인들의 시체는 새로운 언데드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스켈레톤 워리어인가.]

새롭게 합류하게 된 언데드들을 데리고, 근처의 건물들을 털어서 쓸 만한 물건들을 모으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새로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언데드로 만들었지만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 중앙에 도착해서야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전부 모여 있었구나.]

이곳에서 양측 간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주변에 널린 수백에 달하는 언데드의 잔해와, 한데 뭉쳐 몰살당한 흑마법사 일당.

말콤과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이후의 상황을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습격이 있자 서로 뭉쳐 골목을 끼고 싸우며 버틴 것 같았다.

게다가 흑마법사들은 다들 로브와 지팡이를 장비하고 있었다.

하수인들도 저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일이 벌어지고 나서 바로 전투를 준비하고 모인 것이리라.

[어··· 그런데 언데드 수가 좀 이상한데? 왜 이렇게 많아?]

그리고 중앙을 지키는 방향으로 서서 싸운 듯한 언데드들도 적지 않았다.

[아하, 이것들은 흑마법사들이 따로 가지고 있다가 소환한 것들이구나.]

자세히 보니 상위 언데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물량이 제법 되어서 버티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

그리고 좀 더 살펴보자, 하수인 중에서도 유독 강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 가장 많은 피해를 준 건 마을 입구를 지키던 중년 사내였다.

[마을 전체를 탐지했을 때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습격을 가했던 상위 언데드들 중 대부분은 이 사내에게 파괴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마법사와는 다르게 전사다 보니, 보유한 흑마력의 양과 전투력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리라.

[흑마력의 양만 보고 방심했다가 큰일 날 수도 있겠는걸···. 앞으로 주의해야겠어.]

다행히 이 양반은 제법 활약했지만, 말콤에 의해 흑마법사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가고 나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 제물이죠.]

수준이 낮아 보이는 자들부터 하나씩 언데드로 만들었다.

흑마법사는 스켈레톤 메이지가 되었고, 하수인들은 엘리트 스켈레톤이나 스켈레톤 워리어가 되었다.

몇몇 눈여겨봤던 하수인들은 스켈레톤 나이트가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언데드들을 만들다 보니 깨달은 것이, 이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이 엘리트 스켈레톤이라는 것이다.

난 이 마을에서 가장 최약체였구나.

'됐어, 지금은 내가 가장 강하니까. 이놈들은 이제부터 실컷 부려 먹어 주지.'

새로 만든 언데드들이 스켈레톤뿐인 데엔 특별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파편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를 이용해 언데드를 제작했는데, 말콤의 취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많이 제물로 바쳐진 것이 해골들이어서 제일 효율이 높았다.

또 자신이 스켈레톤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쪽 계통으로 만드는 게 확실히 편하기도 했고.

'다양성이 좀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마을의 문지기는 해골기사로 끝내기엔 아쉬워서 좀 더 공을 들였다.

어차피 말콤도 더 강한 개체로 만들 생각이니,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언데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르륵···]

쓰러진 시체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더니, 움푹 패여 덜렁거리던 목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몸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더니 떨어져 나간 머리를 주워들고 옆구리에 끼었다.

[오, 다행히 성공했구나.]

목 없는 기사, 듀라한이 탄생했다.

상위 언데드들이 대부분 쓸려나간 지금, 이 듀라한이 내가 가진 최고의 전력이었다.

다른 듀라한이 몇 기 더 있긴 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

물론 그것도 지금 이 순간까지 만이고, 순위는 금방 바뀔 것이다.

이제 대망의 말콤 차례였으니까.

그 전에 잠깐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가진 정보 중 마법사에게 적합한 언데드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말콤은 겨우 스켈레톤 메이지로 만들기 아깝다.

유령류는 애초에 영혼이 있어야 만들 수 있었고, 리치 또한 마찬가지.

'아니, 일반적으로 리치는 마법사가 타락해서 자발적으로 언데드화가 되어 만들어지는 거지. 애초에 나한테 정보도 없고.'

말콤이 괜히 나보고 반쪽짜리라며 성토한 게 아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자신의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된 데스나이트는 언데드 중에서도 최상위 개체로, 자아도 남아있는 데다가 그 전투력은 리치에 비해서도 그렇게 꿇리지 않았다.

내가 잠시나마 데리고 있던 녀석들은 파편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힘을 빼앗기고 자아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물론 마법사인 말콤을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는 없지만, 어떻게 비슷하게 모방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불사왕의 파편'에는 데스나이트에 대한 정보들이 있었고, 데미리치로 진화하고 나서 몇 번 살펴보기도 했으며 지금 내 오른팔도 데스나이트의 것이다.

[좋아, 해보자.]

자리를 깔고 앉아 말콤의 시체에 오른손을 올리고 집중했다.

지금까지 얻은 지식을 통해 「사악한 지혜」가 방법을 속삭여준다. 심장에 있는 '불사왕의 파편'이 힘을 빌려준다.

말콤의 몸에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뼈만 남기지 않았고, 수분만 증발한 듯 미라처럼 비쩍 말라갔다.

성공했다.

나는 서둘러 말콤의 잔존사념을 긁어모아 자아를 심었다.

파편화된 사념은 정보로서의 가치는 없었지만, 이렇게 하면 스스로 판단할 정도의 지능은 갖추게 될 것이다.

이내 말콤이 그 자리에서 스르륵 떠올라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푸른 귀화가 일렁이는 두 눈을 들어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오오··· 말한다!'

나 말고 말하는 언데드는 처음이어서 순간적으로 감격에 젖었다.

'자아가 있고, 말도 하니 이름이 있어야 하겠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이름은 말콤이다. 잘 부탁한다. 앞으로 말 잘 듣고, 알았지?]

괜히 다른 이름 지어줘 봤자 헷갈리기만 하고, 애초에 이 이름도 제피처럼 가명이었을 테니 상관없겠다 싶었다.

끄덕

자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대답하는 게 시원찮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나아질 것이다.

퍽!

안 그러면 나한테 맞을 테니까.

[대답해, 인마.]

[···예.]

그렇게 나는 모든 복수를 달성했고, 나를 죽였던 말콤은 '데스 위저드(Death Wizard)'가 되어 내 부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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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무리 (1)

마을을 샅샅이 뒤져 쓸 만한 것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정리했다.

물론 나는 손가락질만 하고, 일은 이백에 가까워진 내 부하들이 했다.

[흠, 화전민 마을이라도 흑마법사들이 차지한 곳이니 가진 게 많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 정도면 나름 괜찮군.]

개인 숙소와 소지품들을 탈탈 털어 모으고 나서 촌장 집을 뒤지다, 작전 중 사용한 공금으로 보이는 화폐들과 귀금속 등을 제법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동안 꽤 오래 머무르면서 많이 사용했을 텐데, 이놈들 이거 생각보다 부자였잖아.]

이곳 화폐의 가치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금화면 고액 화폐일 테니 많은 거겠지.

무엇보다 금괴도 몇 개 발견했고 말이다.

[···이거 진짜 금인가?]

평생 금을 만져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슬쩍 이를 벌려 금괴를 깨물어 봤다. 이빨 자국이 남은 걸 보니 진짜 금 맞겠지?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나는 다른 물품들을 살폈다.

하수인들이 사용하던 무기나 갑옷들은 언데드들에게 그대로 입혀서 쓰기로 했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던 마도구들이었다.

지팡이나 로브부터 시작해서 편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도구들도 많이 있었다.

나는 일단 깔끔해 보이는 로브를 하나 걸쳤다.

온도조절과 간단한 방어기능이 있는 로브로, 온도조절 기능이야 필요 없다지만 방어기능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언제까지 뼈밖에 없는 알몸으로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 이건 좀.]

로브를 입은 몸을 살피다 곧바로 다시 벗었다.

몸에 뼈밖에 없어서 그런지 영 맵시가 살지 않았다.

[요걸 요렇게 해서···.]

천 옷을 입고 위에 어깨 부분이 두툼한 가죽 갑옷을 착용한 후에 다시 로브를 걸쳤다.

[음, 이 정도면 아까보단 낫네.]

역시 남자는 어깨 빨 아니겠는가.

이어서 지팡이를 둘러보다가 그중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골랐다.

[야, 말콤. 이리 와 봐.]

[···네.]

[자, 여기. 이거 너 가져. 지금 가진 건 나한테 주고.]

그리고 말콤과 물물교환했다.

아무래도 말콤이 쓰던 게 제일 좋은 물건이지 않겠는가.

나는 눈에 보석이 박힌 해골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한번 찍었다.

발밑의 대지가 검게 물들며, 온갖 장비를 걸치고 전리품을 든 언데드들이 하나씩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마을을 둘러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이세계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 한 명 없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하나씩 눈에 담았다.

내가 묵었던 촌장 집의 물통과 땔감이 쌓여있는 곳을 지나고, 언데드가 되어 갇혀 있었던 마을회관으로 보이는 건물을 스쳤다.

화르르—

지나가는 곳마다 검은 불꽃이 일어나 마을을 불살랐다.

그렇게 화마를 등지고 마을 중심부에 도달했을 때, 나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완전히 파괴된 언데드들을 모아놓은 곳.

그 한편에는 원래의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한데 누워 있었다.

가장 약했던 좀비들은 전투 중에 대다수가 파괴되었다.

회생이 가능한 좀비들도 제법 있었지만, 나는 되살리지 않고 그대로 마을 중앙에 모아두었다.

마을 사람들의 시신이 모여 있는 곳의 중앙에 서 있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좀비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어어···]

격전 중에 여기저기가 손상되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제라프를 죽이는데 일조했던 청년 좀비.

나는 그와 잠시 시선을 맞추다 가볍게 묵례하고 돌아섰다.

이내 검은 불꽃이 모든 것을 불태웠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자 했던 그는 죽어서야 모든 복수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영면에 들었다.

화르르륵—!

마을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나는 이윽고 보수하는데 한 손 거들었던 목책을 지나 마을 입구로 다가갔다.

화재의 영향으로 이제는 흐릿해진 결계가 느껴졌다.

'외부인 감지, 흑마력 은폐, 비상시 방어기능까지···. 안쪽에 있던 결계들도 그렇고, 상당히 수준이 높은데?'

특히 흑마력 은폐 기능은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결계들이 필수적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불사왕의 파편'을 감추기 위해서였겠지.

'뭐, 이제는 나와 하나가 되었으니 아무 의미 없겠지만.'

그래도 쓸 만해 보여서 결계들을 보고 배운 대로 흑마력 은폐장을 구축하여 몸 주변에 둘렀다.

아무래도 흑마력은 터부시되는 모양이니, 감출 수 있으면 감추는 게 좋겠지.

나는 입구를 나서며 목책에도 불을 질렀다.

화륵— 화르륵—

이 마법으로 지핀 불꽃은 내가 원하는 곳만을 태울 것이고, 모든 것이 재가 된 후엔 자연적으로 사그라질 테니 산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 방문했던 마을을 떠나 동쪽의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우테리카 차원, 대륙의 가운데에 있는 성지.

그중에서도 중심부의 로셀리아 대신전의 예배실에서는 한 소녀가 주신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리던 은발의 소녀에게 은은한 서광이 머물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이 사그라지고 눈을 뜬 소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하게 신상에 절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예배실의 문을 나섰다.

"성녀님."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새하얀 법복을 입은 사제들이 다가와 소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마틴 주교님, 다른 분들에게 연락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어떤···."

소녀, 주신 교단의 성녀 리에스타는 굳은 표정으로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에서 불사왕 부활의 전조가 감지되었습니다."

"부···불사왕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곧바로 알려 회의를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경한 마틴 주교는 성녀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수백 년 전 대륙 전체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던 불사왕의 이름은 그만큼 커다란 사안이었다.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

성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졌다.

한스는 흑마력만 감추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겼었지만, 성녀의 능력은 그의 상상을 벗어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게 대륙 최대의 세력 중 하나가 한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

"음··· 오늘은 국밥이 땡기네."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하인즈는 그대로 인근의 국밥집으로 향했다.

메뉴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 콩나물국밥이랑 순대국밥, 소머리국밥 하나씩 주시구요. 육개장이랑 설렁탕은 포장해 주세요. 아! 수육 대짜도 부탁드립니다."

그냥 끌리는 대로 주문하면 되었으니까.

먹는 입이 늘어나고 대식하게 되면서 여러 종류를 골고루 맛보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

그래도 평소였다면 좀 자제를 했을 테지만, 오늘은 기분이 매우 좋았기에 내키는 대로 먹고 푸짐하게 포장해 왔다.

'음··· 요즘 금 시세가 어떻게 되더라.'

시국이 어지러워 금 시세가 제법 올랐던 것 같은데.

나는 하인즈가 포장해 온 국밥을 먹으며 인터넷을 살폈다.

대충 계산해 보자 속이 따뜻해지면서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이 집 국밥 맛있네.'

지금 한스는 숲을 헤치며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라 당장 금괴를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면 모든 일에 너그러워질 것 같았다.

팀 게임에서 트롤러를 만나도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으리라.

"아니 저 새끼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일로 오라고 좀!"

음··· 역시 그건 무리였나.

포장해 온 수육을 같이 집어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게임을 하는 하인즈를 보며 「마인드 허브」를 이용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정신 수양에도 도움이 되겠는데?'

다 먹은 그릇들을 정리하며 한스 쪽의 상황을 살폈다.

한스는 데미리치가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주변에 공포 효과를 발산하게 되었다.

지금은 흑마력을 은폐해서 효과가 반감되어 직접 마주했을 경우만 공포를 느끼게 되었지만, 그거로도 충분했는지 마수들의 습격이 많지는 않았다.

간간이 덤벼드는 마수들은 내 지루함을 덜어줄 뿐이었고.

'그놈들을 이용해 언데드들도 늘리고 말이지.'

한스가 마을을 떠나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진짜 동쪽에 도시가 있기는 한 건지, 역시 말콤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며 불신이 싹틀 무렵 불현듯 한 사실이 떠올랐다.

'나쁜 놈들 꽤 많이 처리했는데, 이 정도면 카르마도 제법 차지 않았을까?'

나름 암약하면서 음모를 꾸미던 놈들 아닌가. 수준도 제법 높았고.

쏠쏠한 소득을 기대하며 카르마 상점을 열었다.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6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792,208』

어느 정도 기대하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후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40만 좀 넘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대단한 놈들이었나? 아니면 내가 뭔가 다른 걸 했나?'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다른 이유가 없었다.

'뭐, 그만큼 나쁜 놈들이었나 보지. 그보다 고유스킬을 강화해 볼까?'

애초에 내가 한 것이라고는 불사왕의 심장을 빼앗고 흑마법사 놈들을 족친 것밖에 더 있는가.

"정신력이 기준치를 넘어섰습니다. 스킬「명경지수」를 획득합니다."

고유스킬을 강화하자 잠시간의 두통과 함께 새로운 스킬을 획득했다는 문구가 떠올랐다.

외부의 자극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정신 공격을 방어하는 스킬이었다.

'나한테는 「마인드 허브」가 있지만 이건 아바타에게만 적용되니까. 본체에도 적용이 가능한 스킬이 있으면 더 좋지.'

그리고 때마침 아바타를 하나 더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무래도 한스는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기 힘드니까. 하인즈를 보내고 새 아바타는 바깥 활동하는 데 쓰면 되겠다.'

한스가 사람이 지나다닌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

한스는 해골로 이루어진 거대한 샤벨 타이거를 타고 숲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숲을 말콤을 비롯한 언데드 몇 기와 헤쳐오길 한참, 도중에 덤벼든 마수들을 언데드로 만들어서 탈것으로 이용했다.

'타고 다니는 게 더 빠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폼 나니까!'

해골 마수를 타고 다니는 언데드 마법사라니, 게이머의 로망이 아닌가!

아예 대량으로 사냥해서 언데드 기승 병과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았으니···.

'불편해! 위에 올라타 있는 거 겁나 불편해!'

애초에 뼈밖에 없는 언데드 아닌가.

달릴 때마다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또 안장도 없이 매달려 있자니 정신이 없을 노릇이었다.

'발을 갈비뼈 사이에 끼워서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이건 생각해 볼 만한 문제군. 탑승용 언데드는 다른 종류로 만들어 봐야 하나?'

딴생각하면서 숲길을 이동하자, 점점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더니 이내 숲의 끝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곳에.]

해골늑대를 탄 말콤이 다가와 한곳을 손가락뼈로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성벽이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오오··· 진짜 도시가 있긴 했잖아? 말콤 그 노인네가 거짓말한 건 아니었네.]

중얼거리며 옆에서 해골늑대를 타고 있는 말콤을 슬쩍 쳐다보자, 녀석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며칠을 동쪽으로 이동해도 숲밖에 보이는 것이 없자, 그동안 틈만 날 때마다 말콤을 갈궈댔기 때문이다.

말콤에겐 생전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잘못한 게 사라지진 않는 법.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괴롭혀 주었다.

'뭐, 고통도 없고 감정도 희박한 언데드이니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겠지만.'

말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멀리 보이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이동하자. 너흰 들어가 있어.]

숲의 외곽부에서 한꺼번에 몰려다닐 이유도 없으니, 이제부턴 나 혼자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언데드인 몸으로 숲 밖으로 나갔다 들키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숲을 벗어나지 않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최대한 성벽 쪽으로 가깝게 이동했다.

한스는 성에 들어갈 순 없겠지만 일단 인근까지 이동한 후에 하인즈와 교대할 생각이었다.

아직 이계전송진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시간까지는 하루가 더 남아있었으니까.

***

-개체명 : 하인즈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튼튼함」

-특이 사항 : 한성현의 두 번째 아바타. 「튼튼함」의 영향으로 체력과 육체의 강도가 증가했다.

하인즈는 전송을 마치고 눈을 떴다.

한스가 발견한 성벽이 눈앞에 보였다.

제법 거리는 있지만 한 시간 정도만 걸어가면 충분한 거리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스를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오우야, 흉악한 거 보소···.'

한스가 언데드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다른 아바타와 마주 보는 것이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파괴력이 굉장했다.

고위 언데드 데미리치의 기본 능력인 공포의 아우라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불길함.

손에는 해골 지팡이를 쥔 채 위압적인 샤벨 타이거의 골격 위에 앉아, 파랗게 빛나는 안광으로 내려다보는 해골 마법사.

그야말로 환상의 시너지였다.

'한밤중에 마주치면 진짜 오줌 지리겠네.'

사실 「마인드 허브」와 「명경지수」가 없었다면 지금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런데 남들에겐 어떻게 보이겠는가?

진짜 마주치기만 해도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 있었다.

'한스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걸로.'

생각을 정리하고 각자의 위치로 헤어지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하인즈는 한스가 챙겨둔 이세계의 옷과 가죽 갑옷으로 갈아입고, 무기와 두둑한 여행경비를 챙겼다.

한스는 금괴와 귀금속을 비롯한 쓸 만한 마도구를 몇 개 챙겨 손에 들었다.

지구에서 물건들을 소환할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안전하게 직접 가져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하인즈는 홀로 성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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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무리 (2)

성문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문 앞에서 검문하는 경비병들.

까다롭게 구는 병사들에게 은근슬쩍 금전을 쥐여 주며 통과하면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을 기대했는데, 여긴 왜 이러냐?'

규모가 좀 작기는 해도, 성벽이 둘러쳐져 있고 건물들도 많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도시는 맞다.

'근데 뭐가 이렇게 휑하지?'

심지어 성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은 흘끔 한번 쳐다보기만 할 뿐, 문을 통과하는 내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기 여념이 없었다.

'일단 검문이 없는 건 다행인 일이지만.'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화전민 마을의 노인에게 둘러댔던 것처럼 대충 얼버무리는 게, 도시의 경비병에게까지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까다롭게 이것저것 따져 물으면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슬쩍 찔러주려고 은화도 몇 개 준비했었는데.'

아직 밝은데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는 주민이 별로 없었고 외지인인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그냥 도시 전체에 생기가 없었다.

'여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찝찝했지만 먼저 숙소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일단은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수집해야 했으니까.

'어디 보자···. 숙소가 어디에 있으려나. 저 사람한테 한번 물어볼까?'

인근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길을 물으려고 했을 때, 문득 길옆의 골목 안쪽이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에 문신을 한 근육질의 거한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꾀죄죄한 소녀.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소녀는 울먹거리는 얼굴로 거한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애원하고 있었다.

"사정은 아는데, 나도 오래는 못 기다린다는 거 알지? 3일 준다. 3일 내로 가져오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리고 소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말했다? 너희 두 명. 3일 안에 은화 두 개다."

그가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내뱉은 마지막 목소리에, 소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소녀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신의 볼을 찰싹 두드렸다.

그리고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흠··· 도시의 건달과 착취당하는 어린 소녀. 진부한 클리셰로군.'

중세 판타지 세계인만큼, 이 세계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내가 인권을 주장하며 날뛴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고,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툭—

그쪽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자니, 땅만 보고 비틀거리던 소녀가 골목을 빠져나오다 나와 몸이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거칠어진 피부와 상처 나고 부르튼 손.

공허한 눈동자와 은연중에 감도는 암울한 분위기는, 나에겐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사과를 마친 소녀는 나를 지나쳐 다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축 처진 어깨와 활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

괜스레 그 뒷모습이 눈에 밟혔다.

'흐음, 은화 두 개라.'

품 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뇌물용으로 따로 준비했던 돈주머니로, 안에는 다수의 동전과 대여섯 개의 은화가 들어있었다.

'이곳의 물가를 모르니 푸짐하게 넣었었는데. 생각보다 은화의 가치가 큰가 보군.'

검문도 없이 성문을 통과하면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타이밍 좋게 적당한 사용처가 생겼다.

'마침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는데.'

정보를 제공해 줄 현지인이면서 이쪽이 요구하는 바를 성실히 이행해 줄 사람.

그러면서 다른 수작을 부릴 위험성이 적은 인물.

눈앞에 딱 좋은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나.

'믿을 수 있을 진 아직 모르겠지만, 겨우 이 정도 돈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야.'

돈주머니에서 은화를 두 개 꺼내고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뭐, 이것도 인연이겠지. 어차피 뇌물로 쓰려고 했는데, 그것보단 이쪽이 더 효율적일 테고.'

나는 아직도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는 소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쪽이 기척을 내며 가까이 접근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흠흠··· 저기, 꼬마야?"

"······."

"저기~? 오빠가 잠깐 할 말이 있는데···."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어서, 좀 더 크게 말하며 어깨를 톡톡 두드렸는데···.

"히엑—! 자, 잘못했어요!"

놀라서 펄쩍 뛰어오른 소녀의 모습에 이쪽도 덩달아 놀라 눈을 껌벅거렸다.

"······."

"어, 저기··· 누구세요?"

네 고용주가 될 사람이다.

소녀의 상황이 안쓰럽다고 무작정 베풀 생각은 없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야말로 튼튼하고 오래가는 법이니까.

내가 이 도시에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지만, 지킬 건 지켜야지.

그러니까 이제 근로 조건을 협의해 보자.

***

하인즈는 도시에서 소녀를 만난 후, 그녀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숙소를 잡고 정보 수집을 시작했다.

현지 가이드가 옆에 있으니 모든 게 순조로웠다.

"자··· 그럼 나는 내 일을 시작해 볼까?"

금괴! 금괴를 수확할 차례였다.

이세계 여행도 좋지만, 일단은 본체인 나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먼저 아니겠는가.

'근데 한스를 그냥 소환하기는 좀 무섭단 말이지.'

하인즈로 마주했을 때 그 위용을 직접 깨닫지 않았나.

'그래도 「명경지수」도 있고. 잠깐이면 괜찮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시선이 마주치지 않게 눈을 감고 한스를 소환했다.

사아아···

소환과 동시에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눈앞에 불길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평생 사람들 앞에 못 나서겠는걸?]

한스의 시야로 선 채 굳어있는 내 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력을 공명시켜 울리는 그 목소리가 마치 지저에서 악마가 속삭이는 것처럼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래도 「명경지수」 덕분인지 점점 괜찮아지는 것 같네.'

처음 한스를 소환했을 때는 사정없이 흔들리던 스킬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점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후우, 이제 괜찮···."

고요해진 마음으로 눈을 뜨고 한스를 마주 본 순간,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예 몸을 돌려 화장실로 향했다.

"우리 당분간은 거리를 좀 두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다. 오줌이 마렵네."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스레 중얼거리며 한스와 거리를 벌렸다.

'물건이야 한스가 알아서 꺼내 놓으면 되는 거고.'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한스가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한쪽에 차곡차곡 내려놓았다.

금괴를 비롯한 귀금속과 마도구.

마도구는 보호 능력이 있는 물건들로 몇 개 챙겼다. 본체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니까.

혹시나 싶어 해골 지팡이를 들어 바닥을 가볍게 두들겨 보았으나.

[음, 역시 이 세계에서는 소환이 안 되는 건가.]

차원을 넘어 그쪽 세계의 언데드들을 소환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다.

완전히 한스 자신에게 귀속된 아공간을 만들어 그곳에 수납할 수 있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자신은 그런 마법을 알지 못했다.

'뭐, 앞으로 성장하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지.'

당장은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괜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삐비비빅— 철컥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와 좀 떨어진 거리에서 한스에게 익숙해지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운동하러 나갔던 아바타가 돌아왔다.

멋진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 심사숙고 중이라 아직 이름은 없었지만, 순간 속도가 증가하는 「가속」 스킬을 가진 쓸 만한 녀석이었다.

'시대상을 반영해서 나무 가면을 준비했는데, 이게 꽤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아바타의 손에는 한스에게 씌우기 위해 준비한 나무 가면이 하나 들려있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플라스틱 가면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니, 쓸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자신은 이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아바타를 움직여 한스의 얼굴에 가면을 가져다 대고, 뒤쪽의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혹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 질긴 가죽끈으로 여러 번 고정했다.

"오오··· 분위기 있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흉악해."

나는 한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짝짝 박수를 쳤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달리기를 하던 아바타의 눈에 문득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지금 한스가 쓰고 있는 저 양반 하회탈이었다.

로브를 눌러쓰고 여유롭게 웃는 듯한 눈구멍에서 피어나는 푸른 귀화, 열린 입 부분에서 얼핏 보이는 이빨들과 그 사이에서 안개처럼 새어 나오는 한기.

그야말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어, 가만. 이거 가면으로써 의미는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한스는 귀여운 핑크색 토끼 가면을 써도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로 보일 테니까.

일단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가면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했다.

'음··· 해골이 직접 보이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우길 수 있겠지.'

애써 한스의 위압적인 몰골을 외면하며 손가방을 가져와 금괴를 챙겨 넣었다.

'일단 가져온 금괴는 3kg인가. 일단은 이걸로도 충분하지.'

장기적으로는 서울 외곽에 주택을 사서 온갖 결계로 둘러버릴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었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 믿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일단 이 금괴는 그냥 정상적으로 판매하기로 했다.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물건들을 정리하다 발견했다고 하면 되겠지.

우리 집이 그렇게 못 사는 편도 아니었고, 요즘 시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이 정도 금을 판매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한 아바타가 문밖을 나서려다 잠깐 멈춰 섰다.

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다 보니 괜스레 걱정되었다.

"이대로 그냥 나가기는 좀 불안한데."

보호용 마도구를 챙겼는데도 뭔가 찝찝하다.

그렇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고민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금 매입소의 직원이 구십도 인사를 하며 나를 배웅했다.

예상했던 대로 판매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걱정했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러 금을 비싸게 매입한다던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어, 풍족해진 통장잔고를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져서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나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바닥의 그림자를 슬쩍 쳐다봤다.

다른 곳보다도 유독 더 새카맣게 보이는 그림자.

'직접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진 못하겠지만, 이렇게라도 쓸 수 있으니 다행이군.'

내 그림자에는 흑마법을 사용한 한스가 숨어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숨겨왔는데 역시 걱정이 과했던 것 같았다.

위이잉— 위이잉!

콰앙—!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있던 금 매입소에 보안문이 내려오더니, 잠시 후 벽이 터져 나갔다.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 거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쩍 뒤를 쳐다보았다.

2미터가 넘은 근육질의 늑대인간과 그에게 매달린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부서진 건물 구멍에서 빠져나와 골목길로 도망쳤다.

슬쩍 난장판이 된 건물 안쪽을 살펴보니 귀금속들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사건 직전에 나온 덕분에 직접 휘말리진 않았다.

하지만···.

'빌런, 이란 말이지···.'

각성한 이능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

물론 그런 빌런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가디언들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모든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가족들처럼.

나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변은 신고하고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저들은 가디언들이 알아서 추적할 것이고, 잡히면 이능 범죄로서 가중처벌을 받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다면···.

'잘 먹고 잘 살겠지. 하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한성현은 그렇게 사건 현장을 떠나 집으로 향했다.

***

"좋아 울프, 작전대로야. 이제 포탈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곳만 빠져나가면 끝이다!"

"크릉, 가디언이 오기까지 약 3분, 그 정도면 널널하지."

작전은 간단했다.

무력 담당인 '울프'가 경비들을 제압하고 금고와 보안장치를 파괴해 퇴로를 확보하면, 운반 담당인 '포터'가 귀금속들과 현금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울프에게 업힌다.

이후 탈출 담당인 '포탈'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 그의 이능을 통해 멀리 벗어나는 것으로 끝.

"카하핫— 가디언놈들 뒤늦게 와서 벙찐 얼굴을 봐야 하는 건데!"

"크흥! 됐다. 도착했으니 내려라."

그들은 곧 공사장 내부로 들어섰다.

포탈의 이능인 게이트는 생성하기 위한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현장에서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미리 장소를 구해 탈출 준비를 해둬야 했다.

타닷— 타악!

서둘러 안에 들어서자 기절한 채 구석에 밀려나 있는 공사장 인부들이 보였다.

그리고 게이트를 생성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포탈 또한 같이 기절해 있었다.

"어···? 뭐야?"

쓰러진 포탈의 앞에 서 있는 어둠 속의 '무언가'.

"크르르르···."

울프의 전신의 털이 곤두섰다.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며 몸을 낮추고 꼬리를 세웠다.

하지만 그 두 눈은 명백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으··· 저, 저게 뭐···?"

포터의 상태는 더 심했다. 사고가 뚝뚝 끊긴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한 손을 들어 그들을 가리켰다.

포터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덮쳐오는 그림자 사이에서 파랗게 빛나는 안광을 가진 웃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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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잔투 (1)

"이쪽이다! 빨리 움직여!"

한국 귀환자협회 소속의 가디언, 이창수는 팀원들을 이끌고 범인들이 도주한 곳을 추적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제 와서 이렇게 쫓아가 봤자 놈들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사건이 발생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온갖 이능을 가진 귀환자들이 도망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럼 어쩌자고? 놈들의 흔적이라도 잡아야 할 거 아냐! 벌써 세 번째다!"

늑대인간과 검은 복면의 2인조는 이번 범행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전에도 놈들을 추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사라져 허탕만 쳤었다.

'젠장, 놈들의 활동반경이 너무 넓어서 전부 대응할 수가 없어. 탈출을 돕는 공범도 있는 것 같고. 이번에도 대판 깨지겠군.'

언제나 그렇듯 지키는 쪽은 공격하는 쪽보다 훨씬 많은 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디언의 인력은 항상 부족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사소한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놈들의 뒤를 쫓던 중.

쿵—!

목적지였던 공사장 안쪽에서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서···선배님, 이 기운은···."

"큭, 따라와! 진입한다!"

소리는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저 안쪽에서 퍼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기운에서 무시무시한 악의가 느껴졌다.

이창수는 곧바로 공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구석에는 공사장 인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고, 중앙에는 복면을 쓴 남자와 평범해 보이는 여성이 기절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 만신창이가 된 채 처박혀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 늑대인간 한 마리.

현장을 둘러보고 이창수는 곧바로 팀원들에게 외쳤다.

"주변을 살펴!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근처에 있을 거다!"

상황은 명백했다.

누군가가 빌런들과 싸우고 사라졌다.

빌런들을 제압한 것을 보니 나쁜 마음은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현장에 남은 기운의 잔재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인데, 가능하면 신원은 파악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누군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팀장님, 빌런들을 제압 완료했습니다."

팀원 하나가 이능범죄자용 특수수갑을 채운 세 사람을 염동력으로 띄우며 다가왔다.

여자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지만, 정황상 도주를 담당하던 공범자였으리라.

'조사해 보면 다 나오니까.'

이능을 통한 심문에는 거짓말도 통하지 않는다.

만약을 대비해서 지원을 요청해,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도 가디언이 상주하는 관할의 병원으로 옮겼다.

공범이 피해자인 척 섞여 있더라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범인들도 잡았고, 걱정하던 문제는 해결됐는데···.'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아직까지도 공간에 진득하게 남아있는 사악한 기운.

'저놈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길 바라야겠군.'

직접 마주친 놈들이니 뭐라도 알 수 있으리라.

***

나는 소환 해제했던 한스를 다시 불러냈다.

슬슬 익숙해지는지 직접 마주하고도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한성현은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한스는 다르지. 내가 직접 드러날 일도 없고.'

집과도 거리가 있었고, 부담할 위험도 없다. 빌런 놈들을 엿 먹일 힘도 있다.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생각보다 강했어.'

탈출 수단으로 보였던 게이트를 열어놓고 방심하던 여자와 비전투원으로 보였던 복면 남자는 쉽게 제압했지만, 늑대인간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했다.

다행히 가디언들이 도착하기 전에 쓰러뜨리고 소환 해제로 모습을 감출 수 있었지만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공포 효과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대항해 오다니. 하긴 나름의 수라장을 이겨내고 돌아온 귀환자이니 당연하려나.'

물론 모든 귀환자들이 그렇진 않을 것이다.

초창기에 아무것도 없이 이세계로 전송된 이들에 비해 최근의 귀환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대비했고, 안정적으로 카르마를 수급하고 돌아오는 이들 또한 많았다.

그 때문에 귀환하는데 10년 정도 걸렸던 초기에 비해, 요즘엔 빠르면 5년 만에 돌아오는 귀환자도 있었다.

물론 카르마를 강해지는 데 사용하고 더 오래 있다가 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러고도 평균 귀환율 20%라는 게 공포지만. 심지어 이것도 초기에 비해 많이 오른 수치라니.'

어쨌든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놈들이 빼돌린 귀금속들도 가디언 측에서 알아서 회수하고 처벌할 것이다.

아예 죽여서 목격자를 없애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놈들도 살인은 하지 않은 것 같고. 괜히 함부로 막 죽이고 다니면 한스도 빌런으로 취급받을 거야.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돼.'

가끔 이렇게 빌런들을 때려잡는 활동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 도움도 될 것 같고, 스트레스 해소도 되었으니까.

***

며칠간 하인즈는 디아나의 도움을 받아 도시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디아나는 처음 도시에 들어섰을 때 만난 12살 소녀로, 평생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가이드로는 최적의 인재지. 힘들게 살아서인지 아는 것도 많고.'

은화 두 개의 대가로, 자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매일 도시의 가이드를 해 줄 것.

그것이 디아나와 맺은 계약의 내용이었다.

상황이 급한 것을 아는 만큼, 은화 두 개는 선금으로 지급했다.

떼먹힐 위험을 감수하고 나름의 호의를 보인 것이었는데, 다행히 디아나는 지금까지 성실히 계약에 임하고 있었다.

첫날은 꼭두새벽부터 내가 머무는 숙소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이후엔 점심 식사 시간에 약속을 잡아, 함께 밥을 먹고 도시를 순회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까진 그랬는데···.'

그래, 어제까지는.

나는 숙소 1층의 테이블에 앉아 디아나를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을 어길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 잘 지키기도 했고. 무슨 일이 생겼나?'

뭐, 지금까지 얻은 도움으로도 고용한 보람은 충분했으니까.

혹시 몰라 숙소의 주인장에게 말을 남기고, 홀로 도시의 상가로 향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아잔투'로 대륙 서쪽의 탈리아 왕국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농사도 짓고 밖의 숲에서 사냥과 채집도 하는 그런 평범한 도시라고 한다.

'치안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뭔가에 잔뜩 위축된 것 같았다.

디아나도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큰길로만 다니고 뒷골목으로는 얼씬도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할 정도.

그리고 되도록 빨리 도시를 떠나는 것이 좋다고 종용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좋겠어. 동쪽으로 더 가면 다른 도시가 있다니까 그쪽에서···.'

그렇게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급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 형씨, 잠깐 얘기 좀 하지."

골목길 안쪽에서 목덜미에 문신한 덩치 여럿이 이쪽을 보며 손을 까딱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나쁜 예감은 항상···.'

일단 놈들의 말에 따라 순순히 다가갔다.

어차피 곧 떠날 생각이었으니 조용히 해결할 수 있으면 하고, 안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말이지. 우리가 이쪽 상가를 지키고 있는데 말이야,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다 보니까···."

들어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알아서 뇌물을 바치라는 거였으니까.

"아하하, 그러셨구나. 여기, 약소하지만 치안을 지키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성의이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시지요."

"음흠흠··· 이 양반 이거 아주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구만. 이건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도록 하지."

그래서 그냥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며 적당히 쥐여 주고 마무리했다.

사실 이럴 때 사용하려고 돈주머니도 따로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치안이 좋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네.'

"형님, 그래서 그 꼬맹이는 왜···."

"왜겠냐? 그쪽에서 준비하라니까 하는 거지.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멀어져 가는 덩치들의 대화가 들려왔지만, 내 관심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다음 도시까지 동쪽으로 도보로 일주일. 평범한 사람들 기준일 테니 난 좀 더 짧겠지만···, 말이나 마차를 구해 봐야 하나?'

이세계에 왔으면 마차 정도는 타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여행에 대해 생각하며 보존식량을 구하기 위해 식료품점을 찾을 때였다.

굉장히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혹시 보시면 꼭 좀 말씀해 주세요!"

"그려, 내 기억해 두지,"

상점 주인과 이야기를 마치고 고개를 꾸벅이더니, 이쪽 방향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디아나.

뭐가 그리 급한지 이쪽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기에 뒷덜미를 잡아챘다.

"꺅-! 뭐, 뭐에요! 놔주세요!"

누가 보면 이쪽이 나쁜 놈인 줄 알겠다.

나는 얼른 손을 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야, 하인즈! 약속 시간 한참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더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아, 아저씨?"

그제야 이쪽을 확인했는지,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앗···! 그, 약속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가서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응, 그래 보이네. 그건 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 제, 제 동생 아론이···, 그러니까···."

어물거리며 뭔가를 말하던 디아나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아침에 밥 챙겨주고···, 그래서 잠깐 씻으라고···. 무, 물이 없거든요. 그래서 밖에 나갔는데···."

그리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목이 멘 소리로 횡설수설했다.

'어, 이거 상당히 위험한 장면 아닌가?'

건장한 청년이 어린 소녀를 겁박하고,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울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 청년이었다.

나는 황급히 거리를 벌리고 떨어졌다.

디아나는 여전히 파들거리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자, 잠깐!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하지 않을래? 그래, 심호흡하고. 이야기는 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사실, 나는 아이에게 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