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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엽 2킬!! 정말 드라마틱한 킬이 나왔습니다!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킬을 기록하다니요! 개리 윌리엄스 선수가 저곳에 있다는 걸 확신하고 던진 거였습니다. 투창의 컨트롤도 컨트롤이지만 판단력이 정말 예술입니다! 이번 킬은 아주 큽니다!

-예, 영국 팀의 눈이 되어주었던 개리 선수가 킬을 당했습니다. 한동안 영국 팀의 우세로 흐르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와아아아아!!"

"역시 서문엽이다!"

"지렸다! 서문엽 만세!"

"서문엽! 서문엽! 서문엽!"

수만 관중들이 신이 나서 서문엽의 이름을 연호했다.

로이 마이어의 단독 침투로 허를 찔린 대한민국 대표 팀이 불리한 흐름으로 가고 있어 답답했던 차였다.

그 분위기를 바꿔놓은 한 방이었다.

접속 모듈에서 나오는 개리 윌리엄스의 넋 놓은 표정이 대형 스크린에 포착되었다. 자신이 데스당했음은 인지했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간만에 나온 이런 명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로이 마이어의 3킬도 여러 번 보여줬듯, 방금 기록한 서문엽의 2킬 장면도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었다.

첫 번째로 던진 창부터 여섯 번째 창까지.

여섯 자루의 창이 동시에 첨탑에 도달한 것이 압권.

-와! 보셨습니까? 창 날아가는 속도를 조절해서 여섯 자루의 창이 모두 동시에 도달하게 만들었습니다. 피할 곳이 없어 뛰어내릴 수밖에 없게 설계된 정교한 투창이에요!

-그리고 뛰어내린 것을 감안하여 두 자루의 창을 던졌죠. 운이 좋았지만, 단지 운만으로 이루어진 킬이 아닙니다! 서문엽 선수의 입장에서는 부상만 입혀도 성공이었는데 대성공이었던 것이죠!

개리 윌리엄스도 자신이 죽은 장면을 보면서 아 하고 감탄을 했다. 투창도 예술이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니 완패였다.

-이러면 영국 선수들은 답답해집니다. 이제 한국 팀의 움직임을 볼 수가 없거든요.

-우리 선수들은 백하연 선수가 로이 마이어 일행의 위치를 아주 잘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도망치기가 더 편해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문엽이 노리고 있는 영국 선수 4명도 위기가 닥치고 있었다.

유인당한 스켈레톤 근위대가 동쪽 지역 일대에 도착한 것이다.

모습을 감춘 서문엽을 찾아 길목을 샅샅이 뒤지고 있어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래 봤자 한낱 사냥감일 뿐이지만, 혼란을 노리고 덤빌 서문엽의 기습이 두려웠다.

-서문엽 선수가 저 4명을 모두 잡아먹을 수만 있다면 8 대 5로 충분히 유리한 싸움이 됩니다.

-영국 대표 팀 선수 4명을 전부 킬하라니 다소 황당한 주문이지만, 서문엽 선수는 할 수 있습니다! 서문엽 선수도 그럴 생각이고요.

-이러면 이제 시간은 영국의 편이 아닙니다. 로이 마이어,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마법사는 이번엔 어떤 지혜를 내놓을지?!

로이 마이어는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즉시 내린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서쪽에 위치한 2구역 경비 초소로 향하여서 그곳에 있는 모든 스켈레톤 경비원을 처치한 것.

2구역 경비 초소 안에 있는 던전 코어까지 파괴하자,

쿠르르릉!

-2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시작되는 카운트다운.

만인릉은 각 구역에 코어가 있어 이 코어를 부숴야 지역이 붕괴되는 방식이었다.

로이 마이어의 판단은 바로 던전 각 구역을 파괴해 버리는 것.

구역을 없애서 채우현이 이끄는 한국 팀 본대가 도망갈 곳을 제한시킬 속셈이었다.

-로이 마이어가 판단을 내렸습니다. 2구역을 파괴하네요.

-구역을 파괴하며 도망칠 곳을 줄여 나가는 판단입니다. 코어를 파괴해 사냥 포인트도 대량 획득하고, 숨통도 조여 나간다는 뜻이죠.

-장기전을 생각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사냥 포인트를 잘 먹고 세지겠다 이겁니다. 상대가 도망칠 곳도 없어지니 일석이조죠. 좋은 판단입니다!

다음은 그 아래인 남서쪽에 있는 3구역까지 공략하는 로이 마이어 일행.

그 틈에 채우현 일행도 도주를 멈추고 사냥에 집중했다.

그들도 도망만 칠 수는 없었다.

성장이 망해 버리면 살아 있어도 한타 싸움에서 도움이 안 되니까.

하지만 로이 마이어는 홀로 3구역을 사냥하고 일행 4명에게는 한국 팀을 계속 쫓게 했다.

백하연이 정찰로 이를 알려주니, 채우현은 다시 일행을 이끌고 도주해야 했다.

로이 마이어는 3구역을 쓸어버리며 사냥 포인트를 독식했다. 그 결과 그의 몸이 3단계인 붉은 광채에 휩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3구역 첨탑 지하에 보호되고 있던 던전 코어를 부수는 데 성공.

-3구역이 붕괴됩니다. 60초, 59초, 58초······.

사냥 포인트를 대량 획득하며 로이 마이어의 붉은 광채는 더욱 흉흉해졌다.

-로이 마이어 선수가 거의 4단계 검은색에 이르기 직전입니다. 사냥 포인트를 획득할수록 그간 소모했던 오러도 다시 회복되고, 무엇보다 검은색의 아이리시 위저드는 괴물입니다!

-3킬을 하고 3구역도 혼자 다 먹었어요. 이대로 성장해서 한타 싸움 때 힘을 발휘하겠다는 뜻입니다. 검은색 단계에 이르러 눈보라를 펼치면 서문엽 선수도 견디기 어려워져요.

-우리 선수들은 계속 피해 다니기만 하는데요. 아무래도 다른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말씀하신 순간, 서문엽 선수도 움직입니다!

서문엽도 전투를 개시했다.

스켈레톤 근위대가 도처에 깔려 있어 전투를 치르는 틈을 타서 서문엽이 덤벼든 것이다.

파앗!

"막아!"

까아앙!

탱커가 나서서 방패로 막아냈다.

궤도가 휘어지는 투창이었는데, 일류 탱커답게 방패가 끝까지 쫓아가서 잘 막아냈다.

덩치는 산만해서는 신중하게 방어만 하는 탱커의 태도에 서문엽은 울컥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보라고 아까처럼 창들을 한꺼번에 던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러는 아껴야 해.'

억지로 밀어붙인다면 저 4명을 다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서문엽도 오러가 바닥난다.

오러가 회복될 때까지 힘을 쓸 수 없는데, 그럼 영국의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문엽은 조급함을 버리고 신중히 접근했다.

주위에 있는 스켈레톤 근위병부터 사냥했는데, 사냥 속도가 영국 선수들과 큰 차이가 나서 한눈에 비교됐다.

콰직! 빠가각!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의 테크닉으로 스켈레톤 근위병을 죽여 나갔다.

서문엽은 언데드 몬스터에 강했다.

스켈레톤 근위병이 펼치는 창술을 다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거나 빗겨내기가 손쉬웠다.

그 모습이 겉보기에는 퍽 아슬아슬했다. 조금의 오차가 나도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기술이 정점에 이른 서문엽이니 보일 수 있는 사냥 속도였다.

빠르게 주변을 정리.

여유가 생기자 아직 근위병과 싸우는 영국 선수들을 다시 노릴 수 있었다.

창 세 자루를 연달아 던졌다.

팟! 파앗! 팟!

노리는 것은 탱커와 떨어져 있는 근접 딜러.

하나는 일직선으로, 나머지 둘은 스크루를 그리며 날아갔다.

정신을 바짝 집중한 근접 딜러는 검을 휘둘러 첫 번째 창을 쳐냈다.

예측 불허의 궤도로 날아드는 두 번째 창 또한 마지막까지 집중하며 피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를 쳐내려고 검을 휘둘렀을 때, 근접 딜러는 타이밍이 꼬여 반응이 굼떠졌다.

콰지직!

"끄악!"

왼쪽 다리에 창이 박혀 주저앉은 근접 딜러.

서로 다른 궤도로 던진 것뿐만이 아니었다.

창이 날아가는 속도를 제각기 다르게 해서 템포가 꼬이게 만든 것이 서문엽의 진짜 노림수였다.

"크아아아!!"

다친 근접 딜러는 서문엽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이미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최후의 저항을 각오했다.

근접 딜러의 초능력은 다섯 가닥의 칼날.

모든 오러가 검에 집중된 채 다섯 가닥의 칼날이 되어서 넘실거렸다.

하나하나의 길이만도 족히 4m 이상.

하지만 서문엽은 개의치 않고 달렸다. 이미 분석안으로 어떤 초능력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죽어!"

근접 딜러가 다섯 가닥의 칼날을 휘둘렀다.

정면에서 방패로 막으려면 서문엽도 오러 소모를 각오해야 할 위력.

그러나 그 순간 서문엽이 점프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다섯 가닥의 칼날이 베지 못한 틈바구니로 절묘하게 빠져나갔다.

말도 안 되는 곡예.

하지만 오러를 훨씬 변화무쌍하게 사용하는 지저인들과 숱하게 싸워온 서문엽에게는 그리 어려운 동작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아바타가 소멸되기 전에 근접 딜러가 생각한 한마디였다.

퍽!

-서문엽, 3킬.

방패로 마무리하며 드디어 3킬째를 거둔 서문엽.

사냥 포인트가 쌓이자 몸이 붉은빛에 휩싸였다.

킬을 쌓아나가는 서문엽.

하지만 시간은 한국 편이 아니었다.

로이 마이어 일행이 몰이사냥으로 채우현 일행을 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둘, 둘, 하나로 세 길목을 막으면서 가고 있어!

백하연이 열심히 정찰하며 다급히 보고했다.

-하나는 로이 마이어지?

채우현의 질문.

-당연하지! 북쪽으로 가! 루트는 거기밖에··· 어?!

백하연이 갑자기 당황한 소리를 냈다.

세 갈래로 나뉘어 이동하던 영국 선수들이 돌연 방향을 돌린 것이다.

몰이사냥이 맞긴 하지만 타깃은 채우현 일행이 아니었다.

-아 망했다! 타깃이 나야!

백하연이 소리쳤다.

그랬다.

로이 마이어는 백하연을 잡기 위해 설계한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정찰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을 감수한 영국 대표 팀이었다.

듣고 있던 서문엽은 혀를 차며 말했다.

"하연아, 최대한 시간 끌어. 나머진 북쪽 루트로 이동, 나와 합류한다."

-응!

"되도록 로이 마이어한테 킬 주지 마!"

-노력할게.

하지만 백하연은 그 오더를 따를 수 없었다.

로이 마이어가 가장 먼저 접근, 얼음벽을 치며 도주로를 가로막은 것이다.

팟!

순간 이동을 써서 얼음벽을 통과한 찰나, 백하연은 발밑에 있는 둥그런 원을 발견했다. 얼음 봉인의 표식이었다.

급히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표식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표식을 조종하는 로이 마이어의 컨트롤이었다.

쩌저저적!

결국 백하연은 얼음 속에 갇히고 말았다.

봉인이 풀리자마자 순간 이동을 쓰려 했지만.

콱!

먼저 지팡이의 칼날에 찔려 데스.

-로이 마이어, 4킬.

그사이 다른 일행은 채우현 일행을 쫓고 있었다.

"북쪽 루트를 막아."

로이 마이어는 서문엽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오더를 내렸다.

-로이, 윈햄이 당했어!

로이 마이어는 비보에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내가 한 발씩 앞서고 있군.'

이제 한국 측도 정찰을 담당할 사람이 사라졌다.

"계속 버텨. 우리도 그쪽으로 간다."

정찰이 사라졌으니 한국 측은 도망치는 데 한계가 있다.

구역도 계속 파괴되니 어디로 도망치든 금방 막다른 길에 몰린다.

그럼 차라리 서문엽과 합류해 함께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나을 터.

그렇다면 환영이었다.

적이 한데 모였을 때 한타 싸움을 열 생각이었다.

'자신 있다.'

로이 마이어는 검은색 광채에 휩싸여 있었다.

선수마다 가장 강해지는 시기가 따로 있다.

서문엽은 초반에 가장 강하다. 공수 밸런스가 완벽하고 테크닉이 완벽하며 오러 소모가 적은 던지기로 상대를 잘 괴롭힌다.

약점은 후반.

초능력이 던지기 하나뿐인데, 이는 사냥 포인트가 많이 쌓여서 오러가 더 강력해지는 후반에도 위력이 그다지 차이가 없다.

하지만 로이 마이어는 그와 정반대였다.

초능력 하나하나가 스케일이 너무 커서 오러 소모도 방대하다.

때문에 초반에 상대적으로 약하다.

하지만 사냥 포인트로 오러가 점차 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위력이 배가된다.

4단계인 검은색 광채를 띨 때부터 로이 마이어는 괴물이 된다.

지금부터가 가장 자신 있을 때라는 것이었다.

'시간을 끌고 싶다면 그것도 좋지. 하지만 그사이에 내가 흰색이 되면 곤란할걸?'

마지막 5단계인 흰색까지 갔을 때는 져본 기억이 없었다.

한국 대 영국 A매치, 3세트.

경기는 슬슬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 분전(4) > 끝

< 분전(5) >

서문엽은 채우현 일행을 이쪽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백하연이 데스당했다.

더 이상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니 위험했다.

백하연 대신 그런 위험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한국에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이 새끼들, 생각보다 더 허접하네.'

대한민국 대표 팀의 처참한 기량에 서문엽은 학을 뗐다.

분석안의 수치가 모든 것을 다 말하진 않는다.

팀워크와 경험 등 분석안에 안 보이는 중요한 요소도 많다.

서문엽이 기대를 걸고 있었던 점도 그런 부분.

지금 와서는 대체 무슨 기대를 했을까 하는 한숨뿐이었다.

'수치화되지 않은 기량은 더 형편없구나.'

경험이 없었다.

강팀을 상대해 본 경험이 없으니, 오히려 자기들 능력치보다 더 형편없는 게임을 했다.

부익부 빈익빈의 배틀필드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세계적인 약체 주제에 강팀을 상대하는 약팀의 방식도 몰랐다.

서문엽이 혼자 영국 선수 5명을 상대하는 동안, 한국 대표 팀은 로이 마이어 한 사람에게 탈탈 털렸다.

그때 이미 승부는 기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풍비박산 나기 전에 차라리 합류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사냥 포인트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한타 싸움을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때까지 한 놈이라도 더 줄이자.'

서문엽은 눈에 불을 켜고 영국 선수들을 치열하게 몰아붙였다.

참 얄밉게도 그럴수록 영국 탱커는 클래식 탱커의 강점인 탄탄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스켈레톤 근위병과 서문엽의 공세를 막아내며 동료를 보호하려고 애썼다.

근접 딜러 2명도 간간히 서문엽을 견제하는 공격을 펼치며 대항했다.

3인이 딱딱 맞는 호흡으로 질서 있는 저항을 하니 서문엽도 쉽사리 킬 기회를 못 봤다.

적의 기량과 목적을 아는 이상, 영국 국가 대표 정도쯤 되는 선수들이 쉽게 당할 리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서문엽 한 사람에게 5명이 붙잡혀 있었던 것이 망신이었다. 그 와중에 3킬까지 당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로이 마이어의 계획대로 마지막 순간은 다가왔다.

8 대 7.

수적으로도 한 명 불리한 채로 한타 싸움이 벌어졌다.

서문엽은 정신을 빠짝 집중했다.

백하연도 없는 이상 믿을 건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팀원들에게는 뭉쳐 있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이라고만 지시해 놓고, 서문엽은 전투에 몰두했다.

민첩성을 증폭.

그 뒤에 한 번에 앞으로 뛰쳐 나가며 적과 거리를 좁혔다.

깜짝 놀란 상대측 탱커가 사각 방패를 들어 올리고 방비한다.

빈틈이 잘 안 보인다.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서문엽은 근력을 증폭시키고서 온몸으로 부딪쳤다.

쿠우웅!

근력이 약한 서문엽이 몸통 박치기를 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탱커는 놀랐다. 하지만 빅 리그 레벨의 클래식 탱커답게 밀리지 않는다.

몸싸움을 비비면서 서문엽은 창을 들었다.

이번엔 기술을 증폭.

서문엽은 탱커와 밀착한 채로, 있는 힘껏 점프했다. 그리고 창을 던졌다.

창은 탱커의 머리 위를 지나가 뒤편에 있던 근접 딜러에게 쏘아졌다.

탱커 바로 뒤에 있었던 근접 딜러는 자신이 안전지대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 속력으로 날아드는 창에 대응하지 못했다.

콰아악!

-서문엽, 4킬.

놀라운 슈퍼 플레이에 영국 선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클래식 탱커와 몸싸움을 비비고 있으면서 뒤에 있는 딜러를 창으로 맞추다니?

그런 플레이는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이다.

'뭔가 알 것 같다!'

서문엽은 온몸에 끓어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성취감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자신의 몸이 펼친 플레이가 지금껏 체감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 환희.

그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은 한 가지 답이었다.

'빠른 증폭 전환!'

뛰어들 때 민첩을.

밀어붙이며 근력을.

창 던질 때 기술을.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능력치를 신속하게 증폭시킨 결과였다.

순간적으로 민첩성 107, 근력 89, 기술 110을 가진 선수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증폭도 오러가 소모되는 초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낄 오러 같은 건 없었다.

서문엽은 여전히 기술을 증폭한 채로 눈앞에 있는 탱커와 육박전을 펼쳤다.

밀착된 채로 치열하게 진행되는 몸싸움.

탱커들의 몸싸움은 단순히 덩치로 밀어붙이는 대결이 아니었다. 배틀필드에서 가장 치열한 대결 공간이다.

사각 방패를 손으로 뜯어내며 짧게 쥔 창을 쑤셔 넣으려는 서문엽.

탱커가 허둥거리며 뿌리쳤다.

그 순간,

파앗!

몸을 납작 바닥에 뉘인 서문엽이 땅을 쓸어가는 듯한 낮은 발차기로 발목을 후려쳤다.

퍽!

"헉!"

탱커의 몸이 비틀거렸다.

잃은 균형을 재빨리 되찾는 것도 클래식 탱커의 전통적인 강점이지만, 이번에는 서문엽이 더 빨랐다.

민첩을 증폭시켜 재빨리 몸을 일으킨 후에,

근력을 증폭시켜 몸통 박치기!

쿠우웅!

다시 한번 밀어붙여서 탱커를 쓰러뜨렸다.

쓰러진 탱커를 킬 시키려고 욕심 내지 않았다.

그냥 지나쳐서 공격에 노출된 다른 근접 딜러들을 습격했다.

서문엽에 의해 영국 선수의 포메이션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아!!!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악!"

"버텨!"

"벗어나!"

아우성치는 한국 선수들에게 거센 눈보라가 정통으로 쏟아진 것이다.

-로이 마이어, 5킬.

-로이 마이어, 6킬.

2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그렇다.

어디까지나 한타 싸움의 꽃은 범위 공격형 초능력을 지닌 원거리 딜러였다.

로이 마이어의 몸이 흉흉한 칠흑색에 휩싸였다. 2킬로 인해 검은색 광채가 더 짙어졌다.

눈에 불을 켠 서문엽이 로이 마이어에게 덤볐다.

로이 마이어는 그에게 왼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쏟아질 것 같은 상황.

그러나 격돌하려는 순간, 로이 마이어는 눈보라 대신 얼음벽을 펼쳤다.

얼음벽이 대각선으로 전장을 가로질렀다.

서문엽은 얼음벽에 튕겨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직후 발밑에 보이는 둥그런 원을 발견했다.

얼음 봉인의 표식이었다.

서문엽은 순간적으로 민첩을 증폭시켰다.

그리고 표식을 피해 좌우로 무빙!

로이 마이어도 표식을 컨트롤하며 서문엽을 뒤쫓았지만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저렇게 빠르다니!'

로이 마이어는 미세한 표식 컨트롤에 진땀을 흘렸다.

그의 천적이라 할 만한 사람은 바로 나단 베르나흐였다.

얼음벽을 써도 둘로 나뉜 몸이 양쪽에 있으면 전술적 가치가 떨어진다. 얼음 봉인을 써도 분신을 해제하면 그만.

거기다가 얼마나 민첩한지 초능력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나흐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어!'

서문엽은 표식을 피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다른 영국 선수들을 습격했다.

잠시라도 한 자리에 머물면 표식에 따라잡혀 얼음 속에 갇힌다.

그래서 계속 휙휙 방향을 전환하며 이 선수 저 선수를 건드리고 다녔다.

결과적으로는 영국 선수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한타 싸움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로이 마이어까지도 표식을 조종하느라 여유가 없는 상황.

급격히 불리했던 한타 싸움의 흐름이 갑자기 대한민국 대표 팀에게 왔다.

"혁아! 밀어붙여!!"

채우현이 최혁에게 소리쳤다.

최혁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우현이 먼저 달려들었다.

영국 탱커와 부딪치면서 곧바로 둔화를 펼쳤다.

탱커는 자신의 몸이 느려지자 움찔했다. 그 탱커는 오러가 81로 82인 채우현보다 미세하게 아래여서 둔화의 타깃이었던 것.

그 틈에 최혁이 뒤이어 돌격했다.

"크아아아!"

그것은 영국전에 대비해 치열하게 연습했던 가짜 탱커 전술의 축소판이었다.

적진 안에 침투한 최혁이 로이 마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근접 딜러 1명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남은 한국 선수들도 일제히 달려들자 당혹했다.

얼음벽 때문에 영국 선수들도 나뉘어서 더는 도와줄 동료가 없는 상황.

하는 수 없이 로이 마이어는 얼음 봉인을 포기했다.

대신 분노한 눈길로 한국 선수들에게 눈보라를 퍼부었다.

"다 죽어라!"

파아아아아아앗!!!

신이 분노하면 이런 자연 재해가 쏟아질까.

-로이 마이어, 7킬.

-샘 윌슨 1킬.

삽시간에 2킬이 터졌다. 한국 대표 팀의 채우현과 근접 딜러 유벽호가 죽었다.

다른 선수들도 눈보라에 밀려 움츠러든 상황.

하지만 그때 최혁이 강인한 힘으로 눈보라에서 벗어났다.

"너만은 죽인다!"

악에 받친 최혁은 로이 마이어에게 달려들었다.

근접 딜러가 가로막았지만 방패를 던져서 방해하고 계속 로이 마이어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예전의 근접 딜러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최혁이었다.

초능력 오러 집중으로 빠르게 검에 집중했다.

모든 일격을 로이 마이어에게 먹이겠다는 필사의 각오였다.

로이 마이어는 칼날들이 솟아난 지팡이를 겨누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냉정한 눈빛.

등 뒤에는 근접 딜러가 계속 쫓아오는 상황.

그 순간.

"흐압!"

최혁은 급격히 U턴하며 쫓아오던 근접 딜러를 공격했다.

"헉!"

깜짝 놀란 근접 딜러는 검을 들어서 가로막았지만, 모든 오러와 근력이 담긴 일격에 의해 밀려났다.

서걱!

-최혁, 1킬.

이윽고 로이 마이어도 칼날 지팡이로 최혁을 처치했다.

-로이 마이어, 8킬.

이제 한국 팀은 살아 있는 선수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곧 영국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

왜냐하면.

-서문엽, 5킬.

-서문엽, 6킬.

-서문엽, 7킬.

"뭐라고?!"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3연속 킬 안내에 로이 마이어가 기겁하고 소리 질렀다.

30초가 지나 얼음벽이 사라지고 서문엽의 모습이 보였다.

서문엽은 미소를 지으며 로이 마이어에게 말한다.

"이제 좀 익숙해졌거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껏 봤던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다 모여!"

로이 마이어의 외침에 살아 있는 영국 선수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

로이 마이어는 놀랍게도 들고 있던 지팡이를 버렸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서문엽과 한국 선수 몇 명을 바라보았다.

"뭐가 됐건 이제 끝이다."

"오냐, 한번 해보자."

서문엽은 오러를 증폭시키며 대꾸했다.

사실 이제 오러가 많이 남지 않았다.

빠른 증폭 전환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오러 소모량도 커졌던 것이다,

서문엽도 이제 최후의 힘을 한 번에 다 퍼부어서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마침내 양측이 격돌했다.

***

<'초인 중의 초인' 서문엽, 영국전서 도합 20킬 금자탑>

<'대한민국의 희망' 서문엽, 20킬로 한 경기 최다 킬 한국 신기록>

<서문엽에 찬사 보낸 로이 마이어 '내가 본 가장 강한 초인'>

<파리 뤼미에르 모로 형제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

<나단 베르나흐 '서문엽은 경이로운 하이브리드 탱커'>

"쯧."

신문을 읽던 서문엽은 혀를 차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다 네 칭찬뿐인데 왜 심통이야?"

백제호가 물었다.

광란의 A매치 경기가 끝나고 하루가 지났다.

서문엽은 집에서 한껏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일해서 진이 빠졌다.

하지만 피로보다는 허탈감이 더 컸다.

"결국 졌잖아."

그 불만에 백제호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니냐? 경기가 거기까지 간 게 더 신기하다."

그랬다.

결국 승자는 영국이었다.

3세트 스코어는 2-0.

영국 대표 팀도 로이 마이어와 필사적으로 그를 보호하던 탱커 하나만 간신히 살아남은 상황.

하지만 서문엽의 기력도 거기까지였다.

혼자서 날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영국을 상대로 혼자 날뛰며 9킬을 한 것이 더 경이로웠다.

오죽했으면 경기를 중계하던 해외 방송에서도 믿을 수 없다는 중계진의 외침이 연신 들렸겠는가.

서문엽의 실력이 마침내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났다.

뚜껑을 열고 보니, 서문엽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1세트, 7킬 3어시.

2세트, 5킬.

3세트, 8킬.

한 경기에서 최다 킬을 기록한 한국 선수가 되었다.

상대가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드는 영국 통합 대표 팀임을 감안하면 믿을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비록 졌지만 강팀을 상대로 저 정도까지 싸웠다는 사실에 한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다른 선수들만 좀 더 보강하면, 내년의 월드컵이 기다려진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울상이 된 쪽은 영국.

서문엽의 미친 활약도 있었지만, 영국이 패배 직전까지 간 데는 '가짜 탱커' 전술에 근본적인 스타일인 '기사와 마법사' 체제가 박살 났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미국을 박살 낼 좋은 방법을 배웠다며 감사를 표하는 상황.

영국이나 미국이나 클래식 탱커 위주의 팀들은 전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마저도 서문엽이 만든 전술이니 과연 세상을 구할 만하다고 전 세계의 찬사를 듣고 있었다.

"오늘 세계 협회에서 사람이 온대. 알고 있지?"

백제호가 화제를 전환했다.

"이거?"

서문엽은 품속에서 자드룬의 씨앗이 담긴 상자를 꺼내 보였다.

"잘 건네주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알아."

< 분전(5) > 끝

< 초대(1) >

점심 무렵에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세계 협회에서 온 피에트로 아넬라라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백발을 지닌 이탈리아 남자가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서문엽은 물론 백제호도 영어를 어느 정도 했기 때문에 대화에는 문제가 없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 아넬라를 빤히 살폈다.

하얗게 탈색된 백발이 왠지 특이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대상: 피에트로 아넬라(인간)

-근력 53/53

-민첩성 61/61

-속도 58/58

-지구력 42/42

-정신력 21/92

-기술 42/42

-오러 92/92

-리더십 9/78

-전술 56/56

-초능력: 맹독의 손길

-맹독의 손길: 맨손에 닿은 상대를 맹독에 중독시킬 수 있다.

능력치도 여러 가지로 특이했다.

심지어 피에트로 아넬라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뻗었다.

맨손이었다.

저런 초능력을 지닌 작자가 장갑도 끼지 않고 악수를 청하다니, 참 미심쩍은 작자였다.

서문엽은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악수에 응했다.

'수작 부리면 죽이면 되니까.'

불사신인 서문엽은 당연하지만 독이 두렵지 않았다.

서문엽에 이어 백제호도 악수를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작자인가?'

하기야 초능력에 대해 일부러 남에게 밝히지 않는 이상 악수로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일은 없다.

서문엽만 분석안이 있어서 미심쩍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능력치도 이상했다.

정신력이 21/92.

본래 강한 정신력을 타고났어야 정상인데 21밖에 안 되다니?

나이를 보아하니 초인이라 젊어 보여도 50대 후반쯤은 족히 되어 보였다.

저 나이에 정신이 저 정도로 성장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그것도 세계 협회에서 일하는 직원이 말이다.

'같은 이유로 리더십도 이상하지만 이건 그냥 넘어가고.'

더 이상한 것은 따로 있다.

"혹시 배틀필드 선수 출신입니까?"

"하하, 설마요."

피에트로 아넬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던전을 공략했지만 그마저도 오래됐지요."

"그렇군요."

서문엽도 웃었다.

'그런 인간이 왜 능력치가 남김없이 다 개발되어 있냐고.'

정신력과 리더십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한계까지 개발되어 있는 상태.

저 나이에도 불구하고 쇠락한 부분도 없이 말이다.

"자, 그럼 약속했던 대로 거래를 하죠. 공개되어서 좋을 게 없는 거래이기 때문에 일단은 현금으로 준비했습니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현금이 담긴 상자를 서문엽에게 건넸다.

007가방에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5억이네."

백제호가 말했다.

"그래? 필요도 없다면서 생각보다 많이 쳐주네."

서문엽은 자드룬의 씨앗이 담긴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응?"

피에트로 아넬라는 앞뜰로 나왔다. 그리고 상자에서 자드룬의 씨앗을 꺼냈다. 그러고는.

파악!

땅에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깨진 씨앗에서 작은 줄기가 꾸물거리며 나와 도망치려 했지만, 그마저도 지근지근 밟아 없애 버렸다.

방금 5억 원을 주고 산 물건을 짓밟아 죽여 버린 것이다.

그 행동에서 서문엽은 이상한 부분을 포착했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확실히 수상했다.

'한 번 시험해 볼까?'

일단 한번 격하게 자극을 해보기로 했다.

"무슨 짓이야?"

서문엽의 물음에 피에트로 아넬라가 말했다.

"그래서 실례한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필요 없으면 뭐 하러 사냐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니까요."

"이 씨발아, 돈 안 주면 내가 어딘가에 몰래 심기라도 할까 봐? 너 뒈지고 싶냐?"

서문엽이 눈을 흉흉하게 뜨며 으르렁거렸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어딘가에 숨어 있었던 자드룬의 씨앗을 발견해 주신 공로에 감사하는 의미였습니다. 이놈이 자라서 민간인을 습격했다면 5억 원은 우스운 피해를 입혔겠죠."

"그건 우리나라 정부가 할 일이지 너희가 뭔데 이 나라 민간 피해를 생각하면서 사례를 표해? 뒈지고 싶지 않으면 돈 갖고 꺼져."

서문엽은 이제 살기까지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 반응에 피에트로 아넬라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저희 세계 협회는 세상을 위해 일합니다. 초인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걱정하고 평화를 지향합니다."

"갖고 꺼지라고. 모가지 따버리지 전에, 씨발아."

"지, 진정하십시오. 서문엽 씨를 존중하는 의미지 폄하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제호가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합시다. 엽아, 너도 진정하고."

"난 멀쩡해. 문제 있는 건 저 새끼지."

서문엽은 피에트로 아넬라에게 이어 말했다.

"야, 이 개 아들 새끼야. 내 성질 자극해 보라고 누가 시키디? 갖고 가서 처리하면 되지 왜 보란 듯이 그 지랄을 했는지 설명 못 하면 넌 60초 안에 반드시 죽는다."

그러면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본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식은땀을 흘렸다.

진심으로 죽이겠다는 태도가 더 무서웠다.

"하, 한시라도 빨리 제거해야 하는 게 원칙입니다. 지저의 개조 생명체를 발견하면 반드시 즉각 처리해야 합니다. 지니고 이동하다가 어떤 사고라도 터지면 안 되잖습니까?"

"흐음······."

서문엽은 화가 좀 풀린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됐고."

말리기 위해 노력하던 백제호는 맥이 풀려버렸다. 화난 것치고는 너무 쉽게 납득해 버린 서문엽이었다.

"오해는 풀리셨지요?"

"어."

"그럼 세계 협회 회장님의 전언을 전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뭣?!"

백제호가 화들짝 놀랐다.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뵙고 싶다고 서문엽 씨를 초청하셨습니다."

"세계 협회장님께서 직접 초청하신 겁니까?"

"예, 협회장님께서 직접요."

피에트로 아넬라는 미소를 지으며 단언했다.

서문엽은 백제호가 왜 그렇게 놀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더 거물은 없다고 굳게 믿는 자기애의 화신이었던 탓이다. 세계 협회장이고 나발이고 세상을 구한 자신보다 중요한 사람이겠는가?

"가까운 시일이면 정확히 언제? 나도 스케줄이 있는데 바빠서 못 갈지도 몰라."

짐짓 비싸게 구는 서문엽.

"언제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당장 가자."

이번에는 피에트로 아넬라도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스케줄을 봐야 한다면서 내일 당장이라니. 한가했는데 마침 잘됐다는 투였다.

"내일 가시겠다면 제가 당장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응, 그래라."

"그럼 오늘은 이만.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았어, 가봐."

결과적으로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하대를 받게 된 피에트로 아넬라는 찜찜한 표정으로 떠났다.

피에트로 아넬라가 떠난 뒤, 백제호는 서문엽에게 화를 냈다.

"인마,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

"그냥."

"뭐?"

"그냥 어떻게 나오나 시험해 보고 싶어서."

"난 네 속을 여전히 모르겠다."

"인마, 저 자식 겉보기보다 훨씬 찜찜한 새끼야. 그놈 믿지 마."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내 말 믿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서문엽이 이 정도로 단언하면 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백제호는 수긍했다.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야. 세계 협회에서, 그것도 협회장이 직접 보자고 한 거야!"

"뭐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기에 그래? 그래봐야 어딘가의 나이 든 꼰대겠지. 내가 왕년에 말이야, UN사무총장도 봤고 미국 대통령도 봤고, 어?"

도리어 자신이 더 꼰대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서문엽이었다.

백제호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몰라.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잉?"

"모든 게 베일에 가려져 있는데, 확실한 건 배틀필드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야."

"호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전 세계 아무도 흉내 못 낸다는 배틀필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

기술이 아닌 초능력으로 만든 것이라는 추측만 오가는 가운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온갖 음모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세계 협회장이었다.

던전이 사라지면서 일거리를 잃어 범죄나 군사 방면으로 빠질 뻔했던 초인들을 배틀필드로 다시 규합시킨 장본인.

몰락한 던전 산업체들까지 배틀필드로 되살아났기 때문에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권위자였다.

"잘됐네. 내가 만나보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게."

"어휴, 그래라."

백제호는 이미 몹시 피곤해진 표정이었다.

대화가 끝난 뒤, 다시 소파에 드러누운 서문엽.

'그 자식. 역시 찜찜한 놈이야.'

피에트로 아넬라는 떠올렸다.

굳이 그를 죽이겠다고 설치며 반응을 살펴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드룬의 씨앗을 처리한 방식 때문이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맹독의 손길로 씨앗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꺼내 발로 밟아 번거롭게 처리했다.

초능력을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걸 보여주면 상대는 찜찜해서 악수도 못 할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는 되지만, 그럼 왜 장갑을 끼지 않는가?

맹독의 손길을 비밀로 하고서 늘 상대와 맨손으로 악수를 하는 저의가 뭔가?

마음먹으면 언제든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저열한 우월감을 느끼려는 유형으로도 보이지 않았는데.'

낮은 정신력으로 보면 열등감 같은 걸 많이 지닌 타입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럼 맨손 악수도 납득 간다.

근데 그런 유형으로 보이지가 않아서 문제였다.

'저 나이에 선수도 아니면서 모든 능력치가 다 개발되어 있었고, 하여튼 여러 가지로 수상쩍은 작자야.'

그래서 내린 결론.

'재미있을 것 같다.'

수상쩍은 놈이니 더욱 같이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내일 당장 가겠다고 한 것이다.

베일에 싸인 세계 협회장이든 피에트로 아넬라의 본모습이든 한 번 보고 싶었다.

다음 날, 피에트로 아넬라가 차를 끌고 왔다.

"가시죠."

"그래."

옷가지 외에는 딱히 준비가 필요 없었다.

서문엽은 이미 예전에 많은 국가로부터 비자 면제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전 세계 주요 국가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캐나다 앨버타 주의 캘거리 시.

캘거리 국제공항에서 내린 서문엽은 피에트로 아넬라와 함께 움직였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움직이면서, 서문엽이 문득 물었다.

"세계 협회가 여기에 있어?"

"세계 협회는 미국에 있습니다."

"그럼 여긴 왜 왔어?"

"협회장님께서는 세계 협회에 안 계시니까요."

"호오, 완전 수수께끼의 인물이네. 어디에 사는지도 비밀인 거야?"

"예."

"그런 데 날 데려가도 되는지 몰라."

피에트로 아넬라는 미소를 지었다.

"입이 무거우시리라 믿습니다."

"난 입이 좀 싼데, 그래도 믿어보긴 해봐."

피에트로 아넬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차는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할수록 창밖에 보이는 풍광이 점점 멋있어졌다.

로키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엽은 세계 협회장이라는 작자가 산속에라도 은거하고 있나 하고 상상했지만 정말 로키 산맥으로 향하자 피식 웃었다.

"설마 저기서 사는 건 아니지?"

"비슷합니다."

"응?"

"이제 내리시죠."

이동 중에 한적한 도로에서 돌연 차가 멈췄다.

두 사람을 내려놓고 차는 훌쩍 떠나버렸다.

"이제 어쩌자고? 여기서 등산이라도 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품속에서 어떤 돌을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귀환석이었다.

"귀환석?"

"예, 귀환 좌표가 협회장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귀환석은 던전이 아니면 쓸 수 없는데?"

어디서나 쓸 수 있었으면 인류 사회에 교통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특별 귀환석이었습니다."

던전에서 지상으로 벗어나도록 귀환석을 설정할 수 있는 기술자는 예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용 장소는 던전이어야 한다.

지상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던전으로 이동하도록 귀환석을 설정할 수 없었다.

아니.

지저 문명은 가능하다.

서문엽의 눈빛이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재미있네."

배틀필드 시스템부터 이 특별 귀환석까지.

인간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 세계 협회장을 만나볼 기회였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특별 귀환석을 하나 더 꺼내 서문엽에게 건넸다.

"자, 사용하시면 목적지로 이동됩니다."

"오케이."

서문엽은 특별 귀환석을 사용했다.

사용 직전, 웃고 있는 피에트로 아넬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서문엽도 씨익 웃어줬다.

파앗!

< 초대(1) > 끝

< 초대(2) >

파앗!

도착하자마자 음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햇볕이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는, 던전 특유의 느낌이었다.

쐐애액!

어디선가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휙!

서문엽은 고개를 옆으로 꺾어 피했다.

머리 위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치르르! 치르르르!

괴상한 소리를 내는 괴물이 나타났다.

3m쯤 되는 거대한 사마귀처럼 생긴 괴물이었다.

'망트로군.'

망트는 지저 전쟁 후기에 출현한 괴물이었다.

출현 시기나 생김새나 실제 사마귀를 본떠서 만든 조작 생명체임이 틀림없었다.

당시 서문엽에게 던전이 하나둘 무너지고 있어서, 발등에 불이 떨어져 급히 만든 괴물이 바로 망트였다.

사람을 먹어 치우고 배 속에 오러를 저장하는데, 날카로운 앞발로 오러의 칼날을 만들어 방금처럼 쏘아 보내기도 한다.

오러를 지독히 탐내는 지저인이었다.

보통은 죄다 먹어 치워서 오러를 축적하게 한 다음에, 그 괴물을 죽여 모인 오러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저인의 행태.

그런데 망트는 오러를 소모하는 공격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지저인이 얼마나 다급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을 살상하는 능력이 무척 뛰어난 괴물이기도 했다.

치르르!

망트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14마리의 망트가 일제히 서문엽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서문엽은 대뜸 이상한 던전에 떨어져 괴물들의 습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저 피식 웃었다.

'피에트로 아넬라, 이 자식. 역시 수상한 놈 맞잖아?'

차라리 계속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다면 찜찜했을 텐데, 이렇게 본색을 드러내 주니 다행이었다.

서문엽은 여행용 캐리어를 열고 창과 방패를 꺼냈다.

어딜 가든 창 한 자루는 꼭 챙기고 다니는 편이었다.

특히 피에트로 아넬라 같은 수상한 자식과 함께 온 지금은 방패도 특별히 챙겼다.

세계 협회장도 어떤 작자인지 알 수 없는데 아무리 불사신이라도 아무런 대책도 준비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내가 불사신인 건 그놈도 알 테고.'

철컥! 철컥!

오러를 주입하자 창이 1.8m 길이로 펼쳐졌다.

'몸뚱이가 죄다 뜯어먹히면 불사신이어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정말 그러면 죽는 건지 서문엽도 궁금하긴 했지만, 실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좀 허술한 생각이지. 아마 괴물들이 이것보다 더 잔뜩 준비됐을 테고······.'

촤촤촤촤촤촥!

망트들이 하늘에서 일제히 오러의 칼날을 쐈다.

서문엽은 몸을 웅크린 채 방패를 들어 능숙하게 빈틈없이 막았다.

그 틈에 망트 한 마리가 돌격해 왔다.

앞발을 휘두를 때, 방패를 들어 막고 있던 서문엽도 동시에 창을 내질렀다.

"옜다."

퍼걱!

망트의 머리통이 꿰뚫렸다.

한 번 더 찔러 목을 아예 끊어버리고, 몸통도 찔러 마무리했다.

망트는 상대의 공격을 잘 피하는 습성을 갖춰서 상당히 까다롭지만, 공격할 때는 회피를 못한다.

상대의 공격 타이밍을 노려서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펼치는 서문엽의 전투 습관은 망트를 사냥하면서 기른 것이었다.

'귀환석이 없을 테니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그러나 서문엽은 귀환석도 가지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 귀환석을 소지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엽은 요즘 사람이 아니었다.

7영웅 동료 에릭 튀랑에게 선물받은 귀환석이 아직 백팩에 넣어져 있었다.

일전에 자신의 비밀 던전에 다녀오면서 귀환석을 넣어둔 백팩을 그대로 메고 왔던 것이다.

'수작을 부리려면 내가 좀 더 평화에 취할 때까지 기다리지 그랬어?'

창도 방패도 귀환석도 다 있는 남자!

2020년대를 살기에 서문엽은 아직 긴장이 안 풀렸다.

망트들이 계속 날아들었다.

앞서 덤빈 한 마리가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봤으므로, 한꺼번에 덤벼야 한다고 판단했으리라.

전후좌우에 공중까지 모두 점하고서 포위 공격을 펼치는 망트들의 집단 전투 습성은 무섭지만, 서문엽은 예외였다.

'이 정도는 초능력을 쓸 필요도 없지.'

자신 같은 위대한 초인을 잡는 함정인데, 설마 고작 이걸로 위험이 끝나겠는가?

'2탄, 3탄, 4탄, 끝판 왕까지 계속 나와라!'

서문엽의 창이 춤을 췄다.

포위당하지 않도록 계속 움직여 주면서 망트들을 하나씩 처치했다.

초능력은 던지기조차 쓰지 않고, 순전히 창술로 상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픽픽 쓰러지는 망트들.

창술뿐만 아니라, 무빙과 방패 컨트롤까지 모두 절정의 경지였다.

최소한의 동선, 최소한의 힘.

망트들은 어느새 모조리 시체가 되었다.

오러는 창을 유지하는 정도 외에는 거의 쓰지도 않았다.

"2탄은 없냐?!"

서문엽이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스스스스스스스······!

무언가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작은 소리로도 서문엽은 정체를 대번에 알아챘다.

온몸의 가지와 이파리에 가시가 난 나무 괴물, 파둡이었다.

몸체가 질겨서 오러로 베어야 하는 식물형 괴물이었다.

파둡의 몸체에는 또한 식물형 괴물인 미스텔이 기생해 있었다.

'내 예상이지만 아마도 내 힘을 빼려는 수작이겠지?'

강력한 망트를 처음에 배치한 것은 예상 못 한 기습으로 단번에 죽이려 했던 술책.

하지만 실패하거든 오러를 사용해야 잡을 수 있는 괴물들로 힘을 빼겠다는 안배라고 해석하면 그럴듯했다.

그렇다면 힘을 최대한 아껴주어야 손님으로서 저들이 준비한 것을 모두 즐겨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서문엽은 창에 오러를 살짝 실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대기했다.

먼저 공격을 가거나 던지기로 하나씩 잡아봐야 힘 낭비였다.

사실 탈출하려거든 당장 귀환석을 써도 되지만, 서문엽은 좀 더 지켜보고 싶었다.

'피에트로 아넬라를 세뇌시킨 지저인 놈이 누군지 봐야겠어.'

당연하지만 서문엽은 피에트로 아넬라를 이 일의 원흉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한 피해자였다.

지저인이 어떤 방법으로 피에트로 아넬라를 세뇌시켰는지도 짐작이 갔다.

'신성한 언어를 가르쳤겠지.'

지저인의 언어는 대부분 너무 복잡해 인간이 해독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독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이 종교 의식용으로 사용하는 '신성한 언어'였다.

고차원적인 지저인의 언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

신성한 언어를 해독한 인간은 피에트로 아넬라처럼 세뇌되어 버린다.

인간이 틀렸다고, 태초의 빛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며 지저인의 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지저인 입장에서는 그냥 신성한 언어를 인간이 익힐 수 있도록 만든 책 한 권만 던져주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물론 타깃이 그걸 해독할 수 있는 엄청난 두뇌의 소유자여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피에트로 아넬라가 그런 똑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성한 언어에 대한 사항은 몇몇 사람만 아는 극비였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익혀 버린 것이리라.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 꼭 있어서 극비로 한 건데 이것 참.'

신성한 언어를 익힐 정도의 두뇌를 가진 사람이 던전 공략가 중에는 거의 없는 탓에 여파가 크지 않았던 일이었다.

파둡과 미스텔이 덤벼들었다.

파둡이 접근해 가지를 휘두르면, 기생해 있던 미스텔도 줄기를 뻗어 합세했다.

주로 나무에 기생하는 미스텔이지만, 서문엽은 참 탐나는 새로운 기생 대상이었다.

파둡과 함께 미스텔들도 서문엽의 몸을 차지하고 싶어서 안달을 내며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고요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모든 감정의 동요까지 가라앉혀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소모까지 최소화한 채, 전투 기계가 되었다.

팟! 팟! 콰직!

가지들을 자르고 파둡의 심장이 있는 뿌리 부근을 찌른다.

죽은 파둡에서 뛰쳐나온 미스텔들도 창 한 방에 즉사.

그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파둡과 미스텔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미스텔 중 몇몇이 죽은 망트의 시체를 노리기도 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안 돼 쌩쌩하므로 전투에 이용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문엽이 미끼로 활용했다.

망트 사체를 노리고 가는 미스텔들이 창에 찔려 허망하게 죽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문엽은 마침내 모든 괴물을 살육했다.

꽤나 장기전이었지만, 힘을 아끼기 위해 동작을 줄였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일 뿐이었다.

한참을 싸웠지만 서문엽은 여전히 멀쩡했다.

"이거밖에 못해? 최후의 던전 때처럼 굵직굵직한 놈을 만들 여력은 이제 없나보지?"

허공에 대고 또 도발했다.

그다음 3파(波)가 쏟아졌다.

살러분.

아바타 테스트 때 본, 푸른 오러로 이루어진 가오리처럼 생긴 물고기 떼였다.

살러분 또한 오러로 처치해야 하는 괴물이었다.

싸움이 또 시작되었다.

그렇게 괴물들은 계속 쏟아졌지만, 서문엽은 침착하게 학살했다.

단조로운 싸움이 지겹다고 홧김에 힘을 크게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평소와 달리 던전에서의 서문엽은 지독스럽게 냉정하고 인내심이 깊었다.

어느 순간, 더는 괴물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끝인가?"

기다려 줘도 더는 오지 않자, 서문엽은 슬슬 던전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끝까지 방심하지도 않았다.

백팩에서 귀환석을 꺼내 주머니에 넣어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귀환석을 쓰려면 약 12초의 시간이 필요한데, 최후의 던전에서 서문엽이 홀로 남아 희생한 것도 그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심상치 않다 싶으면 귀환석을 바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걸로 끝은 아닐 거야.'

이번 일을 꾸민 지저인이라면, 목표인 서문엽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할 것이다.

게다가.

'이 우주 최고의 초인을 죽이는 함정인데 이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되지.'

이미 엄청나게 많은 괴물을 죽인 서문엽이었다.

서문엽은 최후의 던전 때보다 더 강해졌다.

증폭을 따로 사용한 것도 아닌데, 정신력 110이 영향을 발휘해서 평정심을 상시 유지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던전을 샅샅이 수색하며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던전의 끝에 도달했다.

"응?"

5층으로 쌓인 제단이 나타났다.

오러로 만들어진 영원히 타오르는 푸른 등불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단 위에는 시신이 들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관이 있었다.

차가운 얼음으로 이루어진 관이라 로이 마이어의 얼음 봉인이 떠올랐다.

"뭐야. 이게 끝판 왕이야?"

서문엽은 저 얼음 관 안에 자신을 위해 준비된 끝판 왕 최종 보스가 있다고 확신했다.

동족의 시체도 언데드류 괴물로 만들며 갖고 노는 놈들이니까.

예상대로.

-손님은 인간인가.

흠칫.

서문엽의 표정에 여유가 사라졌다.

지저인은 오러의 진동으로 말을 전달한다.

그 진동도 지저인마다 패턴이 제각각이라 사람 목소리처럼 구분 가능하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진동 패턴이었다.

얼음 관 안에서부터 지저인의 말이 계속 들렸다.

-들어본 언어에 들어본 목소리구나.

얼음 관 안에 있는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바로 한국어로 말을 건네는 것부터가 이미 어떤 인간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었다는 뜻.

어떤 인간은 아마 서문엽일 확률이 높았다.

"누구야?"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한 번 맞았던 놈이냐? 누군데 이렇게 긴장감이 오지지?"

여유를 지워 버리고 진지한 서문엽.

그가 이 정도로 긴장해야 했던 지저인은 몇 없었다.

만인릉의 황제.

그리고······.

-서문엽이구나.

뇌리에 섬광이 번뜩였다.

누군가가 떠올랐다.

"설마하니, 대사제냐?"

-대사제라······.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허한 진동. 허망한 감정이 짙게 서린 소리였다.

-그런 소명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

얼음 관에서 누군가가 상체를 일으켰다.

죽었지만 멀쩡하게 보존된 시신은 지저인이지만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상처럼 보이는 외모였다.

목과 복부에 서문엽이 남겨주었던 긴 자상이 보였다. 시체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 소명은 실패했다.

번쩍.

대사제가 눈을 떴다.

-어리석은 죄인인 나는 죽어서도 영령(英靈)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비참히 남아 있구나.

"내가 많이 원망스러우시겠어?"

-원망?

대사제는 서문엽을 응시했다.

언데드이기 때문일까? 감정이 전혀 안 보였다.

-원망치 않는다. 넌 나의 징벌이었다. 타락한 대사제였던 나를 응징하기 위해 태초의 빛께서 내린 벌이다.

완전히 일어선 대사제는 튜닉 비슷하게 생긴 흰 옷을 잘 여몄다.

-이렇게 험한 꼴로 너를 다시 보게 되었구나. 이것도 나의 형벌인가, 아니면 내 벌이 끝나려 하는 것인가?

서문엽은 짙게 웃었다.

이 일을 꾸민 놈들이 손님맞이로 아주 화끈한 피날레를 준비한 듯했다.

< 초대(2) > 끝

< 재회(1) >

대사제는 잠시 자신의 몸을 훑어봤다.

-널 죽이라고 통제 설정이 되어 있군.

통제 설정이란, 언데드에게 심어진 명령을 뜻했다.

"그러시겠지."

서문엽도 전투를 치를 준비를 갖췄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어서 분석안이 통하지 않았다.

다만 언데드니 살아생전만큼 강하진 않을 것이다.

언데드로 그게 가능했으면 인류는 진작 멸망당했다.

인류 중 가장 강한 초인 7인이 처절하게 싸워야 했던 지저 문명의 지도자, 대사제!

언데드가 된 그가 힘을 얼마나 보존했을지 알 수 없었다.

'뭐, 어찌 됐건 내가 이기기야 하겠지.'

여차하면 불사를 증폭해도 된다.

영체로 변신해 일격을 먹이면 혼자서도 어찌어찌 이길 터다.

그런데 그때,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너무 서두르진 말지.

"응?"

-널 죽여야 하긴 하지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나.

"뭐, 뭐래?"

-통제 설정은 널 죽이라고만 되어 있지, 보는 즉시 죽이라고는 안 되어 있다. 고로 대화 나눌 시간은 충분하다.

"그럴 수도 있어?"

-언데드라고는 하나 대사제였던 나를 통제한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통제 설정은 이 정도가 한계였겠지.

"와, 언데드 주제에 자존감 쩌네."

자존감 랭킹이 언데드 중 만인릉 황제 다음이었다.

-보나마나 내 휘하 사제 중 한 명의 소행일 것이다. 격 높은 사령(死靈)은 통제할 수 없으니 욕심 내지 말라 일렀는데. 욕심은 끝이 없군.

대사제의 부하 중 살아남은 놈이 그의 시신을 보존했다가 사령을 담은 언데드로 만든 모양이었다.

즉 시신만 활용하는 언데드가 아니라, 만인릉 황제처럼 죽은 이의 영혼까지 담은 것이다.

그러면 살아생전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어 더 강력한 언데드 괴물이 되지만, 그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댁이랑 내가 할 얘기나 있어?"

-추측컨대, 너는 함정에 빠져 이곳에 왔겠지?

"맞아."

-누구의 소행인지 궁금하지 않나?

"잉? 넌 알아?"

-모르지만 추측을 도와줄 수는 있지.

"댁이 나한테 굳이 그럴 이유가 있어?"

-서문엽, 말했다시피 난 널 원망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는 오히려 호의를 갖고 있지.

이해가 안 된다는 서문엽의 표정.

대사제가 말했다.

-나의 타락을 끝내줬고, 지금은 내 형벌을 끝내주려고 하지 않나.

"뭐, 뼈도 못 추리게 박살 낼 생각이긴 하지."

-무엇보다도 나를 이렇게 만든 자는······.

대사제는 회한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마도 나와 똑같은 오판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태초의 빛의 말씀을 왜곡하고 동족을 재앙으로 끌고 가게 둬서는 안 돼.

오판.

그것은 지상의 인류와 전쟁을 일으킨 일을 뜻하리라.

"그래, 좀 묻자. 전쟁은 왜 일으킨 거냐? 그놈의 땅이 탐나면 같이 살면 될 거 아냐? 세상에 안 쓰는 땅도 얼마나 많은데."

이를 테면 사막이나 험한 산지.

혹은 해상이나 해저도 괜찮지 않은가?

땅속에서도 문명 만든 놈들이 바닷속이라고 어려울까?

대화도 없이 대뜸 지상에 던전부터 뚫어놓고 괴물을 쏟아낸 심보가 고약했다.

애당초 흉측한 괴물을 만든 놈들에게 그런 건전한 인성은 기대하기 글렀지만 말이다.

-그걸 설명하려면 우리 지저인의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장대한 대서사시의 프롤로그가 시작되려는 듯한 분위기였다.

서문엽은 냉큼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바쁘니까 요약 설명해, 새꺄. 돌아가서 손봐줄 놈도 있으니까."

대사제는 서문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가 이곳에 온 지 4시간 43분 32초 지났군.

"그런 것도 알 수 있어?"

-우리는 공간 이동의 흔적을 살필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최상위의 존재는 더 상세히 알 수 있지.

서문엽도 자기 자랑에 일가견 있지만, 대사제의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거만함이 배알 꼴렸다.

-나를 이긴다면 널 이곳에 왔을 때의 시간으로 지상에 보내주마.

"그게 가능해?"

서문엽은 깜짝 놀랐다.

-왔을 때의 이동 흔적이 남아 있다면 가능하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난 할 수 있지. 이곳에 올 때 쓴 귀환석은 가지고 있나?

"어."

-그럼 가능하다.

아마도 던전에서 귀환할 때 종종 발생하는 시공 왜곡을 이용해 과거로도 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만약 정말 가능하다면 경이로운 솜씨였다.

'그렇게 잘난 놈이 왜 졌대?'

최후의 던전에서 이겨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거다?"

-약속했다.

서문엽은 철퍼덕 땅에 앉았다.

"자, 썰 풀어봐."

-이동 흔적은 쉽게 안 지워지니 여유를 갖도록.

"이 새낀 나 죽이라는 명령받은 언데드가 뭐 이래?"

오히려 살아 있을 때는 패닉에 빠져 광기를 터뜨렸었다.

죽어서 남의 조종을 받는데도 저런 여유라니.

-우리 사회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사회? 태초의 빛이라는 신을 섬기는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사회 아니냐?"

-둘 다 틀렸다.

울컥.

서문엽은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았다.

-태초의 빛께서는 신이 아니고, 우리는 본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다.

"태초의 빛이 신이 아니라고?"

그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지저인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단어이니 마땅히 그들이 믿는 신인 줄 알았다.

-우리는 죽어서 영령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영령과 대화를 나누지.

"그래서 태초의 빛과 함께 조상을 그렇게 찾았군."

-그렇다. 영령도 수명이 있다. 자신의 소명을 올바로 행하지 못한 자는 영령이 되자마자 흩어지는 반면, 위대한 이일수록 영령이 오랫동안 유지된다. 즉, 오래된 영령일수록 위대한 조상님이라는 뜻이다.

서문엽은 잠자코 설명을 들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정보였으므로 열심히 머릿속에 기억해 놨다.

-누구나 영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직 사제만이 가능하지. 그리고 뛰어난 사제일수록 오래된 영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오래된 조상님의 영령은 원활한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귀중한 말씀을 해주시지. 그리고 태초의 빛이란······.

"그중에서 제일 오래된 조상?"

-맞았다. 우리의 근본이 되신 태초의 선조님의 영령이지. 그분의 영령은 억겁의 세월이 흐르도록 사라지지 않으시고 계속 우리에게 가르침을 내리신다. 바로 그 태초의 빛과 교감할 수 있는 사제는 오직 한 사람, 대사제다.

대사제의 눈빛이 슬픈 빛이 어린 듯한 것은 착각이었을까.

-반대로 말하면 태초의 빛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오직 한 명만이 대사제가 된다. 나는 아주 어릴 때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들었고, 그날 즉시 기존의 대사제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놀랍군. 정치적인 속성 없이 그만한 지위가 절대적인 규칙으로 결정된다니.'

서문엽이 아는 지저인은 끝없이 탐욕스러운 종족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권력 다툼을 할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의 절대성을 띤 사회적 룰이 있는 모양이었다.

-본디 왕이 사회를 통치하며, 사제들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렇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는데, 어느 순간 우리 사제들의 힘이 왕을 능가하여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재앙의 전조였을지도 모르지.

서문엽도 왕이 따로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까마득한 고대야 만인릉 황제 같은 이가 있었지만, 이후엔 대사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체제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종족의 명운을 건 전쟁인데 대사제만 날뛰고 왕은 존재조차 몰랐으니 착각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태초의 빛께서 아주 오랜만에 말씀을 내리셨다.

"영적 각성을 이룬 선지자가 나타났노라. 선지자가 너희를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하리라."

서문엽이 말했다.

일전에 죽였던 지저인이 남긴 말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는군?

대사제가 놀랐다.

"얼마 전에 한 놈을 죽이고 들었지."

-그런가.

대사제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 예언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

-그 선지자는 바로 나라고. 내가 선지자여야 한다고.

비로소 드러난 전쟁의 전말.

예언의 선지자가 되겠다는 대사제의 욕심이 부른 재앙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태초의 빛께서 하신 말씀을 내가 완전하게 듣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완전히 듣지 못했다고?"

-선지자란 앞서 아는 자.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하는 이가 아니라, 그곳으로 인도해 줄 이의 출현을 아는 이라는 뜻이었다.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깨끗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내 더러운 마음이 그분의 말씀을 놓친 것이다.

결국 모든 게 눈앞의 이놈 탓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별로 원망이 들지 않았다.

그는 가족도 없었고, 전쟁 덕에 오히려 출세했다. 지저 전쟁이 없었으면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인류애 같은 것도 별로 없는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뭐, 그래서 나한테 죽었으니 그 일은 관두자고. 그런데 날 여기 유인한 놈은 누구일 것 같아?"

-살아남은 사제일 것이다. 내 사령을 다룬 것을 보면 8명의 상급 사제 중 하나겠지. 5명은 너에게 죽고 아마 3명이 살아남았을 텐데, 그 셋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셋이 합심했을 수도 있다.

"아, 걔들도 까다로웠지."

서문엽은 옛 기억 중에 절대보호막을 펼치는 상급 사제를 떠올렸다.

그 절대보호막을 우회한 각도로 공격하기 위하여, 당구처럼 슈란의 소멸 광선을 튕겨내서 공격해 간신히 처치했었다.

"잔챙이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거물이네."

-상급 사제쯤 되지 않으면 누가 무리의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겠나.

"아, 하나만 더 묻자. 왜 대뜸 공격부터 했어? 땅 좀 같이 쓰자고 요구도 안 해보고."

-서문엽, 넌 전쟁 중에 단 한 번도 우리가 지상에 직접 나온 것을 본 적이 없겠지?

"어, 그런데?"

-왜 우리가 굳이 던전을 만들어 지상에 뚫어놓는 방식으로 침공을 해야 했을까?

"몰라. 제한이 있냐?"

-빛을 쬐고 있으면, 우리는 힘을 쓸 수 없었다.

"햇볕?"

-그 햇볕을 반사한 달빛과 별빛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지상에서 오러를 사용할 수 없었다.

"······."

의외로 간단한 약점이었다.

괴물만 내보내고 지저인들은 던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밝혀진 셈이었다.

-오러가 전부인 우리에게는 당혹스러운 무력감이었지. 그래서 위협될 만한 모든 지상의 생명체를 쓸어버리기 위해 괴물을 투입했다.

공존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지상에 나오면 무력해지는데, 그런 지상에서 다른 종족과 함께 산다는 건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궁금증이 풀리자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오케이. 이제 더 할 말이 없지?"

-그렇다. 나도 슬슬 통제 설정이 한계에 왔군. 싸우자.

파아아앗!

대사제의 몸이 백색 휘광으로 휩싸였다.

최상위인 5등급 백색 오러를 단번에 일으키는 모습에서 위압감이 들었다.

그런 대사제를 보며 서문엽이 물었다.

"혹시 말이야."

-뭐냐.

"내가 초필살기로 일찍 끝낼 생각인데, 죽겠다 싶으면 미리 말해야 한다? 나랑 약속도 있는데 완전히 골로 가버리면 안 되잖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비록 이 처지라 힘이 없다지만, 완전히 골로 간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네게 강력한 수단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만?

"그땐 그랬지."

-통제 설정이 걸린 이상 나는 싫어도 최선을 다해야 하니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침착하게 상대하도록.

파아아앗!

대사제가 두 손을 뻗자, 하늘에 십여 개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랬다.

마법진이란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는, 오러로 이루어진 둥근 원에 기묘한 형상이 수놓아진 형상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영령의 일격이다. 나의 오러에 조상님들의 영령을 입혀 공격 수단으로 삼지. 지금은 타락한 나의 영혼에 실망하신 탓에 격 높으신 조상님들은 응해주시지 않고, 격 낮은 영령들만 동원된다.

친절한 설명이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도 많이 적어졌네."

영령의 일격.

최후의 던전에서는 수십 개나 되는 마법진이 떠올라서 기겁을 했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숫자도 위력도 쇠락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상급 사제보다는 훨씬 강한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오래 끌 것 없지. 나도 바로 간다."

서문엽은 불사를 증폭시켰다.

아껴왔던 필살기를 바로 꺼내 든 것이다.

그오오오오!!

서문엽의 몸이 대사제와 동등한 하얀 빛으로 휩싸였다.

불이 번지듯 하얀 오러에 잠식된 서문엽은 이윽고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가 되었다.

-영체? 인간이?

깜짝 놀란 대사제는 이윽고 침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골로 가겠군······.

< 재회(1) > 끝

< 재회(2) >

영체가 된 서문엽이 곧바로 대사제를 향해 날아들었다.

120초 동안 모든 공격이 무효화된다는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때,

-방심하지 마라!

대사제가 호통 쳤다.

-영체의 경지에 이른 것은 가상하다만, 오러는 안 통해도 영령의 공격은 통한다.

-뭐?

서문엽은 곧바로 달려들다가, 마법진에서 차례로 나타난 전사 형상의 오러 덩어리들을 보며 멈칫했다.

-본래 같았으면 하필 나를 상대로 영체가 된다는 건 오판이었을 것이다.

-혹시 다른 놈들도 이런 거 할 줄 아냐?

-내가 아는 한, 오직 나만 가능한 일이다.

영체로 변신한 서문엽은 분명 무적이었다.

그러나 그 영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공격이 바로 대사제의 초능력 영령의 일격이었다.

아마 살아생전 때 영체로 덤볐더라면 영령의 일격에 의해 서문엽이 골로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새낀 왜 이렇게 쓸데없이 대단하지?

최후의 던전에서 붙었을 때는 괴물 같지만 좀 멘탈 나간 미치광이였는데, 알면 알수록 거물인 대사제였다.

-하지만 언데드가 된 나 또한 사령이 취약하므로 영체에게 공격받으면 쉽게 무너진다. 현재는 영체로 변신한 게 아예 오판은 아니다.

-에이 씨, 아무튼 진짜로 간다!

-잘 피해라. 평소에 비행 연습 안 했으면 낭패 입을 거다.

-그런 거 안 했는데··· 에라, 몰라!

서문엽이 날아들었다.

대사제의 오러를 빌려 형상화된 영령들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날아다니는 데 익숙하지가 않은 서문엽이었다.

하지만 민첩성은 높기 때문에 영령이 공격하는 순간 몸을 비틀어 피할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계속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대사제에게 접근한 서문엽.

연이어 영령들이 덮쳤지만, 확실히 살아생전보다 움직임들이 굼떴다. 대사제 말마따나 쓸 만한 영령들은 안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쉬쉬쉭!

3단 찌르기로 영령 둘을 처치하고 계속 날았다.

실전파라 그런지 비행도 금방 익숙해진 서문엽.

-이 악물어라!

그러면서 대사제를 향해 창을 던졌다.

대사제는 손을 들어 오러로 보호막을 펼쳤다.

오러를 머금은 창이 보호막과 충돌했다.

콰아앙!

오러의 충돌에 의한 충격파가 던전에 퍼져 나갔다.

연이어 날아든 서문엽이 방패로 다시 보호막을 두들겼다.

꽈아아아앙!

영체가 된 서문엽은 모든 오러를 단번에 방패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오러가 육신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운용되는 것 또한 영체의 강점 중 하나였다.

그 강맹한 일격에 보호막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큭!

보호막이 깨졌다.

연이어 오른쪽 주먹이 힘껏 휘둘러졌다.

뻐어어억!

-컥!

대사제는 펀치에 맞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가 소환한 영령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혹시 몰라서 서문엽이 다시 달려들려 할 때 대사제가 말했다.

-이제 됐다.

-끝이야?

-내 사령이 육신에 안착 못 하고 요동친다. 역시나 허술하기 짝이 없군. 주제넘게 격 높은 사령을 다루려 했기에 벌어진 결과물이지.

-영령의 일격으로 영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지만, 영체 또한 언데드의 영혼에 직접 타격이 가능한 거구나.

-그런 셈이다.

대사제의 몸에서 백색 오러가 넘실거렸다.

오러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치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문제가 생긴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곧 붕괴될 것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알지?

-안다. 마침 전투 불능 상태가 되니 통제 설정도 깨져 버렸군. 어떤 못난 놈 작품인지 얼굴이나 보고 싶군.

-그건 너 알아서 하고, 나 좀 보내줘.

이 던전에 왔을 때의 시간으로 되돌려 보내주겠다고 대사제가 약속했었다.

그러면 돌아가자마자 피에트로 아넬라와 마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라.

대사제가 말했다.

그제야 서문엽도 뭔가가 생각났다.

-이 일을 꾸민 녀석이 결과를 보려고 올 수 있겠구나?

-그렇다. 죽은 자를 언데드로 만드는 짓은 대개 우리 사제들이 하던 일이었다. 특히나 붕괴되는 성역에서 내 시신을 챙겨갔다면 상급 사제들만이 가능한 일이지.

대사제는 요동치는 오러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한숨을 쉬었다.

-내 휘하의 사제였다면 누가 됐건 과거의 나와 비슷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난 그들을 말려야 할 책임이 있어.

-그게 말린다고 되냐? 쥐어 패야 알아듣지.

-나도 말로 타이른다고 한 적 없다.

-······.

그때였다.

-왔군.

대사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던전의 천장 쪽에서 공간이 일그러졌다.

파앗!

일그러진 자리에 이윽고 지저인이 나타났다.

대사제의 비슷한 순백색 옷을 걸친 지저인이었다.

-대상: 상급 사제(지저인)

-근력 42/42

-민첩성 71/71

-속도 63/63

-지구력 50/50

-정신력 57/77

-기술 94/94

-오러 189/189

-초능력: 영매, 백염

-영매: 죽은 자의 영혼을 다룬다.

-백염: 백색 오러를 고밀도로 응집하여서 꺼지지 않는 하얀 불꽃을 만든다.

분석안으로 보니 상급 사제였다.

신체 능력은 형편없지만 지저인에게 중요한 것은 오러였다.

오러가 무려 189로 인간 중 최고인 서문엽의 2배 가까웠다.

물론 서문엽이 본 최고치는 228이라는 수치를 가졌던 생전의 대사제였다.

저 상급 사제도 지위에 걸맞게 그 정도는 못 되어도 200에 가까운 높은 수치를 자랑했다.

상급 사제는 아직 영체 상태인 서문엽을 보더니 기겁을 했다.

-영체?! 인간이 어떻게 저런 지고의 경지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 말을 듣고 서문엽이 눈을 빛냈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방금 상급 사제가 구사한 언어는 이탈리아어였다.

지저인은 언어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모국어라는 개념도 없이 알고 있는 언어는 어떤 언어든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혼잣말을 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가장 최근에 썼던 언어를 구사한다.

-저 자식 맞는 것 같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이탈리아인이다. 피에트로 아넬라를 세뇌시키고 조종한 게 저 상급 사제라는 뜻이었다.

아직 영체 변신 시간은 60초 정도 남았다.

영체가 풀리기 전에 때려눕히기로 작정한 서문엽은 상급 사제를 향해 뛰어올랐다.

-히익!

영체에 대항할 대책이 없는 상급 사제는 도주를 택했다.

파앗!

공간 이동으로 사라져 버린 상급 사제.

그러나······.

팟!

어딘가 멀리로 사라진 줄 알았던 상급 사제는 대사제 앞에 나타났다.

상급 사제는 눈앞에 있는 대사제를 보고는 혼비백산했다.

-여, 여기는?!

-세 번째여. 이것은 네 소행이더냐?

대사제가 상급 사제를 불렀다. 8명의 상급 사제 중 세 번째였던 듯했다.

-대, 대사제님?

그때, 공중에 떠 있던 서문엽이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상급 사제는 다급히 공간 이동을 펼쳤다.

같은 타이밍에 대사제도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파앗! 팟!

사라졌던 상급 사제가 제자리에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자리임을 깨달은 상급 사제는 절망했다.

-돌아가라고 허락한 적 없다, 세 번째여.

대사제의 능력이었다.

상급 사제의 공간 이동을 조작해서 목적지를 제자리로 설정한 것이다.

-대, 대사제님! 제발 저를 놔주십시오! 저 인간의 편을 드는 겁니까?

-세 번째여.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감당할 수 없는 격 높은 사령에 욕심내지 말라고 말이다.

-크으윽, 제기랄!

다시 한번 순간 이동을 시도했지만 대사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서문엽의 일격이 떨어졌다.

뻐어어어억!!

-끄억!

있는 힘껏 쥐어박자 상급 사제는 땅에 처박힌 채 졸도해 버렸다.

-어이구, 너무 세게 팼나.

영체가 되어서 힘 조절이 잘 안 되는 서문엽이었다. 똑같은 펀치여도 영체라 훨씬 오러의 밀도가 높아져서 필살기처럼 강력해진 것이다.

-깨우면 된다.

대사제는 쓰러진 상급 사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했다.

그러자 상급 사제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감겼던 눈이 강제로 떠졌다.

-크헉! 허억, 헉!

강제로 정신을 차린 상급 사제는 자신의 상황에 절망했다.

-세 번째여.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느냐?

-대사제님, 대의를 위한 일이니 용서를······!

-문제 삼고자 하는 건 네가 방금 말한 대의다. 목적이 무엇이더냐?

-그건······!

상급 사제는 옆에 있는 서문엽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 인간을 죽이고 예언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대사제님, 저희는 대사제님께서 이루시지 못한 예언을 실현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예언의 실현은 선지자만이 아는 일이다. 너희가 멋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니라.

-예, 그리고 대사제님께서는 선지자가 아니셨죠!

-······.

뼈아픈 지적에 대사제는 말을 잃었다. 어찌 보면 동족을 몰락시킨 결정을 내린 실책을 자신이 저지른 것이다.

-저희는 진짜 선지자를 비로소 찾았습니다!

상급 사제가 소리쳤다.

죄책감에 잠겨 있던 대사제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그럴 리 없다.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듣는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게 누구더냐?

-첫 번째, 아니, 지금은 새로운 대사제이자 선지자이십니다.

-그럼 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겠구나. 그건 너희의 착각이다.

-사제가 태초의 빛을 걸고 거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짓이 아니라 착각이라고 한 거다. 그게 더 위험하다.

상급 사제의 두 눈에 분노가 어렸다.

-닥쳐라! 실패한 대사제, 가짜 선지자야! 우리는 너처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만에 빠지고서 태초의 빛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나와 닮았던 너희들을 태초의 빛께서 선택하셨을 리가 없다.

-닥쳐!!

-첫 번째가 야망이 있어 새로운 대사제를 자칭한 것이라면 무엄한 일이지만, 착각이라면 문제가 더 크다. 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들었느냐? 누구의 목소리를 태초의 빛이라 여긴 것이냐?

-크아아아! 닥쳐라! 나는 선지자의 뜻에 따라 하다못해 저 인간이라도 데려가겠다!

상급 사제는 영체 상태가 해제돼 원래대로 돌아온 서문엽을 보았다.

파아아아앗!

상급 사제의 몸에서 오러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상급 사제는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고주파의 비명을 토했다.

자폭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위험한 거 아냐?!"

서문엽은 귀환석을 꺼내 들며 소리쳐 물었다.

대사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놔둬라.

오러의 팽창이 극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제 가라.

파앗!

대사제의 손짓과 함께 상급 사제의 신형이 사라졌다.

서문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다른 곳에서 자폭하게 했다.

"헐."

자신을 언데드로 만든 상급 사제를 붕괴되기 직전의 몸임에도 손쉽게 죽여 버렸다.

정말로 감당 못 할 사령을 욕심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실감한 서문엽이었다.

하지만 대사제 또한 힘을 더 쓴 탓인지 오러의 요동이 점점 심해졌다.

-이제 한계다. 슬슬 가거라. 귀환석을 사용하면 내가 시공간을 조작하겠다.

"알았어."

서문엽은 귀환석을 사용하려다가 문득 대사제를 바라봤다.

"넌?"

-여기서 죽는 거다. 죽기 전에 또 내 육체를 언데드로 이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자폭하겠다.

"음, 그보다 말이야. 이왕 죽는 김에 너도 같이 안 갈래? 불가능한가?"

-같이? 그건 불가능하지 않지만······.

"어차피 죽을 건데 빛이 내리는 땅도 구경하고 좋잖아? 자!"

서문엽은 대사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

대사제는 멍하니 서문엽을 바라보았다.

죽고 나서, 대사제는 태초의 빛으로부터 들은 문제의 예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추측컨대, 아마도 선지자는 빛이 내리는 땅으로 이끌어줄 인도자 같은 존재를 점지할 것이다.

점지된 인도자는 모두를 빛이 내리는 땅으로 안내할 것이라는 게 본래의 예언일 터였다.

그 인도자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대사제의 추측이 틀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인도자가 존재한다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고, 임종 직전의 대사제는 서문엽을 보며 생각했다.

대사제는 서문엽의 손을 잡았다.

서문엽은 귀환석을 사용했다.

파앗!

< 재회(2) > 끝

< 재회(3) >

파앗!

서문엽이 특별 귀환석을 써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피에트로 아넬라는 킬킬 웃었다.

"휴, 쉽게 끝났군."

여기까지 데려오는 동안 고생 좀 했다. 아무래도 서문엽이 자신을 의심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끝이었다.

놈은 이제 그곳에서 못 돌아온다.

"멍청한 놈이라 다행이야."

그런데 그때였다.

"뭐 인마?"

"헉?!"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피에트로 아넬라는 기절초풍했다.

돌아보니 방금 사라졌던 서문엽이 떡하니 있었다.

"어, 어떻게?"

"뭘 어떻게야, 다 조지고 귀환석 써서 돌아왔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런데 서문엽은 웬 지저인을 데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 지저인이었지만 익숙한 흰 옷을 걸치고 있었다. 사제들이 입을 법한 복장 말이다.

"대체 이게 어찌 된······."

피에트로 아넬라는 혼란에 빠졌다.

예정대로 함정을 설치해 둔 던전으로 서문엽을 보냈다.

그런데 몇 초 만에 되돌아왔다.

그것도 웬 정체 모를 지저인과 함께 말이다.

"아, 너한테 지시 내리던 상급 사제는 죽었어. 잘했지?"

서문엽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이성을 잃고 소리 질렀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걔 이탈리아어 잘하더만."

"크으윽! 거짓말이다!"

계속 상대를 조롱하던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됐다, 당신이 무슨 죄겠어. 호기심에 신성한 언어를 익힌 죄지."

생각해 보면 피에트로 아넬라의 정신력 21/92는 바로 세뇌된 상태를 뜻하는 수치였다.

"그래도 날 건드린 대가는 크지. 그러니까 딱밤 한 대만 맞자."

서문엽은 한 손에 방패를 든 채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창은 버렸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주춤주춤 물러났다.

순간 서문엽이 오른손을 내밀며 접근했다.

정말로 이마에 딱밤을 때릴 듯한 동작이었다.

겨우 딱밤이 아니었다.

피에트로 아넬라는 서문엽이 아바타 테스트 때 손가락 하나로 살러분을 죽인 사실을 들었다. 저거 한 대로 두개골이 쪼개질 수도 있었다.

"이익!"

피에트로 아넬라가 포기하고 싸움에 응했다.

그는 양손으로 서문엽이 내민 오른손을 잡으려 했다.

-맹독의 손길: 맨손에 닿은 상대를 중독시킬 수 있다.

불사신인 것도 알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배틀필드 선수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최후까지 저항해 볼 각오였다.

'태초의 빛을 위하여!'

순교를 각오한 피에트로 아넬라.

그런데.

부웅!

서문엽은 돌연 오른손을 회수하고, 대신 왼손에 든 방패를 휘둘렀다.

뻐어억!

그대로 피에트로 아넬라의 머리통을 방패가 강타!

피에트로 아넬라는 장작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어이쿠, 딱밤이라고 했는데 실수로 방패로 찍었네. 쏘리."

서문엽은 쓰러진 피에트로 아넬라를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끝났나.

"어, 넌 좀 어때?"

-요동치던 오러가 안정되었다.

땅에 쓰러져 있는 대사제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비하구나.

밝은 햇볕이 대사제의 죽은 육신을 내리쬐고 있었다.

대사제는 태양에 빛나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흔들리던 사령도 안정되고 있다.

"그래? 그럼 안 죽는 거야?"

-난 이미 죽었다, 서문엽.

대사제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찬란한 하늘의 태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찌 이리도 푸르고 밝은가.

"뭐, 태양이니까."

-죽은 이의 영혼마저 보듬어주는가. 자애로운 빛이여······.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대사제는 놀라우리만치 안정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문엽.

"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건 또 왜?"

-난 죽은 몸이기 때문에 오러로 육신을 조종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빛이 닿고 있으니 오러를 움직이기가 힘들어진다.

요동치던 오러가 안정된 까닭도 햇볕에 억제된 까닭이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업어주랴?"

서문엽은 괜히 데려왔나 싶은 듯 귀찮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야 할··· 말도 잘··· 오러······.

그것을 끝으로 대사제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말소리도 오러의 진동을 통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관광 시켜주는 셈 치고 데려왔더니, 짐 덩어리가 됐네. 얘를 어떡해야 하는 거야?"

어차피 죽은 애니 땅속에 묻어버릴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정서적으로 왠지 생매장 같아서 꺼림칙했다.

게다가 아까 던전에서 상급 사제와 나눈 대화에 대해서도 물어볼 게 더 있었다.

홀로 서 있는 서문엽.

주위에 쓰러져 있는 대사제와 피에트로 아넬라.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됐나 한탄하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

"아, 세계 협회장!"

비로소 캐나다에 온 진짜 목적이 떠올랐다.

세계 협회장이 보낸 직원인 피에트로 아넬라는 세뇌를 받은 지저인의 끄나풀이었다.

'세계 협회장도 이 일에 관련되어 있다.'

서문엽은 쓰러진 피에트로 아넬라의 품속을 뒤졌다.

'세계 협회장의 거처는 특별 귀환석을 써야 갈 수 있다고 했지.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이 녀석은 진짜 특별 귀환석을 가지고 있을 거야.'

"찾았다!"

예상대로 특별 귀환석이 나왔다.

서문엽에게 줬던 함정용과 달리, 정말로 세계 협회장의 거처로 가는 특별 귀환석이리라.

'가만?'

서문엽은 특별 귀환석을 사용하려다가 멈칫했다.

특별 귀환석을 써야 찾아갈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완전히 거짓일 수 있었다.

이 특별 귀환석은 세계 협회장이 아니라, 피에트로 아넬라를 조종한 지저인 잔당 소굴로 가는 이동수단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때? 그럼 더 좋지."

적의 소굴로 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두려울 게 없는 서문엽이었다.

찔끔찔끔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깡그리 덤비는 게 좋았다.

일단 피에트로 아넬라와 대사제는 나무 그늘 아래에 앉혀놓았다.

그리고 특별 귀환석을 사용했다.

파앗!

도착한 곳은 아쉽게도 던전이 아니었다.

여전히 햇볕이 내리쬐는 설산의 정상이었다.

주변에 온통 눈 덮인 산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온은 따스했다.

서문엽이 도착한 곳 일대만 풀과 꽃과 나무로 푸르렀다.

높은 산 정상 같은데 어떻게 이곳만 이렇게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네. 왜 던전 같은 느낌이 들지?'

평생 던전을 전전했던 서문엽은 던전 특유의 느낌을 이곳에서 받았다.

어딜 보나 영락없이 지상인데, 오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햇볕이 비추는데도, 희한하게도 그의 직감상 이곳은 던전이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방패와 창을 들고, 서문엽은 앞으로 나아갔다.

머지않은 곳에 꽃밭에 둘러싸인 오두막집이 보였다.

지상 낙원처럼 꾸며진 아담한 오두막이었다.

오두막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안에서 따스한 온기가 물씬 느껴진다.

한 여성이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성은 서문엽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늦으셨네요."

"······."

"혼자 오셨나요? 아넬라 씨는요?"

"걘 자는데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서문엽은 증폭된 분석안을 여성에게 펼쳤다.

-대상: 여왕(지저인)

-근력 32/32

-민첩성 40/40

-속도 33/33

-지구력 40/40

-정신력 97/97

-기술 73/79

-오러 199/199

-리더십 93/100

-전술 29/52

-초능력: 기도, 운명안

-기도: 태초의 빛의 응답을 받는다.

-운명안: 상대의 운명을 본다.

'헐.'

서문엽은 평생 분석안을 쓰면서 이렇게 놀랐던 적이 없었다.

지저인인 것은 짐작했다.

그런데 이름부터가 압권이었다.

여왕.

지저인은 이름이 없다. 대신 그들이 평생 행하는 역할을 호칭으로 삼는다.

대사제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본디 왕이 사회를 통치하며, 사제들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그렇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사회였는데, 어느 순간 우리 사제들의 힘이 왕을 능가하여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사제에게 권력을 침탈당해 전쟁을 지켜봐야만 했던 왕.

지저 문명의 통치자가 눈앞에 있었다.

배틀필드를 만든 세계 협회의 수장이 지저 여왕이었던 것이다.

지저인이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을 은연중에 한 적이 있었던 서문엽이었다. 배틀필드는 어딜 봐도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기껏해야 고향을 잃고 지상에 정착하고 싶어서 인간과 협조한 지저인 정도로 여겼다.

높은 오러 수치에도 놀랐다.

199면 서문엽이 지금껏 만나봤던 지저인 중 대사제 다음가는 수치였다. 아까 죽은 상급 사제보다도 한 수 위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놀란 것은 두 가지 초능력!

기도.

운명안.

서문엽은 소름이 끼쳐 버렸다.

둘 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초능력이었다.

먼저, 기도.

태초의 빛의 응답을 받는다는 이 초능력은 대사제가 갖고 있었어야 할 법한 능력이었다.

물론 대사제는 타락으로 인해 태초의 빛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최후의 던전에서 싸울 때 '기도'를 분석안으로 보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여왕이 갖고 있다.

지저 문명은 원칙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는 사회였다.

그러나 대사제는 권력을 침탈하여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여왕이 종교까지 아우르게 된 셈이었다.

두 번째, 운명안.

'이건 너무 스케일이 커서 어떤 초능력인지 견적도 안 나온다.'

"앉아주세요."

여왕은 차를 테이블에 내며 자리를 권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차는 얼 그레이였다.

향을 맡으니 놀랐던 심신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분석안으로 보고 많이 놀라셨죠?"

서문엽은 만화처럼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분석안을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여왕이었다.

그것도 분석안이라는 명칭까지 정확히 말이다.

"운명안으로 볼 수 있는 겁니까?"

"네. 기분 나쁘시다면 죄송해요."

"뭐, 나도 분석안으로 봤으니까 마찬가지죠."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아넬라 씨는 어떻게 된 건가요?"

그 물음에 서문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일단 기색으로 보아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직감마저 속일 정도로 교활한 지저인이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에야 깨달은 사실.

여왕은 마치 인간처럼 육성(肉聲)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피에트로 아넬라와 어떤 관계입니까?"

"협회장과 협회 직원의 관계예요. 다만 제가 지저인이라는 것을 아는 정도죠. 여왕이라는 신분까지는 모르지만요. 이곳을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 사람은 내 손에 죽었다."

서문엽은 그렇게 내지르면서, 여왕의 반응을 살폈다.

여왕은 화들짝 놀란 표정이었다.

"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날 속일 생각 마.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지?"

지저 문명을 끝장내 버린 장본인, 서문엽은 여왕을 더 강하게 압박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설명해 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여왕은 침착했다.

무척 놀랐지만 서문엽의 압박에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려 하는 모습이었다.

"운명안으로 봤을 텐데."

"그는 숭배자의 운명이 점지된 사람이었어요. 성실하게 저를 위해 일해주고 배려해 준 사람이죠."

"숭배자? 운명안에 숭배자로 보였다고?"

"네, 상징적인 칭호만 알 수 있어요. 태초의 빛께서 제게 내려주신 권능이지만 제가 부족한 탓인지 한계는 있어요."

확실히 애매했다.

실제로는 세뇌되어서 잘못된 숭배를 하는 놈이었지만, 여왕이 보기에는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피에트로 아넬라가 여왕의 측근이라는 것을 알고서 세뇌한 것일 수도 있지.'

서문엽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여왕에게서 자신을 기만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저인에 관한 한 서문엽의 육감은 초능력에 가까운 수준이라, 차츰 경계심은 사라졌다.

여왕이 이어 말했다.

"그때 그곳에서 죽어가던 당신을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뭐?"

"망트를 끌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리셨죠?"

서문엽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최후의 던전.

죽기 직전의 순간.

시각과 청각이 마비되고 팔다리도 말을 안 듣자, 최후를 직감한 서문엽은 괴물을 끌어안고 뛰어내렸다.

그 장렬한 사투는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래요. 전 그때 무너지는 성역에서 당신을 처음 봤어요. 구원자. 그게 우리의 모든 걸 파괴한 당신의 운명이었죠. 인간을 위한 구원자인지, 예언의 주인공인지 알 수 없었어요."

< 재회(3) > 끝

< 재회(4) >

"구원자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 거기서 날 봤단 말이지?"

"봤다 뿐일까요?"

여왕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서문엽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럼 날 치료라도 해줬다는 거야, 뭐야?"

"치료할 틈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어요. 불사를 각성하신 걸 운명안으로 봤으니까요."

"그럼?"

"당신이 어떻게 지상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최후의 던전이 붕괴된 여파로··· 아."

말하다 말고 서문엽은 진실을 알아차렸다.

최후의 던전이 붕괴된 여파로 발생한 오러의 파동이 귀환석과 같은 역할을 해서 자신을 지상에 돌려보냈다.

···라는 것보다는 여왕이 손을 써줬다는 쪽이 훨씬 말이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 그쪽이?"

"당신이 누구를 위한 구원자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냉정하게 보면 우리를 망하게 만든 원수였죠. 하지만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만 놔둬도 살았을 테지만, 최후의 던전이 완전히 붕괴되면 영원히 시공 속을 떠돌아야 했을 테죠."

"그건 감사한 일이네."

생명의 은인이라는 게 밝혀지자 서문엽은 의심이 수그러들었다.

"그럼 왜 하필 17년이나 시간이 어긋나게 했는데?"

"최후의 던전이 붕괴되고 있던 터라 오러의 움직임이 불안정했어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틈도 제게는 없었고요."

거기까지 설명한 여왕은 서문엽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제 피에트로 아넬라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어요?"

"아, 실은 아직 죽지는 않았고 반만 죽였다고 해야 하나?"

"어디에 있죠?"

"특별 귀환석 쓰기 전에 나무 뒤에 앉혀놨지."

"제가 데리고 올게요."

"아, 옆에 함께 앉혀놓은 사람도 데려와 줘. 잘 아는 얼굴일걸."

"알았어요."

파앗!

여왕이 공간 이동으로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파앗! 파앗!

피에트로 아넬라와 대사제가 연달아 공간 이동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여왕도 되돌아왔다.

그녀는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왜 대사제가 이곳에 있는 거예요?"

-그건 내가 설명하겠소, 여왕.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서문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말할 수 있는 거냐?"

-여긴 빛이 내리는 땅이지만 결계를 쳐서 빛의 영향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빛이 내리는 던전이라는 표현이 좋겠군.

그제야 서문엽은 왜 이곳만 높은 산 정상임에도 눈이 안 쌓여 있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특별 귀환석을 써서 드나들어야 했는지도 말이다.

"그동안 많이 연습해서 오러 없이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깥에 나가면 저도 여전히 오러를 쓸 수 없어요. 그래서 이 두 분도 귀환석으로 데려온 거고요."

-똑똑한 방식이오. 이러면 빛이 내리지만 영향을 차단하여서 우리 지저인이 살기 좋은 환경이 되지. 다만 이 작은 공간을 만드는 데도 많은 시간과 자원이 소모됐겠지.

"맞아요."

-본래 내가 알던 당신은 이런 힘을 가진 분이 아니셨소. 그사이에 갑자기 이 정도로 오러가 성장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아마도 여왕 당신은······.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제부터였소?

"성역이 붕괴되기 2년 전부터였어요."

-그럼 왜 그 사실을 숨긴··· 밝힐 수 없었겠군.

"네, 당신에게 살해될까 봐 두려웠어요."

태초의 빛과 감응한 지저인은 새로운 대사제가 된다.

그것은 지저 문명의 절대적인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 규율이 이행될 거라고 장담 못 하는 많은 변수가 있었다.

일단 대사제는 자신이 선지자라는 광기 어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여왕이 태초의 빛을 등에 업고 나서면 가만 안 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여왕이라는 것도 문제였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와 종교가 통합되는 사건일 테니까.

지금껏 득세했던 대사제와 휘하 사제들이 모조리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진즉 나섰더라면 내 거짓도 밝혀졌을 테고, 오늘 같은 몰락까지는 안 왔을 거라는 원망도 드오. 하지만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소? 확실히 그때의 나라면 당신을 죽였을지도 모르지.

"미안해요. 너무 두려웠어요. 전 여왕으로 즉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제 정당한 통치 권한을 누려본 적이 없었어요. 아무도 제 말을 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왕은 불행한 통치자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대사제의 권력 침탈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지저 문명이 몰락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미안하오.

대사제도 힘없이 여왕에게 말했다.

-내가 죄인이었소. 나는 선지자는커녕 정당한 대사제도 아니었소. 타락하여 태초의 빛께서 등을 돌리셨으니까. 모든 게 내 탓이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네 탓이 맞긴 하지.'

그 뒤, 서문엽과 대사제는 여왕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 아넬라의 함정에 빠져 던전에서 괴물들을 처치하고 대사제를 만난 이야기를.

대사제는 자신을 사령 언데드로 만든 세 번째 상급 사제를 죽이기 전에 나눈 대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원흉은 첫 번째요. 나를 가장 닮았던 사제였지. 아니나 다를까 대사제를 자칭하고 있다더군.

"근데 말이야."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걔들 그냥 놔둬도 되지 않아? 잔당이 몇 되지도 않을 텐데 음모 같은 걸 꾸며봐야 뭘 할 수 있겠어?"

지저 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던 서문엽은 지저인이 무슨 짓을 하든 그다지 겁나지 않았다. 불사신이 된 지금은 더더욱 말이다.

살아생전의 대사제 정도라면 모를까, 상급 사제는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잔챙이였다.

'지저 문명도 다 망한 판에 잔당이 얼마나 있겠어? 막말로 내 눈에 띄면 나 혼자 작살 낼 수 있어.'

-그 녀석들이야 별문제가 아니지.

대사제가 동의했다.

하지만 대사제는 마음에 걸리는 게 따로 있는 눈치였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여왕이 말했다.

"대사제님, 예언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그 예언 말이오? 어찌 잊겠소.

"저는 그 예언에 이어진 말씀을 들었어요."

-그것이 무엇이오?

"문이 열리고 환란이 닥친다."

그 말에 서문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의 예언 참 지겹기도 하다. 그거 맞는 말 맞아? 그냥 미신 아니냐고."

-미신은 너희 인간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지금껏 틀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투덕거릴 때 여왕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선지자여. 구원자를 안배하라."

"······."

-······.

서문엽과 대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여왕은 쓸쓸히 웃어 보였다.

"네, 제가 선지자예요."

-허, 그렇군. 내 다음에 태초의 빛과 연결되었으니 선지자는 여왕 당신밖에 없겠군.

서문엽은 구원자라는 말이 거슬렸다.

여왕이 말하는 구원자가 왠지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왕은 서문엽을 보며 말했다.

"저는 문이 열리고 환란이 닥친다는 말이 우리가 성역을 잃고 몰락한 그날을 뜻하는 줄 알았어요."

그럴듯했다.

서문엽을 비롯한 7영웅이 던전 입구를 통해 최후의 던전에 침입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문명이 몰락했으니 어엿한 환란이었다.

-하지만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한다는 예언과는 위배되는군.

"네, 무엇보다도 제 운명안에 보인 구원자는 서문엽 씨였고요."

"나야 인류를 구했으면 된 거 아냐?"

"그래서 알 수 없다고 한 거였어요. 하지만 아직 진정한 환란이 아직 오지 않은 거라면요?"

"우리한텐 너희도 충분히 환란이었거든? 던전 문이 마구 열리고 환란이 닥쳤는데 내가 물리쳤으니 예언 끝난 거 아냐?"

-그건 인간의 입장이다. 태초의 빛의 말씀의 주체는 늘 우리다.

"아오, 계속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하니까 짜증 나네. 애당초 난 그놈의 예언도 안 믿어. 궁금한 건 첫 번째인지 하는 걔들이 무슨 꿍꿍이냐는 거지."

서문엽은 쓰러져 있는 피에트로 아넬라를 툭툭 발로 찼다.

"일단 얘부터 깨워서 추궁해 보는 게 어떨까?"

-일단 그렇게 하지.

대사제가 손가락을 위로 까닥거렸다.

그의 손가락에서부터 오러가 피어나와 피에트로 아넬라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크헉!"

피에트로 아넬라가 비명을 토하며 정신을 차렸다.

-일어나라.

"헉!"

피에트로 아넬라의 몸이 저절로 둥실 떠올랐다.

-날 봐라.

대사제와 눈이 마주치자 피에트로 아넬라는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무엇을 위하여 일했느냐?

"나, 나는, 태초의 빛께서 내리신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실현한다고 하더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대사제가 다시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피에트로 아넬라는 다시 정신을 잃고 땅에 널브러졌다.

여왕은 슬픈 눈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세뇌당했군요."

"정확히는 신성한 언어를 익혔다. 내가 아는 바로는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은 없어. 대사제, 넌 어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언어를 익혔군. 세뇌시키는 방법은 연구했지만 그걸 원상 복구 시키는 치료법은 생각 안 해봤다.

"결국 결론은 또 해괴한 예언만 남는군. 답답하니까 있다가 얘기하자."

서문엽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예언이라는 말의 뜻을 해석하며 토론하는 게 영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애당초 예언이라는 걸 믿지도 않았고 말이다.

지저 전쟁 시절에도 온갖 사이비 종교 단체와 멸망설이 떠돌아서 민심을 해쳤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질색이었다.

오두막 밖으로 나온 서문엽은 산 정상의 풍경을 둘러보며 산책을 했다.

결계 안은 풀과 꽃과 나무로 잘 꾸며져 있었지만, 바깥은 눈 덮인 설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장관이었다.

태양이 지면서 붉은 노을에 물든 하늘도 멋졌다.

노을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밖으로 나온 대사제가 다가왔다.

-아름답군.

"처음 보지?"

-그렇다. 우리는 저 태양도 만들 수 없고, 저 넓은 하늘과 끝없는 대지도 만들지 못한다.

"우리도 못 만들어, 인마."

땅속에서 문명을 꽃피운 지저인들이 대단한 거다.

-그래도 빛 아래에서 사는 것을 허락받지 않았나. 너희는 빛 아래에서도 오러를 쓸 수 있지. 그게 증거다.

"너희도 올라와서 살면 됐잖아."

-무력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쯧쯧, 하여간 자외선에 약한 놈들 같으니."

그러고는 말없이 풍경을 감상하는 두 사람.

서문엽은 여왕이 배틀필드를 만든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후에 환란이 닥칠 수 있으니 그에 따른 준비를 하려고 했겠지.'

배틀필드라는 스포츠로 인해 다시금 전투를 연마하게 된 초인들.

또다시 던전이 열리고 괴물들이 쏟아지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인류는 지저 전쟁 초처럼 무력하게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각 지역마다 각종 훈련을 하며 팀워크까지 다져진 배틀필드 클럽들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키운 선수들은 인류는 지킬 테지만 지저인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지저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지저 세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환란이 닥치면 선수들이 나서서 인류를 구할 테지만, 지저 세계를 떠도는 지저인들은 지켜줄 존재가 없다.

'최소한 인간만이라도 무사할 수 있도록 배려한 건가.'

최후의 던전에서는 자신들을 몰락시킨 주범인 서문엽을 구해주었다.

지상에 와서는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적이었던 인류를 위해 배틀필드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참 상냥한 여자가 아닌가.

백성을 잃고 홀로 지상에 있는 처지가 불쌍하기도 하고 말이다.

지저 문명을 몰락시킨 자신이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언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빚도 있으니 최대한 협조를 해줘야겠다.'

< 재회(4) > 끝

< 동행(1) >

대사제는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왔어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왕이 직접 차려준 저녁 식사를 먹고 나온 서문엽은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대사제를 보고는 혀를 찼다.

"뭐 해?"

-별을 세고 있다.

"지겹지 않냐?"

-이 축복을 매일 누리는 인간이나 할 법한 소리군.

서문엽은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긴 하늘이 맑아서 별이 잘 보이네."

대사제는 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하늘에 정신 팔려 있었다.

그 모습이 좀 찐따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누가 온다.

대사제가 불쑥 말했다.

"뭐?"

그 직후,

파앗! 팟! 팟!

3명의 지저인이 여왕의 거처에 나타났다.

그중 2명은 주위의 풍경을 둘러보며 감탄을 했다.

-여, 여기가 여왕께서 계신 곳인가!

-아름답다! 빛이 내리는 땅이라니!

그 2명은 지상에 처음 올라와본 지저인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둘을 데려온 지저인은 서문엽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서문엽?

"나 알아?"

-여, 여왕께서 당신을 초대했다는 말은 들었다.

여왕을 추종하는 지저인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유명무실했어도 여왕은 여왕인데 추종하는 지저인이 한둘쯤은 있을 법했다.

서문엽은 다른 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관광객 같은 애들은 뭐야?"

-정처 없이 떠돌던 동족들이다. 앞으로 여왕께서 마련해 주신 거처에서 지낼 것이다.

"모여 지내는 거처가 따로 있나 보지?"

-더는 얘기할 수 없다.

지저인은 서문엽과 말을 섞는 것 자체가 꺼림칙한 태도였다. 지저 문명을 몰락시킨 원수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때, 밤하늘의 별을 세던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가까운 곳에 여기처럼 꾸며진 공간이 또 있더군. 아마 거기겠지.

"오, 그런 것도 아냐?"

-여기는 동족이 드나든 이동 흔적이 잔뜩 있다. 흔적을 분석하면 시간과 위치까지 나온다.

'별이나 세는 찐따 주제에 못하는 게 없네.'

서문엽은 뭐든지 척척 해내는 대사제의 능력에 감탄하며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여왕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지저인이 대사제를 보더니 경악했다.

-대, 대사제?!

-너는 '관측'이구나. 네 얼굴을 알고 있다. 독특한 능력을 가졌었지.

-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떻게 당신이 이곳에······.

-설명하자면 기니 생략하지.

다른 지저인 2명도 대사제를 보더니 경악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눈치였다.

여왕의 거처라고 해서 왔는데 무서운 대사제가 떡하니 있으니 당혹스러우리라.

서문엽은 독특한 능력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들어서 분석안으로 여왕의 측근 지저인을 보았다.

-대상: 관측(지저인)

-근력 50/50

-민첩성 62/62

-속도 41/41

-지구력 55/55

-정신력 86/86

-기술 92/92

-오러 140/140

-리더십 33/33

-전술 32/32

-초능력: 관측, 구현

-관측: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기억 속에 저장한다.

-구현: 생명체를 제외한 기억 속의 대상을 똑같이 구현한다. 대상과 동일한 성질·질량의 재료가 있어야 한다.

생각 외로 뛰어난 능력자였다.

오러 수치로 보아 신분은 3등급 붉은색이나 그 상위인 4등급 검은색 사이였다.

'저 구현이라는 초능력은 대단한데?'

눈에 본 것을 고스란히 기억에 저장하는 관측은 사실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기억 속의 것을 똑같이 구현할 수 있는 초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재료만 갖춰져 있으면 뭐든지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지저인들은 여왕에게 인사를 한 뒤에 다시 떠나 버렸다.

그리고 서문엽과 대사제는 다시 여왕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요약하자면 문이 열리고 환란이 닥칠 거라는 예언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위험이 나타날지는 모르고, 첫 번째 상급 사제가 그 주범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서문엽의 말에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금도 보셨다시피 저는 보금자리를 잃고 떠도는 지저인을 모아 지상에 마련한 거처에서 살게 하고 있어요. 지상에 환란이 닥치면 우리도 똑같이 위험하기 때문에 배틀필드를 만들어서 초인들을 육성하고 있었죠. 그 외에는 딱히 대책이 없고요."

"뭐, 그것만으로도 훌륭해. 다만 어떤 환란이 닥칠지 알 수가 없으니 원."

-지상에 거처를 마련하여서 떠도는 동족을 불러오고 있으니 확실히 선지자는 여왕 당신이 맞구려.

대사제는 여왕이 예언의 선지자임을 인정했다.

-그러면 구원자는 여왕이 안배한 자라는 건데, 정황상 서문엽이 유력하군.

"운명안으로도 구원자라고 나오고 있고요."

"그래그래, 구원자든 뭐든 할 테니까 싸울 상대 좀 달란 말이지, 내 말은."

싸움을 마다할 서문엽이 아니었다.

다만 지저 전쟁 시절처럼 단순명쾌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전쟁 시절이 그리웠다. 던전 뻥뻥 열리고 괴물들 팍팍 쏟아지니 그냥 열심히 싸우면 된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첫 번째 상급 사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지.

대사제가 문득 화제를 전환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첫 번째는 지금 나의 뒤를 이어 대사제를 자처하고 있는데,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듣지는 못했지.

태초의 빛과 감응한 지저인은 이 자리에 있는 여왕이었다.

분석안으로 '기도'라는 초능력을 확인했으니 거짓이 아니었다.

-태초의 빛께서 여러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없으니, 첫 번째는 거짓으로 대사제 노릇을 하는 셈이다.

"맞아요."

여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아는 첫 번째는 거짓으로 대사제 행세를 할 놈은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서문엽은 대사제가 세 번째 상급 사제를 추궁하면서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착각이라면 문제가 더 크다. 대체 누구의 목소리를 들었느냐? 누구의 목소리를 태초의 빛이라 여긴 것이냐?

아마도 대사제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서문엽과 싸우기 얼마 전이었지. 태초의 빛의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해 안간 힘을 쓸 때였어. 그때 나는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다.

대사제의 말이 이어졌다.

-태초의 빛이라 착각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무척 오래된 영령의 목소리였다.

전쟁에서 패망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대사제는 자신이 선지자가 아니며 거짓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패닉에 빠져 태초의 빛을 애타게 찾았다.

자아를 잊을 정도의 몰입으로 기도에 빠져, 정신은 영령계를 헤맸다.

더 깊이.

가장 오래된 영령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깊이 까마득하게 시간을 거슬러서 태초에 있었던 단 한 분의 조상님과 접촉하고자 했다.

그때,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다.

[나를 찾느냐, 아이야.]

대사제는 소름이 돋았다.

굉장히 강력하고 오래된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대사제는 이미 태초의 빛과 감응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결코 태초의 빛이 아니었다.

지고하고 위대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사악함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려워진 대사제는 그 즉시 기도를 종료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태초의 빛을 찾는 기도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냥 오래된 다른 영령 아니고?"

서문엽이 물었다.

대사제가 말했다.

-그 깊이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빛 외에 다른 영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맞아요."

여왕도 그 깊이까지 기도를 해 태초의 빛을 만났으므로 공감했다.

-없었던 영령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도 존재감이 너무도 뚜렷했다.

인간인 서문엽은 지저인들과 대화를 나눌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일단은 계속 귀를 기울였다.

-오래된 영령의 존재감이 그렇게 뚜렷할 수는 없다. 세월이 흐를수록 존재가 마모되고 흐려져서 결국 사라져 버리는 것이 정상이지.

"태초의 빛께서도 그래서 말씀이 많지 않고 굉장히 희미하죠. 그나마도 한 사람에게밖에 전달할 수 없을 정도로요."

여왕이 거들어 설명했다.

"그럼 그놈은 뭐야?"

-모른다. 그 명확한 존재감은 마치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 죽은 영령과도 같은 생생한 존재감이었다. 어쩌면 어딘가 아주 머나먼 곳에 갇힌 채, 타인과 접촉하기 위해 영령계로 손을 뻗은 것인지도 모르지.

그것은 꽤나 오싹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서문엽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오, 그럼 첫 번째 상급 사제란 녀석이 바로 그놈을 태초의 빛으로 착각하고 따르고 있다는 말이지?"

-그럴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뭐가 걱정이야. 이제야 좀 명쾌해졌는데."

드디어 숨겨진 대마왕의 실마리를 얻은 기분이었다.

-오만하지 마라, 서문엽. 그 정도로 오래된 영령계에 존재하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면 대체 얼마나 괴물일지 짐작이나 할 수 있더냐?

"···좀 센가?"

그렇게 중얼거린 서문엽은 한심하다는 대사제의 눈초리를 외면했다.

"문이 열린다는 것이 그 존재가 있는 곳과 시공이 연결되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예언과도 일치하니 두렵네요."

대사제의 추론은 얼추 정황에 맞았다.

첫 번째 상급 사제가 그 오래되고 사악한 어떤 존재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

까마득히 먼 곳에 갇혀 있는 사악한 존재는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이용해 이곳과 시공을 연결하고 싶어 한다.

그 존재가 나오면, 그게 바로 예언의 환란인 것이다.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우리는 고대 역사의 상당 부분을 소실했어. 태초의 문명이었다는 '버려진 세계'는커녕 전제 통치 시절이었던 만인릉의 황제 시절조차 모른다.

"알 만한 지저인이 전혀 없나?"

-내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재수 없는 자식.'

절로 뿜어져 나오는 대사제의 거만함에 서문엽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여왕도 이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문득 여왕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만인릉의 황제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엥?"

서문엽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미안한데 그 양반 우리가 처치했거든?"

실제 존재했던 만인릉은 서문엽에 의해 파괴되었다.

아니, 서문엽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초인들이 투입되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막막한 공략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황제의 모가지를 딴 사람은 군계일학이었던 서문엽이었다.

그 두려운 황제의 힘은 대사제와 싸웠을 때보다 더 무서웠을 정도였다.

그런데 대사제는 여왕의 말에 동의했다.

-일리 있군. 그자는 영령이 되었을 리는 없으니 아직도 사령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사령 언데드를 만들면 불러내는 게 가능해.

"아니, 시체도 없는데 너처럼 사령 언데드로 살리는 게 가능하다고?"

서문엽의 물음에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아까 보시지 않았나요? 저를 따르는 지저인을요."

"아!"

그제야 아까 봤던 관측이라는 지저인이 생각났다.

분명 '구현'이라는 신기한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여왕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안 가본 곳이 없죠. 모든 곳을 기억에 담기 위하여 평생 탐험했어요. 만인릉 원정대에도 참가했다가 패퇴할 때 살아남았었죠."

-구현: 생명체를 제외한 기억 속의 대상을 똑같이 구현한다. 대상과 동일한 성질·질량의 재료가 있어야 한다.

생명체는 구현할 수 없지만, 관측이 보고 기억에 담은 만인릉 황제는 언데드였으니 가능했다.

-그 녀석의 능력은 재료가 필요했었지. 지저인의 시체가 하나 필요하군.

대사제의 말에 여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가상의 세계에서 만든다면 재료를 구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 말에 서문엽은 경악했다.

"혹시 배틀필드를 만든 게 그 녀석이야?"

< 동행(1) > 끝

< 동행(2) >

"혹시 배틀필드를 만든 게 그 녀석이야?"

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가장 큰 공헌을 했죠."

대사제에게도 배틀필드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했다.

적당히 듣고도 대사제는 대충 배틀필드 시스템이 어떤 구조인지 이해한 듯했다.

-현실이든 가상 세계든 본인의 육신만 있다면 사령을 불러낼 수 있다. 감당 못할 사령을 부르는 짓이지만, 가상 세계면 죽임당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으니 더 좋지.

그러나 대사제의 말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뭔데?"

-내가 가상 세계에 접속하면, 정신이 이탈한 현실의 육신은 타격을 입는다. 아마 한 번의 접속으로 현실의 난 소멸되겠지.

"뭐 그래?"

-언데드는 여러 모로 취약한 법이지. 만인릉의 황제처럼 엄청난 수준으로 만든다면 모를까.

대사제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가상 세계에서도 내가 죽으면 난 완전히 소멸된다. 이미 죽은 마당에 소멸이 두렵지는 않지만, 신중해야 할 것이다.

"당신 외에 사령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상급 사제 말고는 없을 거예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죠."

여왕이 만류했다.

서문엽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사제가 이번 일의 상당 부분에 실마리가 되고 있었다. 현존하는 지저인 중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말이다.

"아오, 딴 몸에 빙의 같은 건 할 수 없냐?"

서문엽이 답답해져서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런데.

-음?

대사제는 눈빛이 달라졌다.

여왕이 놀라워하며 물었다.

"가능한가요?"

-전쟁 중에 초인의 몸을 이용할 연구를 한 적은 있소. 살아 있는 인간의 몸에서 영혼만 뽑아내고, 사령을 빙의시켜 살아 있는 언데드를 만들고자 했었지.

"개새끼······."

같은 인간인 서문엽이 저도 모르게 욕설을 했다.

하여간 사악한 쪽으로는 온갖 궁리를 한 지저인이었다.

-보통 사령들은 자신의 본체가 아니면 거부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실패했소. 그게 가능했으면 만인릉 황제를 되살리는 일도 간단했겠지.

"최대한 비슷해도 안 돼?"

-최대한 비슷할수록 성공률이 올라가겠지. 하지만 그때 실험은 동족의 사령을 인간의 몸에 빙의시키는 일이었기에 거부감이 심했지. 미개한 인간에게 빙의되는 건 심히 모욕적이니까.

"······."

-하지만 사령 자신이 거부감을 안 느낀다면, 한 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마침 재료도 있군.

모두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피에트로 아넬라에게도 쏠렸다.

여왕은 슬픈 얼굴이 됐다.

"참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는데."

"거부감이 든다면 포기해도 좋습니다."

서문엽이 말했다.

여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차피 한 번 세뇌된 이상 돌이키긴 글렀어요."

-그럼 한번 해보도록 하겠소.

대사제가 손짓하자 피에트로 아넬라의 몸이 떠올랐다.

그의 차가운 검지가 피에트로 아넬라의 이마에 닿았다.

이윽고 검지를 떼자, 이마에서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으아아아······!

환청 같은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육신에서 영혼을 뽑아낸 것이었다.

서문엽은 섬뜩해졌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잖아?'

아마도 인체를 가지고 온갖 실험을 해봤으리라.

대사제는 텅 빈 피에트로 아넬라의 몸을 보고는 잠시 한숨을 쉬었다.

-인간 따위의 몸이라니. 짐승에 빙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던가.

"너희들 인간한테 졌거든? 지은 죄를 만회할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해라, 필요악 같은 새꺄."

정작 필요악은 전쟁 시절 서문엽의 별명이기도 했다.

-어차피 영령에도 이를 수 없는 죄인의 신분이다. 오욕을 감수한다.

"좋은 점도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몸을 얻는 데 성공하면 지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까요."

여왕이 위로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대사제가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

파앗! 팟!

원 모양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진 마법진 2개가 나타났다.

영령의 일격을 펼칠 때와 같은 마법진이었는데, 각각 대사제와 피에트로 아넬라의 앞에 나타났다.

이윽고.

파아아아앗!

대사제의 육신에게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마법진 2개를 통과하여 피에트로 아넬라에게로 스며들었다.

털썩!

힘없이 널브러지는 대사제의 육신.

"크윽!"

대신 피에트로 아넬라의 몸이 비명을 토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피에트로 아넬라, 아니, 대사제가 신음을 했다.

"진짜 성공했냐!"

서문엽이 놀라 소리쳤다.

"치료 능력을 가진 자를 불러올게요!"

여왕은 급히 지저인을 불렀다.

아마도 텔레파시로 불렀는지, 이내 지저인 한 명이 나타나 대사제에게 치료를 펼쳤다.

간신히 몸을 가누게 된 대사제는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무 하찮은 몸뚱이다."

"시체보단 낫지 않냐?"

"···확실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긴 하군. 심장을 비롯한 모든 장기가 몸속에서 기능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문엽은 한번 대사제를 분석안으로 바라보았다.

-대상: 피에트로 아넬라(인간)

-근력 53/53

-민첩성 61/61

-속도 58/58

-지구력 42/42

-정신력 100/100

-기술 42/42

-오러 100/100

-리더십 100/100

-전술 97/97

-초능력: 공간 이동, 명상, 초혼, 영령의 일격

-공간 이동: 시공의 터널을 통해 공간을 이동한다.

-명상: 영령계로 접속해 선조의 영령과 감응한다.

-초혼: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낸다.

-영령의 일격: 영령을 불러내 자신의 오러를 입혀 공격 수단으로 삼는다.

'헐.'

서문엽은 감탄했다.

피지컬 부문은 피에트로 아넬라와 동일했다.

하지만 정신력, 오러, 리더십, 전술이 대폭 향상됐다.

21/92이었던 정신력은 100.

오러도 본래 92로 높은 편이었는데, 대사제가 몸을 차지하니 100으로 치솟았다.

물론 대사제의 본래 살아생전 오러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지만, 이는 인간의 한계인 듯했다.

리더십과 전술도 지저 문명의 통솔자다운 수준으로 상향됐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이 4가지나 생겼다는 점이 대단했다.

본래 대사제가 갖고 있던 능력들이 그대로 옮겨진 것.

"으음, 불편하군. 보유할 수 있는 오러량이 제한되어 있어. 역시 개조되지 않은 신체라 그런가. 너희는 이런 나약한 몸으로 어떻게 전쟁에서 우릴 이긴 것인가."

"내가 얼마나 위대한지 실감이 오냐?"

서문엽이 우쭐거렸다.

틈만 나면 거만 떠는 것은 서문엽도 마찬가지였다.

"인간 따위라는 수치만 참는다면 나름 메리트도 있다. 이제 빛 아래에서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까."

대사제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대사제의 본래 육신이 둥실 떠올랐다.

자신의 본래 몸을 보며 잠시 감상에 잠겼던 대사제는 손가락을 다시 한번 까닥였다.

파시시싯!

대사제의 본래 육체가 삽시간에 재가 되어 흘러내렸다.

'아직도 저런 게 가능하구나.'

서문엽은 내심 감탄했다.

전지전능으로 보일 정도로 섬세하고 고차원적인 오러 운용을 인간의 몸으로도 여전히 펼치는 대사제였다.

자신의 본래 육신을 없애 버린 대사제가 말했다.

"이제 대사제는 없다. 이미 오래전에 박탈되었어야 했던 신분이었다."

"그럼 죄인이라고 불러주랴?"

"그냥 피에트로 아넬라가 낫겠군. 이 몸이 기억하는 이름이니 그 편이 익숙하겠군."

"좋은 생각이에요. 따로 인간의 신분을 만들 필요도 없으니 편리할 거예요."

여왕도 찬성했다.

대사제, 아니, 피에트로는 그런 여왕을 보며 말했다.

"뇌에 각인된 기억을 훑어보니, 이 자는 여왕을 가까이서 도우면서 지저인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왔소. 신성한 언어를 익힌 계기도 그것이었겠지."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이에요."

"한 번 배우기 시작하면 절대로 멈출 수 없소. 우리의 고등 언어를 한 번 맛보면 지적 욕구에 의한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지. 많은 실험을 통해 나온 결과요."

여왕은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일단 오늘은 인간의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니, 만인릉 황제를 되살리는 건 내일 하는 게 좋겠소."

***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여왕의 처소에 배틀필드 장비가 준비되었다.

접속 모듈은 혹시 모르니 4대까지 설치했고, 서문엽을 위한 갑옷과 무기들도 갖춰졌다.

피에트로는 갑옷이나 무기는 의미 없다며 거절했다.

일은 간단했다.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던전 만인릉에 접속한다.

만인릉이 똑같이 구현된 그곳은 황제의 육체 또한 실제와 동일하게 구현되어 있다.

본래 가상 세계에 최종 보스 몹으로 구현되어 있는 황제는 영혼이 없는 몸뚱이뿐이라 다소 전투력이 약하다.

거기서 피에트로가 황제의 영혼을 불러내 몸뚱이에 빙의시킨다.

진짜 황제의 영혼이 깃들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마 내가 봤던 그 전투력을 고스란히 펼치겠지? 그럼 존나 센데."

"영혼에 타격을 입힌다면 큰 효과를 볼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기술로 만들어진 언데드라도 특유의 약점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지."

전직 대사제, 피에트로가 펼치는 영령의 일격은 영혼에 직접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초능력이었다.

거기에 서문엽도 이번에는 아바타에 걸려 있던 제한이 임시로 풀린다.

불사를 증폭시켜 영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체로서 공격하면 영혼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만인릉 황제를 단둘이서 상대하는 무모한 미션이지만, 나름대로 믿을 수 있는 한 방씩은 가지고 있으니 해볼 만했다.

"문제는 싸움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만인릉 황제에게 궁금한 걸 물어보는 거야. 싸움 없이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지."

서문엽의 말에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순순히 답해줄 성격의 소유자도 아닐 것이다. 1만 명을 순장시켰다는 것은 아무리 고대 시절이라도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니까. 영령이 되길 거부하고 삶과 권력에 집착한 이유는 지독한 악의와 오만함이다."

"살다 보니 너한테 그런 소릴 듣게 되는 작자도 있구나."

"그런 자는 남에게 강요되는 것을 거부한다. 이긴다 해도 협박으로 답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애걸해도 소용없지. 싸움의 목적은 최소한 우리가 타협할 수 있는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 성격 나쁜 놈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문엽은 접속 모듈에 들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아바타가 만인릉에 접속됐다.

스켈레톤 괴물들은 등장하지 않도록 조정된 던전이었기 때문에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직접 와보기는 처음이군."

피에트로는 거리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너희도 원정대를 보냈었다며?"

"만인릉에 보존된 고대 역사를 연구하고 싶었으니까. 조작 생명체를 수없이 많이 거느린 원정대를 보냈지만 패퇴했다."

"우린 이겼는데."

"너희는 마침 원정대 덕에 만인릉의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탔던 것이지."

"전쟁 이전에는 왜 만인릉을 건들지 않은 거야?"

"사회적 금기 같은 거였다. 역사가 잊힌 데는 이유가 있으니 캐지 말라는."

피에트로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우스운 소리다. 동족에게 자랑스럽지 못한 치부라 해도 역사를 알아야 반복하지 않을 게 아니던가."

의외로 옳은 말도 한다며 서문엽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궁전에 다다랐을 때, 피에트로는 궁전 외벽에 새겨진 벽화에 관심을 드러냈다.

전쟁을 표현한 벽화 같았는데, 제대로 된 그림도 아니고 상형문자 같아서 서문엽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뭐라고 되어 있는지 알아?"

"황제가 민란을 진압한 업적을 자랑하고 있군."

"민란 일어난 게 자랑이냐?"

궁전 외벽에 잔뜩 새겨진 벽화를 모두 가리키며 피에트로가 이어 말했다.

"수십여 차례의 민란을 전부 진압했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 말라고 백성들에게 엄포하는 것이다."

폭정에 고통받다 못해 민란을 일으킨 백성들.

그러나 모조리 진압하고 영원토록 권력을 누린 무소불위의 폭군.

흡사 악마와 같은 행각을 일삼은 그 미친 황제를 만나러, 두 사람은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궁전 내부에 장식된 벽화도 마찬가지였다.

"측근 중신들까지 반란을 일으켰었군. 그러나 모두 황제에게 패배하고 순장의 제물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그럼 여기에 있던 언데드들이 모두 다?"

"그렇다. 근위대마저 반란에 참가했었군."

"뭐 하는 새끼야? 황제란 자식."

"뭐긴 뭔가. 강대한 힘과 권력을 가진 미치광이지."

그리 말하면서 피에트로는 회한을 느꼈다.

남 일 같지가 않았던 탓이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황제의 침소에 이르렀다.

< 동행(2) > 끝

< 황제(1) >

불쾌한 벽화가 그려진 나선형 계단을 올라 궁전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서문엽은 옛 추억이 떠오르며 긴장감을 느꼈다.

마침내 황제의 처소 앞에 이르렀다.

"준비됐나?"

"어."

서문엽은 방패와 창을 들어 올리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사령을 불러내는 일은 영령과 접촉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령계에 접속하여 영령을 찾듯이, 떠도는 사령을 찾아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못 찾을 수도 있는 거야?"

"장담할 수는 없지. 영령이 소멸하듯 사령도 육신이 없으면 존재감을 서서히 잃고 소멸하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 삶에 집착한 자의 영혼이 소멸되었을 것 같지는 않군."

"좋아, 아무튼 황제는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 넌 황제의 영혼을 찾아서 불러내."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황제가 머무는 처소였다.

사방이 유리벽으로 둘러져 있어 만인릉의 전망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황제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창백한 피부와 큰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인 지저인.

체격도 특별히 크지 않았다.

황금빛의 요란한 갑옷으로 무장했고, 붉은 망토 또한 금빛으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걸쳐진 두 자루의 대검을 집어 든다.

딱히 어떤 말은 없었다.

그냥 적이 나타나자 무기를 들고 싸울 준비를 하는 황제.

영혼은 없이 그냥 육신만 복제된 황제는 전형적인 던전의 최종 보스 몹일 뿐이었다.

"어디, 실력은 얼마나 구현되어 있는지 한번 볼까?"

서문엽은 거침없이 덤벼들었다.

창으로 빠른 찌르기!

깡!

왼손의 대검으로 창을 쳐냈다.

연이은 찌르기가 계속해서 펼쳐졌다. 황제는 두 자루의 대검으로 여유 있게 쳐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파앗!

황제가 두 자루의 대검과 함께 360도 턴을 시도했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 서문엽을 대검의 사정거리 안에 넣었다.

왼손의 대검이 먼저 서문엽에게 도달했다.

콰앙!

백색 오러가 실린 대검이 방패를 강타했다.

쩌렁쩌렁한 굉음.

안정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음에도 서문엽의 신형이 힘에 밀려 흔들렸다.

시간차를 두고 오른손의 대검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 서문엽도 흔들리던 신형을 다시 회복했다.

콰아아앙!

연속으로 강타.

서문엽의 신형은 다시 흔들렸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실력이군.'

2격은 각도가 살짝 달라져서 대비하던 서문엽도 다시 균형이 흔들릴 뻔했다.

1격으로 흔들고 2격으로 무너뜨리는 황제의 스타일이 확실했다.

딜레이 없이 황제는 연이어 어깨를 들이밀며 몸싸움을 걸어왔다.

완전히 서문엽의 균형을 무너뜨릴 속셈이었다.

그때.

털썩!

서문엽은 몸통 박치기를 피해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왼발을 뻗어 뒤꿈치로 절묘하게 오금을 찼다.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리는 황제.

그 틈에 몸을 일으키며 거리를 벌렸다.

거리가 생기자 창을 던지기 그립으로 고쳐 잡고.

팟!

던졌다!

최대한 느리게.

던지는 순간 손끝으로 긁어 회전력을 일으켰다.

가장 느린 속도로 날아간 창은 황제가 휘두른 대검을 피해 궤도가 휘어졌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속도가 무척 느렸기 때문에 회전력으로 인해 휘어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뚝 떨어지며 하단을 노리는 창은.

따앙!

다른 대검에 의해 막혀 버렸다.

변화가 극심한 투창이었지만, 황제는 궤도를 읽고 대응한 것이다.

'육신만 복제한 것치고는 참 쓸데없이 잘 만들었네.'

서문엽은 혀를 찼다.

정확한 테크닉에 순발력까지 최상급.

다른 창을 꺼내 든 서문엽은 계속해서 황제와 공격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고차원적인 테크닉이 실린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피에트로는 허공에 마법진을 띄운 채 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깊은 명상에 잠긴 피에트로의 정신은 실제 만인릉이 있었던 시공의 옛 터를 해매고 있었다.

수많은 사령이 떠돌고 있었다.

황제와 함께 순장되어 영혼까지 붙들린 채 고통받았던 백성들, 신하들의 사령.

만인릉을 공격했다가 패퇴한 원정대의 사령.

공략에 참가했다가 죽은 인간들까지.

하나같이 고통과 원한을 호소하는 사령들의 지옥도였다.

형체를 알 수 없으므로 피에트로는 그러한 사령들의 원한과 울부짖음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야 했다.

정신력의 소모가 상당히 큰일이었지만, 피에트로는 참아냈다.

본인도 그러한 사령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익숙했는지도 모른다.

'원한 말고, 고통 말고, 다른 말을 하는 자를 찾아보자.'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원독에 찬 증오의 말을 영원히 내뱉는 것도, 나약함의 증거였다.

황제는 나약하지 않았다.

조금의 약점도 없는 사악함 그 자체였다.

고통을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난 백성들을 몸소 짓밟으며, 신하들의 반역에도 아랑곳 않고 권좌를 수성한 최악의 폭군.

악마의 심성을 가진 황제는 근본부터가 다른 사령들과 달랐다.

찾아야 한다.

남다른 사령을.

설마 그마저 만인릉이 파괴되어 소멸된 바람에 분노에 차 원독 어린 비명을 지르고 있다면, 이 많은 사령 중에 황제를 찾는 일은 너무나도 힘든 작업이 될 터였다.

'나도 견디기 힘들었지.'

피에트로, 즉 대사제도 그랬다.

헛된 영광을 꿈꿨지만 끝내 문명을 몰락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죄.

추한 자기 자신의 실체에 직면한 수치심.

영령에 이르지 못한 채, 고통의 시간을 보냈었다.

당대 지저인 중 최고의 천재였던 대사제조차도 그러했다.

하지만 만인릉의 황제는 그런 자신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보통의 악마가 아니다. 죄악도 이 정도 수준이면 욕망을 넘어선 신념이다.'

삐뚤어진 신념을 실현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아마 만인릉 같은 모습이 되리라.

피에트로는 자신의 과오와 비슷한, 잘못된 신념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한 황제를 찾아 헤맸다.

그때였다.

[나의 의무.]

무언가 다른 사령을 찾아냈다.

피에트로는 그 사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나만이 가능하다.]

타고난 오만함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말이었다.

[나의 통치만이 세상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올 수 있거늘.]

'찾았다!'

피에트로는 희열을 느꼈다.

[오직 나만이 나의 백성을 수호할 수 있다. 나만이 통치할 수 있고 군림할 수 있다.]

피에트로는 혀를 내둘렀다.

사령이 되어 헤매는 와중에도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실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누구냐, 넌.]

황제도 피에트로의 정신이 접근한 것을 알아차렸다.

일반적인 사령에게서 나올 수 없는 반응이기도 했다.

'역시 황제가 확실하군.'

아예 영혼부터가 남달랐다.

올바른 신념이 있었다면 능히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수도 있었을 영혼이었다.

[넌 누구냐.]

'이리로 오시오.'

[건방지구나. 넌 누군데 짐을 부르느냐.]

'여기에 당신의 육신이 있잖소.'

피에트로는 마법진으로 황제의 사령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영령의 일격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다만 오러를 입히지 않고 텅 빈 육체 속으로 안내할 뿐.

[짐의 옥체!]

황제가 강력히 반응했다.

'맞소, 이곳에 있소.'

피에트로의 이끌림에 의하여 황제가 마법진으로 인도되었다.

마법진을 통과했다.

자연스럽게 황제의 몸에 스며들었다.

순간, 명상에서 깨어난 피에트로가 소리쳤다.

"떨어져라!"

서문엽은 재빨리 황제의 공격을 떨쳐내고 물러났다.

황제의 몸이 휘청거렸다.

-크윽······.

오러의 파동으로 내는 목소리가 황제로부터 나왔다.

"성공한 거야?!"

"보다시피."

"엉뚱한 사령을 데려온 건 아니지?"

"명백히 만인릉 황제였다."

황제는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렸다.

하지만 슬슬 육신에 적응했는지 움직임이 멎었다.

황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두 자루의 대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무기를 쥔 익숙한 촉감도.

익숙한 공기를 가진 자신의 영원한 도시도.

-돌아왔다. 짐이!

황제는 희열에 차 중얼거렸다.

기쁨의 감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소에 침범한 두 이방인이 거슬렸다.

인간?

지상의 혜택을 받는 미개한 유인원들이었다.

심지어 둘 다 유난히 거슬렸다.

평소에 볼 일이 없었던 하잘것없는 인간임에도, 둘 다 왠지 낯설지 않았다.

황제는 피에트로를 보았다.

-네놈은 이상한 존재감을 갖고 있군. 인간이냐, 동족이냐.

"무엇도 아니외다."

피에트로가 대답했다.

인간도 지저인도 아닌 혼종이라는, 자조(自嘲)였다.

-음, 이 목소리. 그래, 네가 나를 되살렸구나.

"맞소."

-이건 동족의 사제 나부랭이들이나 할 수 있는 건데. 넌 정체가 뭐냐?

"한때는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듣는 자였소."

-호오?

황제의 표정에 흥미가 어렸다.

-그래, 너구나. 무엄한 원정대를 보낸 후세의 통치자가.

"맞소."

-흐흐흐, 지금은 인간의 몸에 들어간 꼴이라니. 참으로 기구하구나.

"말하자면 긴 얘기요. 그러니 내 얘긴 됐소."

-아아, 말하지 않아도 안다.

황제는 비웃었다.

-자멸했겠지. 인간에게 숨통이 끊어졌지만, 사실상 너희 스스로 자멸했으리라.

"그걸 어떻게 아시오?"

피에트로가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황제는 흐흐 웃었다.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데 모를 턱이 있던가.

같은 역사.

황제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지저인의 고대 역사가 언급되자, 서문엽은 숨을 죽였다.

황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잠자코 있었다.

'계속 말해라. 내 얼굴을 알아보지 마.'

만인릉이 무너질 때, 황제에게 치명타를 가해 소멸시켰던 서문엽이었다.

황제가 그런 서문엽을 알아본다면 중요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있었다.

-유전 형질을 조작한 괴생물체를 잔뜩 동원하여 이곳을 공격했었지?

"맞소."

-어리석은 선조들이 그따위 짓을 했다가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피에트로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것은 전설로나 알려진 버려진 세계 이야기였다.

기록도 말소되었고 언어도 실전된 탓에 구전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말소된 까마득한 고대의 역사.

지상의 인간은 아직 문명조차 이루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였다.

-악의적인 목적만 갖고 만든 괴물은 그걸 만든 사회의 사악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악의를 주체하여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멀쩡히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 말이 맞소."

피에트로는 자신의 과오를 신랄히 지적받고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내 이전의 시대에도 있었던 일이 아니냐.

"옛날, 버려진 세계에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단 말씀이시오?"

-모르느냐?

"모르오."

-또 잊었구나, 너희는.

황제는 돌연 분노를 터뜨렸다.

-짐이 명하여 다시 되살려 놓은 역사를 너희는 또 말소시키고 잊었구나! 그렇게 덮어버리면 죄악이 사라진단 말이더냐!

황제의 분노는 피에트로에게 똑바로 꽂혔다.

-더러운 사제 놈들. 태초의 빛을 대변한다고 내세우므로, 언제나 옳아야 하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숨겨야 하지! 두 번 다시는 정치에 손대지 못하도록 박멸시켰더니, 또 살아나서 나라를 망쳤구나!

피에트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역사를 누락시켜 버린 것은 역시나 자신 같은 사제들인 모양이었다.

'짐작은 했었다.'

-자신들이 만든 괴물들을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게 버려진 세계의 실체다. 너희가 찾는 조상님들이 한 짓거리가 그거다!

이야기를 듣고서 서문엽은 최후의 던전이 무너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저인의 통제에서 풀려난 괴물들이 미쳐 날뛰었었다.

버려진 세계도 그렇게 망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네놈은 낯이 익군.

황제의 시선이 어느새 서문엽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사람 잘못 봤는데."

서문엽은 일단 부인했다.

< 황제(1) > 끝

< 황제(2) >

-아니, 처음부터 네놈은 낯이 익었다.

"거참, 잘못 봤다니까 그러네!"

서문엽은 끝까지 잡아뗐지만, 피에트로가 보기에도 구차했다.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보았다.

-네놈만은 기억한다. 부질없이 죽으러 달려드는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네놈은 위협적이었으니까.

"······."

-희한하군. 그러고 보니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하나는 날 죽인 인간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몸에 빙의한 사제 나부랭이. 굳이 나를 살려낸 이유가 무엇일까?

"묻고 싶은 게 있었소."

피에트로가 답했다.

황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그랬군. 그래서 나를 살려냈군. 궁금한 것은 너희가 잃어버린 오래전의 역사에 대한 일이더냐?

"비슷하오."

정확히는 고대의 역사에 대한 게 아니라,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조종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고대의 영령이었다.

-너희가 스스로 말소시켜 놓고는 다시 나에게 묻느냐.

"역사를 말소시킨 이유는 아마 당신 때문일 거요. 이곳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소."

-뭐? 그게 무슨 소리지?

황제는 의문을 표했다.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이곳에 오면서 벽화를 보았소. 수십여 차례의 민란을 친히 진압하고 포로를 이 무덤의 주민으로 삼은 일들이 자랑스럽게 새겨져 있었소."

-누구도 절대 짐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기 위함이지.

황제는 그런 자신의 행각을 자랑스러워했다.

듣고 있던 서문엽은 그런 황제에게 구역질이 치밀었다.

죽어서까지 이런 도시를 만들어 통치한 정도의 권력욕이라니.

거기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잡힌 이들을 이곳 만인릉에 순장시켜 죽어서까지 지배를 받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패한 이들을 모조리 데려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지배받는 굴욕과 고통을 준 황제의 악의. 권력자를 싫어하는 서문엽은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피에트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당신이 1만여 명을 무덤에 끌고 들어간 탓에 사회는 엄청난 공백이 생겼을 거요. 누구도 당신의 빈자리를 매우지 못했을 테니 큰 혼란이 찾아왔겠지."

-애석하게도 네 말이 옳다. 짐을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다 쭉정이들이었지.

그리 한탄하면서도 애석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피에트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누가 분노와 혐오로 물든 당신의 권좌에 앉을 수 있었겠소? 누가 당신 때문에 뿌리 깊게 박힌 백성의 불신을 감당할 수 있었겠소? 또 누가 당신처럼 백성의 불만을 강제로 진압할 폭력이 있었겠소?"

-······.

"그런 자질을 타고난 이가 있었어도 아마 성장하기 전에 당신이 살해했을 거요."

황제가 흠칫했다.

피에트로는 그런 황제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권력과 자기 신성화에 미친 자의 사고방식이란 뻔한 것이오. 나를 대신할 자가 없다고 한탄하고, 누구도 나를 대신하지 못하게 제거하지. 나처럼 위대한 통치자는 없었다고 길이 여겨지도록 말이오."

황제의 표정에 슬슬 불쾌감이 어렸다.

"난 알 수 있소. 나도 비슷했으니까."

-감히 너따위 실패자와 짐을 비교하느냐?

"물론이오. 그런데 자질 있는 후계자를 죽인 것은 사실인가 보군. 거기에 대해서는 부정 못 하는 걸 보니."

-······.

피에트로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계속 맞춰보리까? 당신에게 죽은 그 후계자들도 이 무덤에 있지 않소? 넌 감히 날 대신할 수 없다. 넌 영원히 내 지배에 복종하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테니까. 당신 같은 악의를 지닌 이의 생각은 뻔하지. 내 말이 틀렸소?"

황제는 말이 없었다.

다만 깊은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피에트로에게 속내를 훤히 간파당한 것에 굴욕을 느꼈으리라.

"당신 탓에 혼란을 수습할 정치적 역량을 가진 이는 없었고, 대신 종교 쪽에서 지도자가 나타났을 거요. 바로 태초의 빛의 선택을 받은 대사제 말이오. 당신이 아무리 사제를 죽여 씨를 말리려 들어도, 결국 태초의 빛께서 누군가를 선택해 말씀을 전하시니까."

설명이 이어졌다.

"참 고생 많았을 거요. 당신이 만들어낸 지옥도를 수습하려면 일단 뿌리 깊은 증오가 있는 백성들부터 달래야 했으니까."

그제야 황제는 피에트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 방법이 고작 역사를 말소하는 일인 건가.

"정확히는 당신의 존재 자체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는 일이지. 당신이라는 트라우마부터 없애야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을 테니까."

-짐을······.

"당신이 행한 모든 일도 지워졌을 거요. 그 탓에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조차 몰랐소. 그저 만인릉을 보고는 죽어서까지 권력에 미친 작자구나 싶었을 뿐."

-이이!!

쿠아아아!!

황제에게서 오러가 폭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사악한 심성에 어울리지 않는 백색의 환한 오러였다.

-네놈들 따위의 평가는 필요치 않노라! 너희 같은 우민들은 한결같거든! 은덕은 잊어버리고 원망할 것만 기억하는 간사한 마음 말이다.

서문엽도 오러를 일으키고 맞설 준비를 했다.

-아느냐? 너희 사제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조상들이 싸질러 놓은 오물을 치운 게 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 말과 함께 황제가 서문엽에게 달려들었다.

준비동작 없이 곧장 불쑥 휘둘러지는 대검!

터어엉!

서문엽은 방패로 안정적으로 막아냈다.

그럼에도 묵직한 오러의 충돌이 온몸에 퍼져 나가는 압박감을 느꼈다.

연이은 2격!

콰아앙!

"흡!"

서문엽은 기합과 함께 방패 컨트롤에 심혈을 기울였다.

'역시 껍데기와 오리지널은 다르다.'

방금 2격은 미세하게 시간차를 두어 타이밍을 뺏으려 했고, 충돌 순간 미세하게 방향을 바꿔서 서문엽을 흔들었다.

서문엽은 그 즉시 방패의 무게 중심을 조절해 버텨낼 수 있었다.

단순한 한 차례의 공방에 고급 테크닉이 섞여 있었다. 서로의 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단과 싸워본 게 도움이 됐다.'

쌍도를 불규칙하게 휘두르던 나단 베르나흐와 싸워본 덕에 대처하기가 익숙했다.

-호오? 역시나 까다롭구나. 솜씨가 있어.

황제는 서문엽의 실력에 흥미가 생겼는지 피에트로의 도발로 인한 분노가 다소 수그러든 모습이었다.

그때 피에트로가 다시 끼어들었다.

"절대 권력은 백성의 지지 없이 나오지 않소. 분명 당신은 초창기에 모두를 매료시킨 위대한 업적을 세웠을 것이오. 아마도 이후에도 당신의 권좌를 지켜준 강력한 군대와 연관된."

황제는 새삼스럽게 피에트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지도자를 했던 자인가. 동족을 통째로 말아먹은 놈치고는 훌륭한 통찰력이다.

"들려주시오. 누구와 싸웠소? 조상이 저질러 놓은 문제란 무엇이오? 혹시 버려진 세계와 관련 있소?"

피에트로는 계속해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가 왜 그것을 알려줘야 할까?

당연하지만 협조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너희는 이미 망했다면서 왜 그것을 궁금해하느냐? 그것도 인간의 몸으로, 인간과 함께 와서는 말이다. 버려진 세계처럼 너희도 괴물을 만들어대다가······.

거기까지 말하다가 황제는 돌연 피에트로를 응시했다.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렇군! 너희는 자멸한 게 아니라 인간에게 패배했구나.

황제도 통찰력이 대단했다.

"자멸이나 마찬가지였소."

-그래, 많은 것이 이상했어. 짐승이나 다름없던 인간들이 오러를 사용하며 짐의 안식처를 침공했고. 어째서 인간이 우리의 근간이자 우리만이 사용 가능했던 오러를 쓸 줄 아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겠군. 지상을 탐내서 침공했구나. 그러다가 인간에게도 오러가 전

해진 것이고.

"맞소."

-푸하하, 가장 한심한 몰락이로다. 버려진 세계의 선조들 못잖게, 너희가 내 후예라는 게 부끄럽다.

"나 스스로도 부끄럽게 생각한다오. 허나 지금 용건은 그게 아니오."

-아아, 그렇지. 짐의 빛나는 업적을 궁금해했지. 그런데 그 와중에 그게 왜 궁금한 것이냐? 혹여······.

황제는 씨익 웃으며,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너희도 예언이라도 들었느냐?

피에트로는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서문엽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이라는 말에 격동하는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도전 속에서 권좌를 끝까지 지킨 괴물 황제를 속이지는 못했다.

-맞군.

음산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역시 황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성과였다.

'황제는 뭔가 알고 있다. 그도 우리와 알아내고자 하는 문제의 환란을 당해봤고, 그걸 이겨낸 적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환란은 만인릉 황제보다도 오래된 지저인의 선조가 싸질러 놓은 오물이라는 것까지.

-나는 별로 후예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 하물며 인간은 더더욱 도울 마음이 없지.

"원하는 게 무엇이오? 무엇이든 줄 수 있소."

피에트로가 말했다.

현실에서는 무리지만, 이곳은 가상의 세계였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

-짐은 계속 백성을 다스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너희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지.

황제는 클클 웃었다.

-이 무덤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짐이다. 백성들을 순장시킨 것도 짐이지. 백성들의 사령을 다시 불러내 살려내고 짐의 나라를 다시 완성할 것이니라.

그랬다.

사령을 다루고 언데드를 만드는 재주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은 바로 이 만인릉의 황제였다.

1만여 명의 사령 언데드를 통제했던 능력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오."

-뭐라?

황제는 깜짝 놀랐다.

피에트로가 말했다.

"이곳은 가상의 공간이오. 현실에서 이 거대한 도시를 다시 재건할 역량은 우리에게 없었소. 당신 백성들의 시신은 당연히 찾지 못했소."

서문엽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당신의 진짜 무덤은 당신을 처치하고서 진즉에 파괴했지."

황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텅 빈 도시의 정경.

을씨년스러운 거리에는 어떤 스켈레톤의 잔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황제라도 시신 없이 언데드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신을 찾아와라! 짐의 도시가 있었던 시공 어딘가에 시신들이 떠돌고 있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한다면 내 너희에게 원하는 답을 들려주겠다.

마침내 황제도 조급해진 듯했다.

권력자가 가장 싫어하는 결말은 홀로 외로이 남겨지는 것일 터였다.

홀로 이 거대한 무덤에서 남겨진다는 것은 황제로서는 상상하기 싫은 결말이었으리라.

피에트로는 한숨을 쉬었다. 인간이 된 후로는 보기 드물게 감정 표현을 한 것이었다.

"시공 속에서 시신들을 찾아 수습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오. 하물며 시신을 수습해 온다 해도 문제는 있소. 사령들은 당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것이오."

-어째서냐?

"되살아나길 원하는 사령이 없을 테니까."

-웃기지 마라. 짐도 육신을 잃고 혼돈 속을 떠돌았다. 삶에 대한 열망, 육신을 되찾고 싶은 욕구. 내가 느껴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나!

"역시나 당신은 남을 이해할 줄 모르오."

-뭐라고?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죽어서 모욕받고 싶어 하는 이는 없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순장되었던 이들 중, 되살아나 당신의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소."

-뭐, 뭐라고!

"당신의 지배를 받느니 그냥 사령으로 맴돌다가 소멸되고 싶어 할 거요."

-이이······!!

황제가 분노로 씩씩거렸다.

"자기 존엄을 짓밟히고 싶어 하는 이는 없단 말이오. 황제, 당신은 환란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위대한 군주이지만, 또한 구한 세상을 스스로 다시 짓밟았소."

황제는 망연자실했다.

죽고 난 후 까마득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권력을 상실한 셈이었다.

< 황제(2) > 끝

< 황제(3) >

서문엽은 망연자실한 황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지독한 권력욕이다.'

적과 싸워 승리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영웅이 폭군으로 타락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이놈의 황제처럼 거대한 스케일은 듣도 보도 못했다.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는데도 엄청나게 강했던 황제야. 살아생전에는 훨씬 더 강했다는 뜻이겠지.'

피에트로, 즉 대사제 또한 사령 언데드가 되었을 때는 살아생전의 힘을 반의반도 발휘 못했다.

살아생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가진 언데드는 없다고 피에트로는 단언했었다.

서문엽의 경험상, 만인릉 황제의 강함은 최후의 던전에서 맞붙었던 대사제와 동급.

그럼 대체 살아생전에는 얼마나 강했다는 뜻일까?

'엄청난 괴물이었겠지. 황제를 따르는 강력한 군대도 있었을 테고.'

그랬던 황제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던 환란이란 대체 무엇일까?

만약 살아생전의 황제조차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이겼을 정도라면······.

'우리는 못 이기는 거 아냐?'

그렇다면 문이 열리기 전에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처치해서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선일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놈의 고집불통 황제에게 환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황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짐의 나라가······.

황제는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좌절을 겪고 있었다.

서문엽은 피에트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냐는 무언의 질문.

피에트로도 별반 답이 없는 걸 보니 뾰족한 대책은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니! 백성은 있다!

돌연 황제가 버럭 소리쳤다.

의아해하는 두 사람에게 황제가 킬킬 광기에 젖은 웃음을 흘렸다.

-바로 너희다.

"뭐?"

황당해하는 서문엽.

-너희를 죽여서 내 백성으로 삼겠다!

"돌았냐? 미안한데 우리 몸도 가짜라서 죽여도 안 죽거든?"

-뭐, 뭐라고?

"우리가 미쳤다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목숨 걸고 댁을 되살렸겠어? 생명은 하나야, 이 새꺄."

황제는 부들부들 떨었다.

서문엽은 쯧쯧 혀를 찼다.

"그만큼 살았으면 이제 그만 좀 추하게 굴고 도움 좀 줘봐. 백성은 못 줘도 산해진미, 금은보화 뭐 그런 건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책도 있고, 아 컴퓨터 게임도 가능하겠다. 재미있는 거 존나 많은데······."

-닥쳐라!!

황제가 두 자루의 대검을 들고 버럭 소리쳤다.

황제가 금방이라도 덤빌 기세라, 서문엽도 방패와 창을 치켜들었다.

"그래, 덤벼봐! 스파링 상대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건방진 놈! 죽여 버리겠다!

폭사하는 하얀 오러에 둘러싸인 대검이 마구 휘둘러졌다.

콰앙! 쾅! 쾅!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오러량에서는 완벽한 열세라 서문엽은 계속 밀려났지만, 그래도 좌우로 무빙하며 정면 충돌은 피했다.

계속해서 충격을 옆으로 흘리며 버텨내는 서문엽.

그런 그를 보며 황제가 말했다.

-건방 떨고 있구나. 그래, 무기를 다루는 솜씨만은 짐과 견주어도 되겠다. 건방질 만하구나.

진심으로 서문엽을 칭찬하는 황제. 그러나 말투가 꼭 어린애를 보며 기특해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황제도 기술이 100 수준이라는 건가.'

충돌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힘에서 밀리는 게 아니더라도, 황제는 자칫 공격 속도가 느려서 빈틈이 드러날 수 있는 대검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단지 대검 두 자루를 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자루를 양손에 쓴다 해도 휘두르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상대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막기만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었다.

소위 싸움의 흐름을 리드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힘은 검술이 아니었다.

-하나 고작 그것 가지고는 너희에게 닥칠 환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환란인지 안다는 듯이 말하네?"

서문엽이 툭 질문을 던졌다.

-알고말고.

황제가 답했다.

-싸움은 그때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서문엽은 눈을 빛냈다.

듣고 싶었던 정보가 황제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짐조차도 놈들을 완전히 박멸시키지 못했다. 쫓아내는 게 한계였고, 싸움이 끝난 뒤에는 폐허만이 남았지.

서문엽은 내심 실망했다.

살아생전의 황제조차도 한계를 느꼈다고 하니, 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미션이란 말인가.

-놈들이 언제 또 올지 모른다. 그래서 짐은 나라를 재건하고 더욱더 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백성들의 희생이 따랐지만, 마땅한 희생이었다. 언제 또 환란이 닥칠지 모르는데, 그 무지몽매한 것들은 금세 잊어버리고 희생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콰아앙!

교차된 대검이 일거에 서문엽의 방패를 덮쳤다.

"큭!"

서문엽은 나뒹굴었지만, 구르고 난 후에 다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 어리석은 모습을 보며 짐은 깨달았다. 역시 짐밖에 없다. 짐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이 황제가 타락한 계기였다.

또다시 닥칠 환란을 막기 위해 육성된 무적의 군대는 백성을 탄압하는 데 쓰였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일을 물었을 때 짐은 바로 알았지. 놈들이 결국 또 침공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 놈들이 대체 누구냐고?"

황제는 씨익 웃었다.

-짐을 이기면 알려주지.

"뭐?"

서문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의 짐조차 못 이기거든, 어차피 미래가 없으니 그냥 뒈져라.

"끝까지 밉상이네, 정말!"

-그때 짐의 무덤을 침공한 원정대와 그 뒤에 온 너를 포함한 인간들. 그게 너희가 낼 수 있는 전력의 한계치겠지. 맞나?

"···대충 그렇겠지?"

배틀필드로 인해 실력 있는 초인들이 늘었지만, 지저 문명은 멸망했다.

대충 전력의 총합을 따지면 그때 이상의 힘은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문이 열리고 환란이 닥쳤을 때 며칠 내로 멸망할 것이다.

"······!"

그 정도였던가.

황제가 단순히 악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의 짐의 처지처럼, 너희 또한 덧없고 부질없구나.

자신의 처지에 절망한 황제는 서문엽과 피에트로에게 조소를 보냈다.

"각오해라. 금방 끝내줄 테니까."

결심을 굳힌 서문엽은 불사에 증폭을 걸었다.

파아아앗!!

서문엽은 순식간에 영체로 변했다.

황제는 깜짝 놀랐다.

-영체?!

-놀랐냐? 새꺄, 이 악물어라. 강냉이 털어버릴 거니까.

영체가 된 서문엽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런데,

-실로 놀랐다. 인간이 그런 재롱을 부리다니.

-재롱?

서문엽이 울컥한 찰나였다.

파아아앗!

황제도 온몸이 하얀 오러로 잠식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직후, 황제 또한 영체가 되었다.

서문엽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체가 된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 얘기다.

-어, 어떻게······.

-건방지구나. 너 따위도 되는 영체의 경지를 짐이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느냐?

-아니, 예전에 싸웠을 땐 영체로 변신하지 않았잖아?

서문엽은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예전에 만인릉을 공략할 때는 황제가 영체로 변신한 적이 없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넌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로군.

-뭐?

-영체 상태에서는 오러의 낭비가 심해지는데 짐이 뭐 하러 이 모습을 고수하겠느냐?

그제야 서문엽은 120초의 시간제한이 오러 소모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옛날에는 이 상태로도 몇 시간 동안 싸울 수 있었지만, 언데드가 되고서는 그만한 오러가 없어졌다. 기껏해야 15분 정도가 한계지.

-······.

기껏해야 2분이 한계인 서문엽은 시무룩해졌다.

황제의 영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영체가 풀려나는 모습이었다.

무릎, 몸통, 목, 머리.

영체가 풀린 황제는 두 팔도 원상복귀 되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두 자루의 대검은 여전히 영체 상태였다.

-어? 그거 뭐야?

놀랍게도 황제는 자신의 무기만 영체화 시켰다.

-봤을 텐데?

황제가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만인릉 공략 때, 황제는 이상하게 빛나는 대검을 휘둘렀었다.

대량의 오러가 집중되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제 보니 무기만 영체화한 것이었다.

휘익!

황제가 대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흐억!

방패로 막았음에도 서문엽은 영혼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런 꼴로는 무기만 충돌해도 영혼까지 타격을 입지.

황제의 비웃음을 받으며 서문엽은 나동그라졌다.

그때였다.

"비켜."

피에트로가 나섰다.

파파파파팟!

십여 개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피에트로가 필살기인 영령의 일격을 펼친 것.

-호오.

황제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

"아오, 씨발!"

접속 모듈에서 나온 서문엽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에트로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완패였다.

"하다못해 고위급 영령이라도 동원할 수 있었다면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텐데."

피에트로는 낭패 어린 표정이었다.

여왕이 그런 두 사람을 위로했다.

"그래도 많은 것을 알아냈잖아요."

여왕은 스크린을 통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왕뿐만이 아니었다.

'관측'을 비롯한 여러 지저인이 스크린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서문엽은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누구는 고생하는데 아주 월드컵 경기라도 보냐?"

"저, 저희라도 합류할까요?"

여왕이 겸연쩍어서 물어보았다.

피에트로가 고개를 저었다.

"몇 명 포함된다고 달라질 문제는 아닌 것 같군. 대인원을 끌고 가서 인해전술로 이긴다 해도 황제가 납득할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

서문엽은 황제가 보여준 무기 영체화를 떠올리며 납득했다.

영체화된 대검은 모든 것을 썩둑썩둑 썰어버렸다.

만인릉 공략 때처럼 무기로 직접 공격을 하는 동료들이 필요하지, 오러만 사용하는 지저인들은 그다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영체화된 무기로 오러를 베어 소멸시키는 것을 피에트로의 영령의 일격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자포자기 상태이기 때문에 설득은 불가능하고, 일단은 그자가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도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군."

피에트로의 말에 서문엽도 공감했다.

"그래 뭐, 계속 도전해 보지."

서문엽은 만인릉에서도 봤던 황제의 강함을 새삼 재확인하자 암담함을 느꼈지만, 절망보다는 호기심을 더욱 느꼈다.

'그 무기만 영체화한 거 어떻게 했지?'

일부만 영체화할 수 있다니, 서문엽으로서는 신세계를 본 것이었다.

'나도 해봐야겠다.'

그렇게 도전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접속해서 시작한 싸움은 꽤 오래갔다.

이번에는 영체로 변신하지 않고 그냥 싸웠기 때문이다.

영체화된 황제의 대검은 충돌 없이 최대한 피하면서 창으로 찌르고 던지며 싸웠다.

-그래서야 이길 수 있겠나?

황제는 그런 서문엽을 조롱했다.

그 와중 서문엽은 피에트로와 눈빛을 교환했다.

순간적으로 피에트로가 영령의 일격을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에.

파앗!

서문엽도 재빨리 영체로 변신해 달려들었다.

오러에 씌워진 영령들과 함께 합공에 나선 서문엽.

황제는 씨익 웃고는, 두 자루의 대검을 교차해 십(十) 자를 그렸다.

그리고 놀라운 황제의 필살기를 구경하게 되었다.

대검 두 자루를 종횡으로 베며, 다시 십자로 교차하고서 또 벤다.

그것을 엄청난 속도로 무한 반복!

촤촤촤촤촤촥!!

허공에 수많은 빛의 열십자가 수놓아졌다.

영령들이 무차별로 썰려 나갔다.

경악한 서문엽은 급한 대로 수많은 십자 속의 틈새로 창을 던졌다.

틈새로 절묘하게 통과한 창이 날아들었지만,

터엉!

다시 십자로 교차된 대검에 가로막혔다.

-방금 건 칭찬해 주마.

그 말과 함께 서문엽은 썰려 버렸다.

접속 모듈에서 나왔을 때는 피에트로도 함께였다.

"이 작전은 안 되겠군. 내 영령의 일격 자체가 힘이 없다. 영령들이 버티지 못하고 너무 쉽게 나가떨어졌어. 보다 강한 선조분들이 도와주셨다면 한 번은 베여도 버텼을 텐데."

서문엽은 다시 황제의 전투 스타일을 떠올리며 전법을 새로 구상했다.

그러고서 내린 결론.

"나도 그거 따라할 수 없을까?"

완전 영체로는 극히 불리했다.

무기끼리 충돌 시 황제는 별반 타격이 없는데, 서문엽은 타격을 입는다. 완전 영체화와 무기 영체화의 차이였다.

하지만 서문엽도 무기 영체화가 가능해지면 해볼 만했다.

< 황제(3) > 끝

< 영체화(1) >

"내가 최후의 던전에서 널 처치하고 나서 말이야."

4차 도전을 마치고 쉬는 동안, 서문엽은 뜬금없이 피에트로의 아픈 과거를 건드렸다.

피에트로는 거기에 대꾸해 줄 생각이 없었다.

"탈출은 불가능하고, 괴물들한테 둘러싸여서 황천행이 확정이었거든. 그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가 돼서 미친 듯이 싸웠어. 삶에 대한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까, 아주 원 없이 싸운 것 같아."

서문엽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볼 때 황제도 지금 그 상태야. 한 풀릴 때까지 싸우고 싶은 거야. 검술을 저 정도로 익혔으면 무투파거든. 남은 즐거움이 그거밖에 없는 거지."

"직성이 풀릴 때까지 어울려 줘야 한다는 거군."

"그래. 그리고 걔 말도 틀리지 않은 게, 언데드가 된 황제도 못 이기면 예언에 나온 환란을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 말에 여왕이 끼어들었다.

"우리의 목적은 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저지해 미연에 방지하는 거예요."

"쩝, 그게 제일 좋지만,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릴지 모르겠네."

아무튼 지금 할 일은 시름에 빠진 황제와 놀아주는 것이었다.

5차.

콰지직!

"끄억!"

6차.

-아직 멀었다.

"컥!"

그리고 7차 도전.

"야 이 씨발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서문엽은 황제를 보자마자 삿대질을 했다.

-뭐냐? 벌써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냐?

"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서문엽은 영체화된 황제의 대검을 가리키며 물었다.

옆에 있던 피에트로가 흠칫했다. 다른 사람 탓에 자신이 창피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황제는 기가 찬 나머지, 감탄했다.

-그걸 나에게 알려달라고 묻는 것이냐?

"그래! 이건 뭐 싸움이 안 되잖아!"

-그런 것치고는 점점 오래 버티던데, 좀 더 노력해 보지 그러나.

"에이 썅!"

욕설과 함께 서문엽은 영체화했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말했다.

-창을 놔봐라.

-창?

뜬금없었지만 서문엽은 시키는 대로 창을 놨다.

땅에 떨어진 창을 대검으로 가리키며 황제가 말했다.

-손에서 내려놓으면 네 창은 더 이상 영체 상태가 아니지.

-그야 그렇지. 내 몸에 닿지 않으면 영체에 포함 안 되니까.

-그것과 같은 이치다.

서문엽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창을 주웠다가 내려놓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야 인마, 너 이거 뻥치는 거 아니지?

-알려줘도 불만이군. 하여간 우매한 백성들은 은혜를 금방 잊어.

혀를 차는 황제.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 서문엽은 계속 창을 쥐었다 내려놨다 하며 실험했다.

그러다가 120초가 지나 영체에서 풀렸다.

"아무리 해봐도 모르겠는데."

-다 요령이다. 일단 뒈져라.

콰아아아앙!

서문엽의 아바타는 소멸됐다.

피에트로는 그로부터 30초 후에 나왔다.

"넌 대사제였던 놈이 꼴랑 30초 버텼냐?"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영령 가지고는 대적하기가 무리로군."

서문엽은 문득 뭔가가 떠올라서 피에트로에게 물었다.

"저 황제 언데드 따지고 보면 네가 만든 거잖아?"

"그렇다."

"너도 언데드였을 때 통제 설정이 되어 있어서 나랑 싸워야 했었지?"

"황제에게 통제 설정을 왜 안 걸었냐고 묻는 건가."

"어."

"감당 못 할 사령은 본래 저렇게 살려내서도 안 된다. 세 번째 상급 사제가 나한테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라."

도망치지 못하게 공간 이동을 조작해서 죽였다.

뭔가 인간은 상상도 못 할 복잡한 오러 컨트롤이 필요한 스킬이었을 테지만, 겉보기엔 손가락만 까닥해서 죽인 것처럼 보였었다.

"통제 설정을 조금도 할 수 없었다. 묻는 말에 대답하라는 간단한 통제조차 불가능했지."

그 말에 여왕도 동의했다.

"황제 정도면 태초의 빛 외에는 그보다 오래된 영령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예요. 역사에 남을 만한 천재였던 대사제님이라도 통제는 불가능할 거예요."

"역사에 남을 만한 천재?"

서문엽은 피에트로를 빤히 쳐다봤다.

"뭘 그렇게 보지?"

"자기 자랑이 심한 놈인 줄 알았는데, 진짜 천재로 인정받고 있었구나 싶어서."

"난 내 자랑을 한 적 없다."

일부러 자랑한 게 아니라면, 주변에서 하도 찬사만 받고 살다 보니 아예 그걸 당연시 여기게 된 케이스였다.

'보통 그런 놈이 대형 사고를 치지.'

결국 지저 문명의 역사를 새로 쓴 대형 사고를 친 피에트로.

그런 그를 보며 서문엽은 문득 욕심이 났다.

'배틀필드로 치면 톱3는 그냥 들겠지?'

톱3 중에서는 아이리시 위저드, 로이 마이어와 비슷한 포지션이었다.

굵직한 초능력을 펼치며 전장의 판도를 결정짓는 마법사.

하지만 전직 대사제 피에트로가 로이 마이어에게 꿀릴 것이 없었다.

약발이 조금 떨어졌다지만, 그의 영령의 일격이면 상대 팀은 그냥 떼 몰살이었다.

'거기다가 공간 이동도 있고.'

그 외에도 초능력은 아니지만 오러를 활용해서 온갖 짓을 할 수 있다. 물론 지저인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자제해야 할 테지만.

'공간 이동과 영령의 일격만 갖고도 엄청난 인재잖아? 와 씨, 얘를 데려가면 좋겠는데?'

YSM에 데려가고 싶었다.

이 녀석만 있어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재패는 확정이다.

월드 챔피언스리그도 좋은 성적을 노려볼 수 있었다.

서문엽과 피에트로가 활약하고, 카자흐스탄에서 데려온 사니야 아흐메토바도 잘 자라면?

'이 녀석만 있어도 가능하겠다.'

피에트로를 바라보는 서문엽의 눈빛에 탐욕이 어렸다.

'엄청난 피해를 끼친 전범 자식이지만, 뭐 어때. 안 들키면 되지!'

일단 황제 문제가 끝나면 한 번 구슬려 봐야겠다고 생각한 서문엽이었다.

잠시 후, 다시 접속했다.

서문엽은 만인릉에 접속하자 황제에게 가지 않고, 일단은 무기 영체화 훈련을 시작했다.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

머릿속으로 창을 내려놓았던 느낌을 되새기며, 발부터 영체화를 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변화가 없었다.

120초가 지나 영체화가 풀려 버렸을 뿐이었다.

오러가 전부 고갈되자 접속을 끊은 뒤 다시 재접속했다.

불사를 증폭시켜 영체가 되고 나면 오러가 거의 다 소진되곤 했던 것이다. 120초의 시간 제한은 바로 오러량 탓일 터였다.

'무기만 영체화하면 오러 소모를 막을 수 있으니 시간이 대폭 늘어날 거야. 자, 내려놓는다. 내려놓는다.'

창에서 손을 떼듯이 발을 마음속에서 내려놓는 기이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렇게 재접속을 수시로 반복하며 연습을 했다.

"하루 이틀 연습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만."

피에트로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시끄러, 난 해낼 거야.

서문엽의 훈련을 가만히 지켜보기가 지루했는지, 피에트로 역시 명상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하루가 훌쩍 지나갔을 무렵······.

-됐다!

서문엽이 버럭 소리 질렀다.

피에트로는 명상에서 깨어났다.

"설마?"

하루 만에 진전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봐봐, 인마!

정말이었다.

서문엽의 발 부분만 영체에서 풀려 있었다.

다른 온몸은 영체 상태였지만 발만 빛나지 않고 그대로였다.

피에트로는 눈을 부릅떴다.

'정말 천재란 말인가?'

인간인 주제에 영체의 단계에 올랐으니 천재가 맞긴 할 테지만, 설마 하루 만에 이런 진전을 보일 줄은 몰랐다.

-으하하! 역시 난 나야!

의기양양해진 서문엽.

그런데 문득 이상함을 느낀 피에트로가 입을 열었다.

"그 부츠 벗어봐라."

-응? 왜?

서문엽은 시키는 대로 부츠를 벗었다.

그랬더니, 발은 여전히 영체 상태로 빛나고 있는 게 드러났다.

-······.

서문엽은 급격한 쪽팔림을 느꼈다.

부츠만 영체에서 풀린 것이었다.

부츠에 가려져 발은 여전히 영체인 게 안 보였을 뿐.

"그래도 큰 진전이군. 신체와 접촉한 상태임에도 부츠가 영체에서 풀린 게 아닌가."

-에이 씨, 더럽게 어렵네.

그래도 진전이 있었으므로 서문엽은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

여왕의 처소에서 머물면서 며칠간 수련에 몰두했다.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는 오로지 수련.

서문엽은 그렇듯 목표를 이룰 때까지 끈덕지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 익숙했다.

처절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를 게으르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성격이라 늘 자극적인 일을 찾아다녔고, 그것이 던전이었다.

분석안으로도 스스로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으므로, 지독한 훈련을 매일같이 했었다.

그리고 현재.

더는 강해질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황제라는 새로운 목표.

그리고 무기 영체화라는 궁극의 경지.

오랜만에 느끼는 도전 정신이 서문엽은 즐거웠다.

'타고난 오러량이 다르니 일대일로 잡는 건 무리겠지.'

황제는 무기술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거기에 오러량도 살아생전보다 대폭 줄었을 텐데도 서문엽을 훨씬 능가했다.

공략할 빈틈이 전혀 없으니 일대일 대결로 이긴다는 목표는 무리였다.

'피에트로와 둘이서 이기는 걸 목표로 하자.'

피에트로도 옆에서 계속 명상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선조들의 영령과 다시 감응을 하여서 잃었던 신망을 회복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타락으로 인해 선조들의 외면을 받은 탓에, 영령의 일격에 동원되는 영령들도 하나같이 수준이 낮았던 것.

동족을 몰락에 빠뜨린 중죄를 지었으니 선조들의 분노를 풀 수 있겠냐마는, 나름대로 노력하는 듯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파아아앗!

서문엽의 방패와 창이 영체 상태가 되어 하얗게 빛났다.

"됐다!"

서문엽은 환희에 차 소리를 질렀다.

정확히 방패와 창만 영체화된 모습.

무기 영체화를 완벽하게 터득한 것이었다.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었는데, 일주일 만에 해내다니."

피에트로가 중얼거렸다.

"나 천재라고 했잖아! 크하하!"

서문엽은 영체화된 창을 마구 휘두르며 좋아했다.

영체로 변신했을 때는 120초.

무기 영체화는 43분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도전해 보자."

"좋다. 나도 나름 진전이 있었다."

"오, 널 용서해 주는 선조가 있긴 하디?"

"그건 보면 안다."

함께 수련에 몰두한 피에트로도 무언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접속 해제하고 조금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접속했다.

심기일전한 두 사람은 일주일 만에 다시 황제에게 향했다.

-왔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

황제가 물었다.

"일주일이오."

피에트로가 대답했다.

-벌써?

"그렇소."

황제는 어쩐지 쓸쓸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긴 세월을 살았던가. 이제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게 되었구나. 언제부터 시간이 이리도 가치가 없던 것이었나.

즐겁게 두 사람을 때려잡던 모습이 아니었다.

홀로 있었던 일주일간 황제도 많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저 양반 저거 현자 타임인 것 같은데.'

위험했다.

모든 의욕을 잃으면, 심경의 변화가 생긴 황제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예측 불허였다.

궁금했던 것을 순순히 가르쳐 줄 수도 있지만, 그냥 냅다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결국 서문엽이 나섰다.

"야 이 새꺄, 그러게 적당히 살지 그랬냐?"

파아앗!

방패와 창이 영체화되었다.

"그랬으면 오늘 나한테 맞을 일도 없었잖아. 안 그래?"

무기 영체화에 성공한 서문엽의 모습을 본 황제는 흐렸던 눈빛에 흥미를 되찾았다.

-호오? 성공했나?

"죽었다고 복창해라."

-하하하.

황제의 웃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도 좋지. 짐의 마지막 유희다! 짐을 즐겁게 해라, 광대들이여!

8차 도전.

어쩌면 마지막 도전이 될 싸움이 시작되었다.

< 영체화(1) > 끝