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11

***

짝짝짝—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나는 감동을 금치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주연과 감독을 모두 맡아, 훌륭한 장면을 연출해 낸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첫 단추는 괜찮게 끼었군. 이로써 한스와 하인리히 사이에 대적자로서의 서사가 완성되었다."

이미 완성된 최종 보스 한스와, 급격히 성장 중인 용사 후보 하인리히.

지금의 그는 용사 후보라고 하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 도달한 주교급의 신성력은, 성기사단장들이나 가지고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실질적인 무기술이나 경험 등은 그들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부분은 추후의 노력과 하인리히가 가진 스킬들로 어떻게든 벌충할 수 있었다.

'「축복 : 광검」을 얻은 것도 굉장히 좋고. 어둠 속성을 종잇장처럼 베어버릴 수 있는 극상성의 공격이라니.'

그것이 정말 순수하게 하인리히 혼자만의 힘으로 타이밍 좋게 깨달은 건지, 아니면 지켜보던 후원자께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서포트해 준 건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 힘이 영웅담의 주인공에 더없이 어울린다는 게 중요하지!'

이번에 교단 고위층들의 눈에 강한 인상을 주는 데에도 성공했으니, 이만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극한까지 뽑아먹었다고 봐도 되리라.

'물론 가장 큰 이득은 따로 있지만.'

시선이 방구석의 바닥으로 향했다.

스스스—

방바닥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아래에서 검은 인영이 서서히 올라왔다.

격전 끝에 누더기가 된 로브를 걸친 해골.

이제는 불사왕이 된 한스였다.

철저하게 감춘 덕에 그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오싹함이 느껴졌다.

'분위기 하나는 정말 장난 아니군.'

사실 가진 능력은 더 장난이 아니었다.

-개체명 : 한스

-종족 : 언데드 (불사왕)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명경지수」

-개체 특성 : 「불사의 심장」,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심연의 눈」, 「마력 지배」

-특이 사항 : '불사왕의 심장'을 온전히 계승해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3대 불사왕이 되었다. 심장을 통해 흑마력이 무한히 공급된다. 심장이 파괴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재생한다. 죽음을 초월하여 모든 사자(死者)의 왕이자, 모든 생자(生者)의 적이 되었다.

이미 사용해 본 적 있는 「심연의 눈」은 무한정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지만,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불사의 심장」은 기존의 능력을 강화하는 정도를 벗어나, 「사악한 지혜」나 「금단의 지식」 등 그가 가진 모든 스킬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에 「마력 지배」로 기본 마력 컨트롤이 강해진 건 물론, 상대방의 제어권도 일부 빼앗아 올 수 있게 되었으니···.

'주문 사용 직업의 최종 진화형이군.'

그야말로 마왕 그 자체였다.

거기다 아공간의 심장을 직접 타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받아도 의미가 없으니, 불사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것 때문에 이번 연극도 성공할 수 있었지.'

심장부가 꿰뚫리고 신성력에 지져진 것치곤 너무 멀쩡한 한스의 모습.

「축복 : 광검」에 공간을 가르는 힘은 없었던 만큼, 당연히 진즉에 수복된 것이다.

하인리히는 좀 더 극적인 연출을 위한 저주의 여파로 상당한 회복 기간이 필요했지만, 그 또한 영웅의 시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작전명 '안방극장 : 마왕과 용사'의 서막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설정상 타격을 입은 한스는 당분간 지구에서 활동해야겠지만, 이참에 그동안 밀린 청소를 해치우면 될 터.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수금이지! 관람비를 정산할 차례다.'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한 연극이었다.

물론 이번 사건의 후폭풍이 다른 곳으로 퍼지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그 직접적인 영향력은 교단 내부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였지만, 업적 보상도 있으니 당장 주어진 카르마가 그렇게 적진 않으리라.

『카르마 상점』

『고유스킬 강화 (800,000)』

『스테이터스 강화 –상세 보기』

『보유 카르마 - 1,641,132』

'호오, 대충 백만 정도 오른 건가?'

이계로 전송된 각성자가 단번에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포인트.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얻게 된 카르마였다.

'그 한 번의 사건 스케일이 좀 크긴 했지.'

어쨌든,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고유스킬 강화를 선택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느꼈던 두통이 느껴지고, 나는 또 하나의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유스킬이 성장하여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특수스킬「커스터마이징」를 획득합니다."

아바타마다 1회에 한해 여러 가지 설정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게임에서 캐릭터를 생성하기 전에 몇 시간이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맞춤 제작 서비스 아닌가!

곧바로 사용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그리고 때마침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한스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아바타들은 각자의 일로 바쁜 만큼 당장 시험할 수 있는 아바타가 한스밖에 없었다.

또 만약 「커스터마이징」으로 외형을 변경할 수 있다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를 품으며 곧바로 한스를 통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했고···.

나는 곧바로 할 말을 잃었다.

-매끈한 두개골, 짱구형 두개골, 금이 간 두개골···

-둥그런 안와, 치켜 올라간 안와, 축 처진 안와···

-가지런한 이빨, 뾰족한 이빨, 흡혈귀 이빨···

눈앞에 떠오른 세부 목록.

그것뿐만 아니라, 추가로 세밀한 조절을 통해 자신만의 해골을 원하는 대로 조형할 수도 있었다!

'···종족의 한계는 넘을 수 없는 거였나.'

사실 평소 가면을 쓰고 다니고, 인간관계도 만들 수 없는 한스다 보니 외형 변경은 딱히 도움 되는 능력은 아니었다.

'정 필요하면 환상 마법이라도 덧씌우면 되니까. 이제 마법 수준도 더 올라갔으니, 어지간하면 들킬 일은 없겠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다른 기능들을 더 살펴보았지만, 아쉽게도 한스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형 변경이 전부였다.

「커스터마이징」에 포함된 '초기 스테이터스 설정'은 이제 막 만들어지는 아바타에만 한정되는 능력이었으니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이제 장래 직업에 따라 미리 능력치를 조절해 둘 수 있는 건가?'

지금 그의 능력치는 포인트 분배를 통해 전체적으로 고르게 높은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라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제 그 평이한 능력치를 한 가지에 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법사는 지능과 마력, 전사는 힘과 체력처럼.

'마침 이번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바로 시험해 보자. 이번엔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까···.'

그렇게 아바타 생성을 위해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려는 순간.

"어?"

불현듯 한 가지 정보가 뇌리에 스쳤다.

스킬은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거나 어떤 조건을 달성했을 때에 특정 기능에 대한 정보를 해금 식으로, 새로운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였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만큼 지금 새로 깨달은 기능은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매개체를 통해 그 관련 종족으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되다니!'

'매개체'라는 단어가 굉장히 애매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거실의 구석에 자리한 화분 앞으로 향했다.

세실리가 주었던 친환경 공기청정기··· 아니, '메마른 세계수의 가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동안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것을 잡고 화분에서 쑥 뽑았다.

이것이 바로 '엘프'로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게 해줄 매개체였으니까.

#66

커스터마이징 (2)

'엘프라··· 엘프가 될 수 있단 말이지?'

언데드나 뱀파이어처럼 인간에서 변화한 종족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곧바로 「커스터마이징」을 사용하자, 매개체는 일회용이었는지 손에 들린 가지가 부스러져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달리 눈앞에 반투명한 형상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뾰족한 귀를 한 자신과 닮은 엘프의 모습이.

'하인즈와는 다른 느낌으로 잘 생겼네.'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의 하인즈 2세와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미남자였다.

'···그래도 살짝만 손볼까.'

이 얼굴에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연상하기는 힘들 테지만, 매사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도 아바타는 계속해서 늘어날 테니까.

한스는 해골이니 의미 없고 하인즈 2세와 할리는 자력으로 외모를 변경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인연을 맺은 하인리히는 어쩔 수 없지만, 휴버트는 조만간 성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시간,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공들여 외형을 변경했다.

백옥 같은 피부에 금발과 녹색 눈동자, 장인의 마음으로 빚은 이상 속의 엘프 그 자체였다.

'성별 바꾸기는 안 되네.'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아직 스킬의 숙련도가 부족하거나 다른 조건이 필요한 듯, 여성 아바타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딱히 아쉬운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하니까. 정체를 더 확실하게 숨길 수 있기도 하고."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변명을 주절거리다 헛기침하며, 아바타 생성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초기 능력치를 재조정할 차례였다.

후보 직업군은 정령사와 궁수인데, 역시 어느 쪽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럼 둘 다 하면 되지.'

진짜 게임도 아니니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도 둘 모두 엘프들의 기본 소양이기도 했고.

'능력치는 친화력 쪽으로 몰아넣자. 빨리 강해지기 위해선 일단 정령사 쪽이 유리할 테니.'

대부분의 능력치가 친화력으로 변환되었다.

물론 궁수도 겸할 생각이다 보니 신체 능력치는 많이 깎지 못했지만, 그 부분은 추후 단련으로도 성장시킬 수 있으리라.

'회복력도 많이 떨어졌다지만, 공용 스킬로 「초회복」이 남아있긴 하니까 어느 정도 벌충은 되겠지.'

가진 회복력을 증폭시키는 스킬인지라 기본 수치가 낮으면 효과도 떨어지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고민을 거친 끝에, 드디어 엘프 아바타가 생성되었다.

-개체명 : 해리스

-종족 : 엘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세계수의 아이」

-특이 사항 : 한성현의 일곱 번째 아바타. 세계수의 가지를 매개체로 엘프로 탄생했다. 「세계수의 아이」의 효과로 친화력과 자연력의 성장 속도가 대폭 상승한다.

아까 한스도 그렇고 해리스의 정보창에도 「즉사 면역」에 관련된 내용이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특전으로 받은 능력은 개체 정보창에 표기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더 잘 생겼네.'

앞에 자리한 수려한 외모의 엘프 남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기분 탓인지 뭔가 주변에서 신선한 숲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커스터마이징」으로 탄생해서인지 초기 스킬도 매개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무작위로 부여되는 스킬이라기에는 너무 개체의 특성에 딱 맞아떨어졌다.

아마 「커스터마이징」의 추가 효과일 터.

이는 다음에 또 새로운 아바타를 만들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런데 부드럽게 웃고 있던 해리스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서서히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불쾌한 느낌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답답해···."

뿌연 연기 속에 있는 기분.

그나마 있던 친환경 공기청정기가 사라지면서, 남아 있던 효과가 서서히 떨어져 바깥 공기의 매캐함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예민하네.'

본체로는 아무렇지도 않건만, 해리스는 주변 환경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무라고는 가로수와 한 줌의 공원밖에 없는 메마른 도시 한복판.

그저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괴롭게 느껴졌다.

'이 환경에 익숙해져서 본체의 자연 친화력이 떨어진 건가···.'

굳이 이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어봤자 좋을 일은 없으니, 일단 해리스의 소환을 해제했다.

오늘 자 이계전송진은 한스를 대신전으로 보내며 사용한지라, 내일에나 아우테리카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드디어 하인리히가 정신을 차렸군.'

새 아바타 생성에 몰두한 지 몇 시간, 아우테리카의 시간은 이미 하루가 넘게 지나 있었고···.

치료실에 입원해 있던 하인리히가 눈을 떴다.

***

"으음···."

"아! 하인리히 경, 정신이 드시나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자, 옆에서 한 여성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집중 치료실이에요. 하인리히 경이 이곳에 오신 지 꼬박 하루가 지났어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이에요."

강아지 같은 인상의 치유 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인리히의 몸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맨몸으로 그 정도 수준의 저주를 뒤집어쓰신 것 치곤 예후가 굉장히 좋으시네요. 강체의 축복에 회복력까지 원체 뛰어나신지라 후유증도 딱히 남지 않을 것 같고요."

"그거 다행이군요···."

사실 그것도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각본이었지만, 하인리히는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요. 한 달 정도는 상태를 지켜보며···."

"웃차~"

이런저런 설명을 시작하는 치유 사제.

그는 계속 가만히 누운 상태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답답해서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아앗! 아직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고통이 엄청나실 텐데!"

그녀의 말대로, 잠깐 움직였다고 「마인드 허브」에 걸러지는 정보량이 폭증했다.

이걸 그냥 버텨야 했다면 눈물 콧물을 쏟으며 데굴데굴 굴러다녀야 했으리라.

"아···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는 참을 만합니다."

"그, 그걸 참으신다고요? 아··· 아! 그래도 안 돼요! 누워요, 누워!"

잠시 당황하던 그녀는 기어코 하인리히를 억지로 자리에 눕히고 나서야 진정했다.

"단순히 고통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저주는 정신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혀서, 당분간은 평소에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어요. 스트레스에 취약해져서 사소한 자극에도 발작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음, 그런가요?"

물론 그것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수준 높은 흑마법들 중에서도 그에게 별 영향이 없는 것만을 엄선해서 고른 저주였으니까.

'「마인드 허브」로 '불사왕의 심장'의 정신 오염도 막아내는데 이 정도 수준이야 뭐···.'

그보다 지금은 자신이 기절한 이후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에 대한 내용을 물어보자 치유 사제는 괜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여겼는지, 그냥 다른 생각 말고 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기엔 너무 답답해서 말이죠. 이대로 있는 게 더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은데요? 간단하게라도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계속되는 하인리히의 고집에 그녀도 결국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사망자는 없어요. 대신전의 결계 덕분도 있겠지만, 불사왕이 방심하고 여유를 부린 탓이 컸겠죠. 부상자는 많지만 전부 입원 치료 중이고요."

그리고 마물의 숲으로 파견되었던 토벌대도 급히 귀환해 대신전의 보안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미 거하게 침입을 허용한 이상, 아마 당분간은 경계수위가 내려갈 일은 없으리라.

"이단심문관들은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느라 바쁜 상황이죠."

불사왕이 침입한 경위를 알아내기 위한 현장 조사는 물론, 마물의 숲에는 현지의 이단심문관들이 일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급파되었다.

'이번 사태로 엘프들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겠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이 대신전의 방비를 낮추는 데 한몫한 셈이 되어버렸으니···.

당장 교단 측에서 대놓고 뭐라 하진 않겠지만, 지난밤의 소동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은 자리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이단심문관들이 한스의 비밀 실험실을 발견하고 나면 엘프들의 억울함도 풀리겠지.'

그들은 한스가 언제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낼 능력이 있었으니까.

"아! 하인리히 경! 깨어나셨네요!"

때마침 성녀가 치료실로 들어서다가 하인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던 치유 사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지 않나요? 이렇게 일어나 계시는 것보단 푹 주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재워드려요?"

하인리히가 누워있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쉴 새 없이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하인리히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있다간 정말로 성녀가 성법을 사용해 그를 재워버릴지도 몰랐으니.

"아, 괜찮습니다. 그냥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건데요 뭐. 오히려 제가 기절한 이후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다죠?"

서둘러 화제를 돌린 효과가 있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하인리히 경이 늦지 않게 불사왕을 쫓아버린 덕분이죠. 놈을 그 자리에서 해치우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모두 전멸하는 최악의 사태만은 면했으니까요."

"모두가 힘을 합친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축복을 얻어 불사왕의 심장에 빛의 검을 꽂아 넣는 순간은, 마치 영웅담의 한 장면 같았어요!"

반짝이는 눈으로 공치사를 날리는 성녀와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겸양의 말을 하는 하인리히 사이의 공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그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저는 지금 라포리 님께 갔다 오는 중이에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다시 한번 불사왕의 위치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을 드렸는데···."

라포리도 상황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터라, 성녀의 요청에 급하게 재탐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어제까지만 해도 마물의 숲에 머물러 있던 불사왕의 기운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고 한다.

"물론 엘븐 킹덤 측을 의심하진 않아요. 라포리 님은 침묵의 축복까지 받으셨기도 하고,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요."

타이밍이 공교롭기는 하지만, 엘프들을 의심하기보단 불사왕이 대신전의 방비가 약해진 틈을 절묘하게 노리고 들어왔다고 봐야 하리라.

여전히 '어떻게'라는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긴 했지만.

"앗! 말하다 보니 너무 하소연만 늘어놓았네요! 환자이신데 괜히 신경 쓰이게!"

"괜찮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냥 누워만 있는 것보단 훨씬 나으니까요. 말동무가 되어주시면 저야 좋죠."

이렇게 여러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 말이다.

이후 성녀가 다시 일을 보러 떠나기 전까지,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

이계전송진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인리히가 입원한 지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아우테리카 차원으로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리스는 타라크의 거점에 머무르고 있던 휴버트 앞으로 곧바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휴버트에게서 그간 차고 있었음에도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았던 하이 엘프의 팔찌를 인계받았다.

"음··· 확실히 뭔가 느낌이 다르군."

팔찌를 팔목에 걸자마자 오는 반응.

처음부터 친화력이 강한 상태였기 때문인지, 다른 아바타가 착용했을 때와는 느껴지는 감각 자체가 달랐다.

주변의 자연력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고, 속성에 대한 감응력도 확연히 증가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이건 그야말로 해리스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장비였다.

'그것도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 없는 최종 장비나 다름없지. 무려 하이 엘프가 직접 사용하던 거니까.'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쓰다듬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알림이 떠 오른 것은, 그가 한참 느껴지는 감각에 심취해 있던 순간이었다.

"세계수가 자신의 아이를 바라봅니다."

"어라?"

세계수가 해리스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내 분신이 거물이 되어간다

#67

커스터마이징 (3)

"호오··· 과연, 소문대로 아주 질이 좋은 후추로군. 가공 상태도 깔끔하고."

"직접 사용해 본 이들의 평가도 아주 좋습니다. 높으신 분들도 하나같이 만족하신다고 하더군요."

"이 정도면 잘만 갖다 팔면 마진은 물론, 인맥을 다지는 데에도 그만이겠는데."

휴버트의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공간 마도구에 가득 담아온 후추는 상당히 높은 가격을 책정했음에도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후추 판매 초기에 근처의 대형 상단에 샘플을 보내고 이런저런 연을 맺어둔 것이 좋게 작용한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상대가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할리 서비스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교단을 통해 정식으로 용병 길드에 전해진 감사 인사는 할리의 유명세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명해진 만큼 시비가 걸리는 빈도도 전보다 늘었지만, 그 또한 새로운 마케팅이 될 뿐이었다.

'그 흉악한 외모의 할리에게 싸움을 걸 정도면 나름대로 유명한 놈들이었을 텐데. 그런 이들을 맨손으로 접어 버렸으니···.'

타라크 용병계의 유명 인사가 된 할리.

그런 이가 동업자의 신분으로 있는 휴버트 상회도 나름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거기에 좋은 제품과 합리적인 가격, 한정된 물량을 이용한 마케팅. 또 유명인의 이름을 이용한 신뢰도까지. 이건 실패하는 게 이상하지.'

외부의 개입 또한 할리 덕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대형 상단 등의 커다란 세력은 기본적으로 교단과 연을 맺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인맥을 통해 할리가 정말로 교단 상층부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휴버트 상회를 건드릴 생각을 접어 버렸다.

그들 입장에서는 작은 사업체 하나 꿀꺽하겠다고 교단에 밉보이는 게 더 손해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정보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은···.

"크헉··· 요, 용서를···."

어두운 뒷골목.

험상궂은 사내들이 곳곳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할리, 이놈이 용서해달라는디?"

얼굴에 문신이 새겨진 산만 한 덩치의 사내가 한 파락호의 멱살을 잡고 탈탈 털다가 옆쪽으로 말을 건넸다.

"용서? 이 새끼들이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제 와서 용서야?"

"이런 것들은 처음부터 뿌리를 밟아 놔야 다신 기어오르지 않거든? 내가 시범을 보여줄게."

그의 말에 할리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마찬가지로 몸 곳곳에 문신이 있는 덩치 두 명이었다.

한때 그와 마찰을 빚었다가 이제는 형제처럼 가까워진 남부 전사들.

가장 큰 덩치의 루왕, 눈가에 칼자국이 있는 다오, 얼굴에 털이 가득한 투라바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지금 할리를 도와 휴버트 상회에 개수작을 부리려던 파락호들을 밟아놓는 중이었다.

'물론 무보수로 부려 먹는 건 아니지만. 돈도 많이 버는데 이런 데에 아낄 필요까진 없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으면서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다.

돈 몇 푼으로 적극적인 협조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음, 그러고 보니 뭔가 할리의 인상이 조금 바뀐 것 같지 않아?"

"너도 그래? 난 뭔가 전보다 친근감이 느껴지는데."

"그건 그냥 그동안 친해져서 그런 거 아녀?"

"그런가?"

일을 마치고 술 한잔하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별 의미 없이 나온 대화 주제였지만, 할리는 괜히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찔끔찔끔 바꾸고 있었는데···.'

정말 그의 얼굴형이 처음과는 미묘하게 다를 정도로 변하는 중이었으니까.

남부 현지인들을 셋이나 만났으니, 이참에 그 특징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기회였다.

뭔가 미묘했던 할리의 얼굴이 매일 조금씩 남부인의 인종에 맞게 수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하핫! 그게 다 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의미 아니겠나! 이제 정말 형제처럼 느껴지는 거지!"

할리는 넉살 좋게 껄껄 웃어대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화제를 넘겨버렸다.

그리고 들어선 술집 안에서 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주제는 대부분 남부 지역에 관한 것으로, 현지인들의 생생한 경험담이 주가 되는 아주 유익한 정보였다.

"···그래서 남부를 벗어나면 각인을 새기기 힘들단 말야. 주술사들이 대부분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으니께."

"가끔 다른 곳에서 마주칠 때는 있는데, 그때 자격을 증명하고 대가를 지불하면 새로운 각인을 새길 수 있지."

그 중엔 그들이 자주 말하던 '각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가끔 멍청한 것들이 분수에도 맞지 않는 각인을 새기려고 드는 경우가 있는데, 어지간한 경우라면 주술사가 알아서 쫓아내거나 할 테지만···."

"가끔 있단 말이제. 꼭 지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이."

협박, 회유, 매수, 속임수 등으로 억지로 몸에 각인을 새기는 경우가 있었다.

"괜히 자격 증명이 필요한 게 아닌데 말이야."

각인은 단순한 문신이 아니었다.

육신에 흐르는 생명력과 마나, 당사자가 쌓아 올린 업을 엮어서 새기는 신비의 한 갈래였으니.

'육체를 강화하는 생체 마법진의 일종인가?'

분수에 맞지 않는 각인은 수명을 갉아먹는 건 물론이고 근손실과 정력 감퇴, 노화와 탈모까지 온갖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부에서는 각인 하나 없으면 전사로 인정해 주지도 않아. 가장 기본적인 '전사의 각인'의 자격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니."

그게 그들이 '자칭 남부의 전사'였던 할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이유였다.

벌거벗고 다니는 몸에는 장난 같은 낙서만 있을 뿐, 어디에도 각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당장 얻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남부로 가기 전에는 꼭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는 상남자답게 커다란 잔에 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휴버트와 할리가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새롭게 타라크에 합류한 해리스는 며칠간 계속해서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끄응··· 뭔가 느껴지긴 하는데···."

휴버트가 구해 놓은 거점에 틀어박혀 매일 명상을 통해 정령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엘프 아바타 해리스.

하이 엘프가 될 수 있을 줄 알고 기대했건만, 세계수가 바라본다는 알림 이후로 딱히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자연력인 것 같은데, 정령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거지? 아직 내 친화력이 부족한가?'

나무 등의 자연물을 통해 한 번 걸러져 맑고 깨끗하게 정화된 마나, 자연력은 정령 계약 시에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었다.

초기 능력치도 그렇고 「세계수의 아이」와 팔찌의 효과로 친화력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어떻게 정령사가 될 수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러기보단 좀 더 자연력이 풍부한 숲속으로 가서 시도해 봐야 하나···?"

그동안은 엘프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젠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대충 후드를 눌러써서 귀를 가리면 되겠지. 정령을 계약하기 전에는 최대한 몸을 사리려고 했는데···.'

이온 대륙에서 희소한 종족인 엘프는 필연적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 엘프 후보였던 세실리도 그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갔던 것이 아닌가.

'그래, 세실리처럼··· 응? 가만···.'

하이 엘프 라포리와 후보 세실리, 그리고 스물에 가까운 엘프 사절단까지.

그들은 아직도 로셀리아 대신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탈리아 왕국의 이단심문관들은 마물의 숲에서 불사왕이 머물렀던 거처를 발견하고, 그가 대신전에 침입하기 직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밝혀냈다.

여전히 그가 어떻게 대신전의 방비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알아차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교단 측도 엘프들을 의심한 건 아니었으니까.'

일의 진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것뿐이라, 엘프들에 대해선 교단도 처음처럼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 일도 마쳤으니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하던데···.'

독학하는 것보다는 같은 엘프의 도움을 받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조언이라도 받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좋아. 그게 좋겠다.'

해리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당당히 타라크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가 목적지에 다 와 갈 무렵, 옆의 골목에서 거대한 거구가 어슬렁거리며 접근했다.

가녀린 체구의 해리스와는 반대로 크고 우람한 몸뚱이.

위압적인 걸음으로 다가온 사내, 할리는 자연스럽게 그와 합류해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부 전사들과 술자리를 가지다가 해리스를 돕기 위해 시간을 내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걸어 곧 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 할리 님이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무슨 일로··· 혹시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개성적인 모습으로, 그 존재 자체가 신분증인 할리를 알아보고 신전의 입구를 지키던 성전사가 말을 걸어왔다.

"하하핫—! 이번에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이오. 안쪽에 이야기 좀 전해 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해서 마련된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간단했다.

그리고 징표로서 자신이 사용하기 애매했던 팔찌까지 선물로 줬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의 도움 요청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합의가 끝난 사항이라, 할리의 이야기는 곧바로 로셀리아 대신전의 엘프들에게로 전달되었다.

***

우우웅—

이미 몇 번이나 이용해 본 게이트를 지나니,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공간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해리스 님. 로셀리아 대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쪽만 일방적으로 얼굴을 아는 게이트 담당 대사제가 그를 반겼다.

그리고 해리스는 다른 사제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안내되었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곳을 전혀 다른 신분으로 오게 되니 뭔가 어색하네.'

엘프들의 도움을 받기로 이야기가 되자마자, 그는 교단의 협조를 받아 며칠에 걸친 게이트 이동으로 로셀리아 대신전까지 도착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안내받은 곳은 엘븐 킹덤에서 온 이들이 머무는 숙소였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엘프들이 한데 모여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븐 킹덤의 하이 엘프, 라포리 그랜우드라고 합니다."

해리스가 들어서자 라포리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저는 해리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할리 님의 부탁이시기도 하고, 같은 동포의 일이니까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한 라포리는 해리스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리 님이랑 절친한 사이이신 모양이군요. 그분이 호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하신 부탁이 자신의 친구를 도와달라는 것이라는 말에 상당히 놀랐습니다."

"아··· 상당히 친밀한 관계이기는 하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랄까요···?"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팔찌는 원래 라포리 님이 사용하시던 거라고 들었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 같아서 받기는 했는데, 불쾌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것은 제가 감사의 대가로 할리 님께 드린 것이고, 그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든 제가 더 이상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요."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오히려 그걸 저희 동포분을 위해 사용해 주셨다는 것에 재차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눈으로 해리스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왠지 부담스러워지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해리스 님이 원하시는 게 자연력을 다루는 방법과 정령과 계약하는 법이라는 말씀이시죠?"

"아, 예. 그렇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혼자 살아온지라,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없더군요. 어떻게 조언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찾아왔습니다."

"흐음···."

라포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좀 과하게 친밀하게 여기는 것 같은데? 뭔가 눈치챈 건가?'

아무리 은인의 소개로 찾아온 타지의 동포라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라포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말입니다. 해리스 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으로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에나멜 대륙으로요?"

"예, 저희도 조만간 돌아가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짧게 조언만 듣는 것보단 그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가게 되면 정령술과 궁술 등 여러 가지를 좀 더 세세하게 교육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은근히 유혹해왔다.

'엘프··· 이종족··· 다른 대륙··· 새로운 모험!'

이런 좋은 기회를 굳이 거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흔쾌히 수락하려는 찰나, 라포리가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엇보다, 세계수께서 해리스 님을 눈여겨 보이시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아직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건 아니지만, 적성 정도는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미묘했던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세계수께서는 해리스에게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었다.

#68

각인 (1)

신전을 통해 해리스의 전언이 할리에게 전달되었다.

사실 필요도 없었지만, 남들의 시선에 따라 지켜야 하는 절차가 있었으니까.

할리는 친우의 여정을 기꺼이 축하해 주었고, 해리스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과 함께 에나멜 대륙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불사왕과의 일이 영 찝찝하게 끝난지라, 윗선끼리 아직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절단의 엘프들은 하나같이 엘븐 킹덤의 엘리트들이었으니, 그 와중에도 기본 교육은 착실하게 이뤄졌다.

정령술과 궁술을 비롯해 우아한 숲의 요정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우기 위한 그 과정에는, 그 혼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할리 님과 친구분이시라구요?"

북부 산맥에서 할리가 구해주었던 엘프 소녀, 세실리도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만난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는지라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죠."

"그래서 그런가? 해리스 씨에게서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요."

순간적으로 익숙한 아이가 오버랩되는 대사에 내심 움찔했다.

'디아나 같은 말을 하네. 설마 눈치채진 않았겠지?'

라포리도 별말을 하지 않은 걸 보니 하이 엘프로서의 능력은 아닌 듯한데···.

그렇게 속으로 혼자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아! 세계수의 가지에서 느껴졌던 냄새랑 비슷하네요! 제가 그걸 하루 종일 끌어안고 있어 봐서 잘 알거든요."

'그 가지, 이 몸의 재료가 되어 사라졌답니다.'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세실리가 기시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흐음~ 그래서 라포리 님이 신경 쓰시는 건가···?"

그리고는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저희 잘 지내봐요. 할리 님의 친구분이라고 하니, 제가 잘 챙겨드릴게요."

작은 엘프 소녀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어깨를 활짝 펴고 으스댔다.

아무래도 자기 혼자 교육받다가 새로운 교육생이 오니, 선배인 티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하···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어진 정령술 강의.

"정령은 정령사와 함께 성장해 나가는 동반자입니다. 계약한 정령은 친화력을 통한 교감과 자연력을 공급받아 성장하죠. 그리고 계약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왜 그동안 해리스가 정령사가 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호감이 가는 외모(친화력)와 충분한 재력(자연력)이 있다고 해도 결혼(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절차가 필요한 법이었다.

제대로 상대를 인식하고 서로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으니, 그 과정이 바로 정령술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요? 처음이라면서요?"

그리고 그가 손끝에 자연력을 뭉쳐 다루는 모습을 본 세실리가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작은 물의 정령을 소환한 채, 뭔가 조언을 하고 싶다는 듯 기대 어린 표정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떨떠름해진 상태였다.

그동안 수많은 에너지를 다뤄 온 가닥과 이세계 성장 보정, 아바타 성장 가속, 거기에 「세계수의 아이」의 효과까지.

그에게 이런 기초 중의 기초는 그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호오, 습득이 굉장히 빠르군요. 이대로라면 곧 두 분의 진도를 맞출 수도 있겠는데요?"

강의를 맡은 엘프는 일이 편해졌다고 좋아했으나, 세실리는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물의 정령을 다루는 데에 더 집중할 뿐이었다.

그녀도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춘 만큼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진짜 하이 엘프는 아닌 만큼 해리스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궁술이나 산악 기동 등 몸을 쓰는 일에 관해서는···.

"과연, 용병 일을 하다 왔다더니 신체를 다루는 건 제법이로군. 활 쓰는 방식에서 인간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많이 쏘다 보면 교정이 되겠지."

엘프 교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육체파 선배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하인리히의 「무골」과 「종합 무기술」로 궁술까지 미리 습득해 둔 상태였으니, 딴 사람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흐엑··· 헥···."

활을 들고 나무 위를 달리는 훈련이 끝나고, 세실리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몰아쉬었다.

"으아··· 이, 이쪽은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패배를 인정하죠. 제가 졌어요!"

···그녀의 마음속에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경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교육을 받은 지 며칠.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정령술」을 획득합니다."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해리스는 빠르게 「정령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파직— 파직—

허공에서 작은 빛뭉치가 스파크를 튀겼다.

최하급 번개의 정령.

모든 정령은 정령사의 수준에 따라 함께 성장한다.

이 아이도 지금은 최하급 정령이지만, 그의 능력이 증가할 때마다 교감을 통해 계속해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네 이름은 와트다."

파직— 파지직—!

'볼트(Volt ;전압)'는 뭔가 흔한 느낌이고, '암페어(Ampere ;전류)'는 어감이 좋지 않으니 '와트(Watt ;전력)'였다.

그렇게 해리스는 정령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

한스는 지구에서 범죄자 청소 중이고, 하인즈 2세도 지구의 세력을 다지는 중이다.

하인리히는 부상으로 입원 중이었으며, 해리스는 엘프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

'어쩌다 보니 지구에 둘, 대신전에 둘, 타라크에 둘씩 배치가 됐네.'

타라크의 두 아바타는 각자 사업과 사냥을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휴버트의 후추는 10일에 한 번, 그것도 여유가 생길 때만 이계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다 보니 공급의 안정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래서 그것은 프리미엄 상품으로 두고, 그간 챙긴 밑천을 바탕으로 「감정」을 이용해 다른 분야까지 발을 넓히고 있었다.

일단 상인에게 물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까.

그간의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 신뢰도도 쌓여서 어렵지 않게 순항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할리는···.

"오! 할리! 드디어 왔구만! 얼른 이리 와봐!"

구레나룻을 비롯해 얼굴에 털이 가득한 남부 전사, 투라바가 단골 주점으로 막 들어서는 그를 격하게 반겼다.

해리스를 대신전으로 보낸 후, 오랜만에 강철의 성채를 넘어 사냥하고 막 돌아온 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래?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휴버트 상회도 한창 성장 중인 만큼 경비를 서는 용병들을 따로 고용하기도 했지만,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직접 신경 써 주는 게 당연히 더 안전했다.

할리가 이번에 마음 편히 사냥을 다녀온 것도 베테랑 용병인 삼인방이 있어서였는데···.

'휴버트한텐 별일 없었는데?'

그가 평소와 같이 위압적인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자리에 앉자, 할리 다음으로 덩치가 큰 근육 돼지 루왕이 그에게 잔 하나를 건네며 실실 웃었다.

"이번에 투라바가 기가 맥힌 걸 발견했다는데."

"확실히, 할리가 좋아할 것 같긴 했지."

눈가에 칼자국이 있는 다오도 술을 홀짝이며 맞장구쳤다.

"오? 그렇게까지 말하니 기대되는군!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보라고! 정말 좋은 정보면 오늘 술은 내가 다 살 테니! 하하핫!"

할리는 큰 기대는 하지 않으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친구들은 다 좋은데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일이 잦았으니까.

"이거 허리띠 풀고 마셔야겠구만!"

"투라바 덕에 오늘 뒤질 때까지 마실 수 있겄어!"

"거 친구들, 답답하게 설레발은 그만 치고 얼른 이야기나 해 보라고!"

삼인방에게 재차 핀잔을 주고서야 듣게 된 이번 정보는, 진짜로 솔깃한 내용이었다.

"남부 출신의 주술사가 이곳 타라크에 있더군! 저번에 말했지?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주술사에 대해서 말이야."

남부의 전사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다는 여러 종류의 각인들.

가짜가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거··· 정말 반가운 정보로군! 좋아! 일단 배터지게 마시며 이야기해 보자고!"

이내 그들은 옆에 술통을 잔뜩 쌓아두고 죽어라 마시며 용케 멀쩡하게 대화를 나눴다.

"흠흠, 내가 요즘 타라크 서쪽 거리에 갈 일이 좀 있었는데 말이지···."

"이 친구 요즘 그 근처 포목점 아가씨한테 작업 걸고 있잖어."

돼지가 털보의 말을 끊으며 낄낄거리자,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연애 사업은 별로 순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크으~ 암튼! 내가 지름길로 가려고 거기 골목을 지나가다 딱 마주치고 말았지 뭐야!"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남부의 주술사가 있었을 줄이야.

"상황을 보아하니 없이 사는 사람들 잔병이나 고쳐주며 겨우 밥벌이 하며 사는 것 같던데. 실력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더군."

"기껏 주술로 한다는 게 그런 거면 별 볼 일 없는 거 아냐?"

"글쎄? 사람 사정이야 제각각이니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주술사면 전사의 각인 정도면 새길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의견이 분분해졌지만,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할리는 털보 투라바와 함께 주술사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흐음, 그간 제법 타라크에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처음 와 보는 것 같군."

"우리 같은 용병은 어지간하면 이런 곳까지 올 일이 없으니까. 특별한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빈민가까지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허름한 것이 도시의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지역인 것 같았다.

"용병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저 차림새는···."

"쉿! 못 본 척해."

"빨리 가자고."

언제나와 같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할리와 험상궂은 용병 그 자체인 털보가 나란히 길을 걷자, 지역 주민들이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 구역의 건달로 보이는 청년들도 슬쩍 시선을 돌리고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할리, 그 복장은 정말 계속 그렇게···."

"응? 이 멋진 차림이 어때서! 진정한 전사의 기개가 느껴지지 않나?"

"···그래, 마음대로 해."

물론 항상 있는 일이었던 만큼 그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털보는 아직도 조금 민망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그 주술사는 어디지? 제법 들어온 것 같은데."

"다 왔어. 저기 저 골목만 지나면···."

그리고 골목을 지나고 처음 마주한 것은, 할리에게 굉장히 반가운 장면이었다.

"아~ 노인네 참 말귀를 못 알아먹네."

"그니까, 치료비를 조금만 높이면 다 해결되는 문제라니까?"

"거 우리가 너무 곱게 대해주니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얼굴에 문신이 가득한 왜소한 노파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는 파락호들.

사건의 냄새가 났다.

"오호라~?"

할리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가며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주술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마당이었는데, 굉장히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자신의 무력을 과시할 기회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놈들에게 다가갔다.

"응? 어··· 어?"

"야, 야! 잠깐 멈춰봐···."

그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파락호들이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눈치 빠른 털보는 어느새 그들이 도망갈 길목을 막아선 채였다.

하지만 할리에게는 아쉽게도, 따로 무력행사할 것도 없이 일은 한순간에 끝나버렸다.

도망도 치지 못한 놈들을 그 위압적인 근육으로 하나하나 어깨동무해 주며 지그시 눈을 마주쳐 주자, 하나같이 오줌을 지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푼돈이나 뜯는 놈들에게 「야성」까지 사용한 건 좀 심했나?'

실력도, 깡도 부족해서 용병조차 되지 못한 놈들이다.

그런 이들이 몬스터 이상인 그의 기세를 코앞에서 버티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니들 얼굴 기억했다? 이 형님들이 저 할매한테 볼일이 좀 있으니까, 알아서 처신 잘해라?"

한쪽에서 털보가 문신이 새겨진 얼굴을 들이대며 그들을 조곤조곤 타일렀다.

자상하게 어깨를 다독여 주는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파락호들이 달아나면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멱살이 잡혔던 노파는 어느새 태연한 기색으로 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끌끌끌···, 남부 출신 야만인들이 여기까진 무슨 일로 왔누?"

"거 야만인이라니, 요즘 그런 말 하면 남부인들에게 돌 맞소, 할매."

"암만 봐도 저치는 모범적인 야만인 그 자체인데, 뭔 헛소릴 하는가? 내 젊었을 적 보던 모습이랑 똑같구먼. 흘흘···."

"끄응, 저 양반은 그··· 에휴. 그보다 전사가 주술사를 왜 찾아왔겠소? 각인 새기려고 온 거지."

뭐라 한 소리 하려던 털보가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본론을 꺼냈다.

저 복장은 도저히 어떻게 변명할 수 없었으니까.

"흐음, 한 명은 제법 노련한 전사인 듯하고. 다른 하나는 복장은 모범적인 남부 전사 그 자체인데, 몸에 각인 하나 없구먼. 알고 있겠지만, 각인은 아무나 새길 수 없··· 응?"

말을 이어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노파가 묘한 빛이 감도는 눈길로 그들을 훑었다.

그러다 그 시선이 할리를 향한 순간, 줄곧 태연한 기색이던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더니 곧바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다.

"뭐야? 이 괴물은?"

#69

각인 (2)

"거기, 털복숭이. 이거 진짜 인간 맞는가?"

눈을 연신 끔벅거리던 노파가 할리를 삿대질하며 털보에게 물었다.

"거, 할매 노망났소? 사람한테 이거라니! 그리고 할리가 그동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어서 그렇지, 어엿한 인간이오!"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털보는 거품을 물듯이 흥분해서 항변했다.

파란만장한 '할리의 대모험'의 4막 3장에 사악한 흑마법사 '한스'에게 사로잡혀 생체실험을 당하다 탈출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마 그걸 염두에 두고 그를 신경 써 준거겠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세심한 친구란 말이야.'

괴물이란 말에 내심 움찔했던 할리는 우람한 근육이 가득한 팔짱을 끼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어쨌든, 정말 인간이란 말이지?"

털보가 노발대발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이 그녀는 다시 찬찬히 그를 살펴보았다.

"거참, 나도 그동안 많은 전사들을 봐 왔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구먼."

"노인장! 대체 뭐가 문제인지 설명 좀 해 주쇼. 이거 답답해서 원!"

그리고는 재차 감탄을 터트리는 노파의 모습에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뭐 했던 할리가 끼어들었다.

"딱히 문제라는 건 아니야. 오히려 아주 좋다고 볼 수 있지. 흘흘···."

"오호?"

"끄응··· 그보다 바깥바람이 차구먼. 안에 들어와서 얘기하지. 나이를 먹으니까 삭신이 쑤셔서 말이야."

등을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고맙다는 말도 안 했군. 곤란하던 차에 도와줘서 고맙구먼. 차를 내올 테니 적당히 앉아 있어."

이런저런 잡동사니로 가득한 내부로 들어서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노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풀을 달인 차를 내왔다.

"편히 드시게. 몸에 좋은 거니. 늙으면 좋은 걸 챙겨 먹어야 하거든. 오늘 도와준 것도 있으니 고맙다는 의미로 주는 게야."

할리는 곧바로 찻잔을 집어 입에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김이 펄펄 날 정도로 뜨거운 찻물은 그의 강인한 육체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핫하하! 건강해지는 맛이군! 자,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 주쇼!"

"에잉··· 젊은 놈이 성질머리가 그렇게 급해서야."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노파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자격이 없는 자는 각인을 새겼을 때 부작용이 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 정도야 기본이지!"

"각인은 기본적으로 육체의 에너지를 크게 소비하지. 마나··· 그러니까 전사들이 사용하는 오러의 비중도 크긴 하지만, 그것보단 생명력이 더 중요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대상자의 육체에 흐르는 생명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내 이 정도 생명력은 처음인지라 당황해버렸지 뭔가? 대전사도 몇 번 본적이 있지만, 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할리가 그 정도였소? 물론 오러를 쓰지 않고도 굉장한 수준이긴 했는데···."

"저 정도면 인간이라기보단 몬스터에 가까워.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본 게야. 정말 인간이냐고."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신체 능력을 지닌 몬스터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생명력.

그것이 고스란히 할리의 몸에 담겨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각인은 몸에 흐르는 생명력을 억지로 끄집어 올려서 사용하는 만큼, 그것이 풍족할수록 더 효과가 강한 걸 많이 새길 수 있지."

각인이 새겨진 그 순간부터 지속적으로 생명력이 소모되기에, 전사의 단련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같은 에너지가 필수였다.

"그런데 이 정도면 전사의 각인이 아니라, 대전사의 각인을 새겨도 충분하겠구먼."

"오! 그런데 혹시 그 위 단계는 없소?"

"흘흘··· '투왕의 각인'이라고 있긴 하지만, 근 수백 년간 아무도 새기지 못했다는구먼."

"호오, 투왕이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이름에, 할리의 눈빛이 번뜩였다.

"물론 그건 나도 할 줄 몰라. 애초에 대주술사 주도 아래에 여러 주술사의 보조가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고."

"거참,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일단 대전사만이라도 새겨주쇼. 나 정도면 그 정돈 가지고 있어야지! 하하핫—!"

"고것도 좀 곤란한데."

"아니, 왜!"

할리의 항변에도 노파는 느긋하게 차를 들이켜며 애간장을 태웠다.

"우선 첫 번째, 재료가 없어. 알다시피 여기까지 남부의 전사가 찾아온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그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지."

오랜 세월 잔병이나 고쳐주며 지내다 보니, 당장 있는 재료들은 그쪽에 사용하던 것뿐이었다.

"그 정도야 내가 금방···."

"그리고 두 번째, 대전사의 각인을 새기기 위해선 그만큼 합당한 업이 필요하지. 단순히 생명력이나 마나가 많다고 새길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래도 수준 높은 각인일수록 까다로운 조건이 달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기면 이전에 들었던 부작용들이 그 당사자를 갉아먹게 되는 것이리라.

근손실, 탈모, 노화, 정력 감퇴···.

'안 돼!'

하나같이 치명적인 부작용에 할리는 곱게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그 필요한 업이라는 게 뭐요? 드래곤이라도 잡아야 하나?"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던지라, 불퉁한 어조로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흘흘흘··· 그 정도까진 필요 없어. 어디 보자···. 그래, 강철의 성채 너머의 북부 산맥. 그곳의 포식자인 오우거를 단신으로 사냥하는 정도면 되겠구먼."

'응?'

"오우거라니! 할매, 그게 어떤 괴물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요?"

옆에서 듣고 있던 털보가 경악해 소리쳤다.

오우거는 5미터에 가까운 덩치에 어마어마한 밀도의 근육, 예리한 감각을 가진 최상위 포식자였다.

그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사냥해 먹기만 해야 하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고랭크의 용병 여럿이 한꺼번에 덤비고 막대한 피해를 보아도 잡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그걸 혼자서 잡으라니.

"대전사에 도전하겠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야겠지. 사실 이것도 최소 기준이야."

"음··· 하긴, 대전사라면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리고 사냥에 성공한다면, 그 부속물은 각인을 새기는 데 쓸 수도 있겠지. 고위 몬스터는 주술을 사용하는데 훌륭한 재료가 되니까."

느긋하게 말을 마친 노파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할리는 말없이 품속의 아공간 마도구를 뒤적였다.

"그러니 일단 다른 각인을 받고 성장한 후에, 천천히 도전해 보··· 푸우웁—!"

"으엑! 뭐 하는 거요, 할매? 남의 얼굴에 갑자기··· 으이잉?"

그는 주섬주섬 몬스터 부속물을 꺼내 놓았다.

커다란 뼈다귀와 힘줄, 눈알, 피가 담긴 병 등 종류별로 골고루.

"어··· 이건 설마···."

털보가 멍청한 얼굴로 그것들과 할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오우거! 오우거의 부속물이군! 그것도 사냥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신선한 것들이야!"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알아본 노파가 경악해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이건 아주 신선한 것들이었다.

강철의 성채 너머로 가서 사냥하고 어제 막 귀환한 직후였으니 말이다.

'오자마자 주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느라 처분하는 걸 까먹고 있었는데, 잘됐네.'

다시 번거롭게 재료를 구하러 갈 수고를 덜었다.

"혹시나 해서 묻지만··· 이거 설마, 혼자 사냥해 온 겐가?"

이 타이밍에 재료들을 꺼내놓는 것을 보고 뭔가를 느꼈을까.

할리가 꺼낸 물건들을 자세히 살피던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눈만 껌벅였다.

"흐··· 후하하핫—!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노인장! 이 몸에게 오우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파하핫!"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이걸로 대전사의 각인을 새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는 거로군?"

"그···그렇지. 혹시나 해서 다시 묻지만, 정말 혼자 잡은 게 맞겠지?"

"당연하지!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뻔히 아는데,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그의 말에 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잔에 차를 따라 다시 홀짝였다.

"그런데 할매. 대전사의 각인을 새길 수 있을 정도면 꽤 실력 있는 주술사라는 소린데, 왜 이런 데서 이렇게 지내는 거요?"

그때 얼굴에 묻은 찻물을 대충 닦은 털보가 시큰둥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녀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다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 마시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가 뭐가 어때서? 적당히 밥 벌어먹고 있고,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데?"

"정작 할매가 봉변당할 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인간들 말이오?"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나."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아무래도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할리는 자신의 용건부터 빨리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각인은 언제 받을 수 있겠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다른 각인도 받고 싶은데···."

"에잉··· 그놈 참, 성질 급한 건 한결같구나."

혀를 차던 노파가 뭔가를 생각하다 대답했다.

"일단 지금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 다른 재료들을 구하고 미리 준비하는데 하루는 걸릴 게야. 모레 다시 오도록 해."

"재료를 말해주면 내가 금방 모아 올···."

"어허! 주술이라는 게 그렇게 서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야!"

시일을 맞춰 하나하나 정성들여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일 또한 주술에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비용 절반은 선금이야. 보다시피 가진 게 없어서 재료를 구할 수도 없거든."

고가의 몬스터 부속물과 순조롭게 장사 중인 휴버트 덕에 매우 풍족한 상황이었으니, 비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때 다른 각인도 같이 받을 수 있나?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데 말이오!"

"하나 새긴 후에 일주일 정도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도 체력을 보충해야지. 각인 새기는 게 쉬운 줄 알어?"

그렇게 모든 용건을 마치고 나서, 할리와 털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파와 모레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골목길을 걸어 돌아가는 길.

"으엇차~! 자, 그럼 아까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러 가 볼까?"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내뱉는 그의 말에, 털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엉? 할리, 여기 오기 전에 뭐 하다 온 게 있어?"

"하하핫!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친구? 우리 같이 하다 만 거 있잖아?"

아무래도 이 친구는 건망증이 조금 심한 모양이었다.

할리는 그를 위해 조곤조곤하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아까 그놈들, 정리해야지?"

"엉?"

다시 맹한 표정을 짓는 털보.

아무래도 좀 더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내 경험상, 그런 놈들은 내버려 두면 꼭 나중에 사고를 치게 되어 있거든! 그 전에 미리 정리해 놔야지!"

물론 그 경험의 출처는 클리셰가 범벅된 지구의 대중문화였다.

"그···그런가? 내 경험으론 이 정도로 겁을 주면 알아서 몸을 사리고 얼씬도 하지 않던데."

"어허, 생각보다 곱게 살아왔구만, 친구?"

털보의 말은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로 절여진 현대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안이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고작 파락호 무리였고, 그들은 근육질 거구의 유명한 용병인데다 「야성」까지 사용해 공포를 각인시켰으니까.

아마 어지간하면 털보의 말처럼 알아서 길 테지.

하지만 생각 외로 주술사 노파가 더 유능했다.

거기에 첫 번째 각인이 이틀 후고, 이후로도 일주일 간격으로 새겨야 해서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데···.

'그 정도면 공포가 희석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그래서 좀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오호···. 과연, 온갖 역경을 거치고 살아남은 불굴의 전사로군. 한 수 배웠다, 할리. 그래서 놈들은 어떻게 찾을 건데?"

놈들은 이미 도주해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근거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흐흐흣— 어차피 이 근방에 거주하는 놈들일 텐데, 관련된 놈들 하나하나 족치다 보면 튀어나오지 않겠어?"

"그렇군! 만약 놈들이 오히려 앙심을 품고 복수하려고 들면?"

"그럼 덜 밟은 거지! 이번 일도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 미리 정리해 두려는 거니까!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밟아 놔야지!"

"과연··· 훌륭해! 너처럼 철두철미한 전사는 본 적이 없어, 할리. 무력뿐만 아니라 지력까지 갖췄구나!"

"뭘, 이게 다 경험의 산물이지. 투라바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다. 와하하핫!"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며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

하지만 그 내용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거리에 여러 차례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 후···.

그들은 깔끔하게 일을 마치고 시원한 마음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70

각인 (3)

두 거한이 방문한 지 이틀째.

후루룩—

"후우···."

노파는 따뜻한 찻물을 홀짝이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랜만에 남부의 전사들을 만나고 각인을 새길 준비를 하다 보니 감회가 새로워졌다.

사실 한 명은 정말 남부인이 맞는 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그녀가 신경 쓸 필요는 없으리라.

사람들에게는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마라키···.'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남부를 떠나 이곳에 정착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유망한 전사였던 아들은 용병으로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며, 도시에서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십 년 전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북부 산맥으로 향한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그녀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홀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이곳에서 살다가 죽을 생각이었는데.'

미련 때문에 타라크를 떠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더는 생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또 도시 내에서도 외진 주거지역에 있다 보니, 그간 동향 사람들을 마주칠 일도 없었는데···.

"할매! 우리 왔소!"

"하하핫—! 노인장 기력 보충 좀 하라고 고기를 싸 왔지! 든든하게 먹고 힘내 보자고!"

바깥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노파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젊은 전사들과의 인연이었지만, 사실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들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고기는 옘병. 이가 약해서 씹는 것도 시원찮구먼."

괜스레 불평을 내뱉으며 투덜거리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

한바탕의 고기 파티가 끝나고 각인 시술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노파의 치아 건강을 생각해서 최대한 부드러운 고기를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양을 먹어 치웠다.

'남부인들은 대부분 육식에 대식가라고 하더니···.'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남부인의 피가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씁— 오랜만에 고기를 먹으니 기운이 좀 나는구먼. 육질도 부드러운 것이 제법 고급품인 듯하고. 흘흘흘···."

"하핫핫! 오늘 잘 부탁한다고 특별히 신경 써서 골라왔지."

"걱정 마라 이놈아. 그 정성을 봐서라도 내 신경 써서 해 줄 테니."

몬스터의 뼈를 갈아 만든 바늘을 비롯한 주술 도구에, 오우거의 피에 약품을 섞어 가공한 정체불명의 액체 등 온갖 기괴한 물건들이 준비되었다.

"넌 이쪽에 눕고···. 집중하는 데 방해되니까 거기 털복숭이는 밖에 나가 있는 게 좋겠구먼. 치료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나절 후에 다시 오라고도 해 주고."

"걱정 마쇼 할매. 내가 잘 말해서 돌려보낼 테니."

털보가 믿음직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향했다.

"에잉··· 저, 저. 괜히 동네 사람들 겁만 주고 쫓아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먼."

가볍게 혀를 찬 노파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작업대 위에 드러누운 할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허 참. 고놈 참 몸뚱이가 크기도 하구나.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되겠어."

정해진 위치에 정해진 비율로 새겨야 하는 게 각인이었다.

몸집이 크면 그 면적도 넓어지니, 재료도 더 필요하고 주술사도 더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만큼 각인의 효과도 더 강해지므로, 전사들은 몸집을 키우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나 참, 전사 없이 바로 대전사를 새기는 건 처음이구먼. 끌끌끌···."

두 각인이 새겨지는 위치는 동일했다.

심장에서 시작해서 목까지 이어지는, 타오르는 불꽃 문양의 '전사의 각인' 위에 추가로 더 복잡하게 덧그린 것이 '대전사의 각인'이었으니까.

"그럼 시작할 테니, 이거나 꽉 물고 있게나."

"으응? 필요 없소, 노인장. 그냥 바로 시작해 주시오!"

"흘흘··· 상당히 아플 텐데?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물어 두는 게 어떤가?"

"핫하하! 거 쓸데없는 걱정이로구만. 진정한 전사에게 고통 따윈 아무것도 아니지!"

애초에 그에게 통증이란 의미가 없었으니, 노파가 내미는 나무토막을 시원하게 거절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는 더는 권하지 않은 채 곧바로 각인 시술을 시작했다.

"후우···."

작은 한숨과 함께, 노파의 얼굴에 새겨진 각인에서 은은하게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스승에게 사사하는 동시에 새겼다던 '주술사의 각인'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뼈바늘이 검붉은 액체에 깊게 담겼다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할리의 심장부에 꽂혀···.

"으잉?"

바늘은 여전히 그의 가슴 근육 위에 놓여,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채였다.

"이놈 이거, 피부가 단단해서 바늘이 박히지가 않는구나!"

"어라?"

예상치 못한 난관이었다.

몬스터 같은 그의 몸뚱이는 이제 일정 이상의 기운이 담기지 않은 공격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으니···.

그가 당황하고 있자니, 노파가 혀를 차며 양팔을 걷어붙였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누워 있어라. 에잉··· 이거 고기 아니었으면 영 맥을 못 출 뻔했구먼!"

그리고 노파의 각인이 더 강하게 빛나기 시작하며, 뼈바늘에 희끄무레한 기운이 덧씌워졌다.

이후 몇 시간.

시술 작업은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진행되었다.

***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칼코스식 전투 각인」를 획득합니다."

마지막 바늘땀이 턱 아래를 찔러오는 순간, 몸 전체에서 활력이 들끓었다.

그리고 할리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근육과 뼈 등에 잠들어 있던 생체력의 일부가 완성된 각인으로 빨려 들어가며, 모든 육체 능력을 일거에 활성화 시키고 있었다.

'대단한데? 「생체 오러」를 사용해 강화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야.'

여기에 추가로 각인에 오러까지 부여한다면···.

생각이 났으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직성이 풀리는 할리는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가슴에 새겨진 화려한 불꽃 문양의 '대전사의 각인'이 서서히 붉게 물들며, 정말 타오르는 것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오옷—!"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주먹을 움켜쥐자 뿌드득거리는 살벌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정도면 「육체변이」를 안 쓰고도 맨손으로 오우거를 때려잡을 수 있겠는데?'

희희낙락하던 할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노파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시술이 마침과 동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독한 놈 같으니. 정말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을 줄이야. 네놈은 고통이 마비되기라도 했느냐?"

"노인장, 괜찮소?"

"그냥 기운을 너무 써서 지친 것뿐이다. 각인 시술을 한 지도 십 년이 넘었다 보니, 갑자기 무리해서 탈이 난 게지."

핼쑥해진 얼굴로 땀을 잔뜩 흘리는 그 얼굴을 보니 할리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이도 적지 않은데, 그의 단단한 몸뚱이를 뚫기 위해 상당히 힘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아직 새겨야 할 각인이 많이 남은 상황에, 벌써 이런 상황이면 곤란한데···.'

역시 그녀를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삼시세끼 고기와 몸에 좋은 건강식품들을 먹이고, 규칙적인 운동과 스트레스 관리를 통해 체력을 증진시킬 필요가 있었다.

"노인장···."

"나는 이제 좀 쉬어야겠으니, 썩 물러가. 내 이러다 골로 가겠구먼."

노파는 비틀거리며 걸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무래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남은 잔금이 든 주머니를 작업대 위에 올리고 밖으로 나서자,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털보가 보였다.

"여어~ 투라바!"

"으···으잉? 할리? 끝났남?"

할리의 부름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선 털보가 그를 돌아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오오—! 그것이 대전사의 각인!"

"후하하핫!"

그 남부 전사는 연신 감탄하며 동경 어린 눈빛으로 할리를 바라보았다.

전사들이 가진 단조로운 불꽃 문양이 아니라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타오르는 불꽃이 가슴팍에서 시작해 목까지 뻗어 있었고, 그것이 벌거벗은 상체를 통해 밖으로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아! 그랬구나!'

그리고 할리는 깨달았다.

이전 세대의 남부 전사들이 왜 이런 차림을 고집했던 건지를.

'단순히 근육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각인까지 과시하려는 거였구나!'

지역, 생태, 문화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적용된 결과였지만, 지금의 할리에게 그런 요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껏 어깨를 펴고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길을 나서자, 기분 탓인지 주변의 시선에서 이전보다 더한 선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투라바, 이렇게 각인의 효과가 좋은데, 왜 남부 전사들만 이런 걸 쓰는 거지? 기술 보안이 그렇게 철저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기술을 가진 주술사가 마음대로 남부를 떠날 수 있을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기술을 빼돌릴 수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동안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각인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뭐, 부작용 때문이지. 여러 가지로 조건이 까다로우니까. 뭣보다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게 커."

새겨지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빨려 나가는 생명력.

물론 그 이상으로 강화 효과가 좋다지만, 그것도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제각각이었다.

"남부인들은 선천적으로 생명력이 강하게 태어나니까. 우리한테 잘 맞는 방법인 거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차라리 오러를 집중 단련해, 필요할 때 육체를 강화하는 쪽이 효율이 높다고 한다.

그만큼 남부 전사들은 오러를 다루는 데는 좀 약한 편이라고···.

"그렇군. 뭐, 이제 어엿한 남부의 대전사인 나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와하핫핫—!"

"그러게 말이야! 내 친우가 대전사라니! 껄껄껄!"

"파하하하!"

"끄헐헐!"

두 사나이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을 메아리쳤다.

물론, 그런 그들의 모습에 뭐라고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앗! 하인리히 경! 벌써 일어나셔도 괜찮은 건가요?"

"아하하, 가볍게 걷는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사실 전부터 일어날 수는 있었는데, 담당 치유 사제님이 워낙 엄해서요."

"그래도···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조심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걱정스러운 듯 말하는 성녀와 반갑게 대화를 나누는 하인리히.

상태가 많이 호전된 그는 이제 치료실 바깥으로 외출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마침 오늘은 중요한 날이기도 했으니,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오늘은 엘븐 킹덤의 사절단이 떠나는 날이니까요. 그간의 연이 있는 만큼 배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우여곡절이 있던 엘프 사절단이 마침내 자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하인리히도 그들의 수장인 라포리와 많은 인연이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얼굴 정도는 비추는 게 좋았다.

이렇게 헤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만나기는 힘들 테니까.

'애초에 하이 엘프가 직접 사절을 이끌고 온 게 특이한 경우였지.'

엄연히 한 종족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으니, 이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세계수 옆을 떠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게이트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엘프 사절단이 사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라포리와 사절단 외에도 그 일행은 두 명이 추가된 상태였다.

하이 엘프 후보 세실리와··· 할리의 소개를 받고 온 엘프, 해리스까지.

"하인리히 경.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나오셔도 괜찮으십니까?"

"아, 정말 괜찮습니다. 라포리 님."

곳곳에서 교단 측과 사절단의 작별 인사가 오갔다.

그들이 제법 오래 머문 만큼 친분이 생긴 이들도 많아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지만, 어느새 정말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우우웅—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간 교단에서 보여주신 호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양측이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리에스타 성녀와 라포리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엘프 사절단은 게이트의 푸른 소용돌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제 그들은 며칠에 걸쳐 대륙의 동부 끝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그들만의 수단을 이용해 에나멜 대륙으로 넘어갈 것이다.

해리스와 함께.

신대륙을 코앞에 둔 탐험가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71

새로운 질서 (1)

펄럭펄럭—

[후흐흐흐··· 어떻게 된 게 쓰레기는 치워도 치워도 끝이 보이질 않는군.]

달빛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밤.

한 고층빌딩 위에 바람을 맞으며 휘날리는 검은 옷자락이 있었다.

어둠을 두른 듯한 모습에서 제대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 쌍의 푸른 안광이 전부.

그 두 눈은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을 내려다보며, 세상을 오시하는 절대자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실 절대자라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가 바로 아우테리카 차원의 재앙, 불사왕 그 자체였으니까.

'한 번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범죄율이 줄어들긴 했는데, 그 이상으로 커버하는 지역이 계속 넓어지면서 일거리는 오히려 늘고 있으니.'

불사왕이 되면서 얻은 무한한 마력과 「마도의 길」, 「마력 지배」 등의 스킬을 이용해 그동안 애용해 오던 '전염성 사역마법 최종본_수정_2차_FINAL(3)_진짜마지막'을 대대적으로 손보았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전염성 사역마법 완전판'.

더 은밀하고, 더 정확하며, 더 넓은 범위를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활동 영역은 서울 전체를 뒤덮고도 계속해서 늘어났고, 처벌하는 악인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지는 중이었다.

[악의가 들끓는 이 세태가 통탄스럽기 그지없구나. 그 마음에 품은 독기가 얼마나 컸으면 이럴까.]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게 어떻게 그들만의 탓일까.

그들 또한 이 세상에 상처 입은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래, 너희들의 세상을 향한 울분, 내가 전부 받아주마. 더는 바깥으로 그 악의를 분출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 품 안에서 영원한 평온을 누리게 될 것이다. 크흐흐흣—]

누군가는 그 불행의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부정함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스야말로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존재이리라.

그때 또 새로운 신호가 감지되었다.

이능을 이용한 강도살인, 안타깝게도 이미 몇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듯했다.

[저런··· 저질러 버렸구나.]

이렇게 되면 또 그가 거둬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스의 몸이 어둠에 휩싸이며 그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의 발밑에 드리운 음영에서 수백이 넘는 무언가가 아우성치듯 일렁거렸다.

곧 도착할 신입을 열렬히 환영하듯··· 매우 거칠게.

***

"어때? 뭔가 알겠어?"

"으음··· 대충은 알겠네요.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트라우마를 반복 재생하는 건데, 저주에 사념까지 섞어서 우회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놨어요."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잠든 이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려놓고 답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던 거고. 해주(解呪)는? 할 수 있겠어?"

"아, 그거요? 절대 못 하죠. 체계가 다른 것도 있는데, 일단 나보다 수준이 더 높아요.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나까지 살(煞) 맞을걸요."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질문을 던진 양복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대체 할 수 있는 게 뭐야? 따로 알아낸 건 없어?"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네요. 이 저주를 건 인간, 터무니없는 괴물이에요. 나 같으면 이 양반하고 싸우느니 그냥 곱게 자살하는 편을 택하겠어요."

"···그 정도야?"

이능관리국 범죄수사과 팀장인 박한철은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모자 쓴 사내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 그는 흑마법에 대한 자문으로 수사에 협조 중인 상황이었으니까.

"일단 흑마법의 수준이 높아요. 복잡하고 견고한 구조를 보아하니, 어느 차원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발전되어 온 걸 체계적으로 배운 것 같아요."

거기에 대충 겉핥기로만 익힌 수준이 아니라, 그 비전까지 제대로 깨우치고 습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흑마력의 밀도가 말이 안 나올 정도예요. 단순히 양이 많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 질 자체가 달라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기운을 쌓았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기운을 키우다 보면 불순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사용된 흑마력은 놀랍도록 정순했다.

애초에 부정한 기운인 흑마력이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걸 그도 이번에 처음 알았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그쪽 체계만의 특징인지 비전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저주를 사용하는 방식이 인간 같지가 않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모자 쓴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침대에 누운 이의 속마저 꿰뚫어 보듯,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애초에 저주라는 건 양날의 검이라, 사용할 때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단 말이죠? 자칫 잘못하면 자신한테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많이 듣긴 했지."

"그런데 이 양반은 그에 대한 방비가 하나도 없어요. 더 빠르고 강하게, 오직 효율만을 추구한 방식. 그런데 또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단 말이죠."

저주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다.

뭔가 우회로라도 있어야 해주든 뭐든 시도할 텐데, 이건 어떻게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저주 면역 스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이건 그 수준이 아닌 것 같단 말이죠?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듯한 느낌?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려나···."

"하! 저주에 인간성은 얼어 죽을. 그놈도 미쳐도 한참 전에 미쳤겠지."

"에이, 느낌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흑마력 사용자라고 다 정신이 나간 건 아니잖아요? 저만 해도 이 정도면 멀쩡한 편 아닌가요?"

박한철은 모자 쓴 남성, 안성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는 평소에는 얌전한 편이었지만, 한 번 발작해서 사고를 치고 잡혀 온 이력이 있었으니까.

특별한 스킬로 흑마력의 정신 오염을 막기는 했으나, 그것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가 귀환한 직후,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의 가게에 건달들이 들이닥쳐 난리를 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제어가 풀려버렸던 것이다.

다행히 살인까지는 가지 않았던지라, 여러 가지가 참작되어 지금은 이능관리국의 일을 도우며 지내는 중이었다.

'저렇게 보여도 고위 흑마법사이기도 하고. 사실 도망갈 수도 있었는데 부모님을 생각해서 순순히 잡혀올 정도로 정신이 잘 잡혀있는 놈이기도 하니.'

그동안 제법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도 사실인 만큼, 더는 그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 저주를 건 게 하회탈이라고 했죠? 범죄자를 죽이고 나면 시체까지 가져간다고요?"

"그래, 그 자리에 흑마력이 가득한 피만 남겨진 경우도 있고,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가져가 버린 경우도 있고."

"와우··· 이 정도 수준의 흑마법사가 사용한 사령술? 그거 진짜 무섭네요. 영혼까지 노예가 되어버릴 텐데."

"···정말?"

"네크로맨서 앞에서는 죽는다고 끝이 아니에요. 그 몸은 물론 영혼이 닳아버릴 때까지 재활용할걸요. 아까 제가 괜히 자살하는 게 낫다고 한 게 아니죠."

물론 안성진처럼 그쪽은 전공이 아니라 생각보다 약할 수도 있었다.

시체는 연습용으로 가져간 것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상대에게 그런 요행만을 바라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다.

"사실 여기 이놈은 들어온 지 제법 됐어. 하회탈이 한창 활동할 때 당하고 아직 퇴원하지 못한 놈이지."

박한철은 침대에 잠든 채 누운 사내를 턱짓하며 말했다.

그 사내도 범죄자였으니, 조사를 편하게 하기 위해 마음대로 재워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했던 하회탈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거든. 그래서 오늘 막 들어온 놈들이 있는데, 그놈들의 치료도 대충 끝난 상황이니 네가 한 번 봐줬으면 좋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래도 당한 직후의 상대에게선 뭔가 더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흠··· 그럼 한 번 봐 볼까요?"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 안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중환자실에 들어선 후, 전신에 붕대를 감고 있는 미라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 이 인간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 꼴이 된 거래요?"

"어디 보자···, 방화로군. 그나마 사망자가 없어서 이 정도로 그친 모양이다. 요즘 하회탈은 강력범들을 주로 잡느라 대부분 즉결 처형이거든."

활동 범위가 넓어지면서 바빠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안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든 환자의 머리맡으로 이동해 그 머리에 한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길 잠시···.

"흡!"

한순간 눈을 번쩍 뜬 그는 황급히 손을 떼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

"왜? 뭔가 다른 게 있어?"

"아하··· 아하핫— 그래서 팀장님! 이, 하회탈을 잡아서 뭐 어떻게 하신다구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딴소리를 하는 안성진.

박한철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일단 묻는 말에 순순히 말해주었다.

"잡는다고 하기보단 일단 정체를 파악하는 게 먼저지. 그 다음엔 재차 검증을 거친 후, 회유하게 될 거고. 능력도 있고 나름의 선도 잘 지키는 것 같으니까."

"저처럼요?"

"뭐··· 그렇지? 아니, 근데 갑자기 왜 이러냐? 뭐 알아낸 게 있어?"

답답해진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윽박지르자, 안성진이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으로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앞에 했던 말, 철회해야 할 것 같네요."

"오? 뭔가 알아낸 게 있구나!"

그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 지금 바로 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동안 나랏일 제법 도왔는데, 유공자 연금은 나오겠죠? 모아둔 돈이 얼마나 되더라···."

갑자기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안성진의 모습에, 그때서야 박한철은 그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동공이 풀려 초점을 잃은 두 눈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웃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너 괜찮냐?"

안성진은 멍한 얼굴로 조금 전의 일을 회상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저주를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그는,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호오—? 넌 뭐 하는 놈이냐?]

이전의 저주에서도 본 적 있었던 간단한 사념인 줄 알았는데, ···뭔가 달랐다.

한없이 어두운 심연을 뭉친 것 같은 형체에 푸르게 빛나는 한 쌍의 눈이 자신을 또렷이 직시하고 있었다.

그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에 안성진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새하얘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발작하듯 급하게 연결을 해제하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도, 한 쌍의 눈은 그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가 떠나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야! 너 왜 그래! 정신 차려!"

"아하하··· 괜찮아요. 그래도 일단 엄마한테 전화해야 할 것 같으니까 잠시만 놔 주실래요? 잠깐 비밀 임무 맡았다고 하고, 저 순직 처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처음 살폈던 저주와 이번 저주의 차이.

단순히 더 강해졌다거나 성장했다 정도가 아니었다.

존재 자체의 밀도가 달랐다.

잠깐 편린을 엿본 것만으로도 영혼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그 또한 수준 높은 고위 흑마법사였기에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정없이 덜덜 떨리는 양손을 보며 주먹을 꾸욱 움켜쥐고 다시 결심을 다졌다.

'이미 존재를 들켰어. 직접 영혼을 관측당한 이상,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 위치를 찾아낼 수 있겠지.'

하회탈의 변덕에 따라 언제든 그의 주변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이 집에 있을 때 그자가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안 돼!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아! 그리고 지금이라면 영혼도 사로잡히지 않고 곧바로 성불할 수 있을지도 모르···.'

찰싹—!

"야! 안성진! 정신 안 차리냐!"

볼에서 전해지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순간적으로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 대충 무슨 일인지는 짐작이 가는데, 일단 진정해!"

박한철은 패닉에 빠진 안성진의 뺨을 때리고 나서야 그의 눈빛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네가 알아둬야 할 거. 지금까지 하회탈은 범죄자들만 처벌해 왔다는 거야. 그것도 나름의 기준을 두고 죄에 따라 차등을 둬서."

고의적인 살인 등 강력범의 경우엔 즉결 처형, 그 외에는 지금 그들의 옆에 있는 범죄자처럼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쫓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계속 알고 있었어. 그랬는데 지금껏 우리에게 손을 쓰지 않았지."

하회탈에게는 오직 범죄자만을 심판한다는 명확한 선이 있었으니까.

"알았냐?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마음 좀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봐."

"아···."

안성진은 그의 말을 듣고서 심호흡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어떤 대단한 정보를 알아낸 것도 아니었다.

하회탈의 정체나 위치 같은 건 물론이고, 그 능력조차 '대단하다'는 것밖엔 알지 못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사념을 통해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뿐.

이윽고 그는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 저주를 통해 존재의 편린을 마주했을 뿐인데, 공포에 질려 공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아하하··· 그랬구나···."

"진정됐냐?"

"네··· 저기, 팀장님?"

"어! 그래! 왜? 뭐 할 말 있냐?"

"저, 잠깐만 좀 쉴게요···."

털썩—!

한순간 긴장이 풀려버린 안성진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듯 쓰러졌다.

"엉? 야! 갑자기? 여기서?"

멀리서 들려오듯 박한철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여러 가지를 따질 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

[흐음··· 이런 경우도 다 있군.]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공간 속, 한스가 한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푸른 안광이 향한 방향의 끝에는··· 정확히 한 병원이 위치해 있었다.

#72

새로운 질서 (2)

온통 어둠으로 가득 찬 결계 안에서, 한스는 고개를 돌려 옆쪽을 지그시 응시했다.

시커먼 그 공간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듯이.

[재밌군.]

그의 수준이 급상승하며 새로 만들어낸 더 효과 좋은 저주를 이번에 활동을 재개하며 선보였다.

그런데 그것과 연결된 가느다란 끈에서 뭔가 미묘한 느낌이 들어 잠시 살펴봤더니, 웬 흑마법사와 눈이 딱 마주쳐버린 것이다.

'어떻게 할까···.'

사념을 통해 잠깐 마주쳤지만, 이미 그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악의에 민감한 한스였는데 그에게선 딱히 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제법 실력 있는 흑마법사이면서도 광기에 물들지 않은 특이한 상대.

'나처럼 관련 스킬이라도 있나 보지. 그보다 이 위치는···.'

그의 머릿속에서 서울시의 전체 지도가 그려지고, 방금 파악한 위치가 표시되었다.

곧바로 본체가 인터넷을 통해 그곳의 정보를 확인했다.

'···역시.'

정부 기관인 이능관리국의 관리하에 있는 병원이었다.

저쪽은 딱히 손을 쓸 필요도 없다.

부지런하게 의미 없는 수사만을 계속하는 공무원들에게 잠시 애도를 표해 줄 뿐.

'그 흑마법사는 제법 쓸 만해 보였는데. 일단 기억해 둘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 나중에 조용히 접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크흣, 그보다 이거 마음에 드는군. 범죄자 놈들이 함부로 내 저주에 대해 조사하게 되면, 그 순간···.]

그 즉시 역공을 받고 위치를 특정 당해 한스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흑마법사는 범죄자들의 비율이 높은 만큼, 그 가능성도 높았다.

그의 저주를 조사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면 잔챙이도 아닐 테니, 제법 괜찮은 함정이 될 수 있으리라.

'처형하지 않고 저주를 걸만한 놈들의 숫자를 늘리려면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네.'

"헉···허억! 괴, 괴물···!"

그때, 그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열심히 한스의 방어막을 두들기던 빌런들이 이를 갈았다.

사방을 둘러싼 결계 때문에 도망도 치지 못한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저항하다가, 기어코 절망에 빠져 버린 상태였다.

[미안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구나.]

한스의 푸른 안광이 사그라지고, 곧 「심연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흐으—"

그렇게 한스는 오늘도 서울의 치안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범죄자들이 몸을 사리면서 강제적으로 범죄율이 급감했고···.

서울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그 차이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이전부터 괴담처럼 알음알음 퍼지던 하회탈에 대한 소문이 인터넷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우상화를 염려한 이능관리국의 개입으로 아직 공중파 뉴스에까지 보도되진 않았지만, 인터넷 뉴스를 비롯한 커뮤니티에 퍼지는 속도로 봤을 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할 터였다.

한스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만은 피했던 만큼, 사진 대신 목격자들이 그린 그림 등이 대신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중에는 시커먼 인영에 파란 눈만 대충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실제와 흡사할 정도로 잘 그린 초상화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회탈을 쓴 이가 시커먼 로브를 두르고 푸른 안광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장갑 낀 손을 내미는 그림이었다.

그것을 그린 작가는 자신이 마인들의 인육 공장에서 하회탈에게 구출되던 순간의 장면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때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주장했다.

-와ㅋㅋㅋ 빌런들도 다 쳐 죽인다니까, 속 개시원하다.

-범죄자들한테 인권이 어딨냐. 그거 챙길 시간에 우리 생존권이나 좀 챙겨줘라.

-하회탈 님 덕분에 요즘 좀 맘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다.

물론 그 또한 범죄자에 불과하다며 개인의 사적제재를 옹호해선 안 된다는 정론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여론에 휩쓸려 조용히 묻힐 뿐이었다.

하회탈이 서서히 이슈가 되어감에 따라 기자들과 개인 크리에이터들의 취재 열기도 뜨거워져, 목격자들의 인터뷰와 온갖 자료 수집에 따른 정보들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서울 전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초광범위 탐지력.

그렇게 탐지한 장소로 곧바로 공간이동 할 수 있는 기동력.

상대가 어떤 빌런이라도 순식간에 해결하는 압도적인 전투력까지.

다만 그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그는 등장과 동시에 그 자리의 피해자도 재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당하고도 살아남은 범죄자들도 극심한 공포에 빠져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못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무도 그의 무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까지 이뤄온 업적이 모든 것을 증명했으니까.

그리하여 얻어진 칭호가 바로, '비공식 한국 최강'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경험담만 무성할 뿐 증거 사진이나 CCTV 자료 같은 것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지라, 그에 대한 갑론을박도 연신 이어지는 추세였다.

-이거 그냥 주작 아님? 어떻게 한 명이 서울 전체를 커버함?

-요즘 범죄율 떨어진 건 팩트. 진짜 하회탈 때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있긴 함.

-진짜면 가디언 개쪽 아님? 그 큰 조직이 한 명보다 못하다는 거니까ㅋㅋㅋ

-범죄자들 인권까지 챙겨야 되는 호구 가디언이랑 다르게 하회탈은 무관용 즉결 처형이 원칙이니까.

-그럼 개인이 아니라 조직 아냐? 같은 분장한 여러 명일 수도 있잖아.

국내에서도 이런 상황이었으니,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측의 조작이라 단언하며 상대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 그 '하회탈'의 활약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그의 활동이 계속될수록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이가 있었으니···.

"으아아—! 이게 얼마만의 퇴근이야! 하하핫! 성현아, 뭐하냐? 짠 하자 짠—!"

지금 내 앞에서 맥주 캔을 들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고 있는 친구, 강태산이었다.

"일 많이 힘든가 보다? 연수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죽는소리가 나오는 것 보니?"

"말도 마라, 하필 처음 배속받은 데가 하회탈 수사팀이라니! 지금 범죄수사과에서 제일 바쁜 부서란 말이야! 다른 데는 오히려 여유로워졌다고 하던데, 하필 나만 그런 팀에 막내로 들어가게 돼서!"

재차 울분을 터트리며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는 강태산.

간만에 퇴근하게 되었다며 술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찾아온 하나뿐인 친구였다.

'이젠 굳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사고 이후 자신이 집에 틀어박혔을 때부터, 계속 옆에 남아 힘이 되어 준 고마운 녀석이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자기 대신 쓰레기를 버려주거나,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말동무가 되어주는 등.

소소하지만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았던 나에겐 따뜻한 관심의 손길이었다.

"그래도 너 많이 괜찮아 진 것 같다? 전에도 잠깐씩 보긴 했는데, 뭐랄까··· 삶에 의욕이 생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래, 언제까지 과거에 매달려 살 수는 없잖아. 부모님도 그걸 원치 않으실 테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인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아냐?"

태산이와는 초등학교 때부터 인연을 맺은 관계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아래에서 자란 그와 친해진 것을 계기로, 한성현의 부모님이 항상 그를 자식처럼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 유대는 중, 고등학교를 지나며 더욱 강해져, 나중에는 그도 자신의 친부모 대하듯 한성현의 부모님들을 의지하게 되었다.

까놓고 말해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너희 할머니는 좀 어떠셔? 좀 나아지셨어?"

"아···하하···. 뭐, 그대로지. 이제 연세도 있으시니까···."

몇 년 전부터 입원 생활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가 걱정되는지, 그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조만간 나도 한번 찾아뵈어야겠다."

"응? 아냐, 괜찮아! 괜히 무리하지 않아도 돼."

"무리하는 거 아냐. 나도 이제 밖에 나갈 수 있으니까. 아, 조만간 이사도 할 거야. 로또 당첨됐거든."

"···엥?"

큰 소식을 연달아 전하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나는 온몸으로 놀람을 표현하는 태산을 강제로 진압해서 진정시키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의 할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하인리히의 신성력이면 어느 정도 효과가 되겠지. 노화엔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슬쩍 가서 잽싸게 치료하고 제자리로 돌려보내면 될 터였다.

상황을 만드는 데 번거롭긴 할 테지만, 다른 분신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렵진 않을 테지.

"···그래도 다행이네. 성현이 너도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아서."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고 태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이쪽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뭐 할 말 있냐?"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똑바로 눈을 마주쳐 왔다.

"사실, 말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거든? 지금까지는 말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는데···. 오늘 너 상태 보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

갑작스러운 진지한 분위기에 나도 들고 있던 맥주를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내가 왜 범죄수사과에 지원했는지 너도 알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도 자신의 부모님들을 친부모처럼 따랐으니까.

그날 현장에 있었던 자신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방에 틀어박혀 버렸지만···.

할머니의 병간호로 뒤늦게 소식을 듣게 된 태산은 오히려 그 사건을 계기로 더 독하게 노력해, 결국 이능관리국에 입사한 것이다.

그때의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파헤치고, 또 같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때의 사건. 이미 각성자의 묻지마 테러로 결론 난 상태였지.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어. 최근까지도."

순간, 내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암약하던 조직이 있었어. 최근까지는 비교적 조용히 사건을 일으키던 놈들이었는데, 약 반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지."

그때가 바로 한국의 치안이 어지러워지던 시기였다.

"워낙 철두철미한 놈들이라, 그동안 존재만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을 뿐 그 꼬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하회탈이 등장했다.

"그가 범죄자 사냥을 시작한 후, 뒷세계가 흔들리고 규칙이 무너지면서 그쪽을 바탕으로 세를 불리던 놈들에게 빈틈이 생긴 것 같아."

그렇게 이능관리국은 마침내 놈들의 꼬리를 잡았다.

그간 뒤에서 온갖 테러를 벌여왔던 '번천회'라는 조직에 대해서.

그리고 태산은··· 놈들이 '서울역 테러 사건'의 배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거 대외비라 말하면 안 되거든?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다른 데다 얘기하지 마라? 나 깜빵 가는 수가 있다? 크크큭···."

최초로 정보를 얻은 곳이 하회탈 수사팀이었는데, 하필 그때 신입인 그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놈들은 하회탈과 충돌한 직후 국내 활동을 중지하고 꼬리 자르기에 들어간 것 같아. 그는 계속 활발하게 움직이는 중이니 누가 이겼는지는 뻔하지."

태산은 코웃음을 치며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 이후론 더 이상의 추적이 힘든 상황이야. 놈들이 얼마나 숨죽이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세력의 크기가 만만치 않은 것 같아 우리도 예의 주시하고 있어."

그는 보안 사항이고 뭐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범죄수사과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만큼 한성현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리라.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조심스럽게 이쪽의 반응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안주를 집어 먹었다.

"하회탈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 사람 덕분에 그런 범죄 조직도 파악한 거 아냐? 그런데 이능관리국은 왜 계속 그를 쫓는 거야?"

"그래서 내가 더 짜증 나는 거야! 아니, 일 잘하고 있는 양반을 쓸데없이 왜 쫓아다니는 거야? 서로 피곤하게! 그냥 계속 잘하게 내버려 두란 말이야—!"

내 반응에 안도한 듯, 그가 다 마신 맥주 캔을 구기면서 과장되게 노성을 터트렸다.

강태산도 나와 마찬가지로 빌런 혐오파였으니까.

범죄자들을 잡고 싶어 이능관리국에 들어갔는데, 내심 그 가치관에 동조 중인 하회탈이나 쫓고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큰 모양이었다.

"일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야, 일단 마셔, 마셔!"

"그래! 어차피 내가 열심히 구른다고 잡힐 양반도 아니고. 에라, 모르겠다—!"

"또··· 말 해줘서 고맙다. 난 이미 다 떨쳐 냈으니까 이제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어차피 민간인인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나머진 너희 쪽이나 가디언에 맡겨야지. ···그리고 하회탈도."

"···음, 확실히 그 양반 일 잘하더라. 남의 눈치 볼 일도 없으니까 일 처리도 시원시원하고."

다시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어 술판이 벌어졌다.

연신 술을 들이켜는 친구와 보조를 맞춰, 나는 적당히 취한 척하며 분위기를 맞췄다.

신체 능력과 회복력 때문에 쉽게 취하지도 못한다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마음이 맞는 친우와 함께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자리였다.

···그렇게 서울의 밤이 깊어 갔다.

***

지저분한 뒷골목.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의 한가운데, 어둠에 파묻힌 듯한 인영이 서 있었다.

[흐··· 바쁘군, 바빠. 그래도 큰 덩어리들을 쳐내니, 전체적으로 수준이 떨어지긴 했구나.]

오늘도 치안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푸른 안광으로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뭐라 하건, 어떤 어려움이 있던··· 그는 절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곳곳에서 날뛰는 빌런들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숨죽이고 숨어 있는 번천회까지.

그의 손으로 모조리 파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스가 한 손을 뻗어 밤하늘을 움켜쥐었다.

[크흐흣··· 시커먼 것이 마음에 드는 구나.]

이제, 그가 이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으니까.

#73

새로운 질서 (3)

탕—! 탕탕—!

"이런 씨부럴! 하회탈이 여기에 왜 오냐고! 요즘엔 서울 전역을 돌며 흉악범들 잡느라 정신없다며!"

"닥치고 총은 집어치워! 그딴 게 저놈한테 통할 것 같아?"

소소하게 강도질로 금품을 터는 것이 주 업무인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하회탈의 방문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굉장히 억울했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사방은 결계로 틀어 막힌 상태라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하압!"

쿵—!

한 명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진각을 밟으며, 그 충격을 고스란히 주먹에 담아 하회탈에게 찔러 넣었다.

동시에 그의 동료들도 일제히 전력을 다해 협공을 가했다.

터어엉—!

사방에서 몰아친 막대한 기운이 담긴 공격에 검은 보호막이 출렁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어느새 바닥에서 솟아오른 어둠이 그들의 전신을 휘감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크윽···."

"제기랄!"

아니, 그들뿐 아니라 어느새 사방이 전부 질척질척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는 상태였다.

마치 지옥의 심연을 그대로 베껴온 듯한 풍경.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시커먼 기운을 전신에서 뿜고 있는 가면의 존재가···.

처음처럼 그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푸흐흐··· 쓰벌, 마교 교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압도적인 위압감.

얼굴을 뒤덮어 오는 그림자를 느끼며, 그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지구에 '마왕'이 강림했다고.

***

"그래서 내가 딱 말했지! 선배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그랬더니 눈을 부릅뜨고···."

태산이와의 술자리는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적당히 먹고 뻗으면 눕혀놓으려 했는데,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 한이 쌓였는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주량만 강해서는···!'

차라리 내가 먼저 뻗은 척할까 고민하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마침 고민하던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말을 꺼내도 쉽게 무마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던 참이기도 했고.'

나는 기회를 노리다가 태산의 말이 끊긴 틈에, 곧바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야, 태산아. 근데 내가 요즘 취미로 소설을 하나 써 보려고 생각 중이거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그건 이미 한창 알코올이 뇌를 지배하는 와중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 소설? 네가 웬일이래? 그래, 뭔 내용인데?"

"평범한 마왕과 용사 이야기로 써 볼까 하는데···."

"클래식한 것도 좋지. 나도 한때 소설 좀 써 봤던 사람 아니냐!"

한창 감수성이 폭발하던 중학교 시절, 녀석이 소설을 쓰겠다며 하루 종일 노트를 붙잡고 뭔가를 끼적였던 적이 있었다.

물론 중학생의 혈기가 가득 담긴 그 심연의 유실물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경험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는 할 터.

나는 곧바로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기본 플롯은 주인공이 대륙에 부활한 사악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한 여정을 떠나고, 마왕이 일으킨 사건들을 해결하며 영웅이 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선량한 이들이 피해를 보는 내용을 쓰기는 좀 그렇더라고."

"흐음···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바로 나 본인이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만큼, 태산도 별다른 말 없이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뭔가 나쁜 놈들만 족치면서도 마왕으로서 악명을 떨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네."

"그렇네. 사악한 마왕이라면서 상대를 골라가며 죽이는 것도 이상하지."

"나도 그래서 여러 가지를 고민 중이야. 넌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아?"

"흐음··· 바로 떠오르는 건 없는데. 좀 생각해 봐야할 것 같네. 어쨌든 일단 플롯을 짜는 단계라 그거지? 그럼 등장인물들 이름은 전부 정했어?"

"어? 어··· 아직?"

이름 정도야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상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꺼려졌던 터라 대충 얼버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이랑 마왕 이름은 임팩트 있고 멋진 걸로 지어야 돼. 막 마이클, 존, 한스 이런 이름은 절대 안 돼!"

움찔!

"흐···흐흠. 역시 마왕 이름이 한스 같은 거면 이상하려나?"

"당연하잖아! 마왕 이름이 한스라니! 최악이야!"

"어··· 나는 나름 괜찮을 것 같은데. 반전 같은 느낌도 있고?"

"반전은 얼어 죽을, 그냥 촌스러워! 동네 엑스트라도 아니고, 임팩트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태산이 흥분해서 벌게진 얼굴로 강하게 주장했다.

술이 들어간 상태에서 뭔가 스위치가 눌린 듯한 모습이었다.

"봐봐, 마왕이 딱 등장했어! 그런데 주변에서 '마왕 한스가 나타났다! 도망쳐!' 이러면 어떻겠냐? 또 '으하하! 내가 바로 마왕 한스다!' 하면 어때? 너무 모양 빠지잖아! 비웃음거리밖에 안 된다고!"

"그···그런가?"

그동안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전부 맞는 말이잖아?'

아우테리카의 재앙, 불사왕 한스.

한스라는 이름은 한 마을에 한 명은 있다고 봐도 될 정도로 흔한 이름이었다.

대륙의 절대 악이라 불리기에는 조금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

'문제는 이미 그 이름을 교단에서 알고 있다는 건데···.'

얇은 귀가 사정없이 팔랑거렸지만, 인제 와서 이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 그 이름이 마음에 들면 애칭으로 쓰든지. 약자라던가. 정식 이름은 멋진 걸로 하고."

"오? 예를 들면?"

"그래, 한스라면 어디 보자. 한, 스···. 흠··· 그래! '한니발 스트라우스' 어떠냐? 졸라 멋있지 않음?"

녀석은 중학교 시절의 열정이 되살아난 듯 콧김을 뿜으며 몰입했다.

문제는 나 또한 그 이름이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간 쉬지 않고 들이켠 술기운이 조금씩 누적되어 약간의 취기가 감돈 상태에서, 태산의 열정이 옮겨붙어 내 안의 사춘기 감성 또한 타올라 버린 것처럼.

···그래, 사실 당연했다.

한스의 그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언행 또한, 나의 일부였으니까.

"그리고 마왕군 간부로 사천왕 같은 걸······."

"그럼 이렇게 하면······."

그렇게 우리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열정적인 토론을 나누었다.

***

'젠장! 젠자앙—!'

캄캄한 어둠 속을 질주하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연신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고, 최대한 기척을 줄이기 위해 숨을 죽이고 내달렸다.

'어떻게 그런 괴물이! 그건 7레벨 수준이 아니잖아! 설마 정말 8레벨인가? 단순히 소문이 아니었다고?'

그와 뜻을 함께하던 동료들이 그자 하나에게 모조리 죽어 나갔다.

도주에 특화된 고유스킬이 아니었다면, 그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함께 산화했을 것이다.

'망할···! 알파가 사라지고 드디어 자유가 찾아왔나 했는데! 그보다 더한 놈이 나타나다니!'

그동안 강경파의 감마로서 권리를 누려온 것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보다 자유를 더 갈망하고 있었다.

조직 속에서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하는 것이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경파가 무너진 걸 기회로 잽싸게 움직인 건데.'

'그날'에 별장에 소집되었던 이들은 모두 죽어서 사라졌다.

운 좋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던 그는 이걸 기회라고 판단해,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이끌고 곧바로 독립해 버렸다.

'헤테로시스? 온건파와 뜻을 같이한다고? 그건 전보다 더한 규율에 얽매인다는 거잖아! 난 그런 생활은 죽어도 못해!'

새로운 로드에게 종속되는 데다가 마음대로 흡혈할 수도 없다니,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나 정도 수준이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요즘 서울은 하회탈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다고 하니, 지방으로 숨어들어 조금씩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헤테로시스의 로드가 직접 방문했다.

그것도 간만에 각자 취향의 인간들을 납치해 와 즐기던 시음 파티 현장에.

그 후의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자신만 몸을 숨기고 도주 중이었다.

'이 정도 거리를 벌렸으면 더 이상 못 쫓아오겠지?'

슬슬 고유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한계였다.

일시적으로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그의 능력은 효과가 강한 만큼 유지 시간이 짧았다.

최대한으로 발동하면 아무리 감각이 날카로운 이도 코앞에 있는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결계도 무시하고 빠져나갈 수 있어 지금까지 그를 살아있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후우··· 후우···.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스킬의 효과를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척을 죽이며 긴장 상태로 내달렸던지라, 그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도망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에게 남은 길은 이제 많지 않았다.

앞이 막막해져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이동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던 찰나···.

"여기 있었군."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얼려버렸다.

"어···어? 어떻게···!"

"신기한 능력이군. 순간적으로 존재가 사라지다니. 여기서 다시 나타나기 전까진 놓친 줄 알고 제법 당황했어."

어느새 옆에 나타난 하인즈 2세가 태연한 기색으로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나타나는 위치를 감지했다고···? 족히 10키로는 이동했는데?"

고유스킬을 발동하는 중에는 발자국 같은 흔적도 일절 남지 않는다.

즉, 그가 사라진 위치에서 어떤 단서도 없이 이곳을 바로 찾아냈다는 뜻인데···.

"그게 뭐가 문제지?"

하지만 하인즈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한 데다 「간파」까지 곁들어진 초월적인 감각이 있는데, 이미 한 번 마주한 상대를 겨우 이 정도 거리에서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하···하하핫."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대는 그저 연신 허탈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살려 달라고 해도··· 소용없겠지?"

"그래, 넌 이미 너무 늦었다."

강제로 종속시킨다고 해도 여러 문제를 일으키며 사사건건 피곤하게 만들 스타일이었다.

능력 자체는 좋은 것 같다만, 헤테로시스가 알아서 잘 굴러가기를 원하는 하인즈가 원하는 인재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당할 수는 없···, 커헉!"

푸욱—

그가 반항을 위해 힘을 끌어 올리려던 찰나, 이미 하인즈의 손날은 그의 심장을 꿰뚫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크윽, 어째서, 이렇게까지···."

"그것이 새로운 질서니까. 따르지 않겠다면 배제할 뿐."

피를 흡수당하며 점점 재가 되어가는 상대의 마지막 질문에 하인즈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항변하고 싶다는 표정이 흩날리며 사라지고, 일순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이쪽도 다 정리됐네. 이만 돌아갈까.'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슬슬 동이 터 오는 것을 느끼며 하인즈는 서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

"다녀오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로드."

"그래. 또 문제 있는 곳 있나?"

"당장 문제가 되는 곳은 없어요. 요즘 로드께서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덕분이죠. 이제 혈맹 내에서 헤테로시스는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런가···."

해가 떠오르는 아침.

하인즈는 진소란이 있는 사무실에 도착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헤테로시스를 창설한 지 삼 주가 훌쩍 넘었다.

강인한 체력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가 직접 발로 뛴 덕분에, 이제 어지간한 문제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자생력을 갖추게 되었다.

큰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은 그가 미리 처리해 두었으니, 앞으로는 부하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만 직접 나서면 될 것이다.

'그 말인즉, 지구에서 해야 할 일들은 이제 거의 다 끝났다는 말이지.'

하인즈의 최우선 과제였던 헤테로시스의 안정화가 방금 종료되었다.

혈맹을 통해 뒷세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니, 애당초 목표는 초과 달성했다고 봐도 되리라.

서울은 지금··· 한스와 하인즈를 통해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한국 전체로 확산될 것이다.

'이제 하인즈도 아우테리카 쪽에 전념할 수 있겠어.'

시나리오의 진행을 위해 이세계에서 별개의 세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어둠에서 정보를 모아오기엔 그가 가장 적임이었으니까.

이미 하나의 조직을 통째로 집어삼킨 경력도 있겠다, 이번엔 좀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당분간은 쉴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따로 연락하도록."

"네? 이제 안 나오실 생각이세요?"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다.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때 오도록 하지. 나머지 일은 알아서 처리해."

그러라고 그 자리에 앉혀둔 거니까.

하인즈 2세는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유능한 부하 직원을 둔 사장의 기분을 한껏 만끽하면서···.

#74

브로코슬락 클랜 (1)

해리스는 엘븐 킹덤의 사절단과 함께 며칠에 걸쳐 이온 대륙의 동부로 향했다.

'확실히 교단의 위세를 통하니 대륙을 횡단하는 것도 별거 아니네.'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영향력을 보이는 주신교단인 만큼, 그들의 보증이 있다면 어느 지역이든 이동을 허락받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개의 신전을 거쳐 동부에 자리한 공화국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인근의 숲으로 향했다.

"그··· 저희 바다를 건너가야 하지 않나요?"

그 의문의 목적지에 세실리가 의문을 표하자, 라포리가 부드럽게 웃음을 지어주었다.

"직접 바다를 건너면 위험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세실리 양, 기억해 두세요. 세상의 모든 나무의 뿌리는 세계수이시고, 하이 엘프는 그분의 선택을 받은 존재입니다."

쉽게 말해 하이 엘프는 세계수의 힘을 빌려 어떤 먼 곳에 있는 숲이라도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한스를 탐지할 때도 그렇고, 생각 외로 하이 엘프의 능력이 대단한데? 아니, 세계수의 힘을 이용한 거니까 당연한 건가?'

물론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멀수록 소모하는 힘도 커지는지라, 최대한 거리를 줄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떻게 생각하면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서만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주신교단보다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 엘프만 쓸 수 있다는 점만 빼면 말이지. 의미 없는 비교였네.'

엘프 전체에서 열 명도 안 되는 그들을 이동에만 써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자, 그럼 지금부턴 제 뒤를 잘 따라오시면 됩니다. 일행과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세요."

라포리의 몸에서 시원한 기운이 퍼져나가 그들의 주변을 감쌌다.

그리고 일행은 초행길인 세실리와 해리스가 낙오되지 않게 대열의 중간에 세운 채로, 선두의 라포리를 따라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래도 며칠은 이렇게 더 이동해야 할 겁니다. 이제 급할 것도 없으니 천천히 가도록 하죠."

올 때야 최대한 빨리 세실리를 구출하기 위해 서둘렀다지만,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장수종인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느긋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몽환적으로 변한 분위기의 숲길을 가로질러, 대양을 넘어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

하인즈 2세는 대륙 서부 탈리아 왕국의 수도, 탈라리아에 입성했다.

극한까지 「은폐」를 활성화해 내부의 기운을 감추는 데에만 집중한 터라, 그의 정체를 알아챈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 비싼데··· 좀만 깎아 주소."

"무슨 말씀을! 이 정도면 남는 것도 없수!"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곳곳에 뱀파이어들이 있기는 한데··· 과할 정도도 아니고, 그나마도 철저하게 숨겨져 있군.'

하인즈는 길을 걸으며 느긋하게 주변을 훑었다.

그는 초월적인 감각과 훨씬 높은 수준의 뱀파이어라는 점 때문에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은신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하긴, 아무리 영향력이 크다고 해도 이곳은 주신교단의 신전까지 있는 일국의 수도였다.

어둠의 존재인 뱀파이어들이 대놓고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겠지.

'놈들을 어떻게 흔들지 고민해 봐야겠는데. 곧바로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건 아직 시기상조니까.'

그곳에 모여 있을 전력도 전력이거니와, 놈들은 오랜 세월 이 왕국의 그림자에서 암약해 온 기득권층이었다.

괜한 소란을 일으켜 봤자 앞으로의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결국 바깥에서부터 조금씩 갉아먹어 빈틈을 유도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의 내부 사정을 잘 알만한 이를 자신의 편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정제혈정」이 있으니 그 정도야 간단하지. 그럼 일단 적당한 뱀파이어 하나를 회유해 보자.'

그 과정에서 약간의 무력과 강압이 조금 포함되긴 할 테지만, 이는 그 당사자에게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헤테로시스를 키우며 「정제혈정」을 통한 강화 효과를 몇 번이나 체감했으니까.

그의 피 한 방울은 뱀파이어들에게 영약이나 다름없는 기연이었다.

'마침 저쪽에 괜찮아 보이는 타깃이 있군. 일단 저 녀석을 시작으로··· 응?'

인기척 없는 주택의 2층 창가에서 뱀파이어 하나가 기척을 죽이고 있는 게 감지되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뭔가 익숙했다.

'무슨 수라도 써 놨는지 흐릿하긴 한데···. 이건 설마?'

애초에 하인즈에게 뱀파이어 지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 아잔투에서 싹 쓸려나갔으니 남은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이런 데서 경계를 서고 있을 만한 인물이라면 역시···.

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한 장본인은, 역시 그가 잘 알고 있는 뱀파이어였다.

'로실리카. 여기에 있었네.'

하인즈 2세가 처음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 그의 교육 담당이었던 잔혈.

아잔투에서 불사왕의 파편 탈취 사건이 시작된 이후 그 행적을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 다시 수도로 배치된 모양이었다.

'교단과의 충돌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살아 있었네?'

한때 대대적인 충돌이 있었던 만큼 제법 많은 수의 뱀파이어들이 사살되었다고 들었다.

아잔투에서부터 시작된 여러 고난을 겪고도 기어코 살아남은 걸 보니 명줄 하나는 질긴 듯했다.

하인즈는 조용히 「투명화」까지 사용해 그녀가 있는 건물 내부로 스며들었다.

"하아~ 대낮부터 이게 무슨 신세람. 요즘 피부 거칠어졌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해?"

조용히 주택 내부로 잠입한 그의 시선에 연신 투덜거리는 로실리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방이 암막 커튼으로 뒤덮여 어두운 방은 피로 그려진 온갖 종류의 혈마법 결계가 가득한 상태였다.

내부에 있는 이의 기척을 지우는 종류부터 시작해 바깥 감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보조 장치, 거기에 침입자에 대한 경보와 방어 결계는 기본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의미 없지만.'

「피의 신비」로 결계를 파악하고 「은폐」의 힘으로 가뿐히 무시하며 로실리카의 뒤로 다가갔다.

'감시자가 죽으면 발동하는 알림 장치가 있긴 한데,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하는 기능은 없네. 마침 잘됐어.'

그녀의 뒤에서 가볍게 결계들을 훑어보며 「투명화」를 해제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척을 죽인 상태라, 그녀는 하인즈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창밖만 살피고 있었다.

"낮에는 푹~ 자야 피부가 상하지 않는···."

"로실리카."

그녀의 몸이 움찔하며 순간 정지했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입이 방정이라··· 응?"

곧바로 뒤로 돌며 사과하던 로실리카는 하인즈의 얼굴을 보며 흠칫했다.

결계를 무시하고 나타난 데다 그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 당연히 상관이라고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황한 눈치였다.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하지만 앞선 여러 요인 때문인지, 그녀는 긴장을 유지하며 경계하는 기색을 비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전에 함께할 때와는 외모도 체격도 많이 달라졌으니, 그를 몰라보는 건 당연했다.

"하인즈다."

"하인즈···?"

딱히 이름을 숨길 생각은 없어 솔직히 말했지만, 그녀는 그저 동명이인이라고만 생각한 듯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혹시 저희 클랜의 손님이신가요?"

자신이 어떻게 하지 못할 수준의 강자라는 것을 느꼈을까, 로실리카는 경계하면서도 계속해서 정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손님이지."

"아! 그럼 이쪽이 아니라···."

"초대받지는 않았지만."

그 말이 끝난 직후.

쉬익—!

그녀의 오른손 끝에서 다섯 줄기의 핏줄기가 하인즈에게로 날카롭게 휘둘러졌다.

동시에 왼손은 이상을 알리기 위한 결계의 한 축으로 뻗어졌지만···.

"크흑?"

이미 사방에서 뻗어 나온 핏빛 사슬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 움직임은 물론 마력의 유동까지 철저하게 차단된 후였다.

"말도 안 돼! 설마, 진혈? ···여긴 브로코슬락의 영역입니다! 이건 협정 위반이에요!"

그 절대적인 격차에, 그녀는 하인즈를 다른 클랜의 진혈이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하인즈는 그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 이거 어쩌면?'

마침 성능 좋은 은신의 결계 내부에 있겠다, 그는 「은폐」로 감추고 있던 뱀파이어의 기운을 슬쩍 내비쳤다.

극한의 혈액 통제력과 압도적인 혈마력 제어로 원하는 부분만을 따로 추출해서, 극히 일부만을 노출한 것이다.

그리고 피에 민감한 뱀파이어인 로실리카는 그곳에 담긴 피 냄새를 곧바로 알아챘다.

"어··· 어? 우리 클랜? 아니, 뭔가 다른데···. 어라?"

최대한 집중해서 원본에 가까운 기운만을 뽑아냈는데, 역시 완벽하게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그녀가 혼란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녀의 사고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하인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브로코슬락의 방계다."

그리고 항상 해왔던 대로, 여러 그럴싸한 정보를 토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뱀파이어의 세계에는 제법 많은 분파가 존재했다.

어떠한 이유로 '피의 종속'의 간섭에서 벗어난 이들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꾸리며 갈라져 나온 지류(支流).

그 뿌리는 같더라도 세대를 거치며 점점 차이가 나기 시작하고, 끝내 완전히 별개의 세력이 된다.

하인즈는 그들을 떠올리며 적당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충 그들은 그저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왔을 뿐이며, 자신은 그간 박해받아왔던 방계로서 주도권을 쥐고자 할 뿐이라는 얘기였다.

거기에 이건 외부에서의 침략이 아닌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이고, 결코 클랜 전체에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의 향연.

하지만 일단 있는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든 데다, 하인즈가 은연중에 「피의 신비」를 이용해 미약한 암시를 곁들인 터라 큰 의문을 품지 못했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지.'

일단 그의 뿌리가 브로코슬락인 것은 맞지 않은가.

"저기··· 저는 일개 잔혈일 뿐인데, 대체 왜···."

"나를 따르면 너에게 힘을 주마. 너는 그저 약간만 내 일을 도와주면 된다."

굳이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그녀의 거부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정제혈정」의 종속에는 마음마저 절대적으로 충성하게 하는 세뇌 효과는 없었으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그녀가 거절의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 지금까지 잘 잡고 있던 줄을 놓고 생전 처음 보는 이를 따를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웃음기 서린 하인즈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마음 편히 포기하고 순순히 따르라고 이런저런 말을 꺼냈을 뿐.

일단 「정제혈정」으로 종속이 되면 돌이킬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어서라도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하인즈의 손이 떨떠름한 표정의 로실리카에게 뻗어졌다.

***

결국 자포자기한 로실리카에게 순조롭게 협조를 구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제혈정」으로 강해진 자신의 힘에는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로 인해 얻게 된 브로코슬락 클랜의 내부 정보들.

물론 그녀는 아직 잔혈인지라 고급 정보는 별로 없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무르고 있던 만큼 제법 쓸 만한 정보들도 건질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수도 탈라리아의 감시망을 총괄하는 진혈,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에 관한 정보였다.

"프리지아 님은 특이한 분이셔서요. 낮에 자주 산책하시거든요. 그, 인간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신달까···."

화려한 차림으로 수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쇼핑 등을 즐기는 철없는 귀족 아가씨.

그것이 그 진혈이 내세우고 있는 위장 신분이었다.

"그분의 감지 영역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어요. 상업지구에 있으면 성문 바깥까지 범위에 들 정도로. 사실 수도의 절반 정도는 혼자서도 감시하실 수 있을걸요?"

듣고 보니 굉장히 익숙한 인상착의였다.

하인리히를 주신교단에 입교시키기 위해 하인즈 2세가 수도에 도착한 첫날.

그때 맞닥뜨리는 바람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진혈이었다.

'아··· 생각나네. 마안(魔眼)을 사용하던 뱀파이어였지.'

갑자기 뒤에 나타나서 동족 포식을 추궁하던 것을, 다음에 두고 보자고 여기면서 소환 해제로 도망갔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실 곧바로 피한 만큼 딱히 원한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감정이 있는 상대도 아니었으니···.

'우리 오랜만에 얼굴 좀 봅시다.'

하인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75

브로코슬락 클랜 (2)

하인즈는 로실리카를 통해 프리지아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부지런히 움직여 수도 곳곳에 퍼져있는 뱀파이어들을 종속시켰다.

「정제혈정」은 체내에 주입되는 순간부터 그 몸의 흡혈인자를 강제로 진화시킨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힘의 근원이자 이능의 원천인 흡혈인자가 변질되는 순간, 그에 엮여있던 '피의 종속' 또한 그 주체가 강제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브로코슬락'에서 '하인즈 2세'에게로.

하인즈는 그렇게 종속시킨 뱀파이어들에게도 로실리카에게 했던 거짓말을 적당히 늘어놓으며, 일단 평소와 같이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일부러 소량의 「정제혈정」만 주입해 피의 변질을 최소화했으니까. 어지간하면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피 냄새에 민감한 고위 뱀파이어라면 약간의 위화감은 느낄 수 있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던 이들의 깃발이 갑자기 바뀌었으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흡혈인자가 변질되어 종속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는 전제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동족 포식으로 완전히 미쳐버린 거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예상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로실리카를 비롯한 다른 뱀파이어들이 더 쉽게 내 말을 믿을 수 있던 거기도 하고.'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라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억지로라도 수긍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기는 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니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유독 충성심이 투철한 자들도 있을 테니, 통제를 강하게 설정했다고 해도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들킬 위험이 가장 높은 인물이 바로, 수도 내 감시 총괄인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일 터.

하인즈는 곧바로 여러 뱀파이어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녀를 꾀어내기 위한 무대를 준비했다.

'그럼 월척을 낚아 볼까?'

준비를 마치고 머지않아, 실행의 순간이 다가왔다.

***

"브라이트 공녀님,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여기 이번에 들어온 신상 루비 목걸이 한 번 보시겠습니까? 요즘 한창 이름을 날리는 세공사가 만든 건데···."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은 평소처럼 느긋하게 사치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남쪽 지구를 순찰하는 날.

느긋하게 보석상에서 쇼핑을 마친 그녀는 고급 카페 옥상 정원의 차양 아래에서 차와 다과를 즐기며,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의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봐도 재미있단 말이죠.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발버둥 치는 모습들이. 후후후···."

그녀의 대외적인 신분은 '프리지아 브라이트'로 탈리아 왕국의 실세인 브라이트 공작가의 일원이었다.

탈리아에 하나밖에 없는 공작가인 그들은 왕국 내에서는 왕가의 영향력을 능가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이미 대부분이 우리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니. 교단 때문에 전면에 나설 수는 없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요.'

그런 그들이 신경 쓰는 일이라면, 요즘 주신교단의 탈리아 교구가 본단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할 낌새를 보인다는 것뿐이었다.

'로드가 최대한 힘을 써 볼 테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좀 더 귀찮아질 것 같단 말이죠.'

그래도 정치적인 수단을 써서 왕국 차원에서 반발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교단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터였다.

그간 교단이 모두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이게 되면 항상 그곳에 양해와 허락을 구하고 움직였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들이 타 세력을 배려해 최대한 내정간섭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다른 세력도 교단에게 양보와 존중을 표했던 것이다.

불사왕 토벌대 때야 워낙 사안이 위중해 그들이 강압적으로 나오더라도 대응하기 힘들긴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없지 않은가.

후룩—

프리지아는 재차 찻물을 들이켰다.

좋은 향의 차를 즐기는 것 또한 그녀의 소소한 취미 중 하나였다.

그렇게 그녀가 취미 생활을 만끽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순간···.

"흠?"

수도의 남문을 넘어선 바깥, 그녀의 감지 범위 끝자락에서 생소한 뱀파이어의 기운이 수도로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죠··· 이건? 기운은 순혈 정도인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한데?"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던 프리지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르면 직접 확인해 보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녀는 감각이 뛰어난 만큼, 뭔가 불확실한 것이 생기면 직접 확인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기운으로 보건데 진혈인 그녀에게 그리 위협적인 상대도 아니거니와, 브로코슬락의 영역 내에서 자신들에게 싸움을 거는 멍청한 짓을 할 리도 없었다.

휘이익—

옥상 정원에서 그녀의 모습이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사라지고···.

잠시 후, 그 모습은 성벽 바깥의 한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동을 멈추고 가만히 수도를 바라보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의 등 뒤에서.

그녀는 쓰고 있던 양산을 느긋하게 빙글빙글 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당신, 정체가 뭐죠? 순순히 밝히는 게 좋···을···?"

화악—!

하지만 그 순간.

진득한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더니 그들이 자리한 언덕을 둘러싸듯 바닥에서 핏빛 문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은폐」와 「피의 신비」를 이용해 만들어낸 결계였다.

발동과 동시에 내외부의 공간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제 결계가 파괴되기 전까지는 도주는커녕, 한 점의 기운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함정?"

하지만 프리지아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자신은 진혈이라는 고고한 자존심과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확신이, 위기감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건, 이 프리지아 브로코슬락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파란색으로 위장했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의지가 담긴 그녀의 요사스런 눈빛이 서서히 뒤를 돌아보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한 뱀파이어에게 향했다.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 크윽!"

상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안을 시전하던 그녀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마주친 시선을 황급히 피하는 그녀의 눈가에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마안이 튕겨져 나왔어?! 이 정도 반발력이라니, 말도 안 돼!'

어느새 그자의 검은 눈동자 또한 피처럼 붉게 변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리지아는 그때서야 상대가 고작 순혈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지 능력에 자신이 있던 그녀를 완벽히 속일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춘··· 진혈이었다.

"···당신, 목적이 뭐죠? 진혈이 아무 언질 없이 브로코슬락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전쟁이라도 하자는 건가요?"

그녀는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천천히 양산을 접었다.

마안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한 그 순간.

"내 목적?"

검은 머리의 뱀파이어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로코슬락의 모든 것이다."

퍼엉—!

직후, 터져 나오는 충격파와 함께···.

프리지아 브로코슬락과 하인즈 2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

폭음과 함께 기운의 잔재가 퍼질 때마다 주변을 감싼 결계가 연신 뒤흔들렸다.

화사한 금발을 가진 20대 초반의 귀족 여성.

그 가녀린 겉모습과는 달리, 과연 진혈답게 프리지아와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쉬익— 콰앙!

혈마력에 뒤덮인 양산이 어지러운 경로를 그리며 하인즈가 이동할 방위를 점해왔다.

하인리히의 시점으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오랜 세월 배우고 깨우친 제대로 된 검술이었다.

'마안을 사용하기에 당연히 마법파일줄 알았는데, 무투파라는 정보를 듣고 상당히 당황했었지.'

이미 알고 싸움을 시작했는데도, 뱀파이어의 육신과 오랜 세월 단련한 검술의 시너지는 상상 이상이었다.

상체를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양산의 끄트머리를 쳐내는 순간, 그 반동까지 이용해 반원을 그리며 곧바로 다리를 베어온다.

무릎을 세워 그것을 튕겨내는데···.

'가벼워?'

공격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콰직!

그와 동시에 하인즈의 감각을 속이고 뻗어진 그녀의 뾰족한 하이힐이 그의 발목에 꽂혔다.

그에 하인즈가 잠시 휘청한 순간, 양산이 재차 그의 심장으로 내질러졌다.

콰앙—!

「가속」을 사용해 급히 올린 가드로 겨우 양산을 막은 하인즈가 균형을 잃고 뒤로 맥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유효타를 가한 프리지아는 살짝 짜증 어린 표정으로 거리가 벌어진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흐음, 과연··· 대단하군."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스트레칭하는 하인즈의 얼굴에는 그저 미미한 감탄만이 감돌고 있었다.

짙은 혈마력이 깃들어 강철도 두부처럼 꿰뚫을 공격이었지만, 그에게는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의 피해에 불과한 것이다.

"당신···! 무슨 몸뚱이가! 거기다 혈마력까지!"

프리지아가 재차 이를 갈며 양산을 움켜쥐었다.

경험을 비롯한 전투의 기교에서는 그녀에게 밀리는 하인즈였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에서는 반대로 그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혼혈진화」로 이뤄진 압도적인 스펙 차이.

힘과 속도, 내구력을 비롯한 육체 능력은 물론 혈마력의 양과 제어력, 응용력까지 차원이 달랐다.

순간적으로 타점에 밀집한 혈마력이 공격을 흘려내고, 그 충격은 육체가 전신으로 분산시켜 흡수한다.

그 와중에 입은 피해도 「초재생」으로 눈 깜짝할 새에 회복해 버리니, 프리지아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지금도 상당히 페널티를 가지고 싸우는 중인데.'

애초에 하인즈의 전투방식은 은밀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암살자에 가까웠다.

그녀가 결계를 파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정면승부를 하고 있을 뿐.

아무리 공들인 결계라도 진혈이 마음먹고 가한 공격에는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

또 충돌의 여파로부터 결계를 지키기 위해 지속해서 혈마력이 새어나가는 것 또한 소소한 핸디캡이었다.

'그런데 백 년이 넘게 살아온 뱀파이어라 그런지 경지가 예사롭지 않네. 스펙이 이렇게나 차이 나는 데도 정면에서 근접전으로 부딪치면 승산이 없겠어.'

물론 이쪽이 지지도 않을 테니, 싸움이 끝도 없이 늘어질 것이다.

프리지아의 혈마력은 지구의 기준으로 따지면 7레벨 수준이었지만, 그 전투력은 강경파의 베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갖 성장 보정과 고유스킬로 급성장한 각성자와 오랜 세월 스스로를 갈고 닦은 이세계인의 차이이리라.

"과연 훌륭하지만, 조금 아쉽군. 나를 따를 생각은 없나?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입 의사를 표해 봤지만, 그녀에게선 웬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쉽지만, 그녀 또한 약간의 강제력이 동원돼야 할 것 같았다.

'이제 프리지아에 대한 분석도 어느 정도 끝났으니까.'

남에게 들은 정보와 실제로 겪은 정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잔혈이나 순혈도 아니고, 진혈을 휘하로 거두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계속 맞다 보면 생각이 좀 바뀔 거다."

"하아··· 허세는 참. 당신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그 몸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두드리고 두드리다 보면 결국에는··· 읏?!"

그 말을 끊고, 그녀의 뒤편에 있는 결계에서 핏빛 칼날이 쏘아졌다.

몸을 휙 뒤튼 그녀를 스친 칼날은 맞은 편 결계에 도달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사라졌다.

"당신···!"

"뭘 오해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너처럼 무투파가 아니야. 지금까지는 그저 어울려줬을 뿐이지."

처음부터 이 내부는 하인즈의 영역이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피의 신비」를 사용하자, 결계의 일부가 그의 의지에 따라 이빨을 세웠다.

칼날, 화살, 작살, 사슬 등 온갖 공격이 프리지아를 노리고 쏘아졌다.

하인즈로부터 시작된 혈마법과 결계에서 사출된 혈마법이 시너지를 이뤄 그녀의 손발을 어지럽혔다.

거기다가···.

콰앙—!

"커헉!"

순간적으로 「은폐」와 「투명화」를 사용하고 「간파」로 빈틈을 파악한 후, 「가속」으로 파고든 그가 혈마력을 듬뿍 담은 주먹을 그녀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옆으로 튕겨 나가는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 오는 핏빛 사슬과 그에 연계되는 무수한 혈마법.

하지만 하인즈는 슬쩍 인상을 굳히고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역시 만만치 않은데.'

공격이 적중한 찰나에 가해진 프리지아의 순간적인 반격에 그의 어깨에 구멍이 뚫렸다.

공격에 너무 신경을 쏟은 나머지, 방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물론 「초재생」으로 순식간에 회복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인즈가 좀 더 철저하게 그녀의 숨통을 조여 가자, 이후의 상황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점점 수렁에 빠져들듯 그녀의 기세가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보다 더 오래 버텼군."

"크윽··· 다, 당신···!"

전신이 걸레짝이 된 프리지아가 사슬에 포박당한 채 하인즈의 앞에 널브러졌다.

브로코슬락 클랜의 진혈 중 하나가, 드디어 하인즈의 손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76

브로코슬락 클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