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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로셀리아 대신전의 깊은 곳에 있는 한 개인 수련장.

우우웅—

그 한복판에 선 하인리히의 손에서 성검이 부드럽게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검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이 서서히 증폭되다가 끝내 넘쳐흐르며 그것을 쥔 이의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건 언제 겪어도 대단하단 말이야.'

「축복 : 성검」을 얻으며 다룰 수 있게 된 성검의 기운, 일명 '성검기'는 신성력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한층 공격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무기에 적용하면 절삭력과 파괴력 등을 극한으로 증가시키고, 몸에 두르면 신체 능력과 육체 강도를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마를 멸하고 악을 처단해 힘으로 세상을 지키기 위해 벼려진 성검다운 능력이었으나, 그 뛰어난 성능과는 별개로 기운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 까다로운 과정이 필수였는데—.

바로 성검과의 교감이었다.

우우웅—

검이 재차 진동하며 그 감정이 하인리히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뚜렷한 의사 표현이라기보다는 원초적인 감정이 기반 된 의지였지만, 그것은 분명 자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성검의 시련을 주관했을 때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때는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에고 소드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어쩌면 주인을 선정하기 위한 시련에 한정한다는 조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성검을 뽑고 주인으로 인정받고 나니 지능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똑똑한 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

부우우웅—!

그때, 성검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교감하기 위해 열어뒀던 통로를 통해 살짝 생각이 새어 나간 것 같았다.

-'아냐, 아냐. 그만큼 친근하고 믿음직하다는 뜻이지! 정말 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니야, 로지아.'

하인리히는 급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성검을 타일렀다.

'로지아'는 초대 사용자가 붙인 성검의 애칭이었는데, 하인리히도 선배를 존중하는 의미로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로지아 성투법」이란 스킬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그 이상 가는 이름이 없기도 했고.

-'그래, 착하지? 역시 우리 로지아는 언제나 믿음직스럽다니까? 아유 귀여워.'

우웅—

서서히 잠잠해지는 성검의 진동.

잘 생각해 보니 역시 강아지보단 대여섯 살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왔을 텐데도 이만큼 순수한 의지라니, 이것도 성검이라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그렇게 마음으로 교감하는 와중에도 하인리히가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당연히 자신의 비밀이 성검에게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나름 수를 써 두긴 했는데, 그래도 최대한 위화감이 없게 하려면 매사 조심하는 게 좋겠지.'

숙련도가 절정에 오른 「마인드 허브」와 「페르소나」를 연계해, 아예 '내'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이 '하인리히'에게 역류하지 않도록 설정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좀 더 완벽하게 '하인리히'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렇게 사고 공정을 여러 단계로 분할하면 정신력의 소모도 커지지만, 이번에 고유스킬을 강화하며 상당한 여유분이 생겨 한결 편하게 적용할 수 있었다.

'주신님도 이미 용인하고 있는 마당에 성검이 알아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한데. ···아니다, 역시 그냥 이대로 가는 게 좋겠어.'

교감을 통해 성검의 순수함을 느끼다 보니 이제는 차마 이 마음을 배신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탄생 의의부터가 사악한 존재와 싸우기 위함이고, 그간 수많은 마(魔)와 맞서 싸워왔을 텐데.

하필 이번에 주인으로 인정한 용사가 마왕과 한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순수한 아이는 지켜줘야 하는 법. 예로부터 모르는 게 약이라는 성현들의 가르침이 있었지.'

굳이 불확정 요소를 끼어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철저히 통제된 '하인리히의 사고(思考)'와 성검이 교감을 마치고 눈을 뜨자.

체내에 흐르는 신성력과 날카로운 기세의 성검기가 조화를 이루며 그의 몸에서 노도와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계속해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패도적인 기운.

그 성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폭력적인 존재감에 기어코 신성 결계로 보호되는 개인 수련장이 흔들릴 지경에 이르러서야···.

"후우—."

그는 천천히 기세를 가라앉히고 심호흡과 함께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이제 제법 능숙해진 것 같군.'

성검의 시련을 통과하며 짧은 시간에 워낙 급격하게 강해진지라, 그걸 온전히 수습하기 위해선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물며 그 직후에 내려진 「대축복 : 빛의 기사」는 그의 격 자체를 억지로 끌어올릴 정도였지 않은가.

다행히 초기 스킬이었던 「무골」 덕분에 육체를 사용하는 방면은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지만, 아직도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가벼운 오전 수련을 마친 하인리히는 가볍게 몸을 씻고 중앙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가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는데.

"음,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그 성녀가 이곳에 있었다.

언제나처럼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채로.

"앗! 안녕하세요, 하인리히 님? 좋은 아침이네요!"

슬슬 정오에 가까워져 가는 시간이건만.

그녀가 언제부터 화단에 나와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침부터 나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곳에 있었겠지.

"성녀님. 혹시 몰라 말씀드립니다만, 곧 정오 예배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정말요?"

"예, 다행히 아직 늦진 않았···."

하지만 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성녀가 급히 중앙 신전의 예배당으로 전력 질주해 사라졌다.

'한동안 일에 치여 살았던 부작용인가. 요즘 유독 허술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 같은데.'

최근 성녀는 정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 넘치는 신성력을 작은 벌레들에게 쏟아붓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인 듯해 말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 작은 벌레들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날뛰던 광경은··· 역시 떠올리고 싶지 않네.'

하인리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천천히 예배당으로 향했다.

지금 성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녀는 마침내 모든 업무에서 해방되어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남은 것은 촉박한 일정에 맞춰 실무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뿐.

그렇게 불사왕에게 맞설 '대륙 정상 회의'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131

막간 (3)

정오 예배가 끝난 직후.

하인리히는 성녀가 뒷정리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업무가 끝났다고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 합류해 함께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서···.

그녀가 겸연쩍은 듯한 웃음과 함께 그에게 감사를 표해왔다.

"아— 하인리히 님, 아까는 감사했어요! 오늘은 미리 가서 준비할 게 있어서 좀 일찍 나왔는데, 화단 앞을 지나다 저도 모르게··· 아핫."

시간이 지체될 것까지 감안하고 아침부터 나왔지만, 결국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화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성녀님은 그동안 한 번도 늦으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제시간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아마 자신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정말 촉박한 시간이 되었다면 그녀 스스로 알아차렸든, 다른 사제가 찾아오든 해서 예배에 늦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최근 화단에 죽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이 대신전 내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으음··· 네에···."

하지만 그의 위로에도 그녀는 갑자기 뭔가가 불만스러워진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그에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나 그가 고민하고 있는데.

"···저번에 제가 공적인 자리가 아닐 때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었는데."

그녀가 먼저 소심한 말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기의 작은 진동마저 감지할 수 있게 된 하인리히가 이 지근거리에서 그 목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런 말을 했었지. 성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나.'

하지만 워낙 가볍게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기도 했고, 그동안 바쁜 일상에 치이며 자연스럽게 잊혔던 사실이었다.

최근 둘 다 업무에 매진하게 되면서 관련한 모든 만남이 공적인 자리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 자기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성녀는 주신교단의 최고위 지도층인 만큼, 당연히 그녀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그저 '성녀님'이라고 부를 뿐.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인 그녀는 그 호칭만으로도 오롯이 존재했으니,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소개하는 '리에스타 세인트 하티아누스'라는 이름은 그저 외부에 소개할 때 잠깐 쓰이는 정도에 불과해진 것이다.

그래도 전에는 성녀와 유일하게 대등한 위치에 있던 교황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나···.

'그가 병상에 누우면서 이젠 그것도 힘들어졌지.'

그런 와중에 등장한 것이 바로 새로운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였다.

"하하핫— 그동안 성녀님이란 호칭이 입에 붙어서인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군요.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리에스타 님."

물론 이름을 부른다고 곧바로 존칭까지 생략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동시에 항상 자체 발광하는 후광에 어우러진 그 미소는, 그녀의 반짝이는 외모와 어우러져 주변에 화사함을 풍기기 시작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마치 혼자만 조명을 받는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저런 후광이 없는데.'

하인리히는 그렇게 속으로 감탄과 불평을 토했지만, 사실 남들이 보기엔 그의 모습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엇? 예를 갖춰! 저기 성녀님과 성자님이 가신다."

"으음, 성자님은 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군. 직접 발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 존재감이라니. 거기다 저 아우라는···."

대신전의 경비를 맡은 광휘수호의 성기사들이 멀리서 지나가는 그들에게 예를 표하며 작게 속삭였다.

물결치듯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과 태양처럼 빛나는 금안을 가진 두 남녀.

그 외모 또한 감탄이 나올 정도인 그들은 딱히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어우러지고 있었다.

물론 둘이 받은 '대축복'이 다르기 때문인지 기본적으로 발산하는 후광에 차이가 있긴 했다.

머리 쪽에 전구를 밝힌 것처럼 빛나는 리에스타와는 달리, 하인리히는 전신에서 투명한 불꽃 같은 아우라를 피워 올리고 있었으니.

투명한 그것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지만, 따로 신성력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뿜어지는 그 아우라는 사방에 그의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나 경로를 비춰주는 등대와도 같아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공간에서조차 퇴색되는 일 없이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그 어떤 짙은 심연도 그의 존재를 묻어버리지는 못 하리라.

그것이 '용사'였으니까.

"그래서 정상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해야 할···."

"아, 그건 이단심문관 쪽에 이미 부탁한···."

성녀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집무실로 향하는 하인리히.

그렇게 모두의 희망을 짊어진 용사 겸 성자는 오늘도 대륙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

그리고 용사가 열심히 노력하는 동안.

모두의 원망을 짊어진 마왕겸 불사왕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불사왕이시여!]

[제 영혼을 왕께 바치겠나이다—.]

심연이 열리며 경계가 약해진 여파로 수많은 언데드가 대륙 전역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꼭 불사의 군대 지휘관 출신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하위 언데드를 통솔하던 중간 간부들이 다수 있었다.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 불멸의 마법사 리치, 목 없는 처형자 듀라한 나이트 등···.

하나같이 그가 처음으로 만든 자아를 가진 언데드, '데스 위저드 말콤'과 비슷한 수준의 인재들이었다.

대부분 경계에서 빠져나온 직후, 자의적 판단으로 안전을 도모하며 상황을 살피던 이들.

그들이 하나둘 한스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며 군대의 규모가 점차 커져 나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만족스럽군. 역시 이 몸께서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닌 보람이 있어.'

아무래도 최고의 탐지력과 기동력을 가진 게 불사왕 본인이다 보니, 그가 직접 움직이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모양이 빠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분주히 움직인 끝에, 마침내 대륙 서부에 등장했던 언데드들을 모조리 수습하고 이제 중앙 쪽으로 발을 뻗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서둘렀는데도 아쉽게 회수하지 못한 녀석들이 제법 된단 말이야. 가장 먼저 손을 쓴 서부 지역도 이런데 다른 지역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당연하지만, 이 세계에 자리한 여러 세력은 언데드들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언데드 측의 습격, 인간 측의 토벌, 예상치 못한 불시의 조우 등 서로 간에 온갖 충돌이 이어졌고···.

결국 불사의 군대에 합류하지 못하고 희생된 수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지휘관 출신을 더 건질 수 있었던 건 꽤 쏠쏠한 수확이다.'

불사의 군대 고위 간부는 지난 전쟁에서 그 수가 크게 줄어 남은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

'며칠 전에 받아들였던 녀석 이름이 파고스였지.'

얼마 전에 전 서열 20위권이었던 유령체 언데드, 드레드 팬텀(Dread Phantom) 파고스를 새로 휘하에 거둘 수 있었다.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한 밴시 퀸 올리비아와 달리 그는 마치 검은 안개가 뭉친 것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뚜렷한 형체를 갖춘 것은 상체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크기가 3미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불사왕께 영광을— 이 세상에 공포를 퍼뜨리는 데에— 제가 앞장서겠나이다—.]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머리에서 한 쌍의 붉은 안광을 빛내는 파고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악령 그 자체.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마력이 가득 깃들어있었지만, 사실 그건 모든 고위 언데드가 마찬가지였으니 이제와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찾은 녀석이 구울 로드(Ghoul Lord)인···.'

[피오나—.]

한스가 나직이 그 이름을 부르자, 막 종속되어 그의 앞에 부복했던 평범한 인상의 여인이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이전 불사의 군대 서열은 약 30위권.

움직이는 시체라는 점만 동일할 뿐, 모든 면에서 좀비의 상위 호환인 구울은 시체를 파먹고 강해지는 특성이 있었는데.

끝없이 사냥감을 먹어 치워 결국 그 구울의 정점에 오른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겉보기엔 인간과 크게 달라 보이진 않는군.'

그리고 시체를 포식해 육체를 재생할 수 있는 구울의 특성상, 그녀는 언데드임에도 부패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얼핏 봐선 그냥 평범한 인간 여성처럼 보일 정도로.

물론 몸에서 나는 악취라던가 풀린 동공과 메마른 점막 등 자세히 보면 극심한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다른 언데드들에 비해선 상당히 양호한 상태였다.

'그 입 안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지.'

귀밑까지 찢어지는 입꼬리와 악어처럼 크게 벌어지는 턱, 그 안 가득 들어찬 톱니 같은 이빨들.

포식하는 언데드의 대명사답게 그녀는 할리에게도 뒤지지 않는 흉악한 구강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충성을···.]

하지만 피오나는 자기 입 안을 내보이기 꺼려지는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과묵한 태도를 보였다.

마력을 공명시켜 말하는 언데드의 특성상 직접 입을 열 필요는 없는데도.

'아마 인간 시절의 기억이 습관처럼 굳어져서겠지.'

그런 예민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것이 자상한 상사의 덕목.

사회생활 한 번 해본 적 없지만, 자신을 이상적인 리더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한스는 그녀를 포함한 부하들의 태도를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시킨 일만 제대로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렇다고 감히 불사왕 앞에서 방종하게 구는 녀석은 본 적이 없지만.'

여하튼 그렇게 여러 인재가 충원된 덕에 불사의 군대는 여러 방면으로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진 만큼, 은밀히 움직이는 것도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어지간한 세력에서는 그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태겠지.

'다행히 아직까진 큰 충돌이 벌어지지 않고 있긴 한데.'

그들 입장에서는 괜히 선공을 했다가, 비교적 얌전한 행보를 보이는 불사의 군대를 쓸데없이 자극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을 것이고···.

먼저 단독으로 움직였다가 그로 인해 자신들만 입을 피해를 저어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오래가지 못하겠지.'

불사왕과 불사의 군대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대륙 정상 회의'.

그것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

그곳에서 앞으로의 대응 방안이 정해지고 나면, 아마 어떻게든 결판이 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방극장' 작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리라.

***

사전 조율에서 시간이 오래 걸렸던 만큼, 일단 일정이 확정되자 '대륙 정상 회의'의 준비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어차피 회의장을 비롯한 어지간한 준비는 이번 일의 주최자인 주신교단 측에서 한다지만, 물 흐르듯 진행되는 상황을 보니 이렇게 쉽게 성사될 일이 그간 왜 그렇게 지지부진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마 다른 이들도 느낀 거겠지.'

하인리히는 회의가 벌어질 장소를 가볍게 둘러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간 위기감도 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하려던 자들.

그들도 자기가 지금처럼 계속 이기적으로 굴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만큼 현 대륙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광기 사태는 진정되기는커녕 점차 격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란과 테러는 그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지경이었다.

특히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지고 북부 산맥 대부분과 맞닿은 아제리온 제국은 물론, 제국의 북쪽에 자리해 아예 삼면이 북부 산맥으로 감싸인 로한 공국은 하루하루가 전쟁의 연속일 정도였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대륙 정상 회의든 뭐든 빨리 진행해서 지원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제국 측에서도 이 일을 성사하는 데 주변에 상당한 압력을 행사했을 테고.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회의가 드디어 열리는군.'

로셀리아 대신전에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만 잡히면 바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덕분에 회의 날짜를 최대한 빨리 앞당길 수 있었고, 신전의 게이트가 있는 이상 이동 거리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로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개최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을 때.

대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각 세력의 사절단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132

막간 (4)

고요하게 침잠한 마음속에서, 세상의 고동이 느껴진다.

두근두근—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선선하게 부는 바람, 포근하게 감싸 안는 대지,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식물 등.

모든 자연물에서 맥동이 느껴지고, 그것은 자신과 동화되어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수줍게 피어오른 한 떨기 꽃송이도, 그것을 장난스레 간질거리고 지나가는 잔잔한 순풍도, 그 옆에서 그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도.

내 안에서 그것은 다른 객체가 아니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바람이 분다. 지금은 내가 바람이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지금은 내가 나무였다.

강물에 떨어진 나뭇잎이 아래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강이었다.

나는 대자연 그 자체였으며—.

-내가 곧 세상이었다.

"으허엇—? 쓰읍!"

나무 그늘에 누워 꿀잠을 자던 해리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며 입가의 침을 빨아들였다.

'아··· 잠깐 누워 쉰다는 게 그사이 잠들어 버렸구나. 그런데 이게 무슨 개꿈이야?'

전신에서 느껴지는 나른한 탈력감에 그는 맹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잠은 계속해서 자 왔고 꿈도 가끔 꾸기는 했지만, 이런 이상한 느낌의 꿈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개꿈만은 아닌 듯했는데···.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스킬「자연 친화」가 특수스킬「자연 동화」로 진화합니다."

잠에서 깬 그의 눈앞에 난데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음?"

당황한 해리스는 그 자리에서 눈만 끔벅거렸다.

물론 그간 꾸준히 수련은 해 왔다지만, 설마 낮잠을 자다가 스킬이 진화하다니.

타이밍이 공교롭기 그지없었다.

'하긴, 드라샤에 온 직후 줄곧 세계수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니 슬슬 성장할 때도 됐지.'

다만 이렇게 스킬이 진화한 것에도 소소한 부작용은 있었는데.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도 귀찮아. 안 그래도 귀찮은데 더욱더 격렬하게 귀찮아···!'

자연으로의 몰입이 전보다 훨씬 더 심해지면서 나태함도 그만큼 증가한 것이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친화력과 자연력이 급증하긴 했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이는 일상생활조차 이어갈 수 없을 수준이었다.

만약 해리스가 아닌 다른 이였다면, 자기가 강해진 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대로 자연의 품에 안겨 하나가 되는 것을 선택했을 정도로.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자연사(自然死)인가?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끄응—."

해리스는 당장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워 대지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뚱이의 욕구를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정신력이 소폭 증가하긴 했지만, 아직 이 정도는 다른 아바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사왕의 심장과 심연의 죽음을 품고 있는 한스.

온갖 차원의 흡혈귀 피를 빨아들인 하인즈 2세.

주신과의 통로를 상시 유지 중인 하인리히.

괴물의 유전자와 심연의 광기를 받아들인 할리.

소모량만 따지면 이 다른 개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압도적이었으니까.

그저 신경 써야 할 점이 약간 늘었을 뿐이었다.

'어디 보자, 아직 집합 시간까진 제법 여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이번에 얻은 걸 시험해 볼까?'

해리스는 슬쩍 시간을 가늠하며 왼손에 쥐고 있던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 '테미스'를 추켜올렸다.

이 숲은 드라샤 아카데미에 포함된 수련 부지로, 조금 전까지 그가 계속 사용하던 곳이었으니 훈련을 이어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잠깐 쉰다고 누웠다가 깜빡 잠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스킬이 성장했으니 절대 농땡이를 피운 건 아니었다.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성과로 증명하리라!

"후우—."

해리스의 심호흡과 함께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광룡의 심장」을 통해 할리가 강제로 일으켰던 폭풍과는 달리, 이 바람은 조금의 강제성도 없이 발생한 자연 현상이었다.

자연 현상이라 해도 과학 이론과는 한참 동떨어졌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에 속해 자연 그 자체인 존재들이 있었으니.

파지직! 화르륵—!

휘이잉! 우우웅—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이 바로 그들이었다.

번개의 정령 와트, 불의 정령 칼리, 바람의 정령 파스칼, 소리의 정령 데시벨.

그와 계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빠르게 성장해, 기어코 전부 중급에까지 오른 사랑스러운 그의 동반자들이었다.

'그럼, 최대 출력으로 가 보자.'

힘을 끌어올리자 서서히 자연력이 해리스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령술」로 이끌려 나온 정령들이 「세계수의 아이」로 한껏 증폭된 그의 기운을 머금고 존재감을 부풀려 나갔다.

여기까지는 이전과 같았지만···.

우우웅—

그의 오른손이 빈 활시위를 잡아당기자, 주변의 자연력이 빨려 들어가 뭉치며 한 대의 화살이 빚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전과는 달리 매우 빠르고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주변의 기운을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힘인가.'

「자연 동화」의 힘을 빌리자 마치 한계는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자연력이 응집하기 시작했지만, 겨우 스킬 하나로 정말 한계가 없어졌을 리 없었다.

"해리—! 스···?"

그때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익숙한 기척이었던 만큼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지금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을 여유가 없었으니까.

끌어모으고, 뭉치고, 기존 화살에 합친다.

그 단순한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기운을 응집하는 것이 조금씩 버거워져 슬슬 포기하려던 찰나.

왼손에 들린 테미스에서 퍼져 나온 부드러운 기운이 해리스와 주변의 기운을 한데 어우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오른 손목의 '하이 엘프의 팔찌'까지 은은한 빛을 내며 거기에 동조했다.

'···이 정도면 됐다!'

처음 예상 이상으로 밀집된 자연력의 화살.

그는 그것에 마지막 공정을 추가했다.

파지지직!

화살대에 깃드는 번개의 정령.

화르륵—

화살촉에 깃드는 불의 정령.

휘우우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바람의 정령과 소리의 정령까지.

"~~♪"

거기에 더해, 해리스의 가벼운 콧노래 소리와 함께 「요정 사법」으로 쏘아진 화살이—.

——!

어떤 소음도 없이, 빛살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것이 족히 1킬로미터는 넘는 과녁에 명중한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푸화아악—!

뒤늦게 휘몰아친 후폭풍이 수풀과 그의 머리칼을 어지럽혔지만, 해리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이는 눈으로 먼 곳의 과녁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 생각 이상인데? 스킬만으론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역시 아이템빨이 좋긴 좋아?'

거기다 바람의 정령을 공격력 증폭에 이용하지 않고 공기의 유동을 억제하는 쪽으로 응용하면, 좀 더 은밀하고 완벽한 저격까지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고수끼리의 싸움에선 기운의 유동을 감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지만 그것도 「자연 동화」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해리스가 완전히 초토화된 먼 거리의 마법 과녁을 바라보며 새로운 힘의 효율성에 대해 판단하고 있던 차.

"해리스! 방금 그건 뭔가요! 어떻게 한 거죠?"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가 그의 감상을 일깨웠다.

"언제 또 이렇게 강해진 거예요! 웬일로 안 자고 훈련하고 있었다 싶더니!"

아까 기운을 통제하는 데 전념하느라 무시했던 이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조잘거리고 있었다.

슬쩍 활을 내린 해리스가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집합에 늦지 않으려면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한다고요?"

청발에 청안을 한 엘프 여성, 샤피론 실베스티.

그녀가 평소처럼 동그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아니, 그냥 얼굴 빼고 전부 평소와 다르잖아?'

익숙한 상대의 익숙하지 않은 모습.

튼튼하면서 편안해 보이는 여행복과 신발, 활동성을 위해 단단히 올려 묶은 머리칼, 등의 배낭과 몸 곳곳에 달린 장비들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여행자 복장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음, 샤피론 양? 필요한 물자들은 사절단 차원에서 준비할 테니, 개인 소지품 정도만 챙기면 된다고 들었는데. 그건 대체···."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츠의 앞뒤 굽은 물론 몸 곳곳에 금속이 덧대진 복장은 전투용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고.

허리는 물론 어깨와 다리 등 곳곳에 휘감긴 벨트에는 이런저런 물건과 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이 불룩한 걸 보니, 옷에 숨겨진 비밀 주머니도 상당히 많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물건을 가득 채워 넣어 전혀 비밀이 아니게 된 건 차치하더라도.

'거기다 저 배낭, 아공간 마도구인가? 심지어 제법 대용량인 것 같은데, 그걸 메고도 짐이 저렇게 많다고?'

그 가냘픈 체구를 완전히 덮고도 남을 커다란 배낭이 그녀의 등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마치 오지 탐사라도 가는 것처럼 완전 무장한 모습.

해리스는 자신의 옆에 놓인 단출한 배낭 하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녀와 너무나 차이가 나는, 간단한 옷가지와 몇몇 여행 물품이 들어있는 것이 전부인 가벼운 짐이었다.

"후후후, 무슨 소릴 하시는 거죠?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항상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고 했던 건 해리스잖아요."

샤피론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코밑을 슥 훔쳤다.

함께 사절단에 포함된 후, 그녀가 이온 대륙에 대한 조언을 구해 온 적이 있었다.

대가로 세계수의 이파리로 만든 최고급 찻잎을 제시하면서.

그래서 다른 대륙에 간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줬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좀 과하게 먹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용병이라는 입장에서 사건을 풀다 보니, 조금 과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거 보세요! 힘들게 구한 건데, 이것만 있으면 갑자기 지반이 무너져 지하에 매몰되더라도 장시간 견딜 수 있을···."

그녀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연신 콧바람을 내쉬며 자신의 준비성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흥분한 얼굴로도 눈 밑의 다크서클은 숨길 수 없었는데, 아무리 봐도 충분히 수면을 취한 얼굴이 아니었다.

마치 소풍 전날 잠이라도 설친 아이처럼.

"그리고 여기 있는 것들은 비상식량이에요. 보존기간을 극도로 끌어올려 몇 년이고 버틸 수 있게 만든···. ···아, 혹시 무게가 걱정인가요? 걱정 마세요! 배낭은 물론, 모든 장비에 경량화 주문이 걸려있어서···."

해리스는 쉬지 않고 조잘거리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샤피론은 수도 드라샤를 벗어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첫 외유가 단순히 수도를 벗어나는 것도, 엘븐 킹덤을 벗어나는 것도 아닌 대륙을 벗어나는 원정인 것이다.

'많이 기대했나 보네.'

그렇게 멍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그의 시선을 눈치챈 듯 말을 멈추고 씨익 미소 지었다.

"훗, 과연 해리스.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얕볼 수 없다니까?"

"···?"

"이 옷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거예요! 엄마···, ···어머님을 졸라서 받은 드라이어드 실크를 기반으로 해서 드워프에게 의뢰한 희귀 금속을···."

곧바로 다시 신난 듯이 입을 여는 샤피론.

최근 함께하며 제법 친해진 덕일까, 까칠하기만 했던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였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자자, 빨리 이리 오세요!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건가요? 이번엔 다른 나라 사절단과 함께 이동하는 만큼, 정말 늦으면 안 된다고요?"

정신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녀가 시간을 보고 화들짝 놀라 해리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둘러 재촉했다.

그리고 그가 챙겨 든 단출한 짐가방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해리스, 짐이 너무 간소하지 않나요? 아무리 당신이 베테랑이라지만···. 음, 뭐 제가 만약을 대비해 모든 물건을 이인분씩 챙겼으니 상관없겠죠! 우후후, 그런 상황이 오면 절 의지하도록 하세요!"

그리곤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며 앞장서서 집합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자, 가도록 하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해리스는 자신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보이면서도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뜬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라포리의 '숲의 길'로 이동한 후에 곧바로 신전의 게이트를 이용할 테니, 저렇게 챙겨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을 텐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흠흠~♪"

등에 멘 배낭을 덜렁덜렁 흔들며 콧노래를 부르는 샤피론.

'뭐, 기분만이라도 내게 해 주자. 그것이 신사이자 어른의 도리니까.'

그것이 그들이 이온 대륙으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이 로셀리아 대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가 준비한 물건들을 사용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33

대륙 정상 회의 (1)

"그럼 저는 이만 신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지침은 숙지했겠지?"

"물론입니다.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가봐."

"예."

뮬로의 대답에 중년의 사내가 공손히 인사하며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상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게 철저히 자신을 낮춰 행동하는 그의 정체는, 탈리아 왕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알려진 브라이트 공작이었다.

이번 대륙 정상 회의에 탈리아 왕국의 대표로 참석하게 된 그가 마지막 보고를 위해 찾아왔던 것.

그리고 그가 자리를 떠나자, 내내 조용히 의자에 앉아있던 하인즈가 옆에 시립하고 선 뮬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저자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

대륙 정상 회의는 주신교단을 비롯해 각국의 최고위층이 모이는 자리이다 보니, 그곳에서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간 일이 귀찮아질 수 있었다.

"로드, 그 녀석은 젖먹이 때부터 제가 준비한 패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뮬로는 하인즈의 말에도 그저 자신만만한 얼굴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외부에 노출될 경우를 대비해 티가 나는 정신계 마법 등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종속시키는 것에는 아주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뮬로는 그런 방법에 통달해 있었고, 그렇게 쌓인 경험으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베테랑이었다.

"흐음— 그래. 지금 상황이라면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쪽에 신경 쓸 여유는 없겠지. 대륙 상황이 워낙 개판이다 보니."

탈리아 왕국은 브로코슬락 클랜까지 동원한 철저한 마물의 숲 통제로 광기 사태에 대한 피해가 크지 않았다.

물론 몬스터가 그곳에만 있지는 않은 만큼 희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수준.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탈리아 왕국처럼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고, 여러 이권과 협잡 등이 얽히고 얽혀 피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거기다 서부 외의 지역은 언데드들의 준동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까.'

또 여러 곳에서 쇄도하는 지원 요청에 주신교단도 정신없는 상황인지라, 설령 브라이트 공작이 함부로 입을 놀린다 해도 이쪽에 손을 쓸 여유는 없을 터였다.

'생각해 보니 이번 일을 계기로 클랜이 전면으로 나서는 것도 괜찮겠어.'

이미 유페르쉬 클랜의 하위 뱀파이어들도 혈문(血門)을 통해 하나둘 탈리아 왕국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뱀파이어 클랜 3강 중 둘이 힘을 합치게 된 상황이었으니, 이미 그것만으로도 국가 하나 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탈리아 왕국을 제외한다고 해도 말이다.

'진혈만 여섯에 성혈이 둘. 그 아래 순혈은 백에 달하니···. 하,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전력이군.'

진혈이 보유한 혈마력을 지구 기준으로 환산하면 7~8레벨에 달한다.

하인즈에게 종속되기 전의 프리지아가 7레벨이었다면 뮬로는 8레벨.

'하지만 직접 싸워봤을 때는 프리지아가 지구의 베타들보다 훨씬 강했어. 수치로 표현하자면 7.5레벨 수준은 되겠지.'

그것은 온갖 성장 보정과 고유스킬로 급성장한 각성자와 오랜 세월 스스로를 갈고 닦은 이세계인의 차이였다.

역량이 비슷하다면 기량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베타들이 고유스킬을 더 많이 강화했었다면 경우가 달랐겠으나, 일단 그가 직접 겪은 바로는 그랬다.

'거기다 그건 프리지아가 「정제혈정」으로 강화되기 전의 이야기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8레벨 수준은 될 거야.'

그런데 그만한 수준의 진혈이 무려 여섯인 것이다.

아니, 각 클랜의 리더 격인 뮬로와 테오도르는 좀 더 윗줄로 쳐줘야 하니 8.5레벨 수준은 될 터.

'성혈은 일단 9레벨 이상이라고 봐야겠지. 지구에선 존재조차 들어본 적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어쨌든 이 정도면 탈리아 왕국 같은 작은 약소국이 아니라, 제법 강성한 왕국의 수도를 점거할 수도 있는 전력이었다.

소수정예인 만큼 이후 벌어질 인간 측의 전면적 대응을 생각하면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물론 이미 나라 하나를 차지한 이상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나저나 성혈이란 말이지···.'

하인즈가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를 제외한 또 다른 성혈, 브리키.

그의 머릿속에는 유페르쉬 클랜과의 전투가 끝난 직후에 그녀와 했던 이야기가 다시 되새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과 최종 지향점에 대해.

"후, 일단 좀 더 두고 볼까?"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그녀의 운명은 이미 그의 손에 쥐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잡아먹든, 휘하로 거두든.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테니.

***

화르륵—

어둠 속에서 보랏빛 불꽃이 타올랐다.

그 불꽃은 밀폐된 지하실 한가운데에서 음산함을 흩뿌리며, 주변을 둘러싸고 서 있는 인영들의 그림자를 사방의 벽면에 투사했다.

보라색 빛의 흔들림에 따라 정신없이 일렁거리는 다섯 개의 기괴한 그림자들.

그리고 어둠에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정체불명의 남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올드만은 참석하지 못한 것 같군?"

그렇게 부재자의 근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역천의 서약 비밀 정기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무도 그와··· 연락이 닿는 이가 없는 건가···?]

[크히힛~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에게 신경 썼다고? 사실 이유야 뻔하잖아? 그냥 어디서 뒤져버린 거겠지!]

활동 지역의 거리나 관계성에 따라 아예 그 동향도 파악하지 못한 이가 있는 반면.

[흠,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연락은 서부 일대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이었지. 소규모 지부들이 누군가에 의해 공격받고 있다던가.]

[아아— 교단이 움직인 게 아니냐는 말도 들었던 것 같군! 설마 이단심문관이 움직인 건가?]

약간이나마 교류가 있어 이상을 감지한 이들도 있었다.

점조직으로 구성된 그들은 보안을 유지하는 데에는 유리하지만, 원활한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었다.

지금처럼 그 지부를 총괄하는 지부장에게 문제가 생기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흐음~ 저기, 그 건에 관해서 제가 좀 알아낸 정보가 있는데요?]

그때, 끈적한 여성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지며 모두의 주의가 그쪽으로 향했다.

기괴하게 뒤틀린 그림자임에도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즐기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사의 군대가 지하 조직들을 습격하고 있다는군요. 그것도 이상할 정도로 우리 휘하의 세력들 위주로.]

그녀가 풀어놓은 정보에 순간적으로 주변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그거야 저도 모르죠~?]

그녀의 밑에 정보를 알아내는 데 특화된 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덕을 제법 보기도 했으니 이제 와서 정보의 신뢰성에 대해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으흠, 어떻게 지금까지 예상한 불사왕의 움직임 중에 맞는 게 하나도 없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예상을 벗어나고 있으니.]

애초에 심연의 '죽음'에 잠식되어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데만 전념해야 할 불사왕이 이렇게 오래 모습을 감추고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처음 불사왕의 부활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개.

오히려 지하 조직을 습격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 대부분을 폐기해야 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그럼 올드만도 불사왕에게 당했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면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할 이는 아니었으니까요.]

불사왕이 그들을 대륙 정복의 방해물로 여기고 제거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이 경우엔 오히려 그들을 유용하다 판단하고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벌인 일일 테지.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건 곤란한 상황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 얼간이 같은 놈들 때문에 되는 일이 없군! 마르코스와 누라베에 이어 이번엔 올드만인가?]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덩치 큰 그림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불평을 토해냈다.

[십 년 이상을 준비해 놓고 그 준비를 제대로 써먹기도 전에 일을 개판으로 만드는구나! 너희도 마찬가지다! 내가 심연을 열어 광기를 꺼낸 후로 이루어진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푸훕! 크히히힛~ 그것도 맞는 말이네. 푸크큭···!]

[넌 닥쳐라!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아, 죄송죄송! 푸히—!]

덩치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지만, 경박한 이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던 순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 최근은 불사왕의 덕을 보려고 눈치만 보느라 너무 몸을 사린 감이 있으니."

갑자기 그들의 언쟁을 끊고 들어온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였다.

불사왕이란 말이 나온 이후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나서자, 내내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도 조용히 입을 닫고는 그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모두 이번에 개최될 대륙 정상 회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그만큼 떠들썩한데 모를 리가.]

"마침 이쪽이 준비하던 일도 끝난 상황이다. 바로 준비하면, 시기상으로도 딱··· 회의가 개최되는 도중이겠군."

[음? 분명 그쪽은··· 아아— 그런가.]

각자의 영역이 다른 만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계획을 세우면서 대략적인 정보는 공유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확한 시기를 조율하고 규모와 장소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달려 있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들끼리도 알지 못했었는데···.

[크힛! 아— 대책을 논의하겠답시고 모인 놈들의 표정이 궁금한데! 그걸 직접 보지 못한다니 아쉽구만! 크후훗!]

[이쪽이 뭔가 도울 일은 없나요?]

"없다. 이미 오랜 시간 공들여 온 작업이니까."

그는 기괴한 그림자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천천히 둘러보곤,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하듯 덧붙였다.

"그리고 그때가, 현 지배 체계가 무너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모든 회의가 끝나고.

어둠을 밝히던 보랏빛 불꽃이 사그라지자 공간엔 짙은 어둠만이 남았다.

스으윽—

한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서 있던 남성이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지하실 계단을 올랐다.

주변 공간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서서히 밝아지는 실내에도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으며.

촤르륵—

마침내 창가에 도착한 그가 밖을 가리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한순간에 쏟아지는 밝은 햇살과 분주한 도시의 정경.

"···이제 이 모습도 마지막이군."

불사왕이 그들을 노린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제 이렇게 여유를 부릴 틈도 없었다.

그간 준비한 것들을 한 번에 쏟아붓고 나면 한동안은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해야 할 터.

'다행히 올드만이 이쪽에 대해 가진 정보는 많지 않다. 녀석에게 걸린 금제가 있긴 하지만, 불사왕이라면 무슨 수를 낼지도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두는 게 좋겠지. ···이후로는 다른 녀석들도 경계해야겠어.'

그리고 그는 이후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바깥 풍경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점조직인 역천의 서약 고위 간부들은 겉으론 모두 대등한 관계였으나, 그중에서도 실질적인 리더는 있기 마련.

그리고 사내는 누가 뭐래도 조직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였다.

몇몇 간부들에게 금제까지 가해둘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그가 지금 있는 장소는, 제국의 북쪽에 붙어 삼면이 북부 산맥으로 둘러싸인 탓에 매일같이 몬스터들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곳.

로한 공국이었다.

***

로셀리아 대신전에 각 세력의 사절단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각 소속 국가의 전권을 위임받고 온 고위직들부터, 마탑 연맹과 용병 길드를 비롯한 단체의 대표들까지.

그들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사전 조율이 힘들었을 뿐이지, 그것이 해결되자 정작 이동하는 것 자체는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쉽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물론 그 안엔 에나멜 대륙에서 온 이종족들도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교단과 합의된 대로 하이 엘프 라포리의 '숲의 길'을 통해 빠르게 바다를 건너와 합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엘븐 킹덤 측에서 사안의 중요성을 인지한 데다, 이전 세실리 건으로 더 친밀해진 덕에 쉽게 그들의 협조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이 세계 아우테리카를 주도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로 이곳, 대륙의 중심인 성지에.

만약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세계적으로 큰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그만큼 각 세력에서 영향력이 큰 권력자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은···.

'이곳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것만으로도 카르마가 폭증한다는 소리지!'

이곳이 노다지나 마찬가지란 뜻이었다.

#134

대륙 정상 회의 (2)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포리 님, 세실리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좋지 않은 일로 마주하게 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성녀님."

"안녕하세요, 성녀님?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 세실리 그랜우드입니다."

이곳을 떠날 때는 조금 특별할 뿐이었던 엘프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하이 엘프가 되어 정식으로 성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 왠지 모를 뿌듯한 감상에 젖은 리에스타가 반갑게 세실리를 맞이하며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사실 외양과는 반대로 나이는 엘프인 세실리가 더 많았지만, 그건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하하. 저도 저번 일이 마지막 대외 업무가 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라포리가 멋쩍은 듯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이 일이 워낙 중요한 사안이었던지라 라포리가 직접 나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드라샤에서 한창 교육에 매진하고 있어야 할 세실리까지 사절단에 참가한 건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는데, 이는 다시 이온 대륙으로 가고 싶다는 본인의 강한 의사가 반영된 결과였다.

'이렇게 대륙을 건널 기회가 자주 오진 않을 테니까. 이참에 할리 님께 제대로 보답 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겠지.'

그리고 엘븐 킹덤의 지도부도 그녀의 의견을 수용해 주었다.

사절단 자체는 그리 위험하지도 않고, 이 또한 교육의 일부로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었으니.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인리히 님께서 성자가 되셨다죠? 그때도 범상치 않은 분이라고 느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역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후후후··· 성자님께서도 여러분을 보시면 반가워하실 겁니다. 지금은 대신전의 방비 상황을 다시 살펴보시느라 바쁘시지만요."

그렇게 오랜만에 성사된 만남은 한창 다른 이들을 맞이하느라 바쁜 성녀의 일정으로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머물 숙소로 안내되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

순탄하게 이어진 일정에 모두가 만족했지만, 그 중 알게 모르게 의기소침한 이가 하나 있었는데···.

"뭐··· 뭐죠? 전 실망 따윈 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요!"

해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몸에 두른 벨트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다, 당연히? 이만한 대규모 사절단인데 도중에 문제가 생길 리가 없죠? 이건 말 그대로 만약을 대비한 거니···."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지만, 샤피론은 작은 목소리로 열심히 설득력 없는 변명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선 모른 척해 주는 게 어른의 도량이겠지.'

해리스는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고, 그건 귀엽다는 눈빛으로 연신 이쪽을 흘깃거리는 라포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지만, 옆에서 말리지 않은 그 또한 공범이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속속 대신전에 도착하기 시작한 여러 세력의 사절단들.

물론 불참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큰 판에서 빠진다는 건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당연하겠지만.'

괜히 대륙 '정상' 회의가 아니었다.

일이 성사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드는 상황에서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거기다 게이트라는 편리한 이동 수단도 있으니 촉박한 시간이라는 점은 아무런 방해 요소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큰 문제 없이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대륙 정상 회의'의 날이 밝았다.

똑똑—

곳곳에 배치된 성기사들로 철통같이 지켜지는 로셀리아 대신전의 심처.

평소 이상으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차려입은 하인리히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리에스타 성녀님? 하인리히입니다. 이제 회의장으로 가셔야 하는데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네! 곧 나갈게요!"

대답이 들려온 직후, 문이 열리며 격식 있는 예복을 갖춰 입은 그녀가 수행하는 여사제들과 함께 조심스레 다가왔다.

아무래도 공적인 자리다 보니 여러모로 신경 쓸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 긴장한 것 같군. 하긴, 이렇게 큰 자리는 처음이겠지.'

굳은 얼굴로 뻣뻣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온 리에스타.

사실 그간 주신교단의 얼굴로서 대외 활동을 해왔다고는 해도 그녀는 이제 고작 19세의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만한 규모의 행사 또한 처음이었고,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녀처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감정 조절의 달인, 하인리히는 단 한 점의 마음의 동요도 없었지만.

그는 그녀의 긴장을 모른 척하며 태연한 기색으로 말을 걸었다.

"이번에 상당히 여러 곳에서 왔더군요. 전 이렇게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보는 건 처음입니다. 성녀님께선 이미 이런 경험이 많으시겠군요?"

"그··· 크흠, 그렇죠. 제가 성녀가 된 것도 7년이 넘었으니까요.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익숙한 편이긴 한데···."

"또 이게 전부 그동안 성녀님께서 백방으로 노력하신 덕분 아닙니까? 각지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고생하신 끝에 마련된 자리니, 감회가 새로우시겠습니다."

"···그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성자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요즘 줄곧 성지 보안 상황을 점검하시느라 바쁘셨을 텐데."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수행원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이동하는 와중,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자 서서히 성녀의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애초에 평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성법도 있는 만큼, 그녀가 긴장했던 이유는 오로지 심적인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간 이런 상황에서 성녀란 교단의 얼굴이며 대표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하인리히라는 성자도 함께 있으니, 혼자 그 부담을 짊어질 필요는 없단 말이지.'

성녀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태평한 태도의 그와 대화를 나누며 점점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듯했고, 회의장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이 이미 몇 번이고 살펴보셨을 텐데, 성자님까지 나서서 여러 번 보안을 점검하실 필요가 있었나요? 거기다 예복이 아니라 갑옷까지 차려입으시고."

"저는 성기사이자 불사왕과 직접 맞서 싸울 용사이기도 하니까요. 이 모습이 더 믿음을 주지 않겠습니까? 또 이곳의 방비는 저희 주신교단의 위신이 걸린 일이니 철저히 확인해야지요."

각 대륙에 자리한 나라에서 전권을 위임받아 온 고위층은 물론, 바다의 신이나 대지의 신 등을 모시는 소수 교단, 그리고 마탑 연맹과 용병 길드를 비롯한 주요 세력의 대표들까지 참석했다.

대표자 외에도 그 수행원과 호위들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한 수의 외부인이 한 번에 이곳으로 유입되어 온 것.

당연히 대신전의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해질 수밖에 없었다.

팔라딘과 대주교까지 동원된 건 물론, 성자인 하인리히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이끄는 게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또 만약을 위해 이단심문관이 참석자들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기도 하고.'

혹여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숨어든 이들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들어온 이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 두 분 모두 오셨군요. 그럼, 들어가 볼까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던 끝에, 그들은 대회의장의 문 앞에서 실무를 도와줄 코델리아 추기경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모두 입실했다고 들었으니, 그들만 들어서면 이제 곧바로 시작될 것이다.

이 세상의 앞날을 결정할, '대륙 정상 회의'가.

***

로셀리아 대신전 내부에 마련된 대회의장.

중앙부에는 각 세력의 대표와 수행원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바깥쪽에는 그들을 따라온 사절단 인원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상 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인 지금 대부분의 좌석은 빈자리 없이 채워진 상태였지만, 그들 사이의 공기는 각 세력 간의 관계에 따라 미묘한 온도 차를 보이고 있었다.

'후우, 힘들군. 제발 이번 회의에서는 뭐라도 건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분주히 움직이며 여러 사절단과 접촉을 거듭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로한 공국의 후계자인 데니스 로한 대공자였다.

그는 가장 먼저 최우방국인 제국에 지원을 부탁하러 접근했으나, 그 대표로 참가한 황태자는 그저 번거롭다는 듯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당장 군대의 파견은 어렵고 지금까지처럼 군수물자는 충분히 지원해 줄 테니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부탁하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그간 정식 루트로 몇 번이고 주고받은 내용과 별다른 것도 없었다.

'물론 물자 지원도 고맙긴 한데, 지금 당장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나가고 있다고···! 그걸 쓸 사람이 없단 말이다.'

몬스터 때문에 정신없기는 제국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한다만, 그래도 실망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잘 버티고 있는 아제리온 제국에 비해 로한 공국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니까.

데니스는 천천히 넓은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대륙을 지배하는 세력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장관이나 다름없었다.

이 많은 이들 중 그의 조국을 도와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건 상당히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이종족들에겐, 말도 붙이지 못했지. 하긴 잘 풀렸다 해도 거리 때문에 군대를 보내줄 수도 없었을 테니.'

그의 시선이 저들끼리 한곳에 뭉쳐있는 에나멜 대륙의 사절단으로 향했다.

엘프의 왕국이자 세계수를 신봉하는 '엘븐 킹덤',

'불과 금속의 신'의 신도인 드워프들이 세운 '타이타니아'.

그 외에도 각자의 토착 종교를 믿는, 수인들의 연합 '와일드 랜드'와 리자드맨 공동체 '중앙 늪지대' 등···.

애초에 주신교단을 제외하면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이종족들이었으니, 그들에게는 말을 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교단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을 이들이 대다수일 터.

'난장판이 된 이온 대륙과 달리 에나멜 대륙은 비교적 멀쩡하다고 하니까.'

물론 전대 불사왕 사태와 마찬가지로 불이 번지기 전에 진화하려는 목적으로 대륙 차원에서 지원이야 하겠지만, 당장 나라가 위태로운 로한 공국이 원하는 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좀 더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무력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니.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제피아 공화국은 아예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우리 공국이 친제국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발품을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데드의 출몰이 적어 비교적 피해가 덜한 서부의 탈리아, 샤로티, 툴크, 레스크 4개 왕국 연합은 물론이고.

마탑 연맹의 본부가 위치한 동남부의 섬나라 위제트 마도국과 남부 칼코스 부족 연맹까지 전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보니 이 시기에 자국의 전력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꺼려지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소수 교단은 딱히 전투력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나마 용병 길드가 대형 용병단들을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그들과의 협상에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이번 정상 회의의 결과가 중요했다.

주신교단에서는 이미 로한 공국에 성기사단은 물론 팔라딘까지 파견하며 지원하는 상태.

그들이라면 공국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아마 상당히 중요도가 높은 안건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겠지.

만약 대륙 연합군이 창설되어 공국을 도와준다면 충분히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데니스 로한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던 찰나.

덜컹—

대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신전의 대표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곳으로 집중되며, 떠들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진행을 도와줄 이들까지 제법 많은 수가 한꺼번에 들어오고 있었지만, 지금 눈에 띄는 존재는 오로지 선두에 선 두 남녀뿐이었다.

"허— 과연 신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라는 건가. 마치 저들이 있는 공간만 다른 세상 같군."

"저분이 새로 탄생한 성자···."

"으음··· 저번에 얼핏 보긴 했다만, 역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야."

잠시의 정적 후,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한 사절단들.

그간 여러 번의 대외 활동을 통해 알고 있던 리에스타 성녀와 다르게, 이번이 첫 공식 활동인 하인리히 성자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와 주변에 감도는 경건한 분위기와 달리,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뜨겁고 강렬한 기세를 자연스럽게 흘리는 사내.

그가 바로 불사왕에 대적해 지금의 혼란을 종식할 주역인, 이 시대의 용사이자 희망이었으니까.

#135

대륙 정상 회의 (3)

"우선,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이 먼 곳까지 자리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리에스타와 하인리히, 코델리아 추기경이 중앙에 둥그렇게 둘러진 테이블의 빈 곳에 나란히 앉은 직후.

"그럼, 대륙 정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추기경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는 미증유의 위기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에 있었던 두 차례의 불사왕 사태 때보다도 더 큰 위기라고 할 수 있겠죠."

회의의 전체적인 진행을 맡은 코델리아 추기경의 목소리가 신성력을 품고 대회의장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연륜만큼 경험도 많은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연설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천 년 전, 심연이 열리고 세상에 강림한 불사왕이 이 땅의 절반을 죽음으로 뒤덮었습니다."

그때의 대륙인들은 모두의 힘을 한데 모으고, 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불사왕과 언데드 군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삼백 년 전, 불사왕의 심장을 손에 넣은 흑마법사로 인해 2대 불사왕이 탄생했습니다. 그는 당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사르브 제국을 멸망시켰죠."

하지만 그 또한 많은 이들의 협력 끝에 토벌하는 데 성공해 피해가 더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거기다 전과는 달리 심장까지 조각내어 그중 하나를 봉인함으로써,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으나···.

"그리고 지금, 3대 불사왕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코델리아 추기경은 이어서 새롭게 탄생한 불사왕, 한스에 대해서도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를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대륙 서부의 탈리아 왕국이었지만, 한스는 상상 이상의 영악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시종일관 그들을 농락했다.

교단을 유인해 당시 갈등을 빚던 뱀파이어 클랜과 상잔시킨 간교함.

자신을 따르는 흑마법사들이라도 쓸모가 다하면 가차 없이 미끼로 쓰는 무자비함.

추적에 성공한 토벌대를 여유롭게 기다리다 그들을 조롱하며 유유히 빠져나간 기동성.

이후 전력을 다한 교단의 탐색도 무력화해 몸을 숨긴 은밀성.

"으음···."

"이건, 생각 이상으로···."

추기경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지만, 그녀의 말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륙 서부 마물의 숲에서 행해진 정체불명의 사악한 생체 실험과 그 잔혹함.

그 실험실의 위치가 노출된 것을 역이용해 로셀리아 대신전의 전력을 바깥으로 빼낸 과단성.

이후··· 불사왕의 힘을 온전히 잇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침입해, 기어코 깊은 내부에 봉인되어 있던 불사왕의 파편을 탈취할 정도의 마법 능력.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성장 속도와 치밀한 심계까지.

"······."

"···크흠."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으며 모든 이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건.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성자, 하인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와··· 한스 그놈, 알고 보니 무서운 놈이었네!'

교단의 입장에서 정리된 사실을 들으니 새삼 한스의 용의주도한 움직임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나 하인리히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보란 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세상의 빛을 위해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서.

주변에서 자신을 보는 몇몇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굳이 시선을 돌려 확인하지 않았다.

이건 절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렇게 그가 정의로운 용사에 몰입해 사명감을 불태우는 와중에도 연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이번 대의 불사왕은 전대들처럼 무언가에 취한 듯 맹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행적을 숨긴 채 세상의 뒤편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점이죠."

이후 그 한스가 획책한 것이 바로, 대륙 곳곳에서 제물 의식을 벌여 한 번 더 심연을 열어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약해진 심연의 경계에서 이전 세대에 봉인되었던 수많은 언데드들이 풀려나와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로 그것, 세상 전체에 심연의 '광기'가 퍼져나갔다는 것이죠."

광기는 이성이 약한 몬스터들을 중심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육체 능력과 폭력성을 큰 폭으로 증가시켰고, 그것은 곧 전 세계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몬스터의 천국이라 불리던 북부 산맥을 비롯한 마물 밀집 지역은 물론, 야산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몬스터들마저 미쳐 날뛰며 피해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또 이 사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격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건 세상에 뿌려진 광기가 몬스터에 기생한 채 조금씩 양을 부풀리고 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번 늘어난 '광기'는 몬스터를 죽인다고 소멸하는 게 아니라 다시 세상에 퍼져나가거나 더 강한 몬스터의 양분이 될 뿐이었으니···.

"저희는 이 광기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그것이 심연에서 꺼내졌을 때 함께 나왔을 광기의 핵을 봉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주신교단의 조사단이 오랜 시간에 걸쳐 심연이 열린 의식 장소를 조사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불완전한 소환의 여파로 대부분의 광기가 부스러져 퍼져나갔지만, 분명 실체를 갖추고 세상에 현현한 매개체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아마 불사왕이 어딘가에 숨겨둔 채로 대륙을 공격할 무기로 사용하고 있을 터였다.

거기다 최근 불사의 군대가 보이는 은밀한 움직임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

무슨 큰일을 벌이기 직전 같은 그 모습에 교단 쪽에서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인 불사왕을 처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일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말이지요. 그를 위해선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웅성웅성—

코델리아 추기경의 설명이 끝나자 회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고위층인 만큼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방금 그녀가 발표한 내용 중엔 모르던 사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발언 중엔 교단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모두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대표석에 앉아있던 이 한 명이 느긋하게 한 손을 올리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말을 들어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데 말이지요."

밝은 금발과 녹색 눈동자를 가진, 주위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의 신경질적인 인상의 청년.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 사이먼 카르테 아제리온이었다.

"처음부터 교단에서 파편의 관리를 제대로 했다면 불사왕이 부활할 일도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 방금 추기경은 주신교단 측의 치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교단의 관리하에 있던 파편이 탈취당한 탓에 결국 불사왕이 부활해 버렸노라고.

"그 말은 불사왕의 부활에 교단의 실책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겠지요?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 교단의 안일한 대처 때문이었다고?"

그리고 일상 자체가 정치의 연속인 사이먼 황태자는 그런 상대의 약점을 모른 척해줄 이가 아니었다.

주신교단의 세력이 강성하다고는 하나, 아제리온 제국 또한 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패권국.

다른 때라면 몰라도 상대 쪽에 명백한 흠이 있는 상황이라면 절대 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교단 측에선, 이걸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웅성웅성—

그리고 이 자리엔 이번 사태로 피해를 본 나라들이 무수히 많았다.

여론 또한 자신의 편을 들어줄 테니, 지금이 교단의 영향력을 깎아내릴 절호의 기회였다.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교단의 세가 강한 것이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교권이 강할수록 황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그리고 지금 주신교단의 위세는 충분히 제국을 넘어설 정도였다.

'나는 제국을 다스릴 황제가 될 몸. 주신의 권위는 인정하나, 그를 따르는 종이 내 머리 위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번 기회에 눌러둘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주신을 믿는 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성직자라 해 봐야 신의 이름을 빌려 위세를 부리는 한낱 인간일 뿐,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격은 황족인 자신이 월등하다 믿고 있는 사이먼 황태자였다.

"하아—."

그렇게 엇나간 주제가 도마 위에 오르자, 자리에 앉아있던 리에스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위기를 논의하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로써 시간이 더 지체되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직접 나서진 않았지만 그의 말에 심적으로 동조하는 이들도 상당한 듯싶었다.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남을 매도하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 말이 나온 이상 그냥 어물쩍 넘어갈 수도 없다.

그에 코델리아 추기경이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웅혼한 기세가 담긴 남성의 목소리가 먼저 회의장에 울려 퍼지고.

그 존재감에— 모두의 시선이 일시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하지만 저희 주신교단은."

그곳엔 지금껏 조용히 앉아만 있던 하인리히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각 세력의 대표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강렬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한 사이먼 황태자의 표정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임에서 물러난 적이 없습니다."

황태자의 말은 정론이었지만, 한 가지 간과한 부분이 있었으니.

주신교단은 그간 그가 상대해왔던 이들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치부를 숨기고, 아등바등 진흙탕 싸움을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교단은 처음부터 실책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럴 심산이었으면 애초에 전부 공개하지도 않았겠지.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산적한 지금은, 그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때가 아니었을 뿐이다.

"천 년 전에도, 삼백 년 전에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위기 상황에서도. 주신교단은 항상 최전선에서 피를 흘려왔고,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과거,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선 것도.

피해를 입어가며 불사왕의 행적을 추적해 정보를 수집한 것도.

기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아군의 희생이 강요되었을 때도.

최후의 싸움에서 용사들이 불사왕과 싸울 수 있게 길을 열었을 때도.

기어코 놈을 쓰러뜨리고, 조각난 파편을 봉인하는 책무를 짊어졌을 때조차.

그 모든 일의 선두에는 항상 주신교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인리히의 강렬한 눈빛이 사이먼을 꿰뚫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위압감이 사위를 압도하고, 이 자리의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번 일의 실책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와 교단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겠지요."

침묵에 잠긴 대회의장.

이 넓은 공간에 오로지 하인리히의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공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가장 앞에는 제가 있을 것입니다. 부득이 물러날 상황이 된다면,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도 제가 되겠죠."

또한 전쟁에서 그런 행보를 보이는 건 단순히 성자인 그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주신교단의 모두가 그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불사를 테고, 그것은 불사왕을 완전히 이 땅에서 몰아내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겠지.

"···지금까지, 주신교단이 그래왔듯이."

그렇게 그의 말이 끝났음에도, 장내에는 여전히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전과는 확연히 변해 있었는데.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인상을 찌푸렸던 이들도 표정을 펴며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하인리히가 한 말은 '실수는 인정할 테니, 앞으로 수습하기 위해 열심히 하겠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 좀 봐 달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주신교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는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간 보여 왔던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 쌓여온 믿음과 신뢰는 이미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그 자체로 무형의 자산이 되어 막강한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뭐, 두고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것은 사이먼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댈 뿐이었다.

이미 분위기가 바뀐 순간부터 원래의 목적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빠르게 노선을 변경한 것.

'과하면 모자람만 못 하지. 일단 이 자리에선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거다.'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의 가라앉은 눈빛이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길 듯 존재감을 발산하는 하인리히에게 향했다.

신실하고, 고결하며, 정의감에 가득 찬 강인한 성기사.

'성자, 하인리히···.'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선을 보내는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 강렬한 인상은 모두의 뇌리에 깊게 새겨졌고, 그에 따라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이 하인리히에게 집중되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인 성자 데뷔라고 봐도 되리라.

'휴— 겨우 수습했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선방한 거겠지?'

물론 그는 그저 자기가 싼 똥을 치웠을 뿐이었지만.

#136

대륙 정상 회의 (4)

여러 안건이 오가며 활발한 토의가 이어지는 대회의장.

한 번 분위기가 환기된 덕인지 이후의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결정된 것은 대륙 연합군의 창설이었다.

각 나라의 군대와는 별개로 일종의 UN군과 비슷한 조직을 꾸려 만약의 사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한 것.

이미 전대 불사왕 사태 때부터 그 쓸모를 증명해왔던 역사가 오래된 조직이다 보니, 별다른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또 자연스럽게 연합군의 사령관은 여러 세력의 정치적 이해에서 자유로운 주신교단의 팔라딘이 맡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 가장 심각한 건 로한 공국입니다! 제국과 접한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전쟁터예요. 이대로 도움이 없다면 언제 나라가 무너질지 모릅니다!"

연합군의 창설이 결정된 다음, 그 운용과 지원 방안에 관해 논의할 때 나온 열변이었다.

당연히 그 당사자는 로한 공국의 대공자, 데니스 로한.

"흐음— 확실히 몬스터의 광기 사태는 불사왕의 공격이나 다름없는 만큼, 이에 대응하는 것도 연합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겠지요."

그리고 그의 주장엔 아제리온 제국의 사이먼 황태자도 동조하고 나섰다.

제국도 사정이 급한 만큼 직접 군대를 파병하는 데에는 난색을 표했었지만, 어차피 만들어야 할 연합군으로 속국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었으니.

잠깐 제피아 공화국 쪽의 사절단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긴 했으나,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이 자리에서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결국 여러 이야기가 오간 끝에 로한 공국에 대한 지원이 최종 결정되었고.

데니스 대공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훔쳤다.

'됐다. 이제 이걸로 좀 더 숨통이 트이겠지. 연합군이 꾸려지고 파병되기까지 시간이 좀 소요되겠지만, 그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그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이후의 토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안건을 지나 마침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 일명 용사 파티의 결성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불사왕을 직접 상대하는 것.

당연히 그들을 이끄는 건 현 성자인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였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긴 부대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의 시초가 바로 전대 불사왕들을 물리쳤던 결사대였기 때문이었다.

대륙 연합군이 목숨을 걸고 열어준 길을 통과해, 마침내 불사왕을 물리치고 대륙에 두 차례의 평화를 가져왔던 영웅들.

막중한 책임과 영광이 함께 하는 만큼 그 인원의 선별에도 각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대륙 최고의 인재를 선발하는 자리나 다름없었으나,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의 표정은 미묘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흐음, 결사대라···."

"···크흠."

그들의 그런 반응은 이전 세대 결사대들의 생환률 때문이었다.

길게 따질 것도 없이, 불사왕을 토벌한 직후 멀쩡하게 생을 마감한 이는 정말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들 대부분이 전투 도중 전사했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이들도 영구적인 장애와 저주 등의 극심한 부작용에 시달리다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그것은 성자이자 용사였던 이들도 마찬가지.

그들도 몇 년 정도를 더 버텼다는 것만 다를 뿐, 결국 오래지 않아 주신의 품으로 떠나지 않았나.

온갖 신의 가호로 보호받는 그들이 그럴 정도인데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안 그래도 세상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한 세력을 대표하며 든든하게 그들을 지켜줄 최고의 인재들을 그런 식으로 소모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눈치를 보는 상황에, 또다시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히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여는 이가 있었으니···.

"그거라면 우리 제국에서 추천하고 싶은 인재가 있습니다만."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 사이먼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이라고,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마법사까지 오른 천재 마법사지요. 우리 제국이 자랑하는 보물이라고나 할까."

"오— 프리스틴 자작이라면 확실히 자격이 있지요. 작년에 그녀가 발표한 '얼음의 결정 구조를 이용한 빙계 마법의 다원적 분석'은 빙계 마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그의 말에 호응해 마탑 연맹 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간부 하나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설레발은 바로 옆에 앉아있던 맹주가 지그시 노려보자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이세아 프리스틴이라···. 들어본 것 같은데. 다른 세력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면 정말 뛰어난 인재라는 소리겠지.'

성자라는 위치가 위치다 보니 각국의 강자에 대한 정보를 숙지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국의 신흥 귀족으로, 오로지 본신의 능력만으로 작위를 얻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였다.

마법사로서는 이온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거라고 했던가.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알려지기론 30대는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니, 그 발전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봐야 했다.

황태자의 말대로 제국의 보물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데 그런 자국의 인재를 사지라 알려진 자리에 흔쾌히 추천했단 말이지?'

당황한 듯한 기색의 제국 측 수행인들을 보니 사전에 합의된 내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그 이유는 뻔한 노릇.

'정적이라도 되나 보군. 하여튼 정치인들이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서로의 눈치만 보던 이들도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저희도 빠질 순 없죠. 마침 아국에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그러고 보니 레스크 왕국의 세링턴 후작이 그리 무위가 뛰어나다고 하던데···."

"어허!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분은 이제 연세도 있으셔서···."

자국의 정적부터 타국의 인재까지.

불사왕 타격대의 조건이 워낙 높다 보니 적합한 이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여러 사람이 거론되자 회의장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하인리히의 속도 점점 뜨거워졌다.

슬슬 배알이 뒤틀리기 시작해서.

그도 그럴게 저들의 수작은 자신이 이끌 파티가 전멸한다는 걸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 몸,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님의 파티가 말이다!

'···반드시 전부 영웅으로 만든 후에 곱게 돌려보내 주지.'

그렇게 굳게 다짐한 그가 그 촌극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당연히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가 직접 나서도록···!"

"안 됩니다! 사도님이 자리를 비우시면 저희 교단은···."

의욕에 차서 나서려다 옆의 수행원에게 제지당하는 소수 교단의 지도자부터.

"으음, 역시 결사대에 참여하기엔 아직 제 실력이 부족하겠죠?"

"최소로 잡아도 마스터 급은 되어야 할 테니···."

"어떻게 종자로라도 들어갈 수 있으면···."

자신만은 남과 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가득 찬 일부 대표단 참가자들까지.

그 중엔 한심하다는 듯한 해리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연신 눈을 반짝이는 샤피론도 있었다.

우물우물—

"응? 해리스, 뭘 먹고 있는 거죠?"

"아, 이거요? 팝콘이라는 건데···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특이하게 생겼네요. 이온 대륙의 특산품인가 보죠?"

다행히 그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는지, 이내 그가 들고 있는 먹거리에 눈길이 쏠리긴 했지만.

그렇게 해리스는 나란히 앉은 그녀와 함께 「아바타 클라우드」로 지구에서 공수해 온 팝콘을 씹으며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슬슬 진정되는 것 같군. 하긴 이 자리에서 추천해 봤자 바로 결정되는 일도 아니니.'

하지만 태평한 것은 겉모습일 뿐, 그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심정으로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해리스, 해리스. 이거 더 없나요? 부드럽고 짭조름해서 맛있네요!"

열심히 냠냠거리더니 어느새 한 봉지를 전부 먹어 치운 샤피론에게 따끈따끈한 팝콘을 리필해주며, 그는 한층 차분해진 중앙 대표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 파장 분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정해진 안건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긴, 이곳의 결과에 따라 국제정세가 달라질 텐데 하루 만에 모든 일이 결정될 수는 없겠지. 정상 회의가 열린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도 많고.'

이 와중에도 협력이 잘 되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들은 아직도 위기감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럼, 금일의 회의는 여기서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같은 시간에 2차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오니, 모쪼록 착오 없이 참석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웅성웅성—

마침내 이어진 코델리아 대주교의 폐회 선언 직후, 각 세력의 대표들을 삼삼오오 모여 저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온 안건들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

하지만 시종일관 조용히 지켜만 보던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은 이번에도 별다른 교류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되지. 이제 서로 친해질 때도 됐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건 그저 가벼운 레크리에이션일 뿐이었다.

우우웅—

파지지직—!

그 순간.

"음?"

"갑자기 무슨?"

찬란한 광휘를 내뿜는 신성 결계가 대회의장 내부에서 강렬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스파크 소리와 함께.

[이런, 내가 조금 늦었나 보군.]

지옥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영혼까지 얼어붙는 듯한 존재감에 모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

"이··· 이건···?"

갑자기 발생한 이변에 혼란에 빠진 이들.

그리고 그 끔찍한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사악한 기운이 그들의 심상에 파고들려 할 때···.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반응한 성자 하인리히의 신성한 아우라가 회의장의 모든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전투 준비! 모든 팔라딘과 성기사단은 즉시 집결하라!"]

직후 울려 퍼진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진득한 신성력을 품은 채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

촤차창—!

철그럭! 철그럭!

주변을 경비 중이던 교단 병력이 순식간에 모든 태세를 갖추고 회의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이상이 발생하고 대응이 이루어진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

그들은 하인리히가 사전에 내려둔 지침에 따라 사절단들을 뒤쪽으로 물리며, '만약'을 대비해 성물까지 사용해 구축한 안전 지역으로 이끌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주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었지만, 정황 파악은 중요한 문제이니만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으음··· 과연, 이번엔 상당히 준비를 많이 했나 보구나. 이만한 신성 결계라니. 크흐흣— 어지간히 이 몸이 두려웠나 보군. 용사, 하인리히여!]

파지지직—!

연신 불똥이 튀는 하얀 스파크 속에서, 전신을 짙은 어둠의 기운으로 감싼 존재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심연 그 자체를 뭉쳐놓은 듯 일렁거리는 검은 로브와 후드 아래로 살짝 비치는 기괴하게 웃는 가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이 대륙에 사는 이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그를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이라 하더라도, 그 앞에 서면 누구나 깨닫게 되리라.

그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은 바로···.

"한니발 스트라우스! 그걸 알면서도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어지간히 우리가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대륙 정상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 난입해온 불사왕 한스··· 아니, 한니발 스트라우스.

그리고 손바닥에서 성검을 뽑으며 그에 당당히 맞서는 고결한 용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마침내 그 두 숙적이 다시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대륙 정상 회의가 개최된 이곳.

이 대륙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137

불사왕의 준동 (1)

조금 전의 회의에서도 문제가 되어 사이먼 황태자에게 빌미를 주었듯, 주신교단은 이미 불사왕에게 한 번 침투를 허용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그 후에 더욱 철저히 보안을 강화한 건 자연스러운 수순.

하물며 이번 대륙 정상 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자리였던 만큼, 정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전적이 있는 주신교단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마지막 불사왕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던 그 장소가 이미 교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단 말이지.'

철저하게 외부인을 통제하고 공간까지 왜곡시켜, 수백 년 간 그 누구의 침투도 허용하지 않았던 봉인지.

그런데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그곳을 뚫어냈던 불사왕이 온전하게 부활한 지금, 과연 어떤 대비가 그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주신교단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지만.'

그들은 한스가 가진 '모든 방어를 무시하고 공간을 뛰어넘는 힘'을 어떠한 권능 같은 능력으로 간주하고, 침입을 원천 차단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가정했다.

그래서 교단이 주력으로 준비한 것은, 그 직후의 상황이었다.

파지직—!

우우우웅—

바로 지금처럼.

[···이건, 상당히 짜릿하군. 과연 주신교단, 이 몸의 숙적답구나.]

순식간에 빼곡하게 새겨진 금빛 기도문이 벽면을 내달리고, 몇 겹이나 중첩된 신성 결계가 동시에 발동하며 사방이 환하게 물들었다.

흉흉하게 퍼져 나가던 흑마력이 억눌려지고, 존재 자체가 치명적인 죽음의 기운이 약화되었다.

세상을 오시할 듯 공간을 좀먹던 불사왕의 기세에 맞서 주변에 넘쳐나는 신성한 기운이 거칠게 반발했다.

그 빛과 어둠의 대립 속에서···.

"한니발 스트라우스. 너는 오늘, 그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마치 빛을 대표하듯 선두에 선 하인리히가 「축복 : 광검」을 덧씌운 성검을 한스에게 겨누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어떻게 방해 결계를 뚫고 진입하긴 했지만, 적대적인 기운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은 마(魔)에 속한 존재에게 최악의 장소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맞서야 할 이는 비단 용사 하인리히뿐만이 아니었으니.

"불사왕 한스가 혼자 이곳에 온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 놈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혀둘 수 있다면!"

"설마설마 했더니 정말로 이곳에 나타날 줄이야. 서둘러라!"

후방으로 물러나며 머리맡의 후광을 더욱 밝게 빛내는 리에스타 성녀와 어느새 세 명의 팔라딘들과 함께 현장에 합류한 피온 대주교.

코델리아 추기경은 만약의 사태에서 사절단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이 피한 결계 쪽으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이탈이 전력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이곳에는 주신교단의 강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크핫! 지루한 이야기만 하다 끝나는 외유가 될 줄 알았는데, 설마 그 불사왕이 직접 나타나다니! 이거 재밌겠는데!"

사자와 같은 치렁치렁한 갈기와 부풀어 오른 덩치,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

시종일관 시큰둥한 표정으로 회의 내내 한 마디도 없던 와일드 랜드의 대표, 사자 수인 라이오넬이 짐승 같은 이를 드러내며 하인리히의 옆쪽에 섰고.

"확실히, 파편으로 느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군요. 그래도 신성 결계의 도움이 있는 지금이라면···."

엘븐 킹덤의 대표, 라포리 그랜우드가 주변에 정령들을 불러내며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무리 이번 대의 불사왕에게 특이성이 있다고는 하나, 두 번이나 침입을 허용하다니. 대신전의 방비가 너무 허술한 건 아닌지?"

"흐음, 허나 본인 또한 어떤 마력의 유동도 느끼지 못했소. 그저 갑자기 그 공간에 덧씌워진 것처럼 나타났을 뿐. 솔직히 본인으로써도 어떻게 방비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구려."

사이먼 황태자의 호위로 참여했던 황실의 마스터 급 기사와 마탑 연맹의 맹주에.

"끄끅끅··· 어쩐지 요즘 점괘가 고약하더라니···."

"젠장, 무보수로 일하긴 싫은데. 나중에 주신교단에 청구해도 되려나?"

칼코스 부족 연맹의 대주술사와 용병 길드의 현 용병왕 등···.

당장 싸울 수 있는 강자들이 자발적으로 속속 교단 측에 합류했다.

불사왕의 끔찍한 기운을 느끼고서도 나선 만큼, 그들 모두 잠시나마 불사왕의 공격에서 버틸 수준은 되는 이들이었다.

애초에 자기 주제 파악조차 못하는 인원은 이곳에 참석하지도 못했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불리한 환경 속에서 용사와 성녀를 비롯한 세계의 강자들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크흐흐··· 버러지들이 위세는 좋구나.]

불사왕의 태도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아— 이 몸에 대항하기 위한 정상 회의가 열린다고 해서 기대하고 왔거늘. 정녕 이게 최선인가? 겨우 이 정도 수준이, 이 세계의 정상에 이른 자들이란 말이냐?]

고오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빛조차 빨아들일 것 같은 짙은 어둠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사방을 잠식해 가기 시작했다.

분명 대신전의 신성 결계에 억제되었을 것이 틀림없을 텐데도, 그 압도적인 기세는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끝을 모르고 팽창하고 있었다.

"···설마 이건, 심연의 기운인가? 이걸 직접 다루고 있다고?"

"으음···."

"크흐, 이거 살이 떨리는군!"

그 본능을 자극하는 위압감에 모두가 침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독 감각이 예민한 수인 대표 라이오넬의 꼬리는 이미 저도 모르게 말려들어간 상태.

저벅— 저벅—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그 끔찍한 기세를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이의···.

"몇 가지 오해 하고 있군, 불사왕."

저 크고 넓은 등을 보면서 어떻게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호오? 그게 무엇이냐, 용사?]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양측의 대화가 이어졌다.

하인리히의 뒤편에 선 강자들도, 안전한 결계에 숨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도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첫째, 우리의 저력은 결코 이 정도가 끝이 아니라는 것."

정상 회의라고는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논의를 위한 실무자나 권한을 가진 책임자에 불과했다.

물론 강자의 비율도 높긴 했지만, 그 중 지금도 현역에서 뛰고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둘째."

그의 성검에 머문 빛의 칼날이 「축복 : 증량」의 힘으로 점점 크기를 부풀리며,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듯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 여기 있는 우리만으로도, 지금의 약해진 너 하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아악—

일순, 그에게서 광휘가 뿜어지고.

서서히 세력을 넓히던 불사왕의 검은 기운과 맞닿아 격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폭풍처럼 거칠게 요동치는 기운의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시선이 날카롭게 오갔다.

그리고 그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는 지켜보는 이들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크흐흐흣! 그래, 그럼 나도 너희의 오해를 한 가지 정정해 주어야겠구나.]

그 신경전의 끝에 하인리히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까.

결국 불사왕이 태도를 달리하며 천천히 두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

그의 주변 바닥은 어느새부턴가 끈적하고 질척한 어둠으로 가득 뒤덮인 상태였는데···.

[누가 나더러 혼자라 하더냐?]

덜그럭!

스으으—

그 어둠 속에서, 시커먼 기운을 몸에 두른 언데드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물론 심연을 휘감아 신성 결계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있다곤 하나, 그 능력들이 평소만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데스나이트를 비롯한 최상급 언데드이고.

[소신, 카람. 주군의 부르심을 받고 왔나이다.]

[불사왕께 영광을—! 세상에 영원한 공포를—!]

[···명령을···.]

그를 보조해줄 간부 몇몇까지 함께한다면, 그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이 몸은 심연의 죽음을 집어삼키고, 극복했으며, 지배한 끝에 초월에 이르렀나니. 나는 죽음의 지배자이며—.]

설령 이곳이 대신전 한복판 할지라도.

[—내가 곧 죽음이다.]

***

쿠르르릉—!

성녀가 쏘아낸 굵은 빛줄기가 불사왕의 방어막을 두들겼다.

신성 결계의 도움으로 한층 강해진 그 공격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이며 흑마력의 구조를 흔들었고.

"하압!"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용사의 성검이 섬광과 함께 검은 방어막을 그대로 갈라 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한 바퀴 더 회전한 검이 빛의 날을 길게 내뽑으며 휘둘러졌으나···.

[크흐흣! 제법이구나!]

순식간에 구축된 흑마법진에서 뻗어 나온 검은 손이 그 공격을 대신 맞으며 하인리히를 뒤로 밀어냈다.

그 대가로 검은 손은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그는 조금의 당황도,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고 침착하게 등으로 빛의 파동을 분사해 운동량을 상쇄시키며 다시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떤 상황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서우리만치 냉철한 검격이, 거대해진 광검을 머금고 불사왕에게 휘둘러졌다.

콰아앙—!

그 찰나에 재생성된 방어막과 부딪친 빛의 검.

상극의 기운이 맞부딪침으로써 발생한 스파크와 함께, 재차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치밀한 공방의 연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눈을 뗄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초고위 흑마법과 성법, 고절한 무예를 바탕으로 한 전투술까지.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빠져들 정도로 화려하고, 경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매혹적이었으며.

절망적인 벽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

"···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저 격전지에 끼지 못한 이들이, 보호 결계 내부에서 그저 멍하니 저쪽을 바라보았다.

전투가 계속되자 터져 나온 충격으로 사방이 진동한다.

다행히 사전에 빼곡하게 새겨둔 신성 결계와 기본적으로 대신전에 깃든 신의 가호 덕에, 충돌의 규모에 비해 건물의 손상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아무리 이쪽에서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 여파만으로 이미 주변은 평지가 되어버렸을 터.

'아무리 주신님이 암묵적으로 허락했어도 신전을 완전히 박살내는 건 좀 그렇지. 그래도 지금 이 정도면 리모델링만 신경 써서 하면 될 테니··· 괜찮겠지?'

물론 거기엔 사전에 모든 상황을 조율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개입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몇 번이나 현장답사를 하며 가장 적절한 무대를 선정하고,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싸움을 연출하면 좋을 지부터 주변에 퍼질 여파에 대한 대책까지.

보안 총책임자가 하인리히였던 만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회의장 구석의 명당에 자리한 결계 안에서, 해리스가 마치 영화감독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저쪽으로 병력이 너무 밀집한 것 같으니 균형 맞춰서 좀 조절해 볼까. 흠, 저 양반은 너무 흥분한 거 같군. 잠깐 눌러둬야겠어.'

사자 수인 라이오넬과 구울 로드 피오나가 맞붙은 곳으로 일단의 병력이 이동하며, 좀 더 치열하고 격렬한 전투로 보이도록 진형이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이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진행된 그 작업의 중심은, 당연히 불사왕과 용사의 격돌이었다.

쿠르르릉!

다시 성녀와 추기경의 보조를 받은 하인리히가 한스와 부딪치며 사방으로 충격이 퍼져 나갔다.

우우웅—!

사절단이 몸을 피한 결계가 연신 진동음을 토했다.

그것은 성물까지 사용해 구축한 만큼 후폭풍 정도에 부서질 리 없었지만, 그 여파가 워낙 강력해 결계 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충격에 담긴 기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저 아주 미세하게 스며든 편린의 조각일 뿐이었지만···.

그 모골이 송연해지는 오싹한 기운은, 그것만으로도 어째서 불사왕을 '대륙의 공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여기서 멀리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니오?"

"밖이 저 난장판인데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씀입니까? 이 결계가 없었으면 진작 저 여파에 휩쓸려 시체도 찾을 수 없었을 겁니다!"

격화되어 가는 싸움에 겁을 집어먹는 이부터,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바깥 동태를 살피는 이.

"하! 두 번이나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다니. 내 주신교단을 잘못 봤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또 그 와중에 기회를 잡았다는 듯 정치질을 시도하는 사이먼 황태자까지.

일단 인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건 성공적인 것 같았다.

'그럼 이제 피날레를 준비해야 하는데. ···이참에 해리스도 슬쩍 숟가락을 얹어 볼까?'

그래, 아직 해리스가 주연급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신 스틸러로 살짝 눈도장을 찍는 것도 제법 괜찮을지 모르겠다.

#138

불사왕의 준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